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에 나는, 적어도 유럽 여행을 기약하는 사람들에게 3종 셑트 영화 씨리즈 하나를 적극적으로 권고한다.
흔히들 '다빈치 코드'로 회자되는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을 중심으로 중세의 기독교 역사와 연관되는 미스테리한 사건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들이다.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 코드'에 이어서 두 번째로 영화화 된 작품이다.
다분히 기독교적인 테마와 중세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사건을 풀어나가는 잘 짜여진 한 편의 스릴러 스토리는 댄 브라운만의 매우 독특한 영역을 훌륭하게 구축하게되었다고 나는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다룬 기독교에 대한 분야가 지극히 성스러워야 할 부분들을 폄하 내지는 훼손시켰다고 하여 많은 물의를 빚은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는 소설가이다. 브라운 스스로가 '영적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그는 그의 여행을 통한 생각들을 소설로 썼으며, 이를 하나의 훌륭한 대본으로 판단한 제작자들에 의해서 영화로 만들어진것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의 스토리에 반대되는 학문적 뒷받침이나 카톨릭계의 반발 또한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들이 중세의 교회와 교황이 주장하고 지시하고 요구해 왔던것 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들만이 진리이고 진실이라고 누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댄 브라운은 로버트 랭던이라는 기호학자(톰 행크스)를 등장시켜서 이제까지 다섯편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천사와 악마(2000)', '다빈치 코드(2003)', '로스트 심볼(2009)', '인페르노(2009)', '오리진(2017)'. 이렇게 다섯편이다.
그중에서 '다빈치 코드'가 가장 먼저 영화화 되었고, 사실은 전편이었지만 스토리의 개작을 거쳐서 '천사와 악마'가 속편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뒤를 이어서 '인페르노'로 3부작 시리즈가 마무리 되는가 싶었는데....... 아무튼 머지않아 후속작이 나올것이라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오고 있다.
프랑스나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영화 (다빈치 코드)를 두 번쯤 감상해 보시고 나서 여행을 하신다면 보다 풍부하고 행복한 여행이 되실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드리고 싶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파리의 루부르 박물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며, 유리 피라미드와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트루리안 맨이 등장한다. 중세 십자군 원정 뒤부터 마치 전설같은 이야기로 온 유럽인들에게 꾸준히 전해내려온 프랑크 왕국(프랑스와 독일)의 베르빙거 왕가의 혈통이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성스러운 피를 이어받은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깔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거기에다 생 쉬필즈 교회와 시온 수도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는 이번엔 도우버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간다.
영국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런던의 웨스트 민스터 사원과 애든버러의 로슬린 예배당과 링컨 성당 또한 결코 빼어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이제 영화는 사건의 해결을 위한 마지막 열쇠를 찾으러 다시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한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작품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바티칸과 카톨릭 교계는 일찍부터 댄 브라운의 소설에 대해 깊은 우려를 넘어 신랄하게 비판을 가해 왔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스토리를 배경으로 실제 영화를 만들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쉽게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카톨릭의 소중한 유산들을 쉽게 내어줄리가 없었다. 하여 이 영화 전 편에 등장하는 카톨릭 교회의 장면들은 대부분이 셑트를 통해 촬영되었다.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성과 영화제작 기술의 발전과 향상에 나는 존경과 갈채를 마음껏 보내고 싶다. 여행을 통해서 여행자의 발걸음과 시선으로 직접 찾아가서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진한 감동을 상영시간 내내 전하여 주기 때문이다.
바티칸 대성당을 시작으로 하는 (천사와 악마)는 오로지 '로마에 의한 로마를 위한 영화'라고 할 만하다.
영화 (천사와 악마)를 두 번쯤 감상한 여행자라면, 로마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이미 로마의 절반은 완벽하게 마스터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로마를 아주 멋지게 담아냈다.
시스티나 성당을 필두로 바티칸 광장의 넘치는 인파와 산 탄젤로성과 판테온과 나보나 광장이 극사실주의적인 파노라마 처럼 시종일관 우리의 시야을 잡아끈다. 행복한 로마여행 다큐멘타리라고 부제라도 달아주고 싶을 정도이다.
억만장자 조브리스트가 고풍스런 중세도시의 이골목 저골목으로 뛰쳐 달아나는 장면은 너무도 강렬하게 나를 화면속의 피렌체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조브리스트는 팔라초 베키오의 종탑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선택을 감행하지만, 그의 죽음과는 별도로, 베키오 종탑에서 둘러보는 빨간 지붕으로 빼곡한 피렌체의 중세적 풍경은 엄청난 감동 그 자체였다. 천사와 악마가 로마을 위한 영화였다면, (인 페르노)는 완벽하게 피렌체를 위한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다. 베끼오 궁전과 바사리의 통로를 통해 내다보는 베끼오 다리, 그리고 피티 궁전과 두오모.......... 질리도록 피렌체를 샅샅히 조명하던 화면은 이내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빨간 기차(알 이딸로)를 통해서 베네치아로 옮겨간다. 유럽의 응접실이라 불리는 산 마르코 광장과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이 눈 앞에 펼쳐진다. 4차 십자군 원정대의 파행과 그 중심에 섰던 엔리코 단돌로의 흉계, 콘스탄티노플에서 훔쳐 온 4마리의 청동마상이 등장한다.(이 청동마상이 엔리코 단돌로의 욕심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대전차 경주장에서 약탈해 온 것이지만,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 역시 로마에 의해서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에서 약탈해 왔던 것인데, 그 이야기까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의 멋진 풍경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이번엔 멀리 터키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로 다시 건너간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거쳐서 예레바탄 지하궁전에서 긴 여행의 대장정을 마치게 된다.
이제 다음 이야기는 또 어느 도시를 중심으로 어떤 스토리로 나오게 될 것인가?
나에게 있어서 이 씨리즈 영화의 다음편을 기다리는 감홍은 다음번 월드컵을 기다리는 기분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면...........
CERN에서 실바노 신부와 비토리아 베트라 박사는 반물질 용기 3개를 만든다. 연구 책임자 실바노 신부가 살해되고 용기 중 하나는 도난당한다. 때마침 바티칸은 교황 비오 16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고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교황청 콘클라베를 준비던 참이었다. 궁무처장인 패트릭 맥케나 신부가 바티칸을 장악한다. 이 틈을 노려 누군가가 교황이 될 유력한 후보인 추기경 4명이 일루미나티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한 남자에 의해서 납치된다. 그는 도난당한 반물질이 폭발하여 도시가 파괴될것이며,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 추기경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살해할 것이라 경고를 보내온다. (이하는 차차 설명을 통해서 해나가기로 하고 생략........)
소설을 좋아해서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를 이미 책으로 읽은분이 아니라면 위에 간략하게 줄거리를 요약해 놓은 것은 전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리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어 줄 뿐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실제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조차도 재미를 떠나서 '도대체 뭔 소리인지 영' 하는 의문이 가득히 남았을 지도 모르겠다. 씨리즈 전편에 등장하는 '바티칸의 음모' '일루미나티' '페리 메이슨' '제수이트교' '어쌔신' '오푸스 데이' '시온 수도회' '적 그리스도' 등등의 용어들은 이해하고 납득하는데 어느 정도의 지식적 접근이 필요한 내용들이다. 카톨릭의 반발 또한 이런 용어들의 배경과 이해에서 파생된 것이다. 설사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 모른다해도 영화 자체를 즐기기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고나서 그런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에 등장하는 단체의 성격들이 궁금해져서 공부를 하게된다면 그보다 더 유익한것이 어디 있겠는가? 종교적이던 비종교적이던 문제는 차후의 일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는 '교회와 과학의 대립'이 연화 전편에 걸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의 배경으로 깔려있다.
어쩌면 그 점이야말로 댄 브라운이 독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교황 피우스 16세께서 갑자기 선종하셨기에 이제 바티칸 교황청은 장례 절차에 착수함과 동시에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를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게되었다.
같은 시간에 CERN(유럽 원자력 연구기관)의 연구원인 실바노 신부와 비토리아 베트라 박사는 반물질 3통을 만들어 추출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서 물리학자도 아닌 처지로 감히 '반물질'을 거론하기는 좀 그렇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접목시킨 폴 디렉의 이론을 근거로 따져본다면 아마도 '현존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질이 바로 반물질' 이라 할 수 있겠다. 더하여 '오가네손'에 이어서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비싼 가격에 언제나 거래가 가능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혹 반물질을 이용해 폭탄을 제조할 수만 있다면 그 위력은 능히 수소폭탄 보다 1000배는 강력할 것이라 학자들은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한이 CERN에 침입하여 실바노 신부를 살해하고 만물질 추출물 한 통을 빼앗아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동시에 차기 교황선출 유력군에 속하는 4명이 추기경이 누군가에 의하여 납치하는 사건까지가 더하여 벌어지게 된다. 스스로를 (일루미나티)라고 밝힌 납치범은 납치된 4명의 교황이 저녁 8시에서 시작하여 한 시간에 한명씩 '일루미나티 심판'의 상징인 (흙) (공기) (불) (물)이 암시하는 장소에서 그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처형될 것이며 자정이 되면 '바티칸은 빛으로 소멸될 것이다' 라는 과거 일루미나티의 선전포고를 알려 온다. 그것이 곧 '일루미네이션의 길' 임을 재차 선언하면서 말이다.
이에 교황청은 서둘러 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을 급하게 로마로 불러들인다. 이미 그 자리에는 사라진 반물질 사건의 이해당사자이면서도 중요 참고인인 비토리아 박사가 도착해 있었다.
기호학자인 랭던 박사는 이 사태의 배후로 등장한 '일루미나티(Illuminati)' 라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단체에 대해서 주목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일루미나티라는 사라진 단체의 핵심엔 '갈릴레오 가릴레이'가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립시키는 주장을 펼치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종교재판에 회부되기까지 했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갈릴레오 였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어스의 천체학을 기반으로한 천동설(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운행된다)을 처음으로 부정하고 지동설(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을 주장한 사람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였다. 하지만 당시의 중세적 교회중심 사고가 절대적으로 팽배해있던 사회속에서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여 가히 혁명적이랄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교회의 입장에선 전혀 위협적이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교회의 무관심과 방치속에 이 혁명적인 학설을 꾸준히 '토머스 딕스'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쳐 마침내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에게까지 이어져 내려갔던 것이다. 이는 다시 '아이작 뉴튼'으로 이어진다.
갈릴레오에 이르러 교회(교황청)은 아주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을 발전으로 인해서 지식의 전파가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며, 성스러워야 할 종교교리를 부정하는 주장이 책으로 편찬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갈리레오가 집필한 <두 개의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는 온 유럽을 거센 폭풍우가 되어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이었다.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종교재판에 세웠다. 교회는 그에게 종신형을 언도하였으나 이미 노쇠하고 병약한 상태라 종신 가택연금에 처하였다. 망원경을 통해 태양을 관찰한 후유증으로 이미 실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연금상태중에서도 그는 연구를 계속했고 찾아오는 후학들에게 지동설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사망했다.
갈릴레오가 굳이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하려 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프톨레마이어스 방식의 천체학이 잘못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밝히고 싶어했다. 갈릴레오가 싸우고자 한 거대한 장벽은 교회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도전은 곧 기독교 교리에 대한 심각하고도 불경스런 도전으로 교회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유럽의 지성사회를 뿌리채 흔들기에 충분했다.
거대한 교회의 감시와 탄압속에서도 갈릴레오의 뒤를 이으려는 학자와 지식인들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교회는 이를 교권에 대한 도전이자 반란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했다. 교회는 종교재판을 앞세워서 이들을 응징하고 제거하는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브르노의 정죄' 사건이 발생한다. 조르다노 브르노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도사이자 과학자였는데, 그런 그가 지구의 공전은 물론 자전까지 주장하면서, 지구는 스스로 빛을 발산하며 공전의 중심이 되는 항성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항성 주위를 자전하면서 도는 행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교회로서 극단의 심각성을 일깨우기에 너무도 충분한 사건이었다. 로마 카톨릭은 그를 8년 동안이나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끝내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1668년에는 로마 변두리의 한 광장의 구석진곳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채 가슴에 십자가 낙인이 찍힌 4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훼손된 시신의 상태는 차마 너무도 참혹하여 누구도 나서서 수습하려 들지 않았을 정도였다. 살해당한 4명의 신분은 모두가 과학자였다. 그것도 갈릴레오의 뒤를 따르는 학자들로 이미 정평이 나있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함구를 하고있었지만, 공공연하게 교회가 새로운 학자들의 의식과 흐름에 분명한 경고를 날린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젠 더 이상그 누구도 공공연하게 드러내놓고 이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거나 이야기하려 나서지 않기 시작했다.
그때 등장한 단체가 바로 '일루미나티(Illuminati)'다. '일루미나티'는 라틴어의 'Illuminatus'의 복수형으로 '밝히다' '계몽하다' '깨달은 사람들' '계몽하는 사람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재판이라는 무소불위의 강력한 철퇴를 마구휘두르는 로마 카톨릭의 탄압과 폭정속에서도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앙골슈타트 대학에서 교회법을 강의하던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에 의해서 1776년 창립된 계몽주의자들의 단체로 일루미나티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불과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1785년 교황 비오 6세가 일루미나티를 이단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바이에른 의회는 법률을 앞세워 단체의 해체를 명하였고 결국 단체는 해체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이 모여서 회합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 교회는 이들을 불손한 위협세력으로 판단했고, 일루미나티 집회 참가를 이단 집회 참가로 규정하여 교회에서 파문시켜버렸다. 교회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속의 법령(바이에른 의회)에 까지 압력을 행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해 끌고갔고 가두고 처벌했다.
일루미나티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와 평등 사상의 고취'였을 뿐인데, 왜 교회는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였을까?
여기에서부터 엄청난 음모와 모략이 뒤따르게 된다.
"일루미타니는 절대왕정과 카톨릭 교회로 대표되는 기득권 체제를 전복시키고 저들만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비밀결사이자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라고 모함하기 시작했다. 누가 이들을 향해 이런 모함을 시작하였는지는 입장을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러한 진실의 왜곡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꾸준하고도 매우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심지어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는 '일루미나티가 소수의 자신들만을 위한 인류말살 계획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게 퍼트리고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모두....... 애초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사건을 만들어냈던 주체들, 거기에 빌붙어서 기득권에 편승해 보려던 자들, 그들의 모략과 술수에 현혹되어 놀아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제까지도, 또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 참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 다분히 피해망상에 젖어서 스스로의 의식과 가치관까지도 이미 손을 더럽힌 자들(?)에게 내 맡긴 사람들이 벌이는 한바탕의 광란이라고 생각한다.
일루미나티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서 중세의 암흑기에서 벗어나게하기 위해 헌신한 계몽주의자들이었다.
과학의 발전을 종교에 대한 위협으로만 판단하는 중세시대의 주류들에게 당당히 맞서고자 나섰던 숭고한 반기득권 집단이었단 말씀이다.
생각해 보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던지' 아니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던지'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침이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밝아지고 사람들이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고, 해가 질무렵이면 돌아와 휴식을 취하면서 또 내일을 기약하고, 모두가 무사하고 먹고 마시고 쉴 곳이 있음에 하늘(신)에 감사하면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
그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고통을 나누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축복이자 커다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태양이 따라다니던 지구가 뛰어다니던........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
'우주의 최고 절대권자는 하나님이시고 세상 만물은 모두 그분의 생각과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행해진다. 그 분의 뜻과 생각에 따라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만들어졌고, 그 지구에는 그 분께서 지명하신 교회(교황)가 있다.' 그러니까 세상과 우주는 오로지 한 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1 천년을 버텨왔는데........ 그 중심축인 지구가 태양의 딸랑이로 전락해버리면....... 1 천년을 유지해 온 교회의 권위가 하루아침에 개차반(?)으로 전락해 버릴지 모든다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계몽주의자들은 사탄이자 곧 마귀가 아니었겠는가?(사실은 그들의 그런 생각 자체가 사탄이었던 것을)
그들은 만약 '지구가 태양을 향해 돌기 시작하면 교회는 망한다' 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종교재판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런데 밝혀지지 않았던가? 지구가 태양을 향해 돌고있는 지극히 별 볼일 조차 없는 행성의 하나라는 사실이........ 그럼 교회가 엄청난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슨 책임을 졌나?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교회를 화형시켜야만 하지 않았을까? 교회 스스로가 잘못을 시인하고 해체해야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교회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태양이 돌던 지구가 돌던 아무 상관도 없이 여전히 그대로이다.
생명의 창조는 신의 고유영역이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능력이 생명의 근원에까지 다가가고 있는 실정이다. 신의 고유한 영역인 '창조주로서의 신'이 점 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게 사실이다.
기독교의 탄생에서 중세까지는 모든것이 교회 마음먹기에 달렸었지만, 중세의 어느 시점부터는....... 인간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과학이 실생활에 밀착되기 사작하는 순간부터 '교회와 과학은 대립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과학의 발전은 곧 종교의 영역을 계속적으로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 대세론적인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된 생각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은 존재하고, 어느 누구도 기독교의 말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명의 신비가 풀리고 인간의 능력이 무한대까지 펼쳐진다고 해도......... 어쩌면 인간은 여전히 신(神)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남을것이라고 나는 역시 생각한다. 필요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오히려 교회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이 아닐까?
중세 시대까지는 오로지 교회만 존재했다. 교회가 곧 모든것이었다. 그후로 하나씩 하나씩 곳감 빼가듯이 교회는 항상 빼앗기고 잃었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에 젖어있는것으로 보인다. 더 내놓거나 빼앗기면 교회의 존립마저도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일루미나티는 그러한 선에서의 공존을 모색했다고 나는 생각하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여러가지 미신적인것을 너머 허구적인 내용들을 앞세워서 대중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을 하거나 요구하는 억지들을 규명하여 바로잡고, 또 그같은 허구를 앞세워 국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소수의 기득권자만을 위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있는 것을 좀 개선해보는 방편으로 우선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는 계몽주의적 노력을 경주하자는 것이 무슨 그렇게 신성모독이며 이단이라는 말인가?
음모론자들이 펼치는 주장에 의하면 '일루미니티들의 음모에 의해서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인류 문명사에 어쩌면 가장 큰 영향과 역활을 했던 위대한 사건이 아니겠는가? 인류가 선택한 제도중에서 현재까지 드러난 가장 이상적이고 지속가능하다고 판단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적 기반 위에 형성된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의 모태가 된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 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 이렇게 3 가지를 기치로 내세우고 벌어졌다. 그것이 곧 '일루미나티의 목표' 이기도 했다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일루미나티는 악마의 숭배자들도 아니고, 소수자를 위해 인류 전복을 꽤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비과학적인 미신들을 부정하고 인류에게 유익할 수 있는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고자 애쓴 선구자들이자 휴머니스들이었다.
누가 왜 계몽주의자들을 폄하하고 음모론 속에 가두려 하는가?
기독교와 연관된 '모든 음모론' 속에 항상 등장하는 이름들이다. 다빈치 코드에도 자주 등장한다.
오푸스데이,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예수회, 검은 교황. 루시퍼 등등을 말한다. 여기에 여러 기사단들을 미롯한 중세시대 이후의 굵직굵직한 단체나 유명인사치고 '음모론'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이쯤되면........ 음모론에 이미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이나 단체가 문제가 아니라, 배후에서 이런 음모론을 창조해 내는 사람들과 그들의 숨은 의도가 진짜 크나큰 문제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숨어서 음모론을 만들고 확산해서 이를 빌미로 종교재판을 열고 이교도와 사탄을 끌어들여서 계몽주의자들을 참혹하게 할살했다. 일루미나티는 해체를 넘어 송두리째 뽑혀나갔지만, 그들에겐 세상에 본보기로 내보여주거나 더 제거해야만 할 적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젠 근거조차 사라진 일루미나티와 일부 계몽주의자들이 지하로 숨어들어서 조직을 확장시키면서 여전히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새로운 음모론을 거듭 확장시켜 주장했다. 거듭 음모는 음모를 낳고있다. 어쩌면 그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도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자기들만의 입맛대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이 이루어져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혹 거짓된 명분이거나 도구가 아닐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인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라는 대사 말고도 충분히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대사가 더 있다. 당당하게 나서서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호언하는 자를 경계하라' 라고 에코는 썼다. 기꺼이 자신을 거대한 목적의 희생양으로 순순히 내어줄듯이 호언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은 치밀한 주동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충동적인 추종자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로 이들에게서 심각한 사태가 주로 발생한다. 이들의 자신을 선의의 희생양으로 내어놓기 전에 언제든지 다수의 불특정 대상들을 먼저 죽음으로 곧 잘 몰아세우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성적이라거나 합리적인 사고나 기대를 아예 할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그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주동자가 바로 음모론자인 것이다.
이럴때마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아주 짧은 한 마디 말을 툭 던져봄으로써 정신적인 환기를 시켜보려 애쓴다.
"요새 귀신은 뭐 먹고 사는지 몰라? 저런것들 싸그리 안잡아가고 말이야.......... 우이 씨.......'
언젠가 곧 시간을 내서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 대해서 한 번쯤 꼭 짚어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는 갈릴레오에서 일루미나티를 포함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비슷한 같은 시기(중세시대)에 과학이라는 대상을 두고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태도를 보였던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처 방식과 생각에 대해서도 거론해 볼 생각이다. 인간의 시대변화에 편승해서 과학의 발전을 이슬람은 적극 수용했던데 반해서,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적대시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심도있게 고찰해 볼 생각이다. 차후에..........
랭던 교수는 일련의 사건을 저지른 사건의 배후자를 자칭한 일루미나티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간다.
계몽주의의 정점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다.
바티칸의 지하서고에서 갈릴레오의 고서적을 살펴보던 랭던 교수는 일루미나티가 거론한 '네가지 원소설(四元素說)'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다가, 고대 그리이스의 철학자 '탈레스(Thales)'주장한 '이세상의 모든 물질은 (흙) (공기) (불) (물)의 4 가지 원소로 만들어져 있으며, 이 네가지 원소를 가지고 이 세상과 우주를 모두 만들 수 있다' 라고한 대목에서 4 원소 중의 (흙)이 '산치오'와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의 산치오는 '산치오 라파엘로'를 가리킨다.
하여 이 사건의 수사에 관여된 사람들은 서둘러 랭던과 함께 라파엘로가 죽어서 잠들어 있는 그의 묘지가 있는 장소를 찾아 쫓아가게되는데......... 그 장소가 바로 '판테온(Pantheon)' 이었다.
(일루미나티 + 갈릴레오 + 탈레스의 4 원소중에 흙 + 산치오) = 판테온
랭던 박사와 일행은 허겁지겁 판테온으로 달려와 라페엘로의 무덤을 살펴본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흙에 대한 단서가 나타나지 않았다. 착오가 있었음을 자각한 랭던은 '산치오'가 '라파엘로의 무덤'을 상징하는것이 아니라, 라파엘로가 만든 건축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라파엘로는 평생 화가였다. 나 역시 라파엘로가 그림 그리는 일 외에 건축했었다느 사실은 알지 못했었다. 랭던은 학생들에게 판테온의 역사를 가르치고있는 지나가는 여자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진다. '라파엘로의 무덤 말고, 혹 라파엘로가 만든 건축물이 있었나요?' 라고 말이다. '라파엘로는 화가였지만 딱 한 번 예배당을 설계한적이 있었어요. 포폴로 성당의 치기 예배당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일루미나티 + 갈릴레오 + 흙 + 라파엘로 산치오) = 치기 예배당
일행은 다시 로마의 대동맥인 코로소 거리를 질주해 북쪽으로 달려갔다. 포폴로 광장을 향해서였다.
판테온(Pantheon)은 BC. 27년 집정관으로서 세번째 임기를 수행하던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에 의해서 완공되었다.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 이라는 의미의 '판테온'이라 이름지어진 판테온은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커다란 직사각형 건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고대 그리이스 올림푸스 신전의 12신이 모셔졌을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초기의 판테온은 AD. 80 년의 로마 대화재때 완전 소실되어 버렸다. 하여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건축황제 히드리아누스 치세인 AD. 125 년 경에 현재의 돔 형태로 새롭게 건설되었다.
신전의 출입문 위 박공부위에는 '(M·AGRIPPA·L·F·COS·TERTIVM·FECIT”)' 라고 새겨져 있는 명문이 있는데, 이는 'Marcus Agrippa, Lucii filius, consul tertium fecit' 라고 풀이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루시우스의 아들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재 집정관 임기에 만들었다' 라는 뜻이다.
새로 만들어진 판테온은 그리이스 신전을 본 떠서 후대에 이어붙인 정면의 파사드(출입문) 부분을 제외하면, 팔각형 모양의 원형 건물에 둥근 돔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출입문이 세워진 한 쪽 벽면을 제외하면 나머지 일곱개 벽면에는 고대 그리이스의 일곱 신을 모시기 위한 부벽의 설치되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신들의 조각상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에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진다면 혹 판테온에 설치되었던 조각상들이 발굴되어 나올지도 모르겠다. 7 세기경에 들어서 판테온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서 교회로 개조되었다. 혹 이 시기에 이교도의 신들을 모조리 파괴해 없애버리는 거룩한(?) 만행이 저질러진 것이라면 고대 신들의 조각상을 찾는것은 영원히 불가능해 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뒤늦게 로마를 차지 한 헤브라이즘은 찬란한 헬레니즘을 말살하는데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왔던 때문이다. 판테온의 뼈대만 남겨놓고 청동 조각상과 청동 부조상을 모조리 뜯어냈는가 하면 지붕의 청동판까지 뜯어서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현 바티칸)이 새롭게 만들어지던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 우르바노 8세 치하에서는 또 다시 판테온 출입문 신전 지붕의 청동판을 또 다시 뜯어다가 천사의 성(산탄젤로성)의 방어용 대포를 만드는데와 대성당 제단의 발다키노(교황 전용 설교대)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성스러워야 할 대성당을 짓는데 약탈이 허용되고 자행되었다는 비판이 일자 교황청은 청동수입목록을 제시하면서까지 판테온에서 뜯어내 온 청동판은 거의 대부분이 산탄젤로의 대포를 만드는데 쓰였고 발다키노 제작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수입 목록을 세세하게 검토한 결과 베네치아에서 수입한 청동의 분량으로 발다키노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 차이를 어떻게 채워넣었을까는 어디가지나 독자들의 몫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현재 여행자들의 대부분은 판테온의 정문을 통해 내부를 간단히 둘러보는 정도에 그치지만, 벽면을 가만히 살펴본다면 건물의 외벽이 한꺼플쯤 벗겨나가서 외부 벽면의 훼손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이 또한 대성당을 비롯한 다른 교회의 건축을 위해 잘 다듬어진 판테온의 외벽들을 뜯어갔기 때문에 생겨난 훼손들이다.
그리이스 신전의 신들을 모두 쫓아내고 십자가를 내걸고 교회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른 교회를 짓는다고 엄연히 교회로 변모한 건물의 외벽과 천장을 마구마구 뜯어내 갔던 것이다. 모두가 신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그 성스럽고 영광스런 찬탈과 파괴에 가이없는 박수 갈채를 보내드리는 바이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언제나 여행자들로 넘쳐나서 경건함과 교요한 엄숙함을 기대할 수 없는 유명 여행지로 변모되었지만, 간혹 비바람이 심하거나 이른 아침에 찾아가게된다면 어느정도의 장엄하면서도 경건한 신전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판테온의 유일한 창문인 지름 9m의 오클루스(Oculus)를 가만히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2.000년 가까운 먼 과거에 이처럼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생각을 처음 가졌던 사람에 대해서 경탄을 금할길이 없다. 어디 그 뿐인가? 빗물받이 포인트 지점에 지름 43.3m의 벌룬을 놓아두고 바람을 불어넣는다면 바닥과 360도의 벽면들과 뚫려있는 천장의 지붕까지 정확히 들어맞아 풍선(벌룬)이 터지지도 전혀 찌그러지지도 않는다고 하니......... 와!!!!!!!!
판테온의 내부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을 기리고자하여 초대 왕인 베토리아 에마뉴엘 2세와 두 번째 왕이었던 움베르토 1세와 그의 아내 마르게리타 왕비가 잠들어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이곳에 '산치오 라파엘로'의 무덤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회와 교황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여실히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돈이나 명예만으로 판테온에 무덤을 쓸 수 있다면 과거에도,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열정을 불사를 사람들이 넘쳐나고야 말것이다. 기준은 단 하나........ '라파엘로를 능가 할 정도라면.......'
판테온의 천장에 난 구멍인 오클루스는 라틴어로 '눈'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판테온에서 오믈루스를 통해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면 계절(시즌) 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름으로 만들어진 문이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문을 통해 올림푸스 신전을 오르내리는 고대 그리이스의 신들 모습이 보일 것이다. 누구나의 마음가짐에 따라 보이는 정도가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
'판테온'이나 '아그리파'에 대해서는 보다 소상한 내용들을 이전의 여행기에서 다루어 보았던고로...... 이쯤에서 나머지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제 랭던 박사의 발걸음을 따라 (포폴로 광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자.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지하철 A선을 타고 플라미노(Flamino)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이용은 처음이기도 했고, 이제까지의 로마여행에서 버스를 이용해 바티칸 대성당을 다녀 온것을 제외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것도 모처럼만이다. 포폴로문 앞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되돌아서 대로를 건넌다. 트램 노선이 있는 골목안에서 포폴로 문을 바라다 본다.
어떤....... 알 수 없는 감동이 벅차올라 온다. 괴테나 몽테뉴도 그러했을 것이며 단테와 크리스티나 여왕도 바로 이곳에서 진한 감동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유럽은 물론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북쪽 바다건너 브리테니아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세상을 로마라고 불렀지만 그래도 유독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로마'는 전혀 다른 벅찬 감동 그 자체였을것이다.
포폴로문은 '플라미니아 가도(Via Flaminia)'의 시발점이다.
포폴로문에서 시작한 플라미니아 가도는 아레초와 피렌체를 거치고 볼로냐를 지나 리미니에서 끝이 난다. 그러고나면 리미니에서 새로운 아이밀리아 가도와 포필리아 가도로 나뉘어 알프스 너머 유럽의 전지역으로 실핏줄처럼 뻗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남쪽으로 시칠리아로 향하는 아피아 가도가 있지만, 플라미니아 가도야말로 진정한 로마제국의 척추이자 대동맥이었던 것이다.
로마로 향하는 사람이나 정보나 물자나 군대까지도 모두 이 길을 통했다. 모두가 이 문앞에 서서는 '이제부터가 진정한 로마구나'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과 소망에 여기 이 '포폴로문'이 등장했을까?
가장 빠른 출세방법으로 인식되던 군인이 되어 공을 세운 뒤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상인이 되어 커다란 부를 거머쥔 뒤 로마의 상류층처럼 풍요와 향락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물론 타고난 언변과 수단을 동원하여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도 이 문을 통해 로마로 몰려 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아마도 제국의 정복전쟁 결과로 족쇄가 채워진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저 문을 통해 로마로 향했을 것이다.
'로마 왕국'
'로마 공화정'
'로마 제국'
그 모든 권력이 자리잡은 곳은 '포로 로마노' 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 로마의 모든 권력이 바로 이 문을 통해서 세상으로 뻗어나갔던 것이다. 로마가 이룩한 '정치 군사적인 통일'이 그러했으며, '만민법(로마의 법률)을 통한 세계 지배' 또한 그러했다, '기독교에 의한 정신적 통일' 또한 모두 이곳을 통해 퍼져나갔던 것이다. 여기 포폴로 문에서 시작하여 로마 권력의 심장부 포로 로마노까지 일직선의 대로를 통해 연결된다. 그것이 바로 로마다.
테르미니역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곳이 모든 로마 교통망의 핵심이자 중심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모든 여행자들도 반듯이 이곳에서, 혹은 이곳을 통하여 로마여행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테르미니역이 지금의 현대식으로 탄생하면서 로마여행의 기점은 이제 오로지 테르미니역을 중심으로 변하게 되었다.
포폴로문(Porta del popolo)은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성벽의 북쪽문으로 생겨났다. 성문의 안쪽으로 아주 커다란 광장이 놓여있는데 당연처럼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으로 여기에서의 'Popolo'는 영어에서의 'People'의 의미로서 '시민의 문' 그리고 '시민광장'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중세에는 공개 처형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포폴로의 문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역시 제국의 문 스럽다' 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거대한 성벽의 줌심에 기워넣은듯한 성문은 웅장함과 장엄함으로 굳게 닫혔을 성문을 통해 '제국의 위용' 이라는 것이 어떤것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Welcome to Rome) 라는 환영문구는 어디에도 없고, '이제부터 진짜 로마다. 찬양과 존경을 받쳐라' 라고 외치고 있는것 처럼 느껴진다. 황금빛 투구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글라디우스를 찬 로마의 군인들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로마로 향했던 모든 길의 종착점이 바로 여기' 라는 사실은 너무도 확연하게 느껴진다.
여러 개선문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성문들은 안과 밖이 같은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포폴로문의 경우는 안과 밖이 다르다. 처음엔 같은 디자인이었지만 17세기 초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로렌초 베르니니로 하여금 지금의 모습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교황 알렉산더 7세와 교황청이 처한 당시 상황으로 치자면 성문이 아니라 교황의 궁전을 달라했어도 내줄 판이었을 것이다.(그 이유는 생략)
쥬세페 발라디에가 만든 시민광장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기원 전 10년에 이집트에서 약탈해 온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이집트 헬리오폴리스에 놓였던 세티 1세의 오벨리스크는 처음에 서커스 막시무스(대전차경기장)에 설치되었었으나 식스투스 5세 교황에 의해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 설치되었다. 당시에 이전 기술책임자였던 폰타나가 이집트 스타일의 사자 분수를 만들어 붙였다.
광장의 넵튠 분수를 보고자 다가가는데 어디선가 우리나라 노래가 들려온다. K-pop 이다. 평소 내가 알고 있는 K-pop이 전무한지라 약간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데....... 한군데서 들려오는 한국노래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저마다 다른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 챠밍여사와 조카가 가수와 노래 제목들을 이야기 하는데....... 헐.(모두 첨 들어보는 이야기들)
여기저기 청소년들이 우루루 몰려서 저마다 Tv에서 얼핏 보았던 군무들을 추느라 열심들이다. 자못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세상에........ 여기가 지금 대한민국이여? 충주 현대타운이여?)
여학생 한 명이 내가 둘러 맨 배낭의 태극기를 보고는 엄지 척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자 모여있던 청소년들의 모든 시선이 일순간 우리에게 쏠려온다.(이럴때면 항상 내가 대한민국 국민 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 대해서 굳이 아쉬운 한 가지를 지적한다면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다소 억지스러움이 곳곳에서 느껴진다는 점을 꼬집지 않을 수 없을것만 같다.
그것이 애초 원작자인 댄 브라운에 대한 아쉬움인지, 아니면 론 하워드 감독의 연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내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으로는) 소설을 시나리오화 하는 작업부분에서 각본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댄 브라운의 랭던교수가 등장하는 스릴러 씨리즈의 첫 작품은 바로 (천사와 악마) 였다. (다빈치 코드)는 두 번째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영화화 할 수 있는 시나리오로 (다빈치 코드)가 더 매력적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하여 (다빈치 코드)가 첫 영화로 만들어졌고, (천사와 악마)는 시나리오 작업에서 대폭적으로 수정을 가미하여 후편처럼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 때문이었을까?
원작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빈치 코드)는 가히 충격적인 소재만큼이나 스토리전개에 있어서도 절묘하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고 기막힌 타이밍이 더해져서 보는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강렬하게 사정없이 끌어 당겼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의 경우는 장면전환때 마다 보는 사람의 시선이나 의식을 다소 무리하게 억지로 잡아끌고 앞으로만 나아가려는듯 무리한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연출의 실패였거나, 아니면 이미 전 편을 통해서 이 씨리즈가 어떤 방식으로 전환되는지 알았을터이니, 진정한 영화의 이해는 다분히 보는 사람의 몫이라고 오히려 책임을 떠맡기는듯 했다. 연출가의 의도를 따라 차분히 길을 따라가다보니 강이 나왔는데 다리가 끊겨있었다고 치자. 길이 끊겨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끊어진 다리를 건너게 되는지에 대한 해명보다는, 잠간 눈을 꿈뻑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다리를 건너있었고 앞서 달려가는 연출자의 의도를 따라 부지런히 다음 상황으로 쫓아가야만 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세번째 시리즈 작품이었던 (인페르노)에서는 다시금 상당히 안정적인 스토리 전개를 보인다. 아니 확실하고도 분명한 사건의 핵심이 처음부터 드러났던만큼 다음부터는 일반적인 스릴러 정도의 긴박한 전개만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어느것도 (다빈치 코드)만큼의 짜임새나 학문적인 깊이는 물론 영화적 재미도 덜 한것만은 분명한것으로 보인다.
바티칸을 중심으로 벌어진 희대의 사건에 역사에서 오래전에 사라졌던 '일루미나티'가 재등장을 하고, 이는 랭던교수의 입장과 함께 '갈릴레오 갈릴레이'로 스토리가 이어진다. 고대 그리이스 과학에서 발생한 학설인 온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네 가지 신성한 원소인 '흙' '공기' '불' '물'이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음이 밝혀지게되고, 갈릴레이의 고서를 통해 이 사건속에서의 '흙'이 '산치오 라파엘로'로 연결되어 진다. 라파엘로의 무덤을 찾아 (판테온)을 찾아갔지만, 랭단 교수는 이내 라파엘로의 무덤이 아니라 라파엘로가 만든 건축물과 '흙'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서둘러 라파엘로가 일생동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축한 교회건축물을 찾아나선다. 포폴로 성당에 들어선 여덟개의 소예배당(채플) 중에 라파엘로가 유일하게 만든 건축물 '치기 예배당'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세 번의 로마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포폴로 성당'은 항상 내부수리공사 중이었다. 하여 첫 여행에서는 볼 수 없었던 채플을 다음 여행에서는 볼 수 있었고, 그런가하면 챠밍여사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이번엔 장막을 치고 공사중이어서 볼 수 없기도 했다. (천사와 악마) 쵤영당시에 다분히 기독교 역사에 비판적인 영화라는 것이 밝혀져서 바티칸이 당연히 거절했을테지만, 내부수리중이라는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여 공사장을 방불케하는 세트장을 만들어 놓고 촬영하다보니 사방을 어지럽게 흩어놓거나 공사장막으로 온통 가려놓을 수 있어서 훨씬 수월했을것이라는 제작후기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내용적으로는 상당히 완성도 높은 세트장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할 수 있겠다.
포폴로 성당(Santa Maria del Popolo)을 급하게 찾은 랭던 교수 일행은 라파엘로의 유일한 건축작품인 '치기 예배당(Chigi Chapel)'을 찾아낸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은 '흙'이 상징하고 의미하는 것이 라파엘로의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 놓여있는 '삼각형의 피라미드'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흙으로 만든 피라미드'는 바로 일루미나티의 상징으로 쓰여졌었으며 아울러 미국의 지페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계몽'을 나타내기도 했었던 것이다. 이 피라미드 무덤을 만든 사람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조각각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 였다. 베르니니로 옮겨 간 시선은 이제 그의 작품들을 쫓다가 그의 작품인 구약 성경의 내용을 소재로 한 (하박국과 천사들)로 쏠리게 되고, 하박국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아랫쪽 방향에서 지하로 향하는 맨홀(악마의 목구멍)을 발견하게 된다.
기하학적 패턴으로 꾸며진 대리석 바닥 위에 장미와 참나무 잎 문양으로 둘러싸인 맨홀의 뚜껑에는 날개달린 해골이 치기 가문의 휘장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아래의 라틴어 비문에는 '모든것은 죽음을 통해' 라고 새겨져 있다.
이미 열려진 흔적이 남아있는 맨홀을 발견한 랭던은 그 아래에 하박국이 가리키고 있는 '과학의 제단'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서둘러 맨홀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루미나티를 표방하는 살인자 집단으로부터 납치된 추기경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포폴로 성당의 지하에서 납치되었던 추기경 한 명의 입속 가득 흙이 채워진채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예고된 첫번째 살인은 그들의 사전통보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문제의 핵심은 서둘러 두 번째 예고된 살인을 미연에 방지하는 수 밖에 없다.
랭던박사 일행은 베르니니의 조각작품을 단서로 하여 이번엔 '공기'로 상징되는 살인을 막아내기 위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광장'으로 달려 간다.
하지만........ 어찌 알 수가 있었겠는가? 어딘가에서 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된 살인음모가 차곡차곡 진행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가 상영되고 나서 로마에는 '영화의 발자취를 따라해보기' 패키지 여행 프로그램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만큼 인기와 관심을 받게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연히 '포폴로 교회'를 찾는 방문객들도 훨씬 증가했다고 한다.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치기 예배당'을 찾아서는 베르니니의 조각작품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악마의 목구멍을 통한 지하실까지는 들어가볼 수 없겠지만 말이다. 현재도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포폴로 교회 안의 여덟개나 되는 예배당(채플)을 다 둘러볼 수 있는 일 조차도 어느정도의 여행 행운이 따라주어야만 하겠지만서도 말이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여행자들의 관심과 사랑은 2006년 영화가 개봉된 이후에 생겨난 새로운 풍속도라고 해도 좋을것만 같다. 갑자기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치기 예배당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사실 이전에도 포폴로 성당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놀라울만치 많이 보관하고 있는 로마여행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포폴로 교회는 내부에는 12개의 예배당(채플)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치기 예배당'은 라파엘로가 건축하였으며, 내부에 베르니니와 로렌제토의 조각상이 유명하여 항상 여행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더하여 반대편에 있는 '세라시 예배당(Cerasi Chapel)'에는 유명한 '카라치'와 '미켈란젤로(부오나로티가 아닌)'의 미술작품이 소장되어 있어서 사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잡아끌어들인것은 '세라시 예배당' 이었다가 최근에 들어서 '치기 예배당'에 더 많은 발걸음이 몰려들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중세시대 이후로 대성당이나 유명한 교회들이 모두 앞다투어 여러개의 작은예배당(채플)을 보유하기 시작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의 핵심을 한마디로 꼬집어 정의한다면 바로 '돈(money)'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또한, 여기에서 제기한 '돈(money)'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그 전에 '연옥(燃獄)'과 '단테(Durante degli Alighier)의 신곡(神曲)'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짚고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을것만 같다. '연옥'의 개념을 모든 유럽인들의 가슴과 정신세게에 각인시켜 준 것이 '로마 카톨릭의 교리' 라기 보다는 오히려 단테가 쓴 '신곡'의 영향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옥(燃獄, Purgatorium)' 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것일까?
<카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르자면 '연옥은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죽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기는 하였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정화를 거쳐야 하는 상태이다.' 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자비로운 사랑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영원한 구원을 이미 보장받았지만, 아직 하늘나라에 오르기에는 이승에 머무는 동안에 생겼던 세속의 때가 완전하게 정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연옥이라는 아주 특별한 공간에 머물면서 세속의 정화를 통해 하늘나라에 오르는 거룩한 기쁨을 누릴 준비를 하는것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로마 카톨릭) 이라는 특정 종파만의 내세관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둘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하는 여러종교들 중에서 일부 종교는 연옥을 하나의 내세관적인 의미만으로 수긍을 하는 부분도 있긴하지만, 개신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이를 확실하게 부정하고 거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옥' 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카톨릭교(로마 카톨릭) 안에서만 허용되는 내세관이라 해야만 할것이다.
카톨릭은 '연옥'의 문제가 비화되자 '성경의 기록에도 분명하게 쓰여져 있다' 라고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그 쓰여진 기록이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낯선 (마카베오기 하권 12장 42절~ 45절)의 기록이다. 로마 카톨릭이 이 기록을 근거로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이는 '로마 카톨릭' 자체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태에 직면하고 말것이다. 하나님께서 성 베드로를 후계자로 삼으시면서 천국의 열쇠를 내어주셨다는 카톨릭의 핵심 정통성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꼴이 되고마는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합의에 의해서 성경을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고대 유대교의 전승이나 예수 사후의 초대교회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기독교 경전들이 있었다. 핍박과 탄압을 받는 기독교에서 어느날 로마제국의 국교로 신분이 상승하게되자, 우선 체계적이고 통일된 교리가 필요해졌고 교회를 통해 기독교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제도와 격식과 제례의식들이 필요해 졌다. 하여 여러차례의 종교회의나 공회의 등을 통해서 하나하나 체계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모든 역사의 주도권이 로마제국의 수도를 기반이자 거점으로 차지하고 있던 '로마 카톨릭'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데에 적지않은 문제점이 발생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분명 예루살렘 중심이었고, 탄압이 극에 달한 시기에는 안티옥이나 알렉산드리아나 데살로니카 등등이 중심역활을 해왔다. 로마는 초대교회에서는 먼 변방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로마의 종교지도자들이 스스로 대표자임을 자임하고 나선것이다. '로마의 기독교 지도자' 대 '로마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지도자' 간의 첨예한 대립이 벌어졌다. 하지만 승리는 로마 카톨릭의 몫이 되었다. 성경을 규합하는 과정에서도, 교리를 체계적으로 잡아가는 과정에서도, 교회의 운영방안을 확립하는 과정에서도, 모든 제례의식을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오로지 로마의 종교지도자들만의 의도대로 집행해 나갔다. 수많은 이의제기와 부당함을 규탄하고 개선을 촉구했지만....... 로마 카톨릭은 이를 모두 묵살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밀고 나가버렸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함이었으며, 그토록 갈망하던 종교의 자유였을까? 거기에는 신성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로마 기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 확보와 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들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27권의 (신약성경)을 규합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소요와 다툼이 벌어졌다. 이는 이미 오래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언제든지 또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이미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바였다.
로마 카톨릭의 수장들에 의해서 반 강압적으로 27권의 경전만이 (정경)으로 선택되었다. 거기에다 그토록 거룩하신(?) 그분들은 '선택되어 성경으로 재편집되는 경전들은 모두 사람의 지혜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기록된 것' 이라는 절대적 신성(神聖)을 부여했다. '더 할것도 덜어 낼것도 없으며, 그 쓰여진 구절들은 곧 하나님의 생각이자 말씀이다' 라는 폭탄 선언인 것이다. 성 아우구스투스가 교회와 교황에 대하여 (무오류설)로써 '신격화'를 완성시킨것에 버금가는 위대한 발상이었다. 27권에 뽑히지 못한 경전들은 (외경)이라 분류되었지만, 다른말로 하자면 '영지주의'니 어쩌니 하는 변명스런 표현보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솔직하게 '신성시 하기에는 좀 뒤떨어지고' 이는 곧 '믿을만한 구석이 좀 덜하다'는 의미일 수 있으며, 좀 다른 의미로는 '로마 카톨릭이 내세우고 주창하는 교리나 정통성에 장애가 되거나 실직적인 이득이 좀 덜한 이야기들' 이라고 판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적 판단을 넘어서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이 차고 넘치도록 가득 스며들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도들의 다른 편지들이 (정경)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다. '요한 계시록'만은 (정경)에 포함시켜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 절대다수의 종교지도자들 요구였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 수장들은 이를 묵살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왜 그런 결정이 그들에게 필요했든지가 궁금하지만....... 이를 파고들다가는 자칫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는 불순한 의도로, 중세로 치면 종교재판에 끌려나가 모진 고문끝에 화형에 처해질것만 같아서 멈추어야만 할것 같다.
로마 카톨릭이 '연옥'의 정당성을 위해서 (마카베오기)를 굳이 인용하자고 한다면, 전체 기독교는 보다 확고한 진실을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서) (유다서) (파티마 문서) 등등의 (외경)들도 자유롭고 정당하게 교회 안에서 거론되고 연구되고 활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천 년에서 1천 오백년 전 가지 드러난 경전들을 추스려서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더는 손대면 안되는' 책(聖經)은 정말로 그렇게 '절대적 신성함을 스스로 지니고 있을까' 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는것은 왜일까?
20세기에 들어서 쿰란지역에서 (사해문서)가 발견되었다. 아주 최근인 것이다.
그 내용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의 기록인 것이다. 그럼....... 늦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신성함이 모두 사라지는 것일까? 이미 (정경)으로 선택된 기록들과 새로이 발견된 기록이 차이를 보인다면........ 어느것이 진실일까? 왜 그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하지않을까? 과학과 고고학과 교통의 발달은 어쩌면 앞으로 얼마든지 더 많은 그런 문서들이 발견될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지금의 잘 다져논 기독교적 틀이나 교리체계의 사수를 위해서는 더 이상 발견이 없거나, 발견후의 전파를 완벽하게 차다나해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럼 이제부터는 '연옥'과 '돈(money)'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지 1천 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까지도, '연옥(燃獄)' 이란 말은 기독교에 없었다. 기독교의 어떤 기록에서나 어떤 지도자의 가르침에서도 '연옥' 이란 말이 등장한 적이 없었다. 초대교회로부터 로마 카톨릭이 생겨났다고 치면, 적어도 로마 카톨릭 안에서만은 '연옥'이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연옥'에 대해서 관심을 갖거나 이를 교회의 활동에 사용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따지자면 사실 '연옥' 이란 개념은 카톨릭에서 조차도 있거나 말거나 한 무가치한 일개 개념이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카톨릭 역사에서 '연옥'의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AD. 1160년~1180년 사이에 비로소 '죽은자를 위한 기도의 관습'이 생겨나면서 부터였다고 전해진다. 왜 그 때였을까? 죽은자는 언제나 항상 있었기 마련이고 장례식과 기도의식도 늘 있었을것인데............. 왜 그 시기에서야 '죽은자를 위한 기도'에 '연옥'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나는 한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고심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단테에서부터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면서 그 실마리를 찾아냈다.(내 주관적인)
이 시기에 바로 '초승달과 십자가의 충돌' 이라고 불리어지는 '십자군 전쟁(1095~1272)'이 벌어졌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리인'이라 칭하기를 좋아하던 교황은 전혀 성스럽지도(聖) 종교적(예수의 부활의 의미 위에서 탄생한 기독교)이지도 않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탐욕스러움에서 기사단을 포함한 유럽의 젊은이들을 소아시아의 불구덩이 속으로 떠밀어 넣어버렸다. 그야말로 종교의 탈을 쓰고 벌어진 인류역사 최대의 치욕적인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중세에 벌어진 십자군 원정에 대해서 당시의 사상자들과 인류앞에 그릇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 이는 교회(교황)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최악의 범죄였다.
2백년 가까운 시간동안 벌어진 여덟 차례의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죽어갔다.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적에게 포로로 잡혀 노역에 끌려갔고 상당수가 노예로 팔려나갔다. 귀족이거나 부자거나 성직자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고향으로 금위환양하는 차마 웃지못할 일들이 무수히 자행되었다.
이 참혹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슬람군에게 포로로 잡혀간 기독교 군사들은 참으로 낯설은 광경을 목격했다. 그런가하면 싸움에서 승리하여 이슬람군을 포로로 잡아 온 기독교 군인들도 역시나 참으로 낯선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슬람의 군인들은 하루 다섯 번에 걸쳐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것만이 아니라, 전투중에서나 부상을 치료하던 중에 죽게되는 군인들을 위해 따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죽은자를 위한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적어도 기독교 군사들에게는 대단히 낯설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오늘날에야 아주 흔하게 죽은자를 위한 기도나 기념 행사가 당연시 되고 있지만, 적어도 중세까지는 아니었다. 장례가 끝나면 죽은자를 위한 기도는 아무런 소용이나 효험이 없다고 당연시 되던 시대였다. 사람은 죽는 순간 이미 육신을 떠난 영혼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게끔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이슬람의 죽은자를 위한 기도를 지켜보던 기독교인들은 알 수 없는 부러움을 느끼게된다. 고위 기사단원이나 군인으로 참전한 유럽의 지성인들이나 전쟁에 동행한 종교인들이 로마의 교황청에 이 뜻밖의 사실을 알렸다. 거기에는 처참하게 죽어나간 동료 군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죽은자들의 미래에 대한 어떤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교황청의 종교지도자들은 이 같은 이슬람의 '죽은자를 위한 기도의식'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여 마침내, 지금은 유명무실하다 못해 페기처분해 버린, 교리에서 조차도 취급한적이 없는 '연옥'의 개념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교황청은 12세기의 중세에 이제 십자군 전쟁을 통해 현실적 문제로 부각된 '연옥'을 이제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를 심도있게 연구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중세의 카톨릭은 이슬람과의 전쟁중에 '죽은자를 위한 기도'를 보고나서 사라지고 지워버린 초대교회의 교리에서 '연옥'의 개념을 다시 찾아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문화에서는 '연옥'이 없다.
이슬람교계에서 '이슬람의 백과사전'으로 불리었던 '이븐 헤이즈(Ibn Hazm)'에 따르자면, 코란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교도가 죽으면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고, 분리된 영혼이 림보(천국)에 이르는 여정중에서 '바르자크(Barzakh)'에 잠시 머물면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바르자크에서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기도하는 자들은 그저 죽은자들의 영혼이 떠나는 여정이 평안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측은함과 연민과 자기반성이 더해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슬람교에서는 카톨릭의 연옥 개념과 비슷한 정신적 영역의 기도예식은 행하여지고 있으나, 분명하게 '연옥'은 정의 내려지지도 않고 인정되지 못한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스페인 코르도바 옛도심으로 향하는 성채 정문 앞에는 두 개의 조각상이 서 있는데, 하나의 로마의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철학자인 키케로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이슬람 최고의 석학이자 역사가. 철학자. 신학자, 법학자인 이븐 헤이즈의 동상이다. 그의 저서를 통하면 이슬람교의 '연옥 개념'에 대해서 보다 소상하게 접근할 수가 있겠다.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에서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젊은영혼들이 살점이 뜯겨져나가고 피를 쏟으며 전쟁을 하고있는 상황에서도, 정작 전쟁을 기획하고 밀어붙인 로마 교황청에서는 '연옥'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에 고심을 하고 있었다. 동방의 이교도이자 미개인인 이슬람도 저렇게 '연옥'을 신성하게 잘 활용하고 있는 터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택을 받았다고 큰소리치며 지내온 유럽의 기독교가 '연옥'을 오랫동안 잊고지냈거나 내팽개쳐버렸었다는 사실이 자칫 잘못 변질되기라도 한다면 교황청의 위용에 커다란 타격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선언했다.
'연옥은 본래부터 로마 카톨릭의 아주 중요한 교리중 하나였다'고 말이다.
사람은 죽어서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여정의 시작 즈음에서 영혼은 한동안 연옥이라는 아주 특별한 공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영혼 스스로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추스른 후에(신 앞에 정갈해지는 의식을 치른 후에) 비로서 정해진 천국이나 지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이 대목에서 그야말로 신묘한(귀신도 기절초풍하고 까무러칠만한) 묘책을 하나 발명한다. '이슬람에서는 연옥과 유사한 과정에 머무는 동안에도 이미 정해진 운명은 어떤 방법으로든 변할 수 없다' 라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는것에 반하여, 뒤늦게 창안해 낸 '로마 카톨릭 방식의 연옥에는 그 머무는 기간동안에도 특별한 방법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개정을 한 것이다. 이 계책이 누구의 발명품인지 로마 카톨릭은 결코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 발명자가 카톨릭의 지옥 구렁텅이 가장 깊은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을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진 2천년이 가까운 이 순간까지 교회(로마 카톨릭)가 창안해 낸 발명품중에서 가장 그럴싸한 위대한 상품이 '연옥'이요, 두번 째가 '종교재판'이며, 세번 째가 '면죄부' 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옥은 로마 카톨릭이 발명해 낸 '사설 입시학원' 이다.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성업할 것이며, 그 댓가는 당연히 엄청난 돈이다. 특정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세계속에서 향락과 사치를 즐기면서 말이다.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낙인 찍혔다. 처녀의 몸으로 구세주를 낳으신 분과, 그분에게서 나신 존귀하신 분 정도만이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분이신 것이다. 태어나는것 자체가 죄악의 결과였으며,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것 자체가 죄악덩어리를 키우는 일일 뿐이라고........ 바로 교회가 가르쳤다.
인간이 죽어서 갈 곳은 딱 두군데 뿐이다. 천국 아니면 지옥뿐인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악덩어리인 인간이 갈 곳은 오로지 불가마 지옥뿐이었다. 아무리 죄를 씻으려 씻으려 애를 써도........ 어쩌면 그 애를 쓰는 행위 자체가 죄악이었다. 그 판단을 교회(교황과 종교지도자)가 판결했다. 말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쁘도록) 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와 교황께서 크게 기뻐하시게) 무슨일인가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자체도 '예루살렘 탈환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오면 면죄부를 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교회가 천국을 놓고 한바탕 사기극을 벌인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에 학교가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갈 곳이 딱 두군데 밖에 없다. 하나는 훌륭한 미래가 보장되는 서울대학교요, 다른 하나는 노가다 현장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선택받은 지극히 일부의 특권층뿐이다.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정해졌고, 이 운명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바꿀 수가 없다. 이것이 중세시대까지의 로마 카톨릭이 정한 운명론이자 내세관이었다. 이미 교회와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으며 모두가 서울대를 졸업한 스페셜 로얄 패밀리들이었다. 세상은 그저 그들의 놀이터였을 뿐이다.
그러던 와중에 '연옥' 이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었다.
'세속의 죄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성경)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열심히 기도하며 연구하다보니 죄에서 구원할 해법을 마침내 찾아냈다'는 희소식이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인간의 영혼도 연옥에 머무는 동안에 하기에 따라서는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상품이 등장한 것이다. 무조건 노가다 현장으로 가서 영원히 죽어라 삽질만 하는것이 아니라........ 연옥에 머무는 동안에 사설학원에 다니면서 특강(?)을 받으면 운명을 바꾸어서 서울대에 합격할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이야기다. 이 얼마나 기쁜 복음인가!!!!!!! 인간에게 구제받을 길이 열렸다. 다만 교회(교황)이 강의하는 사설학원에는 꼭 다녀야 하는 전제가 따른는데........... 학원비가 상상초월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상상초월의 학원비를 내고서라도 꼭 서울대에 가고싶어하는 왕들과 귀족들과 부자들이 차고 넘쳤다. 억만금에 사채와 딸라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서울대에 가고싶어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교황 알현을 신청했다. 신도시 택지개발지구의 떳따방 풍경이 딱 그짝이었다고 하겠다.
부자와 관리들은 학원 등록비 마련을 위해서 농민과 서민들을 더 쥐어 짰다. 그들의 신음소리와 한숨이 교회 지붕의 십자가를 뒤흔들었지만........... 학원의 강사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들의 비밀금고에 쏟아져 들어오는 재물을 보며 천국보다 훨씬 나은 이승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로마 카톨릭이 새로운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신곡)이 전 유럽의 지성사회를 광풍으로 휩쓸기 시작했다. 단테는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지옥)을 여행한다. 너무도 적나라하게 불구덩이의 지옥형벌이 묘사되었다. 책을 읽은사람은 모두가 치를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지옥행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연옥) 역시도 끔찍하기란 지옥이랑 별반 다를것이 없어보였다. 다만 (연옥)에는 '특별구원'라는 아주 특별한 제도가 있어서 잘만하면(교회의 가르침대로 하면) 악의 구렁텅이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마지막 한가닥 희망에 모든 영혼들이 처절하게 몸부림 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테는 연인 베아트리체를 따라 (천국)을 여행한다. 천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책을 덮으면 결론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다.
'지옥까지는 절대로 가지 말자. 하지만 태생적 죄인인고로 그나마 잘 해야 연옥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연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가자.' 라는 결론 하나뿐인데........ 천국의 열쇠는 돈에 달려있지 않은가?
단테의 신곡이 온 유럽을 광풍으로 휩쓸면 휩쓸수록 교회의 수입은 늘어만 갔다. 무자료에다가 세금도 내지않는 그야말로 눈 먼 돈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 온 것이다.
신앙의 열기가 한 풀 수그러들면 그만큼 교회의 돈이 바닥을 드러낸다고 했다.
사람들을 광기의 열풍으로 몰아넣고 세상히 혼란에 휩싸여 불안해 질수록 교회의 금고는 차고 넘쳤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것은 왜 일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에 대해서도 한 번은 지면을 빌어 심층 분석을 해보련다)
그럼 사설학원에서 교회성직자들이 특강을 통해서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는 쪽집게 과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연옥에서 구제되어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아주 특별한 딱 한 가지(실로 절묘한) 방법 뿐이었다. 그 신묘한 한 가지 방법이 시대상황으로 보나 인류문명사로 보나 신통하게도 (르네상스의 도래)와 이어지는 (종교개혁 운동)과 딱 들어 맞아 버리고 말았다.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면죄부를 써 줄터이니 무조건 돈을 가져와라'는 지난 시절의 무지막지하면서도 치졸한 사기행각에서 이제는 교회도 약간의 체면과 세련을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몹쓸 연구 노력의 결과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지만 말이다.
할렐루야!
아멘!
고대 이래의 내세관에 따르자면 사람은 죽는 순간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다고 믿었다.
육신은 지상에 버려지지만 분리된 영혼은 이승에서의 삶을 평가하여(다분히 종교적 시대적 기준의 평가에 준해서) '공'이 많은 사람은 천국으로 올라가고, '과'가 많은 사람은 땅속 지옥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모든 종교가 이런 기준에 적합하거나 아니면 아주 유사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세계에서 행해지는 '죽은 영혼을 위한 기도의식'을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마침내 로마 카톨릭은 '연옥' 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이는 오로지 로마 카톨릭 안에서만 인정되고 있는 다소 어정쩡한 교리에 따른다)
카톨릭 교리에 다르면,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떠나기 전에 '연옥'에 잠시 머물면서 이승에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영적인 자정의 시간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 기간이 얼마나 허용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천국을 허락받은 영혼이야 굳이 연옥에 머물 시간이 아마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잠시 체류를 했다는 뜻인데......... 놀랍게도 이 '연옥'에 체류하는 기간에 일정 조건만 갖추게된다면 지옥행 열차표를 천국행 비행기표와 바꿀 수 있다고 교황청이 연옥에 대한 교리 해석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교황들과, 최고 성직자들과, 성인들과, 기독교 역사에 헌신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정도는 되어야만 천국행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하늘아래 죄가 없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사람은 출생 자체가 죄악의 덩어리였으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대부분 죄가 늘어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낙타가 바늘구멍을 천 번은 드나들 정도가 되어야 겨우 천국행을 차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물론 교회가 원하는 만큼을 넘어서는 돈과 재화를 바치고 면죄부를 여럿 구매한 사람이거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교황으로부터 면죄부를 약속받았던 사람이나, 교회를 위하여 순교해서 성인에 반열에 오른 사람은 되어야 카톨릭이 제정한 '그들만의 리그' 혹은 '그들만의 세상'인 천국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날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
연옥에서 구제되어 천국행 열쇠를(티켓)을 얻는 방법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지옥행을 언도받은 영혼이 연옥에 머무는 기간동안에 세속(인간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죽은 영혼을 기억하면서 많이 이름을 거론하고 기도를 해 주면........... 그 기도의 숫자에 따라 구제받을 수 있다는 카톨릭식 교리 해석이었다.
죽은 영혼이 연옥에 얼마나 머물 수 있는지, 이승에서 벌어진 기도의 숫자가 얼마가 되어야만 구제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이승에서 살아가는 죽은 영혼의 후대 사람들 하기에 따라서 지옥행 판정을 받았어도 구제받아 천국에 오를 수 있다는 카톨릭적 교리의 해석이었다.
잘 생각해 보자. 쉽다면 아주 쉽고...... 어렵다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옛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 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적막하기 그지없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은 다음에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죽은자의 내세를 위해서 매일매일 기도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생전에 그렇게 살기가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당연히 '그 인간 잘 죽었다. 그런 나쁜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올라가 편하게 살면 안돼' 하면서 저주의 기도를 누군가 드리게 된다면....... 당연히 팍 팍 감점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죽기 전에 주변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나 죽은 후에 기도를 해 줄 비용' 이라면서 선금을 뿌렸다고 치자? 그런 계약이 효력이 있을까?
이제 연옥을 탈출하기 위하여 죄인인 인간이 선택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한 가지 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에 투자하는 방법) 뿐이었다. 중세 시대는 그야말로 '기독교 왕국' 이자 '로마 카톨릭의 세상' 이었다.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니 죽은 후까지도 그야말로 모든것을 교회가 관여하던 시대였다. 교회를 위해 돈과 재물과 모든것을 희사하고 봉사했다. 그래야만 죄가 그나마 가벼워질 수 있었다. 교회를 건축하고 치장하고 조각상을 세우는데 엄청난 기부를 하고, 그 기부 사실이 모든이들의 기억에 남아있어야만 죽은 후에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기도를 얻을 수 있게될 것이며, 그것으로 연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많은 교회들이 거대하게 위용을 갖추며 건설되는데에 '연옥'에서 파생된 효과가 실로 엄청나게 작용했다.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이 메디치 가문의 개인 예배당이 되었듯이, 수많은 부자들이 거대 교회의 일부인 작은 예배당(채플)들을 사들이다 시피하여 증축을 하고 그림과 조각으로 치장하기시작했다. 조각가는 그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이 작가를 기억하기 쉽지만, 제단화나 벽화들은 그렇치가 않자 이번엔 저마다 대형 벽화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넣고, 이 사실을 은근히 소문으로 퍼트려 두고두고 타인들에게 회자되게끔 만드는 유행이 생겨났다. 그림 제작의뢰자들이 성화속에 등장인물이 되고, 화가들도 자신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후대사람들에게 이름이 불리워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가지 교회가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면, 이제는 부를 가진자들이 스스로 돈다발을 들고 찾아와 교회를 치장하고 건설하고 은밀하게 헌금을 받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터전이랄 수 있는 리카르디 궁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종교화를 올려다보면서 어떤 성스러운 위압감 앞에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경건해졌을 것이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접한 소아시아 지역의 동방박사 세 명이 축하방문을 하는 행렬을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동방박사들은 당시의 소아시아지역을 대표하는 지성인들이지, 결코 부유한 대상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림속의 행렬은 대단히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예루살렘이나 다마스쿠스의 최고부자 상인이라 해도 저런 행렬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건 샤를마뉴 대제나 시저나 나폴레옹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정도의 행렬인 것이다. 군대를 동원해 전후 호위를 받으며 진군하는 황제의 행렬이라 해야만 좋을 정도의 실로 어마어마한 행렬이다. 이것이 '메디치'다. 가문의 위용을 스스로 서스럼 없이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라도 백마를 타고 황금옷을 입은채 행렬을 이끌고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 당시 불과 20세인 '로렌초 메디치' 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뒷줄에 백마를 탄 '피에르 메디치'를 비롯해 그 옆에 당나귀를 탄 소박한 차림의 '코시모 메디치'를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조반니 메디치에서 시작하여 코시모에 이르러 유럽 제일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으로 성장한 메디치 가문이라면 당연하게 이 정도쯤의 위상이 넘치는 벽화로 장식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저마다 피렌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공헌한 메디치 가문사람들을 기억해내고 추억하고 감사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것을 그들은 간절히 원해서 이 같은 일을 벌였고 과감하게 돈을 투자했던 것이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이 순간에 역사를 되돌아 보아도 교회(로마 카톨릭)의 "연옥 발명'은 묘수를 넘어 가히 신의 한 수였다.
이슬람은 끊임없이 죽은자를 위해 기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연옥의 교리는 아예 없다. 나의 필명이자 아호인 '피안' 역시 불교적 용어로서 연옥의 개념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역시 연옥에서의 일로 인해서 운명이 바뀌어 질 수는 없다. 기타 개신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교리도 일부 개념상의 이해로는 해석되지만, 교리적인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다.
'로마 대약탈(1527년)' 이후에 새롭게 재건되는 포폴로 대성당(Santa Maria del Popolo)
16세기 유럽은 한마디로 격동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비단 정치.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 그러니까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광풍노도의 시대였다고 해야 할것이다.
리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아랍인(이슬람)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본토로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유럽의 위기이자 기독교의 위기였다. 이때 프랑크 왕국의 카를 마르텔이 등장하여 이슬람을 막아내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때부터 유럽은 프랑스(프랑크 왕국)가 절대적인 지배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계기로 삼아서 로마 카톨릭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프랑크 왕국 못지않은 부와 세속적인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오랜 시간동안 아랍인(이슬람)들의 치하에서 억압받았온 리베리아 반도(스페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사벨 여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스페인에서 태어나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벌여서 마침내 이슬람을 유럽의 영토에서 내쫓아버린 것이다. 오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스페인 국민은 모두 애국심과 카톨릭 신앙으로 똘똘 뭉쳐졌다. 이는 곧 프랑크 왕국에 버금갈 정도의 국력을 갖춘 새로운 신흥 강국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이 현명한 여왕은 지중해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콜럼부스를 발탁 지원하여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대성양 시대를 열게된 것이다. 이제 유럽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세력다툼의 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탐을 내는 목표는 오랜세월 지중해 무역상권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이룬 이탈리아였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 이탈리아는 아직 국가의 개념조차 가지지 못했다. 피렌체. 나폴리. 제노아. 씨에나. 베네치아 등등의 도시국가 형태로 분열되어 오로지 상업적인 이익만을 추구해왔던 것이다. 그들에겐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부를 축적한 상인중심의 도시국가 체제만으로도 풍요와 향락을 추구하기에 이미 너무나 충분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비효율적인 집단권력체제일 뿐이었다. 특히 군대가 그러했다. 도시국가들은 소규모의 용병만으로도 방어가 충분했던 때문이다.
사건 발단의 책임은 상당부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있음을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분열되어 있는 이탈리아반도 내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향해 교황은 끊임없이 압력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때의 교황은 최고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한 세속의 군주에 지나지않던 암흑의 시대였던 것이다. 교황권에 불복하는 도시들끼리 연합을 형성해 대항했다. 교황은 온갖 추잡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을 분열시키고 심지어 전쟁으로 끌어들이기까지 서슴치 않았다. 교황청은 만행에 벗어날 수 없게된 도시국가중에 국제무역을 통해 친숙해진 프랑스의 샤를왕에게 도움과 파병을 요청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것이다. 그러자 엄연하게 스페인의 식민지역이었던 나폴리 역시 본국인 스페인 카를 5세 왕에게 파병을 요청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제 도시국가들은 프랑스를 지지하는 편과 스페인을 지지하는 편으로 갈라서게 되었고, 그 가운데 놓인 교황(로마 카톨릭)은 수시로 이쪽 저쪽으로 위험한 외줄타기 곡예를 시작하였다.
샤를이 이끄는 3만4천명의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왔다. 로마는 함락되었고, 이어서 교황청으로 쳐들어갔다. 스위스 군위병의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으로 교황은 겨우 산탄젤로성까지 도망쳤으나, 끝내는 항복하여 산탄젤로성에 약 7개월간 갇혀있다가 몰래 탈출하여 알프스 너머 스페인 점령지로 달아난다.
로마에 입성한 프랑스 군대의 지휘체계가 무너진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광포해진 군인들은 로마시내를 위젖고 다니면서 무차별적으로 살육과 약탈과 파괴를 시작했다. 로마는 불길에 휩싸였고 무법천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지휘관의 위계질서 명령은 이미 효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전투에서 적군이었던 교황청 수비대는 참혹한 방법으로 공개처형되었다. 성당과 수도원과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저택과 고급 관료의 저택과 궁전들이 가장 우선적인 약탈의 대생이 되었다. 로마는 건국 이후로 가장 치명적이며 참혹한 약탈과 파괴와 살륙이 어어졌다. 추기경을 비롯한 최고위 성직자들까지도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고, 점령군에게 거액의 금전을 제공한 후에야 생명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자들은 노인과 아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수녀들까지 포함하여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9개월이나 되는 프랑스군대의 점령 시기동안 한마디로 로마는 아비규환 지옥이었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의 많은 문화재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로마 약탈은 스페인의 카를 5세가 뒤늦게 이 사실을 접하고나서 스페인군대를 모아 나폴리에 상륙하면서, 위기를 느낀 프랑스군이 서둘러 물러나면서 끝이났다.
로마 대약탈(Sacco di Roma, 1527)은 한 마디로 제국의 수도였던 찬란한 로마를...... 건국 이전의 들판으로 회귀시켜 버리고 말았다.
깊은 수렁으로까지 추락한 로마 카톨릭은 그야말로 교회의 존립마저 심각하게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까지 내몰린것이다. 실추된 명예와 권위의 회복이 가장 급선무였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 내분을 수습하고 시대적 국면전환을 위하여 트랜토 공회의를 열고 '기독교 중심으로서의 로마( Roma Triumphans)'를 캐치프레이즈로 새로운 로마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교황 식스토 5세와 바오로 5세의 시기 내내 대대적인 로마 재정비 사업이 활기를 띠게된다.
유럽 전역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미술가와 장인들이 로마로 몰려들게 된다.
이와 맞물려 오랜시간 교황청 재무장관을 역임한 티베리오 세라시(Tiberio Cerasi)가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포폴로 대성당에 속해있는 12개의 소예배당(채플)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소의 채플을 구입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건축과 치장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할 목적이었으며 실제로 여기에 묻혔고, 채플의 옆면에 기념비석이 놓여있다.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위대한 경당을 소유하고 싶었다. 하여 세라시 채플에 많은 르네상스 최고의 장인과 예술가들이 동원되었지만, 20세기 현대에 들어서까지 수많은 여행자들을 포폴로 대성당으로 잡아 이끈것은 세라시 추기경의 거룩한 명성이나 대성당 건축물이 아니라 경당을 장식하고 있는 2명의 화가에 의해 탄생한 3점의 미술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세라시 경당(Cerasi Chapel) 제단 가운데에는 애니베일 카라치의 (성모 마리아의 승천) 패널화가 걸려있고, 양쪽 옆으로 카라바조의 (사도 바울의 개종)과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이 걸려있다. 카라바조가 밀라노를 거쳐 로마에 온지 10년 만이었으며 비로소 그는 진정한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 세상의 중심은 로마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멀고 긴 여행 끝에 마침내 로마에 도착하였고, 로마의 첫 관문이 포폴로 문 앞에 섰다. 저마다 사연과 목표를 가지고 로마까지 오게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긴 여정 대부분이 도처에서 갖은 위험에 노출되었으며 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갖은 험난한 역경을 수도 없이 격으면서 겨우 도착한 로마였기에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 병사의 검문을 통과해 비로소 진정한 로마에 첫 발을 내딛게된 감동은 차마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포폴로 문을 통과하면 왼쪽으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이 바로 포폴로 대성당이었다.
이쯤되면........ 로마를 드나드는 사람치고 맨 처음이거나 맨 마지막 로마에서의 여정으로 포폴로 대성당을 들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앞으로 펼쳐질 여정에서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무사히 도착하였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하여 포폴로 대성당은 로마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회로 자리잡았었으며, 이 점은 고위 성직자나 교황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대 교황들의 포폴로 대성당에 대한 애착은 참으로 유별나 보이기까지 했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최측근이며 추기경인 델라 로버를 통해 포폴로 대성당에 속하는 12개의 예배당 중에서 오른편 두 개의 경당(Chapel)을 구입해 가족예배당 겸 가족묘로 꾸미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같은 예배당의 사유화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과 호르헤 다 코스타 추기경 등이 예배당 구입과 치장에 뛰어들었다. 이는 이제 교황의 가족이나 친척들에까지 점점 퍼져 나갔다. 바티스타 멜리니 추기경이 사망하여 이곳에 묻힌것을 필두로 암살된 간디아 공작(교황의 아들)과 의사인 루도비코 포도카타로 등등의 부와 명망을 갖춘 사람들이 대성당의 경당에 묻히게 되었다. 카톨릭인 '연옥'을 새로운 교리로 채택한 이후에 생겨난 신풍조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부와 명성을 획득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예배당을 구입하고 치장하고 가족묘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지만, 16세기 말까지 새롭게 치장된 경당(채플) 어디에도 르네상스를 대표하거나 문화사에 언급될만한 중요한 예술작품들은 전무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특별히 세상의 이목을 끌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로마 대약탈을 겪고 난 뒤에 '세계 기독교 중심으로의 로마 재건' 이라는 숙명적인 목표 아래 시작된 포폴로 대성당의 재건사업 일환으로 벌어진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의 '세라시 경당(Cerasi Chapel)' 재건축은 이후로 다방면에 걸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비로소 로마인들이 가장 즐겨찾고 아끼는 포폴로 대성당에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만한 훌륭한 예술품이 소장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세개씩이나 말이다.
이 영향은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고, 로마의 모든 교회들이 진정으로 재건축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같은 채플(경당)들도 하나 둘 재건축되기 시작하였고, '치기 예배당(ChiginCHapel)' 또한 그것들중의 하나인 것이다.
세라시 경당을....... 아니 포폴로 대성당을 뭇 사람들의 이목이 항상 집중되는 이름난 명소로 만든 요인중에 가장 으뜸되는 요인을 말하자면 바로 이사람을 빼놓고는 거론할 수 없을것만 같다.
그는 바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라는 르네상스 후기의 화가이다.
'진정한 르네상스 최후의 화가' 내지는 '바로크 미술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그림들은 찰라와 같은 순간들을 잘 포착하여, 여기에다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참으로 절묘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사실적으로 그대로 보여준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지배했던 플라톤의 사상에서 비롯된 종교적 내용을 무조건 이상적인 형태로 미화시켜야만 하는 형식의 틀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인간의 모습과 내면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바라보고 표현하고자 했다. 하여 서양미술사는 이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라고 기록했다.
광기(狂氣)에 휩싸인 희대의 풍운아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갔지만 세상은 그를 여전히 '안타까운 천재(天才)'로 기억한다. 질곡의 삶은 이전 여행기에서 다루기도 했고, 또 앞으로도 다룰 기회가 있을것 같아 여기서는 짧게 포폴로 대성당에 소장된 작품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카라바조는 10년 가까이 로마에서 지내면서 항상 세간의 이목 한가운데 있었고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다. 항상 술에 취해 있었으며 툭하면 싸움질을 일삼았다. 거기에 내기에다 도박까지 거의 중독수준이었다. 또한 성에 집착도 유별나서 부녀자 강간 사건에 체포되었는가 하면, 남색에 대한 추문도 뒤따라 다녔을 정도였다. 모두가 외면하고 손가락질 하는 패륜아였지만......... 그림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그리는 재주가 그에겐 있었다.
그림 솜씨 하나로 그럭저럭 부랑자의 처지를 커버해 나가고 있을무렵, 교황청의 실세 중에 실세였던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이 포폴로 대성당의 세라시 채플을 개인적으로 구입하여 최고로 훌륭한 경당으로 탈바꿈 시키는 작업을 벌이면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장인과 예술가들을 불러들렸는데........ 거기에 카라바조가 뽑힌 것이었다. 세라시 경당의 재건에 뽑혀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입지와 명성은 하루아침에 크게 달라져 있었다. 카라바조는 이제 누가 뭐라해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른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17세기의 유럽을 '극장의 시대( Theatrum mundi)'라고 평가한다.
오페라와 연극과 발레 공연등이 대중화를 넘어서 부흥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극장문화는 왕가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기술의 발전에서 시작된 교역의 발달은 부유한 상인집단을 탄생시켰으며, 그동안 상류사회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많은 문화와 예술활동들이 이제 이들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정도였다. 거대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앞다투어 미술작품을 사들였고 문화생활에 뛰어들었다. 너도나도 극장을 찾아서 오페라. 연극. 발레 공연을 관람했고, 앞다투어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단테의 작품을 읽는것에 그치지 않고 외우다시피 하게되었다. 극장공연을 사랑하고 단테의 싯구를 일상생활속에서 자주 인용하는 사람이야말로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갖춘 진정한 상류사회인이라고 인정받았던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앞다투어 상류사회라는 특별한 자기들만의 리그속에서 머물기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이러한 시대 흐름은 미술계에도 적지않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카라바조 작품을 보아도 쉽게 느낄 수 있듯이 어떤 돌출된 순간적인 상황에 황홀하리만치 아름답게 빛이 작용하고. 거기에다가 화가만의 개성 넘치는 극적인 연출을 가미하여 드라마틱한 장면을 만들어냄으로써 마치 극장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듯한 감동을 보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세라시 경당의 우측에 걸려있는 ‘다메섹 도상의 회심’(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이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을이 바로 그와같은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어둠과 정적 속에 느닷없이 쏟아져 내리는 빛이 화면 중앙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말과 함께 땅바닥에 쓰러진 사울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그토록 박해하는 예수이니라.' 라는 하늘의 음성에 놀라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로마인 사울은 그만 말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림속의 사울은 결코 두렵거나 고통스럽거나 당혹해 하는 표정이 아니다. 아픈곳을 부여잡거나 서둘러 일어서려는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자세와 표정으로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듯이 지금 사울의 자세와 표정은 무엇인가로 충만한듯한 놀라움과 감격스러움으로 가득한 모습인 것이다.
이 순간을 오히려 신약성경이 잘 부연설명하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혹 '성성모독죄'에 해당되는것은 아닐까? 이 극적인 장면 하나로 '이제까지의 로마인 사울'과 '사도 바울'의 전혀 다른 삶과 발자취가 구분되니까 말이다.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 장면을 묘사한 회화는 무척이나 많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조차도 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남겼으니까 말이다.
카라바조의 (다메색 도상의 회심)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느라면..........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로마의 길도, 소아시아의 풍경도, 어찌되었던 음성으로 들려오는 신의 계시도, 기뻐하는 천사들도, 찬양을 받치는 주변사람들 조차 그림속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지치고 세상 풍파에 찌든 늙은 마부가 오히려 당황해 하고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이 신성한 사태의 유일한 목격자역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사동 소극장의 연극무대에 두 명의 배우가 말 한 필을 끌고 나와서 정지된 화면처럼 신약성경의 내용을 공연하고 있는 것이다. 정지된 무대 위로 한 줄기 환한 빛이 내려비치고 있는것이 연극의 전부다. 나머지는 보는 사람의 몫이다.
'사울이 어떻게 바울이 되는지가 궁금하면 알아서 신양성경을 읽어보라' 명령하고 있는 식이다.
다분히 '카라바조만의 방식'인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나만의 내면적인 방식으로 바라보았고 해석했다. 그러니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있다.
잔혹한 카타르시스가 가득하고 섬광처럼 번뜩이는 깨달음의 순간이 한 편의 빛과 심연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파르르 떨리는 모세혈관와 긴장감으로 터져버릴것만 같은 긴장 위로 따사로움을 간직한 빛이 쏟아진다. 한 편의 심리극이다.
카라바조만의 극단적인 명암법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 부르는데 이 모두가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어디에서도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적 시선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것을 바로크적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보다 분명한것은 이런것은 결코 르네상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형이상학적인 르네상스적 시선이 아주 적거나 거의 없다고 느껴진다. 그냥 사람의 시선에 보여지고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막상 이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는 호평 보다는 호된 비평이 절대적이었다는 아이러니를 가진 작품이다.
17세기의 카라바조는 천재화가의 작품 자체보다는 그의 기행과 더불어 많이 회자 되었었다.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는 250년 이상을 세상은 카라바조를 찾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카라바조가 사망한뒤 20년이 지나자 아무도 그를 기억하거나 찾지 않았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카라바조는 재발견 되었고 화제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인 오늘날에서는............ 지금 카라바조 보다도 더 뜨거운 '미술계의 아이콘'이 또 있을까 싶다.
세라시 경당의 좌측에는 카라바조의 작품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The Crucifixion of St Peter)'이 걸려있다.
저마다 다른곳을 응시하면서 마지못해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려는듯한 세 사람의 표정과 자세에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처형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어떻게든 입증해 보려는듯한 안간힘으로 느껴진다. 사방으로의 짙은 어둠과 적막속에서 한줄기 빛을 통해서 알 수 있는것은 오로지 십자가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베드로의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평화로운 표정이다. 그는 지금 목전에까지 찾아든 죽음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을 줄여달라고 신에게 울부짖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여 신으로부터 천국에 대한 비전을 확약 받았기에 애써 표정관리를 해야만 했던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베드로는 더 이상 그 어떤 암시나 의미를 추가해 전해주지 않고있다. 역시나 카라바조 스타일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벌어졌던 장면을 여과없이 사실 그대로 표현해 놓았으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르네상스가 최고의 정점을 찍은지 한참을 지나 17세기에 접어들게되면 천편일률적으로 규격화도다시피 정형화된 르네상스 스타일에 염증을 느낀 화가들에 의해서 매너리즘이 로마와 피렌체에서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르네상스주의자들에게 만연한 플라톤의 이상적 성향이 한계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와 피렌체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과 베네치아 회화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요소을 과감히 탈피한 자연적이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회화양식이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오히려 이들 베네치아 회화양식에 보다 더 친숙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회화양식이 후일 바로크 미술로 발전하게 되었고, 하여 이를두고 '카라바조의 바로크식 자연주의' 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은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루벤스로 이어지게 된다.
카라바조는 극명하게 명암을 대비시키면서 종교적 소재의 그림속에서도 성인들의 이미지를 결코 이상화 하거나 신성스럽게 그려내지 않았다.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움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오로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이는 어쩌면 '회화를 통한 반종교개혁 정신'을 추구하고자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성스러워야 할 성경속의 인물을 그려내는 모델로 일부러 창녀나 노동자를 고용했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밑그림 없이 직접 화폭에다가 스케치와 채색을 병행하는 알라 프리마(alla prima) 기법의 대가가 바로 카라바조 였다. 스케치에 온 정열을 쏟은 화가들은 무척 많다. 혹자는 '스케치야말로 회화의 시작이면서 또한 회화의 전부'라고 말한 화가도 있었다. 카라바조와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람은 아마도 레오나드로 다빈치였지 않았을까? 바로크 회화를 창시한 위대한 천재화가이면서도 반항적이고 보헤미안적인 기질로 인하여 격정의 짧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카라바조의 마음속에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극복해야만 할 대상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보다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그이 정서를 평생동안 짖눌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이시여. 이 세상에 화가 미켈란젤로는 하나면 충분했을것을 어쩌자고 둘을 내놓으셨단 말입니까?' 라고 카라바조가 생을 하직하면서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을까?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인 현재에도 로마여행을 하면서 포폴로 대성당의 세라시 채플을 찾은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불만섞인 푸념들을 늘어놓기 일쑤다.
'도대체 카라바조의 그림들은 어디에 붙어있는거야? 거기에다 왜 쓸데없이 허접한 그림을 위대한 카라바조의 작품 사이에 끼워놓았느냔 말이야?'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팩트다. 실제로 세라시 채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카라바조가 그린 (다메섹 도상의 회심)과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작품에 관심이 있을뿐, 두 작품 사이를 갈라놓고 걸려있는 그림이나 작가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아예 시선조차 주려하지 않는 진풍경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차라리 카라바조의 그림을 하나 더 걸었어야만 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리했어야 할 정도의 일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위대한 미술작품 사이를 갈라놓듯이 끼워넣어서 전시를 해야만 했단 말인가? 예배당 제단의 중심에 떡하니 엉뚱한 그림이 걸려있고, 카라바조의 그림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일부러 고개를 디밀어 찾아보아야만 겨우 볼 수 있을뿐이다. 사전지식 없이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심고 지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위대한 카라바조의 작품을 밀쳐내고(?)' 제단 중앙의 최고 중요한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림은 애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의 패널화 (성모의 승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냐고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17세기가 처음 시작되던 AD. 1600년 1월 1일의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을때,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포함하는 이탈리아를 대표한다고 평가되는 가장 유명한 화가 두 명을 꼽으라면 바로 '카라바조와 카라치'가 당연하게 뽑혔을 것이며, 당시로서는 도저히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라고 말이다.
우리 미술책자에는 주로 '안니발레 카라치'로 기록되어 왔다. 카라바조와 카라치는 공히 르네상스 말기이자 매너리즘의 시대를 극복하고 새로운 바로크 시대가 등장하는 시기에 수많은 화가들에게 커다랗게 영향을 끼친 선구자적 화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르네상스가 최고의 절정기에 이르렀을때부터 일부 화가들은 '이대로 좋은것인가' '이대로 영원히 갈 것인가' 하는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완성으로 여겨지는 르네상스 예술이 정말로 완벽한 완성인가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르네상스 양식은 이제까지의 모든 방식을 수렴해 하나의 정형화된 정통의 틀을 만들어 놓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도 역사도 시간도 예술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고 발전해 나가기 마련이다. 아무리 르네상스라해도 왁벽이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르네상스가 과거 고대 그리이스로의 회귀에서 시작되었다면, 이제 최고의 정점에서 다음의 변혁을 맞이 할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경험을 중시하는 근대정신으로 표현되는 리얼리즘을 모든 생각과 행동에 담아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리얼리즘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서 미술계에서도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화풍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기 시작했다. 풍부한 르네상스의 화려한 부활이 고대 그리이스 정신의 복원과 계승에서 비롯되었다면 아직은 그와 같은 길을 좀 더 깊이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부류들로 그 중심에 산지오 라파엘로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이쯤에서 인간의 내면과 현실을 직시하면서 세상만물을 있는 그대로의 시간과 모습과 존재로 바라보고자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부류로 여기에는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있었다.
이러한 시선의 차이와 가치관의 차이는 이후 수백년간 양분되어 지속된다.
여기에서 안니발레 카라치는 라파엘로의 주장을 따르고자 하는 미술에게서의 회귀파에 해당했고, 카라바조는 자연주의에 해당하는 레오나드로 다빈치파에 속했다. 이들의 화풍에는 그 처럼 내재되어 있는 가치관과 추구하는 화풍이 달랐으며, 그런 이유로 더더욱 시대의 라이벌로 사사건건 부딪치고 비교 평가받게 된 것이다.
카라바조가 사망한 뒤 20년쯤 지나자 이 세상에서 카라바조는 잊쳐지고 지워지고 말았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새롭게 다시 부각되었으며, 지금에는 세상에서 가장 핫한 미술가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카라치는 17세기에서 21세기까지 언저나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이어져 나왔다. 다만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나 라파엘로에 비해서 특축난 유명세를 전혀 누리지 못한 먼 과거의 화가로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기억되어 온 존재였던 것이다.
바티칸(교황)의 권력과 위용이 세계사를 넘어서 인간의 정신세계까지를 다스리던 시대에 그 바티칸의 실세중에 실세인 테라시오 추기경이 훗날 자신의 무덤을 계획하고 아주 특별하게 꾸미고자 추진한 세라시 채플 재건사업이었으니 당연히 소요되는 자원과 인력은 세상에서 최고인것들로 골랐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살아있어서 데려올 수 있는 최고 명망있는 화가로 카라바조와 카라치가 선정된 것이다. 세라시 추기경은 직접 카라바조와 카라치를 선정하였으며 섭외하였다. 그리고 경당의 제단에 사용할 미술작품으로 카라바조와 두 점을, 카라치와 한 점을 직접 계약했다. 아울러 계약단계에서 이미 이들의 세 작품을 걸어서 장식할 장소까지도, 그리고 추기경이 원하는 작품의 소재와 구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런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시대적 라이벌로 항간에 늘 화제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경쟁심리는 어떻게 얼마나 작용하였을지 어느정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우리는 이미 조금 앞선 시대인 르네상스 전성기에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거대한 벽면을 마주보고 세기의 그림 대전을 벌였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대결은 시도는 되었으나 지나친 과열과 관심때문이었는지 결국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양쪽이 모두 중간에 다른 이유를 들어 경쟁을 포기하고 다른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카라바조와 카라치의 경우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의로인이자 주문자인 테라시오 추기경의 위세가 교황에 못지 않았으며, 거기에다 추기경은 미술에 관한한 최고의 안목과 지식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과 명성이 모두 세라시 채플의 그림대전에서 판가름나게 생겼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같은 포폴로 대성당에 별도로 설치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포폴로 대성당이 로마의 상징적인 장소이며, 그 안에 설치될 세라시 경당의 위치와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 위에다가 계약된대로 그려서 내걸었을 경우까지를 계산하면서 세기의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로마를 넘어 온 유럽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카라바조와 카라치 모두 이번 대결에 사활을 걸고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1년 정도 지나서 작품이 모두 완성되었다.
카라바조는 (다메섹 도상의 바울의 회심)과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완성했다. 카라치도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완성했다.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에게 세 작품이 모두 제출된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우리가 세라시 경당에서 볼 수 있는 두 사람의 세 작품이 모두 그대로 완성되어 받아들여져 전시된 것일까?
그럼 두 사람의 대결 승자는 누구였을까?
지금의 드러난 현실대로라면 당연히 카라바조가 절대적으로 우위였겠지만, 4백년 전 당시의 평가도 그랬을까?
물론 나는 답을 알고있다.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은 애초 계약서에 주문했던 대로의 세 작품을 납품 받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은 현재 세라시 경당에 걸려있는 세 작품을 전혀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왜 그랬을까? 계약서 대로 작품을 납품 받았음에도 어떻게 지금 걸려있는 그림들을 볼 수 없었을까?
그 해답까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속내용에 관한 정보나 안내 또한 찾아보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다. 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을 요약해서 전달하고자 한다. 차후로 로마여행이나 세라시 경당을 찾아가게되는 여행자들을 위해서...........
세라시 채플을 방문한 티베리오 추기경은 이루형용할 수 없는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카라치가 제출한 (성모의 승천) 작품을 가리고 있던 휘장을 잡아당겼다. 벅찬 감동으로 탄성을 자아냈어야 했음에도 적막과 고요만이 흐르더니 이내 추기경의 표정은 경악과 분노로 인하여 심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불끈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면서 더는 참을 수 없다는듯 뒤를 향해 고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카라치....... 카라치는 지금 어디 있는가? 당장 그자를 찾아내서 내 앞에 데려오라.'
카라바조와 카라치의 작품을 모두 소장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바로크 미술의 핵심이자 정수를 모두 가지게 되는것이라고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은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추기경의 가까운 지인인 조반니 벨로리는 카라치를 소개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르네상스적 정통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모범생은 카라치뿐' 이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여 추기경은 자신의 채플 제단 중앙에 카라치로 하여금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주제로 하는 그림을 제작해주도록 의뢰하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교회적 분위기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따지자면 의로한 그림의 주제로 인하여 어쩌면 한동안 커다란 소요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교황청의 최고 실력자인 자신의 개인 채플에는 가장 '반 종교개혁'적인 위대한 작품이 상징적으로 내걸려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치와 카라바조에게 의뢰한 세 작품의 이면에는 이처럼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대적하기 위하여 어느때보다도 심도있는 주제와 수준 높은 훌륭한 그림작품을 앞세워 카톨릭과 교황청의 교황 다음가는 실권자인 자신의 존재감을 보다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교회와 교황의 부패와 타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은 이제 보다 심도있게 카톨릭의 교리에 대해서까지 도전을 해오고 있었다. 원죄. 은총. 대속(代贖). 성사(聖事). 성찬식. 연옥(燃獄) 같은 카톨릭의 뼈대와 근간을 이루고있는 교리들 까지도 개혁의 대상으로 성토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神)의 존재로서 부활을 했다고 하지만, 인간인 성모 마리아를 부활 사건에 끌어들인것은 허구를 넘어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라고 집요하게 공격을 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결국엔 성모 마리아가 예수처럼 부활 승천했다고 주장하던 교회지도자들 마저도 슬쩍 꼬리를 내리듯 대꾸를 삼가하고 있는것이 현실 이었다. 교회(교황청)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종교개혁론자들의 창끝은 분명하게 교황(교황청)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신성함과 절대적 권위는 기약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어느누구 하나 교회에 동전 한 잎도 가져다 받치지 않을것이다. 돈이 없으면 교회의 권위도 없음이요 권위가 없어짐은 교회의 존재가치나 필요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초대교회 이후로 숱한 어려움과 위기를 겪어보고 극복해왔지만, 지금의 사태는 시로 1천오백년만에 겪어보는 최고의 위기였던 것이다.
결국 교회(교황)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예수회(제수이트교)를 만들어 종교 개혁론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반종교개혁'을 펼쳐나가도록 한 것이다. 개혁론자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여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카톨릭 스스로의 개혁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예수회를 탄생시킨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내보이는 명분일 뿐이었다. 예수회 안에는 아주 특수한 집단을 두었는데, 이들의 주요 활동은 종교개혁을 펼쳐나가는 사람들을 파악하고 감시하고 더 나아가 중요인물들을 암살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다.(이런 활동 내용을 바탕으로 꾸며진것이 영화 '어쌔신 크리드' 이다) 그와 더불어 리베리아반도에서 아랍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나서 스페인의 카톨릭을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이사벨 여왕이 꺼내들었던 '종교재판'이란 무시무시한 무기를 로마 카톨릭이 다시 꺼내들었다. 이 종교재판은 장장 19 세기까지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잔인무도한 살륙을 자행하게된다.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든 재판과 처형은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단언컨데 모든 종교재판에서 기독교가 교리로서 내세우는 사탄이나 마녀나 적그리스도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교회가 요구하는 돈이나 토지를 내어주지 않고 교황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밉보인 인간이란 존재들(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선택받고 구원을 약속받은 신분의 인간) 만이 산더미처럼 시체로 쌓여나갔을 뿐이다.
종교개혁의 염원이 강하게 퍼져나가던 시기에 수많은 미술품들이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이유는 교황과 교황청이 자신들의 사적인 욕심과 부정축재의 방법으로 교회를 과도하게 치장하고 고가의 미술품들로 도배하고 있다는 비평에서 시작되어 많은 미술적 문화재들이 소실되는 비운의 사태를 실제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은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교회를 더욱 성역화하여 다시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기 위하여 새롭게 더욱 교회를 미술품으로 치장하는 분야에 힘을 쏟게된 것이다.
카라치와 카라바조의 세라시 채플에 전시될 작품들은 그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탄생하게 된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이 1600년에 카라치에게 의뢰하여 처음 받았던 (성모의 승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판단)
천사들이 지지하고 있는 집 위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앉아있다. 집은 아마도 죽은 영혼들이 거할 천당을 상징하는 것일까? 부활 승천하는 성모의 머리에 천사들이 황금면류관을 씌워주고 있다. 천사들의 발 아래 고통속에 절규하는 인간들이 보인다. 바로 연옥이다. 지옥과 달리 연옥은 잘(?)만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 교회의 말을 잘듣고 교회를 위하여 큰 공을 세우거나, 아니면 많은 돈을 받치고 여러장의 면죄부를 자주 사면 가능한 일이다. 성모의 품안에 안긴 아기예수가 장난치듯이 물통을 쏟으내면......... 그 생명수가 지붕을 타고 내려가 연옥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에게 뿌려지고 있다.
'이게 지금 카라치가 1년이나 걸려서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그림이란 말이야? 나 라도 이 정도는 그린다구..........'
지금 당장은 그림의 주문자인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한 그림을 접하고 분노가 하늘을 찌를듯이 치솟아 있지만.......... '반종교개혁' 이라는 의도를 담은 주문이었다면........ 나름 그 의미나 의사를 나름 성실하고도 충분하게 담고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티베리오 추기경은 실망과 분노는 실로 엄청났다고 전한다.
결국 추기경은 작품의 인수를 거부했다. 그는 모든면에서 앞선 이 작품을 훨씬 능가하는 훌륭한 작품을 요구했고, 카라치는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티베리오 추기경이 교황 다음 가는 로마 카톨릭의 최고 막강한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인수를 거부당한 그림은 화가의 손으로 폐기처분해 버리던가, 화가 작업실의 지하 창고에 방치되건가, 아니면 그림 중개상이나 후원자를 통해 새로운 주인에게 팔리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수거부당한 그림들이 주문자의 취향이나 입맛에 맞지 않았을 뿐이지........ 작품의 격이 훼손되었거나 떨어진다는 의미가 결코 아닌것이다. 인수 거부당한 작품중에 오히려 불멸의 명작이 더 많을뿐더러...... 훨씬 더 고가에 매매되기가 다반사인 것이다. 카라바조의 경우는 미술사 전체를 통털어서 인수거부의 비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고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인수거부를 당했다. 그 숲한 인수거부의 사태가 오히려 카라바조를 오늘날 가장 귀한 화가로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추기경이 거부한 (성모의 승천) 초기버젼은 이후로 여러사람의 손을 거쳐서 1605년 로마의 한 교회에 걸리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이 또한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말이다. 하여 초기버젼을 소장한 교회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려 한다. 초기버젼 그림 사진을 위에 계시하였으니......... 찾아보고자 하신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애니발레 카라치는 결코 티베리오 추기경의 요구를 허툴게 여기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런만큼 이번에는 그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심혈을 기울여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새로운 (성모의 승천)을 완성하기까지 다시 1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작품이 바로 지금 이 순간 포폴로 대성당의 세라시 경당에 걸려있는 바로 그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티베리오 추기경은 이 새로운 작품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말았다.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사이에 티베리오 추기경이 사망한 것이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설이 있다. '큰 판일수로 재미없고 싱겁게 끝난다'고 말이다.
카라치와 카라바조라는 17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에 이루어진 '세기의 깜짝놀랄만한 대결'은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게 싱겁게 끝나고 만 것이다.
카라치의 그림이 인수 거부를 당했다. 내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좋아하는 카라치의 훌륭한 작품들이 즐비하건만, 하필 교황청의 최고 실력자에게 의뢰받았음에도 최악의 평가와 함께 인수거부를 당하다니 말이다. 내가 보아도 카라치의 작품중에서 따져본다면 가장 허접하다는 느낌이들 정도이니 말이다.
어떻게 이런일이.......... 분명히 같은 공간에서 최대의 라이벌인 카라바조의 작품과 비교평가 될것이라는 것을 알고 만들어 제출한 작품이었음에도 말이다. 실로 믿기지가 않을 정도이다.
카라치의 작품이 지독한 혹평속에 인수거부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카라바조의 기분은 어땠을까?
이를 기회로 카라바조가 단독질주하는 영광의 탄탄대로가 펼쳐졌을까?
아니다. 카라바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카라바조 역시 지독한 혹평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두 작품 모두 인수거부를 당했다. '인수를 거부 할 만큼 수준 이하' 라는 티베리오 세라시 추기경의 이유가 딸려있었다.
카라바조 역시 1년을 더 투자해서, 지금 세라시 경당에 걸려있는 (다메섹 도상의 바울의 회심)과 (성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을 새롭게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추기경은 새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사망하여 완성작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내게는 커다란 영광스런 즐거움을 누리는 행운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카라치와 카라바조의 인수거부 당한 초기작품과 새롭게 완성된 현재 전시중인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 비교해 볼 수 있는 참으로 귀하고 즐거운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카라바조는 아마도 피렌체 여행에서 좀 더 심도있게.......)
추기경님의 '인수거부'에 아낌없는 존경과 갈채를...........
고객으로부터 의뢰받은 그림을 완성해 놓고도 정작 작품인수를 거부당하기로 너무도 유명했던 카라바조의 일화를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래야 앞으로 수도없이 만나게되는 카라바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을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쉽게 다시 말하자면......... 카라바조의 그림들이 왜 인수거부를 당했는가 라고 의문을 가지기보다는, 극히 일부의 별 탈 없이 인수를 마친 그림들을 살펴 보는것이 더 쉽게 이해에 당도하는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열에 여섯이나 일곱은 인수거부를 당했으니 말이다.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서 아주 가까운곳에 성 아우구스티노 대성당이 있다. 기독교의 교리와 예식의 체계를 정착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신 성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성당이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모방하여 건축한 교회는 규모면에서 생각보다 아주 작고 내부장식 또한 간촐하고 소박한 인상을 짙게 풍겨온다. 그렇다고해도 건물은 르네상스 건축의 대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지은 훌륭한 르네상스 유산이며, 야코포 산소비노의 조각상이며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도 소장되어 있고, 주제단의 경우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했다. 성 아우구스티노을 낳고 훌륭하게 이끌어주신 어머니 모니카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속에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로 추앙되고 있다.
이탈리아 현지인들은 성녀 모니카를 추모하기 위하여 대성당을 즐겨 찾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대성당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로 바로 카라바조의 유명한 그림을 찾아보기 위해서가 거의 전부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유행처럼 이탈리아 북부인 볼로냐 출신 귀족이자 교황청 서기관이었던 에르메테 카발레티(Ermete Cavalletti)가 높아진 자신의 위상을 널리 드러내고자 1603년 성 아우구스티노 대성당의 카발레티 채플을 개인적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막 포폴로 대성당의 세라시 채플이 완성되고 난 직후였다.
카발레티 역시 티베리오 세라시 채플 못지않은 자신의 채플을 소유하고 싶었다.
하여 카발레티 추기경은 선대의 고향이 모두 볼로냐였던 이유를 내세워 카라바조에게 제단화를 의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세라시 경당에서 있었던 작품 인수거부의 사태에 대해서 낱낱이 들어서 알고있던 터라 카발레티 추기경의 작품 요구서에는 상당히 세세하면서도 까다로운 요구조건들이 명시되어 있었다.
카발레티 추기경이 주문한 작품은 '로레토의 성모(Madonna di Loreto)' 였으나, 카라바조의 마음속에는 이미 '순례자들의 성모(Madonna of Pilgrims)'를 그리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개 제목의 차이 정도라 여길수도 있겠지만
이는 이미 시작단계에서부터 서로의 안목과 기대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카발레티 추기경의 주문은 쉽게 말해서 삐까뻔쩍하고 사방에서 성령이 팡팡 풍겨져 나오는 바티칸에나 걸려있을만한 감동적인 성화(聖畵)를 요구하는 것이고, 카라바조의 생각은 내 방식대로의 성모 마리아를 그리면 그 뿐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럼 결과는 어떠했었겠는가?
너무도 당연하게 카발레티 추기경과 교회측은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을 두고 인수를 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두고 한동안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적어도 카라바조 스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아니 이것은 레나 안토니에타(Lenna Antognetti)의 얼굴이 아니더냐? 카라바조 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 오냐오냐 했더니만 기어코 사고를 치는구나. 서둘러 근위대를 보내라. 당장 그놈을 꽁꽁 묶어서 끌고 오너라. 내 신성모독을 들어 놈을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나서 친히 장작더미에다 불을 지펴줄 것이다.'
카라바조가 완성해서 가져온 '로레토의 성모'를 보자마자 카발레티 추기경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고 치켜부릅뜬 눈에는 진한 살기마저 서려있었다.
교황청의 근위대인 스위스용병 부대에 느닷없이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있는 희대의 난봉꾼이자 천재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를 체포해서 죽지 않을만큼 혼쭐을 내준뒤 성 아우구스티노 대성당으로 압송해 오라는 교황청 서기관의 직접 명령서가 한밤중에 도착한 것이다.
기마병으로 구성된 스위스용병 추격대가 횃불을 앞세우고 말을 달려 천사의 다리를 건너 도심으로 향했다.
평소 카라바조와 친분이 있었으며 그의 천재적 소질을 아끼던 사제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껴 서둘러 카라바조에게 은밀하게 사람을 보냈다. 그 시각 카라바조는 피오리 광장 인근의 도박장에서 한참 도박에 빠져있다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언제 추격대가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촌각도 지체하지 마시고 서둘러 로마를 벗어나 멀리 잠적하시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사태가 여의치 않으니 자중하고 또 자중하셔야 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상황이 진전되면 지인들을 모아 구명운동을 벌이신다고 전해달라셨습니다. 주변 정리가 되시면 궁정처장님께 고해의 서신이라도 보내셨으면 하셨습니다.'
어려운 심부름을 온 마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채 연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품속에서 서신과 은자꾸러미를 꺼내 카라바조에게 건네주었다.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라고 전해주시게. 이제껏 내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이 어디 한 두번인가? 상황이 이쯤되었으니 내가 서둘러 로마를 떠났다가 어디에든 거처할 곳이 마련되는대로 다시 기별을 보내겠다 전해주시게.'
'강변나루 소인의 처소로 기별을 주시면 예전처럼 어떻게든 조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몸 조심 하십시요.'
'자네의 노고는 잊지 않겠네. 자리 잡는대로 곧 소식을 전해주겠네. 고맙다는 인사나 전해주시게.'
자리에서 일어 선 카라바조는 자신의 물품을 챙겨들고 외투를 걸치고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함께 도박판을 벌였던 지인들에게 하나하나씩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세상 일이라는게 참으로 요지경 속이 아닌가? 교회에 들어앉아 죽어라 기도만 올리기에도 바뻐죽겠다던 고귀하신분들께서 어떻게 레나의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신다는 말씀이신가?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씀이네만........ 교회의 그 양반들 성모님의 얼굴을 알기나 하겠는가? 거룩하신 성모님의 얼굴도 모르는 분들께서 어떻게 저잣거리 유녀(遊女)의 얼굴은 기억하고들 계시냔 말씀일세 그려. 이몸 카라바조가 술과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호색한이라는 것을 로마인이라면 적어도 모를리가 없을터인데 로마에서 제일 미인이라는 레나 안토니에타를 어떻게 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하루는 내가 레나의 초상화를 하나 그려주겠다고 제의하고는 그녀를 마침내 품게되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말일세....... 정말 예쁘더군. 보면 볼수록 정말로 예쁘더란 말일세.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성모 마리아도 이렇게 예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더란 말일세. 그래서 나는 아주 예쁜 성모를 그리기로 작정을 했다네. 그때 카발레티 추기경이 성모님을 그려달라고 요청하더군. 그래서 예쁜 성모를 그렸던 것이지. 그게 이유야. 그게 전부라고. 나는 그냥 예쁜 성모 마리아를 그렸을 뿐인데.......... 교회의 높은분들은 성모의 얼굴에서 로마 제일의 창녀인 레나 안토니에타를 단박에 찾아내더란 말일세. 기도하기에도 바쁜 그 분들이 언제 어떻게 레나 안토니에타를 만날 수가 있었지?'
카라바조가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육중한 나무문을 열자 사늘한 밤바람이 사정없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내가 레나의 얼굴을 그리는 동안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 시간이 좀 지나서 내가 그린 자신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레나는 자신이 격었던 지나간 일들을 조목조목 아주 소상하게 나에게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네. 로마에서 돈 좀 있다고 거드럼 피는자들과 권세 좀 누린다고 오만방자한 자들과 교회안에서 거들먹거리는 높은 양반들의 다양하고도 적나라한 취미생활이 술술술 흘러나오더란 말일세. 어느 정도 높이까지였냐고? 하하하하 하하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 없이 태어나신 분을 제외하고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 다 섞여있더란 말일세. 이미 죽어서 천당에 갔을것이라 여겨지는 수많은 양반들까지도 부지기수가 죄 다 시궁창에서 뒹굴렀더란 말씀이네. 그런 고귀한 사람들의 눈에는 성모님도 창녀의 얼굴로 보여지는것인가 보네. 이 카라바조의 눈에는 창녀도 성모님처럼 예뻐보이기만 하던데 말씀일세. 보다 소상한 이야기는 내가 훗날 이번 사태를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는대로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 해주겠네. 기다려 주시게. 혹여........ 추기경이나 교회의 높은 양반들이 나를 심하게 헐뜯거든, 지금 내가 한 말을 고스란히 전해주시고 다음에 돌아와서 보다 소상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고해 드리겠다고 전해주시게.'
말을 마친 카라바조는 서둘러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로마 교황청의 최고위 성직자들이 은밀하게 성 아우구스티노 대성당에 모였다.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교황청 궁정처장이 소집한 자리였다. 카발레티 추기경은 물론이고 로마의 주교급 이상 고위 성직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것이다. 긴급회의의 안건은 카라바조가 그린 (로레토의 성모)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내세웠지만, 거기에는 이 불한당 카라바조의 불경스런 처신을 어떻게 조치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음산하다.
- 고귀한 성스러움이나 경건함이 그림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 르네상스의 관례에 따르자면 성모의 의상인 청색과 붉은색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있다.
- 화려한 동방박사의 경배로도 부족할 판에 발도 씻지못한 남루한 노부부의 경배가 누추하기까지 하다.
- 도저히 성화(聖畵)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고위 성직자들간에 장시간에 걸쳐서 심도있는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속 사정은 사뭇 달랐다.
핵심은 이곳에 모여든 성직자들이 문제의 카라바조가 그린 (로레토의 성모)를 모는 순간 모두가 로마 제일의 창녀로 알려진 레나 안토니에타를 그림속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냈다는 점이었다. 서로간에 에둘러서 직접적으로 표현은 못하고들 있지만, 내심은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고 나면 이내 아기를 안고있는 성모 마리아의 포즈 조차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있는 창녀의 모습으로 보여질 정도였다.
놀랍게도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고위성직자들 대부분이 이미 레나 안토니에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또 한가지 더욱 놀라운 사실은........... 비록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서 레나의 모습이 보여지고는 있으나, 그 점만을 빼놓게된다면 더 없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속으로는 '내가 가졌으면' 하는 생각들을 떠올렸다는 사실이었다. (로레토의 성모)는 가히 카라바조의 최고 전성기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궁정처장이었던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의 경우는 피렌체의 로렌조 메디치 못지않을 정도로 회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도 (로레토의 성모)는 다시없을 위대한 작품으로 여겨졌으니 결과는 뻔할 수 밖에........
카발레티 추기경은 결국 이 그림을 인수하게되었고 현재의 모습처럼 카발레티 채플의 제단 중앙에 걸게 되었다. 알도브란디니 궁정처장의 배려로 카라바조는 수배에서 해제되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사태로 인하여 카라바조의 명성은 치솟을 수 있을만큼 치솟게 되었다. 덕분에 그와 견주었던 카라치의 명성은 반대로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뒷끝이 작열하면 카라바조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알도브란디니 궁정처장의 배려로 (로레토의 성모)는 카발레티 채플에 본래대로 전시되게 되었고, 수배에서 풀어주는 전제하에 더 이상 레나 안토니에타에 대한 이야기는 함구하기로 서약을 하였지만, 그 사태에 대한 가슴속에 응어리진 앙심은 모두 사그라진것이 아니었다.
하여 카라바조는 보란듯이 누군가의 주문에도 없는 새로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다.
새로운 그림의 주인공은 당연히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 끝판 작열왕이 작정하고 덤벼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누구를 모델로 그려졌을까? 당연히 (로레토의 성모)에 이어서 속편 겪인 (뱀을 짓밟는 성모)의 모델은 역시나 로마 제일의 창녀라 불리던 레나 안토니에타 였다.
카라바조가 아니었다면 차마 꿈에서도 시도해 보지 못할 도전(?), 치기(?), 또라이 기질(?), 막가파식(?) 이라고나 할까?
카라바조가 후속작 (뱀을 짓밟는 성모)를 공개하자 바티칸과 로마사회는 또 한번 격랑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그림은 남아서 현재 보르게세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카라바조............ 어떻게 표현해야만 좋단 말인가?
다시 본론이랄 수 있는 영화 <천사와 악마>로 돌아가 보자.
어찌되었든간에 첫번째 원소인 흙(earth)에 관한 살인으로 에브너 추기경은 포폴로 대성당에서 타살되었다.
이제는 일루미나티가 선전포고해 왔던바 대로 두번째 살인을 막기위하여 두번째 원소인 공기(air)와 바람(ponente)이 암시하는 장소를 찾아내 연속살인을 막아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랭던 교수는 치기예배당의 조각상들이 눈길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근거로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초입부분에서 이미 거론했던바 처럼 <천사와 악마>는 단순하게 재미있는 씨리즈 스릴러물로 생각하고 감상하면 상당히 재미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원작과는 상당히 동떨어지게 각색하였고, 연결 부분들을 지나칠 정도로 과감하게 삭제하여 빠른 진행으로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얻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스토리 전개가 불편할 정도로 매끄럽지 못하다. 전편으로 제작된 <다빈치 코드>에 비교하자면, 네 가지 원소(흙. 공기. 불. 물)의 등장에도 톨레미를 비롯한 고대 그리이스 과학에 대한 소개가 필요했음에도 곧바로 갈릴레이로 넘어가는가 하면, 그 다음 전개 과정의 단초를 조각상의 눈길이나 화살 혹은 손가락 방향만으로 이끌어나가는 설정은 전편에 비하자면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각색하는 부분에 있어서의 무리한 결과로 보여진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영화 보다 소설이 훨씬 긴박감 있고 감동이 있고 재미있다.
소설을 먼저 읽어보고 다음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각색과 편집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로마의 명소들을 단 번에 순례할 수 있는 매혹적인 퀄리티가 존재한다는 강한 유혹이 있지 않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언제나 (n.카잔차키스)로 불변이다. 현대 작가로는 두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바로 (톰 클랜시)와 (댄 브라운)이다. 그 이유는 생략하더라도 꼭 한 마디를 첨언한다면, 이들 작가의 작품 대부분이 영화화 되었는데......... 영화의 재미를 아무리 극대화 시킨다 하여도 결코 소설(원작)의 재미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느낌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또다시........ 우리 랭던 교수의 위대한 천재성은 다음 살인의 예고가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 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만다.
공기(air)로 상징되는 두 번째 살해 장소가 밝혀진 것이다.
어쩌겠는가?
요란한 경찰찰 싸이렌 소리를 앞세우고 로마 도심을 가로질러서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갈 수 밖에...........
--- 영화 (천사와 악마)를 따라가는 로마여행은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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