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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멜랑꼴리 오딧세이) 2023년, 이번엔 프랑스다.

by 피안재 2023. 2. 10.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기리라,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고

우리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살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 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 아폴리네르(G Apollinaire·1880~1918)의 시 <미라보 다리>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적어도 빠리지엥 이라면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한 편을 차분하게 낭송할 줄 알아야 비로소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국인들이 세익스피어를 자랑스러워 하고, 스페인 사람들이 세르반테스를 소중하게 생각하듯이, 그들 못지않게 프랑스 사람들은 아폴리네르를 사랑한다. 그만큼 아폴리네르의 시가 프랑스인들의...... 파리의 정서를 고스란히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미라보 다리 강변을 거닐다가 이 시를 쓰게되었지만, 어찌보자면 아폴리네르의 시 속에 등장하면서 부터 미라보 다리의 존재가 새롭게 생겨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세느 강에 놓여진 31개의 다리 중에서 미라보 다리의 존재적 가치는 지극히 미미하지만 정서적 가치로는 최고로 대접받고 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블록버스터 영화 <인셉션>에 등장해 웅장한 철제 다리 기둥 사이로 에펠탑의 뷰를 아찔하게 선보이던 '퐁 드 비라켕(Pont de Bir-Hakeim)' 다리가 있는가 하면, 로맨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알렉산더 3세(Pont Alexander-3) 다리는 오래 전부터 이미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칭송되어 왔었다. 수많은 기념비적인 조각상들과 금장식과 화려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조명으로 다른 다리들과 확연하게 구분이 되어왔다. '사랑의 자물쇠 다리'로 온 세상에 유명세를 톡톡히 떨쳤던 '퐁 데 자르(Pont Des Arts)' 다리는 자물쇠가 모두 철거되면서 과거만큼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들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다가 온 다리는 바로 '레오폴드(Passerele Leopold- Sedar Senghor)' 다리 였다.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와서 이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튀를리 정원까지 닿게된다. 보통 다리와 같이 수평의 길 아래로 도 하나의 아치형 다리가 설치된 이층형 다리이다. 아래쪽의 아치형 다리를 걷노라면 발 아래로 세느 강이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는 듯힌 느낌을 선사해 준다. 아주 독특한 파리 강변 산책 경험을 할 수 있다.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줄리엣 비노쉬)를 만나기 위하여 찾아간 '퐁네프(Pont Neuf)' 다리에서 미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과거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영화는 모두 사라지고 아폴리네르의 싯귀처럼 쓸쓸한 연민만이 잔잔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한때는 이곳이 진정한 파리지엥들의 본거지라고 불렸던 추억의 장소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파리지엥을 연상시킬만한 모습들은 보이지 않고 개를 끌고 산책을 하는 부르주아들의 모습이 흔하게 눈에 띈다. '퐁네프 다리'는 세느강에 놓인 다리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그만큼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다리가 가진 '퐁네프' 라는 이름의 뜻은 '새로운 다리'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550년 앙리 2세가 다리를 완공하면서 '적어도 준공 다시에는 가장 새로운 다리였을테니' 그냥 쉽게 '새로운 다리(퐁네프) 라고 이름을 붙인 결과라 한다.

이런 유명한 다리들에 비하자면 <미라보 다리>는 어느것 하나 변변히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 세느강변의 흉물에 가까운 정도이겠으나, 아폴리네르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라고 적는 바람에 마치 '미라보 다리가 없으면 세느 강이 흐르지 않을것만 같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파리가 존재하고 세느 강이 흐르는 한 <미라보 다리>는 영원히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느껴진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는 가난한 방랑자였다.

  아폴리네르 에게는 '살해당한 시인(Le Poete Assassine)' 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후에, 평소 시인과 교류하던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앙드레 드랭 등이 모여서 시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책을 한 권 출간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살해당한 시인' 이었다. 하지만 아폴리네르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급작스런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다만, 짧은 시인의 생이 사회제도와 편견과 생활고와 시대적 상황 등에 치이다시피 하여 극한으로 몰려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다는 의미를 담은것이라 해야 하겠다.

  시와 단편소설과 여행기 등을 쓰면서 배고픈 시인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마치 고백하듯 늘어놓듯이 주로 쉽게 글을 썼다. 스스로도 '내가 쓴 시 한 편 한 편은 내 생애 일어났고 내가 격었던 사건들의 기념' 이라고 곧 잘 말했다. 피카소. 마티스 같은 입체파 미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시와 결부시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그 결과로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e)' 라는 용어가 처음 생겨났다. 초혈실주의의 창시자라고나 할까?

피카소의 소개로 만난 프랑스 대표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과 사랑에 빠지면서 서로에게 문학적 예술적 감성을 주고 받게된다. 이후로 약 5년간 실로 꿈같은 세월을 보낸다.

  이를 신께서 시샘하셨음일까? 엉뚱한 곳에서 엄청난 악재가 발생했던 것이다.

  1911년 그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 미술품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진 미술품이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였다.

  루브르는 난리가 났고 파리 경시청을 넘어 프랑스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는 곧 톱 뉴스가 되어 온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최고 수사팀이 꾸려졌고 현상금이 내걸렸으며 온 세계의 이목이 온통 루브르와 모나리자에 쏠리게 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오리무중이었다.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졌음에도 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실마리 같은 단서 조차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은 채 해가 넘어갔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일년 반 정도 지난 시점에서 또 다시 사건이 텨졌다. 그것도 같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또 다시 도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 다수의 조각작품들이 사라졌다. 루브르를 넘어서 프랑스 전체가 멘붕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 희대의 '루브르 미술품 도난 사건'에 아폴리네르가 끌려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벌어진 조각상 도난사건은 오노레 조세프 제리 피에레(Honoré Joseph Géry Pieret)에 의해서 저질러 진 사건이었는데, 그는 바로 아폴리네르의 이전 개인 비서였던 것이다. 어느날 피에레가 아폴리네르의 집으로 여러개의 조각상을 가지고 와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상태로 판매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그 조각상들이 어디 시골이나 골동품점에서 가져 온 것으로 판단하고 하나를 자신이 구입한 후, 친구인 피카소에게 석점을 구입하도록 중재했다. 피에레는 나머지 작품들도 소개를 부탁하면서 아폴리네르의 집에 맡겨 두었다. 그 과정에서 조각품들이 도난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이를 눈치 챈 제프리가 해외로 도망을 치면서 동시에 경찰이 들이 닥쳤다. '루브르 박물관 도난사건의 진범 체포'라는 뉴스가 삽시간에 온세상에 호회로 퍼져나가면서 그 아래에 '아폴리네르와 피카소가 배후' 라는 활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는 체포되었고 모나리자와 조각상 도난사건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약 2주간 교도소에 구금 되었다. 그리고 이 세기의 도난 사건에 치를 떤 마리 로랑생이 아폴리네르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런 와중에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풀리게 되었는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모나리자> 그림을 암시장에 몰래 내다 팔려던 빈센초 페루지아가 경찰에 붙잡혔는데, 그가 바로 도난 사건의 진범이었으며 단독범행을 자백했던 것이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는 석방되었지만........ 이미 이별을 통보하고 마리 로망생은 파리를 떠난 후였다.

  하루아침에 모든것을 잃고 긴 방황에 접어든 시인이 어느 날 세느 강변을 쓸쓸하게 거닐면서 마리 로랑생을 그리워하며 써내려간 시가 바로 <미라보 다리>였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건만........

  어디에도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훗날 마리 로랑생은 생을 마감하면서 이런 말을 남기게 된다.

  '버림받은 여자보다, 떠도는 여자보다,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것은 잊혀진 여자랍니다.'

 

 

 

 

 

 

 

 

애초 계획한 이번 여행에 프랑스는 아예 들어있지도 않았다.

이번 여행은 무조건 프라하와 부다페스트가 포함되는 동유럽 여행이 목표였다.

하여 프라하로 들어가 비인을 살짝 들러서 부다페스트로 가서 여행을 즐기다가 크로아티아로 넘어가 나머지 기간을 채우거나, 부다페스트로 들어가서 프라하로 향했다가 폴랑드르 지역(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을 돌아보거나 아예 그리스로 건너가 산토리니에서 여행을 마무리 할까를 두고 고심을 했었다.

어쨌거나 고심을 거듭한 끝에 비행기표 티켓팅을 하려는 즈음에 동유럽 지역에 한파와 더불어 폭설이 쏟아졌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나라에 까지 이상한파가 들이 닥쳤다. 눈에 덮힌 동유럽 여행지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이번 여행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암울하고 걱정거리 투성이의 슬픈 예감들이 생겨났다. 아내인 챠밍 여사는 유독 추위에 약한 편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 무작정 눈보라가 흩날리는 혹한의 겨울 속으로 들어섰다가...... 혹 눈길에 미끄러져서 나뒹구는 사태가 연이어 벌어지게 된다면 우리 여행의 미래는........

'난 추위는 무조건 싫어!' 라는 챠밍여사의 단호한 외침으로 그동안 준비해 왔던 계획들이 한순간 싸그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럼 추위가 누그러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렸다가 출발할까?'

'아니! 이대로 마냥 더 기다리기도 싫어. 어서 떠나고 싶단 말이야. 프라하는 내가 가장 먼저 가고싶은 곳이었고...... 당신이 가고 싶다는 곳이 있었잖아. 거기는 따뜻하다면서........ 프라하는 다음에 가면 되지. 당신이 꼭 가고 싶다는 곳이 어디였지?'

'코트다쥐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코트다쥐르가 내가 가고 싶은 곳이야.'

'그럼 파리엔 들렸다 가는거야? 유럽을 그렇게 드나들었으면서 우린 아직 에펠탑을 보지 못했잖아? 스페인 가느라고 파리를 경유했으면서도 정작 파리 시내엔 들어가 보지도 못했잖아. 거기에 가면 파리는 들릴 수 있는거야?'

'그럼. 당연히 파리엔 들려야지. 프랑스를 여행하려면 당연히 파리로 들어가는게 순서일거야. 원하는만큼 파리에 체류할 수 있는거지.'

'그럼 우리 프랑스로 가자. 파리에 들려서 구경 좀 하고나서 당신이 가고싶어 하는 지중해로 가자. 그럼 어디로 나오는데?'

'파리로 되돌아 나올 수도 있고, 이탈리아로 가서 밀라노나 베네치아에서 나올 수도 있고....... 비슷한 이동거리와 조건으로는 바르셀로나로 가서 지난번 여행에서 아쉽게 남겨놓은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의 일요미사에 참석해 보고 나서 돌아오는 코스도 있는데...... 그동안 나는 파리로 들어가서 바르셀로나에서 나오는 여행을 생각해 왔어.'

'그것도 좋겠다. 파리로 들어가서 에펠탑을 보고 지중해로 내려가서 따뜻하게 우리 방식의 자유여행을 즐기다가 바르셀로나 파밀리아 성당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경건하게 여행을 마무리 하는것도 아주 의미있을것 같아. 좋아. 거기로 결정했어. 우리 그리로 가자.'

마눌님의 결재가 떨어진 마당에 이제 새로운 여행의 계획을 넘어서서 실제적으로 진행하는 것에는 아무런 장애가 있을 수가 없다. 항상 평상시에도 앞으로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서너가지의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밤을 새워 거쳐야 하는 도시들과 구체적 이동방법과 시간에 대한 계획과 확인 절차를 거치고 나서 새벽에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는 것까지 모두 마쳤다. 이제 약 40일 남은 여행 출발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에 좀 더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일정을 조정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알아보면 되는 것이다. 이제 새해(2023년)를 맞이하고 1월 16일에 떠나서 2월 7일에 돌아오는 우리의 겨울 여행은 본격적으로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새해는 되었고 출발일은 다가오는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3년 이라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생겨난 여파인데, 인천공항을 오가는 공항버스의 배정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을 뒤늦게 알게된 것이다. 예전의 경우에는 아주 이른 새벽에서 부터 늦은 심야에 까지 공항버스가 운행되었었는데, 한때는 완전 운행 중지 상태까지도 있었으나 해제되어 지금은 편수가 상당히 줄어든 상황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장 빠른 시간에 출발하면 공항에 오전 8시에 도착하는데,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출발지는 공항 2터미널이었으니....... 아주 오래 전에 1시간 10분을 남겨 놓고 공항에 도착해서 기적적으로 비행기에 올라탄 이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마눌님을 모시고 1시간 안에 비행기에 올라타기는(9시 30분 출발)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이 뻔하다. 그렇다고 자가용을 가지고 가서 장기주차 하기도 그렇고....... 고심 끝에 인천공항 영내에 속해 있는 '다락 휴' 라는 캡슐 형태의 간이 숙소에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12시간을 체류하고나서 출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다락 휴 숙박에 대해서는 수많은 경험들이 온 라인에 이미 올라 있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마침내, 1월 15일 저녁에 우리는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다락 휴에 입실했다. 다음날 아침 7시 반에 다락 휴에서 나와 항공권을 받고 짐을 부쳤다. 출국 수속을 하고 해당 게이트로 가서 보딩 패스를 기다렸다.

우리를 파리까지 데려다 줄 에어 프랑스를 기다렸다. 여기부터 진짜로 이번 우리의 겨울 여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 Oh my God!!

  What's all this?

  Even if it's cold, it's so cold.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샤를 드골 공항(Charles de Gaulle Airport) 3터미널에 도착했다. 프랑스 파리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춥다!

  그것도 무지무지 춥다. 온도계는 영상 8도를 가리키는데 체감 온도는 영하 10로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에겐 겨울옷이 없다. 봄 가을 옷에 바람막이가 가진 옷의 전부였다. 혹시나 하여 머플러와 목도리는 가지고 왔다. 이는 모두가 유럽에 이상기온이 덮쳐 영상 20도 까지 올랐다는 지난 보름 정도의 뉴스를 믿어도 너무나 믿었던 탓이다. 도착하는 순간부터 후회막급이 전신의 신경세포를 타고 전률처럼 차 올라왔다.

  짐을 찾고 입국 수속을 마치자 마자 함께 에어 프랑스를 타고 온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말로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대합실 밖에 덜렁 우리 두 사람만 남겨졌다. 어쩌자고 이런 어처구니가..........

드골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RER-B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RER은 파리 시내와 인근의 교외지역을 연결해 주는 고속철도를 가리킨다. 두 개의 노선이 운행중인데 그 중에 B선의 종점이 드골 공항이다. 파리 시내로 접근하기에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르와시 버스(Roissy Bus)가 있다. 공항 터미널 바로 앞에서 탈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요금도 저렴한 편이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오페라 하우스까지 운행하며,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메트로와 시내버스의 다양한 노선을 선택할 수 있어서 이용도가 매우 높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에어프랑스 리무진(Les Cars Airfrance)으로 우리나라 서울에 운행중인 공항버스에 해당한다. 요금이 조금 비싼 단점은 있지만 파리 시내의 중요 거점인 개선문. 앵발리드. 몽파르나스 까지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택시를 이용하거나 미리 호텔 측에 신청한 픽업 써비스를 이용하는 방법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위에 열거한 그 어떤 이동 방법도 선택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때문에 우리가 마지막까지 달랑 남겨진 이유였을 것이다.

  351번 시내버스.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이동 방법이었다. 드골 공항에는 몇 개 노선의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시내버스인 만큼 좌석도 불편하고 시간도 가장 많이 걸리지만..... 당연히 비용도 그만큼 썩 저렴한 매리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우리가 비용 때문에 굳이 시내버스를 선택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에 머물 숙소를 고르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썩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파리 여행의 핵심에 해당하는 도심(1~2 존)에 해당하는 숙소는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 오랜 경험에서 이런 상황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겪어보면 시설이 형편 없음에도 일단 유명 관광지역에 속하게 되면 일단 비싸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진으로만 보고 숙소를 선택하는 것은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나는 3존에 해당하는 갈리에니 지역(Gallieni)에 있는 레세다 호텔(Hotel Reseda)을 선택했다. 가성비(시설과 가격 비교)가 적당했다고 판단한 결과였지만, 이곳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지하철(Metro) 3호선의 종점역인 갈리에니 역이 바로 호텔과 붙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아울러 드골 공항의 351번 시내버스가 이곳 지하철 역과 정류장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공항에서 편리함 때문에 르와시 버스나 에어프랑스 리무진을 선택했다고 해도, 오페라 역이나 개선문 광장에서 지하철을 옮겨 타야만 했고, 중간에 환승을 통해서 3호선에 올라야만 숙소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머나먼 이국의 낯선 도시에서 첫발자국을 떼자마자 대중교통을 찾아다니며 갈아타야 한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매우 부담이 가는, 나름 극한의 고통을 수반하는 고역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에서 나는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택한 선택이었다.

  그런 속사정이 있어서 나름 고심 끝에 선택한 351번 시내버스였는데...... 또 한 번 아뿔사........

  아무리 찾아다녀도 있어야할 351번 버스정류장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영어가 되는 사람을 찾아다녀 가면서 물어보았고 심지어 인포메이션에 가서 물어보아도 다들 한결같이 택시 정류장 출구를 가리키면서 거기에 가면 351번 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정작 그곳을 찾아가면 어디에도 정류장이 없다. 그 근처를 샅샅이 뒤지다시피 해도 없다. 슬슬 지쳐갈 즈음에 지프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공항 관계자 명패를 찬 중년의 신사를 붙잡았는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본래는 3터미널 8번 게이트 앞에 351번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정류장을 폐쇄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2터미널 351번 버스정류장으로 통합시킨 결과가 되었기에, 무료 셔틀을 이용하여 여기 3터미널에서 2터미널로 이동한 뒤에 8번 출구를 나가면 그곳에 351번 버스정류장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여 그분 말씀대로 셔틀을 타고 2터미널로 이동하여 찾아가니 마침내 그곳에 떡하니 351번 시내버스가 대기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는 심야의 파리 외곽지역을 시내버스는 쌩쌩 잘도 달린다. 잘 달리는 것을 넘어 무시무시하게 날아다닌다. 헐!!!!

  거기다가 손님도 우리 포함하여 네 명이 전부다. '우리가 갈리에니 지하철 역까지 가려 하는데 밤길에다가 초행이니까 도착하면 좀 알려주세요' 라고 미리 버스 기사님께 부탁을 사전에 해 놓았는데....... 한참을 씽씽 달리던 시내버스가 느닷없이 멈춰서더니 우리보고 내리란다. 시계를 보니 공항을 출발한지 대충 25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내가 책자를 보고 구글 지도에서 길안내로 확인한 바로는 공항에서 갈리에니 역까지 대략 60~70분이 소요된다고 나왔는데........... '우리는 갈리에니 지하철역 입구까지 간다니까?' '여기가 갈리에니여. 그러니까 내려.' 하는것이 아닌가. 뒤에 타고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 갈리에니를 외치면 손가락으로 어둠속 저쪽을 가리키는데, 거기엔 빨간 메트로 표시가 정말로 있었다. 하니 어쩌겠는가? 무거운 배낭과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지하철 입구로 달려가 이름표를 확인 했는데....... 갈리에니가 맞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코 앞에 거대하게 우리가 예약해 둔 호텔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헐!!!! 우리가 방금 헬리콥터에서 내린건가? 공항에서 불과 25분만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다니........

다른 어떤 방법을 택했더라도 지금쯤 오페라 역이나 개선문 광장 근처에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지하도를 오르내리며 환승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없이많은 인파가 움직이는 복잡한 지하철에서 소매치기 조심까지 하면서 죽을뚱 살뚱 하고있을 시간대였으니 말이다.

  자유 배낭여행자에겐 이런 상황을 '횡재 했다' 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파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고난의 행군은 무사히 끝난 것이다.

  대충 설명해서 파리는 1존에서 5존까지 대략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이는 파리의 중심에서부터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거리에 따른 구분으로 시초는 대중교통(지하철)의 이용료를 차등 구분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근원은 시청을 중심으로 노틀담이 있는 시테섬 인근을 1존으로 시작하면서 파리의 유명 여행지 대부분이 1~2존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절 더 넓혀서 파리의 외곽지역을 감싸듯 돌고있는 순환도로 지역 까지가 3존에 해당된다. 여기 3존까지의 안쪽은 모두 대중교통 기본요금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3존의 외곽에서부터 4존과 5존은 이용요금이 더 많게 부과된다. 오를리 공항이나 베르사이유 궁전이 4존에 해당하고, 샤를 드골 공항과 디즈니랜드는 5존에 속한다.

  세계 어느 유명지에서나와 같이 차등된 승차권을 구입해야 하며, 모든 승차권은 처음 이용하는 대중교통에 승차와 동시에 체크 기계에서 펀칭을 해야만 한다. 펀칭을 하지 않으면 무임 승차로 취급되고 수시로 벌어지는 검표원에게 적발되어 비싼 과태료를 물수도 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지하철. 버스.트램의 환승을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대부분 1시간) 허락하는 편이지만,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처럼 환승에 대하여 아주 심하게 제한을 두는 곳도 있다. 그런 제한들은 거의 횡포에 가까울 정도이며..... 마치 '올려면 오고 돈 내기 싫으면 그냥 가' 라고 하는 불쾌한 느낌으로 다가 오기도 한다.(차차 논의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던 시차적응에 대한 어려움을 거의 겪지않는 편이다. 여행에 체질화가 되었다고나 할까?

별도의 시차적응이 필요치 않고,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잔다. 이런 정도의 존재들에겐 거기에 더하여 시간과 경비만 허락된다면 언제까지고 영원히 여행 go go go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갈리에니 라는 낯선 이국의 동네를 산책한다. 처음 만나는 낯선 이국 사람들에게 먼저 서스럼없이 '봉주르'라고 인사를 건넨다. 언제나 처럼 말이다.

  그런데 춥다. 정말로 춥다. 패딩을 하나씩이라도 걸치고 오는 건데......... 정말로 후회막급이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말이다.

  유럽의 이상기온 상승 뉴스를 믿어도 너무 믿었다. 한 마디로 '낭패다' '완전 낭패다' 이를 어쩔꼬냐? 현지에서 하나씩 사? 그러다가 날이 팍 풀리면 애물단지가 될것이고....... 가진것은 춘추복에 인천공항 가느라 걸친 바람막이 하나씩이 전부인걸.......

  파리의 한낮은 영상 10도 정도이지만 아침 새벽은 0도나 영하 1도 2도에 머문다. 거기에다 문제는 바람이다. 파리에 하늘은 늘 희뿌연 구름으로 가득하고 간간히 몰아치는 바람은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서 불어오는 것처럼 매섭기로 정평이 나있지 않았던가. 체감 온도는 거의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판에........ 뉴스를 바보처럼 너무 믿었지 뭐야.

  갈리에니 지하철 건너편 모퉁이에 있는 작은 빵집에 들른다. 프랑스 하면 빵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한 이스탄불 뒷골목의 창고형 빵집에서 막 궈워낸 빵이 최고라고 생각해 온 판에....... 드디어 프랑스 빵과 비교할 기회가 생긴것이다.

  멋쟁이 금발 아줌마가 막 구워나오는 빵을 진열대에 전시하고 있었다. 막 구워낸 빵에서 풍겨나오는 구수함이란.............!!!!

  크로아상이랑 쇼콜라를 하나씩 주문하고 나니..... 커피가 문제였다.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커피' 라고 하면 100% 당연하게 '에스페레소'를 뜻한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선 '아메리카노'라고 따로 주문하면 우리가 흔히 마시는 덜 진한 커피 '아메리카노'가 나오는데, 프랑스에선 아예 '아메리카노'라는 형태의 커피가 없다. 서너가지 형태의 커피가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아메리카노는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등장한 것이 '커피 알롱제(Cafe Allonge)'다. 에스페레소를 추출하는 동일한 과정에서 조금 커다란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약 2배로 섞어서 아주 조금 묽게 만들어진 것이 알롱제다.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한국인 여행자들은 알롱제를 우리 방식의 커피로 생각하고 마실 수 밖에 없다. 뜨거운 물을 추가로 부탁해 보기도 하지만, 더러는 매몰차게 거절 당하기 일쑤여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알롱제에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파리라 해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내 경우는 커피 주문을 하면서 표정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를 부탁해요' '조금 큰 잔에 뜨거운 물을 조금만 더 주셨으면 좋겠어요'를 아주 다정스런 몸짓과 말짓으로 부연 설명과 함께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그러면 한 두번을 제외하고는 늘 우리방식의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었다.

  '파리 여행' 하면 늘..... 혹은 거의 대부분 '소매치기 걱정'과 '인종 차별적 대우' 등을 거론하는데........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세상 천지에 사람이 사는데는 다 거기서 거기로 비슷하다는 것이 내 정론이다. 파리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모든것은 우선적으로 자기 하기나름인 것이다. 우리는 소매치기를 당한 적도 없고 인종자별을 당해 본 적은 더더욱 단 한 번도 없다. 우리의 여행은 늘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의 온정과 배려로 즐겁고 행복하게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파리 사람들,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은 더없이 친절하다. 자상하다. 언제나 처럼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는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웃으며 그들을 대하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부탁해 보자. 공항이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검색대마다 내 배낭에 달려있는 태극기를 그네들이 알아 본다. '그래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이다' 라고 환하게 웃으면서 '그게 바로 나의 사랑이며 나의 자부심' 이라고 짧게 말해주면 으례히 그들이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면서 '코리아 넘버 원'을 외친다. 거의 매번 그런 경험을 아주 즐겁게 거듭 반복한다. 어디에서도 인종차별은 없다. 단 한 번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환한 미소와 함께 아주 작은 주전자에 팔팔 끓는 물이 별도로 담겨져 금발 아줌마가 손수 가져다 부어주기까지 한다. 여기가 바로 프랑스 파리다.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빵 바게트(baguetle)는 길게 나무막대 처럼 생긴것으로 바삭바삭한 껍질과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속살을 자랑한다. 여성들이 혼자 장을 보고 가다가 있을지도 모를 상황에 호신용 몽둥이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것만 같다. 이 프랑스 바게트가 식민지였던 베트남으로 건너가 반미(banmi)로 거듭났다.

  프랑스인들이 바게트만큼이나 아침 식사 대용으로 사랑하는 크로아상(croissants)은 사실은 터키에서 만들어졌다. 오스만제국 시절 터키인들의 아침식사용으로 탄생한 빵이다. 오리지널 크로아상은 타원형으로 굽은 형태이며, 이는 이슬람교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으로 처음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십자군 전쟁과 비잔틴 제국을 통하여 프랑스에 건너왔으며 최고로 사랑받는 아침식사가 되었던 것이다. 맨손으로 부드럽고 바삭바삭한 크로아상을 뜯어 먹다가 한 조각을 진한 커피에 담궈서 쪽 빨아들이듯 맛보게되면........ ㅋㅋㅋ

  또 하나 아침식사용 빵인 쇼콜라(pains au chocola)는 말 그대로 빵 속에 약간의 쵸컬릿을 펼쳐 바른 것인데 이따금은 앙증맞은 건포도 알갱이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기도 한다. 커피향과 함께 풍겨나오는 쵸컬릿 향이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우리가 이른 시간에 커피 알랑제에다가 크로아상과 쇼콜라를 먹는 동안에 부쩍 손님들이 늘었다. 프랑스인들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는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에 또 찾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빵집을 나온 우리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치고 메트로에 몸을 실었다.

  본격적으로 파리 여행을 시작할 참이다.

 

 

  내가 생각해 둔 파리 여행의 시작은 바로 몽마르트 언덕(Montmarye) 이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몽마르트 언덕에 장엄하게 서 있는 사크레 쾨르 성당(La Basilique du Sacre-Coeur)에서 파리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 보는것으로 본격적인 파리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가 이미오랫동안파리에 거주해온 사람인것 처럼 자연스럽게 파리의 대중교통을 환승해 가면서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피갈 광장에 내려서 샤크레 쾨르 성당이 올려다 보이는 몽마르트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 양 옆으로 기념품 가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파리에서 처음 나선 발걸음이었기에 호기심 가득 기념품점을 둘러 볼 만도 하겠건만........ 헐! 잔뜩 찌프린 파리의 날씨 앞에서 자꾸만 움츠러드는 몸에 열기를 우선 채워야만 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가파른 계단을 향해 옮겨갔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La Basilique du Sacre-Coeur)



  파리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해 있다는 몽마르트 언덕이래야 봤자 겨우 해발 180m에 달하는 그저 야트막한 언덕일 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세느 강변에 펼쳐져 있던 늪지대와 너른 들판 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런 태생적 이유로 파리에는 서울이나 뉴욕 같은 고층빌딩의 숲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파리 사람들은 여기 몽마르트 언덕을 유독 아끼고 사랑한다. 그 언덕 위에 프랑스인들에게 성스럽게 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하얀 석회암으로 지어진 사크레 쾨르 대성당이 장엄하게 엄청난 위용을 뽐내며 서있다. 어디 그 뿐인가. 파리를 찾는 여행자들이 에펠탑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바로 여기 몽마르트 언덕이자 사크레 쾨르 대성당이라고 한다. 길고 제법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 계단에 걸터 앉거나 대성당 광장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서 저멀리 자신의 발치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찔한 파리 시내의 전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하겠다.

  책이나 여행 잡지에서 읽었고, 방송과 이야기를 통해 전해듣고 마음과 생각으로만 그리워하던 파리가 바로 그곳에 있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사는 곳,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대로 살아가며 무한한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는 파리지앵들의 세상이 그곳에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으면 '아무 이유없이 마냥 행복해진다'고 입을 모은다. '눈에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바로 파리야. 낭만의 도시 파리가 그곳에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우리가 분명 지금 몽마르트 언덕 계단길을 올라서 사크레 쾨르 대성당의 마당에 서서 파리 시내의 전경을 발아래 두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둘러보고 있는데........ 전혀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는것은 왜일까? 지금 눈에 들어오는 파리는 전혀 낭만스럽지도 않다.

  '이거 여기가 정말로 파리가 맞기는 맞는거야?'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 보는 파리가 가장 낭만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더한다면 파리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소란스럽고 소매치기가 들끓고 거칠고 험악한 장소 또한 몽마르트가 틀림없어. 그것은 진실이야.' 라고 지나치는 말로 해주었고 나는 아주아주 선명하게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솔직하게 나의 심정을 표현해야 한다면........ 아마도 당장은 후자에 더 가까울것만 같다.

  희뿌연 안개가 내려 앉은 파리는 그렇게 명확한 풍경도 상쾌한 느낌도 우리에게 전해주지 못한다. 잔뜩 찌프린 하늘에서는 이따금씩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습지에 몰아치듯 불어오는 음습하면서도 싸늘한 매몰판 바람결이 우리가 발걸음을 움직일 때 마다 가혹할 정도로 괴롭히고 있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느껴 볼 수 있는 낭만 중에는, 언덕 바로 아래쪽 데카르트 광장의 화가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제대로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 이른 아침 시간에다가 을씬년스럽고 매서운 날씨 덕분에 광장에는 지나치는 행인들 뿐 마냥 썰엉한 채로 그냥 방치되어 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도 없고 초상화를 그려주던 무명의 화가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텅 빈 언덕에 하얀 석회암으로 세운 대성당만이 우뚝 솟아있을 뿐이다.

  '그래. 아무려면 어때? 이 모습이야 말로 '순교자의 언덕' 이란 이름에 걸맞은 진짜 이곳의 풍경이 아니겠어? 몽마르트의 진면목을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이잖아. 화가들을 만나지는 못하지만 삐끼와 소매치기를 피할 수 있고 몽마르트와 사크레 쾨르를 우리가 통째로 전세낸 것처럼 여유롭게 누려볼 수가 있지 않겠어?' 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위로하면서 대성당의 내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 모진 날씨에도 을씬년스러운 언덕을 찾아 온 대략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보이는데 대부분이 여행객들이 틀림없다. 그런 와중에 더욱 놀라운 것은 30여명의 여행객 중에서 20명 이상이 한국인들 이라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 각자 한국인 가이드를 따라 패키지 여행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풍경은 그 이후로도 여러 장소에서 거듭거듭 목격하게 된다.

  이거 혹시........ 코로나 시국의 유럽 여행업계를 한국인들이 먹여 살리고 있는것은 아닐까? 언젠가 들었던 뜬소문처럼....... '한국인 여행자들은 모두 부자래.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닌대. 그래서 소매치기들의 최우선 목표가 한국인 여행자래'........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잘사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세계에서 여행에 가장 올인하는 국민들인가? 아무튼...... 세상 어디를 가던지 멋지고 비싸고 유명한 장소에는 한국인들로 넘쳐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중국인들과 비슷비슷하다고 할까? 소란스럽고 매너가 부족하고 비싼것을 파는 장소에 집단으로 몰입하는 점은 중국인이 좀 더 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면에 외지고 불편하고 무엇인가 탐험을 하거나 땀을 흘려야 하는 곳에는 한국인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가 트래킹이나 외진곳을 찾아다니다 보면 한국인은 거의 만나지 못하고, 중국인은 이따금씩 마주치는 반면에 일본인은 자주 마주친다. 각 나라의 여행 스타일과 취향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유명 브랜드의 쇼핑매장, SNS에 화제로 떠오르는 카페나 맛집, 루프탑, 럭셔리한 최고급 호텔, 화보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유명 여행지에만 한국인 여행자들로 북적이고 넘쳐난다. 결코 예쁜 광경들은 아니었다.

  내가 배낭에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이유는 '내가 당당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우선이겠으나, 중국인 혹은 일본인으로 오해받는게 죽기보다 싫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요즘은 중국여행자들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란하고 매너가 부족한 행동을 당연한것 처럼 일삼는 우리나라 사람들 조차도 우루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면 가급적으로 먼저 자리를 피하는 처지이다. 내 개인적 소견이지만 한국인들은 젊을수록..... 그리고 숫자가 많이 모이면 모일수로 소란스러워 지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잃고만다. 한국에선 안보이던 모습들을 흔하게 드러낸다. 점 점 더해들 간다.

  당장 몽마르트의 환경이 그리 낭만적이지도 평화롭지도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지만, 어쩌겠는가? 하필 이런 시기에 이곳에 오고 말았던 것을...... 이제부터 라도 나름 추억과 낭만을 만들어서라도 유익하고 즐거운 여행으로 꾸려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고호나 고갱이나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그리고 앙리 툴르스에서 로트레크 까지....... 미술사에 그게 한 획을 그었던 유명인사들도 유명해 지기 전까지 젊고 배고프던 시절을 이 부근에서 서성거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춥고 배고픈 가운데 꼭 이런 날씨에 어떤 절박함을 가지고 대성당을 찾아 어떤 기도를 드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리의 낭만 그 깊은 저변에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추위에 지친 소시민들의 애환과 희망을 상실했던 지식인들과 갈 곳 모르고 서성대야만 했던 수많은 무명의 화가들의 좌절과 아픔과 지친 발걸음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막 파리 여행을 시작한 즈음에 우리도 잠시나마 대성당의 의자에 걸터앉아 기도의 시간을 가짐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로 했다. 그저......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한 감사할 뿐이다. 아멘!!!!

  파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몽마르트(Montmarte)는 '순교자의 언덕'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고대 로마제국의 점령시기인 AD.250년 경에 훗날 성자로 추인 받게되는 파리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생 드니(Sant Denis of paris)가 기독교를 선교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이 언덕에서 참수 당했다는 역사에서 기인한다. 생 드니가 이곳에서 참수 당하기 전까지 이곳은 고대 그리이스의 신전들이 들어 서 있던 성스러운 장소였다.(파리의 역사 혹은 프랑스의 역사를 이야기할때 다시 등장하겠지만)

  이곳은 그저 파리에서 좀 떨어진 외과지대로 포도밭과 야채밭들이 널려있는 가난한 시골마을 이었다. 가장 높은 언덕이었기에 풍차도 설치되었다. 파리 사람들이 몽마르트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품질 좋은 새하얀 석회암이 채취되었기 때문에, 채석장을 설치하고 채취한 석회암으로 파리 시내의 궁전과 분수대와 관공서를 짓는데 중요한 건축재료로 오랜세월동안 사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몽마르트에 거주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파리 외곽에 거주하는 소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터이자 수입원이 되어 주었다. 그 흔적으로 오늘날 채석장 자리에 블랑쉬 광장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블랑쉬가 바로 '하얀색'을 뜻한다.

  1860년 총리에 취임한 오스만은 대대적인 '파리 도심 재개발' 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개선문을 중심으로 장방형의 직선도로를 뚫어 원활한 교통과 도시 계획에 의한 새로운 파리를 건설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악취가 나고 파리와 쥐떼가 들끓던 복잡한 미로와 같던 구도심을 모조리 뜯어내고 철저한 사전 계획과 통제에 따른 바로 지금 모습의 현대화된 새로운 파리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관청과 궁전과 부자들이 살던 고급 빌라들은 살아남았지만 파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빈민가와 시장 등은 완전 철거 되었다. 그러자 문제는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정부의 시책에 따라 대다수의 파리 시민들이 집과 생활터전을 잃어버리게 된것이다. 국가정책의 강제성이 동반된 가운데 도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우루르 몽마르트 언덕으로 몰려갔다. 파리에서 가장 땅값이 쌌을 뿐더러 여유지가 가장 넓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 이후에 우리나라 곧곧에 급하게 판자촌들이 들어서면서 대개 '신촌' '해방촌' 등으로 불리며 새로운 집단 거주지가 탄생하던 모습과 같다고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다시 도시 재개발 사업장과 세느 강변 정비 사업에 노동력을 담당하게 되면서 다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몽마르트가 건설되었고, 파리가 세계적으로 아름답고 체계화된 도시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오스만 총리에 의해서 대대적인 파리 재개발 사업이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에 프랑스에 커다란 재앙이 떨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처절하게 치욕을 당해야만 했던 독일이 점차 국력을 되찾게 되자, 다소 국력은 쇠퇴하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이탈리아를 쳐들어가는가 하면 인도차이나에 식민지 확보 전쟁을 벌이고, 부동항을 찾아 흑해로 남하하려던 러시아를 막아서 크림전쟁을 벌이고 멀리 멕시코의 국정에까지 심하게 간섭하던 나폴레옹 3세가 지배하던 프랑스 사이에서 유럽의 패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가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으니 바로 '보불 전쟁(프앙스 제국과 프로이센 제국의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 도처에 너무나 방만한 전선을 구축했던 프랑스는 연일 프로이센군(독일)에 밀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1870년 9월 4일에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적군에 포로로 붙잡히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럼에도 무능한 프랑스 정부는 자기들끼리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기만 할 뿐, 국민들을 위로하고 안심 시키거나 코 앞의 전쟁을 계속 수행할 능력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871년 1월8일에 허수아비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패전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토 손실은 물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치루어야만 하게 되었다. 이는 곧 국가의 파산을 의미했다. 하루아침에 프랑스의 미래는 암흑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곧 대대적인 국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꼭 90년 전에 벌어졌던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별반 다를것이 없는 국가적 재앙이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 영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아 합병시켰다. 그리고 50억 프랑이라는 천문학적 배상금을 요구했다. 여기에 분노한 프랑스 민중봉기군의 일부가 무기를 쟁취해 무장하고는 프랑스 국민군을 선언하며 프로이센에 대항해 재차 전쟁을 벌였다. 외부적으로는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던 중에 내분이 일어나 세계 최조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을 탠생 시켰다. 결국 파리 코뮌은 진압되었고 1만 명이 넘는 파리 코뮌 가담자가 총살당하는 사태로 종결되었지만, 이 파리 코뮌에서 머지않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파생되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100전 전에 파리는 '프랑스 대혁명'을 이루어 냈었다. 역사는 이 프랑스 대혁명을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꼽는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민주주의는 아주 짧은 기간에 단명해 버리고 말았다. 어수선하고 이름뿐인 공화정이라는 팻말을 잠시 내걸었다가가는 다시 역사적 퇴보 단계로 접어들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한 새로운 왕정복고의 시대를 열었다. 한 세기가 지나 다시 국민적 봉기로 무능한 공화정을 끝내기는 했지만....... 민주주의로 가기에는 아직 남겨진 길이 너무도 험난하기만 했다. 거기에다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그 터전 위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새로운 씨앗을 터트렸으니 말이다. 그만큼 참으로 신기하고 기묘한 것이 프랑스의 역사요 프랑스인의 정서가 아닐까 싶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 (Basilique du Sacre-Coeur)

 

 
 
 
 
 
 

 

  프랑스가 패망이라는 깊은 수렁으로 끝도 없이 추락해가자 여기저기에서 자성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낭트의 주교인 펠릭스 푸르니에(Felix Fournier)는 프랑스의 구국운동과 가톨릭의 재건을 위해 교회가 앞장서서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 그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알렉산드로 레장틸(Alexandre Legentil)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레장틸이 '세인트 빈센트 드 폴 협회(카톨릭 교단 안에 설치된 국제 자원 봉사 단체)'를 만들어 왕성하게 이끌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열정과 헌신이 반듯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푸르니에의 요청에 레장틸은 한 걸음에 달려왔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였다. 그들이 합심하여 내린 결론은 '프랑스를 위하여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단합시켜서 이 고난을 극복하고 옛 영광의 프랑스로 되돌아 가야만 한다'고 결론 지었다. 거기에는 교회가 모든 고난의 중심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활을 도맡아야만 한다는 결론이었다.

  레장틸은 파리 시민들 앞에 나서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프랑스여!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모든 고난은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하늘이 내리신 이 고난과 고통은 모두 정당한 것이며 우리는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이 처벌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명예롭게 감내하고 보상할 것은 보상하고 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심께 무한한 자비를 다시 구하고 우리가 지은 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프랑스의 모든 불행을 극복하고 나아가 적당들에 의해 지금 감금되어 있는 우리들의 믿음의 주권자인 교황을 감옥에서 구출해 주십사 하고 주님께 특별한 도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파리의 순교자의 언덕에 예수의 성심에 봉헌된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할 것을 모두 함께 약속합시다. 이 역사는 모든 프랑스인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해 반듯이 성공적으로 이룩될 것입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모금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레장틸의 연설에 '감금되어 있는 교회의 수장인 교황'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지극히 사실적인 역사에 근거한 이야기이며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의 교황은 비오 7세 였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 시칠리아에서 가리발디에 의해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북쪽에서 왕족인 에마뉴엘 2세에 의해서 똑같은 독립운동이 벌어져 중부 지역 로마에서 합세를 하면서 가리발디는 회복된 영토와 군대와 모든 권한을 에마뉴엘 2세에게 넘기면서 비로소 이탈리아는 최초의 통일 왕국이 된다. 이때가 1870년의 일이다. 이듬해 체재를 어느정도 안정시킨 에마뉴엘 2세의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영토 안에 엄연히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교황령 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왕을 설득하고 압박하여 마침내 이탈리아 왕국이 일방적으로 모든 교황령을 이탈리아 영토와 재산에 강제 합류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에 반대하는 교회를 밀펴내고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교황을 감금하기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하여 비오 7세의 이름 뒤에는 '바티칸에 갇힌 죄인' '바티칸에 갇힌 순교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이 같은 파행의 사태는 그대로 지속되다가 제 2차 세계대전에 즈음하여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제 3세계와 연합하여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기독교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바티칸과 무솔리니간의 비밀 협약이 이루어짐으로써 새로운 최소한의 교황령인 현재의 바티칸 시국이 탄생학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인의 회개와 화합을 위해 새롭게 건설되는 성심 성당(사크레 쾨르 대성당)에 온국민의 지대한 관심과 성원은 놀랍게도 4.000만 프랑이라는 당시로는 실로 어마어마한 성금이 모아졌다.

  이 또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세상이 잘 돌아가고 경기가 호황을 누리며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되지 않는 시기에는 성금이 잘 걷히지 않는다. 그런데 대재앙이나 전쟁이나 세상이 극한의 절망적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성금이 잘 걷힌다. 있을때는 안 내면서 지지리도 없을 때 오히려 잘 내놓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IMF를 겪던 시기에 전국민 금 모이기 행사를 통해 이를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던가?

  성심 성당 위원회는 건축가 폴 아바디에(Paul Abadie)의 설계안을 선택하여 마침내 1875년 9월에 대역사의 첫삽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대성당의 건설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거세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바뀌면서 대성당의 건설을 중지 시키는가 하면 모금 행사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건축학적 이유를 들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통적인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에펠탑의 건설을 혹평했던 에밀 졸라는 이번에도 샤크레 쾨르의 미관이 파리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킬것이라고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어쨌거나 사크레 쾨르 또한 건축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인 이유로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역사였다. 애초 성당 건축의 모토가 회개와 화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것은 증오와 분열이었던 것이다.

  1891년 성당의 내부가 완공되어 축성식을 거행하였을때 시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들이 우르르 몰려와 '악마 만세'를 외치기 까지 했다. 이러한 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성당은 1914년에 마침내 완공되었지만 지금 현재에도 죄파나 무정부주의자들이 정부를 대상으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툭하면 사크레 쾨르 대성당에 화풀이를 해대고는 한다. 툭하면 사크레 쾨르 대성당의 철거를 주장하고 나서기 일쑤다. 실제로 1976년엔 무정부주의자이자 파리코뮌 참가자에 의해서 폭탄이 터지기까지 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교모를 자랑하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은 비잔틴 양식을 취하고 있다. 내부가 온통 비잔틴 양식의 특징이랄 수 있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종탑에는 알프스 인근 사부아 사람들이 주조해 기증한 19톤 무게의 종이 걸렸으며, 이 또한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이다. 성당 전면의 파사드 부분에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상을 중심으로 프랑스를 구한 성인인 루이 왕과 오들레앙의 잔 다르크 동상이 위엄을 뽐내고 있다. 300개의 계단을 통해 종탑에 으르면 온 파리 시내의 전정이 한 눈에 가득 쏟아져 들어 온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파리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 보면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니 무언가가 아쉬움에 발길을 멈추게 한다. 잠시 돌아서서 사크레 쾨르 대성당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려는데 왼편으로 범상치 않아 보이는 건물이 하나 시야에 들어온다. 대성당의 부속건물이려니 하다가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어떤 번뜩임에 저절로 발걸음을 그리로 옮겨본다. 아니나 다를까.

  생 피에르 드 몽마르트 교회(saint-pierre-de-montmartre-church) 였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의 하나인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긴 성스런 장소이다. 어쩌면 프랑스 전체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측에 꼽힐것이다. 몽마르트 언덕의 의미가 '순교자의 언덕' 이라는 데에서 기인한 산증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파리의 수호 성인인 생 드니와 두 명의 동료가 파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군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의 신전과 공동묘지가 있던 언덕에서 목을 잘리는 참수형을 당했다. 그들이 사형당한 바로 그 장소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생 피에르 드 몽마르트 교회'이다. 이곳 지하실에서 세 구의 시신이 담긴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아직 무덤의 주인까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무덤이 생 드니를 포함한 세 명의 무덤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모든 프랑스인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생 드니 대성당(Basilique_Saint-Denis)이 엄연히 존재한다. 생 드니의 시신을 모신 곳으로 절대 신성시 되는 순례자들이 찾는 장소다. 그런가 하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하달 수 있는 파리의 노틀담 성당(Cathédrale Notre-Dame)의 지하에도 생 드니의 잘려진 목을 담은 무덤이 있다. 오랜 세월동안 '생 드니 대성당'과 '노틀담 성당' 사이에 '생 드니의 머리'를 두고 소유권 반환의 분쟁이 실제로 벌어져 왔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수많은 순례자들이 파리에 오면 가장 먼저 노틀담 성당을 찾는다. 가장 유명한 명소이니 파리에 와서 안보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몽마르트 순교자의 언덕을 찾는다. 사크레 쾨르 대성당에 들렸다가 다시 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생 드니 대성당으로 순례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생 피에르 몽마르트 교회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치 않은것 같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생 드니(Saint-Denis)는 그만큼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면서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일까? 그런가하면 말도 안되게 느껴질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그런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고 신통방통했다.

  모든것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생 드니의 죽음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제 파리 여행을 시작하는 즈음에서 당장은 묻어두기로 하고........ 이번 여행을 마치기 전에 한 번쯤 '생 드니'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 '생 피에르 드 몽마르트 교회'에 대해서 다시 거론해 보기로 해야겠다. 어차피 프랑스 역사에 대해서도 둘러 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몽마르트 언덕을 내려 온 우리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에트알 광장으로 이동했다.

거리의 화가들이나 몽마르트 공동 묘지를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이날의 날씨는 마냥 추운 언덕에서의 시간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에 또 하나의 파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이름은 'Arc de triomphe de l'Etoile' 이다.

 

 

 

 

 

 

 

 

 

 

 

 

 

 

 

 

           ---- 파리 여행기는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 일을 하면서 글을 써 나가야 하다 보니 조금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