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로마 도심을 걷다......

by 피안재 2021. 5. 9.

 

 

 

 

 

 

 

 

 

 

 

 

 

 

 

 

 

 

 

 

 

 

 

 

 

 

  광장(廣場)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너른 공터',  혹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라고 적고있다.  Square, Plaza, Piazza  등이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

  그래서 이탈리아어 사전에서 (Piazza)를 검색하여 보니 '광장' 그리고 '시장' 이라는 해석이 따라 나온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여 집단 거주생활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점차 도시의 형태로 발전하게되었으며,  학계는 이를 대략 6.000년 전쯤부터라 보고 있다.  광장은 이때부터 도시의 형성과 함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고 함께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다.  광장은 열린 공간으로서 생활권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규칙을 정하는 장소로 사용해 왔다.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어 발전해 나갔으며 정치와 종교의 중심이자 행사를 치루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다용도 공간이었던 셈이다.

  광장이 제 이름과 용도를 가지고 문명사에 등장한 것은 아무래도 고대 그리이스 도시국가의 아고라(agora) 광장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고라는 도시국가의 한복판이나 항구에 주로 형성되었는데,  점차 '광장'의 역활을 넘어 '시장'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띠며 발전해 나가게 된다.  자연스레 아고라는 도시국가의 구성원들(시민)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영향력이 큰 장소가 되었으며,  종교. 정치. 사법. 상업. 축제 등이 벌어지는 사회생활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공공건물들이 들어서고 신전과 시장 점포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되자 사람들은 광장에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고 연못과 분수를 만들어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아고라(agora)는 로마 시대로 접어들면서 포룸(forum)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고라에 비해서 규모가 커지면서 체계적으로 다양한 기능들이 세분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광대한 지역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여 사용한 로마 포룸(Rome Forum)은  가장 대표적인 훌륭한 사례라 하겠다.

  중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많이 변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는 한 마디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때까지 인간과 세상사 전부를 온통 종교(교회)가 직접 관여하고 통제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열린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어느 순간부터 소멸되었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에 의해서 광장의 색깔과 역활이 달라지고 분리되어지게 되었다.

  중세 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는 광장은 대성당(두오모) 앞에 만들어진 광장이었고,  주변의 수많은 교회 앞에 설치된 교회광장(敎會廣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역활을 도맡았다.  다음으로 왕이 기거하는 궁전 앞이나 관공서 앞에 시뇨리아(signoria) 라고 흔하게 통칭되는 시민광장(市民廣場)이 있었다.  마지막 다른 하나로는 주로 다양하게 상업활동이 이루어지는 시장광장(市場廣場)을 꼽을 수 있겠다.

  도시의 외곽과 연결되는 중요 거점에 광장을 두고 이집트에서 빼앗아 온 오벨리스크(obelisk)를 세우고,  자신이나 가문의 업적을 새긴 커다랗고 높은 원주(圓柱)를 세우거나 아니면 거대한 동상을 세우기도 하고,  그마저도 아니면 유명한 조각가를 데려다 멋진 분수를 만들거나 웅장한 교회를 세우거나 건축물을 짓는것으로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용도로도 광장을 훌륭하게 쓰여졌다.

  로마의 대로를 따라 걷다보면 수없이 많은 골목길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는것을 너무도 충분하리만치 공감할 수가 있다.  어느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던........  미처 그 골목길이 끝나기 전에 어딘가에는 공터가 불쑥 나타난다.  하지만 어느하나 무시해도 좋을만한 그저 그런 공터는 없다.  크건 작건 그것은 누군가가 사전에 충분히 의도하에 조성해 놓은 광장인 것이다.  공터의 가장 좋은 위치에는 반듯이 교회가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동네 구멍가계보다 많은것이 공터이자 공원이며 광장인 것이다.  그곳엔 반듯이 교회가 놓여있으며.......  그 공터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국립박물관에나 들어앉아있어야 할 분수며 대리석 조각상들이 사방에 널린 휴지통 숫자만큼이나 제멋대로 놓여있는 곳이 바로 로마다.

  로마 도심을 거닐다보면 지겹도록 마주치고  덕분에 관심도 흥미도 저절로 사그러지게 만드는 표지판이 바로 (유네스코 지정 기념물 표시판) 이다.  우리나라에선 유네스코 지정 기념물이면 대단한 문화유산 대접을 받겠지만........  지나가던 개가 목을 축이는 대리석 판떼기도 살펴보니 유네스코 표식을 달고 있은것이 아닌가?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로마에서 유네스코 안내 표시는 조금 과장하면 우리나라 골목길에 도로명 주소표지판 나붙어 있는것 만큼이나 흔하디 흔하다.

  그런 로마의 도심 골목길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서 우리는 나보나 광장을 향해 걷고 있다.

  카메라 광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런 로마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눈망울과 가슴은 기억 세포의 용량을 걱정하면서 끊임없이 로마의 풍경을 스캔하면서 동시에 쓸어담고 있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가 아니라,  당장 이 골목을 돌아서고 나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방금 지나온 골목풍경이 그리움으로 변하여 내 발걸음을 잡아당길것만 같아서 이다.  오늘밤 꿈속에서 우리는 지금 걷고있는 이 길과 시간의 파노라마 필름을 밤을 하얗게 새워가면서 돌리고 또 돌릴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만 있다면........  이대로 로마에 눌러 앉아 살고 싶다.

 

  이탈리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의 알라 나폴레오니까 궁전을 차지하고는 산 마르코 광장에서 거의 매일 성대한 파티를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산 마르코 광장을 '유럽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광장' 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광장의 본래 의미를 상실한 침략자의 만용이며 위선을 감추기 위한 방편으로 광장을 도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그 당시의 산 마르코 광장은 세기의 침략자이자 약탈자인 나폴레옹의 권력을 과시하고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세레머니를 펼치던 무대였을 뿐이다.

  광장은 우선  그곳에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삶과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있어야 제대로된 광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광장들을 만나보았지만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않고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을 고를 것이다.  무엇이라고 딱히 꼬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에는 그 광장 특유의 어떤 멋과 정취가 고즈넉하면서도 멋스럽게 스며들어 있다고 하겠다.  두오모 광장은 분명 사방으로 건물들에 의해서  병풍처럼 가로막혀 있다.  에워싼 그 건물들 사이로 수많은 골목길이 나있다.  광장을 분명 건물들에 둘러샇여 갇힌 형상이자만,  광장의 어디에서든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둘러다 보면 한없이 포근해짐을 느낄 수가 있다.  파란 하늘이 드높고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곳에서는 광장이 결코 갇힌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탁 트인 한없이 넓고 자유로운 공간이 시야 가득 펼쳐져 있는듯한 아주 특이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단조로운듯 하지만 바로크 건축의 미를 한껏 뽐내고 있는 두오모 파사드의 라임스톤이 주는 온화한 질감도 톡톡히 한몫을 하는것만 같다.  파란 하늘과 장엄하면서도 자애로와 보이는 두오모가 지켜주고 있는 한없이 드넓게 느껴지는 이 아주 특별한 공간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따사로운  시칠리아의 햇쌀이 한없이 쏟아져 내리고,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고온 건조한 바람이 지중해를 건너면서 아주 알맞은 정도의 지중해 수분을 들이키고는 이 광장에 머무는 사람들의 머리칼과 페부를 스쳐 지나간다.  그 바람(시로코)결에서는 사하라의 향기와 시칠리아 오렌지 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져 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에워싼 건물들 사이로 억겁의 세월동안에도 변함이 없는 지중해의 코발트빛 파도소리가 들려 온다.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은  그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다분히 광장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의 매력에 푹 빠져 살면서 로마의 캄피돌리아 광장을 비롯한 너무도 유명한 광장들과 피렌체의 수많은 광장이나 특히나 유명한 씨에나의 캄포 광장이나 밀라노. 타오르미나. 오르비에토. 몬테풀치아노.  등등의 두오모 광장들이 나름 매력적이었지만, 그래도 광장 본래의 모습과 향취를 여전히 품고있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광장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잠시 고민이야 되겠지만.........  결국에 나는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을 꼽고야 말것이다.

  '나보나 광장' 하면 원래 대전차 경기장이 있던 장소로  베르니니가 만든 4대강 분수를 포함하여 세 개의 분수가 놓여있는 아름다운 광장으로 여행자는 물론 현지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있는 로마 여행의 명소 중에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우리가 흔히 '로마 여행'을 상상하면서 떠올리게 되는 모든 명소들이(테베강 건너의 바티칸과 산탄젤로 성만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이곳 나보나 광장 주변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 광장도 트래비 분수도 판테온도 모두 나보나 광장에서 아주 가가운곳에 흩어져 있다.  베네치아 광장도 비교적 인근이라 하겠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을 바라보면서 옆길 계단을 오르면  캄피돌리아 광장이 되고,  광장의 뒷길로 나서면 그곳이 바로 포로 로마노 이다.  로마 포룸의 유적들 숲을 가로지르면 그곳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콜로세움이 나온다.  바티칸이라 해도 나보나 광장에서 도로 아래 파뭍혀있는 고대 유적들을 살피면서 아주 조금만 걷다보면  테베강이 나오고,  베르니니의 천사 조각상들이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면 산탄젤로 성에 도착하고,  모퉁이를 돌아서기만 하면 바티칸 대성당의 영역에 들어서서 성 베드로 광장의 열쇠 끝부분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나보나 광장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명품 샾들이 즐비한 번화가를 지나면 쌍둥이 교회가 있는 포폴로 광장이고,  우측의 언덕에 보르게세 공원과 박물관이 있다.  보르게세 공원에서 동쪽을 향해 걸으면 비토리아 대성당이 있는 퀴리날레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이 나오고 조금만 더 지나면 바로 테르미니 역에 도착한다.

  도심의 끝에서 끝을 걸어서 여행한다면 아주 쬐끔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나모나 광장에서라면 아주 쉽고도 간단하게 어느 관광지든지 걸어서 이동이 가능하다.(내 경우는 세 차례의 로마여행 모두를 바티칸만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걸어서 여행했다)

 

  하지만 내가 나보나 광장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과는 조금 다른데 있다.  

  로마의 모든 역사와 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가장 짙게 서려있는곳이 또한 나보나 광장이겠으나,  나에게 있어서 나보나 광장이 특별하게 생각되는것은.........  이곳에서 위대한 두 명의 천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나보나 광장이 이토록 크게 여행자들과 현지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의 핵심에는 바로 이 두 천재의 역활이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다시피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원한 도시 로마를 아름답게 조각하기 위하여 태어난 천재' 라고 불리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가 바로 두 사람중 한 명이며,  다른 한명은 '그 누구도 흉내를 내거나 모방조차 허락치 않는 바로크 건축의 전설'로 남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로서 드물게 그들의 생년까지를 기록한 이유는,  이들이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훨씬 능가 할 정도의 강력한 라이벌로써 당대에 이루 형용할 수 없을만치 많은 신화나 전설 같은 마찰과 반목의 역사를 만들어 냈었기 때문이다.

  나보나 광장에는 두 사람의 위대한 천재성과 그들의 경쟁에서 파생된 전설들이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것이 나보나 광장이 더욱 아름답고 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며 소중한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이제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 (천사와 악마)의 후반부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대성당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에서 얻은 단서를 쫓아서 나보나 광장의 베르니니가 만든 4대강 분수로 달려간 것이다.   일루미나티를 사칭한 테러범의 예고대로  물을 상징하는 원소의 낙인이 가슴에 찍힌 바치아 추기경이 범인에 의해 휠체어에 묶인 채 분수에 떨어져 익사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범인이 살인을 예고한 밤 열 한시에 정확하게 벌어진 사태였다.  하지만,  부랴부랴 서둘러 여기까지 쫓아 온 랭던의 기지와 명철한 두뇌의 덕분인지  이들은 범임의 예측을 뛰어넘어 살인이 막 실행되려는 찰라에 이곳 현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주변인들의 도움을 얻어서 랭던 박사 일행은 극적으로 마지막 살인을 방지하고 납치되었던 바치아 추기경을 구출한다.  그리고 추기경의 입에서 이 모든 사건이 산탄젤로 성의 지하감옥에서 계획 실행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또한 범인은 랭던 박사와 함께 했던 바티칸 수비대와 경찰들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된다.

  마지막에 결국 범인은 밝혀지고 사라졌던 반물질도 찾아내서 해결이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대단히 불만족스러울만큼  허망하고 비현실적이다.  이래서야 어디 성직자를.....  교회를......  신(神)의 존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싶어질 정도이다.

  성스러움도(聖) 찾아볼 수가 없고,  정의는(正)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하며,  이 세상에 진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해서 얻어지는 것이 결국 무엇이란 말인가?

  신(神)은 도대체 어디에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혹여 신(神)은 수명을 다 해서 사라질 수 있다손쳐도,  결단코 교회(성직자)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유지가 될 것이다.  이미 그들의(교회 지도층) 역량은  신이 경지를 초월해서 넘어서고 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도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이런 생각이 반복적으로 자꾸만 고개를 들게되는 것은 왜 일까?

  지금의 정형화된 교회는 초대교회에 배해서 너무도 많이 변질되었다고 생각된다.  교회가 모든 기득권을 버리던가.......  아니면 신(神)께서 교회를 버리시던가..........  결론이 나야지만 남은 인류에게 희망과 미래가 그나마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피안재의 고백)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은 처음부터 광장이 아닌 경기장을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그래서 AD. 86년 도미티안 황제가 이 건물을 완성하였을 때에는 이곳을 '서커스 아고날리스' 라고 불렀다.  나보나의 어원은 그리이스어 '아고네'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데,  진화한 '나보나'는 '커다란 배'를 의미 한다.  로마 도심의 한복판에 들어선 커다란 경기장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게되면 영락없는 커다란 배의 형상이 영락없어 보이니 그렇게 이름지어진것이 당연한 듯 여겨진다.

  흰색 대리석으로 뒤덮혀 최대 3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던 아고날리스 경기장은 초기에는 콜로세움과 차별화된 경기장을 목적으로  고대 그리이스의 올림픽을 모방한 누드 체육대회는 물론 소녀들만의 체조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경기장의 주변으로는 빼곡하니 술집과 유흥가들로 넘쳐났다.  매춘부들이 길거리에 나서서 호객행위를 하는가 하면 여성 노예를 매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검투경기나 맹수와의 싸움에 익숙해진 로마시민들에게 서커스 아고날리스의 경기는 점차 흥미를 잃어 쇠퇴의 기로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서기 217년에 벼락이 콜로세움의 지붕을 내리쳐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다.  콜로세움은 이전에도  여러차례의 재난을 당한적이 있었으며 그때마다 서둘러 복원이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217년의 벼락은 콜로세움 상층부의 목재건축부분을 전소시켰으며 콜로세움의 이곳저곳에 복구가 어려울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결국 화재로 인하여 회복이 힘들어진 콜로세움을 대체하기 위하여 아고날리스 경기장이 재단장 되었다.  전차 경기가 열리고 검투 경기가 도입되었다.  심지어는 경기장에 물을 가두어 호수를 만든 뒤  고대 그리이스의 해상전투를 재현하는 나우마치아(Naumachias) 공연이 해마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더니만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에 이전하여 새로운 비잔틴제국을 건설하자 로마는 더 이상 과거의 번영을 구가할 수 없게되었다.

  첫번 째 밀레니엄이었던 서기 1.000년이 지나면서 로마에 남은 유일한 지배계급으로 급부상한 바티칸은 공공질서 확립을 이유로 교황령을 내려 모든 경기를 제한하였으며 경기장 자체를 페쇄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때부터 서커스 아고날리스는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교회나 다른 공공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부족한 석재를 콜로세움은 물로 아고날리스 경기장의 흰대리석을 마구잡이로 뜯어내 가져가기 시작했다.  성직자나 고위 관리나 인근의 부자들도 막무가내로 석재들을 반출하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웅장했던 아고날리스 경기장은 주춧돌과 포장된 바닦만 남게 되었다.

  흰대리석으로 덮인 전차경기장이 사라지자 그 자리엔 덩그러니 커다란 공터만 남게 되었다.  그러더니 어느날인가부터 인근의 캄피돌리오 언덕 인근에 서있던 시장이 조금씩 조금씩 이 텅빈 공터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전차경기장이 시장으로 변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이곳을 나보나 광장(커다란 배 형태의 광장) 이라고 새롭게 이름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1.400년에 이르자 나보나 광장은 로마에서 가장 크고 번창한 과일 채소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그러자 이곳에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주변 정리는 물론 새롭게 포장 공사를 벌이면서 로마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광장으로 거듭나게되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서커스 아고날리스(좌).  그 자리에 건설된 현재의 나보나 광장(우)

 

전차 경기장이 뜯겨 나가고 새롭게 정비된 중세의 나보나 광장.

 

3개의 분수가 완공되고, 성녀 아그네스 성당이 광장을 내려자 보고있는  르네상스 시대에 완광된  나보나 광장 전경.

 

나보나 광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역시나 4대강 분수와 성 아그네스 성당의 감추어진 뒷이야기가 아닐까?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3년 재위) 시기에 나보나 광장에 3개의 작은 분수가 설치되었다.  이곳에 들어선 과일 야채시장에 마차 가득 짐을 싣고 드나드는 소나 말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레고리 13세는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교황이면서도,  서민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자금 조달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으며 권세가들의 재산과 토지를 약탈하는 일에도 전혀 주저함이 없었기에 일부에서는 다소 부정정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빈민구제와 제도적 개선과 공공시설의 확충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보기드문 교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럼 서양에서도 성명학이나 사주팔자가 통해서였을까?  그레고리오 14세의 이야기를 짚어보기로 하자.

  1590년 교황 우르바노 7세가 선종하자 곧바로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차기 교황을 노리는 강력한 추기경들이 운집한 시기여서 콘클라베는 상당한 기일동안 계속 지연되었다. 석 달을 훌쩍 넘긴 1590년 12월 5일에서야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던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했던 여러 추기경들을 재치고 새롭게 교황 그레고리오 14세에 등극한 사람은 밀라노 출신의 니콜로 스폰드라티 추기경이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변이었다.  추기경들 간에 이합집산 세력을 규합하고 서로 견제하였는데,  자신이 뽑히지 않는다면 강력한 상대도 절대로 선출되어서는 안되고 그 보다 못한 차선책을 선택한다는 세속적인 옳지않은 풍토가 신성한 바티칸에서도 버젓이 적용되었던 사례라 하겠다.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오 14세에 등극한 니콜로 스폰드라티는 다음날 콘클라베에 참석했던 모든 추기경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는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난밤 대체 무슨짓을 한 것인지 아십니까?'

  교황의 직분이 어떤 막중한 자리인지, 어떤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지,  그러자면 적어도 어떤 심성과 학식과 덕망과 지위에 걸맞는 굳건한 신앙심이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처지를 잘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원망이었다고 이해하고 싶다.  과연 그에 걸맞는 교황은 얼마나 되었을까?

  어찌되었던 간에 중세 시대에 벌어진 모든 악행의 중심 혹은 배경에는 항상 교황, 교회,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성직자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가 양의 탈을 쓰고서 말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사도궁전에 교황의 거처가 마련되었기는 하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동안 교황들의 거쳐였던 라떼라노 궁전이나 새롭게 완공된 퀴리날레 궁전을 드나드는 교황들에게 로마 도심을 지나 테베강 건너의 바티칸에 이르자면 반듯이 나보나 광장을 지나가게 되어있었다.  교황을 비롯하여 로마에서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점차 이곳 나보나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나보나 광장에 서서히 짙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성기를 지난 르네상스의 막바지이자 바로크 라는 새로운 문예사조 탄생의 사이에서 여러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세속의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하리만치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싸움에 화가. 조각가. 건축가. 인문학자. 과학자들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은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고,  다신 없을 새로운 시대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이 전쟁은 인류에게 참으로 고귀한 많은 문화유산을 남기기도 했지만,  잠시 들렸다가는 많은 여행자들은 여전히 왜곡되고 변질된 허소문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진실인것 처럼 믿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와 분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맞짱이라 하겠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다툰 희대의 라이벌인것은 맞겠으나,  분수 조각상이 교회의 꼴을 보기 싫어서 천으로 머리를 감쌌느니,  교회 안의 마리아 조각상이 마치 '내가 언제 뭘?' 하는 듯한 포즈로 분수쪽을 향하고 있느니 하는 소문들을 모두 허구를 넘어 가짜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여행관계자들은 이런 허구를 재미삼아서 늘어놓기도 하고,  단순한 여행자는 이를 참으로 신기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해들은것으로 착각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웃지못한 씨츄에이션이 반복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복잡하고 구도나 이해가 다소 버거울 수도 있는 이야기가 되겠으나.......  이제 나보나 광장을 둘러싼 희대의 전쟁터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하자.

 

 

 

 

 

 

 

 

 

 

 

 

 

 

 

 

 

 

 

 

 

 

 

 

 

 

 

 

  중세 시대의 교황(PaPa)은 세상 최고의 권력자이자 부자였다.

  교황청에 기거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셨다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세속의 황제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것이다.  세상의 이름난 통치자나 황제들을 보면 대부분 공(功)과 과(過)가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중세의 교황에 대하여 여기에다 조금만 더 보탠다면 이 세상의 폭군이나 나쁜 황제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보따리 위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까짓것 벌일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서슴치 않고 저지른 악(惡)의 화신이 대부분의 교황들이었다고 욕이라도 실컷 퍼부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사건으로 인하여 벌어진 희망에 찬 구원의 세상이 아니라,  교황과 그릇된 고위 성직자들만을 위한 그들의 놀이터였으며,  신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란 존재는 그들에게 한낮 심심풀이 땅콩이었다.

  막대한 권력과 부는 더 큰 탐욕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사치와 향락으로 인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교회에서 대부분을 생활하면서 넘치도록 풍요로운 접대를 받고,  세상사람들이 모두가 앞다투어 찾아와 칭송과 찬양을 멈추지 않으며,  온갖 귀한것을 아낌없이 바치는데 교황에게 왜 돈이 필요한 것일까?  빈민가에 찾아가 고아들 사탕사주는데는 얼마면 될까?  고아원이나 학교를 지어주는데 교회가 비용을 대는 것이지  교황이 사비를 들여 공사를 벌이는것은 아니지 않은가?  먹고 자고 입는데 자비로 들어야 하는 돈 정도라면야 모르겠으나 수백 억씩이나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걸까?  십계명에 '남의것을 탐하지 말라' 적혀있어서 고리대금업자를 짐승보듯이 멸시하던 당시의 기독교에서 교황은 어떻게 그 큰돈을 마련했을까?

  교황이 선종했다.  장례를 위하여 궁정처장을 비롯한 추기경단이 사도궁전의 교황침실을 들여다보고는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로 수십억원이 버젓이 방구석 한켠에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는 한 사람 교황의 사례가 결코 아니었다.  셀 수 없을만큼의 많은 교황들이 그렇게 생활해 왔던 것이다.

  교황 우르바노 7세는 단 12일을 교황 제위에 올랐다가 사망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멀쩡한 추기경이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교황 지위에 올랐는데 단 12일 후에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세계 최고의 바티칸 의료진은 모두 휴가중이었나?  그런가하면 재위 기간이 1개월, 아니면 2개월,  채 1년 남짓의 재위기간이 전부인 교황들이 상당한것을 보면 누구라도 충분히 짐작가는 부분이 있을 것이 아닌가?

  교황의 개인 사저인 사도궁전으로 향하는 브라만테의 계단에 가장 뻔질나게 드나든 사람들의 순번에 성직자들은 번외였다.   공개장소에서 떳떳하게 만날 수 없는 비밀 유지가 전제인 사람들이 주류였다. 

  1. 교황 출신 가문의 피붙이와 측근들.   

  2. 창녀와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귀족여인들.   

  3. 은행가를 비롯한 고리대금업자와 돈을 빌려쓰려는 유럽 전역의 왕실 귀족과 상인들.

  4. 군인 출신의 비밀스런 용병 집단과  사설 암살단체 요원  등등 이었다.

  5, 금화와 온갖 귀한 보물을 가득 실은 당나귀나 노새가 끄는 마차가 사도궁전까지 비밀리에 수도없이 오르락거렸다.

  지상 최고의 권력자 이지만,  그런만큼 그 권력을 향한 치밀한 암투와 음모와 비극으로 점철된 역사가 다른곳도 아닌 바티칸의 계단이나 담벼락마다 덕지덕지 피빛으로 물들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렌체에서 금융업(사실은 고리대금업)으로 진출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명문가로 일으켜 세운 로렌초 메디치는 일개 지방 소도시의 고리대금업자에서 벗어나 커다란 부를 일으켜 메디치를 최고의 명문가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반듯이 필요한 것이 전제된사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업적 식견과 수단이 남달랐던 그가 가지지 못한것은 권력이었다.  성공하기 위해선 권력이 꼭 필요했으며  세상의 권력은 대부분 교회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부를 바탕으로 권력을 향했다.  권력자들과 교류하고 점차 혼맥을 통해 권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교황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황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내 로렌초 메디치는 교황과 이면계약(?)을 통해 바티칸의 모든 자금을 담당 처리하는 공인 은행으로 인정 받게 된다.  이때부터 메디치 은행은 이 세상에 통용되는 돈의 대부분을 직접 관장하게 되고,  유럽 제일의 은행가문으로 눈부신 성장을 하게된다.  로렌초 메디치는 이 어마어마한 자금을 교황의 비호아래 마음껏 유용하며 커다란 이문을 남기는 법을 깨달았고,  거기에서 얻은 막대한 이익의 1/10 을 십일조의 명목으로,  또 교황의 배려와 은통에 감사해서 어마어마한 금화와 보물을 바티칸 교회가 아닌 교황의 개인 사저 금고로 열심히 퍼다 날랐다.

  로렌초는 메디치 가문의 은행업을 영원히 존속 시키고 싶었는데........  종신직이기는 하나 주로 고령에 접어들어서야 교황에 등극하게되는 이유로 교황의 후원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황이 선종하여 새로운 교황이 등극하여 혹시나 바티칸 금고의 운영권을 다른 은행에 넘기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곧 몰락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로렌초 메디치는 보다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바티칸의 금고 뿐만이 아니라 교황청을 통째로 차지하고 싶어진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들을 217대 교황(레오 10세)에 오르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조카를 219대 교황(클레멘스 7세)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피렌체를 차지한 메디치 가문은 가문 출신의 교황들을 통해 로마는 물론 온 유럽을 마음대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가진 막대한 권력과 엄청난 부를 이용해 르네상스 탄생의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긍정적인 평가로는 기반을 닦은것이지만,  부정적인 평가는 그렇게 권력과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와  후대에 텨져나올 역사적 평가를 두려워하여 이를 무마코자 예술 문화 분야의 지원으로 이미지 쇄신을 한것이라 평가)

  이는 메디치 가문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코시모 1세 시대에 들어서 또 한 명의 232대 교황(레오 11세)를 탄생시키면서 바야흐로 유럽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유럽 전체의 부자와 권력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는 모든 가문과 사람들이 지켜보고 알게되었다.

  '부자가 되려면 메디치에게서 배워라.'

  '더 큰 부자와 최고 권력자가 되려면 메디치가 어떻게 했는지를 잘 생각해 보라.'

 

 

 

 

 

 

 

 

 

 

 

 

 

 

 

 

  지금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이 생겨나기 까지의 역사를 들여다 보려면 먼저 한 가문의 내력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좀 색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나보나 광장은 팜필리 가문의 역사이고, 팜필리 가문이 곧 나보나 광장의 역사' 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별로 무리일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역인 이탈리아 반도의 북동쪽 페루자 지방의 구비오(Gubbio)에 살면서 나름 름으로 부를 이루고 어느정도 지역 유지로 대접받는 삶을 살던 카밀로 팜필리는 자신의 피붙이 일가족 모두를 데리고 멀고 먼 로마로 이주 하였다.  당시 팜필리 가문의 수장이었던 카밀로의 야심이나 목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후에 그가 벌였던 행적들을 들여다보면 어느정도 추론이 가능해진다.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뛰어넘을 정도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지극히 높고 놀라운 위력을 지녔다. 교황과 교회의 생각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이 세상엔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새로 완성된 교황청(성 베드로 대성당)은 천국과도 같았고,  로마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자 천국으로 불려질 정도로 세상의 중심이었다.  거기에다가 르네상스라는 가히 혁명과도 같은 문예사조는 로마인들의 삶과 생각과 현실에 대한 모든것을 바꾸어 놓았다.  로마는 그야말로 풍요와 번영의 상징과도 같았다.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수많은 명문가들이 새롭게 등장했다.  과거 로마의 명문가는 고대로마제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었지만,  지금의 명문가는 교황을 배출하거나 능력있는 추기경을 여러명 배출하는 가문이 명문가에 속했다.  내노라 하는 부자들을 많았지만,  교회에 관련된 명문가들의 권력과 부에는 미치지 못했다.

  변방의 촌동네에서 유지로 살아가는 삶이 로마의 길거리를 배회하는 강아지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카밀로 팜필리는 서너 차례의 로마 방문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로마에서 새롭게 원대한 꿈을 이루어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일가족 모두를 이끌고 먼 로마까지 이주해 온 것이었다.

  그는 로마에 대해서 제법 오랫동안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고 연구를 했다.  로마인들의 생각과 습관에서 시작해 돈의 흐름과 권력의 이동에 대해서까지 세세하게 분석한 결과 자신이 생겼을때 과감하게 이주를 강행하였던 것이다.

  그가 로마에서 첫 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나보나 광장이었다.

  과거 고대 로마의 아고날리스 경기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커다란 시장이 들어서고 날마다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교회와 귀족들과 부자들이 이 광장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보나 광장의 변화와 흐름을 주시하고 있는 그 사람들 중에 바르베리니(Barberini) 가문도 있다는 사실을 카밀로는 잘 알고 있었다.  카밀로 팜필리는 현세의 최고 권력자인 우르바노 8세 교황의 출신 집안인 바르베리니 가문을 연구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고,  나아가 극복해야 할 목표로 설정했다.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공인을 받기 전인 AD. 304년 전후의 시기는 가장 극심하게 종교적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그 해 1월 21일에 아주 부유한 로마가정의 열세 살짜리 소녀가 목이 잘리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로마제국의 태양신인 베스타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기만하면 살려주겠다는 총독의 약속과 회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미모가 유난히 뛰어났던 아그네스(Saint' Agnes)에게는 수많은 청혼자들이 몰려들었다.  황제의 조카와 총독의 아들까지 그 무리에 기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기독교에 귀의한 그녀는 평생 순결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서원까지 한 몸이었다.  하지만 청혼은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거듭 거절을 하다 못해 '이미 정혼자가 있다' 라고 밝힌것이 화근이 되어, 청혼 거절을 모멸로 받아들인 귀족의 고발로 결국 기독교인이 들통나버리고 체포되었다.  심지어 아그네스를 법정에서 심판하여야 하는 총독마저도 그녀에게 매혹되어 배교를 하면 선처를 해주겠다고 약속할 정도였다.  아그네스가 거듭 거부를 하자 분노한 총독은 아그네스를 삭발을 시키고 나체로 만들어 길거리에 내세웠다. 그러자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던 남자는 장님이 되었고  그녀를 범하려던 남자는 그자리에서 즉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뿐이 아니라  삽시간에 치렁치렁 머기카락이 자라서 그녀의 나신을 가렸다고 전한다.  총독은 그녀를 아고날리스 경기장의 중간부분을 차지하고  늘어서있던 유흥가(매음굴)로 보내서 몸을 팔도록 시켰는데,  그 어떤 남자도 그녀의 곁에 다가서기를 두려워하였기에 다시 아그네스를 불이 활활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다 내던져 버렸다.  하지만 이 마저도 갑자기 불길이 양쪽으로 갈라져 비켜서고 하늘에서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자 결국은 귀신을 쫓는 마지막 방법으로 참수형을 집행해 버렸다.  아그네스는 그리이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의미한다.  하여 종교화를 비롯한 성인들의 상징물에 발치에 양이 있거나 아니면 양을 안고있는 성인은 틀림없이 성녀 아그네스 이다. 

  그녀는 아고날리스 전차 경기장의 중간부분 창녀촌 마당에서 참수당했는데,  기독교 공인이 이루어지고 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딸인 콘스탄티나 공주가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그네스 성녀의 무덤 위에 아주 작은 교회를 세워 주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아고날리스 전차 경기장도 페허로 변하더니,  이곳저곳에 건축자재로 뜯겨 나가고 텅빈 잡초더미 공터만 남고 말았다. 지금도 나보나 광장의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어느 상가의 안쪽이나 살림집이나 레스토랑의 어느 벽이나 지붕이나 기둥으로 사용되고 있는 아고날리스 전차 경기장의 잔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울러 이 광장의 지하 유적은 아직도 미발굴 상태라고 하니.......  맘먹고 어디든 한 번 파볼까? 

  페허가 된 뒤로는 소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공터 한쪽으로 작은 교회가 하나 외롭게 남아있은 뿐이었다.  양치기와 떠도는 유랑자들만이 이 작은 교회를 알고 찾아와 기도를 올릴뿐이었다.  5백년 이상을 전차 경기장 공터와 허름하고 아주 작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했다.  그러다가  캄피돌리아 언덕 아래 늘어서 있든 시장중에서 서서히 미리려나기 시작한 야채와 과일 가계들이 하나 둘 이곳으로 옮겨오기 시작하더니 점차 시장으로 확대되었다.  시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가면서 아그네스 성녀를 기리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만 갔다.  성녀에게 드린 기도의 덕분으로 병이 낮는사람과 돈을 버는 사람이 생겨나면서 교회의 문지방이 닳을 지경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교황 칼리스터 2세는 1123년에야 비로소 작은 예배당을 제대로 된 작은 성당으로 확장 시켰다.  교회 앞의 광장에 들어선 시장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때는 사람들이 이곳을 캄포 아그네스(아그네스 광장) 이라고 불렀다.

  다시 5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페루자 지방의 구비오에 살던 카밀로 팜필리가 그의 일가족을 모두 이끌고 바로 이곳 캄포 아그네스에 도착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성녀 아그네스 성당에서 200 미터쯤 떨어진 비아 델마니아에 처음 주택을 구입했다.  당시의 개인 기록에 '팜필리는 닭과 함께 사는 테론(Terrone)' 이라는 이야기가 있는것을 보면, 로마에 입성한 카밀로는 장사를 통해 부를 축척해 나간것으로 보인다.  '테론' 이라는 용어가 '농부'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남을 비아냥 거리거나 비하 하는 표현으로 쓰이는 점을 감안하면  본인이 직접 나서거나 사람들을 두고 닭이나 정육점은 물론 다양한 장사에 수완을 발휘해 남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유발시킬 정도로 이 지역에서 돋보였던듯 싶다.  카밀로 팜필리는 벌어들이는 돈으로 온통 부동산을 구입했다.  처음 사들인 비아 델마니아 주택에서부터 옆으로 쫄로로니 닥치는 대로 주택을 사들여서 마침내 아그네스 성당과 담벼락을 같이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로마의 이곳저곳과 변두리 농장을 사들였다.

  카밀로는 온가족을 거느리고 자주 아그네스 성당을 찾았다.  왕족과 귀족들이 저마다 자신들만의 예배당을 만들어 꾸미고 가족 묘지로 위세를 보이는것 처럼,  아그네스 성당은 팜필리 가족 전용 성당이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그네스 성녀가 팜필리 가족을 지켜줄것이라고 믿었다. 카밀로는 보다 큰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회와 귀족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분명히 바르베리니(Barberini) 가문이나 보르게세 가문이나  메디치 가문 같은 롤 모델과 목표가 존재했다.  하지만 번번히 바르베리니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서 제지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부와 권세를  거머 쥔 상류사회는 아주 멀고도 높은 곳에 우뚝 솟아있었고,  그곳으로 가는 길목마다 바르베리니 가문이 철옹성 처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해 낙담하고 좌절감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채 카밀로 팜필리가 사망했다.

 

 

 

 

 

아그네스 성녀(Saint' Agnes).  항상 양과 함께 등장한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Saint' Agnes in Agone Chuch)

 

 

 

 

 

 

 

   사망한 카밀로 팜필리(Camillo Pamphili)에게는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Giovanni Battista Pamphili)'와 '팜필리오 팜필리(Pamphilio Pamphili)'라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사실 팜필리 가문에는 잘 드러내놓기를 꺼려하는 비밀이 한 가지 있었는데, 팜필리 가문의 조상중에는 약 1백 오십년 전에 교황을 지낸 알렉산더 6세가 있었다.  교황청의 유구한 역사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게 온갖 악행을 많이 저지른 극히 소수의 부류에서도 최고의 정점에 있었던 이유로 집안의 내력을 밝혀보았자 이득보다 손실이 클것이기에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 6세가 특히 여성편력과 파악할 수 없을만큼의 사생아를 만들었기에 그의 핏줄을 하나하나 판별하기도 불가능할 지경의 상황에서 팜필리 가문도 그 어디쯤엔가 연줄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아니면 핏줄속에 남다른 성분이 존재했음일까?

  장남인 바티스타 팜필리는 로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의 길을 걸으려 했는데,  교황청을 법률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다가는 어느순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진로를 바꾸어 버리게 되었다.

  바티스타 팜필리는 동생인 팜필리오에게 아버지 카밀로가 꾸려오던 집안의 모든 일을 맡기게 된것을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후로 바티스타는 바티칸에 들어가  나폴리. 프랑스. 스페인의 교황청 소속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대신 세속적인 모든 무거운 짐을 이제 동생 팜필리오가 떠맡게 된것이다.  하지만 팜필리오는 세심한 꽁생원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호탕한 풍류남아였던 것이다.  엄청난 부를 이룬 한 가문의 수장이 되자.......  그만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고 말았다.  도박과 술과 여자와 가문의 재산을 축내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간섭하거나 제재할 수가 없었다.  팜필리오를 제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형은 교황청의 막중한 일로 너무나 먼 곳에 나가 있었다. 팜필리오 가문이 부채더미에 파뭍히기 시작했을때........  팜필리오가 갑자기 허무하게 사망했다.

  스페인에서 이 소식을 듣고 형이 허겁지겁 로마로 돌아왔을때.......  이젠 동생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문의 몰락이 목전에 닥쳐있었던 것이다.  형은 가문을 위해 동분서주 쫓아 다녔다.  팜필리오의 자녀들을 아직 너무나 어렸고,  집안에서 누군가 대신 일을 맡아줄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가속들을 단도리하고 빚쟁이들을 찾아다니며 상환 유예를 사정했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귀족이나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자금 융통을 부탁해 보지만........  아직 교황청의 실질적 실세가 아닌 바티스타 팜필리에게 막대한 자금을 융통해 줄 사람이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정치 군사적인 대립 양상이 전쟁으로 치닫게 되자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바티스타 핌필리를 특사로 파견한다.  로마에 남아있는 제수와 조카들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게 되었지만,  이때의 공로로 이제 바티스타 팜필리는 교황청의 추기경에 서임된다.  로마로 돌아 온 그의 지위와 권위는 이전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외교적 역량을 고스란히 인정받고 있는 교황청의 추기경이었던 것이다.  빚쟁이들의 독촉이 우선 사라졌다.  바티스타 팜필리는 특히 조카의 교육에 힘썼다.  자신은 이미 성직자의 길로 나섰던 만큼  아버지 카밀로 팜필리가 꿈꾸고 노력했던 가문의 미래는 모두 조카들의 몫이 될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가족에 대한,  특히나 조카에 대한 바티스타 팜필리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것은 죽은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도 포함되었다 하겠다.

  1644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선종했다.

  8월 8일에 개최한 콘클라베는 9월 4일이 되도록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을 양강으로 분할하고 있는 프랑스계의 추기경들과 스페인계의 추기경들이 저마다 사활을 걸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추기경을 당선시키려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이번 콘클라베는 결말을 내지 못할수도 있어 보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모두 교황직을 빼앗기면 몰락이라고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자 추기경들도 성당 밖에서 쳐다보는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하여 그들은 상대의 적극적 추천 후보를 우선 배제하고,  프랑스에게도 특별히 이롭거나 해가되지 않을 인물을,  스페인에게도 특별히 이롭거나 해가되지 않을 제 3의 인물을 추대하기로 어렵게 합의가 되었다.  9월 5일 교황청 굴뚝에 흰연기가 피어 올랐다.  새로운 교황이 탄생한 것이다.

  새롭게 추대된 교황은 자신의 이름을 '이노센트 10세(Pope Innocent X)'라 지었으며, 앞으로 11년 동안 이세상 최고의 권력과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새로운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본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Giovanni Battista Pamphili) 였으니,  페루자 지역의 산골 구비오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해서 가문을 일으켜보고자 헌신했던 카밀로 팜필리의 아들이었다.

 

 

 

 

 

 

 

 

벨라스케스 作  (교황 이노센트 10세 초상).  로마 팜필리 미술관 소장.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나보나 광장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얼핏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게 된다.

    - <내로남불> 이라 통용되고 있지만 기실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라는 고사성어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인면수심(人面獸心)>'행색은 사람이되 하는 짓꺼리는 그야말로 짐승'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권불십년(權不十年)>'자고로 권세란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의미로 <화무십일홍(花無百日紅)>과 함께 쓰인다.

    - <대처식육(帶妻肉食)>이란 '승려가 본분을 잊고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는다'는 의미로 한 마디로 다시말하면 '개판'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천번지복(天翻地覆)>'하늘이 날아가고 땅이 뒤집힌다'는 의미로 천지개벽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나보나 광장 하나를 설명하고자 함에 있어 이렇게 섬뜻한 단어들이 먼저 떠오름은 왜 일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그런 단어들이 의미하는 일들이 이곳 나보나 광장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한복판에는 바로 교회와 교황이 있었다. 모든 일은 그들에 의해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우고 저질러 졌던 것이다.(아멘!!!!)

 

 

  교황 이노센트 10세에 오른 팜필리아 가문의 장남 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가 가장 먼저 시도한것은 교황청의 재산인 공적자금을 횡령한 혐으로 바르베니니 가문을 조사와 재판에 회부하는 명령서에 서명한 일이었다.  그것이 단순하게 교황청의 개혁을 위해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여서 였을까? 아니면 아버지 카밀로 팜필리의 희망과 노력을 좌절시킨 지난날에 대한 앙갚음이었을까?  당대에 로마에서 보르게세 가문이나 바르베리니 가문을 대체하거나 그들 이상의 권력과 부를 나눠가진 가문을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바르베리니 가문은 바로 전임 교황인 우르바노 8세(마페오 바르베리니)를 배출한 가문이었던 것이다.  우르바노 교황이 재직한 21년 동안 로마는 아니 유럽의 기독교 국가는 곧 바르베리니 가문의 지배를 받는 세속적 국가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들의 권세는 엄청났었다.

  사실 우르바노 8세의 업적은 교황의 역사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종교 개혁의 거센 파도와 대항해서도 카톨릭을 나름 수성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천문학자 갈릴레이도 어찌되었건 굴복시킨것이며 반종교개혁에 맞서기 위해 예수회(제수이트교)를 막후에서 지원한것도  바로 그였다.

  그런가하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완공과 후기 르네상스의 완성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유독 예술과 문학에 조예가 깊단 교황은 지안초 베르니니를 발굴하고 완성시킨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흔히 로마를 베르니니를 위한 야외 조각 박물관이라 하는데, 그러자면 우르바노 8세는 당연히 그 로마박물관의 관장이나 수석 큐레이터였을 것이다.  우르바노 8세가 빠지고 나면 베르니니는 어쩌면 그저 솜시 좋은 석공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베르니니의 모든 작품과 건축 배경에는 언제나 우르바노 8세의 성원과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에 모든것이 가능했다.  거기에다 우르바노 8세는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 같은 화가들을 마지막까지도 아낌없이 후원했다.  이러한 우르바노 8세의 예술 문화에의 관심과 후언에서 생겨난 최고의 걸작을 꼽으라면 당연히 베르니니의 최고작품들이 먼저 거론되겠지만,  그가 마음속에 교황인 자신뿐만이 아니라 출신인 바르베리니 가문의 권위를 만천하에 드러내놓기 위하여 제작한 최고 작품은 아마도 바르베리니 궁전의 대형 객실 천장에 그린 천장화 '하느님의 섭리와 승리( Trionfo della Divina Provvidenza)' 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얼마나 놀랍도록 자신에 차있고 거만함을 넘어서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태도인가?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만이 하느님의 권능과 권세에 가까이 갈 수 있으며,  그런 자신을 배출한 바르베리니 가문이야 말로 신의 의지와 배려로 선택된 어떤 아주 특별하고도 고귀한 가문이라는 선언을 세상을 향해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궁전이 들어서 있는 바르베니니 광장의 한복판에는 유명한 베르니니의 트리톤 분수가 있다.

  돌고래들이 조개를 받치고 있는 형상에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트리톤이 머리위로 들고 서있는 소라껍질의 속에서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가만히 살펴보면 교황의 삼중관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고 전해지는 두 개의 천국 열쇠와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세 마리의 꿀벌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광장의 한 켠으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바르베리니 궁전이 들어서 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선출된 바르베리니 가문의 마페오 베르베리니(Maffeom Barberini)는 처음 구입했던 파르네제 빌라에서 나와 밀라노의 실력자 스포르차로 가문으로부터 궁전을 구입한다.  평소 예술과 건축에 조예가 깊던 교황은 아주 기발한 생각으로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창의적인 바로코 양식으로 궁전을 재건축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우르바노 8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던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와 그의 제자인 로렌초 베르니니(Bernini)에게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되었고,  곧이어 베르니니는 우르바노 8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당대의 예술 건축 분야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가 된다.  1633년에 궁전 리모델링 공사는 마침내 마무리 되었고, 화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가 그린 400미터 가까운 천장화 '신의 섭리와 승리'를 보는 순간 교황은 환호성을 질렀을 정도였다.

  새롭게 완성된 성 베드로 대성당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 세상 최고의 권력과 부가 그곳에 모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장소가 바로 지금 교황 자신의 처소인 것이다.  그런 교황에게 있어서 그 뿌리는 바르베리니 가문이었다.  이제 세속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완성하여 자신의  가문까지도 특별히 선택된 최고의 가문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다시금 확실하게 알리고자 이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우르바노 8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궁전 자체를 아주 거대한 고대 미술품 화랑으로 탈바꿈 시켜나갔다.  바티칸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서 미술품에 관해서 견줄만한 곳은 빌라  보르게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랄만한 작품들을 끊임없이 사들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당대 최고라 불리는 카라바조. 틴토레토. 라파엘로 등의 작품을 수집하였고,  모든 건물의 내부를 신화적 내용인 담긴 작품들과 프레스코화 벽화로 가득 채워나갔다.

  이 모든 비용의 출처는 단 한 곳뿐이었다.

  빌라를 사들이고, 다시 궁전을 사들이고, 궁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재건축하고,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고,  고대 미술품을 닥치는대로 사들이고,  사방에 바르베리니 가문의 영지를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사들이기 시작하였는데.........  그 어마어마하고도 엄청난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돈의 출처는 오로지 하나.........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왔다.

  교황을 직업인 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는 순간 그것은 어쩌면 신성모독이 되고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교황에게는 월급도 없지 않겠는가?  하긴 교황이 돈 쓸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그 많은 돈의 출처나 명목은 뭐지?

  혹.......   교황 직책의 판공비?

 

 

 

 

 





베르니니 작품인 (트리톤 분수). 바르베리니 광장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광장 주변의 풍경도 많이 변해갔다.

 

 

 

 

 

 

 

교황의 삼중관과 천국의 열쇠,  그리고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세 마리 꿀벌이 조각되어 있다.

 

비교적 인근인 아랫쪽에 역시 베르니니가 제작한 (꿀벌 분수)가 있다.  이곳에서 비로서 로마의 번화가인  베네토 거리가 시작된다.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는 바르베리니 궁전의 옛 모습.    현재는 로마 국립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르베리니 궁전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주인공 오드리 햅번이 머무는 숙소로 등장해 엄청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바르베리니 궁전은 1895년부터 궁전의 일부를 (국립 고대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파에 떠밀려 다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방문을 극도로 꺼리는 나로서는 굳이 하나를 로마에서 고른다면 이곳 (국립 고대 미술관)을 택해 나름 망중한을 누릴 수 있을것이다.  피렌체의 우피치는 아주 많이 붐비는 미술관이기는 하나 적어도 르네상스를 마음껏 누리려면 그 정도의 번거로움과 줄을 선 긴 행렬의 고통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르베리니 궁전에 설치된 국립 고대 미술관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간추려서 몇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물을 완성하기 위하여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에게 총공사 책임을 맡겼다.  마데르노는 두 명의 청년을 데리고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한 명이 수석 조수이자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로렌초 베르니니였고.  다른 한 명이  집안의 혈육인 조카를 제자로 가르치고 있던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였다.  이렇게 보자면  바르베리니 궁전은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세 명의 건축가가 모두 참여게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건축물이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보는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역시나 희대의 두 라이벌은 이곳에서 한판 대결을 펼치게 된다.  베르니니는 정사각형의 나선형 계단을 만들었고,  보로미니는 바티칸 궁전의 브라만테 계단을 연상시키는 이중 나선형 계단을 완성 시킨다.  마차와 당나귀 수레가 오르내리던 브라만테의 계단에 비하자면 사람만 오르내리는 크기가 한참이나 축소된 형태이지만 건축적 아름다움은 오히려 보로미니의 계단이 더 멋지다고 말하겠다.  이 대결로만 한정짓는다면  보로미니의 한판승이라고 할 만하다.  역시 조각은 베르니니가 으뜸이고 건축은 보로미니가 더 매혹적이라 할 만하다. 

  다음으로는 우르바노 8세 교황과 바르베리니 가문의 권위와 성공을 내세우기 위하여 400여 미터에 이르는 회랑의 천장에 그린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신의 섭리와 승리)를 마음껏 감상하며 누릴 수 있는 여유의 축복일 것이다.  회랑의 이곳저곳에 복도 바닥을 침대삼아 드러누워있는 여행객을 종종 발견 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제 세상이다.  하긴 저렇게 덜렁 누워야지만 천장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다 싶어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여기 (국립 고대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은 라파엘로와 카라바조의 그림일 것이다.

  르네상스의 천재화가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니아)를 이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제빵사의 딸'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그림속 주인공은 바로 라파엘로의 연인이다.  신분의 격차와 라파엘로에게는 약혼자가 있는 처지였으면서도 두 사람의 열정은 아주 오랫동안 불타올랐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속에서도 라파엘로는 여러 작품속에 자신의 연인을 그려넣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놀랍게도 그림속에 등장하는 라 포르나니아의 팔뚝에 찬 팔찌에는 분명하게도 라파엘로 자신의 서명을 그려 넣었다.  라 포르나니아가 라파엘로의 것이라는 의미인지,  라파엘로가 라 포르나니아의 소유라는 것인지.......  유독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는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런가하면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카라바조의 대표작이 아닌가?  카라바조에 대해서는 피렌체에서 다시 거론하게 될것이다.  다만 이 그림이 전시되고 있던 중에 약 6년 전인가?  프랑스의 시골 다락방에서 집수리를 하던중에 이와 아주 유사한 그림이 한 점 발견되었다.  삽시간에 커다란 화제를 낳으며 전문가에 의해 여러차례 감정을 거친 결과.......  그것 또한 유디트을 소재로 카라바조가 그린 약간 다른 버전의 진품임이 밝혀졌다.  당시 예상 판매 가격이 1.600억이었으니........  헐.  그렇다면 시방 앞에 걸려있는 이 그림은 도대체 얼마일까?

  르네상스 초상화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 초상화)가 어찌된 영문인지 대영박물관을 마다하고 이곳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의외로 방문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짙은 여운으로 아주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그림은 누가 뭐라해도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화가에 의해서 베아트리체 첸치의 다양한 버젼 그림이 그려졌다.  화단에 등단하고 싶은 화가 지망생치고 베아트리체 첸치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 전한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고, '저 소녀는 지금 무슨 상황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고 싶다.  지금 내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묻고 싶다.  '당신의 지금 저 소녀의 표정에서 어떤 느낌을  떠 올리시나요?' 라고 말이다.

  놀랍게도 베아트리체 첸치는..........  그녀가 이세상에 살아서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표정을 지금 당신에게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이 지나서 그녀는 처형장에 끌려올라가 목이 자리는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베아트리체 첸치는 이탈리아 귀족가문의 아리따운 소녀였다.  그런 그녀를 친아버지인 프란체스코 첸치가 강간했다.  어려서 시작된 강간은 시간이 지나가면서도 멈추지를 않았다.  견디지 못한 첸치는 친아버지를 강간치상혐의로 당국에 고발했다.  하지만 당국은 아버지를 무죄방면하였고,  분노한 아버지는 그녀를 시골의 농장 창고에 감금시키고 그대로 방치하였다.  결국 첸치는 복수를 결심했다.  아버지의 악행이 어찌나 심했던지 아버지가 새로 데려온 계모 마저도 첸치의 복수 계획에 동참하였다.  오빠와 이복 동생과 하녀들을 포함하여 여럿이서 복수를 계획하고 아버지에게 몰래 독약을 먹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죽지를 않았다. 보복을 두려워한 이들은 결국 망치로 프란체스코 첸치의 머리를 두들겨 팼고,  죽은 뒤에야 실족사로 위장하기 위하여 다리난간 아래로 시체를 내던졌다.  결국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 사건은 로마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다.  법원은 유죄를 인정했고 시민들은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로마가 혼란스러워지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직접 나서서 사형을 언도했다.  산탄젤로 다리위에 사형대가 세워졌고,  살인에 가담한 한사람 한사람이 끌려나가 처형되었다.  베아트리체 첸치가 마지막 순서였다.  첸치는 주변에 몰려 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림속의 해맑은 표정을 지어보인뒤 그대로 처형장으로 올라갔다.

  카라바조의 작품이 곳곳에 보이고  귀도 레니의 작품 또한 여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의 작품을 대하면 항상 카라바조이 작품으로 오해를 하게된다.  작품 설명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으면 '카라바조에게 이런 작품도 있었나?' 하고 생각될 정도이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서둘러 다시 (나보나 광장)으로 되돌아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렇게 마냥 길어지다 보면 1년이 더 지나도 이번 여행을 도저히 마치지 못 할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베르니니에 의해서 바르베리니 궁전은 완공되었다.  바르베리니 완공 기념 공연 풍경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作   (신의 섭리와 승리)  천장화.
(신의 섭리와 승리) 천장화는  400 미터의 회랑 천장에 길게 그려졌다.  어마어마한 대작이다.

 

 

 

 

라파엘로 作  (라 포르나니아)

 

카라바조 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귀도 레니 作  (베아트리체 첸치 초상화)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베아트리체 첸치는 사제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했다.

 

한스 홀바인 作  (헨리 8세 초상화)

 

엘 그레코 作  (세례 요한의 세례)  (목자의 경배)

 

 

 

 

바르베리니 궁전의 창가에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조각상이 서 있다.  그의 삶이 과연 기독교적이었을까?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든 사각형의 나선 계단.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만든  타원형의 나선 계단.

 

흡사 바티칸의 사도궁전에 있는 옛 브라만테의 계단을 닮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있는 퀴리날레 언덕에서 나보나 광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가 상당부분 바르베리니 가문의 소유였다.  교황이 선사한 가문의 영지라 해도 무방하지 싶다.  우르바노 8세는 로마라는 도시 안에 바르베리니 라는 작은 봉건국가를 만들어 주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보나 광장은 현재까지도 로마의 가장 번화가인 코르소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21년 이라는 재위 기간 동안에 이 모든것을 만들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완공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고,  로마 영토 안에 이 정도의 바르베리니 가문의 영역을 확보하였고,  수많은 미술가와 건축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서 새롭게 부활한 르네상스 시대 흐름에 이바지한 공로가 적지 않았기에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영광이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바르베리니 가문의 부와 권세가 영원히 지속되는 이상,  이 모든것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낸 마페오 바르베리니(교황 우르바노 8세)를 향한 존경과 갈채가 영원하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진리를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인간이란 이렇게 부와 권세를 이용해 명예를 끝없이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남의 그런 꼴을 두고보지 못하는 부류가 엄연히 존재하는 아주 특별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차기 교황에 즉위한 팜필리 가문의 이노센스 10세(조반니 바티스타 팜필리)는 첫 번째 교황권 행사로 바르베리니 가문의 재산에 대한 조사와 재판 회부를 명령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21년 동안  전임 우르바노 8세 교황과 그의 출신 가문인 바르베리니가가 축적한 모든 재산에 대한 불법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재산(교황청)이 무분별하게 빠져나가고 도용되었다는 명목이었다.  전임 교황이 재위한 21년 동안 바르베리니 가문에서 정상적으로 수익 활동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돈을 벌지 않았는데 그동안 엄청난 세도를 부리면서 재산을  부동산을 마구 구입하고 궁전을 짓고 온갖 미술품을 사들이는 그 모든 행위들의 배경에 전임 교황의 비호아래 교황청의 공적 자금이 불법 유출 사용되었다는 사실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재판 회부는 물론 모든 재산의 동결과 압류와 압수가 뒤따랐다.  단지 교황이 바뀌었을뿐인데.......  21년간 이룩한 한 가문이 몰락하고 잿더미로 변하게 된 것이다.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던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과 함께 가문의 어린 막내였던 타데오 바르베리니까지 야음을 틈타 프랑스 파리로 도망쳤다.  프랑스파로 불리는 교황청의 추기경들을 이끄는 실세중에 실세인 마자랭 추기경에게 도망가 보호를 의탁한 것이다.  교황은 특사를 보내 피고인으로 전락한 추기경 형제를 로마로 소환 통보하고 이에 불응하거나, 6개월 이상 교황이 지시한 직책을 벗어난  추기경에 대해서는 콘클라베에 참여할 수 없음과 성직자 목록에서 삭제한다는 새로운 교황의 칙서를 발표했다. 마자랭 추기경이 이끄는 프랑스파가 이에 정면으로 대치하자,  교황은 교황령 산하에 있는 군대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아울러 바르베리니 가문의 전 재산은 그대로 몰수 되었다.  바르베리니 가문의 추기경들은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교황의 조카딸이 몰락한 바르베리니 가문의 막내인 타데오 바르베리니와 정략 결혼이 성사되면서 모든것이 다시 정상화되고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면 이때.......   웬만한 국가의 재산과 맘먹을 정도로 엄청나게 부를 이루었던 바르베리니 가문의 전 재산을 몰수하였으니,  다시 말해서 교황청의 재산은 더욱 크게 불어나고 재무구조가 이상적인 방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까?

  교황청의 재정이 얼마나 심각하였기에 오죽하면 면죄부를 팔고 성수까지 팔아야만 했을까 마는.......... 흑자 재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아니었다.  교황청의 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 그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간것이란 말인가?

  바르베리니의 재산은 모두 압류되고 환수되었음에도.........  돈은 교황청 금고에 들어오지 않았다.

  헐...........  지금 장난해?(궁금하면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그 분에게 여쭤봐야만 할 것이다.  그 분의 거룩한 이름으로.....  그 분의 뜻에 의해서 돈이 어디론가 모두 가게 되었고 쓰여졌으니까 말이다)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천문학적인 숫자의 금액이 회수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10세는 전임 교황 우르바노 8세와 그를 배출한 바르베리니 가문 사이에 벌어졌던 적절치 못한 관계와 거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바르베리니 가문의 추기경들을 파문하고 전 재산을 재판을 통해 압류하고 몰수했던 것이다.  교황의 직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였던 것이다.  기독교 교리의 정의를 구현하고 모든 신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시 곳으로 올바르게 인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 선택한 것이다.

  교황은 로마 카톨릭 안에 산재해 있는 모든 구태와 적페를 청산하여 올바른 기독교관을 확고하게 바로세우는 일이 하나님이 교황에게 부여한 소임이라고 확신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헐!!!!!!!

  교황에 즉위한지 2년이 지나고  모처에 엄청난 금액의 돈이 쌓여가자  교황은 참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게된다.

  어느날 교황은 건축가 지롤라모 레이날디(Girolamo Rainaldi)를 불러서 자신을 이 자리에 오게끔 헌신해준 가족들을 위한 궁전 건설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명한다.  리이날디는 이날부터 기고난다는 건축가들과 기술장인들을 불러모아 현재 나보나 광장 어귀에 기거하고 있는 팔필리 가문의 사람들을 위한 궁전 건축을 위한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먼저 궁전을 제대로 짓기 위하여 인근의 주택들을 매입하면서 주변 정리를 마치고, 최소한 바르베리니 궁전은 능가하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야겠다는 전제하에 설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헐!!!!!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거야 말로 적페의 대상이었던 바르베리니 가문의 전철을 따라하다니?)

  역시나 모든 비용은 교황에게서 은밀하게 제공되어 나왔다.

  하루는 건축책임자 레이날디가 교황 알현을 요청했다.  팜필리 궁전의 설계가 끝나고 본격적인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이 완성된다고 해도..........  광장(당시엔 아그네스 광장)이 정리가 안된채 방치된 상태라 너저분 할 뿐더러,  들어선 시장이 혼란스러워 보인다는 제언이었다.  아무리 폼나게 지어봤자 이대로는 영 폼이 안나게 생겼다는 말이었다.  교황은 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  결론은 광장을 제대로 주변정리를 하고,  민심을 생각해서 시장은 좀 깔끔하게 정리해서 유지토록 하고,  마차를 끌고 시장을 드나드는 말과 소를 위해 설치한 세 개의 조악한 분수를 제대로 새롭게 만들자는 결론을 내렸다.  광장을 제대로 새롭게 조성하여 마치 팜필리 궁전의 정원처럼 꾸미겠다는 복안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분수를 세 개씩이나 만들자면 우선 풍부한 물이 필요했다.  이곳에 사용되던 아그리파가 만든 수로는 먼 과거에 고트족의 침공때 파괴되어서 겨우 쫄쫄쫄 물이 흘러나오는 정도였다.

  누구에게 이 하수도 공사를 맡길 것인가?  레이날디의 일행들은 이미 팜필리 궁전 공사로 더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레이날디가 추천한 인물은 당대 최고라 칭송받던  로렌초 베르니니 였다.  하지만 이노센트 10세 교황에게는 왠지 베르니니가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베르니니가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것은 맞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전임 교황인 우르바노 8세가 유별나리만치 총애하던 사람이 아닌가? 우르바노 8세와 바르베리니 가문을 상징하거나 기념하는 모든 건축과 조각의 배후엔 언제나 베르니니의 탁월한 솜씨가 도사리고 있었다.  모두 때려부수고 없애버리고 싶어도 차마 그 훌륭한 작품성 때문에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베르니니라니.......

  '그래.  차라리 보로미니를 불러다 쓰는게 좋겠다........  조각이라면 모를까,  건축이라면 보로미니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옳거니.'

  그때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바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였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앙숙이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더우기 보로미니는 떡하니 누구에게 속한 배경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교황은 그날부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를 불러들였다.  중간에 부서진 수도교와 수로를 보완하고,  그 물길을 여기 광장에 분수를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끌어들이라는 요구였다.  보로미니도 곧바로 공사에 착수하였다.

  보로미니의 공사가  마침내 완공 되었다.  충분한 수량이 물이 나보나 광장까지 공급되었던 것이다.

  교황은 보로미니에게 광장에 설치 할 3개의 분수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했다.  3개의 분수 중에 가장 중요한 가운데 분수를 만드는데 있어서 전제를 달았다. 아피아 가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막센티우스 대전차 경기장에는 고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가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에서 가져 온 오벨리스크가 있었는데,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교황은 이 오벨리스크에 유독 관심이 깊었다.  하여 무조건 이 오벨리스크를 가져다가 광장의 한복판에 재건하는 전제로서의 아름답고 웅장한 분수의 제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보로미니는 즉시 오벨리스크 상태 점검과 이송 계획을 세워야 했으며,  더불어 새로운 분수를 설계해야만 했다.

  그런데.........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보로미니는 교황이 요구하는 바 대로의 분수 제작이 썩 내키지 않았던것 같다.  오벨리스크 재활용이라는 전제도 전제였지만,  오벨리스크의 훼손 상태도 매우 좋지가 않았고,  한창 건축에만 정신이 쏠려있던 시기에 분수라니.......  분수는 어디까지나 조각가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큰 그림을 그리는 건축가이지  건축에 속하는 일개 장식품이나 만드는 조각가가 아니라 생각하면서 교황의 처사에 불만을 쏟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보로미니는  오벨리스크를 활용하여 광장의 한복판을 장식할 분수의 설계를 교황에게 제출했다.

  이노센트 10세 교황이 실망을 넘어서 분노와 적대감까지 그대로 보로미니에게 토해냈을 정도로 졸속적인 설계안이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도대체 보로미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전날에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화가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야 말로 최고의 예술가라고 주장하면서 다툰적이 있었는데,  지금 베르니니는 자신이야말로 미켈란젤로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보로미니는 건축가야 말로 최고의 예술가라고 생각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보로미니가 제출한 설계도를 꾸겨서 휴지통에 내던진 교황은 이제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

 

 

 

 

 

 

 

보로미니가 그려서 교황에게 제출한 나보나 광장 4대강 분수 조감도.  충분히 열 받을만 하고도 남았겠다.(장난해?)
베르니니가 그려서 교황에게 제출한 4대강 분수 조감도.  당신이라면 어느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르바노 교황 8세의 재위 기간동안 로렌초 베르니니는 미술계의 최고 권위자로 영광을 누렸었다.  교황과 교회와 로마가 그를 원했다.  그는 교황청과 로마를 자신의 재주를 맘껏 뽐내는 하나의 개인 미술 전시장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고(차차 다음에 설명하기로),  그순간부터 베르니니는 교황과 교회와 로마로부터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밀려나는 계기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였다.  지난 10년 가까이 베르니니는 절치부심 명예획복을 위해 불철중 노력해왔다.  반면 그 10년동안 보로미니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우르바노 8세 교황이 선종하고 새롭게 보위에 오른 이노센트 10세 교황이 보로미니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을 때  베르니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새로운 교황이 전임 교황을 정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으며,  보로니니 자신을 전임 교황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때 베르니니가 갖은 절망감과 상실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아직도 교황청에는 전임 교황을 추모하고 베르니니를 아끼는 추기경들이 여럿이 남아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저마다 암울한 소식들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황은 나보나 광장의 개축을 위하여 시작된 토목공사인 상수도 사업을 보로미니에게 맡겼던 것이다.

  수도교를 완성한 보로미니에게 막센티우스 경기장의 오벨리스크를 옮겨와 4대강 분수를 건설하는 작업까지 맡겼다는 소식을 접했을때,  어쩌면 베르니니는 죽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 하면서 기다린 10년의 세월이 더 이상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그를 빠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베르니니는 교황청에 속한 한 추기경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게된다.  교황께서 보로미니가 설계한 4대강 분수의 도면을 보시고 대단히 분노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정적의 불행은 곧 다른 정적의 희망이 되기도 하고 행복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베르니니는 즉각 자신의 오랜 측근들을 불러모아  '4대강 분수 비밀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소식을 전해준 추기경을 통해 교황이 생각하고 희망하는 4대강 분수의 요건에 대해 상세한 소식을 전해 듣게된다.  베르니니는 이 프로젝트에 올인했다.  자신의 남은 인생 전부를 걸었다.  그것만이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자 전제조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성된 프로젝트는 우선 지지해주는 추기경의 손에 넘겨졌고,  혹 짜고치는 고스톱이라 여겨질까봐 이사람 저사람의 손을 거쳐서 마치 우연처럼 또는 운명처럼 마침내 교황의 책상 위에 놓이게 되었다.  어찌되었건 베르니니의 설계안은 그야말로 혁명적이라 할 만큼 세세하면서도 충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면서도 장엄한 멋이 넘쳐 흘렀다.

  베르니니의 설계도를 본 교황은 손벽을 치며 만세를 불렀다.  바로 그 자신이 원하던 바가 고스란히 도면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교황은 설계자를 찾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설계자의 소개란이 비어 있었다.  수소문을 해내 내려가자 마침내  그 모든것이 로렌초 베르니니에 의해서 준비된 계획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교황은 심각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타도이 대상으로 사건수습을 진행중인 전임교황과 베르니니의 관계,  자신이 이미 선택했던 보로미니와의 관계,  또 그간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사이에 벌어진 일들하며.......  보로미니에게서 설계안을 받아 실망했던 시점에서, 중간에 베르니니의 설계안을 받고,  마침내 최종 결심을 하기까지 근 1년에 걸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교황은 결정을 내렸다.

  '나보나 광장의 중앙에 설치할 4대강 분수의  건설을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설계대로 시행 할 것이며  그 총책임자로 베르니니를 임명한다' 교황의 칙서를 내렸다.   이 모두가 1648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보나 광장의 중심에 4대강 분수가 있고 앞쪽에 아그네스 성당과 왼편으로 팜필리 궁전이 있다.

 

팜필리 가문의 궁전은 현재 브라질에 매각되어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가 지롤라모 레이날디(Girolamo Rainaldi)는 베르니니 보다 한세대(29년)를 앞서는 나이였지만 당시까지도 활발하게 건축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1644년 새로운 교황에 즉위한 이노센트 10세는 베르니니를 재치고 레이날디에게 자신 가문(팜필리 가문)을 빛낼 수 있는 팜필리 궁전 건축을 의뢰해온 것이다.  레이날디가 구성한 위원회는 우선 나보나 광장의 한켠으로 치우친 영지를 아그네 성당의 부지와 연결되는 지점까지 매입하여 부지확장을 꾀한 후에야 토목공사에 돌입하게 되었다. 토지매입과 토목공사에 2년여를 소요하고,  1646년에 본격적으로 궁전의 건축공사에 돌입하게 되었다.

  교황의 개인사저라 할 수 있는 팜필리 궁전에 대한 이노센트 10세의 관심과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깊은 심중에는 '반듯이 전임 교황의 사저였던 바르베리니 궁전 보다 훌륭한 건물' 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궁전의 전면 벽채(파사드)가 어느정도 올라가자 현장을 방문한 교황의 눈엔 영 무엇인가 성에 차지않고 못마땅해 보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하나는 마무리 공사를 마쳐 완성된 건물이고,  하나는 한참 어질러 놓고 공사중인 건물인것을  중도에 비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을것이다. 어쨌거나 건축주의 심기가 불편하다는데에야.........  하여,  마침내 교황은 비장의 히든카드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를 불러냈다.  한창 줏가를 올릴대로 올려서 불철주야 바쁘기로 소문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보로미니를 불러왔다.

  교황 이노센트 10세는 보로미니를 팜필리 궁전 건설 현장에 파견했다.  현장을 살펴보면서 설계안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건설에 관한 레이날디의 의중도 파악해 보고..........  최소한 우르바노 8세의 바르베리니 궁전을 능가하는 건물을 만들고 싶으니,  혹시 수정하거나 추가해야 할 복안은 없는지를 모두 살펴보고 판단한 후에 보고서를 올려달라는 요구였다.

  괴팍한 심성의 보르미니로 알려졌지만,  30살 가까이 연장자인 지롤라모 레이날디에 대해서 보로미니는 상당히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레이날디와 베르니니는 적지않게 경쟁자로 부딪치는 면이 좀 있었다.  교황이 왜 보로미니를 파견했는지를 파악했을 레이날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자칫 자신이 내쫓기고 보로미니가 들어앉게될지도 모르는 판이었다.  하지만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4년여의 시간이 걸려서 팜필리 궁전은 결국 지롤라모 레이날디에 의해서 1650년 완공되었다.

  보로미니의 보고서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들 뿐이었다.  궁전의 건축현장이나 설계안의 문제 보다는  주변 환경의 개선에 주안점을 둔 보고서를 교황에게 올렸다.(1647년의 일이었다)  내용에는 나보나 광장의 개선점과 시장 질서의 확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마차를 끄는 소나 말에게 먹이기 위해서 억지로 설치해 놓은 분수가 흉물스럽게 느껴져 주변 경관을 해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에 준하여 결국 교황은 나보나광장을 정비하기로하고 4대강 분수의 건설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교황이 지목해서 수도교 토목공사를 맡겼던것 처럼 당연히 이 모든것은 보로미니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주재 브라질 대사관.(오리지널 팜필리 궁전이다)

 

 

교황 이노센트 10세 조각상.

 

피에르토 다 코르토나 作  (아이네아스와 올림프스 천국)

 

 

팜필리 가문은 자신들을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아스의 후손이라 생각했다.

 

 

 

 

 

 

 

  요대목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팜필리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요청으로 건축가 지롤라모 레이날디가 설계하고 건설하였으며,  후에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증축하고,  더하여 라이벌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마감한 신기하고도 복잡다난한 건물은 나보나 광장의 성 아그네스 성당 옆에 있는 현재의 브라질 대사관(팔라초 팜필리) 건물이다.

  교황이 이 궁전을 지은 목적이 뚜렸했으니만큼 이 궁전 또한 바르베리니 가문의 궁전만큼이나 웅장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게끔 꾸며졌었다.  하지만 지금 브라질 대사관의 건물을 보자면 어딘가 썰렁하고 화려하지가 않다.  창가에 놓인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조각상과 천장화만이 이곳이 팜필리 가문이 영화를 누리던 장소임을 나타내보여준다.

  이곳에 소장되던 모든 미술품들과 보물들은 건물을 브라질에 매각함과 동시에 다른곳으로 모두 옮겨졌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팜필리 가문이 기울어져 갔으며,  많은 자손들이 상속자산에 대한 다툼으로 나뉘어지고 쪼개지고 축소되어 가면서 결국 이 기념비적인 건물까지 매각해야만 하는 상황에 도달했던 것이다.

  본래의 팜필리 궁전에 소장되었던 모든 미술품과 보물은 비아 델 코로소에 있는 새로운 장소로 옮겨졌다.  사람들은 이곳을 '팜필리 도리아 궁전(Palazzo Doria Pamphilj)' 이라 부르거나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Doria Pamphilj Gallely)' 이라 부르며 찾아간다.  그러다보니 아예 홍보책자에도 오해하기 쉽게 표현되었거나 오류로 나타나고 있을 정도이다.  이곳을  오리지널 팜필리 궁전으로 아는 사람들도 허다 할 정도이다.

  이 건물은 본래 로마의 대지주이자 부호가문인 알도브란다니 집안의 건물이었다.  차마 밝히고 싶지않은 사정의 결과로 교황의 조카인 카밀로 팜필리가 모두가 반대하는 여성과 결혼을 감행했다.  그 여성은 올림피아 보르게세로 전에 보르게세 가문의 며느리가 되었다가 재혼한 것이다.  올림피아는 이 건물을 포함해 보르게세 가문에서 상속받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카밀로 부부는 이 건물에서 살았고,  자연스레 그 후손들에 의해서 이 건물은 팜필리 가문의 재산이 되었으며,  가세가 기울어 유산을 모두 이 건물로 옮기면서부터 새로운 '팜필리 도리아 궁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더하여 한 가지 더 조언을 드린다면..........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는  그냥 패스해 버리는것이 건강에 이로울것이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초상화가  이곳 갤러리의 대표작이다.  아울러 카라바조의  초기 작품이 몇 점 걸려있다.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의 소장품은 400여점 정도이다.  그런데........  개인 사설 미술관이다 보니........  입장료는 유럽 전체 박물관이나 갤러리 중에서 최상급인 특A 정도의 요금을 요구한다.

  속된 표현으로........  우피치 미술관의 2배에 가깝다고 할 정도이다.  우피치 특별전이 열릴때 보다도 높아 보인다.  머지않아 우피치 미술관에 약 2KM를 미술품을 감상하면서 베끼오 다리를 실내로 걸어서 건너 피티 궁전까지 갈 수 있는 바사리 회랑이 공개될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옛날 메니치 가문의 사람들은 여기 피티 궁전에서 긴 회랑을 통해 걸으면서 창밖으로 피렌체를 내다보고, 벽마다 르네상스의 미술품을 구경하면서 베끼오 궁전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그 바사리 회랑이 예모습으로 재단장 되어서 머지않아 공개될 것이라 한다.  그러면 우피치 미술관도 현재의 미술관 요금에다,  바사리 회랑 입장을 추가하는 특별요금이 부과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그렇다해도 그 합쳐진 요금이 이곳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의 입장료만큼 되지은 않을것 같다.

  이노센트 10세 교황이 아무리 우르바노 8세 교황을 견제했던 말았다......... 도리아 팜필리 갤러리를 관람하느니.......  차라리  로마 국립 고전미술관을 관람하시라 적극......  아주 적극 추천하고 싶다.

 

 

 

 

 

 

 

 

 

이 아름다운 4대강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를 과연 베르니니가 만들었다고 하는것이 옳을까?

 

 

 

 

 

 

 

  교황의 얼굴엔 황홀하리만치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감격스러움을 넘어 어느새 그의 두눈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도궁전 교황사저의 저녁식사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은 교황께서 지금 무었때문에 이토록 감격스러워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하얀 보자기로 가려진 수레가 하나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보자기가 벗겨지자 그 안에는 높이 약 1m쯤 되어보이는 뾰족탑이 솟아있고 아래로 사람의 조각상이 에워싸듯 둘러서있는 미니어처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축소되어 있는 은색의 분수대 모형은 그것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었을때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이미 충분히 느낄 수 있을만큼 뛰어난 작품의 완성도를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미니어처 뾰족탑의 꼭대기에 앙증맞게 서있는 올리브 나무 줄기를 입에 문 비둘기를 보는 순간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교황을 바라보면서 이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이미 모든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네 군데 모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네 명의 거인들이 보여주는 역동적인 자세는  보는 이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끌어들이기에 너무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 분수가 완공되는 그 순간 산만하고 너저분했던 나보나 광장은 4대강 분수라는 아주 강력한 구심점으로  모든이의 이목과 관심이 쏠려들게 될것이며,  이제까지와는 전혀다른 생동감에 충만한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것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마도 이정도의 디자인과 역동성이라면 보로미니라 해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숨을 죽여가며 속삭이듯 속으로 외쳤다.

  '베르니니가 보로미니를 밀어내 버렸어.  10년만에 제대로 복수를 해 낸거라고........'

  나보나 광장의 피우미 분수(4대강 분수) 설계와 건축가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성정되었다는 교황청의 발표가 났다.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최고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하여 권좌에서 멀어진지 거의 10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새로운 교황이 로마의 중심으로 새롭게 꾸미고자 하는 나보나 광장의 정비사업의 핵심적인 분야를 맞게된 것이다.  팜필리 궁전이야  교황 사저로 가문의 위상을 드러내게 되겠지만,  광장에 조성될 4대강 분수는 그야말로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개인적 업적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기념비적인 작업을 밀려났던 베르니니가 맡게된 것이다.  '역시 베르니니야.  로마를 이처럼 빛나게 만든것이 바로 베르니니의 조각과 건축이 아니냔 말이야.  로마에게 있어서 베르니니는 커다란 신의 축복이야.'라는 말들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게 될것이다.  반듯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것이라고 이 소식을 접한 베르니니는 생각하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한 편에 있던 보로미니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교황의 결정이 떨어지면서부터 4대강 분수 조성사업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근래에 들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과 기근이 이탈리아와 유럽을 강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것이 계절이 바뀌자 느닷없이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많은 도시들을 집어 삼켜버렸다.  메뚜기 떼를 비롯한 병해충의 피해가 극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겨울이 되자 엄청난 한파가 들이닥쳤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하염없이 이어지는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사나 목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들이닥친 극심한 추위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교회에 구원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언제나 처럼........  교회는 받아들이는 것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베풀고 내어주는 일에는 전혀 익숙치가 않았다.  선정을 베풀고 나눔에 앞장선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신분이 낮거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대부분 이었다.  교회가 크거나 성직자의 직위가 높은 교회일수록 그런 일에는 문을 닫아 버렸다.

  한참 팜필리 궁전의 외벽공사를 진행하던 지롤라모 레이날디나,  이제 본격적으로 4대강 분수 조성을 시작하려는 베르니니의 입장에서도 점점 썰렁해져가는 광장의 시장 분위기와 어디선가 자꾸만 광장으로 모여드는 노숙자와 유랑민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건축석재를 쌓아놓은 곳에 몰려와  둥지를 틀듯이 드러누운 사람들을 매번 쫓아낼 수 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건축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광장의 상황을 교황에게 알렸다. 타당한 조치를 기다렸다.

  교황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공사 강행'  기일 엄수'라는 말씀의 뜻처럼 아주 간단명료 했다. 

  길 잃은 불쌍한 양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거두어 푸른 초원으로 인도해야 할 교회가.......  최고 지위의 교황이 이를 외면하고 거절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가치와 사명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서 나왔다고 입을 모아왔지만,  보여주어야 하는 그네들의 모습과 보이지 않는곳에서의 현실적 모습은 사뭇 달랐다.

  느닷없이 교황청 수비대가 이끄는 로마의 자치 군대가 출동해서 공사장 인근에 사람들을 몰아냈다.  저항하는자와 부랑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체포해 끌고 갔다. 시장을 공사장 반대편의 지역으로 이주 시켰다.

  팜필리 궁전 공사장 주변으로 말뚝을 박고 저지선을 매달았다.  공사는 어제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다.

  4대강 분수가 진행될 광장의 한복판으로는 거대한 나무 기둥들이 설치되고 장막이 뺑둘러 둘러쳐 졌다.  이제 사람들은 그 장막과 목책 안에서 무슨일이 거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쇠를 두드리고 망치로 돌을 깨는 소리만이 울려나올 뿐이었다.  장막의 안에서 무슨 공사가,  무엇을 만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사장의 군데군데에 주야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있었기 때문이다.

  4대강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 건설 공사는 교황을 포함한 일부 성직자와 베르니니를 포함한 현장 공사 관계자만 알 수 있을뿐, 일체의 진행과정이 모두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  교황에겐 나름의 복안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행된 4대강 분수 조성 계획은 1648년에 시작되어 3년이 경과한 후인 1651년에 마침내 완성되었다.

 

  '4대강 분수는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요청에 의하여 1651년에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4대강 분수가 장막을 걷어내고 일반에게 완전 공개되나서부터 현재에까지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과연 베르니니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왜 그런 문제 제기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꾸준하게 제기되는 것일까?

  바로크를 대변하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자신의 조각 솜씨를 마음껏 뽐낸 웅장하면서도 지극히 아름다운 분수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조각가의 길로 접어들어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성공한 로렌초 베르니니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기 위한 교회 관계자나 귀족들 못지않게 새롭게 부를 움켜쥔 사람들까지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몰려드는 부류는 당연히 그에게 조각기술을 배워서 자신도 훌륭한 조각가로 성공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연구생이나 제자들이었다.  사방에서 어찌나 많이 몰려드는지 지원자들 중에서 나름 소질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받아들이는 일조차도 대단히 번거롭고 까다로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이미 자신의 영역을 갖춘 엄연한 조각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베르니니와  기꺼이 함께 작업을 하면서 좀 더 자신의 역량을 개발시키고자 하는 젊은 기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하여 베르니니가 새롭게 공사들 맡게되면 항상 상당수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몰려다니게 되었다.  점차 세상사람들은 이들을 '베르니니 사단'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교회이던 광장이던 일단 베르니니가 작업에 돌입하게되면 우선 수십명에 이르는 베르니니 사단이 우루루 몰려 이동했다.  그러면 그 뒤로 벌떼같이 수많은 인파가 우르르 몰려 뒤를 따랐다.  베르니니와 그의 사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작품의 탄생을 생생하게 지켜보고자 해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던 베르니니 사단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다.  항간에는 보로미니와의 다툼에서 베르니니가 패배했기 때문에 벌어진 이이라고 했다.  베르니니 사단이 해체된지 근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로마의 나모나 광장에 다시 베르니니 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로마에 퍼져나갔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하지만 몰려든 사람들은 베르니니도 베르니니 사단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광장의 한가운데로 거대한 목책이 세워지고 온통 장막으로 둘러싸여 안쪽의 아무것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군인들이 지키기 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체념한 군중들의 관심은 이제 보로미니를 찾게 되었다.  보로미니를 보면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것인지를 알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보로미니를 찾을 수가 없었다.

 

 

  교황청의 측근으로부터 보로미니의 4대강 분수 설계가 이노센트 10세 교황에게 제출되었으나  실망을 넘어 교황의 진노가 엄청났었다는 소식을 베르니니가 전해 들었던것이 꼭 1년 전의 일이었다.

  베르니니는 즉각 흩어져있던 자신의 사단을 모두 불러 모았다.  실낱 같았던 일생일대의 기회가 드디어 찾아 온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운 인고의 세월을 혹여 이런날이 올까 하면서 기다려 왔던 베르니니였다.

  흩어져 있던 10년의 세월동안 기술과 기량이 일취월장한 사단의 멤버들이 하나 둘씩 모두 모여들었다.  베르니니는 즉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 째는 막센티우스 경기장에 방치되어 훼손 상태가 심해진 오벨리스크를 나보나 광장까지 옮겨서 재조립해 세우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그 오벨리스크에 덧입혀서 울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수를 만드는 일이었다.

  연일 회의는 벌어졌고  수많은 보고서와 설계도들이 그려졌다.  하지만 어느하나도 먼저 제출되어 낙제점을 받은 보로미니의 설계안을 확실하게 능가하는 작품다운 작품은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에는 선대에 처음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부터 반입하여 들여오는 과정이나,  로마 안에서도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일이 허다하게 많았다.  또 그런 공사에 대한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베르니니는 이런 공사 기록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막센티우스 경기장 구석에 방치된 오벨리스크의 휘손 상태였다.  적어도 네 군데 정도는 상태가 심각했다.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끌어내 세우려다가는 틀림없이 부러트려질것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누워있는 오벨리스크를 지켜보면서 이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그 아래에 웅장한 조각품으로 장식을 하는 상상을 하던중에 문득 섬광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젊은시절 열정적으로 조각 공부에 매진하던 베르니니는 젊은날 한동안을 피렌체에서 보냈던 일이 갑자기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의 조각 공부에 가장 영향을 끼친것은 당연히 고대 그리이스가 후대에 남겨준 위대한 조각상들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아마도 피렌체에 머물면서 만나보았던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선배 조각가들이었을 것이다. 피렌체의 베키오 궁전과 란치 화랑을 비롯해 곳곳에서 르네상스 전성기의 조각품들을 마음껏 만날 수 있었다.  야코포 델라 케르시아나 방코를 시작으로 로렌초 기베르티의 청동문에서 그는 낙원의 사람들을 만났다.  화폭에나 담겼을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조각으로 옮겨놓은 도나텔로는 그에게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  안드레아 산소비노에게서 고딕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르네상스)로 변모하는 건축과 조각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미켈란젤로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천재 거인의 위대함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베르니니 자신이 꼭 극복해내야할 목표로 설정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베르니니에게 매혹적인 감동을 넘어서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 온 것은 바로  잠볼로냐(Giambologna)가 대리석으로 만든 <사빈느 여인의 약탈( Repe of the Sabine woman)> 이었다.  그리하여 이 만남은 마침내 미술사적 측면에서 르네상스의 조각가 계보를 완성시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베키오 광장에 설치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잠볼로냐는 <사빈느 여인의 납치>를 만들어 인근 란치 회랑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잠볼로냐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마침내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조각상을 만들게 되었다.(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이렇게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조각가 계보는 미켈란젤로에서 잠볼로냐로, 다시 베르니니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계보의 맨 앞쪽에 로렌초 기베르티를 세워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기베르티나 잠볼라냐나 베르니니 까지도 포함시켜서, 이들중 누구 하나를 뺀다고 해서 계보가 심각하게 망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다르다.  미술이 되었던 조각이되었던 미켈란젤로를 빼고는 계보라는것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미켈란젤로는 일생동안 기베르티에 대해서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매우 독특하다 못해 성격 자체가 괴팍했던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그렇게 물고 뜯고 싸웠던 것처럼,  보티첼리도 하찮게 보았고,  라파엘로도 애송이라 불렀고, 벤베누토 첼리니의 <메두사의 목을 들고 서있는 페르세우스> 조각상을 보고 '성냥곽 장식에나 어울릴만한 조악한 작품' 이라고 비아냥 거렸을 정도였다.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훌륭한 미술가는 오로지 자기자신뿐이었다.  그런 미켈란젤로가 일생동안 마음속으로 존경했고  배우고자 했던 사람이 세 명이 있었다.  필리포 브르넬리스키와  단테 알리기에리와 지를라모 사브나롤라 였다.  인문학자 단테와 개혁성직자 사브나롤라에 대해서는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미켈란젤로의 인문학적 사고와 가치관과 그의 발자취에는 존경했던 두 사람의 영향이 여러곳에 드러난다.  하지만 브르넬리스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미켈란젤로가 오픈해서 여러번 강조하며 언급했다.  미켈란젤로를 발굴하고 후원한 메디치 가문에 대하여 보은의 의미로 산 로렌초 성당의 재건축을 미켈란젤로가 직접 맡았다.  부와 권력을 모두 차지한 유럽 제일의 명문가문에 걸맞은 메디치 가문의 전용 예배당(성당)으로 새롭게 개축되는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납골당도 직접 만들었고,  건축 역사의 유명한 걸작품인 라우렌찌아나 도서관도 이때 함께 만들었다.  성당은 메디치 가문의 위상에 걸맞게 재건되었지만,  단 한가지......  그때까지도 성당의 파사드(정문)가 완성되지 않아서 성당 자체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미켈란젤로에게 의뢰를 하기 이전까지에는...........  원래 이곳에 있는 낡고 오래된 성당을 15세기에 들어 시의회의 요청으로 부르넬리스키가 건물의 왼관부터 재건축을 해오던중에 파사드 완공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여서 미완성으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에게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완공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필립보 브르넬리스키야 말로 진정 위대한 건축가이자 예술가 입니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브르넬리스키가 만든 파사드가 놓여있어야만 합니다. 저의 미천한 재주로는 감히 그분이 계획하고 의도했던 바 대로의 파사드를 만들어 세울수가 없습니다.'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는 당연히 브르넬리스키가 만들어야만 한다는 당연한 논리다.  그러나 부르넬리스키가 사망해 없는 지금에.........  미켈란젤로 자신 정도의 실력으로는 감히 부르넬리스키를 대신할 수 없어서 물러난다는 부연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이 파사드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뻔한 해답 또한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만들고자 한다면........  누가 보아도 미켈란젤로를 훨씬 능가하는 건축 솜씨를 가져야 하며,  이는 다시 최소한 부르넬리스키 건축의 위대함에 어느정도 근접한 사람이어야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껏 부르넬리스키 수준에 근접함은 접어두고라고...........   최소한 '내가 미켈란젤로 보다는 위다' 라고 자신있게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손대지 못한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미켈란젤로에게 브르넬리스키는 영원한 스승이었고 영원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

 

 

 

 

 

 

 

잠볼로냐 作  <사빈느 여인의 약탈>    피렌체 란치 회랑 소장.(진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로렌초 베르니니 作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몇날 동안을 베르니니는 잠볼로냐의 작품에 빠져 살았다.

  잠볼로냐의 작품을 찾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세세하게 모두 소묘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 위하여 찾아갔던곳 중에 피렌체의 산씨그마 안눈치아타 광장(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가 있었다.  피렌체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는 아주 쉽게 '부르넬리스키가 유럽 최초로 만든 고아원이 있는 광장'으로 더 잘 알려진 장소이다.

  이 광장은 깊숙한 안쪽에 거대한 청동 기마상이 있는데  바로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 기념 청동상이다.  잠볼라냐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코지모 1세 메디치의 기마청동상이 안눈치타 광장에만 있는것은 아니다.  그리 멀지않은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기마청동상 또한 코시모 1세 메디치 기념 동상이다.  이 또한 잠볼로냐의 작품이다.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인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는 많은 공적을 남긴 사람이 틀립없으나  그는 또한 공포스런 독재자로도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재임시 피렌체는 한마디로 코시모 1세 군주가 다스리는 전제군왕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막강한 군대를 앞세워 종국에 씨에나를 멸망시켰으며,  이를 시작으로 씨에나.아레초. 산세폴크로. 피스토이아를 강제로 피렌체에 병합 시켰다.  나아가 이탈리아 반도로 진출해 오는 오스만 군대(이슬람 세력)를 레판토 전투에서 물리쳤다.  그의 아들 코시모 2세가 아버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청동기마상으로 청동상 제작에 들어간 청동 또한 물리친 오스만 해군의 갤리선에 설치되었던 청동 대포를 녹여 재료로 사용하였다.  잠볼로냐가 시뇨리아 광장의 기마청동상 제작에 돌입하였을때 처음으로 자신의 제자인 피에트로 타카(Pietro tacca)를 작품 제작에 참여하도록 불러 들였다.  하여 피에트로 타카가 시뇨리아 광장의 코시모 1세 청동기마상의 작업에는 기마상이 받침대 위에 튼튼하게 올라서있는 기단부분 작업을 맡아서 했다.  이후에 또다시 코시모 1세의 청동기마상 작업이 산씨그마 안눈치아타 광장에서 벌어지게 되었을때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공동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잠볼로냐가 사망함에 따라 중반 이후의 작업은 피에트로 타카 단독으로 완성하게 되었으나, 은인이신 스승의 영전에 모든 영광을 돌렸다.  하여 잠볼로냐의 유작이 된 안눈치아타 광장의 기마상은 흔히들 볼로냐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된다.

  그런 피에트로 타카가 이대로 스승의 유작이 남아있는 안눈치아타 광장을 떠나기는 서운했던가 보다.

  스승 잠볼로냐의 품에서 벗어나 조각가 피에트로 타카로 거듭나면서 만든 작품이 광장의 구석 양쪽으로 나뉘어 서있는 쌍둥이 분수라 불리어지고 있는 '바다 괴물의 분수(Fontana dei Mostri Marini)' 이다.

  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대리석 바닥에 산봉오리를 닮은 대리석 말뚝을 박아 놓고는 그 위에 청동으로 만든.......  그러나 딱히 무엇이라고 설명하기가 결코 쉽지않은 청동 조형물을 냅다 내리꽂아 참으로 묘한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라고 할 밖에는........

   무릎을 꿇고있는 두 마리의 바다괴물이 팔과 꼬리로 서로 얽혀매어있는 형상이 놀라울 정도로 잘 균형잡힌 좌우대칭의 참으로 희귀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신선하게 느껴질만큼 정교한 조각솜씨는 이제껏 보아왔던 모든 조각상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부숴트리고 있다.  이 모호한 독창성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좋단 말인가?

  잠볼로냐의 기마청동상을 보러 왔던 로렌초 베르니니는 여기 쌍둥이 분수를 바라보고는 그만 넋을 빼앗끼고 말았다.  조각가의 독창적이면서도 무한한 상상력에 깊게 빠져들고만 것이다.  베르니니는 잠볼로냐의 제자를 넘어서 새로 접해보는 피에트로 타카의 작품 세계에 빠져 이제부터 그의 작품을 연구해 볼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로마에서 기별이 도착했다.  베르니니에게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작품 의뢰가 들어왔다는 소식이었다.  피에트로가 만든 아주 혁신적인 조각상이 리보르노(피렌체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 항구도시)에 설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향하려던 계획이었지만,  작품 계약을 위해서 일단은 로마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었다.

  어느덧 20년 이상이 훌쩍 지나 있었다.  조각공부에 매달리던 그때의 베르니니도 아니었다. 적어도 미켈란젤로의 계보를 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조각가 베르니니였던 것이다.

  당장 보로미니를 훨씬 능가하는 혁신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거기에다 품격있는 분수를 만들어야만 하는 시점에서 열정과 의욕은 그 어느때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새로운 구상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떠오른것이 피에트로 타카 였다.  베르니니는 마차에 올라 도망치듯 로마를 빠져 나갔다.  서둘러 리보르노를 향해 마차가 횃불을 켜들면서까지 밤길을 달리고 또 달려 마침내 토스카나 지역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리보르노의 미켈리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의 한가운데 높고도 장엄하게 칼카라 대리석으로 만든 코시모 1세 동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프리카 튀니지를 근거지로 하는 바바리 해적들이 토스카나 해안을 약탈하자 성전 기사단의 일원으로 해적을 소탕한 코시모 1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각가 조반니 반디니(Giovanni Bandini)가 만든 규모가 엄청난 대리석 조각상이었다.  대리석 주산지인 칼카라에서 실제 제작된 이 조각상은 바다를 통해 이곳 리보르노로 이송되었다.  애초부터 조각상의 안치가 완료되면 받침대의 아래쪽에 추가로 조각상이 제작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반디니의 사망으로 추가 계획은 답보상태였고,  이를 우려하던 코시모 2세가 안눈치타 광장의 분수대를 보고는 피에트로 타카에게 나머지 완성을 맡겼던 것이다.

  베르니니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베르니니의 안중엔 반디니가 만든 거대한 조각상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베르니니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대리석 조각상의 아랫쪽 받침대 부분에 쇠사슬에 묶여있는 4명의 죄수들을 매달아 놓은듯한 청동조각상 뿐이었다.  베르니니는 마치 넋이나간 사람처럼 죄수들의 청동조각상에 사정없이 빠져 들었다.

  사흘을 꼬박 이곳에서 청동조각상을 소묘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했다.  작업 틈틈히 멍하니 청동조각상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사흘이 지나 베르니니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로마로 돌아가는 마차에서  그는 어떤 확신에 가득한 환한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보로미니에 대한 승리의 자신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르니니의 머리와 가슴속엔 4대강 분수에 대한 완벽한 마스터 플랜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씨그마 안눈치아타 광장의 코시모 1세 기마청동상.  잠볼라냐의 작품으로 제자인 피에트로 타카가 함께 제작에 참여했다.

 

피에트로 타카 作  < 두 바다괴물 분수>   안눈치아타 광장에 쌍둥이 분수로 두 개가 놓여있다.

 

조반니 반디니 作  <코시모 1세 대리석 기념 조각상>

 

기단부의 4개 청동조각상은 잠볼로냐의 제자 피에트로 타카의 작품이다.

 

 

 

 

두 명은 죄수,  한 명은 지중해의 해적.  마지막 한 명은 아프리카의 노예를 나타낸다.  이들이 쇠사슬에 묶여있다.

 

 

 

 

 

 

 

 

 

  피에트로 타카(Pietro Tacca)가 만든 4명의 죄수(Monumento dei Quattro mori) 조각상을 보고 돌아온 베르니니는 곧바로 4대강 분수의 설계안을 완성했다.  누가 보아도 피에르토 타카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보이고 있는,  결코 그 지대한 영향을 부인할 수 없는 그런 설계였다.

  지구상의 4개 대륙의 강을 상징하는 거인들이 반쯤 엎드린 상태로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오벨리스크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는 느낌을 담았다.  하늘을 향해 쭉 뻗어올라가는 오벨리스크의 끝에는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비둘기가 놓여져 있다.   올리브 가지를 물고있는 비둘기는 팔필리 가문의 상징이었다.  이는 곧 지상에서 가장 높은곳까지(하늘에 이르기까지)  치솟아 있는 교황(이노센트 10세)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품의 구상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들으면서 설계도면과 모형을 직접 대면하였을때,  어떻게 이해당사자인 교황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수가 있단 말인가.

  보로미니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으로는 절대로 감격의 눈물이 흐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베르니니로 인해서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으니  이제 4대강 분수에 대한 교황의 허가가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어느누구라도 충분히 잘 알수 있는 일이되고 말았다.

 

  교황이 보로미니의 설계안에 실망을 넘어 진노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부터 베르니니는 '4대강 분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거기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자신과 같은 전문 조각가에서부터 소문난 석공을 포함하여 베르니니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조각가 지망생인 제자들이 수없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르니니는 '4대강 분수 프로젝트'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이미 컨소시엄을 구성해 협업(協業)을 전제로 일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협업체제는 베르니니의 일생동안 그가 이룬 거의 모든 작업장에서 지극히 일상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 흔한 일이었다.

  하나의 예로 성 베드로 광장(바티칸 광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성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가 '4대강 분수 프로젝트'를 모두 완성시킨 다음에 1656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667년에 약 12년의 공사기간을 거쳐서 완성했다.  좌우 너비가 240m에 달하는 이 거대한 광장 조성에도 어김없이 오벨리스크가 등장한다.  칼리큘라 경기장의 오벨리스크를 이곳으로 옮겨와야 했고  분수를 조성하고 포장도로를 깔아야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광장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것은 장엄하면서도 웅장하게 좌우에 대칭으로 늘어서 있는  대리석 기둥들로 이루어진 숲길이다.  도리아 양식의 둥근기둥이 284개나 되고,  더하여 88개의 각진 돌기둥이 지붕역활을 하고있는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현대적 장비외 기술자를 동원하다고 해도 그 기간동안에 석재를 들여와 다듬고,  가져다 세워서 그 위에 테라스를 얹는 작업만으로도 벅차지 않을까 싶다.  그런 테라스 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 성인 140명의 2m가 넘든 거대한 조각상들이 올라서 있다.  같은 모양이나 대충 만든 조각상은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 내놔도 충분히 보물이나 국보급의 조각상들이다.  이는 조각상만을 가지고도 한 달에 적어도 하나씩 만들어야만 그 기간 안에 겨우 충당해 낼수 있는 숫자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성 베드로 광장을 베르니니의 작품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게 가능하고 실제 타당한 일이었을까?  아마도 실제로 베르니니가 직접 관여한 작업은 채 1/100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것이 나의 생각이자 판단이다.  성 베드로 광장의 공사 전체도 베르니니는 콘소시엄을 꾸려서 협업을 바탕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실질적 공사는 동료 조각가들과 전문 석공들과 베르니니를 따르는 제자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로.......  진짜로 베르니니가 직접 손을 댄 작업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였을까?

  어쩌면 지극히 미미 할 정도였거나.......  아니면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는 머리와 눈과 입으로 모든 작업 공정을 대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4대가 분수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기면서 베르니니는 작업을 여러부분으로 나누어서,  각 부분마다 전문 책임자를 두고 별도의 공정으로 개별 진행 시켜 나갔다.

  오벨리스크를 복원하는 팀,  오벨리스크를 막센티우스 경기장에서 나보나 광장까지 이송시켜 설치할 팀, 오벨리스크 주위로 설치 할 조각상 거치대의 뼈대를 제작 설치하는 팀,  그리고 4개 대륙을 상징하는 거인 조각상을 제작하는 조각가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세분화된 팀들은 하나같이 같은 목표인 4대강 분수 프로젝트의 완공을 위하여 동시에 나뉘어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베르니니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막센티우스 전차 경기장이었다.  오벨리스크의 훼손 상태와 복원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다.  오벨리스크의 여러곳이 부식되어 있었고 적어도 4군데 이상에서 균열이 발생하여 언제 부러질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베르니니는 오벨리스크 이송에 관한 고문서를 섭렵하였고  수리 복원 전문가와 이송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석재 기둥의 부분 이식수술과 철판을 이용해 쐐기를 박는 형식으로 흡사 인대 복원 시술같은 모험적인 실험을 강행했다.

  오벨리스크의 보수와 복원이 이루어지자 베르니니는 즉시 이송작업에 들어갔다.

  오벨리스크가 막센티우스 경기장에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나보나 광장의 장막으로 가려진 광장 한복판에는 오벨리스크를 떠받치고 고정시킬 커다란 좌대 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석회석 바위가 올려져 다듬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곳의 기초작업은 조각가 조반니 마리아 프란치가 모두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오벨리스크가 옮겨져 나보나 광장의 중앙에 우뚝 섰다.

  군대가 동원되어 몰려든 인파를 쫓아냈고,  커다란 목책이 설치되고 다시 커다란 장막이 가려졌다.  장막 위로 삐쭉 튀어나온 오벨리스크의 윗부분은 보였지만,  장막 안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은 눈으로 확일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런저런 소문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4개 대륙을 상징하는 거인의 조각상들이 완성되어 설치되는 일이 남았다.

  다뉴브 강은 유럽을 상징하는 강이다.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강이며  교황의 종교적인 절대 권위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지역이다.  다뉴브 강이야말로 이 세상의 중추적인 중심이며, 이 모든것이 교황 권위의 뿌리가 되고 토대가 되는 것이다.   다뉴브 강을 상징하는 거인 조각상을 맡은 조각가 안토니오 라기는 거인 조각상 위로 교황의 개인 문장을 조각해 넣었으며 이는 은연중에 팜필리 가문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유럽 대륙을 상징하는 다뉴브 강의 거인은 조각가 안토니오 라기의 작품이다.

 

 

교황 이노센트 10세를 상징하는 개인 휘장 안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문 비둘기는 팜필리 가문을 지칭한다.

 

 

 

 

 

  콜럼부스에 의해서 발견된 신대륙을 의미하는 라플라타 강의 거인은 금화가 넘쳐서 쏟아지는 자루를 깔고 앉아 있다.  이는 아마도 아메리카로부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엄청난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리라.  이탈리아 조각가 프란체스코 바라타는 대단히 역동적인,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마술사 같은 이미지의 거인상을 만들어 올려 놓았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상징하는 라플라타 강의 거인 조각상은 프란체스코 바라타의 작품이다.
신대륙의 거인은 손을 뻗어 무엇을 가리려고 하는 것일까?

 

 

 

 

 

 

  아시아를 상징하는 갠지스 강의 거인은 긴 항해를 뜻하는 커다란 노를 들고 있다.  조각가 클로드 푸신이 만든 이 거인조각상은 흡사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우아함이 넘쳐나는 포즈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아시아를 상징하는 갠지스 강 거인 조각상은 클로드 푸신이 만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라해도 4대강 분수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나일 강의 분수가 아닐까 싶다.

  나일 강 분수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과 숱한 소문들이 어쩌면 그토록 많은 여행자들을 이곳 나보나 광장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베르니니가 4대 강 분수를 만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아프리카 나일강의 신비(발언지)가 풀리지 않은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거인은 천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나일강을 상징하는 거인 조각상을 제작한 조각가 지아코모 안토니오 판첼리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니  이것이 틀림없는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나보나 광장에 4대강 분수가 조성되던 당시의 사람들 중에는  로렌초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앙숙관계에 대해서 소상하게 속속들이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호사가들에게 나보나 광장에서 벌어진 팜필리 궁전 건축과, 4대강 분수 조성사업과,  성 아그네스 성당의 건축 과정에 복잡하게 혼재해 있는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맞장구도는 더없이 훌륭한 이야기꺼리 소재가 되고도 남아 넘쳐날 지경이었다.  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서 시작된 억측과 소문들이 시공을 타고 넘어서 지금 현재까지도 수많은 이야기꺼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4대강 분수를 만들던 베르니니는 코 앞에 떡허니 버티고 서있는 보로미니가 만든 성 아그네스 성당을 쳐다보기 싫어서 일부러 나일강 분수 거인의 눈을 천으로 덮어 버렸다.'

  '그 소식을 접한 보로미니는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가 내다보이는 지점에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포즈가 마치 (내가 뭘 어쨌다고?) 하는 포즈로 밖을 내려다보며 서있다.'

  나보나 광장에는 이런 수많은 근거없는 가십거리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많은 여행자들이 '괜한 소문이겠어?' 하면서 은근한 시선으로 자꾸말 힐끗힐끗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4대강 분수의 나일강을 상징하는 거인은 베르니니의 작품이 결코 아니다.  실제 제작자인 판첼리는 미지의 나일강을 표현하기 위하여 눈을 가렸음을 분명히 밝혔다.

  나일강의 거인 조각상이 눈을 가리고 있는 방향에 있는 '성 아그네스 성당' 또한 보로미니의 작품이 결코 아니다.  성당은 분명하게 바로 옆은 팜필리 궁전을 건축한 지롤라모 레이날디가 시작하여 최종 마감은 그의 아들 카를로 레이날디에 의해서 성당이 완공되었다.  완공 후 시간이 좀 지나서 양쪽에 설치된 종탑이 너무 높아서 돔을 가린다는 지적으로 인하여 부분적인 재건축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야 보로미니가 등장하여 재건축과 옆의 팜필리 궁전을 연계하는 지붕과 외부의 부분적 리모델링을 담당하게 된다.

  4대강 분수가 완공된 것이 1651년 이요,  아그네스 성당은 다음해인 1652년에 착공되었으며,  완공된 팜필리 궁전의 리모델링에 보로미니가 투입된것이 1654년 인것을 따져보면........... 나보나 광장에서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마주치고, 서로 삿대질을 하고,  마침내 죽기살기로 주먹다짐까지 했었으리라는 추측은 터무니 없는 억측으로 결론이 난다.

  '보로미니 꼴이 보기 싫어서 나일강 거인의 눈을 천으로 가리게 베르니니가 일부러 만들었다?'

  헐!!!!!!

 

 

 

 

 

 

 

 

 

 

얼굴을 천으로 가리긴 하였으나 눈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슬며시 내다보고 있다.   과연 무엇을 보는 것일까?

 

 

 

 

 

 

 

 

 

 

  도대체 어디를 얼마만큼 베르니니가 만들었다는 말인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벨리스크는 애초부터 이집트에서 쌔벼온 것이고,  오벨리스크를 세워 받쳐줄 좌대 따로,  조각상을 얹어놓을 바윗덩어리 따로, 나일강 따로, 라플라타강 따로, 갠지스강 따로, 다뉴브강 따로........  거기다가 분수까지 물을 끌어 온것도 보로미니이까 또 따로.........  이렇게 따로 따로를 죄 다 빼버리고나면 남는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럼 베르니니는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보나 광장의 4대강 분수가 베르니니의 작품이라는 그 말이 지금 현실적으로 맞는 야그여??????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대해서 실제로 당시에 문제가 발생했었다.

  4대강 분수의 완성과 함께 모든 영광과 그에따른 결과물(성과급)을 모두 베르니니가 독차치했기 때문이었다.  분수 제작 과정에 급여를 받고 단순하게 노동을 제공하는 기능인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같은 조각가이거나 숙련된 전문적인 석공의 입장에서 정식으로 컨소시엄 구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적당한 배분과 대우를 요구하였다.  '베르니니의 피우미 분수(4대강 분수)'가 아니라 '베르니니 + 아무개 + 아무개2 + 아무개3 + 아무개4.........'를 요구하고 나선것이다.

  자칫 이 파장이 커질것을 염려한 고위성직자들이 나서서 약간의 성과급을 나누어주는 선에서 이를 무마하였다.  이의를 제기한 측에서도 자칫 교회에게 밉보였다가는 밥줄이 끊어질 판이라 다소 억울해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을 타고 점점 퍼져 나가기만 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던 1651년 어느날..........  로마 도심의 곳곳에서 때아니게 유랑악단 패거리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벌써 이틀 째 유랑악단 패거리들은 로마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이면 어디에서나 춤과 묘기를 선보이며 모두가 똑같은 홍보내용을 외치고 다녔다. 

  '내일 나보나 광장으로 모두 나오세요.  그 어디에서도 보지못했던 엄청나게 놀라운 광경을 보게될 것입니다.  내일 정오에 나보나 광장으로 모이세요.' 라고,  어디에서나 똑같은 내용을 홍보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로마인들 입장에선 나보나 광장에서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진다는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정오 무렵에 나보나 광장은 온통 인파로 가득찼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도 남을지경 이었다.

  정오가 되자 요란한 포성과 함께 광장의 한가운데 높고 길게 둘러쳐져있던 장막이 벗겨지고 완공된 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가 연단에 올라서 4대강 분수의 완공을 알리는 그동안의 과정을 포함해 세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말이 설명회였지 내용은 모두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업적을 기리고,  그를 배출한 팜필리 가문을 떠받드는 내용으로 가득했으며, 다분히 이런 행사를 통하여 교황을 기리고 찬양하고자 하는 성격의 연설이었다.  귀족들의 축하 연설이 뒤따르고 이어서 로렌초 베르니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공연을 하던 유랑악단 단원들이 여러대의 마차를 끌고 광장에 들어오더니 모려든 수많은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더하여 광장의 곳곳에서 하늘을 향해 은화를 뿌리는 깜짝 이벤트까지 벌어졌다.  나보나 광장은 삽시간에 광란의 도가니이자 열광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나보나 광장은 인파로 넘쳐났고,  여전히 곳곳에선 교황과 베르니니의 이름이 함성으로 터져나오곤 했다. 

  다음날 날이 새자 또다시 사람들이 꾸역꾸역 광장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도 교황이 선물하는 빵보따리를 받을것이라는 기대감에서, 혹 운이 좋으면 은화를 줍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그들의 발걸음을 광장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광장의 분위기는 어제와 영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4대강 분수 주변으로 아직 채 치우지 못한 목재와 석재가 쌓여있는 주위로 이상한 많은 것들이 나붙어 있었던 것이다.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한  바르베리니 가문 출신의 우르바노 8세 교황의 개인 휘장 위에 붉은 페인트로 올리브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있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었다.  광장 바닦의 여기저기에 '팜필리가 바르베리니와 다른것이 무엇인가?' 라는 문구가 쓰여지기도 했고, '팜필리를 보내고 바르베리니를 다시 부르자' 라는 문구까지 나붙어 있었다.  수십명의 무리가 깃발을 앞세우고 휘장을 펼쳐든 채로 도열해 서 있는데, '우리에겐 분수가 필요없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빵이다' '빵을 달라' 라는 함성을 외쳐대고 있었다.

  로마의 민중들이 교황과 팜필리 가문의 횡포에 정식으로 항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들이 풍자나 해학을 통하여 권력에 불만을 표출하고 나아가서 합심하여 저항하는 것을 패스퀴나드(Pasquinade) 라고 하는데,  이는 로마의 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를 통해서도 유래가 깊은 자연 발생적인 저항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나 문학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마당놀이나 연극 공연이나 미술 작품들을 통해서도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하나의 시민문화라 하겠다.  이러한 풍자나 패러디들은 대론 가벼운 의사표현의 정도에서 그치기도 하지만,  심각하게 먹고사는 문제와 결부되면  격렬한 저항을 넘어 때론 혁명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여 종교 최고지도자나  정치 권력자들이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독차지한 귀족과 상인들은 이런 민중들의 흐름에 그때마다 매우 민감하게 반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르베리니 가문의 권력남용과 부정축재와 과도한 부동산의 소유와  극에 달한 사치와 향락에 치를 떨던 로마의 시민들은 새로운 교황(이노센트 10세)이 등극하자마자  전임교황과 그의 출신가문에게 책임을 물어 재판에 회부하고 전재산을 압류 몰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세상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와 안도감을 가졌었다.

  새로운 교황이 처음 2년 가까이 매진한 일이 모두 교황청의 권위를 남용하고, 이를 도용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일부 고위 성직자와 그들의 배후에 있는 가문들에 대하여 철저하게 조사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부당하게 벌어들인 재산을 보두 압류 또는 환수하는 일이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적폐 청산과 기독교식 정의 실현'이 2년 동안의 업적이자 전부였다.  가진 돈을 모두 내어놓고 납작 엎드려 용서를 빌던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 치다가 재판에 회부되어 추방을 당하거나 파문을 당하게 되면 당연하게 몰수한 전재산은 자동으로 교회에 귀속되게 되어 있었다.  이도저도 아니면 손쉽게 들고갈 수 있는 만큼만 바리바리 싸서는 야간도주하듯이 해외로 멀리 도망치는 수 밖에는  달리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적페 청산과 기독교식 정의 구현'이 바야흐로 이제 서서히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끼기 시작했을때.........  나보나 광장에 현직 교황의 출신 가문을 위한 사저라 할 수 있는 팜필리 궁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바르베리니 가문의 궁전을 추월하는 정도의 궁전을 지을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가운데 주변의 토지를 닥치는대로 팜필리 가문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교황 즉위 직전까지 팜필리 가문은 내리막을 타고 있었기에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가문이 절대로 아니었다.  이제 이 궁전이 완성되기만 하면 나보나 광장은 어쩌면 팜필리 궁전의 정원쯤으로 변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이 광장의 한복판에 장막을 둘러치고 커다란 공사판이 생겨난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그것이 아주 커다란 분수의 조성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그러다 말겠지'  설마 정의와 적페청산을 부르짓던 '교황이 전임자와 똑같은 짓을 반복하겠어?' 라고 생각하며 좀 나아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에 걸친 엄청난 기근이 이탈리아 반도를 덮쳤다.  날이 밝으면 먹을것을 걱정해야만 했으며,  해가 지면 주린 배를 욺켜쥐고 밤을 하얗게 지새어야만 했다.  혹시나 내일은 먹을것이 있으려나........

  그러자 어디에선가 한숨가득한 야속한 마음의 소리들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교황은 전임 교황 보다도 백배는 더 지독한 악질이래' '바르베리니 가문은 우리들을 이렇게까지 굶게 만들지는 않았잖아?  팜필리 가문이 이제것 우리에게 해 준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어?'  라는 불만 섞인 음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궁전의 외벽이 완성되고 지붕이 올려지기 시작하고, 4대강 분수의 마무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을때,  로마 시민들의 불만과 원망은 벌써 도를 넘어서 언제라도 민중봉기가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빵을 필요로 한다.'

  '분수는 팜필리가 당장 가져가라.'

  '광장을 예전으로 돌려놓고 팜필리는 구비오로 돌아가라.'

  이제는 다른 지역에 사는 시민들의 동요까지 합세했다.

  교황은 수위스 용병 근위대는 물론 로마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과 군대를 파견해 저항하는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아울러 위장한 스파이를 시민 무리에 들여보내 탐색을 하고 서로간에 이간질 시키는 작업을 벌어기도 했다.  정보 탐색이 끝나자 대대적인 주동자 색출과 체포가 시작되었다.  재판을 통해 감옥에 가두고, 해외로 추방 시키고 심지어 교회에서 파문을 단행했다.  어디 그뿐에 그쳤겠는가?  뒤로 숨어서는 주동자를 체포하여 감금 폭행 고문을 자행했으며,  끝내 거부하는 자는 은밀하게 제거해 버렸다.  극히 일부의 생필품 가계를 제외하고는 아예 시장을 페쇄시켜 버렸다.

  교황은 일시적으로 빵과 야채를 무상지급하는 회유책을 써보기도 하였지만,  한 번 돌아서버린 민심은 요지부동이었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을 계속했다.

  어떻게 해야만 이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단 말인가?

  지오반니 바티스타 팜필리는 결코 이렇게 편협하고 비합리적인 이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콘클라베를 통해서 교황 이노센트 10세에 즉위한 뒤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교황은 하나님의 커다란 은총이 내려져야만 오를 수 있는 아주 특별하고도 고귀한 존재이다.  살아있는 성령이 늘 함께하고 있다는 아주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극히 이성적이며 합리적이었던 사람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쏟아져 내렸을 뿐인데.........  그러했던 사람은 어디가고 마귀를 닮은 후안무치의 인간말종 쓰레기를 만들어버렸단 말인가?

  오묘하고 놀라운 신의 섭리란.........  바로 이런것을 말하는 것인가?  정말로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도대체 교황의 자리라는게 무엇이기에 하루아침에 이렇게 자신을 모두 내팽개치고 짐승과 다를바가 없는 무지막지한 존재로 돌변하는가 말이다.  이런것까지도 기쁘고 영광스럽게 찬양하고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 기독교적 가르침의 정수인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버러지만도 못한 교황은 고육지책으로 한 가지 복안을 제시했다.

  로마시민들의 원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공사중인 자신의 사저궁전 옆에 초라하게 버려지다시피 겨우 서있는 '성녀 아그네스 성당'을 대대적으로 초대형 교회로 다시 건축하겠다는 복안을 발표했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을 새롭게 건축하여  성녀의 보살핌과 하나님의 은총이 나보나 광장 주변의 시민들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끔 배려하겠다는 말이었지만,  기실은 언젠가 아그네스 성당을 증축하여 팜필리 가문의 개인 교회로 만들고 추후에 자신과 가족들이 그곳에 묻히도록 하려던 속내를 이번 기회를 이용해 조금 앞당기겠다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교황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사후에 바램대로 이곳에 잠들었다. 

  교황은 즉각적으로 명을 내려서 지롤라모 레이날디를 성당건축 총책임자로 하고  그의 아들 카를로 레이날디로 하여금 아버지를 돕게끔 지시했다. 

  이는 바로 나란히 서있는 교황의 개인사저인 팜필리 궁전의 완공이 끝난지 불과 수 개월이 겨우 지나서 벌어진 1652년의 일이었다.  수개월 만에 레이날디 부자는 팜필리 궁전에 이어서 또다시 성 아그네스 교회의 건축을 맡게된 것이다.

  이렇게 성 아그네스 성당의 시작은 4대강 분수의 완성과 동시에 발생한 로마민중들의  교황과 팜필리 가문에 대한 반감이 도를 넘어 반란으로 점차 비화될 조짐을 보이게 되자 서둘러 시민들을 달래고 회유하기 위하여 부득불 궁여지책으로 급하게 입안된 건축공사였던 것이다.  성당의 재건축은 서둘러 급하게 진행되었으며 전 공사과정을 그대로 오픈했다.  그리고 찾아오는 민중들을 향해 선심성 빈민구제 행사를 끊임없이 벌여나갔다. 

 

 

 

 

 

 

 

 

 

 

 

 

 

 

 

 

 

 

 

 

  말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것이 나보나 광장의 탄생과정 이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나보나 광장하면 세기의 라이벌인  베르니니의 4대강 분수와  보로미니의 성녀 아그네스 성당이 한바탕 맞짱을 뜨는 장소라고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추측이나 가설은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지만  한 발작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지어낸 이야기들 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속내용이 그곳에 숨겨져 있다.

  그렇게나 많았던 우여곡절들을 모두 함축시켜 놓은것이 바로 '성녀 아그네스 성당(Sant' Agonese in Agone)' 이며,  진정한 나보나광장의 끝판왕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결코 무리는 아닐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보나 광장을 찾은 여행자들은 4대강 분수를 올려다보면서 '이게 베르니니의 분수로구나.  어쩜.....  사방에서 위대한 조각가의 숨결이 느껴지는것 같애.........'  뭐 어쩌구저쩌구 할테니지만........  얼씨구나.  어쩔까나?

  4대강 분수에서 로렌초 베르니니의 손길이 닿은곳이 어느구석 어디쯤인지는 나로서도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베르니니는 종이에 분수 그림을 그린것만으로 분수를 완성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벨리스크의 고정 지지대와 분수대 전체를 받치고있는 커다란 바윗덩어리,  그리고 4개의 거인상 모두가 베르니니가 아닌 다른 전문 조각가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베르니니가 망치를들고 정을 두들겨서 만든 부위를 커다란 안내판에 만들어 붙여줬으면 좋겠는데......  작업중인 조각가들에게 망치와 정을 베르니니가 구입해서 제공하였기 때문에 베르니니가 만들었다고 영수증 대신 처리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을 찾는 사방으로 시선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건축을 찾으려고 안달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그네스 성당이 역사를 어느정도 알고있거나,  르네상스와 바로코 건축에 대해서 어느정도 식견이 있지 안고서는 보로미니의 흔적을 찾는다는것이 결코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니다.  설혹 좋은 가이드(안내자)를 만나 심도있는 부연설명을 듣는다 해고........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건축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로서도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어느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아주 쉽고 단순한 수준과 시선으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성녀 아그네스 성당(Sant' Agnese in Agone)는 교회건축사 관점에서 바라볼때 아주 특이한 건물이라 말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태생적인 한계에서 발생한 어쩔 수 없는 한계성이었으며,  적지않게 이 한계성 때문에 레이날디. 보로미니. 베르니니 등 여러 건축가들의 마찰과 여러가지 소문을 낳게되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중세 이후의 교회 건축을 보면 절대다수의 교회들이 세로로된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어진다.  교회 건축을 계획함에 있어서 가장 기초이자 최소한의 필요 조건인 셈이다.  흔히들 이를 라틴 십자가 형태의 건축물이라 한다.

  라틴 십자가 형태의 교회는 앞쪽에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파사드(건축의 정면 부분의 장식하는 하나의 별도 건물로 인식)를 세우고 그곳을 통해 교회 안쪽(문)으로 들어간다.  높고 긴 건물 내부의 공간이 벽화나 천장화 그리고 조각상이나 부조 등으로 치장되어 있다.  이는 세상의 어느 공간과도 차별되는........  성스러운 성령의 은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공간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길다란 통로 형태의 교회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십자가의 상부이자 날개가 달린 부분에 이르러 양쪽으로 여러개의 채플(예배당)을 만들고,  십자가의 꼭대기 부분에 제단이 만들어 진다.  십자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특히 주안점을 두고 교회장식을 두거나 설교단을 만들기도 한다.  돔 양식에서는 이 교차점 위로 높고 아름다운 천장이 마치 교회당 지붕을 뚫고 솟아 오를것만 같은 돔을 만들어  그리스도의 승천이나 성모의 승천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그러넣기도 한다.  이 돔은 하늘나라로 통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카톨릭의 상징인 라틴십자가에서 파생된 형식이다.

  동.서 로마의 분리에서 갈라서서 로마카톨릭과 대립된 길을 걷기 시작한 동방의 정교회들은 모두 정사각형의  그리스 십자가를 사용했고, 지금도 정교회들은 여전히 그리스 십자가를 사용한다.  네 변의 길이가 똑같은.........  몰타 기사단의 상징 마크에서 볼 수 있고,  현재 조지아의 국기에도 사용되고 있다.

  로마카톨릭의 교회건축이 라틴십자가의 형태를 기본으로 취하고 있다면,  당연하게도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 건축들은 정사각형의 십자가 형태 위에 만들어졌다.  그리이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러시아 등등의 동방정교회 세계에서는 지금도 정사각형의 교회건축을 정통으로 여긴다.

  그런가하면 피사나 피렌체의 세례당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카톨릭 형태도 아니고  그리스정교회 형태도 아닌 타원형의 팔각형 구조나 아예 둥근 구조의 교회 건축도 볼 수 있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의 경우에는 로마카톨릭에 속한 교회이니 당연히 라틴 십자가 형태의 건축물이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도 아그네스 성당은 라틴 십자가 형태로 계획되었고 건설되었으며 현재에도 같은 형태의 건축물로 남아있다.

  다만........  다른 보편적인 로마카톨릭의 교회들과는  좀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아는 사람????????

 

 

 

 

 

 

 

피렌체 두오모는 라틴십자가 형태 돔양식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시오니 성당은 전형적인 그리스십자가 형태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피렌체 조반니 세레당은 팔각형 돔형태로 만들어졌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이 라틴십자가 형태로 지어진 교회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당을 짓기 위하여 대지를 마련해서 토목공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건축물의 설계를 시작 할때부터 생겨난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아그네스 성당의 터(건축 대지) 안쪽으로는  '아고날리스 전차 경기장(Circus Agonensis)'의 트랙에 해당된다.  바깥쪽은 경기장 밖으로 도로(현 Via di Santa Maria dell' Anima)가 애초부터 만들어져 있었다.  아그네스 성당은 전차경기장 중간부분의 귀족들이 차지했던 관중석에 해당되는 것이다.  트랙에서 도로까지(관중석의 폭) 약 40m 가 된다.  이는 라틴십자가 형태의 교회를 지을 경우에 세로의 길이가 40를 넘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되는 것이다.  굳이 세로를 늘리자면 도로를 없애고 다음블럭까지 길게 늘이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렇게하면 거의 세로길이 100m에 이르는 라틴십자가 형태 교회 건축이 가능해 진다.  하지만 이는 전차경기장 주위를 관통하다시피 뻥 뚫려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도로를 뚝 잘라 가로막는 형태가 된다.  나보나 광장 주변 전체의 도시형태가 불편하고 답답하게 변질되는 선택이다.  이미 바로 옆쪽에 완성된 팜필리 궁전의 후문 도로가 가로막히게 되는 것이다.  교황 사저궁전의 건설에도 차마 기존의 도로만은 건드리지 못하고 완성했던 것이다.

  우선은 성난 로마시민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허겁지겁 서둘러 시작한 성당건축이었지만, 장차로는  교황의 눈부신 업적으로 남을 성당을 지어야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 자신과 팜필리 가문의 개인 교회이자 가문의 장지(무덤)로 꾸미고자 하는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이 길이 40m 하는 한계에 부딪혀 조그만한 움막을 짓게 생겼던 것이다.

  팜피리 궁전을 막 완공하고 난 건축가 지롤라모 레이날디와 아들 카밀로 레이날디는 이 문제점에 한 가지 해결 방안을 교황에게 제시했다.

  '라틴십자가 건물이면 되는것이지  그것이 꼭 세로 형태여야만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로로 길게 라틴십자가 형태로 건축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말은 일단 된다고 보겠다.  그것도 한 방편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파사드(정문을 상징하며 별도로 하나의 건축물로 인정받았다)가 교회의 한쪽을 모두 차지하는,  교회의 정문이 곧 교회의 크기 전부를 나타내게 된다.  실로 그 어마어마한 파사드의 크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며,  파사드의 정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교회의 본당(중심)에 닿게 된다.  그렇게되면 천 년가까이 이어져 온 교회건축의 정통성과 그렇게 건축을 해 왔던 깊은 의미와 목적이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속마음에 가득차있는 나보나 광장에 대한 미련을 접어두고 교회를 다른 장소로 이전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결국 교황은 건축가 레이날디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계를 지지했다.  부득이 횡적인 형태의 라틴십자가 교회를 짓게된다면,  그런 바탕 위에다 어떻게하면 거룩함과 화려함과 인테리어를 통해 기존 교회의 정통성을 가급적 고스란히  되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신신당부를 했다.

  지를라모 레이날디는 대충 지금 우리가 나보나광장에서 보고있는 것과 비슷한 건축물의 설계를 완성해 교황 이노센트 10세에게 제출했다.  교황은 레이날드의 설계안을 보고 대단히 흡족해하며 곧바로 성당 건축을 명했다.  성녀 아그네스 교회 건축의 첫삽이 퍼진것이다.  1652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교황의 지대한 관심과 전폭적인 지지가 뒤따랐던 이유로 성당의 건축은 무척이나 급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떻게 교회를 옆으로 길게 늘어트려 지을 수가 있지?' 하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가며 숱한 의문과 불만 섞인 음성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내노라하는 당대의 건축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그들이 제기하는 의혹과 불만은 대체적으로 똑같거나 비슷한 것을 이었다.

  성당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이 바로 본당이 된다는 것,  그 주위로 4개의 채플(예배당)을 두다보니 갑갑하게 느껴지고 본당과 소예배당의 구분이나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파서드가 성당의 한쪽 벽면을 채우도록 넓다보니까 어떤방법으로도 기존의 파사드 분위기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  성스러운 공간........  성당 안에 들었고,  어디선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느낌이 지절로 들게끔 만드는 기존 교회건축의 의미와 가치가 상실된 점 등을 지적하고 있었다.

  여론이 들끓자 결국 교황은 건축 채임자인 레이날디 부자와 의문을 제기하는 여러 건축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공청회를 열었다.  질문과 답변을 넘어서 이해 당사자간에 사활을 건 설전이 오고갔다.  공청회의 막판에 이르러 분위기는 대체로 이러했다.  여러 의견과 많은 지적들이 있었지만  이는 차차 보완해 나가면 될 일이고........  이미 레이날디 부자가 자신들의 설계대로 이만큼이나 건물을 올려놓았는데,  아무리 불만이 있다기로서니 과연 누가 나서서 이미 상당히 완공된 부분에 대해 감히 설계 변경을 할 수 있으며,  구조를 바뿌어가면서 까지 나머지 건설을 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겠는가?  어찌되었건 간에 레이날디 부자가 계속 마무리까지 공사를 계속해야 한다는데에 이야기의 촛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는 사람이 있었느니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서 손색이 없는 처지이면서도 다소 괴팍한 성격과 처신으로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였다.  비록 오늘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천하의 베르니니와 쌍벽을 이루는 그야마로 기인(畸人)이 아니겠는가.

  보로미니는 많은 사람들이 제기한 이견들을 조목조목 예로 들어가면서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그 누구의 눈치도 안살피는 평소의 성격처럼........  레이날디 부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두 가지 잘못된 점을 호되게 꾸짓었다.

  첫째,  설계도면 대로라면 어쩔 수 없이 교회를 가로로 늘려 짓다보니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엄청난 크기의 파사드이지만, 레이날드의 설계안으로는 결코 제대로 된 파사드를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그저 길다란 성벽에 빼꿈하게 문을 뚫어놓은 꼴이 될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여 레이날디는 중앙 출입문의 양쪽에 파사드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서 두 개의 종탑을 웅장하게 설치하고자 하는데.......  이 종탑은 광장이라는 좁은 지역적 한계속에서 교회의 핵심이 되어야 할 돔을 가리게 되어서 돋보이고 빛나야 할 교회 건축의 위상을 심각하게 훼손시킬것이라 주장했다.  굳이 종탑이 필요하다면 높이를 한참이나 낮추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더우기 이 종탑 문제를 나열함에 있어서 그 예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탑 사건을 들고 나왔다.  공청회장이 시끄럽게 들끓기 시작했다.  베르니니의 지지자들쪽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한참이나 지난 먼 과거의 일이었지만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의 종탑은 어찌되었건 라파엘로가 생각을 꺼냈고 상갈로가 시작을 했다고  간략하게 전제를 하고,  이는 나중에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에 의해서 실제로 대성당의 파사드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데르노가 사망함에 따라 수제자였던 로렌초 베르니니가 그 뒤를 이어 종탑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당시 세상은 온통 베르니니의 세상이었다.  마데르노의 제자로 있으면서도 그는 명실상부 스승을 훨씬 추월하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로 이미 오래전부터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훤출한 솜씨로 대성당의 마무리 공사까지 완성하게된다면  그야말로 베르니니는 평생을 목표인 미켈란젤로에게 근접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종탑이 아랫부분에 작은 균열이 발생했다. 바티칸 건축 위원회는 조사에 나서서 베르니니의 의견을 듣고자 자리를 마련했다.  사태 수습의 가닥이 잡히는가 싶었을때 뛰어든 사람이 바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였다.  보로미니는 마데르노의 조카이면서 동시에 제자였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동문수학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마데르노가 사망하고 베르니니가 건설총책임자가 되면서 보로미니는 석공들을 이끄는 한 파트의 책임자였다.  다시말하면 베르니니에 속해있는 기술자였던 셈이다.

  보로미니는 종탑의 균열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미 건물의 하중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서 생겨난 설계자의 잘못에서 비롯되었으며,  시공과정에서 깨달을 수 있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개선하지 못한 시공자의 잘못이 크다고 아주 아주 신랄하게 비판을 쏟아냈다.

  그 자리에서 베르니니는 쫓겨났다.  수 십년동안  쌓아온 공적과 명성이 한 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린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 바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앉았다.  그때부터 베르니니는 잊혀졌고  바야흐로 새로운 보로미니의 시대가 열렸다.

  그로부터도 10년이 다시 흐른 지금, 아그네스 성당의 건축 공청회에서 또다시 그 당시의(성 베드로 대성당 종탑 사건) 사건이 당사자인 보로미니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참다 못한 베르니니의 지지자들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남다른 강단과 성격처럼  이 상황을 씨익 웃어넘긴 보로미니는 다시 입을 여어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두 번째 그릇됨은..........  성당의 출입구(파사드)가 잘못 설치되었다는 지적이었다.

  지를라모 레이날디의 설계도에는 출입구가 지금의 광장쪽이 아닌 반대편의 도로(산타 마리아 델 아니마 도로) 쪽으로 한참 건설되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를 돋보이게 하는 파사드가 좁고 긴 도로쪽으로 나있게 되면 웅장하고 아름다워야 할 교회의 이미지가 마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위축된다는 이유였다.  교회는 존엄한 성소이지만  은총을 경험하고 나서는 교회의 문밖은 언제나 환하고 열린 세상이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교회의 앞마당이 너른 광장인 이유였다.  반대로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교회를 올려다 볼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하며,  나아가 스스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언제근 교회 안쪽으로 쉽고 편하게 찾아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로미니의 주장은 공청회장의 많은 청중들과 건축가들을 설득을 넘어서 충분하게 공감시켰으면 끌어들이에 충분했다.  파견되었던 추기경과 성직자들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내용들을 고스란히 교황에게 보고했다.  그 죽시 교황 이노센트 10세는 새로운 명령서에 서명했다.

  지롤라모 레이날디 부자는 성녀 아그네스 성당 건축에서 쫓겨났다.  새로운 성당 건축 총책임자로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보로미니의 처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성 베드로 대성당 종탑에 문제가 생겼을때 이를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서 책임자들을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다.  그 일을 계기로 근 10년째 자신 인생의 최고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의 종탑 설계자는 스승이자 집안의 삼촌이었으며,  쫓겨난 책임자는 스승의 수제자이자 동문인 베르니니였다.  이 일을 계기로 베르니니와 그의 추종자들은 언젠가 반듯이 기회가 올 것이라며 와신상담 재기를 모색하며 10년을 기다렸다.

  그런 상황에 새로운 교황의 야심찬 계획하에 진행중이던 성녀 아그네스 성당 건축에 문제가 제기되자 또 보로미니가 나서서 하나하나 잘못되었다고 지적질을 해댄 결과로,  이번에도 건설 총책임자 레이날디 부자가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고 그 자리에 떡하니 보로미니가 다시 올랐다.

  보로미니 자신은 하나도 그릇되거나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고 당연하다는듯이 그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그의 괴팍스런 성격으로 보아서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더욱 어깃장을 놓았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눈초리 따위에는 애시당초부터 관심조차 없었다.

  이 괴팍한 천재의 특출난 처세술에 대하여 세상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천재의 삶에는 정말로 주변의 상황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 무관심하듯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될 수가 있을까?

 

  성녀 아그네스 성당의 새로운 건축총감독에 오른 보로미니는 대대적으로 전임자의 설계와 시공중이 공사를 변경했다.  그야말로 새로운 성당의 건축이라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후면 도로로 내려했던 파사드와 출입문을 광장쪽으로 변경했다.  아울러 성당의 외관이 옆에 나란히 서있는 팜필리 궁전과 연속성이나 친밀한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개선했다.  아울러 성당 건축에 내재되어 있는 교황의 속내인 팜필리 가문의 개인 성당이자 가문의 묘지로 쓰인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고민한 결과로  팜필리 궁전의 최상층이 성당의 돔 부분으로 서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었다.(현재 레스토랑 테라스로 쓰인다)  팜필리 가문의 사람들은 궁전에서 외부로 통하지 않고 직접 아그네스 성당을 드나들 수 있게된 것이다.

  파사드의 중간부분을 오목하게 들어간 곡선의 형태로 만들어 광장까지 흘러내리는듯한 곡선미의 조화가 돋보이게 만들었다.

  광장의 폭이 좁아 성당을 대표할 우아한 돔이 제대로 올려다 보이지 않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돔을 떠받치는 펜덴티브를 커다란 루네트 창문이 달려있는 드럼 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돔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보로미니는 끝내 전임자 레이날디가 시공해 놓은 종탑의 높이를 낮추었고 열려진 텅빈 창문을 만들어 붙였으며,  그 양쪽의 종탑에 등불 설치를 시도했다.  흡사 오늘날 유명 관광지 건축물에 간접 조명이나 반짝이를 달아놓은것과 비숫한 생각을 보로미니는 했던 것이다.  험한 바다에서 등대 불빛을 보고 찾아오듯이,  광장 혹은 도시의 여러곳에서 성녀 아그네스 성당이 확연하게 잘 드러나도록 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이고........ 너무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고 했던가........  그만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성녀 아그네스 성당의 파사드(정면) 모습은......  어느 정도  보로미니의 솜씨가 그런대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라해도 여기 이 돔은  보로미니의 솜씨가 맞다.

 

 

성녀 아그네스 조각상과  성녀의 유골함(무덤)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무덤.  그는 여기 아그네스 성당에 뭍였다.

 

 

 

 

 

 

 

 

 

  교황 이노센트 10세가 선종했다.(그와 관계된 부당하고 파렴치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은 생략해야만 하겠다)

  그는 7살 먹은 조카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홀로되었음에도 평생 가문을 지켜왔다고 제수씨를 받들어 모셨는데,  실은 두 사람 사이가 부부 이상의 관계였다.  그녀가 저지른 죄가 엄청났음에 사람들은 '교황 사저에 계신 여자교황' 이라고 받들어 모셨다.  이를 눈치 챈 추기경(7살에 서임된)이 직을 내놓고 저주를 퍼부으며 떠나자,  다시 12살된 조카를 새로운 추기경에 임명했다. (오!!!!!!  놀라운 신의 은통이여!!!!!!!!!  여원히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

  끝내 교황은 자신 가문의 개인 예배당이자 가족 무덤으로 건설한 성녀 아그네스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여 이곳에 뭍혔다.

  그와 동시에 성당 지붕에 설치된 등불에 대하여 거센 비판과 항의가 들끓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보로미니가 시작한 성당 개축의 모든 분야 하나하나가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흡사 레이날디의 건축에 불만족인 사람들이 사정없이 비판하고 헐뜻어서 결국 공청회까지 열게되었던,  보로미니가 등장하던 그 시기와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민심이었고 이것이 바로 여론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보로미니에 의해서 명예를 잃고 쫓겨났던 베르니니와  성녀 아그네스 성당에서 역시 보로미니에 의해서 망신 끝에 쫓겨났던 레이날디 부자는 어느새 동지가 되어 있었고  그들의 공적은 바로 보로미니였다.  엄청난 세력을 규합한 베르니니와 레이날디는 체계적이면서도 집요하게 보로미니를 물고 늘어졌다.

  가뜩이나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소심하고 신경질적인 보로미니에게 연일 이어지는 비판은 견디기 힘든 고행이었다.  인격적인 비판은 보로미니로서는 평생 들어왔던 터라 견딜만 했는데,  자신의 건축 설계와 기술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외골수적인 그의 자존심과 평정심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그는 그만 이성을 잃고 적들에게 정면으로 맞받아 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세상에 그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이노센트 10세 교황의 후계상속자들이었던 팜필리 가문의 사람들 조차도 보로미니를 외면해 버렸다.

  새로운 교황 알렉산드르 7세는 매몰차게 보로미니를 파면시켜 버렸다.  보로미니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하지만  거 정도에서 사태가 진정된것이 아니었다.

  새 교황은 아그네스 성당의 후임 건축책임자로 쫓겨났던 카밀로 레이날디에게 맡겼다.  지롤라모 레이날디가 사망하여 아들이 책임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이 소식도 보로미니에겐 추가된 충격이었을 것인데,  얼마 뒤에 레이날디는 성당의 마무리를 위한 고문이자 총감독으로 베르니니를 초빙하게 된다.

  레이날디와 베르니니의 공동작업은 그 시작이 사실은 보로미니의 흔적을 지우는것으로 시작된것은 사실이다.

  보로미니가 만든 종탑과 아랫쪽 창틀을 재설계해서 다시 만들었으며,  돔의 루네트 창은 닫아 버렸다.  하지만 종탑의 등불은 차마 없애지 못하였고,  내부의 돔을 비롯한 일부분은 베르니니나 레이날디로서도 보로미니만의 워낙 뛰어난 솜시에 감복하여 차마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하나의 건물을 두고도 이렇게 서로 물고 물리는 엄청난 사연들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보로미니는...........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으로 돌아갔다.

  콰트로 폰타네 성당은 건축가로 독립한 보로미니가 처음으로 공사를 맡았던 뜻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채 3년만에 공사를 중간에 그만두고  성 베드로 성당의 완공을 위해 떠나야만 했다.  거기에서 성공한 보로미니에게는 중단한 폰타네 성당을 완공시킬 짬을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성공했고 바쁘게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그네스 성당에서 쫓겨난 이후에 그를 찾는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  그제서야 폰타네 성당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제서 그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열정을 폰타네 성당의 완공에 쏟아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고 저주하는 원성과 비판은 폰타네 성당의 작업장까지 쫓아오고야 말았다.  이젠 고통을 넘어서 거의 미쳐가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보로미니의 작업장에 돌맹이가 날아들고 그의 작품들을 쓰레기로 매도하는 낙서까지 등장했다.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의 파사드가 완공되자마자 보로미니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들의 미니어처를 산산히 두둘겨 부수고,  그동안 그가 작성했던 작업일지와 모든 설계도면을 불태워 버리고는 자살로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보로미니의 유작이 된 폰타네 성당은 아주 작은 성당이다.  모세의 분수 아랫쪽 인근에 있다.  미술사와 역사는 이 작은 성당을 로마 바로코 시대를 상징하는 희대의 걸작으로 꼽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사연도 많은 나보나 광장의 이야기른 이쯤에서 접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하겠다.

  4대강 분수 이외에도 넵튠 분수와 무어인 분수에 대해서도..........  베르니니가 또 꼽사리 끼는 사연에 대해서는  앞전의 로마 여행기에서 나름 상세하게 거론한 바가 있었기에 차후를 기약하면서 이쯤에서 생략하기로 하고..........

 

 

 

 

 

 

 

 

 

   ---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장문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들었다고(?) 하는  4대강 분수를  우리 부부가 조사하는 모습.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유작인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 파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