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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몰타를 느끼려면..... 이 세상의것은 다 내던져 버려라.

by 피안재 2020. 5. 24.

 

 

 

 

 

 

 

 

 

 

 

 

 

 

 

 

 

 

 

 

 

 

 

 

 

 

 

 

 

 

 

 

  컴퓨터 검색창에 <몰타>를 검색해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올라있는 글의 상당수가 (몰타 어학연수)에 대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던 과거 시절에서 영국이나 캐나다로 옮겨가더니, 한동안은 필리핀 어학연수가 붐을 이뤘었다.  그러던 어학연수 장소로 현재는 몰타가 대세라고 한다.  유럽의 백인들이 시리제로 주로 거주하고 있고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니 영어 공부를 위해서라면 몰타가 적격 인지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유럽 본토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물가마저 착하니까 말이다.  몰타에 가면 영어 공부가 정말로 일취월장할까?

  세 번이나 몰타를 드나들면서 많은 한국의 청소년들을 만나 보았다.  그들에게서 확실하게 들은 바로는 몰타라는 나라는 천혜의 환경을 간직한 여행하기 참 좋은 나라라는 이야기였지,  영어 공부하기에 딱 좋은 나라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를 못한 것 같다.  아무튼 외국어 공부를 위해서 아주 머나먼 타국까지 유학(?)을 왔으니  고국에 계신 부모님들은 공부하느라 고생한다고 생활비와 용돈 넉넉하게 보내주시지,  실질적인 생활에 대해서 볼 수가 없으니 부모님의 간섭에서 벗어 난 완전 해방공간이지, 아무도 제약을 가해오거나 터치하는 사람이 없다.  주변에는 한국의 뜨거운 교육열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나라에서 온 청소년들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사고와 생활방식으로 젊음을 즐기고 또는 불태우는 모습들이 거의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물론 그네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영어문화를 접하고 또 영어 회화 실력이 향상된다고 하면 더는 할말이 없다.

  이쯤에서 나는 '어학 연수'와 '영어 체험학습'은 좀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싼 돈을 들여서 해외까지 나가서 얻고자 하는 영어 교육이라면.........  몰타 어학연수 다녀와서 토익 점수 좀 올라가셨습니까?  지원서에 스펙이랍시고 '몰타 어학연수'라고 쓰는것 말고,  국내 학원도 아니고 해외 연수까지 다녀오신다면  적어도 토익 400점 이상은 아주 최소한의 기본적 목표이시겠지요?

  그랬으면 좋겠다.

  혹,  영어 공부를 핑계로 한 해외 자유여행이 아니셨나요?  어디까지나 영어 체험 실습을 다녀오신거지요?  토익하곤 전혀 상관이 없고,  영작문하고도 거리가 멀고.........  겨우 영어 울렁증 정도만 좀 치료가 되는.........

 

  어학연수 다음으로 '몰타 여행'에 대한 글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어학 연수를 다녀 온 한 청소년의 글에서 또 한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몰타 여행하면 늘 '아주르 윈도우'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는 한 번은 들어가는것 같다.

  근자에 올린 글(2020년 작성)에서 아주르 윈도우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소상하게 잘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보는 아주 멋진 아주르 윈도우 사진이 꽤나 여러장 올려져 있었다.  다른 첨부된 이야기가 없는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근자에 고조섬을 방문했고 아주르 윈도우가 너무나도 인상적인었던 것 같다.  사진의 풍경고 너무나 멋졌다.  그냥 몰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참 부러울 정도로 멋짓 여행이었다고 감동을 받을만 했다.

  그런데 말씀이다.

  몰타에는 아주르 윈도우가 없다.  아주르 윈도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예전에는 몰타에 아주르 윈도우가 있었다.  하지만 2017년 3월에 무너져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나서는 다신 옛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무런 부연 설명이 없이 너무도 생생하게 방금 체험한것 처럼 아주르 윈도우를 생생하게 그려놓은것을 보자니.........

 

  

  내가 컴퓨터 검색창을 두드린 것은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한 일이 아니었다.

  '17 불랙(17 BLACK)' 이란 회사의 정체가 밝혀졌나 궁금해서 였다.

 

  아주르 윈도우가 무너지기 약 두 달전쯤,  그러니까 2017년 정초에  몰타에서 프리랜서로 활약하고 있는 여기자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는 우연히 광고전단지에서  '17 불랙(17 BLACK)' 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뭐하는 회사기에 달랑 불랙이지?  어둠속에 숨고 싶어서? 17은 또 뭐야?  무슨 암호야?'

  이 지극히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 다프네 기자는 그날 저녁 '17 블랙'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파고들면 들수록 이 '17 블랙'의 주변으로 어떤 알 수 없는 보호막이 철두철미하게 설치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오랜 직업에서 터득한 본능작인 직감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2월 22일 다프네는 나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블로그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올 짧은 기사를 올렸다.

  '17 블랙  -  두바이에 설립된 회사'

  그리고 이 단순한 제목 아래  4명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면  무스카트 몰타 총리, 총리 비서실장 케이스 스켐브리, 정치인 존 달리, 콘라드 미치 관광부 장관 이렇게 4명이었다.  더 이상의 어떤 부연 설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상황은 일파만파 번져 나갔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이 정체를 깊게 숨기고자 하는 어떤 회사와 어떤식으로든 연관이 되어졌다는 암시였다.

  몰타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EU(유럽 연합)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다프네 기자는 두 번째 글을 올렸다.

  에너지 기업 '일렉트로 가스'의 공동 소유자이며 몰타 최고의 갑부인 요르겐 페네치가 두바이에 설립한 '17 블랙'을 통해서 이미 거명된 정치인을 포함한 고위 관료들에게 지속적으로 뇌물을 제공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거명된 정치인과 관료들은 앞다투어 다프네를 고소했다.

  하지만 다프네의 폭로는 이 후로도 계속 이어져 나왔다.

  8개월 후인 2017년 10월 취재를 위해 몰타의 북족 해안길을 달리던 다프네 여기자의 차량에서 폭탄이 터졌다.  아주 잔인한 차량 폭탄테러였으며 다프네 여기자는 현장에서 흔적조차 찾기 힘들만큼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빈스 무스카트를 포함한 3명의 남성이 다프네 여기자 차량테러범으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총리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끝까지 연관되지 않았으며  다프네의 기사는 허위라고 주장했다.

  총리는 엄정한 수사와 해결을 약속했지만.......  사건은 오리무중.......  그대로 뭍혀 잊혀지는듯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간 지난 해(2019.11월)  자신의 초호화 요트를 타고 몰타를 빠져나가 도망치려던 요르겐 페네치가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17 블랙'에 관련된 내부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요르겐 페네치 구속 소식은 몰타 전역을 또 한번 광풍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경찰은  요르겐 페네치가 다프네 여기자 테러 사건과 연관을 조사중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구속 수감중이던 무스카트가 감형을 조건으로 테러 사건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새로운 진상을 쏟아냈으며, 종국엔 요르겐 페네치가 배후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테러 사건을 혼자 뒤집어 쓰게 된 페네치가 또 입을 열었다.  총리 비서실장 스켐브리가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스켐부리는 당일 사임과 동시에 체포됐다.  장관들의 사임과 경찰조사가 줄을 이었다.
  다프네 기자가 사망 직전에 쓴 기사에는,  '17 블랙'은 조세 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에 등장하는 여러 회사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 회사의 실질적 소유주는 무스카트 총리의 부인이다 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만큼 드러난 상황에서도 무스카트 총리와 부인은 끝내 사건과의 연관을 부정했다.

  총리의 최측근과 주변 권력자들이 줄줄이 낙마하자 결국 12월 17일 죠세프 무스카트 총리는 사임을 발표하고 권좌에서 내려왔다.

  경찰의 조사는 계속되고 있으며  반듯이 모든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런 격랑의 시기에 우리는 몰타에 머물로 있었던 것이다.

  몰타나 우리나 다른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도.......  부패는 항상 권력의 주변에서 시작된다.

 

 

  '명리(名利)에 날뛰는 저들을 어찌할꼬?  모든것이 순간이고 다 부질없는 것이거늘.......'

 

 

  초등학교 시절 학교 수업시간에 '장래의 희망'을 적어보는 시간이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 장군. 정치가. 사장. 의사. 판사........  등 등,  대부분 경쟁 비율이 높은것들 이었다.  지금 되돌려 생각해 본다면  그 소망들에 적지않게 나름의 사연이 있는 장래 희망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뭐라고 적었을까?  아마도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장래 희망 뒤에 따라 온 우리네 교육은 오로지 외길........  그 장래 희망에 가기 위해선 죽어라 기를 쓰고 공부에만 매달려야만 하며,  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반듯이 남을 꼭 이겨야 한다는 숙명을 깨우쳐 주는것 뿐이었다.  반칙도 괜찮다.  성공하고 나면 지난 과오는 모두 파뭍인다고 가르쳤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것을 깨우쳐 주었다.  변명은 오로지 패자의 몫이었다.

  단 한명의 대통령을 위해서는 이 세상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마 그때에.....  그 시기에......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또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더 나아가 고위 공직자가 되기 위해선 사랑. 정의. 책임감. 청렴. 헌신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무장하고, 오로지 외길 인생을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어려서 부터 가르쳤더라면........  대통령이나 정치가를 꿈꾸는 아이들은 확연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미리미리 각오하고 준비하는 아이들이 지금 이나라의 지도자가되었다면  세상은 훨씬 아름답고 사람살기 좋은 나라로 바뀌었을 것이다.

  왜?  인생 막판에 급회전을 해서 느닷없이 정치 권력에 집착을 할까?  죽어서 묘비에 직함이 달라져서?

  남을 헐뜻다 못해 핍박하고 모략하고,  남의것을 가로채는것을 다반사로 저질렀고, 눈 먼 나랏돈을 죽어라 빼먹었고,  똑똑한 변호사 옆에 끼고 금줄(법)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고,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할짓 못할짓은 다 저지르고도 비밀금고에 돈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이래저래 명함에 폼나는 직위도 새겨졌으면  족한 줄을 알아야지.......  느닷없이 인생 막판에 장관, 국회의원, 공관장 이라니.........?

  '하나님.  야네들 해도해도 너무하는것 아닌가요?'

  개판처럼 지저분하게 살아 온 자들이,  어느날 갑자기 엄숙한 수도사 복장을 하고 나와서는  이제 내가 세상을 위해 헌신 봉사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지는데........  개뿔.  지옥불에나 떨어 질 더러운 인생들아.......

  하나같이 드러나는 막 살아 온 과거사들.......  세상에 못된짓은 다 절릴러 놓고 호위호식 해왔으면서.......

  사회적인 망신에 그치지 말고,  못되먹은 심뽀와 저질러 놓은 지난날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뒤다라야만 하겠다.  이는 모든것이 그릇된 교육에서 비롯된 일이라 생각한다.

  교육은 적어도 한 세대,  그러니까 30년 단위로 구분지어 평가할 수 있다면........  지금의 혼돈스런 대한민국의 사태를  이제라도 진정한 교육관에 입각해 수습하고자 노력한다면.......  적어도 우리 다음세대인 30년 후에는 좀 달라질 수 있으려나?  그러자면 지금 우리의 손자 손녀들에게  대통령  정치가 국회의원 고위 공직자가 되기 위해선 어려서부터 남다른 근면 성실 정의감으로 똘돌 뭉쳐서 스스로 잘 처신하면서 외길을 가야한다고 가르쳐주어야만 할것이다.  돈벌었다고 출세했다고 유명세를 탔다고 갑자기 정치타령하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나라꼴이 (2020년의 대한민국)이 된다는 사실을 꼭 유념하게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다.

 

다프네 여기자 테러에 관한 몰타의 정국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 대한민국의 꼬라지 또한 별로 다르지 않음에 통탄하고픈 심정으로 또 하루를 맞이한다.

  초등학교는 우리세대때도 이미 의무교육이었다.  그 과정에 '바른생활' 과목이 있었다.  바른 생활이 뭐 그리 어려운 것이라고......  더불어 사는 좋은나라 대한민국을 우리는 모두 초등학교 바른생활 시간에 배웠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처럼.......  세상사는 이치가 궁금하거든.......  초등학교 바른생활을 펼쳐 보라.

 

 

 

 

 

 

 

 

 

 

 

 

 

 

 

 

 

 

 

 

 

 

 

 

 

 

 

 

 

 

 

 

 

 

 

 

 

  몰타는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나라이지만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몰타섬.  고조섬.  코미노섬이 해당된다.

  그럼 오늘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좋았던 시절에 신혼여행을 갔던 북쪽에 있는  고조섬으로 가보기로 한다.

  그런데 날씨가 하수상 하기만 하다.

  구름이 잔뜩 낀 을씬년 스러운 날씨임에도 구름 사이로 삐쭉삐쭉 자주 고개를 내미는 햇쌀은 마치 여름 한낮을 상기시켜준다.  그런가하면 불었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바람은 어찌나 거센지 마치 북대서양을 탐험하고 있는것이 아닐가 싶기까지 한다.

  예측불허의 날씨가 고조섬 투어하는 일정에 이른 아침부터 태클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슬리에마에서 222번 시내버서를 타고 45분 정도 가면 섬의 북쪽 끝에 치케와 항구가 나온다.  여기에서 페리를 타고 15분 정도면 저만치 건너다 보이는 고조섬의 임자르 항구에 도착하면서부터  고조섬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얼씨구?  치케와 선착장 대합실과 항만이 공사중이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도로를 따라 한참을 되돌아 가서 임시 선착장에서 조금 불편한 방법으로 페리에 오른다.  그런데 바람이 엄청나다.  거의 태풍급이다.

  몰타섬에서 고조섬으로 들어갈 때는 배삯(요금)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짜는 절대로 아니다.

  이 망망대해 절해 고도에서 이 항구를 통하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은 절대로 없다.  그렇다고 고조섬에 들어가 죽어서 나오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기어코 이 길로 다시 돌아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여 요금을 계시만 해 놓고,  다시 나올 때 합산해서 두 배로 징수한다.  들어갈 때 표파는 사람 인건비,  검표원 인건비.  티켙 인쇄비  등등이 절약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임자르 항구에 도착하니 느닷없이 한줄기 소나기가 쒸익 소리와 함께 지나간다.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날씨에  오늘 여정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임자르 항구에 도착하면  3가지 교통편이 기다리고 있다.

  택시를 대절해서 고조섬을 둘러 보는것.

  시내버스를 이용해 다니는 방법.

  투어버스를 이용해 이름난 관광지만 골라서 돌아보는 방법 등이다.

  고조섬은 아주 작은 섬이지만 7.000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서 깊은 장소이다.  하여 역사적인 유적지를 비롯하여 이름난 관광명소가 즐비한다.  하여 고조섬을 하루에 모두 둘러 본 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 있어서 고조섬 역시 세번째 방문이지만 늘 상 그랬었다.  고조섬은 1박 2일 정도의 여행코스라 생각하면 되겠다.  내 입장에서는 고조섬 전체를 어찌되었던 대부분 제대로 둘러 본 처지였지만,  이번 나들이가 챠밍여사를 위한 방문이라고 생각하면 이쯤에서 절대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위해서 먼저 선택할 것은 이동방법으로 투어버스를 선택하는 것이며,  투어 상품에 게재된 15곳의 명소 중에서 절반 정도를 골라서 집중해야 하는 과제가 남게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건너오는 페리 안에서 이미 투어버스 승차권을 구입한 후였다.  페리에서 선도매하면 약간의 할인이 주어진다.

  투어버스는 초록색과 빨강색의 두 회사로 나뉘는데,  도는 순서와 시간표가 다를 뿐이지 들리는 곳은 모두 같다.  매시간 마다 임자르 항구에서 투어버스가 15개 관광명소를 순회한다.  여행자는 자신이 선택한 여행지에서 내렸다가 다음 순번에 오는 버스를 갈아타고 다음 코스로 이동하면 되는 것이다. (앞 선 두번의 고조섬 방문기에서 올렸던 글들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기에서는 일부만 절충 기록해 본다)

  투어버스에 오르면 그리 오래지 않아  현지인들이 우리나라 영농 법인 처럼 운영하는 토산품점을  필수 코스처럼 들리게 된다.

   고조섬의 맛보기라고나 할까?

 

  몰타 하면 전체적으로 떠오르는 몇가지 풍경이 있는데....... 같은 풍경이면서도 고조섬의 풍경은 몰타섬이나 코미노섬하고는  웬지......  혹은 무언가가 사뭇 좀 다르게 느껴진다.

  딱히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고조섬에는 고조섬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내가 첫 방문에서 실제 라임스톤으로 건축을 하는 현지 어른들을 만나 본 이후로 더욱 그런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몰타섬은 하나의 거대한 성채이지만,  고조섬은 그런면에서  요한 기사단의 전설과는 무관한 듯 한적한 시골같은 분위기가 주류를 이룬다.  몰타섬의 고대시대가 엠디나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면,  고조섬의 고대시대는 '빗토리아'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  그 외의 모든것은 몰타와 고조섬은 어딘가 모든것이 다르게만 다가온다.

  고대에 누군가가 엠디나를 중심으로 몰타를 지배하고 통치했다면,  아마도 엠디나의 통치자가 고조섬까지를 지배했으리라는 생각보다는,  고조섬은 빗토리아를 다스리는 별도의 통치자가 있어 이 섬을 재배해오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닮은듯 확연하게 무엇인가가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 때문이다.

  이제부터 천천히 고조섬은.......  빗토리아를 만나보게되면 조금은 더 확실하게 알게되지 않을까?

 

 

  임자르 선착장을 출발한 2층 투어버스는  아름다운 교회라 불리는 'xewkija rotunda chuch'를 지나고, 다시 기념품 판매점 'savina creativity'에서 약 십오분 정도를 머문 후에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마침내 빗토리아에 당도한다.  빗토리아 주차장은  어느 투어회사 버스인던지 고조섬을 투어하는데 있어서 두 개의 코스로 나뉘어 있는 교차지점임으로  여행자는 이곳을 특별히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빗토리아 도심의 중간 지점에서 내려 굿을 날씨를 피해 인근의 카페에 들러 따근하고 향기 그윽한 몰타 커피에다가 방금 직접 구워내놓은 맛있는 빵으로 잠시나마 허기를 달래본다.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이 적당히 섞인 작은 공간에서 고조섬 나름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즐겨본다.

  카페에서 나와 도심의 얕은 언덕길을 걸어 오르노라면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중세라는 먼 과거의 공간에 머물고 있는 착각마저 생겨난다.  그렇다.  어쩌면 고조섬의 시간은 여전히 중세에 머물고 있는것이 아닐까?

 

 

 

 

 

 

 

 

 

 

 

 

 

 

 

 

 

 

 

 

 

 

 

 

 

 

 

 

 

 

 

 

 

 

 

 

  빗토리아(Victoria)에 들어서서 주변을 돌아보면 작은 성채도 이렇게 튼튼하게 지어질 수 있고,  수없이 많은 외적이 몰려온다 치더라고 결코 무너지지 않을거라는 자부심으로 당당하게 대적할 용기가 저절로 생겨날 수도 있겠구나 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빗토리아는 발레타나 쓰리시티의 요한 기사단이 지은 육중하면서도 장업한 거대 성채와는 전혀 다르다.  작은 소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서는 몰타섬의 엠디나에 가깝겠지만,  얼핏 실제 전쟁을 대비한 성채라기 보담은.......  혹 영화 셑트장이 아닐까 싶을만큼 작고 아름답고 더없이 예정취가 물신 풍겨난다.

  이런것을 '중세스러운 풍경'이라고 해야할까?

  어찌보면 지중해 유역의 성채로는 보이지 않는다.  기후와 환경이 아주 척박한 저쪽 북유럽(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끄트머리에나 있을법한 느낌이 팍팍 떠오른다.  주변에 숲이 우거지고 아래로 초원이 펼쳐지고 허구헌날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자욱하면........  빗토리아는 영락없는 스코틀랜드 풍경이리라.

  아주 작은 성책 빗토리아는 아주 깊이있는 중세 시대의 향취가 가득 풍겨난다.

  고조섬의 한복판 언덕에 우뚝 서있는 이 성채는 애초에 '성채도시인 시타델(Citadel)의 용도로 지어졌다.  성채 안에는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와 기사들과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주로 머물렀다.  성밖의 주변으로 주민들이 기거하면서 영주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댓가로 존경을 표하고 세금을 받쳤을 것이다.  군사적 용도의 이름인 '그랑코스텔로(Gran Costello)'의 관제탑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그야말로 고조섬의 모든것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우리는 지금 적어도 17세기 이전의 몰타를 여행하고 있다.

  '중세스러운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것이구나'를 실감하면서 말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몰타의 날씨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30분은 멀다하고 단 십분 뒤의 날씨를 전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면 이해가 될려나?

  하늘의 2/3가 새파랗고 햇쌀이 빛나고 있다가도,  십분 뒤에는 시커먼 하늘에서 집중 호우가 쏟아지고 그 와중에도 해가 빼끔 얼굴은 내비추고 있다.  비오는 날이라 하기도 뭐하고,  맑은 날은 더더욱 아니다.

  연 중 320일 이상의 더없이 화창한 날씨로 정평이 나있는 몰타의 자연환경이 왜 하필 이때 말썽이란 말인가?  내가 다년갔던 앞 전 두번의 경우도 날씨 하나만은 정말로 예술이었는데 말이다.

  이스탄불도 몰타도 다들 왜그러느냔 말이다?

  챠밍여사랑 기우제라도 정성껏 한번 지내고 올걸 그랬나 싶다.

  이런 사태를 어디다 하소연 한단 말인가?  무얼 원망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때일수록 더욱 고도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어차피 고조섬이 우리에게 모든것을 허락하고 곱게 보여줄 심사가 아니라면........

  아무리 앞을 가로막고 훼방을 논다 해도 우리가 가고픈 곳은 기를 쓰고 간다.  볼것은 보고야 말겠다.

  빗토리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윽고 저만치에서 빨간 2층버스가 올라오고 있다.

  1코스?  2코스?  상관없다.  우리는 오로지 슬랜디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슬렌디(Xlendi)로 가는 버스다.

 

 

 

 

 

 

 

 

 

 

 

 

 

 

 

 

 

 

 

 

 

 

 

 

 

 

 

 

 

  슬랜디는 지중해 연안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촌 마을이자 포구다.

  하지만 이곳 몰타에서는 결코 흔하지 않는 소중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운 항구이나,  항구 보다는 가족단위의 여행객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작은 해변 휴양지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섬 전체가  깍아지른 바위벼랑으로 해안선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곳은 완만한 백사장이 펼쳐있고 아주 작은 어선들도 쉽게 정박할 수 있는 해양 환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스쿠버 다이빙이나 해양 액티비티를 원하는 사람들은 코미노 섬이나 골든 베이로 몰려들 가겠지만,  연인이나 노인 여행객이나 어린이가 있는 가족단위 여행자들에게는 물놀이 천국이 바로 슬랜디가 아닐까 싶다.  해변와 나란히 하여 레스토랑과 숙박업소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아주 작은 천연 수영장이기에 투어버스를 타고 이곳에 들어와서 주변을 잠시 둘러 본 후에는,  더 이상 다른 할 것이 없기에 주로 이곳에서는 식사를 해결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음 버스를 이용해 다른곳으로 이동하는 경유지 쯤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슬랜디에서 출발한 투어버스는 전형적인 고조섬의 시골풍경을 선사해주면서 한참동안 들판을 달린다.  돌담을 쌓아만든 손바닥만한 밭들이 지나가고 사방으로 어디나 섬 전체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은 선인장들이 나무가 거의 없는 몰타에서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초원 지대를 지나는가 싶어지면 어느새 주변의 풍광이 사뭇 달라진다.  사방으로 온통 희뿌연 바위산 투성이다.  풀밭에 듬성듬성 바위가 튀어 나온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온통 바위밭에 누군가 듬성듬성 풀을 심어 가꾸고 있다.  흡사,  이것은 전형적인 그리이스 크레타 섬 풍경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증이 하나 생겨난다.

  고대에 기념비적인 위대한 문명을 완성시켰던 그리이스인들은  비좁은 영토와 척박한 환경과 지진피핼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지중해 전역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이 원하는 식민도시의 선정기준은.......  그리이스 본토의 환경과 비슷한 곳을 찾아서 도시를 건설할 것 이란 전제 하나뿐이었다.  바다가 곁에 있고,  주로 바위산으로 되어 있고,  하여 신전과 성벽과 원형 극장과 조각상들을 만들기 위해 대리석 광산이 주위에 있으면 그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시대를 앞서간 선지식인들은 왜?  넉넉하게 강물이 흐르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옥토가 있으면서도 도시로 건설하기 좋은 지역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들은 기어코 척박하고 물도 부족하고 바위투성이인 해안가 산비탈을 찾아다녔으니 말이다.

  투어버스가 한참을 달려 크레타 섬을 닮은 해안 언덕에 서면 발아래로 푸르디 못해 검푸른 지중해의 바다가 시야 가득 넘실 거린다.  하늘아래에 단 두가지 뿐이다.  라임스톤의 바위산과 검푸른 바다,  이 둘 뿐이다.  버스는 가파른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 해안을로 향한다.

  왼편으로 자욱히 피어오르는 먼지와 함께 굉음 소리가 진동한다.

  라임스톤 광산이다.

  넓은 평원에 마치 계단식 논을 만드는 풍경처럼 마치 두부판에서 두부를 한 모 한 모 떠내듯이 커다란 라임스톤이 싹뚝싹뚝 잘려져 나온다.  그 풍경 또한 자못 신기하기만 하다.

  가파른 언덕길을 식씩하게 달려내려간 버스는 너른 공터에 미니 가판대 하나랑,  허접해 보이기까지 하는 교회당 건물이 달랑 하나 서 있는 너른 공터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웨지라(Dwejra) 라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에는 과거 몰타의 랜드마크라 한 수 있는 아주 빼어난 풍경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내가 몰타를 처음 알게 된것도 바로 이곳의 풍경 때문이었다.  워낙 이름난 풍경이었기에 여러 영화에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고는 했었다.  나는 미드 (왕좌의 게임) 초반부에서 이곳의 풍경을 경험했다.  그래서 '몰타...... 몰타......' 하고 중얼거리면서 언제고 꼭 찾아가 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2017년 초,  나는 이스탄불을 혼자 여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처음 생각은 우선 몰타에 들렸다가 시칠리아로 건너가서 다음 계획을 세워볼까 했다.

  아니면 터키의 남동부로 내려가 하산케이프나 산느우르파를 여행하고 넴룻산에 오를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하필......  시리아 내전과 IS 테러전쟁이 급속히 번지기 시작했다.  산느우르파에서 시리아는 직선거리 20km 밖에 안되어서 여행 금지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다음 생각은 트라브존으로 해서 국경을 넘어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향하는 계획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터키 서부를 흩으며 내려가 보드룸에서 바다를 통해 그리이스 산토리니로 해서 크레타와 아테네를 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평소 내 여행 스타일이 떠나는 날짜와 돌아오는 날짜만 정해놓고 사방으로 쏘다니는 방식이라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고,  어디로든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었다.

 

  그날 밤,  터키의 국영 티비 방송에 몰타 고조섬에 있는 웨지라 지역의 절경인 '아주르 윈도우(Azure Window) 소식이 방영되었다.  왕좌의 게임 영상과 함께 전해지는 소식은 아주르 윈도우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겨서 이제 여행자들이 아주르 윈도우 위에 올라서는 것을 금지 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거기에다 세계적인 지질학자들이 등장해서 '아주르 윈도우가 풍화작용에 의해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앞으로 적어도 30년에서 150년 동안은 우리가 아주르 윈도우를 더 감상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검푸른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푸른 창'은 이상이 없단다.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 뉴스만 없었더라면........  나는 몰타로 향했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아주르 윈도우가 이상이 없다하기에.......  아무때고 차차 찾아가면 만나볼 수 있다기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트라브존을 거쳐서  장장 13시간의 장거리 버스여행을 계속해서 나는 조지아로 향했던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지 두 달쯤 지나서였을까?

  느닷없이 아주르 윈도우가 또다시 이번엔 대한민국 뉴스에 등장한 것이다.

   '몰타의 절경인 아주르 윈도우가 결국 무너져서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마.이.갓.

 

 

 

 

 

 

 

 

 

 

 

 

 

 

 

 

 

--- '아주르 윈도우' 님의 살아생전 모습. 당시에는 '지구 절경기행'에 올랐음.

 

 

--- 사망을 선고한 아주르 윈도우 지금 현재 모습. 마치 거제도 어딘가 모습정도랄까?

 

 

 

 

 

 

 

 

 

 

 

 

  웨지라를 벗어난 투어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거슬러 가파른 언덕을 질주한다.

 이제 고조섬의 반대쪽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중요 교차로인 빗토리아를 다시 경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몰타의 2층 투어버스를 몰고다니는 기사양반들.........  거의 곡예사 수준이다.  좁은 도심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곡예하듯 빠져나갈때마다 여행자는 긴장하거나 내밀었던 손을 째빨리 거둬들이기에 바쁘다.  골목 양쪽의 삐져나온 건물의 테라스 난간이랑 2층버스의 난간이랑 거의 한뼘 정도의 아슬아슬한 간격일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지금 당장 그때를 회상해 본다고 해도......  정말 아슬아슬한 장면이 너무나 많이 있다)  곡예를 넘어 거의 예술의 경지라 할까?

  빗토리아를 관통해서 고조섬의 반대쪽으로 초원지대를 한참을 달려간 버스는 우리를 어느 낯선 작은 도시의 어귀에 내려 놓고는 다시 왔던길로 쏜살같이 달아난다.

 우리 외에 이곳에 함께 내린 여행자는 달랑 한명 뿐.........  별 볼일 없다는 암시인가?

 도심의 입구에는  '마르샬폰(Marsalforn)' 이라고 허름한 표지판이 내걸려 있다.

 마르샬 폰은 고조섬 최고의 해변 휴양지다.  겨울이 아닌 시기에는 연중 해수욕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들썩이는 전형적인 지중해 해변을 품고 있다.  헌데 지금은 한겨울로 완전한 비시즌이다보니 도심은 을씬년스러울 정도로 한산하다.  지중해의 파도소리만이 전부라 하겠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데 있다.  이 계절에 바다를 즐겨보려 온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솔트 판스(Salt Pans)', 그러니까 '염전'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이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위에니베이 염전' 이라고 부른다.

  몰타에서는 아주 고급 품질의 천일염을  고대시대부터 생산해 왔다.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해 졌지만.

  비록 염전이라고 해도 시칠리아의 마르살라 염전에 비하면 생산량이 미천하겠지만,  이 절해고도에서 그나마 소금을 자급자족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몰타의 존립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몰타에는 갯벌도 없고해서,  우리나라 같은 대규모 염전이 생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해왔던 것이다.  이미 몰타섬에서 보았던아주 작은 염전과 비슷한 모습과 형태와 방식일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하지만  적어도 몰타에서는 마르샬폰 안쪽에 있는  위에니베이의 천일염이 최고라고 하기에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 온 길이었다.

 

 

 

 

 

 

 

 

 

 

 

 

 

 

 

 

 

 

 

 

 

 

 

 

 

 

 

 

 

 

 

 

 

 

 

 

 

 

  마르샬폰은 한적하다 못해서 적막하기까지 했다.

  바람소리와 성난 파도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만에 처음 만난것은  삽살개를 닮은 강아지였다.

  하지만 마을을 가로질러 바닷가에 도착해서 느끼는 풍경은 전혀 달랐다.  탁 트인 바다가 전부.......

  혹한의 겨울만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해운대나 경포대 못지않을 빼어난 해변풍광을 품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방파재를 타고 넘어 마을 안쪽까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린다.  해변가 작은 광장 옆에 아담한 카페 하나가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현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발 디딜틈이 없어보인다.  잠시 추위도 피하고 따끈한 커피 한잔 마시려 하였으나 빼곡한 실내 상황을 보니 어디 들어갈 틈이 없다.  주민 서너분이 틈새를 만들어 내어주면서 안으로 들어오라는데.......  '염전 부터 다녀오고 나서 들어갈께요'라고 답하고 뒤로 서너걸음 물러났다.

  '저쪽으로 해변을 따라 20분 쯤 가면 위에니베이 염전이 나올텐데.......  파도가 길을 넘어 가로막고 할테니 조심해야 할꺼요.'

  할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방파재를 따라 마을 도심을 지나 언덕을 넘어간다.

  사나운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때까지는 그래도 대단히 좋았다.

  언덕을 돌아가니 해안 언덕에 바위를 깍아서 만든 작은 염전의 흔적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고(우리나라 계단식 전답 가꾸듯이)  백사장이 굽어 지나간 저만치 다음 해안 돌출부에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건물 잔해랑 해안 바위를 잘 다듬은 풍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저곳이 염전이로구나.........  했을 때........

  느닷없이 또다시 비가 시작되었다.  하늘에 반쪽은 분명 파랗게 드러나 있는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흔한 보통의 비가 아니었다.  해일이나 풍랑과 함께 들이닥치는 그런 유형의 폭우였다.   어찌나 심하게 쏟아붓는지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한다는게 무리일 듯 싶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우리는 해변에 설치된 화장실 건물로 대피했다.  겨울에도 건물 자체는 열려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또 기다려봐도  비란 녀석이 태도를 바꿀 낌새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남아있던 반쪽짜리 파란하늘도 어느새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배낭에 담겨있던 비상용 양산을 꺼내들고 챠밍여사가 나서 보았는데.......  서너 발자욱만에 양산이 훌렁 뒤집혀서는 부러져 버린다.

 우산이라곤 여태껏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우리의 여행 스타일........  장만한지 십년도 넘은 1회용 우비는 호텔의 큰배낭 맨바닦에 잠들어 있고...........  헐.  어쩐다?

  '어쩌긴 몰 어째?  이런게 어디 한 두번이여?  볼려고 왔으면 기를쓰고 가서 기어코 봐야지.'

  빗속을 아랑곳 않고 챠밍여사가 벌써 저만치 앞서 나선다.

 몸종이자 짐꾼 처지로 달리 생각할게 뭐가 있겠어?  죽자사자 따라 나서야지.

위에니베이 염전에 도착했다.

  고대인들의 지혜니,  이런 방법으로도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니 없었니,  한번 소금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걸렸을까라든가,  일년에 생산량이 얼마나 되었을라나 등등은  이제나 회고하듯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당장은 인증 샷 몇장 찍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우리처럼 이 날씨에 여기기까지 투어버스를 타고와서 걸어서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더 없었다.  서너팀의 사람들이 그냥 렌트카를 이용해 왔다가는 그들도 우리처럼 인증샷 찍기가 무섭게 잽싸게 왔던길로 빠져 나갔다.

  날씨만 괜찮았더라면........

  돌아가는 길은 더 혹독하고 참혹했다.

  옷이 젖어들자 파고들어오는 추위도 한껏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마르샬폰에 유일하게 문을 연 카페까진 오긴 왔는데........  아까보다 동네 주민들이 더 빼곡히 들어차 있다.  겨울이겠다 비가 극성을 부리겠다.......  이 마을 사람들도 달리 할일이 없으니까 동네에서 당장 하나뿐인 카페에 모여서 수다나 떨면서  당췌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것으로 보인다.

  어쩌겠는가?

  하늘을 원망하면서 터덜터덜 아까 투어버스에서 내린 지점으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 언덕에서 버스가 내려오는 기척이 있기에 죽어라 뛰어가 보는데.......  아뿔싸.  초록색 투어버스다.  우린  빨간색 투어버스를 타야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나.......  이를 어떻게 설명 할 수가........

  느닷없이 비가 뚝 그치더니만  해가 비추기 시작한다.  영화 <십계>에서 바다가 갈라지듯이.......

  그리고 버스정류장 건너편 저만치에  미니버스로 꾸민 커피 숖이(노점) 문을 열었다.

  그날 우린..........  그곳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메리카노와  몰타 도너츠를 먹었다.

 

  '이런게 여행 아니겠어?'

 

 

 

 

 

 

 

 

 

 

 

 

 

 

 

 

 

 

 

 

 

 

 

 

 

 

 

 

 

 

 

 

 

 

 

 

 

 

  몰타라는 국가의 역사 중요부분이 '요한 기사단'과 연관이 있으며,  몰타 여행자의 상당부분은 몰타를 아예 '요한 기사단의 나라' 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몰타는 당연히 '로마 카톨릭'이 주류를 이루고있는 카톨릭 국가(국민의 96%)이다.  노르만에 의해서 시칠리아 왕국에 포함되고 요한 기사단이 나타나 카톨릭 국가를 이룩하지 전까진 상당기간 이슬람의 실질적 지배를 받아왔기에 카톨릭을 제외하면 이슬람 교도가 가장 많다.

  하여 이 작은 나라(강화도 크기)에만도 약 350개가 넘는 성당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그렇게 크게 놀랄만한 일처럼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하게 몰타인들이 여기고 있는 교회를 꼽아 본다면,  우선 몰타의 상징이랄 수 있는 발레타의 '성 요한 기사단 대성당'을 최우선으로 꼽을 수 있겠다.

  두번째는 옛 수도였던 엠디나에 있는 '사도 바울 대성당'을 꼽을 수 있겠다.  지중해 연안으로 선교여행을 계속하던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던 중,  배가 난파되어 몰타로 떠밀려 와서는 약 두달동안 지하 감옥에 갖혔었던 동굴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짧은 투옥기간에 바울은 뱀에 물려 생명이 위독한 몰타총독 푸불리우스의 아버지를 치료한 일을 계기로 그와 가족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고 세례를 주었으며  그가 몰타에 교회를 세우고 수도자의 길을 걸었었다고 하니,  몰타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진원지였던 셈이다.

  세번째는  엠디나를 방문하는 중에 조금 앞서 거쳐가는 길목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모스타 돔' 이다.  이런 작은 섬나라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만큼 실로 어마어마한 이 건축물의 본래 이름은 '성모 승천교회(Church of Santa Marija Assunta)' 이다.  우리가 이미 피렌체 두오모나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에서 보았듯이  돔을 직접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없이 상부에 돔을 얹어놓은 듯한 건축물로 세계에서 서너번째에 드는 커다란 돔을 가진 아주 유명한 건물이다.  하지만 개관시기나 시간에 제약이 많아서인지 아직 한번도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고른 교회는 윗쪽 사진에서 보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로 잘 알려진 '타 피누 성당(Ta Pinu)' 이다.  전형적인 몰타적인 풍경속의 들판 한복판에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하게 세워진 이 교회 자리에는 본래 아주 작은 교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불치의 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서 어린 처녀가 이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고  응답을 받았음인지 아버지의 불치병이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사방에서 많은 병자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게 되었고,  그후로도 여러번의 기적이 이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하여 사람들이 이자리에 새롭게 지금의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했다. 1931년 성당 축성식에 참석한 교황 비오11세가 '성모 승천교회'라 이름 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적을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서 꾸준히 찾아들고 있는 이름난 교회이다.

 

  예전엔 타 피누 성당을 찾아오면 1개 코스로 쳐서 투어버스가 여행자를 내려주고는 곧바로 되돌아 나갔다.  여행자는 성당을 둘러보고 시간이 남으면 주변의 바위투성이와 선인장만이 빼곡한 들판과 개간 전답을 둘러보고는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투어버스가 정차를 하면서 '10분간 시간을 드립니다' 라고 안내를 하고는 정차해서 기다린다.

  1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겠지만.......  저만치 뚝 떨어져 있는 거대한 교회당과 광장을 조각상들과 모자이크 벽화들을 둘러보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지금 타 피누 성당은 투어버스의 가장 짧은 맛보기 코스로 전락해 버렸다.

 

 

  몰타에서 유일하게 황금빛 모래사장을 가지고 있는 여행자 보다는 현지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있는 해변 휴양지가 있다.  이곳을 드나드는 교통편(시내버스) 자정이 시간도 불규칙하고 불편하다보니 심지어 투어버스를 이용하는 여행자들 조차도 그냥 통과해 버리기 일쑤다.

  양쪽으로 깍아지른 바위벼랑 사이로 계단식 전답이 돌담을 끼고 정겹게 늘어서 있다.  도랑 양옆으로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는데,  어찌나 크고 위용이 당당한지 얼핏보면 대나무로 오인하기가 쉽다.

  이 지역은 유사 이래로 몰타에서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 한 곳이 아닐까 싶다.

  고대 그리이스의 대서사시인 호머가 쓴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딧세이의 주인공 율리시즈와 그의 군대가 트로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귀국 도중에 난파를 당해 달랑 율리시즈 혼자만 이 섬으로 떠밀려 왔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동쪽 언덕의 바위 벼랑에는 '칼립소 동굴'이 있다.  님프인 칼립소는 바다로 떠밀려 온 율리시즈를 사랑하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과 재물과 권력을 약속하면서 7년 동안 이 동굴에서 율리시즈를 떠나지 못하게 유혹과 감금하다시피 하면서 함께 살았다.  하지만 이타카에 두고 떠나온 아내 펠레로페를 향한 사랑을 잊지못하는 율리시즈를 끝내는 떠나보내주게 된다.

  현지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이 황금빛 해변 '람라 해변(Ir- Ramla, 혹은 Red Sand Beach) 언덕에 서서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소설 '이타카로 돌아가다'를 회상해 본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면 호머의 '일리아드와오딧세이'를 제대로 번역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아들에게 선물해야만 할까보다.

  아들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어느때고 꼭 한번쯤은 진지하게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고이 담아서 말이다.  살아가면서 꼭 한권을 정해서 책을 읽어보라고 한다면.......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나는 권하겠다.

 

  

 

 

 

 

 

 

 

 

 

 

 

 

 

 

 

 

 

 

 

 

 

 

 

  몰타섬의 거석문화(Megalithic Temples of Malta)를 대표하는 '간티야 신전(Ggantija)'이 교조섬에 있다.

  토끼풀 잎새모양인 2개의 타원형 방으로 나뉘어 건설된 신전은, 크기가 작은 남쪽 신전이 대략 기원전 2200 경에 지어진것으로 보인다.  신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북쪽 신전은 기원전 3000~2200년 경으로 추정되는 몰타의 청동기 시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대단히 귀중한 유물이다.

  현재에 최고의 선사시대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켐브리지 대학의 로드 렌프류 교수는 간티야 신전을 보고나서는 '이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기념물' 이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과 같은 건축기술과 장비와 재료들이 없던 시절에........  5000년 전에 말이다.

  왜?

  어떻게?

 

 

 

 

 

 

 

 

 

 

 

 

 

 

 

 

 

 

 

 

 

 

 

  아쉬운대로 험악한 날씨속에섣고 무사히 고조섬 여행을 마칠 수가 있어서 다행스런 하루였다.

  정말로 강행군이었다.

  감히 말하건데......  고조섬을 투어버스를 이용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처럼 하루에 이렇게 여러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오늘의 이 힘듬 또한 시간이 지나면 또 아쉬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일은 좀 여유롭게 몰타를 즐겨보기로 할까?

  챠밍여사와 나의 여행에서 그런 일들이 가능하기는 할까?

 

 

 

 

 

 

 

 

 

   ---  남은 몰타 여행기는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