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체크 이슈> 은폐된 진실과 버려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 (아프가니스탄)

by 피안재 2021. 12. 15.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케메네스 왕조(Archaemenes)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것 같다. 오랜 세월동안 아케메네스 왕조라 불러왔지만, 이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지극한 효심과 존경의 표시였을뿐,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면 차라리 테이스페스 왕조(Teispes) 라고 불렀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족사회를 넘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것은 아케메네스가 분명하지만 아들인 테이스페스에 이르러 정식으로 국가를 건국했으며, 이를 뛰어넘어 인류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대제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테이스페스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개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쯤되면 '아케메네스 왕조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째서 역사 시간에 들어보질 못했지?'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일부에서 시작하여 이란과 이라크 지역 전체를 비롯해 흑해 연안 대부분의 지역과 소아시아 전체를 그의 왕국에 포함 시켰다. 서쪽으로는 발칸 반도와 트라키아 지방은 물론 팔레스타인 전역과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이집트와 리비아 연안에 이르는 실로 어마어마할 정도의 광대한 지역 모두가 바로 에케메네스 제국의 영토였다.(그런 제국이 정말 있었나 싶을 수도 있겠다)

  에케메네스 왕국은 (기원전 550년~ 기원전 330년)까지 약 220년간 존속했는데, 처음 국가를 세우면서 수도로 건설한 곳이 파르스(Parsa; 페르시아어 표기) 였기에 왕조의 중간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수도가 놓여진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부르기 시작했다. 왕조의 첫 수도인 파르스를 영어로 표현하면 페르세 폴리스(Persepolis)가 되는데, 이때부터 모든 역사에서는 이 왕국을 '페르시아 제국' 이라고 부른다. 아울러 '페르시아' 라는 표현은 이 지역에서 등장했던 여러 왕조들을 통칭하여 모두 쉽게 그냥 '페르시아 제국' 이라고 한다. 하여 근동지역의 세세한 역사를 들여다보거나 비교분석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를 좀 더 세분화해서 깊이 들여다 보아야지만 맥락이 구분되어지고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페르시아' 하면 이란을 중심으로 하여 사우디 아라비아의 반대쪽인 중앙아시아 지역에 걸치는 너른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페르시아 제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치는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고 있을때, 산악지역인 박트리아 지방에서 인류 최초의 유일신 종교가 탄생한다. 오래지않아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종교(오늘날의 국교)로 발전하게 된다. 이 종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차가 매우 커서, 일부 학자는 기원전 1.800년 경에 생겨났다고도 하고, 일부는 기원전 550년 경에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통상적으로는 종교를 세운 창시자가 기원전 630년 쯤에 현 아프가니스탄의 북서부 지방인 발흐(박트리아의 수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형체가 없이 빛나는 신, 이세상에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리고 자라투스트라는 바로 그 신께서 허락하신 예언자이다.'

  고대 이란지역의 예언자이며 종교개혁자인 조로아스터(독일식 호칭은 자라투스트라)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오르마즈드라 부르기도)는 '지혜로운 주'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류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 탄생한 것이다.

  신(神)으로부터 직접 통치권을 넘겨받았다고 여겨지는 페르시아의 왕들은 고대 이란지방의 하늘에 살고 있던 망령들과 악마의 무리를 무찌르거나 감당 할 수가 없었다. 망령과 악마의 무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면서 쑥대밭을 만들기 일쑤였다. 페르시아의 왕들에게는 피라미드식의 체계와 질서 위에 왕이란 직분의 존재가 신으로부터 허락받은 존재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왕의 권위를 굳건하게 해줄 절대자인 유일신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를 위해 신의 대리인으로서 혼돈을 밀어내고 질서를 정착시킬 예언자로 자라투스트라가 등장하게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살아가는 도중에 깨달음과 행동을 통해서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택하게 된다고 말한다.

  선(善)의 원칙을 정하고 빛의 제국을 다스리는 유일신이 바로 아후라 마즈다 이다. 반면 사악한 적대자인 망령과 악마의 우두머리는 아흐리만이다. 세상의 종말이 오면 '지혜로운 주' 아후라 마즈다가 사악한 아흐리만에게 거룩한 승리를 거둘것이며,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심판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조로아스터가 전해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있노라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일부의 극단적인 기독교주의자들은 이제까지 살펴 본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조로아스터가 <성서>을 패러디해서 퍼날라 온것 쯤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구약과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조로아스터가 말한 비슷한 이야기들이 수두룩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성경을 체계화해서 만드는 과정 중에 앞선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사상을 상당부분 패러디해서 흡수했을 것이라고 종교학자들이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는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그 어떤 경전보다도 먼저 앞서 만들어 졌다.

  조로아스터는 1천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박트리아 왕국을 순회하면서 유일신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설교했다. 그는 자신의 전도여행 근거지로 소그디아나를 삼고 사막속의 유목민 야영지를 찾아다녔다. 동쪽의 텐산 산맥에서 서쪽의 제라프샨 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소그디아나의 수도가 바로 사마르칸트(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였다. 이어서 그는 아무다리야 강 하류에 위치한 호레즘 지방의 오아시스와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멀리 카스피 해 남동쪽의 아열대 식물이 울창하고 비옥한 히르카니아 지역까지 찾아다녔다.

  짜라투스트라는 40년 이상을 이란 북동부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의 산악지방과 사막과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며 선교여행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일신 신앙을 근거로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이 전파되고 유목민들의 생활속에 깊이 파고들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곧 고대부터 뿌리깊게 이 지역에 전래되어 내려 온 수많은 다신교 종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기원전 553년에 고대 다신교 종교를 신봉하는 사제들에 의해 짜라투스트라는 노상에서 무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마르기아나 지역을 지나던 중에 신전 부근에서 타종교 사제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어 시신 조차도 들판에 그대로 내버려졌다고 했다. 하여 오랜 세월동안 많은 탐험가와 역사 학자들이 마르기아나 지역의 신전터를 찾아다니고 짜라투스트라의 무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짜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기는 했지만 끝내 결실을 맺지는 못하고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헌신과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불과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에케메네스 왕국이 등장하였으며, 이 왕국을 거대 페르시아 제국으로 확장시킨 테이스페스 왕에 의하여 페르시아의 국교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 교 외에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토속적 종교와 유대교 일부를 수용하였는데, 제국의 통치세력이 조로아스터 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자 주변국의 사람들까지 너도나도 앞다투어 조로아스터 교로 개종하는 사태를 낳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울러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부분은 자라투스트라의 출생지로 거론된 1천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박트리아' 라는 호칭이자 지명이다.

  설산이 녹아 흘러내리는 아무다리야 강을 따라 폭이 겨우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극히 좁은 녹색의 초원이 길게 형성된 지역으로 북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을 지나 남우즈베키스탄의 황량한 황부지를 거쳐 아랄해로 흘러드는 지역을 가리킨다.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연안지역의 상인들이 반듯이 지나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고대에는 이 지역을 히르카니아 해라로 불렀었다.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는 이 협소하고 황량한 지역에 기원전 1.000경부터 사람들이 급격하게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수많은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하여 이 지역을 1천개의 도시가 들어서 있는 '박트리아 왕국'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양가죽에 무거운 돌을 달아 완만하게 물이 흘러내리는 아무다리야 강에 며칠이고 담가두었다가 건져서 양가죽을 말려 빗질을 하면, 양털에 달라붙어 있던 금을 함유한 모래(사금)이 걸러지면서 쉽게 많은 양의 금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하여 박트리아를 '황금의 나라' 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전개되었으니 너도나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몰려들면 뒤이어 상인들이 쫓아오게 되어있고, 당연히 그 뒤를 군대가 뒤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도시와 국가가 생겨날테니 말이다.

  황금의 나라 박트리아 왕국( Bactriana)은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야 강 사이에 있는 좁지만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1천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박트리아 왕국은 순수하게 자신들의 언어 '박트리아어(고대 이란어)'를 창제해 사용했다. 이 언어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인 일부가 사용하고 있다.

  만년설에 뒤덮인 높고 깊은 산골짜기의 작은 왕국에 금이 차고 넘친다는 소문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권력을 가진 통치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인들 그 황금의 나라를 차지하고 싶지 않겠는가?

  이때부터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이 박트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이 험준한 산악지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이제 막 조로아스터 교를 국교로 받아들이 페르시아가 쳐들어 왔다. 뒤이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쳐들어 왔다. 다음으로는 먼 동쪽에서 거대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칭기스칸의 군대가 연이어 쳐들어 왔던 것이다. 그들이 말발굽으로 짓밟으면서 차지하려고 했던 영토가 바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이었던 것이다. 후세의 역사는 (아프가니스탄)의 국가 지명의 뒤에 (강대국들의 무덤) 이라는 별명을 하나 더 덧붙이게 되었지만 말이다.

  사람들과 상인들과 군대가 박트리아 지역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표이자 이유는 오로지 하나, 금 때문이었다. 사람이 이동한다는 사실은 곧 물자도 함께 이동한다는 뜻이고, 이는 교역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된다.

  박트리아와 전 아랍지역 사이에 상인들을 통한 교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지만, 당시까지의 교역 물품에 비단과 도자기와 향신료는 없었다. 아직 실크로드는 생겨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서서히 실크로드가 생겨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본격적인 동양과 서양의 조우와 교역이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실크로드)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실크로드) 이야기를 꺼내면 중국인들은 항상 장건(張騫) 이라는 인물을 내세운다. 중국인들에게 장건은 그야마로 실크로드의 개척자나 창시자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장건 이라는 인물이 실제하긴 했고, 타림 분지 지역을 다녀온 것은 맞지만, 그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데 기여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분히 회의적이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실크로드에 관한 장건의 역활을 과도하게 부풀렸다는 이유에서이다.

  어쩌면 그것은 중국인들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서 나온 필연적 속성이자 한계성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인들은 온세상을 중국인 중심의 선민사상으로 왜곡하고 판단하려는 기질이 너무도 강하다. 잘 알려진 우리나라에 대한 동북공정(東北工程) 또한 그런 선민사상에서 나온 일면이라 하겠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먹고살기에도 급급하던 중공(구 중국공산당)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서 먹고 살만 해지니까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에 시달린것을 보상받으려는듯이 제국주의의 행태를 제멋대로 저지르고 있는것이다. 자기들 나라 역사나 제대로 정립하고 되찾을 일이지, 남의 나라 역사까지 빼앗아다가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말인가? 날조된 허구 가득한 '세계 제 일'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탐험가' 로 '대항해 시대의 마젤란' 이라고 배웠다. 이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고 시험 문제에도 정답으로 채점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느닷없이 정화(鄭和) 라는 인물을 발굴해 '정화가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했다'고 주장한다. 명나라 시대 해군 장군인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인도양을 비롯해 항해를 떠난것은 맞지만, 그의 활동을 세계일주라고 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함에도, 이쯤되면 중국인들은 그 드러난 조그만한 상황에다가 온갖 억측과 신화나 전설같은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정화가 지구를 세바퀴쯤은 돌았다고 이야기를 완성시키고야 만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것이 중국인들의 속성일까?

  실크로드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장건(張騫)은 기원전 2세기 경의 중국 한나라 시대 사람이다.

 중국을 통일한 한무제에게 남겨진 최대의 과제는 북쪽의 흉노족이었다.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은 가을 추수가 끝나갈 즈음이면 중원지역을 침범했다. 길고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그 피해가 너무도 극심하였기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까지 흉노족의 남침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만리장성으로도 흉노족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진나라에 이어서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흉노족에 대항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했다. 추수가 끝나면 엄청난 물량을 스스로 흉노족에게 조공으로 가져다 받치면서까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동시에 사방에 허물어진 만리장성을 보완했으며, 한나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에 숨어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한무제의 야망은 흉노족과 정면대결로서 저들을 섬멸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다시 북방의 흉노족에게 어마어마한 식량과 옷감과 가축을 조공으로 보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한무제는 이번엔 조공 대신 오랜세월 숨어서 양성한 막강한 군대를 보내 흉노족을 토벌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이 전쟁이 단번에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한무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조공 대신 군대를 보내서 토벌에 성공하게 된다면, 겨울을 지낼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흉노로서는 한나라를 비켜 돌아서 따뜻한 남쪽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게될 것이다. 그들이 안주할 거처를 확보하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이때, 장차 남쪽으로 도망치는 흉노족이 향하게 될 지역에는 대월지 라는 티벳과 중앙아시아에 걸쳐진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왕국이 있었다. 한나라와 대월지가 힘을 합쳐서 흉노족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외교적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그가 바로 장건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파견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월지의 변방인 이미 그곳에 파견되어 있던 흉노족의 척후대에게 체포되고 만다. 흉노의 본진으로 끌려가던 장건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대완과 강거를 거쳐 마침내 대월지에 도착하였으나, 정작 대월지의 왕은 한나라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대월지 역시 흉노에 시달리가다 쫓겨서 이 지역까지 내려온 처지였으나, 이제 이 지역에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던 차에 다시 흉노를 건드려서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장건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길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흉노족 선발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흉노족의 포로가 되어 이리저리 전쟁터로 끌려다니다가 또 한번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감행해서 겨우 한나라로 돌아갔다. 장장 13년만의 귀국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서역에 대한 지리와 환경을 토대로 새로운 대응책을 마련했다고 전한다. 아울러 이때의 경험이 실크로드의 개척에 커다랗게 영향을 끼쳤다는.......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주장인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역사에 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서역으로의 진출에 공을 세운 사람은 장건으로 부터 8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역을 향해서 실질적인 탐색과 연구와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씩 다가갔던 당나라 시대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을 꼽는다. 포로로 끌려다니면서 힐끗힐끗 간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한도시 한도시를 차곡차곡 실질적으로 싸워서 점령해 나갔던 것이다. 마침내 고선지는 72개의 소국들을 차지하고 토번국 전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본토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변방을 마냥 지켜야 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것 만은 아니었다. '일단 차지했으니 어떻게든 잘 지켜' 하는 것이 왕조의 명령 전부였다. 관심도 지원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무조건 영역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고선지가 이끄는 유격대의 침입은 본래 토번지역을 다스리던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에게도 위기로 받아들여 졌다. 북쪽의 외적침입을 대항해 이스람 최고의 군대가 나섰던 것이다. 이슬람 최고의 호라산 총독의 군대와 고선지의 유격대가 탈라스(현 키리기스탄 지역)에서 맞붙었다. 병력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고선지는 이 전투에서 패했다. 토번은 다시 이슬람 지역에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 고선지의 군대가 전진하고 후퇴했던 풍부한 경험에 의한 기록들이야 말로 실크로드의 번영과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인들은 허구에 가까운 장건의 이야기는 전면에 확대해석하면서, 고선지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동북공정을 치밀하게 전개하면서도....... 고선지가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깨림칙한 모양이다. 아무리 가리고 덮어 씌우고자 해도......... 진실은 반듯이 드러나기 마련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실크로드)가 이처럼 국가간의 전투를 위한 군대의 이동이나, 외교를 위한 사신들의 파견에서 생겨났느냐?

  모든것은 순수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생겨났다고 해야 하겠다. 이런것을 굳이 갖다 붙인다면 '민간외교'라 해야하지 않을까?

 

 

 

 

 

 

 

 

 

  실크로드(Silk Road)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근대 이전의 동서 교역로' 라는 설명이 나온다. 여기에서의 실크로드는 동양의 비단이 로마제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다음에 등장하는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비단길은 투르크 민족과 북방의 기마민족들에 의해서 중국까지 개척된 길이다' 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실크로드는 장건을 비롯한 중국인들에 의해서 개척된 길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지역에 오랜 세월동안 살아왔던 현지인들에 의해서 개척되었으며, 그 길이 중국 장안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이되는 것이다.

  어쩌면 머지않아서 중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나서서 '실크로드 공정'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중국인들 심정으로야 '실크로드는 중국인들이 힘들게 개척해서 동서문화의 교류를 통해 인류역사 발전에 절대적으로 크게 기여했다' 라고 정의 내리고 싶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부터는 지극히 주관적인, 내가 오랫동안 지켜보고 관찰하고 공부해왔던 기준에 의한 나름의 '실크로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아라비아 사막지역에서 만년설에 뒤덮인 힌두쿠시 산맥이나 파미르 고원이나 텐산 산맥을 지나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중원지방(중국)에 이르는 길을 흔히 (실크로드)라 부르는데, 이 길을 처음 지나간것이 비단은 결코 아니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확인해 보면, 길 조차 분명하게 나 있지 않은 시대에 이 루트에 처음 발걸음을 내딛은 사람들은 바로 불교의 승려들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북동부의 마가다 왕국을 중심으로 싯다르타 고타마(Siddhartha Gautama)에 의해 창시된 불교(佛敎)는 점차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인도 북부의 간다라 지방을 거쳐서 티베트.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향해 전파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둔황지역까지를 자신들의 영토라 생각했으며, 타클라마칸 너머의 지역을 서역이라 불렀으며, 그 지역에는 대월씨(大月氏). 안식(安息). 강거(康居) 등의 왕국이 존재해 있었다. 이곳 서역을 통해 들어온 불교가 둔황에 찬란하게 꽃을 피우며 중국 내부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승려들이 불경과 부처의 가르침을 가지고 넘나들던 이 길이 바로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동서 교역로를 통해 가장 먼저 옮겨진 것은 바로 불경이었다.

  1908년 중국 간쑤성 인근의 둔황 석굴에서 신라의 승려 혜초가 쓴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吳天竺國傳)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723년 당나라 광저우를 출발하여 뱃길을 통해 수마트라. 쓰리랑카를 통해 인도에 들어갔으며, 이후로 인도 전역을 둘러보았고 니샤푸르(당시의 이란)와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과 파미르 고원의 카슈가르 지역과 쿠차를 8년에 걸쳐서 여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혜초가 인도에 갈때는 바닷길을 통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분명 실크로드를 거쳐서 둔황에 한동안 머물렀다는 가정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실크로드를 여행한 최초의 한반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불경이나 작은 불상이 가장 먼저 실크로드를 통해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감추어진 복병이 하나 더 등장한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에 시작되었지만, 이 난데없이 나타난 복병에 대한 기록을 따지자면 기원전 1.600년 전부터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확증할 수는 없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학자들의 추론에 근거해 보자면 실크로드를 통해 가장 먼저 교역이 이루어진것은 바로 옥(玉)이었다고 해야만 하겠다.

  옥의 유통을 위해서 처음 길이 생겨났으며, 그 길을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고, 다시 그 길을 통해 비단과 도자기가 전파되었다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인 것이다.

 

 

 

 

 

 

 

 

 

 

 

 

 

 

 

 

 

 

  기원전 16세기 경에 이미 중국 황하강 유역에는 고대국가가 들어서 있었다.

  역사상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나라(商)의 수도는 은허(殷墟)였는데, 후대에 이르러는 여기에서 기원해 흔히 은나라(殷)로 불리워지고 기록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은왕조의 역사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고대 은왕조의 무덤에서 옥토끼. 옥구슬. 옥창 등과 함께 다수의 옥기(玉器)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한 적이 있다. 더우기 이 옥기들은 중원지역에서 소량으로 출토되던 옥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기록을 토대로 은왕조를 화려하게 장식한 옥의 출처를 찾아내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록에서 '호탄 지역의 옥이 지역에 살고 있는 월씨족(月氏族)에 의해서 채굴되어 은나라까지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옥(玉)을 그저그런 광물중의 하나쯤으로 생각들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옥은 분명 보석이다. 심지어는 다이아몬드 보다도 더 큰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윗쪽 우측 사진의 옥광석은 아직 재련하지 않은 원석의 상태로 중국 신장위구르 지역 옥 박물관에 소장중인데, 무게는 171kg의 돌덩어리가 분명한데, 공시된 가격이 자그만치 8천만 유로라고 적혀있다. 한화로 환산하려면 8천만에 1천300을 곱해야만 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어디 금덩어리나 사파이어에 비교하겠는가? 다이아몬드 보다도 귀해보인다는 말 밖에는.......

  중국인들은 둔황을 기점으로 그 너머의 지역을 서역(西域)이라 불렀으며, 삭막하고 광활하기만한 타림분지(타클라마칸 사막) 너머를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사람이 살기에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슬러 지나서 텐산산맥과 곤륜산맥이 가로막고 선 척박한 지역에 바로 호탄이 있었다. 훗날 장건이 흉노족의 남하에 대비해서 대월지를 끌어들이려고 파견되었던 지역이다. 그 대월지국의 한 모퉁이에 월씨족이 모여사는 호탄이 있었던 것이다.

  호탄의 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백옥하(白玉河)였으니 호탄과 옥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자연스레 모두 설명해 주는듯 하지 않은가. 호탄이라는 지명 또한 현지인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위구르어로는 '대지의 가슴' 혹은 '상아의 집'이라는 참으로 근사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최고 품질의 옥이 생산되었다. 그 귀한 옥의 최고 소비처는 멀고 먼 황하강 유역의 은왕조의 수도 은허였다. 허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어찌되었건 누군가는 가져가서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1.600년 경에 벌어진 일이다.

  최초에 이 길은 옥(玉)을 운반해서 팔기위해 생겨난 길이었던 것이다.

  '옥의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오늘날에도 이 길은 여전히 변함없이 멀고도 험한채로 남아있다.

  이 길의 주변에........ 혹은 수도 은허에 사는 사람들은 한 눈에 월씨족을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이유는 너무나 특이한 복장의 행색이었기 때문이다.

  만년설에 덮인 곤륜산맥과 텐산산맥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야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실크로드 하면 하나의 낭만처럼 떠오르는 낙타행렬로는 눈덮인 산악지역을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 말도 안된다. 오로지 야크만이 가능했다. 짐승의 털로 온몸을 꽁꽁 동여맨 월씨족은 수십마리의 야크 잔등에 옥광석을 싣고 눈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설산지역을 통과해야만 했다. 설산을 지나 만년설이 녹아 급하게 흘러내리는 계곡을 겨우 건너면 이제부턴 찌는듯한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이 나타났다. 뜨거운 태양과 모래먼지를 헤치고 나아가면 마침내 둔황의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그들은 이곳의 석굴에서 며칠간 여독을 풀면서 저마다 조상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이곳에서부터는 중원지역이다. 지나온 여정에 비하자면 비교적 수월하게 은허까지 이동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란것이 개화된 지역일수록 도둑과 사기꾼과 강도가 들끓기 마련이다. 이제까지의 자연재해 보다도 문명화된 세상의 인재를 극복하면서 그들은 마침내 은나라의 수도 은허에 도착했다. 그러고나면 그들을 기다리고 맞딱트리는 것은 장사꾼들이다. 사기꾼과 도둑과 강도를 모두 합친것 보다도 더 위험한것이 장사꾼이다. 장사꾼들이 서로 짜고 옥을 자기들 입맛대로 차지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호탄에서 은허가 그리 만만한 여정인가? 아무나 오갈 수 있는 길인가? 월씨족 중에서도 옥을 캘 수는 있겠지만, 무리를 이끌고 은허까지 올 수 있는 우두머리는 하나 둘 뿐이었다. 이들중 누구라고 교역을 포기하면......... 은나라에는 품질좋은 옥의 공급이 끊기고 마는 것이다.

  옥은 우리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중국인들에게는 가가이 두면 악귀를 물리쳐 주는 귀한 보석으로 오래전부터 인간의 몸과 의복을 치장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결국 시장 상인들의 농간을 눈치 챈 은왕조 정부가 옥의 교역을 직접 관장하는 사태가 생겨날 수 밖에 없게되었다.

  판로와 적정한 가격이 보장되자 월씨족의 옥 교역이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옥의 거래는 정상적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월씨족 입장에서 힘들게 옥을 가져다 주고......... 댓가로 무엇을 보상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세상끝의 꼴촌에 사는 월씨족으로서는 돈을 줘도 싫고 쌀을 줘도 싫고........ 다시 가지고 가는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은 최소한의 부족 생활에 필요한 철기 도구와 소금과 식량 외에는 무조건 가지고 가기에 편한 것이어야만 되었다. 화페는 가지고 가야 통용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은왕조 입장에서 옥 이라는 보석을 얻고자 다른 금이나 은 같은 보석류를 내어놓을수도 없는 상황이었을테니 말이다.

  거래는 성사되었는데........ 댓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새로운 문제였다.

  결국 양측은 오랜 고심끝에 합의를 보기는 보았는데......... 그 결과는 바로 비단이었다.

  당시 은나라에서도 비단은 최고의 교환 품목이었던 것이다. 비단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물물교환이 가능했다. 당시에도 비단은 곳 금이라 여겨지던 시대였다. 월씨족에게 자신들의 실질적 생활에는 별반 필요가 적게 느껴지는 비단이지만, 오가는 과정에서의 비용 지불이나 소금이나 철기 구입에 비단이면 언제든 가능했고, 비단은 비교적 보관과 운송에도 유용했기 때문이다. 비단은 쌓아두면 재산으로서의 가치도 분명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세상에 내다 팔거나 교환이 가능했던 이유로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호탄의 월씨족이 그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옥을 실어다가 은나라에까지 가서 팔아서 소금과 철기와 약간의 식량을 바꾸서 다시 야크에 싣고 호탄에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것은 모두 비단이었다. 이렇게해서 아무튼 비단이란 녀석이 히말라야 언저리까지는 진출을 하게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월씨족이 개설한 이 도로 이름이 갈 때는 '옥의 길'이 었다가 올 때는 '비단 길'이 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도 실크로드가 되기에는 멀었다. 일부 구간 개통만 되었던 것이다.

  그럼 나머지 구간 개통은 도대체 언제야 되는 것이냐?

 

 

 

 

 

 

                          실크로드의 출발지라고 일컷는 장안성.

            

                          돈황의 오아시스는 '여기까지가 사람이 사는 세상' 이라는 이정표를 상징한다.

 

 

 

 

                     사막이 끝나면 텐산산맥과 곤륜산맥이 앞을 가로 막는다.

 

 

 

 

 

          멀고도 먼 그 너머에 호탄이 있다. 오늘날 중국 신장위구루 자치구의 왼편 아랫쪽 파키스탄 국경옆이다.

 

 

 

 

 

 

 

 

 

  역사속에서 대월지(大月氏)를 찾아보면 드러나는 사실이 별로 없다. 거의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느낌이 생겨날 정도이다.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의 타림분지를 중심으로 세워진 왕국으로 인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하던 대월지에 대하여 중국 한나라의 연대기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대월지의 통치권자 부족을 월씨족(月氏族) 이라 불렀으며,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지역을 중심으로해서 타림분지 전역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그 중에 호탄지역의 월씨족이 은나라와 한나라를 대상으로 옥을 출토하여 비단과 교역을 시작했던 것이다.

  고대 황금의 도시 박트리아는 어느날 들이닥친 월씨족에 의해서 점령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마민족이자 유목민족인 월씨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어디에서 유래하여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되었는지, 또 언제 어떻게 몰락하여 사라졌는지가 오늘날까지 모두 베일에 싸여있다.

  다만, 고대중국 한나라의 연대기와 흉노족의 이동에 관한 역사기록에 준하여 추론되기로는........ 북방 흉노족의 거점지역 서쪽에 거주하던 여러 소부족 중의 하나가 월씨족이었다고 전해진다. 흉노족의 위세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를 넘어 한나라까지 압도하는 상황이 되자 주변의 여러 약소부족들은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위하여 월씨족의 한 부족장이 흉노를 기습하여 왕자 모태를 인질로 잡아왔다.그런데 협상이 시작될 즈음에 왕자가 탈출하여 도망친 것이다. 이때 도망친 왕자 모태가 뿔뿔히 흩어져 있던 흉노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 시키게 된다.

  그쯤되었으니 이미 지은 죄가 큰 월씨족으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별로 없었다. 무조건 도망치는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월씨부족은 인근의 흉노에게 속국으로 굴복하기 싫은 소수 부족들을 모두 끌어모아서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언제 뒤쫓아 올지 모르는 흉노족 추적대를 피해 죽어라 내달려서 겨우 도착한 곳이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대초원이었던 것이다. 대초원에 도착하고서도 월씨족의 수뇌부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차곡차곡 준비를 계속해온 한무제의 용맹한 군대가 마침내 흉노족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한것이다. 모질고 참혹한 동토의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나도 갖추지 못한 흉노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한나라의 세력이 미미한 서쪽 변방으로 이동해 우선 겨울을 나는것 뿐이었다. 그 다음에 재기를 모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흉노를 피해 월씨족이 내려온 길을 따라 흉노족이 머지않아 들이닥칠 것이다.

  흉노족에겐 긴 겨울을 나기위해 이곳 카자흐스탄의 초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월씨족으로서는 이곳에 머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카자흐스탄의 초원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지?

  남은 길은 두 갈래였다.

  서쪽으로 가면 우랄산맥이 가로막고 서 있다. 우랄산맥을 넘으면 유럽지역의 발칸반도를 지나 지중해로 진출이 가능하고, 산맥을 따라 남하하면 코카서스 지역을 지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현 터키)에 도달하게 된다. 카자흐스탄의 대초원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 또한 대단히 넓은 지역이었다.

  다른 길은 남쪽으로 향해서 다시 텐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이 가로막고 있는 산악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악지역인 탓에 안락한 풍요로움은 덜하겠지만 그만큼 강력한 군대의 침입에 대해 방어하기 유리한 점이 생긴다. 더하여 만약 이곳까지 흉노가 들이닥친다면 최악의 경우에 눈덮인 골짜기를 넘으면 남쪽의 카스피해로 달아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북방의 기마민족인 흉노족이 과연 카스피해 인근의 아라비아 사막지역이나 인더스강 유역의 우림지대까지 쳐들어 올지는 아직 불분명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월씨족 수뇌부는 열악한 소수의 부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산악지역에 은신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전혀 사전에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지만, 부득불 이동해야만 했던 이들이 들이닥친곳이 1천개의 소도시가 들어선 황금의 나라 박트리아였던 것이다. 뒤로 자빠져서 코가 부러진것이 아니라, 엎어지고 보니 노다지 광산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횡재였다.

  월씨족은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자신들의 왕국 대월지(大月氏)를 세웠다. 대월지가 자리를 잡고 인근으로 점차 세력을 뻗어나갈때까지 흉노족은 북방에서 한나라와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왕국으로 발전한 대월지는 나라를 5개로 나누어 제후국으로 다스린다. 그 중심 도시인 수도가 엠시테페였다. 또한 옥광석의 생산지인 호탄 역시 대월지 왕국의 한 제후가 다스리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훗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등장하는 인도제국의 쿠샨왕조가 바로 여기 대월지 왕국의 제후국이었던 귀상흡후의 구취각이 나뉘어진 5개의 제후국을 다시 통합하고 남쪽으로 인도지역까지 진출하여 세운 제국이다.

  이런 대월지에게 절대적 위기가 들이 닥친다.

  이미 예고되었던것 처럼......... 결국엔 흉노족이 한무제의 군대에 패해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거대한 기마민족의 군대가 죽어라 도망쳐서 겨우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월씨족이 겨우 안도의 함숨을 몰아쉬던 카자흐스탄의 초원이었다. 월씨족의 예상이 기가막히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흉노족의 수뇌부도 똑같은 고민을 시작했다. 이제 어디로 갈것인가? 서쪽이냐? 남쪽이냐?

  남쪽을 택해 월씨족의 대월지 왕국을 빼앗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거기에는 복수가 깔린 것이다.

  하늘이 월씨족을 보호하고자 했음일까? 다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흉노족은 서쪽의 길을 택했다.

  흉노족은 태생적으로 거칠은 기마민족이다. 그들은 말 위에서 태어났고 말 위에서 죽는 민족이었다. 태생적 기마민족인 흉노족이 스스로 산악지역에 갖혀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곳은 지옥이나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다. 거칠고 모질고 아무리 험악한 환경일지라도 그들은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들판이 있어야만 하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흉노족은 거칠것이 없었다. 그저 말이 달릴 수 있는 땅이면 모두가 그들의 생활터전이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곳곳에 흉노의 부족들을 터전으로 남겨놓고는 더러는 우랄산맥을 넘어 코카서스 지역으로 진출했고, 더러는 남쪽으로 산맥을 따라 아나톨리아 평원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덕분에 월씨족의 대월지 왕국은 위기를 넘기고 한동안 번영을 구가하게 되지만........... 인류 역사는 절대로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발칸반도에 이르는 모든 민족들이........ 투르크족. 아리안족(게르만족). 아랍족. 유럽의 집시들까지도 이때 전부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유는 모두가 흉노족의 침입때문 이었다. 흉노족의 침입은 그만큼 무자비했고 참혹했다. 그 어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살려면 무조건 흉노로 부터 도망쳐라' 그것이 전부였다. 서구의 역사는 흉노족의 남하 이전과 이후로 전혀 달라지게 된다.

 

 

  이로써 동서의 교류통로인 (실크로드)의 동쪽 구역과 중간 교착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살펴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것은 텐산산맥(힌두쿠시 산맥) 인근의 대월지를 지난 서쪽 구역의 실크로드에 대해서 살펴 볼 차례인것 같다. 실크로드의 서쪽 구역은 언제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동쪽 구역과 연결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는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페르시아와 그리이스의 역사에서부터 새롭게 시작을 해야만 하겠다.

  더하여, 가끔식 내가 시도하는 '은근 슬쩍 역사 비틀어 보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서구인들의 무조건적 유럽 중심사관에 심하게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른말로... '곳곳에 팽배해 있는 백인 우월주의적 역사관과 사고방식에 심한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주 잠시........ 내 방식대로의 '서구 중심의 백인 우월주의'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인류문명의 4대 발생지가 모두 오리엔트 지역이다.

  이집트 문명을 굳이 아프리카라고 분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프리카 중에서도 적어도 나일강 지역만은 고대시대부터 '레반트 지역' 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유프라. 티그리스강 상류의 이라크 지역과 묶어서 초승달 지역이라 부르며 같은 문명권으로 늘 취급해 왔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유럽지역에서 탄생한 문명은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서구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에 있어서도 그 뿌리가 유럽이 아닌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부족에 의해서 시작되었을까?

  그러자 유럽인들은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를 외면하고 오로지 한 목소리로 제대로 격식을 갖춘 위대한 선진 문명으로 (그리이스 문명)을 찬양해 마지 않으면서, 결국엔 자신들의 정신과 뿌리가 그리이스 문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찬란한 제국의 역사인 로마를 덧붙이는 작업을 오랫동안 벌여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인 바로 '백인 우월주의에서 파생된 유럽 중심사관'인 것이다.

  하긴...... 지금 지구상의 사람살이를 쥐락펴락 하는것이 백인들이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만서도........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그들의 오만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다.

 

 

 

 

 

 

 

 

 

 

 

                    고대 그리이스 제국의 영토(좌). 페르시아와의 전쟁 발발시 영역(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좌). 알렉산더 제국의 영토(우)

 

                          서기 555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우스 황제 시대의 영토.

 

 

 

 

 

 

 

 

 

 

  유럽지역 발칸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고대그리이스 왕국을 서구유럽인들은 정신문화의 뿌리로 삼고있다. 그에 대한 유럽인들의 찬양과 숭배작업은 여전히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한 연장 선상에서 살펴보노라면, 많은 사람들이 고대 그리이스를 찬란한 고대문명을 탄생시킨 단일민족으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엄연히 고대그리이스 문명은 복합민족에 의한 복합문화의 산물이다. 아울러 그 복합민족과 문명에는 적지않게 동방(오리엔트)의 영향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중해를 열심히 오가면서 물자와 문화를 퍼나르던 페니키아인들이 있었다. 페니키아인들이 취급하는 모든 물자와 문화의 원산지는 나일강 유역의 찬란한 이집트 문명이었다. 이집트의 문물이 페니키아인들의 주된 교역상품이었는데, 그 최대 거래처가 바로 발칸반도의 끝자락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크레타 섬 주변이었다. 이집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크레타섬의 미노스인들이 점차 자신들만의 해양도시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미노스 문명. 에게 문명. 크레타 문명 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이들은 좁은 해협을 건너 마침내 그리이스 본토에 상륙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초기 문명이 꽃을 막 피우기 시작했을 무렵에 느닷없이 반도의 북쪽으로부터 철제무기를 든 용맹한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철기문화를 가지고 그리이스 반도에 남하한 이들을 도리아인 이라고 역사는 적고있다. 그들은 크레타 문명을 파괴했고 원주민을 살륙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도시국가를 건설했으니 바로 스파르타 였다. 도리아인들에 의해 여러개의 도시국가가 건설되었을 시기에 이번엔 소아시아 지역에서 뛰어난 해양 선진문물을 가진 새로운 이오니아인들이 침입해 왔다. 이오니아인들도 서둘러 도시를 건설했으니 바로 아테네이다. 도리아인들과 이오니아인들은 처음부터 격하게 전쟁을 벌였으나, 저멀리 바다 건너로부터 실로 감당해내기 어려울 정도의 거대한 적이 공격해오자 생존을 위하여 힘을 합쳐서 바다건너의 적을 대항하기로 연맹을 맺는다. 바다건너의 거대한 적이 바로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페르시아와의 세차례 전쟁에서 끝내는 그리이스 연합군이 승리를 쟁취한다. 거대한 적이 물러가자 그리이스의 패권을 놓고 또다시 도리아인과 이오니아인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오랜 세월에 걸친 지리한 내전 끝에...... 결국엔 신흥 강국 로마에 의해 그리이스는 멸망하게 된다.

  그리이스의 내전과 로마의 등장 사이에 그 이름도 선명한 역사상 위대한 영웅이 그리이스에....... 변방 약소 도시국가인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다. 그가 정권을 잡고 세계정복에 나선지 불과 13년만에 소아시아를 지나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하고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지만, 급작스런 그의 사망은 단시간만에 그리이스의 역사를 벼랑끝으로 내몰고, 새로운 로마 제국의 시대를 열게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위에 계시해 놓은 지도들을 좀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이스 도시국가연합은 본토와 지중해 연안의 섬들을 공략하여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았다. 점차 세력을 넓혀 터키지역의 북부 해안 도시를 식민지로 삼았고 시칠리아에 진출하여 그리이스식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리이스인들이 점령해 세운 도시들은 조공(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식민지였다기 보다, 워낙 열악한 환경을 가진 그리이스 본토를 떠나 그리이스인들이 이주해 살기위한 식민지 건설이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그런 고대그리이스의 지도를 가만히 살펴보자. 어디에도 유럽의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는다. 고대 그리이스 보다 조금 늦게 반도 중심에서 로마의 역사도 시작되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로마는 거의 원시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이스인들은 아주 멀리 흑해를 지나 만년설이 덮인 코카서스 산맥과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의 지붕인 아틀라스 산맥을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속에는 너른 지중해와 그 건너편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이집트가 있으며, 소아시아지역을 건너면 막강한 페르시아 제국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그들에겐 유럽이라는, 혹은 쓸 수 있는 유럽의 영토라는 개념 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코카서스나 아틀라스는 알아도 알프스가 어디에 붙었는지 조차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고대그리이스를 서구(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저 너머의 페르시아가 지중해로 진출을 해왔다. 그들은 거칠것이 없었다. 세상은 그저 페르시아 왕이 마음먹기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발칸반도는 물론 이집트까지가 페르시아의 영역이었다. 흔하게 말해서 고대에 이미 유럽의 일부가 페르시아의 영토였다는 사실이다. 터키 전지역과 지중해 대부분의 지역이 모두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다. 페르시아의 식민지 정책은 그리이스인들과 전혀 달랐다. 속국은 페르시아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복종하겠다는 충성서약과 함께 매년 일정한 조공(세금)을 받치면 되는 식민정책이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감히 페르시아와 대적하려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리이스만을 제외하곤 말이다. 페르시아는 손톱만한 그리이스를 당연히 자신들의 식민지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이스 연맹 안에서는 도시국가들마다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속국으로 자진해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버티다 싸울것이냐? 최종적으론 속국으로 들어가는 결론에 났지만, 그 결론이 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그만 페르시아가 지정한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분노한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이 직접 나서서 그리이스를 엄하게 징벌하겠다고 전쟁을 시작했다.

  로마제국에 앞서서 페르시아는 거대한 제국을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이중 상당부분이 훗날 로마가도에 편입되게 된다. 이 도로망의 중간중간 역쇄권에 영관과 파발마를 관리하는 역참을 두었다. 현 이란의 고대도시 페르세 폴리스에서 터키 남부의 리키아까지 대략 2.700km의 거리를 왕의 명령서 한 장을 달랑 손에 든 척후병이 7일 밤낮을 쉬지않고 달려서 도착했다고 전한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건설된 페르시아 제국이 반도 건너의 손톱만한 그리이스 연맹을 정복하기 위하여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가 친히 원정군을 이끌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마라톤 평원이 있는 아티카 반도에 상륙한 것이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에 실패했다. 대를 이어서 기원전 480년과 449년 까지의 세 번대 원정까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세번에 걸친 원정의 실패는 페르시아 제국에 엄청난 충격과 타격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페르시아는 오랜 시간 숨고르기에 들어갔고, 승리한 그리이스 연맹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은 처절한 내전 끝에 함께 스스로 자초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는 알렉산더라는 영웅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알렉산더는 최강의 친위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단숨에 그리이스를 통일한다. 그 여세를 몰아 소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다. 터키 남부를 점령하고 신전에서 스스로 운명의 실타래를 칼로 내리쳐 끊어버린 순간부터 그에게는 어떤......... 그리이스 왕국의 왕이 아닌,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어드에 나오는 아킬레스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새로운 야망에 불타오르게 된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추구하게 된 그는 마침내 동방원정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이스의 복수일 수도 있고, 다리우스 왕을 밟고 일어서 지상 최고이자 유일의 진정한 영웅이 되고 싶은 야망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 어떤것도 나를 막을 순 없어. 나는 내가 목표로 한....... 딱 한 놈만 잡는다.'

  천둥소리와 같은 고함 소리가 끝나자 마자 벼락처럼 바람처럼 눈이 부시게 새하얀 백마가 적진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붉은 망토에 황금빛 투구 위로 하얀 깃털을 휘날리면서 알렉산더가 칼을 위두르기 시작하였다.

  거칠것이 없었다.

  그가 내달리는 앞쪽으로 저절로 길이 열리고 있었다. 저마다 살려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언덕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다리우스 3세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가 탄 백마가 점점 자신이 서있는 곳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우스는 이내 자신의 전차를 돌려 언덕을 내려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딱 한 놈만 무조건 끝까지 잡는다.'

 

  기원전 330년 이란지역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 폴리스 인근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마저 다리우스 3세는 참혹하게 패했다. 그는 동쪽을 택해 이란 북부의 산악지역으로 도망쳤다.

 

  페르세 폴리스에 입성한 알렉산더는 철저한 파괴를 명령했다. 자신의 위대한 승리에 걸맞는 전시적 효과를 노린것이다. 도시는 화염에 휩싸였고......... 더없이 찬란했던 인류의 문명이 화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페르시아의 왕족과 귀족과 통치세력이 대부분 불에 타 죽고, 마케도니아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윗편 가운데 줄의 지도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두 장의 지도를 잘 살펴보자.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하나는 분명 아시아 지역에서 생겨난 페르시아 제국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리이스 태생의 알렉산더 대왕이 평생 점령한 영토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영락없는 복제품 같아 보이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시아에 뿌리를 둔 페르시아 제국의 영역이나, 그리이스에 뿌리를 둔 알렉산더 대왕의 영역이나 그 모두가 소아시아 지역에서 나일강 유역에 이르는 지점이었다는 말이다. 두 제국의 시작에서 끝까지가 모두 소아시아 지역이 전부였다는 뜻이다. 어디에도 유럽은 흔적 조차도 없다. 유럽은 사람이 사는지 안사는지도 불명확한 원시상태의 방치지역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처지에 문명은 무슨?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한참 후대인 로마제국 시대를 그린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보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에 주인공 믹시무스 장군을 데리고 갈리아 지방 원정을 떠나 전투를 벌이는데, 그때 숲속에서 동물의 가죽을 걸치고 도끼를 휘두르며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해 로마군들이 '야만인' 이라 경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야만인들이 바로 유럽인의 진면목인 것이다. 중세시대까지 알프스 인근 내지는 너머의 유럽인들은 그야말로 야만의 상태와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에는 그리이스, 중세 중기까지는 로마인 만이 문명인 축에 낄 수 있었다. 유럽을 제외한 세상에는 비단에 도자기에 향신료에 인구 50만의 도시가 여럿이나 건설해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서구 중심의 백인 우월주의 사관'을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중세까지의 야만성을 모두 가리거나 잊어버리고....... 태어날때 부터 올리푸스 신전의 신들과 함께 살면서 포도주나 즐기고 시를 읊고 하늘을 날라다녔다고 착각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찬란한 고대 그리이스 문명이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 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번쩍 정신이 들면....... 그제서야 유럽인(서구인)들의 근본에는 또 하나의 뿌리가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서구인들의 핏줄속에는 기독교인 이라는 선민사상 또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랴?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르자면......... 그리이스 문화는 다분이 이교도적 미신이니 말이다. 역사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을 모두 죽여 버렸다' 라는 표현이 있다. 기독교 신앙이 그리이스 신화의 신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는 뜻이다. 왜? 이교도들의 못된 우상숭배에 해당하니까 말이다.

  그리이스 신화에 근거하지 않는 그리이스 문명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그리이스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 성립될까? 이게 거짓말일까? 아님 제멋대로 내 뱉는 말장난일까?

 

 

  페르세 폴리스가 화염에 휩싸이는것을 목격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죽어라 동쪽 산악지역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알렉산더에게도 카스피해 동쪽 소그디아나 지역의 소문과 전설이 보고되었다. 전설의 도시 마라칸다(사마르칸트)와 황금의 도시 박트리아(발흐)에 대한 이야기였다. 알렉산더에게는 일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다리우스는 내가 직접 끝낸다' 라고 외치며 다시 추격을 계속했다. 알렉산더의 추격 소식에 안절부절하는 다리우스 3세를 지켜보던 사트라프(페르시아의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독) 베수스가 안전지대로 이동하는것 처럼 꾸며서 사막지역에서 쿠데타를 벌여 다리우스 3세를 참혹하게 죽이고 말았다. 베수스는 소그디아나 지역에 흩어진 소수민족들을 끌어모아 독립을 외치며 알렉산더 군대에 전면적인 대항전을 벌인다. 원정군 사령관 알렉산더 대왕은 곧바로 이곳을 지나쳐 힌두쿠시 산맥의 간다라 지역으로 진출하지만, 원정군의 일부는 이곳에 남아서 자치독립을 부르짖는 베수스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결국 산악지역 깊은곳까지 도망친 베수스가 마지막으로 항전한 산성이 함락되기까지 3년 정도의 시간동안 게릴라전으로 마케도니아군을 끝까지 괴롭혔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박트리아 주변에 마케도니아 군인들에 의해서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박트리아에 속했던 1천개의 도시들 중에서 일부 도시가 새롭게 그리이스식으로 리모델링 된것으로 보여진다. 알렉산드리아 아스카테. 알렉산드리아 마르기아나 등의 새로운 지명이 박트리아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이곳에서 타지키스탄의 헤라트를 지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에 간다라 지역이 위치해 있다. 이곳을 지나간 마케도니아군의 생활문화와 원주민격인 토착문화가 이 시기에 결합되어 새로운 간다라 문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간다라 지역에 주둔한 알렉산더는 두 달 가량을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군대를 재정비 한다. 그리고는 다시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인더스 강변의 열대우림 지역을 통과해 인도로 진격을 개시했다. 코끼리를 앞세운 토속 인도인들의 저항과 처음 겪어보는 열대우림 기후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중에 대왕은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다. 열병에 쓰러져 누운 알렉산더의 군대는 결국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바빌론에서 끝내 이 불세출의 영웅 알렉산더는 33세의 나이를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만다. 20살에 정복원정을 시작한지 꼭 13년 만의 일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영토. 당시로서는 문명화된 세상의 전부였다. 유럽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은 소아시아 지역이 전부였다.

 

 

 

 

 

 

 

 

 

 

 

  알렉산더가 갑자기 사망하자 디아도코스(후계자)들 사이에서 심각하게 내분이 발생한다.

  누가 진정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였다. 길고 오랜 알렉산더의 원정에는 최소한으로 꼽히는 7명 정도의 최측근에서부터 대략 십수명에 이르는 군대와 행정의 실권자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 지명없이 대왕이 사망하자 이들 사이에 후계자의 정통성을 놓고 파벌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유약한 알렉산더 대왕의 핏줄과 가족들을 앞세우고 섭정노릇을 하며 진정한 후게자임을 천명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이스 지역을 사활을 걸고 차지하려 모든 측근들이 하나같이 혈안이 되었다. 합종과 연횡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케도니아를 차지하기엔 역부족이라 느낀 이들이 다음으로 노리는 곳은 풍요롭고 왕국의 기틀이 확실하게 다져있는 페르시아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누군가 최고 막강한 세력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이스 지역을 차지하게되면 차후로 점차 나머지 모든 지역을 탐을 낼 것이 뻔하기에, 마케도니아를 차지할 수 없다면 무조건 가장 먼곳이 안전하다는 복심도 깔려 있었다. 여러 측근들은 합심하여 페르시아 지역을 우선 차지한 다음 연합세력들 끼리 합의에 의하여 영역을 분할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들 로열 패밀리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오로지 측근중의 최측근이랄 수 있는 안티파트로스와 프톨레 마이어스 중에서 누가 마케도니아를 차지할 것이냐에 있었다. 그야말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라이벌이었으니 말 그대로 용호상박이었던 것이다. 안티파트로스의 경우는 동방원정을 떠나는 알렉산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케도니아에서 혹시 벌어질지도 모르는 반란을 대비하기 위하여 남겨두었다가 중반에 원정에 참여할 정도로 믿는 심복중의 심복이었으며, 프톨레 마이어스의 경우는 어린시절부터 궁중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일설에는 배다른 이복동생으로 알려질 정도로 최측근이었다. 그런 두 사람중에 과연 누가 후계자가 될것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이스 지역을 너무나도 손쉽게 안티파트로스가 차지하게된 것이다. 안티파트로스가 자신의 목표를 먼저 발표하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모두들 프톨레 마이어스의 눈치만 살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프톨레 마이어스가 안티파트로스가 지목한 마케도니아 총독(디아도코스)을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다. 대충 모든 상황은 일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자신의 순서를 다음 사람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모두 앞다투어 마케도니아에서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을 분할 차지하기 위하여 열띤 경쟁이 벌어졌다. 대충의 영역이 결정된 이후에 마침내 다시 프톨레 마이어스의 차례가 되었다. 안티파트로스를 제외한 그 어떤 지역이라도 이제 프톨레 마이어스가 지목하는 지역은 어쩌면 당연히 그에게로 다시 배정되어야 할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막강한 실세 휴계자였던 거이다. 프톨레 마이어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던 이집트를 그잉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이집트가 프톨레 마이어스의 차지가 된 것이다. 뜻밖의 결과에 모두가 으아해 했지만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야말로 지구상에서 최고의 곡창지대이자 살기좋은 곳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알렉산더라는 배경과 그의 후계자라는 정통성에만 눈이 멀었을때, 프톨레 마이어스는 이제 앞으로 이들의 관계가, 장차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리라는 것을 예견했으며, 살아남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이집트를 택했던 것이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이집트로 향했고, 그곳에 왕국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집트 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 마이어스 왕조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이 왕조에서 후대에 클레오파트라가 탄생한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알렉산더가 지중해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고, 전설속의 등대와 도서관을 건립했다고 배웠으나 사실은 그 업적들이 모두 이집트 마지막 왕조를 세운 프톨레 마이어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한다. 알렉산더가 터키 지역을 정복하고 삽시간에 소아시아로 이동하였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페르시아 지역에서 보냈던 탓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등대와 도서관을 만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을테니 말이다. 이 위대한 건설 사업은 아마도 알렉산더가 사망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완공되었을 것이다. 새롭게 왕조를 열었으나 알렉산더에 대한 존경과애정이 남달랐던 프톨레 마이어스의 우정과 충성심에서 나온 발로였을 것이다. 그러니 당대의 세상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렸겠는가? 알렉산더 대왕의 정통성은 프톨레 마이어스에게 있다고 칭송이 자자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쯤 되어서야 안티파트로스를 포함한 모든 디아도코스들은 비로소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마케도니아니 정통성이니 다 헛껍데기일뿐, 진짜 알짜배기는 이집트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안티파트로스의 선동으로 디아도코스 연합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로 여러차례의 전쟁이 벌어지지만, 차근차근 새로운 이집트 왕조의 기틀을 다져간 프로레 마이어스 왕이 이끄는 이집트군이 매번 나일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예견대로 이집트는 번영을 이어갔고, 다른 모든 디아도코스들의 왕국은 새롭게 이탈리아 반도를 뛰쳐나온 로마에 의해서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멸망하고 만다.

 

  알렉산더가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여 중앙아시아의 마라칸다(사마르칸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였을때, 앞장 서서 가장 혁혁하게 공을 세운 디아도코스가 바로 프톨레 마이어스(Ptolemy) 였다. 황금의 도시로 알려진 박트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약 2개월간 주둔하면서 군대를 재정비할 즈음에서 프톨레 마이어스는 현지인으로부터 산맥 너머의 월씨족 마을(호탄)에서 귀중한 보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여기에서의 호탄은 바로 질 좋은 옥을 채굴하여 멀리 한나라까지 가져다가 비단과 요역을 해온 월씨족이 살아가는 그곳을 말한다. 험준한 산악지역 너머의 호탄에서 생산된다는 보물이 중국측에서는 옥(玉) 이었지만, 서역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물은 옥이 아니라 옥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흑수정 이었다. 하지만 좀 더 심도있게 구분한다면 흑수정은 결정이 있기에 광물로 취급되는데 반해서, 같은 유리 성분이면서도 흑요석(黑曜石)은 결정이 없기에 준광물로 취급되는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특정하게 생긴 모양이 없이 제멋대로 깨지는 유리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서역의 유목민족들은 이 제멋대로 깨지면서 날카롭게 쪼개지는 단단한 이 돌조각은 고대부터 칼이나 화살촉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철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흑요석은 최고의 위력을 가진 무기 재료였던 것이다. 철제 무기가 등장한 이후로는 아랍지역의 궁궐이나 신전을 치장하는데 쓰이는 파란 타일 처럼 쓰이는 최고급 건축재료였던 것이다. 이 흑요석이 생산되는 지역이 지구상에 별로 없다. 후대에 지어진 이스탄불의 술탄 마호멧 사원이 (블루 모스크)로 불리게된 이유가 바로 이 흑요석을 주재료로 외형을 완성했기에 붙여진 이름인 거이다. 불루 모스크에 사용된 푸른색이 전부 이곳의 흑요석을 가져다 완성시킨 것이다. 하여 그후로는 흑요석을 '터키 스톤' 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아랍지역의 모든 사원과 왕궁 건설에 가장 귀하게 사용되는 재료가 흑요석이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흑요석은 그야말로 보석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흑요석이 생산된다는 호탄에 부쩍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사방을 둘러싼 만년설에 뒤덮인 끝이 보이지 않은 험준한 산맥과 추위를 헤치고 호탄까지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현지인 노인에게서 뜻밖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은 비교적 손쉽게 호탄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통로에 관한 정보였다. 텐산산맥과 곤륜산맥이 겹쳐지는 사이로 비교적 낮은 높이의 한 골짜기를 통과하면 호탄에 다다르게 된다는 소식이었다. 그 길을 통해 호탄의 월씨족이 흑요석을 서역으로 반출하고 소금을 비롯한 생필품을 조달해 돌아간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호탄의 월씨족 입장에서 보면 옥을 제값을 받고 팔기엔 중원의 한나라가 최고 상대였다. 하지만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고 너무나 멀었다. 최소의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은 텐산산맥을 넘어서 사마르칸트까지 다녀야만 했는데, 그에 비하자면 흑요석을 가지고 계곡을 통과해 박트리아에서 최소한의 소금과 식량을 구입하는 방법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였다. 하지만 호탄 지역의 월씨족들은 자신들이 그곳까지 오게된 이유인 흉노족의 침입에 대해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자신들의 터전을 외부에 보여주기를 꺼리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톨레 마이어스 사령관은 수소문 끝에 월씨족이었으나 호탄을 벗어나 박트리아에 정착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 설득한 끝에 그를 길잡이로 앞세우고 소수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거대한 산맥 사이에 난 좁은 협곡을 향해 들어갔다. 마치 길게 뻗은 사람의 손가락을 닮았다 하여 오늘날까지도 '와칸 협곡(Vally of Wakhan)'으로 널리 알려진 매우 뜨거운 분쟁지역이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이 이 협곡을 통새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협곡의 저쪽 끝이 바로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역인 것이다.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과 서역을 연결해 주는 비밀통로가 <와칸회랑> 이다.

 

 

 

 

 

 

 

 

  " 2개월 앞으로 다가온 중국 북경 동계 올림픽에 대하여 지난주에 미국과 서방의 일부국가가 정치적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한 배경에 바로 이곳 '신장 위구르 자치구역의 인권문제'가 깔려있는, 작금에 세상에서 가장 핫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한 중국의 경제성장과 자원외교에 찬물을 끼얹기 위하여 미국이 꺼내 든 비장의 카드가 바로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탄압' 카드였다. 급격한 개혁과 성장을 추구하는 중국으로서는 저변에 깔려있는 공산주의 사회제도의 특성상 인권문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근본적 한계가 뿌리깊게 내재해 있을 수 밖에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숭고한 스포츠 정신의 축제장에 은근 슬쩍 정치(인권문제)를 끌어들여 개최국을 압박하는 미국의 태도 또한 졸렬함의 극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문제는 중간에 끼인 약자인 대한민국의 선택인데....... 우리나라는 정치적 중립과 초월적인 스포츠 정신을 앞세워서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단계를 낮춘 정치적 사절을 파견하는 참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은 눈치에다가 짜증을 좀 받아내는 정도로 무마될 수 있겠으나, 미국의 편에 서서 중국을 외면했다가는 엄청난 경제적 보복을 당할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짝 터지지 말고, 이럴땐 게(일본)과 쭈꾸미(러시아)를 슬쩍 끌어들여서 냉혹한 외줄타기 승부에서 옆으로 비켜나야만 하지 않겠는가?"

  호탄을 침입한 마케도니아군대와 프톨레 마이어스의 관심은 오로지 흑요석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에는 옥(玉)이 그다지 귀한 보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옥광산의 실태를 철저하게 조사했으며, 상당량의 흑요석을 탈취해 먼저 계곡 밖으로 실어 보냈다. 충분히 제국의 앞날을 생각해 볼때 매우 요긴하게 쓰여질 중요한 영토로서 확실하게 식민지화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말이다.

  호탄을 벗어나려는 프톨레 마이어스에게 문득 참으로 신기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호탄의 지배계층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대부분 입고 있는 대단히 화려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마케도니아의 군대는 물론 본국의 귀족들에서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장은 뻣뻣한 마나 아마로 만든 천이 대부분 이었다. 페르시아 지역의 동물의 털실로 짠 카페트 형태의 옷감들도 두텁고 뻣뻣하고 거칠기는 매 한가지였다. 여러가지 염색을 통하여 신분을 과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복장은 마나 아마로 만들어 졌다. 그런데 이곳의 남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이제껏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살랑살랑 흘러내리듯 한없이 부드럽고 색상 또한 그렇게 다양할 수가 없었다. 얼핏 올림푸스 신전의 신들이나 입었을성 싶은....... 전설속의 님프와 천사들이나 입었을것 같은 고급스런 기품과 한없는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이런 옷감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비단(Silk) 이었다.

  월씨족은 호탄의 옥을 한나라까지 가져다 팔고 대신 비단으로 셈을 돌려 받았다. 돌아 오면서 철기구와 소금과 식량을 바꿔 구입하고 남은 비단을 호탄까지 가지고 와서 창고에 잘 보관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중원에 가지고 나가면 엄청난 고부가가치의 비단인데 막상 호탄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쌓아 놓았다가 어느해 극심한 가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창궐하면 그때 비단을 꺼내들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가 가까운 도시에서 필요한 물품과 물물교황을 할때만 쓸모가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쓸모없는 비단이 창고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한나라에 교역을 다녀온 사람만이, 한나라의 왕실이나 고급 관리와 부자들이 겨우 입는 비단옷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교역을 다녀온 유지 하나가 쌓아놓은 비단을 가지고 자기들 방식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그 옷이 폼도 나고 한없이 편했던 것이다. 그러자 호탄에서 나름 잘나간다는 남자들이 하나 둘 비단옷을 입고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케도니아 군대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프톨레 마이어스에게 호탄은 적어도 의복에 있어서만은 올림푸스 산 정상의 신선의 세계였다. 험준한 산속에서 야만에 가까운 생활을 겨우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복만은 가히 천상의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그 옷감이 눈덮인 산을 넘고 거대한 사막을 건너 아주 멀고도 먼 동쪽의 한나라로부터 들여온 귀중한 보배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호탄의 월씨족이 창고에 보관하던 비단을 몽땅 말잔등에 실었다. 얼핏 모두 정당한 셈을 치뤘다고 하지만....... 개뿔. 침략자가 징발해 가는데 정당한 계산이 어디 있겠는가?

  박트리아로 돌아온 프톨레 마이어스는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 비단을 나누어 주었고, 상당량을 심복을 통해 마케도니아로 보냈다. 노예 출신으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아직 마케도니아에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이 대목에서 야사에서는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왕이 미모가 출중했던 노비를 임신시켜 프톨레 마이어스가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어머니가 노예의 신분이었으면서도 프톨레 마이어스는 궁중에서 알렉산더와 함께 자랐다. 그가 장성하고 군인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귀족의 대우를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어린시절 노예로 고된 노역에 가까운 일을 하던 어머니가 늘 안타까웠던 효자였기에, 그순간 비단옷을 걸치고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 서안에서 생산된 비단이 호탄의 옥과 교환되어 타림분지까지 흘러 갔고, 흑요석을 찾으러 왔던 알렉산더 제국의 프톨레 마이어스 장군에 의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아라비아 반도를 건너 아나톨리아 평원을 거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지중해에서 배에 실려서 마침내 발칸반도의 끝자락 마케도니아의 궁전까지 전해졌다.

  프톨레 마이어스의 어머니가 아들이 보내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나서지 마자........ 본래 태생적으로 여성들은 미적인 것에 탁월한 촉감이 있지 않겠는가? 하루아침에 온 마케도니아에 먼 동방에서 흘러온 비단 때문에 난리가 나고 말았다. 지위가 높던 낮던,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비단을 얻으려고 난리가 벌어진 것이다. 비단을 싣고 먼 길을 왔던 심복의 품에는 '얼마든지 많은 비단을 보내주면 좋겠다. 비단 때문에 난리가 났어' 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서신이 갈무리 되어 있었다. 프톨레 마이어스는 보급담당 부하에게 어떻게든 많은 양의 비단을 구해 마케도니아로 보내줄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알렉산더와 함께 인도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했고,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더 군대는 후퇴를 거듭하던 끝에 바빌론에서 알렉산더가 요절했다.

  이집트에 왕조를 세운 후에도 그는 비단을 구하고자 했다. 이젠 자신의 영역이 아닌 정적들의 영역이었기에 이때부터 비단을 얻기 위하여는 중간에 장사꾼(카라반)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집트에도 여타의 아랍 전지역에서도, 그리이스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에서도 비단은 최고로 비싼 보물 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이 비단의 교역을 카라반들이 전량 담당하게 되었고, 그들이 오가는 교역로가 어느때 부터인가 비단길(Silk Road)가 되었던 것이다.

  이 길은 사실 별다른 이름이 없었다. 그저 카라반들이 오가는 장사길 정도로 불렸을 뿐이었다. 1877년 독일의 지질학자 페르디난드 폰 리히트호펜이 자신의 저서 <China> 1권에서, 투르크족과 몽골제국 등 북방의 유목민들에 의해서 기원전부터 서양에서 중국까지 개척한 길을 이용하여 비단이 이동했다는 부분을 연구하면서 처음으로 '실크로드(Seidenstrassen)' 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실크로드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는 점차 번성하기 시작했고, 몽고가 유럽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고,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대항해 시대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그제서야 유럽은 문명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근대화가 서구에서 벌어지고 유럽의 열강들이 저마다 제국의 길을 걷게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역사문명의 발전에서 한걸음 물러나 스스로 도태되고 뿔뿔히 흩어져 있는 이슬람 세계를 향해서 야욕의 식민지 침략 전쟁을 감행해 온것이다. 세계사의 주도권이 어느새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온통 넘어가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 이 과정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근. 현대사의 이슬람 이야기로 넘어가서 살펴보고, 9.11 사태 이후의 (테러와의 전쟁)과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사태)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보기로 한다.>

 

 

 

 

 

 

 

 

 

 

 

 

 

 

 

 

 

  지금 언론 매체를 통해 이슬람 소식을 접하게 되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울것 같다. 대략 20년전 까지만해도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가 있는데 대부분의 분쟁이나 테러는 소수파인 시아파에 의해 저질러 진다는 것이 하나의 분문율처럼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인가 (ISIS) (알 카에다)가 등장하면서부터 다수인 수니파에서도 테러단체가 생겨나고, 이제는 수니파니 시아파니가 문제가 아니라 무장 단체 이름만해도 여럿인데다가, 그 단체에 연계되는 민족과 국가들이 세분화되면서 이차 방정식만으로는 문제를 풀기가 불가능해져 버리고 말았다. 오사마 빈 라덴은 알아도 아야툴라 호메이니를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것이고, 사담 후세인은 기억해도 아라파트. 낫세르. 무바라크. 카다피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테니 말이다. 툭하면 등장하는 팔레스타인 분쟁을 뉴스를 통해 들어보았어도, 그 근원을 파고들면 거기에 이스라엘의 독립이 원인이었으며 더 깊은곳에 시오니즘이 있다는 사실을 어디에서도 교육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았을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인 불순분자들이 툭하면 테러를 벌이는데 그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서도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고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 퇴각까지 약 2.500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아프가니스탄 양민 약 30만명이 이번 전쟁통에 사망했다. 군인은 전쟁을 위해 택한 직업인이었고 생명 수당까지 받아가면서 임무를 완수하다가 사망했다. 자의에 의한 선택과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일반 국민은 다르다. 그들은 무기를 손에 들지 않았으며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다. 직접 사살이던 오발이던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하고 배상을 해야만 한다. 아프간에 무작정 쳐들어간것은 미국이고 사망한 2.500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미국이 져야한다. 이미 실질적인 부담을 지고 보상을 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30만명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회피한채 도망치는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은 당당하게 말했다. '원치 않는 전쟁이었고,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명분도 없어서 퇴각한다. 하지만 나름의 성과는 얻었다.' 라고 말이다.

  그럼 30만명의 원치않는 전쟁을 통해서 원치않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 죽음을 목격한 유가족들이 선택할 수 있는 희망과 목표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미국이 전면에 내세우는 정의(正義) 라면....... 나는 정의로운 신(神)께서 오만방자한 저들에게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형벌을 내려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하련다.

 

  그만큼 이슬람을 진실로 알아가고 이해하고 더불어 함께하기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이미 너무나 많은 선입견과 편파적인 가치관과 폄하 왜곡된 진실들이 버젓이 사실인것 처럼 돌아다니고 이미 안착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들려오고 보여지는 현실적인 상황만으로도 복잡한데, 그 근원을 찾아가겠다고 오랜 역사를 되집어가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하여 글을 써내려가는 입장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이해를 바라거나, 고시공부하듯이 외우고 짜맞추고 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싫증나지 않을 정도로 꾸준하게 하나씩 하나씩만 이해하고 관심을 갖게된다면........ 머지않아 새로운 이슬람에 도취하게되고 무척이나 재미있는 분야에로의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런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훌쩍, 17세기의 이슬람 세계로 안내하고자 한다.

 

 

  나와 함께 시공을 뛰어넘어 17 세기의 이슬람 세계를 여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슬람 세계의 최고 권위자는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에 기거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분명하다. 모든 이슬람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속한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분명 그러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유럽 침공에서 실패한 후 급격히 몰락해 가면서 이제 술탄의 권위는 이스탄불을 포함하는 아나톨리아 평원의 제한적인 오스만 영토에 국한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초기 이슬람의 지배자였던 아랍지역은 소수 부족단위로 뿔뿔히 흩어져 유목생활로 돌아갔으며, 옛 도시나 오아시스 지역을 거점으로 소규모 왕조들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오스만제국의 심장부인 이스탄불에서 멀리 떨어진 옛 페르시아 영토 지역에서는 이란의 사파피 왕조가 뿌리를 내리고 실로 오스만 제국을 능가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인근 사막지역과 파미르. 힌두쿠시 산악지역으로 사파비 왕조에 복속되는 수많은 작은 왕조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하여, 이 시기에 이슬람 세계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지역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부족이 다르고, 관습과 언어가 다르고, 이슬람 신앙에 대한 이해와 방법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꼈을 것이다. 오스만 지역인 이스탄불 주위를 여행할 때는 여전히 어느정도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투르크족의 문화를 접했을 것이지만, 이내 아라비아 지역이나 페르시아 지역을 지나면서는 매번 나뉘어진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군주국의 관리들에게 매번 다른 서류를 내밀어야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어디든 통용되는 공식문서에는 오스만 제국의 관리 도장이 찍혀야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는 언어나 화페의 기준과 제도와 규제는 대부분 아랍인들에 의해서 기준이 마련되고 운영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디를 가나 소위 부자나 지식인 계급들은 페르시아어를 쓰고 페르시아어 고전문학을 생활전반에까지 인용하고 있었다.

  아랍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과 오스만 투르크 지역이 서로 언어가 다르고 생활 풍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 달랐다. 다만, 어디를 가든지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아랍어로 하루 다섯번 울려퍼지고 사람들이 엎드려 기도 의식을 행하는 것만은 어디나 똑 같았다. 이것이 17세기 이후의 이슬람 세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슬람의 세계가 결코 거기까지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대지는 서로 붙어 있지만 저만큼 땅끝지역인 모로코도 이슬람 세계였고, 인도양 저너머의 인도네시아도 이슬람 세계였다. 영토가 서로 붙어있는 아랍 이슬람과 페르시아 이슬람과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이 다르거나 차이가 있었음인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이슬람들은 어땠을까? 어쩔 수없이 코란의 가르침과 율법의 규정이 점차 모호해지고 이해의 변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슬람의 제도와 질서가 느슨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에서 점차 수피즘에 빠져들고 새로운 수피교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도 점차 상인과 국제무역상들이 높은 지위로 급부상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계급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랬음에도 여전히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초기 이슬람 시대와 전혀 달라진 바가 없었다. 사회는 여전히 남성들의 고유 영역이어고 여성은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었다.

  17세기 전후의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지배하는 영역이었음에는 틀림없겠지만 그 영향력이 아나톨리아 평원 일부에 국한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라비아 반도 건너편의 페르시아 지역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이미 오래전부터 완벽하게 지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와 사파비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양분하고 있었으며, 중간 지대인 아랍 지역은 소부족 단위로 뿔뿔히 흩어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채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사파비 왕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유럽인들이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파비 왕조의 소퇴는 다분히 내부적인 문제로, 번영을 구가하던 왕조나 국가들이 필연적으로 누구나 겪게되는 세기말적 중후군 때문이었다. 사치스럽게만 대접받으며 성장한 왕자들이 향락에 빠져 타락하고 방종에 젖은채 왕위에 올랐고, 그후로도 국정을 게을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능한 왕위가 바뀔때마다 서로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측근들에 의하여 참혹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졌고, 시간이 지나자 음모와 세력다툼이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어느 순간 왕국은 이제 어떤 현명한 군주가 나타난다해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몰락해 갔다.

 

  페르시아 지역은 본래 이슬람 수니파 지역이었다.

  시간이 지나 이 지역에 시아파가 전해졌고 서로 원만하게 교류하면서 지내왔다. 한 시아파 부족장이 점차 세력을 규합해 확장해 가자 이를 우려한 수니파 부족들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수니파는 당시 페르시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백양왕조에 고발하여 군대를 동원해 시아파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시아파 부족의 남자들이 몰살당하였는데, 부족장의 아들인 이스마일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산악지대로 도망쳤다. 산속에 숨어다니면서 이스마일은 시아파를 규합했으며 지도자로 추앙받으면서 비밀단체를 결성해 수니파와 백양왕조에게 복수를 시작했다. 마침내 백양왕조를 물리친 이스마일은 새로운 시아파 사파비 왕조를 세웠으며 스스로 이스마일 1세로 왕위에 등극했다. 이는 당연하게 수니파를 신봉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서로간에 강력한 적으로 자신들의 입지강화를 추구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강력한 오스만 제국에 대척하는 방법으로 사파비는 이지역에 전해 내려온 오랜 관습과는 저혀 다른 철권통치를 실시한다.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니파들에게 악랄할 정도의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강제로 개종을 요구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참혹하게 처형했다. 피와 폭력을 통한 개종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시아파로의 개종은 이후로 페르시아 지역을 하나로 규합하고 이끌어나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된다. 그런가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수니파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견디다 못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 도망친 수니파 신학자와 지식인과 예술가들에 의하여, 엉뚱하게도 주변에 낙후되었던 부하라. 무굴제국. 델리 같은 곳으로 수니파 주도의 신학적 문화적 영향력이 파급되는 참으로 놀라운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하게 되었다.

 

  시아파라는 종교적 열망을 뿌리에 두고 시작된 사산조 페르시아 왕국의 등장은 차후에 이 지역에서는 전례가 없었을 정도의 안정적이면서도 강력한 통일 왕조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들 페르시아인들이 세운 문화의 영향력이 점차 파키스탄. 북인도 지역.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된 거이다. 오늘날 까지도 사우디 아라비아와는 전혀 다른 노선의 이란이 이지역의 국가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대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체가 모두 사파비 왕조 시절에서부터 시작된 영향력과 역사적 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했던 시아파의 페르시아 왕국이 오랜 번영을 구가한 끝에 몰락의 길을 급격하게 내리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왕위가 불안한 왕은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믿고 의자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군대 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대도 이미 차기에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과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결국 왕은 유럽의 군사전문가를 초빙했다. 그에게 전권을 주고 군대를 훈련시켜 자신을 보호하게끔 요청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왕자들도 유럽의 군사전문가를 끌어들여 자신의 군대를 훈련시키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게 했다. 이들 유럽에서 파견되어온 군사전문가들 배후에 유럽 열강의 정치가 숨어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세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침략자들이었으며, 어떻게든 사파비 왕조를 분열시키고 타락시켜서 모락이 길로 내몰아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하이에나들이었던 것이다.

  18세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페르시아 제국은 분열 분열되기 시작했다.

  수니파가 우세한 부족들은 앞다투어 왕국에서 떨어져나가기 시작하였고, 오랜 숙적 관계였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북부 산악지역의 아프가니스탄이 페르시아 지역을 침략해서는 오랜 수니파의 탄압에 대한 무자비한 복수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사파비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럽인들은 여전히 이 지역을 페르시아 라고 불렀지만, 고대 이래의 찬란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만 것이다. 카자르 왕조를 비롯한 부족 중심의 국가들이 한동안 이 지역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한다. 이제 이 근방의 사람들은 더이상 페르시아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사라진 고대의 언어로 여겨졌다. 이제 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란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중동의 이란(Iran) 이다.

  점점 수많은 유럽의 세력들이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가 주류였는데, 이는 종국에 러시아와 영국의 대결로 압축된다.

  다른 한편으로 페르시아 건너편의 인도에서도 식민지 약탈전이 벌어졌는데, 그곳은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장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지구 반대편에 벌어진 아메리카 독립전쟁에 무리하게 개입하다가 재정적 파탄을 맞이하였으며 그결과로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면서 더이상 인도에서 영국에 대항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인도제국 전체를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했다.

  이 상황에서 세상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만한 일대변혁이 생겨난다. 그것은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유럽을 넘어 세계라는 무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Russian)의 등장과 남진정책'.

  그것은 세상을 다시한번 요동치게 만들기에 너무나 충분한 희대의 사건이었다. 시베리아 변방에 머물러있던 야생의 북극곰이 소위 문명세계로 탈출을 감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놀라운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러시아가 서구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처음 등장한것은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 때를 같이 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메트 2세는 1452년 테오스시우스 성채를 함락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의 최후였다. 이는 유럽의 심장이자 당시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리이스 정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1.5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기독교의 정통성이 단절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모스코바 대공으로 불렸던 이반 3세가 과감하게 떨쳐 일어섰다. 기독교의 첫번째 수도는 로마였고 두번째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상황에서 이반 3세는 모스코바가 기독교의 세번째 수도 라고외치면서 모스코바를 새로운 기독교의 중심이자 심장으로 선포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빠져나온 종교인과 신학자와 기독교 자료와 성물들을 모아서 모스코바로 가져갔다. 이제 정교회의 중심이 모스코바로 모두 옮겨가게 된 것이다.

  그런 이반 3세에게서 할아버지를 훨씬 능가하는 위대한 손자가 탄생했다. 이반 4세는 스스로를 카이사르라 칭제하면서 러시아 제국이 고대 로마의 위대한 정통성을 승계한다고 세상에 천명했다. 역사는 이반 4세를 '표토르 대제'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표토르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한다. 뒤를 이어 등장한 예카테리나 대제는 명실상부하게 러시아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키스피해 훨씬 넘어서, 더하여 우랄산맥을 넘어서 시베리아 전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인도와 페르시아는 물론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소아시아 지역 북부의 대부분의 내륙지방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면적으로 따진다면 아마도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대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어림잡아 세계 1/4에 가까운 영토면적이다.

 

  동쪽으로의 영토확장을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제 시선을 점차 남쪽으로 돌렸다. 하여 이때부터 흑해연안과 코카서스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다.(이때부터 러시아와 터키는 영원한 앙숙 관계로 전락한다)

  예카테리나 대제와 러시아에게는 영원한 로망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염원으로 따뜻한 남쪽에 있는......... 겨울에도 얼지않는 바다로 향하는 항구를 꼭 하나쯤 가지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가슴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동쪽으로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바다로 나갔지만, 역시나 혹독한 겨울이 오면 바다가 얼어 붙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인도북부의 내륙지역을 확보하고 나니, 조금만 남쪽으로 확장하면 따스한 인도양이 그야말로 코앞이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지나 인도의 옆구리에 해당하는 아라비아 해협쪽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이제 예카테리나 대제의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먹전에 두고 아라비아해로 진출을 하려고 움직이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영국이었다. 러시아가 이미 차지한 페르시아 내륙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의 옆구리쪽으로 진출하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에 영국은 이미 인도 전체를 식민지로 삼아 목화와 석탄과 목재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화 발전에 꼭 필요한 결포 포기할 수없는 귀중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인도 또한 어마어마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지금의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지역과 방글라데시와 부탄까지가 모두 인도의 영토였다. 이제 러시아의 영역과 인도의 영역 사이에는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아프카니스탄 지역이 유일한 완충지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국의 지휘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완충지대를 전선으로 삼아 어떻게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목표아래 계획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인 것이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선점하여 병참 요새화해서 러시아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하여 다짜고짜 쳐들어 갔다.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제국. 몽골 제국이 이미 다녀갔던 아프가니스탄 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는 나라는 누구나 쉽게 쳐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남한 지역이었다. 실제로 쳐들어가서 점령까지는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재배하고 다스리는것이 불가능한 아주 특별한 지역이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전력상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주저않고 바리바리 짐을 꾸려서 산악지역으로 달아났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역인데다가 절반 가량이 해발 5.000~ 7.000 미터에 이르는 사용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오랜세월 잘다져진 아프간인들은 언제까지고 그 산속에서 생존이 가능했다. 추적도 토벌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틈만 보이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려와 게릴라전을 벌이고 다시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도저히 끝낼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아프간을 요새화 시키려 세번의 침공을 영국이 감행했으나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눈 앞에 멀쩡하게 두고도 결코 가질 수 없는 땅이었다. 이 상황을 지켜 본 러시아로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그 지역을 통과해야만 하겠는데....... 완전 점령되지 않은 배후에 적을 남겨놓고 마냥 앞으로 나갈 수는 없는 상황에, 그 담에 맞붙을 영국에 대해서도 호락호락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두 강대국의 전쟁을 눈치채고 다른 유럽의 열강들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이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영국이 전쟁을 벌여 한쪽이 치명타를 입고 철수하거나, 혹 양국이 모두 치명상을 입게된다면 대신 어부지리로 이지역의 이권을 차지하겠다는 목적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지리한 냉전에 돌입한다. 훗날 미국과 쏘련의 동서냉전의 시대는 바로 이곳에서의 냉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러시아와 영국 간의 전면적인 전쟁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허구한날 공갈포나 날리고 개폼이나 잡고, 식민지 앞잡이들을 데려다 치졸한 소규모 대리전이나 일삼았다. 그저 정보나 수집하고 공갈뻥이나 날리면서 서로의 지역에 방공호를 파고 철책을 둘러놓고는 세월만 죽이는 피곤한 전쟁놀임이 바로 '위대한 전쟁' 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영국에게는 마주한 적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주변에 구경꾼으로 도열해 있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도 모두 하이에나와 같은 적이었던 것이다.

  사파비 왕조가 차지했던 페르시아 전역과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전지역을 포함해 지금의 파키스탄 영역 대부분에다가 소련에서 독립한 투르크매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과 키리기스탄과 타지키스탄 공화국의 영토를 걸고 벌어진 한바탕의 '위대한 전쟁(Great Game)'이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않고 장엄하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이 이 사기성이 농후한 전쟁놀이에 그렇게 엄청난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것은 게임도 전쟁도 결코 아니었다. 거창한 사기극이었을 뿐이다.

  러시아와 영국은 오랜 밀당 끝에 서로에게 유리한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아무도 차지하지 않는 선에서 국경을 정하고, 남쪽의 인도 지역은 예전처럼 영국이 온전히 차지하되 러시아가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을것이며, 아프간 이북의 중앙아시아 지역은 고스란히 러시아가 차지하고 마음대로 처리한다는 전제하에, 양자간의 합의에 따라 국경을 준수한다는 꿍꿍이 협작이었다.

  훗날 인도는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고, 종교 문제로 파키스탄과 네팔과 벵글라데시가 분리 독립하게 되지만, 소련이 차지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나라는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소련)이 해체될때까지 러시아의 식민지로 전락 하였던 것이다.

 

  서구 열강들은 이슬람 세계를 분열시키고 서로 반목하게 하고 봉건적 왕조들을 부패하고 타락시키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부패한 왕조와 귀족들이 스스로 유럽에 의지한채 왕권유지에만 골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든 부패한 왕조와 정권은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나 생활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점차 부패한 왕조의 전횡과 폭정에 시달리던 국민들이 하나 둘 주변정세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세상에는 절대왕조만이 전부가 아니며 공화정이라는 열린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슬람이 새롭게 거듭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꼭 정대왕정을 뒤엎는다는 전제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절대왕조가 가지오있는 해악에 대해서 깊게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라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장점을 이슬람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부패한 절대왕정이 치명적인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초기 이슬람 정신과 생활로 재무장하고 새롭게 근대화된 이슬람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대통합을 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구 열강들의 바램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스스로 선택한것이다.

  사방에서 개혁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패한 왕정은 자신들만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유럽 열강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를 기회로 유럽 열강들은 이슬람 세계에 침투하여 자신들 방식으로 식민지화 작업을 벌여 나갔다.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왕정 타도와 외세 침략을 쳐부수기 위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점차 무장 봉기로 확대되어 갔다.  그럼에도 부패한 왕족들은 사치와 향락을 위해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자 처절하게  권력투쟁을 벌였다.  음모와 암살이 끊이질 않았다.  자고나면 왕위가 동생에게로, 삼촌에게로, 왕실 호위대장에게로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상에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방패로 삼기 위하여 세 차례에 걸쳐 침략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끈질긴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저항투쟁으로 끝내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비록 허울뿐이지만 분명 왕이 다스리는 왕정국가 였다. 나디르 칸이 즉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개혁을 주창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행보를 가로막는 최대의 정적들이 바로 친형제들이었던 것이다.  나디르 칸이 국가의 개혁을 추진하는 방편으로 교육을 중요시 하였는데, 한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압둘 칼리크라는 민족주의적 사상에 눈을 뜬 학생에 의해서 암살되고 말았다.  압둘 칼리크와 그의 일가친척 상당수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권력 수뇌부의 수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흡사 우리나라 '12.12 사태'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고 할 수 있겠다.  수뇌부는 압둘 칼리크 일가를 체포 구금 고문 처형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로 사망한 나디르 칸의 정적이었던 형제들과 다른 왕족들을 겨냥했던 것이다.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굴비 엮기듯이 최고권력집단이 왕족과 귀족들이 걸려들어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처형되기 시작했다.  이런 수난의 시기가 영국과의 3차 전쟁과 맞물려 일어났다.  신흥 수뇌부는 사망한 나디르 칸의 형제중에서 가장 나약한 자를 골라 허수아비 왕으로 삼았다.  내란과 외세(영국)와의 전쟁 사이에서 신흥 수뇌부가 칼끗을 겨누고 있는 왕족으로 수도 카불의 총독으로 있는 하비불라가 있었다.  그의 세째 아들 아마눌라가 용맹한 투사는 아니었지만, 나름 영민하고 배짱이 있었다.  가문의 위기 앞에서 아나눌라는 여러 부족들을 설득하여 충성 서약을 받음과 동시에 카불 총독을 자임하면서 대대적인 영국과의 전면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끝내 영국의 침략을 물리쳤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나눌라에 대한 아프간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은 당연히 너무나 뜨거웠다.  그는 사람을 보내 삼촌에게 왕위에서 내려올것을 권했다.  그러자 삼촌은 사우디 아라비아오 망명을 떠났다.  아마눌라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아마눌라 칸이 되었으며 진정한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아마눌라 칸은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의 건설을 염원했다.  현대적인 개혁을 위해 그의 모든것을 내걸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영국을 국빈 방문한 그의 눈에 비춰진 현대화된 유럽의 생활상은 아마눌라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유럽인들의 생활과 별반 다를것이 없는 개혁과 변혁의 아프가니스탄 모습이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아프간의 현대화를 위해서는 그 어떤것이든 포기하고 버릴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최우선 주안점은 교육이었다.  아프간의 미래는 모두가 현대적 교육속에서 탄생할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으로는 고지식하고 원론적이기만한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국제 학교를 세우고, 영성들을 차별하고 압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던 전통복장(히잡)을 쓰지 않도록 법률로 제정해 버렸다.  남녀 모두가  베일. 턱수염. 터번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시켜 버렸다. 더하여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학교에서 함께 교육받고,  동등하게 사회생활을 하도록 법률로 제정해 실천에 옮겼다.  유럽으로부터의 원조와 차관을 통해 도로를 개설하고 현대적 설비의 공장들을 세우고 전기 조달을 위해 댐을 건설했다.

  아마눌라 칸이 개혁을 통한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다시 유럽을 순방하면서 개혁정책을 입안하고 원조와 차관과 기술적 협력을 논의하던 와중에, 잘라바드 지방을 중심으로 암약하던 사카위스트(아프간 민중 무장단체)의 우두머리 '하비불라 칼라카니'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록, 여성인권의 신장 이라는 혁신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아프가니스탄 국민 대부분의 정서는 급진적인 개혁에 심한 거부반응과 상당한 부작용들을 야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정서는.......  시대 흐름에 순응하는 어쩔 수 없는 개혁 정도만을 받아들이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바로 그 틈새를 칼라카니가 파고 들었던 것이다.  극단적일만큼 보수적인 수니파 신앙을 가진 칼라카니는 아마눌라 칸의 개혁정책을 알라 신에 대한 신성모독으로까지 여겼다. 칼라카니의 군대가 카불을 점령했고 아프간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영국 방문중에 이 소식을 접한 아마눌라는 이제 돌아 곳이 없었다.  아마눌라는 인도로 급하게 날아갔다.  인도의 지원을 받고, 성명을 통해 칼라카니의 휘하로 점령되지 않은 나머지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에게 왕의 명령을 통해 저항을 하달했다.  이때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치열하고 참혹한 내전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 내전을 통하여 한 명의 새로운 실력자가 또 등장한다.  19세의 모하메드 자히르 였다.  개혁군주인 아마눌라 칸이 내쫒은 삼촌 나디르 샤의 아들이었으니,  두 사람은 사촌지간 이자 아울러 원수인 관계였다. 자히르는 아마눌라에 의해서 밀려났던 세력들을 규합했으며,  인도에 체류중인 아마눌라 대신에 아프간의 정규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해 나갔다.

  3개월의 처절한 내전끝에 자히르가 이끄는 군대가 마침내 카불을 재탈활하였고, 반란 수괴인 하비불라 칼라카니를 체포해 공개 처형시켜 버렸다.  아프가니스탄 전체 역사를 포함해서도 최고의 극악무도한 공포의 살인마로 지목되는 칼라카니였으니,  그의 처형을 지켜보면서 아프간 국민들이 자히르를 바라보게되는 시선이 어땠을지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아마눌라 칸 방식의 급격한 개혁을 다소 두렵게 받아들여야 했던 대다수 아프간 국민들은  이슬람 교리와 율법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완만하고 순리에 순응하는 첨차적 개혁을 천명한 자히르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세의 모하메드 자히르 샤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아프가니스탄  절대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히르 샤가 등용하는 재상(총리)들이 신진 학교교육을 통해서 새롭게 받아들인 사회주의 이념 노선의 신봉자들이었다.  아마눌라 칸이 서구유럽 방식의 급격한 개혁을 추구하였다면,  일종의 쿠데타를 성공해 등장한 신흥 집권세력인 자히르 샤의 정부는 차분하고도 서서히 진행하는 사회주의 노선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론은.........  아프가니스탄이 점차 소련과는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반대로 인접국인 파키스탄과는 서서히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에 우호적이면 우호적 일수록,  반대로 파키스탄은 점차 미국에 가까워질 수 밖에 없게되었다.

 

 

  이슬람 민족주의가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 이후로 대략 세갈래의 커다란 개혁운동이 주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와하비즘을 주장한 압둘 와하브와 세속적 근대주의를 부르짖은 사이이드 아마드, 그리고는 이슬람식 근대적 개혁을 주장한 사이이드 자말루딘 아프간이 그들이다.

  자말루딘의 이슬람식 개혁을 오늘날까지에 있어서 가장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사람을 꼽는다면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타튀르크 케말을 꼽겠다.  이슬람의 현대화에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영원히 남게될 것이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이슬람의 지도자들을 아타튀르크 케말 방식의 현대화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아마눌라 칸이 추구한 아프가니스탄의 개혁이 바로 자말루딘 아프간의 가르침에 따른 아타튀르크 방식의 개혁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아말루딘은 개혁에 실패했다.

  아말루딘 칸의 개혁에 두려워하고 거부적인 모습을보이던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새롭게 선택한 자히르 샤의 개혁정책은 다분히 압둘 와하브의 와하비즘에 입각한 개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슬람 전통 교리와 율법에 따르는 보수적인 정통성에 입각해 자신들의 이슬람 정체성을 확보한 후에서야,  신게서 허락하시는 정도의 개혁을 서서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를 퇴보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어찌되었건,  아프가니스탄에서 자말루딘의 개혁은 실패로 끝나 소멸되었고,  와하비즘이 다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써 사이이드 자말루딘 아프간의 이슬람식 개혁주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만것일까?

  아니다.

  자말루딘의 개혁주의는 일단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첫 시험에서만 실패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후로 자말루딘의 이슬람식 개혁주의는 전 이슬람 세계로 무섭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 온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의 교훈을 얻은 자말루딘의 개혁주의가 이집트로 뻗어나가서는 마침내 자말루딘의 개혁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슬림 형제단'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도,  세상사람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화제나 이슈에 등장하는 모든 이슬람 단체들의 뿌리를 추적해 올라가다보면 가장 높은곳에 와하비즘이 아니라 '무슬림 형제단'이 등장하게 된다.  무슬림 형제단의 배경에는 와하비즘이 아니라 사이이드 자말루딘 아프간의 개혁정신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사이이드 자말루딘 아프간은 누구인가?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난 사람 사이이드 자말루딘 이다.

  무슬림 형제들을 정신적 종교의 영향력 하에서 하나로 모여 단합하게 하고,  이슬람 역사를 통털어 처음으로 이들을 정치적 참여 운동으로 이끈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이슬람의 기득권층이 가장 극렬하게 반대와 탄압을 가하는 단체가 바로 무슬림 형제단이다.  그런만큼 이슬람 세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단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이이드 자말루딘의 무엇이 무슬림 형제단을 탄생하게 만들었을까?

 

 

 

 

 

 

 

 

 

 

 

 

 

 

--  너무 길어져서 일단 접기로 하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자말루딘으로 부터 출발해 보기로 하자.   피안재.

 

케말 아타튀르크와 아마눌라 칸(터키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