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우피치 미술관(Uffizi)과 보티첼리 (2)

by 피안재 2022. 8. 29.

 

 

 

 

 

 

 

 

 

 

 

 

 

 

 

 

 

 

 

  보티첼리의 스승이자 그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화가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남겨놓은 작품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데 새삼 놀라게 된다. 진위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서도 실로 엄청난 숫자의 작품을 그는 남겨 놓았다. 작품 하나하나를 보다보면 ‘이건 보티첼리 그림이 아니야?’ ‘이건 안젤리코 그림인 것 같은데?’ 하는 의구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사방에 흩어져 있는 잘 알려진 필리포의 대표작 중에서도 심심찮게 진위 여부가 학자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히 필리포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그 작품이 필리포 리피가 직접 그린 작품이라는데 전혀 이의가 없는 진품(?)을 하나 고른다면 당연히........ 프라토 대성당의 프레스코화 벽화일 것이다. 프라토 대성당의 벽화는 필리포가 스승인 마솔리노와 함께 성 스테판의 일생과 세례자 요한의 일생을 프레스코화 연작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 중에서도 필리포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 바로 맨 아래쪽에 그려진 <헤롯왕의 연회> 작품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예술분야 전반에 걸쳐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재해석은 물론, 어둡고 딱딱하게만 정형화된 틀 속에 갇혀있던 성서의 내용들을 재해석하고 보다 자유롭고 화려하게 재탄생시키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의 ‘아브라함에 의한 이삭의 희생’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유대의 독립전쟁 중에서 홀로페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등이 훌륭한 소재로 자주 등장하게 되고, 신약성경에서는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옥좌에 앉은 성모나 성모의 승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예수의 부활과 승천’ ‘세례요한의 죽음’ 등이 회화와 조각 등에 넘쳐날 정도로 자주 인기있는 소재로 등장하게 되었다.

  필리포 리피가 프라토 대성당에 그린 벽화의 주제는 바로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례요한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헤롯왕의 연회)나 (살로메의 춤) 등의 이야기가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제각각의 작품으로 재해석되고 창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현대에 들어서 회화와 조각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음악과 연극(뮤지컬)으로까지 확대재생산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아주 최고로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는 뜻이라고 해야겠다.

  이 그림은 우선 르네상스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지오토(Giotto Bondone)가 파도바성당의 스크로베니 채플에 그렸던 프레스코 벽화 <성전세>의 구성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 안에다 세 개의 스토리가 담긴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이다.

  무참하게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비장하면서도 극적인 상활을 연출하기 위한 최고의 소재였던 것이다. 이 소재에 대한 최고의 정점은 아무래도 필리포가 세상을 떠나고 백년 후에 등장하는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에 의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카라바조가 몰타 섬의 ‘성 요한기사단 성당’의 안쪽에 초대형으로 그려놓은 <세례요한의 참수>가 그것이며, 나는 이미 몇 차례에 걸쳐서 그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기에 카라바조의 작품은 여기에선 생략하기로 한다.

 

  필리포 리피가 그린 <헤롯왕의 연회>는 한 폭의 그림 안에 세개의 장면이 담겨있다.

  중앙의 화면은 헤롯왕의 생일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연회장의 전경이다. 이 연회의 중심에 팜므파탈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살로메의 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살로메의 춤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은 아마도 유럽 언론이 그토록 극찬했던 2차 세계대전 중의 전쟁 한복판에서 벌어진 ‘마타히리의 춤’이 아니었을까 싶다. 화려하면서도 유혹적이면서 뭇 남성들의 욕망을 극한까지 끌어당겼었다는 살로메와 마타하리의 춤에서는 짙은 죽음의 향기가 똑같이 풍겨 나온다.

  화면 왼쪽으로는 어두침침함 속에서 잘려진 세례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들고 있는 쟁반에 담고 있는데 차마 그 처참함을 볼 수가 없었음인지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화면의 오른쪽으로는 잘려진 요한의 목이 담겨진 쟁반을 왕비이자 어머니인 헤로디아에게 받치고 있는데, 표독스런 헤로디아의 표정과는 별개로 시선을 어찌할 바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필리포 리피나 카라바조나 비교적 근대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쏟아낸 그림의 소재는 모두가 하나같이 ‘세례요한의 죽음’ 이었다. 그런데 정작 어느 그림에서나 세례 요한이란 존재는 그저 목이 잘려진 참혹함을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는 방식의 배경이나 장식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소재에 가장 매력적으로 끌려든 이유는 한결같이 팜므파탈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살로메의 춤’이 핵심인 것이다. 독보적인 주연은 살로메의 춤이고, 섹스 심벌일 정도로 예뻤다는 헤로디아와 피의 향연을 벌인 헤롯왕은 어디까지나 조연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깊게 연결된 (헤롯왕의 연회) 사건이 신약성서에서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여긴다. 과연 그럴까?

  신약성서에 따르자면(마태복음 14장 6-11절, 마가복음 6장 21-28절) 실제로 헤롯왕의 연회는 벌어졌고, 그 와중에 어떤 이유에서건 세례자 요한이 참수 된 것은 맞다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신양성서의 어디에도 ‘살로메’란 여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동생이 죽어 과부가 된 헤로디아를 형인 헤롯이 자기의 아내로 삼자 인륜을 저버린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다고 요한이 격렬하게 비판한 것은 맞다. 그래서 헤롯이 요한을 죽였다. 그냥 거기까지가 전부이다. 이 과정에서 헤롯에게 딸(본래는 조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할 뿐, 살로메란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더하여...... 세례요한의 죽음 이면에 배경으로 깔리게 되는 살로메와 헤로디아와 세례 요한 사이의 은밀하면서도 은근한 러브스토리 같은 것은 아무리 눈을 씻고 밤을 새워가며 찾아보아도 어디에도 흔적조차 없다.

  이는 모두가 1893년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살로메’라는 희극을 발표하면서부터 생겨난 치정이 서로 얽힌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이 희곡을 썼을 당시 마타하리라는 치명적일만큼 매혹적인 여성이 온 유럽대륙을 휩쓸고 다니며 스파이 활동을 벌이던 때였다. 아마도 오스카 와일드는 마타하리를 그윽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문득 ‘헤롯의 연회장’을 떠올렸고, 헤롯이 자신의 딸(사실은 조카)에게 흑심을 풀었다는 가정으로 시작하여, 살로메를 둘러싼 치정극으로 희극을 썼을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헤로디아의 딸에 대한 얘기는 다음과 같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의 형제인(일설에는 동생) 빌립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 세례 요한은 이를 두고 형제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였다. 그렇게 비난하자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원수로 여기고 죽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헤롯은 사람들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어서 함부로 할수 없었다.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하면서도 요한의 비난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새로 부인이 된 헤로디아의 경우는 달랐다. 헤로디아는 요한의 비난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결국 헤롯은 헤로디아의 간청에 못 이겨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딸에게 연회 석상에 나가서 춤을 추라고 했다. 다만, 춤을 추기 전에 헤롯왕에게 한 가지 조건을 먼저 제시하라고 시켰다. 그 조건은 살로메가 춤을 추고나면 한 가지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살로메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술에 적당히 취해 흥이 한참이나 고조된 헤롯은 이 꼬임에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예루살렘의 절반이라도 주었을 판에 너의 소원 하나쯤 못 들어 줄 성 싶으냐? 오냐. 좋다. 여기 모인 귀인들 앞에서 내가 약속하마. 네가 춤을 멋지게 추고나면 내 너의 소원을 무엇이든 한 가지 들어주마.’ 헤롯은 초대된 손님들 앞에서 호방하게 외쳤다.

  살로메는 초대된 여러 사람들 앞에서 황홀하면서도 유혹적인 ‘일곱 가지 베일의 춤’을 추었다. 일곱 가지 베일이란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포함하는 천체(天體)를 나타내며, 그것은 다시 이 천체에 가득해 있는 일곱 가지의 신비로운 경험, 그러니까 인간의 꿈(Dream), 이성(Reason), 열정(Passion), 희열(Bliss), 용기(Courage), 동정(Compassion), 지식(Knowledge)이 총망라되는 황홀경과도 같은 춤을 추었다는 표현인 것이다.

  헤롯을 포함하여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커다란 감동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다. 그러하였으니 헤롯의 기쁨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장 기쁜 사람은 당연히 헤로디아가 아니었을까?

  약속대로 헤롯은 살로메의 소원을 물었다.

  ‘제 소원은 요한의 목이예요. 지금 당장 요한의 목을 받고 싶어요.’

  순간 헤롯은 크게 낙담했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고,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코 살로메의 소원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헤로디아의 간절한 바램이자 소원이라는 사실을 그는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을 잡아 가두기는 했지만 그를 해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많은 대중들이 받들고 따르는 요한을 해쳤을 경우에 자신에게 몰려들 정치적 압박과 저항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두 헤로디아의 음모라는 사실은 알아차렸지만, 모든 것은 이미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었던 것이다.

  마지못해 한스러운 음성으로 헤롯은 시위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 오래지 않아 눈을 부릅뜬 요한의 목이 쟁반에 담겨 연회장에 등장했다. 살로메의 손을 거쳐서 요한의 목은 반대편에 앉아있는 헤로디아에게 전달되었다.

 

  두 번째 유대전쟁에서 유대저항군 총사령관이었다가 유일하게 혼자 생존하여 로마로 망명한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따르자면, 세례요한의 죽음은 저렇게 치정에 얽힌 드라마틱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상황에 연루되어 벌어진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청빈하면서도 진지한 생활태도와 유대민족의 비전을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이 널리 퍼지면서 점차 그를 따르는 군중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가고 점차 유대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신망을 얻어가게 되자, 이 결집된 민중들이 혹시 헤롯의 권력을 상대로 봉기(쿠데타)를 일으킬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 보고 있다. 더하여 세례요한의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 대하여도 언급을 하고 있는데, 세례요한은 헤롯의 연회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헤롯의 명으로 감옥에서 끌려나와 마르켈누스 성채로 옮겨져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헤로디아의 딸에 대한 이름은 성경의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헤로디아의 딸’ 혹은 그냥 ‘소녀’로 언급되었을 뿐이라 밝히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살로메’라는 여인이 등장하긴 하는데,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사도 야고보와 사도 요한의 어머니 이름이 바로 살로메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았을 때,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던 여인 중에 하나가 살로메였으며, 그런 인연으로 예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잘 모셔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일부 학자들은 성모 마리아와 세례요한의 어머니와 사도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서로 자매지간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예수와 세례요한과 사도야고보와 사도요한은 모두 사촌지간이 되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일단 신약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이라면 당연히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질 만큼 참혹하고 흉물스러운 분위기였어야 하겠지만, 얼핏 보자면 그림은 그저 보편적일만큼 흔한........ 별반 특별할 것이 없는 연회장으로 보일 뿐이다. 잔치 상이 차려졌고 하객들에 둘러싸인 채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여 지는 전부다. 조금은 복잡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어떤 감홍에 들떠 기쁘고 소리치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처럼 그렇게 썩 기쁘지는 않은 다소 어정쩡한 연회장의 풍경이 꼭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그림의 제목이 <헤롯왕의 연회>라는 사실과, 신약성경에서 어떤 내용으로든 이미 들었던 바가 있었다면 그제부터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내 ‘이게 뭐야? 너무 다르잖아?’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세세하게 그림을 파악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정돈되지 못한 어수선한 분위기에다가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이 무엇인가 불안해 보이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구석에 엎어져 목이 잘린 요한의 몸뚱이와 쟁반에 담겨진  잘려진 세례요한의 목에서 참혹한 모습

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림은 그때부터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필리포 리피가 애초부터 보여주고자 했던 느낌 그대로의 그림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이 그림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화가 지망생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림의 핵심인 살로메의 우아한 춤사위를 그려내길 원했다. 세 장면에 등장할 때마다 다 다른 살로메의 표정을 구분해서 그려내고 싶었다. 헤로디아의 표독스런 표정과 주변인들의 처참함에 일그러지고 외면하는 표정과 몸짓들을 옮겨 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못내 보티첼리를 당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끼는 동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기껏 옮겨 담고 있는 것은 등장인물이 아니라 배경으로 등장하는 벽면의 선반위에 놓인 유리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닌...... 죽어라 그 투명한 유리병만 계속해서 그리고 또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너가 지금 도대체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니?'

  '훌륭하신 필리포님 그림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잖아.'

  레오나르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주 해맑고 태연한 표정으로  보티첼리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nbsp; <헤롯왕의 연회>&nbsp; 프라토 대성당 벽화.

 

 

 

 

 

 

 

 

 

  레오나르도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보티첼리의 눈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사내치고는 가녀린 손가락으로 필리포 리피가 그린 <헤롯왕의 잔치> 벽화의 중간 우측을 가리켰다.

  ‘산드로 형. 이제부터 내가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었으면 해. 나는 그림이나 생각이나 모든 분야에 대해서 형하고 아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 그림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는 아직 확실치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방향이나 방법에 약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근자에 들어서면서 깨닫고 있었어. 저기 형의 스승님이 표현하신 장면을 잘 살펴봐줘. 선반위에 그려진 투명 유리병들 말이야. 오늘 내가 하루 종일 반복해서 연습한 것이 바로 거기야. 드러나지도 두드러지지도 않지만 가만히 잘 살펴보면 틀림없이 선반위에 올려 진 것들이 유리병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대충 덧칠을 입힌 것 같이 표현했지만 나는 지금 그 표현력에 크게 감동을 받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하면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저런 표현을 어떻게 하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모든 그림에 옮겨서 담아낼 수 있을까? 필리포 선생님이 살아계셨더라면 정말로 꼭 배우고 말았을 텐데 말이야.’

  레오나르도의 말이 새롭게 들려오기는 했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큰일일까 하고 보티첼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스승께서 그리신 벽화이고 또 더 솔직히 말하자면,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에 남기신 뜻에 따라 제자인 보티첼리 자신이 벽화의 미진한 마감을 대신해서 비로소 완성시킨 그림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벽화의 마지막 손질을 하면서 보티첼리의 눈에도 선반위의 유리병은 눈에 띄었었다. 그에게는 오히려 엉성한 마감이 눈에 걸려서 지워버리려고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 벽의 선반위에 왜 꼭 유리병을 올려놓았어야 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무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하여, 사실은 그 이상 작업하기가 귀찮아서 그대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그 부분을 레오나드로가 정확하게 꼬집어 나왔던 것이다. 그게 이 상황에서 왜 중요한지가 보티첼리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레오나르도. 너의 말대로 유심히 살펴보면 거기에 유리병들이 올려 져 있는 것이 보이겠지. 아니...... 틀림없이 유리병을 그리셨을 거야.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하냐고? 희미하게 지나치듯이 옅게 표현해버린 저것이 왜 중요하냐고?’

  ‘자연스러우니까. 투명함이 그대로 살아있어서 자연스러우니까.......... 저 부분만을 제외한 필리포 선생님의 모든 그림과 산드로 형의 모든 그림을 생각해 보았어. 저런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어.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선생님이나 형이나...... 아니, 이제까지의 모든 화가들 그림 어디에도 저런 표현은 없었어. 산드로 형. 내 말이 좀 어렵겠지만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확 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겠어?’

  ‘레오나르도. 네가 이렇게 진지한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치? 예배당 안에서 사람들 있는데 목청까지 높이고 말이야? 알았으니까 조그만 차분하게 목청을 낮추고 이 형에게 아주 천천히 쉬운 말로 설명을 해 봐. 모두 다 들어줄게.’

  ‘이제까지 화가들은 이런 표현방식을 택하지 않았어. 형의 그림을 예로 들어볼게. 형의 그림은 든든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하지만, 정작 본 작업에 들어가면 스케치를 바탕으로 주요 등장인물이나 배경에 대한 테두리에서 시작하지. 어떤 면을 그려내기 이전에 선 작업이 확실해진 상태에서 색채나 명암으로 면을 채워가면서 형상을 그려내는 방식이라 해야겠지.’

  ‘화가라면 누구나 다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는 것 아니니? 캔버스화이건 패널화이건 심지어 프레스코화 까지도 모두.’

  ‘그래왔어. 맞아. 지금도 어느 공방에서건 도제들이 화병이나 장식장이나 가구에도 똑같이 그렇게 작업을 할 테니까.’

  ‘그래. 그림 그리는 작업의 도구와 대상이 좀 바뀐 것 일뿐, 스케치를 하고 본을 뜨고 색칠을 해가면서 완성을 하는 방식은 공방이나 화실이나 예배당이나 똑 같은 거야. 보석함이나 화병이나 가구에 그림을 그려 넣든 것이 캔버스나 교회의 벽면으로 크기까지 포함해서 달라진 것뿐이지.’

‘형. 테두리가 없어지면 그림은 그릴 수 없는 것일까? 꼭 굵거나 가는 선으로 공간을 사전에 미리 구분하고 사물의 다른 면들을 구분해야만 표현이 가능한 것일까?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형이 저 그림을 그리는데 선반위에 유리병을 그려야 한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 내 생각엔 말이야. 형이라면........ 선반 위에다 꼭 무엇인가를 그려 넣어야만 했다면 말이야........ 형은 유리병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형이 꼭 그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면....... 유리병 대신 대리석 꽃병이나 도자기 화병을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것들은 옅고 가는 선으로 표현 가능하겠지만....... 투명하지 않으니까 선으로 그릴 수 있으니까 라고 말이야.’

  분명 당혹스런 표정이기는 했지만, 보티첼리는 지금 심각하게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야 지금 레오나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티첼리 자신은 저 벽화 속에 유리병을 결코 그려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당찬 동생의 지적에 약간의 동요는 있었지만 결코 불쾌하거나 울화가 치밀지도 않았다. 왜냐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색채나 명암에 의한 표현 이전에 선을 분명하게 하는 기법이 언제나 확고부동한 전제였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선반위의 장식이 필요하면 언제든 무엇으로라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반면에, 그것이 꼭 유리병이어야만 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야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어. 좋아. 그런 표현을 좀 더 다양하게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도 물론 좋겠지. 하지만 그런 애매모호한 표현만으로 가득한 그림이 가능하기는 할까? 여전히 그림은 지금의 방식으로 나아가되, 아주 간혹 이거나 부분적으로는 역시나 배경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런 방식도 충분히 이용이 가능하겠지. 그런데 레오나르도. 네가 불쑥 여기에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인데 어떻게 스승님 그림에 저런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예전에 내가 너를 데리고 왔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세례> 작품 마무리를 하다가 스승님께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는데 스승님께서 실은 과거에도 이런 표현들이 있었다고 하시면서 이 그림 설명을 다시 해 주셨어. 그래서 형을 찾아갔더니 없었던 거지. 난 형에게 먼저 물어보고 싶었다니까?’

  ‘그러지 않아도 <세례>가 마무리되었다기에 수일 내로 화실로 찾아가 보려던 참이었다. 듣자니 네가 그린 천사가 진짜로 압권이라고 벌써 소문이 자자하더라. 베로키오님도 네 솜씨에 여간 감명 받으신 게 아닌 모양이야. 곧 너를 독립시키기로 마음먹으신 모양이던데? 화가 길드(조합)에 너에 대해서 문의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까.’

  ‘스승님은 자꾸 나를 짜증나게 만드셔. 나도 모르게 자꾸만 화가 난다고? 내가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시는 거야.’

  ‘네가 너무 커버린 것이겠지. 그래....... 세례를 그리다가 필리포 스승님의 유리병이 왜?’

  ‘형도 보아서 알겠지만, <세례> 그림의 아래쪽은 요단강이 흐르고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요한은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거야. 그 맑은 물속에 잠긴 사람의 발을 스승님께서 표현해 내셨는데....... 지상에 올라있는 사람의 발을 먼저 그린 후에 그 위에 투명하게 흐르는 물을 덧칠을 통해 그려 내신거야. 너무나 사실적으로 놀라울 정도로 멋지게 표현해 낸 것이라는 것에는 나도 충분히 동의해. 그런데 말이야. 내가 실제로 개울에 가서 발을 담그고 앉아서 한참을 지켜보았어. 그런데....... 스승님 그림하곤 다르더라고. 맑은 수면 아래 잠긴 발은 분명 수면 위에 드러난 발하고는 형체도 질감도 전혀 달라 보였어. 그냥 덧칠을 해놓고서 여기는 물속이니까 그렇게 알아서 보고 느끼면 되는 거야 하고 강요당하는 느낌이랄까? 형이니까 하는 말이야. 스승님께서 이런 이야기 들으면 매우 속상하지 않으시겠어? 수면 위나 수면 아래나 똑 같은 테두리로 확정을 해놓고 그 위에 실루엣처럼 덮어씌우는 것 말고, 테두리 없이 보일 듯 말 듯, 차이가 있는 듯 없는 듯 명암과 채색의 조화로 은근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지 여쭤 보았어.’

  ‘그랬더니....... 베로키오께서 뭐라고 하셨는데?’

  ‘있었대. 오래 전부터 이미 그런 표현을 한 그림이..... 더하여 그런 표현 방식에 대해서 직접 연구를 한 사람이 있다고 하셨어.’

  ‘있었다고? 어디에? 누구야? 어디가면 그런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거야?’

  ‘플랑드르(Flandre)에 가면 직접 볼 수 있다고 하셨어. 플랑드르의 화가 얀 아이크(Jan van Eyck)와 로저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이 그런 표현을 자신들의 작품에 실제로 반영을 했었대.’

  ‘플랑드르? 북쪽의 그 먼 곳을? 뭐 그렇다고 쳐...... 그럼 한참 북쪽지방 플랑드르에는 그런 표현방법이 있었다고 쳐도 필리포 스승님께서 그런 플랑드르의 기법을 어떻게 아셨단 말이지? 그리고..... 그 정도였다면 그런 표현 방법을 왜 여기서는 이제껏 몰랐냐고? 아니지? 베로키오님은 알면서도 자신의 작품엔 활용을 못하셨다는 뜻이잖아? 그 기법의 이름이 무엇인데?’

  ‘그런 표현 기법이 실제로 있기는 한데 아직 베로키오 스승님께서도 활용할 정도로 익숙하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아직 보편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은 붙여지지 않았다고 해.’

  ‘그럼 이참에 아예 레오나르도 기법이라고 해 버리던가 아니면 저 그림에 나타나 있으니까 필리포 리피 기법이라고 붙이던가.’

  ‘저 벽화에 투명 유리병을 필리포님께서 그리시던 자리에 오랫동안 기법 연구를 하시던 웨이던님께서 참관하시면서 직접 기법을 시연해 보이셨거나 세세하게 조언을 해 주셨다면?’

  ‘뭐라고? 그러니까 스승님께서 저 벽화를 그리실 때 웨이던인지 누군가가 옆에서 직접 저 표현 기법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어. 물론 베로키오 선생님의 설명도 그와 유사하고...........’

  ‘안되겠다. 레오나르도. 네가 시작한 일이니까 앞장서서 화실로 나를 인도하렴. 그런 이야기를 베로키오님에게 직접 들어야만 하겠고, <세례> 작품도 내친김에 오늘 꼭 보아야만 하겠다. 우리 동생이 화실을 독립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이 형이 직접 보고나서 오늘 판단해 주마.  서둘러 피렌체로 가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作 <그리스도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그리스도의 세례> 중에서 왼쪽의 천사와 배경의 일부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솜씨다.(와! 역시 레오나르도!)

 

베로키오의 화실에서 <그리스도의 세례> 마무리 작업에 참여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른방의 인물은 보티첼리라 여겨도 무방하겠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 함께 오스만 세력에 밀려 수많은 인문학자와 오랫동안 잊혀졌던 고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이 시칠리아와 몰타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들 중에 핵심적인 인물들이 반도 중북부의 피렌체로 몰려들었다.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당시 가장 돈이 넘쳐나는 부유한 도시이자 공화국 체제를 갖춘곳이 바로 피렌체였기 때문이다. 돈이 넘쳐나면 당연히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게 되고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비슷한 공화국 정치 사회제도가 정착된 비교적 선진적으로 열린 사회였던 피렌체야 말로 당시로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살기 좋은 도시였기 때문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토양에서 자라난다. 

  피렌체에서 태동한 르네상스는 아래로는 로마로, 북쪽으로는 베네치아와 밀라노 등지를 지나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비로소 찬란하게 문예부흥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혹은 한참이나 앞서서 중세의 말기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가 태동하기 이전에........ 이곳만은 새롭게 등장해 무섭게 기세를 올리고 있는 르네상스 문예사조의 영향권에서 뚝 떨어져 한참이나 벗어나 여전히 고딕시대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주 독특하고 유일한 지역이 있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문명권은 알프스 이북의 지역을 고트족의 야만사회(고딕문화)라고 폄하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문명권은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새로운 시대를 한참 열고 있는 시기에, 알프스 너머의 야만지역이라 폄하 받는 지역의 한 곳에서는 르네상스에 결코 뒤지지 않은 고딕시대의 마지막 불꽃이 여전히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바로 플랑드르(Flandre) 지역이다. 영어 표현으로는 유명한 ‘플란더스의 개’에 등장하는 지역으로 팔란더스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네덜란드 일부와 벨기에의 지대가 낮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유럽의 중심이었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를 기반으로 르네상스가 번영했다면, 대서양 지역의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폴랑드르 지역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교역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폴랑드르 지역은 여전히 고딕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비잔틴의 몰락과 십자군 전쟁을 통해 새로운 문물이 폴랑드르 지역에도 흡수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딕문화를 고집하면서 고딕문화의 바탕위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온 유럽의 주류를 이루는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 문화와는 별도로 알프스 한참 북쪽의 폴랑드르 지역만은 여전히 고딕문화와 예술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잔틴에서 건너온 인문사회학과 미술이 피렌체와 시에나의 경쟁구도 속에서 지오토를 만나면서 새로운 회화 기풍이 탄생하게 되었고, 마사초를 거치면서 비로소 르네상스 미술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시기에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반도와는 다르게, 뚝 떨어진 폴랑드르에는 얀 반 아이크와 로지에 잔 데르 웨이던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폴랑드르화파 라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자신들만의 미술세계를 펼쳐갔던 것이다.

  프레스코화와 템페라화(계란 노른자에 색재료를 섞어서 물감으로 사용)가 전부이던 시절에 오늘날의 유화물감을(계란 노른자 대신 파마자 오일을 사용) 개발하여 색감과 질감을 살려낸 사람이 바로 폴랑드르의 반 아이크 형제였던 것이다. 동생인 얀 반 아이크가 그린 <켄트의 제단화>는 선명하고 유려한 새로운 물감과 더불어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간 미술사적 새로운 선진문물이 플랑드르에서 시작해 오히려 이탈리아 반도로 역수입되어 르네상스가 찬란하게 빛나는데 커다랗게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더불어 로저 반 데르 웨이던(Rogier van der Weyden)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숙녀의 초상화> 등은 오히려 르네상스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탈리아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정도였다. 플랑드르파의 영향력이 르네상스에 크게 작용했고, 여기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르네상스 미술이 베네치아에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우고 나서 다시 폴랑드르 지역에까지 넘어가서  새롭게 거듭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특히 반 데르 웨이덴은 새로운 미술 기법에 유독 관심을 가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회화 방식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화가에 따라 저마다 표현 기법을 달리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나가 이 기본이자 전부인 네 가지 기법을 습득하여 혼합시켜 나름 자기의 방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스푸마토 기법, 칸거인 기법, 치아로스쿠로 기법, 유니온 기법이 그것들로 여기에서는 세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며, 차후에 상황에 따라서 부연 설명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금....... 플랑드르의 화가 반 데르 웨이덴이 관심을 가지고 나름 연구에 매진했던 회화 방식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비로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 기법을 후대 미술사는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적고 있다.

  스푸마토(Sfumato)는 이탈리아어 푸모(fumo)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영어에서는 스푸마토를 ‘부드럽고, 모호하고, 흐릿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스푸마토 기법을 조금 쉽게 풀어내 본다면, 보통은 선명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선을 이용해 테두리를 그어서 구분을 하지만, 스푸마토 기법에서는 색상과 색조 사이에 미세한 음영의 차이를 두어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이미지 전환을 꾀하는 방식이다. 가장 밝은 부분(하일라이트)과 가장 어두운 부분 사이에 미묘하게 그라데이션(색상 혼합)을 반복해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는 화면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뿐만 아니라 미묘하고도 신비로운 느낌을 전달 가능하게 해 준다. 그림을 살펴보면 인물과 인물사이나 표정에 분명한 선(테두리)이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신기하게 연기처럼 가물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보티첼리의 초상화들을 비교해 보면 ‘아하! 스푸마토 기법이란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하고 단박에 아주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하여, 세상에는 스푸마토 기법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창안해 냈다 하는 이야기들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여러 책자와 방송에서도 그런 표현들이 나온다.

  하지만 아니다. 결코 아니라는 말을 나는 분명하게 밝혀두고 싶다.

  이런 낭설의 근원으로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가 쓴 <미술가 열전((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을 꼽고 있는데....... 글쎄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와 미술품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서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더없이 소중하고 훌륭한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때로는 왜곡되고, 심지어는 허구에 가까운 이야기들과 지극히 개인적 주관에 입각한 지나친 평가 등으로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생존했을 당시나 주변에서 벌어지지 않았던 사건에 대해서도 직접 목격한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당시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이다 보니 이런 신뢰와 불신의 사이에서 엄청난 갭이 여러 군데서 생겨났다. 고로...... 유익하기는 하되 아주 신중하게 그 진위를 가려서 선택해서 사용 할 필요가 절실한 애물단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선상에서 바사리는 ‘스푸마토 기법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서 창안되었고 모나리자를 통해 극한의 완성을 보였다’라고 적고 있다. 스푸마토 기법을 가장 훌륭하게 완성시킨 작품이 <모나리자>라는 평가에는 나 역시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위에서 표현하려 했던 것처럼 스푸마토 기법의 시작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바사리의 주장을 강하게 부정한다. 여러 자료들이 레오나르도에 앞서서 이 기법을 연구했고 실험적으로 사용했다는 기록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푸마토 기법이 로저 반 데르 웨이던에 의해서 창안되었고, 웨이던 자신과 얀 반 아이크를 통해서 알프스를 넘어와 필리포 리피를 거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러 만개했다고 한다면 나는 어느 정도 찬동했을 수도 있었겠다.

  겨울이 지나면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진리다.

  하지만, 그 봄이 딱 꼬집어서 3월 17일부터인지, 4월 3일부터인지, 아니면 좀 늦게 5월 7일부터가 봄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딱 꼬집어서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혹 ‘바사리가 3월20일에 봄이 시작 된다’고 했다손 치더라고....... 그것을 믿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왜!!!! 진리가 아니니까.

  하여, 스푸마토 기법의 창안에 대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언급한 바사리의 주장도 전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아주 주관적인 생각이다.

  바사리가 써내려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와 미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모두 평가절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취사선택에 신중해야만 하겠다는 생각 또한 추호도 변함이 없다.

  바사리가 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한 기록을 보자. <모나리자>는 ‘스푸마토 기법에 의한 레오나르도의 훌륭한 작품이며’ 까지는 좋은데........ 등장인물인 여성을 지목하였는데 현재에도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하여 바사리의 주장을 외면하는가 하면, 심지어 ‘모나리자의 얼굴을 살펴보면 유독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빛나는 눈썹이 매혹적이다’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다른 모나리자를 보았거나, 아니면 모나리자를 보지 못했으면서 상상력을 동원해 적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했음에도 나는........ ‘바사리 회랑’을 보면서 그를 한껏 칭송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오늘날에도 플랑드르 미술을 떠올리게 되면 가장 먼저이자 가장 크게 기억으로 떠오른 화가가 바로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라 하겠다. 반 아이크야 말로 플랑드르 회화의 선구자이면서, 동시에 이탈리아에서 전해온 새로운 문명 사조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서 북유럽 르네상스에 어마어마한 영양을 끼친 개척자였다. 다음으로는 얀 반 아이크의 노력과 헌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최고의 수혜자로 모든 영광과 부와 명예를 누린 루벤스(Peter Paul Rubens)를 꼽지 않을 수 없겠다. 그 영광이 어찌나 컸었던지 후세사람들은 루벤스를 변방 플랑드르의 화가로 보지 않는다. 루벤스는 르네상스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화가로서 최고의 명성과 부와 명예와 인기를 한 몸에 가득 누렸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당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 화가들에 대한 인기투표를 했었더라면 아마도 절대적 인기와 지지로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을 대표적 화가가 바로 루벤스였다. 그 다음을 꼽는다면...... 모든 면에서 루벤스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를 꼽는데 있어서 촌각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들을 ‘플랑드르 회화의 삼총사’라고 부른다.

  플랑드르의 지역의 독특한 기후와 자연조건과 생활풍습과 전승되어 내려온 북방의 전통은 매우 독특한 플랑드르 회화만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플랑드르 회화 삼총사 이후로도 반 고호나 브뤼겔 등 수많은 훌륭한 화가들이 이곳 플랑드르에서 배출되었다.

  그런데, 플랑드르 회화의 시작을 이야기 할 때나, 플랑드르 회화의 역사를 평가할 때, 항상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로 바로 로저 반 데르 웨이던(Rogier van der Weyden)의 이름이 꼭 거명된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미술과 플랑드르 회화를 찾다보면 곳곳에서 반 데르 웨이던을 만날 수 있다. 당시에 그는 얀 반 아이크와 더불어 한 시대를 이끌어가던 훌륭한 개척자이자 경쟁자이자 얀 반 아이크에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던 최고의 화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관심과 인기가 시들어지기 시작했다. 미술사에 관심이 아주 많거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반 데르 웨이던에 대해서 알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화가로서의 그의 능력과 인기와 평가가 플랑드르라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인정받았었느냐 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니다. 그는 유럽의 전역에서 큰 호응과 인기를 누렸던 화가다. 귀족이나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치고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피렌체의 코시모 메디치였다. 코시모 메디치가 관심을 가졌다면...... 실제로 여러 작품을 코시모 메디치가 실제로 주문했다는 사실을 본다면 반 데르 웨이던이 어떤 존재의 화가였는지는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반 데르 웨이던의 작품 상당수는 당연히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에 많이 남겨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작품들이 스페인 지역에 소장되어 있다. 물론 지역적으로 중간쯤인 독일과 프랑스 루브르에도 상당수의 작품이 남아있다. 여기에는 반 데르 웨이던의 인기가 워낙 유럽 전역에서 높았으며, 1445년 경 한동안 스페인을 여행하고 체류하는 동안에 많은 작품을 그곳에서 그려서 남겼던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코시모 메디치는 반 데르 웨이던의 작품을 가지게 되었을까?

  반 데르 웨이던은 새로운 미술 기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많은 화가들과 교류하기를 워낙 좋아해서 틈만 나면 여행을 즐겼던 자유분방한 화가였다.

  그런 반 데르 웨이던에게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로망이 생겼다. 지오토(Giotto)가 파도바의 스코니베니 성당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 <최후의 심판>을 꼭 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일단은 무조건 이탈리아로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떠났다. 이번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당연히 파도바였다. 지오토의 <최후의 심판>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훗날 그가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들을 보면 이 당시의 충격과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해 볼 수가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다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달랐다. 모든 것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는 이탈리아에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여행은 곧 장기체류로 변했다. 그는 수년 동안 자유로운 영혼은 여행자로 그냥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이미 반 데르 웨이던의 명성을 알고 있던 수많은 이탈리아의 지식인들과 화가들이 그와 교류하기를 원했다.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대희년을 맞이하여 세상이 온통 축제였다. 플랑드르가 전부였던 웨이던이 스페인 여행에서 길을 떠나면 너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로마에서 웨이던은 세상의 중심이 어떤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몇 년이 하루같이 훌쩍 지나자 반 데르 웨이던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였고 자신의 본분을 깨달았다. 그는 본시 화가였다. 그런 화가가 몇 년 동안 붓을 놓고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새로운 체험을 통해 공부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화가로 돌아가야 했고, 그것은 곧 다시 서둘러 고향 플랑드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로마에서 플랑드르로 육로를 택해 가자면 우선 피렌체를 지나야 한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가서 알프스를 넘어야 플랑드르에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반 데르 웨이던은 마침내 피렌체에 도착하였는데....... 부르넬리스키의 두오모 돔이며, 기베르티와 도나텔로의 작품들은 물론 여기저기 널려있다시피 한 것이 지오토와 마사초와 인근 시에나의 두오초와 시모네 마르티니의 그림들로 넘쳐났으니...... 웨이던은 그만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마사초의 그림을 보려고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사제(성직자) 신분의 화가로 유명한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를 만나 회화라는 관심사를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그가 입을 열 때 마다 쏟아져 나오는 회화 이야기 끝마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의 <신곡(神曲(신곡)> 이거나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데카메론(Decameron)>이 술술 실타래 풀리듯 이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피렌체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런 수준의 지식 정도는 기본이라는 말인가? 이거 완전히 딴 세상이잖아?’

  웨이던은 엄청난 새로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만..........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도 잊고 피렌체에 주저앉고 말았다.

  체류하면서 안젤리코를 통해 필리포 리피와 안드레이 베로키오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이들 화가들을 든든하게 지원해주던 피렌체의 실질적 권력자 코시모 메디치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코시모의 웨이던 환대는 대단히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의 피렌체 체류를 모두 지원하겠다고 코시모 나섰던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코시모는 정식으로 반 데르 웨이던에게 피렌체에 체류하는 동안에 여러 작품을 그려달라고 직접 주문을 해왔던 것이다. 여러 작품을 의뢰했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코시모 메디치는 반 데르 웨이던의 그림을 소장하게 되었을까?

  반 데르 웨이던이 피렌체를 떠나 페라라에서 피에르 델라 프란체스카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만나기 전까지 피렌체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런 다음 비로소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플랑드르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웨이던의 가슴속에는 인물화를 그리는데 있어서도 원근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깨우침을 가지고 돌아가 이후의 북방 르네상스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고 전한다.

  반 데르 웨이던이 코시모 메디치의 주문을 수락하고 피렌체에서 작업에 들어간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여 진다. 다만 어떤 작품을 과연 몇 점이나 그려서 남겼는지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짐작되는 한 가지는............ 지금 우피치 미술관에 가면 분명하게 로저 반 데르 웨이던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 이란 작품이다. 추측컨대...... 이 당시 피렌체에 체류하면서 웨이던이 그린 그림들이 오랜 시간동안 외부로 모두 반출되고 한 작품만 남은 것인지....... 찾아보면 수장고 어디엔가 더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한 작품만 남기고 떠난 것인지는 이글을 읽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로저 반 데르 웨이던은 프렌체에 머무는 동안에 프라 안젤리코를 만났다. 코시모 메디치가 부르넬리스키나 도나텔로에 이어서 프라 안젤리코와 필리포 리피는 물론 여러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웨이던과 코시모 메디치도 만났고, 그림을 남기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반 데르 웨이던과 필리포 리피가 만났을 것이며...... 그런 사건과 영향력이 마침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까지 연결되었으며, 그런 결과로 스푸마토 기법이 끝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러 활짝 피어나게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로저 반 데르 웨이던作. <그리스도의 매장>&nbsp;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레오나르도. 너는 틀림없이 아주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이것은 보티첼리의 진심이었다. 베로키오의 화실에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온 15살의 레오나르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이 탁월한 천재의 진면목을 눈치 챘던 것이다. 놀라운 깨우침과 곧바로 자신의 것으로 습득해 버리는 능력에다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안목으로 모든 사물을 예리하게 살피고 그것을 분석하는 능력과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하는 놀라운 집중력은 보티첼리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보티첼리는 이 아이가 천재라는 사실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소리. 언제까지 자꾸 놀리기만 할 거야? 나는 기껏해야 베로키오 화실의 견습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형이야말로 필리포 스승을 추월해나가고 있는 피렌체 화가조합(길드)의 새로운 주인공인 알레산드로 필리페피가 아닌 산드로 보티첼리잖아. 모두가 형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고 있잖아. 형이야말로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고 나는 더 부지런히 노력해서 반듯이 형을 쫓아갈 거야.’

  ‘이름가지고 장난은 그만치고........ 레오나르도. 이건 형의 진심이야. 아마도 너는...... 이제까지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다신 없을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나는 그걸 알아.’

  보티첼리는 자신에게는 아예 없거나 부족한 능력을 레오나드로는 태생적으로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때로는 시기심으로 미워도 했고 차라리 멀리하려고도 해보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레오나드로가 보티첼리를 죽어라 쫓아다니면서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보티첼리에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돌보고 이끌어주어야 할 동생이 하나 생긴 것이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프라토 대성당에 스승인 필리포가 그린 <헤롯의 잔치>를 마지막으로 손질한 것이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지적한 벽면 선반 위의 투명한 유리병에 대해서 자신도 한참동안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보티첼리의 시선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였고, 그곳에 유리병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여 꽃병으로 바꾸어버릴까 아니면 신화에 나오는 작은 조각상으로 바꿀까 고민을 해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 생각하거나 다시 구현해 볼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지금 레오나르도가 세세하게 설명을 이미 했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은 애초부터 보티첼리가 지향하고 나아가려는 작품세계에서는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이미 내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오나르도. 너는 틀림없이 아주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이것은 보티첼리의 진심이었다. 베로키오의 화실에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온 15살의 레오나르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는 이 탁월한 천재의 진면목을 눈치 챘던 것이다. 놀라운 깨우침과 곧바로 자신의 것으로 습득해 버리는 능력에다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안목으로 모든 사물을 예리하게 살피고 그것을 분석하는 능력과 시작하면 끝을 보아야 하는 놀라운 집중력은 보티첼리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보티첼리는 이 아이가 천재라는 사실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소리. 언제까지 자꾸 놀리기만 할 거야? 나는 기껏해야 베로키오 화실의 견습생에 지나지 않는다고? 형이야말로 필리포 스승을 추월해나가고 있는 피렌체 화가조합(길드)의 새로운 주인공인 알레산드로 필리페피가 아닌 산드로 보티첼리잖아. 모두가 형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 하고 있잖아. 형이야말로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고 나는 더 부지런히 노력해서 반듯이 형을 쫓아갈 거야.’

  ‘이름가지고 장난은 그만치고........ 레오나르도. 이건 형의 진심이야. 아마도 너는...... 이제까지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다신 없을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나는 그걸 알아.’

  보티첼리는 자신에게는 아예 없거나 부족한 능력을 레오나드로는 태생적으로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때로는 시기심으로 미워도 했고 차라리 멀리하려고도 해보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레오나드로가 보티첼리를 죽어라 쫓아다니면서 결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보티첼리에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돌보고 이끌어주어야 할 동생이 하나 생긴 것이다.

  오늘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프라토 대성당에 스승인 필리포가 그린 <헤롯의 잔치>를 마지막으로 손질한 것이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지적한 벽면 선반 위의 투명한 유리병에 대해서 자신도 한참동안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보티첼리의 시선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였고, 그곳에 유리병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여 꽃병으로 바꾸어버릴까 아니면 신화에 나오는 작은 조각상으로 바꿀까 고민을 해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 생각하거나 다시 구현해 볼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지금 레오나르도가 세세하게 설명을 이미 했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은 애초부터 보티첼리가 지향하고 나아가려는 작품세계에서는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이미 내려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보티첼리가 베로키오의 화실(공방)으로 찾아가는 이유는 베로키오의 작품이지만 왼편 하단의 천사 한 명과 배경의 상당부분을 레오나르도가 맡아서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가 완성되었다는 말에 직접 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런 관심과 호기심의 대부분은 ‘과연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은 어디까지일까’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당장 보티첼리 자신의 화실에도 한참 마무리 작업 중인 <동방박사의 경배>가 마침내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세례>와 <동방박사의 경배>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시작과 완성을 같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초기 작업으로 여러 장의 스케치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캔버스 위에 그림을 옮겨가는 시게에 한 번 레오나르도에게 이 그림을 보여준 이후로는 여태껏 이 그림을 보여주지도 그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게 되었다.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에 대해서 다짜고짜 엄청나게 혹평을 가해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혹평에 크게 화가 나는 것도 열띤 논쟁이나 설전이 오고간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냥 무덤덤하게 사태는 지나갔고 두 해 이상이 지나도록 두 사람 사이에 <동방박사의 경배>에 대한 이야기는 쓱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기려 애를 쓰지만, 어디까지나 그 아름다움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철저한 과학적 이론의 바탕위에다 단순하면서도 이상적으로 재현 시키겠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천재였다. 그러다보니 다분히 돈과 명성만을 쫓는....... 당시의 시대를 대표한다고는 하지만 다분히 탐미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피렌체 인본주의 학자들 주장에만 놀아난다 싶은 아류의 화가들을 경멸했다. 여기에 보티첼리 자신의 화풍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하긴 당시의 화가치고 레오나르도의 경멸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는 화가가 몇이나 되었을까 싶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주문한 사람은 델마라라는 피렌체의 금융 중개인이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은행인 메디치 은행의 그늘에서 중개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이 그림은 델마라가 메디치 가문에 헌정할 목적으로 주문된 작품이었다. 델마라는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박사의 경배 구절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되, 등장하는 세 명의 동방박사 대신에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 즉 창시자 코시모를 비롯해 그의 두 아들 피에로와 지오반니를 비롯해 손자인 로렌초와 줄리아노까지 다섯 명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을 그려 넣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가뜩이나 교회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이던 레오나르도에게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질 욕심과 천국에서의 영생을 노리고 성화(聖畫)의 내용까지 돈으로 왜곡하려는 시도에 심한 분노를 가졌던 것이다. 보티첼리로서는 참으로 아픈 구석을 제대로 찔리고 만 것이다. 큰돈을 지불하겠다는 주문이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적 문제였지만........ 그런 현실을 과감하게 부정하고 깨부수려는 레오나르도의 패기와 용기 앞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후론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에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어느 정도의 자격지심이었을까? 이 그림의 오른쪽으로 무엇인가 불만에 차 있는 듯 고뇌하는 표정의 보티첼리 자신의 모습까지 그려 넣었다. '레오나르도. 나도 마음만은 너와 별반 다를게 없었어. 믿어 줘.

  ‘형이 추구하는 화법으로는 결코 그려내지 못할 거야.’라는 단호한 레오나르도의 지적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보티첼리의 속내가 결코 편할 수만은 없었다. 그 표현에는 자신은 그것을 그려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포함되어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능력과 방법으로는 극복해 낼 수 없다는 말에 스스로 공감하고 동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신과 분명히 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지금 당장 그가 그린 <세례>의 천사 모습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미 자신이 보았던 레오나드로의 천사 모습과 자신이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머릿속으로 비교해 보고 있었다. 달랐다. 아니....... 다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굳이 자신이 못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승인 필리포 리피나 프라 안젤리코나 세상으로부터 이미 공인받은 만테냐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코의 그림들도 자신의 그림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 같이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고 있었다. 적어도 보티첼리 자신의 그림도 그런 범주에서 하나도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이 가슴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지? 이 마음 한쪽에 응어리진 찝찝함은 말이다.’

  보티첼리는 옆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땀을 흘리며 열심히 걷고 있는 레오나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으로 레오나르도가 지지난해 완성해서 자신 있게 세상에 내놓았던 <수태고지>가 펼쳐지고 있었다. 베로키오의 화실에서 화가 지망생으로 시작하여 견습생 생활을 하던 레오나르도는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더니 마침내 스승 베로키오가 주문받은 <그리스도의 세례> 작품에 동참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제자를 열심히 가르치고 실력을 키워서 자신의 작품 활동에 참여케 하는 것은 교육의 일환일뿐더러 더없이 훌륭한 경험이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스승들의 기쁨이자 자랑이던 시대였다. 하지만 제자인 레오나르도의 생각은 달랐다. 작품이란 이름을 내 건 작가의 명예이자 참 가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나의 완성된 작품에는 오로지 그 작품 하나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작가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야 진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여 그는 스승일지라도 다른 화가의 작품에 자신이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끌려가는 심정으로 임했다. 겉으로 번히 드러나는 그의 심사를 헤아려 베로키오는 처음으로 레오나르도로 하여금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도록 허락했다.

  베로키오의 화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 떡하니 처음 그려 낸 정식 등단 작품이 바로 <수태고지(Annunciation)>으로 (성모 영보)라 부르기도 하는 작품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구세주를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는 신약성서의 내용이 소재이다. 21살의 화실 견습생이 생애 첫 작품으로 그려냈다는 작품이 저런 정도였으니 스승인 베로키오나 한참 선배인 보티첼리가 받은 감동과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짐작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겠다. 이때부터 스승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의 독립을 심각하게 고심하게 되었을 것이며, 아마도 이미 시작한 <세례>가 끝날 때까지만 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이 희대의 천재는 자신의 잠재력이 아닌 실제의 실력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수태고지>와 <동방박사의 경배>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속에서 보티첼리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기 시작하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름으로 그린 생애 첫 작품. <수태고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보티첼리가 델마라의 주문으로 메디치 가문을 위해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레오나르도 다빈치作. <리타의 성모(The Litta Madonna)> 러시아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별자리를 보고 구세주가 태어난 것을 알아 챈 소아시아지역에 거주하던 세 명의 동방박사가 찾아와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안겨있는 아기예수를 만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주문자의 요청대로 세 명의 동방박사 대신에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대신 그려지게 된 그림은 당시 미술의 흐름을 잘 말해주듯이 다분히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 안정적 구도 속에 화려함과 다양성을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역시나 르네상스의 거장답게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들이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자연스럽고 더없이 섬세한 표현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게 되는 명작이다.

  다만, 가만히 살펴보면 볼수록 그림의 중심이 되는 성모 마리아가 앉아있는 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가 하면, 신체적 구성과 비율이 어딘지 모르게 잘못 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거기에다 아기들은 자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부쩍 자라게 마련인데, 무릎에 앉아있는 아기예수는 아직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작게 그려져 있다. 더군다나 아기의 다리를 보면, 너무나 작게 그려진 아기예수의 신체구조는 또 어디 헬스클럽에서 만날 수 있는 건장한 사내의 신체구조처럼 늘씬하다. 그런가하면 등장인물들의 손이 저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있지만 대부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이다. 신체구조상 그리긴 그려야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만화적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아기예수 부분과 손동작 부분들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과 입체감이 부족한 느낌이다. 보티첼리의 스케치 실력이 다른 화가만 못해서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보티첼리가 부분 묘사를 잘못한다거나 색채를 잘 사용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스케치와 표현력이나 색채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질 것이 없는 보티첼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어색함과 부족함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가 아직 르네상스 초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그 당시까지는 테두리(선)가 대단히 중요시 되었던 시기였고, 그렇게 밖에 그릴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손가락 마디 사이와 사이에도 선(테두리)이 들어가 구분을 지어야 했고, 마리아의 손이 아기예수의 겨드랑이에 들어가는 부분의 경계도 분명하게 선(테두리)이 들어가 구분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아주 작게 손을 그려야만 하는데, 당시로서는 아무리 작을지라도 분명하게 선으로 그려서 구분을 지어야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양이 좀 이상하던 크기가 좀 이상하던 그런 정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 윤곽선(테두리)이 너무 강하면 아무리 묘사력이 뛰어나고 색상을 잘 다룬다 하더라도 자연스런 공간의 느낌이나 입체감은 희생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보티첼리뿐만이 아니라 지오토에서부터 마사초나 필리포 리피나 만테냐나 피에트로 페루지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가 똑같이 겪고 있는 그 당시까지의 회화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한계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었느냐? 언제가야 개선되느냐?

  지금 이글을 써내려가는 내용의 도중에 그런 불편한 어색함이 해결되고 있지 않은가? 보티첼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 아래 올려 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가 이제까지의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레오나르도에 의한 스푸마토 기법의 활용이 그 해결책이었다.

  스푸마토 기법의 최고봉은 당연히 <모나리자>라고 하지만, <리타의 성모>에서 더 확연하게 느껴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아기예수의 모습 전체에서 스푸마토 기법을 볼 수 있지만,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손을 보자. 자연스러운 표현은 입체감을 넘어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사진속의 손처럼 보인다.

스푸마토 기법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나는...... ‘<모나리자>를 그리는 것 보다 차라리 <리타의 성모>를 하루 종일 그냥 쳐다보고 있어’ 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보티첼리의 그림과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다.

  보티첼리의 그림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플라톤주의 영향이 아주 강한 다분히 초기 르네상스적인 그림’이라고 하겠고,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충분히 계산을 해본 뒤에 비로소 캔버스나 벽면에 옮겨진 과학을 색채로 풀어내는 위대한 서사시’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다분히 과학적이다. 보티첼리나 다른 많은 화가들에게서 보여 지는 형이상학적인 구도나 상황설정 등은 통하지가 않았다. 신화도 레오나르도의 손에 들어가면 수학적으로 계산을 해야 했고 과학을 끌고 와서 구성에 있어서도 원근법이 정확하게 들어맞아야만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론과 논리가 정연해야만 그림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르넬리스키로부터 투시도법(선원근법)을 배웠고, 30구 이상의 인체해부를 통해 신체의 비밀을 깨달았으며, 전승되어오던 스푸마토 기법을 완성시켜 모든 화가들에게 널리 알린 것은 평소 그가 과학과 수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였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이후로 르네상스 미술은 보다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아마도 그 첫 수혜자라면 나는 라파엘로를 꼽겠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회화에는 레오나르도의 고심처럼 과학적이며 수학적인 반영이 필수적 요소로 작용하게 되지만, 그런 것들이 꼭 누구에게나 반듯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보티첼리 같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되는 부류라 할 수 있겠다.

  그는 고대 이래로 수없이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서 오늘에 이른 고전적 회화에서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의 신화나 전설들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불문율처럼 통용되던 고전적 해석과 구시대적인 표현 방법이 더 잘 어울린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보티첼리의 그림은, 혹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지극히 매혹적일만큼 아름답다. 앉아있는 자세나 숙여진 고개가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큼 약간 부자연스럽다거나 손이 어색하게 매달려 있는 느낌이라던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전체적 묘사를 위해서 부분 부분의 테두리(선)의 강조에서 파생되는 미흡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을 그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듯 보인다. 전체적 화면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과학적이며 수학적인 비판에 대해서 아예 무시해 버리거나 그 지적들을 스스로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푸마토 기법이 대중화된 이후에도 보티첼리만의 그런 특징은 전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그리스도의 세례>가 모두 끝났다고 했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럼 이제부터 정식으로 베로키오 화실을 나와서 너의 작업장을 가져 볼 생각이니? 베로키오께서도 네가 그럴 때가 되었다고 느끼시는 것 같은데.’

  ‘산드로 형.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했잖아. 아직은 배우는 입장이고 당장 독립할 생각은 없다고 말이야. 나는 그냥 지금 화실에서 내 방식으로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러면서 부족한 부분은 스승님께 좀 더 배우고 싶어. 내가 자꾸 짜증스러운 것은...... 자꾸만 스승님 그림을 부분적으로 대신하는 작업이 싫다는 거야. 이젠 당연한 것처럼 이 그림 저 그림에 과제를 내리듯이 시키신다니까? 그런 내 그림이 아니잖아? 나는 이젠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야. 화실에 견습생이던 화가 지망생이던 대부분 어떤 방식으로든 스승님의 그림 작업에 참여하고 있단 말이야. 물론 교습비에 생활비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시키는 대로 모른 척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많이 부려먹고 있어. 아니 부려먹는다는 말은 취소할래. 다만 지금 화실에서 만들어지는 스승님 작품에는 진짜로 스승님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야. 스케치 해놓고 나서 색채를 입히다 말고 누군가에게 내밀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를 완성시키고....... 나중엔 그것이 스승님 그림이라고 사인만 해서 팔려나가....... 화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고, 그 그림은 화가 본인이 그려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그리지 않은 그림을 내 그림이라고 버젓이 내놓고 팔수가 있느냐고?’

  ‘인기 좀 있는 화가다 하면 누구나 다 그런 세상 아니야? 필리포 스승님도 그랬어. 정도는 훨씬 덜했지만 말이야. 베로키오께 작품 주문이 쇄도하니까 놓치기는 싫어서 그러시는 것이겠지. 너와 다른 견습생의 실력을 인정하니까 그렇게 시키기도 하겠고. 어차피, 그 일이 그 정도라면....... 독립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레오나르도. 그럼 너는 네 그림을 오로지 혼자만 그릴 생각이니?’

  ‘응. 내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내 손으로 완성시킬 거야.’

  ‘유명해지면 주문이 밀려들 텐데 죽어라 혼자만 하다보면 납기를 못 맞출 거고, 그래서 주문이 줄어들게 되면 밥을 굶게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불쌍하고 가난한 레오나르도가 되는 거고.’

  ‘주문이 없으면 차라리 굶으면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 되지? 그리고 나는 다른 궁금하고 공부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주문이 없다고 해도 크게 걱정은 하지 않을것 같아.’

  ‘그것은 나하고 생각이 같네. 나도 내 그림은 내 손으로 그려야 하는 것이라 생각해.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견습생이나 제자가 들어오면 기초는 가르치되 숙달되었다 싶으면 제 그림을 그리게 만들어 줘야지. 물론 캔버스 밑바탕 칠이나 약간은 교육 삼아서 시키겠지만........ 어쨌거나. 네 그림을 그리려면 넌 이제 독립해야만 하겠다.’

  ‘정이 그렇다면 개인 화실을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밖에.......’

 

  화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를 화가가 직접 손을 대야 그 화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어찌 보면 화가라는 직업의 태생적 한계이자 문제였을 수 있고, 화가라는 직업이 처음 생겨난 르네상스 초기부터 이미 불거진 문제였다.

 

 

 

 

 

 

 

 

 

 

 

 

  위에서 제기한 문제점에 대하여  ‘어디까지가 화가의 몫인가?’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려면 내놓은 그림의 몇 퍼센트 정도를 직접 그려야 하는 책임인 것인가?’ 등의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도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화가)라는 직업이 르네상스 초기에 생겨날 때부터 이미 골치 아픈 문제로 크게 대두되었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분쟁이 그 때문에 생겨났고, 수없이 많은 재판이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판결도 제각각 이었다. 상황들이 다 달랐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원하는 법률가와 변호인의 능력에 따라 판결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미술역사의 태생적 한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치명적 치부가 아닐까 싶다. 소위 예술이라는 것이 행해지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더하여 그 대상이 되는 작품이 유명하거나 천문학적 가치를 가진 유명한 작품일수록 더 심각하게 문제를 일으킨다. 입으로는 작품의 희귀성과 예술적 가치를 말하지만........ 모든 문제의 핵심은 결국 돈(money)으로 귀결된다. 돈으로 환산해서 엄청나게 고가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판명되지 않는 예술작품에는 소유권을 놓고 분쟁과 재판이 따라다니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예술작품에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고부가 가치가 없다고 친다면........ 어쩌면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저 좋아서...... 취미 생활로 그리고 만들고 해서 자신만의 공간에 놓아놓고 보는 즐거움이 전부라면 명작이나 명품은 사라지게 될까?

  아닐껄????? 

  장사꾼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저자거리에 굴러다니는 항아리도 장사꾼의 능력과 수완에 따라서 보물이 될 수도 있고 국보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문제의 핵심은 예술가들이 아니라...... 거간꾼(장사꾼)들의 속셈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근자에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유명한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유명한 가수 출신의 조 화백께서 그린 그림의 매매 과정에서 진위여부가 문제가 되었고 결국 최종 결론이 재판정에서 가려지기도 했다. 직접 작가의 손으로 그려진 부분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급여를 받고 기능을 제공한 사람은 아이디어나 스케치 부분이거나, 최소한의 초벌 작업만 작가가 했을 뿐 모든 것은 자신이 그렸기에 진품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화가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붓 칠만 몇 번 했던 자신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스타일로 그려졌고, 마지막 완성을 작가가 판단해서 싸인까지 마쳤다면 어디까지나 작자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돈(money)이었다. 모든 것은 돈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작가는 별로 한 일이 없음에도 예를 들어 작품 한 점에 삼천만 원씩을 받고 미술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치자. 그런데 죽어라 매달려서 작품을 완성한 기능인에게는 한 작품에 백만 원을 주었다면, 그렇게 그려서 팔려나간 그림이 수없이 많았다면....... 그래서 기능인은 억울하고 손해 본 것 같아서 대폭적 임금상승을 요구하였다가 무참하게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꼴이 되었다면....... 너무도 억울해서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해버린 것이다. 만약에 그 미술작품들이 기껏 한 오만원에서 십만 원 정도였다면 이런 문제로까지 비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게 예술로서의 미술작품에 대한 문제인가? 아니면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의 양심에 관한 문제일까?

  아무튼 이 문제의 판단은 법정에서 판사에 의해서 내려졌다. 그 결론이 어떻게 내려졌던......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런 비슷한 문제들은 모두 해결된 것일까?

  아니다. 미술품이 예술적 가치로 포장되어, 고가의 금전적 가치를 보유하는 한 이런 문제는 인류 역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

  미술의 역사 속에도 이런 억울한 기능인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조화백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았고, 기능인은 재판에서 졌다고 치자. 그대로 끝이 날까? 그에게는 조화백 보다도 더 조화백 같은 그림 솜씨가 있는데 말이다. 억울함에 분노 젖어있고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기능인은 보복하는 심정으로 한 가지 방편을 생각해 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총 동원해서 조화백만의 스타일로 다양하게 여러 그림들을 그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높은 가격이 책정되어 미술시장에 유통되고 있는 조화백의 작품보다 더 조화백 스타일을 장착한 작품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에 나돌기 시작했다. 조화백의 그림 가치가 순식간에 땅바닥에 떨어졌음은 당연했다. 조화백은 기능인을 사기로 고발했다. 미술의 기법은 누가 한사람만은 고유한 특허권을 가진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의 그림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게 되는데 그것들을 모두 자신만의 것이라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능인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래로 화폭에 옮겼을 뿐이지 조화백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위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기능인이 조하백의 그림처럼 그려서 조화백의 싸인을 위조해 넣어 높은 가격에 속여서 그림을 매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 또한 결국엔 재판정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번엔 어떤 판결이 나올까? 그림을(진자로는 그림의 가치를) 사고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중개인의 입장에서, 혹은 소비자 입장에서..... 그림의 예술적인 미가 조화백과 기능인의 수준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라면, 사인이 들어가 진품임을 입증하는 조화백의 그림을 비싼 돈을 주고 살까? 아니면 나무랄데 없으면서도 저렴한 기능인의 그림을 살까?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들이 화가라는 직업이 생겨나고, 그림에 가치가 매겨지면서 거래가 이루어질 때부터 이미 그런 문제들 또한 생겨났던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된 새로운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문제이다.

  미술시장에 한창 인기 상한가를 누리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새로운 그림이 등장했다. 바로 <미인도>였다. 돈 많은 부자들과 이름난 갤러리들이 중계인가지 저마다 앞세우면서 <미인도>를 차지하기 위하여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자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 둘 그림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말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미술품 거래업체는 전문가들을 불러들여 그림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게 되었고, 감정단은 그 그림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림의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그러자 이번엔 감정단의 평가에 금품이 오갔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이미 너무나 유명세를 톡톡히 탄 <미인도>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경쟁이 치영하게 전개되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미인도>를 차지하게 될 갤러리가 선정되었다.

  그런데 아뿔사!!!!!! 어쩌자고 세상에 이런 일이...........

  버젓이 생존해 계시던 <미인도>의 작가로 알려진 천경자 화백이 직접 나서서 ‘저 그림은 가짜다. 나는 미인도를 여러 번 그렸지만 저런 미인도를 그린적은 없다. 저것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라고 기자회견 장에서 밝힌 것이다.

  혼란......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달았다.

  그러자 경매회사 측과 낙찰자는 미술품 감정을 새로 의뢰하였으며 또 한 번 이 문제를 정식으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의 요구에 감정평가는 이번에도 또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해당 작가는 끝내 ‘나는 저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내가 추구하는 그림이 결코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에 버젓이 벌어졌던 것이다.

나는 내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데, 옆집 부부에게서 우리 부부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게 가능한 일인가? 이를 믿어야 하나? 과학이 틀렸나? 아니면 조물주께서 잠시 조시다가 장난을 치셨을까?

  이 뿐만이 아니었다. 유독 미술계에서 이런 유사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런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화가(painter)라는 직업이 처음 생겨난 르네상스 초기로 돌아가 보아야만 하겠다. 아울러 거기에는 중세라는 시대의 사회상과 특히나 당시에 생겨난 길드(guild)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더하여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어쩌면 다소 돌아가는 여정이 될 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이런 문제의 해결 또한 르네상스 미술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고 짧게나마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해야만 하겠다.

 

 

 

 

 

 

 

 

  ---  다음 회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