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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르네상스 산책) 르네상스의 보고(寶庫) 우피치 미술관

by 피안재 2022. 3. 18.

 

 

 

 

 

 

 

 

 

 

 

 

 

 

 

 

 

  1478년 4월 26일. 부활절을 맞이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광장

 

  피렌체 두오모 광장(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인구 십만 명의 피렌체 주민이 모두 쏟아져 나온 것은 물론 인근 카타니아 지방의 주민들까지 합세하였으니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인가부터 세상은 이 도시를 꽃의 도시(Florenc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천 년을 훨씬 넘긴 이 도시는 고혹적이면서도 탐스러울 만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로 변모해 갔다.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와 문학가들이 이 아름다운 도시로 속속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금융업으로 성공하고 피렌체의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각하는 순간부터 피렌체는 명실상부하게 유럽과 전 세계를 통 털어서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치와 경제에 종교를 포함시키면 당연히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으뜸으로 치겠지만, 종교가 아닌 문화와 예술에다 정치와 종교를 결합시킨다면 오히려 피렌체가 우위를 차지한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몬테세코, 이 멍청하고 나쁜 녀석.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뒷골목 개들에게 던져주고야 말리라. 이번 거사만 마치고나면 반듯이 내가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만들고 말리라.’

  분노에 가득 찬 절규와 같은 외침이었기에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두오모의 지하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거사를 앞둔 상황에서 이처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을 보니 자못 무엇이 크게 어긋났거나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조짐 같아서 지하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사(修道者) 복장의 두 사내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쉿.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프란체스코님(Francesco de’ Pazzi) 혹여 누가 엿들을까 두렵사옵니다. 어찌되었건 야코포(Jacopo di Messer Andrea de’ Pazzi) 어르신의 새로운 지시는 받아오셨습니까?’

  ‘이 시간에 두오모 지하의 브르넬리스키 무덤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자가 우리말고 누가 있겠는냐? 사람을 두어 출입문을 지키고 있으니 문제 될것이 없다. 다만 비겁하게 몬테세코(Gian Battiata da Montesecco)가 한족 발을 슬쩍 빼고 말았다. 하지만 거사는 변함없이 오늘 여기서 무조건 끝장을 본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계획이 새어나가거나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전제하에 무조건 오늘 여기서 끝장을 본다는 야코포님의 결정이다.’

  ‘몬테세코가 지금 대성당의 계단에 서있는데 그러면 지금부터 그자도 우리의 적입니까? 밀고라도 할지 모르니 은밀하게 우리가 먼저 처단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한 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의 적은 아니다. 몬테세코가 야코포님을 직접 찾아가서 말하기를, 오늘이 부활절이고 많은 신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대성당 안에서만은 칼부림으로 피를 볼 수가 없다고 했다 한다. 헛소리에 미친 지랄이지. 아무 때고 어디서건 기회만 오면 앞장서서 기필코 메디치 형제를 암살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자신해댔기에 로마에서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아니겠느냐? 일주일 전에 별장에서도 그렇게 호언장담하더니만 막상 일이 닥치고 커졌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는 게야. 삼촌의 말씀으로는 별장사태 이후로 몬테세코가 로렌초를 몇 번 만나보면서 아무래도 맘이 변하는 눈치가 보였다는 것이야. 그래서 자신이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는 못하겠다고 슬쩍 발을 뺀 것이지.’

  ‘그렇다면 밀고할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배신은 할 수가 없지. 로마에서부터 이미 다짐을 받고 그분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제 놈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속셈은 빤한데 발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지. 거사가 실패라도 하게 되면 그놈도 역시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것이야.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만 할 것이야. 무사히 로마로 돌아가려면 말이야.’

  ‘몬테세코는 세상이 다 아는 기사입니다. 그의 뛰어난 칼솜씨가 있었기에 암살을 기획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가 암살 모의에서 물러난다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도시를 점령할 군대까지 이미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는데 그깟 칼잡이 하나가 빠졌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거사에서 큰일을 우리가 도맡아 처리하여 나중에 보다 큰 상급을 받는 것 밖에 다른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 손으로 직접 해치우면 그만 아니겠나? 메디치 두 형제만 제거하면 이번 거사는 성공하는 것이야. 끝장을 내버리자고.’

  ‘줄리아노의 칼솜씨에 대해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용맹한 군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몬테세코를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보게 머페이(Antonio Maffei da Volterra). 이곳이 어딘가? 대성당일세.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가? 부활절이야. 성스러운 축제일이라고. 더군다나 교황성하의 사절로 추기경이 참석하는 미사란 말일세. 대주교들도 있고....... 누구도 무기를 휴대하고 예배에 참석할 수는 없는 날이란 말일세. 아시겠는가? 교회 안에서 무기를 가진 사람은 우리들밖에 없는 것이야. 자네가 검술 솜씨를 걱정하니 그렇다면 이렇게 하세. 허약한 로렌초 메디치는 마페이 자네와 바뇨네(Stefano da Bagnone)가 맡아서 처리하게. 바뇨네가 성직에 몸담기 전까지 기사 생활을 했었으니 나약한 로렌초 쯤이야 간단하게 처치하지 않겠는가. 내가 반디니(Baroncelli di Bernardo Bandini)와 함께 줄리아노를 제거하겠네. 일단 거사가 시작되면 몬테세코와 그의 용병들이 모든 출입문을 통제하면서 메디치 수하 놈들을 하나하나씩 찾아내서 제거를 할 것이고, 필요하면 브라촐리니(Jacopo di Poggio Bracoiolini)가 합세하여 마무리를 지을 것일세. 우리가 메디치 형제 놈들만 단칼에 제거하게 되면 이번 거사는 그것으로 성공리에 모두 끝나는 것이야. 절대로 빠져나갈 구멍이 어디에도 없단 말일세.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벌어지는 상황에 집중 또 집중해서 대처하도록 하세.’

  그때였다.

  지하실의 위쪽에서 뛰어내려 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기경께서 광장에 도착하셨습니다. 그 뒤로 로렌초 메디치의 마차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추기경께서 군중의 환호에 화답하시느라 약간 지체될 것 같습니다. 대주교를 모시러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허겁지겁 다가 온 사람은 성당 입구에서 망을 보던 브라촐리니였다. 브라촐리니의 합세야말로 이번 거사를 주도해온 프란체스코 파치의 입장에서는 가히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자란 브라촐리니는 젊은 혈기만을 믿고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다가 그만 말썽이 생겨서 부득이 다른 도시로 도망쳐 살아야만 했다. 1년을 그렇게 보냈지만 피렌체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자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풍문이 나빠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거나 채용해 주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의 학술단체인 아카데미아 주변을 서성거리던 그를 눈여겨보던 메디치가에서 그에게 남다른 글쓰기와 서기로서의 재능이 있음을 파악하고 채용하였던 것이다. 한동안 메디치가에서 일하던 그는 메디치가를 나와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꾸준히 성실하게 메디치가와 거래가 오고갔다. 그러던 중에 다른 거래처의 하나였던 몬테펠트로 우르비노 공작이 교황(식스투스 4세)에게 그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식스투스 교황은 교회 내에서 도를 넘는 족벌정치를 추구하여 이미 5명의 조카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여러 교구를 관장하게 하면서 이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하나 더하여 아직 나이가 어린 조카 라파엘로 리아리오(Raffaele Sansoni Gaieoti Riario)를 추기경으로 서임하려 하였으나 아직 나이가 16세 밖에 되지 않았는지라 그를 피사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도록 만들었다. 하여 이를 뒤에서 뒷바라지 할 수 있는 인물로 우르니노 공작이 추천한 브라촐리니를 채용한 것이다. 피렌체에 거주하면서 피사를 오가며 교황의 조카를 돌보다 보니 자연적으로 로마의 교황가문과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희대의 아첨꾼이자 도박꾼인 교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와 만나고 그들의 패거리에 속하게 되고 끝내는 이번 살인음모에까지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라촐리니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메디치 가문과 큰 은원이 없었다. 꾸준히 거래를 해온 원만한 관계였다. 하지만 엄청난 보상을 약속한 리아리오 가문의 음모에 그만 빠져들고 만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사사건건 골치 아픈 존재였던 메디치 형제는 이제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메디치 가문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이 은행을 통해서 돈벌이에만 매달려 부자가 되고자 했다면 굳이 교황이나 교회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황권(皇權)과 결탁하고 교권(敎權)에 감히 도전하였던 것이다. 아니 도전을 넘어서 그들은 교회와 교황이 가진 절대권력 까지 무시하고 넘보았던 것이다.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PP4)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주변을 인척들로 채웠다. 6명의 조카들을 추기경 내지는 대주교로 임명했던 것이다. 종교적 가치나 지위나 믿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교황이 총애하고 믿을 수 있는 핏줄이면 허락되는 최고 종교지도자 자리였다. 그야말로 식구들끼리 다 해먹는 족벌주의를 강력하게 실행하였던 것이 중세 교회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서로마 멸망 이후에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오랜 세월동안 허덕이던 로마교회(교황)은 옛 부귀영화를 꿈꾸면서 온갖 음모와 그릇된 짓을 자행하면서 차근차근 기력을 회복해 나갔다. 내부적으로 교리를 다듬고 존재 가치를 드높이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결국엔 ‘교회(교황)의 무오류설’ 이라는 천부당만부당한 허무맹랑한 사기조항을 교회의 정당성 맨 앞에 내세우는 인류역사 최고의 사기극을 완성시킨다.

  교회나 교황은 절대로 아무런 죄가 없다.

  아니지.......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인하여 그 어떤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성스럽고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지만, 교회(교황)은 선택받은 성스럽고 고귀한 존재임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앞세우면서 스스로를 정당화 시켰다. 덕분에 교회(교황)은 황제들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똑같이 행하면서도 추궁이나 문책을 당하지 않는 거룩한 존재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교만해진 교황은 세속의 군대를 창설하고 무력을 이용하여 다른 황제들의 땅을 빼앗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스러운 사업이었던 것이다. 땅을 빼앗고 종교세를 거둬들이는 것에 모자라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처녀를 강간하고 유부녀들과 간통하고 수많은 사생아를 낳는 지경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존귀한 교황들은 자신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들을 형제나 친척에게 입양시키고, 이들의 성장하면 교황청으로 불러들여서 대주교나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교황들이 챙긴 조카들의 상당수가 바로 교황의 사생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분....... 교황(교회)에게만은 어떠한 죄도 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축복을 내리셔서 그 어떤 죄악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거룩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교황이 뿌린 죄악의 씨앗인 사생아(조카)들이 버젓이 교황청의 실세가 되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돈과 권력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의 최종 목표는 다시 그들의 씨앗이 성장하고 부활하여 차기 교황으로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분란과 쟁투와 심지어 전쟁과 암살이 벌어졌다. 성스러운 믿음과 기독교적 신앙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중세 기독교 천년을 ‘암흑의 시기’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죄악은 교회(교황)이 지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스스로 꾸며서 장착한 최첨단 무기인 ‘무오류성’ 이라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면책특권’이 있었던 것이다.

  ‘교회(교황)는 그 자체로서 거룩한 사기극이었다.’

  식스투스 4세는 교황의 절대 권력을 앞세워 더 너른 영토와 더 많은 재물과 더 높은 권력을 추구했다. 그런데 사방에 아직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속의 권력들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바티칸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인근의 교황령 남쪽으로는 나폴리 공국이 존재하면서 스페인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북쪽의 제노아 공국과 밀라노 공국은 교황의 권위를 배척하면서 프랑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대륙 북부의 피렌체 공국과 시에나 공국과 베네치아 공국과 볼로냐나 모데나 같은 도시국가 형태의 정부가 존립하면서 교황의 정치권력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정부의 지원을 받는 나폴리 공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밀라노 공국과 함께 피렌체 공화정부가 교황권의 확대를 가로막고 있는 3대 장애물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1478년 4월에 이르러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미 여섯 명의 조카를 대주교와 추기경에 임명하여 교황청을 자기 가문의 아지트로 삼았다. 조카들 중에 몇 몇이 교황의 사생아라고 역사는 의심하고 있다. 누구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말이다.

  교황은 6명의 조카 중에서 유독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를 총애했다. 지롤라모의 결혼 선물로 볼로냐 근처의 이몰라 왕국의 군주 자리를 주었을 정도였다. 30세에 교황군 총사령관(로마카톨릭 군대) 겸 추기경에까지 오르게 된다. 교황을 제외하면 바티칸의 최고 실세중의 실세가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런 지롤라모에겐 동갑나기의 사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였다. 그런데 항상 이 살비아티가 문제였다. 교황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살비아티는 파치. 메디치. 베토리 가문들과도 혼맥을 통하여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의 사치와 방탕과 탐욕은 멈출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로마 제일의 아첨꾼이자 도박꾼이면서 또한 트러블 메이커였던 것이다.

  이를 눈치 챈 교황은 지롤라모와 살비아티를 떼어 놓기로 결정했다.

  교황은 교회군 총사령관인 지롤라모를 당연히 로마 바티칸에 머물면서 교황을 수호하도록 명했고, 살비아티를 피렌체 대주교에 임명하여 멀리 떠나보내기로 작정했다. 교황의 서명을 가진 살비아티가 피렌체로 향하려는데..... 피렌체 공화정부의 책임자인 로렌초 메디치가 로마주재 대사를 통해 강력하게 이를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교황은 대단히 크게 분노했지만 피렌체의 절대 권력자인 로렌초의 동의 없이 대주교를 파견하였다가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로렌초는 살비아티의 평소 성품이 피렌체 대주교 자리를 맡기엔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따져왔다. 이 분란이 불거질수록 살비아티의 그동안의 불미스런 행적들이 낱낱이 밝혀지게 될 뿐이었다. 이 분쟁은 3년이나 길게 끌게 된다. 교황과 살비아티가 로렌초 메디치의 재가를 기다리는 상황으로 3년이나 끌게 되지만 결과는 요지부동이었다. 교황과 살비아티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그렇다고 피렌체의 주인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어찌해 볼 도리가 당장은 없어 보였다. 결국 3년을 로마에서 허송세월로 보내던 살비아티는 피사 대주교로 임명되어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메디치 가문에 보복을 다짐하면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주변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거듭하는 순간에, 메디치 가문에 의해서 피렌체에서 모든 권력과 영향력을 빼앗긴 파치 가문이 이 격랑의 시대를 이용하여 재기를 꿈꾸면서 교황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피렌체에서 메디치가를 멸망시킨 후에 그들의 막대한 부와 권력을 나누기로 마침내 합의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역사는 ‘파치가의 음모(Congiura dei Pazzi)’ 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작은 파치가의 수장인 야코포 파치(Jacopo di Messer Andrea de’ Pazz)와 그의 영민하면서도 야심에 찬 조카 프란체스코 파치(Francesco de’ Pazzi)가 피사를 방문하여 대주교인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를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메디치 형제의 암살을 모의한 이들은 곧바로 로마로 가서 교황이 총애하는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어 지를라모는 모든 계획을 교황에게 보고하였다. 처음 교황은 이들의 계획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챈 야코포와 살비아티는 피렌체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생겨나는 엄청난 이득에 대하여 끝없이 지를라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는 교황까지도 계속된 지를라모의 요청에 수긍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교황 식스투스 4세는 ‘파치가의 음모’를 수락했다.

  다만 메디치 형제의 암살에 교황이나 교황청의 직접적인 참여는 배제하면서 다방면에 걸친 지원과 암살 이후의 수습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를 증빙하기 위하여 교황은 지롤라모 리아리오(교황군 총사령관) 추기경에게 은밀하게 칼을 하사한다.<아래의 그림처럼> 교황의 허락을 받는 지롤라모 옆으로 파치가문과 함께 직접 암살을 모의한 장본인 살비아티 리아리오(피사 대주교)가 보이고, 앞쪽으로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오른팔인 교황청이 고용한 용병대장 몬테세코(Gian Battiata da Montesecco)가 보인다.

  이 장면 이후, 살비아티와 몬테세코는 피렌체로 가서 파치가문과 함께 암살모의를 실행에 옮긴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까지도 교황은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 만큼은 피렌체로 보내지 않고 언제나처럼 자신의 주위에만 머물도록 한다. 도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이정도 상황이라면 지롤라모가 몬테세코의 호위를 받으며 용병부대를 모두 이끌고 가서 단판에 전황을 휩쓸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교황이 파견한 추기경과 메디치 형제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부활절 예배가 시작되고 출입문은 모두 굳게 잠기게 될것이다.

  미사의 후반부에 들어서 성가가 울려퍼지면서 모두가 고개숙여 기도를 시작하면 프란체스코 파치를 선두로 준비된 암살자들이 다가가 로렌초 메디치와 줄리아노 메디치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을 찔러박으면서 모든 거사는 완성을 향해 달려가게 될 것이다. 시뇨리아 광장 인근에 숨어서 이 소식을 기다리던 야코포가 지휘하는 파치가문의 군대와 용병들이 삽시간에 베키오 궁전으로 몰려가 메디치 가문의 군대와 식솔들을 무장 해제시켜 버리면 마침내 거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피렌체는 교황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서 파치가문에 의해 다스려지게될 것이다. 피렌체 공국의 공화정은 막을 내리게될 것이다.

 

 

 

 

지롤라모 리아리오(추기경)에게 칼을 건네는 교황 식스투스 4세.<파치가의 음모>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중세시대 암흑기 1천년의 역사는 모두 교회(교황)에 의한, 교회(교황)만을 위한, 교회(교황)의 놀이터였다. 한마디로 축소하자면 ‘교황의 패륜으로 얼룩진 세월’ 이었다. 순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구원의 역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부패한 교회권력은 이단자와 적그리스도를 외치며 모든 정적들을 무참히 제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부패하고 탐욕덩어리인 교회권력이야 말로 모든 죄악의 근원이었음에도 그들은 거룩한 십자가를 앞세우고 악마보다도 더한 모든 악행을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중세시대 교회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부패한 교황의 타락과 사치와 향락과 온갖 수치스런 불륜으로 점철되었을 뿐이었다.

  교회(교황)의 무오류성과 토미즘으로 무장한 교회권력은 예정된 수순처럼 점점 타락해 갔고, 이는 교회 내부의 세력다툼을 넘어서 내란으로 까지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틈을 봉건 영주들을 앞세운 황제의 권력이 기회를 틈타서 파고 들었다.

  세속적인 권력의 정점에 프랑스의 필립 4세가 등장하면서 마침내 황제의 권력은 교황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발단은 세금이었다. 프랑스가 유럽에 흩어져있는 많은 영주들, 혹은 스페인 같은 강대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다보니 막대한 전쟁비용이 필요했고 그 대부분의 비용은 프랑스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세금징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턱없이 부족해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여 이 원인을 조사해보니 다름 아닌 국가의 세금에 우선해서 교회가 거둬들이는 세금이 우선시되는 결과에서 생겨난 일이었다. 유럽의 모든 백성들은 교회(로마카톨릭)에게 종교세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라면 구원의 은총을 바라는 마음에 그 거룩한 사업을 대신하는 성스러운 존재인 교회(교황)에게 꼬박꼬박 엄청난 세금을 내오다보니,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소득이 줄어들 때면 그만큼 과중한 세금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교회는 국가보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인 만큼 세금도 종교세를 우선적으로 납부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강제적으로 징수해 갔다.

분노한 필립 4세는 교황령(모든 교회의 권리) 배격하고 단절시키는 황제의 칙령을 발표했다. 모든 교회를 세상과 차단시키고 프랑스라는 국가와 황제의 정치가 최우선이라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러자 분노한 교황은 필립 4세와 프랑스를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필립 4세와 프랑스를 이단자로 단죄해야 하는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당시 유럽 전역에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저지른 온갖 악행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오죽하였으면 단테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을 향해 ‘검은 짐승’ 이라고 까지 지목했겠는가.

  여론을 등에 업은 필립 4세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못된 망아지와 같은 교황을 처단하겠노라고 군대를 몰고 이탈리아 바티칸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교황은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호할 연합군이 모이지 않자 역으로 필립 4세 휘하의 장수들을 하나 둘 포섭하는 방법으로 선회했다. 아울러 특사를 프랑스 본토로 마구마구 파견하여 반 필립 여론전을 벌이면서, 프랑스에 남아있는 필립 4세의 정적들을 규합시켜 속칭 쿠데타를 벌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쳐들어가던 필립 4세에게 프랑스의 소식이 전해 졌다. 황제 권력의 근간이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필립은 말머리를 돌려 서둘러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도중에 자신과 연합하던 봉건 영주들이 이젠 거꾸로 자신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랑스는 이미 자신의 품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지금 거느리고 있는 군대가 전부였다. 교황의 압박과 배신자들의 군대는 포위망을 점점 좁혀 오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는 상호간에 엄청난 손실과 피해가 뻔해 보였다. 교황은 필립 4세 가족의 안전과 재산을 보장해 주고, 대신 필립은 황제의 직위와 군대를 포기하는 것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필립 4세 마저 굴복시킨 교황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승리에 도취한 교황(교회)은 차후로도 이런 일이 또 벌어질까 걱정하여 새로운 교칙을 교황의 명으로 발표한다.

  ‘이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는 영적인 면이고 다른 하는 세속적인 면이다. 세속적인 권력이 정도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연히 영적인 권력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교황의 권위에는 영적인 권력뿐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력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러므로 세속의 모든 왕들은 교황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의 황제들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거나 신과 동등한 반열에 올라있는 아주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교황 또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치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기독교적인 사명이나 책임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결코 교황이 제멋대로 고치고 갖다 부치는 그럴싸한 허울뿐인 거짓 명분에 있지 않았다.

교황의 남다른 총애를 받으며 교황청에서 외교대사로 활동했던 시인이며, 가히 르네상스 시대를 처음 개척한 인물로 추앙받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는 당시의 교황과 교황청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인류의 수치이자 악의 소굴이며 세상의 모든 악취 나는 더러움이 집결하는 시궁창이 바로 교황청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위선과 조롱과 거짓으로 추앙되고 모셔지며, 대신 오로지 돈만이 떠받들어 지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나 교감은 어디에도 없다. 교황청의 공기와 흙과 예배당과 침실에서는 거짓과 위선과 탐욕이 숨을 내쉬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교황의 지시와 묵인 하에 벌어진다.’

 

  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가?

  교황청의 실상을 세상에 폭로한 내부 고발자가 중세의 양심이었던 페트라르카였으며, 바로 그로 인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고 되돌아보고 새롭게 거듭나자고 하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교황)의 과(過)는 인류 역사에 수치스러움으로 도배된 모든 악행의 근원이지만, 굳이 공(功)을 따진다면 덕분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벌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늘이 결코 무심하지 않았음 이련가?

  권력에 취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날로 부패해져만 가는 교회(교황)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군대마저 빼앗기고 초라하게 자신의 시골 영지에 갇혀 있는 필립이란 존재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지난 아픔을 잊지 않고 있었다. 와신상담하며 언젠가 다시 올 기회를 활용할 계획을 차곡차곡 수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감시의 울타리를 빠져나오자 강제로 무장해제 당했던 황제의 군대가 다시 모여들었다. 더하여 교황으로부터 온갖 강탈과 차별을 받았던 각지의 영주와 군대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필립 4세는 수년 전의 그날처럼 교황 타도를 외치며 군대를 몰고 이탈리아를 향해 진군해 갔다. 화들짝 놀란 교황은 교황령을 동원하여 연합군을 모집했으나 어디에도 교황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군대는 없었다. 허겁지겁 교황은 교황청을 버리고 아나니의 교황 별궁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교회 안에 숨었다. 아무리 폭도로서니 교회 안에 있는 교황에게만은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교황을 보호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개뿔, 잘한게 도무지 보이질 않는데.......... 필립 4세의 부하장군인 시아라 콜로나가 교회 안쪽으로 쳐들어갔다. 콜로나는 교황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교황의 직위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직접 내린 것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콜로나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뺨을 후려갈긴 것이다. 콜로나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교황을 군화발로 지지 밟았다. 그리고는 교회의 지하에 가두어 버렸다. 이 사건을 역사는 아나니 사건(Schiaffo di Anagni)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일이 지나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풀려났으나, 이날의 엄청난 충격으로 한 달 후에 선종(사망) 하게 된다.

 

 

 

 

 

 

 

 

<아나니 사건>은 교황이 황제의 부하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사건이다. 끝내 교황은 이 충격으로 선종하고 만다.

 

교회는 부피하고 타락했다.  면죄부를 파고 성수를 팔고,  교회를 비판하면 종교재판을 이용해 누구든지 제거를 했다.

 

교황이 암살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후임 교황이 죽은 전임교황의 시체를 꺼내 종교재판을 통해 참혹하게 복수를 했다.

 

하나님의 정의와 구원의 약속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것일까?

 

 

 

 

 

 

 

 

  하지만 필립 4세 황제의 분노와 복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필립의 목표는 ‘교황이 황제보다 높은 존재다’라고 주장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주장이 허황된 망상이었다는 것을 인류역사 위에 확실하게 입증하고자 했다.

  황제는 차기 교황 선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추기경들 중에서 비교적 온순한 사람을 직접 지명하고 선출되게끔 만들었다. 이쯤 되었으면 누가보아도 황제의 권위가 교황을 선택해 뽑을 만큼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거기에서도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게 즉위한 새로운 클레멘스 5세 교황을 자신의 영지인 프랑스로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해서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새로운 교황청을 세웠다. 로마카톨릭의 권력 중심이었던 바티칸을 황제가 강제로 아비뇽으로 이주시켜 버린 것이다. 1305년에서 1378년까지 교황청은 황제에 의해서 아비뇽에서 유배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역사는 이 사실을 ‘아비뇽 유수 70년’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라는 절대적 지지기반을 잃은 상황에서도 교황청은 점점 더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필립 4세 황제가 사망하고 세월이 유수처럼 흐르고 흘러서 이런저런 계기로 마침내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로마에서 선출된 우르바노스 7세 교황은 옛 로마카톨릭의 부활을 외치면서 교황청의 재건에 힘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로마를 제외한 아비뇽과 여타지역의 종교 세력을 철저하게 무력화 시키고 로마카톨릭만의 기독교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교회 내에서 대대적이며 잔혹한 숙청작업이 이어졌다.

  우르바노스 7세 교황이 주도하는 로마카톨릭에 숙청작업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모여서 우르바노스 7세 교황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자체적으로 새로운 교황을 뽑았으니 이를 대립교황이라 부르게 되며 이때 선축된 새로운 대립교황이 바로 클레멘스 7세 교황이다. 분노한 우르바노스 교황이 군사를 이끌고 나서자 클레멘스 7세 교황은 허겁지겁 아비뇽으로 도망쳐 아비뇽의 교황청을 근거지로 이제 기독교 내에는 두 개의 교황청과 두 명의 교황이 존립하는 해괴망측한 시대가 도래 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로 약 40 년에 걸쳐 두 명의 교황과 교황청은 암살단을 보내고 군대를 보내고 권력다툼을 벌이는 대분란의 기간을 가지게 되며, 이 지루한 교회의 내분을 틈타 피사에서 요한 13세 라는 또 한명의 교황이 탄생하게 된다. 동시에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새로 등극하신 거룩한 요한 13세 라는 피사의 교황에 대하여 기독교 최고의 역사가로 평가받는 에드워드 기본은 이렇게 평가를 적었다. ‘이 교황이나 저 교황이나 부패하고 타락하기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달리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피사를 거주지로 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해적행위. 살인. 강간. 수간. 근친상간에 대해서만은 유독 다른 교황보다 심했다.’ 라고 썼다. 이젠 근친상간이란 단어마저도 평범한 일상적 언어로 등장하고 수간이라는 단어까지 추가되었다.

  도대체 강간 말고 수간이 뭐지? ‘인간말종’ 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님 ‘개잡놈’ 이라 하던가........

  골치가 아프게 생겼다.

  도대체 누가 가진 열쇠가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란 말인가?  누가 진짜여?  혹시나 모두가 가짜인건 아니여?

 

 

 

 

 

 

<파치 가문의 메디치 가문 암살사건>&nbsp; 로렌초 메디치는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지만 동생 줄리아노는 무참하게 살해 당했다.

 

 

 

 

  수려한 듯 은근히 화려함을 강조한 녹색 복장의 로렌초 메디치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교황청이 파견한 대사를 맞이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파견한 교황청 대사는 아직 소년의 티를 다 벗지 못한 듯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불과 나이 17세의 라파엘레 리아리오(Raffaele Sansoni Galeoti Riario)였다. 교황은 피사의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던 라파엘레를 불러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그를 교황청 대사로 삼아 삼촌인 살비아티 리아리오(피사 대주교)와 함께 피렌체를 방문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파치가와 야합한 커다란 음모가 배경에 짙게 깔려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어린 라파엘레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런 음모에 대하여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또 한 명의 이번 암살음모에 대하여 사전에 아는 바가 전혀 없이 이용당하는 교황의 조카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로 현재 피렌체 대주교였다.   로베레 대주교는 교황의 외가쪽 조카로, 역시나 교황의 총애를 받았으며  4년 전에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전임 피렌체 대주교였던 피에트로 리아리오(Pietro Riario)와는 이종사촌 사이였던 것이다.

  피에트로가 4년 전에 요절함으로써 교황은 처음에 말썽꾸러기 살비아티 리아리오를 후임 피렌체 대주교로 임명하여 떨쳐내려 하였으나, 그의 품행을 문제로 삼은 로렌초 메디치의 강력한 반대로 3년이나 피렌체 대주교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결국 살비아티를 피사 대주교로 임명하는 것과 동시에 로베레를 공석중인 피렌체 대주교로 임명했던 것이다.

  이번엔 메디치 가문에서도 전혀 반대가 없었다. 왜냐하면 신임 피렌체 대주교의 성향이 로렌초 메디치와 나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로베레 대주교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후원활동과 더불어 인본주의자로서 이미 널리 알려졌는가 하면, 거기에다 거대한 연회와 사치스러운 행동으로도 이미 톡톡히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추구하는 성향이 비슷한 반면에 사치를 추구한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쉽게 조종하거나 오히려 부려먹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나름의 메디치 판단이 사전에 있었던 것이다. 로베레 대주교는 로렌초 메디치와 잘 어울렸다. 그러하기에 이번 암살 음모에서 주동자 측에서 일부러 뺐던 것이다.

  이때의 인연으로 로베레 대주교는 메디치 가문을 드나들던 수많은 인문학자와 예술가들과 여러 인연을 맺게 된다. 미완의 천재였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청하여 피에타와 모세 조각상을 넘어서 시스티나 천장 벽화와 대성당의 지붕(쿠풀라)를 완성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로베레 대주교인 것이다. 역사는 미켈란젤로를 불러들이고 바티칸을 훌륭하고 위대하게 장식하게끔 만든 사람이 교황 율리오 2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교황 율리오 2세가 바로 식스투스 4세 교황의 외조카이자 파치가의 음모 당시 피렌체 대주교였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였기 때문이다.

 

 

  로렌초 메디치와 라파엘레 교황청 대사가 마차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로베레 피렌체 대주교가 이들을 맞이했다.

  진한 포옹과 함께 두에바치(양 볼에 나누는 입맞춤 인사)를 나누고는 나이 지긋한 신부의 안내로 대주교 집무실로 안내 되었다.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다가 부활절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대성당의 예배당으로 함께 입장하게 될 것이다.

  대성당 안은 부활절 대예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곧 예배를 시작할 것이다. 지정된 자리에서 저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지켜보다가 성찬식을 알리는 성가대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두가 고개 숙여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 내가 신호를 보내면 일시에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저 놈들의 심장에 단도를 깊숙하게 꽃아 넣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야. 다들 실수가 없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고 집중하면서 내 신호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야. 모두 잘 알아들었겠지?’

  프란체스코 파치는 대성당의 회랑에서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둘러보면서 무언의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주변을 살피면서 물었다.

  ‘몬테세코는 지금 어디 있는가?’

  ‘지금 계단 쪽에 있습니다. 출입문에 배치한 용병들이 사람들의 신체를 불심검문하는 것을 지시하더니 계단 주위와 세례당 주변에 배치된 용병부대의 동태를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성당 주변을 통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였다. 복도 저쪽에 은빛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용병대장 몬테세코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프란체스코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용병부대는 이 대성당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무장병력인 것이다. 그들은 교황청 대사인 추기경의 안전을 위하여 교황이 특별히 파견한 특수부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그들이 바로 이번 암살 사건의 핵심이었다. 용병 대장인 몬테세코가 정적들의 암살을 직접 맡기로 하고 파견되었던 것이다. 비록 어처구니 없는 핑계로 용병대장이 한 발 물러났다고는 하나, 이번 암살사건의 모든 준비는 더없이 완벽하게 이미 마쳐진 것이다. 놈들은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저 순순히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프란체스코님. 줄리아노 메디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뭐야? 예배가 이제 당장 시작될 시간인데 아직도 줄리아노 놈이 오지 않았단 말이야? 확실하게 확인한 것인가?’

  ‘오지 않았습니다. 놈을 맡아서 감시했던 반디니(Baroncelli di Bernardo Bandini) 말에 따르면 놈이 아직 메디치 궁전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부활절 예배라면 당연히 일찍 도착했어야 하지 않은가?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냈는가?’

  ‘무슨 일이겠습니까? 줄리아노라면 역시 계집 때문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도 계집 때문에 우리의 거사를 망쳐놓고 이번에도 또 계집 때문이라고?’

  순간 프란체스코 파치의 눈가에 찰라처럼 어떤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 것일까? 당시로서는 그들 누구도 이 사태의 결말에 대해서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음모는 완벽했기 때문이다.

  다만 프란체스코 파치가 불현듯 순간처럼 가졌던 어떤 불길한 느낌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 계획했던 수순대로의 메디치 형제의 암살음모였다면 이미 일주일 전에 완벽하게 끝이나 있었어야 했다. 메디치가문의 잔당들을 모두 체포하여 강력한 처벌을 하고 강제로 해산시키고, 유럽 각지에 설립되어 있는 메디치가의 은행을 모두 접수했었어야하며, 나아가 메디치가의 엄청난 재산을 깡그리 몰수했어야만 했다. 지금쯤이면 메디치가는 모든 기록과 역사에서 사라졌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되었건 아직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자칫하면 또 계획이 어긋날 판이 되고 말았는데, 그 어긋남의 빌미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또 줄리아노 메디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단 말인가? 무조건 거사는 오늘 끝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스테파노, 안으로 들어가 살비아티 대주교님을 속히 모셔오도록 해라. 은밀하게 행해야만 한다.’

  결국 파란체스코 파치는 검은 수사복의 스테파노(Stefano da Bagnone)를 대주교 집무실로 보내서 추기경과 로렌초 메디치와 함께 있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 피사 대주교를 은밀하게 모셔오도록 보냈다. 아무래도 이정도 지경이 되면 거사의 실행 여부는 실질적인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살비아티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 거사의 최고 주동자라면 아무래도 살비아티 리아리오 피사 대주교와  프란체스코 파치의 숙부인 야코포 파치(Jacopo di Messer Andrea de’ Pazzi)가 오랫동안 메디치 가문에 가졌던 원한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암살음모를 계획한 두 사람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의 조카이자 살비아티의 사촌인 교황군대의 총사령관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를 거사에 끌어들였고, 다시 교황 식스투스 4세를 거듭거듭 설득한 끝에 마침내 묵인 내지는 침묵적인 허락의 수순으로 암살에 쓸 단도를 하사받았던 것이다. 이들 주모자 4인방에 비하자면 프란체스코 파치 자신이나 용병대장 몬테세코(Gian Battiata da Montesecco)는 암살에 동원된 하나의 치명적 흉기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줄리아노 메디치(Giuliano de' Medici)만 아니었다면 거사는 애초의 계획대로 일주일 전에 모두 완벽하게 끝났어야만 했다.

 

  교황은 피렌체 대주교 자리를 두고 4년 전에 벌였던 메디치가와의 마찰을 수습하고 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피사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던 당시 17세의 손자 라파엘레 리아리오(Raffaele Sansoni Galeoti Riario)를 추기경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교황청 대사로 임명하여 피렌체로 파견하였다. 화해와 화합을 위한 방문이었던 만큼 당시 모든 사태의 이해당사자였던 피사대주교(살비아티 리아리오)를 불러 함께 방문하도록 교황은 명령했다. 아직 어린 교황청 대사의 행렬을 수호하기 위하여 용병대장 몬테세코가 용병 100여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파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기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교황의 배려와 은덕에 감복한 피렌체의 실질적 지도자 메디치 형제는 당연히 뛰쳐나와 기쁘게 교황청 대사의 방문을 환영해야 할 것이며, 방문에 환영하는 성대한 만찬을 열게 될 것이다. 교황을 대신한 대사의 환영만찬이기에 가급적 군사적 충돌이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메디치의 군대는 물러나게 될 것이며 최소한의 피렌체 경찰만이 치안을 위해 군데군데 배치될 것이다. 하지만 교황청 대사인 추기경의 안전을 책임져야하는 몬테세코의 교황청 용병대는 항시 추기경의 근처에 배치될 것이다. 음모자들은 이 기회를 틈타 한순간에 메디치 형제를 암살해 버림으로서 이번 거사를 마무리 짓기로 애초 계획했던 것이다.

  실로 계획은 완벽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예측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메디치가 역시 오랫동안 교황의 주변을 주시하고 있었다. 음모와 배신과 암살이나 전쟁이 어느 때 누구에게나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자행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과 리아리오 가문의 은원은 언제까지나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대사를 피렌체에 파견하겠다고 했을 때 혹시나 모를 음모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으나, 정작 파견되는 대사가 교황의 손자인 17세의 리파엘레 리아리오라 전해졌을 때 메디치 형제는 모든 의심을 접기로 했다. 이 나이어린 청년은 아직 정치와 권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으며 교회와 교황의 전횡과 부패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 서기로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다가 독립하여 자신의 사업을 성실하게 꾸려가고 있던 브라촐리니(Jacopo di Poggio Bracoiolini)로부터 교황의 손자인 라파엘레와 정적인 살비아티 피사대주교에 대하여 꾸준히 정보를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라파엘레는 아직 권력과 탐욕에 물들지 않은 청초한 청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를 직접 만나본 적이 있는 로렌초 메디치의 눈에는 라파엘레가 탐욕스런 리아리오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 눈앞에 추기경이 되어 교황청 대사로 나타난 라파엘레가 얼마나 반가웠으리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라파엘레를 다시 만난 로렌초 메디치의 가쁨과 감동은 대단히 컸다.

  하여 로렌초 메디치는 교황대사 일행을 카레지의 메디치 가문 별장(Villa medicea di Careggi)으로 안내해 성대하게 만찬을 열었다. 청년 라파엘레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소양과 플라톤 철학과 메디치 가문에서 진행하고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아에 대한 관심과 질문들은 오랜 교황청과의 갈등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였다. 로렌초 메디치는 이런 상황까지를 염두에 이미 두고 교황과 주동자들이 고차원의 음모를 꾸몄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하여 자신이 아끼던 수하이자 직원이었던 브라촐리니가 어떤 이유에서건 메디치 가문에서 등을 돌리고 지금  리아리오와 파치 가문과 손을 잡고 지금 자신을 암살하려 잠입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기쁨에 들뜬 로렌초 메디치는 가문의 호위병들 까지도 멀리 물리쳤다. 이제 별장엔 교황청 대사 일행과 그를 호위하는 몬테세코의 용병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제 거사는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울 것이다.

  다만......... 승리를 목전에 두고 기쁨에 들뜬 음모자들이 이때까지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줄리아노 메디치(Giuliano de' Medici)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교황사절을 위하여 형이 베푸는 특별 만찬인데도 동생 놈이 아직 참석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참석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석을 못하겠다는 전갈이 방금 당도했습니다.’

  ‘뭐야?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이......... 왜? 그놈이 왜 참석을 못하는데?’

  ‘갑자기 몸이 아파서 부득이 참석을 못하게 되었으니 추기경께 용서와 배려를 구한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아파서 뒈지려면 진즉이 뒈져버리던가....... 군대를 데리고 몰래 찾아가서 라도 반듯이 죽여 버려야 하는데, 그놈이 어디가 얼마나 아픈 것이며 지금 어디 있느냐?  반듯이 오늘 중에는 어떻게든 죽여야만 한다.’

  ‘다리를 다쳐서 못 온다고 하였으나, 반디니 이야기에 따르자면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어디 있느냐 반디니.  확실하게 확인한 것이냐? 그래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야코포 파치의 거칠어진 목소리에 기가 질린 반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줄리아노는 지금 고리니 가문의 저택에 있습니다. 두오모 광장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다리를 다쳤다는 놈이 이런 상황에 뜬금없이 고리니 가문에 가 있다니? 고리니라면 갑옷을 만드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장인 가문이 아니더냐?’

  ‘그것은........ 안토니아라는 고리니 가문의 딸이 줄리아노 메디치와 눈이 맞아서 지금 아기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줄리아노의 새로운 정부란 말이냐? 그토록 소문이 자자했던 시모네타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또 새로운 정부가 있었단 말이더냐? 임신까지 했다고?’

  ‘임신 정도가 아니라 산달이 가까웠다는 소문입니다. 시중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안토니아와 줄리아노의 염문이 널리 퍼졌으며, 심지어 다들 안토니아를 비올레타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부르면서 비올레타 고리니와(Fioretta Gorini)와 줄리아노 메디치와의 결혼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을 지경입니다. 줄리아노가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라 비올레타가 심하게 진통이 생겼다하여 허겁지겁 쫓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시모네타와의 간통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더니 그새 또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이번엔 임신까지 시켰단 말이냐? 참으로 한심하고 웃기는 놈이 로고....... 버젓이 약혼자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파옴비노의 군주 이아코포의 딸 세미라메이드 아피아니 아라고나(Semiramade Appiani aragona)와 오래전에 약혼한 것은 사실이나 어찌된 영문인지 약혼식 이후로는 전혀 만난 적이 없으면서 결혼을 계속 미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혼은 계속 미루면서 엉뚱한 여자를 임신 시키는가 하면 계속 유부녀들을 꼬여 간통을 저지르는 놈이란 말이지? 당연히 당장 죽어 마땅한 놈이 아니겠느냐? 그래 몇 명쯤 보내면 놈을 단칼에 요절낼 수 있겠느냐?’

  ‘고리니 가문까지 사람을 보내 끝을 보려하십니까? 한번 쯤 재고해 주십시오. 고리니 저택은 두오모 인근 번화가에 있습니다. 고리니 가문의 수하들이 훌륭한 갑옷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보니 사방에서 그 갑옷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머물면서 갑옷의 완성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곳의 직공들 또한 대부분이 칼을 쓸 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더하여 줄리아노 메디치는 움직일 때 마다 항상 지인들을 여럿 달고 다닙니다. 본인이 기사를 추구하기에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웬만한 용병 이상입니다. 거기다가 굳게 문이 잠겨있는 상황에서 소란을 떨게 되면 메디치 궁전과 집무실인 베키오 궁전이 지척인지라 순식간에 군대와 경찰이 출동할 것입니다. 집안 어딘가에 숨거나 창을 통해 골목으로 도망친다면 야밤에 추적하기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늘이 이 기회를 망나니 놈 하나 때문에 그르치게 하는구나. 살비아티 대주교를 은밀하게 이리로 모셔오너라. 이 정도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구나.’

 

  그것이 꼭 일주일 전에 메디치 별장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줄리아노 메디치만 만찬에 참석했다면 몬테세코와 용병들이 삽시간에 메디치 형제를 에워싸서 단칼에 모두 요절을 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살비아티가 달려가 성 앞에서 군대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던 야코포 파치와 합세하여, 성안에 매복시켜둔 동조자가 성문을 여는순간 쳐들어가서 시정부를 우선 접수하고 메디치의 독재에 항거하는 피렌체 시민들과 합세하여 쿠데타를 성공리에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쿠데타 음모는 줄리아노 메디치의 불참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며, 주동자들은 일주일 뒤에 벌어지는 부활절 대성당에서 펼쳐지는 예배를 이용해 다시 거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부활절이 되었고 사전에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모든 거사가 이제 예배의 시작과 함께 실행에 옮겨질 예정이었는데 아뿔싸....... 이번에도 어김없이 또 줄리아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음으로 해서 다시 한 번 심각한 차질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 것일까?” 라는 국내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또 여지없이 줄리아노 메디치가 빠지게 되었다. 이유는 똑같이 고리니 가문의 여자 때문이다.

 

 

 

 

 

 

 

 

줄리아노 메디치(좌)와  비올레타 고리니(가운데),  그리고  시모네타 베스푸치(우) 초상.

 

 

 

 

 

  줄리아노 메디치(Giuliano de Medici)는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가 낳은 이탈리아 최고의 꽃미남이자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갈망하는 남성상의 표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학교나 학원에서 미술시간에 데생을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많이 등장하는 석고조각 (줄리앙 조각상)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그의 주변에는 항상 여자들로 넘쳐났고 늘 염문설이 따라다녔다. 언제나 멋지게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지녔고, 성격은 쾌활하고 늘 표정이 밝았다고 한다. 우아하고 멋진, 거기에다 너그러운 품성까지 지닌 최고의 기사로 불렸다. 자연히 그는 피렌체 시민의 우상이 되어 ‘젊음의 왕자(the prince of youthfulness)’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모든 스포츠에 만능이었고, 야외에서의 생활을 좋아하여 승마, 사냥, 낚시, 결투를 즐겼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용히 독서를 하면서 시를 읽었으며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한마디로 재능과 에너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적인 꽃미남이자 매력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전하는 소문대로 하자면 천하의 바람둥이 줄리아노 메디치가 가장 사랑한 여인은 이탈리아 최고의 미녀라 불리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였으며,  당시에 이미 유부녀였던 그녀에게서 사생아 한명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훗날 그가 로마카톨릭의 최고권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다고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 최고의 미남 줄리아노와 최고의 미녀 시모네타(Simonetta Vespucci)가 연회장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불타는 사랑을 나눈 것은 사실이다. 당시 시모네타가 이미 결혼한 유부녀라는 사실도 맞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시모네타는 줄리아노가 암살되기 2년 전에 뇌하수체 종양(과거에는 결핵 때문이라고)으로 사망했다. 줄리아노와의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불륜 아내가 죽자 그녀의 남편은 곧 재혼했고, 영원한 연인이었던 줄리아노 메디치도 곧 새로운 여인과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렇게 예쁘거나 매력적이진 않았던 듯 보인다. 그냥 푸근하고 넉넉하고 마음이 편했던 상대였던듯 싶어 보인다.  왜냐면 세모네타에게 마음을 빼앗이고 연모의 정을 보냈던 남자들은 수없이 많은데 비해서,  줄리아노와 마지막을 함께했던 여인을 연모했다는 남자들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줄리아노가 새롭게 사랑에 빠졌던 여인이 바로 비올레타 고리니(Fioretta Gorini)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탄생하여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로 등극한다. 줄리아노가 암살되고 한 달이 지나 비올레타는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자 그녀도 훌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올레타는 아이의 이름을 줄리오 고리니(Giulio Gorini) 라고 지었는데, 사생아로 출생한 그의 유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더하여 줄리오가 태어난지 일 년 만에 비올레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제 그는 세상에 달랑 버려진 어디에도 의지할데 없는 사생아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이름난 건축가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가 줄리오의 후견인이 되어서 아기를 거두었다. 당시 상갈로는 로렌초 메디치와의 인연으로 피렌체 주위에 메디치가문의 별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하지만 줄리아노 메디치와나 비올레타 고리니와의 인연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나 상갈로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하면서 어린 줄리오 고리니를 데리고 갔다. 이후로 7년 동안 줄리오는 상갈로의 손길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형제애가 유난히 뜨거웠던 로렌초 메디치가 동생에 관한 소문을 끝없이 추적 끝에 마침내 줄리오 고리니에 대한 소문과 사실을 확인했다.  자신을 대신해 죽은 끔찍히 아꼈던 동생의 핏줄이 아직 세상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는 줄리오를 데리고 와서 줄리오 메디치(Giulio di Medici)라는 이름으로 가문의 족보에 올리고 친자식 이상으로 그를 끔찍이 아끼며 돌보았다. 그 오랜 보살핌 끝에 마침내 줄리오 메디치는 교황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에 이르러 ‘메디치 암살사건’을 다루어 봄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의 세상 사람들 마음에는 암살사건 자체보다는 ‘꽃미남과 꽃미녀가 만들어낸 희대의 로맨스’에 더 관심을 가지는 듯 보인다. 거기에다 당시의 중세시대에 벌써 유부녀와 총각의 간통사건 이라니 말이다. 거기에다가  유뷰녀와 총각의 불륜만이  전부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피렌체 화가 한 명이 줄리아노 메디치와 시모네타 베스풋치의 불타는 사랑 사이에 엉뚱하게도 찔끔 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다름아닌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였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모두 우선 ‘메디치 형제 암살사건 음모’를 모두 파헤쳐 본 후에 차근차근 다시 거론해 보기로 하자.  당시를 살았던 뭇 남성들은 시모네타만 만나게되면 하나같이 이렇게 외쳤다.

  I just falling in love!

  I just falling in love!!

  I just falling in love!!!

 

 

 

 

 

 

 

보티첼리 作 <시모네타와 줄리아노가 보티첼리의 화실을 처음 방문한 순간> -- 이렇게 세 사람은 처음 만났다. 운명처럼 말이다.

 

 

 

 

 

 

 

 

 

  방금 전에서야 고리니 가문의 저택에서 나와서 자신의 거처인 메디치 궁전으로 돌아온 줄리아노는 서둘러 의복을 갈아있고 두오모의 부활절 대예배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꾸물거리고 있었다. 다분히 귀찮고 피곤했다.

  만삭에 접어든 비올레타 고리니와 임신중인 태아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열과 두통에 시달리는 비올레타의 곁을 밤새도록 지켰던 줄리아노였다.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비올레타를 애써 떨치고 방금 귀가했던 것이다. 이미 정해진 부활절 예배 시간은 넘어서고 있었다.

  부활절 예배만은 차질 없이 참석해야만 한다는 형의 다짐이 그를 다시 서두르게끔 만들고 있었다. 지난번 교황 특사인 추기경을 위한 메디치 별장에서의 연회에 빠진 것도 건강을 핑계 삼기는 했지만, 사실은 역시나 비올레타 고리니의 요청을 떨칠 수 없어서 벌어진 사단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주재하는 교황 특사와 추기경 방문단의 환영만찬에 메디치 가문의 2인자가 무단으로 빠진 것을 두고 이래저래 말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형의 다짐만 아니었던들....... 교항 특사이던 대주교와 추기경들이 무어라 떠들어대던 개의치 않고 그대로 비올레타의 곁에 머물렀을 줄리아노였다. 하지만 더 이상 형에게나 메디치 가문에 누가 미치게끔 모른 척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줄리아노가 평상시처럼 의복 안쪽에 가벼운 갑옷을 덧입기 위하여 손에 집어 들고 있었을 때였다.

돌로 포장된 골목길을 달리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멈춰서더니 거대한 나무문짝이 열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요새와도 같은 메디치 궁전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좀 체로 벌어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메디치 궁전의 대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로렌초 메디치 부부이거나 자신이거나, 극히 몇몇 메디치 가문의 지휘부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부활절 성일인 지금 궁전의 대문이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렌초 메디치는 가급적 두오모에서 예배가 있는 날은 마차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였으며, 메디치 가문의 가족들 모두가 비교적 인근인 두오모까지 함께 걸어서 예배에 참석하면서 피렌체 시민들과의 자연스런 교류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족들은 지금 대부분 두오모의 부활절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메디치 궁전의 대문이 열렸던 것이다. 어떤 불길한 예감의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의복을 갈아입느라 곁에 벗어두었던 칼을 집어 들었다. 조심스레 3층에 있는 자신의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서는 아래의 중앙정원을 살폈다.  화려한 마차 하나가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려한 마차에는 금박으로 수놓은 교황의 문장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메디치 궁전에 들어온 마차는 바로 교황이 사용하는 전용 마차였다. 로마 교황청의 교황에게는 여러 대의 전용 마차가 있었다. 사용 목적이나 대해야할 상대에 따라 각기 다른 마차를 이용했다. 이것도 그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교황의 특사로 자신이 총애하는 조카이자 추기경을 파견함에 있어서 교황이 친히 방문하고 있다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선뜻 교황의 휘장이 새겨진 전용 마차를 내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이번 특사의 피렌체 방문이 메디치 가문에게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줄리아노님. 어디 계십니까? 반디노입니다. 로렌초님께서 줄리아노님께서 너무 늦으신다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대예배를 통해서 교황님의 특별한 전갈이 있으실 것이라고 곡 참석해야만 하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특사이신 추기경님께서도 걱정하시면서 마차를 내주시고 피사 대주교님을 여기까지 보내셨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베르나르도 디 반디노 바론첼리가 줄리아노의 거처가 있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교황 전용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였다. 살비아티라면 다름 아닌 메디치 가문의 형제에게는 라이벌이자 원수와 같은 처지가 아니겠는가? 피렌체 대주교를 탐을 낸 살비아티 리아리오가 메디치 가문의 재산과 피렌체 도시를 탐낸 교황을 부추겨 그동안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켜 오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교황 특사와 로렌초 메디치가 자신을 데려오라고 반디노와 살비아티를 교황전용 마차와 함께 보내 온 것이다. 모든 경계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반디노라면 틀림없는 메디치 사람이었다. 줄리아노 자신이 반디노의 성실함과 능력을 높게 평가해 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메디치 가문에 열심히 헌신하던 반디노는 두 해 전쯤인가 독립해서 지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면서 메디치 가문을 나갔다. 나가서 자신의 공방을 열고 여러 도시를 오가며 장사를 통해서 열심히 성공을 향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메디치 가문과 연을 맺으며 다각적으로 거래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반디노는 틀림없는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 점은 줄리아노 못지않게 로렌초 메디치 생각도 같았다.

  살비아티가 오랜 정적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가 대주교 복장을 하고 스스로 단신으로 메디치 궁전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줄리아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 어떤 상황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다소 긴장이 풀린 줄리아노는 집어 들었던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고귀하신 대주교께서 미천한 저를 위해 여기까지 손수 찾아주셨다는 말씀입니까? 차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며 줄리아노가 마지못한 듯 인사를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마차에서 내려 서성대던 살비아티 피사 대주교가 말을 받았다.

  ‘여전히 그동안의 지나온 일에 마음의 응어리가 맺혀있는 듯 보여 집니다. 시간도 제법 지났고 하니 이젠 모두 풀어 버립시다. 피사에서 그동안 지내다 보니 제가 그만 피사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지 무엇입니까. 그래서 교황 성하께 이젠 지나간 피렌체에 관한 매듭을 모두 풀어 주십사 요청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제 죽을 때까지 그냥 피사에 살겠다고 말이지요. 결국....... 교황 성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특사를 보내주신 것이지요. 아마도 피렌체 대주교 자리의 이동이 필요하다 생각하신 듯 하고...... 메디치 가문의 의중을 중용하시겠다는 언질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오늘 부활절 미사를 통해 교황께서 메디치 가문의 두 분 형제 앞에서 전해주시고픈 아주 중요한 전갈이 들어있다고 하셨답니다. 그런 내막을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중요 당사자이기도 하신 줄리아노공에게 교황 성하의 의중을 전달하기도 할 겸, 곡 참석하실 것을 바라고 계신 추기경과 로렌초 메디치님을 대신해 제가 직접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서둘러서 가면 추기경께서 전하시는 교황 성하의 말씀 이전에는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은 피렌체의 실질적 권력과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노린 교황의 욕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방편으로 모사꾼이자 욕심꾸러기인 교황의 조카인 살비아티를 피렌체 대주교로 만들려고 했다. 메디치 가문의 절대적인 저항으로 결국 피렌체 대주교 자리는 비교적 온순한 품성으로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이었던 다른 교황의 조카인 델라 로베레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벌어진 교황청과 메디치 가문의 반목과 다툼은 서로에게 커다란 난관과 손해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교황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절실하게 내민 것이다. 메디치 가문으로서도 기다리던 바였으며, 뿌리칠 상황은 절대로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내심 쾌재를 부르던 줄리아노는 단숨에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왔다.

  줄리아노는 마차 옆에서 기다리던 살비아티와 감격적인 화해의 포옹을 나누었다. 그런 격상된 감정은 살비아티에게도 같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줄리아노를 품에 안은 피사 대주교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거듭거듭 껴안는 것이었다.

  줄리아노와 살비아티는 함께 교황의 마차에 올랐고, 마부 옆 좌석에 오른 반디노는 서둘러 두오모를 향해 마차를 출발 시켰다.

  두오모 광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로 모두 무릎 꿇고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교황의 휘장이 새겨진 마차는 물 흐르듯 열려지는 인파속을 헤집고 두오모 계단에 멈춰 섰다.

  수사복장을 한 무리들이 다가와서 살비아티 대주교와 줄리아노 메디치를 대성당의 예배당 안쪽으로 안내했다. 제단 앞쪽의 설교대에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피렌체 두오모 대주교가 올라 미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성도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던 대주교가 돌아서서 대주교의 의자에 앉아있던 라파엘로 리아리오 추기경을 설교대로 모시고 있었다. 예배당 경내에 있던 수많은 눈길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젊다. 너무도 젊다 못해 아직 새파랗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만 같다는 것이 모두의 한결같은 느낌과 생각이었다. 아무리 교황의 손자라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나이 17세의 추기경이라니?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는 할까?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경험은 해 보았을까? 그가 과연 이 거대한 교회라는 지상 최고 집단의 내막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무엇이며, 그가 내리는 축원은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설교대에 올라서는 추기경을 바라보면서 줄리아노 메디치는 제단에서 조금 떨어진 서너 줄 뒤쪽의 의자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저만큼 왼편으로 로렌초 메디치와 가족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에게 자신이 당도했음을 알리고 싶었지만 워낙 인파로 넘쳐나고 있는지라...... 혹 추기경이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형과 자신을 지명하거나 다가오게 부르면 그때 합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줄리아노를 이곳까지 안내한 수도사들을 흩어져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고 살비아티 대주교는 연단에 마련된 대주교석 옆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같은 시간.........

  예배당 안쪽으로 살비아티와 줄리아노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반디노를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세례당으로 향했다.

거대한 청동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세례당 안에서 그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공했는가?’

  ‘그렇습니다. 방금 줄리아노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수고했네. 오늘 거사를 성공하고 나면 내가 반디노 자네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

  ‘살비아티 대주교님께서 줄리아노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시면서 세세하게 확인하였는데, 지금 줄리아노는 갑옷도 입지 않았으며 서둘러 오느라 칼도 가져오지 않은 완전 비무장 상태라 하셨습니다. 줄리아노가 비무장이라면 저들의 저항에 대한 걱정이 이제 무의미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확실한 사실입니다.’

  줄리아노 메디치가 마침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에 프란체스코 파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거사의 승리가 목전에 다가왔지 않은가? 그동안 온갖 심혈을 기울여 완벽하게 거사의 실행을 준비했었지만 번번이 줄리아노가 눈앞에서 빠져나가 하늘만 원망해온 것이 얼마였던가.

  ‘줄리아노의 위치는 확인 했는가?’

  ‘로렌초의 의자 두 줄 뒤쪽 오른쪽에 착석했습니다. 한꺼번에 도모 할 수 있는 지근거리입니다.’

  ‘두 형제 놈이 죽는 자리도 제대로 잡았구먼. 한 놈을 먼저 도모하고 나서 서로 합심하면 쉽게 처리 될 것이야.’

  실질적 행동대장이라 할 수 있는 프란체스코 파치의 눈가로 묘하게 승리의 대한 확신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온통 검은 수도사 복장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그런 프란체스코 파치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신속하고 확실하게 끝내자.’

  세례당을 빠져나온 무리들이 인파를 헤집고 대성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성당의 출입문은 하나만 열려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육중하게 닫힌 채로 잠겨 있었다.

  그리고 열려진 문 양쪽으로는 화려한 복장으로 완전무장한 교황청 소속의 근위대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지금 피렌체 성내에서 무기를 갖춘 병력은 교황특사를 호위하기 위하여 몬테세코가 로마 교황청에서부터 이끌고 온 50명의 근위대가 전부였다. 부활절 행사를 위하여 군대는 물론 치안경찰까지 모두 성 밖으로 먼 곳에 주둔 시켰던 것이다. 몬테세코의 요청이었고, 두오모측과 피렌체 정부가 이에 동의하여 벌어진 결과였다. 근위대는 몬테세코의 지휘하여 대성당의 출입문을 감시 통제하고, 회랑과 두오모 광장을 순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피렌체 성내에서 무기를 휴대한 교황특사의 근위대 50명이야말로 몬테세코를 포함하여 애초부터 이 거사의 주동자들 이었음을.........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느닷없이 용병대장 몬테세코가 대낮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성스런 예배당 안에서 피를 흘리는 암살만은 실행하지 못하겠노라고 버티는 통에 프란체스코 파치와 음모자들이 대신 암살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거기에다 줄리아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반디노 조차도 암살대의 일원이었음을......

  암살대인 검은 수도사복장의 무리를 이끌고 프란체스코 파치가 예배당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그를 주시하고 있던 교황청 근위대장 몬테세코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몬테세코가 문을 지키던 근위병에게 손짓을 하자 느닷없이 유일하게 열려져 있던 육중한 예배당 문이 굳게 닫혔다. 그들은 빗장까지 걸어서 출입문을 완전하게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이제 두오모의 예배당과 외부의 광장은 철저하게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어서 몬테세코는 광장을 순찰하던 교황청 소속 근위병들을 모두 불러 모아 예배당 출입문 주위에 배치 시켰다. 이제 그들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예배당을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던 몬테세코는 광장 한 켠에 대기하던 자신의 말에 올라 서둘러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북쪽 성문에 이르기까지 스쳐 지나가는 그 어디에도 경찰이나 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피렌체는 지금 완전 무주공산인 것이다.

  몬테세코가 피렌체의 도성 북문으로 달려가 보초에게 명령하여 성문을 열게 하면, 밖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야코포 파치가 500명의 무장 병력을 데리고 썰물처럼 밀려 들어와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으로 달려가 이십 여명 남짓한 정부청사 근위대를 진압하고 나면........ 이제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던 피렌체는 다시 파치 가문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황과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피렌체 대주교와 메디치 가문에 의해서 밀려난 파치 가문의 수장인 야코포 파치가 조카인 야심가 프란체스코 파치를 앞세워 꾸민 일종의 쿠데타였던 것이다.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두 형제만 제거하면 끝난다.’ 이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승리가 지금 목전에 완벽한 형대로 다가온 것이다.

 

 

 

 

 

 

 

 

미드 <메디치家> 중에 등장하는&nbsp; 줄리아노 메디치와 시모네타 베스풋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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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림 >

 

  먹고 사는 문제로 좀 바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석 달 가까이 새로운 글을 전혀 쓰지 못하였습니다.

  부족한 싸이트에 꾸준히 찾아주신 분들께 대단히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코로나가 다소 주춤하는 사태를 지켜보다가,  스스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것만 같아서 갑작스레 용기를 내어서 해외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을 하였더랬습니다.

   2000년 1월 17일 로마에서 귀국한 이후로 2년반 정도를 여행을 접고 살아왔더랬습니다.  하여 6월 2일에서 12일까지 가족들과 베트남을 다녀왔습니다.   호치민으로 들어가서 달랏을 경유하였고,  호이안에 들렀다가 다낭에서 귀국하였습니다.  제게는 3번째 베트남 방문이었네요.

  이번 여행에서도 많은것을 보고 듣고 깨닫고 공부하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코로나에 대해서도요.

하여.......

그간 블로그에 연재하던 <르네상스 산책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월남유감(越南有感)> 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여행기를 먼저 글로 써서 올리기로 하고,  르네상스 이야기를 그 뒤로 다음 여행을 떠날때 까지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찾아주신 분들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더 노력해서 열심히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   2020년  6월  15일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