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열강의 침략으로 인하여 식민지지배를 당한 역사가 같고, 남북으로 갈라져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한 역사가 같은, 결코 흔하지 않은 경험들을 공유한 양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의도하였던, 하지 않았던 서로 간에 총 뿌리를 겨누었던 애증의 세월 또한 이 역사에 포함된다.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의 식민지 해방전쟁에서 승리할 무렵인 1956년 월남(베트남 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 간에 첫 수교가 시작되었으나,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월남 정부가 패망하자 양국 간의 수교는 단절되었다. 전쟁의 승자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월맹) 이었으며, 호치민 정부에게 대한민국은 침략자의 군대였던 것이다. 정말로 가슴 아픈 과거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베트남이라는 국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며, 월남과 월맹 중에 누가 베트남 역사와 민중들에게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우리가 왜 그들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확신은 물론 일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서 냉전시대의 산물인 월맹은 북한과 같은 빨갱이들이며, 월남은 우리가 수호해 줘야만 하는 민주주의 정부'라는........ 미국이 우리에게 쇠뇌 시키고 전달해준 고정된 관념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끌려들어간 전쟁이었다.
전쟁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그럴싸한 회유와 보상과 함께 막 들어선 박정희 군사정권의 체제유지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측면이 있다고는 하나, 아무런 이유나 명분이 없는 남의 전쟁에 아무런 이유나 명분없이 우리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비극이었다.
왜 베트콩이 우리의 적이 되어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쏜 총알에 옆에 있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자 대한민국의 젊은 피들이 들끓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국군은 용맹했고 전투에 탁월했다. 타고난 전사들이었던 것이다. 개인화기로만 무장한 월맹군과 한국군의 전투력을 약 1:9 로 평가했다. 그러자 월맹군 지휘본부는 특이한 명령을 하달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한국군과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불합리한 반인륜적 파행을 늘 수반하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일지라도, 전쟁의 전 과정이 절대로 정의만으로 수행될 수는 없다.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대동아 전쟁터에 끌려간 까닭에 한국인들의 저변엔 전쟁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잔혹한 전쟁의 참상이 어떤 것인지, 침략자의 만행이 어떤 것인지를 강제로 끌려간 처지의 한국인들은 목격하였고, 깨달았었다. 하지만 침략군이 되어 쳐들어가서 승리자가 된 한국군은 그 뼈저린 가르침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일본군이 한국과 중국과 대동아 전쟁에서 벌였던 그 참혹하고 가혹한 수탈과 만행을, 이번엔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고스란히 반복해 저질러 버리고 만 것이다.
전쟁은 이렇게 인간의 이성을 빼앗아가고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시켜 버린다.
정작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은 사이공에 체류하면서 무전으로 명령만 내리고, 비행기로 황우(제초제 원액)를 밀림에 쏟아 부었다. 한국군과 월맹군이 전투를 버리고 있는 교전지역에 집중적으로 말이다. 당시에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이 지금도 앓고 있는 고엽제 피해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은 후방에서 전황체크와 작전지휘에만 몰두하고, 실제 최전방에서 총을 쏘면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대부분 한국군이었다. 아울러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물자와 병력을 보관하고 보충하기 위하여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된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베트남 전쟁에서 간접 참여국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엄청난 경제적 수입을 올렸다. 이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 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경제대국의 발판을 마련한 것과 똑같은 경우였다.
이런 사태를 일본학자 사노 코지는 짧게 이렇게 평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총알을 제공했고, 일본은 물건을 팔았으며, 한국은 피를 팔았다.” 라고 말이다. 대한민국은 서커스단의 곰이 되어서 재주만 부렸다는 뜻이다. 그럼 한국의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댓가는 어디로 갔는가?
그 돈은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두 군데로 추측된다. 일부 학자는 대한민국의 현대화, 그러니까 경제개발의 초기 자본으로 쓰여 졌다고 하고, 반대쪽에서는 쿠데타를 통해서 막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비자금으로 활용되기 위하여 스위스 비밀금고로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무심하게도 세월은 여지없이 흘러만 갔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는 분명 애증으로 가득 찬 원수 관계였으나, 급변하는 국제관계와 경제협력의 필요성 속에 마침내 1992년 다시 수교를 하면서 함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20세기형 관계로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지금에는 베트남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숫자가 월등하게 늘어나면서 어느 때 부터인가 '사돈의 나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을 격세지감이라 해야할까?
다낭(Da Nang)은 베트남 중부지역의 최대 도시이자 거주인구 구성으로 볼 때, 베트남의 5대 도시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는 바뀔 것이다. 머지않아 하이퐁이나 껀터를 능가하는 제 3의 도시로 급부상이 유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면 곧바로 나짱(나트랑)이 호치민. 하노이. 다낭에 이어서 새롭게 부상할 것이다.
다낭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생겨나고 성장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도시라 하겠다.
오랜 세월동안 베트남 중부 지역의 중심은 다낭에서 30km 떨어져 내륙에 쑥 들어가 있는 호이안 이었다. 200년 전에 들이닥친 프랑스 식민정부는 새로운 항만 건설기술의 발달을 기반으로 쉽게 바다로 직접 드나들 수 있는 새로운 항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다낭을 베트남 중부지방의 새로운 중심 거점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와 약탈이 커져갈수록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월맹(베트남 독립연맹) 세력은 중국 국경을 중심으로 하더니 하노이를 탈환했고 베트남 중부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다낭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확대하면서 북부지역 점령을 다시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프랑스 임시정부가 런던으로 망명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도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낭 이북의 지역이 월맹군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통일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전쟁의 막바지에 중국을 장악한 일본이 쳐들어 왔다. 일본의 막강한 전투력은 삽시간에 베트남을 초토화 시켰다. 막바지로 몰린 전황을 만회하기 위하여 일본은 베트남에서 무자비한 약탈을 통해 부족한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자 했다. 분명한 목표가 약탈이었으니 그 피해당사자들이 겪게 될 참상은 어떠했겠는가? 실로 아비규환 지옥이었다. 약탈과 살육과 방화와 강간이 이어졌다. 프랑스가 지배한 200년의 피해보다도 8개월 동안 자행된 일본의 만행이 몇 배나 참혹했다고 베트남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반감과 저항감을 동시에 갖고 있는가 하면, 일본에 대해서는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은 이런 비평에서 특별하게 예외의 대접을 받고 있다.
월맹은 처절하게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다. 하지만 일본은 프랑스 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군사집단이었다. 호치민과 월맹 지도부는 중국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로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맞이했다.
전범국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이제 베트남은 진정으로 통일을 확신했다. 어찌되었던 세계대전의 결과는 일본을 패전국으로 강제 무장해제 시켜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무심한 전쟁의 결과는 지구 반대편의 또 다른 전범국 히틀러의 독일을 무장해제 시킨 반면에, 겨우 죽다가 다시 살아난 프랑스를 연합군 승전국에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전쟁의 피해보상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막강한 힘을 프랑스에게 되돌려준 것이다. 그런 결과는 프랑스가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하겠다고 몰려오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대전 이전보다도 훨씬 큰 절망을 베트남 독립운동 진영에 안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호치민과 월맹 지휘부도 일본에 쫓겨 중국과 소련에 체류하는 동안에 차세대 젊은 지도자들을 양성했고 베트남 방식의 사회주의 체제 완성에 주력했다.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선진 전투력을 습득했으며, 일본에 대항하는 동안에 한동안 미국 측으로부터 다양한 정보와 무기 지원을 받기도 했다.
서서히 동서냉전이 첨예화되자 사회주의 확장을 꽤하는 중국과 소련의 막대한 지원이 월맹군에게 보급되어졌다. 프랑스와의 베트남 간의 독립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현대화를 달성한 월맹군이 무섭게 프랑스를 몰아세웠다. 결국 양측은 서로의 존립을 내걸고 끝장을 보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된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장담한 프랑스는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아 부었으나 참혹하고도 처절하게 패하고 말았다. 인도차이나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군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프랑스는 패배했다. 프랑스 식민지 정부는 호치민과 디엔비엔푸 협정을 맺고 말았다.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베트남 독립 해방전쟁에서 비로소 완벽하게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서구 열강들의 고질병은 하나 같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
프랑스 식민정부는 서둘러 미국 정보기관(CIA)를 통해 백악관과 모종을 음모를 꾸몄다. 프랑스 입장에서 베트남은 여전히 매력이 차고 넘치는 식민지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힘이 부족해서 결국 내어주는 상황이 되자, 힘이 넘쳐나는 다른 서구열강에게 슬며시 넘겨주고 나서 차후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겠다는 꽁수를 둔 것이다. 그 파트너가 바로 미국이었다. 신흥 강국 미국으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초리가 문제였던 것이다. 하여 그들은 이 약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CIA와 미 국방부와 백악관 간에 모종의 음모를 진행 시켰다.
이른바 현대 역사에 미국의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기록되어 있는 (통킹만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군이 철수를 단행하고 있는 그 시간........ 1964년 7월 말, 미 태평양 함대소속 구축함 USS 매독스함이 통킹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통킹만은 월맹군 지휘부가 있는 하노이 인근의 가장 가까운 해군기지였다. 국제법상 분명한 월맹의 영역이었으나 아직 채 베트남 국가가 수립되기 직전의 상황을 노린 것이다. 매독스함은 통킹만의 해변에 정박했다. 월맹군 해안 경비대가 항의를 했고 철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매독스함은 철수하지 않았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갑판에서 파티를 벌이다가 해안 초소를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붓고 바지를 내리고 볼 일을 보았다. 이는 상부에 그대로 보고되었고 마침내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월맹) 소속의 135편대 어뢰정 3척이 매독스함에 접근하며 거듭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해안 초소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또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그러자 더는 참지 못하던 한 젊은 장교가 해안 초소에서 매독스함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 겨우 유탄 몇 발이 매독스호 선체에까지 날아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매독스호에서 해안초소는 물론 인근의 월맹군 어뢰정을 향해 무차별 공격이 시작되었다. 상부로부터 교전 허락을 받지 못한 월맹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침몰 직전의 피해만 입은 채 겨우 도망쳤다. 하지만 진실과 다르게 미국은..... 도망친 베트남 해군이 곧바로 다른 함대를 이끌고 와서 전격적인 2차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진실이야 어찌되었건 이 사건은 곧바로 전 세계에 긴급 뉴스로 타전되었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미국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베트남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베트남과 프랑스 식민지 정부 간의 독립전쟁은 이제 엉뚱하게 베트남과 서방세계의 맹주로 부상한 대제국 미국과의 전쟁으로 국면이 전환되고 말았다. 체급이 다르고 군사력에 있어서 차원이 다른 이 억지 전쟁이 며칠이 지나면 끝나고, 이제는 미국의 식민지배가 펼쳐질 것이라고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베트남은 점령을 거부했고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장기전으로 이어졌으며, 끝내는 10년이 지나서 미국이 실컷 혼쭐이 난 채로 체면이고 뭐고 없이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죽어라 내빼게 될 줄을 말이다.
B-52 폭격기로 연실 부숴대고, 고엽제를 쏟아 붓고, 네이팜탄을 마구 날려 보냈지만....... 전쟁 초기에 미군이 내버린 구닥따리 M-1 소총을 주워서 훈련한 베트콩들은 군사력의 최고봉이자 미군 전투력의 상징인 F-15 전투기를 보기좋게 정글 위로 격추시켜 버렸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나 미그 전투기가 아니었다. 전쟁은 최신형 무기의 가공할 위력이나 잘 훈련시킨 군대의 숫자로 승패가 좌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베트콩들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입증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이를 부인했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 변명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베트남의 치욕을 씻어내기 위하여 과감하게 아프가니스탄을 쳐들어갔다. 결과는...... 베트남에서 당한 것과 똑같은 상황으로 죽어라 내빼고 말았다. 몇 년 전 트럼프 정부의 미국은 북한을 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트럼프를 향해서 맞장담을 했었다. 한반도 역사에는 강감찬과 을지문덕의 대첩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쳐들어 갈려면 트럼프 네가 직접 가봐. 이번엔 도망칠 퇴로도 찾기 힘들걸?
1971년 공개된 미 국방부의 팬타곤 보고서에 따르면 통킹만 사건이 미 정보기관의 조작과 음모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킹만 사건의 주역이었던 당시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라마의 회고록에서도 통킹만 사건은 미국측의 조작에 의한 매우 부끄러운 역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이 미국의 민낯인 것이다.
미군의 참패와 날 살려라 도망치는 뒷모습을 TV 화면을 통해 지켜본 과거 프랑스 식민정부의 주동자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베트남을 넘겨주는 댓가로 프랑스는 무엇을 미국으로부터 받았을까?
통킹만 사건이 벌어지고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난 직후, 느닷없이 미국의 B-52 폭격기들이 하늘을 까맣게 채우면서 다낭의 하늘에 나타났다. 무자비한 폭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미케 해변으로 미국의 상륙정들이 몰려왔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 곳이 바로 다낭이며, 세계적 휴양지인 미케 해변이 상륙장소였다. 이후 다낭은 미군의 전진기지가 된다.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인 바겅희 정권이 파병한 한국군이 처음 상륙한 장소 또한 다낭 인근의 해안이다. 한국군 또한 다낭에 처음 주둔지를 확보했다. 그때부터 다낭은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로 발전해 나갔다. 한쪽에선 전쟁을 치루고, 쉬어야 하는 병사들이 최고로 생각하는 휴양지가 바로 다낭의 미케 해변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가는 미군들로 인해서 다낭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공화국 노선을 택한 베트남과의 수교가 다시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베트남은 아주 가깝고 익숙한 나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여행 초기에 떠오른 지역은 아무래도 하노이를 거점으로 하는 하롱베이(Ha Long Bay) 관광이 주류였다고 생각된다. 자유배낭 여행자가 늘어가고, 여행사들 입장에서도 새로운 여행상품의 필요가 생겨나면서 점차 지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여,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호치민(사이공)을 중심으로 하여 무이네와 달랏을 같은 여행권에 넣는 여행상품의 개발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 마저도 어느 정도 효용가치를 다했다고 생각하여 개발해낸 새로운 여행상품이 다낭을 중심에 놓고 호이안과 후예를 포함 시키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실질적으로는 호이안을 중심에 놓고 다낭과 후예를 포함시키는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이렇게 북부의 하노이권과 중부의 다낭권과 남부의 호치민권이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포화상태가 되자 여행업계는 힘을 합쳐서 새롭게 나짱(나트랑) 여행권 개척에 공을 쏟고 있는 상황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사실 현대에 들어서 완성된 도시인 다낭(Da Nang)은 역사적으로나 여행자 입장으로나 그리 탐탁한 여행지는 절대로 아니다.
다낭을 좀 돌아다녀 보았다는 여행자에게 한 번 물어보라. 다낭에 가면 볼 것이 무엇이 있고 해볼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말이다. 기껏 다낭 성당이 있고 한시장이 있고 미케 해변에서 바다수영을 할 수 있다는 대답정도가 대부분일 것이다.
마블 마운틴(응우한썬)은 호이안 지역에 훨씬 가깝고, 미선 유적지도 호이안에 귀속된다. 동하 비무장지대를 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역시도 다낭에서 하이번 고개를 넘어 후예를 여행하는 중간에 포함시킬 것이지, 굳이 다낭 여행에서 가 볼만한 장소라 치기는 좀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좀 예외로........ 아니면 특별한 경우로 끄집어 낼 수 있는 관광 명소가 바로 바나힐(Ba Na Hills)가 아닐까 싶다.
다낭에서도 바나힐 여행상품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호이안에서도 역시 바나힐 상품을 적극적으로 판매한다. 나는 호이안에서도 바나힐을 다녀보았고, 다낭에서 바나힐을 다녀오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면, 바나힐은 다낭여행의 일부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여행의 대부분 일정을 호이안에서 체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때는 호이안 여행에 포함시켜도 무방하겠다.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바나힐을 여행함에 있어서 실질적 거리와 드는 비용이 다낭이 훨씬 가깝고 저렴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바나힐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후런트에서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사전 예약해 둔 픽업 택시와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과거에, 호이안에서 바나힐 여행을 감행했을 때, 두 사람이 사설 택시로 2시간 가까이를 달려 바나힐 주차장에 도착하고, 관람을 하는 동안 4시간을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호이안까지 데려다 주는데 한화로 4만 오천원을 불렀는데 흥정을 통해 4만원에 다녀왔었다.
그런데 이번엔, 4인 가족으로 다낭 호텔에서 픽업하여 1시간을 달려 바나힐 주차장에 도착을하고, 관람하는 시간을 5시간 기다려 주었다가 다시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데 3만 오천원에 예약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할 일이 있어서 물론 따로 팁을 지불했지만 말이다. 이 기사는 우연으로 또 한밤중에 우리가 공항으로 가는 픽업을 신청했을 때 다시 만나게 되기도 했다.
예상대로 픽업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무사히 바나힐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말레이시아를 처음 여행하였을 때, 나를 그곳까지 잡아 끈것은 쿠알라룸프의 쌍둥이 빌딩(페트로나스 타워)도 아니었고 페낭의 조지타운 풍경도 아니었다. 랑카위(Langkawi) 섬에는 흡사 우리나라 민속촌을 연상케하는 오리엔탈 빌리지(Oriental Village)가 있고,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진창(Mt. Cincang) 산에 정상부근에 '파노라마 랑카위'라고 불리는 스카이 브릿지(Skybridge)가 산봉우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하늘 위를 걷는 듯한 짜릿함과 아찔함을 느끼며 104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유리알처럼 알알이 박혀있는 안다만과 다타이만을 파노라마처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노르웨이의 투롤퉁가 절벽,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그랜드 캐년의 skywalk, 중국 장가계의 유리잔도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찔한 장소'로 선정되어 이미 톡톡하게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장소였다.
그런 이유로 말레이시아 여행을 감행하기는 했는데..........
오로지 걸어서만 쿠알라룸프 투어를 마치고 페트로나스 타워(쌍둥이 빌딩)와 잘란 알로 야시장의 매력에 빠지느라 예정보다 지체되었고, 페낭으로 장거리 이동하여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또 오로지 죽어라 걷기 투어를 즐기고, 인도양 바닷가 호텔로 숙소를 옮겨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거니드라이브의 매력에 푹 빠져서 동남아 식도락의 진수를 느껴보고 옥빛 인도양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다 보니....... 배를 타고 바다 건너에 있는 랑카위 섬을 다녀 올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하여, 언제가 다시 말레이시아에 와서....... 그때는 아예 페낭 공항에 도착을 하자마자 랑카위 부터 다녀와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기는 했는데......... 끝내 이제것 다시 가보질 못하고 있다.
랑카위의 스카이 브릿지(Skybridge)는 늘 나의 마음 한구석에 어떤 알싸한 아픔처럼 그렇게 남아 있었는데......... 어느날 길을 걷다가 여행사에서 사무실 밖에 비치해 둔 홍보책자 표지에 기가막힌 스카이브릿지 사진이 표지에 실려있는 것이 아닌가?
'다낭 여행의 새로운 랜드마크 골든 브릿지(Golden Bridge)' 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럴수가........ 베트남 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온 처지로 다낭은 물론 호이안과 후예까지를 통털어서 인근의 웬만한 곳까지 이미 웬만큼 섭렵한 처지로 이렇게 표지에 등장한 놀라운 풍경을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으며 진즉에 다녀와 보지 못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베트남에 다낭이 어디 다른곳에 또 있단 말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낭이 어디에 또 있지 않고서야........ 뭐라고? 바나힐에 있다고? 바나힐엔 그런거 없어?
헐!!!!!
또 헐!!!!
'바나힐엔 저런거 없는데......' 아니지, '분명 저런거 없었는데..........'
그런데 생겼단다. 바나힐을 지키는 거인 신(神)의 두 손으로 황금빛 난간을 가진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아주 독창적인 디자인을 갖춘 새로운 명소가 2018년 6월에 새롭게 등장했다는 기사와 함께였다.
그러고 보니 직전의 여행에서 첫번 째 케이블카를 타고 중간 기착지에 내렸을 때의 주변 풍광이 눈 앞에 떠오른다. 임시 가설된 곤돌라를 통해 건축자재들이 끊임없이 바나힐 정상부근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케이블카 주위로 무언가 커다란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때는 아마도 산정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대폭 확장하는 토목공사려니 했었다. 바로 그 자리에 표지의 사진처럼 생긴 조형물이 당시엔 전혀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사람들이 내 눈을 속이고 몰래 이런 큰 공사를 벌였다는 말인데.........'
그러니 어쩌겠어?
언젠가 기어코 다시 바나힐을 찾아가야만 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지.........
보통 우리가 바나힐(Ba Na Hills) 이라고 부르는 명소의 본래 이름은 ‘바나힐스 엔터네인먼트(관광단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가하면 이 단지의 핵심은 관광단지 입구 주차장에 내려서 너른 정원을 지나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나타나는 멋지고 고즈넉한, 마치 프랑스 전원마을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바나힐 리조트(Ba Na Hills Resorts)라고 해야겠다.
세 대의 케이블카 노선 중에 첫 번째 호이안선을 타고 올라 중간 기착지에서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 다음 케이블카를 바꿔 타는 지점에 새롭게 핫 플레이스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골든 브릿지(Golden Bridge)가 위치해 있다. 티엔 타이 정원의 구역이며, 정상의 프랑스 마을과 르자르딘 다모어 꽃밭 정원을 연결해 주는 고리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야겠다.
흔하게 우리는 이곳을 통털어 쉽게 ‘바나힐’ 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애버랜드’ 라는 회사가 ‘용인 자연농원’을 운영하는 것처럼, 베트남의 썬월드(Sun World Group) 회사엣 운영하는 바나힐 엔터데인먼트(바나힐 관광단지) 라고 보면 되겠다.
골든 브릿지(Golden Bridge)는 썬 월드 그룹의 요청에 의하여 호치민에 본사를 둔 TA 건축회사의 수석 디자이너인 안부 베트남(Vu Viet Ahn)을 중심모인 팀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건설되었다. 해발 1.400m의 높이에 약 150m의 길이로 완공된 이 다리의 이름은 금박으로 장식 된 기다란 난간 프레임에서 나왔다. 거대한 신(神)의 손이 산 정상에 불쑥 나타나 황금으로 만들어진 다리를 끌어당기는 이미지를 형상화 시켰다. 기존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롤링 트룽손 산맥 정상에 수놓아진 신들의 정원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하여 콘크리트와 메쉬와 유리 섬유를 이용해 바람에 씻겨 닳고 낡은 이끼가 가득한 있는 그대로 대자연의 일부로 흡수된 손의 형상을 극대화 시켰다. 2017년 7월에 시작하여 18년 4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놀라운 공정을 모두 소화해 탄생한 골든 브릿지의 풍경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그 멋과 운치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가장 많이 사랑받는 풍경은 아무래도 비가 그치고 안개가 자욱한 풍경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언론 매체와 여행업체의 관심을 독차지 한 때문이었는지, 언제부터인가 바나힐의 골든 브릿지는 다낭여행은 물론 전체 베트남여행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덕분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반면에 바나힐 이용요금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베트남 현지인의 일일 평균 수입이 채 한화로 1만 원 정도라 친다면 바나힐의 1인 입장료가 약 3만 오천원이라는 액수는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한 금액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우리가 터키 카파도키아에 가서 벌룬 투어를 하는 비용보다 훨씬 비싼 편이라는 말이 된다.
4인을 태우고 바나힐까지 데려다 주고, 바나힐 구경을 마치고 나오기까지 5시간을 기다려 주며, 자기가 점심 사먹고 차량에 기름을 넣고 운전을 해주는 비용이 3만 오천원인 마당에, 그냥 바나힐 구경을 하기 위해서 게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놀이시설을 이용하고 관광을 하고 다시 내려오는 비용이 1인당 3만 오천원이라는 차원에서 한 번 따져보자. 베트남 현지인들 입장에서 바나힐 관광이라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말이다. 식비를 제외하고 우리 가족 4식구 하루 나들이 비용이 이십만 원정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국도 아니고 베트남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그러했음에도 정작 문제는........ 붐빈다. 붐벼도 너무너무 붐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요 인파에 치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현지인도 있고 인근의 동남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거기다가 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별로 볼 수 없었던 한국인 여행자들이 모두 여기에 몰려 있었다. 아마도 한국에선 다낭의 바나힐 단독 여행상품만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많은 한국인들이 시방 다 어디에서 쏟아져 나왔는지 도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암. 미스테리다.
그런 처지에......
상황이 불을 보듯 뻔한 작금의 이 상황에........ 골든 브릿지는 무슨........ 자칫 이러다 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닐지 두려운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 아니겠니.
골든 브릿지 좀 제대로 누려보자........ 하늘아. 안되겠니?
차라리 폭우를 쏟아 붓고....... 천둥소리 요란하고....... 벼락이라도 가끔씩 쳐 주면 안 되겠니? 다리를 좀 심하게 흔들어 주든지.........
아이구야........ 코로나 사태를 핑계로 밖으로 싸돌아다니지를 못하는 동안에 건강관리를 너무 등한시 했음인가? 바나힐을 얼마 돌아보지 못하였음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힘에 부친다.
일전에 왔을때랑 달라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골든 브릿지 하나 뿐이다. 산정 아래서 케이블카를 타는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내려갈 때까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넘의 다리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튼 뭔가가 버겁게 느껴진다.
지난 번 여행에서는 자유시간을 4시간으로 했었다가, 이번엔 5시간으로 하면서, 혹시나 지루해지고 시간이 남게되면 어떻하나를 걱정했었는데...... 아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제 겨우 시작을 했을 뿐인데 벌써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가고 있다. 아무래도 시간에 쫓겨다닐 판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잠시 휴계실 의자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전부 넘쳐나는 인파들 탓이 아니겠는가? 지난 여행이 딱 우리를 위해 맞추어진 한가롭고 여유로운 최상의 시간이었다면, 이번 바나힐 여행은 온통 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휩쓸려다니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는 데 길게 줄을 서야하고, 구간마다 이동이 전혀 자유롭지 못하게 그저 휩쓸려 다니다시피 해야했으며, 사진 한 장찍으려면 인파 숲을 헤치고 기다려야 겨우 찍을 수 있는 상황의 연속이니...... 골든 브릿지 하나 구경하는 데 소용된 시간만해도 얼마인가? 이런것은 전혀 우리의 여행 스타일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가장 기피하는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었는데....... 이미 깊게 빠져버린 수렁에서 헤어날 방법이 도대체 없어 보인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우선 점심부터 먹어야 겠다. 밥 먹고나면 기운이 나겠지 뭐.'
이번에 와서보니 바나힐 입장권을 예매하거나 판매하는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입장권과 함께 뷔페 식사권을 포함시켜 판매하고 있었다. 대충 5시간 정도라는 관람시간이 소요된다면 어찌되었건 어디서든 무엇을 먹든 식사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말이다. 그것도 전에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는데 확실하게 달라진 풍속도였다.
그때 우리는 광장에서 펼쳐지는 거리 공연을 관람하면서 오픈 레스토랑에서 BBQ 스테이크랑 흑맥주를 각자 2.000cc씩 마셨었다. 아주 폼나고 기운이 펑펑 솟아나던 끝내주는 점심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여행에서 보니 바나힐 정상의 레스토랑 뷔페는 아주 유명했고 마치 필수 코스 같은 분위기 였다. 하지만 우리는 사전 예약시 뷔페권을 구입하지 않았다. 사전에 구입한다 해도 깍아주거나 다른 혜택이 전혀 없는데 굳이 처음부터 살 필요가 있을까? 관람 중간중간에 주점부리를 할 수도 있고, 예전처럼 스낵이나 BBQ 음식점을 찾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였다. 그런데 그동안에 그런 선택권도 변한것인지....... 스낵 코너나 간이 음식점 코너는 군데군데 있으나, 모든 분위기나 여건이 '바나힐에 올라왔으면 무조건 뷔페' 하는 분위기로 영업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 예전같은 자유스러운 선택의 폭이 확 줄어든 느낌이다.
결국 우리들도 일단 허기진 배를 달래주기 위해선 결국 뷔페권을 현장에서 구입하고 입장할 수 밖에 없었다.
유명 관광지에서 사람들로 가득 북적이는 음식점음 어떻다고? 영락없는 딱 그런 짝이다.(내 그럴줄 알았어)
거기까지도 좋은데........ 문제는 뷔페 이용에 술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현지 물가로 그렇게 비싸게 받으면서........ 기껏 와인과 작은 용량의 캔맥주만 별도 계산으로 판매한다. 입에서 쌍소리 나오려 한다. 이정도 레벨이면 생맥주 정도는 기본에 포함되어야 하는것 아닌가? 연수동 농협 건물 2층의 꾸 꾸가 그리워 진다. 음식 수준도 분위기도 한참 아래인데........ 사람들만 북적거린다. 100점 만점에 35점 정도 주겠다.
어쨌거나 점심을 해결하고 어느정도 기운을 다시 챙겨서 프랑스풍 마을로 발걸음을 옮겨 보려는데....... 손녀께서 긴급 청원을 해오는데.......... '할아버지. 우리 저쪽 놀이동산 건물에 들어가서 한 두개 타보기로 해요. 회전 그네도 있고요.......... 이런거 저런거 요런거 조런거.......... 있어요....... 타고 싶어요......'
쫄래쫄래 따라 들어가기는 했는데......... 할아버지가 꼭 타야 손녀도 타신단다......... 헐. 나 이런거 안 좋아하는데........ 거기다가 길게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있자니....... 미티미티. 내가 속으로 미티.
35년 쯤 되었나? 놀이기구를 타 본지가....... 암튼 타 봤다. 할아버지 노릇 할려고..........
프랑스 마을로 올라서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4시간 가까이 지나가고 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지? 예전엔 4시간이면 충분했는데........ 그때 우리는 아주 여유있게 바나힐을 속속들이 돌아다니면서 즐겼는데....... 이번엔 반쯤 돌았다 싶은데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서둘러 내려 갈 궁리를 해야 하다니......... 정상 부분의 정자와 사원 구경은 물론 와인 저장고도 도저히 엄두조차 내보지 못할 상황이 도래하고 만 것이다.
모두 불러서 상황을 설명하고, 프랑스 마을을 대충 돌아보는 선에서 이번 바나힐 여행은 마치는 것으로....... 화장실에서 볼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한것 같은 기분으로 되돌아 내려가야만 하는 부득이한 상황을 아쉽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려고 계획한 바나힐 여행은 아무래도 시기를 잘못 선택한것 같다. 이번 여행의 모든것이 참으로 즐겁고 좋았는데........ 옥의 티로 남을 것 같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주차장으로 가니 픽업 차량이 딱 맞추어 기다려주었다.
1시간 정도만 더 허락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짙게 남았지만, 나름 여행의 말미에 기대했던 바니힐 여행은 다행스럽게도 조카와 손녀에게도 나름은 즐겁고 만족스러웠나보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숙소인 다낭을 호텔로 돌아왔다.
내 입장에서는 허기가 느껴져서 어제 푸짐하게 보아온 장꺼리 남은 것을 어떻게는 정리를 해야 오늘 밤에 귀국을 위해 출발하겠다는 생각에 뭘 해먹을까 궁리를 하고 있던 중에......... 챠밍여사가 놀란 눈치로 다가와 옆구리를 쿡 쿡 찌른다.
‘뭐해? 애들 바다 나간대.’
‘오자마자? 난 배가 고픈데?’
‘나가서 군것질을 하던지 어디 가서 혼자 쌀국수라도 드시던지...... 일단 바다로 가야지 않겠어? 수영복 갈아입던데.......’
‘헐! 우리는 쟤들처럼 청춘이 아니잖아? 좀 쉬었다 가면 안 될까?’
‘할아버지 없으면 심심해서 안 된데...... 어여. 캔맥주 하나 들고서 나서?’
누구 하명이라고 거절을 하겠는가?
잽싸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쫄쫄거리며 도로에 나선다.
‘내 나이가 얼마인데......... 난 바다 안 좋아해. 산을 더 좋아한다고....... 이거야 원. 징말루 까맣게 탄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서리.......’
파란 바다....... 물론 좋지.
알맞은 수온에다 적당한 파도까지 끊임없이 밀려와서 딱 알맞은 만큼 충격을 전달해 주는데 어떻게 좋지 않겠어? 무지무지 좋지.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좋으면 뭐해? 바다에서의 물놀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거든?
하이고야. 오늘도 컴컴해지고 도심의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는데도........ 헐! 숙소로 돌아갈 생각들을 안해.
오늘이 떠나는 날인데....... 이제 이런 바다를 다시 또 언제 만나겠냐고......... 헐!
오늘도 변함없이 밤이 어느정도 깊어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남아있는 장꺼리를 모두 소화해 낼 요량으로 늦은 저녁을 준비하면서..... 각자의 짐정리를 시작한다. 식사를 겸해서...... ㅎㅎㅎㅎ. 남아 있는 맥주도 싹쓸이를 하는데....... 어느 틈에 모잘랐는지 챠밍여사가 우리 침대 옆의 냉장고에서 호텔 비치용 캔맥주를 하나 마지막으로 꺼내 마셔 버렸다. (우리 것일 중 알았단다)
좀 쉬었다가..... 다시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서 공항으로 가는 픽업을 신청하고 체크아웃을 하러 카운터로 갔는데....... 챠밍여사가 얼떨결에 마신 캔맥주 하나가 우리 한화로 1만 오천원 이란다. 기. 절. 초. 풍.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개에 단가 700원 짜리를 1만 오천원이나 지불하란다. 속에서 욕이 터져 나온다. '이런 우라질 도둑놈들' 싶으면서도 어쩌겠는가? 집에는 가야지........
호텔에서 공항까지 픽업 택시가 한화 7.000원 밖에 안하는데....... 캔맥주 하나에 만오천원 이라니.......
여행의 맨 마지막에 말이다........ 기분이 영 묘해진다. 마눌님 혹시 당황하실까봐 서리....... 지불하고, 정중하게 감사(?) 인사 드리고....... 당연히 팁은 얄짜루 없이 생략하고......... 공항으로 간다.
PCR 검사서를 제출하고 , 출국 수속을 마치고, 이번엔 평상시 절대로 허락 안하는 면세점 쇼핑도 허락해 주고, 비행기에 올라서 대한민국을 향해서 날아 올랐다.
무. 사. 귀.국.
일. 상. 복. 귀. 다시 열심히 생활하면서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기다려야만 하겠다.
다음 여행기는 아마도 프라하를 중심으로 동유럽이나, 파리에서 푹 쉬었다가 지중해로 내려가 프로방스를 돌아볼 생각이다. 챠밍여사도 요즈음 프랑스 남부에 빠져드는 눈치......... ㅎㅎㅎㅎ
--- 감사합니다. 이제야 (베트남 여행기)를 마치게 되었네요. 다음 여행까지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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