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관문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드디어 기차가 멈춰 섰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적지에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꽃의 도시라 불리는 르네상스의 발상지 '플로렌스에 아름답게 수놓아 있는 진짜 르네상스'를 챠밍여사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 계획한 여행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 마자 나는 배낭을 둘러메고 대합실 구내에 있는 서점 겸 카페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건데? 화장실 부터 가는거야?'
'아니야. 구내 카페 커피머신 뒤에 흘려놓은 내 마음부터 찾으러 가는 길이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마음을 찾아 텅 빈 가슴부터 좀 채우려고...........'
'헐!!!!! 진짜 어이가 없군. 헤푸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넘의 마음을 다시 찾으면 뭐해? 금방 또 훌려놓을 거면서.......... 밤은 깊었지 바람 불고 비까지 내리지........ 숙소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어?'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면 썰렁한 가슴이 거의 채워질거야. 두 조각이 빠져나갔었는데 한 조각을 드디어 여기서 찾아서 채우는구나......... 피렌체는 이 손바닦 안에 있으니까 아무 걱정 하지마.'
'그럼 나머지 한 조각은 어디 있는데?'
'이스탄불.'
'헐! 우리 여행 시작이 이스탄불 이었는데........ 소피아 광장 옥수수 파는 리어카 뒤에서 쪼각난 맴을 찾아서 채웠다면서? 그런데 또 잃어버렸다고? 그새?'
'이번에 우리가 새로운 공항을 처음 이용했잖아. 그러다보니 떠나오던날 새공항을 이리저리 쏘다니던 통에 또 마음 한 조각을 어디엔가 잃어버린거지 뭐. 모르고 있다가 비행기 안에서 알아차렸지 뭐야?'
'개뿔. 그게 잃어버린거냐? 고의로 흘려버린 거지? 신문지에 꽁꽁 싸서 틈새에 쐐기처럼 박아서 숨겨 놓은거지? 그래야 언젠가 또....... 흘려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네 어쩌네 하면서 다시 가야한다고 개수작을 부릴거 아니야?'
'헐! 이런 마귀할망구 같으니라고....... 촉은 귀신 같이 좋아서리.........'
'하여간 잔머리 대왕이라니까? 일단은 헤푼지 날라리인지 하여간 맴을 찾아서 가슴팍에서 맞춰 끼웠다 치자. 며칠 뒤에 피렌체를 떠날 때는 또 어디엔가 흘려서 잃어버렸다고 사기칠거 아니야? 뻔하지. 피렌체하고 이스탄불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꾸 오고 싶을테니까 말이여. 아녀?'
'오해여. 내가 그렇게 헤푼 사내이줄 알아? 그럴것 같으면 우편으로 파리에 하나, 런던에 하나, 아이슬랜드에 하나, 프로방스에 하나, 산토리니에 하나, 프라하에도 하나, 크로아티아엔 두 개 보내버렸겠다. 날 믿어!'
난 가슴이 늘 썰렁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다.
어마도 어딘가에 흘려놓은 마음 서너 조각이 비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 깊은곳에서 무엇인가가 스멀거리듯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푼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이럴때가 되면 차밍여사는 귀신같이 내 눈치를 알아채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넋이 좀 빠진듯 하고 말수도 줄어들고 표정이 심각해지면서 활기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은근 슬쩍 '가출한 마음 타령'을 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가슴이 텅 빈것 같아서 며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전에 아르메니아 평원 가르니 계곡에선지 조지아의 카즈베기에선지 슬며시 빠져나간 마음 한 조각 때문에 자꾸만 춥고 스산해진다고.........ㅎㅎㅎ'
그러고나면 한 동안 챠밍여사의 감시와 간섭이 심해지고 노골적이 된다. 그럴때면 끝까지 모르고 안듣는 척 하면서 잠시 정신줄을 놓은 모습을 사명감을 가지고 연출해야만 한다. 그렇게 그렇게 고난의 시간을 헤쳐나가게 되면 마침내......... '눈 앞에서 빌빌대지 말고 갔다오고 싶으면 갔다 와. 개뿔....... 맴은 무슨 맴을 흘려........ 하여간 잔머리 대왕이여.'
챠밍여사의 허가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벌떡 일어나 배낭을 꾸리기 시작한다. 코카서스 지역을 다시 찾아갔던 여행이 바로 그런 케이스로 그때가 24일간의 나 혼자 여행이었나........... ㅎㅎㅎㅎ
르네상스(Renaissance)란 무엇인가?
르네상스(Renaissance)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일어난 문예부흥(文藝復興) 또는 문화혁신 운동을 말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에는 좀 더 세세하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혁신 운동을 말하며, 도시의 발달과 상업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인간의 개성. 합리성. 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반(反)중세적 정신 운동이 일어났으며, 문학. 미술.건축. 자연과학 등의 여러 방면에 걸쳐 유럽 문화의 근대와헤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라고 나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을 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인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가 자신의 저서인 <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들을 해설하는 장면에서 '그리이스와 로마의 재림' 이라고 극찬을 늘어 놓으면서 리나시타(Rinascita) 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이 용어가 다시 쓰이게 된 것은 대략 30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19C에 이르러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쥘 미슐레가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용어를 정식으로 자신의 저서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르네상스는 '회귀' '복원'의 의미를 간직한 '문예 부흥 운동' 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 더 깊숙하게 용어 선택의 과정을 살펴보자면........ 서구(서양. 유럽)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나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유쾌하거나 썩 내키지는 않는 의미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있다고 본다.
르네상스는 분명히 한 문예사조, 그러니까 모든 인류의 문명사에 있어서 르네상스라는 한 시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문명은 문화와 같은 의미로도 쓰이기도 하고, 학자에 따라서는 예술. 생활. 따라서는 민족을 포함하는 '문화'에 과학. 기술 등을 첨가하여 약간의 상위 단계나 포괄적 의미로서의 '문명'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굳이 이를 구분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명(Civilization)을 문화(Culture)와 같이 취급한다해서 결코 그릇된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라 하겠다.
바사리가 의미를 분명히 했던것 처럼, 19c의 유럽 사학자들은 르네상스를 '그리이스 로마의 문화 복원' '그리이스 로마의 문명 복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문명(Civilization)은 바로 '야만(Barbarism)'의 반대적 개념으로 처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일부 제 3지대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 처럼 서구(서양. 유럽)의 백인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생겨난 표현이라는 지적이다. 백인 우월주의 관점에서 유럽이 아닌 지역에 사는 모든 민족이나 국가를 '야만이'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이는 중화사상에 빠져든 중국의 한족이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오랑캐라고 표현한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겠다. 중국에게 한반도는 동이족(東夷族), 그러니까 동쪽의 오랑캐였던 것이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유럽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에 대한 깨다음에서 르네상스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성지탈환을 위해 야만인들의 지역(소아시아)을 쳐들어가보니 그곳은 미개한 야만의 대지가 결코 아니었다. 유럽 어디에서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선진문물이 그곳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여 황페한 초원이 되고 비잔틴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단절되기 시작했을때, 과거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의 수도인 로마같은 도시가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구 2~3만의 도시조차 없었던 중세 암흑기였다. 그런데 노랍게도 야만인들이 사는 아랍세계에는 인구 50만이 넘는 도시가 3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럽인들은 꿈에도 몰랐다. 바그다드. 메카. 그리고 리베리아 반도의 톨레도가 그러했다. 이 도시마다 동방에서 온 향신료와 금은 보화와 비단과 도자기가 수북히 쌓여 거래되는 시장이 섰고,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런 그들을 유럽인들은 '야만인' 이라고 불렀다.
이는 분명히 그릇된 시각과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야만인들이 오히려 문명인을 폄하하고 노골적으로 적대시 하는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르네상스를 탐구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를 '그리이스와 로마 문화의 복원 내지는 복구' 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표현을 보다 타당하게 하고자 한다면 '야만에서 탈피하다(Breakaway from barbarism)' 라고 하던가 아니면, '유럽인들의 야만성 극복(Over coming the barbarism)' 이라는 표현으로 르네상스를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의 오만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마가 도시국가 형태를 벗어나 발전하기 시작했을때 부터 그들이 당면한 맞상대는 그리이스 였다. 하지만 솔직히 당시의 로마는 감히 그리이스를 상대라고 부를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오랜 내전으로 그리이스가 급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자 로마는 그때부터 그리이스를 극복해야 할, 또는 반듯이 넘어야 할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태생적인 적대감은 이미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이스 문명과 초기 로마 문명으로의 회귀' 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르네상스에 있어서, 희랍인들은 '그리이스'라는 표현을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다는데 보다 중요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라는 표현은 로마가 희랍인들을 가리키면 만들어 낸 새로운 용어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헬레네인, 혹은 헬라인(Hellenes)라 스스로 칭한다. 또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다.
유럽 여행을 하게된다면........ 낯선 여행자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서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게 될 경우, 만약 그사람이 그리이스 사람이라면 '오! 그리이스인' 하지를 말고 '오! 헬라인' 이로고 해보자. 틀림없이 그사람은 크게 감동을 먹었을 것이다. 그리이스인들에게 최고의 칭찬이자 에티켙은 '그들을 헬라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 이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데 그렇게 중요하냐? 이를 아주 쉽게 다른 예로 표현해 본다면........ 낯선 해외 여행지에서 광장 한 켠에 내걸려 있는 아주 커다란 현수막을 마주쳤다고 치자. 그런데 그 하얀 현수막에 먹물로 그려진 커다란 손바닥 그림이....... 새끼 손가락 마디가 잘려나간 손이 그려져 있고 그 옆으로 (대 한국인) 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면 순간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로마인들은 기원전 8세기 경에 아탈리아 남부에서 그리이스인들을 처음 만났다. 로마는 이제 막 도시국가의 틀을 벗어나는 시점이었지만, 그리이스는 이미 지중해 연안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던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그곳에서 로마인들이 마주친 사람중에 그리이스 본토에서 건너 온 사람으로 이름이 그라이쿠스(Graecus) 였다. 로마인들은 그라이쿠스와 교류와 교역을 하면서 그를 지칭하며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오늘날 영어 표현인 (Greek)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리이스는 몰락했고 로마는 왕정과 공화정시대를 지나 제국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이스인들을 식민지 주민으로 처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식민지의 그리이스인들을 '그라히치'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모든 그리이스 사람들을 다소 폄하하는 의미를 담아 '그라히'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이스인들은 여타의 로마 정복지의 식민지 주민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여전히 그리이스어를 사용했고 고대의 찬란한 영광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호머가 일리어드에 기록한 대로 '자신들은 영웅 아킬레스가 이끌고 프티아에 정착한 선조의 후예인 자랑스런 헬레네인' 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로마의 시민권자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만큼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헬레네인들을 앞다투어 경멸하기 시작했다.(무조건 밉고 배가 아팠을테니 말이다)
키케로는 '오만하고 쬐끄만 그리이스놈' 이라고 외쳤는데....... 그 표현이 그레이쿨리(Graeculi) 라고 기록되었다.
심지어 공화정 말기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로마가 정복해버린 그리이스가 문명화된 라틴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정복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리이스 사람이 선물을 들고 내 앞에 서있다 해도 무척이나두렵다' 라고 썼다.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정복한 헬레네(그리이스)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적어도 헬레네 만큼은 넘어서거나 극복해야지만 위대한 제국으로 번듯하게 설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그리이스(헬레네)가 미웠고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끝끝내 로마(Rome)는 그리이스(Hellenes)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런것도 하나의 정의(正義)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인류가 이룩한 가장 커다란 업적의 하나이자 위대한 발자취로 (4대 문명 발상지)를 꼽는다.
황하강 유역의 (황하 문명),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티그리스 유프라데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이집트 문명) 이다. 유럽은 없다. 문명의 발상지라 하면 인류 역사의 뿌리를 말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신께서 선택하신 우월집단이라는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유럽인들의 입장이 어떠했겠는가? 유럽이 없다니?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뒤집어서라도 유럽을 문명권에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백인들의 간절한 열망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강 유역이 아닌 해안에 위치한 아주 독특한 환경의 (그리이스 문명)을 포함 시키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정통이자 정설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리이스를 훨씬 능가하는 영토와 위대한 역사를 가졌던 (로마)를 유럽인들은 너무도 사랑했고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문명사는 로마제국의 역사를 감히 그리이스에 비교할 수 조차 없다고 평가해 버렸다. 멀리 떨어진 황하 문명이나 인더스 문명은 좀 그렇지만, 페르시아의 역사가 녹아든 메소포타미어 문명과 피라밋과 신전과 오벨리스크가 빼곡한 이집트 문명을 상대하기에는 어딘가 그리이스 문명 하나만으로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를 그냥 역사나 문명사로 이해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테지만....... 서양인(?)들은 백인 우월의식의 선상에서 이를 바라보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백인만이 신에게 선택된 우월적 인종이고 백인이 사는 유럽 지역만이 신에게 선택된 문명세계라는 그릇된 의식이 그네들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아시아나 아프리카는 모두 신에게 버림받은 야만의 세계여야만 하는데 어떻게 지옥과도 같아야 할 야만의 땅에 백인들의 유럽보다 월등한 문명이 버젓이 존재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자문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기고 또 우겨서 (그리이스 문명)을 (그리이스 로마 문명권)으로 확대 재생산 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군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지역과 이집트 문명권을 모두 점령하였고, 군화로 짓밟았으며, 그곳에 로마의 문화와 유적들을 무수히 많이 남겨 놓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에다가 그리이스 문명을 추가로 허용하기는 했지만 로마를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으로 허락하지는 않는 입장이다. 그리이스에 겨우 끼워진 로마는 어쩌지 못해 허용하지만, 그리이스를 제외시켜 버리고 황하문명, 인더스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로마 문명 이라고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고 싶은 특별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말이다.
그런 로마 문화권에 아주 독특하면서도 실로 엄청나게 위대하다 라고 밖에 달리 표현 할 길이 없는 (르네상스) 라는 문예 부흥의 시기가 탠생했다. 포괄적 의미로 넓게 표현하자면 분명하게 '로마 문화권'의 영역 안에서 말이다. 혹 모르겠다. 한 오천년쯤 더 지나고 나면 그 독특한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3대 발상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로마 르네상스 문명' 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해 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유럽의 백인들이 밟고 지나다닌 토대위에 세워진 그들만의 문명을 만들고 싶어질지도.........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승패나 뺏고 빼앗기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모두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럼 (르네상스)가 백인들만의 문화냐? 문명인들만의 축복이냐?
글쎄다. 르네상스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고대 그리이스와 초기 로마에서 번성하던 고전주의, 인간 스스로를 고귀하게 생각하고 아끼던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여러방면에서 비약적으로 문화와 예술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볼 때, 편파적 시각이나 선택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르네상스를 논할 자격조차 가지지 못한 편협한 야만이들이 아닐까?
피렌체에 도착하면 꼭 먼저 숙박업체의 사무실에 들러서 안내와 열쇠를 받은 뒤에 숙소로 향해야 한다는 사전에 전달받은 공지에 따라 업체 사무실을 찾아 나섰다.
싸늘한 겨울바람과 함께 적지않게 비가 쏟아지는 피렌체 도심을 가로질러 두오모로 향했다. 전달받은 사무소의 주소가 두오모 인근의 비아 델 오류놀로(오류놀로 가) 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은 구획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도로를 중심으로 따라가면서 골목 어귀마다 설치되어 있는 도로명과 건물마다 붙어있는 번지 수를 잘 살펴보면 적어도 목적지의 아주 가까이 까지는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가 있다. 한 건물에 여러 번지가 속해 있다던가, 협소한 골목 안쪽으로 다른 번지가 있을때는 예외로 쳐야 하겠지만 말이다.
두오모를 지나치는 한 블럭 너머의 좁은 골목 안쪽에서 사무실을 비교적 수월하게 찾아냈다.
기차의 연착으로 시간이 한참이나 지연되었고, 또 내 경우에는 휴대폰 로밍 써비스를 하지 않고 다니기 때문에 연락처가 나로 명시되어 있는 숙소사무실 측에서는 매우 답답했을거라는 예측은 했었다. '모두 퇴근했으면 어쩌지? 다른 임시 숙소라도 구하러 쫓아 다녀야 하나?' 라는 걱정이 앞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게도 '곧 오겠지'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여직원 둘이 그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인사만 나누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숙소의 체크 인은 어찌되었건 사무실에서 마쳤고, 선불이었기에 체크 아웃은 당일날 시간만 지켜서 열쇠를 호텔 테이블에 그냥 놓고 나가면 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열쇠를 건너 받기는 했는데....... 평상시에는 직원 한 명이 손님을 숙소까지 안내해주고 사용 방법과 당부를 알려주는 것 까지가 체그 인인데, 밤은 깊어서 퇴근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고 모두 사전 약속이 있는데다가 밖에는 칠흙같은 어둠속으로 제법 세차게 비까지 내리는 상황이었으니.......... '노 프라블럼. 기다려 준것만으로도 충분하도록 감사해요. 숙소는 우리가 찾아 갈 수 있어요' 라고 내가 대답을 반복해 주었음에도, 두 아가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극구 내가 자신 있다고 표현하자 마지 못해서는........ 두 가지 지도를 꺼내 놓고는 3D 기법을 활용해 만든 온통 관광지 건물들로 빼곡한 안내 지도를 꺼내 펼쳐놓고는 사무실을 기점으로 숙소까지 빨간 색연필로 띠를 길게 길게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도로 이름들을 설명하면서 가다가 슈퍼에서, 혹은 약국에서 골목으로 꺽어져서 두 블럭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어쩌구 저쩌구......... 서류에 있는 숙소 주소에 나와있는 도로명에 빨간 싸인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다시 지도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ok?' 라고 묻는다. 나는 연실 '노 프라블럼. 트러스트 미'만 반복하고 있다.
작별을 하고 드디어 피렌체 도심의 야간 투어가 아닌 야간 헌팅에 나섰는데........ 쏟아지는 비에 지도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살펴볼 수도 없고......... 뭔 눔의 골목이 이리도 복잡하게 많은지.........
하지만.......... 군대서 30개월 동안 지도만 끌어안고 살았던 내가 아니던가? 거기에다 자칭 타칭 '움직이는 내비게이션'으로 불리던 나에게 있어서 아무리 피렌체라지만......... 같은 길 두 번 헤매지 않고 단박에 숙소 문 앞에 도착해 주소를 확인해 보니 틀림이 없는것이 아닌가?
'뭐야 이건? 괜히 쌩고생을 이제껏 실컷 한거잖아?'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터져나오는걸 막을 길이 없었다.
숙소의 육중한 나무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으려다가 둘러보니 어둠 속에서도 상당히 낯이 익은 풍경이 아닌가? 그곳은 다름아닌 산타 크로체 성당의 파사드 왼쪽 벽면을 따라 나있는 너른 골목길로 산타 크로체 성당 관람 여행객들이 사용하는 출입구가 바로 코 앞인 그런 장소였다.
헐!!!
우리가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 전이었다 해도 <피렌체 숙소 = 산타 크로체 성당 출입구 앞 노란 건물의 2층> 이랬더라면.......... '이 사람들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내가 이래뵈도 피렌체 여행이 세 번째인걸 모르고....... 내가 초짜로 알고 주소만 달랑 손에 쥐어주고 골목길을 이리저리 저리이리로 잡아 돌려?'
어쨌거나 우리는 무사히 피렌체 숙소에 도착했다.
이 순간까지의 과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모두 용서해 줄 수 있는 아량이 팍팍 넘쳐났다.
왜냐면 그렇게 힘들게 찾아 온 숙소가 너무너무 훌륭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자유 여행자에게 이 정도 숙소라면 그건 아마도 족히 별이 4개....... 사성급은 넘든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것도 비수기라는 잇점을 이용해 아주아주 저렴한 비용에 빌렸던 것이다.
가히 중세 시대의 문화재급이라고 해도 좋을듯한 숙소는 아마도 피렌체의 아주 부유한 상인의 집이었던것 같다. 창문을 열면 느껴지는 건물의 외벽이 거의 1m 가가운 두께로 지어졌다. 그것도 돌덩이를 잘라 다듬어 만든 건물이다.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육중한 돌벽 위로 또한 육중한 나무 대들보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부엌과 응접실로 쓰이는 공간이 엄청이나 크고 넓은데다가 큰방과 작은방이 빈티지한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이건물에 현대적 감각인곳은 딱 한군데 화장실이다. 화장실이 작은 게스트하우스 방보다 크고 깔끔하다.
마치 내가 배낭 가득 동양의 진귀한 물건을 채워 가지고 피렌체에 장사를 온 상인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챠밍여사에게 짐 정리를 하도록 하고 나는 다시 숙소를 빠져나와 피렌체의 밤거리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동네마다 골목마다 들어서 있는 넘쳐나는 슈퍼와 편의점은 신의 축복이라 하겠다. 유럽에 나가보면 그 말뜻을 이해하게 되리라. 동네에서 슈퍼 찾기가 하늘의 별 서너개 따기만큼 어렵다면...... 도착이 늦었다고 쫄쫄이 굶고 잘 수는 없지 않은가? 기어코 슈퍼를 찾아내서 와인 한병이랑 사과 세개, 맥주 두 캔이랑 사서 돌아 온다. 아침에 로마에서 다 먹지 못해 남겨두었던 뻣뻣한 빵이랑...... 파티를 한다. 무사히 피렌체에 입성한 축하 파티를.......... 피렌체 여행은 내일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될터이니..........
습관처럼 새벽에 일어나 파란 나무 창문을 열어재치니, 세월의 무게를 잔뜩 머금었음인지 삐걱 소리와 함께 힘들게 겨우 열리기 시작한다. 시원하다 못해 싸늘한 바람결이 쏟아져 들어온다. 피렌체의 바람이다.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살펴보니 옅은 구름이 하늘 가득했지만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도 삐끔 모습을 드러내는것이....... 분명 비는 그쳐있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옆모습이 창문 가득하다. 어찌 멋스럽지 않겠는가?
고개를 한껏 뽑아서 골목길 위로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 드리번 살펴본다. 우측으로 저만치 뽀얀 대리석 조각상의 뒷모습이 시야에 가득 밀려든다. 내가 아주 익히 잘 알고 있는 반갑고 존경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내가 여기 피렌체에 온 이유중에 일부가 저 사람과 함께 이 부근의 골목길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알리기에리 단테'가 내가 아는 그의 이름이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친 우리는 피렌체 거리로 나선다.
일찍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피렌체 여행을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두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휘어져 나가는 골목길을 통해 피렌체 도심을 그대로 통과해서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광장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카페를 찾아 들어가서는 뜨거운 아메라카노 커피랑 식사 대용의 아침에 만든 빵을 주문한다. 우리 방식 아침 의식중의 하나라고 해두자.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오늘 일정을 하나씩 하나씩 설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준다.
노벨라 성당 외벽을 감고 돌아서 우리가 발걸음을 서둘러 찾아간 곳은 피렌체의 관문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이다. 비어 있는 열차표 자동 판매기를 통해 피렌체와 베네치아 사이를 오가는 기차 시간표와 요금을 번갈아 살펴 본다. 이탈리아 국철이 유리한지 이딸로가 유리한지를 유심히 살펴보는데, 아무래도 기차 이용일에 가까워지면 이른 새벽시간과 늦은 저녁시간대의 이딸로가 훨씬 유리하지 싶다. 우리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베네치아를 당일치기로 여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여 우선적으로 당일치기로 다녀오자면 베네치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전제로 오고 갈 수 있는 기차편을 먼저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일이 가능하다면 모든 일정을 베네치아 다녀오는데 우선하고, 나머지 시간적 배분을 하여 피렌체와 인근 여행을 계획하면 되는 것이다. 베네치아행 기차가 모레여야 가능하다면 또 거기에 맞추어야 하고, 글피에 가능하다면 또 거기에 일정 조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도저히 베네치아행 원만한 기차편이 없다고 하면, 포기 하거나 비산 요금이라도 지불하는 방법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다행이 시즌이 비수기라서 그런지 기차는 아무때나 가능했다. 하여 우리는 모레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왕복 열차표를 기대했던 이하로 예매를 마쳤다.
하지만, 피렌체를 제대로 여행하자면 아직 한 가지 준비가 더 남았다.
피렌체 여행의 모든 일정은 이곳을 관람하는 시간을 중심으로 얼마든지 재배정이 가능하게끔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수기에 이곳은 적어도 2시간 이상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하는 명소이다. 피렌체 두오모 지붕이나 지오토의 종탑도 길게 줄을 서기는 하지만....... 결코 이곳에 비교할 바는 못된다. 이곳은 2시간 이상 줄을 서서 표를 끊었다고 해서 끝난것이 아니다. 힘들게 표를 끊었어도 당일 입장이 불가한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겨우 다음날 아침 입장권을 산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베네치아행 기차표를 확보한 우리는 곧바로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다. 걸어서 쉽게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피렌체 여행이라는 것이 사실은 모두 걸어서 쉽게 닿을 수 있는 지근거리에 몰려있다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도착하니 벌써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양인이 많이 있었고 틀림없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저만큼 뒤에 가서 우리는 줄에 합류했고 한참을 지나서 마침내 매표소가 문을 열었다. 대개 전날 오후에 다음날 아침 입장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순번이 되어서 표를 요청하고 요금을 지불하면서 혹시나 하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중에서 가장 빠른것이 언제예요'고 정중하게 물었는데.......... '지금 바로 입장할 수 있어요' 라는 답변이 환한 미소와 함께 건네왔다.
'뭐지 이건? 아침부터 또 횡재하는 기분이네........ ㅎㅎㅎ'
비수기는 한창 비수기였겠지만....... 어쩌면 뜻밖의 아주 특별한 아침을 맞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나름 명성만큼이나 까탈스럽다는 우피치 미술관이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태리할머니야! 우리 방금 계 탓나봐!'
흔히 말하기를 르네상스는 14 세기에서 16 세기에 걸쳐 피렌체에서 시작하여 온 유럽으로 퍼져나간 문예 부흥운동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그 시기를 거론함에 있어는 학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는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계절이나 유행이나 문예사조 등을 구분함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한 시점을 구분지어 규정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마다 어김없이 겨울이 지나면서 봄이 오고 또 어김없이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온다. 하지만 그 오고가는 봄이 어느날 확실하게 도착을 해서 시작된 날이 몇 일이고, 또 몇 일날 기차가 산모퉁이를 돌아나가듯이 봄이 확실하게 떠나갔고, 그날 자정부터 여름이 시작되었다고는 구분지을 수 없는것 또한 엄연한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르네상스의 시기를 규정짓는 것도 그만큼 어려운 영원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의 시작을 분명하게 규정 지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이 너무도 확고했음 때문인지, 아니면 그 주장에 굳이 다른 이유를 들이 댈 명분이 부족해서인지 오늘날 학계의 상당부분에서 그들의 주장을 그런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학자들이 주장하는 르네상스의 시작은 과연 언제 어디서부터 였을까?
15 세기가 이제 막 시작되던 서기 1401년 피렌체의 상인조합(길드)들 중에서 양모와 직물 상인조합(Art di Calimala)이 당시 피렌체의 대성당(두오모) 이었던 '산 조반니 세례당'의 문을 장식할 <청동문 제작을 위한 공모전>을 개최하게 된다.
피렌체와 오랜 라이벌 관계였던 씨에나의 두오모 완공에 충격을 받은 피렌체 시민들의 '결단코 씨에나에는 질 수 없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당시로서는 엄청난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공모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주제는 구양성서에 기록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을 내용으로 43cmx33cm 크기 정방형의 청동판에 무게 34kg의 청동으로 조각 장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제작 기간은 1년이었으며 34명의 심사위원에 의한 공개심사가 조건이었다.
불과 20년전 만해도 이런 세세한 내용이나 이후에 벌어진 사건과 상황들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는 사람조차 드물었지만, 여행이 자유로와지고 미술이나 역사에 관심들이 높아지면서....... 이때의 공모전에 (기베르티)와 (부르넬리스키)가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부터, 장차 이들이 무슨 결과를 창조하게 되는지 까지 이제는 아주 익숙한, 전혀 낯설거나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 변화에 나도 스스로 엄청 놀라고 있는 지경이다.
이 공모전은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 이 공모전의 결과로 엄청난 파급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 누구도 예측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파급효과는......... 수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 공모전을 (르네상스의 시작)으로 규정짓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피렌체 세례당(산 지오반니 대성당)의 청동문 공모전을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의견이 지배적이다. 다양한 다른 학설들 또한 즐비하지만, 그 어떤 하나의 학설로는 모든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기에 대부분 그냥 그렇게 수긍해 주고 넘어가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 견해는 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에는 이상스러울만치 '좀 삐딱하게 보는 시선(?)' '뒤집거나 되집어 보고 싶어하는 충동'이 분명히 있다. 타인의 생각이나 주장에 대해 부정하거나 폄하시키거나 훼손 시키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누구는 숲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무만 집중해서 보는 사람이 있고, 그런가 하면 숲을 파란 하늘이 주를 이루는 풍경의 한쪽 구석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숲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를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녹음이 짙은 푸른 숲을 바라보면서도 눈 덮인 산이나 단풍 가득한 가을 숲을 연상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게는 그런 다양성들을 한꺼번에 모두 느껴보고푼 개구장이 같은 욕심장이 심뽀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버릇일지도 모르겠다.
마이너리티(minority) 라는 말에 나는 묘한 매력을 느낀다.
영어 단어중에서 내가 가장 끌리는 단어는 (beyond)와 (minority) 라고 하겠다.
어쩌면 내가 가진 마인드 자체가 어느정도 (마이너리티적) 일 수 있고,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사고가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마이너리티는 소수(少數)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비주류'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어떤 의견이나 학설을 수렴하고자 할 때, 다수에 의해 선택되지 못하고 밀려난 의견이나 학설을 '마이너리티 리포트' 라고 한다. 톰 쿠르즈가 주연했던 동명의 영화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주류를 이루거나 대중에게 선택되지 못한 의견이나 학설이라고 해서 '뒤떨어진다' '틀렸다' 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끔은 시대적 상황에서 밀려났던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변하게 되자 '탁월한 선견지명' 내지는 '심오한 진리'로 까지 신분격상이 되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는 가끔 목격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1401년에 벌어진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공모전을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에 나는 과감하게 반대하는 한 표를 던지겠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을 마치 내 생각이라 여기고 내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굳이 어느 한 시점을 구분해야 하기에 청동문 공모전을 르네상스의 시작이라고 해야 한다면, 구태여 죽어라 나서서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점 하나만은 분명하게 꼭 말해주고 싶다. 르네상스(Renaissance)를 거론함에 있어서 페트라르카(Petrarca)나 단테(Dante Alighieri)를 빼놓거나, 더하여 지오토(Giotto)를 배제하고 르네상스를 아무리 논한다고 해서 과연 제대로 된 르네상스가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이들 세 사람은 한참이나 앞선 13c에서 14c를 살다간 사람들이다.
하지만, 페트라르카나 단테나 지오토를 뺀 르네상스는 결코 완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하여 활짝 피어난 것이 아니라 북극의 아이슬란드에서 확짝 피었노라고 만들지 않을려면 말이다.
그려면 르네상스가 페트라르카와 단테와 지오토에서 시작 되었느냐?
아니다. 그거야 말로 더 말도 안되고 황당무개한 씨츄에이션이라 하겠다.
마이너리티적 시선으로 르네상스의 시작을 말한다면........... 십자군 전쟁을 통한 유럽과 이슬람의 조우와, 카톨릭의 침략으로 생존 기반을 잃어버린 유대인과 동방정교회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유럽의 본토에 산재해 있는 수도원을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르네상스는 시작되었다고 말하겠다.
산 지오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당은 중세시대 로마의 건축물 위에 11세기에 들어서 팔각형의 돔 양식으로 세워졌다. 세례당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건축물이자 현재의 피렌체 두오모(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엄연한 피렌체의 대성당으로 역활을 해왔다.
세례당에는 3개의 문이 설치되었는데 1330년 증축하는 과정에서 안드레아 파사노에게 의뢰하여 현재의 남쪽 청동문이 만들어 졌다.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세례당이었던 만큼 파사노의 문에는 세례자 요한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모전의 결과로 기베르티에게 동쪽문이 제작주문되었고 신약성경의 내용을 소재로한 28개의 패널로 이루어졌다. 이 청동문의 제작에 기베르티는 약 26년을 매달리게 된다. 청동문이 채 완성제작되기도 전에 작품에 감격한 두오모 위원회는 기베르티에게 또 하나의 청동문 제작을 주문 의뢰한다. 하여 기베르티는 다시 21년을 들여서 구약성경을 소재로 한 10개의 패널을 만들어 완성하였는데, 이 문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경탄한 천국의 문이다. 천국의 문에 감탄한 위원회는 완성되어 동쪽에 설치한 첫번째 청동문을 북쪽으로 옮겨 설치하고, 동쪽문에 천국의 문을 설치하였다. 현재 두오모를 건너다 보고 있는 황금색 문에 해당된다.
기베르티와 청동문 공모전에는 부르넬리스키와 얽힌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하여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소상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약속해 줄래? 내 서른 번째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 쿠풀라에서 만나주겠다고?'
아오이가 10년 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혼자 일방적으로 했던 약속을 준세는 단 한순간도 잊은적이 없었다.
지금 준세는 피렌체 두오모 쿠풀라에 서있다.
그날의 약속처럼.............
'성모 마리아의 꽃' 이라는 우아한 이름을 가진 피렌체 두오모(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돔 지붕(쿠풀라)에 오르면 요즘 사람들의 대부분은 <냉정과 열정사이(Calmi Cuori Appassionati)>를 가장 먼저 떠올리나 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영화 때문에 피렌체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음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시류에 뒤떨어진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자조섞인 푸념을 늘어놓듯이......... '나는 어디까지나 미이너리티에 속한 사람이니까' 라고 해야 할까? 내가 남과 많이 다른것인지, 남들이 나와 다른것인지 종종 작은 고심을 할 때가 나에겐 있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위에 서있으면, 내게는 도면을 들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부르넬리스키가 보인다. 지상에서 42m나 솟아오른 대성당의 본체 위에 지름 42.7m의 둥근 돔을 쌓아올리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런 공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치형의 다리나 둥근 천장(돔)을 건설할 때는 그 아래에 설치를 계획한 높이와 면적만큼 비계(飛階) 라는 임시 가설물을 설치하게 된다. 그 비계가 하중을 견뎌내 주는 동안에 설치물 공사를 완공하고 나서 비계를 철거하는 방식이다. 옥외 공사에서는 비계대신 흙이나 모래를 쌓아올려 공사를 진행하고, 후에 다시 파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피렌체 두오모의 공사는 일단 본 건물의 크기가 엄청날 뿐더러 높이가 장장 42m나 되었다. 당시로서 유일한 재료인 목재로 비계를 설치하려고 해도, 하부의 고임목이 상부 고임목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부러지며 내려앉을것이 너무도 자명하여 공사 자체가 아예 당시로서는 불가능의 역역이라고 했다.
부르넬리스키가 나섰다.
'비계 설치가 불가능하다고? 그럼 비계 없이 공사를 하면 될것 아니야? 돔이 너무 커서 본 건물의 벽이 돔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할거라고? 그럼 돔의 무게를 줄이면 될것 아니야?'
그러자 사방에서 거센 비판과 조롱이 뒤따라 나왔다.
'미친놈. 비계설치 없는 공사가 어디있어? 날라다니며 공사 할거야? 지금 소꿉장난 하냐? 무게를 줄이겠다니? 그럼 나뭇가지에 거미줄을 엮어서 지붕을 만들거야? 기베르티에게 지고나더니 아예 미쳐버렸구만.'
그 지경이 되자 마침내 필리포 부르넬리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피렌체의 두오모 건축 준비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인파가 위원회 앞에 몰려들었다. 미친놈이 허튼 주장을 펼치다가 위원회에 의해서 고발을 당하거나 무참하게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부르넬리스키의 손에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달걀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역사책에는 콜럼부스의 달걀이 유명하지만, 마이너리티 역사에서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명언과 콜럼부스의 달걀이 거짓까지는 아니라도 허구인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나 또한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한 사람이다)
그는 달걀의 아랫부분을 두드려 깬 후에 테이블 위에 세웠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연구한 논리와 근거에 의해서 주장을 하는 것이니 의심과 비방을 일삼지 말고 나의 주장이 틀렸다는 근거있는 반박을 하던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가능한 방법을 나와 위원회 앞에 제시하시요. 당신들은 모두 불가능하다는 생각에만 빠져있고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에 차 있소. 우리 사이에는 그것 뿐이요. 왜 나를 당신들의 불가능에 끌여들이려고만 하시요? 내가 꼭 성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피렌체와 당신들을 위해서 내가 그 불가능을 극복해 내겠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자 목표요.'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달걀이 깨졌다고만 보거나 생각하지 마시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좀 더 크고 너른 시선으로 바라보시요. 무엇이 보이십니까? 돔(Dom) 이요. 그 달걀의 모양이 바로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돔의 모양이 아닙니까? 그 달걀을 천 배로 만 배로 크게 확장해서 본당 건물 위로 올려세우면 되는것 아닙니까? 달걀과 돔의 재질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어미닭의 자궁에서 막 나온 달걀을 보면 말랑말랑 거릴만큼 얇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익히 아실 터이니 말씀입니다. 그 얇고 나약한 재질의 껍질이 열 배가 넘는 내용물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내고 항상 제 모양을 유지해 내는지를 살펴 본 적이 있습니까? 첫째는 타원형의 달걀 모양이 가장 완벽한 형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모양으로도 달걀만큼 완벽한 내구성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돔의 형태도 그와 닮은것이 될것입니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것은 우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만 여겨지는 껍질속에 있는 얇고 하얀 막입니다. 얇은 막이 있기에 달걀은 온전한 형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해답입니다. 하여 나는 대성당의 돔을 저 달걀과 똑 같은 모양으로 만들것입니다. 무겁고 튼튼하기만한 이제까지의 지붕이 아니라 가볍고 튼튼한 지붕으로 대체 할 것이며, 그 안쪽으로 달걀의 막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얇은 속지붕을 만들것입니다. 내벽과 외벽의 완벽한 연결을 통하여 이제껏 그 어디서도 보지못했던 저 달걀과 같은 더욱 강해진 내구성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건물의 하중이 줄어들 것이며 내부와 외부의 장력들이 고르게 분산될 것입니다. 내벽과 외벽사이에 생겨나는 공간에 통로와 계단이 설치될 것이며.......... 그 공간으로 인해서 비계가 필요없는 공사가 진행될 것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도......... 피렌체가 대성당의 완공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그 누군가는 꼭 완성해야만 할 시대의 과업이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누군가가 반듯이 해 내야만 하는 피렌체의 영원한 숙제라면........ 그걸 지금 내가 해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과....... 여러분 모두와......... 피렌체의 미래를 위해서...........'
결국, 부르넬리스키는 16년만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해 내고 말았다.(1436년)
아르놀포 캄비오가 대성당 건축을 위해 처음으로 설계를 완성한 것이 1296년 이었으니까, 완공까지 대략 140년이 걸려서 마침내 완공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뻑하면 공사가 100년 200년을 훌쩍 뛰어넘기는게 다반사다. 이런 사실들을 접할때 마다.......... 와우 아파트. 성수대교. 삼풍 백화점 사고를 떠올리게 되는것은 왜일까?
1년에 약 1m씩 돔의 지붕이 높아지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두오모의 지붕에 오르면 나는 내벽과 외벽 사이의 연결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는 부르넬리스키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르래를 이용하여 긴 로프에 매달린 석재가 올라오는 모습(중세의 엘레베이터라 할까)과 그것을 받아 둥근 지붕의 반대편까지 나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날 같은 안전의식이나 안전망 설치가 없던 시절에 얼마나 많은 사고와 인명피해가 벌어졌으려는지......... 우리는 지금 그 고난과 역경의 결과물 위에서 무한의 풍요를 즐기고 있는것은 이닐런지?
난간에 서서 붉은 지붕으로 덮인 중세 건물들로 빼곡한 피렌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저만치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는 단테가 보인다. 베키오 광장에서 란찌 회랑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상의하고 있는 다빈치와 보티첼리도 보이고, 바사리 회랑을 지나고 있는 로렌초 메디치도 보인다. 피렌체로부터 버림받아 망명을 떠나는 마키아벨리와 교회에 의해서 고발되어 체포되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브나롤라도 보인다. 교황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거듭 거부의사를 보이며 다락방에 숨어있는 미켈란젤로도 보이고, 까만 수탉이 울자마자 시에나에 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말을 몰아 북쪽으로 내달리는 기사도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피렌체 두오모 돔 난간에 기대어 서면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그리움이 된다. 가슴이 시려온다.
"아가타 준세(다케노우치 유타카 역)에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고장이 도착한다.
꼭 10년 전, 막 대학을 졸업한 준세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공방에서 고대 미술품 복원에 관한 공부를 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홍콩에서 유학온 아오이(진혜림 역)를 만났다.
'약속해 줄래? 내 서른 번째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 쿠풀라에서 만나주겠다고?'
어느날 공부를 마친 아오이가 떠났다. 그저 무덤덤한 헤어짐이 그들 사이에 있었을 뿐이다.
준세는 그대로 피렌체에 남아서 미술품 복원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런 준세의 마음속에는 어떤 공허함이 항상 자리하게 되었으며 그 공허함 속에 아오이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준세는 알고 있었다.
준세와 아오이와 함께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동료 다카시가 출장편에 피렌체에 들렸는데, 그에게서 준세는 아오이가 밀라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준세는 밀라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아오이는 준세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과거의 아오이가 아니었다. 미국인 남자친구와 함께 살고있는 아오이는 준세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준세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큰것이었다. 준세는 그만.......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을 접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간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지난 시간의 아픔도 어느 정도 사그라지고 남부러울것 없이 준세가 살아가고 있는 즈음에....... 피렌체로부터 그에게 많은것을 베풀어주신 은사님의 부고장이 도착한 것이다.
스승의 장례를 치루고........ 준세는 그대로 다시 피렌체에 머물러 하던 공부를 계속하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10년 전에 무심코 했던 약속이 바로 오늘이라는 기억을 떠 올린다.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끌림처럼........ 준세는 두오모의 계단을 오른다. 10년 전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쳐럼 펼쳐져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서서히 두오모의 폐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10년 전의 약속은......... 이제껏 나만의 추억이었다는 말인가?"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는 1999년 단행본으로 소설이 출간되자 마자 단숨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단행본의 형식을 빌기는 했지만 엄격히 따진다면 이 책은 분명 각기 다른작가가 쓴 두 권의 소설이 서로 연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1997년 '월간 가토카와'에 여자 주인공 (아오이)의 시선으로 줄거리를 이끌고가는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을 1년간 연재 했다. 가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에쿠니 가오리가 속편을 집필 할 것이라는 소문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월간 feature'에 역시나 연재 방식으로 <냉정과 열정사이>의 줄거리를 계속 이어나가는 글을 썼는데 이번엔 남자주인공 아가타 준세의 시선과 입장에서 스토리를 이끌어 나간 것이다.
폭발적 반응에 힘입어 결국 단행본으로 엮여지게 되었는데, 아오이 시선의 스토리 전개는 빨간 표지로, 준세 시선의 스토리 전개는 파란 표지로 구분해서 단행본으로 역는 기묘한 발상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원작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결국 2001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 졌으며 화제를 넘어서 여러곳에서 신드롬을 낳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피렌체 여행자가 급증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영화 OST를 사용하는 광고마다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던 것이다.
우리 챠밍여사........ 아니 태리할망구 오늘도 어김없이 걷는것에 대해서는 그 탁월함을 스스로 입증했다.
중간층까지 엘레베이터 이용을 안내해 주었음에도(이미 바티칸 대성당의 경험을 바탕으로) 거두절미하고 직접 걸어서 오르는 것을 택했고 거뜬하고도 완벽하게 완주를 몸소 실천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엘레베이터 비용 아껴서 저녁에 우리 더 맛난거 먹자'고 했음)
쿠풀라에 올랐을때, 사실은 나는 등줄기에 땀이 흥건했었는데 이 할망구는 광장에서 출발했을때나 쿠풀라에서나 표정 변화도 없이 그냥 말짱한 모습이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실 웃음을 지으면서 이따금씩 감탄사를 연발한다.
우리는 제법 많은 시간을 쿠풀라(돔 지붕)에서 보냈다. 올라갈 때는 인파에 떠밀리며 올라 갔는데, 날시가 음산하고 바람이 많이 쌀쌀했기 때문인지 다들 서둘러 내려가는 분위기였다. 커피포트에 준비해 간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서 한산해지기를 기다려 우리는 두오모 돔에서 내려다 보이는 피렌체의 풍경을 한껏 즐겼다.
정말로 피렌체를 물리도록 실컷 즐겼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즈음에서야 서서히 사정없이 헤집고 들어오는 추위를 느끼고는 서둘러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쿠풀라에서 내려와서는 두오모의 내부를 둘러 보았다.(세례당과 두오모 본당은 앞선 피렌체 여행기 참조)
밖으로 나와서 두오모 광장의 한복판에 서서 여전히 여유롭게 환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마눌님(태리할망구)을 지켜보자니 은근슬쩍 나도 모르게 또 장난끼가 발동하는 것이 아닌가?
'아 참 급하게 내려오느라고 까먹어 버리고 말았네? 그래도 피렌체 하면 두오모고, 두오모 쿠풀라 하면 <냉정과 열정사이>가 아니겠어? 우리도 준세와 아오이 처럼 영화속 장면 같은 포즈를 잡고 사진 몇 장 찍어두었어야 하는건데....... 엘레베이터 타고 다시 한 번 올라가서 사진 몇 장 찍을까?'
'당신 미쳤어? 사진 몇 장 찍자는 이유로 다시 올라가자고? 겨우 그런 이유로 저기까지?'
'그건 좀 그렇지? 방금 내려와 놓고 말이야. 그럼 다음에 다시 와서 찍으면 되지 뭐. 다음에..........'
'개뿔. 또 마음 한 조각을 두고 왔는데 아무래도 두오모 쿠풀라인것 같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면서 또 개수작을 떨려는것 내가 다 알어. 아까 계단에서 쩔쩔 매놓고는 뭐? 다시 올라 가자고?'
'쩔쩔 매기는 누가 쩔쩔 매? 통로가 워낙 좁으니까 배낭까지 맨 나로서는 좀 불편했던거지?'
'그러니까 잔머리 굴리지 말고 좀 솔직해 지시라고......... 냉탕인지 온탕인지는 내 알바가 아니고...... 이제부터 다음 코스가 어떻게 되냐고요? 태리할아버지께서 앞장 서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말이야. 오늘 두오모 쿠풀라 여행은 정말 멋졌어. 두고두고 기억날것 같애. 로마 바티칸 보다 훨씬 더 좋았어. 다음에 맴이 어떠니 저떠니 개수작 떨지 않아도 어쩌면 피렌체라면 나도 다시 오고 싶어질것 같애. 고마워. 당신 덕분에 행복했어.'
어???
아직 맘 먹은만큼 장난을 다 친게 아닌데......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지?
'여보야. 다음 스케줄 말인데....... 아무래도 결정은 당신이 해야만 할 것 같애.'
'무슨 결정? 뜸 들이지 말고 일단 시원하게 털어 놔봐. 당신이 뜸들이면 이건 또 무슨 수작 부리는것 아니야 하는 의문부터 생긴다구. 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일단 털어 놀것.'
'다음 코스 말인데.......... 아무래도 무리일까 싶어서. 방금 내려와서 가뜩이나 힘든데 또 올라가?'
'또 올라가? 어딜? 우리가 방금 내려 온데가 저기잖아......... 또 올라간다고? 그럼 저기?'
챠밍여사가 방금 내려 온 두오모의 쿠풀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다시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두오모 옆에 나란히 붙어 서있는 지오토의 종탑 이었다.
'저기 종탑 말하는 거야? 저기도 올라가자고?' 표정을 보니 자뭇 심각한 표정이다. 그럴수록 나는 재미가 급증한다.
'응. 원래 생각해 두기는 쿠풀라에 다녀와서 컨디션이 괜찮으면 지오토의 종탑에도 올라가 볼까 했었지?' 라고 말끝을 길게 흘리면서 연실 마눌님의 표정을 곁눈질로 살피고 있는 나는 개구쟁이.(나쁜 넘)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예전에 틀림없이 올라갔다 온 경험에서 나온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테고........ 방금 전에 쿠풀라에서 피렌체 전부를 둘러보고 내려다 보았는데, 바로 옆에 붙은 종탑에서 보이는 풍경이 쿠풀라와 다른것이 있을까? 당신이 설명을 해줘봐. 왜 올라가야 하는데?'
'피렌체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가 두오모 쿠풀라야. 쿠풀라에 오르면 피렌체의 모든것을 모두 바라볼 수 있어. 그렇지?'
'내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잖아. 우린 방금 전에 쿠풀라에서 모든걸 보았잖아.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종탑에 다시 올라가면서까지 새롭게 볼게 아직 남았느냐고?'
'응. 딱 한 가지가 아직 남았지. 아직 우라가 보지 못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았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쿠풀라에서 피렌체를 배경으로 한 지오토의 종탑이 참으로 멋있게 보였지?'
'응. 멋있었어.'
'하지만....... 피렌체에서 가장 멋있는 상징적 풍경이라는 두오모의 쿠풀라는 보지 못했지? 자신이 거기에 서 있었으니까?'
'아하. 쿠풀라에 올라가서 종탑은 보았지만 정작 쿠풀라 자신은 볼 수 없었다는 뜻이구나? 쿠풀라를 제대로 보려면 이번엔 종탑에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지?'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자못 긴장되고 이제 어떤 대답이 튀어나올지가 몹시 기다려지는 순간이다.
'얼핏 보아도 쿠풀라나 종탑이나 높이가 비슷해 보이고....... 아까 올라가면서 엘레베이터 이야기 꺼냈을때 종탑에는 엘레베이터가 없다고 했던것 같고.......... 하지만 피렌체까지 왔다면 종탑에서 건너다 보이는 쿠풀라의 모습이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멋지다는 당신의 뜻 일텐데......... 방금 쿠풀라에서 내려왔으니 결코 쉽지만은 않을것이라는 의미일텐데..........'
하이고야. 내가 괜한 장난을 쳤나? 입술이 바싹바싹 타는것만 같다.
그런데 속이 타는것은 나만이 아닌것 같다.
챠밍여사가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더니 그냥 벌컥벌컥 마셔대는것이 아닌가?(아래 사진 참조)
순간, 어떤 불길한 느낌이 번갯불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왜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를 않는 것일까?
'좋다는데 한번 더 올라가면 되지 뭐. 까짓꺼 못할게 뭐가 있어? 어디여 종탑 올라가는데가? 저기 사람들 줄서있는데 가서 서 있으면 되는거야? 표는 통합권이랬으니까 문제 없을테고....... 가 보자고.........'
Oh, my god!!! (한 번에 두 곳을 다? 하나라도 올라가 본 사람은 내 마음을 아실터인데.......)
---'무슨넘의 팔자가..... 서둘러 종탑에 올라가야만 하게 생겼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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