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 3일이 되면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 인근에서는 매우 특이한 축제 행사와 행진이 벌어진다. 하지만 로마를 찾는 여행자들 중에서 이를 눈치채거나 굳이 찾아가서 경험할 필요까지는 전혀 없는 현지인들만의 행사라고 해야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것과 똑같은 형태의 의식이 행해진다. 다만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대상이 개(犬) 라는것이 다를 뿐이다. 실제로 살아있는 개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참혹하게 죽게된다. 그런가하면 이날만큼은 로마인들 모두가 거위고기를 먹지 않는다. 거위를 데리고 거리 행진을 하는가 하면 실제로 거위를 살려주는(방면) 선처(?)를 베풀기도 한다. 이날은 '개의 수난일' 이자 동시에 '거위의 날'인 것이다.
이는 고대로마의 역사와 관계된 아주 오래된 유서깊은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na)를 부르짖는 미국의 불록버스터급 영화들을 보면 마치 로마제국을 연상시키게끔 억지로 유도하는 듯한 장면들을 곧 잘 목격하고는 한다. 대중문화와 예술에 상식과 통념을 넘어서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나 이데올로기가 은연중에 삽입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할 뿐더러, 이런 방식이 모든 국가나 민족이나 종교로 확대되게 된다면 이는 인류의 앞날에 결코 유익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역사의 종교전쟁과 민족주의의 대립이 만들어 냈던 비극을 미국이라는 나라는 잊어버린 것인지, 최대 강국이라는 오만함이 빚어내는 치기인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것은 없다' 라는 역사적 교훈을 망각해서는 안될텐데 말이다.
세계 최고 강대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면서도, 불과 250년 밖에 안되는 지극히 미천한 역사 전통에 대한 컴플렉스가 오늘날의 미국을 저렇게 과장되게 그려내게끔 만들고 있는것이리라.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백악관은 행사를 열고 그해의 칠면조를 뽑아서 방면해 주는 의식을 행한다. 도축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누군가의 음식상에 올랐을 칠면조가 특혜(?)를 입어 동물원에서 죽는날까지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다. 이는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자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 온 초기 이주민들의 고난에서 생겨난 의식이다. 미지의 땅에 처음 도착해 대자연와 야생동물에 대항하면서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야 했던 초기 이민자들에게 닥친 식량난은 대단히 심각했다. 추수감사절은 돌아왔으나 끼니가 없던 이민자들에게 숲속의 인디언들이 칠면조를 잡아다 선물해 주면서 위기를 극복했던 수난사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추수감사절엔 칠면조 방면과 더불어 너도나도 칠면조 요리를 만들어 주변과 나누는 풍습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먹고 살만해진 다음에 만들어진 풍습이다.
인디언은 낯선 침입자에게 칠면조를 선물해 주었는데, 이민자들은 그들의 생활터전을 빼앗고 그들을 짐승이나 노예처럼 대하며 역사의 뒷전으로 내쫓아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패륜 위에 미국은 건국되었다.
그런데 여기 이 '추수감사절의 칠면조 방면' 풍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고대로마가 거위를 방면해주는 풍습을 영락없이 고스란히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이미 2천 4백년 전부터 이같이 거위 방면을 해왔으니 말이다.
팍스 어메리카가 생각나게하는 전쟁영화를 보면, 폼이 그럴싸한 지휘관이 나서서 '이 싸움터에는 내가 가장 먼저 첫 발을 내딛을 것이며, 가장 나중에 철수할 것이다. 모두 나를 믿고 따르라'고 비장감을 듬뿍 얹어서 외쳐댄다. 감동을 안먹을래야 안먹을 수가 없는 장면이다. 심지어 거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하여 멋진 지휘관 뒤로는 부상자나 전투중 사망한 전우 하나라도 남겨놓지 않고 반듯이 데리고 돌아간다. 그래야지만 아메리칸 스타일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결코 미국영화에서 탄생한 장면이 아니다. 이 말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남긴 전쟁사에 길이 남는 명언이다.
911 사태를 비롯한 테러영화에 꼭 등장하는 아메리칸 스타일 명대사가 있다. '미국은 결코 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는다' 라는 불문율의 명대사 말이다. 하지만 이 명언도 역시 미국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거위의 방면'이 시작된 BC. 39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천 4백년 전 로마에서 똑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생겨 난 말이다.
'브렌누스'가 이끄는 켈트족이 로마를 침공했다. 오랜 내분으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로마는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로마 시내까지 들이닦친 켈트족은 팔라티노 언덕은 물론 포로 로마노까지 점령했다. 로마에게 남은것은 캄피돌리오 언덕이 전부였다. 로마의 7개 언덕 중에서 높이는 가장 낮았지만 캄피돌리오는 사방으로 깎아지른 벼랑위에 설치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브렌누스는 야간 기습을 계획했다. 완벽한 총공세였다. 하지만...... 그 날, 군사들은 지쳐 쓰러져 모두 잠이 들었고, 경비견들 마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기습이 이루어졌는데, 캄피돌리오 언덕 주노신전(헤라신전)에 기르던 거위들이 바위벼랑을 기어오르는 켈트족에게 배설물을 쏟아붓고 한바탕 소란을 피워 잠자던 병사들을 모두 깨웠다. 결국 야간 기습은 물거품이 되었다. 거듭되는 공성전에도 켈트족은 성과를 얻지 못했고, 포위전이 지속된 결과로 로마는 모든 물자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결국 양측은 협상장에서 마주쳤다. 브렌누스는 로마에게 1천 파운드의 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언덕 한 곳에 겨우 갖혀있던 로마에게 그런 정도의 금은보화는 불가능한 배상이었다. 로마가 있는대로 금을 끌어모아 협상에 나섰는데, 브렌누스는 아주 커다란 저울을 준비하였고 이미 한 쪽에 1천 파운드의 쇳덩어리를 올려놓고 있었다. 로마가 다른족에 준비해 간 금화를 모두 얹었지만 택도 없는 수준이었다. 로마는 과도한 배상요구에 거세게 항의 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브렌누스가 자신이 소지하고 다니던 칼을 저울의 쇳덩이 추 위에 올려놓으면서 외쳤다. 'Vae victis' 라고.
이를 다시 표현한다면 '불만은 패배자의 권리가 아냐'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얹어진 내 칼의 무게까지 채워서 가지고 와. 아니면 죽던가........' 라고 해야겠다. 이는 전쟁사에 길이 남겨지는 명언이 된다. 하지만..........
로마에 의해서 추방되었던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장군의 꿈에 거위가 나타나선 주노여신(헤라여신)의 전갈을 알려주는데 '로마가 위기에 빠졌어. 당장 너가 달려가지 않으면 로마는 멸망하고 말거야' 라는 계시를 전달했다. 놀라서 잠에서 깬 카밀루스는 그 길로 말을 달려 로마로 향했다. 소식을 들은 그의 옛 군사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켈트의 브렌누스가 로마에게 제시한 마지막 시간(금을 채워 오라고 명령한 시간)이 임박했을 때, 캄피돌리오 언덕을 둘러 싼 포위망을 뚫고 카밀루스의 군대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삽시간에 캄피돌리오 언덕 주변은 참혹한 도륙장으로 돌변했다. 카밀루스의 군대가 켈트족을 완전 섬멸하였던 것이다. 켈트족과 브렌누스는 도망쳤다. 카밀루스가 이들을 추격했다. 알프스 인근에서 끝내 브렌누스와 켈트족은 괴멸되고 말았다. 살아서 갈리아로 도망친 켈트족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붙잡힌 브렌누스의 처형을 앞두고서 카밀루스가 마지막 훈계를 날렸다. '로마는 어떤 적에게도 배상같은거 안 해' 라고.
이 또한 인류 전쟁사에 길이 남는 명대사가 되었다. 미국은 이 명대사를 교묘하게 자신들것처럼 패러디한 것이다.
아무튼 이런 위기를 격게되면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방어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를 적으로부터 지켜줄 성(城)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브렌누스가 켈트족을 이끌고 쳐들어왔던 갈리아 전투 이전까지 로마에 성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라틴부족의 국가인 로마를 세움과 동시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라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마가 건국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바로 성을 수축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팔라티노 언덕(Palatina)은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형제가 로마를 건국한 신성한 땅이다. 하여 로마를 통치하던 권력자나 왕족과 귀족들은 저마다 서로 앞다투어 팔라티노 언덕에 궁전이나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권력을 지향하며 야망을 불태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령스런 로마의 정통성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믿음과 상징성에서 나온 선택들이었다.
하지만 로마안에서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는 로만 포룸(포로 로마노)에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전과 원로원과 시장과 광장이 모두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역사는 모두 포로 로마노에서 논의되고 이루어졌다.
그런가하면 모든 로마 권력의 정점은 오로지 한 곳,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었다. 건국신화와 맞물려 팔라티노 언덕은 신성한 성지로 여겨지고 받들어졌던 반면에, 로마의 최고 권력과 결정은 항상 캄피돌리아에서 완성되었다. 논의는 포로 로마노에서 이루어졌지만, 마지막 결정과 최후의 승리와 영광은 언제나 항상 캄피돌리오 언덕의 몫이었다. 고대 로마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캄피돌리오의 트라이어드'라 불리던 '쥬피터(제우스)'. '미네르바(아폴로)'. '퀴리누스(야누스)' 신전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퀴리누스 대신에 '주노(헤라)' 신전을 넣기도 한다. 왜냐하면 켈트족과의 전쟁에서 위기를 극복해 준 '거위'들이 바로 이곳의 주노 신전에서 놓아 기르던 상징이자 전령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야누스 신전'의 경우, 실질적으로 현재에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는것이 아니라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내려서서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 로마의 중심대로인 코소보 거리를 따라 조금 북쪽으로 향하는 대로변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뭏튼, 고대 로마인들이 추앙하던 최고 신들의 신전이 모두 이곳에 있었으며, 로마왕국의 궁전 또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왕이 캄피돌리오 언덕에 살면서 최고의 신들에게 제물을 받치고 신탁을 받으며 통치를 하던 실질적인 최고 권력이 상주하던 로마역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가 바로 캄피돌리오 언덕이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왕은 곧바로 캄피돌리아 언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하여 즉시 캄피돌리아 언덕에 목책을 설치하고 방어군대를 상주시켰다. 캄피돌리오 언덕의 방어진지가 완성되고 나서야 두 언덕 사이의 낮은 습지를 메워서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마을이 확장되어서 시장이 서고 광장이 서고 도시로 발전하면서 '포로 로마노'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비니 여인의 납치 사건'이 벌어졌고, 3년 뒤에 모든 전모가 밝혀진 다음에 사비니 부족이 복수를 위한 전쟁을 시작한 곳이 바로 캄피돌리오 언덕이었다. 로물루스의 라틴족을 쳐부수기 위하여는 요새화된 캄피돌리오 언덕을 확보한 다음에 팔라티노 언덕으로 쳐들어가야만 한다고 사비니의 타티우스 왕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요새로 꾸며진 캄피돌리오는 난공불락이었다. 하여 타티우스는 미남계(?)를 이용한다. 꽃미남 사비니 용사가 은밀하게 라틴족의 캄피돌리오 진지 방어사령관의 딸인 타르페아(Tarpea)를 유혹하여 성공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타르페아는 아버지와 부족을 배반하고 한밤중에 몰래 목책의 문을 사비니에게 열어 주었다. 타티우스의 사비니족이 심야 기습으로 한순간에 캄피돌리오 언덕을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타티우스 왕은 비정하게도 성문을 열어 준 타르페아를 과거의 복수라고 외치며 바위벼랑 아래로 던져 버렸다.
포로 로마노에서 언덕을 올라 와, 테베강으로 향하는 노상에서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바위 벼랑이 바로 '타르페아 벼랑' 이다. 지금에야 건물들이 들어서느라 계단식으로 옹벽을 설치하고 언덕길에 도로를 넓혀놓았지만, 2천년 전의 캄피돌리오 언덕은 까마득히 높고 가파른 바위 벼랑위의 요새였던 것이다.
로물루스에 이어서 2번째로 왕위에 오른 '누마 폼필리우스'가 캄피돌리오 언덕에 '트라이어드 신전'을 세웠다. 이 때부터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왕국의 심장이자 최고 권력의이 상주하는 곳이 된다. 하여 품필리우스는 왕이 기거하는 궁전이 있는 캄피돌리오를 방어하기 위하여 천험의 요새로 진지를 구축했다.
이어서 제위에 등극한 로마왕국의 왕들은 포로 로마노를 건설하고, 로마왕국의 기반이 된 7개의 성스런 언덕에 자체적인 방어를 위한 성벽을 둘러치게 만들었다. 각기 자기 지역만을 방어하기 위한 개별 방어진지였던 것이다.
로마는 고대왕국으로 정착하였고 포로 로마노는 대도시로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최초의 하수도 시설인 '클로아카 막시마'가 포로 로마노 아래 건설될 정도였다.
강력해진 로마가 풍요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하였을 때, 로마인들이 침략하고 약탈하고 지배하던 갈리아 지방의 켈트족이 뛰어난 지도자 브렌누스를 맞아 반격을 해오더니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깊숙히 로마까지 쳐들어 왔던 것이다. 방탕과 향락에 빠져 사분오열되고 국방의 중요성을 상실한 로마는 처참하게 켈트족에 의해 도륙되고 말았다. 거대왕국 로마에게 남은것이라곤 달랑 캄피돌리오 언덕 하나뿐이었다. 포로 로마노도 팔라티노 언덕도 켈트족에게 약탈방하고 불에 탔다. 주노(헤라) 사원의 거위들 덕분에 그나마 절대절명의 위기를 겨우 넘긴 로마는, 자신들이 추방했던 용맹한 전사 카밀루스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국가의 운명을 이어나갈 수 있게되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국토방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켈트족의 침입이 너무도 커다란 상처와 두려움으로 남았다.
하여, 기원 전 4세기 경에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수푸리우스 세르빌리우스 프리스커스(Spurio Servilio Prisco)'로 하여금 신성한 7개의 언덕에 설치된 자체방어 진지를 모두 포함하는 타원형의 성벽을 만들도록 하였다. 로마의 첫 번째 방어성벽이 완성된 것이다. 7개의 언덕을 모두 성벽 안쪽에 두고 건설된 약 7km 길이의 성벽(자체 방어진지 성벽을 포함하면 약 9km)을 '세르비안 성벽(Mura Serviane)'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커다란 충격 뒤에 급하게 서둘러 만들다 보티 세르비안 성벽은 그 완성도가 지극히 미미하다 못해 떨어진다고 평가 된다. 하긴 당시까지 점령 일변도의 성공가도만을 달려 온 로마로서는 방어용도의 진지를 구축해본 경험이 거의 없어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12개의 출입문을 성치한 세르비안 성벽은 출입문 근처로는 나름 튼튼하게 지어졌지만, 시간과 물자절약을 위하여 상당구간 날림공사가 불가피 하였던 것이다. 하천이나 물웅덩이를 있는 그대로 해자로 사용했으며, 제방에 약간의 흙을 돋구어 성벽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도심을 지나면서 기존의 건물이나 담장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의 보완을 가하는 정도로 넘어가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공성전을 경험해 본 세력이 침공해 온다면 과연 성벽으로서의 역활을 해낼 수 있을지 조차도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지역이 상당부분 실재했었다. 오늘날 테르미니역 부근으로 세르비안 성벽의 잔재들이 그나마 많이 남아있다.
세르비안 성벽의 대부분을 과감하게 헐어버린 장본인 또한 분명한 로마인이다. 그것도 위대한 로마인이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세르비안 성벽을 외곽지역은 남겨두고 도심 지역의 성벽을 모두 헐어서 치워 버렸다. 이유는 제국으로 확장해가는 마당에 마냥 커져가는 로마도심을 재개발하기 위해서 였다. 기능도 제대로 할 수 없는(시저 평가) 허접한 담벼락이 도심의 미관을 해치고 공간만 차지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만약 이 성벽이 제대로 방어기능을 수반하는 우수한 성벽이었다면 위대한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시저가 보수는 못할망정 헐었을 이유가 없다.
좀 심하게 평가하자면 어디까지나 무늬뿐인 성벽이었다고나 할까?
방어 요새로서의 기능이 의심되는, 툭 치면 금방 무너질것 같은 어설픈 흉내내다만 옹벽? 좀 큰 담장?
아무리 그렇다해도 세르비안 성벽은 로마왕국의 절대 성지인 7개의 언덕을 지켜내기 위한 '로얄 임포리움(Royar Imporium)'이었다. 그곳은 오로지 로마인(생각에 따라서는 라틴족만을 위한)만을 위한 성역이었다.
고대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로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성벽을 쌓았다고 하니 한 번쯤 테스트를 해보고 싶어서였을까? 로마를 향해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쳐 왔던 것이다. 카르타고 였다.
이미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카르타고와, 반도를 벗어나 바다로 나가고 싶은 로마가 시칠리아에서 마주쳤던 것이다. 초기에는 로마가 감히 카르타고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로마는 이제 처음으로 바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카르타고는 오랜세월을 바다를 주름잡으며 살아왔던 해양왕국이었던 때문이다. 로마는 해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다. 그리고 로마에게는 자신들이 정복한 그리이스가 식민지로 엄연히 살아있었다. 오랜 내란으로 국력이 쇠락할대로 쇠락해져 그리이스는 로마에게 멸망당하였지만, 그리이스의 해군으로 치자면 페르시아 제국의 막강 해군도 물리쳤으며, 카르타고에 비해서도 월등하면 월등했지 뒤질것이 없는 최강의 해군이었으나........ 모두 퇴역한 노인이었거나 그들의 후손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로마는 그들에게 눈을 돌렸다. 지중해 최강의 그리이스 해군이 이제 없으나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로마는 뛰어난 그리이스인들을 편입 시켰다. 그리이스 방식을 개선한 함선을 건조했다. 용맹한 그리이스 해군 전사 방식으로 로마의 군인들을 훈련 시켰다. 수 년만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범접하는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오랜세월 최강을 누려온 카르타고 수군의 구태의연한 전투방식을 연구해 나갔다. 결과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그대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로마의 해군들이 해전마다 모두 완벽하게 승리를 쟁취해 나갔던 것이다. 이제 카르타고군은 더 이상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바다에서 로마군을 이기기란 기적을 바라는 일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제 지중해는 로마의 바다가 되었다.
그러자 바다로 나가지 않고서 로마군을 무찌르고자 하는 영웅이 카르타고에 등장했다. 한니발이었다.
멀고 먼 리베리아 반도(스페인)를 돌아서, 갈리아의 늪지대를 통과하고서, 혹한의 알프스 눈보라를 뚫고서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평원에 느닷없이 한니발의 군대가 들이닥친 것이다. 몰려오는 로마의 군단을 보기좋게 하나 하나씩 무찔러 내려갔다. 이제 이탈리아 반도에 남은 로마의 군대는 로마 수도방위군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로마는 이제 바람앞의 등불이었다.
한니발은 전군을 이끌고 로마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진을 쳤다. 세르비안 성벽이 보이고, 우왕좌왕 몰려다니는 로마군이 보였다. 이제 로마가 역사에서 사라지는데는 단 하루면 족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주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인류 문명사 최고의 수수께끼중에 하나라고 할 만한 사건이다. 한니발은 수많은 전투를 치뤘고, 공성전이라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해치우는 명장이다. 거기다가 로마가 켈트족과의 전쟁 이후에 겁에질려서 허겁지겁 대충 만들어 놓은 세르비안 성벽이라는 것이, 훗날 시저의 평가에서도 드러나듯이 성벽이 아니라 부잣집 담벼락 수준이었던 것이다. 정탐도 하고 헛점도 파악했을 것이다. 반나절이면 세르비안 성벽을 돌파하고 한나절이면 캄피돌리오 궁전과 신전들을 점령하였을 것이다. 켈트족과는 다르게 카르타고는 기병 위주의 군대였던 때문이다. 로마는 싸울 군사도 기력도 전무했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한니발은 로마 침공을 망설였다.
초한지를 보자면 99번 싸워서 99번 연승한 항우는 기린아였다.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100번째 싸움에서 단 한 번 패한 이유로 망하고 죽임을 당한다. 유방은 단 한 번을 이겼지만 승자가 되고 한나라를 건설했다.
꼭 그짝이 재현된 것이다.
주변의 모든 참모와 병사들이 서둘러 쳐들어 가서 로마의 숨통을 끊어놓자고 외쳤다. 하지만 한니발은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 그 이유를 나도 알 수가 없다. 카르타고 군대는 세르비안 성벽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을 마냥 기다렸다. 로마가 스스로 항복해 오기만을......... 하지만 로마는 죽을지언정 제발로 걸어나와 항복할 순 없었다. 로마인들의 솔직한 심정은........ '지금이라도 쳐들어 와서 제발 고통없이 죽여다오' 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어서 들어와 끝장을 내다오' 라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한니발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기만 하고 있었다.
끝장을 내주기를 기다리다가 로마인들은 치쳐갔고, 성문을 열고 항복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카르타고군들도 지쳐갔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가 또 있을까? 이럴려고 알프스를 넘어왔단 말인가?
얼씨구? 어쭈?
기다리다 지친 한니발이 세르비안 성벽의 포위망을 풀고 물러난 것이다. 그는 로마에게 항복을 종요하는 통보를 보냈다. '로마가 항복하는 날까지 로마의 전역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페허로 만들어 버리겠다.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라' 라고. 그날부터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 알프스 산자락에서 부터 최남단 시칠리아 코 앞까지 오르내리면서 약탈하고 방화하고 초토화를 시켜나간다. 얼마동안? 장장 16년 동안을 말이다. 와!!!!
한니발이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초토화 시키며 돌아다니고 있어도, 로마는 세르비안 성벽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수로(테베강)를 통해 바다로 나아가 주변으로부터 생존물품을 몰래 끊임없이 성 안으로 퍼 나를 뿐이었다. '나가면 죽는게 뻔한데 너 같으면 나가겠냐? 하는 식이었다. 로마로서야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이겠으나, 이러한 한니발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6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것을............
그 16년 동안 로마가 숨죽이고 가만히 있었던것만은 아니었다. 뛰어난 기개를 가진 젊은 영웅을 한 명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스키피오 였다. 스키피오는 시간만 충분하다면 반듯이 로마가 재기해서 한니발과 상대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로마 원로원의 전권을 부여받은 젊은 군인은 남몰래 세르비안 성문을 빠져나와 나룻배를 타고 테베강을 내려갔다. 뒷돈을 두둑히 안겨주고 교역선을 얻어타고는 카르타고의 포위망을 뚫고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에 남아있던 로마군단을 접수한 후에는 자신의 방식으로 훈련을 시킨 뒤 군단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카르타고 본국을 쳐들어 갔다. 카르타고의 군대 대부분이 한니발을 따라 로마로 가서 16년째 로마를 도륙내고 있었다. 도륙은 한니발이 로마에서 벌이고 있는 상황이고, 당장 카르타고 왕국이 스키피오에게 도륙당하게 생겼던 것이다. 카르타고 왕은 서둘러 한니발에게 돌아와서 왕국을 구하라고 명령을 보냈다.
이로서 로마는 부활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니발을 쳐부수고 카르타고를 끝내 멸망시키게 되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바야흐로 제국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러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시저에 의해서 허물어진 세르비안 성벽을 대처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벌어진 것이다. 로마의 세력확장만큼이나 그동안 로마의 도심도 커졌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총 길이 19km에 이르는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면서 18개의 성문을 설치했고, 성벽의 두께를 3.5m로 하고 높이를 자그만치 8m로 수축했다. 30m 마다 정사각형의 감시탑까지 갖춘 제대로 된 위용의 로마 방어요새가 구축된 것이다. 막센티우스 황제에 이르서서는 대대적인 보완공사까지 이어지면서 성벽의 높이가 16m까지 올라가게 된다.
거대한 로마성벽의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이는 고스란히 훗날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에 건설한 1천년을 버텨내는 난공불락의 요새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롤 모델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건설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아무리 견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방어 성벽이 굳건해지면 굳건해질수록 그 성벽을 넘어서 쳐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기술과 함께 무기도 발전해 나가는 것을.........
이후로도 로마성벽은 여러차레 적들에게 침입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인들에게 '갈리아 지역의 야만인'으로 불려지던 서고트족이 성벽을 뚫고 침입했다.
그 사건으로 서로마는 멸망했다.
숱한 설움과 증오와 복수심에 가득찼던 고트족은 아주아주 철저하게 로마를 파괴했다. 약탈과 살인과 강간이 잇따라 벌어졌다. 모든것을 빼앗은 다음에는 불을 질렀다. 몇 날이고 로마는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이 잦아들자 이번에 파괴가 시작되었다. 신전의 기둥들이 부러져 주저앉았고 왕궁의 담벼락들이 허물어졌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쪽의 로마도심엔 온전한 모습의 건물 하나, 신전의 동상들과 계단과 담벼락 하나 조차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것이 없었다.
지금 로마를 방문하면 볼 수 있는 페허로 변한 로마 포룸(포로 로마노)의 모습이 당시 고트족이 파괴해 버린 로마의 모습이다. 로마는 이제 거대한 파괴된 돌더미에 불과했다. 제대로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지난날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정복한 로마인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카르타고를 파괴한 적이 있었다. 카르타고 영역엔 풀 한포기 자라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지중해 전역의 소금을 가져다가 파괴된 카르타고의 페허위에 거대한 소금산을 쌓기까지 했었다. 똑같은 일이 이번엔 로마인에게 벌어지게 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역사의 교훈이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는 이제 잡초 무성한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초토화된 로마에는 소와 양들이 풀을 뜯어먹던 방목장이었다. 더이상 과거에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의 위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되었다.
하지만........ 그 페허뿐인 그곳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서고트족에 의해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쪽의 로마는 모조리 철저하게 파괴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가장 가까운 성밖으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바로 '벨라리움(Velabrum)'과 '포럼 보아리움(Forum Boarium)'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을 우리나라 방식으로 좀 쉽게 표현한다면 '달동네' 혹은 '판자촌' 쯤 될것이다.
캄피돌리아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난 습지를 메꾸어서 건설한 것이 바로 '로마 포룸(포로 로마노)' 이다. 로마제국의 심장이라 하겠다. 로마인들이 그토록 머물고 싶어했던 정치 종교 문화 경제의 줌심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고대로마의 절대성역(Royar Imporium)에 해당되었기에 당연히 세르비안 성벽 안쪽에 해당되었다. 포로 로마노에서 지대가 낮은 언덕 아래쪽으로 난 성문을 나서면 마차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협곡의 오솔길이 테베강까지 연결되는데, 캄피돌리오 언덕과 팔리티니 언덕 사이의 협곡으로 타르페아 벼랑이 올려다보이는 좁은 길이다. 이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숩지로 이루어진 너른 들판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벨라리움' 이다. 고대부터 이곳은 아주 허름한 재래시장이었다. 로마의 심장부인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가까운 테베강에 이르는 골짜기에 수산물과 야채와 과일을 파는 행상들이 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세르비안 성벽 안쪽의 부유한 저택이나 식당의 하인들이 가까운 이곳으로 수산물을 사러왔다. 벨라리움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 습지를 돌아나가면 테베 강변의 너른 풀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방에 신전들이 들어서 있는 이 지역은 바로 '포럼 보아리움' 이다. 테베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풀밭에 소나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한가운데 헤라클레스 신전 앞에선 로마에서 유일한 소시장(牛)이 섰다. 소시장 주변으로 커다란 도축장들이 들어서 있었다. 로마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육류가 이곳에서 거래되고 제공되었던 지역이다. 그러다보니 벨라리움과 포럼 보아리움 지역엔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대부분이 로마사회의 이방인들이자 극빈자들이 모여사는 빈민촌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떠돌이나 우범자들이 몰려들었기에 로마로서도 이곳의 치안은 늘 골치덩어리였다.
그런 이유로 고트족에 의한 서로마제국의 몰락의 순간에서도 이곳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긴 침략자인 고트족 입장에서도 이곳에서 무얼 약탈하고 무얼 때려부수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것이 있었다.
초기로마는 거의 고대 그리이스의 몰락과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기에, 대부분이 거기서 거기였다. 비록 그리이스는 멸망당하였지만, 이제 막 역사의 전명에 등장한 로마 보다는 앞선 문화와 문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초기로마는 모든것을 그리이스를 모방하거나 답습하는것으로 시작하였으며, 차차 이를 시정하고 개발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로마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고대로마의 생활과 터전 깊숙한곳까지 그리이스인들이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서 함께 생활했던 것이다. 포럼 보아리움은 로마에 이주한 그리이스인들이 모여서 터전을 이루며 살아가던 장소였다. 세르비안 성벽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곳 포룸 보아리움과 캄피돌리아 언덕 모두가 그리이스의 신전들고 가득한 신성한 영역이었던 것이다. 고대로마의 세력이 확장되고 세르비안 성벽이 생겨나면서 로마인들은 점차 로마인들만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였고, 정치와 경제와 생활과 종교면에서 까지 '로만 임포리움(로마인의 자존심)'의 잣대를 가지고 이방인과 차별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세르비안 성벽 밖의 지역은 점차 이민족이자 이방인인 그리이스 출신의 하층민 지역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단순하지는 않지만.......... 어찌되었든 그런 이유로 '벨라리움'과 '포룸 보아리움'은 살아남게 되었다.
이제 벨라리움과 포룸 보아리움은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에 테베강 유역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새로운 중심이 되기 시작한다.
지중해로부터 테베강을 거쳐 들어오는 모든 물자와 해산물은 모두 이곳에 도착한다. 이는 고대 로마대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유래가 깊은 일이었다. 로마에 도심(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가까운 포구(항구)였기 때문이다. 크거나 무겁거나 물량이 많은 물자는 마차로 운송하는데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하여 육상운송은 도저히 수상운송(해상운송)을 따르지 못한다. 그것이 이 지역이 중요한 이유였으며, 로마 초기때부터 이곳에 그리이스식 신전들이 많이 들어선 이유이기도 했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교황청의 급성장은 테베강 건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만들었으며(나보나 광장 중심의), 이는 포룸 보아리움에서 시작하여 벨라리움을 거쳐서 나보나 광장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도심과 교통망을 생겨나게 했다. 제국시대의 로마는 여전히 돌무더기로 변해서 잡초더미에 파뭍혀 버렸고, 중세의 로마는 바티칸을 중심으로 새롭게 건설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벨라리움'과 '포럼 보아리움'의 한복판에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누가 왜 격변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한복판에 야누스의 문을 만들었던 것일까?' <휴! 힘겹게 멀리도 왔다>
'야누스의 문'은 도대체 용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많은 학자들에게 물어봤다. 학설은 분분하지만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에게(피안재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게되었다.
'야누스의 문은 도대체 어디어 써먹으려고 만든거야?'
'글쎄......... 좀 난해한 문제이기는 한데........ 쬐끔만 기다려 봐. 쬐끔만......... '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우선 주변에 남아있는 역사적 유적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위치와 역사적 환경에 대해서는 위에서 대충이나마 설명을 하였기에, 여기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적들과의 연관서을 통하여 야누스의 문에 대하여 나름의 근거를 갖춘 접근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정확한 위치나 주소는 물론 구체적인 그 유적들의 성격까지 세세하게 파악하고자 한다면, 이건 커다란 한 권의 논문이 될것같아 표본조사의 수준에서 가볍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야누스의 문' 주변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아무래도 '벨라브룸'과 '포럼 보아리움'이 될것이다.
'벨라브룸(Velabrum)'은 팔라티노와 캄피돌리오 언덕 사이의 골짜기 아래에 생겨난 너른 습지대이다. 습지대를 메꾸어서 건설한 로마 포로나의 언덕 아래쪽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테베강물이 넘쳐서 이곳 습지대까지 밀고들어왔을 때,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형제가 바구니에 태워져 떠내려 오다가 이곳의 무화과나무 뿌리에 걸려있는것을 어미늑대가 건져다가 인근에서 젓을 먹여 구출했던 성스러운 장소이다. 로마의 번영과 함께 습지 주변으로 수로를 이용한 물자들이 풍부하게 공급되자 자연적으로 전통적인 재래시장이 형성되었다. 포로 로마노에서 팔라티노 언덕을 향해 올려다보이는 지역에 빼곡히 들어선 고급 빌라와 맨션 같은 로마의 고급 주거지역은 뒷쪽의 아벤티노 지역은 물론 캄피돌리오 언덕 주변으로도 많았다. 이 대부분의 주거지역 생활물자를 조로 공급하던 재래시장이 벨라브롬이었던 것이다.
'포럼 보아리움(Forum Boarium)'은 초기 로마가 만든 '고대 그리이스 신전 지역' 이다. 초기 로마는 그리이스의 정치 겅졔는 물론 문화와 예술과 종교까지 모두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름만 바꾼 고대 그리이스의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이 일대에 모두 건설되었다. 로마인들의 종교 중심지 역활을 도맡았던 지역이다. 아마도 이지역은 고대 그리이스의 한 도시 같았을것이다. 그리이스 유민들에 의해 해상무역이 이곳까지 이르렀기에 점차 시장이 확대되어 갔고, 로마 최초의 검투경기도 이곳에서 열렸다. 이는 그리이스식 극장과 대전차 경기장 건설로 이어진다.
하지만, 로마가 체계를 잡아가고 왕국을 거쳐 공화정으로 체재 정비를 완성해나가면서 이제 여기 신전들의 역활과 영역도 점차 포로 로마노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곳은 점차 방치되기 시작했다. 클로아카 막시마(로마의 하수정비시설)가 완성되기까지 이곳은 테베강변에 버려진 습지이자 너른 풀밭으로 전락했다. 소와 양떼가 풀을 뜯는 방목장이었을 뿐이다. 이제 헤라클레스 신전 일대는 우시장(牛)이 형성되었고, 주변은 로마시민들에게 모든 육류를 제공하는 거대 도축장으로 변모했다. 절대빈민과 우범자들이 주로 기거하는 지역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서고트족에 의해서 서로마가 멸망하고 도시가 완전하게 폐허로 파괴되었을 때 겨우 살아남아 생존자들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게되었다.
하여 지금까지도 '헤라클레스 빅터 사원' '포르투누스 사원' '넵튠의 분수'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로마의 건국과 동시에 중요한 교통망이 모두 이곳을 거쳐 지나갔다. 포럼 보아리움 앞으로 고대의 중요 도로가 여전히 제구실을 하고 있으며, 건너편에 '보카 델라 베리타 광장'이 있다. 오른쪽으로 이 광장의 이름을 낳게만든 '진실의 입(보카 델라 베리타)'이 놓인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교회'가 있다.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를 지나 조금만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영화 (벤허)에 등장하는 로마제국 최고의 대전차 경기장인 '서커스 막시무스'가 나온다.
보카델라 베리타 광장의 반대편 골목 안쪽에 바로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 이 위치해 있다. 발견되는 고대 지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야누스의 문 바로 뒷쪽에 아마도 '세르비안 성벽'이 놓여졌을 것이다. 그 성벽에 기대어(혹은 안쪽에) 로물루스 쌍둥이 형제가 늑대어미에게 처음 구출되었던 성지에 세워진 '산 조르지오 벨라브로 성당'이 위치한다. 이 벨라브로 성당의 담벼락에 기대어 '아르쿠스 아르헨타리오룸(Arcus Argentariorum)'이 설치되어 있다. 달리 말한다면 '환전상의 문' 이라고 해야겠다. '머니 체인지'와 관계가 깊은 유적으로 야누스의 문 못지않게 수수께끼로 가득한,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장소이다. 나는 여기 이 '야누스의 문'과 '머니 체인저의 문'이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AD. 204년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이 전하는 환전상의 문(더 쉽게는 전장포)이 하필이면 왜 교회에 붙어있는 것일까?
이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아주 쉬운 문제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늑대에게 구조되어 성장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 성스런 장소인 것이다. 당연히 이곳에는 로마 건국 직후에 신전이 들어섰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신전이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교회로 개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머니 체인저의 문'은 로물루스 신전의 벽에 붙여져서 서기 204년에 만들어졌고, 7세기 경에 신전이 교회로 개축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머니 체인저' 들이 상주하였거나 이용하였으므로 새로운 교회의 건축가들은 이 문을 철거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전해내려왔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야누스의 문'과 '머니 체인저의 문'과 '교회'의 관계에서 나는 야누스 문의 용도에 대해 찾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야누스의 문에서 두 블럭 정도 윗쪽으로 올라가면 대로의 중심에 세르비안 성벽에 설치된 성문중의 하나인 '카르멘탈리스 성문(Porta Carmentalis)'가 위치해 있었다. 성문의 뒷쪽으로는 포로 로마노와 아벤티노 지역으로 향하는 대로가 포장도로로 놓여져 있었다. 이 지역의 광장을 '포로 올리토리오(Poro Olitorio)'라고 불렀으며 야채와 곡물 상설시장이 열리는 지역이었다. 여기에 설치된 '카르멘탈리스 성문'은 로마시민들의 경제생활에 실질적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아주 중요한 영역이었다. 이 성문은(로물루스 신화 영향인지 몰라도) 18개의 성문중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쌍둥이 문으로 건설되었다. 그중 하나의 문을 '포르타 카멘티멘테스'라 불렀는데 이는 '승리의 문' 이라는 뜻이다. 초대 황제였던 아우쿠스투스 등이 승리를 기념하는 페레이드를 이 문을 통과하면서 열었다. 또다른 하나의 문을 '포르타 셀레라타' 라고 불렀으며 이는 '자주의 문'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로마의 대표자격으로 전쟁이나 회담에 나선 사람들 중에 승리의 전과를 올리지 못한 사람은 '승리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저주의 문'을 통과 해야만 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적극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음에도 포르타 카르멘탈리스의 정확한 위치와 발굴은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극히 일부의 패배한 권력자들이 포르타 카르멘탈리스 앞에 이르러 저주의 문은 통과하기 싫고, 승리의 문을 통과할 자격은 미달이고 하여, 카르멘탈리스 성문에 도달하기 직전에 '포럼 홀라트리움'의 옆 기슭을 가로질러 통과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포럼 홀리토리움(Forum Holitorium)' 과 '포로 올리토리오' 는 과일 야채 시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었다. 유명한 그리이스식 극장인 '마르셀루스 극장(Theatre of Marcellus)'이 위용을 한것 뽐내고 있었다. 로마의 야외극장이었던 마르셀루스 극장은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서 착공되었으나, 그의 암살로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완공되었으며, 요절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처남인 클라우스 마르셀루스에게 헌정 되었다. 인근의 그리이스 신전의 석재들을 가져다가 건설했다. 하지만, 로마가 급격하게 쇠락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극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주변의 공공시설(도로. 다리) 공사와 부유한 자들의 개인공사가 활발해지면서 석재공급을 위한 채석장으로 변모하게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홀리토리움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고대 그리이스 3명의 신을 모신 신전일 것이다. 카르타고와의 마일라 해산전투에서 승리한 로마는 승리자 가이우스를 위해서 이곳에 신전을 지었으며, 이는 곧바로 '주노 호스피타(헤라 여신)'를 모시는 신전과 '피에타스(희망의 여신) 여신'을 모시는 신전과 '야누스(사작과 끝의 신)'을 모시는 3개의 시전이 한 자리에 건설되게되는 것으로, 이 지역에서는 가장 빠르게 BC 2~3세기 경에 코넬리우스에 의해서 세워졌다. 하지만 이 신전들의 역사 또한 그리 정확한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특히 야누스 신전에 관한 기록과 발굴 성과가 지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신전은 고대의 지하 무덤위에 건설되었으며, 로마 멸망과 함께 파괴된 이후에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 박해 시절에 크리스마스를 탄생시킨 성 니콜라스가 터키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 후에 이곳에 갇혔었다고 전해진다. 페허로 변한 사원은 AD. 6세기 경에 '카르체르 산 니콜라 교회(San Nicola in Carcere)'로 새롭게 탄생한다. 새로운 교회는 피에타스 신전의 기반과 기둥을 겉으로 고스란히 드러낸 채 건설되었다. 현재의 니콜라 교회 파사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훌륭한 건축가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의 작품으로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야누스 신전'을 비롯하여 '홀리토리움'이나 '올리토리오'의 유적들과 '포르타 카르멘탈리스'를 비롯하여 '야누스의 문'과 '머니 체인저'의 문 등은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 같은 궁금증들을 가득 품고 있다. 이미 제시되었고 지금 나와있는 학설이나 주장들 모두가 아직은 실체외 진실이 모두 불분명한 상태라고 하겠다. 좀 더 연구와 발굴이 뒤따른 후에야 숨겨진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시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어떠했을까?
모든것이 여전히 베일에 쌓인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이곳의 옛 모습은 과연 어떠 했을까?
'야누스의 문' 진실을 추적해 보기에 앞서서.......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모습을 추적하고 연구하고 재생해내는 한 화가의 그림들을 통해서 잠시 중세 이전의 로마인들이 이 지역에서 살던 모습을 잠시 살펴 본 후에 본격적으로 '야누스의 문'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인류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시간의 개념과 구분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이는 분명 백인 중심의 유럽식민사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여 BC(기원 전)과 AD(기원 후)의 구분이 그것이다.
AD. 3세기 경의 기독교인들에겐 항상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로마의 탄압속에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까? 역경속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그런가하면 AD. 4세기 경의 로마인들에겐 꼭 이 질문을 하고 싶다.
'기독교 공인 이전과 이후는 로마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로마인에게 기독교는 과연 무엇입니까?'
신이 로마에 내려준 커다란 축복중에 한 가지는 탁월한 지도자, 그러니까 위대한 국가 경영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 축복은 마침내 '존엄한 자(Augustus)'를 탄생시키면서 정점을 찍게된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로마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하면서 저 유명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만들어 냈다. 이 위대한 지도자들은 모두 철저한 국가경영 원칙론자들이었다.
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해서 첫 시간에 들은 경영학 원론 강의의 요지는 지극히 간단한 한 가지였다.
'경영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단....... 비용을 최저로 들여서 최대의 이윤을 내는것이 바로 경영하는 사람의 목표다' 라고 말이다. 이 원칙을 2천년 훨씬 이전의 로마 황제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비용을 최저로 들여서 엄청난 부를 벌어들여 국가를 부흥시키는 방법을 이미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바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전쟁에는 '승자의 독식' 이라는 불문율이 전제된다. 싸워서 이기고 차지하면 모든것이 승리자의 몫이 된다. 그 전리품에다가 차후로 지속적인 공물을 요구하여 로마로 가져가면 당연히 로마는 풍요로운 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위대한 로마는 끊임없이 계속된 정복전쟁과 노예들에 의해서 이룩되어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정복전쟁사에 최고 정점을 찍었다. 로마제국을 완성시킨 것이다.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원로원을 자신의 세력들로 채워나갔다. 바야흐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모든것을 다 이루었다. 그러자 그는 이제 서서히 정복전쟁을 멈추기 시작했다. 점령지역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세제 개혁을 통해서 정복이 아닌 내치와 세력유지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로마시닌들에게 곡물을 무상분배하였고, 콜로세움과 대전차 경기장 등을 통해서 시민들을 축제분위기로 이끌었으며, 대형 고층의 공동아파트나 공동 목욕탕을 지어서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정권 안위를 위하여 군대는 멀리 외지로 내보내고 강력한 친위대를 만들어 치안확보에 주력햇다.
하지만,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로마의 평화는 어디까지나 위장된 평화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구도 생산적이거나 위험을 무릅쓰거나 헌신해야 하는 일에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향락과 타락에 빠져버리고 취해버린 결과였다. 중소농민이 몰락했다. 당연히 이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나타났다. 도시의 빈민층과 관리조차 버거워진 노예층이 유민이 되어가고 부랑자들로 전락했다. 끊임없이 벌어진 정복전쟁과 거기에서 생겨난 전리품과 노예제도로 유지되던 로마의 평화는 이제 강력한 군사력이 급격하게 쇠락한 가운데 행정력만으로 통제되기에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사후에 불과 200년 만에 로마의 평화는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빵과 서커스 정책에 중독된 로마는 이제 이전까지의 로마가 결코 아니었다.
이제 로마는 황제의 권위와 안전을 위해서 아우쿠스투스가 만든 친위대의 세상이 되어갔다. 군인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50년 동안 26명의 황제들이 군인들의 필요와 입맛에 따라 교체되었다. 황제는 이제 존엄한 최고 통치자가 아니었다. 친위대가 벌이는 정치라는 놀음판의 꾹두각시 인형에 불과했다.
군인들만을 위한 정치놀음과 향락과 사치가 연일 로마에서 벌어졌다.
이미 로마제국이 차지한 영역은 방대하였지만 이젠 이지역을 방어할 최소한의 군대조차 갖추지 못했다. 정복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군인들에게 배당되어 돌아올 신분 격상이나 전리품이 없는 마당에 더 이상 누구도 군인이 되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 로마제국의 국경에 분쟁과 전운이 끊이질 않았다. 더 이상 전리품과 노예가 공급되지 못하는 로마는 극심한 지경까지 붕괴되었다. 그러자 자연히 군인들의 사치와 향락문화에도 더 이상 공급될 재화와 물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지역에서 대규모 농민 폭동이 일어났고, 사방에서 밀려난 군인들에 의해서 반란이 일어났다. 상황을 눈치챈 게르만족이 연일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로마제국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해 버리고 말았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군인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소아시아 지역의 예루살렘 부근에서 아랍족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로마제국의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서둘러 로마로 돌아와서 화려학 황제에 즉위하고 통치하느냐 하면........ 절대로 오산이다. 그냥 죽어라 예루살렘 인근 천막속에서 전투 사령관 노릇을 하면서 황제로서의 행정적인 업무까지 병행해야만 하게된 것이다. 이후로도 그는 황제 신분을 가지고도 소아시아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30년을 더 최전선에서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정말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허울뿐인 황제 자리였다. 하여 그는 제국을 4등분하여 4명의 통치자가 나누어 다스리는 '4분통치제'를 만들어서 스스로 자신의 독점적 황제권을 내놓고 나누어 준다. 소수정예에 의한 분할지역 집중적 관활은 한동안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정치와 권력의 속성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만 않았다. 누구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과감하게 황제의 권력을 내어놓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거저 분할받은 권력을 나머지도 서로 차지하겠다고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보다못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황제의 지위를 반납하고 퇴직을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내란에 휩쌓여 종말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제국에 또 한 명의 유명한 지도자가 등장한다.
루마니아 지역에서 지역관할 사령관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의 길을 걷게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아 4인 체제의 집정관에 오르게되지만, 그야말로 지지기반이 지극히 미약한 어울뿐이 집정관이었다. 하지만 결혼으로 얻는 혼맥과 집요한 목표의식과 각고의 노력 끝에 탁월한 지도력까지 겸비하게되자 마침내 그는 권력의 정점에까지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제국의 권력과 군사력은 막강한 막센티우스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휘두르던 시대였다. 20% 남짓의 군사력을 가지고 독단적으로 막센티우스에게 대항하기는 불가능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갈리아지역(독일 프랑스)에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것을 로마를 차지한 막센티누스가 알아채 버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아직 싸울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가만히 두고볼 수만은 없는 막센티우스가 무장해제와 단신으로 항복해 올것을 요구했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불가항력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살아님기 위해선 막센티우스가 원하는 방식대로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다. 줄리어스 시저가 루빈콩 강을 건너서 로마로 진군했듯이, 콘스탄티누스 또한 테베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보아도 콘스탄티누스의 패배가 분명한 불가능한 전쟁이었다. 갈리아 군대를 이끌고 마침내 테베강 상류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운명을 건 전투가 시작되었다.
막센티우스의 로마 방어군과 콘스탄티누스의 갈리아 원정대가 밀비우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이 전투는 세계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게되는 일대 사건이 된다.
(로마사)를 비롯한 역사는 '절대적 우위의 막센티우스 군대가 뜻밖에 콘스탄티누스의 원정대에게 참패했다' 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게 전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이제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가 지배하는 전제군주제(Dominatum)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첨부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 전승(로마 카놀릭에서만 인정하는 다분히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역사)에서는 뜻밖의 놀라운 전쟁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막강한 막센티우스 군대와 불가능한 전투를 치루어야만 하는 원정군의 총사령관 콘스탄티누스는 그날 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꿈(Labarum)을 꾸게 된다. 이어서 천사가 나타나 P와 X로 된 깃발을 보여주면서, '내일 전투에 기러한 깃발을 앞세우고 방패에 그려서 싸움에 나서면 반듯이 승리하리라' 라는 예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콘스탄티누스는 천사의 지시를 따랐다. P와 X를 그린 깃발을 앞세우고 같은 그림을 그린 방패를 들고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쳐들어 갔다. 어제까지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의 사기는 '신의 계시가 자신들에게 승리를 약속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출정 연설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게도 전투는 첫대면에서부터 일방적이며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로마제국 최강의 막센티우스 군대가 제대로 사워보지도 못하고 와해되어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상당수의 군대와 막센티우스 자신까지도 강물에 빠져 죽게되는, 실로 기적과도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 결과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을 차지하게 되고, 이듬해인 서기 313년에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 하기에 이르게 된다. 오랜 세월동안 로마로부터 숱한 탄압과 죽임을 당해오던 기독교가 비로소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오로지 '로마 카톨릭' 안에서만의 주장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기독교는 약 80년이 지난 서기 392년에 드디어 '로마의 국교'로 공인 받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대한 진실'을 연구했다. 오늘날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이 꿈을 또 분석하고 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오랜 연구 끝에 이 꿈이 모두 사실이다' 라고 발표하기를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기독교적 역사나 정통성 시비에서는 이 사건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를 벗어난 절대다수의 학자들 시선은 매우 부정적이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로마군 내부에서 벌어진 단순한 정권찬탈을 위한 전투였을 뿐이고, 행운이 콘스탄티누스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라고 결론 지었다.
AD. 4세기 초에 벌어진 일이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전제군주로 다시금 우둑 서게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대단히 의미있고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나, 로마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만한 사건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전투의 승리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강력한 권력 확보는 더 이상......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모두 잃어버린 채 급속도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 상황에서 지도자 한 명의 교체나 라이벌 끼리 벌어진 내란 성격의 전투 승리만을 가지고는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결코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일시적인 해프닝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 이상 별다른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했을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시기쯤에.......... AD. 4 세기 초반 무렵에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 이 이곳에 만들어 졌다. 앞서서 야누스의 문이 설치된 주변의 상황을 살펴 보았다면, 이제는 문이 만들어진 시간적 시대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야누스의 문'은 사면으로 문이 뚫려있는 '승리의 문'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 혹은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라는 것이 오랜 세월동안 전해내려오고 인정되어 온 정설이었다. 과연 그럴까?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에 따른 판단은 '그건 절대로 아니다' 라는 생각이다.
"야누스의 문은 개선문(Arch of Triumphal, 승리의 문)이 아니다."
야누스의 문(Arch of Janus)은 가로 12m의 정사각형 기초위에 높이 16m의 아치형 기둥벽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네 개의 벽면마다 커다란 아치형의 문(통로)가 설치되었고 각 벽면마다 상하로 각각 6개씩 총 48개의 부벽(조각상을 놓기 위한 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북쪽 기둥의 바깥 아래쪽 벽면에는 작은 나무문과 계단식 통로가 있어써 최상층부가지 오르내릴 수 있었다. 네 개의 아치 상부에는 머릿돌처럼 조각상들이 걸려있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었고, 일부 남아있는 형태를 추정하여 미네르마(아폴로)와 주노(헤라) 여신상으로 보고 있다.
중세시대에 이 지역을 광범위하게 차지했던 프랑지판 가문의 영토에 속하여, 가문의 재산을 수호하기 위한 요새의 망루역활을 오랫동안 해왔다. 프랑지판 가문은 이 건물을 자신들이 필요로하는 용도로 개조하여 사용하였기에 그들이 사무실과 다락방으로 사용하던 상층부는 19세기 초에 모두 파괴되었다. 이 파괴에는 아마도 나폴레옹이 로마를 정복하면서 이 일대의 교회와 유적들이 심하게 파괴되었던 시기와 사건에 관계가 있을것으로 추정된다. 1993년 이탈리아 내부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실제 마피아 조직이 근처에 나란히 위치해 있는 산 조르지오 성당의 정문 앞에 폭탄테러를 벌이면서 성당의 파사드는 완전히 파괴되어 복원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부분 파손을 입은 야누스의 문은 그 후로 철문으로 접근금지 조치가 내려졌다가, 최근들어 복원작업과 함께 다시 일반에 공개가 되고 있다.
복원작업과 발굴작업이 함께 병행되던 와중에 땅 속에서 심하게 훼손된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AD. 357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비문대로 따져본다면 357년에 재위한 사람이 콘스탄티누스 2세 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비문의 조각에는 357년에 만들어진 대상에 대한 정확한 명칭이나 기록이 없다. 다른 기록이나 구전이나 그림을 찾아보면 여기 '야누스의 문이 서있는 앞쪽 광장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놓여있다' 라는 근거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혹 357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념 동상을 세웠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청동 기마상과 함께 거기에 설치되었던 비문이 부서져서 일부만 땅속에 뭍혔다가 발견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동 기마상과 야누스의 문이 함께 설치되었는지는 아닌지는 알 수가 없게되었지만 말이다.
아뭏튼 이 비문에 따르자면 '야누스의 문'이 '승리자의 개선문'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로마의 유적중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쿼드리플론(라틴어 표현)' 이나 '테트라필론(그리이스어 표현)이 바로 '야누스의 문'이다. 이들은 모두 '네 방향의 통로' '네 방향의 문'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로마제국이 점령했던 지역에서는 흔하게 쿼드리플론(4방향 출구를 가진 문)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요르단 제라시의 사면문' 이나 '시리아 팔메이라의 사면문' 그리고 '리비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치' 등은 대표적인 쿼드리플론들 이다. 이들은 모두 로마의 '야누스의 문'과 흡사하거나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이들 '쿼드리플론'에게는 모두 똑같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결코 개선문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쿼드리플론이 설치된 곳들의 공통적 특징은 그 장소가 모두 대단히 중요한 (교통의 요지) 라는데 있었다. 로마에서 뻗어나간 '로마가도'가 합쳐지거나 분리되는 중요한 거점에 이를 표시하고 안내하는 길목표지판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사통팔달) 중요한 도로망이 뻗어나가는 지역에 건설되었던 것이다. 성벽을 끼어서 건설된 것도 있다.
예를 들자면 시리아의 팔메이라 경우를 살펴보자. 이제까지 뻗어나온 길을 돌아보면 거기엔 로마가 있다. 여기 이 분기점에서 앞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소아시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우측으로는 아프리카로 향하는 길이 나있고, 왼편으로는 페르시아로 향하는 길목이다. 바로 그런 지점에 우측의 사진 같은 쿼드리플론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비로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어디쯤 도착했으며, 이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그럼 '야누스의 문'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보자.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오스티아에서 지중해 바다를 거쳐 온 무엇인가를 가지고 포럼 보아리움을 거쳐서 막 이곳에 도착했다고 치자. 뒷쪽은 테베강이자 지중해 바다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앞쪽은 포로 로마노다. 곧 로마제국이다. 여기에서 왼편 길을 택하면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서 알프스 산맥이 나오고 그 너머의 갈리아 지역으로 향하게 된다. 오른편 길을 택하면 아피아 가도를 거쳐서 시칠리아로 진출하게 된다.
그렇게 따지자면 로마제국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나름 아주 중요한 교통의 요지인것은 분명해 진다.
개선문(승리자의 문)이 아닌것은 아주 조금만 관심을 가지게되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로마의 개선문은 이집트로 치면 오벨리스크인 것이다.
어떤 기억될만한 인물이나 기념될만한 사건을 오래오래 남아있게하기 위하여 만드는 기념물인 것이다. 이집트에서 위대한 파라오들의 업적을 기록한 수많은 오벨리스크 거의 대부분이 유럽에,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에 강제로 반출되어 여기저기에 서있다. 로마의 왕이나 황제들은 크고 멋진 오벨리스크를 약탈해다가 마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할 요량으로 자신의 신전이나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놓았다.(문화재 약탈의 대표적 사례)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신의 기념물이 될 수 없었다. 하여 대신 로마식으로 세운 기념물이 개선문이다.
영원히 기억되고푼 욕망에 저마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멋진 개선문들을 앞다투어 지었다. 개선문마다 온통 만든 사람의 업적과 자랑꺼리를 부풀려서 조각으로 부조상으로 새기고 만들어서 치장했다. 그것이 유럽과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까지 들어서 있는 수많은 개선문들의 진면목이다. 가장 유명한것이 콜로세움 옆에 놓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 이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경우는 그 욕망이 다른 개선문에 비해서 훨씬 지나쳤다. 자신이 참여해 승전한 전쟁의 기록을 부조로 새겼는데 영 마음에 안들었다. 그러자 선대의 다른 사람의 개선문에서 멋있는 전투 부조상을 뜯어다가 자신의 개선문에 끼워 넣었다. 그렇게까지라도 자신의 업적을 미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전쟁에 참여했다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이 그 개선문을 통과해서 돌아오면, 부득이 전투에서 행해졌던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승리의 신에 의새서 사면된다고?' 이는 쌔빨간 거짓말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나 히드리아누스 대왕은 더 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눈부신 승리와 업적을 남겼어. 잘 살펴들 보라고, 알았지? 저것이 진정한 로마이자 승리의 영광이야. 그러니까 좀 쉬었다가 또다시 전쟁에 씩씩하게 나서자고. 다들 알았지?' 라는 세뇌공작을 하는 장소이며, 애국심을 제외한 다른 생각들을 털어내고 세탁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포로 로마노의 뒷쪽에는 로마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버젓이 놓여있다. 그런데 다시 포로 로마노의 서편에 또 하나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으로 '야누스의 문'을 만들었다?
지나가는 멍멍이도 웃다가 자빠쓰러질 정도로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야누스의 문에 만들어진 48개의 부벽에 놓였던 수많은 그리이스 로마의 신들 조각상은 모두 없어졌지만, 안팍으로 벽체는 비교적 온전하게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벽면을 살표 보시라. 누가 등장하고 어떤 전투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비우스 전투가 새겨지고 천사가 나타나 계시를 전하고, P자와 X자로 그려진 방패와 깃발이 어디에 있는지 잘 찾아들 보시라. 니케아 종교회의가 기록되고 기독교가 높이 받을여지고 로마의 국교로 진행되는 기록들을 잘 찾아보시기 바란다.
없다.
아무리 눈을 씻고 잘 찾아보지만 어디에서도 어떤것도 찾을 수가 없다. 무명탑인가?
기울어져 가는 로마제국을 위기에서 구하여 전제군주의 위상을 확립한 위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이자 '기독교를 공인한 대제의 기념물' 인데 어떻게 아무런 기록도 없다. 거기에다 바라보고 있으면 있을 수록,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허접하다 못해 남루하다. 덩치는 분명 기념물 폼인데 속내는 완전히 빈껍데기 뿐이다.
레고(Lego) 장난감도 없던 1천 6백년 전의 시대에 어떻게 사방에 널부러져 있는 페자재(다른 건물들의 잔해) 석재들을 바리바리 모아다가 이렇게 절묘하고도 탄복이 절로나오게 뜯어 맞추어 놓았는지 그 신기(神技)에 절로 감탄이 터져나올 뿐이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재정적으로 저토록 궁핍해졌음인가? 아니면 평소 아버지에 대해서 반감이 심해서였을까?
제국의 황제 기념물을 저렇게 허접한 석자재로 얼기설기 끼워맞추어야만 했단 말인가?
누가 '야누스의 문'을 '승리자의 개선문' 이라고 하는가?(절대 다수의 학설과 여행안내서에도 대부분들 그렇게 짐작하고 있다. 더는 그러시지들 마시기를..........)
거기에다가 조금만 더 진지하게 로마역사를 접근해 본다면...........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가 방문한 기념으로 357년에 이곳에 세웠다고 하는 기념물로서의 '야누스의 문'을 살펴보자면........ 거짓이다. 357년에 황제는 이곳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콘스탄티누스 2세는 로마에 없었으며,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도 못했다. 없는 사람이 어떻게 무슨 기념물을 세우겠는가?
결국 '야누스이 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던 콘스탄티누스 2세이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축물인 것이다.
더더욱 '개선문'도 아닌것이다.
고대 로마의 중요한 교통망 중심지였던 현재의 '보카델라 베리타 광장(Piazza della Bocca della Verita)'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놓여있었고 야누스의 문은 그 뒤에 위치해 있었는데, 복원 작업중에 발굴된 비문에 따르자면 AD. 357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찌되었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무(無)에서 과거의 역사를 추론해 보기 보다는, 실증되지는 못하였더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것이라고도 볼 수 없는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에 준해서 좀 더 심도있게 검토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나 연관있는 다른 기록들에 따르더라도 어찌되었건 야누스의 문이 4세기 초반이나 중반에 건설된것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야누스의 문'이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아니며, 그 보다는 오히려 교통의 요지에 설치한 쿼드리플론에 가깝다고 하고싶지만, 개선문이던 쿼드리플론이던 간에....... 저렇게 짜집기로 억지로 짜 맞춘듯한 기념물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고로 기념물이란 그 기념해야만 하는 인물이나 사건의 가치만큼이나 웅장하거나 화려하게는 물론 세세한 배경과 스토리를 담아 치장해 만드는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좀 심하게 '야누스의 문'을 표현한다면......... 신전이나 왕궁들을 허물어트려 새로운 건축을 실시하고자 할 때, 재화용 할 수 없는 페기물 석재들을 수거해서 한적한 페기물(석재) 처리장에 모아 쌓아둔다. 로마의 여러곳에서 토출된 엄청난 페석재들이 산더미 처럼 쌓였다. 모두가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별되어 버려진 것들이다. 그런데 그 처리장에 전직 건축업자였던 다소 기괴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남들은 쓸 수가 없어서 버렸지만, 자신에게는 어느정도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석재가 줄비했던 것이다. 하여 남는 시간에 취미삼아서 페석재를 살피고 골라추려서 심심풀이로 건축물 하나를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만들어갔다. 그렇게 만들다보니 탄생한 것이 바로 '야누스이 문이다' 라고 한다면, 오히려 이 추론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시각으로 이 해괴한 건축물을 바라보고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러한 나의 시선에 좀 더 첨부하고 싶은 배경들이 있다. 그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다.
AD.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 최고권력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지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하여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공인' 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자유로운 종교활동이 허용되었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 로마 카톨릭의 시각과 정치사에서 보는 시선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세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이번 여행기에서는 생략하기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참모들이 기독교를 수용하는 모험적 선택은 솔직히 말하자면 정치권력적인 면에서 당장은 모르겠지만 그리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극한 표현을 하자면.......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사채를 끌어다 쓴것' 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로마의 정치는 몰락하고 말았지만, 기독교는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라는 내 방식의 표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하지만 기독교(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가히 천당과 지옥만큼이나 차이나 분명했던 것이다. 지하무덤(카타콤베)에 숨어다니며 신앙을 지키고, 발각되어 붙잡히면 처형장에서 십자가형이나 화형에 처해지던 입장에서, 대제국 로마의 신민권자와 동등한 자유인의 입장으로 하루아침에 변모된 것이다. 그것마저도 처음엔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억압받던 기독교인들은 곧 로마의 고위관리에 버금가는 지배계급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아마도 너무도 급작스럽게 변해가는 자신들의 처지에 기독교인 스스로도 몹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과 시선에 자리잡게 되는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지위가 달라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세상은 1천년의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 변화를 하나님은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가 모두 그것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중세 암흑기의 모든 파행은 오로지 최고 종교 지도자들만의 몫이었다. 그것은 모두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여 졌다. 아멘!!!!!!!!!!!!!
로마는(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고 보장했다.
비록 기독교를 허용하기는 했지만, 로마(로마인)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여 기독교 대표들과의 협의를 요청했다.
(예루살렘 교구) (안디옥 교구) (고린도 교구) (데살로니카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카파토키아 교구) (로마 교구) 등이 지중해 연안에 거점을 두고 박해받는 기독교의 중심역활을 꾸준히 해오면서 이어져 내려왔다. 오랜 시간동안 종가집으로서 예루살렘 교구가 중심역활을 맡아왔지만 '유대인 해방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이 완전하게 파괴괴면서 이후로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가 기독교 지하교회의 중추적 역활을 이끌어 왔다. 이때까지 기독교의 전통은 예루살렘 교구를 이끌어 왔던 (야고보)의 후예들이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되는 순간부터 로마라는 핵심지역에 거주하던 로마교구의 지도자들은 갑자기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로마라는 엄청난 새로운 지리적 기득권'을 깨달았던 것이다. 로마제국과 기독교 간의 협의에 로마교구의 지도자들이 단독적으로 대표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는 협의장에 나갔다. 그리고는 로마제국이 그동안의 박해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런이런것들을 조치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분히 로마교의 입장에서 필요로하는 요구와 처분들이었다. 기독교의 힘(지지와 협력)이 필요했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대부분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협의의 결과를 단적으로 하나의 실례로 펴현해 본다면......... '로마교구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의 신분이 로마제국의 고위 관리의 신분 정도로 격상되었고, 그들 관리에 준하는 급여를 로마로부터 매달 제공받았다' 라고 한다면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되었는지 상상이 될것이다.
오랜세월 실질적으로 기독교를 이끌어 왔던 소아시아지역의 다른 교구들이 로마교구의 횡포와 전횡에 불만을 포시하고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이미 로마교구 지도자들은 차지한 기득권의 효력이 어떤것인지 그 거둔 열매의 달콤함이 어떤것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로마교구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로마교구는 기독교 안에서 새로운 전통을 스스로 만들어 가지기로 결정했다.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새로운 정통성에 입각한 로마 카톨릭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이며 천국의 열쇠를 물려받은 진정한 후계자라고 처제를 정비하고 이를 근거로 새로운 기독교의 중심지가 로마이며, 이 모든것을 '로마 카톨릭'이 주관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 선포의 아래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인장이 찍히게 된것이다. 세상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세상의 정신세계(기독교)는 이제 로마 카톨릭의 최고 성직자에 의해서 지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야고보의 후예들인 정통을 주장하는 온 세상의 기독교인들이 이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은 황제의 도장이 찍힌 서신을 통해 지중해 전역의 야고보를 따르던 모든 기독교를 모조리 파문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 세상에 정통성을 가진 기독교는 오로지 사도 베드로의 후예들에 의한 로마 카톨릭만이 남게된 것이다. 이는 로마 교황의 탄생으로 이러지고 훗날 바티칸의 역사가 된다.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파문당한 소아시아 전역의 모든 교회들이 새롭게 뭉쳤다. 그것이 동방 정교회의 탄생이다. 주로 그리이스 지역이 중심이 되었고 지도자들이 그리이스인들이 많았기에 역사는 이들을 '그리이스 정교회' 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사건 이후로 기독교 전통을 이끌어 논 예루살렘 교구의 후예(야고보의 후예)들이 총망라해 하나로 뭉친 것이다. 동방 정교회도 곧 로카 카톨릭을 이단으로 파문시켜 버렸다. 상호간에 서로를 기독교에서 파문시켜 버리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누가 잘못과 죄를 평가하고 판단할 것인가? 그분은 침묵중이신데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사건은 무엇을 위하여 벌어졌는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수많은 기독교의 사제들과 목회자들이 연단(설교대)에서서 보편의 사람들에게 늘 묻고 가르침을 주려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지금 나는 되묻고 싶다. 사제나 목회자들이 신도들에게 묻는 물음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속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오히려 사제나 목회자인 그분들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들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정년 어떤분이십니까? 당신이 전하는 말씀과 행동은 정녕 그 분께서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할 수 있다면 이런 똑같은 질문을 서로 상대를 향해 파문을 외치던 로마 카톨릭과 그리이스 정교회의 당시 지도자들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적어도 내가 알고 깨달은 바에 의하자면......... 인류 역사에서 실로 엄청난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벌어진 비극'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이름을 팔어서 먹고 산다'는 표현은 내가 가장 쓰기 싫어하고, 교회에 관한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극한의 부정적 표현이라는 점도 밝혀두고 싶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너무도 자주 이 말이 내 입가에서 떠돌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 하겠다.
이 세상의 아픔과 슬픔은 이교도나 비종교인에 의해서라기 보다 예수의 이름을 입에달고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더 많이 그릇되게 벌어졌고, 또 앞으로도 더 많이 벌어질것이라는 것이 나의 어설프면서도 슬픈 주장이다.
기독교가 공인된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로마제국의 최고 관리들에겐 전혀 예상하지 못햇던 어뚱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기독교(로마 카톨릭)이 새로운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제국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꺼리에 항상 기독교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례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된 황제에게 로마 카톨릭의 수장은 많은 요구를 해왔다. 황제는 세속의 제국을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이지만, 영적인 하느님의 세계를 다스리는 로마 카톨릭의 수장에게 독립성을 확보해 달라는 요구였다. 언어적 표현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교 지도자는 황제의 권위와 제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로마 카톨릭의 수장은 스스로의 종교지도자 최고회의에서 선출하고, 그 휘하의 종교지도자들을 최고지도자(교황)이 선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가 뒤따랐다. 제국 내의 모든 교회는 황제의 재산이 아니라 독립된 로마 카톨릭의 재산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를 인정한 마당에 이제와서 교회를 내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황제는 이를 수용했다.
이는 곧 로마제국 전체의 심각한 경제문제로 확대되어 나갔다.
정복전쟁이 멈추어진 로마는 전리품과 새로운 노예공급이 모두 끊기면서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오래전부터 입어왔다. 중소농민의 몰락으로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고, 떠도는 유민과 범죄가 들끓기 시작했다. 이젠 아무도 군인이 되려 하지 않았기에 제국의 국경은 늘 반란과 도둑떼가 극성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나몰라라 로마의 귀족과 상류층은 사치와 향락문화에 빠져들었다. 세기말 중후군이 너무도 심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시기에 맞물려 기독교가 공인 되었다. 기독교의 공인은 모든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새롭게 무장시키고 질서가 유지되면서 합리적인 선에서 경제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제국 통치자들의 판단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딴 판이었다. 독립된 자치권을 보장받은 로마 카톨릭은 사방에 우후죽순 격으로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국가의 지원을 요구했다. 로마제국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지 이미 오래전인데, 교회만은 하루가 다르게 재산이 불어만 갔다. 제국의 최소한의 여유자금까지도 교회로 헌금이다 십일조다 해서 유입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교화가 제국내에서 가장 부유하며 수많은 권리를 가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했다. 부유한 교회에다가 최소한 고급 관리에 준하는 급여까지 국가가 지급하는 마당에, 사제의 임명은 고위 성직자의 고유 권리다. 그러자 너도나도 사제나 성직자가 되었다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더하여 돈을 싸들고 성직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제국의 지도부는 썩을대로 썩었고, 제국의 창고는 비었고, 제국을 지켜낼 군인들은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으며, 국경은 늘 전쟁의 위기에 직면했다. 오로지 교회만이 풍요와 번영을 맘껏 구가하고 있었다. 오로지 로마 카톨릭만의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젠 콘스탄티누스 대제로서도 기독교를 공인하고자 고심했던 순간만큼이나 절실하게 기독교 문제를 새롭게 고민하고 결정해야만 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대로의 로마제국은 더 이상 지탱될 수가 없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는 로마제국을 둘로 나누었다. 어차피 모두 가질 수 없다면 절반이라도 건지자는 판단이었다.
그리고는 로마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결심한다. 더 이상은 썩을 대로 썩은 로마를 자체 복구한다거나 개선한다는 것이 불가능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너무도 급성장해서 이제는 황제의 역량으로도 통제할 수가 없게된 기독교(로마 카톨릭)를 내쳐야만 한다는 결심이 확고해진 결과였다.
AD. 330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서 종교적 자유를 획득한지 17년 만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연명을 위해서 기독교를 내치기로 결심하고 과감하게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감행했다. 로마를 버릴 수 없는 기득권자들은 그대로 남겨두고 자신과 함께 새로운 로마를 이룩하고자 하는 사람들만 거두고 떠났다. 로마 카톨릭으로서는 이미 거대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하였기에 천도를 강력하게 반대해왔고 따라 갈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겠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각 또한 그러했다. 이 기회에 로마 카톨릭을 떨쳐내야만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따라 나서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애초부터 천도 계획에는 로마 카톨릭을 과감하게 떨쳐내어버리는 전제가 밑바탕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황제는 서둘러 그리이스 정교회(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파문당한) 지도자들을 만나서 협의를 거쳤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횡포속에서는 도저히 제국과 기독교가 함께 공존할 수가 없다는 전제하에서의 협의였다. 로마제국과 로마 카톨릭 사이에서 벌어졌던 협의와 다른점을 꼽는다면, 로마제국과 그리이스 정교회 사이의 협의에서는 정교회측 최고 종교지도자의 임명권을 황제가 갖는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이는 분명하게 황권이 교권의 위에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이제 이 약정 하나로 정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같은 파행과 전횡을 저지를 수가 없게된 것이다. 정교회의 파행이 심하다 싶으면 황제는 언제든지 자신의 뜻이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최고 지도자를 임명하여 자신의 생각과 뜻은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로마의 종교가 '그리이스 정교회가 이끈는 기독교' 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로마 카톨릭을 정식으로 버렸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이를 부정하면서 서로마제국을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버텨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말망하고 나면서부터는 정말로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거기에다 6세기에 들어서 비잔틴 제국이 '옛 로마 영토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불세출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로마를 점령하고 그들과 함께 그리이스 정교회가 점령자로 몰려오자, 그동안의 로마 카톨릭이 이룩한 명성과 영광을 버리고 그리이스 정교회의 로마지부로 격하되는 비운을 격게되었다.
제국의 미래를 염려한 황제는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가족과 자신을 다르는 무리들만을 이끌고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사를 감행했다. 기독교 공인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들어 황제들 중에서도 몇 안되는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은 거룩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가족사는 너무나도 비참했다. 아내를 내쳤고 장남을 자신의 손으로 살해해야만 했다. 세 아들에게 존엄한 황제의 자리를 나누어 주었지만 그것마저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고 결국엔 가문의 종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것이 제국의 미래를 염려해 천도를 감행하고, 가엽은 인류를 위하여 기독교를 공인해 준 대제(大帝)에게 내려준 하늘의 선물이었을까?
AD. 306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했고, 324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기독교의 체계를 확립했으며, 33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감행했다. 7년이 지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망했다. 그이 뒤를 이어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2세는 340년까지 불과 3년 남짓 황제의 자리를 이었다. 이어 다른 형제들이 황제의 지위를 세습하였으나 361년에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맥은 끊어지고 만다.
'야누스의 문'이 357년에 준공되었다면....... 이는 시간상으로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그 누구와도 연관이 없게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왜 야누스의 문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로마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자면 바로 이 시기에 로마 안에서 한 가지 커다란 대역사(大役事) 벌어졌다는 사실을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가 있다.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Old Basilica di San Pietro)'은 326년에서 333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에 의해서 건설이 시작되었다' 라는 기록이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를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간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326년에 11월 18일에 착공식을 거행하였고, 이후로 약 30년이 걸려서 완공되었다. 전형적인 라틴 십자가 모양의 바실리카 양식이었으며 22개의 기둥이 4열로 늘어선 길이 118m에 너비 64m에 이르는 목조 트러스 지붕을 갖춘 당시로서는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장소에 로마 카톨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성당으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첫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자세한 건축과정이나 완공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다. 어찌되었건 성 베드로 성당의 건설은 시작되었고 건설을 지시한 황제는 로마를 떠났다.
이 기록에 준하자면 성 베드로 대성당은 356년 말이나 357년 초에 완공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더불어 야누스의 문이 357텬에 완공되었다. 우연이었을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동로마가 떠난 서로마제국은 급격하게 종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귀족과 부자들은 제국의 앞날에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없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정복지로부터 물자와 노예 공급이 끊어진 로마의 사회경제는 파탄으로 치닷고 있었다. 자영농은 몰락했고 군대마저 붕괴되기 시작했다. 무너진 로마시민사회는 이제 그 책임을 물어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주변국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갈리아 지역의 고트족이 쳐들어와서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경제가 파탄난 로마 시민들의 삶은 어떤것이었을까?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전까지 기독교인은 제국의 암세포 였다. 로마제국 최대의 적이었으며 기어코 궤멸시켜야만 하는 파괴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샅샅이 뒤져 체포해다가 화형에 처했고 십자가에 매달았다. 하지만 아무리 형벌을 가하고 처형을 가했어도 결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느날, 느닷없이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어제까지 색출과 제거의 대상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버젓이 함께 생활하는 이웃으로 나타난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의 등장은 로마인들의 지속되어 온 경제생활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많은 부분의 잉여를 기독교인들과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거기에다가 오래지 않아서 기독교 지도자들의 지위가 급상승했다. 기독교 지도자의 지위가 로마 고급 관리와 지위가 같아졌으며, 국가에서 급여까지 꼬박꼬박 지급되기 시작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제국 내에서도 제대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교회와 고위성직자 집단뿐인 세상으로 바뀌어간 것이다. 심지어 주변에서 너도나도 풍족하고 부유한 성직자가 되려고 혈안이되는 엉뚱한 현실이 그들 앞에 펼져진 것이다.
기독교로 전향하지 않은 로마인들에게 닥친 현실은 아마도 좌절과 충격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딴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수백년 동안이나 기독교인을 당연시하며 탄압해온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도로의 전향 또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 새롭게 생겨나는 것은 교회였고, 새롭게 등장한 유지나 부자는 모두 교회와 연결된 사람들 뿐이었다. 오리지널 로마인들의 삶은 팍팍하다 못해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 눈에 띈 기독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런 상황에 정작 기독교를 합법화 시켜준 황제는 자신의 편만을 거느리고 훌쩍 소아시아로 떠났다. 남아있는 황제와 귀족들과 관리들은 서민경제의 파탄과 부족한 물자와 불안한 국방에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 마당에 이 재앙의 상당부분을 책임져야만 할 것같은 로마 카톨릭은 테베강 건너에 유래없는 초대형 교회를 짓는다고 난리였다. 눈에 띄는 모든 자재를 징발했으며 뛰어난 장인들의 노동력을 거의 강제로 끌고가다시피 했다. 어디 그뿐이었는가? 허수아비 황제의 명을 빌어 대성당 건축을 위한 세금까지 강제 징수에 나섰던 것이다.
이제 로마는 무너졌고 피폐해져만 갔다.
테베강 너머로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가는 새로운 성당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감이 커져만 가는 본래의 로마 하층민들은 하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제국을 훨씬 능가하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제국에는 허울뿐이 법율이라도 있었지만, 교회에는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 하늘나라의 율법을 늘어놓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혹한 수탈은 교회가 비교할 수 없을만틈 심했다.
시류에 편승했으면 그나마 다행일 수 있었으련만,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종교관을 쉽사리 기독교화 시킬 수 없었던 진짜 로마의 하층민들, 로마의 중심에 들지 못하고 포럼 보아리움과 베라브룸 주위에 몰려살던 극빈층의 사람들 입에서 기독교가 아닌 고대 그리이스에 대한 향수가 하나 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수의 기독교가 젓과 꿀이 흐르는 영원한 생명을 주던 말던, 그들에게는 올림푸스 산의 신들이 지상에 내려와 함께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함께 추수하여 한바탕 감사의 축제를 벌이며 함께 와인을 마시고 함께 밤새워 춤을 추던 고대 그리이스의 시절이 더 행복했고 그리웠던 것이다. 그것은 이상을 넘어 지극히 현실의 세계였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세상은 너무도 멀고 동떨어진 아득한 불가능의 세계로 여겨졌던 것이다.
로마 바티칸이 제멋대로 주무르는 세상과 자기들만을 위한 대성당의 건축이 역겨워졌고 저주스러워 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방법도 가진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로마에는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고대 그리이스의 전통을 믿고 따르면서 살고자 노력하는 진정한(오리지널) 로마인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도 싶었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한 방편으로 무엇인가를 해내고 싶어졌다.
하여, 로마 바티칸에 저항하는 자발적인 심정들을 모아서, 기독교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서 파괴하고 쓸만한 석재를 빼내가고 남은 석재들을 끌어 모으고 모아서, 자신들의 뿌리깊은 자긍심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전통이 버젓이 살아숨쉬는 신전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야누스의 문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임)
작은 아치형의 부벽(좌대) 48개의 부분만 그나마 온전한 석재를 약간 다듬었을 것이다.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 온전한 계획하에 설계되거나 다듬어진 자재가 거의 없다. 다른 장소의 부서진 좌대나 기초석들을 얼기설기 짜맞춘것이 전부일 뿐이다. 48개의 부벽(좌대)에는 아마도 조악하나마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조각상으로 가득채웠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렇게 해서........ 기독교의 시대에 기독교적이 아닌 허름하고 완성도를 측량할 수도 없겠지만서도 확실한것은 고대 그리이스의 맥을 이은 건축물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 되었지만......... 실제적인 활용도는 또 다른데 있었다.
아마도 야채시장과 가축시장의 처마들이 여기 이 야누스의 문에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문의 통로를 통해 이어 붙여서 오늘날의 천막 재래시장 형태의 장이섰을 것이다. 큰 비가 내리고 세찬 비바람이 불면 이 건축물은 아주 훌륭한 쉼터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바로 옆에 서있는 '환전상의 문'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환전상(Money Changer)' 또는 '전당포'나 '암달러상' 이라거나, 아니면 건전하게 '제 2 금융권' 하면 아주 특별한 업무에 필요한 장소이거나 환경이 되는 것이다. 좀 떨어진 콜로세움이나 대전차 경기장에서 노름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의 환전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나 새벽같이 먼길을 떠나려는 사람중에도 급하게 환전을 해야만 다음 진행을 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두 새벽같이 환전상 점포가 문을 열기까지 찬바람과 새벽 이슬을 맞으며 기다려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있어서 '환전상의 문' 코 앞에 있는 늘 열려있는 건물은 최고의 안식처였을 것이다.
이런 가설에 추가로 첨부할 내용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아무래도 이쯤에서 지나쳐야만 할 것 같다.
가야 할 길이, 돌아봐야 할 로마가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차후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거론할 날이 있지 않을까?
포럼 보아리움의 넵툰 분수와 헤라클레스 신전과 베스타 사원을 이쯤에서 그냥 지나쳐야 한다는 사실이 발걸음을 매우 무겁게 만들고 있다. 거기에다 로마가 만든 그리이스식 마르셀로 극장까지 이대로 지나쳐야 한다니 말이다.
설마 로마여행이 이것이 마지막이겠어? 손녀 태리가 오자하면 기어서라도 다시 와야겠지? 그럼 그때 기회를 보아서 이번에 다 소개하지 못한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하면서 캄피돌리오 언덕 기슭을 지나서 플라미니아 가도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전통 재래시장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피오리 광장(Compo de Fiori)' 이다.
현지인들의 소박한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광장을 둘러보면서 안쪽으로 들어서다보면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청동조각상이 하나 있다. 대단히 인상적인 조각상의 모습이다. 과거 중세시대 이곳은 죄수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던 장소였다.
청동조각상의 주인공인 '조르다노 부르노(Giordano Bruno)'는 1600년 2월 17일 이곳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부르노는 '교회가 말하는 영원한 저주'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는 삼위일체설'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동안의 순결과 부활' 등 로마 카톨릭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혐으로 이단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수많은 학자와 종교가들이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 끝에 이곳에서 공개처형되었다. 심지어 로마 카톨릭은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유대인들의 탈무드 경전을 불태우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만남의 장소로 탈바꿈했고, 비교적 가까운 인근의 나보나 광장에 열리던 야채와 생선시장이 이곳으로 점차 옮겨오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현대사 속에서 피오리 광장은 민주화 내지는 민중이 올바른 함성을 외치는 역사의 현장으로 자주 이용되면서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 내려가고 있다.
로마 도심의 중심부에 들어서니 어느새 주변은 짙은 어둠으로 감싸였다.
로마의 밤거리 풍경은 낮풍경과는 너무나 다르게 다가온다. 처음이 아니건만 언제나 낮설게까지 느껴진다.
'로마에서라면 최소한 이정도는........' 싶은 나름 분위기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나마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나보나 광장을 향한다. (그날 우리는 하루종일의 걷는 여행에도 불구하고 나보나 광장. 트레비 분수. 판테온. 스페인 광장의 야경을 모두 구경한 다음에 다시 테르미니 역까지 걸어서 가는 초 강행군을 기어코 달성했다)
골목에서 마주친 피노키오 매장........ 유럽의 유명 관광지마다 한 두군데씩은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피노키오 매장에서 우리 귀한 손녀 태리의 선물을 골라놓고 돌아나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는, 버스 시간에 촉박하여 아쉽게 그냥 통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던 터라......... 누가 태리 할망구 아니라 할 까봐서리 오로지 손녀 생각뿐이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로마 시내여행은 다음 이야기에서 시작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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