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계절 변화에 민감한편 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해도 그렇게 무덤덤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추적추적 비가 지루할 정도로 내리는 날에는 무작정 비를 맞고 걸어다니기도 하고, 특히 봄날 숲이 곱게 파스텔톤으로 물들었을 즈음에 비가 내리면 여하한 경우에라도 차를 몰고 시골길을 달려야만 하는 나름은 감성적 본능에 대단히 충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가을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편이다. 가을과 겨울의 딱 중간쯤에서 길가에 수북히 떨어진 낙엽들이 타들어가면서 제 빛을 잃어가고, 앙상해진 나뭇가지에 겨우 남아서 떨고있는 잎새 위로 겨울을 재촉하는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무작정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곤 했었다.
눈 보다는 비가 좋고, 화창한 날 보다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 좋다. 오염된 산성비를 주위에서 염려들 하지만, 내게는 우산도 모자도 없다. 조상님 은덕으로 탈모 걱정은 적어도 우리 가문에선 찾아 볼 수 없다. 어느 배낭엔가는 15년 이상 되었을 비상용 비닐우비가 미개봉으로 어딘가 있을것이다. 비가 오면 온몸으로 맞이하고 하염없이 걷기를 즐기는 편이다. 자연 그대로의 숲길과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유럽의 돌덩어리로 포장된 골목길을 유독 좋아한다. 인적이 아주 드문 호젓한 열린 공간을 유독 사랑한다.
이런 정도로만 쳐도 혼자 생각되기는........ 나이 60을 넘긴 남성들 중에서는 여전히 젊은틱한 감성주의자라 나름은 생각해보는는데.........
서로 일손을 도와주는 협력업체 후배의 요청으로 연풍현장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며칠 지원을 나갔다.
후배가 괴산군 연풍면 소재 은티마을에 별장형 전원주택 공사를 맡아 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실 이 마을은 예전에 여러번 다녀간 적이 있어서 낯익은 장소였는데, 여기 은티마을에서 하늘재나 희양산으로 향하는 널리 알려진 등산로 기점이기 때문이다. 아주 예전에 등산을 하러 드나들던 곳이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분들이 주로 드나드는 제법 유명한 은티마을의 주막도 여전했다.
그런데......... 얼씨구나....... 저절씨구..........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 싼 봉우리들 마다 울굿불굿 단풍으로 가득했었던 것이다. 아니지...... 절정을 막 넘겨서 잎이 마르게 타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그제서야 문득 '가을'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 이른아침에 이르러서야 '아참! 지금이 가을이지'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가을이 내가 사는 중부지방을 지나쳐 남쪽을 향해 줄달음질 친 후에서야 가을을 떠올렸던 것이다.
'도대체 뭐하느라고 가을이 지나가는것 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지낸것이지?'
하긴, 정치판 꼬라지들이 보기 싫어서 티비로 뉴스도 잘 보지 않고 지내다보니 단풍 소식을 접할 수가 없었나 보다. SNS를 통해 비교적 간단하게 날씨만 확인하고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는 담을 쌓고 한동안 지내왔던 때문이리라. 그래도 현장을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깨을 터는것도 보고, 쬐끔은 고구마 수확하는 것도 도왔고, 밤공장 일을 마치면서는 수확한 알밤을 잔쯕 얻어왔으면서도 정작 '가을'을 느끼지 못했다니.......
'아니...... 내가 좀 느끼지 못했기로서니....... 마누라는 그럼 가을이 다 지나가도록 뭐한거야?' 라고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다가 이내......... 꼬리를 싹 내린다.
추석 이후로 별로 일한 것이 없다. 적어도 내 경우는 말이다. 허구헌 날 비가 하염없이 내리 퍼붓지, 현장이 갯뻘로 변하면 마르기를 사나흘 기다리고, 다시 시작할 만하면 또다시 비가 내리지. 자꾸 딜레이 되는 처지가 어디 우리뿐이겠는가? 작업할 상황이 되었다 싶으면 이번엔 인력난과 장비난에 시달리지. 어쩔 수 없이 반백수 신세로 지낸것은 나였으니....... 반면, 챠밍여사는 정신없이 바쁘다. 일에 치여 살 정도로 바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와 갖은 핑계를 총동원해서 평일 하루를 내서 쉬기로 했다.
왜?
가을 좀 느껴 보려고.........
우리는 때늦은 가을여행을 위해 대둔산으로 떠났다.
우리에겐 아주 소중한 기억이 한 가지 대둔산에 내걸려 있었기에 이번 기회에 그 추억을 되찾아 보고 싶었다.
'여름성경학교 마치는대로 1주일 휴가시라고 들었는데 그땐 뭐하시나요?'
'특별한 계획은 아직 없는데요. 서울 올라가서 제가 자란 서부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좀 도와주려고 생각중이예요. 후배들이 잘하고 있는데 처음해보는 동생들이 있어서 좀 도와주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선생님은요?'
'시골생활에 여름휴가라는 것이 어디 있겠어요? 일 년 열두 달 죽어라 사방에 널린게 일 뿐일걸요.'
'힘드시겠네요. 그런데 제 휴가는 왜 물어보셨어요?'
'그냥....... 혹시나 해서요.'
'무슨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그런건 아니고요. 제가 무례한 부탁을 한 가지 드리면......... 지금 당장 대답하지 마시고........ 여름성경학교 끝나기 전까지만 대답을 해주실래요? 무조건 거절해야겠다고 단정하지 마시고.......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생각해 보신 다음에 제게 대답을 알려주세요.'
'아주 중요한 일인가봐요.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나서 대답해 드릴께요.'
'저도 여름 휴가를 가볼까 해요. 제가 캠핑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3박4일 정도로 대둔산으로 해서 계룡산을 다녀올까 생각했어요. 사전 준비에 대해서는 이미 계획을 철저하게 마추었어요. 모든 여건이나 주변 상황들에 대해서도 준비를 해두었어요. 그 여행의 동행자로 초대하고 싶어요. 저는 이미 충분히 생각해서 내린 결론으로 지금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이고, 절대 억지나 강요는 아니예요. 생각 좀 해봐 주세요.'
흔한 표현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분명 프로포즈였던 셈이다. 하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그게 어디 프로포즈였겠는가? 실로 느닷없이 쏘아댄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였지......... ㅎㅎㅎㅎ
뻔히 불가능하단 사실을 잘 알면서 무턱대고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생겼을까?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시골과수원 언덕위에 있는 나만의 공간인 농막에서 밤새도록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왜 그래야 했을까? 뻔한 결과를 알면서 왜 그렇게까지 엄청난 짓을 저질렀을까? 당장 내일 이후로 어떻게 마주치고 당면한 학생회 일을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 당장 보다리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면 어떻게 하지?
삼 면이 유리로 훤히 뚫려있는 산정높이의 농막에서 새벽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엎드려 절대자께 간절함으로 매달렸다. 일은 저질러 졌고, 수습할 방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내가 하소연 할 데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떤 바램과 목적을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려 본 것이.........
"하나님! 쭈욱 저를 지켜보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저는 가르침과 이끄심대로 참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하며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집안의 반대에도 죽어라 교회를 나갔고 누구보다도 착실하게 교회생활을 해왔습니다. 성장해서 보답하려고 학생회 교사를 맡았지요, 대학부 청년부 활동을 함께하면서 나름 열심히 이끌었지요, 성가대석에도 앉았습니다. 군대 다녀와서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활동 열심히 다시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요...... 제가 이제껏 하나님께 부탁이란걸 드려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요? 이제것 저 개인을 위한 어떤것도 부탁드려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탁을 드려야만 할 일이 생겨버렸어요. 무슨 부탁인지 이미 잘 알고 계시지요? 다시는 다시는 부탁 드릴 일이 없을것입니다. 제 인생을 통털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부탁이니....... 부디 이번 한 번만 제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여 주세요............(생략)'
그랬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벌써 선뜻 내걸었을 것이다. 그때는...... 적어도 그때는 그만큼 간절한 바램이었다. 지금에야 툭하면 나는 챠밍여사를 (왕짜증) 이라 부르고, 툭하면 챠밍여사는 나를 (개뿔) 이라고 부르는 사이로........ '간절함' 이란 의미가 퇴색되었고, 그냥 어떤 '동지의식'으로 새롭게 무장했다고나 할까?
내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이 있기까지 두 가지 기억만을 꼽으라면 전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하나는, 바로 위에 적은 '나랑 여행 같이 갈래요?' 이다. 그날이 바로 '우리'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때 거절 받았다면........ 글쎄다.........
두번째는, 바로 오늘이다. 37년 전의 바로 오늘, 나를 쏙 빼닮은 녀석이 툭 튀어 나왔다. 나의 분신이자 전부인 녀석이 말이다. 오늘이 바로 녀석의 생일 날이다. 엄마는 친정식구들이랑 여행 떠나고, 아빠는 이렇게 집돌이 본분에 충실하면서 지난날을 회상이나 하고 있다.
두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뻔하지. 사랍답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떠돌아 다니고 있을꺼야.' 라고 주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정말? 나를 너무 비하하는것 아니야? 내가 뭘 어쨌다고?'
어쨌거나?
그 해 아주 유난히 태양이 뜨겁던 어느 여름날 새벽에 우리는 기차에 함께 올랐다.
아무도 모르게 새벽 열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서 완행 버스를 타고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을 달려서 마침내 대둔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대둔산 입산이 금지된것이 아닌가? 뜬금없이 한여름에 입산금지라니?
1984년 당시의 대둔산을 지금의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둔산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당시에는 산에 대해서 좀 아는........ 산을 좀 탄다는 사람들만이 찾는 깊은 오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케이블카는 90년이 되어서야 설치 개통이 되었고, 당시에는 관광지라고도 볼 수 없었다. 대둔산이 관광지로 개발착공 시작된것이 83년이었기에,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서 84년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인 개발 공사에 착수할 시점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 대둔산의 매력을 충분히 들었었고, 등산이나 캠핑에 대해서는 나름 일가견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던 젊은날이었은즉, 특별한(?) 첫여행지로 선택한 대둔산이었으되....... 산은 입산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등산로를 폐쇄한 채, 주변 관광 위락시설 공사와 등산로 개척과 케이블카 설치 기초공사가 이제 막 시작되었었던 것이다.
헐!
인생사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여러차례 이사를 다니다 보니....... 그 추억여행의 사진이라곤 달랑 한 장밖에 남은것이 없다. 역사적인 대둔산 개발공사 안내판이 유일하게 남은 그날의 추억이랄까?
사진속에 남은 것이라곤 풋풋했던 24살의 내 젊은 날의 한 페이지 뿐이다.
그해 3월 24일에 제대를 해서 참으로 모질고도 혹독한 시련의 나날을 겪고 있었을 당시의 내 지난 자화상이다.
인생무상....... 덧없고도 덧없음 뿐이로구나. 한때는 내게도 저런 청춘이란게 있었는데........
한동안 재기를 꿈꾸며 서울생활을 하고 있었을때, 글을 쓰는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과 제법 규모가 있는 모임을 했었다. 모임에서 큰누님으로 모 여자대학교 학장님이신 피복누님과 작은누님으로 작가이신 모모누님을 자주 뵈었는데 그분들께서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서 덤으로 자주 '동생은 여난(女亂)만 조심하면 살아가는덴 별 어려움이 없을거야'라고 놀리듯 말씀하시곤 하였다. 더하여, 모모누님께서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나에게 특별히 싸인을 하신 책을 선물해 주셨는데, 그 싸인 내용이 하도 기가막혀서 그날 모인 여러사람들이 배꼽을 부여잡고 난리법석을 떨게 만드셨고 한동안 그 일로 작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예전의 내 필명이 '야련' 이었다가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지금의 '피안재'로 빠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가도 인물 부족하거나 빠진다는 소리는 안듣고 살았는데 말이다. 아! 옛날이여.
모모누님이 작가 조은일 여사다. 더 알려지기는 '7번방의 비밀' 히로인이었던 갈소원양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모모누님, 밖에서는 여복을 타고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집에 갇혀서 여난을 겪으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랍니다. 허이구야.........'
가만히 돌이켜보니 그때까지만 해도 내 허우대가 그래도 어디를 가나 좀 먹어주었었는데......... 다른 사진을 보니 그래도 50까지는 그럭저럭 먹혔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는지?
'우리 아빠는 어디가고 낯설은 아저씨가 자꾸 우리아빠라고 하네.......' 라는 아들의 푸념까지 듣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암튼, 대둔산은 입산 통제가 되었고 할 수 없이 한참을 기다려 다시 완행버스를 타고 계룡산 동학사로 갔다.
동학사를 시작으로 갑사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대둔산을 다녀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이대로 산을 넘는것은 무리이지 싶었다. 하긴........ 등산이 중요했겠나? 당장 손잡고 함께 있는것이 중요했지? ㅎㅎㅎ. 그땐 그랬지.....
동학사에서 내려와 뷰여가는 길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무척이나 먼 길을 걸어서 나왔는데 차편이 없다. 구검가계에서 물어보니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완행버스는 오지 않았다. 지쳐 쉴곳이 우선 필요하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치......... 삼거리 들녁이 끝나는 들판 저너머에 게룡산 자락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실개천이 보였다. 마을에선 거의 보이지 않을만틈 외지고 한적해 보였다. 곧 저녁이 찾아들겠고....... 참한 아가씨 손을 잡아끌고 벼가 한창 자라고 있는 시골 논두렁길을 이리돌고 저리돌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그 너머에......... 너무나 맑고 투명한 실개천이 흐르고, 실버들과 갈대밭이 우거진 보금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올망졸망한 몽돌이 쫘악 깔려있고 작은 물고기가 얼마나 많이 놀고 있던지........ 홍수만 나지 않는다면 이세상 무슨 걱정거리도 없을 무릉도원이 거기에 있었다. 별 모양도 없는 둑방에 독야청청 엉성한 노송 두 구루가 어느정도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곳에 텐트를 쳤다. 어렵던 시절이라 당시의 무거운 텐트 이외에도 3일치분의 먹거리 분량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3일동안 그냥 눌러앉아 지냈다. 완전 에덴동산 생활로 돌아갔다. 이틀째 논 물을 가두러 삽을 들고 농부할아버지 한 분이 들녁 저만치를 둘러보고 가시고, 내가 삼거리 구멍가계에 한 번 다녀온것 빼고는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없는 고립무원의 무릉도원에서 달랑 우리 둘만이 살았다. 물놀이도 하고 일광욕도 하고 별을 헤다가 잠이들기도 하고........ 3일을 그렇게 지냈다.
전 교회가 나서다시피 어르신들의 각별한 보살핌과 전폭적 지지와 성원을 한 몸에 받고있는 애기 목회자와 교회 안에서는 순한 양이지만 교회를 나서기만 하면 소요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푸른늑대를 쏙 빼닮은 놈이 남의 눈을 피해다니며 몰래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엄청난 편지풍파를 몰고왔다.
그러니 어쩔꺼여? 지덜끼리 좋다는데.......
이듬해 식목일에 결혼했고....... 짱구가 태어났다. 이후론 아무도 지난날을 문제삼지 않는다. ㅎㅎㅎㅎ
'이젠 내껀데(?) 뭐!'
금강구름다리를 건너고 삼선게단을 오르고 나서 숨고르기를 하면서 잠시 고심을 해본다.
여기까지 올라온 처지에 마천루까지 마저 올라갈것이냐? 말것이냐?
주로 앞장서서 결정하고 내친걸음에 서둘러 먼저 올라치는 스타일이 챠밍여사 성품인데 오늘은 머뭇거리는 표정이다. 오늘 나들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결정한 일이고, 내일이 챠밍여사 건강검진일이라 낮부터 음식조절과 컨디션 조절을 해야했던 상황에서 시작된 나들이라서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표정이다.
'저녁부터 금식하면서 약 먹으려면 오늘은 이쯤에서 내려가 뭐라도 좀 먹어두는게 좋지않겠어? 오늘 다 올라가서 보고나면 다시 안올테지만 남겨두면 다음에 마저보려고 다시 오게되겠지뭐.'
'그럴까?'
우리는 이쯤에서 천천히 하산을 하기로 결정했다.
현지 관계자의 말씀을 빌어도 금년 단풍은 참으로 볼품없고 황당할 지경이라고 했다.
가을에 비가 연일 계속되었던 이유에다가 느닷없이 불어닥친 이틀간의 한파가, 잎사귀에 물이 들기도 전에 얼었다가 녹아서 그만 물이 들기도 전에 까맣게 타들어가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북쪽에서 단풍이 내려오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현상이 금년엔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하신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대둔산은........ 새싹이 막 피어나는 봄과 눈 쌓이 겨울이 최고인것 같애요.'
그 말씀은 곧....... 그 계절에 다시 찾아오라는 말씀처럼 들렸다.
우리에겐 함께 걸어온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대둔산이다. 다시 찾아 올것이다.
다음날 건강검진 잘 받았고, 이번에도 무탈하다니 다행이다.
그리곤 다시 일터로.......... 열심히 살아야지. ㅎㅎㅎㅎ
우리의 다음여행은......... 제주도 겨울여행이다. 12월 27일에 차를 배에 싣고 제주도로 겨울여행을 떠난다. 새해를 제주도에서 맞이 할 생각으로 계획을 세웠고, 나름 준비를 하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 다음 국내 여행기는 새해에 제주 이야기로 다시 하기로 하고, 먼저(이슬람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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