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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월남유감(越南有感)>

by 피안재 2022. 6. 18.

 

 

 

 

 

 

 

 

 

 

 

 

 

 

 

 

 

 

  베트남을 여행하다보면 아주 가끔 다분히 구시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면들을 목격하곤 한다.

  이번 여행에서도 인산인해와 불야성을 이루는 현지인들로 가득차고 넘쳐나는 달랏의 야시장과 한국인 여행자들이 유독 붐비던 호이안의 올드 시티에서 그 같은 광경을 다시 목격하고 말았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네들의 역사와 생활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이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또다시 엄청난 호기심이 일어나고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가기 시작했다.

  달랏의 야시장과 호이안의 여행자 거리가 삽시간에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베트남 당국의 치안 질서유지를 위한 노점상 단속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지나간 현대사 속에서도 이런 해프닝은 다반사로 있어왔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은 이제껏 우리가 듣고 알던 단속과는 너무도 달랐다.

  거의 일상에 가까울 정도로 흔하게 수시로 벌어지는 단속이라지만, 단속의 대상이 되는 현지 노점 상인들의 표정과 서두르는 움직임에는 단속을 피해야 하겠다는 일념보다 훨씬,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과 행동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이던 국가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도심과 시골의 격차와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당국과 노점상들의 마찰은 의례히 따라붙는 필연이었다. 단속과 생업 사이에서 불협화음과 단속과 집단항의와 정치 사회적 해결 노력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자본주의 속성의 하나라고 해도 별반 틀린 말이 아닐 정도이다. 단속이 심해지면 장사하기가 힘들어지고 수입이 줄어 생계가 막막해 진다. 그러면 벌금을 각오하고서라도 노점 장사에 나서고....... 악순환은 반복되고, 선거 때가 되어야 표를 의식해 다소 단속이 느슨해지고 개선 공약이 남발하고, 그런대로 노점상은 잠시 숨을 고르곤 한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서구의 선진국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가 배출한 폐단이자 모순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 베트남의 노점상 단속은 사뭇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단속원들에게 어떤 아량이나 배려를 기대하는 표정이나 하소연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당장 어디에선가 저자거리에 수류탄이 여러 개 떨어진 것처럼 무조건 벌여놓았던 가판대와 물건들을 어떻게든 치워야 한다는 일념뿐이다. 밀치고 던지기까지 한다. 단속의 대상이 되는 지역(도로)에서 무조건 말끔히 치워서 일단 상황을 모면해야만 한다. 좌판 가득 의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북이 과일이 쌓였었고, 연탄 숯불 위에 여러 개의 냄비에서 각종 음식물이 끓고 있었다. 하지만 치워야만 한다. 뒷골목으로 치워서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게 하거나, 비좁은 자신의 점포 안으로 어떻게든 쑤셔 넣어야만 한다. 가히...... 이건 단속도 아니고, 민방위 훈련도 아니고, 그야말로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난무하는 전쟁터와 너무도 똑 같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공무원 복장을 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쳐 무자비한 단속을 실시한다. 고양이 앞의 쥐란 표현은 다소 너그러운 표현이다. 그들의 단속은 무소불위의 잔혹한 행패를 방불케 한다. 간혹 놀란 비명소리는 들려오지만 어디에서도 거칠게 저항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다툼의 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상호간에 일방적인 의례행사처럼 진행되어 간다.

  이 잔혹한 단속현장의 뒤와 옆쪽에 경찰 오토바이 두 대와 순찰차가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 단속하는 행렬이 가두행진을 하듯이 휩쓸고 지나가는 맨 뒤로 초록색 제복을 입은 사람이 낡은 자전거를 끌면서 따라가고 있다. 초록색 제복의 어깨에 빨간 견장이 달렸고 노란별이 새겨져 있다. 초록색 정모를 썼다가 벗었다를 반복하는 사내는 놀랍게도 갓 스물을 막 넘겼을 것 같은 젊은 청년이었다.

  그가 바로 이 단속행렬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잔혹한 이십여 명을 단속 요원을 모두 합쳐도 경찰 한 명을 당해낼 수 없고, 단속요원들에다 여섯 명의 경찰을 모두 더한다 해도....... 자전거를 끌고 뒤따라가고 있는 초록색 제복의 청년을 상대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 청년은 바로 베트남의 공안(公安人民越南) 이다. 베트남에서 공안의 신분은 법률이 정한 바를 훨씬 초과하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 더하여 그 청년의 계급장과 모자를 살펴보매 공안 중에서도 인민보안(安寜人民, Vietnam People’s Security Forces) 요원이다. 공안은 치안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경찰업무를 주로 맡는다. 국방은 군인이 담당한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보안은 공안의 경찰업무에 더하여 정규군의 업무를 나누어서 일부 관장하는 군대의 임무를 상당부분 공유한다. 국방업무와 치안업무를 동시에 관장하는 좀 특수한 신분의 경찰공무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내 가슴이 막막해지기 시작한다.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고, 어쩌자고 21세기에도 저런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단 말인가?

  무엇이 저런 일들을 만들어 냈고, 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언제든지 또 벌어질 수 있는 일을 태연하게 기다리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공산당???????

  해묵은 과거역사 속에서 공산주의 망령을 끄집어 내지 않고 어떻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죽어 사라진 망령과도 같은 헤게모니가 아닌가? 하지만 사회주의는 죽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은 여전히 현존하는 체제 이념이다. 소련연방의 해체가 사회주의의 실패와 종말이라 말하지만, 사회주의는 여전히 중국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하나의 사회체제 이념으로 존재한다.

  공산당!

  공산당원!

  지금 나는 베트남을 지켜보면서 (공산당)을 떠올리고 있다.

  분명 베트남은 사회주의 연맹을 이끌던 호 할아버지(호지명)의 공산정권에 의해서 통일된 공산당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경제는 서방의 자유 시장경제를 추구하지만, 정치체제는 여전히 중국 방식의 공산당에 의한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한다. 

  저들은 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 속에서 최고이자 최선의 사회제도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경험하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공산당과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생각해 보면 생각 할 수록  대한민국과는 많은 것이 닮았지만, 또 많은 것이 다르다.

 베트남에서 정치 집단인 정당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하나뿐인 공산당에 의해서 지도자를 바꾸어가면서 국가의 통치를 유지해 나가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이다.  베트남은 대부분의 사회제도나 정치체제를 사회주의 종국국과도 같은 중국의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정립해서 실행해 나가고 있다.  중국 또한 공산당 이라는 유일 정당에 의해서 지도자를 바꾸어 가면서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중화 인민공화국)인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사회주의나 북한의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여, 오늘날  큰 사회주의 공화국은 (중국)을 가리키며,  작은 사회주의 공화국을 (베트남)이라 지칭한다고 해서 별반 무리는 아니지 싶다.

  베트남의 정치는 오로지 죽어라  (중화 인민공화국식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고,  베트남의 경제는 오로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대한민국식 자유시장 경제정책)을 롤 모델로 삼아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누구도 예측이 불가능한 수준의 상당한 불협화음과 상호모순을 내포하게 된다.

  베트남에서 지금 이 실험이 한창 진행중이다.

  민주주의 방식의 자유 시장경제를 (공산당) 이라는 (사회주의 체제 수호)라는 사명을 가진 단 하나의 정당이 무한의 독재적 강제적 권한을 가지고 관주도로 일방통행식으로 계속 이끌어 나간다면,  곧 닥칠 한계는 너무도 명확해 진다.   온갖 불협화음과 불공정과 잡다한 마찰들이 곧 엄청난 재앙으로 폭발해 버리고 말 것이다.

  절대적 권력은 필연처럼 부패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중국과 베트남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최우선으로 가장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몰아세우고 있는 정책이 바로 (부패와의 전쟁) 이다.  (개혁)이 그 다음이고 경제 부흥의 맨 마지막에 내세우는 것이 (완전 개방) 이다.  권력에 심취했다가 필연처럼 부패에 빠져버리게 되면........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이념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그 책임은 모두 (공산당)이 져야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도 부패는 있다.  세상 어디에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듯이 부패가 있다.  자본주의 사람들에게 부패는 생겨나고 잘라내고 치료하고 다시 어디에선가 또 생겨나는 종양 정도겠지만,  사회 공산주의 사람들에게 부패는 기본 체제의 이념을 갉아 먹고 이념의 가치관(주체사상)을 파괴하는 악의 근원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공산당에 의한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정책'(공산당의 모든 기득권)을모두  포기하고, 고만고만한 민주 자본주의의 이념을 모방하는 수준의 다른 정당을 만들어서 다른 방식으로 국가 지배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부패에 대해서 어느정도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 지배세력으로 존립이 가능하겠지만........  그들은 절대로 (공산당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거나 (공산당이 차지한 사회주의의 기득권을 포기 할 생각이 전혀 없다) 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공산당)은 지금 (사회주의 이념속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죽어라 (부패와의 전쟁)중이다.'

 

 

 

 

 

 

 

 

 

 

 

 

 

 

 

 

  뒤척이다 눈을 뜨니 새벽 4시 40분이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니 어스름한 새벽미명 아래 낯선 이국의 풍경이 잔잔하게 스며든다. 날이 새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절망에 가깝도록 고심하게 만들던, 밤새 쏟아지던 비가 완전히 그쳐있다.

  헐....... 그럼 그렇지. 날씨에 관한한 적어도 나에겐 신묘한 은총이 항상........

 

  신과 천사들이 사는 하늘나라에서 인간들이 사는 지상 사이에 붉은 뭉게구름으로 생긴 예쁜 문이 있고, 그 문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때가되면 네 명의 님프가 교대로 지상에 내려와 생활한다. 가장 먼저 내려오는 님프는 봄(spring) 이다.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이 만발하면 이번엔 여름(summer) 이라는 님프가 내려와 몇 날을 함께 생활하다가 봄이 하늘로 올라간다. 뜨거운 태양으로 만물이 쑥쑥 자라고 푸르러 가지만 무더위에 지쳐갈 때쯤, 이번엔 가을(autumn)이 구름 사이로 내려와 여름과 몇 날을 함께 생활하다가 시기가 되면 여름은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단풍이 물들고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가을이 된다. 이 수확이 마무리되면 도시와 시골 어디에서건 신과 인간들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축제를 벌인다. 그 축제가 시들해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겨울(winter)이 내려와 몇 날을 함게 지내고 나서 가을이가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사람과 자연에게 휴식의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해가 바뀌고 충분한 휴식이 취해졌다고 느껴질 때쯤이면 다시 하늘의 예쁜 구름문이 열리고 봄이 지상으로 내려 올 것이다.

  아주 까마득히 오랜 어느 때였던가.........  신과 천사들이 드나드는 예쁜 구름으로 만든 문이 고장이 난 적이 있었다. 그때 바로 이 몸이 인간 세상의 기술 장인으로 뽑혀서 하늘을 나는 조각구름을 타고 올라가 구름문(season)을 완벽하게 수리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어느 때부터인가 내 입에서만 흘러나오고 있다. 하여, 그 후로 항상 어디를 여행하던지 날씨에 관해서는 기적에 가까울 정도의 소름끼칠 정도의 놀라운 사연들을 정말로 많이 가지고 있다. 어제 저녁까지 이번 주 내내 강한 비와 바람이 예고되었는데...... 오늘부터 흐리기만 하고, 낼 모레의 달랏 날씨는 기적처럼 모두 쾌청하다는 예고다.

 

 

  집에 있었으면 당연히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서 스위치를 올렸을 것이다. 가끔은 원두를 갈아서 내리지만, 대부분은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듬뿍 머그잔에 넣고 가득 뜨거운 물을 채운다. 이른 새벽 거실 가득히 피어나는 커피향기는 싱그러우면서도 매혹적이다. 새벽 커피를 마심으로 우리 부부의 하루는 시작된다. 둘 중에 누구든지 연거푸 두 잔째를 마시려 준비한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그날이 쉬는 날이다.

  그런데, 낯선 호치민의 호텔에서 새벽 커피를 마시려고 하니 좀 난감하다. 커피포트는 있는데, 가진 커피라곤 비상용 믹스커피가 전부다. 현장에서 쉬는 시간이 아니면 믹스커피는 그리 달가운 대상이 아니다. 어쩐다?

  이제까지의 모든 여행에서 적어도 날씨만은 항상 내 편이었다.

 

  피곤함 때문에 눈을 뜨고서도 억지로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는 챠밍여사에게 산책 통보를 하고, 샤워실에서 찬물을 뒤집어쓰고 나서 가벼운 산책차림으로 카메라만을 달랑 손에 들고서 혼자서 거리로 나선다.

  ‘씬짜오!!!’

  호텔 후런트 소파에서 졸고 있는 관리인에서부터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서둘러 하루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넨다.

  바야흐로 호치민의 아침이 하나 둘씩 시작되고 있다.

  두 번의 앞선 여행에서는 모두 여행자 거리에 숙소를 구하였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1km 정도 떨어진 반탄 시장 주변에 수영장이 딸린 호텔을 숙소를 정했다. 2년의 코로나 사태 기간 동안 베트남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아직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상황에서 베트남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근처에서 그네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좀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호치민의 새벽 거리 풍경의 첫 느낌은 예전에 비해 한산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좀 심하게 낯설다.

  변했다. 딱히 꼬집어 말 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들의 표정이 예전의 기억과는 다르게 많이 굳어져 있다.

  그네들의 일상을 가득 채우던 환한 미소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도 커서 때문일까?

  베트남을 여행하다 보면 열 명 중에 한 두 명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다음 여섯 일곱은 영어소통은 안되지만 자신들 언어이던 몸짓 발짓이던 아니면 어디서 들은 서툰 한국어 이던 대충이나마 소통이 가능하다.(k-pop의 공로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둘은 어찌되었건, 외국인 여행자가 말을 걸려고 다가서면 손사래를 치면서 달아나기 일쑤다. 그런데 이마저도 변했다. 하나 둘은 영어 소통에 과거처럼 응해주지만, 환한 미소로 어떻게든 소통하려 노력하던 사람들이 서넛으로 줄어들었다. 예전에 비해서 훨씬 늘어난 것으로 느껴지는 무조건적 외면파가 대신 서넛으로 늘어난 느낌이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졌다. 가슴 한구석으로 알사하게 어떤 전율이 피어오른다.

  지난 2년을 파노라마처럼 되돌아보면........ 대한민국의 뉴스에서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가? 사회적 인프라도 복지나 의료시설도 아직은  체계를 갖추지 못한 베트남인들이 격어야 했던 2년은 절대로 우리의 처지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마스크 사태를 그렇게 크고 격렬하게 격어야 했다면, 과연 저들은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해야만 했을 것인가? 조금만 지켜본다면 베트남인들의 생활에서 거리두기와 격리란 단 한순간도 실행되기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아주 쉽게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자 뉴스에 따르면 태국의 경우는 코로나 사태로 2년 동안 여행자의 발길이 끊기고 격리와 제재가 뒤따르는 기간 동안 방콕의 카오산 로드처럼 여행자들이 찾고 모이는 장소마다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벌였단다.   도로를 정비하고 주변 시설과 시스템을 재정비 했다는 소식이다. 어쩔 수 없이 생긴 공백을 이용해서 일부러 차단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시설투자 공사를 벌인 것이다. 2년 동안 벌어진 공사로 더욱 새로워진 환경으로 언젠가 코로나가 끝나는 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트남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어느 하나 달라진 것 없이, 내가 찾았던 4년 전과 동일한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냥 단순하게 지난 2년간 찾아 온 여행자가 없었을 뿐이며, 그네들은 그저 막연하게 코로나가 끝나기만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당장 돈이 없기 때문이다. 개선과 개설공사에 필요한 공공자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해외투자자본의 길도 막힌 상황에서 여행자를 위한 시설 개선과 정비는 꿈과도 같은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현실 속에서 저들은 어떻게든 다시 희망을 꿈꾸며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베트남의 미래에 대해서 충분한 가능성을 보는 사람이다.

  이십년 후의 베트남은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지금 보이는 대한민국과의 격차도 상당히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그때 쯤 다시 올 수 있을까?

 

  새벽 산책으로 반탄시장 주위를 둘러보고, 어제 들렸던 여행자 거리끼지 돌아 본다. 내일 달랏으로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풍짱 여행사에 들려서 미리 슬리핑버스 좌석 4개를 예약했다.

  현지인들에 섞여서 도로변 노점에서 목욕탕 플라스틱 의자를 깔고 앉아서 카페 쓰어다(연유가 듬뿍 들은 아주 달달한 베트남식 아이스커피)도 마신다. 깔끔한 아메리카노식 커피에 익숙한 처지이긴 하지만, 베트남에선 적어도 베트남 방식의 달달한 쓰어다 커피와 유리잔에 얼음을 먼저 넣고 맥주를 부어서 마시는 아이스 맥주의 독특한 풍미에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이젠 숙소로 돌아가 챠밍여사와 조카와 손녀를 대동하고 호치민 도심 투어에 나서야 하는 순서이다. 다른 말로는 (콜로니얼 건축물 투어) 라고 해야겠다.

  콜로니얼 건축(Colonial architecture) 에서의 콜로니얼이란 ‘식민지풍의’ 혹은 ‘식민지 시대의’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쉽게 다시 설명하자면, 베트남을 오랜 세월동안 식민지로 지배한 프랑스의 고위 관료나 부자들이 점령지에다가 자신들의 편익을 위해 본국인 프랑스풍의 건축물을 상당히 많이 건설했다는 뜻이라 하겠다. 북부는 호지명의 사회주의 연맹 영역이었기에, 프랑스 식민 정부는 사이공을 중심으로 허수아비 괴뢰 민주정부를 앞장세우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한데서 생겨난 아픈 역사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의 곳곳에 프랑스풍의 교회들을 많이 세웠고, 자신들의 휴양지로 달랏을 건설하거나 중부지역 다낭에 바니힐을 건설했다. 다낭 인근의 후예에는 쿠스타프 에펠(에펠탑 건설자)이 건설한 짱뚱교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건설한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근자에 일제청산을 앞세워 대대적으로 광화문을 철거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과거의 치욕적인 억울한 역사를 무조건 지우고 파괴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광화문을 철거한다고 해서 일제 식민지 역사가 지워지고 바로 세워지는 것일까? 치욕의 역사는 꼭 지워야만 하는 대상일까? 아니면 반복되지 않게끔 각성하고  나아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일까? 적어도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이공(호치민)의 도심을 걷노라면 콜로니얼 건축의 진수를 곳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프랑스를 걷는 것 같기도 하고, 파리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순간순간 잠시나마 가지게 된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이자 건축물이라 해서 콜로니얼 건축물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사이공은 너무나 삭막해지고 말 것이다.

  사이공 도심을 샅샅이 걸어 다니며 콜로니얼 건축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취해보고 감탄해 보고, 더우면 아무데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로 더위를 식히고, 길거리에서 쌀국수도 먹어보고, 근사한 카페에서 점심도 먹고......... 결론은 죽어라 덥다.

  정말로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덥다.

  꼴까닥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꼭 그만큼 덥다.

  쓰러지기 전에 부랴부랴 호텔로 돌아온다. 곧바로 옥상의 루프탑 수영장으로 우르르 몰려간다.

  풍 – 덩!!!!!!!

  천국이 바로 여기이지 싶다. 인생 뭐 있어? 이런게 인생이지........ ㅋㅋㅋ

  완전 우리 가족만의 개인 풀장인 셈이다.

  물놀이에 지쳐 배가 고파지면........ ㅎㅎㅎ. 수영복 차림에 쪼리를 신은 채, 그냥 호텔 밖으로 나간다. 포도랑 과일을 사고 반미(바게트 샌드위치)를 두 개 사고, 캔 맥주를 열 개 사고, KFC 통닭까지 사서 돌아온다.

  풀장에 빠진 채로 만찬을 즐기는 우리들만의 파티다. 마치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어쩌다 풀장을 독채로 전세 낸 것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였기에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호사가 아니겠는가.

  알. 럽. 베. 트. 남. 알. 럽. 사. 이. 공.

 

 

 

 

 

 

 

 

 

 

 

 

 

 

거기에다가 그만..........

챠밍여사께서 감사하게도 내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조기 조 노점에서 과일 파는 할머니에게 덜컹 부르는 가격에 4kg 어치 과일을 사 버리고 말았다. 돈은 내가 분명 지불했는데, 돌아서서 한참을 와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비싼고로...... 이웃 가계에서 가격을 물어보니 꼭 2배를 주고 4kg 이나 산 것이 아닌가 ?

  베트남에선 어떤 경우에건 흥정이 필수이고,  대략 절반 이하의 가격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그렇게 누누이 벼르고 별렀건만,  만원 부르던 기념품이 종국엔 2천원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마눌님을 처분해 버렸다가는  아들의 후폭풍이 무섭고 하여.......  그냥 넘어갈 수 밖에.

  그럼 이게 다냐?

  절대 아니다.  호텔에 비치한 맥주나 음료는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당부 했는데........  마지막날 기어코 목이 마르다고 체크 인 직전에 작은 맥주 캔을 하나 덜컥 따서 마셔 버렸다.  쬐끔 더 계산하면 안되겠냐고.......  헌데.........

  체크 아웃하는데 그 맥주캔 가격으로 한화 만오천원을 요구한다.  숙박비가 방 하나 일박에 3만원인데 말이다.(이게 말이 돼?)  억울해도 지불 할 밖에........  검색해 보니 그 맥주 캔 가격이 하나에 한화 700원 이다.

  ''짱구 모친님은 참 위대하시다!!!!!"  '참 가지가지 한다.'  이걸 그냥...........  에구 에구........

 

 

 

 

 

 

 

 

 

 

 

 

 

 

 

 

 

  베트남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사전에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용어 그대로 인도(India)와 중국(China) 사이에 놓여있는 커다란 반도를 인도차이나라고 부른다.

인도차이나반도에 속하는 국가라면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그리고 베트남이 속한다. 반도의 남쪽 끝에 해당하는 태국의 길게 늘어선 꼬리에 이어져 말레이시아가 있고, 그 주변에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싱가포르 등이 또 다른 말레이반도를 형성하고 있다.

  흔히들 인도차이나반도 하면 태국의 수많은 사원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보듯이 그저 고만고만한 작은 불교국가들이 들어서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캄보디아가 우리나라 한반도 면적보다 조금 작고, 라오스는 우리보다 약간 크다. 베트남은 우리 국토 면적보다 1.5배이고, 태국은 2배이며, 미얀마는 우리 면적보다 약 3배 이상 큰 나라이다. 하지만 이를 근소한 차이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한반도의 경우 남한보다 북한의 면적이 좀 더 크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남한과 북한을 합친 한반도의 면적과 비교한 수치라면 모든 국가가 우리보다 훨씬 크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고 하겠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하듯, 이들 국가의 역사와 생활풍습에는 절대적으로 중국의 영향이 컷을 것이라 단언하기가 쉬운데,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고 나는 이야기 하겠다.

  인도차이나라는 명칭에서 느껴지듯이 이 지역은 중국의 영향력과 인도의 영향력이 미묘하고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하여 북쪽 지역은 어느 정도 중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남쪽의 경우는 인도의 영향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흔히들 중국의 영향력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불교(佛敎)라 하겠다. 하지만 그 불교가 처음 생겨난 곳이 바로 인도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인도의 영향권에 넣지 않는 것처럼, 이런 관점들은 보는 이에 따라 현저하게 차이를 보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어 정착되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런데 정작 불교의 탄생지였던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여 완전 소멸되다시피 하게 되었으며, 그 불교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포함하는 선에서 힌두교가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을 불교국가라 하고, 정작 인도는 분명 힌두교 국가로 성립된 것이다. 역사와 종교의 풀리지 않는 아이러니한 사건 중 하나라 하겠다. 불교가 내륙을 통해 중국에서 체계화된 후에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인도의 힌두교는 해상교역로를 통해 동남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아울러 그런 중에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상륙한 이슬람교가 무굴제국을 통해서 이번엔 해상 교역로를 통해서 이슬람교를 동남아 각지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인도네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이슬람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구열강은 식민지 쟁탈전을 통해서 이번엔 서양 제국주의의 기독교(천주교)가 몰려 들어왔다.

  그야말로 한바탕 요지경 속의 종교 전시장으로 변모한 것이 바로 인도차이나반도인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동남아의 역사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국가가 둘 있는데, 하나는 태국이요, 다른 하나가 바로 베트남이다.

인도차이나에서만이 아니라 현대의 세계 역사에서도 흔치않게 태국과 캄보디아는 입헌군주국 이다. 다시 말해서 엄연하게 왕(王)이 존재하는 왕정국가라는 뜻이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캄보디아에서 입헌군주란 어쩌면 그저 명목상일 뿐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태국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태국의 국왕은 모든 국민들 위에 있고, 헌법 위에 존재하며, 전임 국왕의 경우는 거의 신(神)과 같은 존재로 절대적인 지지와 추앙을 받았다.(현재의 국왕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고 싶다) 태국 국민의 절대다수인 95% 정도가 불교를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불교가 국교는 아니다.

  태국은 헌법상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민주국가일 뿐이다. 타이족(아유타이족)의 국가인 태국의 왕정이 저토록 현재에까지 왕권을 유지하는 것은, 전체 아시아권이 18세기 이후에 벌어진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참패하고 식민 지배를 받아왔지만, 오로지 한 나라 태국만은 국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끝가지 서구열강에 저항하고 사워 이겨서 스스로의 자치권을 수호한 유일한 국가에 속한다. 단 한 차례도 외세와의 사울에 져서 나라를 빼앗겨 본 적이 없는 나라가 바로 태국이다. 그 자부심이 왕정에 대한 신뢰와 추앙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영화 (왕과 나)에 등장하는 서구에 굴복하지 않는 미지의 아시아 국가가 바로 현재가지 이어지는 절대왕정국가 태국인 것이다. 더하여 95%의 불교신자를 가진 국가이면서도 절대 불교 국가가 아닌,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민주국가인 것이다.

  사회주의 공화국 노선을 택한 라오족의 나라인 라오스는 국민의 60% 정도가 불교인이다. 나머지는 이슬람교, 기독교, 도교가 섞여 있다.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하여 정치 종교적인 사회적 문제가 그다지 당장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나라이다.

  역시나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하고 있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독재 집권하고 있는 버마족의 나라 미얀마의 사태는 대단히 심각하다. 다양한 소수민족 문제가 깔려있는 상황에 대다수의 버마족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변방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벌군부에 의한 독재가 탄압의 수단으로 종교와 민족문제를 끌어들임으로서 내분을 넘어 골육상잔의 전쟁과도 같은 비극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베트남은 이들 국가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힘든 나라라고 해야겠다. 모르면 그저 대충 불교국가겠지 하겠지만........ 기실은 그것도 아니다.

  베트남은 엄연히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작은 중국)

  다수의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로는 당연히 불교가 있으나, 이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천주교이다. 두 종교의 신자 숫자나 위세는 거의 비등하다 볼 수 있다. 길가다가 만나는 현지인 세 명중에 하나는 불교, 하나는 천주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교. 도교, 기독교, 그리고 힌두교 아니면 무신론자인 것이다.(인도차이나에서는 참으로 매우 독특한 경우에 해당된다)

  베트남은 원주민인 비엣족이 통일을 하고 확실한 불교국가를 지향하기 이전까지, 분명 1천년 가까운 역사동안 눈부신 힌두교의 나라였다. 하여 그네들의 생활문화 전반에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힌두교의 토속적 신앙과 풍습이 많은 곳에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비엣족은 주로 목축과 농사를 지으며 베트남 반도의 중부 이북에 주로 거주 하였다. 그런 중에 바다건너 인도네시아 해협을 통해 힌두교를 가지고 유달리 항해술과 선박제조 기술이 뛰어났던 참족이 지금의 나트랑 부근으로 건너왔다. 점차 세력을 넓히던 참족은 북상하여 중부지방인 다낭 인근의 미선유적지와 후예 지역을 거점으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 원주민인 비엣족을 점 점 중국과의 국경지역까지 내몰았던 것이다. 이후로 1천년 이상동안 베트남의 중남부를 지배한 것은 바로 참족의 왕국이었다. 이들이 캄보디아로 쳐들어가 크메르족을 점령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아유타이족의 태국과 전쟁에서 패하고, 이후로 세력이 급속히 와해되는 마당에 북쪽으로 도망쳤던 비엣족이 단결해 세력을 규합하여 치고 내려오면서 결국에 참족은 몰락해 버리고 만다.

  베트남의 오래된 모든 유적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모든 고대 유적들이 사실은 힌두교의 종교 사원이자 종교 시설들이었던 것이다. 태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모든 곳에서 힌두교는 절대적 영향력을 오랫동안 행사했었다. 그 참족의 몰락과 함께 힌두교의 종교 기념물 위에 불교 사원으로 개축된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맨 후기의 일부 건축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절대 불교 건축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힌두교 건축물이다. 힌두교 사원 곳곳에 불상들이 올려지면서 애초의 모든 것이 본래부터 불교유적인양 변질된 것이다.

  이처럼 베트남인들의 불교 사원과 의식 저변에는 여전히 힌두교 사상이 뿌리깊게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천주교인이나 도교를 믿고 있는 신앙인의 생활 속에라도 말이다. 참으로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베트남 반도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중국의 침략과 영향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의 역사는 어쩌면 중국과의 마찰과 저항의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지금에도 중국에 대한 반감과 의심은 그치지 않고 있다. 이런 아픈 애증의 역사를 헤쳐 나오는 동안에, 이 또한 역사가 가진 아이러니의 하나겠지만, 스스로 중국의 한자문명권에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상당한 정치체재와 법률 제정과 풍습에 이르기까지를 중국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항상 침략과 약탈을 언제 당할지 모르는 암울한 극한의 처지로 살아가던 베트남인들에게는 불교의 가르침 보다 다소 형이상학적인 도교의 가르침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여 대부분의 베트남인들 정신과 가치관속에는 도교의 가르침과 정신이 핏줄 속까지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다. 종교는 비록 불교와 천주교를 택하였다 하여도, 생활과 가치관의 저변에는 자신들도 모르게 도교가 모든 면에 있어서 넓게 퍼져있는 것이다. 더하여, 역사 전면에 유교가 고르게 스며들어 있어서, 정치. 교육, 가치관 형성, 법률에 유교 사상이 골고루 퍼져있다. 이런 면은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이 유일하다. 어찌 보자면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중국이나 대한민국과 더 비슷한 닮은꼴의 나라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차라리 베트남을 동남아시아의 국가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국가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 지면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이야기로 나누어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