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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우피치 미술관(Uffizi)과 보티첼리

by 피안재 2022. 7. 31.

 

 

 

 

 

 

 

 

 

 

 

 

 

 

 

 

 

 

 

 

 

 

‘인생의 최고 정점에서 어느 날 문득 길을 잃고 뒤를 돌아보니,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단테(Dur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신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역사는 이것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자, 비로소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 인간에 의해 창조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계기이자 빛의 시대로 나서는 첫걸음 이라고 적고 있다.

  교회의 오류와 파행으로 인해 자행된 1천년의 암흑기에 비로소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류 역사의 주체가 신의 섭리에서 인간 스스로의 깨달음과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함에서 시작된다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부활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순간부터 모든 인류는 구원을 받았어야만 했다. 성경에 기록된 바처럼 그것은 영원한 약속이었으며 이미 모두 완성된 축복이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약속도 아니었으며, 약속된 구원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이 애초부터 거짓이었거나, 아니면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이 처음부터 가짜였다는 뜻이 된다. 왜냐면 1천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도록 인류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하나의 생명으로 잉태되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코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형과 부활의 사건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약속의 이행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모두 구원을 받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여야만 했다.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양과 사자가 함께 뛰어노는 낙원에서 생활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전의 소중한 존재로 되돌려 졌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의 놀라운 은총을 현실로 만드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사망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약속이 모두 완성되었지만......... 중세 시대의 현실은 여전히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 있는 두 개의 나라와 두 부류의 인간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하나는 신국(神國)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의 처지인 것은 분명했다.

  다른 하나는 인국(人國)으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기대할 만한 자격조차도 아예 가지지 못한 차마 인간이라는 분류에도 넣기가 꺼려지는 교회를 믿지 않는 존재들이다. 굳이 이 부분에서 한 가지를 집고 넘어가자면...... 인국의 사람들이라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구세주의 약속은 믿지만 교회를 믿지 않거나 교회의 가르침과 지시를 따르지 않으며, 모든 신앙행위의 대상에서 하느님과 교회를 꼭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 또한  여기에 속한다는 뜻이다.  당시에도 교회는 그들을 이단이라 비판하면서 무자비한 탄압과 처형을 망설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이단으로 탄압받게된 이유의 전부였다.

  거기에 더하여 기독교의 교리와 체계 성립에 크게 공헌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하느님에 속하는 구원을 약속받은 존재는 결코 아니라고 사전에 못을 확실하게 박아 놓았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도 꾸준하게 교회의 가르침과 지시에 잘 따르고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에게 속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하여 그런 가치 기준과 판단은 오로지 교회가 맡아서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영구불변의 성스러운 신(神)의 가르침과 약속을 베드로가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며, 베드로가 세운 교회가 바로 로마의 교회(바티칸)이었으므로 당연히 로마에 있는 교회가 세상의 모든 교회들 중심에 우뚝 서서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로마의 주교들이 주장하였다. 결국 로마의 교회가 모든 교회들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그 로마교회의 수장이 바로 교황(敎皇)인 것이다.

  역사의 종말은 최후의 심판과 함께 동시에 이루어지며, 이때에 비로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나라와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나라에 대한 심판의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교회에 잘 다니며 교회의 가르침과 지시를 끝까지 잘 이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만은 다시 완전한 육체의 옷을 입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젓과 꿀이 흐르는 낙원에서 사자와 양들과 함께 뒹굴며 영원히 살 것이라는 진정한 구원이 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저주받은 사람들은 어두운 악의 구렁텅이에서 사탄들과 함께 영원히 고통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교회의 주장과 요구가 중세시대 1천년을 암담하고 처참함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신의 심판’ 이라고 회자되는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교회는 또 하나의 기발한 묘수를 찾아내게 된다.(이를 중세 최대의 발명품이자 특허라고 해야할까?) 이슬람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연옥(煉獄)의 개념을 다시 찾아내고 이를 다시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이자 지시이자 새로운 교리로 확대 재생산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후로 (연옥)은 교회의 아주 짭짤한 수입원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교회로 쏟아져 들어간 눈 먼 돈에 의해서 중세시대의 문화와 예술과 건축에 지대하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회의 타락과 부조리가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인류 문명사 뒤에 짙게 깔려있고 지대한 공헌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세계관에서 신은 완전한 지혜이며 사랑이었다. 그런 신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본 따서 만드셨음은 처음부터 인간이란 존재가 신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였다는 의미가 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기는 했지만, 삼위일체인 구세주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의 사건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행하셨음은, 모든 인간이 이제 다시 궁극적 고향인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영원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란 존재는 어떤 이유에서건 이미 넘치는 신의 은총으로 낙원으로의 회귀를 약속받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교회(로마 카톨릭)의 등장과 함께 이 영원한 약속은 원천 무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원천무효라는 표현이 좀 지나치다면....... 로마 교회는 그 낙원(구원)으로 가는 과정에 사전에 꼭 거쳐야 하는 절차가 존재하며, 그것은 지상에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참된 신앙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많은 선행을 베풀어야만 한다는 사전조항을 달아 놓았다. 그 신앙과 선생의 달성은 오로지 교회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엄숙하고도 성스럽게 시행해야만 한다는 원칙조항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교회는 스스로 ‘무오류성(無誤謬性)’ 이라는 특제 갑옷을 만들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몸에 입혀버렸던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허락받아 대신해 시행하는 신성한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시하고 행하는 사항은 모두 절대적 신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다.’ 라는 해괴망측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면책특권을 스스로 만들어 챙겼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약속하신 구원의 약속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들여보낼지 내쫒을지는 오로지 교회에게 허락된 신성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무조건 교회의 지시에 따르라! 충성하라!’

  중세시대 1천년의 시간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로마 카톨릭)의 시간이었다. 역사는 이 시간을 (중세 암흑기)라고 적고 있다.

  무오류의 면책특권을 쥐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어마어마한 부를 움켜쥔 영원할 것만 같았던 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층은 부패와 권력다툼이 심해지면서 점차 무오류의 면책특권이 허구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정도가 어찌나 심하였던지....... 단테가 대놓고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향해 ‘검은 짐승’ 이라고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자 프랑스의 필립 4세 왕이 파렴치한 교황을 향해 정면으로 대들었다.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싸움으로 확대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는 곧 ‘카놋사의 굴욕’ 이나 ‘아비뇽 유수’와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진다.

  에드워드 기본이 적은 역사서에는 대립교황 요한 13세에 대하여 ‘가장 지독한 물의에 대한 비난은 교회 사람들의 사전 검열과 강제적 탄압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였지만, 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자청한 자는 해적질의 배후였으며 살인과 강간은 물론 수간과 근친상간을 수시로 저질렀던 짐승만도 못한 자였다. 그는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해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그는 또 다른 짐승이었던 것이다.

  부패한 교회의 실상이 점차 드러나고 온갖 만행에 환멸을 모든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이 괴물과도 같은 사악하고도 거대한 집단이 과연 인류를 낙원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을 알고는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은 과연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진정한 문지기인가?’

 

 

 

 

  이탈리아의 중부 토스카나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낮은 구릉지대를 가르며 동서로 아르노 강이 흐르고, 그 강변의 양쪽으로 붉은 지붕들로 빼곡한 아담하면서도 무척이나 예쁜 도시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곳이 바로 꽃의 도시라 불리는 피렌체인 것이다.

  인근의 어디에서 이 아름다운 도시를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본다 해도 가장 선명하게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며 확 눈에 띄는 것은 크고 작은 두 개의 돔 지붕이다. 큰 돔은 피렌체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피렌체 두오모다. 다른 본래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 그러니까 ‘꽃의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대성당’인 것이다. 작은 돔은 ‘산 로렌초 성당(Chiesa di San Lorenzo)’ 이다. 피렌체라는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은 여기 두 개의 돔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작은 돔을 가진 산 로렌초 성당은 피렌체라는 도시의 탄생과 함께 지나온 모든 역사를 함께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피렌체라는 도시는 이 성당을 중심으로 이곳에서부터 뻗어나가 지금의 도시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로렌초 성당이야말로 피렌체라는 도시 발생의 근원지였던 셈이다.

 

 

 

 

 

 

 

  피렌체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프라토에는 10 세기경에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커다란 교회가 있는데 성 스테판에게 헌정되어 건설된 ‘프라토 대성당’, 혹은 ‘성 스테판 대성당(Cattedrale di San Stefano)’ 이라고 불렀다.

  아주 먼 옛날 옛적에 푸른 초원으로 가득한 이곳 보르고 알 코니오 마을에 성모 마리아께서 출현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놀라운 역사를 기리기 위하여 994년에 교회가 처음 지어졌으며 점차 교회의 확장과 함께 작은 마을도 도시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교세의 급성장은 마침내 15세기에 이르러 토스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반으로 하는 고딕성당으로 탈바꿈하는 새로운 교회건축 사업이 펼쳐졌던 것이다. 프라토 대성당은 그렇게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아울러 이 공사에는 점차 무르익어 가던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사조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참여하는 신기원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 역사적인 현장에 작고 왜소해 보이는 한 청년이 모습을 나타냈다. 화가로서의 길을 처음 걷고자 했던, 그가 처음으로 스승을 따라 현장 작업에 직접 참여해 4년 이상을 매진해야만 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런 장소였다. 작업을 마치고 이곳을 떠난 지 벌써 수년이 흘렀지만 그는 한 순간도 그는 처음 붓을 잡은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스승의 스케치를 따라 초벌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작업을 망치던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새삼스레 오늘 그가 이 먼 곳까지 다시 찾아 온 것은 단지 그가 참여했던 그림을 다시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대성당의 성화 속에 스며있는 스승과 스승이 사랑했던 여인에 관한 사랑 이야기를 회상해 보고자 함이었다. 스승이 가졌던 그 열정과 불같은 사랑이 한없이 부러울 뿐이었다. 스승은 자신이 열망하는 사랑에 관하여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끝내는 불가능한 사랑을 쟁취하였다. 지금 자신에게 그런 용기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그는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스승을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 가슴속에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는 열정에 대해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스승께서 세상을 떠나 신지가 벌써 오년이나 지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곳 프라토 대성당까지 올 생각이 없었다. 그가 지금 간절하게 보고 싶은 그림은 스승께서 생전에 절대로 작품을 외부에 내보이거나 판매 할 생각이 없이 오로지 자신의 화실 한쪽 구석에 감추어 놓듯이 걸어놓고는 혼자만 아끼시던 유작과도 같은 작품 바로 그것이었다. 스승은 작품에 ‘마돈나와 아이(Madonna with Child)’라는 제목을 붙였다.<필리포 리피(Filippo Lippi)가 그린 마돈나와 아이는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청년에게도 가장 커다랗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스승의 작품이었다.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 (마돈나와 아이)를 찾았지만 결국 청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전해 듣기로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메디치 가문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메디치가문과 흔치않을 인연을 맺고 많은 후원을 받고있는 청년으로서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 주권자인 로렌초 메디치를 직접 찾아가 스승의 그림을 보았으면 한다고 요청해볼 생각까지 해보기는 하였으나 결국엔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결국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방편으로 프라토 대성당을  오랫만에 다시 찾았던 것이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로 나이는 금년 스물아홉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지금 당장 이 청년의 이름을 꼭 기억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곧 이 청년의 이름은 바뀌게 될 것이고, 그 바뀔 새로운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스물아홉 살에 들어서야 겨우 불같이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청년 알레산드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스승이 이미 가졌었던 뜨거운 사랑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 있다. 핏줄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똑같이 불가능한 사랑의 열병이 불어 닥치기 때문이다.

  알레산드로의 스승 필리포 리피가 저질렀던 불같은 사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필리포 리피( Filippo Lippi) 作. '마돈나와 아이(Madonna with Child)'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는 피렌체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톰마소의 아들로 태어나 두 살에 어머니를 여위고 이모에게 맡겨졌으나 너무나 가난했던 이유로 양육이 불가능해 지자 결국 인근에 있던 카멜라이트 수도원에 맡겨졌다. 어떻게 생각하자면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커다란 도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글을 배웠고, 수도원을 찾는 많은 상류층과 지식인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살에 세례를 받고 카톨릭 신자가 된 필리포는 그의 나이 19살(1425년)에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운명처럼 한 사람과 짧은 만남을 갖게 된다.

  필리포가 속한 카멜라이트 수도회는 피렌체 르노 지역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 카민(Santa Maria del Carmine)’ 교회를 대대적으로 중건하기로 결정했다. 교회의 통합된 건물 안에는 별도의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있는데, 중세 시대에는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교회에 거금을 희사하고 대신에 그 작은 예배당을 자신들의 공간이나 가족묘지 등으로 활용해 왔다. 그런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짧게 예를 들어 본다면......... 바티칸(교황청)은 로마에 속해있지만 교황령이라는 별도의 특별한 지역으로 예외를 인정받았다. 교황과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바티칸(교황청) 안에서 살았지만, 교황청에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연히 로마의 영토 위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그런데 로마의 법령에는 분명하게 장례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는데......... 황제와 그의 직계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로마(Rome city) 안에 묘지를 쓸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이는 로마제국 역사 내내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귀족이나 부자나 고위 성직자라 할지라도 죽어서 묘지만은 로마의 역역 밖에 멀리 묻혀야만 했다. 죽어서일지언정 교회와 자신의 영지(재산)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천국에 가기가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다. 로마 황제의 묘지에 관한 법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교회에 묻히는 것이었다. 교회는 엄연히 교황령에 속한 별도의 영역이었으며, 황제의 권위로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시성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역대 교황들만이 바티칸에 무덤을 써 오지 않았던가. 귀족과 부자들이 교회에 무덤을 쓸 수 있도록 교황청에 끊임없이 요청을 하자 마침내 교회가 이에 화답했다. 거기에 합당한 방법을 찾아보도록........... 결론은 돈(momey)이었던 것이다. 부자들이 앞 다투어 교회의 신축이나 증축에 참여하면서 막대한 기금을 희사하기 시작했다. 추기경들의 예를 따라서 대형 교회의 채플들을 불하 받아서 최고의 예술가와 건축가를 데려다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속으로는 자신들 가문의 번영과 영원을........ 그것은 분명 거래였고 오고 간 것은 결국 금전이었다. 혹여 돈이 없다면 유명해 지는 것뿐이었다. 라파엘로가 판테온에, 단테와 갈릴레오와 부르넬리스키가 산타 크로체 성당에, 도나텔로가 메디치 채플에 고이 잠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명망과 이름이 채플의 주인과 교회에 그만큼 어떤 면으로든 공헌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이미 산타 마리아 델 카민 성당에는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코르시니 가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코르시니 예배당(Corsini Chapel)이 대단히 유명했다. 로마에서 건축가 피에르 프란체스코 실바니를 데려다 제단을 설계했고, 포그기니와 카를로 마르첼리니가 조각한 대리석 조각품 아래 안드레아 코르시니가 잠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피렌체의 가장 부유한 상인 중 하나로 입지 상승한 펠리스 브랑카치(Felice Brancacci)가 마련한 개인 예배당이었으니 이제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어떤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마주하고 있는 코르시니 예배당을 훨씬 능가하는 공간을 새롭게 창조해서 피렌체 사람들은 물론 로마를 지나 하늘나라에까지 ’브랑카지 예배당(Brancacci Chapel)’의 위용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 계신 그 분께서 교회를 향한 자신들의 사랑과 헌신을 어여삐 여기셔서 가문의 사업이 날로 번성하고, 가문의 이름과 명예가 영원하며, 종국엔 자신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이라고는 돈 밖에 없는 브랑카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코르시니 예배당을 훨씬 능가하는 브랑카치 예배당을 만들어 줄 최고의 예술가가 필요한 것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브랑카치는 피렌체는 물론 로마나 온 이탈리아를 통 털어 어디 누구에게서나 크게 존경과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마솔리노(Masolino da Panicale)’를 선택했다. 아울러 거기에는 마솔리노가 책임자로 오게 된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당장 피렌체 화단에 떠오르는 가장 뜨거운 젊은 천재 ‘마사치오(Masaccio)’까지 달려와 힘을 합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까지 깔려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세상은 지금 온통 이 젊은 천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완의 천재 마사치오를 말이다.

  서양 회화의 역사에서는 (유화의 탄생)을 1430년대 네덜란드의 화가 ‘얀 반 아이크 형제(Jan van Eyck)’로 기록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보다 앞서서 1420년에 이미 마솔리노가 유화 작업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솔리노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브랑카치 예배당의 벽면을 구약성경의 내용들로 가득 채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브랑카치의 열망대로 제자인 마사치오를 불러들였다. 마솔리노는 베드로가 젊음발이를 치유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베드로의 설교와 아담과 이브를 차례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사초도 스승에 뒤질세라 성전세, 병자를 그림자로부터 치유하는 베드로,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계속해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실로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불세출의 두 화가가 동시에 함께 같은 장소에서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 회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브랑카치 채플을 직접 방문해서 보지 않고는 도저히 제대로 르네상스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다. 마솔리노의 작품들도 훌륭하지만.......... 르네상스의 시작을 열었던 천재 마사치오의 위대한 진면목은 산타 마리아 델 카민 교회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꼭 찾아가야만 진실함과 절실함으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브랑카치 예배당은 르네상스의 보물이자 하나의 기적이다.

  왜냐하면...... 마사치오는 스승과 함께 브랑카치 채플의 벽화를 완성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 시작이 그가 23살 이었을 때였으며, 3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브랑카치 채플은 공사가 중단되었고, 결국 마솔리노와 마사치오의 그림은 부분적으로 완성이 되었지만 애초의 계획은  결국 미완성 남게되었다.  당시  마사치오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으며......... 다음 해.......... 27세의 나이로 그 비운의 천재는 요절하고 말았다.

  시간이 좀 더 흘러서...... 브랑카치 채플의 최종적 완성은 필리포 리피(Pilippo Lippi)에 의해서 마무리 지어지게 된다.

  비운의 천재 마사치오는 27세 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뿌려놓은 새로운 씨앗이 바로 이곳 브랑카치 채플에서 싹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젠 그 마사치오가 뿌린 씨앗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브랑카치 예배당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좀 뒷편에 ‘마사치오’를 다루면서 다시 거론해 보기로 해야겠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티첼리를 만나러 가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다시 화제를 돌려서....... 다시 필리포 리피 이야기로 돌아가 보기로 해야만 하겠다.

 

 

 

  15세기 초,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사조의 아름답고 영롱한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피렌체에는 두 명의 사제화가가 등장했다. 그러니까 수도사를 거쳐서 정식으로 사제(司祭) 서품을 받은 종교인 중에 두 명의 유명한 르네상스 화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프라 안젤리코(Fra Giovanni Angelico,1395~1455)와 프라 필립포 리피(Fra Filippo Lippi, 1406~1469)가 바로 사제신분을 가졌음에도 매우 뛰어난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 안젤리코 신부와 필립포 신부의 가치관이나 성격이나 생활은 전혀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나 미술사에 기록된 평가에 준한다면 두 사람에 대한 평은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해야겠다. 하나가 백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흑이었으며, 하나가 천사였다면 아마도 다른 하나는 악마나 사탄이라고 표현해야만 그나마 다소 쉽게 이해가 될 듯싶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한 사제에 대해서는 늘 존경을 표하고 기꺼이 그와 함께 자리하기를 청했으며 사후에도 성인 못지않은 추앙을 받았다.

  쉽게 짐작이 가듯이 다른 사제는 질시와 멸시의 대상이었으며, 법의 심판대에 섰거나 종교재판을 거쳐 화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처지였지만...... 남다른 그의 그림 솜씨가 늘 그의 목숨을 연장시켜 주었다. 어쩌면 그는 희대의 광인이었거나 세속적인 생활불가능 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프라 안젤리코(Fra Giovanni Angelico)에 대한 15세기 피렌체에 살았던 사람들의 평가나 미술사에 기록된 평가나 카톨릭 교회사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자면 그는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고귀한 존재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도미니카 수도사의 본분을 지켜 독실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언제나 수도사로서 지켜야 하는 선을 기억하였으며 단 한 번도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늘 앞장섰으며 그는 언제나 올바른 편에 서있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늘 간절히 기도한 뒤에야 붓을 잡았으며, 그는 그의 붓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성모 마리아의 자비를 그려내려 애썼다.

  교황 니콜라스 4세는 안젤리코에게 추기경을 하사하고자 하였으나,  안젤리코가 끝내  추기경 서품을 사양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인품과 평가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프라 안젤리코에 대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겠으나........ 이제 겨우 다시 발걸음을 시작한 (르네상스 산책)에서, 당장 다루고자 하는 것은 (보티첼리와 우피치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안젤리코와 필립보 리피에 대해서도 가능하다면 짧게 집는 것으로 일단 넘어가고....... 다음 기회를 엿보아야만 할 것 같다.

  전제를 이미 꺼내놓고 프라 안젤리코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좋은 평가를 이미 내렸다면........ 그와 정반대라고 전제한 필립포 리피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프라 안젤리코 作. 산 마르코 제단화(성모 마리아와 성도들). 피렌체 산 마르코 박물관 소장.

 

 

 

 

 

 

 

  산 마르코 건물은 피렌체 두오모에서 겨우 두 블록 떨어진 인근에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1438년 도미니크 수도회는 이 낡은 건물을 사들여 수녀원으로 개축을 시작했다. 하여 이내 재정난에 봉착했고 여러 피렌체의 내노라 하는 부자들이 재정적 지원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종국엔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는 실력자 코지모 메디치에게 산 마르코 수녀원의 개축 공사를 맡기게 되었다. 냉정한 사업가 코지모 메디치는 산 마르코 수녀원의 완공을 메디치 가문의 사업 확장과 정치적 발판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로 삼겠다는 당찬 야심으로 재건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급격한 개혁과 정책 시행으로 피렌체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코지모에게 반감을 가지고 저항하는 세력들에게 또 한 번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피렌체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코지모는 오래전부터 많은 자금을 들여가며 꾸준히 후원해 온 예술가들을 산 마르코 수녀원의 재건에 끌어들였다. 훌륭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산 마르코 수녀원이 하려하게 재건된 모습으로 시민들 앞에 공개되었을 때, 그들의 감동과 환호성은 곧 메디치 가문을 칭송하는 것으로 모두 바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차원에서 프라 안젤리코 또한 막역한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으로 제단화를 그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사제이자 뛰어난 화가였던 안젤리코가 참여하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산 마르코 제단화)는 안젤리코가 그린 수많은 그림 중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꼽혀도 전혀 손색이 없을 훌륭한 작품이다.

  그림에는 천사와 성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보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와 어린 아이의 초상화로 이루어져 있다. 안젤리코는 이 작품에 빛과 자연주의 효과를 포함해 다양한 색상과 패턴을 결합하는 실험정신을 발휘한다. 이는 모두가 그림속에 신성함과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였다. 재건된 산 마르코 수녀원이 너무나 유명세를 타게 되고, 제단화에 대한 관심이 지나칠 정도로 증폭되자 여러 비판의 뒤따라 이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프라 안젤리코가 위대한 르네상스 화가였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 기회도 있겠지만....... 안젤리코 이름이 등장한 마당에 그냥 지나칠 수많은 없어서 급한 대로 (산 마르코 제단화) 하나만 슬쩍 감상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해야만 하겠다.

 

 

 

 

 

 

 

 

 

 

 

 

 

 

  위의 사진들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그 뒤쪽의 이젤 위에 거의 완성되어가는 그림이 보인다. 남자는 화가인 듯 하고....... 여자는 분명 수녀의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뒤에 보이는 그림은 이번 이야기의 시작에서 거론한 바가 있는 필리포 리피가 그린 <마돈나와 아이(Madonna with Child)>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나같이 성스럽지 못한 불경스런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근대 현대의 수많은 미술가들이 중세 시대에 활약한 한 화가의 인생 중에서 가장 격정적인 뜨거운 한 장면을 소재로 찾아 꺼내서 저마다 자신만의 솜씨로 그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한 사건의 여러 가지 버전이라 보면 되겠다. 더하여...... 분명한 것은 그림 속에 화가로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바로 (필립포 리피)라는 사실이다. 그럼 수녀가 왜????????????

  백주대낮에 일반인도 아니고......... 수도사와 수녀가 지금........ 뭐하자는 거여????????   거기에다........ 성(聖)과 속(俗)이 엄격히 구분되던 중세시대가 아닌가 말이여?   중세라고...... 중세에.......... 흐메......... 뭔 일이래??????

 

  도대체 ‘그림 그리는 사제(司祭)’로 불렸던 프라 필립포 리피(Fra Filippo Lippi)는 과연 어떤 화가였으며 어떤 인간이었을까?

  그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어머니를 여위고 카멜라이트 수도원에서 성장했으며, 수도사 생활을 거쳐서 마침내 사제(종교인)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이미 다루었었다.

 

  피렌체 두오모에서 남쪽으로 너른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베키오 궁전이 있는 씨뇨리아 광장이 나온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가게 되면 미술관이 끝나는 지점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아르노 강을 만날 수 있다. 강을 따라 우측으로 꺾어져 접어드는가 싶으면 눈앞에 노란색의 아름다운 다리가 나타나는데, 피렌체의 상징이자 가장 먼저 아르노 강에 건설된 다리이며 베키오 궁전과 피티 궁전을 이어주는 (바사리 회랑)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가 바로 그것이다.

  베키오 다리 바로 아래쪽에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을 통 털어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트리니타 다리(Ponte Santa Trinita)가 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슬픈 사랑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브르넬리스키가 건축했고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이 소장되고 있는 유명한 ‘산토 스피리토 성당(Basilica di Santo Spirito)’이 나타난다.

  트리티니 다리에서 다시 바로 아래쪽을 바라보면 나타나는 것이 ‘카라야 다리(Ponte alla Carraia)’가 나타나는데 베키오 다리에 이어서 피렌체에 두 번째로 건설된 유래가 깊은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 조금만 가면 역시나 르네상스 미술의 보고라 칭송받는 ‘산타 마리아 델 카마인(Santa Maria del Carmine)’교회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브랑카치 채플(Cappella Brancacci)’은 그 카마인 교회에 속해있는 한 개의 작은 예배당으로, 부자가 된 브랑카치 가문의 요청에 의해서 지금 마솔리노와 그의 젊은 제자 마사치오가 벽화작업을 통한 예배당의 재건작업에 한창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을 시기였다. 물론 그 시대의 카라야 다리는 목재로 건설된 초기 형태의 다리였다.

 

  마솔리노(Masolino)와 마사치오(Masaccio)가 한창 브랑카치 예배당의 벽화작업을 서두르고 있던 시점에서 커다란 문제점 한 가지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작업이야 마솔리노와 마사치오가 각자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직접 작업을 하고, 그들 작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함께 데리고 온 직인과 인부들이 있었고, 대부분 생활에 필요한 일들은 브랑카치 가문에서 헌신적으로 수발을 들어준다고 하지만........ 작업하는 현장이 엄연히 교회였던 것이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지켜져야 할 규칙도 있고 정숙한 공간을 유지해야만 하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하여 이들 소위 유명한 예술가라는 양반들은 특성상...... 어떤 영감이 떠오르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작업에 몰두하는가 하면, 몇 날이고 멍하니 앉아서 죽을 때리기도 일쑤였던 것이다. 당연히 교회측에서도 작업 현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하나쯤 파견되어 이들을 지켜보면서 교회관리를 해야만 했는데....... 마냥 따분하다가도 몇 날이고 잠시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한 이런 고약한 일을 맡아서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아울러 이 공사가 언제 끝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활에서 말이다.

  카멜라이트 수도회는 고심 끝에 적임자를 하나 골라냈다. 그가 바로 프라토 성당에서 수도사 생활을 하고 있던 필리포 리피(Filippino Lippi)였다. 이 시기에 왜 불과 나이 19세의 수도사 신분인 필리포가 브랑카치 예배당 중건작업에 선택되어 파견되었느냐 하는 궁금증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어 생략하기로 한다. 이는 지금부터 차차 아주 쉽게 설명이 저절로 되기 때문이다.

  당시 프라토 성당 소속의 필리포 수도사는 이미 그의 이름이 교회의 안과 밖으로 상당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골칫덩어리 다른 말로는 말썽꾸러기였던 것이다. 피렌체 라는 도시의 북쪽 끝을 조금 지나 인근의 위성도시와 같은 프라토에서, 피렌체라는 도시의 강 건너 남쪽에 위치한 카민 교회에 파견을 보낸 것이다. 멀다면 한참 떨어져 멀리 있고, 굳이 서둘러 오가려면 수시 왕래가 충분히 가능한 거리였지만 업무의 특성상 그를 아예 보따리를 싸서 파견키로 한 것이다. 일종의 추방이라 해도 무방하지 싶다.

  그런 이유로 성사된 필리포의 파견 아닌 추방이 전혀 뜻하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래서 사람의 운명은 감히 누구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짐작조차 불가능 하다고 누군가 말했나 보다.

  이제 막 브랑카치 작업장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마사초와 필리포 사이에 어떤 필(feel)이 짠 하고 통해버렸던 것이다.

  마솔리노는 그의 작업에만 전념했을 뿐 주변 환경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고 쉬는 시간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상념과 습작에만 주력했다. 마사치오 또한 그러했지만 한창 젊은 천재는 쉬는 시간과 식사하는 시간을 언제나 한참이나 어린 성직자(수도사)와 함께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천재가 수도사 보다 다섯 살 위였던 이유로 그는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어린 수도사를 보듬어 주었다. 두 사람 모두가 외롭고 힘든 성장기를 경험한 것들이 두 사람 간에 어떤 공통분모로 크게 작용했다. 당시 젊은 천재 마사치오는 천재 건축가 부르넬리스키와 또 다른 조각천재 도나텔로와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더구나 브랑카치 채플 작업장과 피렌체의 가장 번화가인 두오모 인근까지는 카라야 다리만 건너면 곧 당도하는 인근이었던 것이다. 마사치오는 브르넬리스키나 도나텔로를 만나는 기회마다 필리포를 동생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 시간과 기회가 필리포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점차 필리포는 적어도 마사치오 앞에서만은 착하고 온순한 동생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필리포에게 엄청나게 놀라운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가 아무데나 스케치를 시작한 것이다.

  마솔리노와 마사치오가 작업을 하는 내내 필리포는 한참 떨어져서 닥치는 대로 스케치를 여기저기 아무데나 그려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업이 무척이나 바빴던 마솔리노는 그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는데........ 마사치오는 달랐다. 그는 진정어린 눈길로 그런 필리포를 바라보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만 나면 필리포에게 친절하게 그림을 가르쳤다. 이들의 시간을 미술사는 사제지간이 아니라고 평가했지만...... 그것은 우선 시간이 짧았고, 세상이 알게끔 스승의 화풍을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는 기준에서였고, 마사치오는 굳이 스승이라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아끼는 동생 필리포의 미술적 개성에 대해서 관심과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보는 시선인 것이다. 필립포는 독학으로 성공한 화가라고 평가받고 있지만....... 나는 그가 분명하게 27살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마사치오에게 사사받은 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필리포 리피라는 화가의 기초와 화가로서의 자질과 소양은 이 시기, 브랑카치 예배당 재건사업의 기간 동안 마사치오의 가르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짧게 생을 마친 마사치오에게 공식적인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이 공식 기록이다. 하지만 필리포 리피(Fillipo Lippi)는 물론이고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와 안드레아 델 카스테뇨(Andrea del Castagno)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마사치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받았냐는 질문에 결코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이는 더 나아가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게 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위대한 천재가 지금 필리포 리피의 개인교습에 브랑카치 예배당 작업 기간 내내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 마솔리노는 브랑카치 채플 작업을 하던 도중에 헝가리로 장기여행을 떠나게 된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예배당의 모든 작업을 마사치오에게 맡기고 떠난다. 하지만 마솔리노는 다시 브랑카치 예배당에 돌아와 작업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된다. 마사치오가 혼자 남아서 사력을 다해 작업에 매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브랑카치 예배당 중건공사는 중단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브랑카치 가문의 사업 부진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함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이때 중단된 브랑카치 예배당 작업은 아이러니 하게도......... 훗날 마사치오와 마솔리노가 모두 사망한 후에.......... 필리포 리피에 의해서 완성된다.

  스승이 여행을 떠난 후, 혼자 전체 작업공정을 마사치오 혼자서 진행하면서도 필리포에 대한 가르침은 이어졌다. 그리고 더 놀랍기는......... 이때쯤엔 필리포 리피가 자신만의 유화 그림을 정식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며, 점차 교회 내에서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수도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사치오와 함께하는 동안에 그림에만 열중하면서 세상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과거와 같은 온갖 불상사에 연루되지 않았음일까? 1425년에 필리포 리피(당시 나이 20세)는 사제 서품을 받고 정식 신부가 되었다. 마사치오가 나서서 필리포의 사제 서품을 크게 축하해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브랑카치 예배당 공사가 중단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필립포는 엄연히 프라토 교회에 속한 사제로서 본연의 신분으로 돌아가야만 했으며, 마사치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요청으로 르네상스 미술사를 통 털어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대표작을 유작으로 남기기 위하여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마사치오의 나이가 27살이던 그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 로마에서 초대를 받고 떠난 그는 로마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역사는 그가 전염병으로 로마에서 죽었다 라고 기록하였지만....... 아무런 병력도 없었고 로마로 떠날 당시 까지도 활기에 넘치던 젊은이가 어떻게 갑자기 급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전염병이라니.......

  극소수의 학자들은 마사치오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한다. 피렌체를 평정한 불세출의 천재가 로마로 진출하게 되자, 자신들의 밥줄을 빼앗길게 뻔한 상황에서 위기를 느낀 로마의 예술가들이 모의하여 독살했다는 주장이다. 나 역시도 이 주장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이다.

  부르넬리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마사치오의 요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그러했음에 필리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필리포 리피 作 '천사와 성도 사이에 옥좌에 오른 성모 마리아' 산안드레 대학 박물관 소장.

 

필리포 리피 作.&nbsp; '성 제롬의 장례식(Funeral of St. Jerome)' 프라토 대성당 박물관 소장.

 

 

 

 

 

 

  마사치오의 급작스런 죽음은 필리포 리피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제부터 필리포에게는 두 가지의 놀라운 일이 펼쳐지게 된다.

  한 가지는 그가 다시 과거의 어두운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오랜 갈등과 방황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까지 그가 벌였던 온갖 파행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성(sex)에 대한 과도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필리포는 성도착증(?) 환자에 가까웠다 보아야 할 정도였다. 허니 이것이 어디 보통 문제였겠는가? 일반인이라도 성에대한 집착이 과도하면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거늘, 하물며 교회에서 자라나 사제가 되기 위하여 수도사의 길을 걷는 처지이고 보니 그 파장이야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사치오를 만나고 그림에 매진하면서 사람이 변해갔고, 마침내 정식으로 사제(성직자) 신분을 얻은 후에 한참 지나서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니....... 이는 곧 프라토 대성당은 물론 교구 전체의 심각한 골칫덩이로 부상하게 되었다. 파문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교회로부터 파문이나 배교나 이단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70년대 대한민국에서 반공법 위반(빨갱이)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아주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이었다.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어디에서도 사람대접 받으며 살아가기란 이미 틀려버린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필리포에게 숱한 파장에도 불구하고 교회로부터 파문만은 면하게 해준 것이 있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짧은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급성장한 그의 그림솜씨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사건으로 마사치오의 배려와 가르침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짧은 브랑카치 파견근무의 시기에 처음 그림을 접하고 빠져들었던 필리포가 그만........ 당대에 내놓으라하는 화가들에 비해서 전혀 뒤질 바가 없는 어엿한 화가로 급성장하고 만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모두가 우르르 몰려가 필리포의 그림에 감탄하고 빠져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모든 교회마다 필리포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한 정도였다고 한다. 틀림없이 이 또한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왕좌에 앉은 마돈나와 아이(Enthroned Madonna and Child)’<사진 위> 작품이 바로 마사치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그려진 필리포 리피의 초기 작품이다. 교황의 최측근이자 피렌체 대주교였던 조반니 비텔레스키(Giovanni Vitelleschi)가 이 작품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어떻게든 그 그림을 구입하여 대주교의 고향인 코르네토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보내려 한다는 소문이 온 피렌체에 자자하게 퍼져나갔을 정도였으니........ 교회로서도 필리포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리포의 파행은  여전히 그쳐지지 않았다.

  결국 필리포는 휴식을 위한 탈출을 감행한다.

  미술 공부를 더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이유로 프라토 교회를 뛰쳐나와 나폴리로 달아난 것이다. 프라토 교회로서도 못 말리는 척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떠나고 나면 일단 프라토나 피렌체에서 말썽은 안 벌어질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그런 재주로 그림 공부를 더해서 돌아오면 더 훌륭한 작품을 교회에 남겨 줄 테니까 말이다.

이 시기에 필리포 리피에 대한 한 가지 전설이 생겨난다.

나폴리 여행 중에 아프리카 튀니지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지중해 전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는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단에게 그람 필리포가 포로로 붙잡혀 간 것이다. 해적들은 재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건장한 남자와 여자를 잡아다가 비싼 값에 노예로 팔아 큰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필리포도 붙잡혀가 노예로 팔려가기 직전에 우연히 해적두목의 초상화를 그리다 적발되어 노예로 팔려가지 않고 포로 생활을 유지하다가, 어느 귀족이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어부지리로 빠져나왔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는 아무래도 필리포의 지지자들이 그의 솜씨를 과시하려 부풀려진 허구로 보인다. 비슷한 경험이야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마침내 필리포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그가 당시에 그린 작품이 바로 ‘성 제롬의 장례식(Funeral of St. Jerome)’인데........ 당시 프라토의 주지사였던 잉그라미가 프라토 대성당에 헌정하기 위하여 여행에서 돌아온 필리포에게 주문한 패널화로서,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왕좌에 앉은 마돈나와 아이’와 비교할 때 너무도 다른 표현력과 기법의 차이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필리포의 작품이 아닌 가짜로 여겨져 왔었다.

수많은 화가와 평론가와 미술관계자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이 그림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필리포가 그린 모든 그림들이 자료가 되어 이 연구에 동원 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필리포 리피의 유일한 제자였던 보티첼리가 자신의 글에 스승에 대해 남겨놓은 ‘스승의 그림은 늘 형상을 지나칠 정도로 힘찬 선을 이용해 표현하시려 하고 과도한 치장을 즐겨하시는 특징이 있다’라고 적은 글을 기반으로 재구성해서 연구한 결과로.......... 필리포 리피가 그린 진품으로 판명 되었다.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자면..........석류로 화려하게 수놓인 천위에 성 제롬이 잠들어 있다. 성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애도와 절망 가득한 수도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림의 전체적 구성과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표현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자면 우리는 이내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을 금방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패널화에서 풍겨오는 전체적 풍경은 바로 지오토의 항취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이건 지오토가 그리다가 완성시키지 못한 그림을 필리포가 마무리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말이다. 지오토를 떠올리고 나서 이 그림을 바라보게 되면....... 본래 지오토의 그림을 현대에 누군가가 과도한 색감과 과감한 선을 이용해 전혀 다른 분위기로 복원해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내 마음속에는 일어난다.

마사치오의 소개로 한때 필리포는 바르디 예배당에서 지오토의 그림을 스케치하고 모사하면서 연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영향이 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제롬 앞에서 무릎 꿇고 애도하는 사람이 바로 이 그림 작업의 후원자인 잉그라미다. 돈 많은 후원자나 성직자들이 성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전에 한 번 거론한 적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소상하게 다음에 설명하도록 해야겠다.

아무튼 이 그림의 앞쪽 전경에 등장하는 붉은 색조나 등장인물의 배치와 구성을 보고 있노라면, 바로 브랑카치 예배당에서 마솔리노와 마사치오가 작업한 벽화들의 경향이 엿보이면서 그 영향이 필리포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여실히 느껴볼 수 있다고 해야겠다. 다만 이러한 느낌과 해석에는 정말로 적지 않게 보티첼리가 스승 필리포의 미술에 대해 요약 평가한 ‘굵은 선과 과도한 치장’이란 대목이 내 인식의 저변에 깔린 후였다는 것을 나는 결코 부정할 수가 없다.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 초상,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작품이나 전기를 따라 가보면 항상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똑같은 두 개의 낱말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자유분방한 생활’과 ‘기행’ 이다. 낱말의 뜻대로만 보자면 ‘아주 조금 심해서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정도의 치기’ 쯤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필리포의 경우는 절대로 아니다. 필리포 리피는 아주 심각한 성중독자(性中毒)였다. 당연히 이는 그의 자유로운 생활과 기행의 전부가 절제할 수 없는 성욕(性慾)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유곽의 몸을 파는 여자나 부녀자나 아이나 노인을 가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거기에 더하여 그의 신분은 분명 성직자(사제)였음에도 말이다.

  길거리에 끌어내서 돌팔매로 때려 죽였거나 불구덩이에 대던져 화형에 쳐해야 했음에도...... 그의 뛰어난 그림 솜씨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해야 하겠다. 교회의 높은 성직자나 부자들은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한 점이라도 필리포의 그림을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프라토나 피렌체의 남자들은 이 망나니 신부로부터 가문의 여자들을 지켜내려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대주교는 물론 로마의 교황에게까지 탄원서가 올라갔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만큼 필리포 리피를 아끼고 지켜 주려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는 바로 피렌체 최고의 부자이자 권력자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였다. 그는 필리포 리피의 재주를 너무나도 아꼈다. 하여 그의 리카르도 궁전 안에 필리포의 작업실을 만들어주고는 그곳에다 아예 가두어 버렸다. 감시와 감금 속에서 오로지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필리포는 커튼을 엮어서 밧줄을 만들고 작업실에서 탈출했다. 그림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말이다. 코지모는 사람들을 풀어서 필리포를 수배했다.

  메디치 가문을 은행가의 집안으로 이끈 사람은 조반니 메디치였지만, 그의 아들 코시모 대에 이르러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넘어서 유럽 전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은행가 집안으로 급부상 하게 되었다. 코시모는 피렌체의 경제는 물론 정치 체제까지를 모두 그의 손안에 움켜쥐었고, 이를 기반으로 다양하게 인문학자, 철학자, 연설자,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에게 개인적 재산을 이용해 예술적 후원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예술에 대한 후원과 피렌체 시민들의 안정과 행복을 위한 자신의 노력과 헌신은 이곳에서 나서 자라고 성장하여 부를 이룬 자신의 의무이자 인본주의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했다.

  시에나의 대주교에서 교황 비오 2세가 되는 실비오 피콜로미니 조차도 ‘피렌체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는 모두 리카르디 궁전(코시모의 집)에서 해결된다. 그는 비록 왕좌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왕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코시모는 떠오르는 젊은 건축가인 미셀로지(Michelozzo Michelozzi)로 하여금 장엄하면서도 절제미가 넘치는 가문을 위한 거대한 궁전(Palazzo Medici)를 만들게 하였으며, 화려하게 르네상스를 꽃피우기 시작한 피렌체의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궁전을 치장하도록 하였다.

  하여 언제든 그의 궁전을 마음대로 출입하도록 허락한 예술가와 조각가와 건축가들 중에 화가가 두 명 있었으니 바로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와 필리포 리피( Fra Filippo Lippi)가 바로 그들이었다. 알젤리코가 필리포 보다 열한 살이나 위였으며 칭송이 항상 자자한 청빈한 사제(성직자)의 표상이었으니, 메디치 궁전에서 안젤리코를 마주칠 때마다 필리포가 가졌을 고충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떻게 자격지심이 없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

  그런가 하면 코시모 메디치는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를 무척이나 아끼고 늘 가까이 두었다. 하여 메디치 궁전의 마당에 정원과 분수대를 만들고 이를 치장하기 위하여 도나텔로의 조각상 둘을 주문 제작하여 세웠을 정도였다. 지금은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 앞마당과 박물관에 들어있는 도나텔로의 대표작 (다윗)과 (홀로페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 청동 조각상이다. 이 작품들이 본래는 메디치 궁전의 분수대에 설치된 것이었는데, 정치 분쟁으로 메디치 가문이 망명을 떠났을 시기의 권력자였던 공화국 정부가 압수하여 외부로 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코시모의 남다른 판단력과 추진력은 건축가가 되어서 로마에서 돌아 온 브르넬리스키를 발굴하고 추천하여서 피렌체인들의 영원한 로망이자 염원이었던 두오모의 돔을 기어코 완성시켰던 것이다. 천재적 예술가들 뒤에 코시모 메디치라는 걸출한 인물이 존재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기메스터스의 플라톤 강의에 크게 감명 받은 코시모는 신플라톤주의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는 자비를 들여서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했으며, 마르실리오 파치노로 하여금 플라톤 사상을 강의케 하였으며, 니콜리와 브르니 등으로 하여금 고대 그리스 문헌들을 모아들이게 해서 도서관을 만들도록 했다. 아카데미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신플라톤주의 강연에 페렌체의 모든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사조는 바로 이곳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코시모 메디치는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이러한 코시모의 혜안과 헌신적인 노력은 그의 손자인 로렌조 메디치에 이르러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된다.   메디치의 모든 영광은 결국 로렌조의 것이 되었다고 해야만 할까?

 

 

 

 

 

 

 

 

본래 메디치 궁전 정원에 놓였던  도나텔로의  조각상. (홀로페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와  (다윗)

 

 

 

 

 

 

 

 

 

 

  어떻게 보자면 마사초는 필리포에게 있어서 형제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마사초가 요절하여 떠나고 없게 되자 둥지를 잃은 필리포는 길고 긴 방황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방황은 방탕함과 탈선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그에게 내려진 천형(天刑)으로 하여금 다시 발작 증세를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사건들을 수시로 저질렀고, 그럴 때 마다 그는 잠시 피렌체를 비워두고 도망을 쳤다. 이 시기에 나폴리와 밀라노 등을 전전하면서 도피생활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신기하게 도피처에서 새로운 미술에 대한 지식과 견문을 넓혀가면서 점점 더 그의 미술 실력도 향상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고,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그림을 그리다가......... 또 사고를 치고 또다시 줄행랑을 쳤다. 마사초가 그의 곁을 떠났을 때가 22살이었는데, 그 보다 세월이 훨씬 더 지나 나이 오십이 가까웠을 때까지도 그는 그렇게 파란만장한 기록을 남기며 천재적 화가인 동시에 희대의 패륜아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는 사고(?)를 치고 어디론가 달아났다가 겨우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살았는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달아났다가 돌아올 때마다 그의 화가 실력이 몰라보게 쑥쑥 향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좌)  마사초 作  <옥좌의 성모>와  (우) 필리포 리피 作 <옥좌의 성모>

 

 

 

 

 

 

 

 

  우피치 미술관과 보티첼리를 찾아가는 여정이었건만, 보티첼리가 등장하려면 아직 거쳐 가야만 하는 산과 들과 강이 한참이나 남아있는 기분이다.

  서둘기는 해야겠는데.........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의 보물창고인 탓에, 보티첼리의 주변 환경이나 앞선 시대 상황을 좀 쉽게 이해하자니 마사초니 필리포 리피니 프라 안젤리코 등등의 이야기를 빼놓고 그냥 건널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어차피 르네상스라는 동네는 한 바퀴 돌아보자면 수도 없이 만나고 또 만나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해야겠지만(언젠가 어디선가는 모두 제대로 한 번씩은 다루어야 하겠지만)........ 그래서 쓸쩍 건너뛰어 보티첼리에서 시작을 하려 했던 것인데....... 아뿔싸! 보티첼리 이야기를 하려니 어디 보티첼리가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서 스승 필리포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고, 필리포를 설명하려니 다시 조금 더 거슬러 마사초까지 기어코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마사초 바로 위로는 지오토를 끄집어내야만 하는데......... 지오토를 꺼내면 이번엔 피렌체 미술과 시에나 미술의 차이와 영향을 또 끄집어내야만 하겠는데.........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기에 이제 새로운 기준점으로 마사초의 <옥좌의 성모>(그림 좌측)를 기점으로 해서 살짝만 들여다보고 나서 서둘러 가던 발걸음을 재촉해 보티첼리로 되짚어 가보기로 해야겠다.

 

  마사초(Masaccio)의 그림 <옥좌의 성모자( The Virgin and Child with Angels)>는 그가 요절하기 전 25세 나이에 피사에 있는 카르미네 성당의 스카르시 채플을 장식하기 위하여 제작한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제단화의 일부이다. 16세기말에 이르러 이 위대한 작품의 가치를 뒤늦게 알아 챈 컬렉션들에 의해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제각각 소장자를 달리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피사 국립 미술관, 나폴리 카포티몬테 미술관, 베를린 국립미술관, 빈의 란코론스키 컬렉션 등이 이 조각들을 내세우며 마사초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을 앞세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이 제단화의 핵심은 중앙에 놓였던 <옥좌의 성모자>라 하겠다. 그리고 그 그림은 1916년 우즈번의 사튼 컬렉션에서 구입했다가 지금은 런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고 있다.

  흔히들 르네상스 회화는 치마부에에 의해서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고, 지오토에 이르러 피렌체 풍의 회화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마사초에 이르러 새로운 차원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회화기법은 여전히 그대로 존속되고 있지만, 과감해 해석과 역동적 구성과 보다 분명해진 원근법이 분명하게 표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에 빛은 그림속의 사물을 확연하게 드러내주기 위한 확실하고 눈부신 빛이 당연한 하나의 형태였으나, 마사초는 그림속의 빛이 눈부신 한낮의 빛이 아니라 해가 질 무렵의 부드러우면서도 미묘하면서도 은근한 노을빛임을 스스로 세세하게 설명을 했었다. 물론 학자들은 이것이 마사초가 폴랑드르 지역을 여행한 후의 작품으로 자연광선을 있는 그대로의 회화적 요소로 생각한 폴랑드르 시대 화가들과의 교류에서 체득한 결과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향은 곧 마사초의 여향을 받게 되는 모든 르네상스 화풍의 화가들에게도 크게 영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필리포 리피가 바로 그런 사례가 되겠다.

  마사초는 마솔리노라는 스승을 두었지만 27살에 요절한 천재 마사초에게는 정식 제자가 없었다. 마사초 사후에 가서야 화가라는 직함을 달게 되지만, 그와 교류했고 그에게 회화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필리포 리피가 유일하다.

  필리포가 마사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화가로서 등장이 한참 후에야 가능했던가, 아니면 영원히 화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쯤되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마사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당연히 필리포 리피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마사초가 요절하고 나서 약 8년쯤 지나서 필리포는 교황 친위군대의 사령관이자 당시 피렌체 대주교였던 조반니 비텔레스키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하는 그림을 주문 받았다. 워낙 온갖 추잡하고 난잡한 생활과 소문에 파묻혀 사는 처지이고 보니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교회(교황)의 요구만은 절대로 물리칠 수 없었으며, 부자와 권세가들로 부터는 생활(도피)자금을 마련해야 하겠기에 쇄도하는 그림주문을 차등을 두며 받아 들였다.

  현재 로마의 나치오날레 갤러리에 소장되고 있는 필리포 리피의 <옥좌의 마돈나>(우측 그림)는 누가 보아도 한 눈에 딱하고....... 필리포가 떡하니 스승이나 진배없는 마사초의 그림을 따라 그린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필리포에게 마소초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느끼게 해주기에 너무도 충분하다 하겠다. 화폭에 스미어 드는 광선을 다루는 방법이나 무게감이 넘쳐나는 의자하며 양감이 넘쳐흐르는 등장인물의 표현이며 생동감이 느껴지는 옷 주름에서 그런 공통점들이 느껴진다.

  내가 보기에도 마사치오의 계보를 굳이 찾아내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필리포 리피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학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겸허히 그들의 주장을 수렴해 보자면........ 마사초의 그림에서는 엄격한 구도와 구성이 전제되는데 필리포 리피의 그림에서는 그런 면이 상당히 결여되어 한마디로 좀 어수선해 보인다고 혹평을 내리고 있다. 더욱이 등장인물의 표정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사초는 근엄함과 절제미가 엿보이지만 필리포의 그림에서는 온화함과 천진난만함 이랄까 하는 단숨함만이 넘쳐나 보인다. 마사초는 원근법 적용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필리포의 경우는 적용은 하다 핵심적 원칙은 결코 아니다 라는 분위기가 엿보인다. 그런가 하면 필리포의 그림에서 엿보이는 폴랑드리 회화의 특징들이 마사초의 그림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기준을 놓고 마사초와 필리포의 회화에 대한 영향력을 비교 평가하는 학자들 입장에서는 필리포 보다는 오히려 프라 안젤리코가 마사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과 함께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평가의 대상으로 거론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거기까지는 당장 거론해 볼 처지나 입장이 아니고.......... 필리포 리피가 마사초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전제하에 두 화가의 <옥좌위의 성모자>를 비교해 본 것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피렌체나 프라토 사람들은 필리포 리피를 성경구절에 빗대어 ‘돌아온 탕자(蕩子)’라고 손가락질 했다. 필리포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면서 ‘제발 안젤리코 좀 닮아라.’라고 푸념을 늘어놓기가 일쑤였다. 같은 사제(성직자)에다가 같은 화가였지만 프라 안젤리코가 선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필리포 리피는 언제나 악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신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결코 필리포의 행실은 나이지지가 않았다.

  그런 필리포 리피에서 피렌체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측으로부터 프라토에 있는 성 마가렛 수녀원의 성가대석 벽면에 성모 마리아나 성녀 마가렛의 일생을 담은 프레스코화를 연작으로 그려달라는 주문이 1456년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위기에 몰려있던 필리포로서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주문이었다. 더욱이 그의 방탕함이 늘 도를 넘었음에도 피렌체의 실력자 코시모 메디치와 교회의 배려와 보살핌으로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온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디치와 교회가 아니었다면 벌써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거나, 교회에서 파문되었거나,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도회 측으로부터 벽화를 장식해줄 화가로 필리포 리피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부터 수녀원장은 썩 내키지가 않았다. 안젤리코라면 모를까 하필 필리포란 말인가? 하지만 수녀원장의 바램과는 다르게 안젤리코 사제가 그만 지난해에 상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벽화를 그리지 않을 것이라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 필리포를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필리포 리피가 성 마가렛 수녀원에 등장했다.

  수녀원장은 수녀원의 모든 수녀들에게 예배당 성가대석 주위에는 절대로 어른거지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나이가 가장 많은 최고연장자 수녀 두 명을 파견하여 필리포 리피의 작업을 돕도록 했으나, 실은 이 탕자가 또 사고를 칠까봐 지근거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토록 했던 것이다.

  아침에 출근한 필리포는 성가대석에 앉아서 몇 날이고 널빤지들을 늘어놓고는 벽화의 구상과 스케치를 했다.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고 실제 벽면에다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났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변함없이 성가대석에서 스케치에 열중하던 필리포가 원장수녀와 만남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못마땅해 하면서 겨우 나타난 수녀원장에게 필리포는 벽화를 그리는데 모델이 필요하다고 요청을 해온 것이다. 원장 수녀는 기겁을 했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필리포가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업이 중단된 것이다. 수도회에서 사람이 파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다.

  ‘벽면의 왼쪽으로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그릴 것이며, 오른쪽은 성녀 마가렛의 업적을 나타내고자 전체적 구상과 스케치까지 마쳤는데....... 적어도 성모와 성녀의 모습을 그리자니 교회의 분위기와 그림의 내용에 걸맞게 표현을 하려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야하는지, 포즈며 표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성스러울 것인지........ 세세하게 상황을 묘사하고자 함에 있어서 모델이 필요하다고 원장수녀님께 요청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습니다. 모델이 꼭 있어야 하는 상황에 이렇게 죽어도 안 된다 하시면........... 제가 길거리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여자를 골라서 데려다 놓고 성모님과 성녀님을 그려도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여자나 모델로 데려다 예배당에 세워놓을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허락을 해 주십시오.’

  대략난감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인 것을 나는 절실히 느꼈다. 어디 이게 나뿐이겠는가? 수도회에서 파견 나온 사제나 원장수녀의 마음도 똑 같았을 것을..........

  결국 주교회의에서 결론을 내렸다.

  ‘필리포가 거랑말코로 치명적 하자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신분이 아직은 분명하게 사제(성직자)이며, 그가 요청하는 모델이 엄연히 교회의 규율을 몸에 익히고 서약을 한 수녀일뿐더러, 벽화를 그리는 작업장이 엄연히 예배당인 것을 감안하자면....... 아무리 파렴치한이나 탕자라 하더라고 감히 신성한 교회에서 더는 사고를 치지 못할 것이며, 이제 그 탕자의 나이도 오십 줄에 이르렀으니 어디 예전과 같겠는가? 그러니 그의 요구대로 수녀 중에서 모델을 고르게 해주고....... 대신 철저하게 지켜보도록 하시오.’ 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망나니라 해도 신성한 교회에서 감히 딴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며, 나이 오십이나 먹었으니 어느 정도 욕망도 사그라졌을 것이라 판단해 내린 결론이었다.

  어디.......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필리포의 그 치명적 중병은 치료가 되었을까?

 수도회의 허락과 수녀회의 철통같은 감시 하에 필리포가 주재하는 모델 선발대회가 개최되었다. 성 마가렛 수녀원에 속해있는 수녀들이 하나씩 하나씩 불려나왔지만 필리포의 선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이 어린 한 수녀가 등장했을 때........ 모델 선발대회의 나머지 일정은 무조건 취소되었다.

  이 선발대회 이전에 이미 필리포에게는 이 수녀원에서 선택할 모델이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합법적으로 불러내기 위하여 벌인 해프닝이었을 뿐, 필리포가 원하는 단 한명의 모델은 벌써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성 마가렛 수녀원에 천사처럼 예쁜 수녀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세상에 파다하게 퍼져있는 사실이었다. 필리포도 이미 서너 번 소문이 자자한 수녀를 지나치면서 만나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필리포에게 수녀원의 벽화 주문이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라토에서 나고 자란 천사처럼 예쁜 수녀의 이름은 루크레치아 부티(Lucrezia Buti)로 사촌까지 포함하여 세 자매가 이곳에서 수녀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그녀의 나이는 꽃다운 21세의 처녀였던 것이다. 50세의 사제와 21세의 수녀가 예배당 성가대석 앞에서 갠버스와 이젤을 사이에 두고 화가와 모델로 마주섰다. 필리포는 루크레치아를 모델로 하여 여러 날 동안 온갖 포즈의 스케치를 아주 열심히 그렸다.

  그러던 중에 원장수녀에게 필리포로부터 다른 요청이 전달되었다.

  벽화의 구도와 등장인물의 묘사는 결정이 되었는데, 그림의 주인공인 성모와 성녀를 그려 넣음에 있어서 품격과 품위에 걸맞은 옷차림을 위해서 모델에게 옷감을 파는 길드에 가서 옷을 제작의뢰 하겠다는 요청이었다. 한마디로 외출을 허락해 달라는 요구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온순하게 벽화제작에만 전념했을 뿐더러, 이미 주교회의의 허락이 있었던 만큼 외출 시간을 제한해 놓고, 루크레치아의 자매들을 동행시키는 조건으로 필리포의 요구를 수락했다.

  마침내 필리포와 세 명의 수녀가 피렌체의 옷감을 담당하는 길드로 외출이 이루어졌다.

  마차를 타고 피렌체 두오모 인근의 상인조합(길드)에 들러서 필리포가 그려내고자 하는 성인의 옷차림에 걸맞은 옷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는 루크레치아의 두 자매는 그만 비단이며 화려하기가 그지없는 귀족여성들의 옷가지와 장신구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온통 그쪽에 빼앗겨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기회를 그냥 지나칠 필리포가 결코 아니었다.

  늘 해오던 대로 필리포는 거칠게 루크레치아 수녀의 손을 강제로 잡아끌고는 아주 익숙한 표정과 몸짓으로 좁은 골목길 안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골목 안쪽의 유곽 구석방으로 루크레치아를 잡아끌고 들어간 필리포는 겁에 잔뜩 질려있는 수녀의 옷을 거칠게 벗기고자 했으며 이내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나이 오십의 사제가 불과 나이 스물 하나의 수녀를 겁탈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백주대낮에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이 올려다 보이는 허름한 창문이 열려진 다락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교회의 성스러움도 수녀의 계율도 수도사의 소임도....... 한 탕자에 의한 한 수녀의 겁탈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조물주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전지전능은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

  길드 사무소는 발칵 뒤집혔다. 피렌체에서 가장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젊은 수녀가 자신들의 조합을 방문하던 중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사무실이며 창고며 인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루크레치아 수녀의 자매들은 물론 허둥대고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똑같이 우려하고 있는 상황은 오로지 한가지였다. 그것은 함께 사라진 남자가 바로 필리포 리피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어떤 간절함으로 서둘러 이 사태가 수습되기를 갈망했지만....... 끝내 그들의 간절함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 마침내 두 사람이 사무소에 다시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필리포는 지극히 평온하고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온통 구겨지고 찢겨진 그녀의 의복에서 무슨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었는지를 예측하기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사태가 이미 지나간 과거형으로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함께 멀리 떠날 겁니다. 돌아가서 원장 수녀님에게 여기서 본 그대로를 말씀 드리세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것입니다.’

  말을 마친 필리포는 루크레치아 수녀의 손을 잡아끌면서 밖으로 나섰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루크레치아 수녀는 사내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완전한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하긴 어쩌겠는가?

  수녀로서의 본분과 규율을 지키겠노라고 서약까지 한 몸이었지만,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날뛰는 짐승 앞에서 그녀는 그저 가녀리고 나약한 처녀에 지나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건만, 엄연한 현실 속에서 그런 비극이 자신에게 불어 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세상 사람들이 사제복을 입은 짐승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말이다. 아무리 거칠게 저항을 했어도 끝내 그녀는 겁탈을 당했고 소중했던 처녀성을 잃었다. 당연히 그녀는 억울했고 그 짐승을 저주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잘잘못이나 도덕성이나 법적인 제재와 처벌이 뒤따른다 해도........ 이미 더럽혀진 그녀에 대한 인식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가해자를 짐승처럼 난도질해 죽여 버린다 해도........ 불과 한나절 전인 오늘 아침 예배시간의 루크레치아 수녀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 그녀 앞에 놓여 진 것이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되돌아 갈 곳이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뿐이었다. 이런 일을 겪은 상태로 수녀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음이요, 한없는 애정으로 곱게 딸을 키워준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체념과 절망만이 가득한 속에서........ 루크레치아는 조금 전에 자신의 정절을 무참히도 짓밟았던 그 짐승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끌려서 어디론가 갈 수 밖에 없었다. 우선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자매 수녀들은 달려가 원장수녀에게 사실을 고했다.

  원장수녀는 곧바로 주교회의에 이 사실을 알렸다.  지체없이 대주교는 로마의 교황에게 편지를 썼다.

  프라토는 물론 피렌체가 발칵 뒤집혔다.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현실이 되어서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필리포가 한 유곽의 여자를 건드리고 화대를 지불 안했다는 정도의 사건은 차라리 애교라 했을 것이다. 어느 과부와 정을 통했다면 그의 남성다운 능력을 칭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부인을 겁탈했다면 요즘처럼 차라리 ‘할머니가 횡재하신 거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엄연한 유부녀나 어린 소녀를 겁탈했다면 ‘그 짐승 버릇이 어디 가나? 하지만 교회나 부자들이 금방 풀어줄걸 뭐’ 했을 것이다. 심지어 그가 남색으로 고발당했을 때에도 ‘많이 급했나보지’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사뭇 상황이 달랐다. 버젓이 수녀원에서 벽화를 그리던 사제가 모델로 선택한 수녀를 백주대낮에 겁탈해 버린 사건인 것이다. 그것도 피렌체에서 웬만하면 다 알 수 있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의 유명한 수녀를 말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정도 사태면 피렌체 시의 경찰이 총출동 하거나, 아니면 바티칸의 군대라도 출병하여 발정 난 짐승을 체포하고, 엄격한 교회의 법률로 처벌하여,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이나 화형에 처해야 하는 정도의 중죄가 아니었겠는가? 세속의 법률을 위반했고 교회의 법률을 능멸했으며 감히 하나님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킨 중죄인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렌체 정부도 교회도, 편지로 보고를 받은 교황에 이르기까지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하여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한 것은 프라토와 피렌체의 시민들이었으며, 루크레치아 수녀의 가족인 부티 가문의 분노였을 뿐이다.

  뻔뻔한 필리포는 멀리 달아나지도 않았다. 프라토 외곽의 한적한 곳을 골라서 아예 루크레치아와 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마치 ‘이미 엎질러진 것을...... 이제 와서 어쩌겠어?’하는 태도였다. 사실 교회의 입장으로도 어서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길 바랄 뿐이었다. 잘잘못을 따지는 재판을 열고 처벌을 하면서 두고두고 뭇사람들의 입에서 교회의 치부가 까발려지고 드러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두 사람은 함께 동거에 들어갔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루크레치아라는 아리따운 수녀를 만나는 순간부터 필리포의 중병이 씻은 듯이 나아졌느냐 하면 그것도 결코 아니었다. 필리포와 루크레치아 사이의 사랑이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운명적이고 뜨거운 사랑이었다면 세상과 역사는 혹 용서를 해주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필립포에 의한 루크레치아 겁탈은 속된말로........ 필리포의 화려한 애정편력에 기록 하나를 더 보태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내 생각으로는 말이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이 또다시 분노하기 시작했다.

  루크레치아의 친정인 부티 가문은 피렌체 정부에 고발장을 접수했고 교황청에 탄원서를 올렸다. 이 사태는 또다시 세간의 관심 속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결국, 필리포 리피에게 많은 작품 의뢰를 했던 코시모 메디치가 나섰다. 코시모가 직접 나서서 로마로 가 교황과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참으로 엄청난 결과를 얻어내고 말았던 것이다.

  교황은 특사를 보내 필리포 리피와 루크레치아 부티가 가지고 있던 사제와 수녀의 서품을 회수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을 좀 해보자.

  영국의 헨리 8세(왕)는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교황에게 의뢰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즉석에서 교황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교황이 왕을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리자, 이번엔 왕이 교황(교회)를 파문시키고 교회의 전 재산을 몰수하며 심지어 새로운 교회(성공회)를 세우면서까지 결혼을 성사시키고야 만다.

  그랬던 교황의 권위였는데..... 불량 신부가 처녀 수녀를 겁탈해서 아들까지 낳고 배 째라 버티고 있다는데 종교재판을 열어도 시원찮을 판에 서품을 회수하고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고 축복까지 내린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 도대체 교황과 코시모 메디치의 협상에서는 무엇이 오갔을까? 더불어, 코시모 메디치에게 필리포 리피는 어떤 존재였을까? 꽤나 이 부분에 대하여 고심을 해 보았지만...... 끝내 나는 아직까지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교황 성하께서 특별히 필리포 리피와 루크레치아 부티의 결혼을 허락하셨다. 하여, 많은 전해지는 이야기와 여행 잡지와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에서 이 대목에 준하여....... 필리포 리피와 르크레치아가 정식으로 결혼하였으며,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다소 해피앤딩적인 결론이 전해진다. 그게 정설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모조리 틀린 이야기다.

  필리포 리피는 끝까지 루크레치아와 결혼하지 않았다. 루크레치아 또한 한 남자에게 겁탈당해 아이들을 낳기는 했지만, 끝내 누구의 부인 소리도 듣지 못했다.

  도대체 왜?

  필리포 리피에게 내려진 천형(天刑)과도 같았던 성중독(性中毒) 증세가 여전했던 때문이다. 천상의 미모를 갖춘 루크레치아에 빠져서 한동안 그녀에게 탐닉한 것은 분명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시 다른 여자들에게 욕망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내 필리포는 루크레치아를 만나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다시 짐승이 된 것이다.

  예순 아홉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을 때 까지도 필리포 리피의 생활 태도나 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럼 겁탈을 당해 새로운 환경으로 끌려 들어와서 아들과 딸을 낳고 살아야 했던 루크레치아의 생활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아쉽게도 겁탈을 당한 이후로 아들과 딸을 낳았고 피렌체 두오모 근처의 리피의 집에서 생활했다는 기록 외에 사망에 이르기까지 루크레치아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대단히 불행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했을 뿐이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필리포 리피의 죽음과 연관해서 이다.

  필리포 리피는 그저 ‘69세이던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라고만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전해진 다른 기록들과 이야기에 따르자면........ 필리포 리피가 분명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다. 끝내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으며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그냥 갑자기 죽었다고 결론지어졌다. 하지만 당시에 피렌체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독살은 루크레치아의 아버지나 자매에 의해 벌어졌거나, 참을 수 없었던 루크레치아의 사촌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필리포 리피는 누군가에 의해 독살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필리포가 운명적으로 루크레치아를 만나 사랑했기에 겁탈을 했으며, 그 후로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루크레치아와 자녀들을 위한 헌신적인 생활을 영위했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어쨌거나 이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르네상스의 풍운아 필피포 리피(Fra Filippo Lippi)의 시대는 지나갔다.

 위에 올린 몇 점의 작품에서 보듯이 초기와는 다르게 이제는 마사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확연하게 자신만의 화풍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성모와 아이>라는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듯이 필리포의 많은 작품에서 연인이었던 루크레치아 부티를 모티브로 그렸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루크레치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성모 마리아의 현신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의 반증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에 나름 동의한다. 하지만, 적어도 필리포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인이 늘 한결같이 루크레치아였던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처럼, 그가 동경하는 여인상도 자주 변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리포의 작품을 쭉 펼쳐놓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루크레치아라는 여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필리포 리피의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면....... 어느 정도랄까,  아니면 힐끔힐끔 다른 화가의 기풍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특정한 한 두 작품에서는 작가가 서로 바뀌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런 기풍이 느껴진다.

  희대의 풍운아 필리포 리피는 그렇게 사회적 교회적 파장과 격랑 속에 휩쓸리며 살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림만은 거의 미치다시피 그렸으며, 자신의 작업실에서 훌륭한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화실을 거쳐 간 사람들은 여럿 있었지만, 우리는 필리포 리피 하면 그의 제자로 단 한 사람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르네상스 미술사는 산드로 보티첼리를 필리포 리피의 거의 유일한 제자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스승의 아주 특별한 능력이랄까,  해괴망측한 기행에 질렸음인지........  화풍에서 물려받은 것이 있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생각과 생활방식은 가히 천차만별이라 할 정도로 너무나 달랐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푸념처럼 내 주관적인 생각을 떠오르는대로 표현하자면.........   보티첼리의 화풍은 필리포 리피로부터 배웠음이 분명하지만, 보티첼리의 생활 철학은 아마도 프라 안젤리코로 부터 배웠던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는 진심어린 내 방식의 표현이다.

  이제 나는 산드로 보티첼리를 출발점으로 삼고 여러 분야와 시대에 맞춘 르네상스 이야기를 계속해 보고자 한다.

 

 

 

 

 

 

 

 

프라토 대성당(Duomo di Prato) 1475년.

 

  스승이었던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가 세상을 떠난 시간도 벌써 여섯 해나 지나고 있었다. 독립을 해서 자신의 화실을 가진 명실상부한 정식 화가로 성장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겨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청년은 늘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화가 길드에 정식으로 등록이 화가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런 처지이긴 했다 쳐도 아직은 그림 주문도 그리 많지 않아 빠듯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던 것이다. 짙은 초록색 외출복에 빨간 두건을 쓴 청년은 지금 프라토 두오모 광장을 지나 성당 현관의 출입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불현 듯 스승이 떠올랐고, 갖가지 숱한 소문 속에 널리 알려졌던 스승의 연인 루크레치아와의 운명적 사랑이 떠올랐던 것이다. 스승과 루크레치아의 운명적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필리피노가 얼마 전부터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신을 거두어 주셨던 스승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제대로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된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광장을 가로질러가면서 올려다본 프라토 두오모의 모습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성당 벽면에 지오토의 종탑을 슬쩍 기대어 놓은 것과 영락없이 닮았다고 그는 자주 생각해 왔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올려다보니 오늘도 영락없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새삼스레 다시 들었다.

  젊은 청년이 프라토 두오모를 자주 찾는 이유는 당연히 그의 스승인 필리포 리피가 남겨놓은 프레스코화가 대성당의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는 이유가 되겠지만, 그 외에도 파울로 우첼로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그림이 성당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프라토 두오모를 찾는 청년에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도나텔로의 강단> 이었다. 두오모 파사드의 측면 허공에 매달린 형태의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동심원의 프레임은 청동으로 만든 지붕을 머리에 매달고 있는 형국이다. 앙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귀여운 원심 효과를 극대화 시킨 이 작은 외부 설교단은 어둡고 근엄하고 갇혀있는 느낌의 교회를 빛이 가득한 외부로 이끌어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청년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그리고 그가 기대하고 있는 바람직한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부활절, 성탄절, 성모 마리아 탄신일 등의 특별한 날에는 이곳에서 열린 광장을 가득채운 사람들을 향해 대주교가 주재하는 예배가 열렸다. 답답하고 갇힌 예배당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신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늘 교회가 지금과는 좀 달라졌으면 하는 바램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6세기경에 처음 프라토 교회가 생겨난 이후에, 이십여 년 전인 145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재건되는 과정에서 건축가 미켈로조(Michelozzo)가 이 외부 설교단을 만들었고,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가 아름답고 우아하게 장식을 했다. 그때부터 이 외부 설교단을 <도나텔로의 강단>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라토 대성당과  <도나텔로의 강단>

 

 

 

 

 

 

 

  청년 알레산드로는 프라토 대성당의 출입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고딕 성당으로 지어졌다. 그것은 유럽 어디에서나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라틴십자가 형태의 바탕위에 르네상스 풍의 인테리어로 치장된 비교적 최근에 재단장된 새로운 대성당의 모습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라틴십자가 형태의 고딕 성당은 대부분 정면의 파사드에 설치된 현관문을 비롯하여 십자가의 양 날개로 인식되는 부분에 두 개의 작은 문을 설치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현관을 들어서면 웅장한 지붕들 사이로 길고도 높은 천장을 가진 복도와 같은 신랑(본당)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어떤 이는 겸손함으로 신을 알현할 준비를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높은 천장과 기둥 뒤에서 금방이라도 신의 불호령이 떨어 질것만 같아 주눅이 들곤 하는 바로 그런 장소이다.

  높고 긴 복도와 같은 신랑을 지나면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가 겹쳐지는 공간인 신성한 장소(Chancel)에 이르게 된다. 찬셀은 주로 제단의 앞쪽에 설치되며 성가대석과 성소를 포함한다. 이곳에서 양쪽으로 십자가의 날개에 해당하는 측랑(아일)이 설치된다. 라틴십자가 형태의 성당 위에 르네상스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돔이 설치되면 바로 여기 십자가가 교차되는 부분인 찬셀의 천장에 돔이 설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찬셀을 지나 십자가의 꼭대기에 해당되는 부분에 제단이 설치된다.

  이곳 프라토 대성당의 신성한 공간인 찬셀의 성가대석을 둘러싼 벽면에 성 스테판(St. Stephen)과 세례자 요한 (St. John the Baptist)의 생애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놓여있다. 그 그림들은 모두 알레산드로의 스승인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와 리피의 친구이자 조수였던 디아만테(Fra Diamante)의 작품이었다.

  이곳에 그려진 성 스테판과 성 요한의 벽화 역시도 필리포의 기행(?) 덕분에 12년이나 걸려 겨우 완성되었다.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에 의하자면 프라토 대성당의 벽화 주문을 받은 필리포 리피가 벽화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한참 벽화작업에 몰두하던 중에 인근인 성 마가렛 수녀원에서 벽화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미 필리포는 그 수녀원에 루크레치아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수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까지 마쳤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다음 상황은 불 보듯 뻔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즉시 필리포는 대성당의 작업을 중단하고 한 걸음에 수녀원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애초부터 아예 작정을 하고 찾아간 만큼....... 제대로 사고를 쳤던 것이다.

  루크레치아에게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일단 교회에서 도망쳐야 했고, 목숨을 부지하고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자마자 또 숱하게 사고를 연발하면서 툭하면 다른 도시나 국가로 도망 다니기에 정신없었던 이유로 이미 돈은 다 받아쓰고서 14년 만에 겨우 작품 완성을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죽기 직전까지 기행(?)을 벌이느라 바빠서 사실은 끝내 프라토 대성당 벽화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기실은........ 못난 스승을 둔 죄(?)로 마지막 완성은 유일한 제자인 보티첼리의 손끝에서 겨우 마무리 완성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신랑을 걸어가는 짧은 순간에 스승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이야기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 알레산드로는 찬셀에 점점 다가서면서 성가대석에 누군가 한 사람이 앉아서 열심히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던 알레산드로는 지금 성가대석에 엎드리다시피 한 자세로 나무판자에 열심히 무언가를 스케치하며 옮기고 있는 앳된 청년의 뒷모습을 아주 흡족한 모습으로 환한 미소 속에 바라보고 있었다. 익히 잘 아는 사이일뿐더러 너무나도 반가운 사이로,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동료이자 동생처럼 생각하며 지내는 알레산드로가 몹시 아끼는 젊은이였다. 장난 끼가 발동한 알레산드로는 발뒷끔치를 들고 아주 살며시 앳된 청년의 바로 뒤쪽까지 접근을 했다. 무언가에 심취해 얼마나 흠뻑 빠져있는지 가까이 다가가 어깨 너머로 나무판자에 그려지고 있는 스케치를 한참이나 훔쳐보고 있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판자에 마구 흘리듯 스케치를 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마치 청년의 영혼까지 마구 빨아들이고 있는 듯 보이는 그림은 다름 아닌 알레산드로의 스승인 필리포 리피가 유작처럼 남겨놓은 벽화로 <헤롯 대왕의 연회>라고 불리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마지막 손질에 자신의 붓 칠이 어느 정도 가미되었기에 잘 알고 있을뿐더러 남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림은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의 벽화에 표현한 작품으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고 호평을 받고 있는 스승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었다. 많은 화가 지망생들이 지금 이 청년처럼 그림을 모사해서 화가 수업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미 그런 장면을 무수하게 목격해왔었던 바였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아니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어깨 너머로 앳된 청년의 스케치를 바라보던 알레산드로의 표정은 이내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앳된 청년은 이미 여러 개의 판자에 하나같이 똑같은 장면만을 모사하고 있었는데........ <헤롯 대왕의 연회>에 등장하는 살로메나 헤롯대왕이나 헤로데 왕비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의 모습을 스케치로 옮기는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년이 지금 반복해서 그리고 있는 것은 그림의 중앙부분 우측으로 그저 무심한 듯 배경으로 등장하는 벽면의 작은 선반위에 올려 진 투명 유리병들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선반위의 유리병을 계속해서 반복해 그리는 이유를 도무지 알레산드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로. 지금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이냐?’

  그랬다.  지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 하는 앳된 청년의 모습은 틀림없는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였다.

  ‘아이쿠. 깜짝이야. 마귀가 날 데려가려고 몰래 쫓아왔는지 알았잖아? 알레산드로 형. 정말 이럴 거야? 이렇게 몰래 다가와 사람 놀래키는게 어디 있어?’

  ‘그러게 평상시 좀 잘하지? 꼬맹아. 프라토까지 왔으면서 형한테 먼저 알리지도 않냐? 그러다 이렇게 나에게 들켜?’

  ‘들키긴 뭘 들켜? 형 화실에 찾아갔었는데 없던데? 조반니 형만 만나고 왔어. 요즘 뭔가에 빠져서 넋이 나간사람처럼 헤매고 다닌다고 조반니 형이 이야기 해 주던데? 무슨 일이야? 우리 보티첼리는 낮이고 밤이고 술 마시고 돌아다니느라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정신이 없을 거라고 하시던데?’

  ‘레오나드로! 그넘의 보티첼리 타령만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했지?’

  ‘보티첼리가 어때서? 조반니 형만 아니라 안토니오 형까지 알레산드로를 만나면 꼭 보티첼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시던데....... 나도 알레산드로 형 보다는 보티첼리 형이 더 마음에 들어. 우선 부르기가 쉽잖아.’

  ‘내가 싫다고...... 내가 죽어도 보티첼리라는 이름이 싫다고......’

  ‘나는 좋다니까? 조반니 형이 그러는데 우리 보티첼리가 이제부터 술을 끊겠다고 하면 언제든 다시 알레산드로로 불러 줄 테니까....... 그때까진 보티첼리로 부르라고 하셨거든?’

  ‘내가 싫다니까? 내가 술을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술통이야 술통이?’

  ‘난 형이 작은 술통이라서 보티첼리라 부르는 게 아니야. 안토니오 형하고 알레산드로 형에게 잠깐일망정 은세공을 가르쳐 주신 스승인 이름이 보티첼리라며? 내가 그분을 정말로 만나보았는데..... 멀리서 걷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형하고 판박이더라고. 그래서 나는 앞으로 알레산드로 형을 죽을 때까지 보티첼리로 부르기로 마음먹었어.’

  ‘보티첼리라고 부르는 순간 너하고 나하고는 이제 끝난 것이라고 나는 마음먹었어.’

  모든것은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스물아홉의 청년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는 사 형제 중에서 막내로 셋째인 안토니오와 함께 잠시 동안 피렌체의 유명한 보석공예가인 보티첼리로부터 금은세공기술을 배웠으나 자신만은 재주가 없다 생각되어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고, 작은형 안토니오는 점차 유명한 보석공예가로 성공하게 된다. 결국,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별명을 가지고 놀림을 거듭하면서........ 결국엔 우리가 익히 알게 되는 르네상스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라는 화가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  다음 이야기에서 (우피치 미술관과 보티첼리. 에피소드 2)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