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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지오토의 종탑에 올라서면 르네상스가 보일까?

by 피안재 2021. 9. 16.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조금만 뒤따라 가다보면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우선 장소적인 전제조건을 기반으로 해서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인 여행을 추구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미리 선정해 둔 장소를 찾아가 눈으로 보고 사진을 찍고 동행자나 안내자에게 어떤 설명을 듣고,  더하여 토속적이던 로컬이던  음식문화 까지를 즐기면서  그속에서 여행의 멋과 맛을 누리는것을 우선으로 하는 여행을 말한다.

  나의 여행이라고 해서 그것들과 특별나게 다를 것은 없다.

  다만, 내 방식의 여행에는 장소적인 전제조건 외에 시간적인 그리고 공간적인 개념이 추가되는 여행이야말로 바로 내가 추구하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시대나 특별한 미술품이나 건축물을 만나면 나의 생각이나 사고는 어느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 시대 그 장소로 달려가곤 한다.  그곳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시공간 속에 휴머니티(humanity)가 넘쳐 흘러나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여행이고 내가 간절히 바라는 여행이다.

  특정 여행 방법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전제하에........  이제껏 내가 살아 온 인생에서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이 나에게 있어서는 패키지 여행의 전부였다.  그외에는 모두가 내 방식대로의 내가 직접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여행이 전부였다.  한때는 '우리나라 만해도 갈 곳이 넘쳐나는데 해외 여행은 무슨......' 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가서 직접 보지 않고는 못견디겠는 어떤 그리움(?)'을 더는 참지 못하고 배낭을 꾸리고 포켓 생활영어 책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고서 무작정 공항으로 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권 사용에서부터 보딩패스를 어떻게 하는지, 배낭을 어떻게 부치는지, 어디로 나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까짓꺼 남들 다 하는데 내가 못할게 뭐가 있어' 하는 *배짱을 앞세우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첫 여행지였던 쿠알라룸프 공항에 내렸는데.........  세상에 그렇게 맘이 편하고 여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지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는 지금도 어느 나라이던 다른 나라의 공항에만 도착하고 나면 그렇게 편안해 질 수가 없다.  어쩌다 서울에 올라가면 답답하고 불편하고 짜증스러워 지는데,  비행기만 떴다가 내리면  그게 어디가 되든 내집만큼 아늑하고 편안한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하여간 타고난 체질이 역마살이여.  일찍 맘 잡고 공부했으면 지금쯤 그쪽 방면에서 성공하고도 남았을텐데......'

  '마누라야.  내가 그쪽 방면에서 성공했으면 지금 이렇게 당신 손잡고 여행 못했을거야.  지금 이런게 진짜 내가 원한 인생이야........'

  '하여간 말은 기가막히게 잘 해요.  가이드 했으면 여러 여자 홀렸을텐데.........'

 

 

 

  '지오토(Giotto) 할아버지는 뭐하러 쓰잘데 없이 종탑을  이렇게 높게 만드셨을까?  하이고야. 올라가면 계단이고,  또 올라가면 계단이고, 또 계단.........  번듯한 쿠풀라 하나면 됐지 옆에다 또 이렇게 높은걸 만들어서 사람 진을 빼셔야 했을까?  그냥 그림이나 그리시래니까  건축까지 하셔가지고......... 이 쌩고생을 하게 만드시남?'

  414개의 계단을 죽어라 걸어 올라가야 종탑 전망대에 도착하는데 높이가 수직으로 85m에 이른다.

  슬쩍 어깃짱으로 마눌님의 심기를 슬쩍 건드려만 볼려고 시작한 장난이었는데 그만.........

  왜,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린적이 없는거냐고요?

  힘이 든다 싶으면 잠시 종탑의 옆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 본다.  창문 가득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 시가지가 한 눈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묵묵히 계단을 올라간다.

  붉은 두건을 머리에 쓰고 짙은 초록색의 케이프 모양 코트를 휘감듯이 길게 흘러내린 중년의 사내는 우울하고 슬픈 표정으로 주변의 그 어떤것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듯한 태도를 보이며 터덜터덜 종탑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익히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왔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네.  여기서 보니까 아까와는  또 다른 피렌체네.  여기서 보니까 이제서야 왜 다들 피렌체 종탑이 정말 아름답다고 하는지를 알것 같애. 당신 말대로 올라오기를 잘 한것 같애.  올라오지 않았다가 나중에 방송에서라도 지금 이 풍경을 보게되면 틀림없이 엄청 후회했을 거야. 올라오자고 한것 참 잘했쓰........'

  종탑의 전망대에서 주변을 한참 동안이나 둘러보던 챠밍여사는 깊은 남의 속도 모르고 환한 미소와 함께 칭찬을 늘어 놓는다.

  매 번 피렌체에 올때 마다 찾아왔던 나로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디............  ㅎㅎㅎ.  그렇다고 속사정을 털어놔서 기껏 남의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고..........

   아모르 파티여!  아모르 파티!(Amor fati!  Amor fati!)

 

  종탑의 전망대에서 서성이던 나는 좀 전에 계단에서 만났던 붉은 두건을 쓴 중년인을 다시 발견했다.

  중년인은 두오모의 쿠풀라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서 난간에 손을 얹어 엎드리다시피 하고는 무심한 눈길로 쿠풀라 지붕의 십자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옅게나마 표정의 변화나 일체의 미동도 없이 그는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마냥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저러다 혹시 뛰어내리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무심결에 그의 곁으로 다가 섰다.  순간 굳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의 고개가 돌려지면서 흠칫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과 마주쳤다.  혹시 그가 뛰어내릴지도 모르겠다는 내가 가졌던 다소 불손한 추측을 애써 감추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전망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산 로렌초 성당의 지붕을 내려자 본다.

  '근데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분명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그렇게 한참을 골똘하게 생각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휴!  챠밍여사 였다.

  '뭘 그렇게 놀래?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다가 나에게 들킨거야?  제법 쌀쌀해 졌어.  그만 내려가자.'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서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에 가득했던 사람들도 어느새 모두 앞서서 내려가고 서너 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한 통에 벌써 시간이 제법 흘러갔나 보다.

  종탑에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하다가 두오모 쿠풀라쪽을 바라보니  빨간 모자의 중년 사내는 여전히 그자리에 그대로 엎드린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내는 지금 노트에다가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챠밍여사가 먼저 계단에 내려서고  이제 내가 막 계단에 발걸음을 내딛으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 사내가 지금 무엇을 써내려가고 있는지가 너무도 궁궁해 졌다.

  나는 슬며시 사내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건너편의 두오모 쿠풀라를 다시 한 번 세세하게 살펴보는듯 한 자세를 취하면서 슬쩍 사내의 어깨 너머로 그가 쓰고 있는 글을 읽어내려 갔다.

 

 

  " 내 인생의 최고 전성기에서 문득 길을 잃고 뒤를 돌아다 보니,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순간 나는 그제서야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어둠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빛의 시대, 창조의 시대, 그리고 아름다움의 시대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내는 지금 불후의 명저가 될  <신곡>의 첫 구절을 써 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였던 것이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종탑의 계단을 모두 내려와서 육중한 출입문을 통하여 광장으로 막 나서려는 찰라에 한 젊은 청년이 느닷없이 들이 닥쳤다.  화들짝 놀라서 옆으로 비켜서는 우리에게 'Scusami, mi dispiace' 몇 번이고 외쳐대던 청년은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허겁지겁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가느 젊은 청년의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는데 얼핏 겉표지를 살펴보니 '칸초니에레(Canzoniere)' 라고 써 있었다.  '칸초니에레'라면 저 사람은 바로..........

 

" 인간은 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바다를 보고 강물을 보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경탄하지만, 정작 인간 내면에 있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테에게서 무한한 영감과 가르침을 받은 이 젊은 청년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책이 출간된 기쁨을 스승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종탑의 계단을 달려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Who am I ?'

  방금 우리를 스쳐 지나간 젊은 청년이 바로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였던 것이다.

 

  '지오토의 종탑에 올라서면 르네상스가 보일까?'

  나의 대답은 'Yes'다.

  그곳에 오르면  브르넬리스키가 있고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있다.  그리고 주변으로 보이는 것은 온통 꽃의 도시 플로렌스다.  그곳에서 보이는 모든것들이 곧 르네상스인 것이다.

 

 

 

 

 

 

 

 

 

 

 

 

 

 

 

 

 

 

 

 

 

 

 

 

 

 

 

 

 

 

 

  두오모 광장에 서면 캄피오가 설계에서부터 시작한 대성당의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우뚝 솟아있다.  광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지오토의 종탑이 보이고 산 지오반니 세례당이 보인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건물들 너머로 산 로렌초 성당의 돔이 보인다.

  피렌체의 외곽으로 멀리 나가서 도심을 바라볼 때,  도심 한가운데의 커다란 돔은 대성당의 돔이고  그 옆에 형제처럼 서 있는 돔이 보이게되는데 바로 산 로렌초 성당이다.

  우리는 이제 광장을 지나 건너편의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Muzeo Opera del Duomo)로 향한다.  광장 여기저기에서 부르넬리스키와 캄비오와 기베르티와 파사노 등 수많은 르네상스 대가들이 남긴 유산을 볼 수 있지만,  사실은 보이는 대부분이 복제품이다.  그러니까 가짜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무튼 진짜가 아닌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진짜는 박물관 안쪽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천국의 문' 앞에는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지만,  그 역시나 모조품이 세례당 동쪽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것 또한 진짜는 오페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훌륭한 문화재를 오래오래 보존하기 위해 부득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선택이었다.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 포장도로를 만든 고대 로마인들의 지혜와 식견에 나는 늘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인류 문명이 물이 있는 곳을 선택해 주거지로 삼기 시작한것은 어디까지나 천혜의 자연이 주는 혜택에 힘입었음이겠지만,  인간이 길을 개척함으로써 교류가 점차 교역으로 이어졌으며  문명이 오고가면서 집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자고 입는것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고대의 시기에 로마인들은 이미 길을 내고 다리를 만들고 더 나아가 모든 길을 포장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만들었던 길이 시대 변천사에 따라 고속도로가 되고 고속철도가 되고 통신선을 지나 인터넷 전산망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라고 치면........  2천 년 전에 포장도로를 통해 미래에 대한 꿈을 담았던 로마인들이 얼만 위대한 사람들이었는지가 새삼 느껴진다.

  내가 굳이 유럽을 자주 찾아가고자 하는 이유중에 한가지는 분명히 돌을 다듬어 만든 오래된 도로들 때문이다.  유럽의 어느곳이든 역사를 간직한 도시들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만든 포장도로를 품고 있다.  그 포장도로는 도심의 대로변을 지나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골목골목들 까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발바닥에 전해오는 투박함과 도시를 온통 회색에서 검은빛으로 마치 모자이크로 단장한듯한 그런 옛 길을........  그런 골목길을 걷는것이 그냥 한없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고 먀냥 내가 아내의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칠고 투박한 돌로 포장된 길이지만  사방으로 경사로가 즐비하고 비가 오면 매우 미끄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이런 길은 캐리어를 끄는 여행자에게는 그야말로 힘겨운 싸움터가 된다.  내가 죽어라 배낭을 고집하는 이유 또한 이런 길에 적응하기 위함도 있다.  배낭은 메고는 이런 포장도로를 얼마든지 갈 수 있다.  가다가 지치면  아무 도로변이고 배낭을 내려놓고 깔고 앉아서 쉬거나  베개 삼아 드러눕기도 자주 한다.  주변의 시선을  적어도 배낭을 지고 있으면 별로 의식하지 않아도 무난할 수 있다.  하지만 한껏 맵시를 부리고 명품 브랜드 캐리어를 끌고는 배낭여행자의 여유를 느껴볼 수가 없다.  타인의 시선부터 의식해야 할테니 말이다.  우리 여행의 무기는 무한한 시간과 배짱이다.  그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싶을 때 가고, 앉아서 쉬고 싶으면 아무데고 주저않아 쉰다.  투박한 포장도로가 있는 길을 나서면서 시작하고  그 길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 여행을 끝내고 다음을 기약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는 그 투박한 천 년 이천 년의 세월을 헤쳐나온 옛길과 골목길이 좋다.

  피렌체 두오모 광장의 돌로 포장된 도로를 거닐면서 나는 문득 땅바닥에 박혀있는 돌로 만든 벽돌이 언제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해 본다.  이는 곧 이 도로가 언제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 도시의 탄생과 궤를 같이하지 않을까 싶다.

  피렌체 두오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이렇게 건설된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익히 잘알고 있는 사실일터.......  대성당의 지하에는 본래 그 자리에 존재했던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 성당의 기초석과 잔해들이 남아 있다.  캄비오가 처음 현재의 두오모를 설계하고 착공할 당시까지도 레파라타 교회는 어느정도의 형태를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무조건 씨에나 대성당의 규모를 능가해야만 한다는 피렌체 시민들의 요구로  결국 설계는 계속 확장되었으며,  결국엔 레파라타 교회를 헐게 되었다.  그 자리가 지금의 돔 바로 아래 제단이 위치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역사책이라 할 수 있는 조반니 빌라니의 <신간 연대기>에 따르면,  두오모가 건설을 시작할 당시에 그 자리에는 이미 900년 이나 된 산타 레파라타 교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오모 착공을 1296년 으로 보고 여기에서 900년을 빼면 396년이 되고........  서기 396년 이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광장의 포장도로가 1.600년 정도 되었다는 말인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시 불쑥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여기 피렌체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활을 담당했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를 따르라'  외치며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던 희대의 영웅이 바로 피렌체를 처음 건설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씨저'라고 기억한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바람처럼 단숨에 로마에 들이닥쳤다.  로마의 공화정 정부를 이끌던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그렇게 빨리 쳐들어 올지 미처 파악하지 못해서 대비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마를 정복한 카이사르는 공화정부를 페지했다.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쳤으며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스스로 임명했다.  그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로마가 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그는 끝내 제국으로 변모한 로마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로마를 차지한 카이사르가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를 시작하고 있던 중에  최대의 걸림돌이 드러났으니 바로 군대였다.  자신이 거느리던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전광석화 처럼 로마를 침공해 차지했는데,  다른 누군가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광대한 영역에 퍼져있는 로마의 최정예 군단이 모두 절대적으로 자신을 지지한다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마의 지나간 역사가 이를 충분히 중명해 주고 있었다.  군대는 양날의 검이었다.  내 손에 쥐고 적을 공격 할 때는 더없이 훌륭한 무기가 되지만,  다른 누군가가 손에 쥐고 나를 겨눌때는 치명적인 흉기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군대를 어쩐다?'

  카이사르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왕궁과 수도를 방위하던 로마 수비대를 일정한 거리 이상의 밖으로 모두 내치는 작전이었다.  로마에는 자신이 직접 뽑아서 믿을 수 있는 정정 숫자의 근위대만이 거주한도록 했다.  로마지역 방어 수비군단은 모두 일정 거리 이상으로 밀어내 배치 했다.  최소한 군대가 이동해서 3일 이상 걸리는 지역으로 내쳤다.  그들중에서 쿠데타가 발생하면 최정예인 근위대와 튼튼한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이용해 적어도 한달은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아무리 먼 국경에서라도 자신을 구원해줄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철저한 계산하에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카이사르의 예측대로 쿠데타가 일어났다.  하지만......  막강한 근위대도 튼튼한 아우렐리우스 성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군대는 아무런 움직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쿠데타를 군대만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한 판단이 미스였던 것이다.

  피렌체는 이때 생겨났다.

  쿠데타를 두려워 한 카이사르에 의해서 로마 인근에 주둔한 군대를 변경으로 물려서 새로운 주둔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피렌체 였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평원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아르노강 옆에 로마의 군대가 주둔할 병참기지로 시작한것이 지금의 피렌체다.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다보니 군대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로마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아주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농사는 잘 되고 도로를 따라 물류가 원활해지면서 시장이 서고,  여러 위험에서는 군대가 곁에 있어서 매사에 안전이 보장되니........  자연히 살기 좋은 도시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꾸준히 사람이 모여들고 시장이 발전하다보니 엄청난 부를 소유한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 좋은 도시로 귀족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의 군대에는 세계 어디에서나 똑 같은 공통적인 순서가 전해내려 왔다.

  그들은 군대가 주둔하기 좋은 조건을 결코 선택하지 않았다.  최악의 지리적 조건일지라고 군사작전에 꼭 필요하면 무조건 그곳을 주둔지로 선택했다.  적정을 살피고 방어에 유리한 깍아지른 바위벼랑 위를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침수가 잦은 늪지라도 교통의 요지이면 마다하지 않았다.  침수지역에 흙을 퍼날라 언덕을 만들어서라도 요새를 만들었다.  작전에 유용한 지리적 요건이 우선 이었다.

  유불리를 떠나 꼭 필요한 지역이 선정되면 서둘러 방어용 목책을 둘러 치고 막사를 지었다.  그러고나면 가장 먼저 로마로 연결되는 도로를 닦는 것이 최우선 이었다.  로마로부터 빠르고 자유롭게 명령이 내려올 수 있어야 하고,  보고서가 올라가야만 했다.  그런 다음에야 보급물자 운송을 위한 도로 확충과 도로포장을 진행했다.  산을 깍고 다리를 놓았다.  마차가 마주 교차해서 다녀야 했으며,  이는 군대가 도열해서 행진하듯이 진군을 할 수 있어야만 완공이라 할 수 있었다.

  도로가 확보된면 목책을 토성이나 석성으로 증축하고 주둔지를 보완한 후에 주위로 포도나무를 심고 농토를 개량하기 시작했다.  자급자족으로 어느정도의 보급을 스스로 해결해 나갔던 것이다.

  이쯤되면 주둔지 주위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군대의 주위는 세상 그 어느곳보다 일단 안전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군대가 로마의 군대였다면,  그 주변은 이미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충분하리만치 사회기반시설이 완비되어 있다고 판단해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건설되고 도로가 완공되었으며,  물이 부족하면 수도교를 건설해서 끌어왔고,  침수지역이면 벌써 제방을 쌓고 치수시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이름난 옛 도시들은 거의 모두가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생겨난것들이 절대다수라 보면 된다.

  카이사르는 기원 전의 사람이다.  피렌체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기원전에 생겨난 군대의 주둔지였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여기 광장의 포장도로는 대충 어림잡아도 2천 년의 세월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지금 내 발자욱은 도대체 몇 번째 발자욱일까?

  '헐!!!  자그만치 2천 년이 얼마만한 시간이여?  살아 본 사람이 있어야 물어나 볼텐데......"

 

 

 

 

 

 

 

 

 

 

 

 

 

 

 

 

 

 

 

 

  <피렌체를 세세하게 둘러보았다고 해서 르네상스를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찬란하게 꽃을 피운곳은 분명 피렌체가 맞겠지만  그렇게 생겨난 르네상스는 종교의 힘을 빌어서 남쪽으로 로마와 교황청을 아름답게 수놓았으며,  북쪽으로 베네치아에서 또 한번 화려하게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더욱 번성한 르네상스는 이제 알프스를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여 르네상스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 르네상스는 한스 홀바인 등을 통해 지극히 미미한 정도가 전해졌을 뿐이다.  그 이유는 대영제국을 표방한 초강대국의 횡포에 대한 이탈리아와 나머지 유럽의 반감이 그만큼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폴랑드르 지역과 프랑스와 스페인을 빼고 이탈리아만의 르네상스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해야 하겠다.  하여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도 전반적인 르네상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의 이야기도 끌어내서 부분적으로 거론해 볼까 한다.  이것이 부득이 부제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르네상스 이야기' 라고 적은 이유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두 주인공인 준세와 아오이가 만나게 된 이유는,  두 사람이 모두 '미술 복원' 이라는 학문적 탐구를 위하여 피렌체에 있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복원 전문업체인 한 공방으로 유학을 오게된 것이 배경이었다.

  영화가 성공을 하자 느닷없이 수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미술 복원'에 대한  직업적인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이기까지 했다.  미술복원 분야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대거 늘어났다.  영화를 두 번 보았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어디까지나  좀 그저그런 흔하다면 흔한 멜로영화였을 뿐이었다.  내가 그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본 이유는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피렌체와 밀라노를 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솔직한 답변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있는 내내 '미술 복원' 이라는 분야와 직업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내 고등학교 시절의 장래 소망은 르포 라이터 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잡지에 글을 써서 기고하는 작가를 직업으로 가지고 싶었다고 해야겠다.  온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소재를 대상으로 기고문을 작성하고 멋진 사진을 찍어서 책으로 펼쳐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느정도 경력이 쌓이면 프리랜서(요즘은 다방면으로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당시에는 '자유 기고가' 라는 제법 폼 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로 전향해서  온 세상의 여러 잡지사와 신문사에 시대적 이슈나 환경 문제, 자원 문제, 인권 문제 등을 다루는 글을 전문적으로 써서 기고하는 글쟁이가 되고 싶었었다.  하지만 그러했던 나의 꿈은.......  우선 공부를 등한시 하게 되었고  나에게 닥친 주변 환경이 그리 호락호락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도 그리 했어야만 했을것을........  충분히 가능했었을것을........  그러기에 그런것을 지나버린 인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두 번째 보면서........  역사와 미술사를 유독 좋아했던 내 정서에 따르자면.........  서른 살 전쯤에 '미술 복원' 분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았더라면,  글쟁이를 포기하는 대신 미술복원사 라는 근사한 직업분야에 충분히 뛰어들고도 남았을것만 같다.

  혹,  그랬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쯤 피렌체 어딘가에 살고 있었을텐데.........

  세계 유수의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는 어김없이 미술복원 전문가들이 연구소를 만들고 상주하고 있다.  그 복원 연구소의 규모나 실력 수준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수준을 대신한다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 표현 일것이다.  오늘날의 미술복원 분야는 최첨단 무기 개발 분야나 생명공학 분야나, 코로나 백신 개발분야 못지않게 최첨단 분야에 속한다.  가히 현대적인 과학과 기술의 최고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리고 그만큼 매력적인 분야라 할 수 있다.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미술분야에 소질을 가지고 장래에 대한 계획을 구상중이 분이 혹시라도 있다면........  나는 '미술 복원' 이라는 분야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얼마나 보람있고 매력적인 직업인가?

  인간은 신석기 시대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서 부터 이미 미술품을 남겨 왔다.  세상에는 본적도 들어본적도 없는 수많은 미술품들이 널려 있다.  그런데 이 미술품이라는 녀석들은 시간과는 천적 관계이다.  미술품이 시간을 극복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보관과 보존인 것이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미술품 복원사'인 것이다.  마지막 인류가 소멸하는 순간까지  인간이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가지고 존재하는 이상.........  미술의 창조 행위와  보존을 위한 노력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술적 창조 능력을 가졌다면 미술가가 되는 것이고,  아쉽게도 창조적 능력이 없다해도 보존과 복원 분야라는 제 2의 영원한 직업이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 온 이상.........  미술품 복원에 관계되는 르네상스 이야기를 조금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해야겠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20 세기라고 한정되는 100년 동안의 미술분야를 통털어 살펴봄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두 가지만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서슴치 않고 다음 두가지를 먼저 고를것이다.

  첫째는 1911년에 벌어진 '모나리자 그림 도난 사건'을 우선적으로 꼽겠다.

  1911년 8월 22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던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사라졌다.  박물관 측이 이 사실을 알아 챈것은 24 시간이 경과되고 난 후였다.  지금 같으면 감히 생각 할 수도 없는 경우라 하겠다.  다른 그림도 아니고 모나리자가 없어졌는데도 몰랐다니........  혹 루브르 박물관이 통째로 사라졌다면 모를까?  지금 모나리자는 루브르에서도 가장 보안이 철저한 장소에 한쪽 벽면 전체를 통째로 전세내어 걸려있을 뿐더러,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가림막이 쳐진것은 물론 항공기용 방탄유리로 철저하게 가로막혀 있어서  훔쳐내기는 커녕 온전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조차 없다.  아무리 다가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나리자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모나리자의 그림이 어디에 걸려 있느냐?  루브르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유독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방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모나리자 전시실이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금액 산정이 거의 불가능한) 그림이라 해서 절대로 크게 기대는 하지 말자.  집에 자녀들 책상에서 책받침 그림으로 보는 편이 훨씬 탁월하고 유익한 선택임을 곧 깨닫게 될테니까 말이다.

  (모나리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대적인 수사가 뒤따랐다.

  처음 수사선상에 두 사람이 지목됐다.  두 사람 모두가 박물관과 미술관을 시장경제 논리에 입각해 상업주의화 되는것을 맹비난해온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선구자들 이었다.  파리의유명 시인인 아폴리네에르와  스페인 화가 피카소 였다.  하지만 곧 이들은 모나리자 그림의 도난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이 밝혀졌다.

  장기적인 수사 끝에 2년 3개월이 지나서 마침내 범인이 체포되었다.

  수시로 루브르 박물관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전시 미술품 복원에 사용되는 액자에 유리를 납품해 끼우던  빈센초 페루자란 사람이었다.  처음 그가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그냥 박물관을 나오고 있는데 아무도 지켜보거나 관심조차 두지 않기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그림 중에서 작아서 들고나가기 편하겠다 싶은것을 골라 그냥 들고나온것이 그렇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냥 심심해서 한 번 어떻게 되나 저질러 보았다는 투로 진술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당시에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서 (모나리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그리고 그 그림이 레오나드로 다빈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관계자가 아니고는 별로 없었다.  하여 실제로 (모나리자)는 안쪽의 구석진 벽면에 다른 여러 작품들과 섞여서 그나마 겨우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들고 나가기 쉬운것을 아무거나 고르다보니 눈에 띈것이 모나리자 였다'는 이야기는 나름 신빙성이 있는 범행 동기로 여겨졌었다.

  철저한 조사가 계속 진행되더니......  페루자가 피렌체의 그림상인에게 10만 달러에 모나리자를 팔려고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우선 범인이 제시한 금액이 엄청난 금액이었기에  경찰은 애초부터 페루자가 이 그림의 가치를 알고 계획적으로 훔친것이라 판단하고 계속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새로운 사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술품 위조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발피에르노가 페루자에게 모나리자 그림을 훔쳐오도록 사주했다는 사실이었다.  발피에르노가 정말로 (모나리자)의 가치를 알았던 것인지,  우연히 모나리자를 목표로 삼았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가치와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발피에르노는 솜씨가 뛰어난 위조 미술품 화가를 데려다가 실로 구분하기 힘들정도로 정교한 (모나리자)를 6 작품이나 복제해 만들었다.  그리고는 빈센초 페루자에게 모나리자를 훔쳐오면 10만 달러를 주겠노라고 사주했다.  그림을 훔치게 되면 일단 경찰의 추적이 잠잠해 질때까지 잠시 그림을 숨겨놓고 이제까지의 일상처럼 평범하게 지내고 있으면,  적절한 시기를 택해 비용을 지불하고 그림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페루자는 그림을 무사히 훔치는데 성공했고 때를 기다리며 지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사기꾼 발피에르노는 유럽의 미술품 암시장을 통해 '모나리자 진품'을 가지고 있다면서 은밀한 거래를 추진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6 명의 누군가에게 진품이라고 속여서 모조품 모나리자를 모조리 팔려고 애초부터 계획했던 것이다.  페루자가 훔쳐 온 진품은 처음부터 실제로 매입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림이 도난을 통해 어디론가 사라지는것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도난 당했다는 소문이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 털린 것이다. 갑자기 그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찾지도 않던 (모나리자)라는 그림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 그림이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남긴,  실제로 몇 개 안되는 다빈치의 작품중에 하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나리자 열풍)을 만들어 냈고,  그 광풍이 온 유럽 대륙을 뒤흔들었다.

  너무도 뜨거워진 모나리자 열풍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만 미술품 암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여론에 시달리는 경찰의 시선이 자나깨나 암시장 상인들을 감시하고 있으니 미술품 암시장이 고사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아무리 모나리자가 탐나는 진품이라 할 지라도 당장 엄청난 리스크를 떠안고 그림을 매입할 암시장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발피에르노는 위조한 모나리자를 하나도 팔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페루자가 계속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멀리 도피해 버리고 말았다.

  일확천금을 꿈꾸던 페루자에게 한계가 왔다.  더이상 발피에르노만을 믿고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림을 팔기로 결정했다.  그는 모나리자를 가지고 피렌체로 갔다.  피렌체 그림 시장이 유럽을 통털어서도 컸을 뿐만 아니라,  다빈치가 활동했던 피렌체에서라면 충분히 모나리자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나름의 계산에서 였다.  이런 철저한 모든 계산은 빈센초 페루자의 고향이 바로 피렌체 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위조 미술품을,  그것도 온 유럽을 광풍 속으로 휩쓸고 들어가고 있는 (모나리자)를 선뜻 암거래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래를 제의받은 암시장 상인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현상금에는 위험부담이 없으니까 말이다.

  (모나리자)는 무사히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먼저 번의 전시되었던 공간은 아미 아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에  최고의 완벽한 보호장치 속에 새롭게 전시되었던 것이다.

   <모.나.리.자.모.나.리.자.모.나.리.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온 세상이 (모나리자 신드롬)에 풍덩 빠져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그림이길래 그 난리법석을 떨게 했단 말인가?  루브르는 안둘러 보아도 죽기전에 (모나리자) 만은 꼭 보아야겠어 라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정도였다.

  박물관이 생긴 이후로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제대로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던 구석테기의 그림 한 점이...........  한순간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역동적인 자본주의 미술품 시장 논리가 하루아침에 작고 보잘것 없었던 그림 하나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모나리자의 도난과 회수'가 뜨거운 화제꺼리였던만큼,  범인의 재판 또한 연일 화제였다.

  그런데 이 희대의 도둑넘 께서는 재판정에 출두하면서 또 한가지 실로 기절초풍할 이슈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주의와 애국심 이었다.

  빈센초 페루자는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다.

  '내가 모나리자를 훔친 이유는........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그림이 처음부터 이탈리아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것을 이탈리아로 가져가기 위하여 훔칠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술품 도난 사건의 재판을 뛰어 넘어  이탈리아와 프랑스간의 외교분쟁으로 번질 조짐이 사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양국이 국제사법 재판소에 이문제를 제기했지만........  쉽게 결론이 내려질 수 없는.........  이것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모두 통째로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게 될지도 모르는, 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을 향해 치닺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누가 뭐라해도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속한 루브르 박물관의 고유 재산 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훔쳤던 빈센초 페루자의 논리대로라면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의 재산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돌려주어야만 제대로 원상회복이 이루어지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첨예하게 맞섰다.  그러자 수많은 나라들이 자신들의 처지와 나름의 목적에 의해서 양분되어 축면 지원에 나섰다.  도대체 빈센초 페루자가 뭐라고 떠들었기에 그렇게 되었을까?

 

  조르조 바사리가 쓴 <미술가 열전>에 보면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1503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가 새로 지은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두기 위하여,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해 와서 작업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그러니까 그림의 내용과 주문자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4년이 지났음에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 양반이 워낙 다방면에 조예가 깊고 바쁘신 분이라.........   여러가지 기계 설비해야지, 인체 해부해야지, 성곽 설계 해야지, 성채 시공 감독해야지, 타고난 재주가 많고 호기심이 많았던 대단히 분주하신  천재 양반께서는 한 곳에 들어앉아 차분히 그림을 그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다빈치는 기계공학자이면서 엔지니어였고, 인체 연구가에다가 건축 설계자이면서 시공책임자였고.......  어쩌면 화가는 부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참으로 요상망칙한 유별난 천재였다.

  모나리자의 초벌 그림이 겨우 완성되었을 정도였을때,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 스포르자의 초청을 받는다.  뛰어난 용병이었던 스포르자는 밀라노 주변을 첨예한 요새로 만들고자 하여 다빈치를  불러들인 것이다.  다소 생활에 궁핍함과 피렌체 생활에 위기를 느끼던 다빈치는 훌쩍 밀라노로 떠난다.  그런 그의 살림살이 보따리에 미완성의 모나리자가 딸려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다빈치는 모나리자 그림에 처음부터 상당한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마지막 임종시까지 자신의 곁에 두고 늘 아꼈던 그림이 바로 모나리자 였다.  하지만 밀라노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림은 별로 진척이 없었다.  밀라노 생활에도 서서히 지쳐 갔음일까?  1516년 다빈치는 느닷없이 프랑스 파리로 옮긴다.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궁정화가의 직분으로 파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모나리자는 작업을 시작한지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초벌그림 정도 상태였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몹시도 부러워하고 탐을 냈던 프랑스와 1세는 다빈치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루브르 궁전에 머물면서 프랑스와 1세를 위한 그림을 그리면서 틈틈히 모나리자를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다빈치 인생의 말기에 접어들 즈음에 마침내 모나리자는 완성되었다.

  당시에 쓴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일기와 서신에는  파리에서의 작품활동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빈치는 프랑스와 1세가 주문한 그림을 성실하게 그려서 납품했고  그때마다 후한 보상을 받았다.  주문 외에 별도의 작품 생활을 계속했으며  개인적으로 완성한 그림은 서신과 함께 피렌체로 보내 판매를 의뢰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수가 너무나 적었다.  현재 남아 있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모든 작품을 합쳐 보아도 채 20 작품 남짓할 뿐이다.  중간에 소실된 작품들에 대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프랑스와 1세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스승처럼 받들어 모셨으며 다빈치의 임종에서 장례까지를 직접 주관했다.  죽음에 임박해 다빈치는 프랑스와 1세에게 환대에 감사하는 편지와 함께 몇 작품을 선물로 남겼다.  그런데 이 마지막 선물 목록에는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모나리자)에 대한 이야기가  어디에도 없다.

  프랑스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편지와 함께 그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유품을 고귀한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게 받아 들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마지막까지 다빈치의 옆을 지켰던 (모나리자)도 포함되었다.

  그럼 이 대목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좀 더 냉철한 시각으로 어디 한 번 따져 보자.

  (모나리자)는 과연 누구의 것이 타당한가?

  프랑스는 다빈치가 임종하면서  그동안 보살펴 준 프랑스와 1세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탈리아는  피렌체 상인 조콘도가 작품을 주문하고 비용을 이미 지불하였으나 아직 완성된 작품을 납품받지 못한 상태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하며,  모나리자는 당연히 존콘도 가문의 소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콘도 가문이 대가 끊긴 상태로 문을 닫았기에  가문의 재산이 당연히 국가에 귀속되었음으로  모나리자 또한 이탈리아의 국가재산 이라고 주장한다. 더하여 이탈리아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약탈 문화재 반환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국적인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는 과거 로마제국이 약탈해간 문화재 반환 소송을 제기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탈리아가 나폴레옹이 빼앗아간 약탈문화재 반환 소송을 제기 했다.

  이를 지켜보는 영국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 졌다.  사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약 94%에 이르는 문화재가 모두 대영제국 시대에 군대를 파견해 세계 각지로 부터 약탈해 온 물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이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뜯어냈고,  이집트 신전을 뜯어내는 것으로 모자라 오벨리스크와 스핑크스를 군함에 실어 날랐다.  남미의 아마존 밀림에서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곳곳까지.........  대영박물관에 유적이나 유물이 약탈되어 전시되지 않는 국가는 아예 국가 취급도 못받을 정도로 약탈문화재로 가득 채워져 있는 곳이 바로 해가 지지않는 영원한 제국인 대영 박물관이었다.  그리이스 이집트 터키가 약탈당한 문화재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목록의 사용도는 너무도 뻔했다.

  허겁지겁 영국이 나서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꾸 이러면 우리 모두 알거지가 되는것야' 라고.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제기한 모나리자 반환 소송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계류중이다.

  어느 한 나라가 멸망하여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 한가지 결론에서 파장될 엄청난 결과를 그들은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공범이다.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문화재를 약탈한 주범 국가들인 것이다.

 

 

  두 번째로  20세기를 뒤흔든 미술사적 사건을 꼽으라면  나는 그것을 '창조주의 짓궂은 장난끼(?)' 때문에 생겨난 사건이라고 정의하겠다.  조물주의 심술이 아니라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두 번째 희대의 사건은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따금씩 다양한 방면의 천재(genius)들이 등장하여 큰 공을 세우거나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세우곤 한다.  이런 세상사를 멀찍이서 지켜만 보시던 창조주께서 하루는 무척이나 심심하셨나 보다.  그냥 재미 삼아서 천재들을 한꺼번에 왕창 세상에 쏟아부으신 것이다.  르네상스는 그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인류역사 전체를 통털어서 그렇게 동시대에 한꺼번에 천재들이 차고 넘쳐난 시대가 다시는 없었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자기의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가 하면 서로들 반목하고 다투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하면서 찬란한 시대(문예 부흥기)를 이룩해 내었다. 창조주가 한꺼번에 쏟아 낸 천재들의 숫자는 가히 세기가 불가능할 정도였고,  그들이 이룩한 아름답고 위대한 시간은 약 15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르네상스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완벽한 최고의 작품이었다.  하여 사람들은 르네상스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성된 르네상스 이상의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지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르네상스는 하나의 정형화된 틀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어떤 불변의 원칙이나 기준으로 인식되어 버리고 말았다.

  150 여년 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정형화된 르네상스에 하나 둘씩 질려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인 르네상스가 문명사의 최고 종점은 아닐것이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던 것이다.  르네상스에 신물이 난 사람들이 서서히 르네상스를 비틀고 해체하기 사작하면서 새로운것을 찾기 시작하였으니,  이 시기를 '매너리즘의 시대' 라고 한다.  뒤를 이어 등장하는 것이 '바로크 시대'인데........  이쯤에서 창조주께서는 또 한번 장난끼가 발동을 하고 만 것이다.  천재들이 아웅바웅 하던 시절을 150년 이나 지켜보자니 창조주께서도 서서히 실증이 나셨던 것이다.  그래서 들이닥쳤던 천재 무리를 한꺼번에 싹 쓸어서 치워버리고,  이제까지의 천재들과는 전혀 다른(상극)  삐딱한 말썽꾸러기 천재를 달랑 하나만 등장시켜서.......  '이렇게 만들어 버리면 이번엔 또 어떤 재미가 생기려나' 하면서 정말로 엉뚱한 망나니를 하나 쑥 세상에 내려보내셨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삐딱한 말썽꾸러기 천재는 창조주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세상을 그야말로 한바탕 광풍속으로 요동치게 만들어 버리고는 37세의 나이로 훌쩍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짧은 인생중에서 화가로 활동한 것은 불과 1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로 화끈하게 세상을 떠나니면서 온갖 편지풍파를 일으키고는 훌쩍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세상에서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도 그 망나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더 20 세기 초에 느닷없이 오래전에 요절한 말썽꾸러기 천재가 부활해  살아있을때 보다도 훨씬 세상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1회성이 아니라  벌써 1백 년이 넘어서는 이 순간까지도 실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순간에도 버젓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르네상스의 천재 집단은 150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여기 한 명의  말썽꾸러기 천재는 혼자서 100년 이상동안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1년 365일 중에서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구상의 어디에선가는 그의 특별전시회나 학술 세미나 등이 반듯이 열리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의 이름을 내 건 행사가 단 한순간도 이 지국상에서는 멈추는 경우가 없으며,  이는 거의 백년 동안 변하지 않고 예외도 없다고들 말한다.  이렇게 따지자면  그의 파급효과는 거의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고 해야만 하지 않을까?

  아마, 이런 결과가 초래하리라고는 창조주께서도 미쳐 예상하지 못했을것만 같다.

  나는 이사람을 '작은 미켈란젤로' 라고 부르지만, 미술사에서는 그를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Caravaggio; 1573~1610) 라고 부른다.

 

  '라 보체(La Voce)'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908년에 창간되어 1916년까지 발행된 문학 잡지이다.

  '목소리'란 의미를 담고있는 이 잡지는 창간사에서 부터 '새로운 형태의 인간 공존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문제를 논의' 하는 장의 역활을 목표로 내세운 만큼   사회적 인식을 같이하는 독자들로 인해서 역사적인 방법,  즉 과거의 고정적인 틀를 깨트렸다고 해서 이탈리아 전체 사회에서 엄청난 파급효과와 함께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시대의 아이콘과 같았던 '라 보체' 1911년 판에,  토리노 대학에서 졸업을 준비하던 21세의 대학생이 작성한 논문이 실렸다.

   논문을 작성한 학생의 이름은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라는 졸업생으로, 그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하나하나씩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카라바조의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와 그의 화풍이 후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기술했다. '카라바조의 그림이야 말로 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었으며, 카라바조는 진정한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 화가이자 최초의 현대 화가'라고 평가했다.  더하여, 르네상스라는 위대하고도 찬란한 문화를 가진 이탈리아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산업화에 성공한 프랑스가 유럽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이탈리아다운 빛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제 이탈리아가 다시 문화대국으로서의 위용을 되찾아야 하며,  그 시작은 바로 카라바조에서 부터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롱기의 논문과 주장은 유럽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온 유럽의 지성사회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앞다투어 카라바조를 혹평하기 시작했다.  살인 화가로서의 원죄를 따지고 들었고  종교적 신성을 훼손하고 폄하한 저급한 화가로 매도했다.  이탈리아를 장악한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르네상스를 꽃 피웠던 문화대국으로서의 이탈리아인들의 자부심에 적대국들의 파상공격에 대한 거부감으로 민족적 감정들까지 고취되기 시작했다.

  카라바조 사후(死後) 400년 동안이나 무덤속에 잠들어 있던 그의 예술혼이 20 세기에 들어서면서 느닷없이 새롭게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미술 지망생들과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찾아가게 되고 관찰하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방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카라바조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극(劇)적이면서도 또한 극(極)적인 한 사내의 인생과 작품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까지도 없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광기(狂氣)와 예술 혼(魂)으로 범벅이 된 37년의 삶의 흔적을 새롭게 찾아 낸 것이다.

  400년 만에 부활한 카라바조는 심지어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인물로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다.  카라바조의 부활은 신드롬을 넘어서 가히 혁명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인파가 느닷없이 카라바조의 그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곳곳에 의외로 여러곳에서 카라바조의 그림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미술품 매매시장에서는 결코 만날 수가 없는 아주아주 특이한 화가가 카라바조 였다.  오랫동안 잊혀지고 냉대받아서 여기저기에 널리다시피한 그의 그림이 산재해 있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줄로만 알고 대충 걸어놓고 방치하다시피했던 그의 그림들이 하루아침에 국보급으로 격상되었다고 가정을 해보자.........  미술 시장에서 가장 만나기 힘든 화가는 단연코 카라바조다.  하지만 심심찮게 새로운 카라바조의 작품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뜨거운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유럽의 어디엔가는 카라바조의 미발굴 명화가 많이 있을것으로 또한 기대를 모으는 화가도 바로 카라바조라 하겠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훌륭하고 세계적인 미술관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새로운 기준이 등장했다고 전한다.

  그것은 카라바조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느냐와 없느냐로 갈리게되며,  나아가 카라바조의 그림이 얼마나 소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숫자에 크게 영향을 실제로 끼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흔히 하는 말로 피카소 정도의 인상파 화가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피카소나 인상파 화가들의 팬들이 들으면 속상하겠지만 말이다.  르노아르나 고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전세계를 직접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더불어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겠다고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여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든 '죽기전에 반드시 찾아가서 봐야만 하는(Must Go) 목록에 올라있는 400년 만에 부활한 화가가 바로 카라바조인 것이다.

  하나의 특별 보너스(Tip)을 드린다면..........  카라바조를 만나고 싶으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자.  로마와 피렌체에 가면 실컷........  실컷 카라바조를 만날 수 있다.  몰타와 시칠리아에 몇 점 유명한 작품이 있고, 루브르 박물관에도 두 점인가가 전시되어 있지만,  로마에 가면 완전 꽁짜로 카라바조를 만날 수도 있다.  열심히 정보를 모으고 발품을 팔면........  카라바조는 꼭 그렇게 비싸고 멀리있는 화가는 아닌것이다.

 2010년 (카라바조 사망 400주년 추모 전시회)에서는 순식간에 표가 매진되고  암표가 10배 인상된 가격에 매매되었다. 5개월간 진행된 특별전시회에 출품된 카라바조의 그림은 불과 24점이 전부였다.  현존하는 카라바조의 그림은 대략 80여점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만큼 카라바조의 그림을 한자리에서 만나보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겠다.  어떤 상황 어떤 이유에서건 쉽게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몽땅 한 자리에서 관람할 기회라는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들 찾아가겠지만.........  부디 속지 마시길.........  카라바조의 그림 1~2점을 걸어놓고 <특별전> 이라고 행사를 거창하게 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유럽에는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카라바조의 그림 대부분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서 모두 볼 수 없다면........  그냥 즐겨라.  로마에선 공짜로 카라바조를 만날 수도 있고,  우피치 미술관처럼  르네상스를 전체적으로 만나보면서 카라바조의 일부를 비교적 싸게 편하게 볼 수 있는곳도 있으니 말이다.  카라바조에게 지나치게 현혹 되지는 말자.

 

 

 

 

 

 

 

 

 

 

 

 

 

 

 

 

 

 

 

 

 

 

 

 

 

 

 

 

 

  항간에서는 르네상스가 유럽의 수도원과 대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이 쫓겨나고,  비잔틴이 멸망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살길을 찾아 유럽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주하기 시작한 지식인들의 짐보따리에는 유럽 본토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고대 그리이스의 학술서와 문학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서책들이 많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교적 가깝고 상공업이 발전한 이탈리아 반도로 모여들었으며, 은신할 곳으로 수도원을 찾아들면서 새로운 문물이 옮겨왔던 것이다.  이들에 의해 아랍어 책들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하고, 점차 대학이 생겨나고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르네상스가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학설이며 주장이다.  나 또한 그들의 주장보다 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를 바라보는 사람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학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좀 더 중요한 세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르네상스에 좀 더 구체적으로 입문해 보기로 하자.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에게는 여러개의 별명이 항상 따라 붙는다.

  마지막 중세인(中世人) 이자, 최초의 인문주의자 이며, 르네상스의 개척자 라는 수식어가 늘 그의 이름 뒤에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그는 이탈리아 북부 돌로메티 지역의  해발 6천 미터급 알프스 산봉우리 암벽 등반을 즐긴  최초의 알피니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에서 법학과 수학을 전공한 페트라르카는 한때 교황청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카톨릭 신자이다.  아비뇽의 교황청 근무당시 이루지 못한 열렬한 짝사랑을 경험한 그는 로마로 돌아와 시를 쓰며 문학가의 길을 걸으며 여행과 등산을 즐기면서 틈틈이 집필 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집필한 아프리카(Africa)의 커다란 성공으로  로미 시당국으로 부터 최초의 계관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돌로메티에서 암벽등반을 마치고 하산하던 중에 페트라르카는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큰 깨달음을 얻게된다.  중세 1천년 동안 교회가 주장하고 가르쳐온 '인간은 탄생 그 자체에서부터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인의 업보를 이미 가지고 태어났다' 라는 불문율을 과감하게 깨트리게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고 고귀하게 여겨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  또한 그런 인간을 궁휼이 여기셔서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시며 십자가에 매달려 대속하신 것이다.  그렇게 볼때......  만약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죄인이라면.......  십자가의 구원은 허구이자 허상인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면.......  그것은 신도 죄인인 것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점차 페트라르카는 교황청을 거세게 비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신(神) 중심의 중세시대적 정신에서 벗어나,  인간의 아름다우면서도 고귀한 본성을 찬미하고 사랑을 자연스레 노래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해 내기 시작했다.  평생동안 베르길리우스의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조반니 보카치오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았다.  그러한 페트라르카의 시와 정신에서 르네상스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이후로 세상 사람들은 페트라르카를 '르네상스의 아버지(der Vater der Renaissance)'라 부르기 시작했다.  페트라르카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귀족과 부유한 자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판은 절대다수의 하층민인 민중들의 의식에 까지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애초부터 민중들에겐 그들만의 세상살이에 적응하는 방법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대신에 거기에 순응하는 방법을 찾았다.  권력자들의 가혹한 조세와 온갖 부역이 뒤따랐지만 나름대로 거기에 순응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적응해 갔다.  세력자들의 악덕과 방종에 항거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기 보다는 외면하거나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며 적응해 나가는 방식이 대다수 민중들이 택하는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죄악들이 온 세상을 뒤엎던 시기에........  신의 분노와 징벌이 지상에 내려졌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죽어나갔다.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스쳐지나갔을 뿐인 아무런 상관이 전혀 없는 사람들까지 무조건 죽어 나갔다.  이것은 질병을 넘어서 재앙이었다.  신의 분노였으며 무서운 질책이었던 것이다.  이 병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이란 존재의 모든 연결고리들을 토막토막 철저하게 단절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 막다른 절망의 벼랑끝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기 시작했다.

  하나는, 당장 죽음이 언제 들이닥쳐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있는 동안 모든것을 최대한 즐기자는 삶의 태도를 가진 부류였다.  세상의 종말이 내일인데 그 다음을 위해서 준비하고 비축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오늘 이순간을 최대한 즐기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다른 하나는,  신께서 타락한 인간을 심판하시기 이전에 마직막으로 강한 시험을 내리신 것이라는 부류였다.  그들은 종교적인 반성과 속죄를 희구하면서 다시 초대교회의 참 신앙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거듭거듭 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삶을 향해 굳건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부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예외적인 부류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교회와 세속의 권력자들과 부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장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거나  아니면 신의 마지막 심판이 내려진다 해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와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애초부터 전혀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 마음속에는........  신이 약속한 하늘나라가 아무리 아름답고 평화롭다고 해도  지금 이승에 자신들이 차지한 부귀영화만은 못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 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아주 특이한 이름을 가진 시인이자 철학자인 '두란테 알리기에리(Durante Alighieri)'를 빼놓고는 감히 서양 미술이나 문학을 거론 할 수 없다.  우리가 쉽게 '단테'라 부르는 이사람은  그만큼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인물이라 하겠다.  

  단테는 자신의 저작인 신곡(Divine Comedy, 神曲)을 통해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장대한 시적 비전을 통해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단테의 신곡은 한 시대의 아이콘 이었다.

  신곡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읽고 또 읽고, 신곡의 내용을 생활전반에 걸쳐서 많이 인용하는 사람이 당시의 지식인 대열에 오를 수 있으며,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며 그 사람의 교양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신곡을 인용하지 못하면 성공한 사람이나  지체 높은 신분의 대접을 절대로 받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곡은 자연스레 유럽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속에 녹아들게 되었으며,  그들의 자부심이자 그들 의식구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서구 문명과 사상과 가치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신곡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필요한 이유라 하겠다.  그만큼 서구 문명속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친 '신곡(神曲)'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 주변에서 정작 (신곡)을 읽어 본 사람을 찾으려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정말로 찾기가 어렵다. 초중고 시절 방학숙제로 낸 교양도서 읽기 숙제에서 (그리이스 로마 신화)나 (신곡) 이나 (데카메론) (레미제라불) 등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신곡)이나 (데카메론)을 읽은 사람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또 그 당시에 그렇게 읽은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우선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일것이다.  대학에서 전공을 '문학'이나 '철학'으로 하지 않고서야 보통 사람들로서 그런 서책을 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충이나마 그 내용에 대해서는 다들 알고들 있다.  그 또한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William Adolphe Bouguereau) 作.  (지옥을 찾아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단테는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행동만이 인간을 비참함(악)으로 부터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거듭거듭 이야기 한다.  더할나위 없는 싯구(詩句)로 쓰여진 자신의 작품에 단테는 '코메디' 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스로 자신이 풀어낸 표현 방법을 '저급하고 볼품 없는것들' 이라고 너스레를 떨고는 있지만,  사실은 전편에 가득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들이 넘쳐 흐른다.

  후대에 들어 (신곡)이 문학사에 있어서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것은  작품에 쓰인 언어가 이탈리아 민중의 속어(사투리 혹은 지방언어) 쓰여진 최초의 위대한 문학작품 이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공용어로 통용되는 라틴어,  로마제국의 언어로서 당시 세계에 가장 널리 쓰이는 공용어를 선택하지 않고,  그의 고향 피렌체와 인근에서만 통용되는 토스카나 지방의 언어(방언)로 신곡을 썼다.  발표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와 파장을 얻었음에도 단테는 정통 라틴어나 기타 언어로 책이 번역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테의 신곡은 오로지 토스카나어로만 책이 편찬되었다.  그러자 돈 많고 지위가 높고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신곡을 읽기 위해서 토스카나어를 배우거나,  아니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토스카나어를 독해하는 사람을 불러 책을 통역해 달라고 해야하는 희귀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점차 유럽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신곡의 내용을 인용해 아침 인사로 시작해서,  역시나 신곡의 내용을 인용해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만국 공통어였던 로마시대의 라틴어가 아니라,  토스카나 지역의 토속언어(지방 사투리)였던 흔히 말하는 피렌체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 한 권이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나아가 통용되는 언어까지 바꾸게 될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흔히들 지금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바로 단테의 신곡이 파생시킨 피렌체어 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신곡)에서 단테는 지옥과 연옥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와 함께 여행을 하는 동반자이자 안내자로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를 등장 시킨다.

  처음에는 나도 '왜 굳이 베르길리우스 였을까' 하고 많은 의구심을 가진적이 있었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참으로 신묘한 선택' 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베르길리우스는 기원 전,  그러니까 고대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인이다.  그는 줄리어스 시저의 측근이었으며 그의 암살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시저의 양자이자 정치적 기반이 전무했던 아우쿠스투스가 황제에 즉위해 기반을 쌓기까지 항상 주변에 머물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다.  시저를 존경했고 로마와 아우쿠스투스를 사랑했던 베르길리우스는 이들을 위하여 자신이 꼭 해내야만 하는 어떤 시대적 사명감을 띠고  11년간 그리이스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기간동안 그는 <아이네이스>라는 영웅 이야기를 약 1만행의 서사시로 써내려 갔다.  이 <아이네이스>에 대하여 혹평가들은 '호머의 아류, 짝퉁' 이라는 참혹한 비평을 내렸지만, T.S 엘리엇은 '모든 유럽 문학의 진정한 고전' 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나의 주관적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에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성이 다분하게 <아이네이스>를 써 내려갔기 때문이다.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는 설화와 역사가 혼재되어 있지만,  그것을 굳이 따지거나 구분하려는 노력보다는 유럽문화의 정신적 배경이 되는 어떤 성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 반면에, <아이네이스>는 특정인을 위하여 가공된 완전한 허구의 신화라고 보는 편이 오리려 타당하다는 생각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허구를 제때 바로잡지 못하면 역사를 오인 오판하게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베르길리우스 자신도 만년에 죽음을 맞이해서는  그동안 자신이 행하고 있던(꾸미고 있던) 이 가공의 설화가 낳게될 파장이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음인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아이네이스>를 불에 태워 없애버리라고 유언으로 남긴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를 완성하지 못하고, 여행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도중에 칼리브리하 항구에서 객사했다.

  하지만 그의 유언대로 책은 불에 태워지지 않았다.

  <아이네이스>는 베르길리우스가 숙명을 걸고 젊은 황제 아우쿠스투스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집필한 서사시였다.  당연히 아우쿠스투스로서는 그 책이 중요했다.  그 책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아우쿠스투스의 황제 등극에 당당한 정통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주기 위하여 쓰여진 책이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아우쿠스투스 황제 가문의 새로운 족보를 신화적으로 꾸며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아우쿠스투스 황제의 어머니 핏줄을 따라 올라가면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물루스에 이르고,  여기에서 더 올라가면 멸망한 그리이스의 고대도시 트로이의 왕족에게 까지 핏줄이 이어져 올라간다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한마디로 아우쿠스투스 황제의 핏줄에는 성스러운 고대 그리이스의 왕실 핏줄에서 이어져 내려와 로물루스를 거친  혈통 중에서도 더 이상을 없을  골든 로만 혈통이라는 이야기를 거대한 서사시로 꾸며놓았던 것이 바로 <아이네이스> 이다.  호머는 트로이가 불에 타버리면서 <일리어드>를 마쳤는데.........  베르길리우스가 다타버린 트로이에서 불씨 하나를 꺼내서(훔쳐서)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로 가져오고는 건국시조인 로물루스에게 건네 주었다가,  마침내 아우쿠스투스에 이르러 커다란 횃불로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남긴 미완성의 작품을 손에 받아든 아우쿠스투스 황제는 제국내의 뛰어난 시인들을 불러모아서 <아이네이스>를 완성하도록 명령했다.  짜집기를  끝낸 <아이네이스>는 황제의 명으로 정식 발표 되었다.

  결국 황제는 지상의 최고 권력자를 넘어서 신(神)의 반열에 가지 오르게 되었다.  황제들이 자신을 태양신 아폴로에 비유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는 훗날 나폴레옹에게 까지 이어져 내려간다.

 

  <아이네이스>는 불타는 트로이 성을 빠져 나온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둘러메고 일족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찾아 바다로 몸을 피하라는 여신의 계시를 따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유독 한 사람,  아이네이스의 아내만은 트로이 성의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왜?  남자가 세상을 주유하면서 큰 일(?)을 하자면 당연히 여러 여자와 썸씽이 생겨야만 하는데.......  사선을 함께 넘어 온 아내를 두고 여기저기 썸을 타는 남자라면 불세출의 영웅이 되기에는 커다란 핸디 캡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아마도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적절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으로는 그렇게 판단)

  21척의 배에 오른 아이네이스 일행은 7년 동안 바다를 떠돌다 폭풍우에 휩쓸려 카르타고에 도착하게 된다.  아이네이스는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에게 트로이 함락 이야기를 전하고  여왕은 아이네이스 일행이 카르타고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과부였던 디도 여왕은 아이네이스가 홀아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썸을 타기에 이른다.  선(?)을 넘은 여왕은 아이네이스에게 함께 카르타고를 통치해 줄 것을 청하지만....... (이 스토리의 창작자인 베르실리우스는 애초부터 어떻게든 아이네이스를 무조건 로마까지 끌고가기로 이미 작정한 터라)

  아이네이스는 여신의 계시가 카르타고가 아니라 세상의 어딘가 다른곳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라는 뜻이었기에 따라야 한다는 명목을 앞세우고 카르타고를 떠나 일행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도착한다.  디도 여왕은 아이네이스를 원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때 여왕이 내린 저주가 훗날 포에니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이다.

  시칠리아에 일부 부족을 남겨두고 아이네이스는 배를 북쪽으로 몰아 나폴리에 도착한다.  아이네이스는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 무녀 시뷸레의 안내로 지하세계로 내려가 카르타고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이때 아버지는 아이네이스에게 자신들의 핏줄이 새롭게 건설하게될 위대한 로마라는 국가에 대해서, 그리고 등장할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등의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준다. (먼 훗날의 미래를  영화 필름 돌리듯이 가르쳐주며 인물들의 이름과 내력까지 알려주는 과도한 친절을 묘사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계시를 넘어 쪽찝게 과외를 해준 것이다.  이런 과도한 설정이나 괴기에 가가운 뻥이 <아이네이스>를 <일리어드와 오딧세이> 아류의 3류 소설이라고 평가받게 해주고 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 온 아이네이스는 부족을 이끌고 티베르 강 어귀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토착부족들과 전쟁을 벌이며 터전을 닦아나가기 시작한다.

  그 터전 위에 로물루스와 레물르스 형제가 로마라는 국가를 건설하였고,  로마의 역사가 이어져 내려와 아우쿠스투스 황제에게 그 위대한 정통성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이야기..............

 

 

  고대 그리이스 시대에도 지하세계에 다녀오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겠으나,  신과 인간이 혼재된 고대의 이야기 속에는 심심찮게 지하세계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이스가 멸망하고 로마가 등장한 이후로는 단 한 사람도 지하세계에 다녀 온 사람이 없었다.  그리이스와 로마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지하세계를 다녀 온 사람이 바로 아이네이스 였던 것이다.

  A.D 13세기의 인물인 단테(Dante)가 직접 지하세계에 내려가 보려고 하니  절로 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  하여 부득이 지하세계를 알고 있는 가장 가까운 시대의 사람을 찾아보니 바로 B.C 1세기에 살았던 베르길리우스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분명 아이네이스를 통해 간접적이긴 하겠지만 지하세계를 경험한 유일한 경험자였던 것이다.  하여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왕복 항공권과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서 동행자로 초빙을 했던 것이다.  하긴,  베르길리우스 로서도  대충 1.300년 만의 나들이였을 터이니 흔쾌이 응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과 (연옥)을 함께 여행하게 되는 것이다.

 

 

 

 

 

 

 

 

 

 

 

 

 

 

 

 

 

 

 

 

 

 

  

  단테는  자신의 저서인 신곡(神曲)을 집필하면서 연옥편(煉獄,XI 94~96) 에서 자신의 친구에 대해 거론한다.

  '그는 이제 지오토 라고 스스로 외쳐야 한다.  분명 한동안 회화 분야를 치마부에가 주름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지오토에 의해서 치마부에의 명성은 희미해 졌다' 라고 적었던 것이다.

  치마부에가 들었으면 크게 실망했을 법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시대의 전환기에 등장한 환한 등불이었으며,  근대 정신을 가진 최초의 화가라고도 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때까지의 미술가는 공방에 속한 그림 그리는 기술자의 처지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구나 보석함 등을 그림으로 치장하는 일들을 주로 맡아서 했다.  교회에 벽화를 그리는 등 개별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지만,  직업적인 의식과 정당한 보수를 받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오토 역시 공방에 속한 공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솜씨를 익히 알던 사람들을 통해 정식으로 그림 주문이 들어왔던 것이다.  어느 순간 지오토는 공방에서 독립하여 정식으로 작품 주문과 사례를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정식 화가라는 직업과 신분으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다.  꾸준히 연구하면서 지신의 작품 영역을 넓혀갔으며 시간이 나는대로 후학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최초의 전문직업인인 화가가 바로 지오토 였던 것이다.

  지오토는 프레스코화의 대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프레스코화는 벽이나 천장에 회칠을 하고 물을 뿌린 후에 마르기 전에 데생과 물감으로 채색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빠른 작업 속도를 필요로 하는 힘든 작업이다.  그릇된 작없을 수정하려면 모조리 뜯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고도의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조르나타(giornata. 1일치 분량)를 잘 산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머리 부분인지,  팔 다리인지, 의상인지,  그날 하루에 그릴 수 있는 분량을 설정해서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한 후에  어떻게든 서둘러서 그 부분까지 단 한번에 작업을 마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힘든 과정을 먼저 이해하고 중세의 벽화들을 감상하게 된다면  절로 그 당시 작가들의 솜씨에 감탄과 갈채를 받치지 않을 수 없게될 것이다.

  지오토는 베네치아에서 비교적 가까운 파도바의 아레나 채플에 프레스코하 기법의 벽화를 그렸다.  성모 마리아의 친정쪽 가계에서 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38 가지의 소재를 가지고 벽화를 그렸다.  그중에서 채플 입구의 한 벽면 전부를 차지하는 <최후의 심판>이 특히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통곡(Lamentation)에서 성모 마리아는 죽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고, 다른 여인들이 예수의 손과 발을 부여잡고 슬퍼한다.  예수를 잘 따랐던 막내제자 요한은 두 팔을 뒤로 내뻗으며 허리 굽혀 예수의 죽음을 다시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수염이덥수룩한 나이가 찬 두 제자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 처연한듯 슬픔을 참아가며 주변을 응시하고 있다.  왼쪽으로 여인네들이 머리를 숙여 슬픔을 감추고 있는데,  그녀들의 애절한 울음소리와 슬픔이 금방이라도 화폭 밖으로 쏟아지듯  울려 나올것만 같다.  하늘을 떠 다니며 몰려드는 천사들 조차도 에수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 하고 있다.  <통곡>은 세밀화는 아니지만 힘차고 간결하게 나름으로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그 표현에 자질그레한 군더더기나 세세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림에 빠져들어 세세하게 관찰해 보면 관찰해 볼 수록  화폭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감정이 제각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은근하게 느껴지게끔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것이다.  화가의 작은붓 터치 만으로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까지 저토록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재능이 얼마나 천재적이었는 가를 지금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더하여,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치 조각 부조상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입체감이다.  이때까지의 그림들이 다분히 2차원적 이었다면,  이제 지오토를 시작으로 그림이 3차원적으로 그려지기 시자한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의 그림 감상은 화면의 어느 특정 부분에서 나머지 부분으로 옮겨가는 방식이었으나,  지오토의 뛰어난 구성력은 감상자를 그림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주변을 둘러보며 감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까지의 평면적 구성에 매달린 비잔틴 양식의 회화에서 탈피하여,  좀 더 생기있고 활기차고 현실감 있는 새로운 회화의 방식과 시대를 지오토가 개척하였던 것이다.

 

 

 

 

 

 

 

 

 

 

 

 

 

 

 

 

 

파도바의 아레나 채플에 소장되어 있는  지오토作  <통곡>

 

지오토 作  <최후의 심판>

 

 

 

 

 

 

 

 

 

 

 

   페트라르카, 단테, 지오토는 분명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을 르네상스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그들을 르네상스에 포함시키기에는 제기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과 여러 경우의 무리수가 뒤따른다.  한마디로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포함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르네상스는 세 사람으로 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이는 누구도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페트라르카, 단테, 지오토의 전환기적 시기는 때에 이르러 한 사람을 거쳐간 후에 비로소 르네상스가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시대를 역사는 '황금시대(das Goldene Zeitaleter)' 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페트라르카와 단테와 지오토를 황금시대로 불리는 르네상스로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를 꼽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것은 그의 저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Oratio de homini dignitate) 에서 시작되었음을 결단코 부인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어떤 이유에서였건 외면당하고 파뭍혀 있었던 정신적인 가치들과  사라졌던 고전 예술이 새롭게 되살아나게 된것을 흔히들 우리는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새로운 시대정신의 흐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혹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변화의 물결이 멀리 동방으로 부터 흘러왔다고 생각한다.

  13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2백년에 걸쳐 벌어진 전쟁은 유럽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가장 크게는 교황의 욕심과 판단 착오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참패함으로써 교회의 권위가 깊은 수렁으로 곤두박질 친것이었다. 오랜 전쟁을 통해 기사계급이 급성장하고 이전의 절대 권력자였던 봉건 영주들이 쇠락하면서 이제 세상은 바야흐로 군웅할거의 시대를 맏게 되었다.  대규모 군대의 이동과 물자의 이송으로 시장이 활성화되고 상인 계급이 세속의 권력자 집단으로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비록 전쟁을 통해 교류였지만  이슬람과의 조우를 통해  커피와 새로운 문물이 점차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4세기가 시작되면서 거의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굴러다니다 시피한 교회의 체면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성스러운 사태가 멀리 서쪽 리베리아 반도에서 전해져 왔다.  작은 십자군 운동이라고도 불린 '레콩키스타 운동(Reconquista)'이 에스파니아 영토에서 커다란 결실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히 로마카톨릭의 수호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과 혼인동맹을 통해 결합한 후에 그 여세를 몰아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성공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700년 이상이나 유럽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는 수도였던 톨레도를 빼앗기고 코르도바로 도망쳤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로 유럽 전체에 인구 10만을 넘는 도시가 5개에 지나지 않았던 당시에 이슬람의 세 도시(메카, 바그다드, 톨레도)는 인구 50만을 가진 세상 최고의 거대도시 였다.  스페인이 되찾은 톨레도에는 이슬람의 선진 문물이 차고 넘쳐났다.  세계 최초의 대학과 거대 시장과 앞선 과학문명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카톨릭 세계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멀고먼 동방의 야민인과고 같은 이교도들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선진 문물속에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충격을 흡수하기 위하여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에 대한 모든것을 통제하고,  모든 여론과 역량을 코르도바로 집중 시켰다.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교도를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스페인에게 내리신 사명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슬람을 코르도바에서,  그리고 그라나다를 거쳐 유럽의 영토에서 지중해를 건너 물러갈 때까지 오로지 외길의 전쟁은 계속 되었다.

  교황과 교회는 다시 크게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사벨 여왕이 추진하는 레콩키스타를 축복하고 전 유럽의 영주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교황청과 유럽의 통치자들은 이 위대한 승리를 찬양하고 자축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를 덮을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에 지나치게 빠져있던 이사벨 여왕은 거듭거듭 실책괴 패착을 저지르게 된다.  국토회복 운동은 여세를 몰아 이슬람을 코르도바에서 그라나다로 몰아내게 되었지만,  카톨릭 신앙에만 너무도 깊게 집착한 여왕은 자신의 모든 영토에 시한을 두고 카톨릭으로는 강제적 귀화를 공표하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영토에 머물고 있던 모든 이교도들(유대교. 그리스 정교회. 심지어 이슬람과 무신론자)에게 무조건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던지,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불과 열흘의 시간을 주고,  시한을 1분이라도 어기면 종교재판을 통해 이교도의 죄로 처벌하겠다고 공표했다.  이교도의 죄는 종신형이거나 사형이었다.  살기 위해서 그들은 무조건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카톨릭으로 전향하던지,  아니면 스페인 영토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인 상가와 쌓아둔 물건과 토지를 가져갈 수도 없도,  촉박한 시간에 매매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것을 포기하고 스페인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으로 무조건 배에 올랐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재물과 토지와 모든 재산이 귀족이나 국고에 쏟아져 들어갔다.  스페인 왕조도 그때는 몰랐다.  창고 가득 재물이 쌓여가는게 마냥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재물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창고에 쌓여가는 억만금 보다도 참다운 인재(人材)가 더 큰 부가가치를 지닌 보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페인 영토로 부터 연일 솓아지는 승전보로 인하여 온 유럽이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지만,  사실 그 축제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가혹한 '신의 채찍'이 교회와 교황과 유럽의 봉건 영주들의 두 뺨을 사정없이 후려 갈기고 말았던 것이다.

  메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신흥 이슬람 지배 세력) 군대가 1천년 동안 난공불락을 자랑하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함락 시켜버린 것이다.  유럽은 경악하다 못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칼 끝이 어디를 향하게 될지는 이미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투루크 군대가 발칸 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제 바다 하나 건너면 이탈리아 반도요,  알프스를 넘거나 돌아나가면 유럽의 심장부가 되는 것이다.

  다가오는 이슬람(오스만 투르크)의 거센 말발굽 앞에  유럽의 영주를 비롯한 권력자들과 부상한 부자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여 실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반목하고 대립을 일삼아 오던 세력들이 하나로 뭉치기가 어려워지자,  그들은 하나 같이 그 단합된 세력의 한 가운데 교회를 두기로 합의 했다.  교회만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중심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교회(교황)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유럽의 중심이자 핵심 세력으로 또 한번 급부상 하게 되었다.

  리베리아 반도의 종교재판을 피해서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밀려 들어 온 이슬람 세력을 피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지중해를 건너서 몰타로 시칠리아로 해서 이탈리아 반도로 속속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란을 피해 난민 유입이 시작된 것이다.(당시에도 물론 난민 유입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 제기는 있었다)  하지만 여러 유형의 봉건 영주 내지는 도시국가 형태로 존립하고 있던 이탈리아 반도에서 의견 일치된 난민 대비책을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난민들은 쏟아져 드러왔고,  자신이 살고 싶은 지역으로 이동해서 현지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날 처럼 난민 문제는 그리 간단치 만은 않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득 안고 있다.

  하지만 이 난민중에 적지 않게 많은 노다시 보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인재(人材)들이었다.  당장 가장 유용한 인재는 상인 계통에서 활동하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여러곳을 다녀 본 경험이 풍부했고,  여러개의 언어를 사용했으며,  수많은 물품을 구분하여 나누고 정리하면서 수요를 예측하고 재고 파악을 정확이 하는데 아주 뛰어난 재주를 지닌 아주 특이한 민족이었다.  시장에도 관공서에도 정리와 계산이 필요한 곳에는 유대인이 제격이었다.  더군다나 검소하고 정직한것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다음으로는 훌륭한 솜씨를 지닌 기술자 집단이 있었다.  도르래를 이요해 기중기를 일상에 활용하고,  천문을 이용해 뱃길을 찾고 날씨를 예측하고, 다양한 새로운 문물의 기계들을 만들어 냈다.  이들이 곧 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장인의 길을 걷게 된다.

  다음으로 뜨내기 서생 집단 같은 학자들 부류가 있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혀 없는 초라한 그들을 눈여겨 보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겨우 제 몸하나 빠져나온 학자들의 품속에는 유일한 소지품으로 책자들이 하나 둘 갈무리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아득한 옛날에 사라지고 버려졌던 고대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시대의 저작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서책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갈구하던 것들이 난민에 휩쓸려 학자들과 함께 다시 유럽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은 먼 길을 온 톨레도나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온 학자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유입된 학자들은 우선 거주하기 좋은 수도원에 안내되어 기거하면서 품에 가지고 온 아랍어로 쓰여진 서책들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자들이 하나 둘 자진해서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에 촉매재로 인쇄술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정말로 유럽 문명에게 커다란 복(福)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번역된 고대의 지식들이 책으로 편찬된 온 유럽에 퍼져 나각기 시작했다.

  그 번역된 책들에게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한 젊은이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피코 델라 미란돌라' 였다.  그 고대 그리이스의 문헌과 초기 로마의 교훈에서 찾아내 발표한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인 것이다.

  미란돌라가 교회 지도자들과 세속의 권력자들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당당하게 일장 연설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르네상스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임)

 

 

 

 

 

 

 

 

 

 

 

 

 

 

 

 

 

 

 

 

  온 유럽은 이제 동방으로 부터 밀려오는 이교도 무리인 오스만 투르크 군대(신흥 이슬람 세격)의 말발굽 아래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오랫동안 반목과 타락으로만 치달은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린 '신의 채찍질' 이라고 여겼다.  여기에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페스트(pest, 흑사병)가 온통 대륙을 휩쓸기 시작했다.  함께 생활하면서 마주치는 세 사람중 한 명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실로 이 어마어마한 공포를 유럽인들은 '신의 저주'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신을 향해 구원을 요청했다.  '신의 자비'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교회는 육중한 문을 안에서 잠궈버렸다.  믿음의 사람들을 저버린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했고,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지키기에만 혈안이었다.  그 중심엔 교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카타르시스 운동(Catharism)'이 생겨났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벌어질 당시의 초대교회 사람들 일부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서 세상을 등진채 기독교 신앙만을 기키며  살아왔다.  천 년이 지난 비잔틴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세상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기독교 신앙의 전통이 너무도 많이 변하고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나톨리아를 떠나온 그들의 일부가 프랑스 남부 해안의 알비(Albi)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기독교는 기존의 기독교와 너무도 달랐다.  이 특별히 다른 기독교인들을 세상은 '알비엔시안' 이라고 구분해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일부가 이탈리아 북부지방으로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 북부에서 처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교황령이라는 교황 소유의 영토를 가진 교회가 일반의 신자들로부터 별도의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백성들로 부터 거두는 각종 세금 외에  교회가 따로 거두는 세금이 더 가혹했던 것이다.  인간은 탄생 자체가 죄악인 동시에 자신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태생적 죄인인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야만 했으며,  그 댓가로 끊임없이 교회에 자발적인 봉사와 헌금 외에도 별도의 세금을 내야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알비엔시안들은 이런 교회의 세금 징수를 일체 거부하였다.  나아가서는 교회의 행위를 비판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부정했다.  교회로서는 당연히 대단히 치명적인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특별히 '성직자' 라는 단계가 필요치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으로 모든 인류는 영원히 구원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예수와 함께한 사도들은 세상 끝까지 이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평화와 행복으로 충만한 기독교 공동체적인 삶을 여위하는 생활 자체를 '교회'라고 한정짓고 부른 것이다.  이 기독교 공동체에는 특별한 리더나 책임자가 필요치 않는 공평하고 열린 사회였다.  아나톨리아의 깊숙한 오지에서  일천 년의 세월을 알비엔시안들은 그 전통을 고수하며 평화롭게 살아왔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보니 '기독교적 공동체 생활 자체'를 의미하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교황)은 세속적인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치 로마제국의 (황제)와 다를바가 전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들 눈에는 (교회)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를 빌미로 세속의 권력을 능가하는 생활 방편으로서의 직업꾼들인 (성직자) 집단이 탄생하였고,  기독교적 전통을 모조리 뜯어고쳐서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추구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온갖 조직과 체재를 거대하고도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세상을 거기에 억지로 끌어다 맞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교회는 변질되었으며,  교황청과 교황이야말로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비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다시 불어닥친 실로 교회의 위기였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교회와 교회가 가진 기득권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해체하고 평신도로 돌아갈 것인가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아무리 그렇기로......  정말로 고심은 무슨 고심?  고심을 하고 말고 따질것이 무엇이겠는가?  자신들이 차지하고 가진것이 얼마인데.......  그것을 모두 내놓고 포기한단 말인가?

  교황이 내놓은 해결책은 아주 심플하고 신속했다.  프랑스 샤를 황제의 최강 철갑기병대 3만명에게 십자군 기사라는 거룩한 명분을 내려주고는 '이단의 범죄를 저지른 알비엔시안들을 하나도 남기없이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하루아침에 2만 오천명의 알비엔시안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륙되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그들과 교류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차별 도륙을 감행했다.  알비엔시안 사람들이 가진 '카타르시즘' 자체를 이 세상에서 싸그리 지워버리고자 한 것이다.  '카타르시즘' 같은 생각과 비판이 존재하는 한  교황과 교회는 정당성과 정통성을 내세울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대량학살을 명령한 교황 알렉산드로 3세는 추후로도 생겨날지 모르는 알비엔시안과 같은 사태를 두려워하여 군대를 이 사태 이후로도 20년이나 더 주둔시키면서 철저하게 알비엔시안의 흔적을 영원히 지우려 했다.

  교회는 온 세상 사람들을 태생적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수많은 요구를 해왔다. 막말로 종교세를 걷고 헌금을 걷고 부역을 시키면서도 모자라 심지어는 면죄부를 팔아댔다.  교회가 왜 돈이 필요했고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교회를 짓고 치장했다고?  언젠가 다시 오실 구세주께서 머무실 공간으로?

  글쎄다.  교회가 창조한 그 모든 건축물과 시설들이 사실은.........  교회를 빌미로 하는 다분히 세속적인 성직자들의 생활공간인 점을 묵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개인 아파트를 초호화로 꾸미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면 세상의 지탄을 받을것이 뻔하니까,  종교를 앞세워서 더욱 거대한 궁전으로 꾸며 성직자들만의 절대적이며 성스러운 치외법권 지역으로 만들어 놓고는 자신들만이 그 안에서 머물면서 아주 특별한(?) 생활을 영유한 것이라는 비판을 썩 달가와 하지는 않겠지만,  결코 모두 허구이거나 틀린말은 또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교황의 절대적 권위와 교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모든 인간은 태생적 죄인이며 이를 속죄하는 방법은 교회의 가르침에 잘 따르고 복종하면서 재물을 끊임없이 받치는 길이다 라고 세뇌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쬐끔만 눈에 거슬리면 가차없이 교회에서 파문 시켜 버렸다. 이는 영혼을 사형시켜 버린 것이다.  죽은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이쁜짓을 하거나 돈을 싸다 바치면 금새 다시 복권 시켜 주었다.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인간 영혼의 죽음과 삶을 수시로 줬다가 빼았고,  또 줬다고 빼앗고를 심심풀이처럼 자행하는 분이 교황이었다.

  먼 곳에서 침묵중이신 하나님 보다도,  당장 눈 앞에서 죽였다 살렸다를 마음대로 하는 교황이 더 무섭고 능력에 찬 위대한 분이 아니었겠는가?(중세시대 천 년은 바로 그 같은 일로 점철된 요지경속 세상이었던 것이다)

 

  교황(교회)은 어찌되었던 알비엔시안과 카타르시즘을 세기적인 대량학살을 감행한 끝에 잠재웠다.

  하지만,  그런다고 스스로가 변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의 치부가 모두 가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성직자의 서품을 받은 한 수도사가 교회와 교황의 횡포와 그릇됨에 대하여 거칠게 항거하고 나선 것이다.  그 수도사는 말이나 글로써 항거하는 것에 결코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촉구하고 몸소 교회에 대항하는 정책을 입안하고 새로운 시대를 주창하며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한 '지롤라모 사브나롤라(Girolamo Savonarola)'는 교회와 교황의 타락과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비판을 넘어 개혁을 요구하였고,  교회가 이를 거절하자  교회의 권한을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는 시민들에 의한 자치공화정부를 만들어 실제 통치행위를 벌였다.  오늘날과 같은 초기적 민주주의 정부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수도사 이면서도 엄청난 혁명가였다. 

  교회와 교황의 반응이 어떠했을까?

  그러한 사브나롤라는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마키아벨리. 단테. 피코 델라 미란돌라. 화가 보티첼리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시대의 지성인들이 사브나롤라의 주장과 행동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와 캘빈에 의한 종교개혁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내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으로는 '지를라모 사브나 롤라'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서 부터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브나로라에 대해서는 추후 여행기 어디에선가 좀 더 세세하게 거론키로 하고.......

  아무튼,  사브나롤라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당시 피렌체에서 장래가 촉망되기로 손꼽히던 한 청년에게 모처럼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가 찾아왔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코지모 데 메디치'는 거대한 조류처럼 밀려닥치는 고대 그리이스의 학문에 크게 매료된 사람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에 심취하게된 코지모는 자신의 궁전 안에 (플라톤 아카데미)라는 연구단체를 설립하고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고대 그리이스의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마침내 '플라톤 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코지모 메디치는 이 번역된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였으며,  플라톤 사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피치노의 번역작업 완성을 축하하는 행사를 거창하게 벌였던 것이다.  코지모 메디치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전 유럽 기독교 세력권 안에 쟁쟁했던 영향으로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귀족들과 부자들과 당대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출판 기념회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번역자 피치노는 행사를 주관하면서 시작즈음에  자신의 각별한 동료이자   피렌체를 대표하는 젊은 지식인이자  뛰어난 인문주의자로 평가받던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당시 미란돌라의 나이가 21세의 약관이었으며,  그를 추천한 피치노의 나이가 51세 였으니  이들의 우정과 동료애는 30년 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관계였던 것이다. 미란돌라는 이 연설 이후 정확히 10년 뒤에 3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 또한 비운의 천재였던 것이다.

  21세의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는 연단에 서서 코지모 데 메디치를 비롯한 당시 유럽 사회의 최고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지식인들 앞에서 차분하게 좌중을 둘러보고 나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연설에 대하여 후대의 역사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이 연설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Oratio de homini dignitate)> 라는 제목까지 붙여서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존경하는 종교 지도자분들을 비롯한............  저는 우리가 이교도라 부르는 아랍의 문헌에서 이슬람 사람 아브달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존재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 대목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보다 더 경이로운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대 그리이스의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도 같은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사람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중략)

  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는 네 자신의 갈망과 네 자신의 판단이 이끄는 목적에 따라 네가 바라는 거처, 네가 바라는 모습, 네가 바라는 역활을 가지고 모든것을 누리게 될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만이 누릴 수 있는 거처나 모습을 부여하지 않았고 너만이 맡을 수 있는 아무런 역활도 부여하지 않았다...........  네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명예심을 가지고,  내가 너를 창조하였듯이 이제 너는 네 스스로를 빚고 만들 듯이 어떤 모습으로든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너에게는 네 스스로의 판단으로 더 거룩하고 고귀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제 저는 이렇게 대답하려 합니다.

  '아!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너무도 관대하십니다.  아!  인간은 얼마나 복되고 복된 존재입니까?  인간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의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니까요.  자유로운 영혼을 부여받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든 그 이후로부터든 영원토록 자신의 의도하는 대로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생명을 얻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은 온갖 인생 행로를 개척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씨앗을 주셨습니다.  그 씨앗이 어떤 씨앗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르는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서 무르익게되면,  역시 그 사람 안에서 어떤식으로든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씨앗이 꽃이었다면 사람은 꽃처럼 피어나겠지요.  지극히 이성적인 존재의 씨앗이라면 당연히 천국에 어울리는 존재로 성장할 것입니다.  지적인 존재의 씨앗이라면 아마도 하나님의 천사나 아들로 자라날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 천사이며 가장 거룩한 분의 아들이다' 라고 말씀한 예언자 아사프의 말씀은 찬양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이 연설은 분명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 사조에 크게 기여를 했다.  그것은 누구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교회(교황)의 반응은 어땠을까?

  교회는 즉시 미란돌라를 신성모독과 여러 죄목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즉각적인 처형(화형)이 예상되었으나,  교회는 미란돌라의 처형 보다 미란돌라의 반성과 회개를 통한 대외적으로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 회복에 주안점을 두었다.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만행된 고문을 가했다.  미란돌라의 오른 팔을 제외한 전신에 참혹한 고문을 가했다.  오른팔은 회개하고 작성한 반성문에 싸인을 받아야 했기에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고문을 견디지 못한 미란돌라는 교회가 작성한 반성문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그를 데려다가 치료하고 돌봐준 사람이 피치노 였다.  상처를 회복한 미란돌라는 다시 세상 앞에 나섰다.  좀 더 강력한 어조로 교회와 교황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피렌체의 아주 유명한 여자 점쟁이가 예언을 남겼다.  천재의 요절을 예언한 것이다.  교회는 다시 미란돌라를 체포했고 종교재판에 다시 회부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처벌은 벌어지지 않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몰려들어 적극적인 탄원을 시작했으며,  이미 참혹한 고문에 의한 회유와 거짓된 반성문의 정체가 탄로난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미란돌라를 석방했고  끊임없는 회유와 감시를 통해 그를 고립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31세로 요절하였다.

 

 

 

 

 

 

 

 

 

 

 

 

 

 

 

 

 

 

 

 

 

 

 

 

 

 

 

 

 

  도우모 광장을 지나다 보면 아주 유명한 두 사람의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부러 찾아다니느라 야단법썩을 떠는 사람들도 간혹 보게되지만,  피렌체에 머물게 된다면 오고가면서 수시로 넘치도록 만나게 되는 인물들이다.

  자신이 설계하고 만든 피렌체 두오모의 예배당을 바라보고 있는 캄비오(Arnolfo di Cambio)와  그 예배당 위에 돔을 건설한 브르넬리스키(Filippo B runelleschi)가 두오모의 꼭대기를 올려다 보고 있다. 

  '본조르노(Buongiorno) 캄비오!'

  '챠오(Ciao) 브르넬리스키!'

  이곳을 지날때마다 나는 이 두 분께 정중하게 인사들 드리곤 한다.  하루에 서너번을 지나더라도 말이다.

  지극히 당연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두오모 광장을 지나 뒷쪽으로 돌아가면 병풍처럼 두오모 광장을 에워싼 건물들 사이로 유독 친근하게 다가오는 3층으로된 아담하고 작은 황토색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아주 먼 옛날에  피렌체 두오모가 현재의 모습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두오모 건설 위원회' 사무실로 쓰였던 아주 유서 깊은 건물이다.  현재에는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 Opera del Duomo)을로 사용되고 있다.  세례당과 지오토의 종탑과 두오모의 쿠풀라와 오페라 박물관까지는 하나로 통합된 입장권을 사용하고 있다.  한 군데를 방문하려고 입장권을 샀다면 부랴부랴 서둘러 여러곳을 쫓아다녀야만 하는 것이다.  피렌체를,  그리고 르네상스를 보고자 왔다면 오페라 박물관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명소라 하겠다.  피렌체의 역사와 정수가 이곳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잠시 숨을 고르면서 오페라 박물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오페라 박물관)에서 이어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