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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참살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오르비에토>

by 피안재 2021. 8. 25.

 

 

 

 

 

 

 

 

 

 

 

 

 

 

 

 

 

 

 

 

 

 

 

 

 

 

   오르비에토(Orvieto).

 

  "언덕 위의 작은 마을로 기억되며 끊임없이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  소박하지만 그렇다고 초라하지는 않은 오르비에토는 도시 전체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은은한 멋을 풍기는 도시이다.

  인생에서 한번 즈음은 천천히 걸으면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듯 사이사이 많은 골목길을 지니고 있는 오르비에토는 '슬로 시티 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 느림의 철학이 있었기에 교황들이 즐겨 마실 정도로 질 좋은 와인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골목 사이를 천천히 거닐면서 전통 수공예품도 구경하고 이름모를 작은 바에 앉아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즐기는 여유를 가져보자."                 

                                                                                       ---  여행 안내책자 (이탈리아 데이) 중에서 

 

 

 

 

  그곳에는 오르비에토의 상징이랄 수 있는 두오모(Duomo)가 중심에 서 있고,  루카 시뇨렐리의 (막달라 마리아)의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Museo dell' Opera del Duomo)이 있다.  이 건물은 중세시대 오르비에토를 찾은 교황들이 머물던 궁전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오르비에토에는 약 3.000년 전에 건설된 지하도시(Orvieto Underground)가 거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수많은 동굴과 통로가 서로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 지하도시가 더욱 놀라운 것은,  지상에 건설된 현재 남아있는 구도심 보다도 더 넓은 면적으로 지하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역대 교황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던 오르비에토는 바위벼랑위의 성채라는 별명처럼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접근 통로를 차단하고 장기전에 대비한 방어시설들을 사방에서 쉽게 만날 수가 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건설된 산 파트리치오 우물(Pozzo di San Patrizio) 또한 장기 수성전에 있어서 식량 만큼이나 꼭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만든 지하 62m의 500년이나 된 우물이다.  물을 길으러 오르고 내리는데 서로 마주치거나 가로막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중 나사선 형식의 계단으로 만들어진 우물에 대해서는,  앞서서 바티칸의 브라만테 계단을 설명하면서 그 기원으로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외곽에 건설된 살라딘의 우물까지 추론해 거슬러 올라갔던 지나간 여행기를 참고해 주셨으면 한다.

  마을의 외곽이자 주요 공공정원이 있는 카엔광장을 지나면 왜 다들 오르비에토를  성채도시라 부르는지 잘 알수 있게 해주는 알보르노즈 요새(Fortezza Albornoz)가 모습을 드러낸다.  요즘의 여행객들에게는 가히 오르비에토 본 도심에 도착했을음 일깨워주는 입구처럼 여겨지는 장소로 성벽의 일부와 아름답고 거대한 성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곳에서 둘러보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움브리아 지방의 구릉지대 파노라마와 파글리아 강과 계곡의 풍경은 가히 압권이라고 하겠다.

  주변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다른 장소로는 단연코 오르비에토의 시계탑으로 알려진 토레 델 모로(Torre del Moro)를 꼽겠다.  높이 40m의 탑은 오르비에토를 요새화하는 공사중에서 참입자를 감시하기 위한 감시탑으로 처음 건설된 곳으로 360도로 바라볼 수 있는 오르비에토 구도심과 주변의 풍광이 너무나도 빼어난 명소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부 수리관계로 올라가 보지 못해 아쉬웠다.

  오르비에토가 도시화 되면서 처음 세웠던 초기 교회는 모두 폐허가 되었고,  그 폐허의 잿더미 위에 세운 교회가  성 안드레아 교회(Chiesa di Sant Andrea)이다.  이 교회는 대단히 유서가 깊은 교회로 성인 안드레아를 모시는 교회와 미션 스쿨인 성 바톨로뮤 대학이 함께 있다.  유리창이 없는 텅 빈 창문이 슝슝 뚫려있는 것 같은  도데각날 타워는 성 안드레아교회의 마스코트처럼 여행자의 발길을 잡아 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역사속에서 오르비에토의 성 안드레아 교회가 분명하게 이름을 남긴 사건은, 교황 이노첸시오 3세가 바로 이곳에서 제 4차 십자군 원정을 천명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베네치아 상단의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와의 밀약속에 이루어진 4차 십자군원정의 참혹하고도 부끄러운 비극은 아마도 처음 이곳 오르비에토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프렌체 두오모를 지은 아놀포 디 캄비오가 브레이 추기경의 무덤을 만들어 소장된 산 도미니코 교회와 산 루도비코 교회 등이 있고, 인민대장궁, 피에궁전, 글터리오 팰리스, 팔라초 페이나 등의 중세 궁전들도 산재해 있다.

 

  오르비에토는 느리게 걸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그속에서 진정한 여행의 자유로움과 멋과 품격을 누리고자 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에겐 최고의 선택지이자 축복이 될 수 있는 바로 그런 장소다.

 

 

 

 

 

 

 

 

 

 

 

 

 

 

 

 

 

 

 

 

 

 

 

 

  오르비에토 여행을 하다보면 자주 (슬로우 씨티 운동의 발생지) 라는 문구를 접하게 된다.

  오르비에토의 골목길을 걷다가 그런 글귀나 포스터를 보게되면  왠지 모르게 알싸한듯 가슴 한쪽이 저려오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서글픈 생각에 휩싸이곤 한다.

  언제부터 였을까?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삶의 질'을 논하기 시작한것이 말이다.

  (슬로우 푸드) (슬로우 씨티) (참살이) (힐링) (웰빙) (여유로운 삶) 등의 단어들이 우후죽순 처럼 쏟아져 나온것이 과연 언제부터 였을까?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참으로 잘 산다.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상층의 부자들이 즐기고 누리고 사는것에 비교하여 우리만의 상대적 평가를 우리방식의 잣대를 들이대고 '왜 나만 못사는거야' '언제 남들처럼 살아볼까' 하니까 자꾸만 못산다고 생각되는 것이지,  지극히 보편 타당한 시선으로 다른 나라나 사람들에게 비교해 보라.  과연 우리가 못사는 것인지?  객관적으로 우리나라 국민 생활 수준이 선진국 진입의 수준이라고들 말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최상층의 선진국 몇 개국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사람처럼 부를 누리고 즐기며 사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까 하는것이 내 생각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로 풍요롭게 잘 사는 국민이구나를 절실하게 느낄때가 많이 있다.

  그런 느낌을 가슴속에 담고 길을 걷다가 (슬로우 씨티) (참살이) (웰빙) (힐링) 이라는 단어를 대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우리를 앞서가신 아버지 세대분들께 적잖게 송구하고 한없이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의 아버지 세대들은 (여유로운 삶) (참살이) (웰빙) 이라는 단어를 전혀 모르고 사셨다.  모그고 사신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런 용어의 개념조차 없었다.  그들에게는 '삶의 질'을 생각해 볼 짬 조차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바램은 가족들이 추위에 떨거나 배고품에 괴로워하지 않게끔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하는 것 뿐이었다.  먼 미래나 희망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가족의 삶을 위해서 성실하게 헌신 할 뿐이었다.  그와중에 간절한 바램을 하나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면.........  자식들이 공부 잘해서 출세하여 더이상 어저지 못하는 부모같은 삶에서 탈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오로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보았고 그 마음을 알았기에 '삶의 질'을 떠올리면.......  새삼 옷깃을 여미고 부모님 세대분들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바치고 싶다.

  부모님 세대가 현실적인 절박함으로 고낭과 역경의 세대였다면,  이제 우리 세대는 돈이 최우선시 되는 물질만능의 시대에 안주하면서 '더 나은 삶(?)' '삶의 질'을 어던 장식처럼 떠올리는 세대가 아닐까?  그럼 그러한 지금의 우리 눈에 보이는 다음 세대는 어떤 세상이 될까?

  그만 두자.  다음 세대나 앞으로의 세상을 생각하면 두통과 어지러움이 마구 생겨나니까 말이다.  그것은 그냥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 두자.  어쩌면........  조물주 께서 내려오신다 해도 어찌해보실 가능성 마저도 없어 보이니까 말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희망을 가지고 무엇이든 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세대의 몫은 여기까지 였거나 아니며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내가 가졌던 혹은 허비한 시간과 노력들이 진한 아쉬움으로 내 가슴을 후벼파고들 뿐이다.

  

  '삶의 질'을 나타내는 많은 용어와 운동의 시작은 (슬로우 푸드) 에서부터 하나 둘 생겨났다고 나는 생각하고 알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슬로우 푸드 운동)이 발생했고,  이어서 여기 오르비에토에서 좀 더 발전된 양상으로 (슬로우 시티 운동)으로  확장되며 점차 단체화로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하나 둘씩 '삶의 질'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바쁘게만 사는것이 목표가 아니며' '부와 성공만이 행복의 전부일 수 없다'는 고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느리게 사는 삶' 같은 정신 세계의 혁명이랄까 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심을 하게 만들었다.  '행복한 삶' '행복한 인간'을 위해서 오늘날의 우리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분야나 사회활동 분야를 넘어서 이젠 먹거리와 여가생활에까지 '삶의 질'을 가늠해보는 다양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적어도 지금 오르비에토의 골목길을 두루 돌아다니고 있는만큼........  잠시일망정  '삶의 질' 그리고 (슬로우 시티 운동)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로 해보아야 하겠다.

 

 

 

 

 

 

 

 

 

유럽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같은 듯 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두 개의 표지판.

 

 

 

 

 

 

  위에 올린 표지판은 로마 시내에 설치되어 있는 것들이다.

  로마를 벗어나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나 아니면 유럽의 많은 대도시를 가게되면 역시나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표지판이다.  표지판의 형태나 색깔이 다르게 나타나 있는 경우도 허다하기에 여행자를 위한 팁으로 간략하게 설명을 해 보기로 한다.  영어 이니셜 대문자 엠(M)은 분명하게 각이 꺾여 있으며 빨간색이나 파랑색이 주류를 이룬다. 위의 사진 왼편의 표지판(M)은 파리던 런던이던 뉴욕이던 세계 어디를 가나 지하철(Metro)을 의미한다. 도시를 여행함에 있어서 여행자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이동 수단의 하나인 것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영어 이니셜 소문자 엠(m)은  세계 최고의 브랜드 중에 하나로 평가받는 패스트 푸드 회사 맥도날드(McDonald's)의 상업용 광고간판 이다.  주로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지만  간혹은 주황생에 파란 글씨도 있다.   나의 여행에 있어서 '맥도날드'는 몇 가지 아주 중요한 특별한 의미로 다가 온다.

  맥도날드는 대부분 유명 도시여행지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에 들어 서 있다.  거기에다 24시간 영업이다.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맥도날드가 눈에 띄면(에펠탑이나 콜로세움 같은 대표 유적이 없는 경우)  그 순간부터 나는 여행의 중심지를 맥도널드에 두고 동선을 꾸려 나간다.  24시간 영업이라는 매리트는 동선을 자유롭게 하고, 약속 장소를 잡기에도 썩 훌륭한 선택이 된다.  비가 오던 눈보라가 치던  24시간 자유롭게 머물고 대기할 수 있는 공개적인 안전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동중이라 바쁘거나 현지에서 당장 마땅한 음식을 고르지 못할때는 세상에 맥도날드 만한 장소가 별로 없다.  다음은 자유로운 출입에 무료 화장실 사용이 가능한 곳이 바로 맥도날드 이다.(혹 나의 여행기 때문에 맥도날드가 출입을 통제하거나 화장실 사용을 유료화 하는 사태는 제발 벌어지지 않기를)  유럽의 대부분의 화장실은 모두 유료다.  평균 1 유로를 받지만 1.5 유로를 받는 곳도 많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환경에서 살던 나에게 있어서 화장실 유료는 무척이나 억울하고 아까운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게끔 만든다.  로마의 한 레스토랑에서는 식당을 이용하는 고객의 처지였음에도 화장실 사용료를 별도로 0.5 유로를 지금한 경험도 있다.  내 여행의 이동동선에 맥도널드를 중간쯤에 놓는 작은 이유의 하나가 맥도날드 화장실 이용을 위해서라고 해도 무방하지 싶을 정도이다. 도보여행중에 화장실이 필요하면 맥도날드로 가서 볼 일을 마치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휴식의 시간을 갖고는 한다.  커피 한 잔이 보통 2~ 2.8 유로 정도라 생각하면........  화장실 사용료가 미치도록 억울하고 아까운 입장에서  쬐끔 더 보태서 마시는 커피는 그야말로 행복이니까 말이다.  아니면 당당하게 관공서나 별이 많이 나붙은 대형 호텔에가서 요청을 한다.  그럴때마다 느끼는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내가 '대한민국인' 이라는 사실이다.  다들 내 배낭에 떡하니 붙어있는 태극기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정중하게 안내를 해주곤 한다.  조지아에서는 현지인은 드나들지도 못하고 반듯이 정장차림 이어야 하는 최고급 카지노에 반바지 차림으로 가서 화장실 사용을 요청하고 허락 안내를 받아서  온통 이태리 대리석으로 꾸며지고 진짜 금도금 수도꼭지가 있는 어마무시한 화장실도  이용해 보았고,  터키에서는 호텔 층층을 공항 검색대 처럼 꾸며 놓은 외국 국빈들이 즐겨찾는 호텔을 배낭여행자의 행색으로 당당하게 허락 받고 검색을 받고 이용해 본 경험도 있다.  피렌체 두오모 광장 세례당 앞의 호텔과 카폐가 한 후런트를 사용하는 곳에서는 매니저에게 화장실 사용을 청했더니 카페 안쪽의 화장실을 안내 해 줬다.  그런데 그가 내 배낭의 태극기를 보더니 '2년전에 서울을 다녀 왔는데 환상적이었다'고 말을 걸어왔다.  좋은 여행이 되라면서 카페에 데려가 커피 한 잔을 사주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까지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후로 피렌체에 가면 그 카페는 내 전용 화장실이 되었다.  오르비에토에서 이동하게 될 이번 피렌체 여행에서도 챠밍여사와 함께 피렌체를 오가면서 항상 그곳의 화장실을 무상으로 자유롭게 사용했다. '차오.  나 다시 피렌체 왔지롱!!!!!' 하면 그냥 패스다.  덕분에 피렌체에서는 맥도날드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괜히 맥도날드 이야기만 길어졌지만.......)

 

 

  '슬로우 푸드는 결코 패스트 푸드의 반대말이 아니다!'

  1986년 이탈리아 로마의 유명 여행지인 스페인 광장 앞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건물 인테리어 작업이 시작되었다.

  로마 최고의 상권이기도 한 인근의 골목에는 구찌, 페라가모, 아르마니, 프라다 등의 세계 최고 패션업체들의 본사 내지는 최고 지점들이 늘어서 있는 장소로도 너무나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세계적인 기업들 조차도 찬란한 로마의 유적인 건물들을 훼손하지 않기 위하여 조로 실내로 최소한의 리모델링만으로 본점을 꾸려나가고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런 장소에 엄청난 규모로 공사를 벌였으니 누구에게나 눈살을 찌프리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공사현장을 지켜보는 사람중에 유독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atrini) 라는 사람이었다.

  페트리니는 2007년부터 뉴욕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면서 '느리게 사는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사회생활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운동을 넘어서 새로운 사업으로까지 확장 할 계획을 세우던 사람이었다.

  페트리니는 이 내부공사가 세계 최고의 패스트 푸드 기업인 맥도날드사가 이탈리아 진출을 꾀하면서 첫 매장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대적인 '맥도날드 거부 운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맥도날드도 매스컴과 언론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이젠 세계적인 화제꺼리가 되고 말았다.

  맥도날드는 상업자본주의의 당위성을 앞세워 합법적인 기업활동임을 천명했다.

  그러자 페트리니는 '음식을 통한 자유'와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한 맛과 영양의 평준화와 기준의 불합리성'을 내세우며 맥도날드의 세계진출을 혹독하게 힐난하기 시작했다.  이미 맥도날드의 지명도와 제품의 맛에 어느정도 익숙한 세계인들은 페트리니의 주장을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맥도날드의 햄버거가 지금 어떻다는 거야?  맛만 좋던데?'

  하지만 페트리니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맥도날드의 경영진은 햄버거를 음식에 대한 최소한의 고귀한 생각과 섭취하는 사람의 영양과 건강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윤추구의 목표아래 최소의 비용을 들여서 오로지 많은 이득을 남기기 위하여 맛을 과하게 느끼게 만들고(단짠) 영양 섭취의 불균형을 이루어 결국 인류의 건강을 해롭게 하는 일을 비지니스라는 명목으로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진 인류는 결국 상업주의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맛과 건강에 길들여져서 각 나라, 각 지역의 전통적인 소중한 음식문화 까지도 파괴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음식이란........... 저마다의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다.'

  미식 문화를 유독 중요하게 여기는 이탈리아인들에 페트리니의 주장은 '미식에 관한 선택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 뿐만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다양한 접근에 관한 자유까지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이는 오랜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둔 전통과 전승되어 내려오는 토속적 음식에 대한 가치까지도 반듯이 후세를 위하여 지켜져야 한다는 이야기로 느껴졌다.

  페트리니의 (슬로우 푸드 운동)은 거센 반향을 일으키며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전세계적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어 퍼져 나갔다.

  바쁘게 앞만 보며 성공을 위해 외길로 줄달음질 쳐온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치'와 '삶의 질'을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성공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되뇌이게 만들었고, '자신에게 행복이란 과연 어떤 모양이며 어떤 의미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끔 만들어 주었다. 

  페트리니가 어느날 지나치는 농담처럼 사람들에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요?  그럼 지금 당장 핸디폰은 내던져 버리세요.  그리고나서 오늘 저녁에 어떤 맛있는 음식을 즐겨볼까 고민을 시작해 보세요.  그것이 행복입니다.' 라고 말이다.

  결국 맥도날드는 1986년에 로마 진출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포기는 아니었다.

  시간이 자나 패스트 푸드의 광풍이 전세계를 휩쓸게 되면서 야심차게 다시 로마에 입성한다.  로마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의 중소도시에서도 쉽게 맥도날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페트리니가 시작한 (슬로우 푸드 운동) 결실을 맺어서 1999년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에서는 (슬로우 시티 운동)이 시작되었다.  치타슬로(Cittaslow) 라는 도시 개혁 운동으로 '느리게 살자' 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루 일과가 마칠 시간이 되면 시민들이 하나 둘 광장에 모여서 단체 산책과 운동을 즐긴다. '삶의 질'을 음식에 국한해서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개선해 보자는 시민운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 운동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신안군 증도를 시작으로 담양군 창평, 완도군 청산도를 지나 16개의 슬로시티(2019년 기준) 조성되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오르비에토(Orvieto)와 주변지역이 교회에 의해 합병되고 교황령(敎皇領)에 편입된것은 1364년의 일로 교황 우르바노 5세(1362~1370)에 의해서 였다.  이때부터 오르비에토는 유사시 교황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은신처로서 요새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고 볼 수 있다.

  교황 우르바노 5세는 프랑스 출신의 교황이었다.  로마카톨릭史 에서 널리 알려진 (카놋사의 굴욕) 사건의 보복으로 (아비뇽 유수)가 벌어졌다.  이는 모두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의 대립에서 파생된 불행 이었다.  이를 다시 표현하자면 교황과 황제가 지상 최고의 권력을 두고 피말리는 싸움을 아주 오랫동안 벌였다는 뜻이다.  로마에서 쫓겨 난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으로 약 70여 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게된 것이다.  그 기간동안 7명의 교황이 새로 선출되었는데,  우르바노 5세 교황은 아비뇽에서 선출된 6번째 교황이었다.  후임자인 그레고리 11세에 이르러 교황청은 아비뇽 시대를 접고 로마로 되돌아 오게 되는 것이다.

  아비뇽에 유배된 교황청은 당연히 현지(프랑스) 중심으로 운영되고 프랑스 출신의 교황들을 선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카톨릭의 지배력은 베드로의 후예를 자처하는 로마 출신의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성직자들이었다.  이 다툼 또한 심화되고 노골화 되어서 한동안은 두 명의 교황이 배출되는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수도사의 엄격한 계율과 청빈함으로 유명한 베네딕토 수도회 출신의 우르바노 5세는  교황청의 체계를 검소하게 쇄신을 단행하고 교육사업에 헌신한 중세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성직자였다.  로마카톨릭과 그리이스 정교회의 통일을 추구하였으나 국제 정세와 맞물려 끝내 실현하지 못하였고,  아비뇽의 교황청을 로마로 다시 옮기려 하였으나 자신의 생애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황이 되기 전부터 이탈리아 북부의 추기경이나 성직자의 가족들이 무력을 통한 전횡을 일삼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청 사자로 여러차례 직접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 오르비에토에 들리게 되고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교황에 즉위한 후에 교황청의 복귀를 위해 몸소 로마로 와서 3년 정도를 머물렀는데,  이탈리아 성직자들의 반감과 위협에 한시도 맘을 놓거나 잠조차 이루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교황의 암살과 독살이 비일비재 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교황은 로마에 머무르는 대부분의 시간을 오르비에토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분히 안전상의 이유였다.  바로 이 시기에 오르비에토 지역을 교황령에 완전하게 편입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오르비에토는 방어하기에 좋은 천험의 요새였던 것이다.  3년을 버티다 못한 교황은 결국 아비뇽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스웨덴 출신의 비르지타 수녀가 꿈에 계시를 받았다면서  교황이 로마를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죽는다는 예언을 했다.  교황은 이를 무시하고 아비뇽으로 떠났다.  아비뇽에 도착한지 며칠 후에 교황은 선종했다.

 

  오르비에토를 처음 거론한 교황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은 역대 교황중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교황으로 꼽히는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년) 이었다.  그러니까 오르비에토가 교황령에 편입되기 700년 전에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오르비에토가 교황의 직위를 수행함에 있어서 나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저서에 글로 남겼던 것이다.  엄격한 수도생활과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베네딕토회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되자 교황이 직접 나서서 베네딕토 수도회를 교황 산하의 직속기관으로 배정해서 외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준 현인이기도 하다.

  수많은 분쟁에서 침략군을 설득해서 되돌려 보냈고,  포로들을 데려 왔으며 기근의 흐생자들을 발벗고 도왔다.  사람들은 교황을 '평화의 수호자' 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의 분쟁지역을 쫓아다니다가 오르비에토에서 머물게 되었고,  이 천혜의 지형을 선한 목적으로 이용행지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크게 화를 입을 지역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교황 알렉산드로 3세를 꼽을 수 있겠다.  아마도 재위 기간의 상당 부분을 이곳 오르비에토에서 보낸 교황으로 유명하다.  알렉산드로 교황 3세는 유럽을 통털어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으며,  그러한 자신의 권위를 내보이고 증명하기위하여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거나 간섭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정당하지 못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베네치아 상당의 엔리코 단돌로 도제와의 밀약으로 제 4차 십자군 원정대를 파견한 것도 한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런만큼 사방에 적들이 넘쳐났다.  로마의 교황청 만으로는 자신의 안위가 불안스러웠다.  하여 그는 오르비에토의 성벽을 다시 수축하고 요새와 작업을 거쳐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이곳 오르비에토에서 보냈다.  오르비에토가 교황청인 시대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종교의 최고지도자일 뿐더러 막강한 정치권력과 군사력까지 갖춘 알렉산드로 3세에게는 더 이상 대적할만한 그 무엇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카톨릭의 절대 수호자였으며, 이단이나 다른 세력들에겐 저승사자 이상이었다.  교황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것이 악이었으며 이단이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골칫거리가 하나 생겨났다.

  11세기 경에 프랑스의 랑그독 지역에 출현한 '카타르시스(Catharism)' 라는 종교단체가 확산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지방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는 보고였다.  카타르시스는 그리이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순수한 사람(들)'을 뜻한다.  문제는 이들이 신랄하게 로마카톨릭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역에서 시작되어 알비(Albi) 라는 도시를 차지하고 거점으로 삼으면서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알비엔시안' 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믿음은 비잔틴 제국의 아나톨리아 평원을 거쳐 왔으며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다.

  서슬이 시퍼런 알렉산드로 3세 교황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카톨릭 신앙의 교리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고 협상은 깨졌다. 교황은 이들을 설득이 아니라 진압하기 위하여 툴루즈의 레이몬드 백작을 파견했다.  카타르시스는 교황의 부당한 처사와 레이몬드 백작의 파견에 분노했다.  레이몬드 백작은 교황과 교황청 주변에서 벌어진 의문의 여러 암살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세상의 공분과 의심을 받던 처지였던 것이다. 여러 암살사건에 교황과 공범이거나 전달이거나 실행자로 알려진 레이몬드의 파견은 카타르시스로서는 엄청난 조롱과 경멸 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번에도 진압은 실패했다.  하지만 사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파견된 눌루즈의 레이몬드 백작이 로마로 촐군하던 도중 길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황이 이쯤되었으니 이런 사태를 그냥 묵과해서 넘길 알렉산드르 3세 교황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교회를 뛰어 넘어 교황의 절대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능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카타르시스' 라는 종교 단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로마카톨릭과 교황을 비난하고 대적시 하였던 것일까?

  오늘날까지도 완벽하게 모든 실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한 '초대 기독교의 일파' 였다.

  따로 특별히 '카타르시스'에 관한 논의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보지 않고 짧은 여행기의 중간에 한 단면만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함축시키고 함축시켜서  카타르시스 종교단체에 대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초기 기독교의 시작은 분명 유대민족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소수의 유대인들과 주변에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12 사도가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 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했고 부활을 목격한 1세대 기독교인들의 삶과 신앙은 지금(교황이 지배하는 중세)과 너무도 달라졌다는 비판과 주장에서 지금의 분쟁이 생겨났다고 하겠다.  그들은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자생하고 있는 흩어진 초대교회의 기독교 지파들(정교회와 비슷한) 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기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한 예루살렘이었으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동안 터키 지역의 너른 아나톨리아 평원을 떠돌며 유랑생활을 겪다가  중세 시기에 어떤 계기로 하여 일부가 프랑스 남부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그들이 전해듣고 기억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른 초대교회는 결코 중세 암흑시대의 교회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했다.  교회는 변질되었고 왜곡되었으며 더하여 부패한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타락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로마카톨릭은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던 그런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부터라도 초대교회의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세상에 대고 목청껏 외쳤다.  그 울림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그들의 주장이나 교리가 맞았다는 생각보다는,  눈앞에서 자행되는 교황과 교회의 파행과 압제가 너무도 심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이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심정이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로마카톨릭의 정통성) 내지는 근본을 훼손시키고 파괴하는 행동이었다.

  교황은 카타르시스를 삼위일체설을 부인하는 이단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진압과 토벌을 명령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인의 정벌에 엄숙하게 서명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 지파 카타르시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가 동원되었다.  바로 알비게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 이다.

  1만 명의 말을 타고 철갑으로 무장한 십자군 정예부대가 프랑스 남부로 달려갔다.

  카타르시스는 엄한 규율의 수도자 생활과 함께 청빈한 삶을 추구하며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를 기반으로 하는 집단 생활 공동체 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적인 삶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군대가 있을리 만무했다.

 

 

 

 

 

 

 

 

 

 

 

 

 

 

 

 

 

 

 

 

 

 

 

 

 

 

 

 

 

 

 

 

 

 

 

 

 

 

  학살(虐殺. Massacre, Bloodbath)

  더하여 대량학살............

 

  알렉산드로 3세 교황이 프랑스의 필립 2세 왕을 압박하여 받아 낸 최정에 기병대 2만 명에게  성스러운 십자군 원정대의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퐁포르의 시몬 지휘하에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지역의 무고한 시민들이 달려나와 교황의 무리한 처사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러자 십자군은 곧 칼을 뽑아들었고 이내 정복전쟁으로 비화도기 시작하였다.

  1만 명의 십자군이 휘두르는 칼에 의하여 선한 기독교인 2만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카타르시스의 종교지도자 뿐만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은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노약자와 어린이까지 닥치는 대로 모두 죽여 버렸다.  더하여 이들과 화해를 청하기 위해 머물렀던 로마카톨릭 선교사와 인근의 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다. 

  모든것이 최고 성직자인 교황의 명령에 의해서 거룩하신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이었다.

  그럼 그 학살 사건으로 모든것이 끝이 났느냐?  결코 아니었다.

    알비게시안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에 들이닥쳐 같은 기독교도인 카타르시스 공동체를 집단 살륙한 것이 1209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살륙을 끝낸 십자군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살장소에 진을 치고 들어앉아 마지막 카타르시스인을 찾아낼 때까지 정복전쟁을 계속했다.  그들은 원정은 1229년에야 끝이 났다.

  도대체  카타르시스가 로마카톨릭에게 어떤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기에 이토록 가공할정도로 잔혹한 보복을 하였다는 말인가?  교황이 저토록 카타르시스를 씨까지 말리고자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교황이나 로마카톨릭은 적어도 '카타르시스' 라는 이름 앞에서는 정당한 표정을 지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대량학살' 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폴란드의 국제법 변호사 라파엘 렘킨에 의해서 였다.

  렘킨은 터키인들이 20 세기에 들어서 자행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재판에서 '이것은 마치 교황의 명에 의해서 거룩해야 할 십자군이 저지른 카타르시스에 저지른 대량학살 사건과 결코 다르지 않다' 주장하면서 처음으로 '대량학살'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훗날 유대인 말살이라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초래한 히틀러가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했으니,  혹 터키인들은 알렉산드르 3세의 십자군 운용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들을 밥먹듯이 쉽게 저지르는 교황이었기에 어쩌면 오르비에토 같은 요새속에 꼭꼭 숨어 지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로마의 교황청 정도로는 도저히 안전에 자신이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어쨋거나.........  그렇게 권력야욕으로 세상을 호령하던 교황 알렉산드로 3세가 피사와 제노아의 분쟁을 중재하려고 출장에 나섰다가 그만.........  페루자에서 급사했다.  여기에서 급사란.......  사인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다.

  교황이 선종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서 복자라는 제도를 통해 성인으로 추대되곤 한다.  물론 생전의 업적에 따라서 성인의 반열에 추대되지 못하고 시복에 머무는 교황도 허다하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살아생전 내내 어마무시한 종교적 세속적 무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 구현에 압장섰던 교황 알렉산더 3세는 복자제도의 심사에 조차 추천받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에 머무르고 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가 생전에 벌였던 그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 과연 성스러운(聖) 업적이 있기는 했을까?  아무리 교황일지라도  전혀 성스러움과 동떨어진 약탈과 분쟁조성과 암살과 대량학살의 이력을 가지고는 천국은 무리겠구나 싶어진다.  아니.......  지옥에 안떨어진게 이상한게 아닐까?

  로마카톨릭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교황이 보낸 성스런 자객집단(십자군)에 집단학살 당한 카타르시스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천국에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서둘러 천국에도 십자군 원정대를 파견해야 하지 않을까?

 

 

 

 

 

 

 

 

 

 

 

 

 

 

로마 바티칸 사도궁전 2층의 '서명의 방'에  라파엘로가 처음 그린 프레스코 벽화 (성찬에 대한 논쟁).

 

역시 라파엘로가 두번 째 방 '엘리오두루스의 방'에 그린 프레스코화 (볼세나의 기적).

 

 

 

 

 

 

 

 

 

 

    브라만테에 의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이 한창 건설되고 있을 무렵에는 현재의 바티칸의 앞마당이랄 수 있는 바티칸 광장이 없었으며,  건축 현장의 가까이 까지 일반 민가(마을)가 빼곡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광장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지 약 20년이나 더 지나서야 베르니니에 의해서 완공되었다. 세상을 감싸안아주는 듯한 돌기둥의 숲인 양쪽의 긴 회랑은 없었지만,  대성장 건설현장과 나란히 성 씨스티나 성당과 사도궁전은 성곽에 둘러 쌓인 채 지금의 같은 장소에 이미 건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차차 브람반테의 계단과 같은 여러가지 추가 공사가 덧붙여지고 나서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겠지만 말이다.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하여 미켈란젤로가 씨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장화를 한참 그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교황의 거처인 사도궁전 2층은 네 개의 너른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황의 집무실과 서재와 접견실로 쓰이고 있었다.  교황은 이 방들을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우르비노 출신의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 의뢰하여 프레스코화로 치장을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나름 미술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던 교황은 집무실의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브라만테가 25살의 젊은 화가를 교항에게 추천했다.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 Raffaello Sanzio Urbino)' 였다.  브라만테의 적극적 추천도 있었지만,  앞서 사도궁전의 벽화를 막 마감한 당시 유명화가 페루지노의 제자라는 사실에 교황은 나름 마음이 좀 놓였다.  교황은 자신의 집무실인 '서명의 방( Stanza della Segnatura)'에 커다란 벽면을 하나 비워주면서 25세의 미완의 화가에게 성경을 소재로 하는 프레스코화를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피렌체에서 건너 온 라파엘로는 교황의 집무실에 첫 작품을 그렸는데 바로 '성체의 논의(Disputa del Sacramento) 이다.  그림속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 라는 '성 삼위일체'를 배경으로 '성찬식에서 거행되는 빵과 포도주이 나눔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냐 아니냐' 하는 주제의 토론을 나타내고 있다.

  완성된 프레스코화를 바라보는 교황의 얼굴엔 환희에 가득찬 탄성이 마구 터져나오고 있었다.  교황은 이 젊은 화가에게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에다가 괴팍한 미켈란젤로와 다투느라고 지칠대로 지친 저지였으니,  빼어난 용모에 기품있는 교양과 매너마저 갖춘 겸손하고 예절바른 이 젊은이에게 푹 빠져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교황은 사람을 시켜 사도궁전 2층의 4개에 방을 모두 기존의 벽화를 회칠로 지워버리고 라파엘로로 하여금 새로 그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벽면을 채우고 있는 그림이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작품들이라는 데 있었다.(현재의 우리는 당시의 페루지노의 그림을 알 수가 없다)  이를 눈채 챈 교황이 라파엘로도 모르게 기존의 벽화를 벌써 모두 지워버렸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라파엘로는 4개의 방을 프레스코화로 채우기 시작하였는데.......  아테네 학당 같은 그의 대표작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두 번째 방인 '엘로두루스의 방'에 그려진 벽화 중에 (볼세나의 기적) 이라는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이 벽화 또한 소재가 '성체(聖體)'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두 개의 프레스코화에서 소재로 다룬 성채(聖體)가 바로 여기 오르비에토(Orvieto)와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얽혀있는 것이다.

  성체논의이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寶血)'가  오비에토 두오모(Orvieto Cathedral)에 보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로마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지 않았거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존립할 수가 없으며 탄생할 수가 없는 종교적 한계성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근본에는 '성 삼위일체(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하나' 라는 핵심 교리가 내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 삼위일체' 교리를 나타내고 늘 주변에서 확인 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성찬식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피와 살을 나눔'으로써 부활의 역사가 여전히,  그리고 도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어저면 가장 중요한 의식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에서 1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숱한 곡절의 역사를 기독교가 겪었던지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십자가 부활 사건이 정말일까?' '예수 재림이나 심판의 날이 곧 오기는 오는거야?' '정말로 성체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 할 수 있는것일까?' '그것들이 정말이야?'  하는 의아함이 마구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여기 오르비에토의 아주 가까운 인근 볼세나(Bolsena)에서 한 신부에 의해  '성체(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등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성체가 지금 오르비에토 대성당(두오모)에 보관 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앞서 말한바처럼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기독교(로마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성 삼위일체'와 '성체 의식'을 모두가 인정하고 실행하고 있다.  카톨릭과 정교회는 주일 미사때 마다,  개신교는 부활절 성탄절 등의 특별한 기념일마다 세례의식과 함께 '성 만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눔으로써 자신들이 다시오실 예수 그리스도들 따르는 무리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측에서는  그 의미나 비중이 로마카톨릭에 비해서 어딘지 모르게 미미하거나 비중이 적게 느껴지는것이 사실이다.  더불어 기독교 역사와 유물에 등장하는 여러 기적에 관한 사건들이나,  성물(聖物)이나 오르비에토 두오모에 보관중인 성체(聖體)에 대해서도 먼 발치에서 침묵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는 다소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예수는 낮고 가난한 사람으로 지극히 먼고 먼 변방인 예루살렘에 삼십 년을 잠시 머물다 부활하였는데,  그런 그와 관련한 무슨 사건이 그리도 많고 유물이 그렇게 많고 성체니 어쩌니가 정말로 남아있을 수 있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과학을 바탕으로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을 오래전에 실제로 벌어졌고,  어찌되었건 예수께서 자신의 발자취와 바래을 신약성경을 통해 남겨 놓으셨으니,  그 성경의 말씀에 따라 그 분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만이지.......  무슨 성체니 성물이니 온갖 이적(기적의 은사)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카톨릭의 입잡은 좀 다르다.  모두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택하심에서부터 로마에 교황청을 세웠고  그 이후에 벌어진 로마카톨릭의 모든 역사가 대부분 그 성물이나 성체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겪고 극복해 나가면서  그 숱한 기적과 은사의 바탕위에다 로마카톨릭 스스로의 정통성과 당위성을 설립하고 유지해 나왔기 때문이다.  성물. 성체. 기적의 은사가  퇴색되거나 의미가 부정당하게 된다면.......  아마도 로마카톨릭은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있는 개신교 입장에서는 성물. 성체. 기적의 은사가 설사 허구로 밝혀지더라도 복음서(성경)만 온전하게 남게된다면 개신교의 존립에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유일신이신 하나님에서 생겨난 종교(유대교. 로마카톨릭. 정교회. 이슬람교. 개신교를 모두 포함) 중에,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보았는데 '예수의 부활 사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가정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쳤을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기반으로 탄생한 기독교(로마카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그 뿌리를 잃고 몰락하고 말것이다.  하지만 그런일이 벌어졌다 해도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아무런 여향을 받지 않게 되는(예수의 부활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종교) 일이 벌어지게 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해야겠다.

 

  여러 저명한 학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의 '유명 교회(카톨릭)마다 고귀한 성물(聖物)로 여겨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사용된 나무 십자가의 조각들을 저마다 모셔두고 보관을 위하여 어마무시한 교회들을 무수히 많이 지었는데.........  그 보관된 나무조각들을 모두 모아 놓으면  본래 크기의 십자가 처형대가 아니라 커다란 목재 범선을 하나 만들고도 남겠다'  라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게 만드는 평가를 쏟아 놓았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성령에 너무 충만한 기독교인들이 나라 안의 사찰들을 여행다니면서 사방에 세워져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가리키면서 '부처님이 이승에서 수행하실때 체구가 특별할 것이 없었다던데 어찌하여 저렇게 사리가 산더미만큼 나왔다는 말인가?  인도에 뿌리고 주변에 뿌리고 중국에 뿌리고 나서 이렇게 한반도에까지 잔뜩 뿌렸으니 말이야.  모두가 쌔빨간 거짓말이야.  우상이라고.......  거짓이라고.......' 열변을 토하신다.

 

  우상(偶像) 이라고?

  헐!!!!!!

  '남의 눈에 티끌은 크게 보이면서  자신의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백 년도 살지 못하면서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갑질에만 익숙해진 부나방 같은 허접떼기들이여................ 주둥이를 닥치라!  그러고도 천국을 탐하느냐?'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화가 로렌초 로또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교령을 하사하는 교황 그레고리 9세)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되었으니 한 이야기만 더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다.

  위 그림의 내용은 거짓이다.  그림의 소재 자체가 황당할 정도를 넘는 완전한 허구이다.

  그런 그림을 요청한 사람이 바로 교황 율리우스 2세 였고,  이 그림은 바티칸 교황의 사저인 사도궁전 2층의 교황의 집무실일 '서명의 방' 벽에 떡하니 그려져 있다.  바로 라파엘로가 그닌 (성체에 관한 논의) 프레스코화의 옆면 비어있는 공간에 라파엘로가 작품을 모두 마친 뒤 새롭게 화가 로렌초 로또를 시켜서 채워 넣었다.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요지는 딱 한가지다.  정면에서 보나 아래서 올려보나 위에서 내려보나.......  어떻게 보던지간에 분명한 것은 교황(그레고리 9세)의 행동이나 위치나 태도나 표정으로 보아 황제(유스티니아누스) 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나타내는데에 중점을 두고 그렸다.  교황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려졌다.  세세하게 작품의 내용까지도 남겨놓았는데......  엉뚱하게도 그려진 그레고리 9세 교황의 얼굴에는 이 그림의 주문자인 율리우스 2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자신이 세계 최고 권위자임을 은근히 내세우고 싶었음인데........  교황 씩이나 되면서 이런?

  아마도 생각은 진즉이 있었지만,  라파엘로에게 이렇게까지 그려달라고 하기에는 왠지..........  그래서 결국......... ㅎㅎㅎ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교황의 얼굴이 그레고리 9세였는지, 율리우스 2세 얼굴이었는지,  아니면 안소니 퀸의 얼굴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소재가 온통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권위와 업적을 자랑하기 위하여 대선배 교황을 억지로 끌어온것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허구로 위조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실로.......  교황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 죄악인 것이다.

  진실은 이렇다.  당시에는 그림처럼 교황이 황제를 아래에 둔 것이 아니라.........  비잔틴의 황제 아래있는 정교회의 대주교 발치 아래에 로마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위치했어다.  역사가 이를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황이 한단계 건너 아랫사람이었던 것이다.(어처구니가 없네)  그리고 그런 결과와 처신은 모두 교황과 로마카톨릭의 최고 성직자들이 중세 초기를 통해 자행했던 업보의 결과물 이었다. 당시에 분명 교황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존재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글을 쓰고있던 도중에 앞선 대목에서 뜬금없이 떠오르는 음악이 하나 있었으니 말이다.  나에겐 진한 역마살이 있어서 이따금씩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스멀거리기 시작하면 무작정 어디론가 떠날 궁리를 하듯이,  때론 오늘처럼 어떤 음악이,  때론 어떤 싯구가,  때론 어떤 그림이나 영화가,  때론 어떤 책이나 카페나 어떤 장소가 사무치도록 괜히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렇게되면 어떻게든 내 방식대로 그 그리움들을 풀어내야만 한다.

  'To Treno Fevgi Stis Okto'  라는 노래로 그리이스의 여가수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 불렀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헤어짐을 애잔한 음성과 선율에 고스란히 녹여 담았다고 하고,  때로는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슬픔 사랑과 이별을 담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노래의 가사나 의미 때문에 지금 이 노래가 떠오른 것은 아니다.  그 노래에서 풍겨나는 분위기.......  축축하고 우울하고 절박한듯 애잔한 그 배경의 느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  이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기회가 된다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라도 꼭 한 번쯤 들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영어로 번역된 제목을 찾자면 'The Train Leaves At Eight',  그러니까 우리 말로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되겠다.

 

  '기차는 8시에 떠났다.'

  '로마는 324년에 떠났고, 로마카톨릭은 그대로 남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여러 학문중에서 유독 역사(국사. 세계사)와 미술사를 좋아했다.  물론 모든것은 책을 통해서였고  책은 양서와 악서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가 성장하던 우리 세대의 교육은 주입식, 암기식, 편식적인 학문탐구의 불행하고도 어두운 시대였다.  긴 암흑의 시대로 통치자의 눈 높이와 가치관에 모든 교육의 목표와 평가가 맞추어져 있었다.  통치자가 쿠데타로 집권을 하였으면,  모든 역사에서 반정이나 정통성 시비 등은 아예 거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나쁜 사람들이야 의례히 나쁜 짓을 자행 했으리라.  그런데 상당수의 역사학자들과 교육자들과 일부 종교지도자들 까지도 나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휘말리는 행동을 밥먹듯 저질렀다는데에 아픔이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입을 손으로 막으면서.......  살아 남아야만 했다.  왜?

  혹 통치자가 설정해 놓은 역사관이나 교육관이나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가치관의 한계를 넘게되면 부닥칠 위험성 앞에 납짝 엎드려 몸을 사리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역사에서 논쟁꺼리로 남아있거나  분명한 사실확인이나 실체가 불분명하면 이를 분석하고 연구해서 나름의 자신있는 주장을 했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대충 은근 슬쩍 그 시대나 상황을 얼머무리며 뛰어넘기 일쑤였고,  그런 부분은 아예 시험문제 출제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온전함만을 택했다.

  국사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도 많았고 비일비재 했었다.

  세계사에 있어서도 앞 뒤 맥락이 설명이 되지 않음에도 그냥 타 넘으라고 말했다.  '임마, 그런거는 시험에 안나는 거니까 엉뚱한데 신경쓰지 말고  선생님이 시험에 난다고 찍어주는데만 죽어라 외우란 말이야.  시험 잘 보기 싫어?'

  그 분들은 내게게 있어서 시험이 가장 중요했다고 판단했나 보다.   일단 성적을 높여서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잘 치뤄야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역사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질문했던 것인데.......... 

 

 

 

 

 

 

 

 

 

기독교를 공인(313년)하여 성인의 반열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대제 청동조각상.

 

 

 

 

 

 

 

  흔히들 (제국)이란 것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서 정복 전쟁을 벌여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고  잘 체계화된 정치권력으로 점령지역을 잘 다스리고, 더하여 앞선 제국의 문화와 선진문물을 전파하여 식민지의 저들 스스로가 독립을 생각치 못하게 하고 영원히 제국의 통치에 순응하며 따르도록 이끌어 나갔다.  제국은 통치자들은 하나 같이 이것이 가능할 것이며 모두가 천년왕국을 꿈꾸었다.

  하지만 제국에게도 한계성과 단점은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제국이라 불렸던 모든 민족과 국가에 하나 같이 똑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이룩했던 제국이 어느날엔가는 바람에 쓸려가는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제국)은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승리의 잉여물자가 지속적으로 제국과 제국의 백성들에게 수급되어 질때에만 유지되는 한계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제국은 정복전쟁의 승리에서 쟁취하게되는 전리품으로 제국에 속한 모든 사람들(통치자. 종교 지도자. 군인. 관리. 농민)을 풍요롭고 호사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을때 까지만 유지될 수 있다.  제국이 그에 속한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지 못하게 하고 다양한 위험에 처하게 하며 제국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다른 안식처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전리품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와 가축과 곡식(밀. 보리) 였다.  제국의 백성들이 제 손으로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끔 국가가 나서서 전쟁을 벌이고 약탈을 하고 훔치고 뺏은것을 가져다 나누어 주었기에 제국이나 통치자에서 복종하고 따랐던 것이다.  노예와 식민지가 제국을 떠받치는 터전이었다.

  로마라는 제국이 북쪽 브리테니아의 스코틀랜드 코앞에서부터 전체 유럽과 러시아 지역의 일부와 소아시아 지역까지 모두 점령하여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을 때,  제국의 최고통치자는 '제국의 한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정복할 영토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북아프리카 해안가를 벗어나면 로마제국의 크기와 맘먹는 사하라 사막이 가로 막았고,  소아시아를 지나면  먼 옛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인더스 강을 건넜다가 돌아와야만 했던 생생한 경험담이 떠올랐다.  강을 건머면 온통 습지대와 늪지대이며 이를 돌아가려고 내륙 깊숙히 강의 상류로 올라가면 만년설에 뒤덮인 바위암봉만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광활하면서도 혹독한 추위의 러시아와 브리테니아 북쪽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역은 연일 비가 내리고 겨울이 혹독하여 전혀 쓸모가 없는 지역이어서 정복을 스스로 포기했었다.  이제 이 세상에는 로마가 차지하고 싶어도 더 이상 차지할 수 있는 영토가 남아있지 않았다.  방대한 현재의 영역 너머를 차지해 보았자 그 척박한 지역에서 가지고 올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제국은 더 이상 정복전쟁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동시에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제국의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전쟁의 잉여생산물(노예. 가축. 곡식)의 보급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제국의 통치자만 올려다 보며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제국의 백성들이 이젠 언제 늑대로 변해서 보급품을  더 내놓으라고 통치자를 향해 칼을 들이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국의 국경선은  광활한 러시아 지역을 가로질러 브리테니아에서 스페인 남쪽 안달루시아를 거쳐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나 이집트에서 터키 이라크 지역까지  너무도 길게 뻗어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정복지를 넘나들때는 누구도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  언제든 제국의 최정예 군대가 들이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이 정지 상태로 계속 지연되는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사방에서 국경을 사이에 두고 소소한 분쟁들이 일어나게 된다.  제국의 군대를 총동원 한다고 해도  너무나 방만한 국경선을 모두 방어 할 수는 없게되는 것이다.  군인 1명당 국경선을 대충 한 4km씩 방어해야만 한다고 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전에는 군데군데의 로마군 주둔지만으로도 그 일대를 철저하게 방어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로마의 군대가 하루에 단 한차례식 국경을 순찰하기만도 벅찬 상황이 되었다.  후방의 로마로 보낼 물자가 더이상 없음은 고사하고  제국의 국경선을 방어하는 군대가 먹을 식량도 부족할 판이었다.  이제 제국은 번영의 정점을 찍고 쇠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한걸음 두걸음 꾸준히 걸으며 올라갈 수 있지만,  국가의 쇠락은 하루아침에 벼랑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주둔과 방어가 최대한 용이한 지역으로 로마제국의 국경을 축소 시켰다. 그러자 로마의 소퇴를 눈치 챈 국경 너머의 수많은 부족과 국가들이 로마의 국경선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제국의 한계'를 절감한 황제는 최후의 방책으로 로마제국을 4등분하여 4명의 황제가 분할하여 다스리도록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였으며, 새로운 4명의 황제와  영토분할을 마치자 자신의 황제 직함을 스스로 내려놓고 고향인 크로아티아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후,  역사에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추측컨데 비참한 말년을 맞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권력을 분할해서 내려놓는 최선의 방책을 택해 실현에 옮겼는데........  새로운 4명의 황제들은 즉위하자 마자  자기 중심의 제국을 만들어 원활하게 통치하겠다는 야심으로 군대를 움직이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사태는 제국의 내전으로 치닫고 만다.

  로마의 뼈대있는 실권자 가문인 막센티우스 황제가 내전을 통해 제국의 3/5을 차지했다.  그러자 새롭게 등장한 젊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장인이었다.

  절대적 열세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꿈속에서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계시를 받고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며 전투에 임해서,  서기 312년 10월 28일 로마근교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로마제국의 최고 실권자 자리에 오른다.

  이듬해인 서기 313년 로마제국 최고의 실권자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정식 공인하게 되었다.  이는 더 이상 로마에 의한 기독교 탄압이 멈추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도궁전 라파엘로 4개의 방 중에서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밀비우스 다리 전투).  줄리오 로마노作.

 

콘스탄티누스 청동상(왼쪽) 과  꿈에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 계시를 천사에게서 듣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오른쪽).

 

 

 

 

 

 

 

 

 

  기독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다는 은공에 기인해서 로마의 전체 역사에서도 몇 안되는 '대제'의 칭호를 덧붙여서 그를 칭송하고 찬양해왔지만..........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글쎄 올씨다' 라고 말하겠다.

  로마카톨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음에 임박해 세례를 받았으며,  그가 통치한 로마제국의 모든것을 통째로  교회(로마카톨릭)에게 기증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고 주장이었다.  이는 교황 스테파노 2세와 프랑크 왕국의 피핀 왕 사이에서  교권(敎權)과 황권(黃權)의 우선 순위를 바탕에 갈고 협약을 맺으면서 300년 훨씬 이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작성했다는 유언장(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을 꺼내들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에는 로마제국이 통째로 교회에 이전되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었다.  피핀은 혹시나 이탈리아 반도에 거점을 확보할 수 있으려나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자신이 교황청의 수호자가 되어서 일단은 자신의 왕국인 알프스 산맥 너머의 프랑크 지역을 교황으로부터 보장받는 것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일은 그렇게 진행되었고.......  이때부터 교황은 기증서를 앞세워서 예 로마제국의 영토는 모두 교회(실직적으로는 교황 개인)의 소유라고 선포했으며,  본격적으로 교황령을 확장시키는데 혈안이 된다.

  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영토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한 337년부터 사실은 로마카톨릭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재산권을 로마카톨릭은 400년 이상이나 내세우지도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묵히고 썩혀왔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 후로 로마카톨릭은 틈만나면 이 기증서를 앞세워서 세속의 군왕들을 압박했다.  세상의 주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교황이었다고 공공연하게 외치는 파행이 거의 50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그것이 멈춘것은 14세기 르네상스가 막 시작되기 직전에서야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서기 1440년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로렌초 빌라(Lorenzo Valla)는 세상의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그때마다 교황이 앞세우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에 짜증이 날때로 난 사람이었다.  귀에 딱지가 앉아도 열번은 족히 않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하여 빌라는 느닷없이 그넘의 기증서라는 것에 진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고문서에 남다른 관심과 조예를 갖고있던 빌라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기증서의 진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는 4세기의 언어적 표현과 쓰임새가 8세기와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알아냈다.  그리고는 고대로부터 당시인 14세기까지 소아시아 지역과 로마 지역과 콘스탄티노플 지역에서 생산되고 기록된 서책들을 시대순으로 구분하고 각 시대마다 쓰여진 잉크의 재질과 문서들의 재질까지 세세하게 일일이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오늘날의 금석학으로 보면 되겠다)  결국 그는 진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쉽게 입 밖에 자신의 주장을 누설하지도 않았다.  교회(교황)라는 거대한 권력이 대항해 거칠고 무자비하게 대항해 올 것이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빌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는 8세기 경에 교황이 만든 위조> 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조사한 모든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했다.  보고서는 한 부가 아니라 수도없이 여러부로 만들어져서, 한날 한시에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게 만들었다.  특히 교황에게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세속의 군주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다.

  파장은 그야말로 일파만파로 온세상에 퍼져나갔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빌라를 종교재판에 회부했고 이단심판소에서 그는 화형은 선고 받는다.  그럼에도 빌라는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유럽 전역의 세속 군주들이 속속 부당한 교회의 처사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빌라를 화형에 초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서 그의 죄를 명확하게 밝혀야만 한다.  그러자면 빌라가 제기한 내용을 하나하나씩 살피고 논의를 거쳐야만 하고,  교회는 세상이 지켜보는 앞에서 빌라가 제기한 의혹에 정당한 해명을 내놓아야만 한다.  그런 결과로 빌라의 주장이 그릇되었다고 판단되면 그제서야 이단이던 신성모독이던 죄를 물어 화형해 처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의 군주들과 세상의 이목이 그 공방의 현장을 주시할 것이다.

  교회는 빌라의 논증을 전부 부정했다.  빌라의 보고서를 금서목록에 포함 시켰다.  그러면서 빌라를 풀어주었다.  빌라는 종교재판에 출두해 심문을 받았으나.........  석방되었고 복권 되었다.

  하지만 사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세상은 진실을 원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종교재판에서 빌라가 혐의 없음으로 풀려난 것이라면..........  기증서는 위조가 맞다는 뜻이냐?' 라고 따져 물었다.

  결국 로마카톨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서>가 8세기에 한 교황의 과욕에서 위조되었음을 시인했다.

  이 대목에서 감히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벌어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례'도 허구였다고 말하겠다.  교회는 로마카톨릭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기독교를 공인해 준 로마제국의 황제가 끝내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는 현실적 상황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생은  오로지 정치와 권력을 의한 삶이었지.......   그에게 기독교적인 삶이나 신앙은 전혀 내지는 거의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천도 이전의 로마에 머무는 동안까지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칙령의 전문.

 

 

 

 

 

 

 

 

  거듭  이야기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황제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로마제국의 부활)만이 전부였다고 해도 결코 틀린말이 아닐 것이다.  그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으며 대단히 노련한 야심가였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통일전쟁을 계속 벌이며 말년에 이르기까지도 페르시아쪽에서 흘러온 미트라 신앙을 고집했다.  미트라 신앙은 고대 그리이스 문명의 유산인 태양신 아폴로 신앙에 근거해 페르시아 지역에서 번성한 태양신 미트라 신앙과 점성술에 심취했다. 코카서스 지역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도 미트라 신앙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가르니 신전)을 통해 잘 알수가 있다.  미트라 신앙에는 아폴로 신에 대한 향수는 물론 인류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었던 조로아스터교의 신앙도 일부 녹아들어 있었다.  하여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안에는 상당부분의 미트라 신앙의 잔재가 여전히 녹아들어 존재한다고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야심찬 정치가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전투에서 당시의 최고 권력자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을 차지했다.  하지만 소아시아 지역의 리키니우스 황제(처남 매부지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서로간에 적대적 이었다.  제국의 통일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점령한 로마에서는 여전히 황제에게 적대적인 막센티우스의 세력들이 건재했다.  정치권력적인 기반이 미미했던 황제는 항상 쿠데타나 암살에 두려워 해야만 했다.  그것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현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황제는 기독교인(크리스찬)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동안 제국이 사활을 걸고 탄압을 했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처절하도록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생명 연장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확장해 나가서,  이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제국의 심층부 어디까지가 기독교도인지 도저히 파악이 안될 정도였다.  황제의 최측근이자 보호막이었던 근위대의 총책임자(흡사 대통령 경호실장)가 기독교인이었던 사건까지 있지 않았던가.  그는 탄압받고 학살당하는 같은 기독교인을 차마 더 지켜볼 수 없어서 불쑥 나서서 제지하다가 신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서 군대에 의해 화살 세례를 받고 절명했다.  그는 기독교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서양화 중에서 화살에 꼽힌 성인이 등장하는 그림은 99%가 성인 세바스티안 이라고 보면 된다.  그는 기독교인의 학살을 저지하려다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만약에 그의 생각이 기독교를 위해서 황제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아마도 열 번은 황제를 쉽게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곁에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무기를 휴대한 채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기독교인 이었던 것이다.  그들 기독교인들의 뿌리가 어디까지 퍼져 있으며 드러나지 않은 그 힘(세력)이 어떤것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리한 야심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기독교인에게 눈을 돌렸다.

  최측근 심복을 보내 로마 주재 기독교의 우두머리를 찾아내 데려오도록 했다. 

  마침내 은밀하게 로마주교회 주재 성직자와 황제가 만났다.

  ㅡ '제국의 황제로서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이든지 한 가지 선정을 베풀어 준다면  너희는 무엇을 택하겠느냐?'

  ㅡ '저희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자유만을 간절하게 원할 뿐입니다.  저희의 기독교 신앙이 누구를 해치거나 남의 것을 탐하거나 누구를 욕되게 하는것이 아닌 이상........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ㅡ '정말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만약에........  내가 너희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면  더이상 숨어다니지 않고 모두가 세상에 나와서 정당하게 생활하고 세금을 성실하게 내고 제국의 안정과 번영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말이냐?'

  ㅡ '신앙의 자유만 얻을 수 있다면 크리스찬들이 모두 나와서 황제께서 방금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를것입니다.'

  ㅡ '알겠다. 내 그럴 생각이 있어서 너를 이렇게 불렀다.  너는 돌아가서 이 약속을 실질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무리중에 최고 높은 사람을 내게 데리고 와라.  그체적 사항을 협의를 통해 확실하게 해 둘것이다.  다만 모든것이 성사 될 때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야만 한다.  나의 요구도 그때 알게 될 것이다.  내친김에.......  서둘도록 해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은밀한 제의를 접한 로마주교회의는 충격과 깊은 고민에 빠졌다.

  초대교회에서 부터 따져도 300년 이상 계속된 로마의 집요한 탄압이 정말로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이는 곧 황제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혹시 황제가 다른 흑심을 가지고 제기하는 것이라면........

  로마제국에 대한 불신을 떨쳐내지 못한 교회는 핵심인물을 뺀 대표자를 뽑아 황제에게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 황제는 아주 구체적인 제안까지를 선뜻 내놓았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와 '기독교인 신변에 대한 보장'과 더 나아가 과거 처형되었거나 현재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기독교 재산까지 모두 되찾아 돌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충격적인 엄청난 황제의 제안 앞에 기독교 대표(진짜 대표가 아니었기에)들은 감히 확실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대표성이들통이라도 날까봐 '기독교가 세상에 넓게 퍼져있다 보니까 전체적 의견을 수렴하는데 다소 시간이 좀 더 걸리겠습니다' 라는 말로 임시상황을 변통하고 물러나왔다.

  로마주교회의는 깊고도 깊은 고심에 빠졌다.  '황제의 뜻은 대충 알게 되었다' '기독교가 황제에게 내어줄 것은 당장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무상으로 종교적 자유와 신변의 안전'을 기증받는 형식이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왜 황제가? 다른 흑심이 있는것은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궁리하게에는.........  제의받은 열매의 달콤함이 너무나 컸다.

  이제는 이 세기의 협상에 누가 황제를 상대할 수 있는 기독교측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가에 고충이 생긴것이다.  예수 사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초대교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주교회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안티옥. 데살로니카. 알렉산드리아. 카파도키아 등지에 기독교의 거점을 두고 활동하게 되었으며,  실질적인 기독교의 중심 역활은 오랫동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안티옥이 중간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  로마주교회 조차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안티옥이나 알렉산드리아에 보고를 하고,  그곳에서 사람을 보내와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황제(로마제국)가 제의해 온 내용이 차후에 어떻게 펼쳐질지까지 염두에 두고 계산해 본 로마주교회는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옥의 고위성직자들이 로마로 몰려와서 기독교 대표로서 황제와 협상을 벌이고 나게되면,  그 대표들은 앞으로 계속 로마에 머물면서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제국(황제)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되면 현재의 로마주교회는 앞으로 영원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옥에서 오게되는 고위성직자들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수행원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로마주교회의는 스스로 자신들을 온 세상 기독교의 대표자라고 자임하게 된다.  명분은 제각각 성격이 다른 여러곳에 흩어진 기독교 수장들로부터 의견 수렴이 불가능할 뿐더러, 그들을 모두 끌어모으기엔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조속한 해결을 원하는 황제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가히 종교적 쿠데타 였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흐름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노련한 황제는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

  안티옥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산전수전 모두 헤쳐나온  삶의 지혜를 깨달은 원로종교인들이 대표로 나서게되면 협상이 길어지고 다방면에 구체적이고 심도있는 조율이 이어져야 하는 부담을 황제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여 로마주교회를 꼬득여 일을 성사시키고 나면  그들은 황제의 은공에 감복해 스스로 자진해서 제국에 충성을 다 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이 계산이 어찌되었든 성공을 거두게 된것이다.

  313년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서 정식으로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 졌다.

  그와 동시에........  아니나 다를까?

  모든것을 한 입에 싹쓸이 한 로마주교회를 온 세상의 모든 기독교가  성토하고 부정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흩어져 극악한 환경에서 교세를 이어 온 안티옥이나 알렉산드리아와 데살로니카의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들에 비하자면  로마의 주교회의는 그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며 부당한 대표성에 적극 항의 하였다.

  로마주교회의는 거듭 자신들의 대표성을 주장하면서 황제가 위임해준 명분을 앞세워서 나머지 전체 기독교계를 파문시켜 버렸다.  자신들만이 참 기독교인 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온세상의 기독교(그리스 정교회)에서도 로마주교회를 파문시켜 버렸다.(이 치졸한 기독교내 기득권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황제의 바람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재에 빠른 로마주교회의 중심으로 어떻게든 수습이 되어서  황제의 통치에 기여하는 하나의 하급 기관으로 정착되기를 바랬던 것이었다.

  로마주교회의 최대 약점은 정통성이었다.

  다른 기독교 지역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뿔뿔히 흩어져야만 했고, 300년 이상 기독교 신앙을 꾸준히 유지해 온 정통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티옥. 데살로니. 알렉산드리아. 카파도키아는  그 같은 기간동안에 꾸준히 교류해 오면서 장차 벌어질 기독교의 앞날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함께 고심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한 뿌리로서의 정통성을 세상이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회의에서 뽑힌 사람이어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의 대표라 할 수 있었다.

  기독교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 로마주교회는 고심에 고심 끝에 한 가지 희망을 찾아냈다.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나와 로마에서 선교사업을 펼치다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실질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음.  다만 로마카톨릭만이 2.000년 동안 그렇게 꾸준하게 주장하고 있다.  로마카톨릭을 제외한 어느 기독교도 베드로의 로마 순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의 로마 순교는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지극히 미미하게 구전으로만 떠돌던 이야기를 정설로 만들어 버렸고,  자신들이 바로 베드로의 후계자임으로 어느정도 기독교적 정통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로서 구세주로 부터 천국의 열쇠를 넘겨받았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성서에 따르면 언젠가는 구세주께서 다시 오셔서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로마주교회의는 이제 새로운 기독교 세상의 중심이된 로마에 새로운 왕국이 건설될 것인지,  아니면 구세주께서 일단 로마에 오셨다가 회의를 통해서 로마이던 예루살렘이던 새 왕국을 건설하실것인지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로마주교회가 심각하게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자 교회와 황제는 다시 모의를 시작했다.  정통성을 창조해서라도 소란을 잠재워야 한다는데 입을 모았다.

  황제는 베드로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 '절대성지로 성 베드로 성당'을 건립했다.(그것이 오늘날의 바티칸이 되었지만,  그곳이 사도 베드로의 진자 무덤이라는 사실에는 카톨릭 신자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계와 이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도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부정하게되면 로마카톨릭의 정통성이 뿌리채 흔들리게 되기 때문데........  아마도 타임머신의 발명을 바티칸은 사활을 걸고 막을것으로 짐작)  이어서 라테라노 성당과 궁전을 지어서 로마주교회의가 상주하면서 기독교를 통괄하는 업무를 보도록 배려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흥망사> 에서 이렇게 썼다.

  '엄격하게 교회용어에 따라 표현하자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최초의 기독교 황제라는 표현은 적어도 황제가 호흡을 멈춘 순간까지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 해야만 하겠다.  황제의 장례식을 엄숙하고도 성대하게 치루고 난 후에 까지도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개종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성경 말씀이나 영적인 진리에는 애초부터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야심에 찬 이 젊은 통치자는 순전히 정치적인 동기에서 종교를 이용하고자 했던 권력자일 뿐이었다.

  밀라노 칙령에 의한 (기독교 공인)에 대해서 카이퍼는 이렇게 덧붙였다.

  '교회가 자유와 양(量)적인 토양은 얻었으나,  바람직한 참신앙의 질(質)은 잃었다.  순수를 잃었고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313년의 밀라노 칙령은 한마디로 교회가 엄청난 타락으로 빠질 수 있도록 댐의 수문을 열어준 것이다.'

  로마교회는 마치 타오르는 불꽃 처럼 비대해져 갔고 타락해 갔다.

  숨어다니고 탄압받던 종교에서 제국에 무수히 요청을 해대고 황제의 명도 적당히 거스르는 정도로 또하나의 무지막지한 권력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의 공인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수많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해버린 기독교 공인이었기에,  이제 다시 기독교를 제재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권위에 흠집을 내서 쿠데타를 유발하게 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까지는 소아시아 지역에 정적인 리키니우스 황제가 건재해 있었기에 기독교는 더욱 더 커다란 화근이 되었다.  그럴수록 기독교는 타락하고 권력에 탐닉해 들어갔다.   불과 채 10년도 안되는 시간에 기독교는  제국에 기생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으로 변했다.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류를 범하고 있는 한가지 역사적 사실을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중요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발생한 (기독교의 공인)이 곧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격상) 이라고 이해하고들 있다.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는 그저 여타의 모든 종교들처럼 신앙활동의 자유를 얻게되었다는 사실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흔한 말로 이단에서 벗어나 더 이상 탄압받지 않게되었다는 뜻이다.  태양신 아폴로나 미트라 신앙, 조로아스터교나 힌두교 신앙이나 이집트에 기원을 둔 신앙까지  이 세상에 퍼져있는 거의 대부분의 신앙을 로마는 허락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탄압에서 겨우 벗어났을 뿐이고  로마에는 여전히 수많은 종교들이 자유롭게 존속해 있었다.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것은 67년 이라는 한참이나 먼 시간이 지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죽고 후대인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시기에(서기 380년) 이르러서야 로마의 국교가 되는 것이다.

  그 시간 사이에는 세계사적으로나 기독교 역사쪽으로나 수많은 사건들이 또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짧은 10여년의 시간이 채 흐르기도 전에 로마카톨릭은 무섭게 변질되어 갔다.  로마카톨릭의 지도자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잃어갔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진 영원한 죄의 사해짐과 의로운 믿음과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약속에 점차 관심을 잃어갔다.  대신 쟁취한 권력과 부를 통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드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구원을 통한 하늘나라의 약속은 권위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승에 아방궁을 지어놓고 자신들은 하늘나라 대신 이승에서 천년만년 살기를 원했다.  세상은 점점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로마카톨릭이 버젓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제 황제(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회(로마카톨릭)에 환멸을 느껴서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불과 10년 만에 황제는 로마제국의 미래가 기독교(로마카톨릭)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로마카톨릭을 멀리 내쳐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미 세상 어디에나 버젓이 활보하고 다니는 기독교를 하루아침에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의 업적중에서 가장 공들였고 최고의 공적으로 치장했던 기독교 공인이 아니었던가?  이상황에서 표시가 나도록 기독교를 제압한다는 것은.........  자신의 업적뿐만이 아니라 어저면 황제의 자리마저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시작했던만큼 자신의 대에서 어떻게든 로마카톨릭의 문제를 해결하고 매듭지어야만 했다.  황제는 기독교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제국의 앞날만이 자신의 앞에 당면한 과제라 여긴 통치자였던 것이다.

  야심에 차고 상황 판단은 물론 남달리 머리 회전이 빠른 총명하고 냉철한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1세 였다.

  마침내 그는 해결 방안을 찾아냈다.  정치적 목적으로 기독교를 끌어들였다면,  정치적으로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기독교(로마카톨릭)를 일거에 쓸어담아 내 칠 방안을 착안해 냈던 것이다.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세운 황제는 우선 '로마제국의 재통일'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와 함께 제국의 군대를 모두 끌어모아서 자신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단합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파행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고 싶지 않았던 황제는 휘하의 정예 군단을 이끌고 로마 도성을 벗어났다.  하지만 로마카톨릭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황제가 은밀하게 거대한 마스터 플랜을 완성하였고  그 첫걸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멀리 소아시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다는 사실 외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황제는 흔들리는 권위의 국면전환을 위해서 소아시아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또 한명의 황제와 제국의 최고통치권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치루러 떠났다고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더 이상 황제의 출병을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수시로 황제와 다툼을 벌여 온 교회(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없는 로마를 자기들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어서 오히려 황제의 공백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을 지경 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근거지는 누가 뭐래도 로마(제국의 수도) 였다.  한편 리키니우스 황제의 근거지는 소아시아지역 입구의 비잔티움(이스탄불) 이었다.  지금 콘스탄티누스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 비잔티움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소아시아로 나아가고, 싸워서, 이겼다.  리키니우스를 잡아 귀양을 보냈다.(처남 매부지간 이었기에)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둘러 귀향하지 않았다.

  전 군대를 이끌고 보부도 당당하게 리키니우스의 본거지 비잔티움에 보란듯이 성대하게 입성했다.  그리고는 그자리에 아예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에 두문불출 운거하면서 그곳에서 사신들을 통해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독을 풀려나 보다,  어디가 아픈가 보다, 가보니 좋아서 그냥 한동안 눌러앉아 쉬려나 보다, 라는 단순한 추측들이 난무하긴 했지만,  그는 승리한 제국 유일의 권력자 였기에 더이상 아무도 토를 달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로마로 향하던 사신들과 식민지의 조공물이 어느 순간부터 로마가 아니라 비잔티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를 알게된 로마의 원로원과 교회와 시민들은 황제를 향해 원망스런 표현들을 내쏟기 시작했다.  그러면 가끔씩 황제는 비잔틴으로 향하는 물자의 일부를 로마로 보내 원성들을 달래주었다.  로마의 재정과 생활이 점차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 황제는 보급 물자와 함께 정예 군단의 일부를 딸려 보냈다.  로마의 방위를 굳건히 보완한다는 명목이었으나,  사실은 교회와 로마의 지배층과 성난 민심을 통제하기 위하여 강압적인 수단의 한 방편으로 보낸 것이었다.

  비잔틴은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로 활기를 되찾아가고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리키니우스의 궁전을 확장 보강하는 공사를 시작했으며 군데군데 성곽을 쌓고 진지를 구축했다.  로마의 군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이자 건축 설계자이자 엔지니어이자 기술적 장인집단 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마)는 이 용맹한 군대가 온 세상에 만들어 놓은 위대한 창작물이라 해도 전혀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황제는 비잔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단에게 비잔틴을 역사적인 도시로 새롭게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원성과 반감이 극한으로 치솟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혹시 황제가 아예 비잔틴에 눌러앉아 살려고 하는거 아니야?' '그럼 혹시 로마의 수도를 그리로 옮긴다는 속셈이 있는것은 아닐까?'  마침내 황제의 깊은 속셈에 대한 온갖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교회로 황제의 속셈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으며,  생겨날지도 모를 '비잔틴의 천도'가 현실로 닥친다면 교회가 대항하고 선택해야만 하는 부분들을 심도있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뻔했다.  오로지 한가지 뿐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중심지이자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근거지를 두고 이제껏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등한시 하고 거의 개념조차 가지지 않았던 (로마라는 엄청난 기득권)에 새롭게 눈을 떴던 것이다.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이제껏 로마가 가졌던 모든 기득권이 한 순간에 깡그리 날아간다는 뜻이 된다.  로마의 귀족과 부호와 원로원과 로마 시민권자와 관리와 시장의 상인까지 모두 치명적 타격을 입게되는 것이며,  교회(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서는 로마의 궁전과도 같은 교회 생활에서  한순간에 다시 지하 카타콤베로 돌아가라는 것과 전혀 다를것이 없는,  결코 받아 들여서도 받아 들일수도 없는  고위성직자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를바가 없다고 여겨졌다.

  로마 군중의 성난 목소리를 전해들은 황제는 로마라는 도시도 엄연한 자신의 영토이기에 저들의 분노도 가라앉히고 로마의 동향도 살필 겸해서 철저한 군대의 호위아래 수도 로마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궁전에 돌아오자 마자  로마교회의 대주교가 황제를 찾아왔다.  대주교는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황제에게 직접 답변을 요구했다.

  ㅡ '황제께서는 소문처럼 정말로 비잔틴으로 천도를 구상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ㅡ '천도 라니요?  제국이 시작된 로마를 두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로마가 제국이고 제국이 곧 로마가 아니겠습니까?  로마는 언제까지나 제국의 수도로 영원 할 것입니다.  떠도는 소문을 주교께서도 믿으셨단 말씀입니까?'

  ㅡ '황제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 말씀을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해도 되겠습니까? 로마시민들의 민심이 날로 흉흉해 지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바삐 소식을 전해 민심 동요를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ㅡ '본인 황제의 뜻은 확고합니다.  로마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로마제국의 수도로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세요.  수 일내로 천도가 모두 헛소문이라는 황제의 포고문을 발표 할 것입니다.'

  ㅡ '사람들은 비잔티움의 도시 재건사업이 수도 이전을 위한 준비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도 이전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대단위 건설공사가 필요 없지 않겠느냐 하면서.........'

  ㅡ '비잔티움 또한 로마의 영토이지만,  직전까지 로마의 공적인 리키니우가 차지하고 지배해 왔습니다.  비록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본래대로 수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잔티움의 재건을 통해서 아직 음지에 숨어있는 리키니우스 잔당들의 싹이 돋아나지 못하게끔 먼저 황제가 선정을 베푼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음이요,  제국의 영역중에서 가장 멀리있는 소아시아 지역을 관장할 로마군대의 주둔지를 확충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제국의 서쪽은 비잔티움의 총독이 모두 관장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 못지않은 비잔티움이 완공되고나면 소아시아 주변의 오랑캐들도 감히 제국을 넘볼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에서의 급한 일정이 마쳐지는 대로 다시 비잔티움으로 돌아가서 나머지 건설공사를 서둘러 끝내고 로마로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ㅡ '황제께서 또다시 비잔티움으로 출정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제께서 천도를 계획하고 계신것 같다고 의구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눈들이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헤아려 주십시요.'

  ㅡ '로마는 변함없이 제국의 수도로 영원 할 것이라고 제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비잔티움의 재건 또한 황제가 해야 할 일이기에 서둘러 마치고 돌아오고자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것을 황제가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ㅡ '어찌 그런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국의 황제께서는 모든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세간의 우려를 알려드리고자 함 뿐이었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교회의 사람들에게 황제 페하의 말씀을 고스란히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대주교는 마음이 급해졌다.  황제가 곧 포고문을 발표 할 예정이라 했으니,  한시라도 바쁘게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빠르고 널리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에서 였다.  황제의 확실한 답변과 속마음을 빨리 알아차린다는 것..........  그것도 로마교회의 대주교를 통해서.........  이것이 곧 권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황제 다음으로 제국의 2인자가 교회라는 사실을 잠시 후면 세상 사람들이 더욱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황제가 로마교회 대주교에게 천도는 없다고 약속했다'는 소문이 내일이면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서둘러 궁전을 빠져 나가려는데..........

  ㅡ '아 참!  대주교께서는 잠시만 발걸음을 멈추어 주시요.  내 긴히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방금에야 깨닫게 되었소. 아주 잠시면 되겠소.'

  지극히 찰라 같은 순간에 어떤 불길한 예감이 대주교의 뇌리를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제께서 부탁이라니.....? 이건 결코 예사로운 느낌이 아니다.  불행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이야.  교회에 위기가.......'

  마지못해 대주교는 황제 가까이로 마지못한 발걸음을 되돌렸다.  황제는 지극히 편안한 모습으로 얼굴에 여유 가득한 미소까지 띄고 있었다.  대주교의 등에 땀방울이 흘러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ㅡ '비잔티움에 머물면서 사방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들 입에서는 하나같이 대주교와 로마교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들을 많이도 쏟아냈더랬습니다.  그들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고 나서 저는 그들에게 대주교와 로마교회는 결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상당한 오해가 있는것 같다.  차차 기회를 만들어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해서 되돌려 보냈답니다.  상호간에 깊은 오해가 있었고 거기에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금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여 내가 대주교께 한가지 부탁을 드린다면..........  대주교께서 이번 출정에 나와 함께 동행하시어 비잔티움을 다녀오시면 어떨까 하여 청을 드려보는 바입니다.  본인이 중재를 잘 할 터이니 이번 기회에 동방의 교회들과 오해를 풀어보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ㅡ '황제께서 명하시면 목숨이 열 개라도 받들어 모셔야 함을 잘 알고있는 처지이긴 하옵니다만,  지금 당장 사방에서 빗발치듯 제기되어 쌓이는 교회 내부의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옵니다.  우선 로마교회의 니부문제를 우선적으로 모두 잘 해결해내야만 제국내의 질서유지와  여러가지 분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사려되는 바.........  당장은 로마교회 내부에 치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시기를 간곡하게 청합니다.  내부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는 즉시 로마교회가 앞장서서 동방의 교회와 화해와 병합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최선책을 찾아낼 것이며,  그때는 황제 페하의 도움과 가르치심을 더욱 간절하게 청하게 될 것이옵니다.  당장은 로마를 떠날 수 없음을 헤아려 주실것을 교회를 대표하여 거듭 간절하게 요청드리는 바 이옵니다.'

  ㅡ '대주교께서 로마교회에 산적된 일들이 많다고 하시니 내가 더 함께 가주십사하고 강요 할 수는 없는것 같습니다.  아무렴요. 일이라는 것이 다 때가 있고 우선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것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하세요.  이번에 다녀오면 사간을 가지고 차차 동방교회와의 문제를 대주교와 다시 상의하도록 하지요.'

  궁전을 빠져나온 대주교는 그만 맥이 탁 빠져서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떤 의도에서였건 황제가 작심한 깊은 음모에서 겨우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황제는 로마교회에 엄청난 덪을 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교회의 대주교에게 로마를 벗어나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동방 교회의 수장들과 만나라고?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었다.  로마를 벗어난 세상의 모든 교회(정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로마교회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늑대 무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로마교회의 기득권에 저항하는 모든 교회(정교회)를 파문 시키고 이단으로 지목한 것이 바로 대주교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의 영적인 영역(믿음의 생활)에 가르침을 내려주고 지대한 영항력을 끼쳤든 사람들이 지금 모두 동방교회의 수장들이었으며,  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자신과 로마교회를 지탄의 대상으로 삼았고 기독교의 공적으로 천명했던 것이다.  로마제국을 등에 업은 로마교회는 온세상 기독교의 우두머리인것 처럼 행세하며 권력과 부를 탐하고 사치와 향락에 취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로마인을 넘어 이제는 황제까지 손가락질 하며 등을 돌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주변에 일부의 정적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라고..........  로마교회는 여전히 정통성과 초대교회의 대표성에 대하여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로마교회의 수장들을 이끌고 동방교회의 심장인 소아시아 지역으로 데리고 가서 들판에 내어놓고 나몰라라 하는 상황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어떤 면으로든지 동방교회에 대적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일이 혹시나 벌어지게 된다면.........  살아남아서 로마로 돌아 올 로마교회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쳤을때........  로마교회의 대주교가 느낀 두려움은 극한의 공포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이 모든것이 사전에 동방교회와 모종의 합의를 끝낸 황제의 흉계였다면...........  실로 로마교회의 엄청난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극적인 상황에서 겨우 살아나온것은 모두 대주교 스스로의 영민함과 탁월한 처세술의 덕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에 이르렀다.  대주교 자신의 기지로 방금 로마교회가 살아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제 로마교회는  황제와 동방교회 연합에 대처해야 하는 새로운 현실적인 과제를 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였을까?

  같은 시각 황제는 스스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들어 혼자 축배를 하고 있었다.

  '여우 같은 대주교가 동방교회라는 말에 놀라 허둥대느라 분별력까지 상실하고 길게 앞을 먼저 내다 본 자신의 꾀 앞에 그만 발을 헛디뎌 나뒹군 꼴이 아닌가?  그토록 집요하게 싸움질로 일관하더니만.......  결국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고 마는구나.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간 실수로 끝나지 않으리라.  곧 무릎꿇고 용서를 구걸하게 되리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대대적으로 본격적인 비잔티움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성벽을 수축하고 궁전을 짓고 도로를 확충하고 수도교를 지어 물을 끌어들이고 신전과 대전차 경기장을 건설했다.  새로 건설되는 건축물들의 위용이 하나하나씩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지켜 본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로마) 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는 '역시나 로마는 위대해' 하는 의미와 '이게 로마야 비잔티움이야' 하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  새롭게 건설된 비잔티움은 제국의 수도 로마에 비해서 못할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런 새로운 대도시였다.

  로마에 버금가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는 쭈욱 그곳에 머물고 있다.  작금의 모든 제국의 통치행위는 여기 비잔티움으로 보고되고 명령이 하달되는 상황이고 보면  이제 세상의 중심은 버젓이 비잔티움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천도는 불가하다고 약속을 했지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함부로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만 꼭 한사람,  황제 자신만은 스스로 내린 자신의 명을 뒤집는다 해서 누구도 따지고 들거나 함부로 질책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황제가 곧 제국이고,  제국은 모두 황제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전제에서 따져 본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티움을 건설하는 속 뜻은 무엇일까?

  그럼 황제가 나서서 직접 로마교화와 나눈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황제의 움직임을 꾸준히 염탐해 오던 로마교회는 이제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다. '황제는 무조건 비잔티움으로 천도를 감행한다.'  그렇다면 로마의 토착 기득권층과 합세하여 로마교회는 어떻게 대항해야만 하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쿠데타 모의와 이민족을 부추겨 침입하게 하는 것과 심지어 황제를 암살하는 방법까지가 모색되기 시작했다.  황제는 로마의 토착 기득권층과 로마교회의 제거대상 1호가 된 것이다.

  황제가 비잔티움으로 돌아간지 만 6개월 뒤에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직인이 선명한 포고문을 소유한 사자들이 내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온 세상의 지축을 흔들었다.  그것은 온세상의 기독교 교회 앞으로 보내는 황제의 친서였다.

  '제국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교적 문제에서 파생되는 불화가 제국의 안위를 걱정케 할만큼 중대해 졌다고 생각되어 본 황제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 안티옥. 데살로니카. 카파도키아. 알렉산드리아. 코린토 등지의 거점도시 주교회는 서기 325년 6월 19일에 소아시아 지역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별궁에 도착하여 대표한 지역명과 함께 본인의 이름에 서명하라. 모든 주교회는 6명 이상의 종교지도자를 선발하여 참석토록 할 것이며,  지역의 대표자는 대주교를 포함하여 의당 그 대표성을 스스로 입증하여야 한다.  황제의 명을 거부하거나 무단으로 참석지 아니하는 주교회에 대하여는 파문과 동시에 해체를 명할 것이다.  이번 공회의에서는  현재 기독교 내부에서 제기되고 대립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토론과 회의를 통해 최종 결론을 얻게될 것이다. 나는 이번 공회의를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가이샤라의 유세비오스(Eusebios tes Kaisareias)를 공회의 진행 책임자로 임명한다.'

  이것이었다.  이것 이야말로 황제가 의도한 새로운 개혁을 향한 마스터 플랜의 핵심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품은 야심찬 계획의 바탕엔 타락한 로마교회의 배척과 제거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비잔틴으로의 천도도 로마교회를 내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채택된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신이 선택해 공인해 준 기독교를 곧바로 내친다는 현실이 그토록 어렵고 가혹한 시련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사태를 스르로 자초한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교회였다.  로마교회의 변질........  부와 권력에로의 집착과 타락이 이 모든 사태를 야기시킨 원인이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절망을 넘어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황제의 속마음을 너무 얕게만 보았고,  그가 로마교회에 얼마나 실망했으며,  끝내는 등을 돌리고 교회를 내치려 이렇게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며 차곡차곡 하나씩 진행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하루 아침에 황제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다.

  로마교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대주교를 포함한 6인을 선발하여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에서 열리는 기독교 공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이었다.  로마지역을 벗어나면 세상은 온통 로마교회의 적이었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회의에 312명에서 318명으로 짐작되는 모든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로마교회(로마카톨릭)을 대표하는 성직자는 6명 이었고,  나머지 300명 이상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동방교회)의 수장들이었다.  더불어 공회의의 진행대표자 또한 황제가 직접 임명한 동방교회의 유세비오스 주교였다.

  로마제국의 후광에 힘입어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교회는 더이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죽은듯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난도질 당할 뿐이었다.  황제는 그런 로마교회를 꾸짖었다가 달래었다가 겁을 잔뜩 주었다가 풀어줬다가 쥐락펴락을 반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니케아 공회의는  성 삼위일체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하나다)을 교리로 채택했다.  그리고 부활절을 정했다.  교리를 놓고 반목과 대립이 이어졌으며,  심지어 이단 싸움을 벌이다가 황제에 의하여 제지당하기도 했고,  패자가 유배를 당하는 페단을 낳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첫번째 공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바야흐로 이제부터 로마제국 기독교의 중심은 로마교회가 아니라 동방의 정교회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온갖 수모를 겪은 후에 겨우 목숨과 로마주교회의 존립만은 어찌되었건 사수하여 로마로 귀환했다.

 

 

 

 

 

 

 

 

 

 

 

 

 

 

 

 

 

 

 

 

 

 

 

 

 

 

 

 

 

 

 

 

 

  로마교회를 완벽하게 제압해버린 황제에게 이제 더는 거칠것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계획대로 비잔티움을 차곡차곡 새롭게 건설해 나갔다.  그러다가 이제 어느정도 제국을 운영 할 수 있을 정도의 도시가 완성되었다고 판단되었을때,  그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천도를........  비잔티움이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음을 세상에 공표하였다.(서기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이 이탈리아 반도 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소아시아 지역의 비잔티움으로 이전한 것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몇가지 오해의 소지가 또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가 비잔티움으로 천도하면서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서기 330년에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거기까지가 콘스탄티누스의 역활이었다.  서기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했던 것이다.  나머지 중요한 일들은 그의 사후에 벌어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하에서 벌어지고 마무리 되었다고 알고 있다.  시간이 한참이나 더 지나서 서기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비로소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여기에서의 기독교는 로마교회(로마카톨릭)이 주관하는 제국의 국교로 격상된 기독교가 아니다.  로마제국의 국교로 신분을 상승한 기독교의 주체는 동방교회(그리이스 정교회) 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 니케아 공회의에서 몰락해 버린 로마교회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땅바닦에 납작 엎드렸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난국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얼마나 이렇게 죽어지내야만 했느냐?  역사를 세세하게 헤집어 보면 325년의 니케아 공회의 이후로 로마교회(로마카톨릭)가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며 되살아 날 기회만을 엿보던 시간이 장장 300년 이상임을 잘 알 수가 있다.  300년 이상을 로마교회는 스스로 세운 로마라는 쇠창살에 갇혀서 호시탐탐 기회만을 엿보면서 숨어지내야만 했다.  이는 모두 그들이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이라는 기득권을 가로채서 10여 년의 기간동안에 저지른 실로 어마어마한 만행에 대한 댓가였다.

  서기 395년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격 시켰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음의 목전에서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유산상속을 시킴으로서 그때에 비로소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었던 것이다.

  위의 설명 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분명 서기 330년에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천도를 감행한 것이다.  그것으로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서기 324년에 시작되어서 1453년에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잔틴의 시작과 수도의 천도 사이에 6년 이라는 시간적인 갭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왜 일까?

  그것은 로마교회에 실망을 느껴 배척하기로 결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원대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로마교회 척결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로마제국에 대한 구상을 마련했다.  그것이 바로 천도였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있는 계획에 따라 수도의 천도를 결심하고 나서 처음으로 비잔티움을 방문한 것이 서기 324년 이었으며,  그때부터 제국의 천도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것이 새로운 비잔틴 제국의 출발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생겨난 결과물인 것이다.  서기 324년 비잔티움에 도착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곽을 수축하고 거대도시의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가장 먼저 실행한것은 제국의 법률 개정이었다.

  번률 개정의 핵심은 로마제국 안에서의 기독교의 위치와 역활에 관한 것이었다.  그만큼 로마에서 로마교회에 의해 끌려다녀야 했고,  급속하게 변질되어 끝없이 부와 권력을 탐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어 교회 자신들은 물론 로마사회를 타락으로 이끌던 파행을 막아야 하는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마에서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해 주면서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허락했었다.  세속의 정치는 황제가 맡으면서  보편 타당한 선에서의 세속적인 삶의 문제를 떠난,  영적이면서 종교적인 역활과 권한을 모두 무상으로 허락하였던 것이다.  황제는 지상 위에 세계(세속적인 영역)를 다스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영적인 경계선을 넘어서 세속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편타당한 선에서 볼때,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유지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는 이런 이유를 빌미로 세속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다방면에 걸쳐서 다양한 페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회는 황제의 권력에서 어느정도 비켜나 있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애매한 또 하나의 권력집단으로 급성장을 해나갔던 것이다.

  황제는 이를 법률로서 개정하고자 했다. 

  비잔티움. 안티옥. 데살로니카. 알렉산드리아. 카파도키아. 로마 등지의 기독교 거점마다 중심역활을 하는 교회를 지정했다.  그리고 그 중심 교회에 대주교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대주교들의 권위는 모두가 똑같았다.  늘 황제와 가까이 마주대하는 비잔티움의 대주교에게 선임 대주교의 지위를 주었으나,  그 선임대주교를 포함한 모든 대주교들의 권위와 맡은 바 책임과 역활은 모두가 동등했다.  서열이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로마교회가 제국을 쥐락펴락하고  그 핵심에 로마대주교(훗날의 교황)가 있었음을 뼈져리게 반성한 결과였다.

  황제의 기독교에 대한 법률개정의 요지는 딱 두 가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황제는 대주교를 선택하고 임명한다.  이는 황제와 교회의 권위와 신분의 격차를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해준다.  이제 교회는 분명하게 황제의 권위 아래 존립하는 단체로서 그의 지휘와 감독을 받도록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황제의 너그러운 재량으로 어느정도의 영적 활동의 범위와 자유는 허락하는 선에서 말이다.

  둘째.  지금 황제가 거론하고 허락하는 기독교 라는 존재의  99.9%가 모두 동방교회(그리이스 정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황제의 의중에 로마교회나 로마교회 대주교는 안중에도 없다.  다만 탄압했다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외면하고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로마교회(로마카톨릭)의 존립 가치나 당위성은 로마라는 영역 안에서 자기들 끼리만의 신앙공동체일 뿐이었다.

( 황제에게 교령을 하사하는 교황)

 

 

 1천 년의 세월이 지나 중세에 들어 기적적으로 부활에 성공한 로마카톨릭은 그날의 치욕을 감추고자 하는 이유에서 바티칸의 사도궁전 교황의 집무실 한 켠에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날조된 역사를 빌미로 거창하게 프레스코화를 한 점 그려넣었던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교령을 하사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역사의 날조마저도 하늘에 계신 높은 분의 뜻(?)이라고 우기면.......  나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열렬한 기독교 숭배자였다' 라고 우기다 못해 교황 주도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서' 라는 위조 증명서를 만들어 세상을 차지하려 했던 희대의 사기극을 모두 바티칸이 벌였다는 준엄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그림  몇 점을 허위로 날조했다고 해서 달라질것도 놀랄일도 아닐터이니 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비잔틴 제국이 최대 영토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든 위대한 왕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알렉산더 대왕에 버금가는 유럽 역사를 통털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불세출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있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 건립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수많은 업적중에 하나로 꼽힌다.

  로마의 정통성을 항상 자부심으로 생각하던 황제는 자신의 임기중에 몰락한 서로마의 영역,  그러니가 로마제국이 가졌던 옛 영광의 부활을 외치면서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지난날 로마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라고 명령한다.  이 시기에 유스타니아누스 황제의 명을 받아 벨리사리우스가 회복한 영토가 기존 비잔틴의 영토 크기와 맘먹을 정도였다.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 반도를 포함한 유럽 대륙의 중심부는 물론 리베리아 반도 일부(스페인 지역)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상당부분을 수복해 황제에게 받쳤다.  비록 말년은 비참하게 되었지만  벨리사리우슨 황제의 충성스런 무장으로 외길 인생을 달렸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흔하게 과거의 서로마 제국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내 자신을 내친 황제의 충신으로 남았다.(벨리사리우스의 삶은 흡사 우리나라 이순신과 여러면에서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의 군대를 몰고 이탈리아 반도로 왔다.

  그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고트족을 비롯하여 일프스 산맥 이북의 여러 오랑캐들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축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한때 제국의 수도로서 인구 50만을 헤아리던 대도시였던 세계의 중심지는 모두 폐허로 변해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아주 특별한 명령에 의해 로마에 여러날을 머무르면서 여러가지 일을 진행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로마교회(로마카톨릭)을 살피고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이었다.  비잔틴 제국과 동방교회는 2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결코 로마교회를 믿지 않았다.

  벨리사리우스는 성 베드로 성당(옛 대성당)이 테베강 건너로 바라다 보이는 포로 보아리움 지역에 진을 치고 한동안 머물면서 여러가지 사업을 벌였다.  로마의 재건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포로 보아리움 지역에 교회를 짖기 시작했다.  이때 건설하는 교회는 당연하게 동방 정교회의 교회였다.  정교회 교회와 로마의 재건사업에 외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도시 로마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든데,  그중에 상당 수가 그리이스인들이었다.

  200년 동안 호시탐탐 재기를 모색하면서 다양하게 숨어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던 로마교회는 또 한번 위기를 느꼈다.  그동안 서로마가 멸망 한 후에 서쪽으로(세계사는 이곳을 프랑크 지역이라 규명했으며,  훗날 이곳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가 되었고 일부는 독일에 병합되었다) 수많은 소국들이 생겨났다가 자기들 끼리 전쟁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로마교회는 이들의 분쟁에 뛰어들어 분란을 조장하기도 하고 연맹을 만들기도 했다가 화해의 중재를 놓기도 하면서 서서히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 어느정도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싶을 때,  비잔틴의 군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로마교회가 상황타개를 모색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벨리사리우스가 군대를 몰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쳐들어 왔다.  로마교회는 대주교를 앞세우며 비잔틴 군대의 성역 침입에 거세게 항의 하였다.  그러자 벨리사리우스가 이렇게 외쳐 답변했다.

  '나는 황제의 명을 받을어 과거 서로마 제국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왔다.  이탈리아 반도를 회복한 것 또한 영토 수복 전쟁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이제 우리의 다음 목표는 알프스 서쪽의 광대한 분쟁 지역이다.  프랑크 지역에서 분쟁을 일삼고 있는 모든 약소국들은 스스로 나와 제국 앞에 무릎꿇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비잔틴 제국의 적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로마교회가 저들과 소통하고 교류하였다면 이는 이적 행위로서 법률에 근거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당하지 않겠는가?  로마교회는 어서 황제 앞에 무릎꿇고 반역 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아라.'

  하루아침에 날벼락이라더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있을 수 없었다.

  저들의 올가미에서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프랑크 지역의 분쟁을 이용해 재기해 보려던 여러 흔적들까지 모두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더욱 납짝 엎드려서 황제의 선처를 빌어볼 수 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제국의 황제가 세속을 법률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까지 로마교회를 파탄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였다.  하지만 만약에........  황제가 동방교회를 앞세워 초기 로마교회가 자행한 수많은 오류와 파행에 대해서 혹시나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토록 하게된다면..........  로마교회는 파문을 넘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까지 이미 섰던 것이다.  결국 로마교회는 프랑크와의 교류를 모두 시인했으며 재발 방지와 함께 황제의 너그러운 선처를 거듭 거듭 호소했다.

  황제의 처벌이 하달되었다.

  로마교회는 기존의 직위를 박탈당하였고,  대주교의 자리도 사라졌다.  이제 로마교회는 로마 지역을 관장하는 중심적인 주교회의가 아니라,  비잔틴 동방교회(그리이스 정교회)의 로마 지부로 교회의 신분이 격하된 것이다.  로마교회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처벌에 대해 거듭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이미 그들에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오로지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를 선택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로마교회의 그 누구도 이 순간에 거룩한 순교를 택하지 않았다.

  이제 로마교회는 사라졌고.........  비잔틴 동방교회의 로마 지부만이 남게 되었다.

  이제까지 살펴 본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하고 살펴보고자 했을 때,  과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열렬한 기독교 숭배자였으며 끝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세례를 받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나는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다.

  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삶에서 '밀비우스 전투를 앞두고 꿈에 십자가를 앞세우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과 '이젠 사실로 공인된 황제의 기증서 날조'와 '임종 직전의 세례'는 모두 로마카톨릭이 자신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꾸며낸 허구라고 생각한다.

  로마카톨릭이라는 존재와 당위성 마저도 모두 빼앗긴 일개 선교사무실 정도의 처지에 어떻게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교황이 교회의 가르심을 지시내리는 교령을 하사했다는..........  그런 낯뜨겁고 허무맹랑한 어처구니를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교만일까?  뻔뻔함일까?  아니면 가증스러움으로 가득찬 단세포적인 철없음일까?

  로마카톨릭은 이런 어두운 역사 위에 건설된 또 하나의 왕국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교황이 있다.

  바티칸은 그 후로 수없이 죄사함과 거듭남의 결과로 지금까시 서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듭거듭 역사의 과오에 자주 거론되고 있는 것이 바티칸이다.

  지금의 바티칸 지도자들과 제국에 편승했던 초기 로마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무엇이 진정으로 변했고  그들이 본모습이 무엇인지도 나는 도무지 잘 알지 못하겠다.

 

 

  인샬라(inshallah)!

  알 카프(Al- Kahf)!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오르비에토 두오모의 파사드 부분.

 

 

 

 

 

오르비에토 두오모는 볼세나의 기적의 핵심인 (성체)를 보관하기 위하여 낡은 초기 교회 기반 위에 새롭게 건설된 교회이다.

 

 

 

 

 

 

 

 

 

 

 

 

 

 

 

 

  볼세냐의 기적과 성체 보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했던 애초의 의도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오르비에토 두오모를 다시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이번 오르비에토 여행을 마무리하려던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물론 과거의 오르비에토 여행기에서 이미 약간의 볼세나 기적과 두오모에 대해서 다룬적이 있었기에,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이쯤에서 오르비에토 여행을 마무리 하고 서둘러 피렌체로 이동해 볼까 한다.

 

 

 

 

 

  예전 같았으면 새로운 여행을 대여섯 번은 더 다녀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겠지만,  코로나 19 라는 새로운 상황은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라면  더욱 새로워진 여행기를 쓰느라고 훨씬 바빠졌을 지도 모르겠다.  2020년 1월 17일 로마에서 귀국하였는데  불과 나흘 뒤인 21일 부터 공항에서 체온감지기를 통한 코로나 방역조치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니.......  그간 훌쩍 지나버린 1년 8개월 정도의 시간에 절로 감개가 무량해 질 수 밖에.......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여행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그저께 부로 이탈리아가 백신 주사를 통한 방역조치를 취한 사람들에 의해서 격리조치 없이 입국을 허용했으며,  그 같은 사례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출국을 해서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고 치자.  정작 귀국하게 되면 자가 격리 2주를 해야만 하는 현실적 상황은 여전하다.  3주에서 4주 정도의 여행을 주로 하는 우리 경우에 기껏 다녀와서 다시 2주를 격리하자면........  그땐 정말로 생계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나라에서 제재를 풀어주었다 해도........  모두가 방역에 힘들어 하기는 지구촌 모두가 같은 처지일 터인데,  힘들고 지치고 썰렁한 남의 나라를 보란듯이 즐겁게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석 내키는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  이럴땐 차라리 복잡해서 짜증스럽기까지 했던 지난여행의 일상이 오히려 그립기까지 하다.

  앞으로의 여행이 언제 다시 재개될지 기약할 수 없는 마당에.......  이제 머지않아 이번 여행기(르네상스 산책)을 마치게 되면.......  다음엔 무슨 소재를 가지고 매진을 해서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를 나름은 고심을 하고 있었다.

 

 

  ##  내가 살고 있는 (충주)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게  역사 지리를 넘어 다방면으로 고찰해보는 글을 준비하였었다.

 

  ## 레플리카(Replica) 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대 그리이스의 다양한 조각품에서부터 세세하게 하나하나씩 미술사를 거슬러 내려가면서 살펴보고픈 생각을 가지고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원본이 없는 복사본' 이라는 표현에 무한하리만치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했다.

 

  ##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과 동경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오래된 지적탐구의 정점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어려서부터 역사를  유독 좋아했던 나는 어느날인가 부터 관심과 시야를 세계사와 미술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스스로 어느정도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국사와 세계사는 전혀 동떨어진 과목(학문)으로 상호간에 보완 내지는 제대로 매치가 되지 않았다.  두 개의 역사 사이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갭이 존재 했다.  그러다 무심코 제 3지대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과  서구라 불리는 유럽의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역사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슬람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역사 줄기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학교 교육이 내게 가르쳐준 이슬람 역사는 '칼이냐 코란이냐' 라는 단 하나의 명제 뿐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진 않아서 나는 이 말이 서구(유럽) 중심의 오만한 백인 역사관에서 비롯된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이슬람 문화와 역사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자면  이슬람에 관한 자료(책)가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미미하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고 놀라게 될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모든것이 너무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슬람에 대한 나의 진도는 더딜 수 밖에 없었고 늘 부족함을 아쉬움으로 달랠 수 밖에 없었던것이 사실이다.

  근자에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철수'와 '탈레반의 카불 입성' 이라는 제목하에 연일 모든 매스컴이 더들썩 하다.  ㅡ동안 일상생활 속에서 석유 문제나 테러 이야기가 나오면 쬐끔식 이슬람 사정을 이야기 하고는 했는데.......  이번 사태로 주변에서 이스람에 대한 질문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경우를 맞이하고 있다.

  하여,  한 번 작정하고 이슬람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의 (르네상스 산책) 못지않은 분량으로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생각하고 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것 같다.  나름 오랜 시간동안 축적해둔 자료와 생각들을 적어놓은 메모장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이슬람은 누구인가?)라는 글을 써 볼 생각을 가지고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이번 여행기를 먼저 마쳐야 하지 않을까?

  당장 피렌체로 가야하고,  베네치아와 씨에나를 거쳐 로마로 돌아간 다음에 나폴리를 다녀와서 로마에서 최종 여행을 마무리 해야만 하는 여정이 아직 남아있으니 말이다.

 

  오르비에토 대합실 타바키에서 맡겨두었던 배낭을 찾아서 둘러메고 서둘러 우리는 피렌체로 향하는 레지오날레(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툭하면 고속철도와 화물열차에 철도를 내어주면서 우리가 탄 레지오날레는 거듭거듭 연착을 반복했다.  어느새 이탈리아 반도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고,  우리나라 초겨울을 연상시키는 겨울비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가 가진것은 시간과 배짱 뿐인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어?' 하는 자조섞인 말을 자주 읖조리고는 했는데........  시간과 배짱으로 해결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다.  그것은 지루함 이었다.  앞만 보고 바쁘게 내달려 온 우리에게 지금 이제나 저제나 느릿느릿 제 멋대로 가는 열차는.......... '지루함'이 얼마나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인지를 처절하도록 우리가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이러다가 오늘 안에 피렌체에 가기는 가는거야?'

  '가기야 하겠지.  그나저나 문제는 오늘 예약한 숙소가 곧장 스트레이트로 찾아가 체크 인을 하면 되는 곳이 아니라,  반듯이 별도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길 안내와 열쇠를 받아야만 한다는 공지가 있었거든?  이러다 사무실 문 닫으면.......  우리 기차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야 하는것 아니야?'

  '설마..........'

  어찌되었건 야심한 밤이 찾아내리고 나서야 기차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겨울비 내리고 바람결이 몹시도 싸늘한 겨울비와 짙은 어둠에 젖은 피렌체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늦기는 했지만 무사히 도착 했잖아.  아무 걱정 하지마.  이래도 내가 피렌체에 세번 째 방문이야.  피렌체가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ㅎㅎㅎㅎ.'

 

 

 

 

 

 

 

 

 

 

 

--- 부족한 장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피렌체)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