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본 강(Thu Bon River)을 끼고 건설된 호이안(會安) 작고 아름답다.
호이안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삶의 속도가 천천히 흐르고 전통과 문화와 건축과 음식이 고스란히 잘 보존되어 있는, 그래서 어떤면으로는 엔티크한 레고마을로 착각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다 해가 지고 거리에 홍등이 밝혀지고 강물에 촛불을 밝힌 꽃배가 떠내려가기 시작하면 어디에서도 보기힘든 낭만적인 도시로 변모한다. 하지만,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옛 호이안의 명성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몰려드는 여행자와 상인들로 북적대 소란스럽다 못해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거기에다가 하수처리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은근하게 도시 전체에서 결코 상쾌하지 냄새가 떠나질 않는다.
말로만 세계문화유산이고 함부로 증개축을 할 수 있다고 떠들어대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찾아오는 여행자 수를 제한할 수 없다면 서둘러 개선이 시급할 수 밖에....... 마냥 이대로 방식의 방치는 외면과 쇠퇴로 이어질 것이 자명해 보인다.
베트남 중부지방의 중심은 다낭이지만 모든 여행의 중심지는 분명 호이안이다. 그런데 어쩌면...... 머지않아 다낭이나 후예로 여행의 중심이 옮겨가고, 호이안은 그냥 반나절 다녀가는 코스로 변질될 지도 모르겠다.
호이안의 역사는 누가 뭐라고해도 참족(占族)의 역사이다.
그것은 베트남 역사의 주체임을 자인하고 있는 비엣족(Viet)에게 있어서는 치욕스런 아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비엣족의 역사와 참족의 역사 모두가 베트남(Vietnam)의 역사에 고스란히 편입이 이루어진 마당에, 호이안의 오랜세월 지배했던 참족의 역사 또한 엄연한 베트남의 역사인 것이다.
AD. 1세기 경에(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살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했을 시기) 호이안 지역에는 이미 작은 포구가 생겨났고 소수의 원주민들이 어업으로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네시아 자바섬 지역에서 뛰어난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을 가진 참족(占族)이 바다를 건너와 나짱(나트랑)에 상륙하였다. 비엣족의 나라 베트남에 이방민족인 참족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참족은 어업과 해상을 통한 장사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입지조건이 자신들이 떠나온 인도네시아와 유사한 장소를 물색한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호이안이었다. 원주민인 비엣족은 하노이 이북의 산악지역으로 쫓겨갔고, 남부에서 중부지역에 걸쳐서 참파왕국이 건설되었다.
2세기 경이 되면 이 지역을 '람앞포(Lam Ap Pho)'불렀는데, 당시로서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항구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젠 어업을 넘어서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된다.
세계사적으로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비잔티움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오스만 제국은 거대한 아나톨리아 평원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통과하는 동서교역로를 막아버렸다. 유럽으로 아주 고가에 팔려가던 향신료와 비단과 도자기가 그만 길이 막혀 버린것이다.
상인들은 북쪽으로 천산산맥을 넘고 중앙아시아를 통과해 불가리아 폴라드 지역으로 들어가는 교통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고, 나침판의 발견등으로 발전한 항해술을 통해 해양실크로드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은 선박기술과 항해술이 요즘과는 달라 육지 인근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항해였다. 광할한 인도지나해를 오가자면, 식수와 음식 공급과 태풍을 피할 수 있는 항구가 절실하게 필요해 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도지나 반도의 딱 중앙에 위치하여, 일찌기 15세기 후반부터 이미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호이안은 그야말로 최고의 지리적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국제 무역항이었던 것이다. 호이안은 명실상부 해양 실크로드의 가장 중심으로 떠올랐다. 20세기의 홍콩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의 여러 성(省)에서 앞다투어 진출하여 화교 상인연합을 결성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에 뒤질세라 일본의 상인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국제 무역이 가능한 상인거리를 건설했고, 인근에 커다란 창고들을 세웠다. 창고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와 인근의 동남아로 부터 온갖 향신료을 사들였다. 인도와 서남아시아인들은 물론 메덜란드. 포루투갈. 스페인. 프랑스의 선박과 무역상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막대한 부를 차지한 화교들이 아예 호이안에 정착해 살기 시작하면서 호이안은 점점 화교식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했다. 출신 성(省)을 중심으로 사당을 짓고 자신들만의 거대한 상권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화교에 밀린 일본인들이 외곽지에 다시 일본식 거리와 상점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중간에 다리를 스스로 만들어 놓아서(내원교) 화교위 상권과 연결을 시도했던 것이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들어서 쇄국정책이 펼쳐지자 하나 둘 일본 상인들이 떠나고, 이 자리를 베트남 사람들이 서서히 차지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에서 18세기 까지(유럽에서 르네상스가 크게 부흥한 이후로) 호이안은 국제무역항구로 전성기를 누렸다. 베트남에 기독교(천주교)가 처음 전파된 것도 17세기경 호이안으로 무역선과 함께 도착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찬란했던 호이안 시대는 어쩌다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일까?
한 마디로 하자면........ '야속한 세월의 흐름에 동승하지 못하고 팽 당했다'고 짧게 말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다분히 여러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겠고........ 바로 그 대목에서 나는 우리나라 나주(羅州)의 영산포(榮山浦)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육지속의 나주평야 한복판에 등대를 갖춘 항구도시 영산포(榮山浦)를 말이다.
호이안과 영산포는 닮았다. 참으로 여러가지 면에서 너무도 닮았다.
한 도시는 최근 최고의 관광지로서 유명세를 톡톡히 치루는 중이고, 한 도시는 모든이의 기억에서 아스라히 지워졌다는 사실이 다르다. 옛 영화는 둘째치고........ '에게게. 여기가 항구라고? 이런 개천에?' 라는 비아냥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이럴 때 배경음악으로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가 생각이 날 뿐이다.
영산포를 무시하지 말자. 되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호이안 못지 않았다니까?
쇠락의 현상은 호이안이나 영산포나 똑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자연환경이 우선 변해갔다. 상류로부터 끊임없이 토사가 유입되면서 강바닥이 높아졌고, 유입되는 수량이 줄어들면서 강폭이 좁아졌다. 큰배들이 들어올 수 없게되었고, 한꺼번에 많은 배들이 접안할 시설이 부족했다. 선박기술의 발전으로 대형선백 건조가 늘어가는 한편으로 항만시설을 건설하는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이제 세상은 탁트인 넓은 바닷가에 방파제를 쌓고 대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항구를 필요로 하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최적지는 바로 다낭(Da Nang)이었다. 아래로 나짱도 부상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호이안은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필요가 없어지면 한 순간에 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호이안 시대는 하루 아침에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200년이 흐른 현대에 이르러 생활수준이 나아지고 해외로부터 여행자들이 베트남을 찾게되면서 부터 호이안의 다시 깨어나게 된다. 한 외국 영행작가가 베트남다운 아름다움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호이안을 들르게 되었는데........ 200년 동안 방치된 덕분에 옛 호이안의 모습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베트남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사진과 기사가 세계에 알려졌고, 지금 베트남을 찾는 사람 치고 호이안을 필수 방문지 목록 최상단에 올려놓지 않는 여행자는 거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고대의 기술로는 오늘날 같은 항구가 아니라, 말뚝을 사방에 박고 널판지를 걸치는 정도의 포구나 나루터가 전부였다. 이집트나 그리이스나 로마나 카르타고 같은 서구의 해양강국이 아니고서는 바닷가에 거대한 항구를 꿈도 꾸지 못하였던 시절이었다.(물론 중국엔 있었다)
바닷가 벼랑으로는 세찬 파도때문에 배가 난파되기 일쑤였고, 너른 백사장에는 커다란 배가 육지 가까이 올 수 없을 뿐더러 해일이나 태풍에 무방비 상태로 놓일뿐더러, 그렇다고 무너지지 않는 방파제와 접안시설을 바다 깊숙한 곳까지 설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거기에다 바다는 항시 해적들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인근의 해적도 있었지만, 일본의 왜구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을 지나 인도차이나 반도 일대를 휩쓸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거대한 선단을 꾸려 원정을 와서는 느닷없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재물과 식량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살해하였으며, 건장한 남자는 노예로 잡아가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는 불을 질러 모든 해안가를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런 모든 요건을 나름 충족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어느정도 내륙 안쪽으로 항구를 건설하는 방법이었다. 수량이 풍부하면서 수심이 깊은 강의 하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안쪽에 접안시설을 갖추고 상가와 창고와 주택을 지어서 시장이 형성되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호이안이며 영산포였던 것이다.
밀물과 썰물 걱정을 하지않고 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와 접안을 한 이후에 사람과 물품을 싣고 내릴 수 있었다. 내륙으로 어느정도 들어 온 만큼 태풍이나 해일로 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해적들은 약탈 후에 빠르게 빠져나가야 하는 약점때문에 내륙 안쪽으로 들어오기를 꺼릴 수 밖에 없다. 나가는 길목이 막히면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방어에 유리해졌던 것이다. 강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물품을 작은배로 나를 수가 있었고, 내륙의 다양한 물품들이 물길을 따라 내려와 시장으로 모여들기가 수월해 졌다.
그러기에 마을은 강을 따라 제방위에 건설되었다. 강줄기를 따라 길게 중심 도로가 하나 건설되고, 이 도로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주로 점포와 거주를 함께하는 용도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마을이 늘어나고 사방에 창고가 들어서는 만큼 곁가지 길들도 늘어났다. 화교들처럼 자신들 출신지역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조합을 이루고, 그가운데 거상이 생겨났다. 부가 축적되자 탑을 세우고 사원이나 사당 같은 공동체적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점차 상가와 부두가 확장되고 현지인을 위한 재래시장도 커져만 갔다. 호이안 시장을 장악한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 출신의 화교와 일본인들이었기 지금 호이안에 남아있는 건물의 대부분은 중국 건축양식과 일본 건축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대부분이 목조양식이라는 특징이 있다. 중국의 전통 가옥 건축방식인 대문. 마당. 뜰. 집의 순서로 이는 베트남 현지인들의 건축이나 생활방식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인 것이다. 특히 중국인 특유의 디자인과 장식으로 출신지역에 따른 사당을 겸하는 집회장소의 건축물들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여러곳에 남아있다.
영산포도 이와 아주 흡사한 이력을 가진 항구도시였다. 화교식이 아니라 일제에 의한 식민지식 일색으로 도시가 만들어 졌다. 거기에다 물론 국제무역항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물자는 배를 통해 이동했다. 조운을 통해 나라의 세금도 움직였다.
전라도 내륙에서 세금으로 걷힌 쌀과 특산물을 배(조운선)에 실려 영산강을 통해 내려가고, 서해 바다를 틍해 강화도에 이르러 다시 한강을 통해 뱃길로 한양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많은 물량을 한 번에 이동시키기엔 뱃길을 능가 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 이는 효율성을 따진다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대충 비교해 보기로......... 효율성을 따져서, 배를 통한 해상운송과 철도를 이용한 운송을 비교하면 8:1 정도로 해상운송이 훨씬 유리하다. 속도를 제외하면 감히 해상운송을 따라 올만한 방법이 없다. 더구나 화물이 고체가 아니라 액체나 기체라면 더더욱 비교불가다. 기차운송을 다시 육상운송(차량)에 대비하면 대충 10:1 정도로 기차운송이 효율적이다. 육상운송을 항공운송으로 비교하는 것은...... 사양하겠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고 정확한 것을 요구하는 시대로 변했다.
늘어나는 제비용은 시장의 기능에서 누군가에게 나누어서 분담될 것이고....... 신속함과 정확함과 편리함을 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로 점차 판매와 소비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시대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방법이나 도시는 자연히 도태될 수 밖에 없어진 것이다.
호이안은 새로운 시대에 훌륭한 여행상품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영산포는 친일청산과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남겨진 옛 정취가 이제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스산하고 썰렁한 촌동네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왜 뜬금없이 호이안에서 불쑥 영산포가 생각나는 것일까?
가슴 한 쪽이 괜스레 아련해지는 것은 왜 일까?
호이안은 참족(Champa)의 역사다. 비엣족(Viet)의 역사는 하노이를 중심으로 중국 국경지방에 걸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들 모두가 베트남의 역사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투본강 어귀에 서서 가만히 호이안을 바라다 보고 있으면....... 참족이 보이지 않는다. 베트남의 역사를 거의 느껴 볼 수가 없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호이안은 온통 화교의 역사가 아닌가? 화교가 베트남에 남겨놓은 유산이 아닌가 말이다. 참족의 역사가 베트남의 역사라는 말은 설득이 가능하겠지만, 화교의 역사가 베트남의 역사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호이안의 역사에서 중추적 역활을 담당하고 기록과 유산을 남긴 사람들은 틀립없는 화교의 상인(華商)들이었다. 중국 출신의 상인들이 대부분이었고, 본국의 쇄국정책으로 일본인들은 모두 떠나갔다. 그 과정에 베트남인(참족)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호이안의 역사에서 참족(베트남인)은 국제무역의 상권에서 멀어진 주변인이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호이안 주변에서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위하여 생필품을 생산 조달하거나, 물품을 배에 선적하고 하선하고 창고에 보관하는 과정에 필요한 단순 노동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국제무역항의 주체자가 아니라 허드렛일이나 하는 들러리였을 뿐이다. 호이안의 지배자는 부를 축적한 화교(華僑)였으며, 현지인들은 대부분 그에 속한 식민지인이었던 것이다.
화교(華僑)란, 다양한 이유로 중국 본토를 떠나 해외 각처에 이주된 사람들로, 현지에 정착하고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본토와 문화적. 사회적. 법률적. 나아가 정치적 측면엣 아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의 후손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세계 도처에서 근면성실로 엄청난 부를 축척했다. 그리고 그 축적된 부를 대리자격으로 내세운 화상(華商)을 통해, 화교 사회와 중국 본토의 이익을 위해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서구의 거대 금융권에 맞먹는 거대자본 세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이 짧은 시간에 급성장하게 되는 든든한 배경이었으며, 어마어마한 자금줄이 바로 화교였던 것이다.
'타인의 나라를 정복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서 영토를 강제로 점령하는 방법이 하나요,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목표로 하는 나라에 한도껏 마구 꿔준 후에 상환을 미끼로 그 나라를 차지해 버리는 방법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선진방식의 거대 금융기관이다'라고 일찌기 존 애덤스는 미래를 예측했다. 초강대국을 자처하는 국가들이 여럿 있겠지만....... 21세기 이후의 진정한 제국은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국제금융 기관들과 중국의 화상(華商)들이 차지하고 있는 양대 제국이 아닐까?
어쩌면 신자본주의 방식의 거대 제국시대 다음은 금융 제국시대가 아닐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글로벌 시대에 경제적 국경은 점점 무력화 내지는 무색해질 것이다. 국가의 경제 정책은 국경이 있겠지만, 돈(자본)이 오고가는데 국경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이다.
국제무역항의 기능을 상실한 채, 200년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사라졌던 호이안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그 버려지고 잊혀졌다는 이유로 옛 유산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새로운 여행 중심지로 우뚝 솟아났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손님을 맞는 베트남 현지인과 찾아오는 외부 여행객으로 구분이 되어 보여지지만........ 솔직히 궁금하기는........ 장사의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급속한 개발과 시대흐름 속에서 막대한 돈을 끌어 올 힘이 현지인들에게 있었을까? 아니면, 겉에서 장사는 현지인들이 하고 있지만, 뒤에서 은행을 통헤 수익의 대부분을 입금받는 사람들은 여전히 화상이 아닐까?
한 조사기관의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절대다수가 중국(중국인)을 아주 싫어한다’고 발표해 충격을 주었다. 드러난 절대적 수치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현재 세계경제를 양분하다시피하면서 극한의 대립과 마찰을 일삼고 있는 당사국인 ‘미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거부감정’의 수치보다도 높아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중국(중국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이 나쁠뿐더러 앞으로 적지 않게 한국을 상대로 하는 정치. 외교. 경제에 있어서 영향을 끼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역사적 이해관계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일부 감정의 표현일 뿐, 결코 혐오의 수준은 아닐뿐더러 이런 여론조사가 양국 관계나 국익에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서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중국(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아직까지는 반일 감정에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혐오라는 표현이 그리 틀림말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국(중국인)에 대한 싫은 감정이 어디 우리나라 대한민국뿐이겠는가? 아니다. 한국인의 반중감정으로 표현된 수치에 근접할 만큼 세계가 지금 중국인들을 경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세계인들에게 물었다.
‘현시점에서 세계사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두 나라를 꼽아 보라’고 질문을 던졌다.
‘미국과 중국’ 이라는 답변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두 나라 중에서 지금 당장의 우위국은 어디이며, 앞으로의 우위국은 어디인가’를 질문했다.
‘아주 근소하게 현재의 우위국은 미국이 분명하지만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앞지를 것’ 이라는 대답이 절대다수였다.
‘그렇다면 지구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느 나라가 종주국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미국이라고 탐탁하지는 않겠지만, 중국이 종주국이 되는 사태만은 어떻게든 막아야한다’는 여론이 절대 우위를 차지했다.
왜 그럴까? 이 여론조사가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차피 이런 여론조사가 세상에 드러난 만큼......... 이제 당장 미국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중국의 지도부가 어떻게 대안을 찾고 무엇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지가 어느 정도는 감이라도 잡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감정 또한 약간의 수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대한민국의 대중 정서와 아주 흡사하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일본에 대한 혐오수준의 감정 또한 우리와 아주 흡사하다. 정말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베트남 사람들의 정치체재와 사회제도는 중국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개발정책을 어느 정도 답습하고는 있으나, 골격은 역시 공산당 일당의 지배에 의한 사회주의 공화국 노선을 지향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당히 모순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나 앞으로의 베트남을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이제까지 중국이 보여 온 중화사회주의 공화국 방식의 체재와 개방과 경제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이미 굳어져 버렸다.
그러면서도 베트남은 중국을 싫어한다. 지금 베트남이 상대해야만 하는 최고의 적(敵)은 당연히 중국(中國)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다음 베트남의 적은 일본이요, 그 다음 베트남의 적은 아마도 태국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한국(大韓民國)과 미국(美國)은 베트남에게 절실한 우방인자 미래를 함께 개척해 나가는 경제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역사는 수많은 미스터리와 아이러니의 합작품이다. 정해진 확실함은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정답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고, 끊임없이 돌고 또 돈다.’(지극히 주관적인 내가 내린 결론임)
대한민국도 베트남도 왜 중국을 그렇게 싫어할까?
지리적으론 아주 멀리 떨어진 이민족 국가이지만 중국과 베트남과 대한민국은 유교. 불교. 한자 문화권 이라는 국민들의 정서와 역사 속에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는,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동질성이 존재한다. 일본을 여기에 끼워 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같은 근본을 가졌으면서도 왜 이렇게 다른가? 무엇 때문에?
호이안( Hoi An)에서 투본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바다와 마주치는 곳에 끄어다이 선착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30km의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사장 저 너머에 다낭(Da Nang)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 선착장에서 부터 시작되는 약 3km의 해변을 끄어다이 해변(Cua Dai Beach)이라고 부른다. 여행자들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호이안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으로 늘 사람들로 붐비는 해수욕장이다.
끄어다이 해변이 끝나면 작은 어촌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어귀를 지나면 작고 소박한 해변이 비로소 감춰있던 모습을 드러낸다. 안방 해변(An Bang Beach)이라 불리는 이곳은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이름난 해수욕장이라기보다는 동네 꼬마들이 뛰어놀고 동네사람들과 인근의 현지인들만을 위한 해변 놀이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조금은 외져 보이고 한적하다. 파라솔 임대와 해변을 낀 레스토랑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낙후되어 보이고 로컬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어촌마을 해변이라 하겠다.
내가 일부러 이곳에 선택한 호텔은 이 해변에서 숲속 골목길을 통해 직선거리로 약 100m 쯤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나는 이제껏 육십 평생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밤바다에서의 수영’을 실컷 해보았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한밤중의 바다수영.......... ‘어두운 바다 저편 위로 달이 떠올랐다!’ 달빛이 내려 부서지는 파도 저 너머로 멀리 다낭의 야경이 빛나고 있었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이지만....... 그동안 한국 바다에서 수영은 해 본적이 없었다. 물론 강에서는 추위를 무릅쓰고 해 보긴 했다. 우리나라 바다는 해만 지면 해수 온도가 뚝 떨어지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기에(또 밤바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이제껏 한 번도 경험을 해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베트남에서라면 꼭 밤중에 바다수영을 해 보아야지’라고 별러왔던 터에........ 밤이 깊어서 해변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그만........ 무작정 무모한 도전을 감행해 보았던 것이다. 인적이 거의 없는 어두컴컴하고 스산한 바다에서 말이다. 짜릿하면서도 상쾌했다. 밤에 하는 바다수영....... 그것은 해 본 사람만 아는 아주 특별한 맛이 있다. 달빛아래 바다수영이라........ 챠밍여사도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숙소에 있는 조카와 손녀에게도 전화를 걸어 불러냈다. 그날, 안방비치의 바다를 우리 가족끼리 풀 셋트로 전세를 냈다. 꽤나 오랫동안 물놀이를 즐겼다.
다음날 아침 일찍, 또 언제나처럼 안방해변으로 새벽산책을 나섰다.
우리가 지난 밤 바다수영을 즐겼던 바다 오른쪽으로 저만치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벽부터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훌훌 벗어던지고 새벽바다 수영을 즐기고 있다. 흡사 우리나라 조기운동을 이들은 새벽 바다에서 수영으로 건강을 다지고 있나보다. 남녀노수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이 이 부근의 현지인들이다. 당장 이 아침에 현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고는 달랑 내가 전부인 것으로 보여 진다.
‘씬짜오!’ 또 ‘씬짜오!’ 앞에 뒤에 사방팔방 다 ‘씬자오!’다.
어느새 나는 절대로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약간 낯설은 초짜 신입현지인일 뿐이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약간은 멋쩍은 웃음으로 화답한다. 궁금하면 안 통하는 말로 물어보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모여앉은 사람들에게서 찐한 베트남 커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는 줄행랑치듯이 손사래를 치고, 기어코 옆에 목욕탕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베트남식 아메리카노를 뜨거운 것으로 주문한다.
젊은 사람들이 쇠파이프와 목재와 전선 등을 끌고 해변으로 몰려오기에 물어보니........ 후후후........ 오늘이 여름 해수욕장 오픈하는 날이란다. 아무 때고 열려있는 해변이지만, 오늘부터 두 달을 특별히 정해서 해변에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고 간이 미점과 음식점도 생기고 노래방과 댄스장까지 오픈해서 외지의 여행객을 맞이하는 첫 날이라는 것이다. 오늘 하루 바쁘게 현지인들은 해수욕장 개장식을 준비한단다. 나보고 밤에 놀러 오라고 한다.
‘나? 놀러 오라고? 밤에 끝내준다고?........ 흐흐흐흐. 당근이지!’
소박한 해변 어촌마을을 산책하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 온다. 모닝커피는 마셨는데 말이다. 하니 어쩌겠어?
복잡한 해변을 벗어나니 좁은 마을골목 이곳저곳에 간이 상점들이 문을 이미 열고 있다. 상점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동남아 사람들은 대부분이 일찍부터 아침식사를 밖에서 해결하는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거의 집에서 음식을 하지 않고 밖에서 간단히 쌀국수 등으로 해결한다.
눈에 확 띄는...... 뭔가 맛있을 것 같은 감이 느껴져 오는 작은 가계로 들어가 앉았다. 특별히 쌀국수가 아니라 처음으로 닭죽과 비슷한 베트남 음식을 주문했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가 주방에서 내가 주문한 음식을 만들 짬을 주지를 않고, 입구쪽의 간이 조리대로 연실 사람과 오토바이가 몰려와 줄까지 서 가면서 반미(베트남식 샌드위치)를 주문해 기다렸다가 포장해 간다. 마냥 지연되자 아주머니가 자꾸만 나를 돌아다보면서 ‘미안해 어째요?’ 하는 표정을 짓는다. ‘늦어도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라고 웃으며 말해준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는데 이름이 짜오가(Chao Ga)라는 잘게 찢은 닭고기를 베이스로 하는 닭죽이라 해야겠다. 그런데 기대한 것 훨씬 이상이다. 맛이 기가 막히다. 흐뭇한 마음에 더하여 반미 하나를 추가로 시켰다. 아주 아주 썩 훌륭한 아침이었다.
반미를 추가로 포장하여 들고서 아침산책을 마치고 숙소를 돌아가니....... 아뿔싸......
헐!!!
챠밍여사와 조카와 손녀가 벌써 출입현관 옆의 풀장에 내려와 물놀이를 하고 있다.
‘아니........ 풀장 없는 숙소를 골랐으면 어떻게 할 뻔 했어?’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성년이 된 손녀를 위해 할아버지가 준비한 선물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달랏에서 널리 알려진 여행상품인 캐니어닝(Canyoning) 프로그램에 손녀를 참가시켜 주는 것이었다. 캐니어닝이란 우리가 이미 다녀왔던 따딴라 폭포의 계곡상류에서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따라내려 오면서 로프에 매달려 바위벼랑을 내려오기도 하고, 레펠을 이용해 벼랑의 중간벽을 타고 돌아가기도 하고, 웅덩이가 나오면 벼랑 위에서 점프로 뛰어내리기도 하는 난이도가 제법있는 최고 인기의 액티비티라 할 수 있겠다. 낯선 외국의 젊은이들과 팀을 이루서 한나절 놀라운 체험을 직접 경험해 보라고 추천을 했는데 글쎄......... '할아버지. 저 혼자서는 안할래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손녀를 혼자 보내지 않으려면 결국엔 할아버지가 따라나서야 하고, 할아버지가 나서면 죽기살기로 할머니가 따라나서는 경우가 되는데....... 할머니가 지금 허리랑 무릎을 치료중이라 배낭을 버리고 캐리어를 끄는 마당에....... 결국 손녀의 사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호핑투어(Hopping Tour) 였다. 호핑투어는 팀을 이뤄서 배를 대절해 바다로 나가 즐기는 프로그램이다. 보트 투어라고도 한다. 바다에 나아가 섬을 방문하기도 하고, 하일라이트로는 바닷속 풍경이 아름다운 장소에 닷을 내리고 수영과 물놀이와 바닷속 구경을 모두 함께 해보는 프로그램이다. 바다에서 보는 일몰 감상이 상품에 들어가기도 한다. 호핑투어는 베트남에서는 아무래도 나짱(나트랑)이 유명하겠지만, 호이안에도 분명히 투어상품이 있다. 그래서 여행의 말미에 대미를 장식할 겸해서 적극 추전하였는데........ 이번에도 결국엔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할아버지야 당연히 굿(Good) 이겠지만...... 다녀 올 때까지 신경쓰며 기다려야지, 비용 절약되지, 안따라가도 되었으니 말이다.(할아버지가 하루종일 좁은 배에서 뭘 하겠는가? 물놀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면서...... 그때 까지는)
'할아버지. 호핑투어 안해도 벌써 충분해요. 호텔에 풀장 있지요? 골목만 조금 나가면 바다가 있잖아여. 새벽이든 밤이든 마음대로 수영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배타고 나갈것 까지는 없는것 같아요.'
듣고보니 또 충분히 그럴만 하지 않은가.
헐.
더군다나.........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 이 호텔은 통째로 우리가족 전용이었으니 말이다.
베트남 해변의 전형적인 로컬 분위기를 듬뿍 담고있는 호텔은 작고 아담했다. 식당과 휴계실과 사무실을 통합해 쓰고있는 본관이 3층이고 잔디밭 건너에 비슷하게 3층의 별관이 놓였는데, 그 건물들 사이에 아주 작고 아담하고 앙증맞은 수영장(풀장)이 그저 고만고만한 가족용 야외샤워장 처럼 위치해 있다. 처음엔 크기에 당연히 실망스러웠다.
우선권을 가진 손녁가 먼저 별관의 3층을 숙소로 선택했고, 우리는 본관의 3층을 차지했다.
호텔측의 배려로 새벽 체크인을 하고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다 돌아왔을 때, 분명히 다른 손님 두팀이 머물고 있었다. 풀장은 온통 아이들의 차지였다. 우리가 호이안 올드시티를 돌아보고 귀가했을 때, 호텔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숙박객들이 모두 체크아웃을 하는 날이었고, 이젠 우리가족만 남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휴계실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매니저가 다가와 메모지를 건넨다. 현관 잠금장치 번호였다.
호텔측의 아무도 이곳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퇴근을 하지 못하고 우리가 돌아 올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호텔이 그냥 통째로 우리것이라는 말이었다. 혹시 드나들때는 대문만 열고 나가서 다시 잠그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시설과 룸들은 그대로 문이 열려있다.
순간........ '내가 정말 이 정도로 출세를 한거야? 이 호텔이 전부 내 소유의 별장이란 말이야?'라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매니저와 관리인은 다음날 아침 7시 40분쯤 오토바이로 출근했다. 우리에게 간단하나마 아침을 차려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방 청소를 사양했기 때문에 관리인이래 봤자 풀장에 물을 교환하고 우리가 흘려논 물기를 닦고, 혹시나 쓰레기를 치우는 정도 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점심 때가 지나면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모두 퇴근을 해버린다. 우리 체류기간 동안 다른 예약 손님이 없단다. 그냥 편하게 통째로 마음대로 쓰란다.
헐!!!!! 살다가 살다가........ 이런 횡재가......... 그때문에 우리 손녀가 지금........ 굳이 다른 할 일을 찾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마음먹은 것이다. 눈 뜨면 바다건 풀장이건 물놀이를 하다가, 관리인 출근하면 아침 차려주고, 또 놀다가 나무 그늘에 누어서 음악 듣다가 지루하면 뒷담너머 바다에 가서 풍덩 빠져놀다가....... 배고프면 수영복 차림으로 동네에 나가서 쌀국수. 반미. 다른 베트남 로컬 음식을 사먹고, 아니면 싸들고 돌아와 풀장에 풍덩 빠져서 먹고 마시고 놀면 되는데........
결국 손녀가 다소 몽환적인 눈빛으로 다가와 한 마디 하는데........ '할아버지. 우리 지금 천국에 있는것 같아요........'
그래. 내 마음도 딱 그래..........
우리들 스스로가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절제도 하면서 즐기니까 호텔 매니저도 특별한 경우라면서 아예....... 아침도 챙겨서 풀장으고 가져다 주고........ 수시로 먹거리만 밖에서 사다가 그냥 풀장에 들어앉은채 먹고 마시고 무한의 자유를 맘껏 누려본다.(이런건 어디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저녁에는 밤바다에서 야간 수영을 즐기고, 해수욕장 개장 축제에도 참석해서 놀고, 여기 안방비치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레스토랑엘 갔는데....... ㅎㅎㅎㅎ....... 그냥 맨발에 수영복 차림으로 2층 테라스에 앉아서 호이안에서의 만찬을 즐겨본다.
'좋은 여행이란게 뭐 별거야? 바로 이런게 좋은 여행이지!'
쏟아져 들어오는 해외소식들을 검색하다 보면 '도대체 중국은 왜 이러는 거지?' 하는 기사들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중국여행객들이 해외에 나가서 어처구니 없는 파행을 저질렀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 부터,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의 뒤에 숨어서 실질적 이득을 독차지하고 있다느니, 시진핑이 전인대를 통해 영구집권의 길로 접어들었다느니 하는 정치외교적인 사건까지 참으로 다양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몰려온다. 이런 사건들이 이슈가 되는 이유는....... 제대로 인간적이지 않거나 상식선에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해괴망측한 토픽성 기사들이기 때문이다. 문화와 가치관이 달라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용납되기 어려운....... 그렇다고 해프닝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는 일들이 중국, 혹은 중국인들에게서 생겨나고 세상에 전파된다.
현시점에서 (중국)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무엇이 있을까?
중국과 관련되어 있는 시사성이 큰 것부터 찾자면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 '중국굴기(中國崛起)' '일대일로(一帶一路)'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은밀하게 지지하는 시진핑' '신장 위구르 지역 달래기' 등이 먼저 떠오른다.
이것들을 면면히 살펴보자면........ 더도 덜도 아닌 당장의 시점에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꼴'이 된다.
100년을 넘도록 지구상에서 벌어진 모든일에는 미국이 개입되었거나 배후에서 관여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 긍정적인면과 부정적인면 모두를 통털어서 미국이 끼지 않는 일은 지구상에서 없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느순간에서 부터인가 이번엔 중국이 불쑥 끼어들지 않는 일 또한 지구상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두 나라는 시시콜콜 사사건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상이 비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느순간에서 부터인지 세상의 눈에는 중국의 태도와 행동에서 불편함을 넘어서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반인륜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발견하게 되었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하여 웃으며 손을 잡지만 뒤에서는 '되놈(떼놈)은 절대 믿어서는 안돼. 되놈 기질은 절대 변하는 것이 야니야'라며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 한족(漢族) = 중화사상(中華思想) = 중국(中國) = 중국 공산당( 中國共産黨 )'
이 공식이 현재 시진핑 정권이 내세우는 중국의 주체성이요, 중국인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가치이자 이념이다.
이것을 다시 내 방식으로 정리하자면 바로 '되놈(떼놈) 기질'이요 '비단장수 양서방의 심뽀'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베트남. 미국. 일본사람들은 유독 중국을 싫어하는가?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중국을 경계하고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은가? 세계를 통털어 최상의 포식자 제국 두 나라(G2)에 포함되는 강대국인데 말이다. 어찌되었던 작금의 세상에 중국과 가가이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에도 다들 중국이란 나라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푸틴의 러시아나 북한처럼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이 중국같은 강대국과 유대를 유지하는 것임을 떠올리지만, 그들 조차도 영원하거나 아주 각별한 맹방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직면한 급박한 상황 때문에 잠시 어깨동부하고 인증샷을 찍고있는것 뿐이다. 중국은 이런분위기 대부분이 미국의 왜곡과 음모라고 주장한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는 하나........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베트남이나 지난 역사속에서 실제로 중국을 상대하고 겪어본 입장에서는 또........ 음모나 왜곡이 아니라 진실이며,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음흉함까지 듬뿍 가진것이 비단장수 양서방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중국. 한국. 베트남은 같은 '한자 문화권' 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오랜 역사와 가치관과 생활속에 '유교' '불교'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또다른 변화의 과정을 거쳤기에 넣을 수도 아니면 제외시킬 수도 있다.
이런 중국의 배후에 또다른 엄청난 세력이 존재하였으니 바로 화교(華僑)다.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지 중국 본토를 떠나 동남아를 시작으로 호주와 미국과 유럽에까지 널리 퍼져서 살아가고 있는 중국인들을 일컷는 용어로, 해외에 흩어져 살면서도 언어와 문화와 전통풍습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특유의 단결심과 근면 성실로 화교들은 해외에서 금융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유대인 다음으로 거대한 부를 일구었다. 화교가 보유한 선진지식과 막대한 부가 고향으로 쏟아져 들어가면서 비로소 중국은 현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지금 초강대국 중국의 위상에는 전방위에 걸쳐서 화교의 역활이 절대적이었다. 화교의 자금과 헌신과 지원이 없었다면, 거대 중국은 아직도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당장의 베트남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화교(華僑)는 내가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커다란 숙제중 하나이다. 중국의 개혁과 경제성장은 곧 화상(華僑)의 역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그 화교가 여전히 베트남의 경제를 차지하고 좌지우지하고 있다. 베트남 국가 안에서 화교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베트남의 국가정책이나 경제관은 중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중국식의 개방과 경제개발이 곧 지금의 중국과도 같은 성공으로 이끌어 갈것이라고 생각하고 추진한다. 그 과정에 주체들의 손과 생각이 바로 화교들이라는 점이다. 중국으로부터 종속이 아닌 자주독립을 추구하고 중국을 혐오하면서도 지금 당장 선택하고 하는짓은 고대로 중국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세계는 베트남을 '작은 중국'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베트남 어디든지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중국의 영향력을 참으로 크게 받았구나' 하는 기본 바탕 위에서 부지런히 땀흘리며 새로운 베트남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확실한 베트남인들로 가득차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있게 그들의 생활속을 들여다보면...... 그속에 실질적으로 맹약하고 있는 화교가 엿보이고, 이는 곧 어느정도는 여전히 중국이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주관적 시선임을 사전에 분명하게 밝히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참으로 중국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공부하면 할 수록 느껴지던........ 거만하고 방자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만으로 점철된 중국사를 치를 떨며 읽어내렸기 때문이리라.
인류역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황하문명국)이라면, 그 명성에 걸맞게 인류와 역사를 위해서 나름의 공헌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영역' 밖으로 긍적적 영향을 끼치거나 베푼것이 없다. 하긴 비단과 종이와 화약 등을 내세우긴 하지만...... 한족들은 쇄국으로 치달으며 자신들의 영역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추구하느라 정작 밖으로의 확장이나 성장을 모색하지 못했다. 한족의 영역 밖으로 겨우 눈길을 돌려 본것이 한국과 베트남이 전부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 세 나라의 사이에는 종주국(지배자)을 강조하는 중국과 끊임없이 저항을 계속한 자주적 독립국을 주장하는 베트남과 한국의 입장이 대립한다.
--- 허용되는 지면 용량관계로 이제 다낭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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