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모든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몰타에는 유독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이런 몰타만의 특별함을 하나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사실 몰타는 사람이 살아가기엔 절대적으로 불합리한 척박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자급자족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별한 환경속에 어떻게 고대문명이 발생할 수 있었단 말인가?
몰타에는 기원전 약 7000년전 신석기 문명에서 기원전 2000년전까지 고대인들이 남겨놓은 청동기 문화가 사방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리고나서 더욱 놀라운것은 이후로 약 1000년간 이곳에는 인간이 전혀 살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어느날부터인가 갑자기 몰타는 완전한 무인도로 변했다. 하지만 그 이유로 밝혀진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류역사에서 어느날 갑자기 그냥 무인도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1000년 이상을 몰타에는 부딪쳐 부서지는 검푸른 파도와 시로코(사하라 사막에서 발생해 지중해를 건너 불어오는 해양풍) 소리만이 바위산과 황량한 들판에 울려퍼졌을 것이다.
몰타섬의 고대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도대체 무슨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아무튼 1000년 이상을 무인도로 방치되었던 몰타에 어느날 사람들이 나타났다.
페니키아인 이었다.
지중해 연안을 누비며 해상무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소아시아 지역에서 온 페니키아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직은 선박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이유로 주로 육지 인근의 내해를 통해서 지중해를 건너 다녔었다. 그러나도비 북아프리카나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이스나 이탈리아 반도로 가자면 반듯이 몰타와 시칠리아를 경유해야만 했다. 여러날을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 견뎌내자면 자주 육지에 올라 지친 육체를 추스려주어야 했으며, 물과 식량을 공급해야만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여기 망망대해 가운데 쓸모라고는 바윗덩어리 밖에 없는 불모지에서 그래도 나름 풍부한 물을 공급받기 위해 정박해야만 했다. 이들의 항로를 따라 더 많은 교역선들이 오고가다 보니 어느때부터인가 몰타는 대단히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을 공급하고 쉬어가려는 배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힘들게 거친 지중해를 건너다녀오기 보담 이곳에서 배와 배끼리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제대로 항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차 무역항의 구실을 띄게된 것이다.
이 소문이 급속하게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자...... 어느날 느닷없이 해적들이 들이 닥쳤다. 약탈과 방화가 뒤따랐다.
페니키아인들은 꾀를 생각해 냈다.
섬의 한가운데 언덕에 작은 요새를 건설하고 모든 창고와 교역사무실을 그곳에 설치했다. 배가 정박하던 항구 주변에 감시탑을 세우고 수시로 순시선을 바다로 내보내 해적들을 감시했다. 해적들이 나타나면 무계를 줄인 교역선들이 서둘로 섬의 반대쪽으로 숨거나 달아나고, 모든 물품을 챙긴 사람들은 일제히 섬 중앙의 요새로 달아났다.
해적들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국가와 부족들의 공적이었기에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저쟁을 치를 처지가 못되었다. 그러다보니 요새를 잠시 공격해 보다가 더이상 방법이 없다 생각되면 빈손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거듭 반복되다보니 어느새 몰타는 지중해 교역로의 대단히 중요한 거점이자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다. 그들은 섬 중앙의 요새를 더욱 강화 시켜나가게 되었고, 이곳이 바로 몰타 최초의 수도였던 '엠디나(Mdina)' 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작은 성채에 불과했다고 보아야겠다.
시간이 흐르자 페니키아는 엄청난 부를 이룬 무역왕국이라 부를만 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흔하게 문명권 내의 국가나 제국들이 시작돤계에서 거치는 군대의 조직, 법률의 제정, 도시(요새) 구축, 문화생활 등등 국가 건설과 존립에 꼭 필요한 사항들을 매우 등한시한 특이한 민족이었다. 오로지 교역을 통해 돈과 재물을 모으고, 그 재력으로 화려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즐기는데만 관심을 보였다. 특히 군대를 철저하게 외면한 채, 교역선의 호위무사 정도를 용병으로 대처하는 선을 끝까지 유지하고자 했다. 이런 결과는 극히 짧은 시간에 종말을 맞이하게되는 결과를 낳는다. 해적이나 마적들이 숫자를 있는대로 끌어모아 거대한 집단(군대 정도)을 이루어 약탈이 아니라 페니키아 상단의 전체를 노리고 쳐들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페니키아인들도 그제서야 군대에 버금가는 용병을 모아 대적하고자 하였으나, 용병이 변심하여 칼끝을 돌리고 페니키아인들의 한 도시나 성을 빼앗아 버리는 일까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도적떼들에 의해 페니키아는 멸망했고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 페니키아인들에게 속해서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던 작은 부족 하나가 이처럼 어리석은 국가운영으로 참혹하게 몰락에 까지 이르게되는 벌어진 페단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새롭게 치고나오기 시작하였으니 이들이 바로 곧 지중해의 절대강자로 떠오를 카르타고이다.
하지만 이 당시에 사실은 지중해 인근에 어마어마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절대 강자 그리이스가 이미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리이스 문명이야말로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을 하면서 열심히 선진문물인 이집트 문명을 퍼다 나르고 있었는데, 그 페니키아인들이 실어오는 이집트 문물을 나름 성실하게 받아들여서 토착화 시킨것이 그리이스 문명이라 보아도 별 탈은 없을듯 싶다.
이집트 문명을 페니키아인을 통해서 받아들여서는 이를 재창조해 낸 것이 그리이스 문명이다. 이 그리이스 문명을 고대로 가져다가 모방하고 슬쩍 끼워넣고 이런저런 여러분야에 마구마구 쓰다보니까 새롭게 생겨나게된것이 바로 로마문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래서 모방을 창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에게해를 넘어 지중해를 장악한 그리이스는 지중해 전역에 자신들의 식민도시를 세웠다. 지중해 전역이 모두 고스란히 그리이스 자체라는 넘치는 자부심의 발로였다.
그들은 몰타에도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이스인들은 몰타라는 요충지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다신 그들은 인근이랄 수 있는 시칠리아의 남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시라쿠사는 한때 그리이스 본토의 아테네를 능가하는 풍요롭고 번영된 도시였다고 한다. 그리이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 출신이다. 더하여 아그리젠토의 그리이스 유적군을 보라. 카타니아는 그리이스인들이 세운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리이스인들에게서 몰타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이스에 뒤를 이어 들이닥친 로마는 달랐다.
로마는 모든 물자가 풍요로운 시칠리아를 방어하기 위한 병참기지로서 몰타의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미 카르타고와의 오랜 전쟁에서 몰타가 군사요새로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로마는 깨달았던 것이다.
하여 로마는 작은 성채에 불과했던 엠디나를 철옹성 같은 방어진지이자 주둔지로서 개축하고 그 안에 도시를 건설하였으니, 바로 지금의 엠디나는 로마에 의해서 생겨난 도시라 하겠다.
로마는 엠디나에 궁전과 집무실을 짓고 총독이 독자적으로 몰타를 다스리게 하였다. 로마에서 이주해 온 귀족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군대의 병참기지로 처음 역활을 다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사도 바울의 흔적이 남은 자리에 대성당을 지어 사도 바울에게 헌정했다. 바로 지금의 엠디나 모습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엠디나(Mdina)'는 발레타로 수도가 옮겨지지 전까지 몰타의 수도였다.
몰타가 세계적으로 아주 작은 국가라고 친다면 엠디나 역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로마시대 이후로 총독(통치자)과 귀족들이 주로 머물기 위한 공간이었고, 요한 기사단이 도착한 이후로도 기사단장과 기사단이 머무는 시설과 교회와 여타 군사시설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통치를 위한 왕궁이나 관공서 중심의 공간이었다 하겠다. 해자에 둘러 쌓인 견고한 성채가 전부였을 뿐이다.
해자를 건너 공원(광장과 버스정류장)을 건너면 고대도시 '라바트(Labat)'가 있다.
엠디나에 속하는 위성도시라 하는편이 옳은것이 아닐까 싶다. 몰타의 통치자와 군대가 엠디나에 근거지를 틀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통치자나 군대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인 활동을 위해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엠디나 주위로 몰려들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되었고 발전하여 도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여, 엠디나가 통치자나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주거공간이었다면, 라바트는 서민들에 의해 형성된 서민들의 도시가 되었다.
엠디나나 라바트라는 이름은 아랍어에서 유래가 된것으로 생각된다.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라. 엠디나나 라바트나 우리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이름이 아닌가?
특히, 모로코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더욱 그런 느낌이 드실것이고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벌써 알아채셨을 것이다. 모로코가 아니라도 아랍권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도 나름 짐작이 가셨을 것이다.
모로코의 도시를 가면 '메디나(Medina)'가 여러군데 있다. 메디나와 엠디나는 영어 표기의 알파벳 한 자가 빠졌을 뿐이다. 또한 모로코의 수도는 라바트다. 영어 표기도 알파벳 'L' 과 'R' 한글자만 바꾸면 똑 같다.
여기에서 추론을 해 볼것같으면........ 로마가 동.서 로마로 분리되고, 또 동로마가 비잔틴 제국으로 전환하면서 짧지않은 시간동안 몰타는 유럽의 제도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아랍(이슬람)이 몰타를 점령하고 지중해 교통의 요지로 차지해 사용하게 되었다. 하여, 오늘날 몰타에서 이슬람적인 문화재가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96%의 로마 카톨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는것이 이슬람교도이다. 이는 엄연하고도 분명하게 오랫동안 아랍의 영향권에 놓여졌었으며, 노르만에 의한 기독교 제도권으로 다시 탈환하고 요한 기사단이 차지하면서 이슬람의 흔적들을 찾아서 대부분 철거하거나 지워버렸지만, 이때 붙여졌던 명칭을 일부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것으로 보여진다.
'엠디나'는 '벽의 도시'라는 아랍어 의미를 담고 있다. 아랍권의 '메디나' 역시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라는 의미이다. 하여 영어권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한동안은 '벽의 도시(The Walled City)'라고 불리워지기도 했으며, 지금도 현지인들의 일부는 '귀족의 도시(Citta Notabile, Noble City)' 또는 '고요의 도시(The Silent City)'로 불린다.
그런가하면 몰타의 '라바트(Labat)'나 모로코의 '라바트(Rabat)' 역시 '중심지역에 붙어서 생겨난 위성도시'의 의미를 똑같이 담고 있다.
이는 몰타가 유럽 기독교 문화권의 중요 유적지이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본다면 아직도 이름은 과거 아랍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것이다. 한때 이곳은 아랍 지배권에 속해 있었다.
고풍스런 라임스톤 칼라가 고즈넉하게 배어있는 엠디나의 풍경이 언제나 한결같은 것만은 아니다. 낮과 밤의 풍경과 정취가 전혀 다르고 각기 독특한 매력을 서로 뽐내고 있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 하나를 두고 낮고 밤을 모두 두루 살펴보기 또한 지치고 바쁜 여행자에게는 여간 힘든 스케줄이 아닌것이다.
멀리 내려앉은 연무때문에 화창한 날 건너다 보인다는 시칠리아의 풍경은 건너다 볼 수가 없었다. 혹 밤이되면 시칠리아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올까?
엠디나의 밤이 좋을까? 낮이 좋을까?
하나만 결정하기가 많이 힘들다고? 그럼 할 수 없지 뭐.........
고조섬을 다녀올 때, 좀처럼 몰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악천후를 실컷 경험한 때문일까?
엠디나를 향하는 시내버스에 올라서부터 이미 또 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 저편은 파랗게 개어있었지만, 우리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비는 계속 따라다녔다. 하지만 어제와 다르게 바람은 불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는 미끄러움 이었다. 고대도시 전체가 라임스톤으로 포장도로를 만들었는데 오랜 세월동안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매끄러운 타일위로 배가 내린 형상이었으니 발걸음 옮기는것이 고스란히 심한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같은 악연은 밤이 되고도 많이 달라지지가 않았다. 빗줄기는 잦아들었지만 오락가락하기는 계속되었다. 나름 최대한 즐거운 여행을 만들어보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결코 원만한 여행일 수는 없었다.
낮에는 유독 한국 여행자에게 인기있는 폰타넬라 카페에서, 그리고 야간엔 골목 안쪽의 또다른 인기있는 삼채색의 당나귀가 있는 개인 갤러리를 포함하는 카페에서 피로를 달래보기도 하고.......
늦어진 시간과 슬리에마로 돌아가는 차편 때문에 세인트 폴 대성당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날씨만 좋았다면....... 엠디나 건너편의 라바트 도심을 돌아볼 수 있었을텐데.........
이제 엠디나는 우리에게 아쉬움을 넘어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날씨야. 너 우리에게 왜 이러는거야?)
중세시대(1327년 11월)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영국 바스커빌 출신의 수도사가 시종 아드소와 함께 나타났다.
이들은 머지않아 이곳에서 벌어질 교황측과 황제측의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다. 당시는 교권(교황)과 황권(황제)이 맞부딪쳐 재앙과도 같은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교황은 자신의 지위를 교회를 앞세워서 세속의 모든 황제들 위에 두고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싶어 했다. 하지만 황제들의 생각은 달랐다. 교황은 오로지 교회안에서 영적 지도자의 최고수장일 뿐이었다. 세상은 황제의 권위를 취득하고 다스리는 여러명의 세속군주의 몫이었다. 세속과 영속은 분명하게 구별이 지어져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교회(교황)의 탐욕은 여기서 그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만큼 그 대리권자인 교회(교황)가 이 세상의 영적영역은 물론 세속적영역까지 모두 책임지고 다스리겠다는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하여 (카놋사의 굴욕) (아비뇽 유수) 등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되었고, (십자군 원정) 또한 배경에는 이런 교권과 황권의 대립이 바탕으로 깔려있었다.
계속되는 이러한 폐단을 막아보고자 교황측과 황제측이 만나서 회의를 하기로 하였고, 그 장소가 바로 지금 윌리엄 수도사가 찾아 온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렇게 중요한 회의를 앞둔 수도원에 근자에 들어서 서너건의 연속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였던 아보 수도원장은 다소 거만하고 퉁명스럽긴 하지만 자연과학과 기호학에 나름 일가견이 있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이 살인사건의 수사를 의뢰한다.
'일 노메 델라 로사(Il nome della rosa)'.
우리나라에는 <장미의 이름>으로 번역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내용이다.
훗날 숀 코널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책은, 내가 영화를 먼저 본 후에 너무도 인상이 강해서 다시 책을 구입해 읽었던 작품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은 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곧 잘 '중세스럽네' '참으로 중세스럽군' 등등의 말로서 내 심정을 토로하고는 하게 되었다. 결코 긍정적이거나 좋은 의미의 표정은 아니다. 지금도 나는 곧 잘 같은 표현을 쓰곤 했는데, 근자에는 '祖國스럽다'는 말로 대신하곤 한다.
뭐 이쯤되면 '중세스럽다'는 의미에 대해서 어느정도 설명이 되지않았을까?
윌리엄 수도사(숀 코너리역)는 수도원 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보고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사해 보지만 사건은 첫 실마리 조차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살인 사건의 단서는 물론 사건이 벌어질만한 정황증거 조차도 찾지 못하고있었다. 거기다 더욱 놀라운것은 수사가 벌어지는 동안에도 연속해서 살인사건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도원 안의 그 누구도 당장 가해자일 수 있고, 누군든지 아무때고 피해자일 수 있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 와중에........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원에서 벌어진 일련의 연쇄 살인사건이 모두 (요한 묵시록)에 기록된 예언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지난 밤의 살인으로 예언에 따른 연쇄 살인사건이 모두 끝났음을...... 이미 완성되었음을 깨닭았다.
이제 살인은 끝이났다.
하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더우기 살인을 저지른 동기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것이다.
윌리엄 수도사의 수사는 이제 새로운 국면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왜 (장미의 이름)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 소설의 결말을 보고는 '참 중세스럽다' 라고 생각했을까?
몰타를 찾는 여행자들이 달력을 요리조리 살피면서 요일 체크를 하는 이유가 있다.
흔히 '선데이 마켓(Sunday Fish Market)'이라 부르는 전통 수산시장이 '마샬록(Marsaxlokk)' 항구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기 때문이다.
워낙 작은 섬나라이다 보니 정기적인 전통장이 별도로 서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샬록의 경우 몰타섬의 남쪽 구석에 한참이나 치우쳐 있기에 어디까지나 인근 사람들을 위한 일요일에만 서는 전통 재래시장이었는데, 어느때부터인가 여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서 이제는 웬만한 관광명소 대접을 받고 있다.
'작은 포구에 서는 수상시장'이라 하면 맞지 싶다. 크기도 고만고만....... 작은 편이다. 상인들과 현지인 숫바만큼 이상 여행자들이 찾아 든다. 극히 일부의 여행자들은 싱싱한 수산물을 구입해서 인근의 식당에 조리를 부탁하기도 하지만, 수산물 거래는 다분히 현지인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몰타 특유의 수공예품을 비롯해 여행 기념품을 구입하고, 마샬록의 풍광과 시장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작은 고기잡이 어선이 빼곡히 정박해 있는 지중해의 작은 항구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할 뿐, 특별한 것은 별로 없다. 새벽 수산시장의 부산함이나 활기는 우리나라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새벽 수산시장에서나 기대해 봄직 하다고 하겠다. 그냥 평화롭고 소박하고 아침사나책쯤으로 삼기에 그만이라고나 할까.
몰타의 많은것을 생생하게 보여드리기로 하였으니 가보지 않을 수는 없겠고.........
몰타 여행중에서 기를 쓰고 날짜까지 맞추어서 찾아가는 수고에 비하면, 어쩌면 가장 심심한 여행지가 먀셜록(선데이 마켙)이 아닐까?
아침에서 점심 식사시간 정도까지 장터가 활성화되고, 오후들어 수산물들이 대충 팔리고 딸기며 토마토며 야채가 어느정도 팔리고나면 주변의 카페나 기념품 상점들 뿐........ 일직 페점 분위기로 들어선다.
이집트 신화에서 다온 '오리시스의 눈'을 사진에 담기는 더 좋으려나..........
현지인들에게는 실생활의 일부이지만....... 여행자에게는 다분히 치기서린 호기심이랄까?
의외로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한번은 둘러보고 주점부리나 간단한 기념품을 사기에 알맞은 장소라고나 할까.
시장을 둘러보던 중에 낯선 외국남자 하나가 다가와서는 환호성까지 지르며 다짜고짜 내 손까지 덥석 잡고 흔든다. 세상에...... 내가 좀 나돌아다니긴 해도 이렇게 반가워 할만한 외국인 친구가 없는데 말이다. 옆에 있는 여성을 자신의 아내라고 하는 통에 얼떨결에 반갑다고 인사는 나눴지만....... '도대체 야가 누구지? 날 어떻게 알지?' 아무리 쳐다봐도 내 표정이 이상한것을 눈치 챘는지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한다. 그제 쓰리시티 산책중에 만났던 전통배(곤돌라) 주인이었다.
하이고야...... 내 기억력 좀 봐. 짜슥..... 진작 자기 소개부터 하고 덤벼들것이지........ 사람 난처하게스리........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어저다 잠시 만난 동양인을 기억해주다니....... 내 인품탓인가? 혹 인물?
암튼, 난 나를 먼저 알아주는 몰타에 현지인 친구 하나 있는 사람!!!!!!!!!!!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여행지)란 어떤곳일까?
여행을 계획하면서 내가 최고로 주안점을 두는것은 아주 간단한 편이다. '스토리가 담겨있는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이 많이 있는 곳' 이면 그만이다. 역사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싸들고 찾아가고픈 곳이면 이 세상 그 어디든 상관이 없겠다.
거기에다 좀 보탠다면......... 품질 좋은 포도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면 좋고, 더하여 값싸게 포도주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라면 더 할나위가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난 와인 매니아는 절대 못된다. 술을 무척이나 즐기고 많이 마시는 편이다. 우리나라에서 맥주 마시듯 와인을 마셔대기에는 경제적 뒷탈이 따르기때문에 여행 나가면 와인을 주로 달고 다니는 편이라 하겠다.
'애초에 직업을 잘못 택했어' 라는 말이 아내나 주변에서 늘 상 듣는 말이다.
사고나 행동에 버터맛이 좀 묻어난다고도 하고, 타고난 체질이 한식의 일부를 제외하면 세상의 모든 음식이 입에 찰찰 달라붙는다. 외국 나가서 오랫동안 머물러도 김치 조차 찾지 않는 체질이다. 걸어다니면서 캔맥주에 소시지나 햄버거 하나면 한 끼가 거뜬한 체질이다.
이런 나에게 반하여 챠밍여사는 절대적인 한식 체질이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역시나 반 반씩이다.
아내와 함게 여행하면서 베트남에서 딱 한 번 한국 반찬을 몹시 그리워한 적이 있다. 오나가나 국수에다가 반찬이 따로 없는 여행지다 보니 국수를 앞에 놓고 '아주 살짝 곰삭은 열무김치가 있다면 얼마나 황홀한 식사시간이 될까' 하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가금은 음식을 조리하는 숙소를 골라서 라면이나 한국음식을 해먹기도 하지만, 아직 한국 라면이 없는 곳이나 여러날 서양음식만 먹다보면 입이 짧은 챠밍여사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디 한국 음식점 없나?'
다니다 보면 한국 음식점은 없어도 중국 음식점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 하여 이럴때면 차이니스 식당을 찾아서 뜨거운 국물 요리를 시키곤 한다. 그런 챠밍여사가 몰타에서도 변변하게 입맛다시면 먹는 음식이 없다. 주점부리나 빵으로만 끼니를 때우곤 한다.
해서 온갖 방법으로 한국 식당을 수소문 하기 시작했다. 더러 있기는 하지만 당장 찾아 나설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도마(DOMA)'
어디선가 많이 듣던 정겨운 이름 아닌가? 거기다 세프가 'Jay Lee' 라고 하면 제대로 한국 음식점 냄새가 팡팡 풍겨오지 않느냔 말씀이다. 그래서 부리나케 찾아 나섰다.
찾아가는 길도 아주 쉽다. 슬리에마 페리 선착장 버스 정류장에서 발레타 방향으로 두 정거장을 가면 된다. 걸어서라도 10분 남짓이면 당도할 수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오른쪽 골목을 두루 살피다보면 아주 작은 (도마) 라고 쓰인 간판이 보일 것이다. 이곳에서 한국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짬뽕' 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한국인은 집 떠나면 우선 얼큰한 국물이 생생하게 그리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이고야....... 챠밍여사 여태 굶고 다니셨나?
말끔하게 싹싹 비우듯이 열심히 한식(?) 삼매경에 빠져드신다.
'몰타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글쎄 올씨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조명 시설에 물든 몰타의 밤풍경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답기는 하다. 간혹 매우 독특한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쁜 일탈도 경험하곤 한다.
화려한 인공조명 아래 몰타는 새옷을 입고 새단장을 하고 새색시 표정으로 여행자를 반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세월의 흔적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라임스톤이 제 빛깔을 드러내는 낮풍경에 더욱 정취가 느껴지고 마음이 끌린다.
신년 정초를 맞이해서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물론 슬리에마나 쎄인트 줄리안까지 온통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다. 연일 계속되는 축제에 벌어지는 행사나 프로그램은 같을지 몰라도 거리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은 어제 다르고 오늘 또 다르다. 아마도 내일은 또 다른 색다름이 더 생겨날 것이다.
계속된 여행에 피로가 누적되고, 어느새 오늘도 변함없이 제법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체력과 시간이 허락되는한 우리는 또 낯선것들을 만나러 거리로 나선다.
이제 발레타는 낮이건 밤이건 제법 익숙해질 때쯤 되었건만....... 여전히 모든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다가온다. 우리는 발레타의 신년 축제속으로 빠져들어 가보기로 했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알프스 산맥 북쪽의 고트족을 폄하하고 비하했다. 그들이 가진 문화와 건축 양식을 '고트스럽다' 라고 평가했다. 이는 곧 '오랑캐나 야만인들의 문화이며 풍습이다' 라고 헐뜻는 표현이다. 그 고트스러움이 오늘날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고딕 양식)이다. 유럽의 문화와 유럽의 건축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고딕 양식)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고딕 양식과 문화가 배제된 인류 문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고딕 양식을 비웃던 사람들이 가진 문화가 바로 (중세 문화)이다.
그런 중세 문화에 대해서 나는 감히 '중세스럽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들이댄다. 그것은 또한 중세인들이 고트족을 바라보던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세스럽다'는 '좀 한심하다'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 '그러고도 너희가 인간이냐?' 혹은 '종교에 탈을 쓴 짐승들의 세계' '단세포 동물인 아메바와 다를게 없는 인간 군상들' 등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장미의 이름'.
외진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교황과 황제들 사이의 세속적권력에 탐욕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다툼, 그런가 하면 성스러워야 할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청빈 논쟁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거기에다 또 그와중에 교황과 제국의 군주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려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그릇된 야망이 끼어든다. 그런가하면 수도원과 세속의 중심인 도시들 사이에도 권력과 경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한마디로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동물의 왕국 무삭제판' 이라 할만하다.
신(神)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 한번도 세속의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벌어지는 옳던 옳지않던 그 모든 일들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교황도 황제도 여러 수도회들도 부자와 귀족들도...... 하나같이 모두가 신을 앞세우고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 무슨일이든 저지르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룩한 조물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와 죄악덩어리 앞에서도........ 그런 일들이 모두 신의 뜻에 의한, 또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거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따라붙게되는 원죄설에 입각해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은 어디에도 없다.
진정한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최소한의 해야 할것과 하지말아야 할것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늘 깊은 침묵이다. 자신의 이름을 빙자해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아귀들에 대한 경고나 징벌 조차도 없다. 신을 빙자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그것이 바로 중세다.
그것이 바로 '중세스러움' 이다.
그렇다면 그 '중세스러움'은 아주 먼 옛날에 모두 끝이 난 것일까?
거룩한 분께서 언젠가 직접 교통 정리를 해주셨단 말일까?
결단코 아니다. 그 '중세스러움'은 여전히 이 순간에도 진행중이다.
그렇다면 신성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의 핵심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기에 수도사들이 연일 죽어나가야만 한단 말인가? 인간의 근원에 대한 비밀이라도 숨겨졌단 말인가?
'웃음(smile)' 때문에 벌어진 연쇄살인사건 이라고 한다면 어디 믿어지기나 하겠는가?
그런데 정말이다. '웃음을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것인가' 때문에 벌어진 수도원 연쇄살인사건 이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하하하하하!!!
그게 바로 '중세스러움' 이라고 내가 말하는 이유이다.
예정되고 계획된 연쇄살인사건은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윌리엄 수도사(숀 코널리)는 계속해서 진범을 찾아내기 위한 수사를 진행한다.
이 사건 자체가 (요한 묵시록)의 예언에 의한 것임을 알아 챈 윌리엄은 마침내, 이세상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 할 수 없는 수도원의 절대 성역인 장서관(고문서 보관소)을 찾아낸다. 모든 수도사들은 물론 심지어 수도원장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장서관의 육중한 문을 윌리엄이 열고 들어섰을때, 안쪽에서 그를 맞는것은 수도원에서 두번째로 나이가 많은 원로이자 맹인 수도사인 호르헤 였다.
장서관이라는 비밀의 공간과 호르헤라는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 윌리엄은 연쇄살인사건의 모든 진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살인의 빌미는 장서관에 보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 때문에 벌어진 사단이었다. 그 책을 꺼내서 읽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비밀스런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 배후엔 호르헤가 도사리고 있었다.
'웃음'.
남을 웃기면서 살아가는 직업있는 처지의 오늘 시대에 웃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중세스러움이 가득하던 시대에는 '웃음'이 절대로 엄숙해야하고 신성해야 하는 교회와 권위로 가득한 절대왕정 체계와 가치체계, 심지어는 인간의 삶 속에 연결되어지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대단히 중요하고도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것이다. 기쁘고 즐겁다고 함부로 웃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신성모독 내지는 불경, 또는 계급간의 갈등으로 언제든 비화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소재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중세스럽다'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교회가 무엇인가? 신앙이 무엇인가?
'교회가 약하고 착한 양 무리를 보호해주고 이끄는 목자'라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100% 거짓의 기반 위에서 지어낸 이야기였다. 초대교회(로마에 핍박 받고 카타콤베에서 신앙활동을 하던 시기)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까마득한 전설 같은 구전일 뿐이었다.
교회는 현실적인 인간사 뿐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허구 세계에 까지 걸쳐 생겨난 거대한 물리적인 조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것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막강한 권력을 차지한 무시무시한 사회제도 자체가 되었다. 교회는 지구상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핵심에 교황이 있었다.
교회는 자신들이 창조해 낸 교리체계를 앞세워 인간의 신앙생활....... 다시 말해서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신과 자연'에 대한 해석과 그에 따른 요구 조건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또한 언제나 신의 이름을 앞세워 복종 할 것을 강요했다. 생각하고 따지고 하면 불경이며 신성모독죄가 적용 되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교회의 지시와 가르침에 복종하기만 하면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생겨난 무한대의 권력은 오로지 교회만이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중세스러움이 너무나 만연하고, 교회 스스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교화 안팍에서 많은 부작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편 논쟁을 둘러 산 교회 내부의 대립, 교황과 세속 권력들 같의 끊임없는 갈등과 다툼, 교황의 타락과 흑사병의 등장.........
새로운 인간의 지적 탐구가 한없이 신성해야만 할 교회에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보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교회 내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경계경보를 울리고 있었으며, 이 위기를 극복하고 신성을 지켜내야하는 측에 바로 호르헤 수도사가 있었던 것이다.
연쇄 살인 사건 자체와 범인 색출을 넘어서 윌리엄 수도사와 호르헤 수도사는 격한 논쟁을 벌인다.
중세의 시대상이자 교회의 진면목이자 세상사에 대하여 날카로운 공방전이 상태의 페부를 향해 화살을 날리며 격돌한다.
정녕....... 이 결과는 신의 책임인가? 아니면 교회의 책임인가? 소수 인간의 방종의 결과인가?
'이 영감탱이야. 악마는 웃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라고 윌리엄은 호르헤 면전에서 호통을 날린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 가득히 어떤 두려움이 호르헤를 가두기 시작하자 이리저리 날뛰던 호르헤에 의하여 장서관에 화재가 발생한다.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자리에 선 호르헤인만큼 삽시간에 거대한 불길로 치솟는 화마 속에서도 호르헤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결국 무서운 화염을 피해 윌리엄은 장서관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장서관의 불은 본관으로 올겨붙고, 다시 수도원의 건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 사흘만에 수도원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만약 호르헤가 죽지않고 살아나왔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무슨 주장을 여전히 펼칠까?
이 시대의 윌리엄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중세스러움'이 극한을 넘어 종국에 곪아 터져 버린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시작'이며 '종교 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몰타 여행기)가 길어졌네요. 다음 이야기 쯤에서 몰타 여행을 마치고 서둘러 시칠리아를 방문해 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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