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던히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숲속으로 나들이를 갔다.
계곡으로 찾아드는 시원한 바람에 아들의 눈거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 아버지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아들을 눕히고는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새 잠이 들것만 같았던 아들이 몸을 뒤척이자 주변을 살피던 아버지는 숲의 이곳저곳에서 유난히 우렁차게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든 줄 알았던 아들이 가녀린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고목나무에는 매미 한 마리가 매달려 움직이고 있었다.
'매미 울음 소리가 너무 시끄럽지? 아빠가 쫓아버릴까?'
'괜찮아. 아빠. 그러면 매미가 너무 불쌍하잖아?'
'매미가 왜 불쌍해? 다른 나무에 가서 실컷 울면되지?'
'선생님이 그러셨어. 매미는 태어나기 위해서 7년을 땅속에서 지내다가 태어나서는 겨우 2주를 저렇게 울다가 죽고 만다고. 내 나이만큼을 기다리다가 겨우 태어나서 저기에서 저렇게 울고 있는데 아빠가 쫓아버리면 도망가야 하는 매미가 너무 불쌍하잖아?'
세월이 흘러갔다.
아들은 딱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 직장으로 출근을 했고, 아버지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서 어느새 아들만큼의 나이로 자라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를 데리고 다시 숲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예전의 느티나무 고목도 그늘 아래의 벤치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먼 과거속의 자난 기억을 떠올리며 손자를 벤치에 쉬어 잠시 쉬게끔 해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숲은 여전히 변함이 없건만, 계곡을 뒤흔들던 매미 울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숲은 변함이 없건만 숲의 정취는 분명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할아버지. 매미야 매미. 저기 매미 있는거 보여요?'
손자의 가녀린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느티나무 고목의 줄기에 매미 한 마리가 매달려 있는것이 보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매미는 움직이지도 소리내어 울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매미가 전혀 울지를 않네? 안타까워서라도 실컷 울어야 하는데? 한번 할아버지가 가서 울으라고 해볼까?'
'아니야. 할아버지. 매미는 지금 배터리가 떨어져서 안 우는거야. 배터리를 바꿔주면 다시 울거야?'
할아버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세월이 쏜 살 같이 지나갔을 뿐, 숲이며 골짜기는 여전히 전혀 변함이 없건만........
아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거부 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신은 이제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되었고, 신께서 점지해 주신 품에 안겨있는 복덩어리가 어느새 아들의 나이만큼 자랐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휑하니 가슴속 폐부 깊숙한 곳을 그대로 관통해 지나가 버리고........ 거부 할 수 없는 어떤 공허함이 가슴을 짖누르는 이 느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직도 깨달음이 부족한 것인가?
인생을 잘못 살았음인가?
'삶(인생) 이란...... 아주 멀고 힘든 길을 스스로 깨닫고 노력하며 완성해 나가는 오랜 여정이란다. 그 여정에 정도(正道)는 없단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여정이 쉽고 편하고 풍족하고 여유롭기를 바라지. 하지만 애초에 신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부터 그런 순탄한 여정은 허락하실 생각이 없으셨던것 같아. 고난과 역경과 고통과 좌절이라는 험준한 고갯길을 꼭 넘어가야만 하게끔 만들어 놓으셨거든. 그 여정을 어떻게 꾸려나갈 지는 오로지 너 자신에게 달려 있단다. 단 하나만 아빠가 아들에게 조언해 줄 수 있다면......... 미덥고 소중한 사람들이 늘 주변에 있어서 먼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아빠가 알고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이란다.' 라고 나는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늘 지나가는 말처럼 해오며 살았다. 언젠가 내가 떠나가도 그 당부만은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손자가 자라면........ 할아버지로서 똑 같은 당부를 꼭 해주고 싶었는데........
'아들아. 아무래도 내 능력으로는 안될것 같다. 차후에 너의 방식으로 네가 대신 전해주렴.'
(책 많이 읽고, 친구 많이 사귀고, 여행 많이 해라. 부와 성공을 크게 이루진 못 할지 몰라도, 남에게 지탄을 받거나 외롭지 않은 인생은 살 수 있을거야.)
새벽 산책길에서 문득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60 줄을 넘어서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들은 많아져 가고, 부지런히 덜어내어 비우고 하나하나 정리해 나갈것들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청옥산은 산세가 그리 큰 산은 결코 아니다. 다만 자연휴양림이 들어 서 있는 계곡의 골은 깊다. 소나무 숲과 맑은 계류를 따라 걸으면 사방에서 정겨운 새소리와 물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곳의 숲은 온통 춘양목, 황장목, 강송으로 불리는 금강송 군락지 이다. 몸매 좋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금강송이 쭉쭉 뻗어 올라가 하늘을 가린다. 시원한 숲길은 최고의 산책 코스라 하겠다.
새벽 미명이 채 밝아오기도 전에 청아한 오페라 무대가 숲속에 펼쳐진다. 새벽마다 울려퍼지는 꾀꼬리의 울음소리에 함참을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인다. 유독 높고 돋보이는 꾀꼬리 울음소리 주변으로 저마다 다른 여러 새소리들이 하모니를 이룬다. 어린시절 시골 참나무 숲에서 들었던 꾀꼬리 소리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이 완벽한 숲속의 메아리에 감동을 넘어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다.
새벽 산책을 마치고 텅 비어있는 데크에 앉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란.........
언제나 처럼 우리집 아침은 머그잔 가득 진한 커피와 빵과 과일이면 된다. 힘든 하루 일정이 예고되면 샌드위치 추가.
잠시 쉬었다가 철수를 위한 짐정리에 들어간다. 당연히 돌아 갈 때는 처음 찾아왔을 때와 똑같이 깨끗한 환경으로 환원 시키놓아야만 한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마무리 되는 철수 준비.......... 오랜 경험의 축적된 노하우 덕분이랄까?
2박의 짧은 청옥산 자연휴양림 캠핑을 마치고 이제 마지막 남은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추~~~~~울 발.
내가 살고 있는 충주에서 청옥산이 있는 경북 봉화까지는 대략 150km 남짓되는 거리다. 서울까지가 140km 정도라고 치면 사실은 거기서 거기라고 할 수 있는 비슷한 거리다. 자가용 차량을 이용한다면 소요 시간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서울은 가깝고 봉화나 울진이나 삼척은 아주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아마도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물리적 거리와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 되다시피 새겨져 있는 심리적 거리감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자동차 여행을 처음 시작하면서 부터 그런 심리적 거리감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광활한 동해바다 보다 나는 오밀조밀한 남해바다를 더 좋아 한다. 거기에다 동해바다의 느낌을 어느정도 담고 있는 경남쪽의 남해바다 보나는 약간의 서해바다 갯벌 정취가 풍겨나는 전남쪽의 남해바다에 더 친근함을 느낀다. 거기에다 제주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어서 차량을 가지고 완도항과 제주항 사이를 페리를 타고 건너 다닌것이 엄청이나 여러번이 처지라 그때마다 역시나 해남 완도 인근의 남해바다를 늘 그리워 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지도책을 펼쳐놓고 서울을 기점으로 하던 충주를 기점으로 하던지, 부산과 해남을 비교해 보면 얼추 비슷한 거리에 놓여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현재 놓여있는 도로 사정을 감안해서 따져본다면 충주에서 부산은 270km 남짓으로 개인 차량을 이용 할 경우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반면, 해남의 땅끝마을 까지는 400km가 넘게 나오며 거의 5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아주아주 먼 길이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도로사정이라는 물리적 시간에 역시나 엄청난 심리적 거리감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을 다녀오는 편으로 생각하고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중간에 지나쳐야만 하는 해남땅은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 지금도 내가 남해나 제주 여행을 계획하면 챠밍여사의 단발마 비명은 '거긴 너무 멀어' 라는 항의성 거부반응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같은 느낌으로........ 서울은 아무때고 필요하면 당일치기로 다녀 올 수 있는 일일 생활권이다. 하지만 봉화. 울진. 삼척은 다르다. 적어도 1박 2일 이상은 잡아야만 하는 멀고 먼 산간 오지에 고립된 외딴섬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 지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리적 거리인식이다.
하지만,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 본다면......... 시간에 쫓기며 물질만능주의에 지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약간의 투자와 헌신으로 심리적 거리감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만큼 대한민국에가 가장 건강한 자연과 옛스런 인심과 ㅎㅇ토색 짙은 한국적 정서가 그나마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 아닐까 하는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매우 독특한 정서(?)와 고집(?)을 가지고 있는 마누라쟁이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릴 수 있는 특수가 더 있지 않은가 말이다.
'시원한 고속도로는 저리 가라. 자연스레 구불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옛날 길이 나는 좋아' 라고 주야장창 외치는 마눌님을 둔 덕분에 우리는 항상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을 출발함과 동시에 '확실하게 목적지는 있지만 시간 개념은 아예 처음부터 집에다 두고 간다'는 규칙을 준수한다. '까짓 우리가 가진것은 오로지 무한한 시간과 배짱뿐이다' 라는 한창때의 철부지 같은 오기와 치기로 현재까지도 밀어붙이며 쏘다니고 있다.
고속도로 같은 큰길은 도시를 우회해 버리고 작은 마을과 골짜기와 실개천들을 여행자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 새소리도 물소리도 숲의 향기가 배어나는 시원한 바람결도 모두 빼앗가 가버리고 차창 너머로 잠시 흐릿한 실루엣처럼 산과 강물을 아주 잠시 스쳐지나갈 뿐이다. 봉화땅 산마루 언덕마다 빼곡하니 널려있는 수박밭에 올망졸망 수박이 매달린 표정이나, 감자를 막 캐고 난 밭고랑에 여기저기 나뒹고 있는 장조림용 애기감자나 고랭지 배추를 수확하는 장면을 볼 수 없을 뿐더러, 가로수길에서 울어재치기 시작하는 매미소리와 참나무 숲에서 울려나오는 꾀꼬리 울음소리와 산골 초막 뒤로 담장처럼 늘어선 대나무들이 서로 줄기와 잎을 비벼내며 쏟아내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무래도 옛길이 제격이지 싶다. 요리조리 숲길을 헤쳐나가듯 올라가다 보면 굽이치며 강줄기가 휘감아 도는 바위벼랑 위로 아담한 산수화 속에나 있을법한 아담한 정자가 하나 나타난다. 잠시 쉬어갈 겸 정자에 오르니 금강송이 바위벼랑과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 내는 한폭의 산수화에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낙동강 지류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대는 장대한 대자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지친 나그네의 발걸음을 잠시 쉬었다 가라고 붙잡으면서도 광활하면서도 멋들어진 풍광을 넘치도록 선사해 주면서, 다시 길을 나서거들랑 편협함에 붙들리지 말고 좌우를 두루 살피고 언제나 지나온 발걸음을 잊지말면서 미래를 함께 꿈꾸고, 더하여 그 꿈을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는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깨우쳐주는 듯 하다.
하심(河心)에 이른 물만이 바다를 얻는다고 말했다.
물은 흐르고 흐르면서 먼제 제 몸을 닦고 그릇됨과 의심을 씻으며 모든것이 맑고 투명해질 때까지 한시도 그 걸음을 놓지 않는다 했다.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대자연 속에서 청정함을 만끽하면서 나아가자니 어느정도 새로운 마음이 열렸다고 느껴질 즈음에서야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두 눈에 가득 들어오기 시작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봉에 등을 기대고 고즈넉하게 들어 앉아있는 천년 고찰 청량사(淸凉寺)가 한 폭의 수채화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는 듯한 정경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청량산 청량사(淸凉寺)
거대한 암봉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명소를 꼽으라면 당연히 주왕산과 월출산과 함께 봉화의 청량산을 꼽을 수 있겠다. 깎아지른 암봉으로 가득한 명산에는 유독 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많이 서식하면서 봉우리 마다 수채화처럼 자리잡고 서있는 소나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당연히 가을 단풍이 유난히 곱게 물드는 이런 빼어난 경관의 명소에 일찍부터 사찰이 들어서지 않을 이유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기대에 저버리지 않게 어김없이 주왕산(周王山) 초입에는 천년고찰 대전사(大典寺)가 위치해 있다. 그런가 하면 월출산 주위에는 여러개의 천년고찰들이 들어 서 있는데, 강진의 무위사(無爲寺)와 영암의 도갑사(道岬寺)와 강진의 금곡사(金谷寺) 그리고 영암의 천황사(天皇寺)가 거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빼어난 산세를 머금고 있는 명산에는 어김없이 항상 이름난 사찰이 있다(名山大刹)이 있다는 고대의 전언을 고스란히 나타내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부분에서 대부분의 천년고찰들이 주왕산이나 월출산을 배경으로 수행하는 도량을 이룬것은 사실이겠으나, 한폭의 수채화처럼 대자연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거나 스며들었다는 느낌은 지극히 미미하게만 다가온다.
내가 오래전부터 하나의 고정 관념처럼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고로 절집이란 속세로 부터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자연속에 조화를 뛰어넘어 마치 애초부터 자연의 일부였던듯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어야 제맛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크고 높은 담장 보다는 산자락이 이어져 내려오는 듯한 적당한 능선의 연장선 정도면 좋았고, 화려하다 못해 번쩍거리는 단청 보다는 색이 바래고 갈라진 백골의 사찰에 정감이 갔다. 거대한 사찰보다는 그저 고만한 크기의 꼭 있어야만 하는 전각들로 나름 사찰의 면모만을 겨우 갖추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20대 후반에 여행중에 우연히 들렀던 고성땅의 건봉사(乾鳳寺)의 당시 풍광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에는 버려지고 방치된 절집이나 진배 없었다. 세월의 참화가 온통 할퀴고 지나간 복구가 불가능한 폐사지의 모습이었다. 그 황량함과 쓸쓸함 뒤에 내재된 과거의 건봉사 흔적이 그리웠고 애착이 갔다. 하여 그후로도 힘든 역경이 생기면 부러 먼 건봉사까지 다녀오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인가 불사가 시작되면서 돌다리로 건너던 도랑 건너로 지금의 대웅전이 지어졌고........ 이제는 옛모습이 모두 사라진 커다란 사찰이 되었다. 대웅전이 거의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바라 본 이후로는 아직 다시 찾아가보질 않았다. 기억속에 먼 추억처럼 잊혀져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시점에서 만난것이 바로 청량사(淸凉寺) 였다.
청량사는 주왕산이나 월출산의 천년고찰과는 좀 다르게 청량산의 바위 암봉에 위태롭게 겨우 붙어 앉아서 암봉들이 뒤에서 붙잡아 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바위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버릴것만 같은 형세다. 그냥 암봉덩어리의 일부인듯 느껴진다.
청량사에 오르는 길은 포장된 가파른 도로도 있고, 등산로 같은 비포장 숲속 오솔길을 가파르게 휘감아 돌듯 올라가는 길도 있다. 입석에서 출발하는 이 산길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하염없이 올라가야만 하는 길이다. 등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쉬운듯 상쾌하게 걸을 수 있으며, 산책이라고 하기엔 그래도 가쁜 숨소리를 고르고 땀이 좀 흘르는 길이라. 그럼에는 나는 항상 이 숲길을 선택하고 또 남들에게도 그렇게 권하고 싶다. 이 산길을 걷다보면 저절로 청량함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느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주영 선생께서 백두산에 올라 천지의 맑은 물을 떠서 마시면서 청량한 무슨 사이다 광고를 하신적이 있다. 바로 그런 청량함이 이 숲길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렇게 땀을 훔치면서 숲길을 올라 모퉁이를 돌아가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똑바로 가면 청량사에 도달하고, 윗쪽으로 돌층계를 향하면 웅진전과 김생굴을 지나 자소봉과 탁필봉에 오를 수 있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코스가 이곳에서 웅진전으로 방향을 잡아서 자소봉 탁필봉을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설치된 하늘다리를 건너보고 나서 다시 청량사로 되돌아 내려오는 코스였다.
하지만 오늘은 좀 사정이 달랐다.
챠밍여사에게 청량사가 있는데 산책 정도라고 실컷 뻥을 쳐 놓았던 것이다. 아무러면 등산은 아니더라도 산책은 좀 넘는 강도가 아니겠는가? 구담봉 산행을 산책이라고 속였다가 철난간 암벽 등반을 시켰던 흉흉한 전력이 아직 남아서리..... 여기 청량산을 산책 수준이라고 말한데에는 분명하게, 웅진전과 하늘다리 산행이 빠진 순수한 청량사 탐방까지였으니까 말이다. 어제 (세 평 하늘길 트래킹)이 준비 미흡으로 고생한것도 있고해서 오늘은 청량사만 관람하고 가을쯤에 다시와서 단풍이 곱게 물든 청량사랑 하늘다리까지 올라보면 되겠다 싶어서 단념하고 청량사로 방향을 잡았다.
오늘은 올라가 보기를 포기한 웅진전과 자소봉 탁필봉의 숲길과 하늘다리 풍경은 내 지난 추억을 빌어서 지난 여행의 사진을 몇 장 올려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마눌님. 요런 풍경은 다음에 체험시켜 줄께)
청량산에는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해 외장인봉과 선학봉, 축융봉, 경일봉, 금탑봉, 자란봉, 자소봉, 연적봉, 연화봉, 탁일봉, 향로봉 까지 12개의 봉우리가 한데 어우러져 들어서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탑봉 오른편의 어풍대가 최고의 절벽으로 손꼽힌다.
갈림길에서 웅진전으로 오르는 길을 택해 여러 산봉우리들을과 산허리에서 청량사를 발아래로굽어내려 볼 수 있는 풍광을 즐기지는 못하겠지만, 곧장 청량사로 향하는 길을 잡아서 숲길을 휘감아 돌아나가면서 올려다 보는 금탑봉이며 까마득한 높이의 웅진전을 멀리서 지켜보는 즐거움 또한 솔솔하다 하겠다.
'오고 가고 아픈다리, 약차 한잔 그냥 들고 쉬었다가 가시구려'
여행자의 가쁜 숨소리가 밖으로 드러날 즈음이면 금탑봉이 올려다 보이는 골짜기에 잠시 쉬어 가라는 팻말(약차를 그냥 먹는집)과 함께 아담한 붉은 가옥이 한 채 등장하고, 그와 어깨를 맞대며 겨우 서있어보이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옥이 바로 청량정사(淸凉精舍) 이다.
청량정사 옆 산꾼의 집에는 구름처럼 살며 바람처럼 떠도는, 주인 같은 나그네 이자 나그네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신 초막 이대실 선생이 살고있다. 그는 아홉가지 산약초를 달여서 만들었다는 구정차(九情茶)를 이곳을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지난 번 여행에서 들렀을때는 담장에 빼곡히 세워놓은 솟대가 금방 만들었음인지 채 바래지 않은 푸르름이 그대로 묻어났었는데 이번에 살피니 부러져 나간것도 있고 무심한 세월의 상채기가 고스란히 덕지덕지 덧칠해져 있는듯 하여 가슴이 뭉클해 진다. 근자에 책을 새롭게 출판하셨음인지 현수막까지 몇 군데 내걸려 있다. 아쉽지만 산꾼의 집에 들리지 아니하고 답싸리 담장 너머로 청량정사를 살피니 여전히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아쉬움 속에 몇 번이고 뒤돌아 보면서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우리나라 역사를 들여다 보게되면 조선의 역사에 근간을 이룬 주자학(朱子學)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주자학이 가지고 있는 헤게모니에 대해서 다분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여기에서는 일체 생략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이는 내가 가진 '조선의 선비 정신'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감히 퇴계 이황(李滉) 선생님의 발자취를 모른척 지나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안동에서 태어나신 퇴계 선생은 조정에서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등의 관직을 제수했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쓰신 유학의 대가이시다. 이런 퇴계 선생이 안동에서 태어난 경상좌도의 영수라면, 영원한 선생의 라이벌인 남명 조식(曺植) 선생은 합천에서 태어나 경상우도의 영수로 불렸으며, 가히 우리나라 유림(儒林)의 양대산맥이라 하겠다. 하여 역사는 두 분을 '경(敬)으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 선비(士)' 로 기록하고있다.
청량정사(淸凉精舍)는 조선 중종때 문신이었던 송재 이우(李堣) 선생께서 속세와 멀리 떨어진 청량산 자락의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의 계곡에 건립하였다. 청량사와는 아주 지척인 셈이다. 유림(儒林)이 여러 파벌로 나뉘어지고, 여기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사화(士禍)로 인하여 멸문지화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선비사회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우 선생은 이황 선생의 숙부였다.
이우 선생은 이곳 청량정사에 은거하면서 조카인 이해(李薤)와 이황(李滉), 그리고 사위인 조효연(曺孝淵)와 오언의(吳彦毅) 등을 가르쳤다. 뒤에 크게 학문을 깨우친 이황 선생은 도산서원(道山書院)을 열고 재야에서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자주 서원을 벗어나 이곳 청량정사에 머무시며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다. 학문의 길을 잠시도 멈출 수 없음을 이유로 재능있는 인재가 이곳 청량정사까지 찾아와 함께 기거하면서 정진하였는데,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정구(鄭毬) 등이 그들이다.
물론 추론컨데 당시에는 초막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청량정사는 훗날 이황 선생의 후생들이 선생을 기리는 의미로 새롭게 개축하였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보수가 시급해 보이는 낡은 청량정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반의 팔작집이다.
청량산에는 십 수개의 절 터와 암자 터가 남아있다. 더하여 신라시대부터 수많은 선현들이 머물며 수도한 유적들이 남아있다. 청량사와 외청량사는 원효대사께서 세웠으며, 유리보전은 의상대사께서 창건했다고 전한다. 아울러 인근에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선생께서 글씨 공부를 했다는 김생굴과 최치원이 수도했다는 고운대와 독서대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청량산의 청량사는 분명 불교의 범주에 들어있다고 하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청량산에는 유학자들의 숨결 또한 짙게 배어있는 곳이라 하겠다. 불교의 산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도교나 유교의 중심지 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 공민왕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유적지도 남아있다.
청량정사를 지나 다시 숲길을 돌아나가면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 아래 청량사의 경내에 다다르게 된다.
경내의 초입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면 까마득히 위로 연화봉의 위용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청량사는 연화봉 아래의 기슭에 작은 연못처럼 놓여져 있다. 그 연못에 피어난 연꽃의 꽃술 자리에 터를 잡은것이 바로 청량사이다.
신라 문무와 3년(663년)에 원효대사에 의해서 창건된 천년고찰 청량사는 창건당시 승당등 33개의 보속 건물로 이루어진 대사찰 이었다. 봉우리마다 자리잡은 암자에서 울려퍼지는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온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전해진다. 이들 암자 혹은 동굴이나 수많은 초막을 이용해 최치원을 비롯한 당대의 내노라하는 유학자들이 기거하면서 학문에 정진한 곳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것이 청량산 이었다. 그야말로 유불선의 학문 요람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천하의 명소를 세상이 시샘한 탓이었을까?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서, 또는 폭정과 탄압에 궐기하는 혁명세력의 은신처나 집결지로서, 그후로도 여러차례 전란의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지금에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청량사의 복원작업은 아주 성공적이란 생각이 든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로 아주 알맞게 채워졌다고 생각된다. 덜렁 남아있는 고른 터에 전각 하나쯤은 더 세워져도 무방할 듯 싶다.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음이 참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산아래 큰길에서 계곡으로 접어들어 청량사 경내까지 연결되는 초고난도의 험악한 도로가 있기는 하다. 그 길목의 초입에 <청량산 청량사(淸凉山 淸凉寺)> 라는 현판의 일주문이 서 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이 길을 권하지 않겠다. 시멘트 포장은 되어 있지만 분명 그 길은 '절집을 찾아가는 호젓한 길' 이 아니라 숨이 콱콱 막히고 불쾌지수가 팍팍 솟아오르는 불편한 길이기 때문이다. 나 라면 입석에서 시작하는 적당이 가파르고 적당히 굽어나가는 숲길을 권하겠다. 이 길이야 말로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오솔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솔길을 걸어서 겨우 청량사의 경내에 제대로 도착했다고 느끼는 순간, 처음 만나는 건물이 바로 안심당(安心堂) 이다. 출입문 위에 내걸린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이라는 간판을 읽는 순간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이곳이 차안(此岸)을 벗어나 도달한 피안(彼岸)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 안심당에 들러 찬 잔의 차로 심신을 깨끗이 씻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은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창량사에서 마음을 씻어주는 차를 한 잔 마시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구름으로 산문을 지은 청량사' 라는 천년고찰의 경내에 찾아들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산사에 오르는 일이 석가모니의 수행의 길을 따르는 길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더욱이 나는 불자도 아닐뿐더러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어설픈 예수쟁이의 처지이면서도 이렇듯 청량한 절집의 경내에 들고나니 한없이 평온하고 여유롭고 무엇인가로 충만한듯 넉넉한 마음가짐 마저 생겨나니 어찌 좋지 않을소냐?
경내에 들어서면 사찰의 이름처럼이나......... 청아한 바람결을 느낄 수 있고 암봉들의 그늘에서 시원하게 쉴 수 있는것만 같아 안락하고 여유로움이 저절로 생겨난다.
'거봐. 자고로 절집이란 말이야? 속세와는 확연하게 구분되어 질 수 있게 거리적으로 좀 떨어져 있어야 하고, 또 아무때나 쉽게 찾아 오기 보다는 어떤 사무치는 마음이 있어서 조금은 힘들게 땀 흘리며 발품을 팔아야만 닿을 수 있는곳에 고즈넋하게 살짝 삐진듯 앉아 있어야 제대로된 사찰의 멋인것 같애? 안 그래? 그런면에서 청량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최고로 멋진 사찰인것 같애.'
청량사 경내에 이르는 아주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말고 뒤돌아 보며 툭 던지는 챠밍여사의 말씀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헐!!!
청량사가 가람으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면에는 깎아지른듯 바위 암봉들 사이에 연꽃처럼 피어 난 청량사의 빼어난 경치뿐만이 아니라, 대웅전격인 유리보전과 조금 떨어진 인근에 위치한 응진전의 불교 문화재적 가치 또한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하겠다. 유리보전의 편액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던 고려 공민왕이 쓴 친필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가람' 이라는 의미이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물리쳐주며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는 부처를 가리킨다. 하여 이곳에서 온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질병이 사그라지고 근심이 줄어든다' 라고 믿고 있다.
뿐만아니라 우리보전에 모셔있는 약사여래불을 아주 드물고 희귀하게도 지불(紙佛) 이다. 종이를 녹이고 붙여서 만든 뒤에 금칠을 해서 완성해 보전하고 있는 귀한 불상인 것이다.
이곳은 피안의 영역인 청량사의 경내!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수려한 경관과 귀중한 문화유적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 내가 산문에 들었고 마음은 이미 선계에 이르렀는데 말이다.
두어라.
지금 이대로도 넘치도록 충분하지 않은가?
말과 생각을 넘어 숨소리 마저도 멀리하고 싶다. 불탑 아래 너른 들마루 위에서 그저 시원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오수(午睡) 라도 즐길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대로 이자리에 모든것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정말로 너무너무 좋았어. 이제껏 다녀 본 많은 사찰 중에서 처음으로 맘에 쏙 드는 절집을 만나본것 같아. 다만 이 포장도로는 아닌것 같아. 다음에 다시 온다면 올라 갈때도 숲속 오솔길을 택할 것이고 내려 올때도 그 길을 택하겠어.'
됐다.
내가 모처럼 계획하고 시작한 이번 캠핑 여행이었는데 챠밍여사의 입에서 연실 저런 감격에 겨운듯한 표현이 터져나온다는 것은 최고의 치하라 해도 무방할 정도니까 말이다.
청량사에서 내려와서는 여행을 마치는 의미로 쬐끔 폼나는 커피 숖을 찾아서 잠시 정리도 하고 쉬어서 귀가를 하려 요즘 제법 핫 하다는 커피 숖을 물어 물어 찾아가 보았다. 첫 번째 커피 숖을 찾으니 붐비기는 하는데 이거야 원....... 우리가 바라는 편한 휴식 공간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차를 돌려 곧바로 나와서 두 번째 커피 숖을 찾아나섰는데, '차 마시며 쉬는 공간'은 없고 큰 자본과 현대적 상술로 치장된 화려하고 현란한 장사꾼의 집이 나온다. 그런데도 사람들로 연실 북적인다. 이것이 변해가는 현실일까? 우리도 저들처럼 변해야 이런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것일까?
왠지 쉬울것 같지가 않다.
우린 동시에 같은 말을 읖조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이라고....... 우린 그냥 이제껏처럼 우리 스타일대로 살자.'
방향을 돌려 나오던 중에 담장이나 외관 풍경이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배도 고팠던 터라 찾아가니 아뿔싸! 브레이크 타임이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웃으시면서 그냥 들어오라 하신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가 더덕구이 정식을 주문했다. 우리가 흔히 '관광지에서 먹는 음식이란.........' 하는 편견이나 선입견과는 다르게 정성이 담긴 음식을 대접받는 기분으로 잘 먹으면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했다. 음식의 맛보다도 전체적인 분위기나 안밖의 꾸밈새가 아늑하고 예뻤다.
바라기는 이번 여행은 끝나가는데......... 그럼 우리 다음 여행은 언제일까?
귀가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벌써 다음 여행의 일정을 세세하게 체크해 나가고 있다. 목적지도 대략적인 날짜도 이미 정했다. 이젠 볼거리 먹거리에 대한 선별작업이 남았을 뿐이다.
추석 연휴여. 얼른 다가 와라. 제발.............
---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다시 (르네상스 기행)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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