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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베트남> 월남유감(越南有感)

by 피안재 2022. 6. 16.

 

 

 

 

 

 

 

 

 

 

 

 

 

 

 

 

 

 

 

 

 

  여행에 관한 한 우리 부부의 생각과 취향은 상당히 닮았다고 확신한다.

  (열심히 일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며,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까지 최대한 여행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자) 라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오로지 여행할 생각으로 일하고 생활 한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포함하여 앞으로 남아있는 우리에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우리 둘이 상의하고 노력하고 해결해 나간다는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조차도 바라는 것도 특별히 남겨 줄 것도 없이...... 그저 서로의 삶에 대해서 지켜보아 주고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 아빠의 삶은 끝날 까지 오로지 우리 두 사람의 몫이고, 아들 딸(며느리) 공주님 둘은 어디까지나 저들의 삶이라 판단했고 공표했으며, 가장의 완장을 넘겨 준지가 십년도 넘었으니 말이다. 멋진 아들과 슬기로운 딸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예쁜 두 공주님을 돌보면서 아기자기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이다.

  아내와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아들 며느리의 온갖 과거사 흉을 보다가도 두 손녀의 사진을 보면서 박장대소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래 걸렸지만......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라고 생각해.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잖아. 가진 것이 부족해도, 크게 이룬 것이 없어도 지금이 이렇게 여유로운 것은 모두....... 우리 아이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지들끼리 이루어 나가는 생활 모습이 안정적이기에 덕분에 우리가 대신 누리는 보답이자 효도라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나는 아들보다도 경은이(며느리) 에게 훨씬 고마워.’라고 고백을 토해내는 아내의 표정은 이내 숙연해 진다. 그러면 나는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진다.

  ‘무늬뿐인 아들에겐 기대를 걸지 말래니까? 나랑 별반 다르지 않다니까?’

  ‘비교 할 데를 비교해야지? 그리고 아들에게 자꾸 무늬뿐이니 하지 말랬지?’

  ‘헐. 내 무늬나 아들 무늬나...... 다들 판박이라 하더만.........’

  ‘아녀! 달라. 완전히 달라! 그러니까 비교하려 들지 마.’

 

  아내(챠밍여사)는 파란 하늘과 태양이 따사롭게 빛나는 스페인을 가장 좋아하고, 나는 역사와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를 좋아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장소는 이스탄불이지만, 잠깐 들려 본 게 전부인 챠밍여사에게 이스탄불은 아직은 낯선 도시이다.

  앞으로 있을 여행을 생각함에 있어서 챠밍여사의 최고 로망은 체코 프라하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이지만, 나의 최고 로망은 파리에서 일주일 정도 파리지앵으로 머물다가 남프랑스 지중해의 프로방스를 유랑하는 것이 지금 당장의 최고 간절함이다.

  챠밍여사는 해외여행에 대해 1년에 한 번은 필수, 두 번은 선택, 기간은 2주가 딱 좋고 부득이한 스케줄이면 3주까진 허용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려 애쓴다.

  하지만 나는..... 1년에 두 번은 필수, 세 번은 선택, 기간은 비싼 항공료가 아까워서라도 최소 3주는 기본이요 한 달이 딱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요런 차이 정도는 언제든 극복이 가능하다. 여차하면 또 혼자서 달랑 떠나버릴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 되고나면........ 우리의 생활 습관이나 패턴, 그리고 각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직업)에 대해서 크게 감사할 따름이다.

  세상에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던........ 1년에 아무 때고 한 달 가까이씩 시간을 비워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흔치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참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지난 여행은 2019년 말 크리스마스 다음날 터키 이스탄불로 떠나서 몰타를 거쳐 시칠리아로 들어가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보고 2020년 1월 17일 로마에서 귀국한 여행이었다.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매일 뉴스 때 마다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19 사태에 대해서 들었었다. 17일 귀국 때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는데 나흘 뒤인 21일부터 공항 검색대에서 발열체크와 격리가 시작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2년 반 정도의 시간동안 우리 모두는(전 세계) 초유의 코로나 사태(covid-19)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여행도 중단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흑사병 사태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과학과 의학이 놀랍게 발전한 현대(21세기)에 그것들을 무력화 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코로나 사태는 많은 상처와 고민과 변화를 인류에게 안겨준 거대한 시련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2년 이상의 시간동안 모든 세상은 단절되었고 마비되었다.

  코로나의 재앙은 온 세상에 골고루 공평하게 뿌려졌지만, 그 재앙을 마주하고 대처하는 상황들은 절대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올바른 지도자가 있는 국가와 부패한 지도자가 차지한 국가, 자주적인 의료체계를 가진 사회와 의료혜택을 찾아볼 수 없는 사회의 차이는 너무도 극명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세계적인 초자연적 재앙은 모든 인류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극복해야만 사라진다는 사실과 교훈을 이번 사태는 뼈저리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나라만 치료하고 극복했다 해서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온 인류) 함께 극복하고 끝내야만 그제야 진짜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인류는 하나로 뭉쳐서 단합해야만 하는데........ 요지경속 정치(政治)는 점 점 인류를 쪼개고 갈라놓기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다.

  그릇된 정치는 실로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오염된 정치와 코로나 바이러스 중에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지구에서 떠나보내겠느냐’고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촌각도 망설이지 않고 ‘오염된 정치가’라고 대답하겠다.

  오염된 정치가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남은 인류는 다시 하나로 뭉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낼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를 먼저 우주로 날려버리고 오염된 정치가들이 잔재한다면........ 오래지 않아 그 썩은 정치적 야심들 속에서 제 2의 제 3의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다시 양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여의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요새 귀신은 다들 뭐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저런 것들 안 잡어 먹고 말이다.’

 

  2022년 4월에 들어서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류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에겐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가 치명적이겠지만, 유럽을 비롯한 먹고 살만한 나라들에 어느 정도의 백신주사가 안정적 효과를 나타냈고, 무역을 비롯한 최소한의 국제 교류만으로 인류의 민생고를 해결하기엔 2년 이상의 단절된 시간이 이대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최악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절박함이 여실히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나 관광 여행 사업으로 민생고를 해결하던 국가나 도시나 종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저주나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굳게 잠겼던 코로나 방어벽들 사이로 출입문이 하나 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2년 이상 걸어 닫은 문을 통해 달러(여행객)가 쏟아져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닫힌 문을 열었음에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나라들이 달러(사람)는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 틈에 겨우 가라앉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변종으로 섞여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문은 어느 정도 열어 놓았지만, 검사는 더 없이 까다로워졌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격리가 따라 붙었다. 떠날 때도 격리를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 했고, 돌아오면서도 격리의 두려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방법은 절차와 검사의 기준을 완화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모두가 팔자이겠거니........ 일단 드나드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고 나서, 혹 감염자가 생기면 차차 시간을 가지고 대처하면 되겠지....... 일단은 사람들이 오가게 해주고 차후에 그 대처 방법을 찾기로 온 세계가 점차 대응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 해결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검사 절차와 격리 기간이 단축되거나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점차 해외여행이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4월 중순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나서 챠밍여사가 뜬금없는 말을 토한다.

  ‘출국 여건 바뀌었다더니 이젠 무조건 귀국 격리도 사라졌는데...... 우리도 짧게 바람 한 번 쐴까?’

  ‘그래도 출국 귀국 시 PCR 검사를 따로따로 필수로 받아야 하는데, 여전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국가마다 기준이 다 다르고.........’

  ‘베트남은 제재가 완전히 풀렸다면서? 검사도 신속항원 검사로 대처해 준다고 하든데? 비용도 절반이라며........ 오갈 때 격리만 풀리면 생각해 보자던 사람이 누군데?’

  ‘그건 내가 그랬지. 알써. 한 번 알아볼게. 어느 나라?’

  ‘베트남이라니까? 가까운 동남아에서 젤 만만한 나라가 베트남 아니야? 당신이야 유럽 생각부터 하겠지만 유럽하면 또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라도 한 달은 할 것이 뻔하고, 이 시기에 오래 비울 수 없으니까 베트남 일 주일?’

  ‘알았어. 이년 반 만에 짧게 바람만 쐬는 거니까 베트남으로 일 주일. 예전 수준에서 저렴하다 싶으면 그대로 티켓팅 해 버린다?’

  ‘그렇게 하셔. 다만...... 지금 당장은 그렇고 하니까, 5월 말쯤에 대충 마감 쳐 놓고 떠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래서 죽어라 열심히 각 항공사 싸이트를 돌아다닌 결과로 6월 2일에 호치민으로 들어가서 12일에 다낭에서 나오는 항공편을 일사천리로 예약해 버렸다. 이젠 준비 끝.

  5월 초에 조카가 딸을 데리고 이모네집(우리집)에 왔는데,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듣더니만 죽어도 따라간단다. 헐.

  챠밍여사의 바로 윗 언니께서 우리가 제주도 여행기에 적었던 금년 1월 3일에 별세하셨는데, 바로 그 처형의 큰 딸과 손녀다. 작은 딸은 지난 이탈리아 여행 때 동행했었다. 챠밍여사가 큰 조카를 유독 많이 아낀다. 유럽에 함께 갔던 작은 조카와 형평의 문제도 있고 더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선뜻 동행을 받아들였다.

  추가 티켓팅도 마치고...... 이젠 코로나 시대 해외 출입국 상황변화만 살펴보고 있는데......... 5월 15일부로 베트남 입국 시 절차가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완전 복귀 되었다. 48시간 이내 pcr 검사나 공항 신속항원검사 까지도 모두 해제 되었다. 적어도 베트남의 경우는 예전처럼 여권만 가지면 무사히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베트남에서 돌아 올 때 48시간 이내 pcr 검사서 요구는 여전히 필요한데, 한때 13만원에 육박했던 출장 검사에서 4만 원대로 비용이 낮아지더니, 다낭의 경우 경찰 병원에서는 한화 7천 오백원이면 pcr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서 닫혀있던 제도의 문이 마구 확 열리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6월 2일 인천 공항에서 비엣 젯(Vietjet)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호치민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겠다는 랜딩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밖을 내다보더니 ‘호치민 날씨가 너무나 쾌청해. 이러다 쪄죽으면 어떻게 해?’ 라고 푸념을 털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때 이미 어떤 불길한 예감처럼........ 팍 하고 느낌이 왔다.

  ‘아가씨. 호치민 날씨는 최소한 구름 아래로 내려가 봐야 아는 것이거든? 쌀국수 국물부터 마시는 것 절대로 아니야’ 라고 한 마디 쏘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다.

  대한민국 국적기는 목적지 상공에 도착하면 현지시간 날씨 온도 풍속 등을 세세하게 기장이 안내방송을 하는데....... 비엣젯 항공은 일절 그런 안내 방송이 전혀 없다. 그냥 다 왔으니 이제 내려앉겠다는 말 외에는 달랑 ‘땡큐’가 전부다.

  아니나 다를까?

  왜 항상 슬픈(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 것일까?

  비행기가 구름 아래로 내려가고 멀리 활주로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rain)다. 그것도 찔끔 내리거나 지나가려고 하늘 반쪽만 내리는 비가 아니다.

  쏟아지다 못해 하늘나라에서 쓰는 소방호수로 아주아주 오지게스리 막 퍼 붓는다.

  ‘아가씨! 이게 쪄죽을 만큼 쾌청한 날씨야?’ 라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흐메. 이게 시방 뭔 난리 부르스래?’

  그 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손녀가 툭 내던지는 어떤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는 목소리에는.........

  ‘할아버지. 베트남 전체가 지금 우기(장마철)래요. 일기예보에 일주일 내내 까만 구름과 우산만 떠요.’

  oh, my god!!!!!!!!!!

  망했다.

  세상에 어쩌자고 이런 일이......... (하여튼 아가씨 입방정이 심상치 않더라니......)

 

 

 

 

 

 

 

 

 

 

 

 

 

 

 

 

  서기 1405년 어느 늦은 가을날, 적도 부근의 열대지방에 위치한 쟘바푸라국(champa,占婆) 해안에 거대한 선단이 나타났다. 어느 누구도 꿈에서 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초대형 함선 63척이 느닷없이 나타나 쟘바푸라국의 바다를 온통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긴 밧줄을 이용하여 내려진 나룻배를 타고 사신이듯 보이는 사람이 해안으로 다가왔다.

  해변 가득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기는 했지만, 초대형 선단의 위용에 겁을 먹은 사람들은 선뜻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우리는 명나라의 황제께서 보내신 평화의 사절이요. 황제께서는 쟘바푸라국과 평화적인 교류와 통상교역을 체결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절로 보내셨소. 쟘바푸라국의 왕을 뵙기를 청합니다.’

  그것은 분명 쟘바푸라국의 언어였다. 이것은 분명 느닷없이 들이닥친 대선단의 국가는 이미 쟘바푸라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쟘바푸라국 입장에선 왕을 비롯한 극히 일부의 통치자 집단만이 명나라에 대해서 지극히 일부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쟘바푸라국과 명나라 사이에 이들과 철전지 원수지간인 비엣국(Nam Viet)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화의 사절이라는 한 마디에 삽시간에 쟘바푸라국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변했다. 그만큼 63척이나 되는 초대형 선단의 위압감이 막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저승사자가 보낸 악마의 함대 같았을 테니 말이다.

  온 나라에 풍악이 울려 퍼지고 꽃가루가 흩뿌려지고 이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해안으로 뛰쳐나왔다. 저마다 긴 머리칼을 뒤로 묶고는 꽃무늬 천으로 싸매고, 잚은 무명옷을 입고 형형색색의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구성진 피리소리와 함께 처녀총각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식을 접한 쟘바푸라국의 국왕이 왕궁을 나와 코끼리를 타고 해안으로 향했다. 황금으로 만든 관을 쓰고 꽃무늬 비단 수건을 두른 왕의 행렬은 화려하기가 그지없었다. 금목걸이와 금팔찌가 왕의 가슴과 팔 다리에 주렁주렁 매달리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가죽신을 신고 귀한 팔보로 만든 허리띠를 두른 왕의 모습은 더없이 존귀하고 위엄 있게 보였다. 관리와 500명의 호위무사가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저마다의 손에는 칼과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있었다. 저마다 등에는 활을 메고 있었는데 그 사기와 위풍이 너무도 당당했다.

  왕이 해안에 당도하기 전에 이미 함선을 타고 온 많은 사람들이 먼저 해안에 당도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코끼리에서 내리자 함대의 수장인 듯 보이는 사람과 무리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서는 왕 앞에서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통상적인 외교에서 보듯이 무릎을 꿇지는 않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대명국(大明國) 사절 정화(鄭和)가 쟘바푸라국 국왕을 알현합니다.’

  ‘대명국 부사절 왕경홍이 삼가 쟘바푸라국의 국왕께 인사 올립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그래 사절과 일행께서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먼 길을 찾아오신 것이요?’

  ‘황제께서는 대명국과 쟘바푸라국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비엣국과의 오랜 역사와 내막에 대하여 세세하게 잘 알고 계십니다. 늘 아쉽다고 하셨지요. 하여 육지의 길은 가로막혔지만 바닷길을 통해서라도 쟘바푸라국과 소통하고 교역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 하명하셨기에 제가 선단을 꾸려서 이렇게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이번의 왕래로 대명국과 쟘바푸라국 사이가 적이 결코 아니며, 서로를 위하고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국왕 전하는 물론 신려들과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해 보라 하명하셨습니다.’ 하면서 가지고 간 황제의 선물을 수북하게 내어 놓았다. 하나같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다. 왕의 입가에 함지박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황제 폐하의 베푸심에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모든 일행들과 함께 성으로 들어갑시다.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성대하게 잔치를 열 것입니다. 천천히 머물면서 대신들과 많은 것들을 충분하게 상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충분하다 싶으시면 과인에게 직접 이야기 하세요. 불편하거나 섭섭지 않게 조치하리다. 충분히 쉬셨다가 떠나실 때는 황제 폐하께 감사의 뜻을 담은 서신을 작성해 놓을 터이니 답례품과 함께 가지고 떠나도록 하시구요.’

  거대한 함대의 위협적인 위용에 질겁한 쟘바푸라국의 왕은 이미 스스로를 굽히고 어떻게든 평화적인 타협을 이루어 내야만 하겠다는 절박함에서 우러나오는 처신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 대함대의 원정 이유이기도 했다.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는 매머드급 초대형 함대를 만들어 파견하면서, 바다에 접해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대명국의 위상을 알리고 상호간에 통상 무역을 체결하는 것 이외에, 약소국들 스스로가 대명국의 휘하에 들어와 지휘 통솔을 받고 조공을 받치기를 요구하는 국세사회 속에서의 무력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방문 당사국이 바로 쟘바푸라야국 이었다. 그리고 63척의 거대한 함선으로 이루어진 원정대의 수장인 정화에게 있어서 잠바푸라국 정도는 결코 낯설 것이 없는, 어쩌면 아주 익숙한 소국이었을 뿐이다.

  정화 일행은 잠바푸라국에서 열흘 정도를 국빈 대접을 받다가 떠났다.

  빠르게 정황을....... 국제정세를 깨달은 쟘바푸라국 국왕은 스스로 낮게 엎드려서 기었다. 정화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통상 외교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스스로 식민국으로서 조공을 바칠 것을 서약하는 편지를 써서 황제에게 올렸다. (정화의 대항해)가 이루어 낸 첫 번째 성과였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조금 예의 주시할 대목이 하나 있다.

  정화 일행이 쟘바푸라국에 열흘 동안 머무는 동안에 선단 일행의 여러 사람들이 열일을 재쳐 두고 죽어라 해안지방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어떤 수소문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남의 나라에서 무엇을 찾아다녔을까?

  심지어 떠날 때, 쟘바푸라국의 국왕과 대신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정화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에게 묻는다.

  ‘혹시....... 이태 전쯤에 바다를 통해 수십 명의 불손한 무리들이 몰려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명나라 본토에서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들이 바다를 통해 도망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아주 흉악한 자들입니다. 황제께서는 이들이 바다건너 인접국 어디에선가 은거하면서 다시 무리지어 사단을 일으켜 큰 폐해를 끼칠까 염려되시어 이번 항해 길에 저들 흉포한 무리를 받듯이 찾아내어 제거하라는 명까지 함께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극악함이 족히 한 나라를 위협 할 만하기에 황제께서 내리신 조치이시니....... 혹여 앞으로라도 그런 무리가 발견되거나 소식을 접하게 되면 즉시 명나라로 알려 국가의 안위를 지키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정화의 대항해가 그저 인도차이나반도 인근의 약소국들을 찾아다니면서 윽박지르고 달래서 교역을 빌미로 조공을 착취하자는 통상적 목표와는 달리 또 다른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정화가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 찾아내서 제거해야만 하는 그 흉악한 무리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쯤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정난의 변(靖難之變)> 이라는 중국 명나라 시기의 역사이다.

  남의 나라 역사를 파고들거나 이해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은 이해하기가 너무도 쉽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어떤 사건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니지. 흡사하다 정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있었던 (정난의 변)이 오리지널 이라면,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있었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리메이크판 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완벽하게 이해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게 되면 어느 역사에서나 정통성 시비와 반정의 공로나 신분의 차이나 능력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게 되고, 이는 곧 권력다툼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사망하자 황위는 그의 손자인 건문제(建文帝)에게 돌아갔으니, 그가 바로 명나라 2대 황제인 혜종(明惠宗) 이다. 이어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삼촌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4년여 동안 벌어진 내전은 끝내 삼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삼촌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영락제(永樂帝)로 태종(明太宗) 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명나라 최고의 전성기를 이끄는 명군이 되니 역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역사는 리바이벌이 결코 있을 수 없지만, 공(功)과 과(過) 따지기 또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영락제는 쿠데타에 성공해 황제에 올랐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건문제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전란 중에 죽었거나 사로잡아서 처형을 집행했어야만 비로소 사태가 재대로 끝나는 것이다. 승리나 제압이나 퇴출만으로 쿠데타가 완전히 끝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다. 건문제의 생존은 정통성 시비에서 치명적일뿐더러 끊임없이 왕위 찬탈에 대한 시비와 또다시 새로운 쿠데타의 명분으로 충분하게 되는 것이다.

  온 나라를 다 뒤지고 탈탈 털었지만 건문제의 죽음은 확인되지 않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임 황제가 버젓이 살아서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명나라 최정예의 추격대를 결성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건문제를 찾아내 처단하도록 파견했다. 그러자 건문제가 측근들만을 이끌고 바다로 도망쳤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영락제로서는 바다로 내보낼 추격대가 필요해 졌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정화(鄭和)의 초대형 함대’ 라는 것이 오래전부터의 학계의 정설로 인식되고 있다. 바다 항로를 개척하고 조공무역을 확대하려는 영락제의 야심 보다는, 최대 정적인 사라진 건문제를 찾아내 모든 화근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탄생했다는 학설인 것이다. 영락제 이후로 명나라의 대외정책이 해양교류를 오히려 금지 시키고 쇄국으로 치닫게 되는 실제의 역사가 이런 추측을 더욱 확신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까지도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건문제의 죽음에 관하여 수수께끼로 받아들이고 있다. 수없이 많은 역사적 추리나 추측이 무성할 뿐이다.

  쿠데타군이 남경 궁전을 불태웠을 때 그 속에서 타 죽었다는 설, 남경을 탈출하였으나 절망적인 상황인식에 양자강에 투신하여 죽었다는 설, 산중으로 도망쳤다가 승려로 신분을 속이고 죽을 때까지 중국 곳곳을 유랑하였다는 설, 그리고 바다를 통해 무사히 빠져나가 절해고도의 어떤 섬에 죽을 때까지 숨어서 살았다는 설이 있는데, 이 가설에 더하여 영락제의 명령에 의해 대대적으로 실시한 정화의 남해 대원정이 실은 달아난 건문제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가설이 더하여진 것이다.

  만약에 단종이 장마철 홍수를 이용하여 영월 땅을 벗어나 어딘가 절해고도에 은거하여 남은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말미까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 맞게 되는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본명이 마삼보(馬三寶) 였던 정화(鄭和)는 명나라의 장군이자 무관이자 제독이기 이전에 환관 이었다.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운남성 곤양에서 회교도인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당시 중국 변방에서 마씨는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을 가리키는 성씨였다. 정화는 중국의 한족과는 근본과 생김새조차도 다른 먼 변방의 이민족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마합지는 이슬람 율법의 ‘일생에 꼭 한 번은 성지 메카를 순례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 온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정화(마삼보)는 아버지를 통해 메카로 성지순례를 온 수많은 사람과 민족들을 간접 경험하였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인도 페르시아 지역은 물론 서남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나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와 풍습을 접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명나라와 원나라의 전쟁 통에 포로가 된 정화는 남경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정난의 변에서 영락제에게 유리한 공을 세워 정(鄭)씨 성을 하사 받고 환관의 최고직인 태감에 올랐다.

  그런 정화를 영락제가 선발하여 남해 원정대의 수장으로 파견한 것은 정화의 생김새나 언어력이나 경험 등이 이미 남지나해에 익숙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음이요, 이 원정대를 이끌고 남지나해 곳곳을 샅샅이 뒤져서 사라진 건문제의 흔적을 찾아내 처단하기에 최적의 인물이라 판단했던 때문일 것이다. 그는 7차례에 걸쳐 항해를 떠났으며, 인도차이나와 서남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 케냐의 모가디슈 지역까지를 다녀 온 것으로 전해진다. 모두가 정화 이전에, 성지순레로 메카를 다녀온 아버지 마합지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이미 많은것을 알고 있었을 지역들인 것이다.

  정화는 모든 항해에 대하여 세세하게 항해일지는 물론 개인적 일기를 기록하였지만 현재에까지 전해지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정도이다. 비록 높은 벼슬까지 오르고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먼 병방의 생김새가 다른 이방인일뿐더러, 회교도였으며 환관이었던 것이다.  한족 중심의 중국사관은 국경 너머의 모든 이방민족을 모두 오랑캐라고 인식하였으니,  정화 역시 서역 오랑캐의 후손이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중국의 역사에서 환관은 늘 멸시천대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하여 정화 사후에 그에 관한 모든 역사적 사실이 중국인들에 의해서 폄하되었으며, 기록들은 삭제되고 불태워 졌다.

  20 세기에 들어서 초강대국 대열에 들어선 중국인들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느 정도 먹고살만해 지니까 그제서 다시 중화사상(中華思相)의 광풍을 꺼내 든 것이다.

  ‘세상의 중심엔 한족(韓族)이 있으며, 이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물이 모두 한족의 문화로 귀결 된다’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헛된 망령과도 같은 그릇된 자부심이다.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이 망령은 도를 지나쳐 이제는 아예 인류 역사의 어떤 것이라도 쬐끔만 중국과 연관이 있다 싶으면 무조건 끌어다 다 지들 것이라고 왜곡하거나 새롭게 만들어 붙이려 사활을 걸고 덤벼드는 형국이다.

  근자에 들어서는 동북공정을 넘어서 이제는 가히 세계공정(世界工程)에 나서는 중국정부의 태도로 보인다.

  20세기 말까지 정화는 중국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의 역사가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조차도 중국인들(특히 한족)은 수치스러워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드러내놓고 세계 공정에 나서면서부터 정화는 중국의 세계화를 상징할 수 있는 최고의 상품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정화의 대항해가 인도지나 반도의 바다를 항해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아프리카를 한 바퀴 돌았다느니, 남아메리카를 지나 남극까지 갔었다느니, 호주를 탐험했다느니, 심지어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콜럼부스 보다도 70여년 앞서서 발견했다고 서슴지 않고 주장한다. 일개 피력이 아니라 역사상 정설이라고 인류의 역사까지를 호도하고 왜곡하고 중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야욕과 노력을 펼치고 있다.

  ‘버젓이 고증된 인류의 역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재편해서 살림살이에 좀 보탬이 되느냐’고 정중하게 물어보고 싶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은 느닷없이 <사기>를 집필한 사마 천(司馬遷), 종이를 발명한 채륜(蔡倫)과 더불어 정화(鄭和)를 묶어서 <환관 출신 3인방> 이라는 신종 상품으로 개발해서 세계공정 이라는 무기로 팔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맨 처음 찾아간 쟘바푸라국은 어디일까?

  바로 지금의 베트남(Viet Nam) 이다.

  정화가 도착한 지역은 나트랑 혹은 다낭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하는데, 좀 더 앞뒤 정황을 따져본다면 아마도 다낭이 가까울것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에 정화(鄭和)가 만난 사람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아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모두 북쪽의 승룡(지금의 하노이)에 살았다. 정화가 만난 사람들은 남쪽의 참족이었으며........ 적어도 20 세기가 지날 때 까지 이들 참족은 베트남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21세기에 들어서는 참족도, 참족의 역사도 모두 베트남 사람이자 베트남의 역사로 재편되었다. 21세기 시선으로 보자면...... 정화가 만났던 쟘바푸라국 사람들은 모두 베트남 남부에 살던 베트남인 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베트남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비엣족)과 (참족)의 역사는 한 마디로 애증의 역사라고 하겠다.

  천오백년 가까운 시간동안 비엣족과 참족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해안 지역을 남북으로 가른 상태로 애증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참족은 몰락했고 극소수만이 메콩강 하류에 겨우 존속하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했고, 본래의 원주민이었던 비엣족이 베트남을 통일하고 현재에 이르렀지만, 베트남의 역사에서 참족의 역사를 억지로 제거해 버리면 베트남 역사는 도저히 어떻게 정리해 바로 세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절반이 날아간 뼈대 위에 역사를 억지로 허공에 매달하야 하는 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베트남은 지나간 역사와의 화해를 어렵지만 과감하게 시도했다. 참족의 역사도 분명한 베트남 역사의 일부분이며, 참족 또한 한때 베트남 역사의 주류를 이루던 베트남 사람인 것이다.

  나는 그러한 베트남인들의 선택과 노력과 헌신에 진심어린 갈채를 보낸다.

  하여, 그들의 지난 역사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고...... 나아가 그들의 미래에 성원과 함께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것이 내가 베트남을 다시 찾고 아끼며 사랑하는 이유이다.

  베트남 여행에 대해서라면..... 앞전의 두 번 여행기에서도 어느 정도는 다루었던 것 같고........ 하여 이번 여행기는 좀 다르게, 다각적인 시선과 관점에서 바라 본, 내가 느끼고 하고픈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월남유감(越南有感)이라는 주제의 글을 써 내려 가보려 한다.

  온전한 여행기는 절대 아니다.

  베트남에 관한........ 역사. 정치. 경제. 지리. 문화. 생활에 관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이야기를 두서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려고 한다.(당연히 재미없고, 따분하고. 또는 어렵거나 지루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애초에 마음먹었던 나의 길을 가련다.

  단 한 분이라도 작은 깨달음이나 얻는 것이 하나라도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보면서 말이다.

 

 

 

 

 

 

 

 

 

 

 

 

 

 

 

 

 

 

  이번 여행의 첫도착지인 호치민의 숙소에는 작지만 아담한 루프 탑 수영장이 있다. 네 군데의 베트남 도시들을 옮겨 다니는 여행 스케줄에서 세 군데의 숙소를 굳이 풀장이 있는 곳으로 선택했다. 결과적으론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달랏에서의 삼일 간만 풀장이 없는 시설이었는데...... 나름 이유가 있어서 풀장 없는 곳을 골랐었지만 어쨌든 지나고 보니 조금은 아쉬웠다.

  동남아 여행에서는 반듯이 풀장이 있어야 한 단계 더 즐거워진다.

  아울러, 세 군데의 풀장을 갖춘 숙소에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즐거움과 행복을 맘껏 누렸다. 이런 경험들은 차차 나누기로 하고 다시 여행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짐을 대충 풀어놓고 옥상에 올라가 풀장을 살펴보니, 아담한 사이즈에 가족용으론 딱 이다 싶었는데...... 빗줄기는 다소 가늘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장마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저녁 무렵에 접어들어,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산을 빌려들고 10분 정도 걸리는 여행자 거리로 나갔다. 언제나 현지인과 여행자들로 차고 넘쳐나던 지역이다.

  그런데 아뿔싸. 거리 전체가 한산해도 너무너무 한산하다.

  서양 여행자인 듯싶은 서너 명에다가 우리 한국인 두 팀(우리 포함)이 이날 이 거리의 손님 전부인 듯하다.

  정말로 예전에 비해서 변해도 너무나 변했다.

  식당 주인에게 물어보니 이게 요즘의 현실이란다. 2년 가까이 코로나 사태로 완전하게 폐쇄되었다가, 그나마 한 보름 전부터 현재 상태로 겨우 제재가 풀렸단다. 그 소식을 세상은 모르는지 요즘은 그저 하나 둘 여행자가 늘어나는 수준이란 것이 설명의 전부였다.

  분위기도 분위기이고, 여행의 첫날이기도 하고, 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마구 주문했다. 그러고 보니 상차림이 무척이나 다양했던 것 같다. 동남아에서 이렇게 푸짐하게 상을 차려놓고 파티를 한 것도 처음이지 싶다. 사이공 맥주에 타이거 맥주도 실컷 시켜서 얼음 맥주를 만들어 마셔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데,  또 다시 장대비를  훨씬 능가하는 폭탄비가 쏟아져 내린다.  삽시간에 여행자 거리 도로 전체가 침수 사태를 격는다.  발목에서 무릎 아래까지 물이 차 오른다.  배수 시설을 따지고 어쩌고 할 때가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도로를 우회하고 대충 빠지며 걸어서 무사히 호텔 로비에 들어선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이래가지고 이번 여행 제대로 가능이나 할까?

  어찌되었든,  우리의 이번 베트남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혼자서 배낭여행을 다니던 시기에는 숙소 문제가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서든 잘 자고 어떤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자유여행자를 위해선 최적화된 좀 유별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막상 길을 떠나면서는 항상 ‘이제 내가 가진 것은 시간과 배짱뿐이다’라는 마인드로 단단히 중무장을 한다. 거기에다가 타고난 체력과 신체조건 덕분으로 이제껏 수많은 여행지에서 그 누구에게도 시비를 당해 본 기억도 없다. 오히려 넓은 오지랖을 가지고 태어난 영향으로 좀 위험하거나 못 본 척 그냥 넘어가야 하는 일에 잘 끼어들기도 한다. 위험 상황에 덤벼들고, 사고 처리에 앞장서고, 남들 싸움판에 뛰어들어 뜯어 말리는 일에도 전혀 망설임 없이 달려들곤 한다.

  공항 대합실이나 버스 터미널에서 배낭을 베고 드러눕기도 하고, 시골 공터 널마루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슬리핑 버스에서도 자고, 게스트 하우스, A&B, B&B, 홈스테이, 호텔, 어디에서든 그때그때 잘 찾아들고 잘 잔다. 내게 있어서 여행지 숙소란 그저 여행에서의 하루 일정과 또 다른 하루 일정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일 뿐이었다.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 일정을 연결해 주고, 추위와 비바람으로부터 잠시 나를 지켜 줄 뿐이었다. 젊은 외국인들과 흔히 군대 막사 같은 대청마루 게스트 하우스에서 대충 길게 늘어서서 자보기도 했다. 숙소에서 아침을 주거나 주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좀 심한 커피 애호가인 이유로 새벽에 일어나면 밖으로 산책을 나와서 길거리 커피를 나름 분위기 있게 마시는 것을 무척이나 즐긴다. 숙소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주면 좋고..... 아니면 길을 가면서 핫도그나 샌드위치에 캔맥주 하나면 그냥 통과다. 오후도 마찬가지다. 쉬고 먹고 자는 게 전혀 문제가 없다. 빵 굽는 가계나 재래시장을 지날 때면 수시로 빵 덩어리를 사고 사과나 포도를 사서 배낭에 넣고 다닌다. 커다란 빵 한 덩어리로 세끼를 해결한 적도 있다. 활활 타오르는 숯불에 통닭 바비큐를 하는 노점을 지나면 아무데고 주저앉아서 캔맥주와 통닭을 맘껏 즐긴다. 유럽의 통닭은 우리나라 통닭보다 족히 두 배 이상 크다. 남으면 싸서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허기가 질 때 다시 꺼내서 캔맥주나 커피랑 즐긴다.(술을 팔지 않은 이슬람 국가 여행에서는 사정이 좀 달라진다)

  그렇다고 내 여행의 대부분이 무슨 거지같거나 집시 같으냐? 그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모든 배낭에는 어느 것에나 태극기가 달려 있다.

  그것은 내가 당당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모든 여행에 있어서 결코 태극기에 부끄럽지 않은 언행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프라이버시를 반듯이 지켜나가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하여, 항상 미소를 잊지 않고 친절하며, 언제 어디서든지 타인에게 손가락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심사숙고하고 행동거지에 조심을 한다. 한국인으로서 결코 초라하고 거지같은 여행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도 나름 애를 쓴다. 나의 편리와 실용성을 위함일 뿐, 고급 레스토랑도 이용하고, 선물도 나누고, 나름 품위유지에도 가뜩 신경을 쓴다.

나만큼 진지하게 건축물, 역사 유적, 미술품, 그 나라의 풍습과 생활문화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서툰 언어 실력이 통한이 되고 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부족하고 서툰 그대로 그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내 여행은 가급적이면 그네들의 역사와 그네들의 일상으로 녹아들고 싶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 여행은 확실히 달라졌다.

  일단 숙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중요해 졌고, 자유분방하고도 돌발적인 상황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사전에 계획이란 것이 거의 없는 완전 자유여행 스케줄에서 여행 일정의 연결고리가 깔끔하게 예정되고 준비되어야 하는 여행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제는 최소한 시작에서 끝까지의 대략적인 여행 줄거리는 미리 계획하고 꿰차는 여행으로 말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마누라님 때문이다.

  죽어도 따라 나서겠다는 마누라님의 의지 앞에서 더 이상 무한한 자유 이상을 꿈꾸는 보헤미안식 여행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어쩌겠는가? 마눌님 뒤에는 한참이나 더 무서운 아들이 떡하니 지켜 서서 ‘아빠! 엄마는 아빠 책임이라면서. 즐겁고 기쁘게 해드리고 꼭 무사히 모시고 돌아오세요’라고 무언의 압박과 강요를 해 오고 있으니 말이다.

(마누라는 어찌 어찌해서 극복할 수 있겠는데....... 아들은 점 점 벅차가더니만 이젠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이 무섭다.)

  그때부터 숙소 문제가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해 졌다.

  초지일관 죽어라 걸어서 탐험하는 것 같은 나의 여행은 사실 좀 고역이라 해야겠다. 그런데 챠밍여사가 하여간 걷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정말로 씩씩하게 잘 걷는다. 쿠알라룸푸.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로마 등의 도시를 거의 걷다시피 해서 샅샅이 구경했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여행 기간 내내 이동시엔 나와 똑 같이 배낭을 메고 걸었다. 그랬다가 작년에 허리를 다쳐서 고생을 좀 하고는......... 이번 여행부터는 캐리어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마도 앞으로 아내는 캐리어를 이용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물론 나는 끝날 까지 오로지 배낭이다. 배낭과 캐리어의 장단점이 다 다르게 있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는 배낭이다. 더하여 특별히 ‘유럽여행은 배낭이다’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패키지 여행이 아니고, 그것도 여러 날 계속되는 장기간 자유배낭여행 이라면 더더욱 숙소 문제는 중요함을 더한다.

  장기간 배낭여행을 계속하다보면 피곤이 엄청나게 쌓인다.

  그때그때 슬기롭게 풀어주거나 해결해 나가지 않는다면...... 이는 곧바로 몸살이나 질병 혹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숙소 선택에 가장 큰 비중은 역시 돈이다. 비싼 요금만 지불할 수 있다면야 오성급 호텔이나 최고급 리조트에서 환상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 같은 초로의 배낭 여행자에겐 그런 호사까지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럴 땐 내 대학 전공과목처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경영학 원론적인 지혜)가 필요해 진다. 뭘 어쩌겠어? 죽어라 열심히 발품을 팔던 인터넷을 검색하던 최대한 싸면서도 나름 휴식을 취하기에 최적의 장소를 직접 물색하는 수밖에 달리 무슨 묘수가 있겠어? (로또를 사서 기회를 엿보느니 그 돈으로 길거리 커피를 사서 마시면서 직접 발품을 파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

  어찌되었던 가성비가 뛰어난 적당한 선의 숙소를 구해서....... 일단 마눌님을 편히 쉬게 해 드리면서 다음 일정을 계획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자 모든 여행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상과제가 되어 버렸다.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탈 이난 마눌님을 들쳐 업다시피 해서 겨우 병원을 찾아갔을 때, 언어도 의료보험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응급실에 너부러진 나의 반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암담함이란...........

  장기간 여행에서 숙소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스케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일 뿐만이 아니라, 그라운드 밖의 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충분한 휴식과 회복을 제공해 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유럽을 장기간 여행할 때는 숙소를 선정함에 있어서 특별히 주방시설에 관심을 둔다.

  아무리 길게 여행을 해도 이상하리만치 특정 한국음식에 대한 아쉬움이나 욕구가 거의 없는 편이다. 드물게 겨울비를 맞으며 세찬 바람에 시달리다가 숙소에 돌아오면 어쩌다 뜨거운 라면 국물을 떠올린 적은 있다. 요즘은 유럽의 대도시마다 적지 않게 한국 식재료를 파는 마트를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럼에도 어쩌다 컵라면 정도를 제외하면 그다지 한국음식을 따로 찾은 기억이 적어도 내게는 없다. 오히려 그 나라, 혹은 그 지역의 특색 있는 현지 음식을 찾아다닐 정도다.

  하몽(프로슈트)이거나, 아니면 너무나 짭쪼름 하면서도 단순한 이탈리아 피자에다 포도주나 맥주라면 내게는 넘치도록 충분하다. 김치찌개나 삼겹살보다도 적어도 내게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토속음식이 더 살갑게 다가온다.

  하지만, 유럽인에겐 스페인이든 이탈리아든지 그들만이 가진 초소한의 요리에 대한 기본이 있다. 올리브유가 일단 베이스이고 갈릭(마늘)은 보편적이긴 하지만, 절대로 우리처럼 생마늘을 쪼개거나 갈아서 쓰는 법이 없이 오로지 굽거나 올리브유에 볶아서 쓴다. 그리고 모든 요리에 치즈를 뿌리거나 올리브유를 듬뿍 뿌리거나 바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주방 시설이다.

  유럽의 레스토랑에서 온자 한 끼 식사를 할 비용이면, 대형마트에서 충분할 정도로 장을 보아서 최소 세 끼 정도의 푸짐한 식사가 내 경우에는 가능했다. 일단 빵을 푸짐하게 사고, 사과와 포도는 꼭 사야하고, 야채샐러드 포장용을 넉넉히 사고, 삶아서 포장해 놓은 다양한 돼지나 소의 부속물 포장육 에다가 소시지나 말린 살라미를 포함해 구입한다. 대충 11 유로에서 16 유로까지면 가능하다. 여기에다가 생산지가 다른 와인을 세 병정도 축사로 구입한다.

  이것이 주방시설이 있는 유럽의 숙소에서 내가 자주하는 장보기라 하겠다.

  주방 시설이 갖추어진 숙소에는 이미 기본적인 향료에다가 올리브유나 간장 식초 등등이 갖추어져 있다. 나은 곳에는 파스타 요리 재료가 완벽하게 기본으로 갖추어진 곳도 있었다. 실로 너그럽고 감사할 정도였다.

흥이 절로 나고 신이 난다.

  나만의 방식이자 오로지 내 스타일로 이렇게 저렇게 요리를 직접 한다. 결론적으로는 도저히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이런 특별한 맛과 멋과 재미는 진짜로 아는 사람만 알고 누릴 수가 있다. 적어도 내게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너무나도 당연한 나만의 방식이자 여행의 일부다.

 

  하지만 동남아를 장기간 여행한다면 이런 원칙은 필요가 없어진다.

  저렴하다 못해 너무도 저렴한 식문화가 사방에 널려있다 시피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날씨는 무덥고 동남아의 주방시설과 냉장고 시설은 매우 취약하다. 현지인들의 실생활 자체가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길거리(외식)에서 주로 해결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식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그때그때 현지인들처럼 먹으면 된다.

  대신, 내가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숙소를 고를 때 최고의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수영장(풀장)이다.

  덥다. 심하게 더운 정도가 아니라 그냥 미치고 팔딱 뛸 정도로 덥다.

  오 분 십분 움직이면 얼굴과 머리에서 더위를 느끼고 땀방울이 솟아나기 시작하면서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리는 삼복더위 한증막 정도가 아니라, 그늘에서 햇볕에 나서기만 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순식간에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확 차오르면서 온 몸에서 동시에 땀이 뿜어져 나오는 더위를 말한다. 적도의 열대 더위와 한반도의 삼복더위는 차원이 다르다.

  호텔마다 샤워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니 그냥 훌렁 벗고 샤워기에 몸을 맡기면 나름 더위를 극복할 수야 있겠지만, 그런 얼음물이 뿜어져 나오는 샤워기 열 개가 있다손 치더라고, 내 생각엔 작은 풀장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쓰러질 듯 더위에 초죽음이 되어서 호텔로 돌아오면 일단 배낭을 풀어놓고 대충 웃통만 벗어던지고 그대로 풀장에 몸을 던진다. 더도 덜도 필요 없이........ 그만하면 거기가 바로 파라다이스다.

  일단 풀장에서 풍덩거리다 보면....... 정신도 돌아오고 컨디션도 회복되고, 그제야 다음엔 뭘 할지, 시방 배가 고픈지 아닌지가 서서히 다시 떠오른다.

  방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다음 스케줄을 진행하면 된다.

 동남아 여행에서 외부 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무조건 캔맥주 하나 들고 곧장 풀장으로 뛰어든다.(거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임)

 

 

 

 

 

 

 

 

 

 

 

 

 

 

 

 

 

 

 

 

  우리가 베트남을 매우 가깝고도 쉬운 여행지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이라는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견해이다.

  동남아의 대부분의 국가가 비슷한 지리적 여건과 역사와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식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어찌된 이유에서건 베트남과 대한민국은 대단히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현대사 속에서 나누어 가진 역사적 아픔과 상흔은 다음으로 미루고서라도 말이다.

  베트남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 벅차지만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극복해야만 할 영원한 숙적쯤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딱 우리 한국인의 정서랑 판박이처럼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고대사 속에서 한사군의 출현 이후로 중국에게 겪었던 약소국으로서의 설움을 당했던 꼭 그만큼, 베트남도 판박이처럼 핍박과 고난의 역사를 헤쳐 나왔기 때문이다. 중국인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정서는 매우 적대적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인에 대하여 늘 경계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상종하기 싫은 부류’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다.

  18새기 이후로 서구 열강들이 앞 다투어 식민지 쟁탈 전쟁을 벌이게 되자,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열세이던 프랑스가 뒤늦게 동남아에 진출하여 겨우 차지하게 된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중국으로부터 오랜 세월동안 독립투쟁을 벌이느라고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베트남을 프랑스는 손쉽게 점령했고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과의 국경지대를 근거지로 북으로는 중국을 경계하고, 남으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장장 100여년 이상 끌어가게 된다. 이는 곧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가 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뜻이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지배국인 프랑스는 히틀러의 나찌에게 패망하여 영국으로 망명정부가 건너가 겨우 국가의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 베트남을 지켜내고 꾸려갈 능력을 상실했다. 베트남 독립의 절호의 기회였다. 이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바로 호지명이라는 구국 영웅이 있었다. 독립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2차 대전 전범국인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고 나서 남쪽의 인도차이나 반도에 들이닥친 것이다. 1941년부터 일본의 거센 야욕이 베트남 반도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상대로 펼쳐지던 독립운동 투쟁 정도로는 감히 대동아 전쟁을 선언한 일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호지명 일행은 다시 정글속으로 숨어들어 이젠 일본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집요한 일본은 끝내 1945년 초에 베트남을 완전히 손에 넣는 정복자가 되었지만, 이미 태평양 전쟁은 막바지로 기울며 종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점령군 일본군은 날로 달라지는 전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참혹한 약탈과 살인과 방화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이때의 약탈과 살인은........ 베트남이 백 년 동안 프랑스와 벌인 독립전쟁에서나, 천 년 동안 중국과 벌인 수많은 전쟁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었던 극한의 참상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살육이었으며 지옥화이자 초토화였다. 그리고 나서 불과 8개월 뒤에 일본은 패전국이 되어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 짧은 시기에 벌어진 일본의 만행을 베트남의 역사와 베트남 사람들은 지금도 결코 잊지 못하고 있고, 용서하지 못한다. 아직 드러내지는 않지만...... 내가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위안부 사태보다 훨씬 농도가 쎄다.

  일본이 물러가자, 독일의 패망으로 연합군이자 승전국으로 전황이 바뀐 프랑스가 인면수심....... 자신들이 베트남의 주인이라고 다시 돌아온다. 호지명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연맹이 이번엔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외세 몰아내기 전쟁을 다시 펼친다.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자신들의 꼭두각시 괴뢰 정부를 내세워 사이공을 수도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을 건국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가진 호지명이 이끌던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을 기반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도를 하노이로 삼아 건국한다. 이제 베트남은 북위 17도(다낭 윗쪽 후예 지역)를 중심으로 나뉘어져서 두 개의 정부 간에 내전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2차 대전의 휴유증으로 더 이상 베트남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프랑스는 CIA와 미국방부가 주도하는 음모 속에서 통킹만 사건을 통해 서로 바톤 터치를 하고, 이제 남베트남의 후원자이자 지배자는 미국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자 공산화된 중국이 북베트남의 호지명을 지원하는 후원자로 새롭게 등장하는 새로운 사태를 맞는다.

  내전이 아닌 국제 대리전은 계속되고........ 이 와중에 대한민국이 미국의 안보동맹국이자 6.25의 은공을 갚아야 한다는 사명감(?) 위에 엉뚱하게 남의나라 베트남 전쟁에 끌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들이 무척이나 많이 자행되었다.

  이 점은 언제고 반듯이 재론되고, 반듯이 짚고 넘어가야 하며, 이해와 사과와 반성과 배상이 뒤따라야만 할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서 반듯이 벌어질 일이다.

  베트남의 극히 일부의 지식인들이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종군 위안부 사태나, 친일파 문제나, 과거사 청산의 전 과정을 아주 꼼꼼히 살펴보고 기록하고 연구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런 지식인들을 직접 만나 보았고 심도 있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일제로부터 피해를 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이 정당하게 사과와 배상 내지는 보상을 정당하게 국제사회에 요구 할 권리가 있다면, 대한민국도 베트남전 참전의 주체가 모두 미국이었노라고 발뺌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댓가를 바라고 한 참전이었고, 온갖 불미스런 참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젊은 군인과 작전을 지시한 장교 또한 한국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한 번은 반듯이 정식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한국인에게 대단히 우호적이다.

  왜 그럴까?

  이런 상황이 되면, 지금 현재 호이안에서 작은 여행사를 차리고 가이드를 하고 있는 베트남을 진정으로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나이 융과 함께했던 짧은 시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는 ‘베엣족만의 베트남 역사에서 벗어나 참족의 역사를 포함하는 새로운 베트남 역사를 다시 써야만 한다’고 내게 열변을 토했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했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이제 베트남은 과거의 증오와 배타심에서 벗어나, 미래와 자손들을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고 교류를 통해 서로가 윈 윈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함께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주변의 베트남사람들에게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약소국의 처지로 미국에 등 떠밀려 베트남의 전쟁판에 올 수 밖에 없었다고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많은 베트남인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우호적이고 나름의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 어찌되었던 그 당시의 한국군대에 의해서 세워진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고, 그때 만들어진 교량과 도로를 통해 지금 베트남이 새롭게 발전해 나가고 있기 때문’ 이라고 환하게 웃으면서 그는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여주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융은 어떻게 변했을까?

  코로나 사태 때문에 사업이 번창해 대형 여행사 사장이 되지는 못하였을 것 같고?

  짤게나마 호이안에 들렸지만 4년 전에 그가 사용하던 사무실은 닫혀 있었고, 간판도 바뀌어 있었다. 더하여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서 끝내 그를 다시 만나보지는 못했다.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달라져 있었다.

  느낌뿐만이 아니라 분명 베트남은 무엇인가 변해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변한 것일까? 베트남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왜?

 

 

 

 

 

 

 

 

 

 

 

 

 

 

 

 

    ---     (월남유감)은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