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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check issue) 오늘의 시선으로 재조명해 보는 이슬람.

by 피안재 2021. 10. 24.

 

 

 

 

 

 

 

 

 

 

 

 

  "만약에 신(神)이 자신의 전능함을 거창하게 드러내 보여주기 위하여 악마(惡魔)를 창조하였으며 처절하고도 스펙터클한 전쟁을 거쳐 마침내 거룩한 승리를 쟁취하였다면, 그 전쟁의 과정에서 파생된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분명히 신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어야만 하는것이다."     ---  아놀드 J 토인비.

 

 

  62해 째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나의 정신적 영역을 지배하고 있고 현재에도 진행형인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평생동안 내가 떠앉고 살아갈 숙제라고 해야하겠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득임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모든 악함이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치졸한 신의 변명(기독교적 관점)이라고 면전에서 격하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신(神)은 조물주이시며 창조주이시다.  온 우주에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판단하고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창조주 한 분뿐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동이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라고 한다면(참으로 다행스럽기도 하겠지만),  그 자유의지 또한 어디까지나 조물주의 창조 영역이었으며,  사악한 뱀 또한 당연히 창조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스스로가 완벽한 존재가 아님을 고백하던가,  상당 부분의 과오는 자신의 부족함이었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스스로는 완벽한 존재로 추앙받고 싶으면서......  자신이 창조한 작품의 헛점들은 다른 누군가의 탓이라고 떠미는것은.........  따져보면 애초부터 전능하지 않거나,  기실은 짝퉁이라는 정체가 탄로난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아나톨리아 평원 서남부에 살던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제대로 직선거리로 이동하였다면 길어야 1년 정도면 실질적으로는 가까운 거리였던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헤맨 끝에서야 겨우 가나안에 입성했다.  신께서 그들 민족을 지극히 아끼사 연단을 시키기 위하여 40년 이라는 고난의 행군을 하도록 만드셨다는 이야기다.  이 고난을 통해서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고,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신(神)은 더욱 거룩한 분이 되셨다.  하지만,  이 모든것이 모세와 유대지도부의 민족대이동 계획이 부실했고 방향감각을 상실함에서 벌어진 촌극을 가리고 만회하기 위하여 고난의 행군 내지는 연단의 시간으로 연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적어도 나는 떨칠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이동하면서 여리고성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돌파한다.  유대민족을 대적한 그들은 모두 이민족이자 이교도이면서 악(惡)의 편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만 할까?  그들이 모두 악이라면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세상에 출현하게 되었을까?  어찌되었던 그들도 모두 창조주께서 만들어 내신 피조물이 아니겠는가?  유대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토록 극진히 보살피신분이 창조주시라면,  처음부터 그들을 괴롭히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들어진 이민족이나 이교도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토록 사랑스런 유대민족을 세우셔놓고도 지루하고 심심하셨는지,  그 분께서 이세상에 직접 내려오셔서........  이제부터는 그동안 유대민족에게만 한정판으로 제공했던 관심과 사랑을 온세상의 믿고 따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겠다고 선포하시고는 훌쩍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리신 것이다.

  신의 지극하신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알고있는 유대민족은 그 기득권을 절대 내놓지 않으려 버티고,  기득권 등기부 등본을 내놓지 않는 유대민족을 향해  세상의 기독교인들은 아예 종족까지를 말살해 버리자고 쳐들어가서 살륙을 감행한다.  종족을 모두 없애버리면 기득권(종교적 장자권)을 주장할 후손이 없음으로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유대민족의 기득권을 빼앗아 나누어 가지려 할 즈음에  느닷없이.........  고대 유대인 조상의 서자임을 내세우는 배다른 후손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서로가 서로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다.  오로지 창조주가 약속한 기득권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하늘나라에 범인류 청원이라도 넣어보려 했더니만,  그 분을 우리 인류가 만나 뵌지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  아이디랑 메일 주소도 불분명한 처지가 되고보니..........  할렐루야.

  거룩하신 그 분께서는 아주오래 전부터 묵언수행 중이시라는데.........  그 분의 하루가 우리의 천 년이고보면......... 도대체 어느 천 년에............. 하이고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테러와의 전쟁' 이나 현대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분쟁과 전쟁을 지켜보면서 토인비의 저 말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드러난 사태(결과)만을 보고 서로 격하게 손가락질하면서 서로 '네 탓' 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한 보여지는 해결에만 급급한 태도로는 아마도 영원이 이런 갈등과 반목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짐승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드러나는 바는 짐승들의 행태와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세상은 점점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인간사에 진정으로 모두에게 유익한 해결방법은 없는 것일까?

  '내 탓이요!'

  지나간 어느 시점에선가 천주교회에서 펼친 사회 계몽운동의 한 캐치 프레이즈 문구이다.

  내 가슴으로 하여금 잔잔한 여운같은 감동이 물결치게 만들었던 그 문구를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떤 떨림으로 기억한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내 탓이요'를 이해하고 저 마다의 가슴에 깊이 새기게 된다면.........  어쩌면 신(神)이 부재중인 현세에서도 우리 손으로 평화를 이룩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차마 나는 아직도 접을 수가 없다.

 

 

  20 세기의 초입에서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말하기를, ' 지나온 세계 역사의 절반이 지금 알레포와 바그람으로 나뉘어 연결되고 있다' 라고 자신의 저서에 적었다.  책의 말미에 토인비는 아프가니스탄을 가리켜 '인류 문명사의 교차로' 라고 불렀다.

  이 표현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참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왜 토인비는 이런 표현을 썼을까?

  그가 말한 '인류 문명사의 교차로'에는 서양(유럽)과 동양(이슬람)의 마찰과 교류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서양에는 기독교와 교권에  대항하고자 했던 왕권국가가 있었고, 훗날 신.구교의 갈등이 포함된다.  이슬람에는 아랍인에 의해서 탄생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페르시아가 주도하는 이슬람으로 넘어가면서 제국으로 발전했지만 종교에 민족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게 되었고,  다시 오스만 투르크가 주도하는 이슬람으로 넘어가면서 유럽의 기독교와 전면전을 벌이기 까지 했다.  하지만, 그 사태 이후로 근 300년 이상을 유럽의 기독교와 이슬람은 별다른 마찰없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문제들을 해결나가며 지내왔다.

  유럽의 중심은 우선 바티칸이었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대립하였으며,  바다 건너 영국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슬람의 중심이라면 당연히 오스만 투르크의 중심 이스탄불이었고,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꼽을 수 있겠다.  거기에다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 역시 이슬람의 중요 거점도시라 하겠다.

  그럼에도 큰 틀에서 보자면 이슬람이나 유럽이나 거진 비슷한 처지를 겪으면서 지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토인비는 느닺없이 알레포와 바스람을 동양과 서양이 교통하는 최고의 중요 거점으로 꼽았던 것이니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아해 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십자군 전쟁사'를 관심있게 살펴 본 사람에게나 알레포(시리아)가 기억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레포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처지에 바그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전쟁 기사를 통해서야 사람들은 겨우 바그람(아프가니스탄) 이라는 지명을 듣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에 '미군이 비행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바그람 공항' 이라는 기사를 통해 겨우였으니 말이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긴 활주로가 전부이고 주변에 아프가니스탄을 오가는 미군들을 위해서 막사와 창고와 군사적 기지로만 여겨지던 바그람이 토인비가 거명했을 정도로 이슬람 혹은 동서문명 교류의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하고 유서깊은 도시였단 말인가?  비행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알레포나 바그람이나 모두가 예루살렘이나 바그다드에 못지않은 거대한 고대도시였다.  그나마 알레포는 지금도 대단히 크고 중요한 시리아의 해안도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이나 인천 정도이겠다.  하지만 바그람은........  이젠 그냥 미군이 철수한 텅 빈 공항일 뿐이다.  바그람에서 고대도시의 옛 영화를 되새겨 볼만한 시설이나 유적은 거의 전무하다.  모두 파괴되어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여,  이제부터는 과거 활발했던 바그람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주된 이야기는 지금으로 부터 그리 멀지않은 백년 전의 이야기부터가 주가 되겠지만,  시작은 이해를 돕기 휘하여 좀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지나간 백오십년 전부터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 이야기의 과정에서 식민지 쟁탈 전쟁이 등장하고, 서구 열강의 약탈과 비인륜적인 만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난민이 발생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저항이 시작되고,  무참한 탄압과 학살이 벌어지고,  거기에서 마침내 극소수에 의한 무장투쟁이 발생하면서 침략자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지목하기 시작한다.  무차별 탄압과 약탈은 저항을 낳았고,  저항은 폭력으로 진압되었다.  폭력은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였고,  학살당한 자의 후손들을 복수를 다짐해 무장 투쟁을 벌였다.  소수자의 무장투쟁을 진압한다며 강대국들이 비행기와 미사일과 항공모함을 동원해 전쟁을 벌였다.

  그것이 바로 (중동 사태)의 전말이다.

  서구 열강이 강제로 쳐들어가서 산업 자원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목화와 목재와 석탄과 철광석을 강제로 빼앗아 본국으로 퍼나르기에 혈안이 되었다.  자원이 고갈되면 은근슬쩍 빠져나갈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어느날 갑자기 검은 황금덩어리가 하늘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신(神)께서 석유를 아라비아 반도에 내려주시지 않았던가,  좀 더 시간이 지나서 뿜어져 나오게 하셨다면 중동문제는 간단했거나 어쩜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영토에서 한참 약탈에 발광하던 시점에 느닷없이 석유가 마구마구 터져버린 것이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인 기계(증기기관)을 고체연료인 석탄으로 모두 충당하던 시기에,  공급과 조절이 용이한 석유가 식민지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이젠 강대국들이 저마다 석유를 차지하기 위하여 광란의 칼부림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신흥강대국 미국까지 가세를 하게되었으니...........  가히 아비규환 지옥과 다를바가 없었더라.

  서구 열강들의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참혹한 식민지 약탈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극소수 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보복의 수단으로 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테러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당방위 차원의 경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그 테러를 진압하겠다면서 대포와 비행기와 항공모함을 가지고 쳐들어가서 석유를 내 놓으라고 본보기로 사람을 죽여가면서 강제로 각서를 쓰고 인감도장을 찍게 만드는 강대국의 처사는 최소한 모두 사형감이라 하겠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누가 살인마인가?

  그런 진실을 외면하고........  우리는 왜 파렴치한 강대국의 시선으로 지난 사태를 바라보고, 침략자를 두둔하기에 열심인가?  그들이 떨어트리는 떡고물에 감격해서인가,  아니면 그들과 잠재적 공범인가?

  나는 진실함으로 모든 인류가 똑같이 평화로운 행복한 세상이 먼 미래에라도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이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고 이해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진실에 다가가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으며,  내가 알고있는 그 진실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영국. 독일. 러시아가 각자 자루 하나씩 차고서  이슬람 지역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것인가를 모의하고 있다.

 

 

 

 

 

 

 

 

 

 

 

  중세시대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무역의 시대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비단과 도자기와 향신료가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지중해는 한마디로 물류 수송의 철도이자 고속도로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눈부신 번영의 시대가 하루아침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젊은 술탄 메메트 2세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비잔틴제국이 멸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메메트 2세는 유럽으로 통하는 모든 교역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한마디로 유럽은 교역을 통해 서로간에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 이해당사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미 확실하게 규명된 쳐부숴야만 하는 적(敵)이었던 것이다.  교역이 유럽인들에게 지대하게 필요와 이익이된다고 판단된 이상, 이 교역을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이슬람의 숙원에 한 발자욱 더 다가가는 일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은 삽시간에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어느때부터인가 호화사치품인 비단이 없는 생활과 향신료가 빠져버린 식생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유럽의 상류사회는 동방으로부터 들여오는 물자와 문화에 깊이 빠져버림을 넘어서 중독되어 버렸던 것이다.  극소량의 비단과 향신료가 중앙아시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넘어서 발칸반도를 통해 유입되었고,  북아프리카를 우회하여 기나긴 여정끝에 겨우 유럽에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니, 당연히 그 힘든 여정에 걸맞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향신료 1kg을 사기위해서는 실제로 금덩어리 1kg을 지불해야만 하는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유럽의 통치자들은 견디다 못해........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이나 방법을 찾아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바스 코 다마가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 것이나,  콜럼부스가 대서양으로 항해를 떠난것도 모두 인도로 가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역사는 '대항해 시대'라고 이름지었는데.......  처음에는 오로지 인도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내자는 단순한 이유가 전부였다.  비교적 지척인 중국에서 인도까지는 기존의 실크로드를 그대로 이용하고, 비단과 도자기가 모이면 새로운 바닷길을 열어서 인도로부터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와 인도의 향신료를 싣고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 오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생각이었다.

  콜럼부스는 엉뚱한곳에 상륙해서까지도  그곳이 인도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 인도에서는 향신료가 없었다.  향신료와 도자기와 비단은 없었지만,  새로운 가치있는 혹은 돈이 되는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약탈물들로 인해서 스페인은 이제껏 없었던 대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모든 유럽인들은 향신료나 비단 못지않게 새로운 미개척지를 찾아내고 확보한다는 것으로 어떤 결과가 얻어지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아직 이 세상에는 미쳐 가보지 못하거나 알려지지 않은곳이 사방에 널려 있을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인도로 가서 보다 많은양의 비단과 향신료를 확보해서 무역을 통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보다, 쓸만한 미개척지를 찾아내서 식민지로 확보해 버리는것이 몇갑절이나 떼돈을 버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새롭게 모두가 깨닫게 된것이다.  모두들 바다로 나섰다.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하여 세상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들에 의한 '식민지 정복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것이다.

  신대륙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부를 스페인은 주체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복지나 사회기반 시설 확충에 부를 쓰기보다는,  일부 귀족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모든 부를 독점하고 흥청망청 사치와 방탕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시간만에 스페인은 자멸하여 폭망해버리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이 신대륙으로 군대를 이끌고 몰려갔다.  스페인이 몰락한 마당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신대륙을 서로 차지해 버리겠다는 심사에서 였다.  신대륙에서 서구의 초강대국간에 살벌한 식민지 정복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신흥해양강국으로 급부상한 영국이 점차 우위를 점령해 갔다.  프랑스는 점차 북쪽의 카나다 지역으로 물러났으며  이내 치명타를 입어서 식민지전쟁을 끝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로 영국에 밀려서 차차 중남미 전선으로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남아메리카를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던 포루투갈과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의 절대적 우세속에 전세가 막바지로 치달아 아메리카 신대륙이 스페인의 커다란 재산에서 이제 막 영국여왕 앞으로 등기부 등본이 발부되려는 찰라에  느닷없이........  일찍 영국에서 건너간 후손들이 영국의 점령에 반기를 들고 등장한 것이다.  조지 워싱턴과 토마스 제퍼슨이 이끄는 민병대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무장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영국은 일부 불순분자들이 주동하는 제국내의 내전이라고 명명했고,  워싱턴의 민병대는 독립투쟁이라고 명명했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에 신대륙에서 '해가 지지않는 나라 대영제국에 맞서서 토박이 민병대의 저항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영국에게 당하고 밀려난 프랑스와 독일이 앞다투어 영국에 대항하는 민병대를 막후에서 지원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흔히들 요즘 미국 언론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해 본다면..........  '신대륙의 극히 일부 젊은 불순분자들이 자행한  테러 행위로 위대한 대영제국이 피해를 입고 있다' 고 썼을 것이다.  그랬다면 과연 미국이 이런 표현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 있었을까?

  이 상황의 잣대를 고스란히 옮겨서 중동사태로 가져가 보자.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그른가?

  한 쪽은 독립투쟁 내지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라 말하며 정당성을 내세우고,  다른 한 쪽은 테러라고 말하고 규정 짓고는 처벌과 응징을 요구한다.  왜?

  신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의 결과는 이내 전세계에 퍼져서 일어나고 있는 식민지 침략전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된다.

  이미 프랑스는 안도차이나반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라이벌인 영국의 세력확장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민지반군인 미국을 지원한다는 것이 도가 지나쳐서 그만 프랑스 자체에 엄청나게 재정적 손실을 초래케 만들었다.  이를 빌미로 궁핍해진 프랑스 시민들이 봉기하여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켜 루이왕조를 몰락시켜버리고만 것이다.  이후로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일단 프랑스의 식민지 정복전쟁은 중단 내지는 퇴보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에 널려있는 식민지는 오로지 영국과 독일의 절대적 우위속에 러시아, 네덜란드, 거기에다 일본이 가세하였던 것이다.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복전쟁 하일라이트는  영국의 '3B 정책'과 독일의 '3C 정책'의 맞대결이라 할 수 있겠다.

  

 

 

 

 

  영국 식민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당연히 신대륙인 아메리카였다.  다음으로 때맞춰 완전히 국력을 상실한 프랑스가 선점했던 인도에서의 기득권을 영국이 가로채 식민지로 점령해 버리는 목표를 세웠다.  결국 인도는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박혀있는 진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황금과 다이아몬드가 쏟아져 나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차지하는 (3C 정책)을 밀어 부치게 된다.  카이로와 케이프타운과 캘커타를 연결하는 인도양에서의 절대적 우위의 거점 확보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이에 뒤질세라 독일이 (3B 정책)을 선언하고 나섰다.  베를린과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비잔티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바그다드를 잇는 동서양이 오가는 교통요지를 핵심목표로 노리고 나선 것이다.

  영국과 독일은 서로 자신의 목표는 달성하되 상대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쩌면 이런 사태의 결과는 결국 전쟁으로 결판날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으로 치닺고 말았다.

  이쯤되어진 사태에서 영국과 독일이 간구한 두 가지 상황이 점차 부각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독일이 차지하고자 하는 지역중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비잔티움. 카이로. 바그다드가 아직은 엄염하게 오스만투르크(터키)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오스만이 무기력할 정도로 쇠락하여 터키지역 정도만을 겨우 추스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오스만이  명목뿐일지라도 아직까지는 모든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수장이었던 것이다.  이슬람 특유의 신정합일 정신과 민족중심국가의 특성을 살펴볼때,  자칫 오스만투르크의 핵심을 건드린다는 것이 종교적으로 어떻게 드러날지에 대해서 서구열강의 그 누구도 쉽게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몰락한 이빨빠진 사자로 여겨 오스만을 툭 건드려 보았는데,  그것이 혹시나 이슬람의 정체성을 건드리는것으로 상황이 돌변해 모든 이슬람이 오스만 중심으로 뭉치기라도 하게된다면.......  유럽 전체가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을 맞게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 영국과 독일은 우선 오스만투르크(터키)의 상태를 판단하는데 몰입하였고,  이슬람 세계를 어떤 방법으로 무장해체 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영국과 독일에 참으로 경천동지할 충격적인 사실이 한가지 전해졌다.

  동토에서 오랫동안 겨울잠을 잤던 러시아 제국이 꿈틀대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오랜세월동안 러시아는 유럽의 역사에서나 이슬람의 역사에서나 아시아의 역사에서 늘 제외되어 왔었다.  너무나 멀리 떨어진 아주 특별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동토의 땅에 욕심을 가지지 않을것이니,  곰은 그저 그 동토에서 혼자 마음껏 놀으라고 방치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북극곰이 점차 세상물정을 알아가고  동토의 땅에서 체계를 잡아가면서 세력을 키우더니만........  서구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전쟁 이라는 축제의 소식을 접하게 된것이다.  러시아는 국가 체계가 바로 잡히기도 전부터 항상........  아니 영원히 따뜻한 남쪽나라,  바다가 얼지 않는 항구를 가지는 것이 소원인 나라였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미개척지를 넘어서 이제는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는 나라면은 어디든지 쳐들어가서 제멋대로 제것이라 차지해 버린다고 들었는 마당에.........  어디 바다가 얼지않는 따뜻한 나라 몇 개쯤 차지한다고 해서 별반 문제될것이 없다는 판단을 해버린 것이다.

  거대하고 무서운 북극곰이 마침내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고자 한다는데.........  그게 도대체 어느 방향이란 말인가?  혹시나 영국이나 독일이 탐을 내는 지역으로 러시아가 내려온다면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결국 러시아 북극곰은 목표를 정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러시아가 탐을 내는 목표가 영국이나 독일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되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장소였다.  러시아의 남하가 시작에서부터 엄청난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코카서스 지역의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과 국경이 되고 있는 힌두쿠시 산맥을 비켜 내려와 아프가니스탄을 먼저 차지하기로 목표를 정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캐슈미르 지역을 지나 파키스탄과 인도의 어느 지역이든 거쳐서 따뜻한 카스피해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영국의 처지에선 어찌되었던 자신들이 차지한 인도가 러시아의 다음목표가 될수 있는 처지가 되었으며,  독일로서는 바그다드가 당장 러시아의 다음 목표가 될 수 있는 처지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언제나 재발될 수 있는 돌발변수로 이제 오스만투르크와 러시아제국의 국경선이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지척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오스만과 러시아는 두 제국의 조상들이 이동을 시작했을때부터 이미 정적을 넘어서 영원한 앙숙이 되어왔었다.  러시아가 남하를 계획하면서 목표로한 대부분의 지역이 모두 엄연한 오스만투르크의 영역인 이슬람의 영토였기 때문에  앞으로의 사태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결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느닷없이 러시아의 남하문제로 이지역 전체가 그만 난장판으로 돌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장 몸이 닳아오른것은 당연히 영국이었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전쟁에서 프랑스와 독일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민병대에 패했고 미국이 독립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점령해 버리게되면  인도 전체가 위험해지고 마는 것이다.  알짜배기 식민지 인도가 없이는 대영제국이 유지될 수가 없었다.  이제 영국으로서는 제국의 사활을 걸고 러시아 곰과 한판 전쟁을 불사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것이다.  세상에 드러내 본적이 없는 동토의 땅에서 뛰쳐나온 곰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 영국으로서도 적지않게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영국인들에게 끼쳤던 압박감과 두려움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 사테에 대해서 이름지어 붙인 '그레이스 게임(Great Game)'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진 그 장소가 바로 (아프가니스탄) 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로 누구든지 인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반듯이 힌두쿠시 산맥과 페르시아 고원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다.  페르시아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군대와 로마군대와 몽고군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전투에서 승리해 잠시 이 지역을 차지한적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곳을 완전점령하고 지배한 사람이나 나라는 없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 완충지대를 사이에두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암암리에 서로간에 보이지않는 물밑 전쟁을 시작했다.  사파비 왕조가 지배했던 페르시아 전지역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전체와 파기스탄의 대부분, 그리고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구분되는 투르크매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탄을 포함해 타지키스탄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지역을 놓고 벌이는 제국간의 전쟁이었다.

  이 긴박한 상황을 두고 영국의 소설가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이 (그레이트 게임)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여 이후로 세계대전에 맘먹는 분쟁지역이 발생할때 마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별명이 앞뒤로 항상 따라다니게 된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영국과 러시아간에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이지역의 실질적 지배자는 카자르 왕조의 이란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명한 군주는 아니었다.

  아침에 러시아 사절이 찾아와 이런저런 제의를 해오면,  저녁엔 영국 사절이 찾아와 더 나은 조건의 제의를 내놓았다.  매일매일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이란의 고위층들은 이를 기회로 유럽의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 이란을 개혁하고 부강하게 말들 수 있다는 꿈에 잔뜩 부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독일과 프랑스와 스웨덴까지 가세하였으니  경쟁이 가열될수록 생겨날 이익의 규모는 커져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최고통치권자인 왕은 무능했고 욕심꾸러기였을 뿐이었다.  고위층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왕은 유럽의 노련한 사절들에 의해서 이래저래 휘둘리기 시작했다.  한 국가의 비극이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유럽의 사절들은 왕에게 뇌물을 주고 독점 계약권을 따내기 시작했다.  차후로 생겨나는 이익의 일부를 왕에게 계속 헌납하겠다는 약속에 한나라의 경제권이 외국인들에게 마구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출신의 영국인 로이터 남작이 대표적 케이스로 그는 탐욕스런 왕을 뇌물로 꼬득여 이란 전역의 철도부설과 전차노선을 설치하고 운영까지 담당하는 독점권을 따냈다.  이란 전역에서 광산을 개발하고 광물을 채취하는 독점권은 물론 국유림을 벌채할 수 있는 벌목권까지 독점적으로 따냈다.

  국민들이 반목하기 시작했고  과도한 독점에 러시아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가자 샤 이란왕은 결국 압력에 굴복하여 계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아무리 전제왕권의 시대라지만 왕이 서명한 국제간의 약속에 일방적인 파기는 불가능했다.  왕은 로이터 남작에게 당시 금액으로 4만 파운드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위약금으로 지불하면서, 이란 국영 은행의 상당부분 지배권까지를 배상해야만 했다.  계약에 따른 어떤 생행도 없었음에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었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게된 것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배상금이 왕의 주머니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이란의 국고에서 지출된 것이다.  무능한 왕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이란에 생긴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엄청난 국고에 손실을 입힌 것이다.  더군다나 참으로 엄청난 일은  그후로도 계속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때마다 국고가 축나고 있는데,  왕은 자기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기에 별로 문제꺼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왕의 무능과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이란의 지식인들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항의하는 단체행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왕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체포해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는것을 염려해 유사시 유럽의 지원군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망조(亡兆)가 든 것이다.

  이란의 몇몇 지역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배후에서 조정하는 무력분쟁이 벌어지기는 했다.  그 마저도 영국이나 러시아의 군대가 아닌,  사주받은 이란인들 끼리의 치졸한 대리전이었을 뿐이다.  영국도 러시아도 이 이상의 전면전은 서로에게 전혀 득이 될것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적당한 선에서 차라리 이란에서 경제적으로 빼먹을 수 있는만큼 빼먹리로 애초의 계획을 대폭 수정하였던 것이다.(그레이트 게임의 전말이다)

  거창하게 제국들 끼리의 슈퍼 볼을 예고해 놓고는 광고수익만 차지한채 무승부 처리를 해버리고 말았다.

  러시아는 이란 북쪽국경의 윗쪽을 차지하고  영국은 남쪽국경의 아랫쪽을 차지하기로 협약함으로 분쟁을 마감했다.  협약에는 자신들의 영역에서 어떤 방법으로 약탈을 하던 상관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이때 이들이 정한 국경선이 묘하게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선이 되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처음 남하하기 시작했을때부터 이미 먼저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여 자신들의 방어용 전진기지로 삼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왜 아프가니스탄을 두고 역사가 유독 특별한 나라라고 부르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석은자의 깨달음에는 반듯이 엄청난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이란이 어리석은 군주때문에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면,  아프가니스탄엔 반대로 현명한 군주가 버티고 있었다.  그점을 영국은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아프간은 커다란 몇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는데,  저마다의 처지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통합이 절재적으로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18세기 초에 아마드 샤 바바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갈라선 부족들을 통합하고 하나의 국가체계를 갖추었다.  아프가니스탄을 노리는 열강들은 부족간의 분열을 조장시키며 아마드 샤의 왕국을 전복시킬 음모를 꾸몄다.  영국도 그 중의 하나였다.

  조지 에덴 영국 총독은 모하메드 칸 아프가니스탄의 새로운 왕에게 사신을 통해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가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인도를 향해 내려오는 마당에  중간에 놓여있는 아프가니스탄이 스스로 영국의 우방임을 입증하라는 요구였다.  혹시라도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 동맹국으로 돌아설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여.......  막말로 자진해서 영국에 투항하라는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아직 다가오거나 실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다가올지 모르는 우려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내편이 아니라 판단되면 일방적으로 먼저 제거해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바로 이라크전을 시작할 당시의 부시와 미국이 강행했던 만행과 천배만배 똑같이 닮은 것이다.  다지고 올라가보면 영국이나 미국이나 그런 호전적인 한 핏줄이 아니겠는가?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싸우겠다는 생각을 표현조차 해 본적이 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나를 적이라 지목하는가?' 라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에 따지고 들었다.

  이미 전쟁을 통한 점령을 목표로 했던 영국은 1838년 12월 인도 북부의 영국군을 중심으로 인도군대까지 포함하여 21.000의 군대를 파병했다.  영국군과 인도연합군은 이내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그동안 여타의 식민지에서 자행한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약탈과 갖은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아프간의 반발과 항의를 총칼로 탄압하는 사태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견디다 못한 아프간 지식인들이 나서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참혹한 살륙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다.  남의 나라를 무작정 쳐들어가서 약탈하고 강간하고 방화를 저지르고 살인을 벌이는 행위를 영국은 군대가 수행하는 정당한 전쟁행위라고 규정하고서는, 아프간인들의 저항을 부당한 폭력이라고 몰아세웠다.  요즘말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여쩌면 요렇게 영국이나 미국이 저질러 놓고 둘러대는 말이 토씨 하나까지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프간의 저항이 점점 격렬해져 갔다.

  더 이상의 아프간 점령 지속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영국군 윌리엄 엘틴 스톤 점령사령관은 한겨울에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인도로의 철수를 결정했다.  16.500명의 영국군 인도연합군이 눈 덮인 혹한의 겨울산을 뚫고 잘라라바드(Jalalabad)를 향해 철수를 시작했다.  이런 기회를 파슈튼족이 주축이된 용맹한 길쉬 자이 전사들이 그대로 지켜볼리가 만무했다.   아프간 전사들은 영국.인도 연합군이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며 눈쌓인 겨울산의 골짜기로 깊게 깊게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눈사태를 이용해 앞과 뒤를 차단시켰다.  가만 두어도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추위에 모두 얼어죽었을 상황에서,  아프간 전사들은 자신들 방식으로 복수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양파 껍질을 한꺼플 한꺼플 벗겨내듯이  그들은 영국군과 인도군을 바깥쪽에서부터 야금야금 잔혹하게 살해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면 잠시 물러나 불을 피우고 쉬었다가 다시 양파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나갔다. 

  겨울산으로 들어간 영국군과 인도군대는 정확히 16.500명 이었다.

  이 겨울산에서 살아나온 윌리엄 브리돈(William Brydon) 군의관은 부상당한 말을타고 영국군 진지에 도착해 이렇게 외쳤다. '나를 빼고는 아무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 라고 말이다.  이대목에서는 우리 역사속의 청산리 전투가 떠오른다.

  그제서야 영국은 국제사회를 향해 이 사태를 잔인한 학살이라고 규탄했다.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살인과 방화와 양탈을 감행한 정규군대에 대항해서 침량당한 국가의 독립군이 정당한 전투를 벌여서 벌어진 사태를 이번엔 살륙이라고 규정했다.  영국이나 미국의 침량전쟁은 늘 정당한 전쟁이고,  거기에서 파생된 만행들은 전쟁에 수반되는 부득이한 사건일 뿐이라면서,  약소국의 저항은 늘 비열한 살륙이 아니면 테러라는 판단의 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인가?

  충격에 빠졌던 영국은 즉시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동인도 회사 소속의 용병들까지 합세하여 보복전쟁을 감행한다.  다시 카불로 쳐들어가서 이번엔 그레이트 바자(시장)을 에워싸고 출구를 봉쇄한 후에 불을 질러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물러나왔다.  이것이야 말로 막장 테러리스트의 끝판왕이 아니겠는가?  스포츠에서도 반칙에는 카드가 나오지만,  보복성에 대해서는 즉시 레드카드가 적용된다.  군대간에 벌어진 전면전의 패배를 빌미로 민간인을 가둬놓고 불을질러 확살하는 것으로 보복하는 행위야말로 테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게 비무장인 상태로 죽어가는 형제와 부모를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다른 가족들에게 장차 무엇이 남겠는가?

  이런 천인공로할 만행 앞에서 아프간 사람들은 더욱 분노했고 하나로 단합했다.  이제까지 보다도 더 극렬하게 무장투쟁을 벌여나갔다.  치열한 전투를 끝낸 아프간군은 북부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하지만 영국군은 끝까지 뒤쫓을 수가 없었다.  하디만 아프간군은 아무때고 산을 내려와 또다시 불쑥불쑥 나타나 게릴라전을 펼쳤다.  영국군의 피해는 점점 커져만 갔는데 어디에서도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영국군 지도부는 머리를 감쌌다.  도대체 이렇게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망막한 전쟁을 언제까지 왜 지속해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어 여기가지 오게되었는지 조차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제서야 왜 아프가니스탄을 '강대국의 무덤' 이라고 했는지 되돌아 보게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자신들이 제단에 희생제물로 이름이 새겨진 다음이었다.

  영국이 그렇게 비참하게 물러갔음에도, 이어서 또 다른 유럽의 열강들이 계속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노리고 침공을 반복하였으나 어느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그레이트 게임으로 대변되는 러시아의 남하는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 헤매는 틈을타고 비교적 수월하게 중아아시아 지역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을 차지해 버렸다.  이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될때까지 계속 유지된다.

 

 

 

 

 

 

 

 

 

 

영국.인도 연합군  16.500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생존자인 영국군 군의관 윌리엄.

 

 

 

 

 

 

 

  오랜 나의 경험에서 우러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자면,  왜 독재자나 급진적 개혁주체자들은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 먼저 타락하고 자기합리화에만 몰두해 극단의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드는지를 나는 알지도 못하겠고 이해하지도 못하겠다는 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비젼과 개혁에 힘입어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오히려 수 십년 혹은 수 백년 전으로 퇴보하는지를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인은 분명 유럽의 백인이 아니다.

  인종학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생겨나고 성장한 아랍민족 중의 하나이다.  당연히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인이나 시리아인이나 터키인과 닯았다.  인종도 풍습도 생활방식도 아랍지역의 유목민들과 닮았다.  그런 그들에게 터다란 축복이 있었으니.........  창조주이시며 유일신인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예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로 온갖 고난을 헤쳐냈고  마침내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파생되고 생겨난 수많은 사건이나 불합리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끝내 가나안을 차지한 그들은 엄연한 승리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배경엔 절대적인 창조주의 특별한 혜택들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세상사가 그냥 마냥 이대로 흘러갔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날 뜬금없이 메시아 라는 사람이 홀연히 이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예수였으며.......... (이대목에서 꼭 등장해 해명을 해야만 하는 '삼위일체설'은 어찌되었건 생략하기로)  유대인만을 사랑하시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이제부터는 모든 인류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겠다는 가히 혁명적인 공약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국가.민족.인종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형평에 맞게 헤택을 나누거 주시겠다는 거룩한 약속이었다.  

  유대인 입장에서야 느닷없는 하나님의 계약 파기로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내려졌던 창조주의 엄청난 축복이,  하루아침에 온 세상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고르고 균등하도록 배당되어야 하는 1/n 이라는 새로운 규정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자필로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내리셨듯이  새로운 규정에도 그렇게 성스러운 이벤트를 벌이셨으면 문제가 없었겠는데,  이 모든 규정이 허접한 뜨내기와 같아 보이는 어설픈, 스스로 구세주를 자칭하고 다니는 한 사람의 입에서 모두 뱉어진 말이라는데에서 모든 사태의 발단에 빌미가 제공된 것이다.  나라도 당장 그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다니는자를 고발했을 것이다.  내가 가진 등기권리증에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서명날인과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있는데,  지금 그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 위임장도 없이 이전의 계약이 모두 무효라고 주장하는 꼴이 아닌가 말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법률과 상식과 양심에 따라 예수를 세속의 법정에 고발했다.  정해진 법률을 통해 온 세상을 다스리던 로마는 정해진 법률에 기준해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하루아침에 전재산을 날리게된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 사태의 빌미를 제공한 예수를 사기죄로 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로마는 정해진 규정과 법률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형 집행은 어찌되었건 이루어졌다.  이는 어디까지나 로마가 점령한 식민지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날 그 상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야기가 사형을 집행해야만 했던 로마까지를 포함하는 거대한 종교로 발전하게된 것이다.  그 종교의 헤택을 커다랗게 누리던 로마는,  지난 과오의 책임을(구세주를 십자가형에 처한) 해소시킬 속죄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거룩한 명분을 내세워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저주하고 지구상에서 제거하기 위한 성스러운 과업에 돌입한다.  그런데 이들을 죽이고 또 죽여도 여전히 이들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은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하기에 이른것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이(로마가 차차 백인 유럽사회로 변모)  무슨 권리와 자격으로 유대인을 이토록 핍박하느냐고 따지고 든다.

  하나님의 세상은 과거에 유대인 독점 지주회사였다가 시대가 변해서 1/n 의 자본주의 주식회사로 공개오픈 되었는데........  공개 오픈에는 분명 국가. 민족.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었음에도.........  서구의 백인유럽사회는 공개된 주식의 적어도 51%를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자본주의적 권리와 제도에 힘입어 자유시장경제가 인정하는 독점적 우위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 결과는......  100%의 권리를 가졌던 유대인 보다도  51%를 가지고 전권을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서구유럽의 횡포가 더욱 잔혹하다는데 모든 문제가 있는 것이다. 

  더하여,  그런 그들에게 어떻게든 눈높이를 맞추어 호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갖은 표정과 포즈로 아부를 떨고있는,  우리 같은 약소국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기득권을 넘어 창조주의 특별한 특혜를 받고있다고 자랑하는 서구열강은 무차별로 자주권도 변변히 행사하지 못하는 약속국들을 침범해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 횡포에 따른 약소국의 반발과 저항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독일군과 유럽의 열강이 실제로 자행했던 것처럼)  함께 거사를 벌였던 뭇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지리멸렬하자 나지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해 버리는 2차대전 말기에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함께 세계정복을 꿈꾸었던 이탈리아인들이 이번엔 나찌 독일을 향해 독립운동을 벌이게 된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일군 1명이 죽게되면  무차별로 이탈리아인 10명을 무작위로 착출하여 공개 처형하는 보복이 가해졌다.  이는 프랑스에서도 그리고 세게 도처에서 흔하게 자행되는 극단적 폐해의 하나였을 뿐이다.  남의 나라를 무대뽀로 쳐들어간 침략군의 행태는 성스런 전쟁행위이며  그들의 생명은 위대한 군인이고,  피해당사국의 선량한 시민은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무방한 기생충이란 말인가?  그런 그들의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은 인륜적 범죄이며 잔악한 테러행위란 말인가?

  그랬던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지금 하나가 되어서  지금 중동에서........  전혀 다를것이 없는 패륜적인 만행을 자행하고 있는것이 (중동 사태)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쯤에서도 아직까지 테러와 전쟁을....... 좀 더  나아가 무엇이 진정 악(惡) 이며, 누가 진정한 테러리스트인지를 헷갈리는 분이 있다면,  나는 다음의 질문을 그런분들에게  드리고 싶다.

  아래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잘 살펴보시라고.........  그들은 과연 나라를 되찾기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인가,  아니면 저들이 말하는 테러리스트인가?

  나는 확실한 답변을 듣고 싶다.

 

 

 

 

 

 

 

  일제의 침략 앞에 자유민주주의 수복을 위하여 투신하신 구국 선열들이신 이분들을 일제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이 사실 앞에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외세의 무단침략 앞에서 피해당사국은 최소한의 저항에서 시작한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벌이는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정통성의 시작이기도한 상해임시정부 소속 광복군 일원으로 침략전쟁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을 벌인것이다.  군인의 신분으로 전쟁을 수행한것임으로 군사법정에 세워달라고 한 요구를 일본은 거절하고 민간법정에서 테러범으로 형을 집행했다.  강대국과 침략정부는 늘 이런식으로 처신해 왔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그리고 중국인의 상당수와 극동지방에 사는 일부의 러시아인들은 이분들의 숭고한 독립투쟁 정신을 기리고 추모한다.  그분들은 분명 자유민주주의의 독립을 지키고자한 의로운 분들이지,  거짓된 명분으로 남을 위해하려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도 이분들을 모두 테러리스트 라고 규정짓고 규탄한다.  자신들의 침략정쟁은 모든 아시아의 평화달성을 위해 거룩한 명분으로 벌인 헌신적 행위였으며,  약소국의 저항과 투쟁은 모두 테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미국이나 영국을 포함하는 서구가 내세우는 명분이랑 상황이 저렇게도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긴,  열강의 식민지 침략전쟁에 유럽의 백인세계가 아닌 처지로 유일하게 참가한 강대국의 끄트머리에 일본이 포함되니 그럴수 밖에........

 

 

 

 

 

  일본인들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를 아시아의 대표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절대적 경제공동체를 이루거나  일본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동남아시아 국가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주장만을 믿고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이나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서 잘 알지못한다.  하지만,  일본이 내세우는 근거인  권총으로 암살하고,  슈류탄을 투척하고,  제조한 도시락 폭탄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분들을 테러리스트 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인류 평화를 수호하는 정의의 수호신 미국은 이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프랑스 등은 절대로 이분들이 테러리스트냐 아니냐에 절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괜한 답변에 혹시나 자신들의 지난 치부가 줄줄이 딸려나올까바  그런 질문 자체를 극구 회피한다.  미국에게 한국은 북한이나 중국과의 안보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이고,  일본은 미국중심의 경제공동체를 꾸려나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라이다.  진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독립운동가들이 테러리스트냐 아니냐는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관계하고 싶지도 않은 사안이다.  그 사안의 진실 규명에도 아예 관심조차 없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국가들이 대부분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냐 아니냐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고 관심분야도 아닌것이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거나 크게 해를 끼치는 사안에만 반응을 하는 것이다.

  중동에 분쟁이 생기면 석유값이 치솟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미국이 앞장서서 중동문제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잘 다스려주기만을 바란다.  북한의 핵 위협은 세계 정치정세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여 미국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북한을 잘 통제하거나 아니면 침략 제거를 해서라도 안전하게만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  정의니 국제법이니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다.  미국이 알아서 지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서 알아서 처리해 줄터이니 말이다.

  늘 이런식이다.  그러다보니 강대국은 늘 크게 당당하게 탐욕스런 사태를 조장하고 야욕을 채워 나간다.  약소국들은 이를 모른척 외면한다.  자신이 그 야욕의 직접적인 희생제물이 되기전까지는 말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프랑스 대혁명)은 사실 실패한 혁명이다.

  역사학자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성공한 쿠데타는 거룩한 혁명이 되고  실패한 쿠데타는 테러로 지탄의 대상이 된다' 라고 했던 기준으로 보자면 '자유. 평등. 박애' 라는 민주주의 이상적 개념을 남겼을 뿐,  정작 프랑스 혁명 자체는 실패했거나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역효과를 나았다고해야 맞을 것이다.

  루이 16세가 다스리던 프랑스는 분명 왕정국가였다.  라이벌인 영국 또한 엘리자베스 1세라는 강철여제가 다스리는 왕정국가였다.  이런 두 나라가 아메리카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열하게 벌였던 것이다.  영국이 압도적 승리를 거머쥐었고 프랑스는 카나다 지역으로 도망쳤다.  이런 와중에 오래전부터 식민지에서 살아왔던 토착영국인들이 왕정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강압적인 왕정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로운 공화국을 만들고자 했다.  영국은 이들을 불순한 내부적 반란자들이라 규정했고,  토착영국인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독립운동이라고 선언했다.  이들 사이에 남은것은 폭력을 동반한 처절한 전쟁뿐이었다.

  이제까지의 역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희대의 사태를 맞이하여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가 신대륙의 독립군대를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으로 뒷바침을 해준 것이다.  오늘날 까지도 이 시기의 프랑스에 태도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영국이 왕정의 정통성을 잃게된다면,  당연히 프랑스 왕정도 위협을 받게될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신대륙 독립정부는 왕정을 부정하며 공화정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랑스 왕은  신대륙의 독립정부를 지나칠 정도로 적극 후원하였다.  이유라면 라이벌인 영국이 신대륙에서까지 승리했다고 나대는 꼴을 보기 싫어서라는 이유 뿐이었을 것이다.

  영국은 이 전쟁에서 져서 철수하였고,  이제 신대륙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새로 건국되었다.

  그렇다면 정작 프랑스의 루이 왕조는 신대륙 전쟁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왕비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너무도 적극적이자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공로로 단두대를 선물로 받았다.  전쟁비용을 대주고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지어주다보니 정작 루이왕조의 금고가 텅 비게되었던 것이다.  극심한 자연재해까지 겹친 프랑스 백성들은 굶주림에 거리로 뛰쳐나왔고,  바른 소리를 외치던 민주인사들이 갇혀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불을 질렀다.  공권력을 상실한 허울뿐인 왕정을 뒤집고 왕과 왕비를 끌어다가 광장에서 단두대에 세웠다.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왕정을 공개처형 시켜 버렸다.

  인류 최초의 민중혁명이 성공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은 거룩한 성공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 라는 이념을 성취시켜줄 공화정부를 원했다.  하여 왕정의 압제속에서도 끊임없이 개혁을 외쳐왔던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들을 찾아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줄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한동안 정치뉴스 시간마다 대하다보니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그런  상황이 당시에도 벌어졌던 것이다.  왜 개혁을 부르짖고 그럴싸하게 미래를 잘 포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독재자들과 비슷한 이분법적인 사고와 시선과 가치판단으로 똘똘뭉친사람들일까 하는 역사적으로 영원한 과제와도 같은 질문을 또 반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겉은 멀쩡한 개혁가인데 속은 온통 짝퉁 독재자와 다를바가 없는가 말이다.

  수많은 진보적 개혁가들이 등장했다.  민중은 그들에게 막대한 힘과 금전적 밑천을 쥐어 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허락된 아주 특별한 공간에 모여서 프랑스가 직면한 문제나 미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지분의 권한을 가질것이가에만 혈안이 되어 그 안에서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통해 또다른 지옥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와 정의와 미래는 오로지 자신만의 절대권력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그동안의 개혁과 진보주의자였던 가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은 좌절했다.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서 쟁취한 혁명이었던가?

  도대체 개혁이란것이 살제로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권력의 자리에만 오르면 저들처럼 하루아침에 모조리 변절자가 된단 말인가?  민중은 생존을 논하고  선택된 개혁가들은 어느새 제 잇속 챙기기에만 여념이 없다.

  민중은 이제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면서도 엄격하고 준엄한 새로운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중이 그를 찾아내기도 전에  아주 특별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 프랑스를 접수해 버렸다.  이내 그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을 넘어 세계를 접수하고자 나섰다.  역사는 그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라고 기억한다.

  속된 표현으로 '쓰레기차 피하려다가 똥차에 치인'꼴이 바로 프랑스 민중이었다.

  왕정의 폭정에 못이겨 피를 흘려 혁명을 일으켰고 개혁을 추진했는데,  무늬만 개혁가인 사람들에 의해 거듭 혼란만 야기시키다가 끝내는  왕정보다 더 지독한 독재자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형국에 직면하고만 것이다.  어찌 아니겠는가?  거창한 명분으로 군대를 앞세워 대중앞에 나선 선동가들을 모두 일망타진 시키고  나폴레옹 스스로 새로운 왕정을 열고 황제에 까지 오르게되니 말이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들어서 잠시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쟁은 소강사태에 접어들게 된다.  열강들이 약소국을 잡아먹겠다고 침략하기 이전에 당장,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모든 열강을 잡아먹겠다고 연일 전쟁을 벌였으니 말이다.  러시아까지를 포함하는 유럽 전지역과 소아시아 일부와 이집트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화염에 휩싸였다.  한 나라가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을 상대로 초토화 전쟁을 일으킨적이 없었다.  유럽은.......  가히 온 세상이 전쟁터였으며,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폴레옹은 떠나갔고  유럽은 참혹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열강들은 우선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국의 피해를 수습하고 추스리기에 급급했다.  강대국들의 처지가 이러했을지경인데,  강제로 강대국들간의 전쟁에 동원되거나 끼어들게된 약소국들의 처지는 어떠했겠는가?

  그것도 잠시........  자신을 어느정도 추스르고난 강대국들은 그간의 막대한 피해를 약소국들로부터 빼앗아 채우기 위하여 또다시 식민지 강탈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는 과정에서 알제리에 사는 두 유대인 집안이 프랑스 군대에게 800만 프랑어치의 곡식을 판매했다.  상인과 국가의 공식적인 거래였다.  이집트 전쟁을 마치는대로 대금을 지급하겠다고 증서에 나폴레옹이 직접 서명까지 했다.  프랑스는 이집트에서 패해 달아났다.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새로운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다.  유대 상인은 계속 상환을 요구했으나 프랑스는 계속 회피했다.  당시 알제리는 분명한 오스만투르크의 영역이었기에 참다못한 유대상인은 알제리 주재 오스만 총독에게 해결을 의뢰했다.  총독은 프랑스 영사 피에르 듀발을 소환했다.  총독은 프랑스가 채무를 상환해 줄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러자 프랑스 영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프랑스는 이런 사소한 문제로 오스만과 돈 문제를 논하는 것을 정당한 처사라고 생각치 않는다'는 엉뚱한 궤변을 늘어 놓는다.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던 끝에 총독이 손에 들려있던 파리채로 프랑스 영사의 뺨을 때렸다.

  이 사건이 프랑스 언론에 보도 되었다.  프랑스 정부의  채무불이행 부분은 쏙 빠졌고  프랑스의 명예를 짓밟은 총독의 파리채 질만이 집중 조명되었다.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즉각 프랑스는 군대를 몰고 알제리를 침공했다.  그리고 명예훼손에 대한 무한의 책임을 물어서 1억 프랑을 배상 받게된다.  800만 프랑을 지급하지 않아 생긴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라는 국가가 단숨에 12배가 넘는 1억 프랑을 갈취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다시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본격적으로 다시 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과 더불어 다시 가장 치열하게 약탈전쟁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쟁이 계속되고 약소국에 대한 수탈이 거듭되자,  마침내 이슬람 세계 안에서도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슬람(Islam)을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접근방식으로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의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활 여건에 적응하며 나름 만족하면서 살고있듯이,  무슬림 또한 그들의 세상 속에서 아무런 불편없이 그들 방식으로 추구하는 저마다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가는 같은 소중한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다름을 지적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배려하려 노력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되고 나아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어찌되었건 그간 가지게된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과  서구의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심어준 그럿된 사관을 벗어던지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이슬람과 조우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가?  그것은 이제 겨우 시작의 기로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 머리속에는 서구 제국주의가 포장해 놓은 부정적인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이 가득 들어차 있다고 보인다.  부디 그런 그릇된 사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가치관에 준하여 직접적으로 그들을 대하고 교류하고 나누면서  충분히 서로를 알아 본 후에 어떤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숙한 지성이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만 하는 덕목인 것이다.

  나는 당당한 한국인이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모든 인류가 행복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어느날 한 무슬림을 만났는데 다짜고짜 '테러리스트. 나쁜 테러리스트의 후예' 라고 삿대질을 해 온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알고보니 그 무슬림의 곁에 오랫동안 일본 극우단체 관계자가 머물면서 '윤봉길은 테러리스트.  당신도 한국인이고 같은 윤씨의 후에니까 나쁜 테러리스트' 라고 한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해외에 나가보면 그런 오해를 넘어 그런 그릇된 편견을 가끔 경험하고는 한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닐뿐더러,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크게 자부심을 느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처럼.......  당신이 생각하고 마주하게되는 무슬림 또한 테러리스트가 아닐뿐더러 나와 똑같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 또한 창조주의 사랑으로 빚어져 탄생한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좀 더 해나가 보기로 하자.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창시한 모하메드 자신이 메카와 다마스쿠스 사이를 오가는 상인(隊商,Caravan)이었다는 사실은  둘 사이에 상업이라는 아주 긴밀한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기도가 끝나면 흩어져서 알라의 은혜를 구하라,  그리하면 번영하리라' 라고 코란 62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기독교 성경에 기록된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하라'라는 말씀과 비슷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다.

  후대의 역사를 면밀하게 검토하다보면 이 말씀들에 함축되어 있는 가르침대로 중세의 상업이 모두 아름답고 합리적이면서 평화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쉽게 여러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겉으로 드러난 평화적인 교역의 이면에  수없이 많은 무력을 통한 약탈의 역사가 곳곳에 얼룩져 있는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영국이 자행한 아편전쟁이나,  21세기에 미국이 자행하고 있는 자원전쟁(석유)이 극단적이 예라 하겠으며,  아마도 이런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한 계속 반복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슬람에 대하여 나름 공부를 하던중에 정치학자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라는 월간중앙의 연재를 열심히 읽은 적이 있다.  '자유 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 라는 부제가 붙은 박사님의 기고문 중에서 이슬람 문화와 경제 분야에 대한 내용은 적지않게 나에게 큰 공부가 되었다.  내 오래된 메모장에는 '부국굴기'를 읽으며 함께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요약해 놓은 메모가 제법 된다.  수북히 쌓였던 월간지들이 이사하면서 모두 없어진 뒤라,  낡은 메모장을 뒤적거려 보면서 '부국굴기'를 공부하던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이슬람에 대해 좀 더 다가가 보기로 하자. 

 

 

  21 세기를 살아가면서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이슬람 세계를  그때그때 벌어지는 사건에만 투영해서 살펴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우리의 의식속에는 이미 상당부분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의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우리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종교와 가치관과 환경과 문화에 속해있는 현실에서는 다소 동떨어진 이질적인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부와 성공을 목표로 살아가는 우리를 포함하는 대다수 현대인들 입장에서,  지나치게 전통적이며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며 부족 중심적인 다소 폐쇄적으로까지 여겨지는 이슬람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 싶은 생각을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다.

  거기에다 뉴스에 등장하는 이슬람 국가들을 보노라면, 작금의 시대가 분명 최첨단의 21 세기 임에도 여전히  중세 봉건시대적인 왕실과 왕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나마 현대를 지향했다는 일부국가들도 수십년 전에 이미 끝났거나 사라진 역사에나 등장하는 부패한 군부의 권위주의적인 독재와 반인권적이며 반민주주의적인 행태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나 70년대 군부독재 시대도 아닌 21세기에 말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이슬람 세계와  이슬람이 번져가고 있는 아프리카나 세계 도처의 극빈국에서만 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인류와 문화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분명 살아서 꿈틀대는 생명체다.

  세상은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생활도 문화도 과확도.......  심지어는 종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닫히고 열린것의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환경과 사회가 역동적일 수록  발전적이며 흔히 잘 사는 나라가 되어 간다.  물론 '잘 산다는 것'과 '살의 질과 행복도'가 꼭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는 요지부동이거나 오히려 뒷걸음 치는것으로 보여지기 일쑤다.  이슬람이 가졌던 중세의 역동성과 개방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무지 21 세기형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굳건한 폐쇄성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어쩌면 이런 우려가 다분히 주관적인 나만의 오해나 편견일 수도 있다.  부디 그러하기를 바랄 뿐이다.

  중세의 이슬람은 역동적이며 완전 개방형이었다.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슬람은 대상들이 교역을 위해 오가던 길 위에서 시작되었다.

  교역로를 통해 오고가는 수많은 민족이 오가면서  그 민족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던 유대교. 힌두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 신앙을 비롯한 페르시아 지역의 다신교. 이집트의 고대 종교 등이 함께 대상들의 짐보따리에 실려서 오고 갔다.  사막을 건너다니는 카라반의 생활 자체가 늘 고난과 위험의 연속이었다.  그런만큼 대상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신앙 행위는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었다.  신께서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게 이끌어 주시고, 도적들로부터 피하게 해주시며,  많은 이익을 남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여정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종교의 주체자가 대상이었고,  또한 대상들의 교역로를 따라 새로운 종교가 퍼져 나갔다.  시장의 열린 사회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열려진 자유로운 상황에서라야 제대로 거래가 이루어 진다.  억압이나 강요가 동반되면 한 번의 거래는 혹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시장은 형성되지 않는다.  이슬람이 아랍지역에 정착하여 사방으로 멀리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을때도,  여전히 모든것은 교역로와 자유무역이라는 시장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만큼 당연히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가 완전히 열려있었던 것이다.

  종교와 민족과 문화와 인종까지를 포함해 자유롭게 열린 사회였다.

  타종교를 비방하고 배교를 강요하고 탄압을 일삼고 내쫓다 못해 이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한것은 오히려 서구의 기독교였다.  기독교의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을 통해서 죽어나간 다른 종교인들을 다 헤아리기란  현대수학으로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교도 뿐이었는가?  이교도의 기준이 무엇인가?  서구의 기독교는 수많은 유대인과 동방정교회 사람들도 차주 처참하게 집단 살륙을 자행했다.  똑같이  같은 하나님의 줄기에서 파생된 사촌지간이었으면서도 말이다.  이슬람 역시 같은 하나님의 줄기에서 나온 종교임에도 무슨 철천지 원수처럼 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슬람은 모든 종교를 허용했다. '참된 종교란 타인에게 배교를 강요해서는 안된다'라고 코란에 기록까지 해 놓았다.  모든 이슬람 권역에서는 누구나 세금(종교세)만 내면은 모든 종교와 활동을 자유롭게 허락 받을 수 있었다.  그 종교세가  서구 기독교가 자신들의 신자들에게서 거두어가는 종교세에 비하여 훨씬 적게 부과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종교세는 면제되겠으나,  모든 이슬람 신자들에게는 의무적인 사회기부금이 적용되는데,  그 기부금액이 종교세 보다도 높았다.  세금 때문이라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것 보다도  본래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는것이 유익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교회가 거둬들이는 종교세 보다도,  이슬람의 종교세가 훨씬 적었다.  거기에다 타종교인은 다른 모든 세금과 부역이나 의무에서 완전 면제였다.  그런 열린사회 지향이 아랍을 벗어난 여러지역의 민족과 국가들이 앞다투어 스스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게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손에 코란,  다른 한 손엔 칼' 이라는 서구의 주장은,  이렇게 벌어진 현실을 거꾸로 빗대어 서구의 교회를 합리화하고 이슬람을 폄하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며낸,  내가 '성장기에 들었던 가장 위대한 거짓말' 이었다.

  '서구의 역사는 침략전쟁을 통한 약탈과 노예 제도 위에서 만들어졌다' 라는 말을 나는 백 번 인정한다.

  그리이스와 로마의 유산 모두가 약탈과 노예들에 의해서 찬란하게 건설되었다.  대항해 시대를 맞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는 이내 신종사업에 뛰어들어 노예 시장(노예 무역)을 개척했다.  초강대국 미국의 역사는 아프리카 노예들에 의한 목화산업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이름이 바로 '서구열강(西區熱强)인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침략전쟁과 노예(자원 약탈. 시장경제 횡포)를 통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유대인들에게 장부정리와 수요와 공급을 파악하는 업무를 주로 맡겼다.  흑인들을 노예가 아닌 용병으로, 또는 상단이나 창고를 지키거나 운송 담당자로 주요 등용했다.  하여 우리나라 고려시대 벽란도에는 아랍인들이 많이 드나들면서 별도의 거주지가 생겨나기까지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이 아랍인이었던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시대에 이미 아랍인들과 왕성하게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어디에서도 이슬람교를 강요하면서 생겨난 불화나 싸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훗날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입한 기독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프랑스)의 침략자들에 비하자면...........  누가 강도이며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종교도 민족도 인종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자유 시장경제를 추구한 것은 이슬람 이었다.

  여담을 잠깐만 해 보기로 하자.

  서구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아들로의 탄생과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역사로 인해서 탄생한 종교이다.  이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성스러운 의미가 퇴색된다면 존립할 수 없는 종교이다.

  그런 서구의 기독교(로마 카톨릭)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증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게끔 한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라고 서구의 기독교인들은 생각하고 판단한다.  죄 없으신 분을 죄를 씌어서 로마의 법정에 세워 죽게만든 사람들이 바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형을 집행한 사람은 분명 로마의 군인이니까 로마인이겠지만,  원죄는 유대인이 지었고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글쎄다.  과연 그럴까?

  성서에 기록된 바로 우선 살펴보자.  예수는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이유가 부활의 역사를 실행에 옮기고 증명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그 스스로 늙어서 자연사한 후에 부활하는것이 아니라,  모진 핍박을 받은 후에 십자게에 못박혀 죽으시면서도 가해자를 포함한 모두를 용서하고 화해를 당부하는,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없을 거대한 프로젝트를 스스로 각본에 각색에 연출까지 도맡아 직접 하신분인 것이다.  조금만 뒤집어 보면......  유대인이 없었다면.........  밀고가 없었으면 체포와 재판도 없었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도 없게되는 것이다.  부활의 역사가 없게되면.......  기독교는 정통성을 상실한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유대인의 밀고정신이야 말로 지대한 공로가 아니겠는가?

  이 대목을 n.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아주아주 적나라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속된말로 허구헌날 젤론당원인 유다를 찾아가서 사정하고 또 사정한다.  이제 때가 이르렀음에 예수가 가진 거대한 프로젝트에 따라서  핍박을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여야만 하는데.......  그 프로젝트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열쇠인,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지도록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예수는 유다에게 자신을 밀고하여 줄것을 요청하고 또 요청한다.  유다가 오히려 '왜 하필 그 악역을 내가 해야하느냐'고 거절하고 또 거절한다.  이렇게 보자면 유다야 말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높은곳에 올라야 하는 성인이 아닐까?  '예수의 역사'는 유다의 절대적 희생과 헌신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의 국가를 멸망시킨것도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로마제국인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도시를 파괴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세계도처로 유랑(디아스포라)하게 만든 사람이 로마인이다.  예루살렘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로마인들이 벌인 사태이며,  그런 로마는 분명 서구 백인사회의 뿌리이자 정통성이 되었다.  유대인들을 탄압하고 학살하고 유량인으로 만든 것은 모두 서구의 기독교인 것이다.  중세시대,  유럽의 기독교인들에 의한 유대인의 탄압은 결코 그칠줄을 몰랐다.   유럽의 도시마다 게토(Ghetto)가 설치되었다.  도시 외곽의 빈민가에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아주 특별한 분리구역이 탄생한 것이다.  이 구역을 만든 사람들은 역시 서구의 기독교 였으며,  이곳에 거주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모든 유대인의 직업을 통제했다.  서구 유럽사회의 백인들이 가지는 직업적 자유와 선택권을 모두 박탈했다.  기독교(교회)에 있어서 유대인은 이교도이자 야만인이자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함부로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함부로 나돌아 다닐수도 없었다.  낮에 어디가서 심부름이나 구걸을 한다해도 밤이되면 반듯이 게토로 돌아가야만 했다.  감옥이나 수용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어디든 마음대로 떠돌아다닐 권한을 가진 떠돌이 유랑자 집단 짚시가 부러웠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천시하고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아서 그나마 겨우 목숨을 유지해야만 했다.  중세 유럽사회에서 유대인들이 천직으로 생각한것이 백정이었다.  도축업자인 것이다.  백인들의 식생활에 중요한 모든 고기는 유대인 손에 의해서 조달되었다.  그러다보니 거기에서 파생된 소시지 등의 가공업을 생각해 냈고,  온갖 가죽을 이용한 피혁제품이 유대인들의 중요 생활대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성실 근면했으며  무엇보다도 정직했다.  그들에게 정직과 신용은 거룩한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유럽의 기독교 상인들의 거래소에서 장부정리를 하고 재정을 관리하는 분야로 점차 유대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돈놀이(금전 대부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성경의 십계명에는 남의것을 탐하는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있지만,  장사를 비롯한 직업 선택권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새로운 분야로 관심을 돌렸는데......  도축업이나  피혁장사를 통해 들어 온 돈을 억척스럽게 모았다가,  이를 종자돈으로 백인들에게 빌려주면서 이자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을 불려나가는 재주가 유독 유대인들이 가진 탁월한 재주였다.  점차 유대인들은 서구유럽의 기독교 사회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거대한 자금줄을 가진 금융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림자 경제의 실체이자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뉴욕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의 절대적 영향력이 유대인에게 저어져 있는것이 냉엄한 현실이며,  이 영향력의 뿌리가 바로 중세 유럽의 게토에 살았던 유대인 조상들이었던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제권이나 금전적 영향력을 제재하려다가는 오히려 백인들의 유럽사회가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반감이 고스란히 깊게 배어있는 것이 유럽백인사회의 '유대인의 경제력에 대한 박탈감'으로 커져만 갔고,  결국 나찌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서 '아우슈비츠 민족 대학살'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20 세기에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도 안되는 참혹한 비극을 만들어 낸 사람들도 또한 서구 유럽의 백인 기독교사회였다.

  동양인이나 아랍인이나 남미에 사는 사람들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은원도 없었던 것이다.

  모든것이 서구의 백인사회가.......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시작하고 저지른 추악한 역사일 뿐인것이다.

  20세기에 즈음해서 세상은 변했다. 인간의 가치관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서구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쬐끔씩 쬐끔씩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악행들에 대해서 미안해 지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이 자부심 중에 하나로 고집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서 등장한 '자유. 평등. 박애'를 전면에 내세우고 시대를 앞서가는 선진 시민임을 목청껏 외치자니,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을 그렇게 탄압하고 박해하고 민족적 대학살까지 감행했던 서구유럽인들에게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었는지  유대인들을 달래지 않고는 아무리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쳐본들........  '우리는 지난 여름에 네가 행한 일을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의 유대인들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서구유럽의 백인 중심의 기독교 사회는...... 검은 완장을 차고 군화발로 짖밟으면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가스실로 끌고가던 나찌 군인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앞세우고 흡사 성녀 마더 테레사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그동안의 비참한 역사가 기록된 서류보따리를 하나씩 안고서 뻔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구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달래야만 했다.  보상과 배상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유럽의 기독교 대표들이 슬며시 유대인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간의 비극적인 과거는 모두 뭍어버리고 이제부터는 함께 희망을 향해 나아가자.  그간의 그릇됨을 사과하는 의미로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성서에 기록된 바 대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대 국가를 세우고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모두 모여서 살고 싶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염원이자 과제이다.'

  '그럼 그렇게 해 줄터이니.......  그럼 이제부터 우리 사이에 지난 과거는 모두 잊기로 할 수 있겠느냐?'

  '용서와 화해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니 모두 그렇게 될것이다.'

  오로지........  순전히.........  그동안 서구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지은 죄를 일시불로 상환하는 방편으로 생겨난 상황인 것이다.  가해자인 서구유럽의 기독교 사회가 피해자인 유대인들을 위해 바상하는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이스라엘의 탄생'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유대인과 서구 기독교인 사이에 합의에 의해서 등장하는 땅(팔레스타인)이 유럽의 소유 토지가 아니라는데 있는 것이다.  유럽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들에게 땅으로 갚고자 했다면,  당연히 유럽 어딘가의 자기 영토를 할애했어야 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주기로 했다면,  유럽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사서 주든가, 아니면 어디 다른곳을 매입해 대토(토지 교환)라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  팔레스타인을 주기로 했으니까  이제부터 거기는 너희 유대인들 꺼야.  가서 살어.'  라고 해버리면........  이미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이끄심대로 광야에서 40년을 헤맨끝에 요단강 건너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도 그곳엔 이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모두 내쫓고 무대포로 그 땅을 차지했던 것이다.  권리 증명서는 터무니 없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고 약속하셨다'가 전부였다.  이미 그 땅에 살고있던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면.......  나름 상황이 좀 달라지겠지만,  밑도 끝도 없이 느닷없이 쳐들어와서는 '우리 조상님께서 여기가 우리꺼라고 하셨으니 이제부턴 모두 내 땅이야' 라고 한다면  그게 어디 말이 되겠는가?

  아무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무형의 권리증서를 앞세우고 유대인들은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쫓아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알바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난데없이 로마군대가 쳐들어 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유대의 군대도 로마 앞에서는 쨉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로마가 유대땅을 정복하고 차지해 버렸다.  유대인들은 수백년에 걸쳐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 저항이란것이 무력투쟁이었으며,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게릴라전이었다.  좀 더 현대적인 표현을 쓴다면.........  로마를 대상으로 저지른 무차별 테러였다.  역사에 기록된 대부분의 상황들이 분명 테러였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도 유대인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스러운 독립투쟁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중적 잣대 또한 서구인들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2차 예루살렘 전쟁의 유대인 총사령관이었던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아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유대 정항군이 택한 전술 자체가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 전이었으며  로마군을 기습해 이룩한 성과 모두가 테러를 통한 것이었음을 고스란히 나타내 보여준다.  자신들의 싸움은 정당한 전쟁이고,  타인의 싸움은 모두 부당한 테러라는 인식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유대는 멸망했고  유대인은 세계 도처로 뿔뿔히 흩어지는 유랑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이 떠나 무주공산에 본래의 주인이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대인들의 땅 등기권리증은 가짜였단 말인가?   혹 하나님에게서 전세나 삭월세를 얻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땅을 도로 거둬서 팔레스탄인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라고 나는 판단된다,  그게 정의일 테니까 말이다.

  그후로 다시 2천 년이 흐른 마당에.......  2천년 동안 온갖 못된짓은 서구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저질러 놓고,  은근슬쩍 유대인들의 상처를 달래고자 꺼낸것이 턱하니 '팔레스타인 땅으로의 귀환' 이라니.......

  이번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서구유럽의 백인기독교인들의 뜻이라니.......

  '내가 실수로 누군가의 집을 불태우게 되었고.......  그 배상으로 느닷없이 청와대 별관을 대신 가져라' 라고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일이고  정당한 일일까?  이쪽이나 저쪽이나 상식과 양심을 가진 인간이란 존재라면 그런 거래가 과연 성립될 수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유대인과 서구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거래가 진짜로 일어났고 성립을 시켰던 것이다.  그 거래가 지극히 당연한 합법적인 처사였다고 UN(국제 연합)이 등장해 등기 권리증까지 발행해 줬던 것이다.

  그곳에 살고 있던 원래 주인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항의했고 국제법에 호소했다.  그러자 서구 기독교 세력에 달라붙은 국제사회(UN)는 또 이렇게 답했다.

  '팔레스타인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판단해 볼테이니 일단은 기다려.  그때까지 어떻게든 너희들끼리 잘 어울리며 어떻게든 싸우지 말고 살아봐.'  그러면서 벌써 70년 이상을 기다리라고만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둘 사이에 분쟁과 싸움이 이어졌다.  유대인은 초일류 강대국 미국의 전폭적 지원아래 늘 정당한 방법으로 전쟁을 통해 이를 해결해 나가고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늘 부당하게 분쟁과 테러를 일삼고 있다고 UN은 판단하고 결정해 버린다.  

  '정의(正義)란 무엇일까?'

  난 도무지 모르겠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 곧 정의'라는 개념 조차도 니체를 법정에 세워서 심문을 해봐야 할 것만 같다.  아마도 n.카잔차키스의 생각이 나랑 똑 같을것만 같다.(이럼 우린 천당은 물 건너 간거지?)

 

 

 

 

 

 

 

 

 

 

 

 

 

 

 

  우리는 생활주변에서 '다국적 기업' 이라는 용어를 아주 흔하게 듣게된다.

  지극히 현대적인 느낌의 이 경제용어가 사실은 식민지 침탈의 아픈 역사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기업활동이라는 의미를 조금만 뒤집어 보면 유럽 열강들에 의한 참혹한 식민지 약탈의 그늘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가 생겨난 이래로 모든 국가적 약탈은 반듯이 강한국가가 군대를 이끌고 약한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점령을 하고나서 인적물적 재화를 강제로 빼앗는것을 일컬어 왔다.  여기에는 강한 국가권력과 군사력을 통한 전쟁이라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반듯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했었다.  하지만 1553년 영국에서는 새로운 방법의 전쟁을 통해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신대륙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신흥부자들이 마구 양산되던 시대를 모두가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서구유럽의 열강들은 저마다 군대를 총동원하여 식민지 개척에 나섰으며,  곧 이 과열현상이 식민지 쟁탈전으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이때까지의 식민지 약탈전은 어디까지나 국가차원의 전쟁을 통한 방법이 전부였다.

  영국 런던의 시장에서 함께 오랫동안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모인 친목회에서 한 상인이 불쑥 엉뚱한 제의를 꺼낸 것이다.  '이리끼리 돈을 좀 모아서, 거창하게 식민지 개척은 아닐지라도 식민지와 직접 장사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의견이었다.  식민지에서 국가가 물자를 약탈해 반입하면,  국가가 정해놓은 규정과 가격에 준해 구매를 하고 이를 다시 시장에 내다 팔아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상인 입장에서,  이제 바야흐로 식민지와 직거래를 해보자는 의견이 출현한 것이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다국적 기업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상인 마흔명이 각각 25 파운드씩의 자금을 출자했다.  1.000 파운드로 거대한 상선을 빌리고,  항해와 교역을 주도할 선장(총감독)을 선임하고,  인부와 호위를 위한 용병까지 뽑아서 대서양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하나의 국가 단위가 아니라 영세한 사설무역회사 정도였으니  경험과 준비 소홀로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다.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가 목표이지만,  장사꾼은 어디까지나 이익이 최우선이 아니겠는가?  비록 항해는 좌초되었지만  어떻게든 투자된 액수를 초과하는 이익을 남겨서 돌아가야겠다는 신념 하나는 확실했던 이들은,  추운 동토의 왕국을 헤치고 나아가다가 마침내  모스코바(러시아)에 당도하는 기연을 연출하게 되었다.  어찌되었던 이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겨서 런던으로 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이들 상인 연합회는 다시금 선단을 꾸며서 미지의 세계로 장사를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이들 상인 연합회에 투자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식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투자 액수가 적힌 종이쪽지를 받았고,  연합회 상선이 해외에서 벌어오는 수익 총액에서 투자금에 해당되는 1/n 을 배당 받았던 것이다.  중간에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투자 액수가 적힌 종이를 타인에게 팔았는데,  서로 사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웃돈까지 제시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것이 곧 증권시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식거래가 이때부터 실행된 것이다.

  17 세기에 들어서면 시장상인 중심의 주식회사에 국가까지 나서서 참여해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일정 지분을 갖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되는데,  참여한 국가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투자를 하였으며  이때부터 상인연합회 주식회사를 역사는 '동인도 회사' 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정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 이사회가 직접 운영하는 개인 주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유한책임회사가 등장한 것이다.

  경직된 국가 공권력은 거래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고,  경험 많은 노련한 장사꾼들이 모든 거래를 주도했다.  그 위력과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주주들의 뛰어난 재량으로 군사력의 의존도를 미미할 정도로 낮추었으니,  국가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이익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자 서인도 회사를 포함한 여러개의 주식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가는 허가를 통해 주식회사에게 지역적인 할당을 통한 독점권을 주었다.  노련한 장사꾼들이 약소국으로 몰려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를 섭외했다.  뇌물을 제공하고 타락하게 만들고 심하게는 막강한 지위에서 실각하게 만들거나 제거하기에 까지 이르게 된다.  중심 도시에 거래소를 만들고  온갖 이권을 사들였다.  항구 부설과 관리권,  도로 건설과 사용권,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에서 산업혁명 이후로 중요해진 목화 교역권까지 돈이 될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이런 약탈에 항의하는 시위대는 강제 해산 시켰다.  주식회사는 용병에 주로 의지했다.  그러다가 군대에서 퇴직한 우수한 군인들을 교관으로 데려다가 현지인들을 뽑아서 훈련시켜서 사설 경호군대로 양성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들 사설용병들이 약소국의 군사력을 훨씬 능가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새로운 방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 침략전쟁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모든 상황에 상호간에 체결한 합법성을 입증하는 협약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타락한 고위 공무원이나 왕족이 뇌물을 받고 100년 동안의 광산 채굴권을 주식회사에 넘겨주는 증서에 서명을 하고 물러났다고 치면.......  영국은 100년 동안 그 광산을 고갈해 버려도 되는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 지불한 금액이 터무니 없던  공짜이던,  그 돈이 약소국의 국고에 들어갔던 횡령을 했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협약서만 있으면 만사형통이었다.  불합리한 조약이라고 파기라도 할라치면 그 뒤엔 대영제국이라는 엄청난 권력과 폭력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영국의 인도 침탈에서는  현지의 반발이 극심해 지자 동인도 회사는 참으로 기발한 발상을 내놓는다. 인도 정부와 동인도 회사간에 합작 투자형식의 별도 회사를 만들어 놓고는 상당 지분을 가진 동인도 회사가 현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직접 운영에 차지하지 않을 뿐더러,  20명의 운영 이사회원중 지분을 포기하고 단 한명분의 주주권한만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인도로서는 감격해야할 조건이었지만,  영국은 조약서의 맨 하단에 별도의 미미한 부칙을 삽입시켜 놓았다.  20명 주주의 조건은 양도할 수 없으며 그 직계자손에게만 상속된다는 조항과 더불어,  만약 후계자가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간의 양보를 담보로 동인도 회사가 모두 승계한다는 조항을 넣었던 것이다.  19명의 주주들은 모두 혈기왕성하게 건강하였을 뿐더러,  권리가 상속되게 되었으며,  당시의 인도인들은 넘쳐나는게 후손이었으니 그 조항은 무용지물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조약이 발효되고 난 이후부터 19명의 주주들에겐 끊임없이 악재가 겹쳐내리기 시작했다.  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더하여 이유도 없이 남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드러난 증거가 없었다.  그러면서 어이없게도 주주들의 후손이 끊겨나갔으며 주식의 권리증이 하나 둘 동인도 회살 넘어가기 시작했다.  결국엔 동인도 회사가 모두 차지하고 독점하게 되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도 전역에서 남자 아이의 출생 비율은 점점 놓아만 가고 있었건만,  유독 19명 주주의 가문엔 남자가 씨가 마르기 시작하는 아이러니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한단 말인가?

 

 

  이렇게 인도에서 대대적으로 성공한 동인도 회사의 노련한 장사꾼들이 이번엔 새로운 먹이를 찾아서 서서히 아랍 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은 부족 중심으로 뿔뿔히 흩어져 살았으며,  그 중심인 수도에는 고대로부터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군주들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버젓이 군림하고 있었다.  수도에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궁전이 있었고, 그 궁전의 주인은 샤. 술탄. 나와브. 칸. 케디브로 불리는 군주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분명 이슬람이었으며,  당시 이슬람 세계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가 분명했으나, 유럽 침공에 실패한 이후로 오스만은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페르시아 지역은 저마다 다른  군주들이 통치하는 예외적인 이슬람 지대였다.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이나 활발한 교류에서 벗어나 저마다 자신의 지역만을 독차지하고 들어앉아 부귀영화를 누려왔던 처지라  시대의 흐름이나 세계 정세에는 관심이 없고,  사치와 허영심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이런것이야 말로 노련한 장사군들이 수완을 발휘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고,  뇌물은 특효약이었던 것이다.

  이란에서는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국가운영의 자문을 맡으면서 왕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터키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국정에 자문을 해주고 정기적으로 공식적인 급여를 받았다.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동인도 회사가 우수한 교관을 파견하여 군대를 훈련시키고 왕궁 호위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동인도 회사의 직원이 파견되어 경찰의 고위직을 겸임했다.

  상황이 이지경이 되었음에도 사치와 허영에 빠진 타락한 군주와 왕족들은 노련한 장사꾼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슬람의 젊은 지식인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엔 무능한 통치자들의 욕심과 방탕함으로 인해서 이슬람 대부분의 지역이 이미 서구의 노련한 장사꾼들에 의해서 점령되었으며,  이것이 장차 전 이슬람 세계를 엄청난 재앙으로 몰고가게 될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뱅골만에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모든 이슬람 지역의 곳곳에 서구의 침략자들이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미 소수의 백인들에 의해서 모든 무슬림의 삶이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고 복종을 강요당하고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슬람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통치자와 왕족들에게서는 일말의 기대나 희망 조차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미 백인 침략자들의 꾹두각시나 하수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어떻게든 이슬람을 과거의 영광으로 되돌려야만 한다'는 지식인들은 곧바로 이러한 운동이 지속되자면 필수적으로 '신정합일에 입각한 이슬람 권력의 부활' 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무능하고 타락한 권력을 제거하고 이슬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선  옛날 방식의 절대적 권력이 반듯이 필요하다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예날 방식의 권력은 어디까지이며,  누가 가지게 될것이며,  그 권력 또한 타락하지 말란 법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개혁가들이 등장하고  여러 다양한 개혁안들을 내놓았다.  그것들을 수렴해 본다면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무슬림이 달라져야 한다.  이슬람 자체는 이미 완벽한 종교이자 교리이며 더 이상 손 볼곳이 없다.  다만 그 교리를 수행하는 무슬림들의 신앙이 타락해서 모든 문제가 생겨난 것이니, 무슬림들의 생활 전반에서 서구의 영향을 보다 철저하게 차단하고 본래의 이슬람 신앙과 생활로 되돌아 가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서구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당면한 모든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가 서구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개방하여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생활 안정이 유지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변해가는 시대 상황에 적응하는 새로운 무슬림 생활이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서구에 비해 뒤떨어진 낡은 종교 사상에서 탈피하여 이슬람 신앙이 서구인들과 같이 세속적 삶과 조화를 이루며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슬람 자체를 근대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번째,  앞선 전혀 다른 두 가지 주장을 절충하는 선에서 나온,  이슬람이 진정한 종교임을 지켜나가면서도 서구의 문물에 개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앙은 반듯이 지켜 나가되  생활은 서구식으로 근대화 시키자는 주장인 것이다.  여기에선 중요하게도  근대화가 반듯이 서구화를 의미하진 않는다는 전제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펼쳐지는 이슬람의 역사는 앞서 거론한 이 세가지 갈래의 방향으로 나뉘어 지게 된다.

  지금 현재의 이슬람 국가들 모두는 반듯이 제시한 세가지 갈래중의 한가지를 택해서 지금에 놓여지게 된것이다.  오늘의 이슬람 국가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세종류의 부류로 나눠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대입을 시켜보면 알게될 것이다.

  현존하는 이슬람의 양대산맥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격이라 하겠다.

  이란과 함께 이슬람 종주국인 수니파 주류의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첫번째 갈래의 덕분에 건국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와하비아운동의 결과로 탄생했다.   두바이로 대변되는 아랍 에미레이트의 경우가 두번째 갈래에 해단된다고 보면 되겠다.   터키는 오랫동안 두번째 갈래로 여겨졌으나 에르도안 현대통령의 치세 아래서 보여주는 태도는 세번째 갈래를 비켜 지나 어쩌면 첫번째 갈래로까지 가려는것이 아닐까 하는 나만의 주관적인 우려를 자아내기도 한다.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들은 적정한 선에서의 중도적인 세번째 절충안을 추구하고 있다.

 

 

  이슬람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이 '시아파'와 '수니파'와 '수피파'를 구분하고 이해하는 방향이었다고 전제한다면,  두번째 관문은 '아랍인들의 이슬람'과 '페르시아 이슬람'과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을 구분하고 이해하는 방향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재의 이슬람을 알기 위해서는 위에서 거론한 '근대화를 추구하는 시점에서 세갈래로 갈라진 이슬람'을 구분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과제가 남게 되었다.

  그 과제에 등장하는 세갈래에는 세사람의 대단히 중요한 이슬람 개혁가들이 증장하게 된다.

  아라비아 반도 출신으로 활약한 압둘 와하브,  인도 알리가르 출신의 사이이드 아마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사이이드 자말루디니가 그들이다.

  세갈래로 나뉘어진 이슬람 세계에는 국가 명칭 보다도 이들 세 사람의 이름과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크게 작용한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에 '이슬람 사람들은 축구 경기를 빼고는 국가라는 개념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라고 는 말이 있다.  중동에 이슬람 국가는 여럿이지만,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은 국가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버젓이 국기가 내걸리고 정해진 법률이 엄격히 다른 국가체제이지만,  그들의 실생활은 여전히 국가의 개념 보다는 부족중심의 사고와 생활풍습에 있다.

  이것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하기가 결코 쉽지가 않다.  무스림을 제외한 21세기의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그들을 이해하기가 결코 쉬운일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그들의 종교와 풍습에 사는것에 익숙해 있고,  그것이 올바른 가치관이자 정의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아갈 수 밖에...........

 

  (테러와의 전쟁)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순간의 이슬람 세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개혁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압둘 와하브' 라고 하겠다.

  압둘 와하브가 바로 (와하비아 운동)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현재 이슬람과 연계벌어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배경의 뿌리에는 반듯이 (와하비아 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서구인들에겐 혹시나 와하브가 이슬람 분쟁의 핵심적 주동자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는 결단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이슬람을 제자리로 돌려 놓으려 노력한 혁신적인 개혁가였을 뿐이다.  그의 가르림에 그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급진적인 원리주의자들이 다수 나왔다고 해서 와하비를 테러리스트의 원흉처럼 여겨서는 안될것이다.

 

 

 

 

 

 

 

 

 

 

 

 

 

 

  

  유대인과 아랍인(흔히 이슬람사람 이라고 불리는)은 한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그들은 모두 '믿음의 조상' 이라고 추앙받고있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적(敵)은 공히 로마제국 이다.  로마는 소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아랍인들을 지배했고, 유대나라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켰으며 유대인들을 세계도처로 뿔뿔히 흩어져 유랑민족(디아스포라)이 되게 만들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음의 뿌리로 둔 신앙을 고수하였지만,  로마(유럽)은 엄연히 고대그리이스의 신앙관을 바탕으로 한 다신교 신앙의 세계였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로마(유럽)이야 말로 이교도 세상이자 극복해내야 할 대상이자 적이었던 셈이다.  이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기득권은 분명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있었으며,  유럽은 신의 관심과 배려에서 벗어난 지옥의 구렁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러니 하게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를 유럽(로마)이 십자가에 매달았고,  그런 로마(유럽)에게 구세주께서 은총을 내리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속된 말로 대놓고 표현하자면.........  뼈대있는 왕족 가문에 장성한 다들이 버젓인 둘(유대. 이슬람)이 있음에도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가문의 수장은 근본도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던 부랑자 고아를 입양하는것에 그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 하여 교육도 시키고 재산과 지위에 관하여 공동 상속자로 호적에까지 올려주었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이 아들이 차차 성장하면서 어떤 일을 저질렀느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자 자신이 정통 상속권자임을 주장하면서 아버지가 생전에 살던 집(예루살렘)을 차지하겠다고 기독이(유럽)는 군대를 몰고 쳐들어 갔던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에서 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에 따라 실질적 장자인 유대가 거처하고 있던 아버지의 집에 무작정 칼을 들고 침입한 것이다. 부당함을 주장하며 가로막는 유대의 가속들을 무차별 살륙하기 시작했다.  3일동안 2만오천명의 남녀노소는 물론 뱃속의 태아까지 칼로 창으로 찔러 죽여서 길거리에 나뒹굴게 했다.  그것이 특별히 선택받은 기리에서 주워 온 서자(유럽)가 생각하는 정의(正義) 이자 신이 허락하신 섭리(攝理)라고 명분으로 내세웠다.  자신만이 하나님 가문의 적통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와 가속들을 내쫓았고,  이슬람의 가족들은 불모지인 사막속으로 보따리를 싸서 도망쳤다.

  세상에 신은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분의 적통은 유일한 기독이 뿐이라고, 이제까지의 모든 규율과 상식과 양심과 기록물과 유산들을 제 멋대로 마구 뜯어 고쳤다.  역사를 아무리 흩어보고 뒤져보아도......  이제까지 이런 엄청난 씨도둑질(?)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살펴보자니........  세상 곳곳에 가슴팍에 십자성 별무늬(다윗의 별)를 새겨 달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것이었다.  기독이는 긴장도 되고 부아가 다시 치밀었다.  별무늬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가 앞서 자신이 싸그리 죽여버리고자 했단 큰형님 유대네 일가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놓고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했고,  먹고사는 문제에서도 기독이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직업선택의 자유 마저도 박탈해 버렸다.  해가지면 의무적으로 제한시켜 울타리로 쳐지고 경찰이 지키고 있는 보호소(?)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어느것이든 위반하면 최악질 범죄형으로 다스렸다.  유대네 일가는 도축장에서 짐승이나 잡아서 기독에네에게 받치고,  부산물이나 가죽을 얻어서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슬람이네는 척박한 사막속으로 흩어져 근근히 삶을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야박한 짓을 골라가면서 자행했음에도 19세기에 들어선 기독이네 일가들은 좀 더 노골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사회전반 운동으로까지 확산하여, 유대네 가족들을 근본적으로 탄압하고자 '안티세티미즘(반유대주의)' 확산을  유럽 전체의 사회적인 계몽운동으로까지 대대적으로 펼치게 된다.(어찌 부당함을 넘어서 가증스럽기 까지하는 후안무치의 행동이 아니겠는가?  이런 파렴치함에서 파생된 돌연변이가 바로 히틀러의 가스실 만행인 것이다)

  기독이네가 대대적으로 벌인 '안티세티미즘'이  뒤이어 '홀로코스트'로 결실을 맺게된 것이라고 친다면.......  히틀러 만행의  중간 숙주는 기독이네 가문의 가풍에서 모두 유발된 것이라 하겠다.

  장자권은 물론 재산도 모두 빼앗겼고 많은 일가족이 영문도 모르게 기독이네에게 피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살아남은 유대네 가족들의 생활권을 넘어 생존권 마저도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주변의 경찰도 검찰도 군대도 동사무소도 어느 하나 빼놓지않고 모두가 기독이네 일가족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안티세미티즘(anti- Semitism. 반유대주의)'을 통치수단의 하나로 정착시키면서까지 사회전반에 걸쳐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그 지속적이면서도 부당한 탄압에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이 자구책으로 선택한 것이 '시온주의(Zionism)' 이다.  이제 19 세기 이후의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발단이나 과정의 내면에는 적지않게 시온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는 곧 시온주의와 연결되는 모든 사건의 발단에는 '서구유럽의 백인 기독교사회'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와 똑같은 상황과 차원에서 이젠 사막으로 쫓겨난 이슬람 부족들에게도 19 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서구유럽의 백인 기독교사회'의 압력과 약탈이 가해지자,  이슬람인 스스로도 자구책의 일환으로 등장하게 된것이 '와하비 운동(Wahhabism)' 이다.

  (시온주의)와 (와하비 운동)은 시작에서부터 맥락을 같이하는,  서구유럽의 침략과 약탈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피치못해 벌일 수 밖에 없었던 유대인들과 이슬람인들의 생존권 사수운동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  이제부터는 미국을 포함하는 서구백인들의 기독교사회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반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서구 기독교사회는 2천년 세월동안 디아스포라. 게토. 홀로코스트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토록 유대인들의 씨를 못말려서 발광하는듯한 태도로 일관해 왔으면서.  한 순간에 태도를 바꿔 '시온주의의 수호자'로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돌변할 수가 있었을까?  이는 차차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이슬람인들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자구책인 '와하비 운동'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비판을 넘어서 가혹하리만치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탄압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친것이다.  서구 기독교사회는 '와하비 운동'을 모든 이슬람 분쟁의 근원으로 지목하고,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왜 똑같은 발단과 목적을 가진 두 개의 사회적 성격의 운동을 하나는 '적극지원하고 보호' 하려고 엄청난 희생을 기꺼이 치르면서, 다른 하나는 '새로운 악의 축,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매도해 버렸을까?

  나는 정중하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바티칸의 최고 권위자에게 공히 똑같은 공개 질문해보고 싶다.

  '(시온주의)와 (와하비 운동)을 구분하는 당신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진실된 대답을 들을 수 없기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위해서 내 방식대로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진행해 보려고 한다.

 

 

 

 

 

 

 

 

 

 

 

  ---  다음에 이어서 '와하비 운동의 진실' '이슬람이 직면한  근대화로 무장된 유럽의 침략'을 펼쳐 보겠습니다.  낯설고 긴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