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의 랜드마크이자 자존심은 뭐니뭐니해도 (발레타 산 조반니 대성당) 이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대성당을 (요한 기사단 대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콘스탄니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파죽지세의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대제의 통치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술레이만과 오스만 제국의 목표는 전 유럽을 점령하여 이교도(기독교)들의 영토를 모두 이슬람화 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그 성스러운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듯이 몰타를 완전하게 점령해야만 했다.
2백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에 요한 기사단에 의해서 막대한 피해를 이미 충분하게 경험했던 오스만 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쫓겨간줄 알았던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의 영토에서 지중해로 나아가는 지척의 길목인 로도스 섬을 차지하고는 오스만의 해양 진출을 차단하는 바람에 입은 손해 또한 어마어마 했다. 전 유럽을 점령하여 이슬람화 하자면 반듯이 해상으로 진출하여 물자를 운송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육지로 군대가 진출하고, 무기와 식량은 해상을 통해 꾸준히 보급시켜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헌데 가장 중요한 길목에 떡 버티고 선 요한기사단의 함선들이 번번히 오스만의 함선과 무역선들을 나포하고 침몰시켜 버렸다.
비잔틴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풍운아 메메트 2세는 급기야 전군을 몰아 로도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성채에 들어앉은 요한 기사단은 요지부동이었다. 끝내 메메트 술탄은 로도스를 포기했다. 지중해를 통한 유럽으로의 진출을 단념해야만 했다. 오스만 제국 군대가 치명적인 패배의 상처를 안고 이스탄불로 철군한 것이다.
그 충격과 여파는 너무도 컸다, 심지어 메메트 2세는 죽으면서 '다시는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를 공격하지 말라'고 까지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30년이 자나 메메트의 손자인 술레이만 대제는 또다시 오스만의 전군대를 동원하여 로도스를 공격했다. 철저히 사전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치욕을 씻을 차례라 생각했다. 참혹한 살륙전이 벌어졌고, 양쪽이 모두 치명상을 입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요한 기사단도 전멸하고, 오스만 제국의 존립 자체도 장담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게되자 양측 사이에는 결국 최종적으로 협상이 이루어졌고,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에서 안전하게 철수를 보장받는 선에서 전쟁이 끝났다.
그후로 무심하게 세월은 또 30년이 흘렀다.
오스만 제국의 정복왕 술레이만 대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유럽을 침공했다.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거쳐 이탈리아와 독일을 넘볼 수 있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이제 유럽을 점령하는 일은 다소 시간이 걸릴 뿐 더 이상이 장애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유럽은 오스만 군데에 대적할 수 없을만치 분열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오스만 제국의 원정군은 본국으로 부터의 해상을 통한 보급물자가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요한 기사단이 또다시 오스만 제국군대의 발목을 잡고 나섰다.
그곳이 바로 여기 몰타였다. 사라졌던 요한 기사단이 몰타에 요새를 만들고 과거 로도스에서 보다 더 강력하게 전력을 갖추고 오스만의 해상군사력을 하나하나 무력화 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요한 기사단이 존재하는 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략은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술레이만의 오스만 제국은 모든 군사력을 몰타 섬으로 돌렸다. 발칸에 진출한 막강 육군도 말머리를 몰타로 되돌렸다. 사생결단의 순간이 닥친 것이다.
1565년 3월 말......... 지중해의 한쪽에서 유럽의 운명을 건 요한기사단과 오스만 제국과의 한판 전쟁이 벌어졌다.
다양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제각각 근거와 숫자 집계가 다르지만....... 술레이만이 동원한 오스만의 최정예 부대는 약 5만명으로 기록되었고, 몰타 방어군은 요한 기사단원 5백명에 섬 주민들과 지원병을 합쳐서 약 6천백명으로 집계된다. 30년 전 처럼 이번에도 양쪽 군대간의 전력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5월 18일에 시작된 전투는 같은 해 9월 하순에 가서야 끝이난다. 결론은 술레이만 대제의 오스만 군이 패하고 퇴각한다.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 '라 발렛트'와 요한기사단이 마침내 유럽과 기독교를 사수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1백이십명의 요한 기사단원이 사망했다.
그들의 시신을 안치하고 고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것이 바로 (산 조반니 대성당) 이다.
이렇게 역사를 되돌이켜 볼 때 요한 기사단은 몰타의 자긍심이자 몰타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산 조반니 대성당은 요한 기사단의 무덤이다. 몰타는 그들의 성채였으며 생활터전이었으며 그들의 뜨거운 심장이었다.
'Saint_John's_Co-Cathedral(성 요한 대성당)'의 1백오십년 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외관과 별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라틴어로 '산 조반니'로 불리는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서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교회가 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전 중세시대의 말기에 이런 현상이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차차 설명할 기회가 있을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에도 '사도 요한(요한복음 저자)'에게 헌정된 교회는 아직 보지 못한것 같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 처럼 '사도 마가(마가복음 저자)'에게 헌정된 교회는 여럿 있음에도 말이다.
'산 조반니(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교회들은 나름 아주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몰타 발레타의 산 조반니 성당, 피렌체의 조반니 세례당(단테가 세례를 받은). 그리고 피사의 조반니 세례당 등이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세례자 요한에게 헌정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교회는 아마도 로마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Laterano)'일 것이다.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성당이자, 이 세상의 모든 카톨릭 신자들로부터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는 대성당이다. 카톨릭 로마 교구의 주교자 성당이며, 로마 교구의 주교는 교황이다.
이렇게 설명하자면 혹, '바티칸을 잘못 설명하는게 아니야?' 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결코 아니다. 모두가 사실이다. 바티칸은 교황이 거주하는 시설이자 카톨릭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고, 구세주의 후계자이자 대리인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는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밖혀 순교하고, 그의 무덤이 있는 세계 카톨릭의 성지이지만, 단 한 곳.......'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어느 교회도(바티칸 조차도) 라테라노 교회의 지위에만은 범접할 수가 없다. 이는 바티칸도 분명하게 인정하는 바이다. 이 세상 모든 카톨릭 교회의 어머니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곳엔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뿔이 난 모세상'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와 사촌간(성모 마리아의 조카) 이었던 '세례자 요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존경은 유독 남달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와!!!
대성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가장 먼저 여행자를 짙누르는 강한 압박감은 사방으로 온통 금박을 입힌 그 화려함에 서 오는 것이다.
마치 교회 자체가 하나의 금덩어리 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 많은 금이 어디서 나온거야?'
크흐흐흐흐흐흐.........
몰타는 금(金)이 나지 않는 나라다.
라임스톤을 캐는(잘라내는) 채석장과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 외에는 광산이라고는 아예 없는 나라다.
어디 금 뿐인가? 몰타는 어떤것이든 제대로 변변하게 나는 것이 없는 나라이다. 우리나라 울릉도는 더덕과 명이나물이라도 난다는데.....
몰타가 가진것이라고는 돌(화산암)과 바다와 더하여 파란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나라다. 숲 이라는게 없다. '어퍼 바라카 정원'이 몰타에서 가장 큰 숲이라고 한다면 이해갈 될까? 아 참..... 대신 선인장은 사방에 널려있다.
오늘날에도 인구 45만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몰타라는 나라는 생활 물자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90km 떨어진 시칠리아에서 대부분의 물자를 조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실정이었으니...... 중세라고 달랐을까?
로도스에서 좇겨 온 요한 기사단은 한동안 키프로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을 떠돌아 다녔다.
아랍의 침공(오스만)으로부터 유럽과 기독교를 지켜 주었음에도...... 유럽의 교황과 봉건 영주들은 그들을 경외시하고 두려워 했다. 혹 그 용맹한 기사들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들의 영지(국가)를 빼앗으려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두려워 했다. 하지만 이슬람으로 부터 유럽을 구해주었다는 성전에 대한 고마움은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과 현실은 언제나 처럼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떠도는 요한 기사단에게 형식적인 고마음의 표시로 물자는 제공했지만, 아무도 그들이 머물 영토를 내놓지는 않았다. 교황도 마찬가지 였다. 상황이 이쯤되자 요한 기사들의 심기도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교황과 영주들이 밀담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스페인의 카알 5세 대제)가 자신들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 옆에 작은 무인도나 다름없는 몰타를 요한 기사단에게 불하했다. 사용료는 매년 매 한마리...... 여기에서 유명한 '말타의 매'라는 소설이 탄생하고 영화가 만들어 진다. 커크 더글러스 주연)
그렇게 해서 요한 기사단은 몰타로 왔다.
로도스 공방전을 이끈 그랜드 마스터 '아이슬 아담'은 반듯이 오스만제국은 또 다시 바다를 통해 유럽을 침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여 몰타에 정착함과 동시에 로도스 섬의 요새를 능가하는 철벽 방어진지 구축에 돌입했다. 로도스가 중세식 전투에 맞서기 위해 세어진 요새였다면, 몰타는 대포라는 새로운 공성무기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새로운 개념의 최첨단 요새였다.
하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작업이라도 졸졸이 굶어가면서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 이상 유럽의 교황이나 영주들로부터 지원도 오지 않았다.
거주할 곳을 주었으니 자신들의 소임은 다했다는 표현이었다.
사방으로 너른 바다이니 매일 고기나 잡아다 먹으며 살 수 있을까?
아이슬 아담과 요한기사단원들은 더 이상 교황이나 유럽의 영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바다로 나섰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극히 높은 곳의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서기 1531년, 마침내 요한 기사단의 함선 서너척이 씩씩하게 지중해 바다로 나섰다.
마지못해 그들이 택한것은 해적질이었다.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의료행위를 베풀던 자선 구호단이 절정으로 치닷는 참혹한 전쟁을 목격하면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용맹한 전투 기사단으로 변모했다.(사실 템플 기사단의 용맹과 활약은 요한 기사단에 비교한다면 견줄 바가 못된다. 템플 기사단은 이미 시작에서 부터 다른 목적을 가진 단체였을 뿐 실제 십자군 전쟁에 기여한 바는 별로 없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비잔틴 제국의 멸망을 목격했다. 위기에 몰린 기독교와 유럽을 구하기 위하여 로도스 섬에서 막강한 오스만의 군대를 맞아 두 번의 처절한 전쟁을 치루어냈다.
그런 그들이 로도스를 빼앗기고 약 7년간을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그들의 업적을 칭송은 하지만 유럽의 그 누구도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7년만에 그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겨우 몰타라는 영토에 가까스로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유럽과 교황은 그들을 내쳤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들은 마침내 스스로 생존하기 위하여 다시 바다로 나섰던 것이다.
명분은 십자군 당시에 교황이 내렸던 칙령에 근거해서 였다.
'이교도는 사람이 아니다. 이교도는 모두 짐승이다. 그럼으로 이교도를 죽이는 일은 살인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저 못된 짐승을 제거하는 일일 뿐이다. 세상에 뿌려진 못된 짐승들을 모두 제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라고 교황의 칙서는 십자군을 모집했던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해적질을 하나의 좋은 사업 수단으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요한 기사단의 첫번째 목표는 '바르바리 해적' 이었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부터 지중해는 온통 이슬람의 바다였다. 유럽의 지중해 무역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있던 시기였다.
이 때에 등장한 것이 바로 바르바리 해적단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 사람들로 구성된 해적이었다.
소아시아에서 성지회복을 주장하는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반대편 리베리아 반도에서도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거세게 '카톨릭에 의한 국토 회복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유럽의 수많은 영주들이 군대를 이끌고 여기에 참전했다. 그 결가로 마침내 그라나다를 탈환하면서 유럽 영토에 거주하던 마지막 이슬람 세력까지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로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을 몰아 낸 이사벨 여황은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유대교와 이슬람 교인들을 종교재판대에 세우고 처참하게 살륙하기 시작했다. 유럽에 정착했던 유대인과 이슬람인과 제 3세계인들이 대거 아프리카로 도망쳤다. 이렇게 아프리카로 쫓겨간 사람들 중에 튀니지 지역에 몰려 든 이슬람 사람들이, 역시 먹고살기 위하여 해적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점차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한 해적들은 스스로를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바르바리 해적단'이라고 불렀다. 이 해적들의 무대는 지중해 전역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세력은 유럽 연합군의 세력을 넘보게 되었다.
이제 지중해는 이슬람의 바다가 되었고, 또한 바르바리 해적단의 사업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하루아침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땅이면 땅, 바다면 바다에서 저승사자급의 용맹을 떨치던 (요한 기사단)의 함선이 지중해에 나타난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전역을 몸서리치게 만들던 바르바리 해적단이었지만, 배를 만들고 배를 항해하고 요새를 쌓고 사움질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하는 요한기사단 앞에서 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2년 정도가 지나자 지중해는 여전히 이슬람의 바다였지만, 그 안에서는 요한기사단의 사업만 번창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르바리 해적은 거의 궤멸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붉은 바탕에 하얀 뿔달린 십자가가 새겨진 깃발을 보는 순간 유럽의 기독교 교역선들은 함성을 지르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반면 이슬람의 배들은 스스로 배에 불을 지르거나 입에 칼을 물고 스스로 바다로 뛰어 내렸다.
아랍권의 역사서에는 이 당시의 요한기사단의 모습이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 보다도 훨씬 잔혹했다' 라고 여러곳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권의 배를 만나면 항로를 알려주고 호위를 해주고 안전하게 보내 주었다. 그러면 그들은 기사단에게 식량이나 물자를 선물했다. 반면 이슬람의 배를 나포하면 귀족들은 인질로 잡아서 훗날 후하게 몸값을 받고 풀어 주었다. 쓸만한 배를 나포해서 기사단의 함선으로 개조했고, 대부분의 배와 선원들은 가진 재화와 식량들을 약탈한 뒤, 배의 밑창에 구멍을 뚫어 지중해 바다에 그대로 수장시켜 버렸다.
그렇게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요한 기사단의 사업이 무한 확장되던 가운데.......... 지중해를 지나가던 대단히 호화로운 이슬람의 상선 서너척을 나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배에는 이스람의 귀족들이 타고 있었는데 바로 술레이만 술탄의 조카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가 이슬람 상권을 지배하고 있는 막대한 부의 소유자였다. 배에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이슬람 문화권의 보물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요한 기사단은 이 귀족들을 모두 인질로 잡아서 이스탄불에 어마어마한 몸값을 요구했다. 재화는 약탈하고 배는 이슬람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선원들과 함께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혀 버렸다.
모든 이슬람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 군대를 이끌고 직접 발칸반도에 나가있던 술탄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술탄이 주재하는 제국회의가 열렸다.
'더 이상 요한 기사단을 이대로 묵과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둘러 몰타를 침공할 전투태세를 갖추라는 술탄의 명령이 전 이슬람권으로 전달되었다. 몰타 공방전의 서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한 기사단 대성당(산 조반니 대성당)은 1572년에서 1577년 까지 약 5년 동안의 공사에 의해서 완공되었다.
요한 기사단의 51번째 그랜드 마스타 였던 '장 요한 라카시에르'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대성당 건축은, 로마 카톨릭 교구내의 몰타 대성당과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의 역활을 겸하는 두 가지 용도의 건축물로써,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카톨릭 성당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리하여 완성 당시의 명칭은 '성 요한 공동 대성당' 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특히 피렌체나 로마에서는 한창 르네상스의 열풍이 일어났고 이 여파는 온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이 멀고먼 고도 몰타에서는 아직 그런 새로운 문예사조나 유행의 열풍에서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만큼 처음 지어진 대성당은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 양식에 적합한 아주 소박한 규모와 모습의 성당이었다.
그러던 이 시기에 아주 미묘한 사건이 벌어졌다.
로마 교황청이 몰타의 카톨릭을 관장하게 하기위하여 주교를 파견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몰타에는 요한 기사단 소속의 주교가 있었다.
교황은 몰타의 요한 기사단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자 하는 욕심을 가졌고, 사전에 이를 간파한 요한 기사단은 이를 거절했다. 미표한 갈등이 점차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2백년 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치르면서 요한 기사단은 로마카톨릭의 온갖 만행을, 특히 교황의 그릇된 인식과 끝이없는 욕심과 탐욕으로 이교도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기독교인들까지 무수히 많이 희생기켰으며, 더 나아가 유대인들과 같은 기독교도인 동방 정교회의 사람들을 십자군의 손으로 무참하게 학살하는 상황을 수도없이 목격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절대 권력에 대한 교황의 분에 넘치는 탐욕으로 끊임없이 군주(영주. 왕)들과 분쟁을 일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이런 교황청의 오만과 폭정과 타락에 신음하던 유럽인들 사이에 어느때부터인가 서서히 새로운 기독교 운동(종교 개혁.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번져나가고 있음을 교황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위기의 순간에 교황에게 요한 기사단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놓칠 수 없는 바람막이 같은 존재였다. 지옥에서 불어오는 광풍과도 같은 이슬람 세력(아랍과 오스만의 침략)에 기독교와 유럽을 구해준 것이 벌써 몇 번이었던가?
혹 요한 기사단이 유럽의 군주들과 결탁하여 종교 개혁에 가세하게라도 된다면......... 교황과 로마 카톨릭의 운명은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사태로 전락하게 될것이다.
하여 교황은 몰타라는 영토를 자신의 속지로 삼고 요한 기사단을 파견 주교의 휘하에 둠으로써 교황청의 수호군대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한 기사단의 생각은 달랐다. 유럽의 기독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은 당연하였으나, 결단코 부도덕하고 타락한 세속의 군주만도 못한 교황의 휘하에 들어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은 끝까지 파견된 주교를 거절했다. 교황의 휘하에 들어갈 수 없노라는 적극적인 표현이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 소환령이 떨어졌다.
라카시에르 그랜드 마스터는 직접 로마로 향했다. 교황과 로마카톨릭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나님으로 부여받은 자신들의 사명을 거듭 피력했고 유럽의 기독교를 이슬람으로부터 끝까지 지켜내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사명을 다하는 기사단은, 이미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은 바 있고, 그 후로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분쟁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알고 있는만큼....... 자신들은 하느님에게 속해 있는 기사들이지, 세속의 어느 군주나 특정 종교지도자에게 예속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소신을 피력했다.
교황의 분노를 극에 달했으나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이상 다그치게되면 요한 기사단을 적으로 남겨두게 되는 결과를 낳게된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는 이들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가까운 곳에 두면서 늘 감시의 눈초리로 지켜볼 수 밖에 더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엉뚱한 곳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요한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라카시에르가 로마를 방문하던 중에 그만 현지에서 사망한 것이다. 사망원인이야 노환이었지만, 그 노인을 굳이 로마까지 호출한 교황과 로마카톨릭에 대한 반감이 급속하게 팽창해져 갔다. 라카시에르의 시신이 몰타에 도착하던 날, 모든 기사단원과 주민들이 몰려나와 땅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결과는 종교적인 자주독립의 성취로 나타났다. 교황이 파견한 주교가 몰타에 사무실을 두고 머물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루런 권한도 없었다. 몰타 스스로 기사단 회의에서 주교를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실행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몰타는 요한 기사단의영토이며 모든것은 그랜드 마스터가 직접 지휘 통치한다는 뜻이었다.
더하여, 교황과 로마카톨릭에 대한 반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라카시에르 단주를 호위했던 일부 기사단원들은 로마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고 있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던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로마의 교황청(바티칸)을 실제로 목격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교회를 넘어서 문화적인 보물창고와도 같았다. 속된 표현으로 놀라우리만치 멋져 보였던 것이다. 그 광경에서 그들은 신을 찬양하는 새로운 표현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사단 지휘부와 주교에게 로마에서 보고 들은 실상을 모두 전했다.
가뜩이나 교황과 로마카톨릭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기사단 지도부는 선언했다.
'(산 조반니 공동 대성당)을 새롭게 만들어 요한 기사단의 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새롭게 나타내자.'
어떻게?
'무조건 로마 교황청(바티칸) 보다는 삐까빤짝하게.........'
이렇게 해서 '산 조반니 대성당(요한 기사단 대성당)'은 대대적인 내부공사가 시작되었다.
약 30년에 걸쳐서 건물의 외형은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지만 내부 구조를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지금 우리가 방문해서 목결하는 교회의 모습이 이 때, '알로프 드 위그나트' 54번째 그랜드 마스터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으니 1602년 경이었다.
그리고 이때부너 다시 약 100년에 걸쳐서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산 조반니 대성당)이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에서.......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서서히 르네상스의 찬란한 꽃이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회화에서는 이 시기에 (매너리즘)의 시대가 잠시 도래하고, 이어서 바로크 미술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새롭게 탄생하게 된 바로크 미술이라는 것이 어쩌면 여기 몰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산 조반니 성당'과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마침내 산 조반니 대성당은 새롭게 완공 되었다. 지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함의 극치를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었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바로크 양식의 최고의 건축물'로 지금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된것이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최고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이 (산 조반니 대성당)이다.
기사단은 이 성당의 내부 공사를 위해 멀리 이탈리아 본토 북부지방의 칼리브리아에서 건축가이자 미술가였던 '매티아 프레티"를 특별히 초청했다.
프레티는 제단 옆과 아치형 천장에 가득 세레 요한의 생애를 직접 그려 넣었다. 그 벽화와 천장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훗날 이 기법이 다른 화가들에 의해서 다시 새롭게 드러나게 되지만, 그는 그림의 연결 부위와 받침이나 액자 같은 틀을 이용해 마치 3차원의 영상을 보는듯한 초유의 미술적 실험을 감했하였다. 그림 자체의 틀에 들었어야 할 그림자가 액자나 배치를 구분짓는 틀 위에 슬며시 다른 영역을 침범하듯 또는 드러나듯 그린 것이다. 그림자와 독특한 배치를 이용하여 3차원의 효과를 나는 처음으로 조반니 대성당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또한 벽면을 장식하는 조각의 경우, 대부분은 부분적으로 나누어져 다듬어지고 완성된 조각들을 스투코(벽면)에 붙이면서 마치 한덩어리의 작품처럼 매다는 방법이 대부분인데, 프레티는 아예 커다란 돌덩이를 기둥이나 벽면에 매달아 놓고 세세하게 하나하나씩 통째로 조각해 냈다고 한다. 모르면 그저 그만일 터이지만,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조각을 와성했다고 알았을 때, 그 감동은 이전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다. 여기에는 몰타에서 생산되는 라임스톤(화산석)의 영활이 대단히 중요했다. 화산암은 연하고 부드러워서 섬세한 조각에 잘 맞았다. 대리석이었다면 훨씬 힘이 들었을 것이고, 화강암이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산 조반니 대성당은 제단이나 벽이나 천장 못지않게 바닦까지도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어쩜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무늬 대리석을 자르고 다듬어서 기하학 문양으로 가득채운것 같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바닦을 만들었을까?
하지만 이 바닦들은 아름답게만 꾸미려고 대리석으로 만든 치장품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요한 기사단원들의 무덤인 것이다. 이곳에는 약 400명의 요한 기사단원들이 잠들어 있다. 무덤 덮개인 대리석 바닦에는, 잠든 기사의 출신 가문 휘장을 비롯해 그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문장과 장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제단에 가까울 수록, 그리고 크기가 클 수록 유명한(뛰어난 업적을 남긴) 기사라 보면 된다.
로도스 공방전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요한 기사단을 몰타로 영도한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 아이슬 아담이 산 조반니 대성당 지하에 잠들어 있다. 아담의 진정한 후게자라 할 수 있으며 몰타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또 한명의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대성당 앞에 조각상) 라 발렛트도 지하 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 외에도 대성당을 완공한 위그나코트 같은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들은 모두 대성당의 자하에 잠들어 있다.
그 외에도 요한 기사단이 수집하고 소유했던 수많은 보물들이 여기 대성당의 지하공간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닌 소중한 보물들인지, 또 무슨무슨 보물들이 이곳에 소장 보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점령을 위해 진군하던 중에 몰타를 점령하면서 많은 모물들이 약탈되고 사라졌다. 하지만 일부 지각있는 기사들과 주변 국가들의 도움으로 많은 보물들은 인근 국가로 피신하였다고 대부분 근대에 들어와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일부는 마음이 변한 주변 국가들 중 일부가 덥썩 집어 삼키고는 시침을 뚝 뗀채, 자신들의 보물인양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하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두 명의 남자가 진지한 표정과 태도로 지하통로 계단벽면의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지하 공간을 구경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니....... 지금으로서는 모든 관람이 한동안 불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지하 전시실에서 매우 중요한 복원공사가 한참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한다. 머지않아 공개를 하겠지만 당장으로서는 기간을 장담할 수가 없단다. 내가 그들의 작업에 적극적인 호감을 보이고, 나름 이런 분야에 지대한 관심이 있음을 알아 챘는지, 작업 내용은 불가하지만 표면적인 자신들의 작업모습은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면서 서너가지 대성당의 감추어진 역사에 대해서 짧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유물의 훼손과 복원 심지어는 도난에 대한 이야기까지가 포함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관리와 복원에 대단히 신중하고 엄격한 제한속에서 비밀리에 비공개로 모든 작업들이 주로 이루어진다는 부연 설명도 있었다. 하여 여행 후에 그가 해준 이야기들을 찾아서 검색해 보니...... 실제로 요한 대성당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수난사를 어느정도씩은 새롭게 알 수가 있었다.
이분들의 친절한 배려와 일에대한 진지함과 열정, 그네들의 숭고한 직업정신에 열렬히 갈채를 보내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역사를 강의하는 선생이나, 대학 도서관장이나, 저들처럼 고고학 복원사가 되었으면.........
--- 필레모스 성모상 진품 사진.
'성 요한 대성당'은 제단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9개의 채플(예배당)을 가지고 있다.
8개의 예배당은 유럽의 전지역에서 자원한 기사단원들의 출생지 별로 구분하여 각기 다른 8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8개 봉건국가)를 상징하며, 그 지역의 수호성인에게 봉헌된 예배당들이다.
아라곤 랑그 예배당은 사악한 용을 무찌르는 세인트 조지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며,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의 한 축을 이룬 페르디난도 왕이 통치하는 스페인 지역에서 온 기사들을 위한 예배실이다.
카스티야. 레온. 포르투갈 랑그 예배당은 같은 스페인 지역이지만 유명한 이사벨 여왕이 다스리던 지역으로 성인 제임스를 모신다. 이렇게 같은 스페인 국가에서 온 기사단들 이지만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에 따라 지역적으로 언어의 사용이 다른(우리네 토속 사투리 처럼) 출신지역의 기사들을 제각각 구분하여주었던 것이다.(여기에서의 랑그는 영어 'Language'의 좀 더 넓은 포괄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되겠다) 거기에 새롭게 독립한 포르투갈 지역을 더 하였다.
앵글로 바바리아 랑그 예배당은 성 찰스 로메오에게 봉헌되었으며, 영국. 스코틀랜드. 스칸나비아 반도 지역의 기사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귀한 보물을 상당히 많이 보유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나폴레옹군이 침공하면서 보물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다.
프로방스 랑그 예배당은 이름처럼 프랑스 남부 지역의 기사들을 위한 장소로서 사탄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대천사 미카엘을 모시고 있는 예배당이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회심을 하게되는 사도 바울의 그림이 걸려있는 프랑스 랑그 예배당은 이름 그대로 프랑스 출신의 기사들을 위한 장소이며, 사도 바울을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그림은 대성당 내부를 인테리어한 마티아 프레티의 작품이다.
이탈리아 랑그 예배당은 알렉산드리아의 성모와 성녀 캐서린에게 헌정되었다.
몰타 출신의 화가 스테파노 에르아르디의 미술작품 '동방박사의숭배'가 걸려있는 곳은 독일 랑그 예배당으로 독일 지역 출신의 기사들을 위한 장소이다.
이렇게 기사들의 출신 지역과 문화와 풍습과 언어 사용을 달리하는 상황들을 고려하여 특별하게 구분지어 놓은 예배당은 모두 8개 이다. 하지만 대성당에는 분명하게 9개의 채플이 존재한다. 위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나머지 하나의 예배당은 어떤곳일까?
'필레모스 성모 예배당' 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채플은 요한 기사단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성소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시작은 의료 봉사를 수행하는 단체에서 시작하였으나, 점차 칼을 들고 직접 전투에 뛰어드는 전사로 변모한 요한 기사단은 '서례자 성 요한'을 수호 성인으로 받드는 단체였지만, 십자군 전쟁터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끝난 이후의 유럽사회에는 아주 조금은 색다른 이상 기류와 같은 신앙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선과 악을 엄격하게 구분 지으며 분노를 표현하고 엄한 징벌을 망설이지 않는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엄격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세상에 만연해 있는 악의 화신인 사탄들을 멸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미카엘 대천사나 다른 천사들도 온화함이나 따스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강력한 전투와 징벌의 화신들로 늘 두려움의 대상들이었다. 예수 전후의 세상사람들의 신앙관에는 전설속의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눈부신 투구와 갑옷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백마를 타고 나타나 번뜩이는 칼솜씨로 악마들을 단카라에 도륙내고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을 창조하는 그런 구세주를 꿈꾸고 열망하였던 것이다. 그 역시 막강한 능력과 엄격한 꾸짓음과 분노와 징계를 내리는 두려움의 대상 같은 존재였다.
비록 사랑과 평화와 화해와 배려를 가르치며 이 세상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구세주을 믿고 따르게 되어 갖게된 기독교 신앙이었지만........ 중세 기독교(로카 카톨릭)가 자신들만의 어떤 이득을 위하여 오랜세월 가르치고 강요해 왔던바처럼, 신은 언제나 엄격하고 징벌 내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절대 복종과 헌신을 강요하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2백년이나 지속되면서 참혹한 전쟁터에서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느날부터인가 서서히....... 엄격하고 두렵기만한 존재인 하나님 보다는........ 동정녀의 몸으로 사내 아이를 낳았고, 대단히 특별한 존재로서 성장을 했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고난과 역경속에 끝내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죽은 아들을 십자가에서 끌어내려 부둥켜 안고서 눈물로서 통곡을 하던 한없는 모성애를 보여 준 '성모 마리아'를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가족만큼이나 그리워하고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이 서서히 생겨나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작은 마침내 십자군 전쟁 이후의(12세기 이후) 유럽 전지역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또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는 교회들이 마구마구 생겨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전투에 임하는 기사들은 가장 먼저 성모 마리아 앞에 엎드려 '어머니의 손길 같은 자비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언제 누가 그렸는지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잔틴을 위하여 오스만 제국과 벌이는 전쟁터의 한복판에 어느날 부터인가 요한 기사단 캠프에 성모 마리아가 등장했다.
가로 44cm x 세로 36cm 의 작은 목판 위에 단순한 색감의 도료를 달걀 노른자와 곱게 섞어서 칠한 작은 목판화가 등장했다.
요한 기사단이 이동하고 머무는 곳에는 항상 이 목판화 속의 성모 마리아상이 함께 했다. 창과 칼이 부딪치고 포탄이 떨어져 폭발하는 전투에서도 목판화 속의 성모 마리아는 늘 기사들과 함께 있었다. 요한 기사단의 사기는 늘 충전하여 하늘을 뒤덥었고 그네들은 생사를 초월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 앞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많은 기적같은 승리가 펼쳐졌다. 이제 성모 마리아 상이 그려진 작은 목판화는 요한 기사단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절대적 신성을 지닌 성물(聖物)로 여겨지게 되었다.
요한 기사단의 눈부신 활양에도 불구하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함락되었고 비잔틴 제국은 몰락했다.
비잔틴의 영토에서 쫓겨난 요한 기사단은 지중해로 진출하는 초입인 로도스에 새롭게 진을 치면서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목판화를 보관하기 위하여 교회를 지어 헌정했으니 바로 로도스 섬(Rhodes)의 '필레모스 수도원(Philermos Monastery)' 이다. 하여 이후로는 이 성모 조각상을 '필레모스의 성모'라 기적을 행하는 신비로운 기독교 성물로 모셨다.
두 차례에 걸친 로도스 공방전 끝에 다시 요한 기사단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서 필로모스의 성모는 이들을 따라 함께 몰타로 왔다.
몰타에 둥지를 튼지 수십년이 지나 몰타 공방전이 오스만 제국과 다시 벌어졌고 끝내 요한 기사단의 승리로 끝이나고 이를 기념하고 숨진 기사들을 위해 '산 요한 기사단 대성당(산 조반니 대성당)이 건축된 이후에 비로소 영원히 거처할 곳으로 이곳, 성 요한 기사단 대성당내 '필레모스 성모 채플'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 오기까지의 보관에 대해서 상세하고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견해로는 엠디나의 성 바울 성당에 모셔져 보관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필레모스 성모상'은 요한 기사단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어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 오자 더이상 이 성모상은 안전할 수가 없었다. 이미 기적을 행하는 성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단은 성물의 안전을 위하여 우방이었던 러시아 제국 황실로 반출하였고, 상트페테스부르그 근처의 모처에 숨겨 보관했다.
이 성모상을 너무나도 흠모한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스 차르는 이 나무판 성모상에 루비와 다이아몬드가 달린 왕관을 씌우고 두개의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된 목걸이를 만들어 붙였다. 날고 초라했던 나무 목판화가 화려하게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고만 것이다.
그랬음에도 목판화 속의 성모 마리아상이 점점 연약한 상태로 훼손되어 가자 차르는 이와 똑 같은 사본을 만들도록 하였다.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교회가 원본을 회수하였고, 안전을 염려한 러시아 정교회는 서둘러 유고슬라비아 왕실에 보관을 의뢰했다. 2차 세계대전 도중에 이 유물을 두고 열강들의 각축전이 벌어 졌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유고슬라비아 자주독립군 부대가 성물을 접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우여곡절 끝에 현재 원본은 몬테니그로의 국립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왼쪽 어깨쪽으로 약간 고개가 기울어져 있는 다분히 비잔틴 스타일의 긴 코가 두드러진 타원형의 성모상을 몰타는 강력하게 되돌려 줄것을 거듭 요청하고 있지만.......
몬테니그로 쪽에선 사본을 만드는데 돕기 위하여 원본을 개방할 준비는 할 수 있지만 원본을 회수해 줄 생각은 전혀 없어보인다. 하여 로도스의 원래 보관장소였던 필레모스 수도원과 몰타의 필레모스 채플엔 이젠 기념비적인 추모 장소로만 남아 있다.
이렇게 9개의 채플을 모두 둘러보고 출입구를 향한 왼쪽으로 마련된 커다란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면........
몰타와 발레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장소가 '요한 기사단 대성당' 이라고 한다면........
그 '요한 기사단 대성당'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대단히 성스러운 장소가 나타난다. 온통 벽을 차지하고 있는 아주 커다란 벽화와 함께.......
몰타의 (미켈란젤로)가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이루 형용할 수없을만치 압도적이며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다.
'세례자 요한의 참수.'
'세례 요한의 참수'는 대단히 큰 그림이다.
가로 5.2m x 세로 3.7m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캔버스화로 거의 벽화수준의 대작이다.
등장인물의 표정과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하여 중심부분만을 조명한 위 사진과 달리 오른쪽의 창문에 두 사람이 더 있어서 총 7명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전체 그림에서는 음산하고 어두침침한 전체 공간이 너무도 커서 등장 인물들이 오히려 한없이 작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은 등장인물의 크기가 거의 실물 크기라고 보면 된다.
땅바닦에 엎드려 목이 잘려지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 잘려진 목을 받기 위하여 황금 쟁반을 들고있는 여자가 황홀하리만치 유혹적인 춤을 추고 나온 살로메 이다. 한때 요한을 흠모하기까지 했다는 헤로디아 왕비는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감싸안고 있다. 전형적인 터키인의 표정과 복장을 갖춘 간수는 형의 집행을 지시 감독하고 있다. 큰 칼로 요한의 목을 내리 쳐 죽음에 이르게 한 처형자는 다시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이제 막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서 쟁반 위에 올려 담으려 하고 있다. 창문에서 삐끔하고 밖에서 벌어지는 참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두명의 사내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그림은 화가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크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많은 그림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흡사 같은 화가의 작품인 시칠리아 섬 시라쿠사의 '성녀 카테리나의 매장'과 아주 흡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가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대하였을 때, 나는 그의 그림이 '렘브란트'의 그림이라고 생각했었다. '렘브란트에게 이런 작품도 있었나?' 했을 정도였다. 그때까지 나는 이 화가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도 아는 바도 없었던 것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어디서든 가장 많이 전시회가 열리고, 학술 세미나를 열게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많은 관람자들이 줄을 지어 찾아다니는 화가가 바로 이사람이다. 이번 여행기가 동안에도 이스탄불과 몰타와 시칠이아 곳곳에서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세상 어디를 가도 이 화가의 그림을 만날 수 있을 정도이다. 피렌체에는 이 사람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진품에 버금가게 모사해 주는 세게적으로 아주 유명한 아틀리에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진이 아닌 그 모사품의 가격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시라쿠사를 지나 로마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회화'를 이야기 하자면 어김없이 다시 등장해야만 하겠지만........ 본격적으로 처음 등장 했고, '세례 요한의 참수'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는만큼 슬쩍 이 화가에 대해서 들여다 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세례 요한의 참수'는 몰타의 산 조반니 대성당에서 몰타 최고의 보물로 매우 소중하게 보관되고 다루어 졌지만, 사실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요즘의 미술관 전시실 처럼 공기의 온도와 밀도와 습도까지 감안해서 보관해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의한 산화작용과 퇴색되어가는 빛깔은 어쩔 수가 없었다. 1955년에서 56년 까지 로마에서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어우르는 대대적인 회화 기획전이 열였다. 이 중요한 전시회에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이 화가의 작품이 삐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획자들은 그 중에서도 이 작품 '세레 요한의 참수'를 꼭 전시하고 싶어서 오래 전부터 몰타 정부와 깊이있게 협의를 계속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심각한 상태로 훼손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여 주최측은 '세례 요한의 참수'를 최고의 복원 기술자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복원을 전제로 몰타로부터 반출 허가를 받아냈던 것이다.
전시기간 내내 가장 뜨겁게 조명을 받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화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열풍처럼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작품은 몰타로 돌아왔으나, 1995년 또 한번 외출을 하게 된다.
'세례 요한의 참수' 재복원을 피렌체에 있는 세계적인 복원 단체에서 맡아준 것이다. 그동안 복원 기술 또한 회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복원작업에서 또 한번 세상을 뜨겁게 달구게되는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진다.
훼손된 그림을 최대한 원복에 가깝게 복원하기 위해서 X-ray 촬영을 도입한 피렌체의 복원팀은 쓰러진 세레 요한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로 쓴 화가의 서명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400년이 지나도록 이런 비밀이 숨겨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20세기 초 로마에서 처음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을 때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던 사실이었다. 그만큼 이제 회화나 문화재의 복원 기술이 놀라우리만치 함께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흘린 피로 쓰여진 서명은 <f. michel> 이라 적혀있었으며, 이는 <Frater of Michelangelo>의 약자로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사' 그러니까 '요한 기사단의 기사 미켈란젤로' 라는 서명이었다.
화가는 분명하게 자신을 몰타에서 요한 기사단원으로 활동하던 미켈란젤로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나는 그를 '몰타의 미켈란젤로'라고 잠시 불러보기로 한다. 이는 지금으로 부터 약 400년 전이었던 1608년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보다 조금 더 오래전에....... 약 470년 전에 그와 아주 흡사한 일이 로마에서 벌어졌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피렌체 출신의 24세 청년이 실로 세상을 깜작놀라게 만드는 걸작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지금 바티칸에 전시되고 있는 <피에타>이다.
애초엔 교황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로마교황청에 들여 놓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젊은 청년을 못마땅하게하던 새로운 바티칸의 총공사 책임자였던 브라만테는 그 피에타가 막 등장한 앳된 천재청년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하여 '피에타가 먼 북방에서 온 별볼일 없는 조각가에 의해서 얼떨결에 우연히 탄생한 작품'이라는 소문을 로마 전역에 퍼트렸다. 마침내 이 소문을 들은 청년 조각가는 분노했다. 그 길로 망치와 끌을 가지고 바티칸으로 들어가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새롭게 손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손질은 다름아닌 피에타 성모상의 앞 옷주름에 글자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새겨 넣었다. <MICH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 : 피렌체에서 온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 라고 새겨 넣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직접 들어간 단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행위를 평생동안 깊이 후회하였다. 젊은시절 자신의 수양이 부족했음을 시인하고 뼈저리게 반성했다.
그런데 이 피에타에서의 서명에도 역시 미켈란젤로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미술사에서 대부분 단 한명의 미켈란젤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위대한 조각가로 (피에타)와 (다비드 조각상)을 남긴 피렌체의 천재이자 흔히들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미켈란젤로 였다. 화가로서도 단번에 첫 작품으로 (천지창조)라는 천장화를 그렸고, 이어서 (최후의 심판)이라는 벽화를 완성한 인류역사상 최고라 할만한 천재 예술가였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명의 다른 미켈란젤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바로 몰타의 미켈란젤로 이다.
19세기 말에서 시작해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비로서 몰타의 미켈란젤로는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금엔 이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모든 사랑들의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뉴 미켈란젤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를 알게된것이 십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내 경우엔 유독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좋아서 렘브란트를 찾아다니다가 만난것이 바로 몰타의 미켈란젤로 이다.
물론 지금은 사뭇 모든 관점이 달라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렘브란트에게서는 오로지 렘브란트만의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몰타의 미켈란젤로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몰타의 미켈란젤로에게서는 현대의 추상화를 제외하면......... 중세의 회화나 르네상스의 회화나 인상주의 표현주의 등등의 이 세상 모든 회화의 모든 요소들이 모두 들어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혹, 미술사에서 고대부터 있기는 하였지만....... 정물화라는 분야를 우리의 실생활과 회화의 한 장르로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화가가 누구인지 아시는지?
압도적이다.
인파에 휩싸이지 않고 한구석에서라도 가만히 올곳게 그림을 응시할 수만 있다면........ 느낄 수 있다.
화가 자신이 그렇게도 험난한 격정적인 인생을 살아올 수 밖에 없었고, 또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천장화나 벽화와는 다르게........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도 이렇게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으로 슬며시 나를 짖누른다.
시칠리아와 로마와 피렌체를 돌아보다 보면 우리는 이 화가를 다시....... 무수히 반복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나쳐 온 이스탄불에서도, 그리고 지금 여기 몰타에서도........ 그리고 다음 가게될 카타니아와 시라쿠사와 나폴리에서도 모두 이 화가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작금에 이만큼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고있는 화가가 또 있을까?
그는 이쯤에서........ 남아있는 그의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음을 느꼈을까?
산 조반니 대성당에는 '세레 요한의 참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그림과 마주해서 입구 옆쪽으로 크기는 조금 작지만 역시 너무나 유명한 '성 제로니모의 글쓰기'라는 작품이 걸려 있다. 카톨릭 역사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명의 제로니모 성인이 있다. 그 중에서 몰타의 미켈란젤로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성서 학자'이자 '성서 번역가'였던 (성 제로니모)를 말한다. 초기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히브리어로 성경이 쓰여졌고 다음으로 이를 그리이스어로 번역했었다. 그 이후에 성경은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가 이를 바탕으로 다시 지금의 영어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중에서 성 제로니모는 그리이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 학자' 였다. 몰타의 미켈란젤로가 성 제로니모를 많이 존경하고 추앙하였는지 같은 소재의 그림을 또 연작처럼 그렸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바로 산조반니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성 제로니모의 글쓰기' 작품이다.
157cm X 117cm 크기의 이 그림 또한 등장 인물은 거의 실물 크기로 등장한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화풍으로 가득한 이 그림 또한........ 반대편의 '세레 요한의 참수'에 뭍혀서 그렇지......... 충분히 보는 사람을 매료시키엔 너무도 충분하다. 혹 몰려드는 수많은 여행자들만 아니라면......... 이곳 전시관 하나만을 한나절쯤 빌려서 혼자 조용히 감상할 수는 없을까?(사람들이 자꾸 밀쳐서리.....)
좁은 계단을 통하여 2층 발코니에 오르게되면 왜 이곳이 바로코 건축의 최고 정수라 불리는지를 금방이라도 실감할 수 있다.
어쩜 이리도 화려하단 말인가? 어떻게 화려함으로도 엄숙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표출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는 '마티아 프레티'의 뛰어나고 멋진 솜씨를 대성당의 천장화에서 새롭게 느껴 볼 수가 있다. 이탈리아 본토 북부지방 칼라브리아의 타베르나 라는 작은 마을 출신인 그는 로마와 베네치아와 나폴리에서 활동하면서 나름 상당히 유명한 화가이자 실내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의 남달리 뛰어남은 역시 성당의 제단화나 벽화에서 나타나는 대형 프레스코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더도 덜도 말고 성 요한기사단 대성당의 천장화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프레스코화 화가인지, 왜 이 대성당이 바로코 양식의 진수인지를 여실히 느껴볼 수가 있다.
마티아 프레티가 대성당의 실내 장식을 위해서 몰타에 초빙되었을 때 몰타의 미켈란젤로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몰타에서 도망쳤으며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지가 꽤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더군다나 몰타의 미켈란젤로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세레 요한의 참수' 또한 예배당에서 철거되어 지하 수장고 한쪽에 쳐박혀 있었다. 마티아 프레티는 몰타로 오기 전에 이미 로마에서 몰타의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의 여러곳에 나뉘어 있는 그림들을 일일이 찾아가 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여기 몰타에서 지하 창고를 모두 뒤져서라도 '세례 요한의 참수'와 '글을 쓰는 성 제로니모'를 꺼내보지 않았을리는 만무할 것이다.
마티아 프레티의 몰타 미켈란젤로에 대한 관심과 영향은 그 누구 보다도 컸다고 할 수 있다.
몰타의 미켈란젤로는 일생동안 내내 도망치고 숨어사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경을 겪었기에, 평생동안 제자를 두지도 못했고 후배들을 위한 교육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의 작품 활동을 통해 다른 화가들과 미술사에 지대한....... 어마어마하리만치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남겨 놓았다.
마티아 프레티 처럼 단 일면식의 관련도 전무하지만........ 몰타의 미켈란젤로에게서 크게 교훈을 얻고 그의 화풍을 답습하고자 노력한 화가들을 우리는 '카라바지스티(Caravaggisti)' 라고 부른다.
마티아 프레티는 물론이고......... 루벤스. 요셉 리베라. 베르니니. 그리고 렘브란트가 여기에 속한다. 한마디로 몰타 미켈란젤로 키드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들인가?
더더욱 놀라운것은 그런 그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 될 때가지 세상에서....... 그리고 미술사에서 잊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르네상스에 정통했던 미술 사학자 베르나드 베렌슨은 그의 저서에서 말하길 '몰타의 미켈란젤로에게 비견될 수 있는 사람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밖에 없다.' 라고 적었다.
다비드 조각상을 만들고 천지창조를 그리고 바티칸 대성당의 돔을 완성한 르네상스의 천재 '미켈란젤로'에게 견줄 수 있는 사람은........ 레오나드로 다빈치도 아니고, 라파엘로도 아니고, 도나텔로나 브라만테도 아니었다. 타치아노도 보티첼리도 아니었다. 오로지 몰타의 다른 미켈란젤로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 그러니까 1607년 1월 몰타의 하늘에선 차가운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 내리는 겨울비였다. 몰타의 겨울이 우기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비가 며칠씩 이어서 내리지는 않았다. 혹,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이 몰려올 때처럼 어떤 암울한 역경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려주려는 하늘의 계시는 아닐까? 그때는 이스탄불의 술탄 측근에까지 심어둔 첩자의 역활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지금도 역시 이스탄불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전역에, 심지어 교황청 근처에도 기사단의 정보망이 뻗어있지만...... 근자에 달리 긴장을 불러일으킬만한 동태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말이다.
'알로프 드 위그나쿠르트(Alof de Wignacourt)'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어올려 대단히 아쉬운듯 남은 커피 한모금을 들이켰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교도이자 적군인 오스만 투르크로 부터 들어오게된 커피를 처음엔 이교도의 전유물이자 악마의 음료라 불리고 교회에 의해서 절대 금기시 되었지만, 그리 오래지않아서 교회성직자들과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전유물처럼 은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만큼 커피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지만 말이다.
살기위해 바다로 나간 요한기사단의 함선이 이슬람의 배들을 나포할 때마다 상당량의 커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콘스탄티노플과 로도스 공방전을 거치면서 충분하게 경험해 본 커피 문화였다. 커피는 기분을 맑고 개운하게 해 주고 순간적으로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아주 독특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몰타에 거주하고 있는 요한 기사단원들은 수급되는 커피의 양에 따라서 일정하게 배급을 통해 각자가 알아서 커피문화를 누릴 수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현재 요한 기사단의 단장(그랜드 마스터)인 위그나쿠르트의 경우는 커피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는 사람이었다. 밤을 새우게되는 전략회의나 건물 내부의 골격을 대폭 수정하고 있는 산 조반니 대성당 공사장에서나, 가끔 배를 타고 해안 진지를 순찰나갈 때나, 그의 손에서는 커피가 떠날줄을 몰랐다.
알싸한 마지막 한모금의 여운을 아쉬워하면서 창밖으로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만 서 있던 위그나쿠르트는 아뿔싸...... 수십개의 눈이 지금 등 뒤에서 자신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닭았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잠시 딴생각을 했더니만....... 모두에게 미안하네. 그래 더는 결정해야 할 안건이 없는 것이지? 아무쪼록 제군들이나 병사들이나 건강에 특별하게 신경 쓰도록 하게. 특별한 징후가 없으면 경비 인원을 대폭 줄이도록 하게. 따뜻하게 쉴 수 있게 하고 밤에는 보초근무 시간을 짧게해서 자주 교대시켜주고........ 들어 올 배는 없겠지만, 함선은 물론 어선들까지도 내가 별도의 지시를 내릴때 까지는 일체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단속시키고, 의료진만은 비상대기 시켜놓고 직접 병사들의 막사를 돌면서 아픈 사람을 우선적으로 돌볼 수 있도록 지시하게.'
'지시하신 바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여기서 회의를 마치도록하지?'
'단주님께 보고드릴 사항이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나폴리에서 서신이 한 통 도착해 있습니다.'
'내 집에서 오는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가 아니면 모두 공문으로 처리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 모두가 알아듣도록 편지 내용을 말해보게.'
'몰타에 들어 올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는 편지입니다. 콜로냐 가문의 추천장이 함께 동봉되어 있습니다.'
콜로냐 가문이라면 나폴리의 부유한 명문가 가문이다. 요한 기사단이 유럽을 유랑할 때부터 몰타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기사단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또한 콜로냐 가문은 로마교황청과도 활발하게 교류를 하고 있었던지라 그들을 통해 교황청에 대한 많은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콜로냐 가문이 추전장을 써 줄 정도의 인물이라면 틀림없이 몰타에 중요하게 쓰여질 인물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몰타에 들어오고 싶다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미켈란젤로라는 사람입니다. 산 조반니 대성당이 재건축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재능을 모아 제단화를 그려서 헌정하겠다고 합니다.'
'누구라고? 미켈란젤로?'
'푸하하하하하....... 미...... 미켈란젤로 라고? 하하하하하. 이....... 이사람 좀 보게......... 하하하하하하..........'
위그나쿠르트 기사단장이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쉽사리 그 웃음이 그치지도 않았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러자 회의실에 모여 든 십수명의 기사단 장교들로서도 이 뜻밖의 상황에 모두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눈까지 충혈된 기사단장이 겨우겨우 자신을 추스른 후에 편지를 거내들고 있는 장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부관. 아무리 농담이라도 이렇게 비오는 식전댓바람부터 너무 심한게 아닌가? 건축분야라면 모르겠으나..,.... 내가 아무리 그림에는 문외한이라고 해도 그렇지........ 미켈란젤로라니......... 미켈란젤로가 지금 제단화를 그려주려고 입국 허가를 신청해왔다고? 허가 신청이라니? 미켈란젤로라면 내가 친히 전함대를 이끌고 쫓아가 무릎이라도 꿇고 간청을 해서라도 모시고 와야지........ 미켈란젤로 선생이 사망하신지 벌서 수십년이 지난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그렇게 심한 농담을 공개석상에서............'
'아닙니다. 틀림없는 화가 미켈란젤로의 서한입니다.'
'에끼 이사람. 죽은 미켈란젤로의 편지가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수십년이 지나 지금 도착했다는 말인가?'
'마스터께 아룁니다. 나폴리에서 온 편지라면........ 미켈란젤로의 편지가 틀립없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중간에 끼어든 사람은 로마 출신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대를 이어 헌신해 온 요한 기사단 장교였다. 그는 요한 기사단을 대표하여 로마교황청을 오가는 사절단의 호위를 주로담당했었다.
'자네까지? 그렇다면........ 잠시 정리를 하자면......... 또 다른 미켈란젤로라는 화가가 더 있다는 말인가? 나폴리에?'
'그렇습니다. 마스터께서 기억시는 미켈란젤로는 본명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omoni)'로서 피렌체의 다비드 조각상과 교항청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린 조각가이자 화가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편지를 보낸 미켈란젤로는, 또 한 명의 전혀 다른 화가인 '미켈란젤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입니다. 하여 한참 후대의 사람이라 하여 미켈란젤로라 부르기 보다는 그냥 '카라바조'라고 불립니다.'
'또 한 명의 미켈란젤로가 더 있다........ 그가 카라바조라......... 그의 그림은 보았는가? 진짜 미켈란젤로와 비교하면 어떤가?'
'로마. 나폴리. 베니스 등지에 많은 그의 그림이 있습니다만........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를 제가 비교한다는 것은.........'
'카...... 카라바조라 그랬지? 그의 그림도 세상으로 부터 인정을 받고있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유명한 화가이냐가 중요한것이야?'
'마스터께 카라바조의 추천장을 써 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콜로냐 가문의 후계자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로마에 가서 들은 바에 따르면 교황청의 추기경들이 카라바조의 그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수집한다고 들었습니다. 델 몬테 추기경님이 카라바조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 들었습니다. 단주님도 만나셨던 시피오 보르게세 추기경님과 프레데릭 보로메오 추기경께서 그림을 의뢰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 나폴리의 은행가 오타비오 코스타가 지금의 카라바조가 있기까지 오래전부터 후원을 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와도 거래를 튼 나폴리의 코스타 은행가까지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이적까지 미켈란젤로가 하나 더 있는줄도 몰랐단 말인가? 미켈란젤로란 이름이 특별한 것일까? 미켈란젤로만 붙이면 다 천재적인 화가가 된다니 말일세......... 이쯤이면 망설일 것이 더 무엇이 있겠는가? 당장 모셔 와야지?'
'아니됩니다. 카라바조를 받아들이면 교황청의 엄청난 화가 우리 기사단에 미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카라바조는 천재의 얼굴에 가려진 악마입니다. 이쯤에서 내치셔야만 합니다.'
'그림에 관한 한 카라바조는 미켈란젤로 못지 않습니다. 그로하여 조반니 대성당의 제단화를 완성시켜야 합니다.'
느닷없이 등장한 카라바조로 인하여 기사단의 회의장이 그만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카라바조로 하여 몰타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자는 측과 절대 반대한다는 측의 의견이 엇비슷하게 반반이었다.
찬성쪽은 오로지 실로 위대한 화가의 단면만을 가진 카라바조를 응원하고 있었다.
반대쪽은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서 파생 된 일그러진 인생(살인죄. 폭력죄. 강간죄. 절도죄.) 등등의 이유에다가, 역사상 주문자에 의해서 인수가 거부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 주인공 등의 이유가 추가 되었다. 툭 하면 그의 그림은 주문자에 의해서 여러가지 이유로 거부되었고 재판과 소송이 뒤따랐다. 그 이유는 차차 밝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그가 그린 그림은 대부분이 허접하고 수시로 신성을 왜곡 내지는 변질시키고 쓰레기라는 주장이 뒤따랐다.
그 얽히고 섥힌 이야기들이야 차차 여행을 계속하면서 풀어가게 될것이고.........
이제 모든 결과는 그랜드 마스터의 결정에 달렸다.
이렇게 미켈란젤로 카라바조의 몰타 등장은 처음부터 소란을 야기 시겼다. 그리고 이는 그가 몰타에서 어느날 훌쩍 사라진 후에까지 결코 그치지 않았다.
지금 요한 기사단 대성당에는 카라바조가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가 버젖이 걸리어 있다.
그렇다면........ 1607년 초에 카라바조는 어찌되었던 기어코 제발로 몰타에 들어오게 되었단 뜻이 된다.
할.렐.루.야.
선사시대이후로 어디론가 사라졌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다시 몰타에 찾아들면서 생겨난 고대도시가 바로 몰타의 옛수도인 엠디나(Mdina) 이다.
지금까지도 버젖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당당하게 과시하고 있는 몰타의 중심이자 몰타의 수호자였다.
몰타는 지중해 한구석의 아주 작은 섬일 뿐이고 드넓은 지중해는 온통 해적들 천지였다. 거기에다 몰타는 사방이 깍아지른듯한 카르스트형 바위벼랑 투성이로 배를 접안 시킬 수 있는 항구가 별로 없었다. 높은 파도와 깍아지른 바위 벼랑은 그나마 해적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대자연의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 몰타 사람들은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의 한복판 바위벼랑 위에 성채를 짓고 몰려 살기 시작했다. 고기잡이를 위한 소소위 배들은 밤이되면 해안 곳곳의 바위동굴에 숨겼고, 섬의 곳곳에 바다를 관찰하는 망루를 지어 해적들의 침입을 살폈다. 어디선가 해적선이 나타나면 배를 숨기고 모든 물자를 바리바리 싸들고 엠디나 성채로 몰려들었다. 그리곤 똘똘 뭉쳐서 해적들에게 대항하였다. 해적이란 기습으로 짧게 치고 챙기고 빠지는것이 습성이다. 사전에 방비를 하고 성 안으로 몰려들어서 장기전으로 대항을 한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 밖에....... 배를 찾아내 불사름으로써 알갚음을 하려하면 섬 사람들은 서둘러 동굴에서 배를 꺼내서는 시칠리아 쪽으로 달아났다. 시칠리아에는 역사 흐름에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노르만 왕조가 제 역활을 나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몰타는 아주 작은 섬이다.
흔히 제주도의 1/6 정도이다 라고들 말하는데....... 몰타 곳곳을 시내버스를 이용해서 여행을 하다보면 결코 그렇게 작지만은 않아보이기도 한다. 하여 다른 비교 대상을 내가 설정해보기로 한다면........ 몰타는 정확하게 우리나라 (강화도) 보다 아주 조금 더 크다. 쉽게 강화도만 한 크기의 섬이다.
이 섬에 새로운 시대의 위대한 사명(?)을 띠고 마침내 요한 기사단이 나타났다.
기사단은 지정학적으로 몰타라는 섬이 지중해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엠디나가 몰타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하여 그들은 가장 먼저 엠디나를 요한 기사단의 거점(본부)으로 삼고 지금의 모습으로 성채를 완벽하게 요새화 시켰다.
1565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몰타 공방전이 벌어졌을 당시까지도 몰타와 요한 기사단의 중심은 엠디나 였다. 엠디나를 완성한 후에 아이슬 아담의 대를 잇는 그랜드 마스터들은 몰타 전체를 요새화 시키는 작업에 몰두하였으며, 그 핵심은 그랜드 하버를 중심으로 발레타와 쓰리 시티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걸맞는 새로운 방식의 요새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털어 가장 오랜세월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3중 구조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마침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화약 무기의 시대를 넘어서 대형 화포들이 성벽을 향해 무서운 화력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하여 요한 기사단은 대포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요새를 연구했다. 그리하여 발레타 주변의 모든 성채들이 실로 어마무시하게 대포의 공격에도 끄떡없도록 새롭게 설계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바다를 이용한 지형을 최대한 살리고, 적의 해안으로의 접근을 극도로 제한시켜 한 쪽으로 쏠리게 하여 역시 대포 공격으로 섬멸하며, 상륙한 적들이 대포 발사를 위새 집결 할 수 있는 거점들을 미리 파악하였다. 그리고 나서 혹여 적의 대포들이 설치될 곳의 모든 성벽들을 평면이 아닌 다각형의 성벽으로 변환 시켰던 것이다. 미국 국방성 팬더곤의 모델이기도 하고, 스텔스 전폭기 연구의 시작도 여기에서 였다. 적군의 대포가 날라가서 맞추어 부실 평면의 벽이 모두 사라졌다. 모든 성벽이 뾰죽뾰죽 송곳모양의 입체적 방어벽으로 대체된 것이다. 나아간 포탄은 모두 속된 표현으로 삑사리가 났다. 정타가 불가능하게된 것이다.
요한 기사단의 목표는 하나........ 적군이 쳐들어 오는것은 자기들 마음이지만, 일단 몰타를 점령하고자 하면........ 요한 기사단이 만들어 놓은 장소에서, 기사단이 싸우고자 하는 방법으로만이 전투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오로지 마주 싸우는 군사들의 정신력과 용기와 훈련된 전투력이 승부를 가를 것이다. 거기에 더하자면....... 하나님의 끗발이냐 알라신의 끗발이냐?
1565년 당시의 그랜드 마스터 '라발렛'은 이스탄불에 스며들어 있는 첩자로부터 술레이만 대제가 몰타 점령을 위하여 총사령관으로 '무스타파 파샤'를 임명했다는 보도를 받았다. 라발렛이 이 정보를 접하였을 때는 오스만 투르크의 5만 병력이 몰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라발렛과 무스타파 파샤는 아주 오래전부터 참으로 기이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라이벌 이었다. 요한 기사단의 총사령관 라발렛은 무스타파를 잘 알고 있었고, 오스만 투르크이 총사령관 무스타파 파샤 또한 누구보다도 라발렛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라발렛은 우선 몰타와 요한 기사단이 가지고 있던 팔레모스 성모상과 모든 보물들을 엠디나의 사도 바울 성당으로 옮겼다. 이어서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로 모두 엠디나로 옮겨가게 했다. 소수의 최정예 부대가 엠디나를 방어했다.
동시에 총사령관 라발렛을 비롯한 요한기사단의 최영예 군대를 모두 그랜드 하버로 옮겼다. 이번 전쟁은 어찌되었건 그랜드 하버에서 시작되고 그랜드 하버에서 끝인 난다는게 라발렛의 생각이며 작전 이었다. 그런데 라이벌은 통하는지....... 무스타파 파샤의 작전 또한 라발렛과 똑 같았다.
라발렛은 쓰리 시티의 한가운데인 세인트 안젤로 요새에 전쟁사령부를 차리고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오스만 투르크 총사령관의 목표 또한 오로지 한 곳, 세인트 안젤로 요새였다. 안젤로 요새를 공격하여 라발렛을 사로잡거나 요한 기사단의 사령부를 궤멸시킬 수만 있다면 이 전쟁은 깨끗하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돌발 변수가 생겼다.
유럽의 발칸지역까지 파견했던 군대까지 몰타 공격을 위해 불러들인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술탄은 작금의 정세를 대단히 불안하게 생각했다. 하여 자신의 심복인 무스타파 파샤가 직접 전투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여 그이 출병을 며칠 미루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스타파 파샤는 임시로 자신을 대행할 장수로 친척을 임명하면서 오로지 한가지만 신신당부........ 또 신신당부하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천재지변이 일던 태풍이 몰아치던 서둘러 몰타로 향하고, 몰타에 도착하면 그 어떤 상황도 다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하나, 곧장 그랜드 하버로 들어가서 오로지 세인트 안젤로 요새만 향해서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총공세의 끝은 무조건 라발렛을 향하게끔만 하면 이번 전쟁은 승리하게 된다는 자신감이자 확신이었다. 전함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신신당부에 또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와서 주변 상화을 살펴보니 파샤 사톤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자꼬짜 그랜드 하버로 쳐들어갔다가는 발레타 지역(세인트 엘모어 성) 쪽의 기사단이 그랜드 하버의 입구쪽을 봉쇄해버리고 후위를 공격해 온다면........ 그야말로 그물에 걸려들어 꼼짝 못하는 상황이 너무도 자명해 보였다. 오려다 보니 엘모어 성의 위세도 별반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하루 정도면 엘모어 성을 떨구고 당당하게 그랜드 하버로 들어가 삽시간에 안젤로 성을 쳐서 라발렛을 사로잡으면 쉽게 전쟁이 끝나리라 자신했다.
몰타 공방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565년의 일이었다.
라발렛은 쾌재를 불렀다. 하늘이 요한 기사단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한편 무스타파 파샤는........ 꿈속에서도 전쟁이 그렇게 전개될 줄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몰타 공방전이 끝이 났다.
그제서야 바티칸과 유럽은 안도의 한숨을 들이쉴 수가 있게된 것이다.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의 축복과 은총이 몰타와 요한 기사단에 함께하고 있다고 너도나도 믿게된 것이다.
요새화된 성채도시 엠디나로서는 이들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하여 그들은 몰타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입증된 그랜드 하버 인근의 쓰리시티가 건너다 보이는 너른 지역에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엠대나에 보관되었던, 그리고 엠디나가 수행한 수도로서의 지위와 역활을 새롭게 탄생하는 이 도시로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도시를 탄생하게끔 요한 기사단을 잘 이끌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 '장 드 발렛'의 이름을 따서 '발레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발레타는 몰타의 수도이다.
400년 전의 그날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도심을 가로질러 저편 서쪽 산마루에 살포시 내려 앉는다.
그러면 발레타는 성전에 기도하러 나서는 처녀 처럼 부드럽고 고운 새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하루를 가만히 되돌이켜 보면 이 도시를 이루고 있는 라임스톤(화산암)의 칼라가 새벽 미명에 뽀얗게 새하얀 빛깔을 띄기 시작해서, 해가 떠오르면서 표정이 다르고, 한낮에 도심 가득 쏟아져내리는 눈부신 햇쌀에 또 다른 표정이고, 한 풀 더위가 꺾이는 오후 시간이 되면서 또 다른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알아 챌 수가 있을 것이다. 혹 나만 그런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곱고 화사한 미소를 띤것 같은 표정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시간과 역사의 흐름을 하루종일 나에게 가르쳐주던 도시는 이제부터 전혀 다른.......... 한없이 여유롭고 더없이 아름답고 영원할것만 같은 아늑한 공간을 낯선 여행자에게 넘치도록 가득 선물한다.
발레타의 밤은 그렇게 여유와 낭만이 가득 넘쳐 흐르기 시작한다. 아주 서서히 느리게........
그 처음시작은 바로 어퍼 바라카 가든의 서쪽 성벽에서 부터이다.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그리고 현지인들의 발걸음도 하나씩 둘씩 그곳으로 향한다.
몰타의 하늘에서 별무리처럼 여유로움과 평온함이 마구마구 쏟아져 내린다.
알.럽.트.래.블. & 알.럽.몰.타.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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