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사와 악마>는 제작 과정에서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원작의 줄거리를 너무 많이 손질을 한 흔적이 전편에 걸쳐 난무한다. 각색 과정에서 전체적 줄거리의 너무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거나 또는 전혀 엉뚱한 상황들이 첨부되었다. 부득이한 일이었다면 편집과정에서라도 어느 정도 만회를 해주었어야만 했는데....... 영화 전편의 장면들이 전개되는 과정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역시나 편집 부분의 아쉬움 때문이리라.
인류 문명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중에서 분명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마찰)은 커다란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사라진 중세 시대의 일루미나티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 까지는 그런대로 의미가 있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네 가지 원소(흙. 공기. 불. 물)를 좀 더 소상하게 설명하는 고대 그리이스 과학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상황에서 다짜고자 갈릴레이로 연결짓는 상황 전개는 상당히 억지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긴 영화적 전개가 시급한 마당에, 고대 그리이스의 과학과 철학이 로마인들에게는 별반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오히려 소아시아 지역의 아랍인들에게 전해져서 새롭게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중세 시대에 들어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다시 역수입되기 시작했으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기독교 교리와 마찰을 빚어내는 바람에 많은 불행한 사건들을 만들어 냈었다는 사실을 짧은 시간에 영상을 통해 설명해 나가기란 어쩌면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쉬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사태는 교황청의 궁무처장인 카를로 벤트레스카(이완 맥그리거 역)의 자작극으로 판명이 나지만, 왜 그가 이 몹쓸 일을 벌여야 했는지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매우 부족하다.
결론은 새로운 교황선출 선거에 직면해서 피선거 자격이 아직은 없는(추기경이 아니기에) 궁무처장이 비상상황을 통해 자신이 교황에 선출되기 위하여 벌인 치밀하고도 추악한 범죄로 각색되었다. 이를 위해서 궁무처장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일루미나티를 등장시켰으며, 이 모든것이 카톨릭의 권위를 높이고 과학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성스러운 과업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런 궁무처장과 관련된 모든것들이 지극히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중세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교회의 숭고한 교리와 과학의 발전은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다. 일루미나티는 지난 시대의 아픈 결과이자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지금도 일루미나티의 음모설은 끊임없이 이어져 나온다. 이 음모설을 교회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냈을 경우로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오히려 교회가 자기방어와 결속을 위하여 벌이는 자작극으로 보는 시선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루미나티가 등장하면 그 배경으로 프리메이슨이 따라 나오고.......... 영화 말미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궁무처장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과학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직접 제재에 나선것이며 모든것이 교회의 권위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함' 이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그게 바로 교회가 말하는 적그리스도야' 라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이 꼭 그렇게 복잡하고 힘들어야만 하는 것일까?
환갑이 지난 이 나이가 되었음에도 나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하겠다.
인류문명이 탄생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간생활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이전까지 신(神)의 존재는 인간생활의 모든것을 차지했다. 어느 누구도 천재지변이나 맹수들의 습격과 전쟁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때부터인가 인간이 모든 역경을 극복해나가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위치에 오르게되자 이때까지의 모든 가치관은 물론 신관(神觀)까지도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제 더이상 신은 인간존재의 모든것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극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신의 존재는 이제 하나의 명분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수많은 전쟁과 비극이 모두 '신의 뜻이자 거룩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신은 언제나 그래왔던것 처럼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신의 존재는 막연함을 넘어서 이제는 영원한 아득함으로 전락했고, 신의 이름으로 창조된 기념물만이 세상에 가득차고 넘쳐난다. 하지만 말이다......... 그 위대한 기념물들을 모두 다 합쳐도 결코 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당장 그 기념물이 신의 존재 차체 보다도 더 귀하게 모셔지고 대접받고 있는것은 아닐까?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종교와 신앙은 정말로 단순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일상적이다.
코카서스 지역의 진짜 동유럽을 몇 번 배낭여행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았고 감동했다.
새벽에 날이 밝아오면 그들은 일어나 밖으로 나서면서 자신과 가족들의 안녕을 확인하고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지극히 일상적이자 간단한 아주 짧은 감사의 시간이다. 양젖을 짜면서, 화덕에 불을 지피면서, 식탁에 둘러 앉아서도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이들의 기도는 우리가 두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읍쪼리는 기도와는 사뭇 다르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두 눈을 뜬 채로 몇마디 중얼거리는 것이 전부이다. 양떼를 몰고 산언덕을 오르다가도, 포도밭에서 수확을 하면서도, 방앗간에서 올리브유를 짜다가도 습관처럼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혼자만의 기도 시간을 갖는다. 산비탈 동네 어귀에 허물어진 교회가 하나 있었다.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은 누구나 잠시 들러서 나무 십자가 앞에 무릎을 끓고 잠시 기도를 드리고는 가던 길을 간다. 그 시간 또한 매우 짧은 시간이다. 기도시간 이라기 보다 차라리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오히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웃사람들을 만나면 시간이 한없이 길어진다. 차나 보드카도 나누고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은지 모를 지경이다. 오후가 지나 저녁이 되어도 달리 특별한 일이 전혀 없다.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잠시 중얼거릴 뿐이다.
우연히 교회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인 예배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거창한 설교 시간이 따로 없다. 성경 구절을 앞에서 읽어주고 개인적 기도시간과 예배 후 사제와 신도들이 여담시간을 갖는것이 전부였다. 허물어진 교회는 천장이 없다. 10년이 지나도록 보수공사 중이라 했다. 성금이 모이면 모인만큼만 공사를 하고 다시 모아질 때까지 기다린단다.
교회 같지 않은 교회, 전혀 기독교인 같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그곳에 모여 살아가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의 교회라 할까? 교회가 세속이고 세속이 곧 교회인 초대교회의 사람들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기독교적 신앙은 그네들 생활의 전부이며 어디에든 녹아있고 스며들어 있다. 신앙이나 믿음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잘 추스르고 가족을 챙기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신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신 삶의 모습이라고 수줍게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젊은이를 만났었다.
그들 생활에서는 '교회 안에서 직업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교회로 인해서 밥벌이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제 또한 일반인 비슷하게 일을하고 세속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에게 문득 떠오르는 생각..........'교회란 믿음의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십자가가 내걸린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내가 젊은 시절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귀절이 떠올랐다.
코카서스 사람들이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갖는 허물어진 건물에는 의자가 없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서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허물어진 건물에는 지붕이 없다. 하지만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선채로 드리는 그들의 기도는 결코 멈추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나에게 교회란.......... 그런것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아마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는 바로 그곳에 있다. 내가 속한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간직한 채 코카서스 산자락에 서있다.
다시 영화 <천사와 악마>를 따라 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 교수의 안내로 로마여행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앞서 거론했던 '왜 궁정처장이 저런 자작극을 꾸미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어느정도는 알고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물론 소설 속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말이다.
카를로 벤트레스카 궁무처장(이완 맥그리거 역)은 사실 이번에 사망한 교황 피오 16세의 숨겨진 아들이다. 하지만 사생아라고 할 수는 없겠다. 교황이 젊어서 신부 시절에 한 수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는 카톨릭 교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수녀는 직을 버리고 환속을 한 후에 시험관 아기라는 과학 기술의 혜택으로 결국 사랑하는 남자인 교황의 아들을 낳아 길렀다. 이슬람교도의 폭탄테러로 수녀가 사망하자 당시 주교의 신분이었던 교황은 찾아가서 어린 궁정처장의 후견인을 자처하게 된 것이다. 성직자로서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것으로 보여지게 되었지만 사실은 자신의 아들을 법적인 양자로 삼아 돌보게 된 것이다.
양아버지이자 후견인으로 알고있는 교황의 보살핌과 배려속에 성장한 벤트레스카는 교황을 너무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던 이유로 자신도 기꺼이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한다. 교회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 도우며 승승장구 하게된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 피오 16세에 즉위하자 벤트레스카를 궁정처장에 임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은 교황청의 커다란 그릇으로 성장하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한없이 감격스러웠겠으나 점점 노쇠하여 시간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되자 죽기 전에 아들에게만은 이제까지의 모든 진실을 알려주어야만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교황 개인사저에서 궁정처장만을 불러놓고 과거사의 진실을 고해하듯이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신부와 수녀 사이에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대목에서 사태의 전말을 파악한 벤트레스카는 충격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교황의 사저를 뛰쳐나간다.
다음날 아침, 궁무처장 벤트레스카는 예전과 변한것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일상업무에 평상시처럼 전념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황은 성숙한 아들이 자신을 모두 이해하고 용서했다고 안심한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벤트레스카는 궁무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롸 교황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거대한 음모에 착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벤트레스카의 마음속에 교황은 친부로서가 아니라 패륜을 저질러 죽어 마땅한 사탄이나 마귀와 같은 존재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을 뿐이었다.
추악한 교황을 살해하고, 이를 계기로 열리게 되는 콘클라베를 저지시켜 자신이 교황이 된 후에 그 절대적인 권위를 이용하여 교회를 비롯한 모든 종교와 신의 영역에까지 위협이 되는 과학을 말살시키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음모의 배후에 일루미나티를 다시 꺼내서 부활시켰던 것이다.
'일루미나티의 음모론'이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한동안 다시 부각되었었다.
유전자 공학의 발달로 생명의 신비에 접근해 가고, 영화 줄거리 처럼 '신의 입자' 라는 반물질의 발견으로 우주 창조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진다면......... 그렇게 되면 정말로 교회의 존재(신의 입지)나 가치가 모두 물거품이 되는것일까?
무신론자들은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 과학의 발전에 매달리는 과학자들의 절대다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종교인들이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교회와 마찰을 견디지 못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 회부가 두려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면서 혼자 이렇게 중얼 거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과학계와 마찰을 견디지 못해 서서히 고립의 기로에 서있는 기독교계의 원로는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헌금은 계속 들어온다. 헌금이 마르지 않는한 교회는 여전히 잘 돌아간다.'
과학의 발전이 로마카톨릭의 교리와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인식한 교회는 종교재판을 앞세워서 과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과학자들과 당대의 지식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서 모임을 결성해 끝까지 교회에 대항하기로 한다. 이들을 교회는 일루미나티라고 낙인찍고 색출해 내기 시작하였다. 1668년 교회는 일루미나티를 대표하는 네 명의 과학자들을 색출 납치하여 종교재판대에 세워서 이단으로 판결을 내리고 쇠를 달구어 가슴에 십자가의 낙인을 찍은 후에 사람들이 모여든 광장에서 공개처형 하였다. 과학에 대한 교회의 엄중한 경고였다.
그 과거의 사건에 대한 대답이자 보복이 벌어진 것이다.
부활한 일루미나티는 콘클라베에 참석하려는 차기 교황으로 유력한 네 명의 추기경을 납치했다. 고대의 과학발전의 시초를 의미하는 네 가지 원소(흙. 공기. 불. 물)를 상징하는 방식의 처형을 통해 납치한 추기경들을 차례로 살해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과학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사태의 해결을 위해 긴급 투입된 기호학자 랭던 교수(톰 행크스 역)는 고대의 과학과 일루미나티의 연계성을 찾다가...... 어찌되었건 갈릴레이를 끄집어 내게 되었고, 갈릴레이를 통하여 어찌되었건 라파엘로를 찾아내게 된다. 이를 근거로 판테온을 찾아갔지만, 뜬금없이 화가인 라파엘로가 지은 건축물을 찾다가 기어코 포폴로 대성당의 치기 예배당이 라파엘로가 설계한 유일한 건축물임을 확인하고는 허겁지겁 쫓아가게 된다.
하여간, 어찌되었건 치기 예배당을 찾기는 찾았는데 라파엘로의 역활은 거기에서 끝이나고....... 아무튼 치기 예베당을 실제로 인테리어하여 완성한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새롭게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별다른 부연 설명도 없다.
이제 모든 초점을 베르니니에 맞추어 나아가다가 예배당 바닥의 맨홀인 악마의 목구멍을 통하여 지하로 들어가보니....... 목구멍 가득 흙으로 채워진 에브너 추기경이 첫번째 살인으로 가슴에 흙의 낙인이 찍힌 채 시체로 나뒹굴고 있었다.
영화는 더 이상의 세세한 부연 설명이 없지만........ 명석하고도 현명한 우리 감상자들은 스스로 알아서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갈릴레이가 일루미나티 핵심적 회원 이었거나 리더였으며, 이 계보가 라파엘로를 거쳐서 베르니니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전제에 의문을 가져서는 스토리 전개가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것이다. 이제 이 영화의 중심은 느닷없이 등장한 베르니니에 의해서 꾸려져나가게 된다.
첫 번째 살인은 이미 완성되었다. 이젠 어떻게든 두 번째 살인을 앞서서 막아야만 한다.
랭던 교수는 베르니니가 만든 지구의 종말을 예언했던 하박국 천사의 조각상에서 천사의 시선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바로 바티칸 광장이며 그곳에서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질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그곳으로 향한다.
바티칸 광장(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은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기다리는 수많은 인파들이 운집하여 실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
하박국의 천사 동상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랭던과 바티칸 경찰이 찾아 온 곳이 바로 성 베드로 광장(바티칸 광장) 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또 딴지를 걸어볼 수 밖에 없다.
하박국 천사가 가리킨 방향이 성 베드로 광장이라는 딱뿌러지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박국 천사가 가리키는 장소에 가장 큰 건물은 광장이 아니라 성 베드로 성당(바티칸)이다. 어디까지나 광장은 성당의 부속건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전개를 하자면....... 조각상의 가리키는 방향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우선 찾아왔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좀 억지스럽지만 베르니니와 연관성을 조사했어야만 했다. 바티칸에서 베르니니를 찾는다............
이는 제작년 여름에 해운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을 지금 찾으려하는 처사와 별반 다를것이 없는 무모한 접근이다. 전혀 불가능한 상황을 억지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계의 흥행 귀재께서 말이다. 영화의 각색과 편집이 원작 소설에 비하자면 이렇게 무리한 부분들이 사실은 여러곳에 존재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누가 뭐라고 해도 브라만테의 작품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브라만테가 설계를 했고 건축을 시작했다. 유럽의 교회라는 것이 최소한 1백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만드러지는 것이 능사이며, 툭하면 2백 오십년 아니면 수백년에 걸쳐 완공된다. 베드로 대성당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브라만테가 설계하여 시작을 했고, 상갈로. 라파엘로. 베르니니 등등 많은 건축가들이 뒤를 이어 건축에 참가했다. 일부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좀 심하게 과장된 해석이라 하겠다. 메켈란젤로가 참여한 것은 맞는데....... 미켈란젤로는 완성된 대성당 본당 건축물 위에 돔(둥근 뾰족 지붕) 만을 담당했다. 대성당의 돔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맞다.
이는 피렌체의 두오모 경우와 닮았다. 피렌체 두오모는 캄비오가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했다. 그가 사망하자 지오토. 파사노 등등 여러 건축가들이 뒤를 이어 작업을 담당했다. 캄비오의 설계대로 본당은 완공되었으나 지붕의 돔은 그 어느 건축가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부르넬리스키가 둥근 지붕을 얹어서 완공시킨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브라만테이며 돔 만은 미켈란젤로 작품이고, 피렌체 두오모의 건축은 캄비오이며 돔 만은 부르넬리스키라 해야 옳다고 하겠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총책임자로 베르니니가 선택된것은 사실 외형적인 건축의 뼈대 때문이 아니다. 카톨릭 교계의 중심역활을 할 대성당을 짓다보니 상상했던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간이 만들어진 때문에 베르니니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의 실내 공간은 자그만치 사람이 이만오천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공간이다. 그 크고 높고 웅장한 공간이 그냥 텅 비어있는 창고와 같다면 어느 누가 부러 그곳을 찾아 신에게 감사하고 찬양을 올리겠는가? 장엄하면서도 기품이 넘쳐흐르고 성스러움이 사방에 가득 풍겨나는 세상 최고의 기독교적 기념물로 가득 채워야만 하는 사명이 남아있게된 것이다.
애초 브라만테가 설계를 시작할 당시부터 이 거대한 대성당을 짓고나면 어마어마한 내부공간을 어떻게 성스럽게 꾸미고 채워나갈것이냐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했다. 온 세상을 다 뒤져서 대성당의 내부를 채워줄 예술가들을 찾아냈지만, 채워도 채워도 도무지 다 채울 수 없을것 같아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지금 대성당 내부에 전시되고 있는 피에타(미켈란젤로). 성 베드로 청동상(아르놀포 캄비오) 만으로는 대성당 내부의 채플 하나이거나 기둥 하나쯤을 커버할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꺼내 든 히든카드가 바로 베르니니였다. 베르니니는 애초부터 대성당의 내부 인테리어를 위해서 동원된 사람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브라만테, 돔(쿠풀라)은 미켈란젤로, 대성당의 실내건축은 모두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모두 완공되고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주변 정리 겸 외부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별도로 광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 공사는 베르니니가 설계에서부터 맡아서 준공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곳에서 베르니니와 연관된 수많은 것들 중에서 공기와 연관된 단서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럴때 사람들은 주로 이렇게 외친다. ( 오 마이 갓!!!!!!! )
교황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축도를 내리는 강복의 발코니 역시 베르니니의 작품인데, 발코니의 부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내리는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혹 이 부조에 공기에 연관된 표현이 새겨져 있는것은 아닐까?
성당 내부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의 대리석 조각상들이 있다. 그 중에서 베르니니의 작품을 골라서 구분하는것만으로도 하루 가지고는 부족할 지경이다. 둘러 보면서 대충 떠올려 보자. 조각상의 제목이 무엇이고 소재가 어떤것이며 누가 만들었는지를 우선 파악해야만 기록이라도 하겠는데......... 몇 개의 조각상을 파악하실 수 있으십니까?
일단 눈에 확 들어오는 조각상으로 4명의 여신에게 둘러싸여 있는 교황의 대리석 조각이 매우 인상적이다. 젓을 먹이는 여신은 사랑의 상징하고, 그 위에 진리를 상징하는 여신이 보인다. 비둘기를 안고있는 여신은 정의를 상징하고, 신중함을 상징하는 여신이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네 명의 여신에게 둘러싸여 있는 교황이 바로 알렉산더 7세의 기념비로서 너무도 당연하게 베르니니의 작품이며, 아마도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긴 창을 들고 있는 아주 인상적인 조각상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롱기누스의 조각상이다. 롱기누스는 이 사건 이후로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멀고 먼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떠나 나머지 생을 기독교의 선교사업에 매진하여 후세에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조각상을 비롯하여 참으로 인상적인 성 베로니카 조각상이나, 성 안드레 조각상, 성 헬레나 조각상 등이 모두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공기'로 상징되는 베르니니의 조각상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서 베르니니를 데려와 직접 찾아내라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거기에다 베르니니 인생 최고의 역작이 대성당의 내부에 버젓이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오직 교황만이 올라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설교단인 발다키노가 대성당의 제단 앞에 우뚝 솟아 있다. 높이 29m나 되는 네 개의 철기둥 위에 네 명의 천사가 금방이라도 하늘로 들어올릴것만 같은 극적인 아름다움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겠다. 베르니니가 만든 이 발다키노를 제대로 살피려면 중장비를 동원해야만 할 것이니 당장 시간을 어찌한다?
여기 이 발다키노에는 바로크 시대를 이야기 할 때 한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두 천재의 대립과 마찰이 서려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는 분명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하지만 좀 더 소상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설계는 베르니니, 초기작업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중반작업과 마무리작업은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제자들....... 에 의해서 완공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베르니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로미니가 베르니니의 제자로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동료로서 서로 도와서 함께 작업하고 더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가르쳐주는 사이였다고 보는것이 무난한 시각이다. 다만, 이들이 함께 하는 시기에 베르니니는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미켈란젤로만을 제외하고나면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로 명망이 드높던 시절이었고, 보로미니의 경우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출내기 정도의 처지였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세상은 보로미니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베르니니만은 보로미니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의 천재라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로미니를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인 것이다. 대성당 내부건축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베르니니는 너무나 바빴다. 그런가하면 그의 주위에는 웬만한 화가나 조각가들이 차고 넘쳐났다. 베르니니의 제자들만 해도 다른곳에 가면 모두가 장인이 될 정도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다 보니 보로미니를 점점 제자들 다루듯 푸대접하게 되었으며, 작품의 완성에 있어서 보로미니의 의견을 묵살하기 일쑤고 지시와 복종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참다못한 보로미니는 발다키노 제작을 마지막으로 베르니니와 작별을 하고 독립하여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특징을 살려 건축에 매진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명성을 얻는다.
이때부터 바로크의 두 천재는 사사껀껀 서로 물고 뜯고 희대의 앙숙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아무래도 곧 나보나 광장에서 다시 시작하게 될것이다.)
이제 성당 밖으로 나서게되면, 대성당 앞에 모여든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양손을 뻗어 품안에 안아주는듯한 모습이자, 천국의 열쇠 모양을 본떳다고 이야기되는 베드로 대성당의 광장이 나타난다.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양팔을 상징하는 길고 둥근 회랑아래 284개의 거대한 원기둥이 들어서 있고, 그 위로 성경에 등장하는 140명의 성인조각상이 올려져 있다. 베르니니의 작품이라 하는데.......... 바쁘신 베르니니는 조각상 하나 당 망치질 한 번씩만 두둘겼고, 나머지 모든 작업은 베르니니의 제자들로 불리는 장인들의 솜씨로 완성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의 석공들이 사용하는 최신식 장비를 모두 갖다준다 해도 베르니니 생전에 절대로 광장에 전시된 조각상들만도 제작 불가능일껄?
베르니니에게 연탄 찍어내듯 조각상을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서도..........
이번에도 역시....... 영화는 모든 이의 우려와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차고 넘치는 베르니니의 작품들을 샅샅이 살펴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우왕좌왕 몰려다니는 인파속을 헤쳐다니다가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땅바닥의 맨홀에서 단서를 찾아내게 된다. 이젠 베르니니가 맨홀에다 새겨넣은 문양 중에서 공기와 바람을 상징하는 맨홀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하여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천사가 입으로 다섯 줄기의 바람을 내뿜고 있는 맨홀을 찾아냈는데, 그 맨홀에는 서쪽을 가리키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번째 살인에 예고되었던 것처럼 공기를 나타내는 단어가 가슴에 낙인으로 찍히고 페에 구멍이난 채 라마세 추기경의 시체가 군중들 틈에서 나타난다.
두 번째 살인도 완성된 것이다.
드러난 단서는 서쪽이라는 것 뿐이다. 거기에다 세 번째 살인은 불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알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제 랭던과 비토리아 베트라 박사는 또다시 서쪽에 있는 불을 상징하는 베르니니의 조각상을 찾아야 하는 수수께끼에 돌입해야만 한다.
바티칸 지하의 고문서 보관실에서 베르니니가 생전에 작업했던 작품들의 목록을 샅샅이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불의 천사가 쏜 화살에 맞아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되었다는 소재에서 만들어진 (성녀 테레사의 법열) 이라는 조각상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소재의 내용 때문에 베르니니를 넘어서 이제까지의 조각역사에서 가장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이다. 여기에서의 법열(法悅)은 '환희'로 번역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적인 오르가즘' 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Chiesa Santa Maria della Vittoria) 성당으로 가야만 한다. 비토리아 성당은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위치해 있다. 걸어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인근이라 하겠다.
이제 바티칸 지하 문서보관소(바티칸 은행)에서 (성녀 테레사의 법열) 이라는 단서를 찾아 낸 랭던 교수 일행은 바티칸과 로마 경찰의 호위와 안내를 받으며 로마 도심을 가로질러 달려 올 것이다.
그런데 나와 챠밍여사는 지금 테르미니역 인근의 숙소에서 막 나서고 있던 참이다. 영화속 장면에서는 지금 엄청나게 바쁘고 긴박감 있게 장면 전환을 해야겠지만.......... 우리는 지금 새로운 하루의 새 여행을 이제 막 다시 시작하려는 참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가진것은 시간과 여유와 배짱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 서둘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도 나선 발걸음을 어차피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으로 향하려고 오늘 하루의 계획을 잡았던 터였다. 당연히 우리는 그곳까지 터덜터덜 걸어서 갈 것이다. 거기에다가 또 비토리아 성당까지 가려면 중간에 들릴곳이 서너군데나 있지 않은가?
랭던 박사 일행이 찾아낸 단서인 (성녀 테레사의 법열)은 우리도 비토리아 성당에 도착해서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별도로 우리 방식의 로마 여행을 그곳까지 가면서 즐겨 보아야만 하지 않겠는가?
새벽 같이 숙소를 나와 테르미니 터미널 안에 있는 스낵 바에 들러서 진한 커피와 함께 갓 구워낸 따끈한 빵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대신한다. 역사를 나서서 500인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날이 완전히 밝았다. 우리처럼 서둘러 새하루의 여행일정을 소화하려 나서는 사람들과 출근에 바쁜 현지인들로 거리가 부산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테리미니역에서 시내버스터미널로 사용되고 있는 500인의 광장을 지나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통 거대한 황토빛의 성곽과도 비슷한 고대 로마의 유적으로 가득하다.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공중목욕탕 중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완벽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의 유적이다. 가장 큰 목욕탕이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도심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이 주변에 거주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세시대에 들어서 이 건축물은 천사와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카르투시아 수도원으로 이용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초대교회 시절 로마에서 선교에 앞장서다가 체포되어 이 자리에서 순교한 7명의 성인을 기리기 위한 새로운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다. 지지부진하던 사업은 차기 교황인 피우스 4세에 이르러 본격적인 교회의 개축이 시작되면서 새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였고 돔을 완성시킨 미켈란젤로 부오나로니티를 건축의 총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은 고대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공중목욕탕의 중앙홀(프리지다리움)의 벽면을 활용하여 설계를 하였고 건축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끝내 교회의 완공을 보지는 못했다. 후반부 마무리 작업은 그의 제자였던 자코모 델 두카가 완성했다.
미켈란젤로와 두카 이후에도 반 비텔리로 하여금 성당의 복원과 개축을 계속했던것처럼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은 좀 특이하면서도 유독스럽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로마 카톨릭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여행자들은 미켈란젤로의 솜씨를 찾아서 감상하기 위하여 안젤리 교회를 찾고 있지만, 그간의 엄청난 노력으로 지금의 교회는 하나의 박물관 같은 분위기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아주 풍부하리만치 훌륭한 많은 작품들이 소장되고 있는 미술관 같은 교회라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 설계 당시부터 반원형의 벽을 파사드로 인식하고 원형을 유지한 채 출입문을 겨우 내었었다. 하지만 반 비텔리는 양쪽으로 아치형태의 육중한 나무문을 설치했다. 개축과 복원을 반복하던 차원에서 교회 위원회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또 한번의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폴란드 출신의 현대 조각가인 이고르 미토라즈로 하여금 나무문을 모두 교체하도록 하여, 지금 현재 사용되는 현대적인 작품이 전통과 고전을 강조하는 카톨릭 교회의 문으로 버젓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었다. 이고르 미토라즈는 바로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의 콩코르디아 신전 앞에 있는 (추락한 이카루스 청동상)을 만든 조각가 이다. 또한 안젤리 성당의 내부에서 이고르 미토라즈의 상징과도 같은 붕대를 칭칭 감고있는 얼굴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천장의 둥근 중앙으로 미켈란젤로와 반 비텔리는 모두 터다란 등불을 매달아 빛을 밝혔었는데, 나르시수스 콰글리아타로 하여금 '빛과 시간'을 상징하는 유리 돔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거듭되는 복원과 개축만큼이나 안젤리 성당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교회 안에 끊임없이 과학이 가미되어 오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어디선가 은근하게 교회와 과학이 새로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사방에서 저절로 생겨난다.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에는 과학의 상징이랄 수 있는 '선 다이얼'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이 해시계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엄청난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해시계는 지구의 자전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설명된다. 이 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주장을 철회하기도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학설을 주장하다 신성모독과 이교도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그런데 버젓이 교회 안에, 그것도 교황의 명령에 의해서 선 다이얼이 만들어진 것이다.
타일로 이루어진 성당의 바닥에 설치된 약 45 미터의 청동 선으로 이루어진 해시계의 주위로는 별자리들이 새겨져 있다. 19세기까지 해시계는 상당한 정확도를 가지고 실제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영화를 따라 찾아가고자 하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에 소장되어 있는 베르니니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이 아니라면........ 지극히 주관적인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감히 이곳 산타 마니라 델리 안젤리 성당에 비교할 바가 못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그 어떤...... 모든면에서 있어서도 말이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건너편으로 수많은 차량이 오고가는 교차로는 공화국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이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로마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가 없는 크고 멋진 나이아드의 분수(Fountain of the Naiads)가 있다. 시원한 물줄기를 힘차게 뿜어올리는 나이아드의 분수야말로 로마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분수중에서도 가장 인상적 이라고 하겠다. 트레비 분수 같이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분수도 있겠지만, 분수의 진정한 멋은 바로 이렇게 속시원하게 분출되는 풍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느껴지는 장쾌함이야말로 본래의 분수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로마 건국에 관련이 있는 일곱개의 언덕중에 하나인 비미날언덕 정상에 해당하는 공화국 광장은 본래 디오클레티아누스 공중목욕탕의 영역으로 앞쪽에 만들어진 커다란 정원이었다. 로마수도교를 통하여 풍부하게 물을 끌어들여 만든 목욕탕이었던만큼 그 상징을 담아 같은 자리에 본래부터 분수대가 있었다고 전한다. 조각상 같은 치장이 없는 단순한 분수대가 실제로 만들어져 있었다. 로마제국의 말기에 북방의 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하였을당시 도시로 공급되는 물을 차단하기 위하여 수도교를 파괴함으로써 분수는 물론 목욕탕도 사용불가가 되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파괴되어 석재들이 다른 장소의 건축자재로 도용되면서 원형을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파괴되었다.
근대에 들어서서 새로이 로마 도심과 도로가 재정비되면서 지금의 형태로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통일왕국을 이룩하게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공화국 광장을 만들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황제 윌리아 2세가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방문하게되자 교황 피우스 9세는 과거에 이곳이 매우 소중한 유산으로서, 고대로마인들이 물을 잘 다스리고 사용하여 거대한 목욕탕과 분수대를 만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잘 드러나게끔 이곳에 상징적인 분수를 만들기로 하고 알렉산드로 게리에리(Alessandro Guerrieri)로 하여금 현재 모습의 분수대를 만들게 하였다. 그때의 분수는 도로를 건너 산타 마리아 안젤리 성당의 앞쪽에 건설되었다. 아울러 지금 보여지는 모습의 조각상들이 아닌 네 귀퉁이에 물을 내뿜는 네 마리의 사자상만이 놓여있는 비교적 단촐한 형태의 분수였다.
불과 30여년이 지나 로마는 급속도로 팽창 발전하기 시작했고 다시 도로를 넓혀 새로운 교통망 확충이 절대적으로 피리요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시 당국은 알렉산드로 게리에리의 분수를 약 80m 옮겨서 지금의 자리에 좀 더 확장하여 새롭게 만들게 되었다. 기본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전체 면적을 확장시켰다. 아울러 게리에리가 만드러 설치한 네 마리의 사자상을 철거하여 다른 장소로 옮겼다.
통일된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격조있는 분수를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01년 시칠리아 출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마리오 루텔리(Mario Rutelli)에게 이 공사를 맡기게 된 것이다. 루텔리의 선조는 일찌기 영국에서 건너 온 이민자 가문으로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정착하였으며 가문 자체가 명망있는 건축가 집안이었다.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크며 아름답기로 정평이난 팔레르모의 마시모 오페라하우스가 그의 가문 식구들이 협업하여 만든 건축물이다. 마리오 루텔리도 이 건축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오페라 하우스 정면 계단위에 양쪽으로 놓여있는 두 마리의 님프가 올라타고 있는 사자 조각상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에서 강대국들의 극렬한 대립과 각나라마다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렬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전쟁에서 전승국과 패전국으로 나뉘어 마찰이 생겨나고 그 사이에서 약소국가들의 생존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시대에 이탈리아의 지배세력들은 로마의 새로운 상징물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로마제국이 가졌던 막강한 권력과 르네상스가 이룩한 것과 버금가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새롭게 소장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을 맡게된것이 마리오 루텔리였다.
로마의 공화국 광장 한복판에 나이아드의 분수(Fontana delle Naiadi)가 완공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자 파시스트 정권의 수괴였던 베니토 뭇솔리니는 '영원한 젊음의 표상이자 예술에 대한 로마의 첫 번째 자부심' 이라고 찬사를 서슴치 않았다.
분수의 한가운데에는 사람과 돌고래와 문어가 함께 얽혀 마치 레스링 경기라도 벌이고 있는듯한 격하고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도 격정적이고 거친 모습이라 하여 시민들은 새로운 조각상을 거듭 요구하였다. 하여 루텔리는 어깃장을 부러 놓으려 했는지 이번엔 돌고래를 얌전히 가슴에 안고 쓰다듬는 모습을 아주 작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항의가 빗발쳤다. 그러자 둘 중 하나를 고르라 선언하고 연장을 내려 놓았다. 결국 레스링 포즈의 동상이 다시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분수의 제목인 나이아드(Naiadi)는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요정(님프)이다.
하여 루텔리는 처음 알렉산드로 게리에리가 네 개의 사자조각상을 설치했던 자리를 님프들로 대체하였는데, 강의 님프는 물뱀과 함께 등장하고, 바다의 님프는 바닷속에서 뛰쳐나오는 말과 함께 한다. 호수의 님프는 백조와 함께하고, 땅속 지하에 흐르는 물의 님프는 파충류와 함께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이아드 분수의 가장 큰 장점이자 고마움은 커다란 교차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지만 분수대 주위로 인도를 설치하여 놓아서 접근이 쉽고 어디를 얼마든지 마음껏 감살할 수 있다는 매력일 것이다. 거기에다 힘찬 물줄기가 계속 뿜어져 나온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분수다운 분수를.......... 제대로 분수를 느껴보기에 최고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완전 공짜.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팔레르모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고, 카타니아에서도 마리오 루텔리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마시모 오페라하우스의 사자상을 보면서 루텔리라는 예술가에 대해서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도 되었었다. 그런데 로마에 들어와 나이아드 분수를 처음 보면서 떠올랐던 첫 느낌은 '어쭈? 베르니니가 이젠 청동조각상까지?' 라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베르니니는 주로 새하얀 고급 품질의 대리석만을 선호한다. 또 조각품을 가만히 살펴보면 베르니니와 루텔리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장 먼저 이 분수대가 뿜어내는 수준높은 완성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로 베르니니에 견주어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루텔리의 작품이 나이아드 분수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럴 정도이니 굳이 뭇솔리니의 찬사를 빌려오지 않아도 될만큼 로마인들의 받은 감동은 대단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같이 식전 댓바람부터가 아니라 허구헌날 빨가벗고 있는 요염한 요부 느낌의 조각상을 두고 보수가 주류를 이루는 영원한 도시 로마사람들이 끊임없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만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살펴 볼 수록 어디 요염이 그냥 고만고만한 보통의 요염인가? 그것도 지극히 성스러워도 모자랄 역사적인 대형교회를 빤히 건너다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마에서 좀 논다는 남자치고 여기 님프상을 보면서 눈군가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가서 좀 놀았다고 떠들 처지도 못되었던 것이다. 로마 화류계를 당시에 평정하고 있는 유명한 쌍둥이 매춘부가 있었는데, 그녀들의 모습과 몸매와 포즈가 영락없는 나이아드 님프를 빼다박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시의회가 이 사실을 루텔리에게 확인코자 하였는데........ 루텔리는 부정도 시인도 하지않고 묵묵무답이었다. 혹시 루텔리가 카라바조를 따라하고 싶었던것은 아닐까? 예술가들에게 이런일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보수주의적인 로마시민들은 새로운 조각상을 만들어 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다. 어찌나 거센 요구였는지 시의회로서도 더는 묵과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여 의회의 대표가 루텔리를 설득하려고 찾아가니......... 그는 이미 시칠리아로 달아나듯 떠난 후였다. '더 이상 재작업은 할 수 없다'는 나름 작가만의 방식으로 공개 답변을 선언한 것이다.
시의회는 공청회를 열었다. 철거와 보존 중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절대적으로 철거의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루텔리가 떠난 마당에 철거 이후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세상의 그 누구를 데려온다 하여도, 설사 미켈란젤로나 베르니니가 환생하여 돌아온다고 하여도 이미 완성되어 설치된 나이아드 분수 이상의 수준높은 작품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공청회는 아이아드 분수의 보존과 지속적 관리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훌륭한 작품을 가지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의 수치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공화국 광장의 아이아드 분수는 그렇게 하여 지금 우리 앞에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로마 공화국 광장에서 북쪽으로 한 블럭을 가면 성 베르나르도 광장이 나오고, 랭던 박사와 (천사와 악마) 제작진이 앞서 달려간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이 바로 그곳에 있다. 랭던 박사(톰 행크스 역)가 베르니니의 조각품에서 단서를 찾고 있으니 (성녀 테레사의 법열)에서 이번 살인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찾을 시간을 좀 주기로하고 천천히 도심 투어를 즐기고 있는데........ 아뿔싸!!!
기념품점 쇼 윈도우에 진열된 장난감 인형이 코트다쥐르행 버스(COTE D'AZUR EXPRESS)가 아닌가?
하이고야....... 반갑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아니 이보슈? 어덯게 오셨슈? 여긴 프랑스가 아니유? 로마유?
프랑스 남동부 지중해 해안을 코트다쥐르 라고 부른다. 나의 다음 여행 버킷 리스트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로망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로마에서 코트다쥐르 라니? 헐! 이대로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다.
프랑스 여행을 떠나면 우선 파리에서 최소한 일주일(5일 정도는 완전 파리지앵으로)을 머물면서 파리에 취해보고, 하루쯤은 몽생미쉘을을 기차여행으로 다녀오고 싶다. 파리에 익숙해 진다 싶으면 마르세이유로 떠나면서 아비뇽을 들려보고 싶고, 마리에시유에서부터는 프랑스의 지중해를 트래킹으로 걸어다니면서 니스도 칸도 들러보고 제노바까지 걸어서 돌아볼 예정이다. 세 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부러 빼놓았던 밀라노를 프랑스와 연계해 들러보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생각이다. 언제? 일단 코로나가 끝나봐야 알겠고, 챠밍여사의 로망 1번인 프라하와 부다페스트가 있는 동유럽 투어를 아무래도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고민중이다.
그런데 이 코트다쥐르 만원버스의 풍경이 어찌된 영문인지 영 낯설계 느껴지지가 않는다. 불현듯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익살스런 기념품 인형이 생각이 나서 기억을 더듬어 기어코 찾아내 보았다. 느낌이 참 비슷하다. 어떤 그리움이 마구 피어오른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
사진의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교회가 성녀 수잔나 교회(Chiesa di Santa Susanna alle Terme di Diocleziano) 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AD. 284~303년까지 재위)가 지은 로마 제일의 공중목욕탕이 테르미니역 광장에서 시작하여 공화국 광장의 나이아드 분수를 지나 한참이나 떨어진 여기 베르나로도 광장에 이르렀을 정도로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위 목욕탕이었다는 사실에 절고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어질 뿐이다. 성녀 수잔나 교회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을 북쪽 벽을 이용해 만들어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일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아름다운 처녀인 수잔나에게 황제의 아들이 콩깍지가 씌워 열렬히 구애를 하게 되었다. 수잔나는 이미 정혼자가 있는 몸이라고 거부하였지만 황제의 아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결국 구애에 실패하게되자, 그녀와 그녀의 집안이 로마의 정정인 기독교도라 고발하여 결국 순교하게 되었다. 후에 성녀로 추앙받게 되었지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일할 수가 없다. 하여 학계에서는 성녀 수잔나의 이야기를 후대의 기독교 문학에서 파생된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수잔나가 카톨릭에 의해서 성녀로 봉헌된 이후에, 그녀가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자리에 씨스터시안 수녀기도원이 생겼다가 8세기 말엽 교황 레오 3세에 의해서 교회로 새롭게 건설되었으며, 그후 여러차례 증축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녀 수잔나의 교회 우측으로 파사드의 외관이 많이 비슷한 교회가 나란히 조금 떨어져 위치해 있는데, 이 교회가 바로 우리가 지금 찾아가려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Santa Maria della Vittoria) 성당이다.
비토리아 성당의 바로 코앞에 옆으로 돌아앉아있는 흰대리석으로 만든 신전과 교회의 혼합된 형태인듯한 건물이 또한 이색적인 포즈로 자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여기를 모세의 분수(Fontana del Mose)라고 부른다.
내친김에 우측으로 한블럭 건너의 안쪽으로 팔각형의 둥근 웅장한 건물(흡사 피렌체 두오모의 세례당 비슷한)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고대로마의 상당히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의 팔각형 홀(Octagonal Hall Baths Diocleziano) 이다. 후대에 천문대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현대에 들어서는 체조학교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고대 그리이스와 고대로마의 조각상들을 전시하는 박물관 이자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아주 유서 깊은 장소이다.
고대로마시대부터 이곳에는 거대한 지하수로가 존재했었다.
현재의 테르미니역 인근은 고대에도 가장 많은 로마인들이 실제로 상주하면서 생활했던 대단히 중요한 터전이었던 때문이다. 하여 이들을 위해 로마 역사상 가장 크고 거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공중목욕탕이 이곳에 들어섰던 것이다. 이 지역은 로마 건국에 등장하는 7개의 시성한 언덕중에서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에 걸쳐있는 장소라 하겠다.
팔리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인 신성하고 권력중심지였다면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은 시민들의 장소이자 생활터전이었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엔 많은 물이 필요했다.
2세기 경에 건설된 11개의 로마 수도교 중에서 가장 긴 아쿠아 마르키아가 이 지역으로 풍부한 수량의 물을 공급했다. 콜로세움이 들어서기 전 네로의 궁전에 설치된 수많은 분수와 커다란 호수의 물도 모두 여기의 아무라 마르키아가 제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콜로세움 건설 후 검투경기가 질리게 되자 로마의 통치자들은 콜로세움 경기장의 모든 출입문과 틈새를 틀어막고 물을 끌어들여 거대한 수상무대를 만든 후에 모의 해상전투를 연출하기까지에 이른다. 나무마키아(Naumachia)라 불린 모의 해상전투 연극을 실제로 콜로세움에서 벌였다는 기록이 여러차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실로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콜로세움을 바다처럼 보이도록 물로 채우자면........ 헐....
나우마키아에 사용된 물도 모두 아쿠아 마르키아를 통해 공급되었다니........ 2천년 전의 수도시설의 한계는 얼마쯤이었을까? 그러한 수도교가 11개나 되어서 끊임없이 말고 풍부한 물을 로마시에 공급했다니.......... 또 헐........
로마가 급격하게 쇠퇴하자 알프스 너머의 야만인으로 비하되었던 고트족이 쳐들어 왔다.
로마의 최후 방어선인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에워싼 고트족은 로마로 물을 공급하는 11개의 수도교를 모두 파괴해 버렸다. 이제 로마인들은 모두 먼 테베강에서 직접 강물을 길어다 사용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거기에다 고트족은 툭하면 강의 상류에다가 독극물을 풀었다는 소문을 흘렸다. AD. 474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서로마는 고트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후로 로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일부 쉽게 복원할 수 있는 수도교를 골라 부분 수리를 함으로써 어느정도 물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할 수가 있었다. 이는 1천 년이 지난 15세기까지 비슷한 상황으로 계속되어 왔다.
1585년 새롭게 교황에 즉위한 식스투스 5세는 부패와 파행으로 실추될대로 실추된 교회(교황청)의 명예를 회복하고 교황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또는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하여 로마카톨릭의 쇄신운동을 벌인다. 많은 지식인(학자. 예술가)을 동원하여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을 모색하며, 예수회를 통하여 깊은 속내로는 종교개혁 주동자들을 처벌 내지는 암살하고 비방 모략하며 그 세력을 와해시키기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온화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로마시내의 재건작업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모세의 분수는 바로 그 시기에 로마 시민들을 다독이고 로마카톨릭이 새롭게 변모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위해서 다분히 사전에 충분히 연출된 의도하에서 탄생하게 되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교황청의 사전 의도된 전시행정의 표본이라 하겠다. 그런만큼 꽤나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별 실속은 찾아볼 수 없는 겉치레에만 힘쓴 화려한 요식행위였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같은 내용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은 당시 로마 전역에 파다하게 퍼졌던 소문의 예에서도 충분히 근거해 볼 수 있다.
소문의 내용은 모세 분수의 핵심이랄 수 있는 파사드 중심의 모세 조각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모세 조각상을 제작한 사람이 아직 자살하지 않았단 말이야?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구만? 그걸 모세상이라고 내놓고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단 말이야? 요새 귀신은 그런 인간을 내버려두고 뭘 잡아먹고 사는지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야?' 라는 소문이 실제로 파다했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조각상을 '말도 안되는 모세상'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에도 학자나 현지주민들은 실제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말도 안되는 모세' '어처구니 없는 모세' 라고 말이다.
이 모세 조각상을 만든 사람은 이탈리아 조각가 브레시아노 이다. 이 사건때문에 그렇게 다른 이름을 지어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본명은 프로스페로 안티치(Prospero Antichi)가 맞다. 성 베드로 광장 오벨리스크 주위의 네 마리 사자상을 만든 사람이다. 어쩌다 그가 이렇게 모든 로마인들이 분노하는 만인의 공적이 되었을까? 어찌 생각해보자면 안티치로서는 상당히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어찌하여 주유를 내어놓았으면 됐지 더하여 제갈공명을 또 내놓았더란 말입니까?' 라고 탄식하며 생을 마쳐야했던 삼국지에 쓰여있는 주유의 마지막 외침을 떠올려보면 안티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된다.
프로스페로 안티치는 정말로 억울하다. 그가 무엇을 그토록 잘못했다는 말인가?
감히 그런 어마어마한 상대와 비교가 될 줄을 꿈엔들 안티치가 알았겠는가?
모세의 분수(Fontana del Mose)는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5년에 이탈리아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의 설계로부터 시작되었다. 1588년 조각가 프로스페로 안티치가 모세 조각상을 건물 전면의 중앙에 설치하였다. 하지만 로마 전역에서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원성과 심한 반발이 뒤따랐다. 이유는 미켈란젤로 때문이었다. 르네상스의 거장이자 르네상스의 진정한 완성자이자 최고봉이라 불렸던 미켈란젤로의 3대 거작으로 인정받고있는 (모세상)이 빈콜리 성당에 안치된것이 1515년이었던 이유로, 당시 모든 로마인들의 가슴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었던것이 이유라면 이유의 전부였던 것이다. '위대한 모세라면 더도 덜도 말고 적어도 미켈란젤로의 모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시기를 잘 못 만났다는 이유로 안티치는 그야말로 파렴치한 내지는 무작격자 조각가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십 년전에 사망한 미켈란젤로를 모셔다 새로 만들수도 없는 노릇이고........
뿔이 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정말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대작이다. 뿔은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를 미켈란젤로가 그대로 받아들였던 때문이지만, 마침내 완성된 모세 조각상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미켈란젤로가 조각상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이쯤됐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라고 말을 건넸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마주 대하고 있다보면 정말로 그럴만도 했겠다 싶다.
결국 시의회는 거센 여론의 반목에 굴복해 이를 보완하기로 결정했다.
하여 모세상의 왼편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모세의 동생인 아론의 대리석 부조상을 조반니 바티스타 델라 포르타에게 만들게 하였고, 오른편에는 히브리인들을 요당강으로 이끄는 여호수아 대리석 부조상을 만들어 추가로 설치하였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모세의 분수'는 실패작이다.
모세의 분수를 만들게 된 배경은 코트족의 로마 침공으로 파괴된 로마의 11개 수도교 중에서 가장 길고도 가장 중요한 아쿠아 마르키아의 복원을 기념하기 위해서 였다. 현재까지 활용되면서 트레비 분수와 나보나 광장의 분수와 스페인 광장의 난파선 분수에 수원을 공급하고 있는 또 다른 수도교인 아쿠아 베르긴(Aqua Vergine) 만으로는 많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벌여 마르키아 수도교를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가(교황) 종교개혁으로 실추된 명예와 권위를 되찾고자 로마와 시민들에게 더없이 크고 소중한 선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식스투스 5세 교황의 속셈은 제대로 먹혀들지도 작동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부서져 사라진 수로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책임자였던 건축가 마테오 바르톨라니(Matteo Bartolani)가 그만 경사도의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로마에 흘러들어오게 된 수량은 고대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다. 지금 모세의 분수에 설치된 네 마리의 사자 입에서 나오는 물줄기로 새로 복원된 수도교의 수량을 추측하면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어찌되었거나 랭던교수를 포함한 스위스 근위대와 로마 경찰은 시계가 밤 열시를 가리킬 즈음에 마침내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Santa Maria della Vittoria) 성당에 도착했다.
하지만 교회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촌각을 지체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 성스러운 교회의 문을 강제로 부수듯 열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안타깝게 간발의 차이로 범인이 살인예고를 공표한 시간을 넘기도 말았다. 성당 내부 기둥의 꼭대기에 쇠사슬에 의하여 허공에 매달린채 가슴에 불(火)을 상징하는 낙인이 찍힌채로 납치된 세번째 귀데라 추기경의 발아래로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이미 거대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랭던과 일행은 소화기를 이용해 화재를 진압하고 사다리를 걸쳐서 화염에 휩싸인 추기경을 구출하려고 시도를 하지만.......
세번째 단서를 찾아내 비토리아 성당까지 찾아오는 시간이 범인의 예상 시간보다 빨랐음인가? 세번째 추기경에게 화형을 저지르고 아직 미처 현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에서 살인을 막고 범인을 체포하려는 무리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단독 범인과 근위대와 경찰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뛰어난 살인능력을 갖춘 범인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 온 근위대와 경찰을 완벽하게 진압하고 제거한다. 랭던박사(톰 행크스 역)만이 주인공답게 지하로 통하는 맨홀속으로 도망쳐 유일하게 살아남게된다. 세 번째 살인을 완성한 범인은 이번에도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간다.
뒤늦게 추가 수사진이 성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지하 맨홀에서 빠져나온 랭던박사는 다음 살인을 막기 위해서 또 새로운 단서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유일한 단서는 역시 베르니니가 만든 (성녀 테레사의 법열) 조각상이다.
천사의 손에 들려진 불화살이 테레사 성녀의 몸을 사정없이 관통하고 지나가는 방향을 살펴보니........ 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이젠 비토리아 교회에서 바라보아 서쪽에 있는 교회 중에서 물(水)을 상징하는 베르니니의 조각상이 있는 장소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 지도를 펴 놓고 서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베르니니가 세운 교회는 없다. 베르니니가 만든 물을 상징하는 조각상을 가진 교회도 없다. 다만....... 서쪽 방향에 물을 상징하는 베르니니의 대표작품은 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광장이다. 나보나 광장의 한복판에 웅장한 자태로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4대강 분수야말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와 비토리아 성당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과 더불어 잔 로렌조 베르니니의 3대 대표작이 아니겠는가?
네 번째 예고된 살인의 단서가 가리키는 곳은 바로 나보나 광장이었다.
살인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려는 랭던교수와 일행은 혼잡한 로마 도심의 불빛속을 가로질러 나보나 광장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찾아가는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로마에서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으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지순례가 목적이라면 로마에서 바티칸 대성당 말고도 찾아갈 곳이 너무도 많이 산재해 있다.
역사와 문화재 탐구가 주된 관심사라면 굳이 비토리아 대성당까지 끼워넣을 이유가 있을까?
어느 방향이나 어느 골목길을 향하더라고 발길에 돌부리가 걷어채이듯 사방에 널린듯 흔하디 흔한것이 로마의 역사유적과 문화재와 교회들이다. 여러 관광안내 포스터나 홍보 책자의 전면에 당당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않고 이어지는 곳이 바로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탄생하면서부터 수많은 관심과 화제를 끊임없이 불러모으고 있는 지안초 베르니니의 뛰어난 걸작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베르니니의 대표작품 중에 하나인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빼놓고 나면 비토리아 성당이 여타의 다른 성당들에 비해서 특별하게 내세울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성녀 테레사의 법열(The Ecstasy of St. Teresa) 조각상을 가만히 생각하다보면 그것을 만든 조각각 베르니니가 먼저 떠오르는것이 아니라........... 그 조각상을 처음 우리에게 소개하고자 했던 학자나 미술가나 여행사나 가이드나 안내 책자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으려나 하는 안타까움과 위로의 마음이 허튼 웃음소리와 함께 가슴 가득 솟구쳐 오른다. 아마도 그분들이 카톨릭의 눈치를 엄청 살폈거나, 아니면 카톨릭이 이래이래 먼저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을 소도 있겠구나 싶어지기까지 한다. 이는 사실 모두 베르니니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니었을까? 사실 이 조각상에 대해서 제작자인 베르니니 자신도 별로 표현한것이 없다. 베르니니는 그가 알고 생각하고 느낀것을 위대한 장인의 솜씨로 작품 하나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런데 그만........ 종교계(카톨릭)와 미술계를 뛰어넘어 온갖 분야의 학자들과 온세상사람들의 심사를 벌컥 뒤집어놓고 말았던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역사에 미술사에 큰 관심을 가졌던 나는 이스탄불(터키)과 이탈리아 여행을 가장 많이 꿈꾸었었고, 그 열망중에는 당연히 베르니니가 가꾸고 치장해 놓은 위대한 로마 도심을 마껏 돌아다니고 싶었다. 베르니니는 오로지 로마라는 도시를 황홀하리만치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하게끔 예술의 신이 로마에 보내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고대 이래의 로마에서 역사를 모두 빼버리고나면 사방으로 숲과 정원에 베르니니의 조각상들만이 사방에 남게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처음 로마를 방문했을 때, 로마의 고대 유적들과 역사에 취해서 정신없이 싸돌아다니기에 바빠서 그만 베르니니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던것을 여행을 마치고나서 몹시 후회한 적도 있었다. 다음 방문에서 제대로 베르니니를 나름 충분하리만치 느껴볼 수 있었는데......... 그때에서야 겨우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보게되었는데........ 번역된 안내책자와 조각상을 번갈아 살펴보고나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법열'이라니.......... 내가 국어공부를 어느정도 제대로 한 사람(일찍부터 글을 쓰고 싶었기에) 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어서야 '법열' 이라는 단어를 처음 대했던 것이다.
나는 '법열' 이라는 단어를 그때까지도 알지도, 들어보지도, 그 뜻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현지 안내표시에 적혀있는 (Ecstasy)가 무슨 의미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상에........ 한국말 보다 외국어의 설명이 쉽게 이해되고 가슴에 와 닿게되다니............ '세상에 법열이 뭐야 법열이?....... 쉽게 표현하면 될것을 쓰잘데 없이..........'
'법열(法悅)' 이란?
사전을 찾아보면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 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베르니니의 위대한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전에 적혀있는 법열의 의미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이토록 휘귀한 표현을 찾아내 갖다 붙였다는 말인가? 새삼 한 언어학자가 말하길....... '한국어가 어렵기로 치자면 세상에서 두번째가라면 억울할 정도의 언어' 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친김에 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테레사의 법열)에 대한 외국의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한마디로 단박에 이해가 쉽게 되는것이 아닌가? 씸플하게........ 성적인(sexuality), 혹은 영성적인(spirtuality) 의미의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엑스터시에 대한 표현을 심지어 영어권에서는 오르가슴(Orgasm) 이라는 표현으로 이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이 종교적으로는 불경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럼 교회에서 치웠어야지 않을까? 내 방에나 가져나 놓게 말이다. (성녀 테레사의 법열)은 아무리 뜯어 보아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를 넘어서는 차원으로까지 불경 스럽다. 그러니 법열(法悅) 이란 단어를 찾아다 붙이느라고 얼마나 쌩고생들을 하셨을까?
'표현을 어렵게 바꾸고 나니 어떻게 불경이 좀 덜해지고 정화가 되셨습니까?'
'개뿔!!! 법열은 무슨 얼어죽을 법열? '성녀의 환희' '성녀의 올가슴' '성녀의 쾌락' 아님 '열반의 성녀' 하면 안되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은 주제단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채플이 놓여있는 세 개의 예배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왼쪽에 놓인 코나로 채플이 가히 성당의 핵심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곳에 베르니니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 조각상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코나로 채플은 한마디로 말해서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공간(제단)로 여겨질 정도이다. 더 보탠다면 비토리아 성당 존재 자체가 베르니니의 대표조각상을 전시 보관하는 갤러리로 느껴질 정도니까 말이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갖춘 코나로 가문은 명망있는 여러명의 추기경도 배출하였다. 그 가문출신으로 추기경에 오른 페데리코(프레드릭) 추기경은 막대한 부를 동원해 로마에다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예배당(채플)을 가지고 싶었으며, 장차 그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묘지로 쓸 생각이었다. 이 또한 반종교개혁의 흐름으로 인해 생겨난 신풍속도이기도 했다. 페데리코 추기경은 가문의 명망에 걸맞는 최고의 예배당을 원했다. 하여 당시 최고로 명망있는 위대한 조각가이자 예술가인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새로운 채플의 건설을 의뢰하였다. 그 결과로 탄생하게 된것이 바로 (성녀 테레사의 법열) 조각이다.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는 아주 유별스러울 정도로 신비주의적 체험과 환시를 많이 경험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우리 주위에서도 기독교인이 무의식중에 여러개의 언어로 기도를 하였다는 신비한 체험(방언)과 환시를 경험하신 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가 있다.
어느날 테레사 수녀가 기도를 하던중에 불로만든 창을 든 천사가 나타나 사정없이 그녀의 가슴을 마구찌르는 사건으로 인하여 상상할 수 없는 쾌락과 고통이 동반된 영적 육체적 체험을 하게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테레사 수녀의 심장에 성흔이 박히고 만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이체험을 자신의 자서전에 상세하게 기술하였고, 이는 엄청난 파문과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수녀의 성(性)적인 엑스타시 체험'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야말로 천차만별 제각각이었다. 카톨릭으로서도 당황스럽고 난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문학가나 미술가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구미가 당기는 획기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교회(카톨릭)는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이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기쁜 표현' 이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변명조의 장구한 해설을 이어붙여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세속적인 시각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야리꾸리한 표정과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계의 반응은 정말로 뜨거웠다.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인간의 성적(性的)인 교감에서 발생하는 오르가슴과 다를바가 전혀 없다고 자신있게 의사표현들을 하기도 했다.
"작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 긴 황금화살이 천사의 손에 들려 있는것이 보였다. 그가 아주 저돌적으로 내 심장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고 긴 창으로 나의 음부를 찌르는것 같았다. 그가 창을 뽑아들었을 때 그의 모든것이 함께 뽑혀져 나갔으며, 불에 탔던 자리에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만이 남았다. 너무나 큰 고통에 신음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황홀할 정도인 고통의 단맛을 잃고 싶지 않아서 참아야만 했다. 너무나도 달콤한 사랑의 애무에 내 영혼은 주님만큼이나 만족했다. 내가 느낀 고통은 육체적이라기 보다 영적인 고통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나의 영혼과 주님 사이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 <성녀 테레사의 자서전> 중에서.......
어찌할까나?
아가페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들과, 에로스적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려서부터 어느정도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더라도 '그렇게 보아 주는게 올바른 도리여' 라는 관념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지금 베르니니가 만든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은 베르니니의 시선에 끌려다닐 이유도, 프로이트의 날카로운 시선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보는 사람의 가치관과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가진 나만의 시선을 달리 표현할 방법은 어떤것이 있을까?(한참 고심 끝에........)
'베르니니 이 양반아! 당신 참 잔머리의 대왕이시구만? 제목을 참으로 기가막히게 붙였으니까 살아남았고 바로크의 위대한 조각가가 된것이여. 참 기가막히게 머리가 좋고 운도 좋은 베르니니여. 부러워.......'
엑스터시가 되었던지, 쎅슈얼리티가 넘치던지, 아니면 성녀의 오르가슴이 되었던지........ 그 대상이자 주인공이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성녀의 신분 정도니까 그나마 넘어갈 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중에 그리이스 신전의 제우스가 지상에 내려와 어느날은 멋진 청년으로, 어느 때는 바람으로, 또는 구름으로 변신하여 여자들을 유혹하고 능욕하고 해서 여러 자식들을 만들어냈다. 이를 세상은 그저 신화나 전설로 받아들이고 이해했다. (성녀 테레사의 법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락없는 그리이스 신화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천사와 인간의 사랑이라........ 신화 속에서는 꿈만 꾸었을 뿐인데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던가........
한 발자욱만 아주 조심스럽게 더 나아가서........ 르네상스의 회화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소재이면서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마도 (수태고지)가 아닐까 싶다. 천사가 나타나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에게 "당신은 지극히 높은 분의 아이를 잉태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들을 말한다. 천사가 나타나 여인에게 어떤 말을 전해주기 전에 있었던 상황........ 그것이 어떤 형태이던 상관없이 표현되거나 그려져야 한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베르니니가 만든 조각상에 (지극히 고귀하신 분의 수태) 라는 제목을 붙여도 전혀 이상 할 것 같지가 않다. 말씀이 되었건, 숨결이 되었건, 눈짓이 되었건, 좌우지간 무엇인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상황을 베르니니가 저런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치자. 역시나 설득력은 충분하겠으나......... 그 파장은 주인공이 테레사 수녀였을때와 전혀 달랐을테지만 말이다. 만약 그렇게 제목을 붙였었다가는 베르니니가 제 명대로 살지 못했을것이 너무도 뻔하다.
법열 조각상 속의 테레사 수녀 모습이랑,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에타 속의 성모 마리아 모습이랑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만약에 예를들어 두 조각상이 같은 사람이라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왜? 감히 누가 성모 마리아의 참모습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는가? 베르니니 작품에 딴 제목을 붙여서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테레사 수녀는 되고 성모 마리아는 왜 안되는가?
하긴....... 아무리 당대 최고의 예술가 베르니니라 하여도 그 선을 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문자인 페데리코 추기경이 바티칸의 실세중에 실세라고 할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추락할대로 추락한 교황과 바티칸의 위상을 다시 추스르고자 벌어진 반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코나로 가문이 자신들만의 예배당을 구입하였고, 당장 가장 위세를 떨치고있는 페데리코 추기경이 추진한 사업의 일환이라고 보면, 예배당의 구입에서부터 어떻게 꾸밀것인지와 그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는 이미 너무도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페데리코 추기경으로부터 베르니니에게 요청된 작품 주문의 내용은 상당히 세세했을것이다. 물론 그 댓가도 엄청났을것이다. 페데리코 추기경이 구입한 예배당이 속한 교회인 비토리아 성당은 아빌론의 성녀 테레사에게 헌정된 교회였다. 그러니 당연히 소재는 테레사 성녀를 극한의 성스러운 존재로 부각시키고자 하는것이 전제조건 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금액의 댓가를 흔쾌히 지불할 수 있는 주문자의 요구를 베르니니는 잘 받들어 수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베르니니가 이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작품을 만들에 보란듯이 세상에 내놓았다. 이런 파장을 베르니니는 전혀 알지 못했을까? 아님 카라바조의 경우에서 처럼....... 날고 긴다하는 희대의 천재들에게는 이런 어깃짱 심뽀나 범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어떤 반발심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작품이 완성되어서 첫 대면을 했을 상황의 페데리코 추기경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녀(聖女)를 만들어달랬더니........ 이거야 숫제....... 수녀복만 벗기면 영락없는 발정난 화냥년이 아닌가?'
성녀의 에로틱한 이미지는 기독교적 성심에 의해서 고귀한 영성에 저절로 녹아들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다고 교회는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 여행자의 시선 앞에 드러난 성녀는 지긋이 눈을 내리깔고 입술이 열려진 채로 멋진 남성미를 뽐내는 천사의 시선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어디에도 부끄러운 표정이나 거부하는 몸짓은 찾아볼 수 없다. 온전히 자신을 고스란히 내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선한 마음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그녀의 저 표정에서 종교적 엑스터시를 찾아내야만 한단 말인가? 그래야만 불경에서 벗어나고 신성모독의 죄를 짓지 않는것이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도저히 선한 마음의 사람이 될 수 없나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에로틱함만이 보이니까 말이다. 성심이 부족한 내가 베르니니의 작품을 통해 환상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않음에도 말이다.
이 또한 베르니니 탓이다. 그의 뛰어난 솜씨 때문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또 하나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esa)' 조각상 작품이 있다. 천사의 머리와 팔이 잘라져 나가기는 했지만 영락업는 비토리아 대성당의 성녀 조각상과 똑같은 모습이다. 어느것이 먼저 제작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분명한것은 두 조각상 모두가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든 원본이라는 사실이다. 비토리아 대성당의 조각상은 처음부터 페데리코 추기경의 주문에 의해 코나로 채플 제단에 설치하려고 만들었던 것이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작품은 제단이 아닌 독립된 공간에 설치를 위해 별도로 새롭게 만든 조각상으로 보여진다.
교회라는 제한적으로 특수한 공간을 벗어난 (성녀 테레사의 법열)의 더욱 더 섹시해 보인다.
성적인 느낌과 영적인 느낌, 혹은 아가페와 에로스의 경계에서 베르니니가 가졌던 생각은 과연 어떤것이었을까?
정말로 저 에로틱한 느낌 조차도 자신의 솜씨를 통하면 숭고한 영적 이상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카톨릭의 개혁을 주장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늘 함께하면서도 청빈과 금욕주의적 삶을 추구했던 수녀(여성 수도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으로 베르니니에게 크게 감동을 준 사람이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뿐만은 아니었다. 고난의 삶을 살았으나 성 프란체스코의 환시를 경험한 후에 새롭게 거듭나 일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살았기에 후에 '가난한자들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루도비카 알베르토니(Ludovica Albertoni)'를 위해 베르니니는 그녀가 뭍혀있는 성 프라체스코 라파 교회의 알티에리 채플의 건설을 자진해서 맡았다. 베르니니는 (성녀 테레사의 법열)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크게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들어 제단에 설치하였는데 그 작품이 바로 (축복받은 루도비코 알베르토니, Blessed Ludovica Albertoni) 이다.
베르니니만의 솜씨와 표현력이 그대로 살아서 숨을 쉬고있다.
로마의 귀족여성이었던 루도비코 역시 환시를 자주 목격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하루는 그만....... 성 프란치스코의 불화살 세례를 넘치도록 온 몸으로 받아던 모양이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지만, 루도비코는 불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세 아이를 낳았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미 세속적인 엑스터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어딘가 모르게 더욱 선정적이게 베르니니가 작품을 구상했던 것일까?
이런 느낌이나 생각 자체가 불경이며 신성모독이라면.......... 그거야 어디까지나 베르니니 책임이 먼저이고, 신성함을 보존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가 진즉에 어떤 방법으로든 치웠어야만 하는것이 아닐까?
베르니니에 대해서야 할 말이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고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것이기에 이쯤에서 물러나 여지를 남겨두기로 하겠지만........ 그래도 이 양반 말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대단히 선정적인 조각상이 하나 있다. 가히 놀라울 정도로 생동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Sleeping Hermaphroditos)' 조각상으로 고대 그리이스의 작품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수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또한 작자 미상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베르니니의 작품들과 썩 닮아서 그런것일까? 분명한 것은 요염한 자태로 잠들어 있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결코 베르니니가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지금의 조각상이 전혀 베르니니와 상관이 없다고도 할 수도 없다.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앞서 거론했던 (성녀 테레사의 법열) 이나 (축복받은 루도비코)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의 솜씨를 바탕으로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을 좀 세세하게 비교하면서 살펴보시라고 먼저 권해드리고 싶다.
잘룩한 허리에 요염한 포즈, 매끄러운 피부, 탱글탱글한 엉덩이 볼륨........... '아니 왜 여신이 여기에 누워있는 거야?'
지나가는 남성들이 툭하면 손가락으로 엉덩이를 찔러보느라 루브르 박물관 보안 관계자들은 항상 곤역을 치루어야만 했다. 어디 남성들 뿐이겠는가? 지나가는 여성들도 시기와 질투가 서린 눈빛으로 조각상의 구석구석을 샅샅히 살피는가 하면 쌍수를 흔들어대면서 함께 온 남자들의 시선을 가리고 멀리 떨어지게끔 난리 아닌 난리를 피웠다.
그러다가는 '에그머니나!' 하면서 화들짝 놀라 달아나기 일쑤다.
그분들 덕분에 이제는 아예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바리케이트를 쳐버렸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수많은 미술품 중에서도 상당한 지명도와 인기를 끌고있는 작품이다.
유럽의 여러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여행하다보면 여러개의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품을 만날 수가 있다. 로마 국립박물관 소장품 처럼 침대는 없으나 루브르 박물관 조각상과 크기나 모양이 똑같은 작품들도 있고, 제목은 같고 포즈는 비슷하나 다른 버젼으로 보이는 여럿의 조각작품들을 만나볼 수도 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로마 국립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을 포함하여 어느것이 원본 내지는 진품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다. 어쩌면 진품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남아있는 모두가 전부 모조품일 수도 있다. 그럴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오래지 않아서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에 대해서 별도의 장을 만들어 논의 해 볼 생각임)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학자와 미술가들이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와 미술과 철학과 역사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정신이 곧 르네상스가 탄생하게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시대사조에 힘입어 그 어느때보다도 부쩍 고대 그리이스의 도자기와 조각품과 책자들이 대거 새롭게 발굴되기도 하고 등장하게 되었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또한 17세기에 들어서서 새롭게 발견되었으며, 그 빼어난 작품성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유럽 전역의 여기저기에서 같은 작품이 하나 둘 재차 발견되기 시작했다.
초기 로마인들은 유독 조각분야에만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리이스가 차지했던 지중해 연안 유역을 새롭게 모두 차지한 로마의 입장에서 도시건 광장이건 신전이건 어디에든지 넘쳐나는것이 그리이스의 조각이었던 것이다. 새롭게 만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신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의 우수한 조각품들이 지천에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그져 가져다 쓰면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제국의 기틀을 다지게 되자 로마인들은 이제 고대 그리이스에서 벗어나 로마식의 미술품을 가지고 싶어졌다. 특히 로마식 조각품을 소장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어디에도 과거 그리이스에 흔하디 흔하게 넘쳐났을 조각가의 솜씨를 따라갈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제국의 모든 도시에 미술 아카데미를 세우고 솜씨있는 자를 발굴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시 시작했다. 첫 단계는 모방이었다. 그리이스 조각품의 복제가 로마 전역에서 동시에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청동조각상들이 교과서이자 스승이 된 것이다. 거듭되는 복제를 통하여 로마의 학생들은 조각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고대 그리이스의 수많은 조각상들이 똑같은 품질과 크기로 원본 보다도 더 원복같은 또 하나의 작품으로 자주 등장하게된 것이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경우로 얼마나 많이 복제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언제 어디서 더 발굴되어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아무튼 17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삽시간에 유명세를 타게되었고 미술 소장가들에게는 꼭 소유하고픈 버킷 리스트의 최상부에 오르게 되었다.
그 상태는 정확하게 로마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침대가 없는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가장 유명한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Sleeping Hermaphroditus)'를 만나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꼭 찾아가야만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 조각상은 엄연히 여기 로마에 있어야만 했다. 원래는 로마 소유였던 것이다. 그것도 그 유명한 로마의 보르게세 박물관의 소장품이었어야 하는것이 옳다.
카멜라이트 수도회 소속의 성 요한 수도사(맨발의 카멜라이트, 혹은 십자가의 성 요한)와 카톨릭의 개혁을 부르짖던 아빌라의 테레사 수녀가 스페인을 떠나 로마로 왔다. 가장 많은 로마인들이 밀집해 살아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공중 목욕탕 인근의 공터(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 사이)에 움막을 짓고 병든 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인들은 이제 이들 무리를 '맨발의 카멜라이트 사람들'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도사 요한과 테레사 수녀를 따르고자 하는 성직자들까지 합세하게 되자 이들의 거처는 확대를 넘어서서 수도원과 수녀원 규모로 점차 확대되어 갔으며 교황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지원하게 되었다. 마침내 교황청은 이들의 역확과 공적을 인정하여 이곳에 정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하고 기초공사에 착수하였다.(1604년)
당시는 종교개혁을 외치는 광풍이 로마를 비롯해 온 유럽을 통째로 뒤흔들던 시기였다.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과 만행에 끊임없이 개혁을 요구하는 개혁주의자들의(루터파. 캘빈파 등등) 요구를 카톨릭은 묵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카톨릭 수뇌부의 기득권과 카톨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나을것이며, 이는 곧 영원한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신 구교간의 살등과 극렬한 대립은 마침내 전쟁으로 비화되고야 말았다. 30년 전쟁이 발발하고야 만 것이다.
체코 지역인 화이트 마운틴에서 카톨릭의 군대와 개신교의 군대가 참혹한 전투를 벌여 종국엔 카톨릭이 승리하였다. 로마카톨릭으로서는 모든 운명을 내건 한 판의 승부였던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십자가를 앞세워 막센티우스 군대를 쳐부순 이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 역사적인 승리를 카톨릭 입장에서는 성대하게 기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항 바오로 5세는 한참 건설중인 '맨발의 카멜라이트 수도원'을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화이트 마운틴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대성당으로 지어 사도 바울에게 한정하도록 명령했다. 이 기념사업의 책임자로 교황 자신의 조카이자 당대 바티칸의 절대적 실력자이자 실세였던 스키피오 보르게세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보르게세 가문은 본래 시에나의 명문가였다. 시에나는 오랜 세월을 두고 피렌체와 영원한 앙숙 관계를 유지해 온 이탈리아 중북부의 소도시였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문명이 찬란하게 꽃을 피웠듯이 15 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에나는 피렌체에게 모든면에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중심엔 메디치 가문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종국에 시에나는 메디치가 이끄는 피렌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속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절망적인 미래를 예견한 프란시스코 카페랠리는 처가쪽의 식구들을 대거 동반하고 로마로 대대적인 이주를 감행한다. 피렌체에게 지고 사느니 차라리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시에나의 명문가인 보르게세 가문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분명 카페랠리 였지만 그는 보르게세 가문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인 오르텐시아 보르게세가 그 가문의 사람이었다. 가난한 고아나 다름없던 카페랠리가 오르텐시아를 만나 성장하여 처가인 보르게세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던 것이다. 카페랠리의 아들인 스키피오는 그런 배경으로 인해 어머니의 성을 따랐던 것이다. 보르게세 가문에도 어엿한 사내대장부는 있었다. 스키피오의 외삼촌이자 오르텐시아의 남동생인 카밀로 였다. 하지만 카밀로는 비교적 성격이 온순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 성직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로마로 이주한 보르게세 가문은 대단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대부분의 재산은 시에나에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페랠리는 헌신적으로 가문을 돌보았으며, 그의 헌신에 감사한 카밀로는 조카인 스키피오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남다를 우애를 나누었다.
카밀로가 성공하여 추기경이 되었을때 교황 레오 11세가 사망하였고,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레베에서 뜻밖에 카밀로 보르게세가 선출되어서 새로운 교황 바울 5세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하루아침에 보르게세 가문은 이제는 더 이상 시에나 출신이 아니라 로마 최고의 명문가로 급성장하게 된다. 아울러 조카인 스키피오 보르게세 또한 승승장구하여 추기경이 된다. 교황의 복심을 넘어 절대적인 교황의 대리권자가 된 것이다. 교황청은 바울 5세 교황의 명령과 허락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그 명령과 허락의 실제적인 승인자는 스키피오 보르게세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스키피오 보르게세 추기경(Scipione Borghese) 에게 참으로 남다르고 유별난 취미가 한가지 있었다. 미술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식견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수집에 열광적인 면이었다. 건축 미술 조각을 넘어 전분야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식견은 미술품 중개상이나 소장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 식견을 바탕으로 그의 눈에 띄어 마음에 드는 작품이면 가격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코 소유해내고야 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소장가이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소장 열의가 지금 로마에 가서 만날 수 있는 (보르게세 미술관)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미술관의 절대적 대다수가 스키피오 보르게세 추기경이 수집한 작품들이다. 물론 부정적 시선이 따르지 않을 수 없지만 말이다. 시에나에서 쫓겨나오다 시피한 보르게세 가문이 짧은 시기에 어디서 그 많은 돈이 생겨서 그 어마어마한 미술품을 수입 소장할 수 있었겠는가? 보르게세 미술관의 소장품은 모두가 추기경이라는 어마어마한 당대 최고의 권력과 어떤 방법으로였던간에........ 교회를 통해 가져온 돈으로 장만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어디 보르게세 미술관만 그런가? 바티칸 미술관의 모든 미술품도 대부분 그렇게 생겨났다고 해도 결코 틀린 표현은 아닐것이다. 어쩌면....... 그 또한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그 분의 뜻일지도.......... 아님 누군가 제 멋대로 이름을 팔았던가........
스키피오 추기경은 그뿐만이 아니라 탁월한 솜씨를 가진 미술가라면 늘 가까이 두고자 했고 막대한 후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많은 미술가를 지원하였지만......... 스키피오 보르게세 추기경이 아낌없이 후원하여 세상에 명성을 드높인 사람을 두 명만 꼽는다면 그림에는 카라바조가 있고 조각에는 바로 로렌초 베르니니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 막강한 실세 중의 실세인 스키피오 보르게세 추기경이 지휘감독하는 새로운 성모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건설 현장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교회의 외벽공사와 주변의 도로와 연계되는 토목공사를 벌이던 중에 땅속에서 실물크기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대 그리이스에서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현장 책임자였던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소리아는 즉시 이 사실을 교황청에 알리고 이 작품을 교황청 미술관에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떡하니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발굴된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는 추기경의 표정이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이미 여실히 잘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티스타 소리아는 즉시 발굴현장의 모든 관계자들의 입단속을 철저하게 실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성당 건설현장에 스키피오 추기경의 큼직한 선물보따리가 쏟아져 내렸다.
발굴된 조각상은 은밀하게 추기경의 수집품 소장처로 운반되었다.
시간을 두고 발굴 조각품의 세척과 상태 점검을 마치고 지인들에게 공개되었을 때 반응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점이 대두 되었다. 크기에 비해 다소 애매한 포즈의 조각상이었던 이유로 어디에 어덯게 전시해야 할지가 쉽지 않았을 뿐더러, 같은 이유로 쉽게 손상될 소지가 다분하였던 것이다. 추기경은 이 아까운 작품을 어떤 방법으로든 안전하면서도 보다 돋보이게 보관 전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내야만 했다.
그때 로렌초 베르니니가 추기경을 방문했다.
추기경은 조각상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고심을 털어 놓았다. 그런데 별것 아니냐는 투의 그의 대답은 순간 추기경을 몹시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보완 작업을 해서 침대와 쿠션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얹어서 전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궁전의 침대라도 하나 만들어서 황금실로 수놓은 침대보라도 덮어서 그 위에 전시하자는 말인가?'
'아니지요. 저 조각상의 재질과 비슷한 대리석으로 실제 사용되고 있는 생생한 침대처럼 하나 만들어서 제대로 얹어놓는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 만들어 보완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저렇게 만들어졌나 보다 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만들어야겠지요.'
'가능하겠는가? 정말로 원래부터 함께 만들었을것 같을 정도의 침대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정녕 추기경께서 원하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정도까지는 만들어 보겠습니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의 마지막 버젼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여신의 조각은 작자를 알수 없는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가 솜씨이고, 누워있는 푹신푹신 할 것 같은 대리석 침대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훌륭한 고대의 조각품에 새로운 보완을 기꺼이 하락한 추기경의 배짱도 그렇고, 역사적인 작품에 기꺼이 전혀 손색없을 자신의 솜씨를 추가하겠노라고 나선 베르니니의 자신감 또한 경이로울 정도이다. 훼손이나 부조화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베르니니의 대리석 침대를 제거한다고 생각해 보자. 상상불가!
새삼 베르니니에게 존경과 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베르니니의 솜씨가 더해진 조각상은 이때부터 '보르게세 헤르마프로디토스(Borghese Hermaphroditus)'로 불리며 빌라 보르게세에 보관 전시되었으나, 1793년 나폴레옹이 로마를 침공 점령하면서 다시 수난을 겪게된다. 나폴레옹은 문화재 약탈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과 판테온을 그렇게 뜯어서 파리로 가져가고 싶어했던 나폴레옹는 여러 공학자들이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항복하자, 아쉬움을 달래고자 파리에 똑같은 개선문과 판테온을 건설했을 정도로 문화재 수집광이었다. 엄청난 문화재가 나폴레옹에 의해서 프랑스로 약탈되었다. 후에 상당량이 회수되어 되돌아 오게 된다. 최고통치자가 그러했을 정도인데 그 아래있는 추종자들은 어떠했겠는가? 나폴레옹이 찍어서 먼저 앞수한 다음에는 모두가 추종자들 차지였다. 그중에 훗날의 우환을 두려워한 자들은 합법을 가장하여 턱도없는 헐값에 강제로 매매계약서를 작성하고는 단돈 몇 만원을 던져주고는 국보급 문화재들을 마구마구 쓸어가 버린것이다.
보르게세 헤르마프로디토스도 이 약탈의 과정에 포함되어 어거지로 프랑스로 반출되었다. 그후 여러차례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이탈리아는 반환을 요구하고 프랑스는 합법적 거래를 압세워 반환을 거듭 거절하고 있다. 이탈리아가 끊임없이 루브르 박물관에 반환요청을 하는 1호는 (모나리자) 이며 2호는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이다.
그나마 이같은 처사에 대한 하늘의 보살핌이신지........ 나폴레옹이 로마를 침공하여 약탈하던 비슷한 시기에 로마의 도심을 정비하던 중에 똑같은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이 발굴되어서 다행스럽게 지금 로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베르니니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대리석 침대를 하나 더 만들어서 깔아주면 굳이 루브르 박물관까지 가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다. 아직까지는 베르니니 비슷하게라도 침대작업에 도전하겠다는 조각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도전자가 나선다 해도......... 국립 박물관 측이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침대에 엎어져 잠든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은 뭇남성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피기 일쑤였다.
'아니 시방 여신이 왜 훌러덩 벗고 여기에 잠들어 있는거야?' 하면서 엉덩이를 꾹꾹 찔러보기 일쑤였다.
그러면 일행인 여성들은 그런 남성의 등짝을 소리가 나도록 후려치면서 잡아 끌고 지나갔다. 아니면 시기와 질투가 가득 서린 원망스런 눈초리로 여신의 나신 곳곳을 흩고 지나갔다.
그런데 말이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은 이쁜쪽에서만 대충보고 얼른 지나가야만 하는 아주 특별한 작품이다. 감상에도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할 때가 있듯이 이 조각상은 통상적인 뷰 포인트를 벗어나면 절대로 안된다.
'에구에구 망측해라. 이게 시방 무슨 꼴이여? 에그 드러워라. 퉤퉤퉤'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중에 100명이면 100명이 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의 나신(裸身)에 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기대와 감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조각상 주인공의 이름인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찾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
'헤르마프로디토스 라는 이름이 도대체 어땠기에?'
따로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좀 더 명확하게 밝히자면........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신(女神)이 결코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 주인공은 분명한 남성이다.
'에구머니나! 이게 뭔 꼴이여?'
'어쩌자고 이런 해괘망측한 시쵸에이션이 백주대낮에.........'
그러기에 앞서서 분명하게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감상하려면 사전에 시선을 둘 곳을 잘 잡아야 한다고 언질을 미리 해두었던 것이다.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조각상 전체를 스캔하듯이 세세하게 살피다가는 툴립없이 낭패를 격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풍만하고 요염한 여인의 자태 저쪽으로 해괴망측하면서도 분명하게 남성의 심볼이 달려있으니 말이다.
가히 충격적이라 할 밖에 달리...........
까짓 베르니니였건, 처음 발굴한 사람이 되었건 아니면 그 누구였던지간에 슬쩍 망치로 전혀 불필요한 심볼(?)을 툭 쳐서 부러트려 버리고 사포질 몇 번 한 후에 조각상의 제목을 (잠자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되었던, 아니면 (잠자는 헤라 여신) 이라고 붙였어도 아무런 문제될 것도 없고 여전히 각광받는 조각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 아름다운 조각상에 별로 필요도 없어 보이는 부속품(?)이 하나 덜렁 나붙어 있느냔 말이다.
그 쓸모없이 나붙어 있는 그것(?) 하나 때문에 이 조각상의 제목은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일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그렇다면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과연 어떤 존재였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대단히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고대 그리이스의 올리푸스산에 살았던 남신(男神) 중의 하나였다.
날개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마음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들의 전령사'인 헤르메스와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사이에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거대한 남근으로 상징되는 생식력과 풍요를 담당하는 남신 프리아포스다. 두 번째 아들이 바로 너무나 유명한 성욕을 관장하는 에로스이며, 막내가 바로 여신들도 질투를 느낄만큼 미남자로 태어난 헤르마프로디토스 였다, 그러다보니 신들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에서도 헤르마프로디토스의 빼어난 용모를 흠모하는 존재들이 생겨났다. 살마키스(Salamacia)도 그런 부류들 중에 하나였다.
살마키스는 카리아 지방의 샘에 사는 나이아스 님푸다. 물의 요정이라는 뜻이다.
그리이스 신화속에서 님프들은 미의 여왕인 아프로디테 여신이 관장하며, 모든 님프는 순결을 지킬것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맹세하는데 반하여, 살마키스 만은 자유분망하게 살겠다고 선언하고 맹세를 거부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아프로디테 여신은 거다란 상처를 받게 되는데.........
아프로디테 여신은 막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멀고 먼 바다건너 남쪽 끝인 리키아 지방의 보드룸(현 터키 남부 보드룸. 고대 리키아 지역)의 님프에게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양육을 부탁하였다. 터키 남부 보드룸 여행의 명소중에 카리아 샘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숲에서 뛰놀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카리아 옹달샘에서 목욕을 하려고 마음먹고 옷을 벗고 있었는데, 그 옹달샘에 살고있던 요정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살마키스 요정은 솟아오르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다짜고짜 달려들고 말았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미소년은 용케 요정의 육탄공격을 뿌리치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살마키스는 옹달샘 속으로 달아나는것 처럼 속인 뒤 반대쪽 숲에 숨어서 끝까지 미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음에도 더이상 아무런 기척이 없자 다소 안심한 미소년은 다시 조심스레 옹달샘으로 다가가 옷을 모두 벗고나서 물속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기회를 또 놓칠세라 살마키스는 달려들어 미소년이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끌어안고서 억지로 키스를 퍼붓고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미소년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당황한 살마키스는 미소년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꼭 끌어안고서는 신들의 언어로 올림포스 산의 신들에게 간절한 소원 기도를 부르짖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시여, 간절한 요정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영원히 당신들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겠나이다. 바라옵니다. 이 소년에게서 이대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시요.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순간 올림포스의 신들이 살마키스의 간절한 요청을 허락하였다.
이제 헤르마프로디토스와 살마키스는 하나의 몸으로 합쳐진 것이다. 반남반녀, 양성구유, 암수한몸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 그의 이름인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그저 단순하게 아버지인 헤르메스와 어머니인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합쳐놓은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그의 이름에서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 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 용어의 의미는 너무도 당연하게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를 가진 남성'을 의미한다. 남녀의 성징을 함께 가진 존재는 그리이스 신화에서도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유일하다. 그리이스 신화에 다르면 예언자 테이레이아스의 경우는 남자였으나 때론 여자로, 다시 남자로 자유롭게 성전환을 하면서 사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힌두교에는 같은 자웅동테의 신으로 아르나나리시와라가 존재하며, 로마 신화에도 이지스티스 라는 자웅동체의 신이 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인류 역사속에서 다소 희귀하기는 하지만 분명 자웅동체가 꾸준히 존재해 내려왔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고대사를 살펴보면 프리키아의 키벨레 여신을 모시는 신관들은 강제로 거세를 당했는데, 이후로 이들의 외모가 하나같이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일본의 전래되는 고사속에 후타나리 라는 자웅동체의 존재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세조 임금때 세상을 한바탕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방지(舍方知) 사건 또한 이와 비슷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아무리 요리조리 살펴보고 또 뜯어보아도 베르니니가 솜씨를 보탠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조각상은 매혹적일 정도로 아름답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잠자는 여신상(女神象)' 으로 보아주면 안될까?
우리 옛 속담처럼....... '아는것이 병이여' 라는 표현이 이 경우처럼 딱 들어맞는 경우가 어디 흔할까?
앗! 차차 차차차차.
어쩌다 보니 랭던 박사와 그 일행들이 나보나 광장을 향해 달려간지가 한참이나 지나버렸다.
이렇게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는 법인을 체포하고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장면을 놓쳐버릴 수도 있겠다.
이제 이쯤에서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대성당 인근의 여행을 마치고 서둘러 랭던 박사 일행을 뒤쫓아가야만 하겠다. 아쉽지만 미진한 부분이야 훗날 다시 기회가 있을지도 모를테니....... 일단 나보나 광장으로 달려가자.
---- 다음 이야기는 나보나 광장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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