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을 거쳐 고증된 인류문명사에서 역사상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는 터키 동남부 지역에서 발견된 '괴베클리 테페 유적군'을 꼽는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1600여년 전인 구석기 시대에 세워진 아주 거대한 돌기둥 군락지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문화를 '태양 거석문화'라는 범주에 넣어서 역사적 분류와 정리를 하고있다.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 영원과 불멸을 갈망하는 인류의 염원과 욕구가 이런 거대한 돌들을 하늘 끝가지 세워 올리려고 만들었다고 보고있다. 죽은자의 영혼이 성스러운곳에 영원히 안주하기를 기원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위하여 땅이 풍요롭기를 기원하며, 모든 재앙과 공포로부터 평안하기를 염원하는 간절함을 담았다. 하염없이 나약하기만한 인간이 스스로 완전해지고 이승에서의 평화와 안녕이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았다.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고인돌이나 선돌도 거석문화 유산이다. 특히 우리나라 고인돌 군락분포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있는 유명 문화재이다.
이러한 거석문화는 세계 각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류뮨명사의 발상지역이나 찬란한 고대문화를 간직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거석문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히려 지구의 변방이랄 수 있는 척박하거나 기후와 환경이 열악한 뜻밖의 장소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유명한 거석문화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영국 남부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 헨지'의 경우, 기원전 약 3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유산이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카르나크' 도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그런가하면 남태평양 저너머 끝자락 칠레에 붙어있는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은 너무너무 아이러니 하게도 서기(기원후) 400년 경부터 조성된 가장 최근의 거석문화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인류문명사의 중심에 항상 서 있던 지중해 문화권(그리스. 로마.이집트 문명권)에서는 왜 좀처럼 이렇게 선사시대의 위대한 거석문화가 자취를 감춘것일까?
제도권 내에서 피라밋이나 스핑크스, 그리고 거대한 그리이스식 신전들이 들어 선 것은 한참 지난 후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사시대의 거석문화 위에다 새롭게 문명세계를 이룩했기 때문일까? 아직도 나는 명확하게 그 이류를 알지 못한다.
다만 아주 의외의 장소에서 인류 역사에서 적어도 두번 째라 할 수 있는 거석문화를 만나보았고, 그곳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위치나 환경을 인하여 더욱 크게 놀란바가 있었다.
그곳은 지중해 유역에서 지극히 작은 하나의 작은 점만한 섬이었다. 선사시대에나 고대에서 근대를 지나 지금 당장 이 순간까지도 스스로 자급자족이 힘든 아주 열악하고 척박한 작은 바위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섬에는 이미 7000년 전 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섬을 (몰타)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Malta)라고 쓰고 (말타)라고 부른다. 더 정확히는 '몰'고 '말'의 중간으로 약간 '말'에 가깝다.
--- 인류 최초의 건축물 터키 (괴베클리 테베 유적). 기원 전 1만1600년.
-- 영국 솔즈베리 (스톤 헨지 유적) 기원 전 3000년 경.
---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 서기 400년 경.
몰타에는 선사시대의 거석문화 유적이 많이 있다. 하나 둘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이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3600년 경에서부터 3200년 경에 조성된것들이 대부분이다.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을 빼놓고는 모두 세계에서 두번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오래된 유적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오늘날에도 제대로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형태의 기형적인 열악한 환경뿐인 몰타에서 말이다.
지중해에 둘러쌓인 한점 외로운 섬인 '몰타'에 대해서 사람들은 오래전 부터 이렇게 말해왔다.
'몰타가 가진것이라고는 오로지 돌(石) 뿐이라고.........'
주간티아 신전(고조 섬 샤라). 하자르 임 신전(몰타 섬 렌디). 므나이드라 신전(몰타 섬 렌디). 타르신 신전(몰타 섬 타르신). 타하주라트 신전(몰타 섬 므자르). 스코르바 신전(몰타 섬 제비) 등이 모두 기원 전 3600년 에서 3200년 사이에 조성된 거석문화 유적들이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보르그 아임라마. 인나두르. 부지바. 하자르 킴. 코르틴 이임다와르. 타마르지에나. 사그흐라 등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조성된 거석문화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는곳이 바로 몰타이다.
이제 차차 하나하나 찾아가 볼 요랑이다.
주간티아 신전의 경우는 지난 번 여행에서 둘러 보았는데........ 시간적 여유만 따라준다면 모두 둘러보고 싶다.
세번째 방문하는 몰타.......... 여전히 가슴이 뛴다.
그만큼 몰타는 매력적인 여행지이다.
--- 몰타 (므나이드라 신전) 기원 전 3600년 경.
--- 몰타 (타르신 신전) 기원 전 3200년 경.
--- 몰타 (할스플리니 지하 묘역) 기원 전 3300년 경.
한 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인 2019년 12월 31일 이른 아침에 루카 몰타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스탄불에는 방문하는 날부터 떠나오는 오늘 새벽까지 세찬 바람과 쏟아지는 비에 그동안 전혀 격어보지 못했던 우중이 아니라 '수중 트래블'을 혹독하게 경험했던 터라 공항대합실을 나서자 마자 저절로 하늘부터 올려다 보게된다.
지극히 맑고 쾌청함.
그래도 한겨울인지라 아무리 지중해성 기후라 해도 바람은 매우 찼다. 옷깃을 새롭게 여며야 할 정도였다.
이전의 방문도 모두 겨울이었지만, 같은 겨울이라쳐도 이번의 날씨가 그중에 가장 쌀쌀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비만 피할 수 있는것도 어디인가? 거기다가 더없이 파란 하늘이라니..........
배낭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거의 맨 나중으로 대합실을 나섰더니 어느새.......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떠나고 서너 명의 여행자만이 남았는데...... 그들도 택시랑 요금협상중이었다.
이른 아침 시간이지만 좀 전에 첫 시내버스가 운행을 시작했겠다....... 서둘것도 아쉬울것도 없는 몰타 여행.
몰타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1/6 밖에 안되는 크기의 영토를 가진 아주 작은 섬나라이다. 거기에다 대중교통이 아주 잘 완비되어 있다. 몰타여행에서 가장 먼저 시내버스 이용 체계를 이해하고 버스 시간표만 일어낼 수 있다면 이제 몰타 여행 준비는 제대로 모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택시 렌터카 굳이 필요치 않다.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시내버스를 즐길 마음에 준비만 갖추면 되는 것이다.
시내버스 요금도 겨울을 제외한 성수기 요금과 비수기인 겨울 요금이 다르다. 할인이 적용되는 것이다. 1회권은 1시간 이내 환승이 되고, 72시간권. 1주일권. 1달권 등 다양하지만...... 내 여행 특성상 버스 이용횟수를 대충이라도 예측 산정하기가 힘든 우리로서는(주로 죽어라 걷는 여행자들이라서) 이럴땐 일체의 망설임 없이 1회권 사용을 선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몰타에서는 대중교통 티켓을 별도로 구입하지 않아도 현장에서(버스 기사에게) 동등한 가격에 승차하면서 티켓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번거롭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이번 몰타 여행에서는 숙소를 구하는데 제법 어려움을 겪었다.
크리스마스에서 이어지는 연말 연시 시즌이다보니 겨울철 비수기가 아니라 한참 성수기였다. 방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 였다. 지난 번 여행에서 친절하게 대해준 매니저에게 이메일도 보내보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매진이란다. 그래서 아주 힘겹게 겨우 방을 구했다.
십오분 정도를 기다려 시내버스에 올랐고 40분 정도를 달려서 목적지 슬리에마에 당도했다.
그런데 아뿔싸........
예약한 방에 아직 전날 손님이 묵고 있었던 것이다. 체크 아웃 타임은 오전 11시이고, 우리는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이다.
오.마.이.갓.
호텔에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몰타에 오면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은 당연히 '발레타', 그리고 발레타 하면 '어퍼 바라카 가든'에서 건너다 보는 '쓰리 시티'가 아니겠는가?
어퍼 가든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시 이탈리아 기사단이 휴식과 요양을 위해서 발레타에서 가장 높은곳에 설치한 정원(공원)이다.
챠밍여사도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세계 테마기행 몰타편)을 통해서 익히 몰타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몰타 하면 바로 거기?
우리는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발레타로 향했다.
이 사람....... 챠밍 여사........ 태리 할망구............ 몰타는 첫방문이면서도.......... 아주 익숙한듯한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풍경들에 아에 반쯤 넋이 나갔다. 빗속에서 새벽 비행기타고 여기까지 오느라........ 사실 이때까지 배도 쫄쫄이 굶고있으면서도 싱글벙글 신명이 났다.
몰타를 제대로 찾아온것인지 몰 타서 먹은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 이 순간을 즐기고 느껴보기로 하자.
어쩔것이여. 아직 방을 잡고 짐을 푼 것도 아닌 처지로........
'우리가 가진것은 배짱과 남는 시간밖에 더 있나?????????'
--- 몰타 요한기사단의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 (라발렛)
몰타를 여행하다보면 언뜻언뜻 우리나라 제주도를 떠올리게 된다.
제주도가 울퉁불퉁 구멍이 뚫린 검은 화산암의 섬이라면, 몰타는 온통 연한 갈색의 화산암 섬(라임스톤)이기 때문이다.
몰타는 겨우 해발 200m 에 이르는 아주 작은 산호질 석회암 고원지대라 하겠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짙고 검푸른 코발트빛 바다 한가운데 하얗게 파도가 부딪쳐 부서지고있는 높은 낭떠러지로 둘러쌓여있는 세 개의 작은섬들이 모여있을 뿐이다. 온통 돌 뿐이다. 나무도 숲도 없고 커다란 강물도 없다.
어쩌다 돌밭에서 생명이 시작되었고 죽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돌밭으로 돌아가는 것이 선사시대 이래로 몰타에서 이어져내려 온 운명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작고 외진 섬에서 거석문명이 존재했을까?
선사시대의 기록들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엄연하게 남아있는 흔적들이 그 사실을 말하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론하게 만들뿐이다. 왜 선사시대인들은 이 고립되고 척박한 바다 가운데 작음 섬에 신전들을 그렇게나 많이 세웠을까? 인근 지중해 연안의 시칠리아나 북아프리카 연안, 혹은 사르데니아에도 이런 거석문화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왜 굳이 몰타였을까?
페르낭 브로델은 한마디로 몰타를 '신들이 찾아드는 만남의 장소' 였다고까지 표현했다.
고대의 몰타는 문화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다른 세상과는 완벽하게 고립된 매우 특별한 세계였다.
그런 장소와 상황속에서 찬란한 선사시대의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몰타는 실로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거석문화의 탄생과 실재 보다도 더 불가사의한 일이 또 몰타에서 벌어졌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이제까지 신비한 거석문화를 이룩해 놓았던 몰타의 고대인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몰타의 선사시대 문화는 기원 전 1600여년 경 어느날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는 아루런 기록도 흔적조차도 남겨 놓지를 않았다. 혹, 어디 더 풍요롭고 신성한 지역을 찾아내서 집단 이주라도 한 것일까?
고대 이집트 문명보다도 훨씬 앞서서 찬란하게 문명의 곷을 피웠던 사람든은 한 순간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왜 그런 일들이 하필 몰타에서 일어났을까?
그 후, 오랜 시간동안 몰타는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이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소리만이 울려퍼지는 마냥 텅 빈 외로운 섬이었을 뿐이다.
청동기 시대가 지나가고 철기시대가 도래할 무렵에서야 지중해를 무대로 새롭게 해양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페니키아 인들이 처음 다시 나타났다. 이어서 그리이스 인들이 등장하고 그 다음으로 로마인들이 등장하게되는 것은 지중해의 역사와 별반 다를것이 없다. 이탈리아 최남단의 풍요가 넘치는 시칠리아에서 몰타는 겨우 90km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하여 몰타의 거석문화를 제외하고는 시칠리아와 매우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함께하게 되고, 몰타의 존립에 있어서 시칠리아는 뗄레야 뗄수가 없는 아주 막역한 관계라 할 수 있다.
몰타의 거리 곳곳을 거닌다는 것은 한 여행자로서나 아니면 지구라는 별에 태어난 소중한 존재로서의 생명체로서도 대단히 축복받은 일이라 하겠다.
우선 아름답다. 어디를 바라보든 그 모든것에서 몰타 특유의 역사적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져 나온다.
그리고 여유롭다. 몰타에서는 조바심을 내거나 서둘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지난 세월동안 일상에서 우리가 꿈구었던 그 상상의 나래에 우리 자신을 가많히 놓아두고 내맡기면 그만이다.
거듭거듭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곳이다. 처음 내가 사흘을 머물렀다면 이번엔 일주일을 게획하고 싶고, 한 달을 머물렀었다면 다음엔 일 년을 머물고 싶은 계획을 세우게 될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주저않아 그곳에 영원히 남고 싶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신비한 장소가 바로 몰타이다.
그리고 우린 지금 발레타를 거닐고 있다.
이쯤되면........
아 하, 몰타라는 나라는 이런곳이구나 라는 조금은 구체적인 느낌이 생겨나지 안았을까?
이탈리아 반도를 따라 쭈욱 내려서다보면 메시나 해협을 건너 풍요롭고 축복받은 시칠리아를 지나 약 90km를 바다를 가로질러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타나는 겨우 제주도 면적의 1/6 밖에 되지 않은 손톱만한 나라 몰타가 나타난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온통 시퍼렇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허리띠 처럼 매고 있다.
도시 전체가 철저하게 무장된 성벽의도시를 넘어 나라 전체가 해양 요새라 해도 무방하겠다. 사람의 손길이 가미된 성벽이며 집이며 들판의 돌담도 온통 라임스톤(갈색 화산암) 일색이다.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들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몰타는 그런곳이다.
파란색과 라임스톤 사이를 오가면서 스스로를 돌아다보고 도 내일을 계획하기도 한다.
조금만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면 몰타를 거쳐간 수백년의 세월에 담긴 이야기와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재미가 솔솔하다.
모두가 같은 풍경 같은 사연이 담긴 표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살며시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사연을 담고 자신들의 과거를 끊임없이 이야기 해준다.
몰타는........ 우리 부부처럼 한평생(환갑)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어떤 보답처럼.......... 1년쯤 조용히 머물면서 한번쯤 소중하게 자기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기에 최고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혹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아무런 주저 할 이유가 우리에겐 없다.
어디........ 내친김에 몰타의 수도 발레타의 풍광 즐기면서 좀 더 걸어보기로 할까?
몰타 섬에서 거석문화를 창조했던 선사시대인들은 어느날 어디론가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로 세월은 하염없이 덧없게 흘러만 갔다.
고립된 이 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바로 페니키아인들이었다.
시대에 앞선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졌던 페니키아인들은 바다를 다스릴줄을 알았고, 이 기술을 이용하여 지중해의 너른 지역을 오가며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던 고대인들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튀니지 지역)에 식민도시를 세워 자신들의 세력과 지지기반을 확실하게 다졌고, 이를 토대로 지중해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지리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을 오가는 중간지점의 중요한 해양전력 거점인 몰타를 차지하게 된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뒤에 등장하는 그리이스는 몰타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로마도 오기는 했지만 몰타를 그렇게 중요한 거점으로 평가하지 않았었다. 중세 시대에 등장하는 노르만이나 이탈리아 공국들, 그리고 영국이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필요성을 느껴 점령하게 되었다. 그 덕분으로 몰타인들은 노르만. 이탈리아. 영국의 피가 섞여있다. 하지만 본래의 몰타인은 페니키아인이라 할 수 있고, 현재 이들의 언어는 영국의 지배 이후로 영어 문화권이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페니키아어를 사용했었고 페니키아어 연구에 몰타가 대단히 중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몰타가 서양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것은 중세시대 게르만족의 이동에서 부터 시작되어 시칠리아에 노르만 왕조가 성립되면서부터 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역사의 어두운 이면이 존재했던 것이다.(예전의 시칠리아 여행기에서 다룬적이 있었음. 참고)
유럽의 중세 봉건국가 시대에 들어서서 왕들과 영주들과 기사들은 서로 피말리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이기느냐 지느냐는 곧 사느냐 죽느냐로 직결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거기에다 이들 외에 또 하나의 거대한 축인 로마 카톨릭이 신성(神聖)을 가장하기는 했지만 절대적으로 세속(世俗)을 능가하는 권력과 재물에 탐욕스런 눈초리로 호시탐탐 이들을 노려보다가 때론 부추기고 때론 회유하고 때론 달래고 대론 협상케 하면서 점점 자신의 지극히 세속적인 권력을 넓혀나가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서로 밀고 밀리는 전쟁이 유럽 전지역에서 벌어졌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십년 이십년이나 지루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교황이나 제후나 영주나 기사들은 별반 타격을 입지 않았다.뺏을 수 없다면 그저 세월아 네월아 지루하게 싸움만 이끌어 가면서 교황에게 재물과 때론 노예와 여인들을 받치고 중재를 요청하기만 하면 어찌되었건 살아남아 자신들의 지위를 계속 유지 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나는것은 오로지 백성들 뿐이었다.
서유럽의 제후와 영주들이 이 싸움에서 끝내 이기기 위해 묘수를 짜낸것이 바로 공포의 야만적 사움꾼인 '노르만족(바이킹)'을 끌어들인 것이다. 오로지 노략질로 영위하던 바이킹에서 숙식제공에 고액의 연봉과 고향인 아일랜드나 핀란드 노르웨이 인근의 남겨톻은 가족들에게까지 생필품 보급을 제의받은 것이다. 어쩌면 인류 최초의 제대로 된 고급 용병집단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노를 저어 바이킹 조각배를 타고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던 것이다.
한마디로 지옥에서 온 악마집단이었다.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공포 자체였다. 바이킹의 스카우트는 즉시 엄쳥난 표과를 파급시켰다. 그러자 너도나도 앞다투어 더 용감한 바이킹을 스카우트 하는데에만 올인하기 시작했다. 풍요롭과 따듯한 남쪽 생활을 맛본 소문에 바이킹이 앞다투어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든 지루한 전쟁이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스카우트 계약서에 대단히 중요한 사전 조항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용병 계약은 그때그때 전투때마다 상황에 따라서 갱신한다. 둘째, 보수는 항상 선지급이 계약의 전제조건이 된다. 선금을 받지 않으면 바이킹은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셋째, 여하한 경우이건 바이킹 끼리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 밥 벌어 먹고 살려고 먼 지중해까지 내려왔는데 자기편 끼리 싸워서 죽을 수는 없다는 나름 명분있는 이유였다.
처음엔 그런대로 타당성 있는 계약이라고 서유럽 영주들은 판단했다. 하지만 이내 그 심각한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싸움터에 도착하면 적군의 정세를 쓰윽 살피고 나서는 적군이 너무 많으니 돈을 더 달라고 떼를 썼다. 당장 싸움이 급하니 지불했다. 그러자 싸울때마다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올라갔다. 그것도 모조리 현금으로 선지급이 조건이었다. 도저히 감당 해 낼수가 없게되었다. 그래서 이번 한판으로 끝내자고 딸라빚을 내서 쫓아가면........ 어쭈 적군도 정면에 바이킹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바이킹 끼리는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심각해졌다. 이제는 싸움에서 져서 몰락하는것이 아니라........ 바이킹에게 비용 지불하다가 그만 빈털털이가 되게 생겼던 것이다.
영주들이 앞다투어 교황에게 몰려갔다. 바이킹을 타개할 묘잭을 주문했다. 교황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했다.
'돌려 보내. 바이킹을 모두 지덜 집으로 돌려보내고...... 형편들이 좀 안정이 되면 그때 너희들 끼리 다시 싸워.'
할렐루야. 아멘 아멘.
복채를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니 교황의 말씀이 지극히 타당한 성스런 해답이었는지라 그렇게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런 꽁수를 바이킹이 눈치를 챈 것이다. 그들은 귀국을 준비할 시간을 요구했다. 그동안 싸움으로 인한 노독도 풀고 먼길을 노를 저어 가야하니 좀 쉬었다 가겠다는 것이다. 교황과 왕들은 다시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하여 유럽 전체가 바이킹의 횡포에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바이킹들을 모두 한 장소에 모아 놓고 귀국 준비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선택된 장소가 바로 시칠리아와 몰타였다. 바이킹의 리더들은 시칠리아에, 흉악한 전사들은 무인도에 고립시키고자 했다.
일년 이년이 지나도 바이킹들은 귀국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몰타의 바이킹들은 바다를 건너 사방으로 몰려다니며 약탈을 감행했다.
결국 극한에 몰린 교황과 왕들은 비밀회합을 갖고 전 유럽의 연합군을 형성하여 시칠리아와 몰타의 바이킹들을 모조리 제거하기로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 또한 눈치빠른 바이킹들이 알아채 버렸다. 바이킹의 파발조각배가 북유럽을 향해 지중해를 빠져나갔다.
유럽 연합군이 조성되어 시칠리아를 향해서 서서히 진군하는데........ 한통의 서신이 교황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스칸나비아 본토의 바이킹 용병회사 대표의 친서였다.
'우리 본토에 남아있던 전체 용병이 배에 몸을 싣고 바다로 나왔다. 너희들이 약속을 위반하고 시칠리아에 있는 우리 직원들을 해치려 하다는데 지금 내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어떤 놈이 맨 앞장을 설 것이냐? 독일이여? 프랑스여? 아님 스페인이여? 이 시간 이후로 앞장서서 나서는 놈이 파악만 되어 보라. 우리의 날샌 전 바이킹 본진이 그 앞장선 놈의 나라를 아주 박살을 내 주마. 왕궁을 헐어버리고 그 남자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서 대를 끊기게 만들어주고, 여자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창녀로 만들어 주겠다. 어떤 놈이 먼저 나서겠느냐? 차라리 교황보구 나서라고 해라. 늘 뒤에서 노가리나 까지 말고. 끝.'
그 서신 한통으로 단박에 싸움도 끝이 났다. 유럽 연합군은 무슨........ 한 십만쯤 모였다고 치자(본토이니까). 죄 다 헛깨비였다.
그 누구도 단 한발짝을 앞으로 나서길 꺼려했기 때문이다.
자칫 허세를 부려 단 한발짝만 먼저 나섰다가 후방에 남겨놓은 자신의 왕국이 쑥대밭이 된다는데........ 곧 이들은 허겁지겁 본국으로 내빼기에 바빴다.
시칠리아와 몰타의 바이킹들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거칠것이 없었다.
시칠리아와 몰타에 거주하는 바이킹을 위한 의식주를 요구했다. 안주면 약탈해다 해결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서유럽의 왕들과 영주들은 바이킹들의 체제비를 각출해서 충당해야만 했다. 그러자 바이킹들은 스칸나비아 본국의 동포들이 긴 겨울을 날 월동준비를 요구했다. 식량과 옷가지가 무상으로 무제한 배송되었다.
이제 교황과 온 유럽은 바이킹들의 뒷치닥거리에 가진 모든것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교황과 왕들과 영주들은 또 몰래 만나서 몇날 며칠동안 골머리를 싸매고 묘수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묘책을 찾아냈다.
시칠리아에 있던 기독교 왕국을 내치고 바이킹들에게 정식 거주지에 정착해 생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바이킹들에게 나라를 건국하게 만들고 그 나라를 유럽 동맹국으로 끌어들여서 그동안의 야만스런 떼쓰기나 약탈이 아닌 체계를 갖추게 만들어서 신사도와 체면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유럽세계로 점차 동화되게끔....... 야만성을 버리게 가르치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교황과 유럽은 엄연히 존재했던 기독교 왕국인 시칠리아 왕국을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바이킹........ 아니 노르만 왕국이 처음이자 제대로 등장 한 것이다.
교황과 유럽의 왕들은 바이킹을 점차 길들이겠다고 했지만....... 바이킹이 좀 더 고단수 였다.
시칠리아에 첫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으니 국가 이름이 있어야했다. 교황은 여러 이름을 추천하였으나 바이킹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내세운 나라명이 (신성로마제국)이었고 우두머리가 즉석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교황과 제후들은 자신들의 계책이 빗나갔음을 직감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이미 교황과 자신을 동등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바이킹이 요구한것은 혼인 동맹이었다. 유럽의 모든 왕조들과 바이킹들이 정략결혼으로 맺어져 버린것이다. 여기에서의 정략결혼이라는 것은 단순히 혼인을 통한 국가간의 관계가 맺어지면서 상호간의 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의미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전제군주정치에 있어서 왕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곧 차후로 언제든지 왕위 계승권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예를 들어서 독일황제에게 왕세자가 한 명이 있고 그에게서 손자가 있다고 치자. 바이킹이 독일 왕세자의 후처로 자신의 딸을 정략결혼 시키는 것이다. 바이킹의 위세가 너무나 등등한지라 교황이나 유럽의 그 어느 왕이나 영주들도 바이킹들의 혼사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바이킹 여자를 왕세자의 후처로 맞아들였고, 바이킹의 눈치를 살피느라 후처에게서 아들을 하나 낳았다고 치자. 어느날 왕세자비가 비실비실 갑자기 죽고 말았다. 다른 나라와 전쟁이 벌어져 왕세자가 전쟁터에 나섰다가 함정에 빠져 죽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독일 황제가 나이가 들어 사망했다. 손주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할 즈음에 누군가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바이킹 후처의 아들이 독일 황제 상속순위 1위가 되는 것이다. 바이킹의 어린 외손자가 새로운 독일의 황제가 되었다. 바이킹은 그의 섭정이 되었다. 이제 독일은 곧 바이킹의 것이었다.
실제로 유럽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교황과의 대립각을 세워 심각하게 싸우기도 하고, 때론 교황의 비호와 도움속에 유럽 최강의 권력자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몰타는 이 시기에 바이킹 군단(노르만 왕국)의 군사기지(병영)이었다.
난공불락, 천험의 요새가 바로 몰타였다.
-- 유사 이래로 몰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관.
수도 발레타의 가장 북쪽인 세인트 엘모어 요새의 어귀에 만들어진 (구국 기념관)은 대단히 독특한 모습과 분위기로 여행자에게 다가온다.
작은 돔을 여러개의 라임스톤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 안에는 자유의 종이 매달려 있다. 지금에서는 자유의 종이라 하겠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 종은 외적의 침입을 맞아 비상상황을 알리는 경종으로 쓰였을 것이다.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한, 개인적인 무덤으로는 스페인 세비아 카데드랄에 떠있는 콜럼버스의 무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무덤인것 같고, 다수의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묘역으로는 단연코 몰타의 수도 발레타에 있는 여기 이 추모기념관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무덤이 아닐까 싶다.
푸른 지중해를 배경으로 라임스톤으로 꾸며진 절대 난공불락의 요새에 덧붙여 세워진 이 호국 기념관은 정말로 정말로 아름답다.
마치 '몰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면 여기에 이렇게 모셔드립니다'라고 강력한 메세지를 담아 홍보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나 부터라도 기꺼이 목숨을 선뜻 내어놓을 수 있을것만 같다. 모두가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하늘나라 까지는 바라지 않더라고, 이런 정도의 멋드러진 장소에 내 영혼이 모셔지고 기려진다면........ 목숨을 받칠만도 하지 싶다.
누워있는 동상의 인물은 아마도 '요한 기사단원'을 추모하면서 기사단의 장례형식을 빌어 만들었지 싶다.
몰타에 오게되면 나는 이곳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한다.
사람을 차분하게 하고 오랫동안 많은 상념에 젖게 만드는 이곳은 또한 몰타에서 매우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는 명소로 꼽히기도 한다.
몰타가 노르만 왕국이 시칠리아에 들어서기까지 병참기지의 역활을 수행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지만, 역시나 몰타가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것은 바로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였다고 하겠다.
교황의 명령으로 유럽 전역에서 모집된 십자군 원정대가 일부는 발칸반도의 내륙을 통과해 소아시아로, 모든 보급물자와 소수의 해군은 이탈리아 최남단 메시나에 집결 하였다. 수없이 밀려들어오는 보급물자와 식량과 무기들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 전역과 여기 몰타를 군수물자 보급기지화 시키게 되었다. 평균 6만명이 넘는 군대를 2~3년간 먹여 살려야 하는 물자들이다 보니 실로 그 숫자나 물량의 부피가 엄청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하여 시칠리아에 막 태어난 바이킹 왕국(노르만 왕국)은 정식으로 국제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다.
제 1차 십자군 원정대으이 최고 지도자 중 한명인 난폭한 살인자 '보에몽'이 바로 노르만족(바이킹)의 후손이었다. 그런가하면 차차 다시 거론하겠지만 제 3차 십자군 원정대와 제 4차 십자군 원정대에는 노르만 족이 세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직접 총사령관 자격으로 참전하기까지 하게된다.
그리고....... 그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 속에서 비로소 (성 요한 기사단)도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몰타는 곧 요한기사단이라 할 수 있고, 요한 기사단의 역사와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바로 몰타'라고 하겠다.
요한 기사단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킹덤 오브 해븐' 이라는 영화를 꼭 권하고 싶다.
영화에는 몰타라는 지명이나 장소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요한 기사단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동들을 했었는지가 그대로 보여진다.
한마디로 요한 기사단은 '신(神)의 전사들(戰士)'이 아니었을까?
몰타의 상징이자 몰타 사람들의 무한한 자부심이며, 비로소 몰타 여행을 완성시켜주는것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요한 기사단 대성당'이다.
요한 기사단 대성당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에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또 있을까?' 라거나 이니면 '세상에나..... 이게 정말 온통 금이란 말이야?' 하면서 경악의 탄성을 내지르곤 한다. 한마디로 충격적이고 압도적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물론 유명세 치고는 교회건물(바실리카) 자체는 그렇게 내놓으라 할만큼 크다거나 웅장하지는 않다. 외부에서 보여지는 건물 자체는 오히려 왜소해 보이거나 '에게게..... 이게 그 유명한 요한 기사단 성당이야? 별 볼일 없게 생겼잖아?' 할 정도이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면 그 순간 모든 생각은 삽시간에 바뀌고 만다. '세상에....... 이런 교회가 지구상에 어디 또 있을까?;' 라고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활의 자급자족 조차도 불가능한 이 고립된 섬에서 이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를 지을 수가 있었을까?
그 해답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 여기에서 아는 사람이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키며...... 나는 그 소수에 속한다고 하겠다.
'요한 기사단 성당'을 만들고 오늘날의 몰타를 있게한 그 원동력은........ 바로 '해적질' 이었다. 몰타는 해적질 위에 세워졌다.
믿기질 않으신다고? 그것은 모두 사실이며 진실인것을....... 차차 믿게 되실것이다.
(요한 기사단)의 본업은 이교도의 탄압으로부터 기독교인의 신앙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여 그들은 항상 유럽 기독교의 최전선에서 이교도와 맞서 사웠으며, 그것은 곧 유럽 기독교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그만큼 절실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정작 로마 카톨릭과 유럽의 전제왕조들은 때론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했고 그들을 외면했으며 그들을 멀리하려 했다. 그래서 겨우 터전으로 잡은 곳이 몰타였다. 기초적인 생활이 유지될 수 없었다. 열악한 몰타에서는 최소한의 생활자원조차 생산되지 못했다. 이교도와의 전쟁은 커녕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카톨릭과 유럽의 왕조들은 모른척 외면했다. 결국 요한 기사단은 살기 위해서 부업을 택했고...... 그것이 바로 해적질이었다. 지극히 높은곳은 그 분께서 허락하셨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성스런 기사단이 부업으로 해적질을 택했고, 투자 비용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알짜배기 그대로 이문이 남는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은 몰타이자 요한 기사단 대성당이다.
할.렐.루.야.아.멘.아.멘.
---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요한 기사단) 모습.
발레타에서 어느 언덕길을 오르거나, 아니면 어느 골목길을 돌아본다고 해도 걷다보면 결국은 도심 한복판의 너른 광장에 이르게 된다.
'세인트 폴(성 바울) 광장' 이라 부르고 때론 '공화국 광장' 이라고도 부른다.
국가적인 행사나 축제는 물론 각종 음악회가 열리곤 하는 몰타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현지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장소이다.
우리가 몰타에 도착한 1999년 12월 31일 쎄인트 폴스 광장은 매우 분주한 모습으로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오늘 해질무렵부터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몰타 새해맞이 신년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클래식과 팝과 전통음악이 어우러지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신념음악회라 한다. 무대가 꾸며졌고 각종 음향장치랑 조명장치들이 기동을 시험중이었다. 몰타는 물론 일부 서유럽지역가지 티비로 생중계된다고 한다.
당연히 우리의 기대도 컸다.
하지만...... 오후들어 우리가 호텔로 돌아가 체크인을 할 때부터 갑작스럽게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저녁무렵부터는 빗방울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이거 혹시 터키의 심술꾸러기 날씨가 우리를 따라 온것은 아닐까?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날씨에 대해서만은 지나친 우려였다. 여긴..... 몰타니까!
아뭏튼 그 날....... 몰타의 신년 음악회는 참석하지를 못했다. 비가 제법 내리는 속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고, 그 와중에서도 클래식 공연이 펼쳐지는 모습의 일부를 티비를 통해서 볼 뿐이었다. 날씨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여행도 어느정도는 지쳐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대신 다음날 신년 아침의 날씨는 이 세상에서 꼽을 수 있을만큼 감쪽같이 전혀 다른 쾌청한 아침이었다.
쎄인트 폴스 광장에서 둘러보면 웅장한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건물 입구에 두 명의 근위병이 양쪽에 서 있다가 가끔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시간이 되면 아주 쬐금은 유치한 듯 어떤 격에맞지않는 요식행위를 엿보는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몰타 대통령궁이자 집무실이며 요한 기사단 기념 박물관이다.
삼엄한 경호나 세상과의 어느정도 단절 이런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냥 어느 동네의 시청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거기에다 건물의 절반 이상이 박물관으로 여행객에게 오픈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 여행때는 완전 오픈 상태였는데, 지금은 약 3년 정도의 기간을 잡고 대대적인 내부수리중이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주 쬐끔만...... 맛보기로 들여다 볼 수 있는게 지금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하게도...... 외부와 복도와 정원만 살펴보는것으로 패스......
옆쪽으로 몰타 최고의 여행자 거리가 펼쳐진다. 사방으로 최고급 카페나 레스토랑가 명품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엘리자베스 영왕 동상이 있는 카페광장의 분위기를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용해 보니 분위기는 짱인데 다른 곳에 비해서 비용은 훨씬 더 비싼 느낌을 지웅수가 없다.
이곳을 지나면 고대 그리이스 용사들이 무장한 채 서있는 모습을 빼어닮은 요한 기사단 기념 동상이 서 있는 아주 작은 공원이 나온다.
그리고 그 기념 동상 아래로 한 여인의 사진이랑 꽃송이들이 헌화되고 있는 풍경을 접할 수 있다.
--- 참혹한 테러 현장의 당시 실제 사진.
몰타 언론의 자부심으로 불리던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 여사 2017년 10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폭탄에 의한 차량 테러였다.
취재를 위해 몰타섬의 북부 시골길을 달리던 그녀의 소형 차량에서 폭탄이 터졌다. 유해도 거의 수습되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그녀는 몰타 대통령의 부인이 연루된 고위 정치인들의 해외 은닉재산에 대한 취재와 기사를 서서 세상에 알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처참하게 살해 되었다. 그 사건은 몰타의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미궁이다.
인구 40만이 조금 넘는 지중해의 아주 작은 섬나라 몰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성스럽고 영웅적인 신화를 간직한 요한 기사단에 의해서 세워진 몰타에도 부패한 정치와 권력이 스며들었고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이 젖어들면........ 저렇게 잔인한 정치 테러가 일어나는 것인가 보다.
다프네 기자를 추모하는 물결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다프네의 사진 앞에는 이렇게 써 있다. (진실을 말해!)
삼가 옷깃을 여미고 한없는 사랑과 존경을 받치며 명복을 빕니다. 아멘.
그 기념 동상의 뒤로 길게 옆으로 놓여진 건물이 바로 (요한 기사단 교회)이다.
사방에 들어선 건물들에 비해서 별반 독특할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길게 늘어진 창고형 건물일 뿐이다. 우측으로 사람들이 길게 늘어 서 있는 풍경만이 이곳이 몰타 제일의 관광 명소라 불리는 곳이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다. 웅장하지도 거대하지도 그렇다고 여타의 유명 교회들처럼 온갖 조각상들로 치장된 화려한 모습도 전혀 없다. 그저 라임스톤의 독특한 색감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어느 대학의 강의동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 요쯤에서.........
몰타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 99%의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속거나 아니면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살짝 짚고 넘어가보기로 하자.
슬리에마 지역에서 건너다 보면 보이는 아주 흔한 풍경이던 아니면 몰타를 알려준 가장 대표적인 발레타 사진을 하나 보기로 하자. 다른곳 어디에서 본 풍경이라도 상관 없겠다.
몰타에 와서 수도 발레타를 바라다보게되면 어디에서나 바로 저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몰타 = 요한 기사단)이라는 등식이 저절로 머릿속을 파고들어온다.
어디에서 바라보건 같은 풍경으로 나타나는 저 그림속에서 가장 우뚝 솟아있는 돔과 뾰족탑은 당연히 교회라는것을 알아챌 수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몰타는 곧 요한 기사단이고, 요한 기사단의 교회라면 당연히 몰타에서 가장 으뜸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하. 저 돔이 바로 요한 기사단 교회이구나.' 라고 99%의 여행객들은 생각한다.
아니다.
혹 '그렇다면 앞에 있는 뾰족탑의 고딕 성당이 요한 기사단 교회구나'라고 생각 했다면 그것 역시....... 틀렸다.
둘 다 아니다.
멀리서 보이는 풍경으로는 몰타에서 가장 유명한 요한 기사단 교회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저 언덕 위에 건물들 사이로 학교 교실처럼 길게 늘어서있는 지극히 평범한 외부 모습을 가직한 채 숨어있기 때문이다.
돔 건물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천주교 성당이고, 뾰족탑은 사도 바울을 모시는 성당이다. 이제 요한 기사단 교회로 착각하는 오류는 범하지 말자.
(요한 기사단 교회)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교회일지도 모르겠다.
교회의 내부가 온통 금(Goid)로 치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 기사단 교회가 현대에 들어서 더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이유로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빼놓을 수가 없겠다.
물론 여기서의 미켈란젤로는 로마 바티칸이나 피렌체에 남아있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19세기까지 우리는 미켈란젤로 하면 단 한명의 미켈란젤로만을 알았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20세기 이후에...... 작금의 21세기에 들어서서 세상의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고, 1년 365일 내내 전시회라 학술회의나 세미나를 끊이지 않게 벌이는 사람은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가 아니다. 21세기 미술계의 가장 큰 관심은 온통 새로운 미켈란젤로에게 쏠려있다.
그런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 요한 기사단 교회에 있다. 작품 제목은 (세례 요한의 참수)이다.
십자군 전쟁에, 그리고 로도스 공방전에, 이어서 몰타 공방전에서 이슬람과 대적하면서 유럽의 기독교를 수호한 '요한 기사단'이 수호성인으로 받들어 모시는 사람은 바로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다. 혹 이대목에서도 '사도 요한'은 꼽는 사람은........ 사도 요한은 '다빈치 코드'에서 찾아보시라 권해 드리겠다.
(세례 요한의 참수)를 그린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의 파란만장한 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이 생애와 위대한 작품들은 피렌체의 르네상스 편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룰 기회가 또 있겠지만........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참수)를 그린 미켈란젤로와 '르네상스'가 전혀 다른 별도의 미술사로 보기도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어덯게 르네상스와 두 명의 미켈란젤로를 갈라놓을수가 있단 말인가? 두명의 미켈란젤로 중 누구 하나를 빼어도 르네상스는 완성될 수가 없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이제 몰타를.......
요한 기사단을........
20세기 이후로 새롭게 평가 받고있는 이 시대의 가장 뜨거운 화가인 미켈란젤로의 몰타에서의 생활과 작품을 만나 보기로 하자.
옷깃을 여미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이제 요한 기사단 교회로 발걸음을 옮겨보기로 한다.
와!!!!
저절로 터져나오는 탄성........
-----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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