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는 다분히 이분법적인 문화와 가치관과 교육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당시의 세상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한치도 서로간에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공산주의의 수괴인 소련과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의 승패에 따라 그들을 지지하는 수많은 나라들의 희비도 극심하게 갈렸다. 세계는 흑과 백의 진영으로 갈렸고, 이는 곧 선과 악의 대결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것은 영원히 끝날것 같지 않은 인류에게 내려진 처참하고도 가혹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상이 그런 시대였으니...... 그런 세태 속에서 교욱받으며 성장한 우리 세대에게는 떨쳐낼 수 없는 아픔과 지워질 수 없는 상처가 깊게 새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 가서야 (제 3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개발도상국) 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숱한 아픔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보면, 더 없이 아름다운 수많은 사람들과 나름의 역사를 가진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헤게모니(Hegemony. 패권주의)가 인류를 얼마나 참혹하고 암울한 존재로 전락시켰는지를 그제서야 새롭게 깨달았다.
그런 인류에게 어느날 갑자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평의회는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소련 연방의 복속국들의 독립국가연합(CIS) 수립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세상의 한 축이었던 소련이 붕괴한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세력은 마침내 로마노프왕조의 제정러시아를 무너트리며 혼돈의 국제 정세 속으로 뛰어 들었다. 열강들과 전쟁을 치루면서도 국내의 적대세력과 내전을 동시에 치루어내며 1922년 12월 마침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건국했다. 이후 미국과 대결하면서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초강대국으로서 (동서 냉전의 시대)을 열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이후 세상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처절하게 대결하는 시험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과열된 격전의 휴유증이었을까?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함께 페레스토로이카와 그라스트노스트를 기초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서방으로부터 자유화의 물결이 흘러들어가게 되었으며, 이후로 급진적 개혁과 자유시장경제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거센 요구에 맞딱뜨리게 되고 말았다. 결국 거대한 시베리아의 곰은 시대의 흐름을 더이상 거스르지 못하고 한 세기도 못되어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냉전종식!'
두 개로 갈라진 세계에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악의 축' 이라고 불리던 소련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실로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태였다. '어둠의 종말'이 마침내 찾아왔으니..........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확실해진 이상, 이미 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와 가치관 속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전망은 당연히 희망적이고 아름다운것이어야 했다. 영원한 평화와 번영이 뒤따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차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붕괴가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가치관까지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제도라는 것을 입증하게된 것도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세상엔 종교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이외에도 곁으론 드러나지 않아도 반듯이 짚고 넘어가거나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사방에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두고 편가르기식으로 양분해 있던 '강대국과 강대국의 대립' 하던 시대에 걱정 거리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혹시나 미국과 소련의 다툼에서 혹시라도 핵전쟁이라도 벌어질까 노심초사로 일관하던 시대라 하겠다. 핵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나오는 극도의 긴장감은 세상살이에 관한 모든것을 까맣게 잊을정도로 압도해 버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강대국과 약소국의 대립'은 각지에서 일어났다. 약소국의 처지에 어떤 이득을 위해 느닷없이 강대국을 침략하는 행위는 역사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언제나 강대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 정권을 부패하게 만들거나 빼앗아 지배하는 침략행위를 일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약소국은 모든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가진것이 있건 없건 저항하고 투쟁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강대국은 한목소리로 약소국의 저항과 투쟁을 테러라고 쉽고 편리하게 규정지어 버린다. 그리고 그 투쟁을 진압하겠다고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앞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이익에 눈 먼 경제적 짐승으로 포악해져만 갔다. 부당한 이 전쟁에 같은 강대국들은 서로 나름의 이권을 노리고 합세해 점차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시켜 나간다. 한마디로 피도 눈물도 없는 동물의 왕국이 되고마는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벌어지는 '약소국과 약소국 끼리의 대립'은 참으로 눈물 겹다. 약소국 끼리의 분쟁은 대부분 작은 지역적인 분쟁에 그치지만, 그 상처와 휴유증은 보다 더 참혹하고 처절한 댓가를 요구한다. 인접국가 국경 분쟁 내지는 물분쟁, 환경분쟁, 난민사태나 인접국이 관여하는 내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가하면 '다수파와 소수파의 분쟁'은 어떤 방법으로든 가장 해결책을 찾기가 힘들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 하겠다. 종교나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 외에도, 소수민족 문제나 지역 개발의 문제나 빈부의 격차에서 벌어지는 오늘날 가장 흔하고 빈번한 대립과 갈등이라 하겠다. 여기에 근대 이후에 벌어진 강대국에 의한 영토의 분할과 국가의 탄생 과정에서 원하던 원치않던 생겨난 부족과 민족과 종교와 빈부의 갈등은 어쩌면 앞으로의 인류가 당면하게될 가장 큰 고민꺼리가 아닐까 싶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파생시킨 '부자와 가난한자의 대립'은 어쩌면 앞으로의 인류가 환경 문제와 더불어 반듯이 해결해 나가야 할 또하나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부자와 가난한자의 대립은 일부 사회적 현상일 수 있겠으나, '안전하고 풍요로운 부자나라'와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의 대립과 마찰은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언제든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우려가 이내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미국과 쏘련이 핵무기를 손에들고 서로 위협적으로 흔들어대던 시대에는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무수한 문제들이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불만과 분쟁 소지는 되겠지만 그렇다고 문제와 불만을 들고다니며 여기저기 따지고 어깃장을 일삼지는 못했다. 핵무기를 든 소련이나 미국 하나도 감히 상대할 수 없었던 시대에, 괜히 잘못 건들여서 양쪽이 덤벼들기라도 하면 내일 아침을 온전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쪽이든 한쪽에 줄을 잘서서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처지가 모두에게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쏘련이 사라졌다.
초강대국이 맞부딪치는 상황이 사라진.......... 폭력이 부재중인 이 놀라운 상황은 분명 (평화) 이어야만 했다.
이제 어떤 방법으로든 새로운 세계는 평화를 보장하는 질서가 들어설 것이고 폭력과 전쟁은 이세상에서 모두 사라져야만 했다.
세계 평화에 대한 구상과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한 희망의 대안을 찾는것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모든 사람이 생존과 행복, 자유와 자유 의지에 따른 적극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동등한 기본적 권리를 향휴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올 수 있을까?
하지만........ 기대아는 전혀 다르게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신(神)이 인간에게 존엄한 자유의지만을 주셨다면 혹 그런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신은 그 다음으로 인간에게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탐욕과 폭력에 대한 강한 향수를 심어놓으셨기 때문이다.
소련의 붕괴는 그동안 초강대국의 위세에 억눌려지내야 했던 민족과 국가들의 저마다의 사정과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수많은 요구와 주장들이 봇물 터지듯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든 이해관계에는 반듯이 그 대상이 있게마련이고, 그것들은 결코 대화와 화해로 가볍게 끝나거나 마무리되는 사건들이 아닌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세계도처에서 분쟁을 넘어서 이제는 전쟁을 불사하는 사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악(惡)의 축이 하나 사라지자 거기에서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는 새로운 악의 싹들이 무수히 자라나 다시 새로운 구도로 세상의 절반 가까이를 깊은 수렁으로 빠트리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악이 싹틀때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이 생겨났다. 세상은 이전보다 더 혼탁하고 암울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허울뿐인 거대한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백인중심의 사회가 그토록 주장하던 '우월적인 서구문명의 세계재패(헤게모니)'는 피상적인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일까?
해체된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한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강대국에 의해 서로 갈린 국경선에 기대어 다양한 모습으로 민족과 종교 분쟁이 발생했다. (티토)라는 20 세기가 배출한 걸출한 한 영웅에 의해서 유지되어왔던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이 붕괴되면서 정교회와 카톨릭과 이슬람 세력 사이의 갈등이 마침내 20세기 현대에 '인종청소'라는 희대의 비극을 연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종교와 민족이 함께 결부되는 초유의 사태에는 국가의 개념조차도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겨우 독립한 조지아는 러시아(구 소련)의 자원약탈에 저항하다가 21세기인 2008년에 소련의 비행기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폭격하는 사태까지 격게되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의 종교 분쟁은 끝내 전쟁으로 치달았다. 신생 독립국인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석유산유국은 '자원의 저주'를 받고 말았다. 러시아가 자신들이 식민지라고 지배하고 여겨왔던 지역에서 뿜어져나온 석유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들은 석유라는 자원 때문에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만도 훨씬 못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현대사의 아이러니를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극히 일부의 독재자와 타락한 군부와 정부가 석유의 모든 이권을 독점해 가로채고 있으며, 대부분 국민들의 요구와 의사는 묵살을 넘어 탄압되고 그들의 삶은 독립 이전보다 못한 상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캐슈미르 분쟁,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 정세의 불안으로 대변되는 이란 이라크 사태,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의 소모적인 내전, 북한의 핵문제, 소련의 패망 이후에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인접국 파키스탄 문제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약진과 마찰문제등 이루말할 수 없는 의외의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산업발전의 문제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오염과 공해문제, 물 부족사태, 이어져 나온 고갈되어가는 지하자원에 대한 분쟁은 확장 일로에 들어섰다.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기대여 의지하던 일본 경제가 추락하고, 중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새롭게 부상했다. 미국의 위상을 노리며 덤벼들었던 중국은 한 차례 경제전쟁에서 패하면서 호된 댓가를 치뤄야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건재하며, 미국이 일본을 자기의 세력으로 활용했던 것처럼 중국은 인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상황을 '친디아'라는 용어가 잘 나타내 준다.
일부 학자들은 20년 안에 중국이 미국을 확실하게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런 다음에 다시 20년이 지나면 이번엔 인도가 중국을 앞도하게 될것이라 조심스레 미래예측을 하고 있다. 머지않아 미국은 세계에서 3번째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 턱밑에 러시아(구 소련)이 무섭게 다시 치고 올라오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1991년 12월 26일에서부터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5분까지 미국(USA)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일부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이제부터 앞으로의 세계사는 2001년 9월 11일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것이다' 라고 호언했다.
도대체 20세기가 마감되고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에서 '인류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던 미제국(Pax-America)은 도대체 무슨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40대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1981~1989년 재임)은 동서냉전의 막바지에서 서방세계를 하나로 묶어서 구 소련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레이건은 초강대국의 정면대결에서 승리하는데 몰두하느라 중동지역의 분쟁이 확산일로에 접어들었음에도 이를 방관했다. 베이루트에서 278명의 해병이 죽어나가는 참사가 있었음에도 대응이나 보복을 가하지 못했다. 지역분쟁보다는 동서냉전의 정점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란에 억류중인 인질의 석방을 댓가로 CIA를 통해 은밀하게 무기를 거래하다 적발되어 '이란 -콘트라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앞으로는 정의를 외치고 테러의 근절을 호언장담하면서, 뒤로는 정부와 정보기관을 동원해 테러리스트들에게 무기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기로 지금 미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미국의 진면목' 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우방의 지지와 성원은 무섭게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지.H.W. 부시(1989~1993년 재임) 대통령 시기에 미국의 정적이자 악(惡)의 축 이라고 몰아부쳤던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었다. 바야흐로 이제 세계는 미국이 마음대로 주도하는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부시 정권은 냉전의 종식과 승리의 도취감에 빠져서 앞으로 펼쳐지게될 새로운 시대와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력과 준비력을 상실했다. 일단은 성대하게 자축파티를 열어 즐기며 앞으로의 문제는 차차 대처해 나가면 된다는 심사였다. 감히 누가 이 상황에 미국의 심기를 거슬리고 저항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시기에 팬암 103편 폭파사건을 리비아의 테러리스트들이 자행했다. 세계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대응방법의 모색을 거듭거듭 성토했지만, 부시 정권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금은 미국의 승리로 얻어낸 냉전의 종식을 함께 누려야 할 시기이고, 테러 대책은 차차 시간을 두고 마련해도 결코 늦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세계의 여론과 학자들은 중동분쟁에 새롭게 부각되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버리거나, 사우디아라비아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 사담 후세인을 감시하고 중동사태를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부시정권은 이마저도 묵살해 버렸다.
후임인 빌 클린턴은 중동정세이 불안과 테러리즘이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위협이 될것이라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했던 대통령이었다. 그는 새롭게 테러에 대응하는 부대를 창설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전투력 향상을 추구했다. 이시기에서야 미국은 제대로된 대테러리즘 능력을 어느정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알카에다가 보스니아사태에 관여하는것을 차단했으며 이란 이라크에서 확산되던 반미 테러리즘의 차단에 주력하던 중에 그만......... 섹스 스캔들로 인한 정적들의 정치적 공세 앞에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권력을 점차 상실해 갔다. 군통수권자의 권위가 상실된 상황에서 CIA. FBI. 그리고 국방부가 합심해서 새롭게 변모해가는 테러리즘에 대처하기에는 분명하게 한계가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끝내 미국의 불행이자 또한 세계의 불안으로 점차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43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아들 부시(2001~2009년 재임)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가 정적들과 서방세계로 부터 어떤 비판을 호되게 받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임자인 빌 클린턴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일을 추진해 왔으며 무엇때문에 그 성과가 열매를 맺지 못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임자들의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았고 외면하였으며 저 관심 밖으로 내버렸다. 아버지 부시의 치적을 떠받들게 만들었으며 부시 부자정권(父子)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만 온 힘을 쏟아부었다. 클린턴이 대통령직을 넘겨주면서 '이슬람의 결속과 알카에다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국 국가 비밀문서의 공개금지' 연한인 30년이 지나면서 부시 정권의 오판과 실책이 하나 둘씩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5년 정도가 지나면, 어쩌면 9.11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 현대사가 어떻게 새로 쓰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로 이런 와중에서 2001년 9월 11일의 태양이 서서히 뉴욕의 맨하탄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확히 오전 8시 45분.............
그 비극의 아침에(2001년 9월11일) 네 대의 민간 항공기가 공중에서 납치되었다.
납치된 비행기중에서 두대는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를 향했고, 한 대는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팬타곤)의 외벽에 충돌했다. 다른 한 대는 피츠버그 근교에 추락하였는데 아마도 백악관을 향했던것으로 추측된다.
9.11 테러로 인하여 2.944명이 사망하고 25.000 이상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테러에 가담한 주동자 19명도 모두 사망하였다. 이는 미국 본토 안에서 발생한 첫 번째 테러였으며, 여러개의 테러가 동시에 결행된 '동시다발테러' 로 기록되었다. 미국은 이날의 사태를 테러라 규정했으며, 이슬람은 성전(聖戰)이라고 선포했다.
세계는 경악했다. 혼돈과 공포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어찌되었건 21세기 초입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거룩한 성지였던 미국의 한복판에서 또다른 방식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부시 부자의 정치적 성과 쌓기에만 몰두해 있던 부시정권으로서는 그야말로 모든 공든탑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허물어지는 꼴을 맞게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위기를 돌파할 명분이 다급하게 필요했다.
부시는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테러의 배후로 '알 카에다'와 그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다. 아울러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근거로하는 탈레반의 보호하에 있다고 덧붙였다.
한순간에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과 미국을 지지하는 서구의 언론에 의해서 '악의 화신'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참으로 믿기 힘든 역사의 아이러니를 뼈져리게 실감할 수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억 이슬람 인구 전체를 통털어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미국이 가장 아끼는(?) 아랍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재벌가 아들인 오사마 빈 라덴은 지극히 내성적이고 학구적인 소심파 젊은이였다. 청년으로 성장한 오사마는 점점 회교원리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런시기에 동서냉전의 우위를 점령하고 아랍지역에 새로운 거점확보를 노린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침공하여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외세의 침략에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초강대국 소련에 대항하기에는 무기도 병력도 물자도 절대적으로 열세인 아프가니스탄은 심각하게 위기에 몰리게되자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범이슬람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의 어느 지도자나 통치자도 나서지 않았다. 자칫 소련의 눈밖에 나서 화를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종말이 코앞에 보이는 절대절명 위기에서 이슬람 군주들과 지도자들은 망설였지만, 이슬람의 젊은 지식인 청년들이 용감하게 나섰다. 젊은 이슬람 청년들이 혈혈단신으로 하나 둘 아프가니스탄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모여든 많이 배운 사람들 이었다. 그만큼 모든것을 빠르게 배우고 습득해 나갔다. 아프간 무자헤딘의 지도하에 하루가 다르게 용맹한 이슬람 전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력을 갖추고 아프간 지형에 맞는 전술까지 창안해 나가면서 거대한 소련군에 당당하게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어디까지나 냉전의 시대였다. 소련의 남진에 대해 서로 핵무기를 들고 전면전까지는 불사할 수는 없었던 미국의 처지로서도 마냥 강건너 불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레이건정부는 CIA의 최고 요원들을 은밀하게 파키스탄으로 파견했다. 이곳을 통해 막대한 군사정보를 무자헤딘에 제공했다. 최신형 스팅어미사일을 포함한 실전용 무기를 밀반입 시켜주고 물자와 자금을 공급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전투지역을 돌며 장차 군사지도자로 성장시켜도 좋을만한 재목들을 골라 추려서 아프리카 수단의 사막에 훈련소를 차리고 미군 특수부대의 지휘관들로 하여금 특수 훈련을 시키도록 했다. 훈련을 마친 그들이 아프가니스칸으로 돌아가게되면 실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면서 소련을 극도로 괴롭힐것이라는 확신이 섰을 정도였다. 그 선발된 이스람의 차기 군사지도자 후보중에 유난히 깡마르고 생각이 깊고 신중한 청년이 있었다. 장차 큰 일을 맡겨도 좋을것이라고 미국이 선발하고 특별히 아끼며 모든것을 전수해 준 최고성적의 졸업생 이름이 바로 '오사마 빈 라덴' 이었다. 그는 유난히 총명한 머리에다가 상대를 설득하는 탁월한 능력까지 갖추었는데, 더하여 그의 배경이 다름아닌 사우디아라비아의 내놓으라 하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오사마와 그를 따르는 집단은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용맹하였으며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세기의 골리앗인 소련이라는 거인을 쓰러트렸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이 소련제국과의 10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지지자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고향으로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가업을 잇고자 아랍권 여러곳을 오가면서 기업 경영에 참여하며 지냈다.
하지만 아랍권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해 갔다.
급변하는 정세의 한복판에는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과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강대국간의 이권다툼'에서 파생되는 분쟁에다가, 강대국이 서유자원확보를 빌미로 저마다 마음대로 그어놓은 국경선에서 파생되는 부족간의 다툼이 항상 문제였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열강들은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아랍 세계를 이간질하고 반목하게 하고 분쟁을 조성하는 정책으로 밀고나갔다. 이슬람의 단결을 결코 허락하기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서구진영이 가장 인정하기 싫은 상황이 이슬람의 단결과 통합이었다. 강대국들은 아랍권의 국가들을 갈라놓고 분쟁을 만들어 놓고는 자신들이 그들을 지켜주겠다면서 무기를 팔고 군대를 주둔 시켰다. 석유에서 파생되는 엄청난 이득의 일부를 타락하거나 독재에 맛을 들인 아랍의 지도자들 입에 넣어 주었다. 석유를 판 오일달러가 엄청나게 아랍세계로 흘러들어갔지만 그것은 모두가 극소수의 아랍통치자들과 그 잘난 석유왕국 왕자들만의 몫이었다. 서로의 처지를 비교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부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우디나 이란, 구웨이트, 요르단 레바논등의 왕정국가와 아프가니스칸, 혹은 파키스탄 혹은 인도네시아 같은 아랍권 외의 공화정의 정치형태를 띤 국가들 사이에는 엄연하게 엄청난 차이와 괴리가 존재했고 서서히 한 가지 한 가지씩 장단점과 이해득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슬람은 흔들리고 있었다.
거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소용돌이가 불어닥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랍 왕정국가의 통치자들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하고 무차별로 끌어다 고문하고 탄압했다. 그 배후에는 미국의 군대와 정보기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사태의 추이까지도 묵인하고 낙관했다. 궁지에 몰린 아랍의 왕정은 느닷없이 모든 화살을 숨죽이고 있던 이스라엘로 돌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격화되었고 사방에서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아랍권 전체가 격전장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미국의 태도는 언제나 처럼 '이스라엘의 옹호와 수호' 였다.
미국이 파키스탄과 이란과 북한의 핵무장에 사활을 걸고 반대하면서 전쟁까지도 서슴치않고 불사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이미 보유하고 있다는 약 200기의 핵탄두 미사일에 대해서는 함구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이 불공평한 처사에 항의했지만, 이 순간까지도 이스라엘은 '핵 확산 방지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을 뿐더러 '국제 원자력 기구'로부터 단 한 차레의 간섭이나 핵사찰을 받지않은 특별한 국가이자 핵문제에 대하여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아주 특별한 국가이다. 이런 말도안되는 파행과 특혜의 배후가 바로 미국이다.
팔레스타인이 불합리한 난민정책에 항의하다 못해 분노를 참지못한 한 젊은이가 이스라엘 정착촌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고 치자. 그래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스라엘은 즉각적으로 비행기를 날려 팔레스타인 난민 정착촌을 폭격하고 미사일을수십발을 발사한다. 47명이 사망하고 2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마을 3개가 쑥대밭으로 변했다. 그러면 미국과 서방 언론은 일제히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벌인 무차별 테러에 선량한 이스라엔인이 살해되었다'고 대서특필한다. 그러면서 '이스라에측의 정당한 방어태세에 의하여 일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간단하게 그냥 대충 넘어가 버린다.
하도 그런일이 당연한 일상이 되다보니 이제 세상 사람들은 그 숫자나 피해의 정도를 파악해 보기도 전에....... 테러(Terror)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면서 '팔레스타인 혹은 이슬람은 나쁜 테러리스트들' 이라는 인식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서구사회의 집요한 여론전과 노련한 신경전의 결과이다.
사태의 원인과 발단이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으며, 근본적이 치유나 해결을 위한 노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와 이스라엘은 '폭력 근절을 위한 전쟁은 언제라도 불사' 하겠다는 일관된 태도이다.
힘없고, 가진것 없고, 도와줄 그 무엇도 없는 약자의 처지에서........ 강대국의 몰염치와 만행으로 눈 앞에서 가족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면......... 이제 그의 인생에서 남은 최대의 목표는 무엇이겠는가?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만약에 나에게 그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사는 동안에 기필코 해결해야 할 목표는 오로지 복수라고.........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하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필히 가르쳐 주고야 말것이다. 훗날 신(神)께서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해도 달게 받을 것이다. 그때는........ 세상이 나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한이 생긴다하여도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가진 가치관에 준한 정의를 기필코 실현해 내고 말것이다.
더 이상 '인류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칭하는 미국의 불공평한 처사를 이슬람 세계는 믿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은 고스란히 미국에 대한 적대감으로 옮겨가가 시작했다.
아랍세계 전역에서 분쟁이 터졌고, 미국은 정보기관과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미국의 입맞에 맞게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그러수록 이슬람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제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조직을 이룩해 가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이슬람 정책'과 '대미국 정책'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극소수의 급진적 사고를 가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무장투쟁이 걷잡을 수 없을만치 확산되기 시작했다. 테러리즘이라는 초유의 이데올로기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이슬람 분쟁지역에서 이미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 영웅으로 더받들여진 오사마 빈 라덴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오사마는 처음에는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하지만 사방에서 미국의 압제에 의한 부당한 사태가 초래되고 수많은 이슬람의 생명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느 순간 오사마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의사만으로 되지 않는 험난한 길을 가야만 할것 같다는 고백을 남기고는 분쟁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어서 그를 지지하는 무장활동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오사마가 가진 엄청난 부를 통해서 마침내 오사마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이슬람 무장 수니파 주의자 '알 카에다(Al-Qaeda)'를 1988년에 설립한다.
이들의 목표는 분명하고도 확실하다. '이슬람을 파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음모와 분쟁을 벌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기독교와 유대인 동맹을 끝까지 쳐부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허드슨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동쪽으로 이스트강이 흐르는 사이에 맨하탄이 들어서 있다. 강의 하류를 건너다 보면 리버티섬 위에 우뚝 서있는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뒷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찌를듯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초고층 빌딩숲이 미국을 넘어 세계 경제의 중심부인 윌 스트리트이다. 윌가 근처의 배터리 파크에서 페리가 출발한다. 수많은 뉴요커들이 이 페리를 타고 강을 건너 출퇴근을 한다.
그날도 수많은 뉴요커들이 여느때처럼 바쁜 발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고층 빌딩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뾰족하게 마주보고 솟아올라 있던 쌍둥이 건물(세계무역쎈터)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비행기 한 대가 그대로 날아가 부딪치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거대한 건물 상층부에서 검은 연기가 솓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대의 비행기가 날아와 그대로 건물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이내 쌍둥이 빌딩은 화염에 휩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웅장한 건물은 거세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굉음과 거대한 화산먼지 구름이 뉴욕을 온통 집어 삼켰고 세계무역쎈터 건물은 흔적으로만 남았다.
'인류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임을 자처했던 거대한 제국 미국의 영토 안에서, 그것도 심장부인 뉴욕에서 초대형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누군가가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끝까지 이 사태를 '테러'라고 규정 지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테러'와 '전쟁'은 무엇이 다른것일까?
미국의 주장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은 항상 온전하고 정의로운 싸움' 이고, 미국의 적들이 벌이는 싸움은 '비인륜적이고 부당한 테러' 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노력으로만 보인다. 누가 보아도 아주 쉽게 그러한 의도를 눈치챌 수 있음에도, 미국과 서구 언론은 거듭거듭 '전쟁'과 '테러'를 구분지으려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렇게 허울뿐인 대의명분이 중요한 것일까?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가 현대세계에 끼치고 있는 해악들에 대해서 심하게 비평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 중에서도 '노암 촘스키'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그는 자신의 저서 <해적과 제왕>의 서문에서 앞서 제기한 '미국이 왜 전쟁과 테러를 굳이 구분하려 노력하는지'에 대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설문을 통해 나름 의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길에 해안도시를 하나 점령하였다. 식민도시로 만든 후에 다시 원정을 떠나려는데 토착주민의 대표가 대왕을 찾아왔다.
'왕이시여. 떠나시려거든 이 도시의 오랜 숙원을 한 가지 해결해 주시고 떠나시지요? 우리는 대왕과 마케도니아를 받들고자 하나 이를 가로막는 자가 있으니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겠습니다.'
'가로막는 자가 누구란 말이요?'
'바다 저편의 섬에 은거하고 있는 해적들 때문입니다. 저들이 교역선을 탈취하고 툭하면 도시로 쳐들어 와서 재물과 사람까지 약탈을 하는 통에 도저히 온전한 생활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한 처지입니다.'
원정군은 후방에 화근이 될 불씨를 남겨놓고 전진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 대왕은 자신의 군대를 보내 해적들을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숱한 전쟁을 경험한 노련하고 용맹스런 군대에게 해적집단 정도로는 전혀 상대가 못되었다. 해적들은 소탕되었고 두목이 붙잡혀 끌려나왔고 이에 대왕이 해적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바다를 그렇게 어지럽히는 것이냐?'
그러자 전혀 주눅들지 않고 대왕을 노려보던 해적이 당당하게 한 걸음 나서면서 대답했다.
'그러는 당신은 어찌하여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까? 나는 그저 작은배 몇 척으로 약탈을 일삼기에 해적 소리를 듣는것이 당연한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거대한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거창하게 약탈을 일삼기에 제왕 소리를 듣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규모가 다를뿐이지 약탈을 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것은 저나 당신이나 같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주관적인 내 개인적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인들은 어떤 알수없는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있다. 250년 이라는 짧은 역사와 내세울것이 별로 없는 문화유산 속에서 초일류 강대국의 자리에 올라선 그들 스스로의 자긍심 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청소년 시절에 가졌던 미국의 이미지는 긍정적 모습의 '프런티어 정신' 자체였으나, 지금의 모습은 다분히 부정적인 '팍스 아메리카(Pax-America)' 내지는 '거만한 군수산업재벌' 이미지로 변해버렸다.
우리는 여행을 하다보면 수많은 여행자들을 만나 인사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너는 어디서 왔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모로코. 이탈리아. 브라질. 일본. 중국. 베트남. 폴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나 처럼 '나는 한국에서 왔어' 라고들 대답한다.
하지만 미국인을 만나면 다르게 답을 한다. 열에 아홉은 '애리조나. 뉴욕. 미시건. 네바다. 텍사스' 라고 대답한다. 왜 그럴까? 미국의 한 주가 우리나라 보다 커서? 그럼 호주 카나다 중국은 땅이 작은 나라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는 그저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다. 누가 왜 그런 사고를 의식적으로 만들어서 심어주었을까? 그들은 왜 하나 같이 그것이 당연한것 처럼 여기고 행하는 것일까? 왜 나머지 모든 국가 사람들은 또 그런것을 당연한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일까?
우리 학창시절에 백인들이 주로 살아가는 세계는 '서양(西洋)' 이었다. 이는 우리가 사는 동양(東洋)의 반대 개념이기도 했지만, 백인들이 절대적으로 주류를 이루는 '유럽(Europe)을 지칭하는 통념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때 부터인가 서양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대신 서구(西歐) 라는 용어가 은근슬쩍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백인문화권을 가리키려면 서구(西歐) 라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예전에 세계는 단순하게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유럽인 하면 대충 흑.황.백인을 나타내는 용어로 불편함이 없었다. 동양인 하면 아시아인이요, 서양인 하면 유럽의 백인사회를 나타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백인사회의 중심이 확대되었으며, 세력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명실상부하게 먼 바다건너 미국의 위상이 유럽을 통털어서 대적해야 할 만큼 급부상해 버린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라는 백인문화권을 하나로 어우르는 표현을 찾다보니 서구(西歐) 라는 용어가 보편적 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또 하나의 백인문화권이 추가되었으니 바로 호주이다. 하여 작금에 '서구' 하면 '미국, 유럽, 호주'를 하나로 어우르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들 인접국인 카나다나 뉴질랜드에 대해서는 때론 포함 시키기도 하고, 때론 제외 시키기도 하면서 말이다. 현재에 백인문화권은 '서구'로 지칭된다. 거기에서 굳이 구분해 사용 할 때는 미국, 유럽, 호주, 라고 구분 짓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중요하게......... 서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계 사람들은 '서구(西歐)를 크리스트교적 공동체' 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조금은 의아해 하면서도 주된 관심이 쏠리는 곳은 바로 미국이다.
우리는 티비를 통해 심심치 않게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을 보게된다. 취임하는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을 과연 미국스럽게 연출한다 싶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게 다가 아니다. 의회의 상하원 의원이나 수백만명의 공무원과 군인과 CIA나 FBI 요원에서 공항이나 세관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미국 헌법이 규정한 '모든 적들에 맞서서' 조국을 수호하겠노라)고 선서를 한다. 산불을 진화하는 소방관도 초등학교 선생님도 모두 조국을 수호하는 군대인 셈이다. 그것이 미국의 웅대한 자부심이고 미국의 힘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도 공무원들에게 조국 수호를 다짐하는 선서를 시키면...... 부조리가 좀 줄어들까?
'모든 적들에 맞서서 조국 수호' 라는 선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조국 수호'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헌법이 보장한 자유를 칩범하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코 개인적 가치관이나 판단에 의한 이데올로기를 시험한다거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누군가를 응징하고 보복하기 위한 불필요한 전쟁을 일컬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어떤 정치적 지도자나 정권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미국 국민에 대한 충성이자 다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보편타당한 선에서 인류평화와 행복이 이바지하였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미국은 결코 그러하지 못했다. 그 선서들은 그저 공허한 의례적인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고 느껴졌다는 말이다.<혹, 이러다가 나는 앞으로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없게되는것은 아닐지모르겠다>
'미국 본토가 누군가에 의해 공격당했다.'
미국은 경악과 함께 극도의 공포속으로 빠져들었다. 부시정권은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 흔들렸다. 즉각적인 대응조치 만큼이나, 냉정한 상황판단과 더불어 심도있게 주변 정세를 살펴야했으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보다 근본적인 이유와 해결책을 찾기에 노력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미국 본토를 향해 타격을 입히고자 한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구상의 어디에도 감히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상대로 군사적인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격적인 사태는 이미 벌어졌고........ 부시정권에게는 국면전환을 위한 시급한 타개책이 우선 필요했다. 자칫하다가는 미국의 위상보다도 부시 가문의 부자대통령이 그동안 쌓아올린 정치적 성과와 업적이 모두 무너진 공든탑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부시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9.11 테러)의 배후에 '알카에다'와 그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고 확정 발표했다.
부시 미국대통령은 CIA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의 정보를 기초로하여,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은거하고 있으며 탈레반의 보호하에 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아프가니스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탈레반 세력은 즉시 오사마 빈 라덴을 전쟁 범죄자로 체포하여 미국에 인계하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약간의 촉박한 시간적 여유를 제시하고는, 제한 시한까지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에 인계하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을 '미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즉각 군사적인 제재를 행동에 옮길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전쟁 선포를 한것이다. 미국이 엄연한 다른 자치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무력 침공을 하겠다고 협박을 공개적으로 한 것이다.
국제사회와 여론이 부시정권의 횡포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9.11 사태가 벌어진지 불과 사나흘만에 9.11 사태를 테러로 규정지었으며,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그리고는 행방이 묘연한 오사마가 아프가니스탄에 은둔해 있다는 짐작으로 대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부시정권의 미국이 선포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행태는 오만과 아집의 있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온 세계는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히틀러와 같은 한 인간의 그릇된 가치관이나 발상이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해악이 될 수 있는가를 너무도 뼈져리게 깨달았다. 하여 이런 극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UN(국제연합) 같은 기구를 만들었다. 미.영.불.소.중(상임 이사국) 같은 초강대국들의 주도하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전쟁의 폐해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만든 국제단체였다. 지구상의 모든 분쟁과 환경과 자원 문제들을 온 인류적 차원에서 협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원칙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회의와 타협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 사법재판소'를 비롯한 수많은 산하단체들이 만들어져 있다. 어떻게든 지구상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어보자는 인류의 소망이 담긴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온 세계는 한 목소리로 미국에 간절하게 요청하였다.
우선은 9.11 사태로 발생한 인적 물적 치유와 회복에 힘쓸것을 요청했다. 다음으로는 국제적으로 신뢰성을 가지고 있는 기관들을 통해 9.11 사태의 진상을 철저하게 파헤칠것을 요청했다. 그런 이후에 조사에서 드러나는 결과를 기준으로 국제 사법재판소를 통해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이나 단체나 국가에 대하여 엄정하게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요청을 부시정권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묵살했다. 실추된 자신과 미국의 위상을 지금 즉시 회복시키는 것만이 자신의 대통령직 시작에서부터 어그러진 상황을 그나마 바로잡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결정한 결과인 것이다.
부시는 즉각적으로 항공모함을 비롯한 해외 파병중인 모든 군사력을 아라비아해로 집결 시켰다. 미국 본토에서도 전쟁 수행을 위한 군인들과 무기와 물자들이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주둔지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세계의 우려와 걱정 속에서도 부시의 미국은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기독교 국가라고 볼 수 있는 미국이........ 신약성경에 적혀있는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뺨까지도 내 주어라'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까지도 함께 가주어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을 저버리고, 구약성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구약시대로 되돌아가 버리고만 것이다.
지구방위대를 자처하던 초일류 강대국 미국이, 그간 세상의 모든 분쟁을 다 참견하면서 툭하면 '국제법', 툭하면 '진상규명이 먼저', '대화와 타협으로 어떻게든 전쟁은 막아야 한다'고 설레발을 치며 안끼어드는데가 없더니만 정작........ 자신이 피해를 입은 상화에 대해서는 '진상규명도 필요 없고' '국제법도 필요 없고' 오로지 '내 방식대로의 해결'만을 주장하고 나왔으니........ 이런 미국의 파행이 히틀러와 다를것이 무엇이 있는가? 팍스 로마나 시대의 로마 황제들이 '제 마음먹은대로의 세상놀이'를 전쟁을 통해서 펼치던 상황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부시의 미국은 생각도 묻지도 따지지도 마는 방식의 '람보 스타일'로 밀어부치는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무조건 전쟁이다'
'뻔한 전쟁의 승리를 통해 미국의 위상과 자신의 새로운 업적을 창조해 나가겠다'는 부시의 속셈을 세상은 이미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나서서 노골적으로 부시정권의 미국이 추진하는 전쟁준비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거기에 중국과 러시아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9.11 사태가 벌어진지 불과 보름만에 미국은 어용 서방의 정보기관이 수집했다는 정보들을 기반으로, 미중앙정보부(CIA)와 연방수사국(FBI)를 비롯한 모든 정보기관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바탕으로 세계만방의 언론 기자와 방송국을 모아 놓고 '9.11 사태 보고서'를 부시대통령이 직접 공개 발표했다.
부시 대통령의 발표문 요지는 '모든 정보가 9.11 테러의 배후로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선포는 정당한 것이며, 지정된 시간까지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여 미국에 인계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사태를 결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최후 통첩까지 보냈다.
이제 전쟁은 불을보듯 뻔한 예견된 사태였다. 불과 한 달도 되기전에 미국은 아프간 침공의 막바지 마무리에 돌입했다. 동시에 세계를 향해 자신들의 선택이 정당하다는 여론전에 몰입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는 NATO(북대서양 방위조약)이 엄연히 존재했다. 서구열강들의 반대에도 일방적으로 미국이 전쟁으로 치닫자 결국 서구열강은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내키지는 않지만 억지로라도 비열한 전쟁에 끌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합류로 미국은 더욱 명분을 얻었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과 경제적 동맹국임을 자처하는 나라들의 합류로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지지하는 나라는 약 40여개국으로 늘어났다.
2001년 10월 7일(9.11 사태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미국의 군대와 나토 방위조약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침입했다. 내세운 명분이야 어찌되었던....... 분명 주권을 가진 자치국가를 강제로 쳐들어 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국경 침범이며 국제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만행이었다. 히틀러의 나찌정권이 세계대전을 벌인 경우와 전혀 다를것이 없는 인륜범죄를 미국이 저지른 것이다.
작전명 '항구적 자유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헌장 5조가 최초로 발동된 미국 주도의 전쟁이 마침내 벌어졌다. 미군의 아프간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나토간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그토록 전쟁에 반대하던 유럽의 열강들을 포함한 나토 가맹국 전체가 참전하게 된 비열한 전쟁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이야 '불을 보듯 뻔한것'이 너무도 자명했다.
미국은 자신과 확신에 차 있었고 아프간은 오랜 내전의 결과로 심신이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져서 저항의 의지마저도 상실한 상태였다. 나토(NATO) 회원국들은 이 전쟁이 어떤한 명분이 없으며 목표도 목적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오로지 미국의 패권주의를 향한 무모한 도박에 강제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왜 역사가 아프가니스탄을 '초강대국들의 무덤'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지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동서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비에트연방(소련)이 붕괴하는데에는, 모든 국가적 능력을 10년 동안이나 쏟아붓고도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지 못한 휴유증이 엄청나게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미국은 간구하고 있었다. 미국의 마음속에는 '동서냉전에서 소련은 패배했고 승리자는 미국' 이라는 자부심 내지는 자만심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은 소련과 다르다. 소련은 실패했지만, 까짓 아프간 정도쯤이야 미국에게는 식은 죽 먹기지' 라고 판단했다. 밥 먹고 하는짓이 전쟁놀이인 미국의 입장에서 아프간 정도는 한나절 꺼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초강대국의 입장에서 불 보듯 뻔한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이는것이 역사에 흠으로 남을까봐 반강제적으로 나토를 끌어들였을 뿐이었다.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아라' 라고 외치며 쳐들어 갔지만........ 목표가 오로지 오사마 빈 라덴 뿐이었을까?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어느 선에서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끝을 낼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너희들이 스스로 내어놓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오사마 빈 라덴을 끌고 오겠다' 라고 시작한 전쟁일지라도........ 과연 이번 전쟁의 적이 어디까지인지, 상호간에 어느정도 까지의 피해를 각오한다든지, 어디까지가 목표라든지 하는 시나리오 내지는 메뉴얼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전쟁의 명분 이상으로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아프간에 쳐들어간 미군의 지휘부도, 나토군 지휘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백악관의 부시대통령과 강경파 그의 측근들 뿐이었다. 어쩌면 전쟁은 미군이 국경을 넘는 순간에 시작되었고, 그 끝은 부시가 언제든 끝내고 싶다고 마음 먹었을때가 되어야만 끝나게 셋팅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부시의 대통령 임기를 훌쩍 뛰어넘어서 단순 숫자로만 4명의 대통령을 거쳐서야 끝나게 될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꿈속에서도 알 수 없었다. 더하여 팍스 어메리카가 전쟁에 패전하여 무기를 내던지면서까지 도망을 쳐야하는 사태를 그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한번 미국이 전쟁에서 비참하게 패해서 쫓겨 도망쳤다.
군사력으로 보자면 미국은 당연히 세계 1위다. 그럼 아프가니스탄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일까? 유엔 가입국을 대충 160개국 정도로 잡고 본다면........ 내 판단으로 아프가니스탄은 100위권에는 들지 못한다고 본다. 그런데 싸움에서 졌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리동네 조기회 팀하고 축구경기에서 패한 경우라면 상황비교가 될까? 그것도 어쩌다 그냥 진것이 아니라....... 90분 내내 공은 미국이 가지고 슛팅도 50번이나 날리면서 맹국을 펼쳤는데....... 조기회팀이 공을 잡은것은 네 번뿐인데 그중에 3골을 성공시켜서 3:0으로 패한 경우쯤이라고나 할까? 한국 방송에 나오려고 훈련장에 한국인 청년 한명을 데려다가 관람을 시키고 튕겨나간 공을 주워오니깐 서로들 싸인해주면서 '큰 꿈을 가져라' 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는데........ 그 청년이 이 경기에서 3골을 모두 넣은 조기회팀 스트라이커였다면........... '창피한 줄을 알고 뼈저리게 각성'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전쟁다운 전쟁은 없었다.
최첨단 기술을 장착한 초정밀 미사일이 날아가 탈레반의 지휘거점들을 정확하게 타격했을 뿐이다. 최첨단 드론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휘사령부로 전송했다. 적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군과 나토방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 아주 손쉽게 입성했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탈레반군의 저항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벌어졌을뿐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통신이 차단되고 드론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감시하고, 지휘부가 모여들었다 싶으면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미사일이 공격해 왔다. 탈레반은 뿔뿔히 흩어져 북부 산악지대로 도망쳤다. 아프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역(해발 5000M급 이상)을 제외한 나머지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의 지역을 미군과 나토방위군이 완전하게 점령했다. 이제 아프간에서 탈레반은 사라졌다.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은 아주 손쉽게 승리를 나꿔챘다.
그런데........... 정작 침략전쟁의 목표였던 오사마 빈 라덴의 종적이 묘연했다. '내 놓지 않으니 직접 끌어오겠다'고 쳐들어간 전쟁인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오사마 빈 라덴은 보이지 않았다. 포로들을 잡아다 온갖 고문을 자행했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은거해 있다는 정보조차 나오지 않았다.
2001년 연말, 부시 정권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승리와 완전한 점령을 자축하고 있었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은 찾을 수 없고 이제 이 전쟁과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와 어디쯤에서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심해야만 했다.
'도대체 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여야 했으며, 무엇을 얻고자 했으며,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부시정권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미친척하고 한바탕 난리를 부리고 싶었던 것일까?
일단 미국은 아프간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대체적인 명분을 내세우고, 전쟁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분쟁을 중재하거나 예방책을 내놓고, 세계의 여론이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는 선에서 잽싸게 빠져나왔어야만 했다. '쳐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빠져나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유사 이래의 모든 전쟁사에서 배웠어야만 했다.
부시가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를 사면하고 승리의 축배를 드는 순간에......... '양심선언'이 세상을 그만 발칵 뒤집어 버리고 말았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전에 부시는 세계를 향해 '9.11 테러의 배후에는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 라는 세계 모든 정보기관의 정보와 학자들의 의견을 토대로한 CIA의 보고서를 직접 공개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 보고서를 근거로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명분을 삼았던 것이다. 그 보고서 때문에 나토연합은 부시의 무모한 침략전쟁에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시가 공개한 보고서의 말미에는 보고서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참여한 여러 학자와 기관의 이름을 올렸었다.
그런데 그 보고서의 명단에 올라있는 학자들이 모여서 부시와 미국을 성토한 것이다. 그 보고서의 작성에 참여하고 기여한 것은 맞지만, 자신들의 보고 내용은 하나 같이 '미국의 아프간 침략 전쟁 자체가 부당한 것이며, 어디에서도 알카에다나 오사마 빈 라덴이 배후라는 증거가 적어도 당시까지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가진 정보가 허위거나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는 것이다. 9.11 테러에 대해서는 좀 더 장기적인 시각으로 넓고도 세세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는 것이다. 더하여, 추후로 알카에다나 오사마 빈 라덴의 연관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은 UN에서 심도있게 다를 문제이며 그 결과 또한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에 따라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보고서에 써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런 보고서들을 빼돌리고 부시의 욕심과 입맛에 맞게끔 허위 사실을 바탕으로한 '침략 선언문'을 작성하고는, 진실을 적어 올린 학자들의 이름을 버젓이 올려서 대외선전용으로 발표해 버린 것이다. 전쟁 반대론자들의 명부를 전쟁 전폭지지자들의 명단에 올린 것이다.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는 이름들로 골라서 말이다.
세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부시정권의 미국을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뻔뻔스럽게도 부시정권은 '테러를 근절시키기 위한 전쟁'의 정당성만을 거듭 강조했다. 미국이 공격을 받은 당사자이며, 피해 당사자인 미국이 생각하는 적은 곧 인류평화의 공적이라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이 억지전쟁의 결과로 아무런 상관없이 피해을 당한 아프가니스탄의 일반국민들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미국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책임'으로 치부해 버릴것인가? 부시의 사고와 언행은 완전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다를바가 없어보였다.
영국이 가장 먼저 부시정권의 미국이 저지른 만행을 탄핵하면서 전쟁에 참여한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이어서 독일과 프랑스 군대가 철수했고 그해가 가기전에 나토연합군 전체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아프가니스탄엔 달랑 부조리한 침략군 미국 혼자만 남게되었다.
부시정권의 미국은 참으로 난처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처한 수렁에 깊게 빠져버리고만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침량전쟁의 부당성이 만천하에 들통나 버린것이다.(앞으로 10년이 지나 미국 보안문서의 열람금지 기간 30년이 자나면 이날의 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게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지 미국 스스로도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다고 나토군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빠져나간 상황에서, 어정쩡하게 지금 미군마저 철수하게 된다면 그 후폭풍과 전쟁의 책임을 회피할 방법이 없게된다. 어찌되었건 전쟁이었다. 거기에서 파생된 모든 물절 정신적 피해를 미국이 아프간에게 보상해야 한다는 명분을 국제사회가 인정하게된다면......... 부시정권은 폭망하게 된다.
부시의 선택은 외길 수순밖에 남지 않았다.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될것이며, 알카에다 소탕과 오사마 빈 라덴의 수색을 위해서 미군은 계속 아프간에 주둔하면서 다방면의 재건사업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도록 돕겠다. 또한 이를 통해서 아프간 주변의 분쟁을 해결함은 물론 중동지역의 안정에 이바지 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분간 미군은 계속 아프간에 주둔할 것이다.' 라는 선언밖에 다른 길이 없어 보였다.
또다시........ 진정으로 아프간 재건을 위해서의 주둔이 아니라, 미국의 체면과 국익을 위해 무리수를 계속해서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인들은 확실하게 보았다.
오로지 국익만을 앞세우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추악한 뒷면을 2021년 8월 아프가니스탄 철수에서 또 한번 낯낯이 볼 수 있었다. 2001년 10월 7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침범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장장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21년 8월 31일에서야 끝을 맺었다. 참혹한 패배로 말이다.
소련이 패망한 1991년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2001년까지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는 무슨 일을 했을까?
그리고 2001년 아프간 침입에서 부터 2021년 8월 철수까지 도대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슨일을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짓을 했길래 그렇게 도망치듯 쫓겨나야만 했던 것일까?
2001년 침략전쟁에서 2021 철수때까지 20년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약 2조 달러를 들여 전쟁을 벌였다. 절반인 1조 달러는 무기에서 주둔군의 급여와 보급물자 등으로, 어찌되었던 자국민들에게 쓰여졌다. 나머지 절반인 1조 달러, 그러니까 1천 백조에 가까운 돈이 아프가니스탄에 쓰여졌다는 말이다. 억도 큰 돈일터인데 조 라는 단위는 얼마만한 크기일까? 그것도 1천백조라면...........
눈만 뜨면 '국익(國益) 국익 국익' 하고 외쳐대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조건이나 댓가없이 그냥 무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천백조원을 쏟아 부었다고 치자. 왜? 도대체 왜? 미국이 어떤 나라인데? 반듯이 천백조원 이상을 호가하는 그 어떤것이 있기에 노리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20년 동안 고스란이 쏟아부은 돈.......... 어디에 어떻게 쓰였을까?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공언한 아프가니스탄의 재건사업이나 공공분야나 국민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쓰인 돈은 거의 없다. 천삼백조원의 돈이 그냥 사라졌다. 미국이 쏟아부은 돈의 대부분이 부패한 고위관리와 군부재벌들 손에 고스란히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그 돈중의 상당부분이 이번 전쟁의 적(敵)인 탈레반에게 넘어갔다. 이것이 미국이 점령지에서 늘상 벌이고 있는 페단인 것이다.
미국은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 차지하고 천삼백조원의 돋을 쏟아부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역은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수도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도로가 정비되지도 않았고 학교도 세워지지 않았고, 병원은 소련 점령시기에 지어진 지역의료원이 마지막으로 건설된 병원이었다.
20년 동안 미군 지휘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부패한 관리와 군부재벌들끼리 짜고치는 고스톱판만 벌이다 만 것이다. 그것이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전말이다.
부패한 관리의 입장에서 미국에게 징징거리기만 하면 그냥 돈이 쏟아져 나왔다. 탈레반과 싸우기 위하여 군대를 양성해야 하는데 거기에도 군인 1인당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월급주는 돈이 들어간다. 그 총비용에 곱하기 머릿수를 해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쑥 쑥 잘나온다. 머릿수만 늘리면 들어오는 돈도 늘어간다. 숫자 확인이 나오면 사방에 흩어진 방어선때문에 돌려막기가 가능하다. 동쪽에서 인원체크한 병사가 미군 점검관이 지나가면 중간을 거쳐 서쪽까지 계속 충원되어 숫자만 늘린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숫자를 30만으로 체크하고 그들에게 돈을 계속 쏟아부었다. 막판에 실제 동원해보니 정규군은 채 7만이 되지 않았다. 완전히 버블껌이었던 것이다. 부패한 관리만 나쁜넘일까? 거기에 놀아난 미군 지휘부는?
그 부패한 관리와 군부재벌들은 착복한 돈을 어이없게도 적(敵)인 탈레반들과 나누어 가졌다. 어디 상상이라도 가능한 일일까? 탈레반이 없어지면 미군이 계속 주둔할 이유도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계속 돈이 쏟아져 들어오지도 않게된다. 적당한 분쟁과 긴장이 유지되어야 돈줄이 계속 튼튼해지는 것이다. 또 이 전쟁이 영원히 미국 주도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되면 다시 탈레반의 세상이 들어설 것이고, 부피한 관리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게된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하여 미국의 정보와 돈을 탈레반과 나누면서 미리 장기적인 보험을 들어놓게된 것이다. 한마디로 요지경속인 것이다.
부시정권의 오판에서 시작된 파렴치한 전쟁은 결국......... 미국으로 하여금 실로 엄청난 댓가를 치루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댓가가 아니라........ 앞으로도 엄청나게 미국의 발목을 잡게 될것이다.
보고서의 허위조작이 밝혀졌을때, 부시정권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뺏어야만 했다.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고 배상과 개선을 위해서 노력했어야만 했다. 그것이 진정으로 인류 평화를 위하는 길이었다.
'테러를 단절시키는 것이 부시정권의 사명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부시에게 나는 묻고 싶다. '테러와 전쟁이 어떻게 다른것이냐' 라고 말이다. 테러는 정당성과 명분이 없어보이고, 전쟁은 싸나이답게 정정당당하게 한바탕 뜨는것(?) 이라고? 사람 죽어나가는 것은 매 한가지인데.........'
'부시는 전직 미국대통령이 분명하지만........ 그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는 부시시가 아니라 부실투성이다' 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2002년 새해에 들어서 이제 미국은 따가운 세계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전쟁범죄자 처지였기 때문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 재건 자문위원회를 만들고 세계적 학자들을 초빙해 장기적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어디까지나 언론 플레이용 계획일 뿐이었다. 시골 학교 하나 보건소 하나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을 천조원 이상이나 쏟아부으면서 말이다.
대신 침략전쟁의 명분을 위해서 끝까지 빈 라덴의 색출을 위한 추격은 계속되었다. 지상군을 증파하고 고산지역을 수색할 산악사단이 새롭게 꾸려진다. 그리고 2월 27일에는 마침내 한국군 의료지원단인 동의부대 1진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3월부터 대대적으로 시작된 '아나콘다 작전'으로 샤히코트 계곡에 은거하던 800~1500 명의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소탕토벌되었다. 이로써 이제 아프가니스탄에 알카에다는 탈레반의 근거지와 세력은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알카에다는 주변국가로 뿔뿔히 흩어졌고, 소수의 탈레반만이 보다 높은 산악지대로 근거지를 옮겼다. 미군은 숨고르기에 들어갔고 점차 아프가니스탄인 민생안정으로 관심을 돌리고자 했다.
하지만 세계 언론들은 끊임없이 미국과 부시정권의 만행을 비판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시작부터가 조작된 진실에 의한 전쟁범죄였으며,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모두 도망치거나 제거된 당시 상황까지도 정작 빈 라덴의 행방은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어디에선가 죽고 없는 사람을 미국이 모함을 씌운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어졌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사라지고 없는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이 왜 쳐들어가서 아직까지 점령하고 있느냐는 비판까지 일고 있었다. 비판은 세계각지로 번져나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파병반대와 미군철수를 외치는 군중데모까지 있었다.
부시정권에게는 다시 심각한 위기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텍사스 서부 사나이 출신답게 이번에도 부시는 정면돌파를 지향했다.(람보 스타일)
느닷없이 부시정권은 이번엔 이라크를 거론하고 나선것이다. 그러면서 '테러와의 전쟁 연장선상' 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았다.
안하무인 부시의 주장은 대략 이러했다.
1) 과거에 이라크는 대량 살상무기를 이미 보유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으며, 그 가능성이 세계 안보 환경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2)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을 탄압하는 등 압정을 일삼는 독재자이다. 3) 유엔 사찰을 계속적으로 방해하고 있기에 대량 살상무기의 폐기를 믿기 어렵다. 이는 분명한 유엔 안보리 687항의 위반이다. 4) 사담 후세인 정권이 여러 테러조직과 알카에다를 지원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예의 주시했던 사담 후세인은 납작 엎드리는 전략을 택했다.
무조건적인 대량살상무기 사찰을 수용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부시의 전쟁의도에서 벗어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끊임없이 이라크를 중동 지역의 위협이라고 지목하면서 대량살상무기 사찰을 주장하며 이라크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며 무장해제를 시키기에 골몰했다. 이라크는 우선 살아남기 위하여 거듭 사찰을 수용하면서 국토방위를 위한 자국의 방어권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결과를 낳게되었다. 이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이라크의 군사적 방어력을 낱낱이 파악하고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선 부시정권은 미국의 치부를 파헤치기에 혈안이 국제여론의 국면전환을 위해 또 한번의 전쟁을 감행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를 향해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란은 국제사회의 감시하에 모든 사찰을 수용했음으로 자신들은 결백하다면 미국의 횡포를 맹비난 했다.
세계 각국은 미국의 전쟁 의도를 의심하고 심각하게 우려를 자아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재판을 걱정했다.
얼핏들으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시전잡배나 늘어놓을 수 있는 황당한 궤변뿐이다.
혹, 부시가 유엔 사무총장 신분쯤 되어서 평화정착을 위해 권장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주 공손한 말과 제스쳐로 말이다.
하지만 부시는 엄연히 전쟁놀이에 심취한 호전적인 한 나라의 국가원수인 것이다. 그런 처지로 엄연하게 독립된 자주권을 가진 다른 국가의 지도자에게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할 수 있는 말은 절대 아닌것이다. 가만히 말을 지켜보면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양반어른이 자기집 하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아주 꼴통이거나 무식한 개망나니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당연한 것처럼 늘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국제사회에서 말이다.
부시의 목적은 이미 전쟁이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또 한번 전쟁을 벌여야겠다는 결심뿐이었다.
이러한 부시정권의 전쟁 속셈을 선뜻 알아차린것이 바로 영국이었다. 이내 영국은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의 옆에 나란히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보다도 빨리 부시의 의도를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린스펀 FRB 의장이었다.
부시의 속셈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통해 미국의 세계 지배체재를 확고히 함은 물론이고 속으로는 중동의 지도를 새로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의 색깔로 수놓고 싶었던 것이다.
이라크는 중동의 핵심지역인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 이란이 있고 서쪽으로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있다,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위치해 있고 북쪽의 터키를 거치면 중앙아시아의 신생독립국들과 연결되는 요충지가 바로 이라크인 것이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이라크 영내에 미군을 주둔시키게만 된다면 중동 전체의 정치지도가 미국성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보다 핵심적인 이유가 되는 이지역의 걸프만에 세계 석유 매장량의 65%가 묻혀 있다. 세계에 유통되는 석유의 약 56%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석유자원을 미국의 군사력 아래 놓이게만 만들 수 있다면 유럽이나 중국, 그리고 인도나 러시아와의 대결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것이 '테러의 근절'을 앞세우고 군대를 몰고 쳐들어가서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버리고 이라크 영토 안에 미군을 주둔시키기칸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우선을 차지하고 나서 생각해 볼 문제였다.
미국의 의도를 알아챈 영국은 잽싸게 군대 파병을 결의했다. 절대적 미국의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
차차 논의가 되겠지만.........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테러 포함)은 사실 영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영국의 독점 횡포에 프랑스가 끼어들었고 다시 미국이 끼어들면서 지금의 중동문제가, 분쟁과 전쟁과 테러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영국이 또다시 끼어 들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이라크 영토를 무단 침공했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세계 각국은 미국과 영국의 침략전쟁을 앞다투어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전쟁 중독자였다.
미국은 거듭거듭 이라크의 대량 살상무기 은닉과 사찰방해를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전쟁 중독증은 이미 아프가니스탄에서 백일하에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았던가? 그 날조된 보고서를 다시 꺼내들고 부시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벌어졌다. 4월 9일에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되었고, 5월 1일에 부시는 직접 걸프만으로 날아가 미군 항공모함 선상에서 승리의 축배를 들면서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세계는 들끓었다. 몰염치한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을 힐난했다. 그들을 전쟁 광신도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군수사업체를 먹여살리기 위해 아무 상관도 없는 나라에 쳐들어가고 폭탄을 쏟아붓고 자원을 약탈하는 야만적 행위를 규탄하자고 외쳤다. UN 이라는 기구를 앞장서서 만들어 놓고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국제법 위에 군림하려는 미국의 태도를 규탄했다. 아무리 강력한 초강대국이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는것이 세상살이다. 결국은 미국도 국제 여론에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부시는 다시 카드 하나를 꺼내들었다. 자신과 미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번엔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사찰단으로 하여금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은닉했다고 추정되는 대량 살상무기를 찾아내도록 한것이다. CIA의 보고서 조작을 근거로 미국과 영국 주도의 이라크 대량 학살무기 사찰 또한 허위와 날조로 조작될것이라고 세계 여론은 그 어느때보다 철처하게 감시하기 시작했다.
2004년 10월 미.영 합동 사찰단이 장기간 이라크 전역을 사찰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이라크 전역 어디에서도 대량 살상무기의 잔해나 흔적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거짓된 음모에 의한 반인륜적 만행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부시는 갖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방준비 위원회 그린스펀 의장이 한마디 했다.
'미국과 영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은 모두 석유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앞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석유 송유관을 몰래 파뭍는 나라가 있다.
앞으로는 마약과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마약쟁이들에게 무기를 파는 전쟁미치광이가 있다.
앞으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신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군수업자 집단이 있다.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국의 극악한 태도 변화가 한가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에는 나름의 명분과 명백한 적(敵)이 명시된다.
하지만 무도한 미제국주의자들은 이라크 전쟁에서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적들을 상대로 싸웠다. 아무리 몰아세웠지만 이라크는 대량 살상무기가 없다고 답했고, 여러차례의 사찰 결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된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쳐들어 갔다. 전쟁이 끝났어도 어디에서도 대량 살상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결과에 대해서 부시는 비겁하게 에둘러서 피해가는 변명으로 이렇게 답했다. '당장 대량 학살무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은 앞으로 틀림없이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 확보학 될것이며, 그렇게되면 이는 장차 미국에게 엄청난 위험이 될 수 있기에 부득불 이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말이다.
지금은 분명 존재하지 않지만...... 장차 미래에 미국의 위협이 될수 있다고 판단되는 미래의 적(敵)을 향한 전쟁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적이 되는 그 대상을 미국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버린다면......... '미친 부시야. 니가 조물주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위험을 창조해내고 그 결과로 적을 결정해서 군대로 하여금 죽이고 파괴해 버린다면.......... 그 억울한 피해자들의 후예들이 창조주를 흉내내는 제국주의자에게 항거하기 위하여 무기를 드는 행위를 테러라고 규정한다면......... 나는 전쟁 미치광이 패거리에 속하기 보다는, 차라리 테러리스트편에 서겠다.(부득히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말이다)
이제까지의 부시대통령과 부시정권의 핵심참모들이 행한 언행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적지않게 심각하게 걱정이 되는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테러리스트 혹은 테러의 개념이 과연 무엇인가'가 무척이나 궁굼해졌다.
테러(Terror)란, '사회 정치적인 이유로 폭력을 통해 사회적인 대규모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벌이는 무차별 파괴행위' 리고 정의하고 있다. 이 부당한 폭력행위의 결과로 선량하고 무고한 생명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에 세계는 한목소리로 무차별한 테러행위의 근절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반의 보통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엄격한 국제 관례와 국제법에 의해서 테러의 기준을 들이대고 테러리스트를 지목하고 제지하거나 체포해서 책임을 엄중하게 묻는 물리적인 제재까지가 수반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국제사회의 합의와 규정을 무시하고 오로지 미국의 시각과 미국민의 잣대로 테러를 규정하고 테러리스트를 지목하여서 미국의 눈높이에 맞추는 처벌을 행동으로 옮겨서 미국방식의 전쟁까지를 마음대로 수행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당한것이며 최선의 선택이었나 하는 문제에 봉착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게되는 것이다. 어느 특정인이, 특정 단체가, 특정 국가가 테러에 연루되지도 않았고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있음에도....... 미국의 시선으로 볼때, 장래에 미국에 위험이 되고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미국의 적이라고 규정지어 버리고, 곧 그것을 테러리스트를 대하듯이 파괴와 제거의 대상으로 삼아버리게 된다면...... 장차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변하게될것이며 인권과 자유는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당장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인 미래에 있을지도모를 미국의 경쟁상대가 모두 미국의 적(敵)이며, 모든 미국의 적은 테러리스트와 별반 다르지 않게 전쟁을 통해 응징하겠다'고 호언하는 미국의 정의와 평화는 과연 어떤것이란 말인가?
누가 왜 적(敵)이란 말인가?
나와의 아무런 은원이나 관계가 없음에도 미국이 잠재된 미래의 적일지도 모른다고 지목해버리면, 그 누군가는 인류의 공적이 되고 곧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말인가? 이는 테러와 전쟁의 악순환만을 불러올 뿐이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다시 복수가 복수의 명분을 제공하는 파국으로 향할 뿐이다.
누가 적인지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
누군가를 왜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누군가를 공격하고 빼앗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을뿐이다. 먼저 빼앗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들의 것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상의 저주받은자들(프란츠 파농의 말처럼)'은 스스로 '거대한 악마(Grand Santan)'로 둔갑해서 자신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고 무수한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일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혹시라도 더 거대한 악마가 자신들의 목숨을 언제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로 거대한 미국을 쥐고 흔드는 강경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네오콘(neocon) 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지목하는 실존하지 않지만, 어쩌면 장차 미국의 장래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대상은 미국의 적으로 규정될것이며, 테러리스트와 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식 평화에의 접근 방법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正義)인 것이다.
<이슬람이 모두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는 모두 이슬람이다.>
9.11 사태 이후에 한 서방언론은 이슬람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딱 부시정권의 생각을 고스란히 활자로 옮겨놓은듯 한 극악무도한 표현이다. 이건 이슬람을 폄하하고 심하게 모독하는 언사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으로 미국을 표현해 보기로 하자.
<미국인은 평화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쟁으로 먹고 산다. 이슬람만이 미국의 공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미국의 국익에 득이되지 않는 모든 나라는 결코 미국의 우방이 될수 없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디에 속하는가? 그 국익의 기준과 시한은 어디까지인가?>
아랍권의 소수 극진주의자들이 벌이는 테러로 모든 이슬람권을 폄하할 수는 없는것이다. 테러리스트는 극소수일 뿐이고 대부분의 이슬람 사람들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평화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규명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백인 폭력주의자들이 흑인을 무차별 살해하고 집단구타를 하곤 한다. 그것도 미국 경찰복을 입고 업무를 수행중이던 공무원 신분으로 말이다. 마약에 취하고 민주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총기를 무차별 난사해 인명피해를 양산해 내기까지 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들이 저지르는 만행과 테러가 무엇이 다른가? 자국민이 행하는 테러와 타국인이 행하는 테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국민의 테러행위는 체포해다가 변호사를 동원하는 재판을 열고 합법적인 방법의 처벌을 하면서, 타국민의 테러에 대해서는 다자고짜 군대를 동원해 쳐들어가도 된다는 말인가? UN 이나 국제사법 재판소를 자신들이 주도해 만들었으면서도, 자신들 문제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을 행사하니 말이다. 그 치외법권은 가히 지상의 것이 아니더라. 어디 지옥에서 아주 특별하게 수입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동서냉전의 시대에 우리는 세계사 시간을 통해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 가진 침략자들이 이슬람' 이라고 배웠다. 우리와 아무런 이해관계나 원한이 없는 그들을 우리는 '악마의 자손'이나 '악의 화신' 정도로 여겼다. 그런 관점과 안목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다분히 서구적 시각과 판단에 기준한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우리 국경을 침범한 일이 없을 뿐더러, 우리 국민에게 테러를 가한적도 없다. 우리에게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국민 모두가 이슬람이 적이라 부르는 유대교인이거나 기독교인도 아닌 처지로서 말이다. 이슬람의 적은 유대인과 서구인인데, 그들과 경제적 이익공동체에 얽매여 있는 약소국의 비애에서 모두 생겨나는 일일뿐이다.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 주장하는 만큼, 이슬람의 핵심 요지는 '샬롬'으로 이는 곧 '평화'를 뜻한다. 같은 존재로서 이해하고 존중해 줄 필요가 있는것이다.
'너희를 상대하여 싸우는 자에 대하여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라.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먼저 침략하지는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침략자를 사랑하지 않으신다.'(코란 2:190)
코란은 남의 땅을 빼앗고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침략을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들의 싸움은 누군가가 이슬람의 영토를 침범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종교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끝까지 신의 이름으로 싸울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어디까지나 방어적 개념의 부득이한 전쟁을 일컬음이다. 그것이 이슬람이다. 이슬람과 서구의 첫 번째 부딪침은 (십자군 전쟁) 이다. 이를 그동안은 서구적 시선으로만 교육받고 받아들였지만, 냉정하게 제 3의 시선으로 보게된다면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연합군이 흩어져 있는 이슬람의 부족민들을 상대로 벌인 무차별 침략전쟁'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나 '이라크 전쟁 사태'와 별반 다를것이 하나도 없는 광포한 백인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천인공로할 만행이다. 아무런 방비책이 없던 이슬람의 부족들은 기독교 연합군이 무자비하게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거룩한 십자군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이슬람 사람들이 살해 당했다. 그리스 정교회 사람들도 무수히 살해되었다. 성스러운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나서 3일동안 2만오천명의 유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무차별 학살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그들이 평화를 외치면서 전쟁과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즐기고 주업으로 살아가는 성스러운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백인 기독교 세계가 주장하는 정의이며 평화를 정착시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미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주의의 핵심 지휘부는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과 아랍인은 무엇이 다른가? 이슬람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 2021년 8월 30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20년 간의 대 아프간 전쟁에서 패전하고 쫓겨난 것이다.
애초부터 그릇된 전쟁이었고, 결국 참혹한 결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필연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9,11 사태에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차차 이슬람에 관해 살펴 본 이후에, 역사의 순서에 의해서 모두 살펴보고난 말미에 가서 보다 세세하게 다시 한 번 거론해 보기로 하고(끝도 없이 길어질뿐이니까) 이쯤에서 이슬람에 대한 몇가지 원론적인 사실들을 되짚어 보고나서는.......... 중동 사태의 시작부터 되짚어 살펴보는 방법이나, 아니면 이슬람의 탄생에서부터 살피면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중의 한가지를 택하여야만 할 시점인것 같아 이쯤에서 현재의 상황은 일단 생략하기로 해야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약 19억명의 무슬림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이슬람은 결코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슬람' 하면 '수니파'와 '시아파'만을 떠올린다. 대충이나마 그정도 구분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중동문제의 상당부분은 어느정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구분만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않는 문제들이 여전히 산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슬람에는 절대다수의 수니파(Sunnis)가 있고, 소수의 시아파(Shiites)가 있다. 하지만 근현대사 속에서 이슬람은 서구의 지배에 의해서 국가로 나뉘게 되고 정치권력이 들어서면서 종교문제. 부족간 문제. 정치권력 문제 등이 뒤섞이면서 수많은 새로운 문제들을 양산시키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해관계와 목적성을 두고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에서도 여러개의 새로운 종파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큰 맥락에서 이슬람은 수니와 시아로 구분되어지고 있다.
수니파와 시아파 못지않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수피파(Sufis)가 엄연히 존재한다. 수피파는 수니. 시아와 더불어 초대 3대 종파가 분명하지만 극소수의 분파에 속하면서도 아주 특이하게 신비주의적인 종파이다. 극소수라고는 하지만, 지구상의 약 19억 이슬람 중에서 약 1억명의 신자가 수피파에 속한다. 이들은 수피만의 독특한 신비적인 코란의 해석을 가지고 있으며, 보다 깊은 알라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아울러 수니. 시아와는 전혀 다른 양식의 의복과 예배의식을 수행의 방식으로 택하고 있다.
오늘날 분쟁으로 점철된 이슬람 세계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이들 수피즘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진다. 오늘날 여럿으로 파생되어 나간 종파나 이슬람 종교단체의 리더들 중에서 상당수가 바로 여기 수피즘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신을 찾기 위하여 여러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였는데, 문득 내 마음속을 들여ㅛ다 보니 그분이 그 속에서 나를 찾고 계셨다' 는 이말은 얼핏 (탈무드)나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봄직 느껴지지만 실은 수피즘의 창시자인 메블라나 루미(Mevlana Rumi)가 한 말이다.
이슬람 사회가 끝없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싸움으로만 이어지자, 일부 신학자들은 율법적이고 의례적인 정통 이슬람교가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하는 세속적 종교에 머문다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서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신비주의적인 종파로 생겨난것이 수피즘인 것이다. 이들은 고행을 중시하면서도 청빈한 생활을 최우선적인 이상적 덕목으로 꼽는다.
알라신에게 다가가려는 수행을 계속하면서도 고행을 중시하고 청빈한 생활을 이상으로 하는 이슬람인........ 하면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사람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다. 그는 실제 그렇게 살았다.
수피즘의 덕목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빈 라덴이라는 사실은........ 그렇다. 중동문제가 근본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19세기 무렵부터, 지식을 갖추고 이슬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중에 일부의 청년들이 수피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진정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이슬람 학자들이 머물고 있었다. 수피즘 학자들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점차 이 젊은이들이 목소리가 온 이슬람 세계에 퍼졌으며, 나아가 직접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이슬람인들이 이들의 새로운 생각과 비전에 동화되고 함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군주들과 부유한 사람들은 이들을 불온한 세력 내지는 정통 이슬람의 공적으로 몰아세웠다. 이들은 어둠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이 근현대사 속의 중동사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를 차차 여행하게 되다보면 곳곳의 중요한 맥락에서 수피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수피파는 분명 수니파와 시아파의 그늘에 가려있지만, 그 영향력만은 결코 작지 않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주고 싶다.
그럼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와 수피파로 구분지으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 구분은 이슬람은 절반 조금 넘을 정도로만 알게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나머지 부분까지를 모두 파악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슬람)과 (아랍), 혹은 (무슬림)과 (아랍인)의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사실 이슬람은 대단히 복잡하다. 까도까도 끝이 없는 양파 껍질 벗기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결코 불가능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또한 초기의 난해해 보이는 난관만 극복하게된다면........ 아라비안 나이트만큼 실감나게 재미있는 것이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알라에게 복종하는 사람들' 또는 '알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사람들'의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을 혼용해 쓰듯이 통상적으로 '이슬람' 혹은 '이슬람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슬람교의 초기에는 (이슬람인)이 곧 (아랍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적어도 (이슬람인) 하면 (무슬림) 이라는 말로 대체해야만 올바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무슬림)이란 표현은 이슬람 교도, 혹은 일라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현재에 가장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이슬람 교도는 모두 무슬림이다' 하지만 '이슬람 교도 모두가 아랍인은 결코 아니다' 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전제를 어떻게든 먼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를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사건들로만 바라보지 말고 거대한 퍼즐을 맞추듯이 커다란 하나의 틀에서 바라보게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이 세계사이다.
벽면을 가득채울만한 커다란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보면 볼수록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닮았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이겠지만 참 닮아도 많이 닮았다.
두 종교가 모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곳을 기준으로 많은 분쟁의 근원이 되었으며, 나름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는 기독교 영역을 중심으로, 이슬람은 이슬람의 거점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속에서 역사를 써내려 왔지만, 가만히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각기 다른 두 역사의 흐름과 풍경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갑자기 기독교 영역은 무한히 넓어졌고 종교를 넘어 하나의 커다란 세력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6백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등장한 이슬람이지만 에언자 마호메드와 그의 측근들인 4명의 칼리프 시대를 지나면서 이슬람 또한 로마에 못지않은 광대한 영역과 세력을 확보했던 것이다. 양쪽은 너무나 커지다 보니 공히 분열되고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중에 느닷없이 머나먼 동방의 끝자락에서 유목 야만민족이 침략해 왔다. 흉노족의 이동은 세계사에 일대 변혁을 초래했던 것이다. 흉노족의 침입으로 발칸반도 이북에 살고있던 두 집단의 유목민족이 서둘러 짐보따리를 싸서 급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은 로마가 위치해 있는 유럽의 중심부로 쫓겨 이동하였으며, 트르크족은 카스피해를 지나 아나톨리아 평야로 이동했다. 이 격변기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또 벌어졌다. 이동하는 게르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이동하는 투르크족에게도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던 것이다. 게르만족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 중세 봉건의 수많은 왕국들이 생겨났으며 그들은 모두 기독교 왕국이었다. 투르크족이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 아랍 특유의 부족중심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모두 이슬람 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세계사는 그렇게 19세기까지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참 많이도 닮았다.
각자의 영역에서 전혀 다른 역사를 써내려가던 기독교와 이슬람은 19세기에 들어서 또 한번 격동의 새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 중심엔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이 모든 발단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제국 영국이 엄청난 야욕을 가지고 이슬람의 영역에 침범해 들어오지 않았다면, 피로 얼룩진 현대사는 엄청나게 다르게 쓰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6세기 경의 중동(Middle East)에는 두 개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라크를 중심으로 거대한 페르시아 사산왕조가 융성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비잔틴 제국이었다. 비잔틴은 기독교(동방 정교회)에 속했으나, 페르시아에는 고대의 다신교 사상이 널리 퍼져있었으며, 그중에는 최초의 유일신 사상을 가진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와 불교와 유대교도 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동지역에 도착한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하여 인도의 향신료를 포함하는 교역품들은 아랍지역의 대상들을 통해 페르시아 지역을 통과한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모여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럽의 모든지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벌어진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치열한 세력다툼은 끝내 동서무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두 세력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한동안 동서의 교역로는 차단되기가 일쑤였다. 양대 제국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중간지대는 무법천지로 변했으며 비적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또한 아랍의 대상들이 비잔틴의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이교도로 지목되고 이단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경우마저 발생했다. 동서교역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된 것이다. 비단길을 따라 사막을 건너고 험준한 텐산산맥을 수많은 인명피해를 치루며 넘어온 교역품들이 지나가는 길이 차단된 것이다. 결국 대상들은 새로운 교역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잔틴과 페르시아가 맞붙어 있는 접경지역을 우회하는 방법이었다. 비단길을 통해 아랍 지역에 도착한 교역품들은 곧장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분쟁지역을 통하지 않고 멀고 긴 아라비아반도의 남쪽 사막을 우회해서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그 사막의 끝에는 새로운 동서무역의 떠오르는 거점도시 메카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바로 이시기에 또 하나의 교역로인 해상실크로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부는 중국에서부터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을 거쳐서 인도양의 바다에서 배에 실려 운송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도의 향신로 대부분이 이제부터는 해양실크로드를 통해 아라비아반도의 남쪽 항구인 예맨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 다시 낙타에 실려 메카로 집결하는 새로운 교역창구가 개설된 것이다. 메카에 모여든 동방의 교역품들은 다시 대상(카라반)들의 낙타에 실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통해, 일부는 유럽지역으로 지중해 무역을 통해 직접 교역하였고, 상당 물품은 비잔틴 상인들이 다마스쿠스에서 구입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져다가 다시 유럽지역에 되파는 중계무역 방식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는 모두가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기까지만 지속될 수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을 멸망케한 오스만 투르크는 실크로드의 동방 교역로를 완전 차단하고 완전 독점무역을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향신료를 구입하려면 동일한 무게의 금을 지불해야만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비단이나 향신료는 유럽의 어지간한 왕족이나 부자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콜럼부스는 인도와 중국과 통할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서 서쪽으로 대서양을 횡단했던 것이다. 지구는 둥구니까 그동안 오른쪽으로 다녔다면, 자신은 왼쪽을 통해 바닷길을 찾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해양 거점도시였던 에디오피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 끝인 예맨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주교가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수도는 티그리스강 유역의 크테시폰이었으나, 실질적인 왕국의 중심은 메카(Mecca) 였다. 동양에서 오는 교역로와 시리아(Gaza지역)를 연결하자면 반듯이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많은 비잔틴 제국의 대상들이 메카와 교역을 하기 원했으며, 메카를 거쳐 시리아를 통하면 또 다른 여러 교역로가 생겨났기 때문에 수많은 교역상인들이 메카로 몰려들었으며, 이는 도시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게 되었다.
황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쿠라이시족이 번영을 구가하던 메카로 이주하였으며 그들은 오래지 않아 지배계급으로 성장하였다. 쿠라이시족에 속하는 하심가문에서 서기 570년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름이 바로 '모하메드(Muhammed)' 였다.
모하메드는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므로 유복자가 되었으며 어머니 마저 일찍 여위게 되어 고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손에 자라다가 돌아가시자 다시 삼촌 아브딸립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삼촌 아브딸립은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웠으므로 사막을 건너다니며 무역을 해야만 했고, 모하메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를 오가며 무역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리아를 여행하면서 모하메드는 시리아의 영지주의 수도사인 한 바히라를 통해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삼촌 아브딸립은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성실함과 인성이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던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카를 향한 극진한 애정과 보살핌 덕분에 모하메드는 으젓한 청년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모하메드는 삼촌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수입이 좋은 보다 나은 직업을 찾아야만 했다. 삼촌의 소개로 무역업을 하는 대상의 집에 들어갔으며, 성실함을 인정받던중에 과부이던 대상의 주인과 결혼했다.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 모하메드는 삼촌의 아들인 알리를 양자로 입양했다. 삼촌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였다.(모하메드의 사촌동생인 알리의 등장은 훗날 이슬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다)
모하메드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종종 명상 수련을 하였는데, 매년 그는 특별히 시간을 만들어 메카 인근의 히라산(Hira)의 동굴에 들어가 몇날이고 명상에 잠기곤 했다.
모하메드의 나이가 40이 되던 해에(서기 610년) 동국속에서 명상에 잠겨있던 중에 하늘로 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받게 되었으며, 그 가르침을 기록한것이 바로 코란이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놀라운 가르침을 받은 모하메드가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이 순간을 기억할 그 무엇인가를 찾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달랑 하늘에 파란 초승달이 떠 있었다고 전한다. 하여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은 이날의 초승달을 이슬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이슬람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하메드의 초기 이슬람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모하메드는 메카를 중심으로 이슬람을 포교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메카가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기는 하지만, 메카를 실질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와 부자들에게는 무역이 아닌 또 하나의 황금알을 낳는 돈벌이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메카의 카바 신전에 있는 검은 장막 속에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운석) 신비의 돌덩이가 안치되어 있다. 당시 페르시아 지역은 무수히 많은 다신교 시대였는데, 이 검은 장막속의 신령한 운석이 모든 다신교 신앙의 절대적인 성물로 존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종교의 사람들이 메카로 몰려와 검은 운석을 향해 기도하고 제물을 받치며 건강과 행복과 장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기도행렬로 인하여 숙박업과 음식점과 시장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야말로 알찬 엄청난 부가 생겨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모하메드가 유일신을 외치며 등장한 것이다. 이 세상과 온 우주를 통털어 신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다고 주장했다. 그가 다신교 신앙을 폄하하며 신의 분노와 저주를 외칠때마다 카바신전의 검은 돌덩이로 인하여 생겨나던 막대한 수입이 팍팍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대신 모하메드와 이슬람에 투신한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엎드려 기도를 드렸다. 이슬람에게도 처음부터 예루살렘은 절대 성지였기 때문이다. 분노한 메카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모하메드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절명의 위기가 모하메드의 주변에서 계속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득권자들은 아예 모하메드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까운 추종자들까지 모두 한꺼번에 제거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불가피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모하메드는 주위의 요청으로 마침내 메카를 떠나 북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야스랍으로 이주한다.
모하메드가 박해를 피하고자 이주한 사건을 이슬람은 '성스러운 이주' 라는 뜻의 헤지라(Hegira) 라고 명명하였으며, 헤지라가 벌어진 (622년)을 '이슬람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자 '서기 0년'으로 하여 BC와 AD로 구분지어지는 것과는 다르게, 이슬람은 모하메드의 탄생이 아니라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는것이 다르다. 모하메드가 새로운 은신처로 삼은 야스람은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을 담은 메디나(Mdina)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이슬람의 3대 성지가 마침내 모두 역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예루살렘' '메카' 메디나'가 이슬람의 3대 성지이며, 그중에 두 곳인 메카와 메디나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속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는 비무슬림에게는 완전 통제되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다. 여행객들은 아예 도시에 접근조차 제재를 받는다. 한국여행자가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하는 방법은, 우선 국내의 이슬람 사원을 찾아가 다니면서 무슬림이 되는 방법이다. 그러고나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슬람교 신자(무슬림) 이라는 확인서를 사원으로부터 받아서 사우디 정부에 제출을 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나서야 메카와 메디나 출입허가서를 받을 수 있다.
모든 무슬림들은 예배의 방향이 메카를 향하게 되어있으며, 이 방향을 끼블라(Qiblah)라고 부른다. 모든 이슬람 사원에는 끼블라를 가리키는 움푹 파여진 막힌 출입문 같은 공간을 만들어 쉽게 그 방향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은것을 미흐랍(Mihrab)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모하메드가 살아있던 메디나 시절의 이슬람 사원에서 보면 끼블라의 방향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메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여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최우선 성지가 예루살렘이었으며 모든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하메드 사후에 4명의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치면서 어느때부터인가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끼블라가 바뀌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메디나에서 세력을 확장한 모하메드는 3차례에 걸쳐 메카 수복 전쟁을 벌이게 된다. 메카에 입성한 모하메드는 가장 먼저 카바 신전에 있던 수많은 신상들을 제거해 버렸고 '하나님은 오로지 한 분이시며 모든 우상숭배는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계속해서 시리아와 이라크를 향해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서기 632년 모하메드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570년에 태어났으니 62해를 살았던 셈이다. 나이 40세에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아 예언자의 공적 삶을 살기 시작하였으니 22년간 예언자로 살았던 셈이다.
모하메드의 갑작스런 죽음은 준비되지 못한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엄청난 파국을 일으키게 된다.
모하메드에게는 4명의 측근이 있었다. 아부 라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가 바로 그들이다. 당시의 아랍세계가 부족중심 사회였던 만큼, 이들의 관계 또한 매우 밀접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였다. 그런데 모하메드의 사망과 동시에 차기 지도자 선출(후계자) 문제가 대두되면서 이들의 관계가 매우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도자는 최고로 연장자이자 사망한 예언자 모하메드의 친구이면서 장인인 아부 라크르에게 우마르와 우스만이 합세했다는데 있었다. 알리만 따로 고립된 것이다. 알리는 모하메드를 길러준 삼촌 아브딸립의 아들로 사촌지간 이었다. 더군다나 모하메드는 알리를 양자로 입양까지 했었다. 더하여 알리는 모하메드의 하나남은 외동딸 파티마의 남편이었다.
알리와 파티마는 상주의 자격으로 모하메드의 장례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고 장례를 준비하면서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나머지 3명의 측근들과 이슬람의 수뇌부는 따로 모여서 후계자 선정과 앞으로의 문제들에 대하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문제는 알리를 포함하는 아부 라크르와 우마르와 우스만까지 4명이 모두 정당한 후계자 후보였음에도 아무도 지금의 회합을 알리에게 알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데에 있었다. 모하메드 생전에도 아들이 없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신성한 예언자의 자격은 신께서 선택하신 모하메드 가문의 핏줄에서 나와야 한다는 소문들이 떠돌아다닌적이 있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그 기준에 해당되는 사람은 알리 딱 한사람뿐이었다. 알리는 모하메드와 같은 핏줄을 가진 사촌지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모하메드의 외동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후손까지 여럿 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공동체의 부족회의(Shura)는 알리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만장일치로 아부 라크르를 이슬람의 수장으로 선출해 버린다. 신정합일을 원칙으로 하는 이슬람에서 부족회의와 군대통수권까지를 모두 아부 라크르가 차지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리가 빠지고 없는 상황에서 기획된 쿠데타와도 같은 현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모하메드 이후의 이슬람 지도자를 칼리프로 부르기로 하고 그 초대 갈리프에 아부 라크르가 선출되었으며, 칼리프의 권한과 직분을 2년으로 하여 아부 라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4사람이 돌아가면서 맡는다고 정했다. 아울러 후계자가 사망하면 그 시기에 후계자의 자손이 상속할 수 있다고 정했다.
슈라를 마친 아부 라크르와 수뇌부는 그제서야 장례식장으로 향하였는데 군대를 동원하고서 였다. 그들은 문상을 마치고 나서 부족회의의 결과를 그제서야 알리에게 통보했다. 자신을 의도적으로 빼놓고서 이미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알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상황이 여차하면 현장에서 알리를 제거하는 상황까지를 대비해서 군대까지 이끌고 온 문상이었다. 지지기반이 가장 취약했던 처지의 알리는 냉철한 판단의 결과로 승복하기로 결정했다. 부족회의의 결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초대 칼리프인 아부 라크르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서약했다.
2년 후에 우마르가 칼리프로 등극할때도, 또다시 2년 후에 우스만이 칼리프로 등극할때도 알리는 낮은 자세로 승복했고 충성 서약을 했다.
오로지 자신의 시대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때가되면 모든것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리라 수없이 다짐하면서 참고 기다렸다. 그런 알리의 속마음을 앞선 3명의 칼리프가 모를리가 있겠는가? 우스만의 시대에 들어서 아주 노골적으로 알리의 지지기반을 철저하게 제가하는 작업을 벌였다. 알리의 손과 발이 다 잘려나간꼴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알리에게는 제 피붙이와 일가친척 밖에 남지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운명의 시계는 돌고 돌아서 마침내 알리가 4번째 칼리프에 올랐다. 하지만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알리가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으로 병풍처럼 그를 음해하려는 사람들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알리는 허수아비 칼리프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전임 3명의 칼리프와 그 일가친척과 측근들이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면서 온 이슬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원성과 원망이 하나 둘 모여서 알리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고, 알리가 부강해져서 그릇됨을 바로잡아주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알리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임 칼리프 일파가 긴장하기 시작하였을 즘에 3번째 칼리프였던 우스만이 사망했다. 우스만의 모든 권력을 사위인 우마이야가 상속 세습하였는데, 그는 시리아 총독인 아부 수피안의 아들이었다. 우마이야가 아버지의 군대를 이끌고 알리 칼리프를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성공했다.
알리는 일가족만 겨우 이끌고 사막으로 달아났다. 우마이야는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끝까지 알리를 추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서 알리의 일가족을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고 뱃속의 태아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 예언자 모하메드의 핏줄이 하나도 남지 않게되면 더 이상 후계자 문제에서 정통성 시비가 이어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에언자 모하메드의 핏줄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런 결과가 나올줄을 알았다면 과연 모하메드가 예언자의 길을 걸었고 이슬람을 창제하였을까?
이 알리의 죽음에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려지게 된 것이다.
아브 라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의 시대를 이슬람은 '정통 칼리프 시대' 라고 부른다.
모하메드의 핏줄이 끊기는 비참한 알리 일가의 죽음을 두고 비분강개하면서 '육신의 핏줄을 끊어졌어도 영혼의 핏줄은 영원하다'고 외치면서 이스람의 정통성은 예언자 모하메드의 혈통에 스며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시아파)로 이란이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정통성은 혈통에 있는것이 아니라, 후계자의 덕망과 공적과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이슬람을 이끌어야 한다는 아부 라크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인 (수니파)로 구분할 수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가 맹주라 할 수 있겠다.
쿠데타에 성공한 우마이야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며 세습적인 군주제를 채택하였다. 바로 우마이야왕조(661~750)인 것이다.
그는 칼리프 시대와 구별하고 자신의 과오를 떨쳐내기 위하여 수도를 메디나를 떠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파미르 고원을 접경으로 당나라 인근까지 진출했다. 히자만 뭐니뭐니해도 우마이야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북아프리카로 진출하여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리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스페인)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로서 이슬람은 유럽의 영토내에서 약 760년간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당시에 벌어진, 우마이야 왕조의 군사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의 본토에 침공하였다가 마르텔의 군대에게 참패하지만 않았다면...... 유럽 전역이 이슬람화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볼때, 지배 영역이 마냥 넒어지게되면 결코 좋은것만은 아니라는 뼈저린 교훈이 있다.
점령한 영토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일부까지 펼쳐지게되자 더불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늘어났다. 신분계층의 분화가 심화되면서 빈부의 격차도 엄청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차별이 생겨나면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고, 불만이 곪아서 터지게 되면 자칫 생명이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엔가 본래의 이슬람인 숫자 보다도 개종하면서 흡수된 이슬람인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 새로운 개종자들을 마왈리(Mawali) 라고 불렀다. 모든 이슬람의 영역에서 다양한 직업과 분야에 걸쳐 실질적인 일은 마왈리들이 더 많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마스쿠스 중심의 이슬람인 들에 비하면 확 드러날만큼 열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적은 머리 지중해 건너 유럽에만 있는것이 아니었다. 우마이야왕조의 기득권을 모두 차지한 다마스쿠스지역의 이슬람인들의 적은, 메디나를 빼앗겼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지역의 이슬람인들 또한 우마이야왕조의 적이었던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온 이슬람 세계에 울려 퍼졌다.
그 다음에 펼쳐지는 결과야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역사는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기가 다반사겠지만, 이당시의 이슬람에서는 아래로부터 변화아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생겨나 커졌으며 결국엔 민중혁명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압바스왕조(750~1258)가 탄생하게된 것이다.
새로운 압바스왕조(Abbasid)는 시아파가 세운 왕국으로 아블 압바스(Abul Abbas)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카리프시대의 권력을 고스란히 세습한 우마이야왕조는 당연히 수니파인 셈이다. 이들 수니파에 의하여 알리 칼리프 가족이 전원 몰살을 당하면서 이제 예언자 모하메드의 핏줄은 끊어졌다고 여겨졌는데, 이슬람의 역사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비롭게도 두 가족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들 모두 분명하게 알리가 도망쳐야만 했을때 메디나에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또 다른 사촌형제(모하메드의 삼촌인 아브딸립이 아닌 다른 삼촌의 아들)을 은밀하게 모처로 알리가 심부름을 보냈던 것이다. 또 한명의 알리의 친척은 허약한 체질로 태어나 잔병치례가 많았는데 병이 깊어져서 모처에 은신하며 치료를 하느라 도망치는 알리 일행에 합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마이야 군대는 도망치는 알리 일가를 추격하여 붙잡았고, 일가족 모두를 처참하게 살해해 버렸다. 그들이 조사했던 바대로의 알리 일가 전원이 사망한것으로 확인까지 했던 상황이었다. 알리의 사촌형제는 호라산으로 도망쳤다.
호라산(Khorasan)은 이란 북동부에 있는 지역으로 이때부터 이슬람의 성스러운 장소가 된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전부와 아프가니스탄의 북부와 타지키스탄의 일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산악지역으로 '태양의 땅' 이라는 의미를 지명에 담고 있다.
알리의 사촌은 호라산 일대에 세력을 갖추고 있던 아바스 부족의 환대를 받는다. 그들 또한 알리 칼리프를 지지하면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부족이었던 것이다. 이제 마호메드의 살아남은 핏줄과 아바스부족 사이에 친분을 맺고 결혼동맹을 통해 그들은 하나로 뭉쳤으며, 발칸반도 지역에서 호시탐탐 남진을 노리는 투루크족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을 점차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우마이야왕조는 오랜 내전과 부패한 권력층으로 인해서 이미 국가체제가 붕괴 직전에 처해 있었다. 지방의 부족사회는 이니 중앙 정부의 지시를 따르기 않고 있었던 것이다.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를 기다려온 아바스부족이 마침내 호라산을 벗어나 메디나를 향해 진격했다. 자브강 전투(750)에서 아블 압바스 군대는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 마르완 2세를 체포해 처형해 버린다. 수도 메디나를 점령한 아바스가 새로운 칼리프에 등극하였으며, 바야흐로 새로운 압바스왕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바스는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명목으로 친교를 맺자고 모든 우마이야 가문의 남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초대하였다. 그리고는 성 안에 가두어 놓고 군대로 하여금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도록 처참하게 살륙했다. 알리 가문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그런데 또한번 아이러니 하게도, 이번에도 우마이야왕조 왕족의 후손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멀리 리베리아 반도로 달아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이렇게 도망친 우마이야왕조의 마지막 후손인 압드 알 라흐만은 에스파니아영토에서 세력을 확장해 스페인 영토안에 있던 이슬람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앞에서 거론한 또 한명의 모하메드 예언자의 핏줄인 먼 친척은 서쪽의 아프리카 북부로 도망쳤다. 그런데 그가 추적자를 피해 달아나는 길목마다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 지지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보호속에 서쪽으로 지중해의 끝까지 달아난 친척은 바다 건너 리베리아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을 맞았다. 리베리아를 장악한 이슬람은 수니파였기 때문이다. 아여 그는 시아파 지지자들을 이끌고 아틀라스산맥에 의지하여 내륙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 살고있던 사막민족인 베두인들이 그를 지지해 주었다. 그는 사막지역에 정착해 세력을 넓히다가 스스로 왕조를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가지 전해지고있는 모로코왕조이다.
아블 압바스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옮겼다. 더불어 압바스왕조의 기조를 모든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는 범이슬람주의를 선포했다. 역사는 이때부터의 이슬람을 제국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 제국'이 시작된 것이다.
우마이야왕조를 포함해서, 아블 압바스가 이슬람제국을 완성한 이 시기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슬람이 곧 아랍'이며, '아랍인이라는 표현이 곧 모든 이슬람사람을 가리키던 시대'라고 구분지을 수 있다.
흔하게 단순한 인종적 구분으로 사용하던 '아랍인'이라는 표현이, '이슬람을 믿으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아랍지역의 모든 부족과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었던 시대가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 하나의 종교를 넘어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총괄적으로 내포하는 문화적 개념으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아랍인들의 생활영역을 후대에 들어서 '아랍권' 이라고 이르짓게 되는 것이다.
압바스왕조 시대야말로 이슬람의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으로부터 제지술이 전해져 '종이 혁명'이 생겨났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과 문화가 도입되어 연구되고 다시 아랍어 책으로 편찬되어 널리 읽히는....... 이른바 이스람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압바스왕조가 세력을 확장하는 이면에는 종교적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정책이 큰 몫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시기의 이슬람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도 않았고 배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나 약간의 종교세를 부담하기만 하면 자유롭게 자신들의 종교활동을 보장받았다. 그럼 그 종교세가 부담되지 않았겠느냐? 아니었다. 누구든지 이슬람 신자가 된면 정해진 세금 외에 종교적인 못살고 명든자들을 위한 자선기금을 기준에 의해서 세금처럼 내야만 했든데, 그 자선기금 보다도 종교세가 훨씬 적게 책정되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보다도 이교도가 세금을 적게내는 시대였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타종교에 대한 박해나 배교를 굳이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세금마저 싼 정책을 펼치다보니 세계도처의 인재들이 이슬람 도시로 몰려들었고, 스스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당시 유럽이 지역 영주들의 횡포와 과도한 세금착취로도 모자라는 상황에 교회까지 나서서 또 이런저런 명목으로 성금을 강요하다 못해 면죄부까지 팔던 시대였으니...........
압바스왕조의 이슬람 세력은 원하던 원치 않았던 점점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으며...... 역시나 광대한 제국이 필연적으로 가지게되는 삐걱거림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적적으로 도망쳐서 리베리아반도에 세어진 후기 우마이야왕조가 계속적으로 바그다드의 압바스왕조에게 복수를 시도하였고, 제국의 보물창고였던 이집트가 새로운 시아파 지도자들에 의해서 파티마왕국으로 독립하였다. 압바스왕조에 의해서 세워진 중앙아시아 지역의 소규모 국가들이 이슬람의 보호아래 체계를 잡고 정착하게되자 서서히 압바스왕조에서 분리독립하기 위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지역적인 분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가장 심각한 두 가지로, 발칸반도의 유목민족 오랑캐였던 투르크족의 카나한조와 가즈나조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제국의 제도권 안으로 합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남쪽의 아랍지역을 호시탐탐 노려왔던 투르크족이었으니 두고두고 분쟁의 불씨가 될것은 너무나 뻔한 결론이었다.
다른 마지막 문제는 소그드인들이 이슬람화 되었기는 하나 어느 시점이되자 소그드 지역의 분리독립을 본격적으로 표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드그계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란계 민족을 뜻한다. 그들의 근거지인 소그디아나(Sogdiana)는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에 속하는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에 속한다고 보면된다. 이들 소그드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메소포타미아 평원에 정착하면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제 이들이 이슬람속의 페르시아문화를 내세우며 사만조왕조를 세우더니, 바그다드의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상황이 된것이다. 더하여 카스피해 남쪽에 들어선 부와이브조까지도 페르시아적인 이슬람을 표방하고 나선것이다.
찬란했던 '이슬람 제국' 혹은 '이슬람 왕국'은 모두 여기까지 였다. 아랍인에 의한 아랍의 세상이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아주 흔하게 말하는 아랍(Arab)을 서구사람들은 중동(Midle East) 이라고 부르지만, 그 지역을 엄밀하게 따지자면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서구식 중동이라는 표현이나, 우리방식의 서남아시아라는 표현만으로는 명확히 구분짓기가 어렵다. 우마이야왕조 후기와 압바스왕조에 걸쳐 사용된 '아랍'을 표현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로 학자들은 '레반트(Levant)지역'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울러 이는 어떤 지리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특정지역을 하나의 문화적, 역사적으로 배경을 같이하는 권역을 타나내는 용어라 이해하면 되겠다. 북쪽으로는 타우루스산맥, 서쪽으로는 지중해,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 동쪽으로는 이라크를 경계로 하는 지역으로....... 이라크를 시작으로해서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고대의 가나안지역과 팔레스탄인지역을 포함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초승달 모양의 비옥한 초지' 라고 사용되기도 한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 걸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메소포타니마의 평원지역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에서 '아랍어를 사용하며 이슬람을 신봉하는 아랍인들이 살아가는 지역'을 가리켜 '아랍(Arab)'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때까지의 모든 이슬람 사람들은 모두 레반트 지역을 중심으로(리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사람들과 아프리카에 정착한 이슬람인을 제외하고) 아랍어를 공용어로 쓰고, 아랍어로만 쓰여진 코란을 암송하는 이슬람교도 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란지역의 사만조왕조가 분리독립했다. 그들은 끝까지 페르시아 언어와 문화를 고집했다. 그들이 세력이 커져가면서........ 그동안의 이슬람은 모두 아랍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민족이었기에 아랍권 안에서 시아파와 수니파로만 갈려있었지만, 사만조왕조의 등장으로 이제 이슬람에서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민족간의 갈등이 점차 생겨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교적 갈등 위에 아랍민족과 페르시아민족간의 정취권력 문제가 새롭게 부과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니와 시아의 대립 분쟁이 점차 아랍과 페르시아의 민족 문제까지로 확대되어, 아랍계 수니파와 시아파에다가 페르시아계 수니파와 시아파까지 가세하게되면서 이제 이슬람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속으로 깊게 빠져들고 만다. 이 분쟁과 반목과 대결은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오다가 11세기를 지나면서 이슬람 사회의 모든 권력과 통치력은 지리멸렬하고 만다. 이슬람 제국은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면서 초토화되었다. 그저 드넓은 세상에 작은 부족단위로 쪼개고 나뉘어져서 하루하루 신앙과 생명을 연장해나가기에만 급급한 상황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비잔틴과 이슬람의 국경지역은 유명무실해 졌다. 무법지대로 도적들이 들끓고있을 뿐이었다. 이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비잔틴제국은 옛 로마영토의 수복을 내세우며 유럽 전지역을 세력권에 두는 정복전쟁을 이 기간동안에 벌였다. 하지만 비잔틴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그 몰락의 끝자락에서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다. 십자군의 침략 앞에서 이슬람은 나서서 맞이할 군주나 지도자가 없었다. 십자군에 대적한 군대도 없었다. 그저 나눠지고 찟어져서 간간히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있을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최고 정예군대가 아니었음에도 어처구니없게 1차 십자군원정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아시아로 건너온 십자군의 침공 소식은 온 이슬람 세계에 곧바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으려 나서지 않았다.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오랜 세월을 싸우기만 하다가 이 상황이 벌어졌는데, 더하여 기독교 십자군이 쳐들어오던 말던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럼 그렇게 정리되고 대충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까지 오는 과정과 예루살렘을 정복하고난 이후의 십자군의 처신에서 그만 이슬람은 분노하고 말았던 것이다.
교황의 명을 받고 파견된 기독교왕국의 신성한 십자군원정대가 예루살렘 성문을 부수고 들어닥치는 순간부터 사흘간 샅샅이 수색하면서 약 2만오천명의 유대인들을 어린이나 노약자나 여자나 심지어 수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강강하고 살해했다. 말 안장에 올라있는 기사의 말고삐까지 피가 차고 올랐다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기독교인이 같은 하나님의 자손인 유대인들을 그토록 처참하게 살륙하였는데 다른 이교도들인 정교회나 이슬람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는 상상에 맞기기로 해야겠다.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오는 도중인 아크레에도소 예루살렘 못지않은 만행을 이미 여러차례 저질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수많은 이슬람 사원을 때려부수는것 으로도 모자라, 마호멧이 죽음을 맞았고 승천하였다는 신성한 사원을 파괴하고 그곳을 마굿간으로 사용하는 이슬람을 극도로 모욕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그 참혹한 소식이 사막의 이슬람 세계로 펴져나갔고, 그제서야 십자군의 만행을...... 알라신에게 저들이 가한 모욕을 되갚아주어야 겠다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의 최고 정점에 살라딘 이라는 걸출한 이슬람의 영웅이 등장하게되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 원정대는 다시 몰려든 이슬람군대와 살라딘에 의해, 그들이 그동안 벌였던 만행에 대한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에 되돌려 졌으며 십자군은 다시는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된다. 20세기의 초엽까지도 말이다.
이스람이 종교성을 띤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진것에 이어서 이번엔 정치권력적인 아랍계와 페르시아계로 민족적 성격을 가진 집단으로 다시 나뉘게 된 것이다.
유럽을 침공한 칭기스칸의 손자인 훌레구에 의해서 다시 이슬람 세계는 분열되고 쫓겨나 유랑하는 처지가 되었고, 방향을 바꾼 훌레구의 몽고군대에 의해서 발칸반도의 유럽지역 상당부분이 침략 점령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바야흐로 유럽 전체가 유사이래로 가장 치명적인 위험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발칸반도에서 카스피해 지역으로 이주한 투르크 부족중에서 한 부족이 그곳에 정착하여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혼인동맹등을 통하여 점차 아랍화되어 있었다. 몽고가 쳐들어오자 투르크 부족은 드넓은 아나톨리아평원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서 생존을 위하여 군대를 만들고 차차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몽고군은 유럽지역으로 모두 물러갔다. 그러자 고만고만한 아랍부족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부족들이 용맹한 투르크 부족을 용병으로 활용하고자 하였으나, 몇 번의 아랍부족간의 전쟁을 겪은 투르크 부족장은 문득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세력을 가진 부족들간의 전쟁은 치졸한 정도였고, 주변 정세를 살펴보니 한마디로 이슬람세계가 무주공산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미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어느정도 아랍화되었다고 생각되는 투르크부족의 입장에서 세상의 주인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투르크족은 젊고 용맹한 부족장 오스만은 세력을 규합해서는 버젓이 이슬람 세계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왕국인 '오스만 투르크(지금의 터키)'를 건설한 것이다. 그는 모든 이슬람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명실상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세웠으며, 스스로 새로운 왕좌인 '술탄'에 등극하였다.
이제 이슬람의 새로운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유목민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고수하고 그들만의 언어를 계속 쓰고싶은 나름의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제 이슬람은 종교적 파벌인 수니파와 시아파 외에, 정치적 갈등의 소재가되는 민족이라는 문제가 페르시아민족 뿐이 아니라 바야흐로 실권자인 오스만투르크민족의 문제로까지 확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하여 인도양을 거쳐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전혀 다른 지역의 민족들에게까지 이슬람이 전파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체계가 매우 잘 잡혀있는 절대강국이었다. 이슬람 세계 내부에 종교적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느나, 오스만제국이라는 월등한 힘을 가진 통제력 앞에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분란을 일으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스만의 집권시기 내니 이슬람 세계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은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적어도 술탄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시기에 이슬람 세계에서는 마찰이나 분쟁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급성장한 유럽의 열강들이 이슬람 세계를 다시 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아랍진출은 오스만제국의 몰락을 불러왔고, 이는 다시 미래 세계대전의 화약고라 일컫게되는 (중동사태)를 낳게되었던 것이다.
< 사실 중동문제는 들여다보면 들여다 볼 수록 복잡한 미궁속을 헤매는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알렉산더처럼 칼로 실타래를 내리쳐 손쉽게 풀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허상처럼 보여질때도 있겠지만...... 중동의 역사는 아라비안 나이트만큼이나 재미있고 매력적이다. 처음 도입부의 낯선 언어나 표현과, 그동안 익숙해진 서구중심으로 쓰여진 역사관을 슬쩍 비틀거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만 깨우치게되면....... 그때부터는 새로운 신천지의 역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느 한곳의 퍼즐을 맞추기에만 급급해 몰두하지 말고, 대자연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과 시선으로 너른 그림의 퍼즐을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맞추어 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
-- 다음 이야기에서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전쟁을 통해서 아랍지역의 중동문제 발생 원인을 시작으로,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사태까지를 향해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자료는 준비되었으나 일과 병행하느라 시간이 부족하네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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