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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우피치(Uffizi) 미술관과 보티첼리(3)

by 피안재 2022. 9. 10.

 

 

 

 

 

 

 

 

 

 

 

 

 

 

 

 

  회화(繪畵)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 3만5천 년 전인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수렵에 성공한 성과를 남기고자 하는 기록물이었던,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자손들에게 사냥의 표적과 위험성 등을 가르쳐주기 위한 교육목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오늘날 우리가 흔히 미술품을 대하는 방식의 장식용이나 재산축적의 한 방편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회화는 선사시대 이래로 초기 인류가 지금의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늘 함께 해 왔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회화의 역사는 곧 인류문명사 그 자체라 하겠다.

  인류문명사를 가만히 살펴보자면 그것은 곧 수많은 인물과 사건의 기록을 하나하나 펼쳐서 길게 나열해 놓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굴벽화를 그리던 선사시대 인류에서 시작하여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사이엔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수많은 학자와 발표된 논문들이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10가지 사건’ ‘100대 사건’ 아니면 시대별로 나누어서 간추리고 또 추려서 발표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서구적 시각과 동양적 시각이 다르고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보는 시각도 모두가 제각각이다. 종교적 시각에 따라 차이나 나고 언어나 문명권에 따라서도 보는 시각과 이해관계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여기에는 사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발명과 발견의 이야기들도 하나하나의 사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을 추스르고 고르다보면........ 유구한 대부분의 시간들이 오로지 어떤 형태로든 결국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다.

  이번 여행의 안내자이자 주관자인 나는 (회화의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다른 어떤 학자나 책자의 기준이나 제시와는 다르게, 몇 가지 기준(사건)을 중심으로 나누어서 내 방식대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인류 문명사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는다면, 첫째는 ‘불의 사용’을, 둘째는 ‘등자와 쟁기의 발명’이며, 셋째는 ‘산업혁명’ 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통상적인 역사관점이 아니라 회화의 역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본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서 내려진 결론이다. 그리고 위에 제기한 둘째와 셋째 사이에 ‘로마 가톨릭(기독교)의 등장’을 끼워 넣어야만 하겠다.

  인류 문명사에서 (불) (등자와 쟁기) (산업혁명)은 모두 인류 발전에 크나큰 기여와 공로가 지대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인류 문명사의 공로자 3인방’ 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등장)은 사뭇 다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서구 중심 사관을 가진 기독교인들 입장에서야 인류 역사 최대의 공로이자 치적이자 축복이라고 판단하겠지만, 나는 결코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하겠다.

 

 

 헤브라이즘 (Hebraism)이 헬레니즘 (Hellenism)을 죽였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 다분히 기독교적 신앙인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일신 신앙이 치정으로 가득한 신화 속에 그려진 올림푸스의 미신들을 모조리 쓸어냈다’고 자평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시각에만 입각한 지극히 단편적인 기독교적 판단일 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다음의 이런 평가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일부 인문 역사학자들은 ‘그것은 오리엔탈(동양)의 사상과 철학이 서구(유럽)에 흘러들어갔고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제 3지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이 표현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서구...... 적어도 유럽인들의 중심사관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유럽인들의 정신과 문화의 뿌리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자긍심에 치명적 약점 내지는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 마음속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유럽을 제외한 제 3지대를 모두 신에게 버림받은 지역이라는 의식이 고대 이래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에도 올림픽이나 손홍민이 뛰고 있는 운동장이나 세계 각처의 분쟁지역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사실 유럽 문화의 뿌리는.....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모두가 동방에서 시작된 것을 페니키아 인들이 부지런히 그리스로 퍼 나른 덕분에 생겨난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들은 그 족보를 새로 갈아치우자 라고 덤벼들 것이다.

  유럽의 백인 우월주의가 20세기를 지나면서 달라진 것은 딱 한 가지가 있다. ‘백인 우월주의 유럽’의 이름을 ‘서구’로 바꾼 것이다. ‘유럽의 백인이 세상의 주인이다’라는 의식이 바뀌어야만 하는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파생되어 나간 미국인 어느 순간부터 세상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다 건너 뚝 떨어진 호주가 어느 순간부터 세계 시장의 주역으로 뛰어 올라온 것이다. 미국과 호주를 떼어버린 유럽만의 백인 우월주의는 어느 순간부터 유명무실해져 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주체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유럽이란 단어 대신에 서구라는 용어를 채택했고, 여기에는 유럽이라는 기본 바탕 위에 미국과 호주를 포함하는 21세기형  ‘백인 우월주의’ 의식이 새롭게 정착된 것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 서구의 백인 우월주의 영역은 하나 같이 모두 ‘기독교 영역’ 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교이던 구교이던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신앙의 뿌리를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범 기독교인 이라는 사실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이런 강한 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당이나 교회나 가정에 걸려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이다.

  예수는 유대인이다.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나고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의 모습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원주민이나 터키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사는 사람이나 이라크 지역의 사람들 모습이었어야만 했다. 그 지역 아브라함의 고향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와 뿌리를 함께하는 친척이자 이웃사촌들인데........  그들의 표준적인 모습과 성당에 걸린 예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성당에 걸린 예수는 부모중의 하나는 그리스인이요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정통 유럽인 모습이다. (벤허) (쿼바디스) (성의) (소돔과 고모라) 등, 어떤 성경 속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보아도....... 로마인을 제외한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이나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모든 등장인물들의 한결같은 모습은 이슬람 사람들과 똑 같다. 본래가 같거나 이웃한 부족이요 민족이기에 생김새며 옷차림이며 생활풍습까지 닮은 것이다. 야고보나 베드로나 유다 또한 이들과 똑같이 생겼다. 예수만 빼고 말이다. 예수는 옷만 갈아입으면 영락없는 로마인이다. 왜 그렇게 어거지로 창조해야만 했을까?

  어쩌면....... 초기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성상 파괴운동’을 단순하게 판단해 본다면 이런 관점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무엇이 우상(偶像)이며, 어디까지가 성상(聖像)인가?

 

 

 

  (불의 사용)

  서서 걸어 다니는 특별한 존재였다고는 하지만 선사시대의 인류는 그저 자연생태계 속의 하나의 위태로울 정도로 나약한 생명체였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불(火)이 손에 쥐어졌다. 걸어 다니는 생명체에게 날개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놀라운 변화를 어떻게 달리 표현할 방법이 나에게는 없지 싶다. 어디에선가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났거나 화산 폭발로 쏟아져 나온 용암에서 불을 접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경험에 놀라운 적응력을 가진 인류는 머지않아 불의 보관과 활용법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불을 이용해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되었고, 음식을 익혀먹게 되었고, 불로써 거대 짐승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골짜기나 동굴에 은신해야 안심할 수 있었던 인간은 이제 불을 가지고 이동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곳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불만 꺼트리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불이 있는 곳에 하나 둘 모여살기 시작했다. 생존과 생활에 그것이 점차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차차 골짜기에서 나와 강이 흐르는 거대한 평원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야생의 짐승 사냥에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씨를 뿌려 경작한 후에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농경사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한곳에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가 (불)에 대하여 표현하고 기록한 것의 전부라 하겠다. ‘불이 등장했고, 활용법을 터득했으며, 물이 풍부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다’라고만 적혀 있는 것이다.

  역사가들도 이 대목에서는 참 썰렁했을 것 같다. 인류문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아주 특별한 사건을 대충 얼버무리듯 ‘나머지는 생략’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창조주께서 말씀으로 기록하신 성경에 보아도 이 대목에 대해서 별반 기록이 없다. 인간이 걸어 다니는 시기였으니까...... 아담을 만들고,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고, 사과를 따먹은 죄로 추방된 후의 사건인 것만은 분명한데, 이 시기의 기록을 찾다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또 낳고 다시 또 누구를 낳았다는 기록들뿐이다.

 

  이 짧고 달리 부여할 의미나 이야기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건에 더할 나위 없이 찰지고 호기심이 팍팍 솟아오르는 이야기를 덧붙인 사람들이 바로 헬레니즘 사람들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이미 왜 기독교가 이들을 그토록 미워하고 지워버리려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인간은 어떻게 탄생 했을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시고 입김을 불어넣어서 아담을 만드셨으며, 홀로 지내는 아담이 안스러워서 갈비뼈 하나를 취해 이브를 만드셨다’라고 성경에 적혀 있다.  참으로 기독교적인 상황 설명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감성적이고 신화적이며 낭만적인 헬라인들이었던 것이다.

  인간(남자)은 제우스의 명령으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지상에 내려와 흙과 물을 섞어서 만들었다.   쌍둥이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인간을 제외한 지상의 모든 생물을 이때 함께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별명)이 있었는데, 프로메테우스는 ‘먼저 생각하는 자’이며,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자’ 이다.

  어찌되었건 남자는 프로메테우스가 흙과 물로써 만들었다는 사실은 밝혀진 것이다. 그럼 여자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여자는 제우스 본인이 처음 만들었는데...... 별로 정당하지 않은 음흉한 속셈 끝에 만들어 졌다고 전한다.

  제우스의 명으로 쌍둥이 형제는 지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하나씩 저마다의 특기를 주어서 생존에 보탬이 되게 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생물체의 숫자와 나누 줄 특기가 똑같은 숫자로 준비되었다. 코끼리에겐 힘 있는 코를, 기린에겐 긴 목을, 치타에겐 날렵함을, 새에게는 날개를 등이었다. 선착순으로 먼저 도착하는 생물에게 우선적으로 좋은 것을 하나씩 나눠주던 중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떠나면서 동생에게 ‘하나에게 한 가지씩’을 신신 당부하고 떠났는데....... 나중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가 그만 중간에 착각을 하여 한 생명체에게 두 개의 특기를 내주고 말았다. 예를 든다면 독수리에게 커다란 날개만 주어야 하는데 날카로운 발톱이나 부리가 하나 더 딸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심부름을 마친 프로메테우스가 돌아왔고 준비했던 배분은 모두 마쳤다. 마감을 치려는데 가장 느림보에 나약한 인간이 꼴찌로 마침내 겨우 도착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남아 있어야 할 선물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늦은 죄로 허탕을 치고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자 인간을 만들었던 프로메테우스의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왔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더 이상 내어줄 것이 없었다. 힘없이 허탈하게 신들의 광장을 떠나가려는 인간을 프로메테우스가 불러 세웠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프로메테우스는 그길로 올림푸스 신전에 있는 신들의 부엌으로 달려가 몰래 향나무 심지에 불을 붙여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인간에게 불의 관리법, 산술과 건축술, 조선술, 항해술, 목축 등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과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어떤 전달자는 그 불을 에트나 화산(시칠리아)에 있는 헤파이토스 대장간에서 훔쳐 주었다고 조금씩 다르게 전하기도 한다.

  암튼 불(火)은 올림푸스 신전에 사는 신들만의 성스럽고 고귀한 전유물이었다.

  그것을 몰래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으니 제우스가 느낀  분노가 하늘 끝까지 이를 정도였으며, 결국 제우스는 크라토스로 하여금 프로메테우스를 체포하게 하고 헤파이토스로 하여금 신들도 풀 수 없는 족쇄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손과 발에 채우도록 했다. 그리고는 멀리 세상 끝에 우뚝 솟은 만년설에 뒤덮인 코카서스 산의 암벽 동굴에 프로메테우스를 매달아 버렸다. 낮에는 신들이 기르는 독수리가 날아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었다. 밤이면 다시 그 간이 자라나고 아침이면 다시 독수리가 날아와 간을 쪼아 먹는 참혹하고 끔찍한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다. 이 처형은 훗날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안타깝게 생각해 이곳까지 찾아와 아폴로의 화살로 독수리를 죽임으로 끝이 난다. 다른 신들의 간청으로 프로메테우스는 해방되었지만, 제우스의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고심 끝에 제우스는 한 가지 묘수를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여자(女子)였다. 헤파이토스는 제우스의 명령대로 흙으로 아프로디테에 견줄만한 미녀를 하나 만들었다. 바느질의 신 아테네가 예쁜 옷을 만들어 주었고, 자신을 빼닮은 것에 부아가 치민 아프로디테는 간드러진 교태와 애가 타는 그리움과 몸이 나른해 지는 고통을 심어주었고, 헤르메스는 장난기로 염치없는 투정부림과 교활한 심보를 주었다. 제우스가 원하던 바였다. 제우스는 그녀에게 판도라(Pandora)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울러 늘 곁에 두라며 고급스럽고 화려한 보석상자 같은 것을 하나 건네주었다. 보관은 하되 절대로 열어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깔아놓고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판도라의 상자)인 것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와 상자를 프로메테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아프로디테만큼이나 예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니 단숨에 품게 되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이 여인을 보낸 이유가 밝혀져야만 그 다음을 생각해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끝내 그는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제우스로부터 먼 곳을 다녀오라는 심부름이 떨어졌다. 집을 떠나면서 좀체로 마음을 놓지 못한 프로메테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어떤 일도 만들거나 저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그런데 어쩌랴? 형의 집에 들어 가보니 천상의 미녀가 교태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유혹하지 않는가? 나중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당부를 떠올려 보기도 전에 벌써 판도라의 품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오면서 판도라가 옆구리에 꼭 끼고 있는 보석함 같은 상자가 무척 궁금해 졌다. 대답은 제우스의 선물인데 나중에 허락할 때까지 절대로 열어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란 존재가...... 하지 말라고 하면 죽어라 더 해보고 싶은 심보를 원래부터 가지고 태어났지 않는가? 그런 마당에 나중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야 더하여 무엇 하겠는가?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 버렸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채워진 족쇄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십자가 형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 주겠다. 내 주관적 판단에 입각하자면 말이다.

 

 

 

 

 

 

 

  왜 헤브라이즘으로 똘똘 뭉친 로마 가톨릭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이야기를 모두 죽여서 없애야만 했을까?

  중세의 성직자들과 또 현세에 이르러서도 열렬한 기독교 성령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 당시와 똑같은 입장이자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사도 바울이나 사대복음서의 저자들이나 중세 시대를 살다간 보편타당한 일반인들의 입방에서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우고 제거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교회가 나서서 그토록 무섭게 이단을 비판하고 이교도를 말살하겠다고 종교재판을 열던 그 시기에도,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전통이 이어가는 유럽 영토가 아닌 멀고 먼 이교도의 땅 동방에서, 그것도 같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이슬람 사람들은 이 신화와 전설에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 탐구와 연구를 하고 번역을 거쳐 책으로 편찬하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어느 이슬람 학자가 말했다. ‘유일신 알라는 더 없이 완벽한 신이다. 더할 것도 보탤 것도 없다. 그런 처지에 다른 신에 관해서나 신화와 전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는 것이 어찌 알라신께 누가 될 수 있겠는가? 알라는 이미 완벽하신 것을. 우린 세상의 다른 신과 그 신을 믿던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보다 나은 차원에서 나은 방법으로 알라신을 찬양하고 받들어 모시기 위해 이러한 모든 것을 허용한다.’ 라고 말했다. 이슬람에서는 어떤 미신이나 이교 신앙을 연구하고 떠받든다 해서 알라신의 존엄이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이미 가득차고도  넘쳐흘렀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이 이토록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하나님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던가, 기독교 교리나 신앙생활이 이슬람에 비해서 모순되거나 한참 뒤떨어진다는 자격지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교회 스스로가 스스로의 거짓과 모순과 위선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숨기고 차단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교회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까지 동원했음에도 기어코 중세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이교도인 이슬람 학자들의 문헌과 사상이 흘러 들어와서 교회의 그릇됨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결국엔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종교 개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감히 누가 있어서 더 이상 신화는 거짓말투성이의 먼 옛날 꿈같은 이야기라고, 허황된 말장난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있겠는가?

  신화를 받들어 모시고 찬양할 수는 없겠지만, 신화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신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주고, 신화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의 씨앗을 뿌려주고 자라게 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식물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주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 더욱 건강하게 자라서 풍요로운 결실을 우리에게 안겨주듯이, 신화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님이 내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힘이 차고 넘쳐난다’는 기독교인들의 고백처럼, 비기독교인일지라도 신화의 숲속을 뛰놀며 성장한 사람 또한 세상의 어떤 고난에 직면할 지라도 오디세우스처럼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과감히 두려움을 떨쳐내며 싸워서 이기리라는 믿음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최고의 권력자 제우스의 협박에도 결코 무릎 꿇지 않은 프로메테우스의 용기가 한없이 존경스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유독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했던 것처럼, 그에게서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인간이야 말로 프로메테우스를 쏙 빼닮지 않았을까?

  신(제우스)의 음모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일망정 자신이 소중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며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다짐하면서 발걸음을 중도에 멈추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길을 물으면 구원을 받고, 프로메테우스에게 말을 걸으면 이교도가 되어서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인가?

  나는 이교도나 종교재판이나 이단 판결은 결코 두렵지 않다.

  하지만 신화나 꿈을 상실한 채 오로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만 맞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두렵다. 더하여 흔히들 말하는 ‘알맞은 기독교인의 삶’을 나는 이제까지도 찾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여야만 할것 같다.

 

 

  철학과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헬레니즘(Hellenism)에 대하여, 오로지 종교와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헤브라이즘(Hebraism), 그러니까 히브리 문화나 히브리 정신에 뿌리를 둔 로마 가톨릭의 사람들은 허황된 신화와 잡신들에 대한 우상화로 점철된 사악한 이교도 문화라고 모조리 단죄시켜 버렸다. 인간과 신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와 이해관계에 대하여 서로의생각과 가치관과 접근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기독교 사람들에게 헬레니즘의 신들은 모두가 전설과 신화속의 꾸며지고 가공된 허구의 존재일 뿐이었다. 이 세상에 최우선의 진리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살아있는 신(神)이라는 믿음뿐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 유일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오로지 기독교 안에서만 인정되고 허용되는 자기들만의 신앙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나 하나님 신앙에 뿌리를 두지 않은 다른 종교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하나님이나 올림푸스 산 위의 신들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런 떠도는 신화와 전설의 하나일 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신은 동급이다’ ‘모두가 다 살아있는 신이거나 아니면 모두가 하나같이 허구의 창조물일 뿐이다’라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문제는 인류 차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할지 몰라 하루라도 빨리 모든 신들이 나타나셔서 신들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을 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라고 밝혀 둔다.

  지난 2천 년 동안 유독 강하게 이 문제에대해서 집착이 강했던 기독교가 나서서라도, 타 종교를 정죄하고 이단이라 심판할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전보를 치던 카톡을 보내던 해서라도 구세주께서 얼른 내려오셔서 성경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역사였음을 확인시켜 주시고 실타래처럼 얽혀서 분쟁을 일삼고 있는 종교적 갈등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고 입김으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아담이 탄생했다. 아담이 쓸쓸해 보여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서 이브를 만들어 그와 함께 지내도록 하셨다. 그들은 낙원에서 아주아주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뱀에게 속아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담과 이브는 결국 낙원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한시도 인간의 곁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지상에서 펼쳐진 인류의 속사정은 역사책을 펼쳐보거나 저녁에 TV를 보거나 그도 아니면 SNS를 통해 검색을 열심히 해보면 저절로 다 알 수가 있다.

  채널을 돌리다가 기독교 방송 채널을 들여다보면........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고 시도 때도 없이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인류는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럴 땐 한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 ‘하나님 땡큐 예요’라고 말이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구원의 역사가 완료형이 라는 뜻이다. 2천 년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다가 심판의 날이 어쩌니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직 구원으로 가는 과정이나 절차가 남았다고 교회가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날아 올라가시기는 했는데......... 구름에 가려서 아직 정확하게 하늘나라까지 부활 승천해서 안전하게 도착하셨는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활이 아직 진행형이니까 구원의 역사도 아직은 미완성’이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황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하게 확인 되었나요?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로켓이 궤도를 이탈해서 예수님이 시방 우주의 미아로 방황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 그 천국의 열쇠를 폼으로만 들고 계시지 말고 얼른 문을 여세요. 구원 티켓 확인 방법은 아시지요? (할렐루야) (아멘)입니다. 까먹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2천 년을 미루시나요?’

  그럼 이 대목에서 한 번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구원을 받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인지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또 그리 심각하게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거기에도 또 비지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이 갈리고 고급 맨션과 서민 아파트로 갈리고 환경 부담금이 세제 조항에 생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천 년이나 지났으니 하늘나라도 변하지 않았을까? 아니라고? 하늘나라는 변할 것이 없다고?

  그렇다면 말이다.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 이유가....... 낙원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구원은 당연히 낙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먹기 이전의 시간으로 말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이지? 생로병사 희로애락에 대한 모든 지식과 경험들을 완벽하게 포맷을 해서 백치 상태의 어린이로 만들어서 다시 올 누드로 대자연속으로 보내서 사자와 양과 이리와 독사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얼씨구? 구원되어서 낙원으로 돌아간다는 게....... 이게 좋아지는 거여? 아니면 나빠지는 거여? 인터넷 게임도 없고 프리미어 리그도 없으면....... 막창 구이에 소맥도 없다면..... 그게 시방 낙원이여? 지옥이여?

  ‘에덴동산(Garden of Eden, Paradise)이 왜 좋은지 성경 어디쯤엔가는 좀 구체적으로 적혀있으려나?’

 

 

  신약성경은 나름 저자가 드러나 있으나 구약성경은 누가 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에둘러서 교회는 성경이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기록하셨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을 연결시킨 만큼 어떠한 의심이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구약의 모세 오경의 저자가 모세라고 주장하지만, 왜 그것이 택도 없는 말씀인지는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을 입에서 입으로..... 길고 긴 겨울밤에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도깨비 귀신 이야기 해주듯이 구전으로 전해내려 왔다가 문명이 생겨나고 문자와 학문이 체계화되기 시작하면서 구전으로 전해내려 오던 이야기들을 수집해서 가다듬어 책으로 역어내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라면 정설일 것이다. 아무리 기독교가 특출 나고 위대하다고 해도 인류문명사 발전의 궤적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성경에 고귀함과 절대적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지켜내기 위해서 교회의 사활을 걸고 덤벼드는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합류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인류 최초의 문명을 건설한 사람들은 수메르인들 이었다. 이들이 씨앗을 뿌리고 재배해서 수확을 하는 농경사회를 처음 시작하였으며 문자를 만들어 점토판에 기록을 남겼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니푸르(Nippur)는 바그다드 인근의 도시로 당시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다고 한다. 19세기 말옆 미국의 고고학 조사단이 이곳에서 대대적 발굴을 시작했는데 고대 수메르인들의 종교와 신화가 기록된 점토판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2400 년경에 기록된 점토판에 당시의 수메르인들이 하나의 이상향으로 여기던, 빛과 순결의 땅이자 질병도 죽음도 없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다. 그 신비로운 땅에는 물의 신 엔키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먹어서는 안 되는 식물을 따먹어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땅의 여신이 나타나 자신의 갈비뼈를 꺼내서 엔키를 치료해 죽음에서 되살아나게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인류의 조상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질병도 죽음도 없는 빛과 순결의 땅을 수메르인들은 에덴(Eden)이라 부르며 이상향으로 여기고 신성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딘가 모르게 닮지 않았는가?

  세상엔 에덴동산이 하나가 아니었단 말인가?

  구약성경의 에덴동산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수메르인들의 에덴동산 또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구약 성경에는 유대민족만의 이야기들도 많이 있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부족들이 신화와 전설과 토테미즘적 신앙에 기반을 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흡수되어.... 후대의 유대인 누군가가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로 꾸며서 수집된 이야기들을 시대 순으로 배열해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로 유대인의 역사를 창조했다’라고 말이다.

  이를 문명사(文明史)적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성경)의 절대적 신성만을 앞세워서 (그리스 신화)를 무조건 비판하고 폄하할 이유가 그렇게 정당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뜻이 된다.

 

 

 

 

 

 

야곱의 아들들은 막내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기고 늑대에게 잡혀 먹혔다고 거짓으로 고했다.(요셉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일까? 전설일까?)

 

 

 

 

  기원전 2400 년경에 이르면 고대 이집트 역사에 비련의 오리시스 신화가 등장한다.

  파라오가 죽으면 지하세계로 내려가 그곳의 왕인 오리시스가 된다는 새로운 이집트 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인간들이 대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신화와 신앙 속에 담아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결코 그것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허구적인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부족이나 국가나 종교는 그런 신화의 바탕위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결코 없다.

  오리시스의 죽음에서 파생된 자연의 섭리란 ‘한 톨의 밀알이 뿌려져 가을날의 풍요로운 수확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자연의 섭리이자 위대한 교훈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죽은 한 알의 씨앗(오시리스)이 대지(이시스)에 뿌려져 사랑이 이루어지고 열매가 맺혀서 새로운 곡식(호루스)를 낳게 한다는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화이다.

  오시리스 신화의 세세한 내용까지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BC 2400 경에 이 신화가 창제되어 오늘날에 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신약성경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성경이 가르치는 실로 위대한 교훈의 하나인 것이다. 성경에는 누가 이 말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교훈으로 삼으라고 전해 준 인물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누구나 이 교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기에 이집트를 방문한 유대인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시기를 이집트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힉소스(Hyksos) 지배시기로 보고 있으며, 대략적으로 BC 1900년 즈음으로 추정한다. 힉소스 왕조는 이후 약 15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따르자면 바로 이 시기에 야곱(Jacob)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Joseph)을 형들이 질투 시기하여 아버지 몰래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렸고, 이집트까지 노예로 끌려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Potipha)의 종이 되었는데, 보디발의 아내 젤리카가 훈남인 요셉에게 반해서 거듭 유혹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오히려 요셉이 젤리카를 욕보이려 했다고 하여 분노한 보디발이 요셉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감옥에서 요셉은 파라오 측근들의 꿈을 해몽해 준다. 그런데 그 꿈풀이가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았다고 한다. 이 소문이 퍼져 끝내는 파라오의 꿈까지 해몽을 해 주게 되고, 석방되어 관리로 등용되어 파라오의 주변에 머물면서 매사에 너무나 뛰어난 자질을 보여 승승장구해서 결국엔 총리(Vizier)에 오르게 되었다고 구약성경과 코란에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흉년이 거듭되어 멀고 먼 이집트까지 식량을 교환하러 찾아온 형제들을 만나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었고,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총리엣 은퇴하고 나서는 고향인 애굽으로 낙향하여 17년을 살다가 그의 나이 147세에 죽어서 장사되었다고(창세기 50:1-3) 기록되었다.

  퇴직을 하고 애굽으로 낙향하던 요셉은 ‘밀알의 교훈’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에 틈틈이 그의 가족과 보족들에게 ‘밀알의 교훈’을 하나의 가르침으로 전달했다. 그러지 시간이 흘러 후대의 유대인들은 그 ‘밀알의 교훈’이 애초부터 유대민족에게서 생겨나고 전승되어 온 교훈으로만 여기게 되지 않았을까 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요셉이 기가 막히게 꿈 해몽을 잘 했다는 이야기나, 참으로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 이야기 자체가 그리스 신화의 한 페이지와 다를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역사? 진실?

  그런데 말이다. 요셉의 이야기가 구약성경과 코란에는 분명하게 적혀있지만, 정작 이해 당사국인 이집트 역사서...... 특히 힉소스 왕조의 기록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기독교인 입장에서야 분명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이라고 하겠지만.......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일 뿐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세상의 지배세력이 되면 역사이자 진실일 것이며, 다른 종교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꾸며낸 허구적 헛소문으로 전락하는 것이 당연해 지는 것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의 역사가 허구의 전설로 치부되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