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역사를 시대적으로 나누어 구분할 필요가 있어서 선사시대. 고대시대. 중세시대. 근대와 현대 순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는 시대순 나열일 뿐이지, 그 역사를 기억하거나 좀 더 사실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나열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구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하여 인류는 시대와 역사가 가졌던 모든 시간을 공평하게 분배 기록하기 위해 모든 인류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하나의 기준을 마련했다.
기원 전(BC)와 기원 후(AD)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가 되는 기준은 바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준으로 '0'년 이 된다.
고대 역사에서 이 '0'의 구분과 도입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0'이 숫자에 도입되면서 비로소 수학의 기본 개념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나 건물의 기본 지상층은 1층이 된다. 한칸 아래는 지하 1층이 되고. 지상층의 바로 위는 2층이다. '0'의 개념이 빠진 것이다.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지상층은 '0'층 이다. 지상층의 바로 윗층은 1층이 되고, 한 칸 아래는 지하 1층이다. 마이너스(-) 1에다가 플러스(+) 1을 더하면 답은 '0'이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건축에서는 답이 (+ 1)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긴 우리네 일상에서는 별 불편을 못느끼는 그러거나 말거나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기원 전의 사람들 조차도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시간의 개념이나 구분을 굳이 기독교와 연관시켜 만들어 냈을까? 우리나라 '단기' 처럼 세계 여러나라나 민족에 따라 다른 시간 개념도 많이 있는데 말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유럽의 백인들이 가장 끗발을 날리는 강대국일 때 만들어서 그렇게 사용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백인들에 의한 기독교 사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게 진리'고 '이게 정의입네' 하면서 내지른 다분히 '백인 우월의식'과 '기독교 우월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고대 그리이스의 올림프스 신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대에 기준이 만들어졌거나, 문화를 외면했던 징키스칸이 이런 시간적 기준을 마렸했다면 달리 불리게되는 새로운 기준이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에도....... 이렇게 '기원 전'과 '기원 후'가 절대적인 시간의 기준 개념으로 통용되는것을 보면,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는 백인 우월주의 사관이 넘쳐나거나, 아님....... 이제사 바꾸기엔 복잡한 새로운 문제들이 너무도 많이 생겨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당장 불편함이 없으면 이대로 쭉)
결론적으로 인류의 역사 기준은.......... '예수의 탄생'으로 나뉘지만 결국은 기독교의 역사를 기준으로 삼게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기원 전의 역사가 되는 유대교의 역사를 포함하게 된다. 고대가 되었든 선사시대가 되었는....... 그것은 모두 '구약 성경'의 시대요, 그 나머지 이 순간까지의 모든 역사는 '신약 성경'으로 대변되는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타임 캡슐 메모리 카드에 기록하고자 한다면 필히 가장 앞 부분에.......... 예수 탄생 후 2020년 3개월 열흘이 되던 날에........ 어ㅉ구 저쩌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인류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에 왔다가면서 숨을 쉬었던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없는 시간을 절대로 가져볼 수 없다고 해도 허언이나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이렇게 따지자면 사실은 (르네상스)도 오로지 '백인들만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되었건 '기독교의 절대적 영향력 안에서' 오로지 '백인들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백인들끼리만 누렸던' 어떤 특정한 시대에 유럽이라는 한정된 지정학적 영역안에서 벌어진 (시대적 문화현상) 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너도나도 르네상스 르네상스 하는가?
지극히 별 볼일 없는 내 처지로도 르네상스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이렇게 이역만리 타국까지 쫓아다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갑자기 던진다면......... 멍........ 청........ 해 질 밖에.......
그러나 조금만 생각 할 시간을 준다면........ 선문선답이 될지라도 이렇게 말하겠다.
'사람이니까........... 이성과 감성을 가진 내 자신이란 존재를 다시금 좀 더 소중하게 깨닫고 새롭게 발견하고 싶어서...........'
아마도........ 나와 함께 이 여행을 계속하다보면 어디선가 지극히 미미한 답이라도 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A.D 999년.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지 구백아흔아홉해가 되던 해에 유럽은 그야말로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흡사 단테가 글로 써서 그려냈던 아비규환의 지옥 모습이 꼭 그러했으리라.
왜?
성경에 적혀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대부분 요한계시록) 특정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을 거기에 꿰맞추어 지극히 난해하게끔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특정한 날(몇 날 몇 시에)에 세상의 종말이 있을것이라고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사회와 썩을대로 썩은 병든 교회에 기생하는 (시한부 종말론)은 비단 20세기 현대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정확히 1천년 전에도 맹위를 떨쳤던 범 세계적이자 인류적인 현상이자 병폐였던 것이다.
미셀 드 노스트라다뮤스라는 프랑스의 한 유태인 점성술사의 이론과 주장에 의해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1999년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는 예언은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새시대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밀레니엄의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쉽게 다시 설명하자면 '진노하신 신의 심판'이 임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신의 심판이 임해서 인류가 멸망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그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요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해답은 지극히 간단 명료하다.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고 설파하는 사람이나 그릇된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고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심판을 벗어나고 구원을 얻게되며, 좀 더 심하게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승은 그저 잠시 왔다가는 찰라일 뿐이며 이승에서의 모든것은 다 부질없으니........ 오로지 그들에게 절대 복종과 충성을 다하고........ 가진게 있으면 다 팔아서 받치고(하늘나라에는 이미 모든것이 충분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그저 죽어라 짱 박혀서 기도나 드리면서 그들이 말하는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허무맹랑한 주장들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랜초 산타페의 호화 저택에서 '천국의 문'이라는 종말론 사교 집단의 신도 39명의 주검이 발견됐다. 지구에 접근하고 있던 해일-봅 혜성을 뒤따라 자신들을 천상으로 데려갈 우주선(UFO)이 오고 있다 고 믿은 그들은 영혼을 담고 있는 항아리에 불과한 육신을 스스로 버렸다.
도쿄 지하철에 사린 독가스가 살포돼 11명의 행인이 숨지고 5000명이 중독 됐다. 옴진 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노스트라다무스 의 예언서와 요한계시록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가 올 심판을 대신하여 그들 손으로 독가스를 이용해 세상을 심판하려고 했다.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다윗파' 신도 80명이 경찰과 대치중 발생한 화재로 사망했다. 안식교 의 한 분파 지도자인 데이빗 코 레쉬가 요한계시록이 예언한 일곱인을 뗄 어린양이며, 대환란이 일어날 날이 곧 임박했다고 믿어서 자행한 일이었다.
코로나 19 여파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크게 환란을 격고있는 와중에 이들과 비슷한 사례로 모 종교단체가 등장해 화제와 숱한 파란을 낳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지닌 지도자를 중심으로 외부와 단절된 집단생활을 하며, 외부와 자신들을 극단적으로 이분하는 어떤 논리들을 굳게 확신하고 감시와 규율이 엄격하며 이탈(가능) 신도 에 대한 테러를 일삼는 것도 종말론 사교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다.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장시간 집단생활을 하고 이원론적 교리에 세뇌된 다면, 아마도 '멀쩡한 사람'도 얼마든지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사교 집단들이 증명한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인 2000년 1월 1일이 되고, 2일이 지나고, 3일이 되어도.......... 세상은 어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시한부 종말론자)이 말하는 '신의 심판'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삶은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비슷하나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한계와 모순이 명백하게 모두 드러났음에도 그들(시한부 종말론자)들은 결코 사라지거나 포기할 줄을 모른다.
그저 '때'를 잘못 알았고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것일 뿐, '신의 신판'은 '시한부 종말론'은 계속 진행형이라고 스토리를 조금만 수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항상 '거듭 임박했다'라고 하면서....... 그날이 내일 일수도....... 모레 일수도....... 내년 일수도...... 어쩜 영원히 뜯어 먹을 수 있는 '참으로 기가막히게 좋은 명분이자 구실인 것이다'.
그런 (시한부 종말론)이 1천년 전, 정확히 서기 999년 유럽에도 창궐했던 것이다.
당연히 거기에는 교회(로마 카톨릭)의 잘못과 책임이 컸다. 아니 절대적이다.
교회가 제 맡은바 사명과 역활을 다 했고, 병들고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런 밀레니엄 공포에서 유럽은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제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무기로 지극히 높은 권좌에 오른 교회(로마 바티칸)은 하나님의 존엄성만은 지극히 높게 받들면서 그분이 거하시는 교회는 더없이 거대하고 화려하게 만들었을지언정......... 모든 인류를 애초 탄생에서 부터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 하나의 인간은 동물이나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게되었다. 그나마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 원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게 되었는데.......... 그 기회라는 것이.......... 실로 어처구니 없게도........ 교회에 가르침과 요구대로........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고........ 밭을 갈던 장사를 하던 심지어 몸을 팔던....... 생긴것은 모두 교회에 스스로 가져다 바치라는 요구였다. 그러면 그 헌신과 충성 정도에 따라 겨우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 었다.(요즘 티비에 자주 나오는 모 사이비 종교 집단과 별반 다를것이 없었다)
인간은 아무리 기를 쓰고 사력을 다해도 결코 교회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 줄 수가 없었다.
이는 곧....... 인간은 그 누구도 '준엄한 신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영원히 원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받기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런 처지이면서도......... 이승에서의 삶은 지극히 힘들고 고통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죽는것만도 못한 인간의 삶'이라고 모두가 느꼈다.
그러자 노동력과 재화의 손실을 두려워 한 교회가 먼저 선수를 친다. '자살은 신에 대한 불충이며 영원히 가장 깊은 지옥불에 던져진다' 라고........
살아서 뼈빠지게 교회에 가져다 받쳐도 항상 부족하다면서 구원의 손길을 외면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해도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지옥불에 던져진다고 신의 진노를 앞세워 오히려 저주를 퍼붓는 교회이다보니........ 인간은 날아가는 새와 뛰어다니는 들짐승을 부러워하는 처지로 변해갔다.(중세 1천년 동안)
이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서........ 또 실로 절묘한 이 타이밍에서........ 밀레니엄......... 1천년의 한 시대를 가르는 세기말이 도래한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이 등장한 것이다.
어차피 이승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배웠다. 현세는 찰라인 것이다. 다만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 울 뿐......... 또한 자살은 최고로 커다란 죄악이라 배웠다. 절대 스스로 생명을 빼앗으면 영원히 구원받을 명분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세상이 끝난다'는 것이다. 고통스럽기만 하고 그저 찰라 같은 순간일 뿐인 이승에서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야말로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자살이 아니라........ 천사가 내려와 인류를 명망시키던가 어떤 천재지변을 일으키던가........ 아무튼 '자살'이 아닌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방법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온 유럽이 들썩 거렸다. 이제 교회(로마 바티칸)의 눈치를 더 이상 살피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진실편으로 돌아 섰을까?
종말이 다가와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되었을까?
다만, 분명한것은........ 이런 혼란과 이런 시대적 아픔들이 모두 르네상스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뿐..........
그리이스 문명시대에는 신(神)과 인간(人)이 같은 공간에서 어울리며 더불어 살았다.
올림푸스 산 위에는 신들의 영역이었지만, 드넓은 이 세상과 바다는 인간의 영역이었다. 신분상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고 하지만 신과 인간이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그 결과로 중간계의 존재가 생겨나기도 했다. 서로에 대해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상대를 배려하려고 애썼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신학(神學) 철학(哲學) 인문학(人文學)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은 로마에 까지 이어졌다. 로마는 제국으로까지 번성하게 되었지만, 국가가 번영하면 번영 할 수록 문화가 필요하고, 그 문화가 토대로 갖추어져야만 제대로 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 로마의 처음 시작은 무조건 앞선 시대인 그리이스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정치와 군사제도는 물론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서 그리이스를 모방 내지는 답습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모방이 아주 익숙해지면....... 그대는 무엇인가 이제 슬슬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만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스스로 '로마다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다분히 사회 변혁과 정치 권력의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4세기 초 무렵에 느닷없이 (기독교)가 로마라는 제도권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천대를 넘어서 능멸의 대상이었던 기독교가 하루아침에 로마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예수 사후에 예루살렘의 파괴와 로마의 집요한 박해를 피해서 열두 제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페허가 된 예루살렘에는 성전을 지키려는 극히 적은 숫자의 기독교인이 남았고, 이제 교회의 중심은 안티오크나 알렉산드리아로 그 중심을 옮겨갔다. 그리고 많은 순교자의 희생으로 데살로니카를 거쳐서 로마에까지 점차 선교 범위를 넙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기독교의 실질적인 중심은 안티오크나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급했던 로마는 당장 기독교와의 교통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하다보니 범 기독교권의 회의와 토론을 거칠 시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로마에 머물던 지도자들이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종교계의 실권자들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지중해 연안에서 소아시아 예루살렘에 걸쳐 흩어져 있던 실질적인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심한 우려와 함께 비판을 늘어 놓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로마라는 든든한 배경을 선점하게 된 (로마 카톨릭)은 이를 철저하게 외면 한 채, 자신들의 위상을 보다 확고하게 하기 위한 체제 정비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작업이 바로 로마에서 순교한 베드로를 앞세워 장자권(천국의 열쇠)을 내세운 종교를 넘어 권력화된 '로마 카톨릭', 지금의 (바티칸)이 된 것이다.
체계화에 들어간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을 비판하거나 따지고 드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파문' 내지는 '이교도' 심지어는 '마귀' 또는 '악마'라고 덮어 씌우며 자신들의 권위를 확장해 나갔다. 체포. 구금. 재산 몰수. 고문. 유배. 참수형 내지는 끔직한 화형식이 아주 빈번하게 자행되었다.
이제 로마 카톨릭이 거머 쥔 세상에서는 그 어떤 문화나 학문이나 법률이나 제도가 모두 필요치 않았다.
신학(神學)만이 유일하게 권장되었는데........ 이는 신과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고 한걸은 나아가 새로운 관계 모색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연구를 하는 그런 학문 분야가 아니었다. 중세의 신학은 오로지 로마 카톨릭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세상을 좌지우지 하는데 필요한 명분과 방법을 모색하는 학문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철학과 인문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고........ 철저하게 뿌리채 뽑아 내버려야만 하는 분야였다.
신(神)은 논의의 대상일 수 없으며 연구의 대상일 수는 더더욱 없었다. 신은 그저 막연하게 하늘 높은 저편에 머물면서 오로지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을 통해서만 인간사를 통제한다는 논리였다. 인간은 그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원히 구제받을 수 없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이를 속죄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교회 지도자들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외에는 절대 다른 방법이 없다는 논리를 저들은 펼쳤다.
인간에게는 절대적 신성(神性)에 대한 복종과 순종만이 미덕인 세상이 되었다. 신은 그 복종과 순종에 따른 통제권을 모두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에게 위임하셨다. 신은 오로지 로마 카톨릭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이 시기를 역사 학자들은 '중세 암흑기 1천년' 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이스 시대 처럼 신에게 신성이 있다면,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이 있어서 학문으로 발전 시켜왔는데....... 이제 로마 카톨릭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성이나 감성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고귀하고 성스러워야 할 신성에 반하는.......... 최대의 적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고 시키는 대로 '신성'한 기독교인의 삶(시키는 대로 복종하고 가진것을 모두 받치는)만을 성실히 수행하면 그만인 존재로 전락했다. 이성이나 감성은 철저하게 단절시켜야 하며, 이성이나 감성에 의지하고자 함은 곧 '큰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이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존귀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제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잡아먹기 위해서 기르는 가축이 되었거나 평생 부려먹다가 죽게 놔두면 되는 노에로 전락해 버린 존재였다.
철학과 인문학이 죄악시 되고 내팽개쳐진 세상.......... 그것은 한마디로 동물 농장 이라고 해야겠다.
새벽 같이 일어나서 날이 밝아오는 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무심한 듯 세차게 비만 내리고 있다.
숙소에서 정해 준 식당을 찾아 정성스레 준비해주는 터키식 마침 식사를 마치고 따끈한 홍차를 한모금 마시고 나니 새삼 오늘 일정이 걱정된다.
맑은 하늘과 다뜻한 햇쌀을 마주한게 언제였던가? 아니 있기는 했었나?
사흘 내내 잔뜩 찌프린 하늘과 툭하면 내리 퍼붓는 소낙비가 전부였지 않은가?
도대체 오늘을 어쩐다?
다소 부산해지기 시작하는 여행자 거리를 나서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새벽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기 시작하는 것이 보인다.
'저건 도대체 뭐야?'
혹 아침 식사를 유별나게 맛있게 하는 맛집이 있어서 식전댓바람부터 이렇게 줄을 서기 시작하는 것일까?
헌데 아니다.
그곳은 복권 판매방이었다. 오늘이 터키 복권 추첨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처럼 이 골목에 있는 복권방이 꽤나 유명한 명당이란다. 이제사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풍경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자주 보았던 광경이다. 그러고보니....... 동남아의 복권 열기는 터키에 비하면 별거 아닌 듯 싶다.
'한 번만 당첨되면......... 인생이 확 바뀌는거야!!!!!!!!'
가만.......... 철학과 인문학이 사라진 세상에 복권이라면........... 어쩜 '로또도 하나의 종교가 되는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어떤 씁쓸함이 여운처럼 옷깃을 스쳐 지나간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망각하고........ 신(神)이 있으나 마나 한 허수아비로 전락해 버린다면........ 로또(Lotto)가 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로마 카톨릭은 로마 제국은 물론 마침내 유럽 최고의 절대 권력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그것이 긍정적 의미이던 부정적 의미이던 그 로마카톨릭의 역사 위에서 르네상스는 피어났다. 그들은 스스로 이 위대한 백인 문명에 찬사를 보내고 스스로 감격해 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의 뿌리가 유일신 하나님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면........ 그 기원은 당연히 동방(오리엔트)에 있는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하나님과 계약(?)이 되었던 선택을 받았던 최초의 인류를 대표한 히브리인은 당시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생활하던 작은 하나의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나긴 시간동안 광야를 유랑한 끝에 요단 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이르렀고, 먼 훗날 유대민족에 의한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절대적인 신성함을 훼손 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지만......... 유대 신앙의 상당 부분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널리 퍼졌던 인류 최초의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조로아스터 교'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이스 문화에 적용했던 신학과 철학과 인문학을 기독교에 똑같이 적용시킨다면........ 그 시작은 당연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종교와 민족'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르네상스의 그 근원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일테니까 말이다.
하여....... 이 아침에 나는 그 고대 문명을 여기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찾아가 만나보기로 했다.
메소포타미아 고대 역사와 아나톨리아의 역사에서 기독교와 르네상스의 흔적을 직접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서둘러 챠밍여사와 함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아니 이번 여행은 오로지 죽어라 발품 팔아가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나날이다.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스쳐지나가는 트램을 따라 언덕길을 조금만 따라 내려가면 우측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질서정연하게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공원 숲길을 만나게 된다. 톱카프 궁전의 담장 너머로 조성된 이 아름다운 공원은 오스만 시대 제국군대의 행진이 벌어지던 귤하네 공원이다. 옛 성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다시 조그만한 언덕길이 나온다. 유수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언덕 골목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여기저기 그저 아무 의미없이 나뒹굴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석재 조형물이 서서히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여행자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왼편으로 육중한 철문이 굳게 잠겨있고 겨우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쪽문만이 열려진 채 낯선 여행자를 맏는다.
마침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도착한 것이다.
바티칸이나 루우부르나 대영제국 박물관에 비교한다면 그 첫인상이 별로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터키 전체를 통털어 가장 큰, 거기에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나 역사적 가치로 보아 적어도 '세계 5대 박물관'에 꼽히는 대단히 중요한 장소인 것이다.
본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세 개의 별도 영역으로 구분되어 전시실을 따로 가지고 있다.
중앙에 놓인 길고 커다란 그리이스식 건물이 박물관의 본관인 '고고학 박물관'이고, 매표소 옆의 왼편 건물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아나톨리아 지역의 유물'을 따로 구분하여 전시하던 공간인 '고대 동방 박물관'이고, 마당의 건너편으로 '타일 정자 박물관'이다.
그런데 2020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전시실을 전폭적으로 개선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본관 건물을 완전 내부 개조하여 새롭게 전시하는 공사가 한참 진행중인것으로 보였다. 앞서 이곳을 다녀간 두 번의 방문때와는 전시실도 내용도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아뿔싸...........
이 세상에서 터키만큼 고귀하고 아름답고 다양하고 수없이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노천 박물관이 또 있을까?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그리이스 문명이 터키에는 상당히 많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거기에다 고대 페니키아 문화와 카르타고의 문화가 스며들었고, 페르시아 문명이 전래되면서 멀리 인더스 문명까지 스며들어 왔다. 그런가 하면 본래 이 지역의 척박한 산악지역에서 유목민으로 살아 온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베두인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로마가 있었고 비잔틴과 오스만 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다양한 문화의 전시장이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가장 소중한 문명 박람회장이 바로 터키요, 이스탄불인 것이다.
1991년 유럽연합(EU)은 그해 최고의 박물관으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꼽았다.
이제 수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나톨리아와 보스포러스 해 인근에서 벌어졌던 역사를 만나러 들어가 보자.
거기에 앞서서......... 아나톨리아와 보스포러스 인근의 고대사를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꼭 먼저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이야기가 있다.
하여 먼저 한 장의 그림을 꺼내보고자 한다.
터키 고고학의 시작과도 연관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트로이 목마'는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이스라는 영역 안에서 벌어진 그리이스 인들과 올림푸스 산에 사는 신들의 이야기이다. 흔히 그리이스 문명권이라고 부르는 조금은 동떨어진 다른 나라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여기는 터키다. 터키와 그리이스는 이웃하고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에게해에 가로막혀 있고 고대 이래로 쭈욱 역사적으로 서로 비난과 경계를 주고 받는 앙숙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대 그리이스 전성시대에 여기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쪽 해안지역 대부분이(터키의 에게해 지역) 그리이스 연맹 국가였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여기까지가 그리이스 국가연합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곳의 상당부분이 그냥 그리이스 영토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바로 다르다넬스 해협 언덕위에 난공불락의 요새로 굳건했던 (트로이 왕국)인 것이다.
트로이가 다르다넬스 해를 두고 아시아지역의 영토에 기반을 두었었다면, 1차 세계대전에서 엄청난 참화를 불러 온 '칼리폴리 전투'는 트로이에서 겨우 해협을 건넌 유럽지역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이는 그만큼 이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호머의 대서사시에 따르자면 사과 하나를 두고 세 여신의 과도한 경쟁심이 끝내 비극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무용담 끝에 결국은 트로이가 온통 불에 타 멸망하는 비운을 맞게 되지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현실적인 사료를 제시하고 있다.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오로지 해상무역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제해권 다툼이었다. 트로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때문에 생긴 전쟁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길에도 이 길을 지나갔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도 아테네 원정길에 이곳을 통과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전도여행을 떠날 때도 이곳을 지나갔다. 그만큼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을 오가는 대단히 중요한 길목으로 세상의 그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요충지였다.
그런 절대적 요충지에 떡하니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어 놓고 트로이가 들어 앉아 주변을 다스렸다. 트로이는 이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배들로 부터 중계무역으로 부를 이루었고 통행세를 받아 더욱 부강해 졌다. 당시 미케네를 다스리던 위대한 욕심장이 아가멤논으로서는 여간 속이 상하고 비위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부추겼다. 눈에 가시 같은 트로이를 멸망시키고 그 부를 모두 나누어 갖자고 제안했다. 결국 트로이 전쟁은 해상 무역권을 둘러 싼 그리이스 연합군과 트로이 간의 경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피말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잔혹한 전쟁을 시인 호머는 영웅담과 아름다운 사랑이 묻어나는 장엄한 대서사시로 새롭게 창작한 것이다.
피트로클로스가 등장하고 아킬레스가 나오고 마침내 헥토르가 전사한다. 파리스가 화살을 쏘고 아킬레스도 끝내 죽는다. 트로이 목마로 인해서 끝내 트로이는 멸망하고, 유리시즈는 지척에 집을 두고 십년동안 바다를 뺑뺑이 돌게되지만.......... 마지막에 호머는 '극히 일부의 트로이 사람들이 불타는 트로이를 빠져나갔다'고 적었다.
호머를 존경했던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호머가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던 소수의 트로이 유민들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어서는......... '아이네이스'라는 트로이에 정통성을 둔 또 하나의 위대한 영웅을 탄생 시켰다. 트로이 멸망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탈출한 일행중의 한 명이었던 아이네이스는 기나긴 여정을 통과한 후에......... 로마의 건국 시조가 된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정통성의 뿌리를 트로이에까지 연결시킨 위대한 이야기 창조꾼인 것이다. 어쩌면 이는 그리이스가 로마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는 역사적 정당성까지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조의 복수를 한것이니까.......
이 위대한 썰꾼(?)들의 이야기에 심취한 사람이 있었다.
7살에 호머의 책을 선물받은 이 소년은 성장한 후에 '불에 타 소멸된 도시 트로이'에 대한 로망에 인생 전부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의 무용담을 줄줄이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그리이스의 모든 도시와 지명들을 모두 찾아 다녔지만....... 딱 하나. 트로이 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불에 타서 사라졌고 역사속에서 지워졋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 어딘가에 그 트로이가 여전히 남아있을것이라 생각하고 믿었다.
무기 거래와 금광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이룬 '하인리히 슐리만(독일인)'은 1870년부터 본격적으로 '트로이 발굴'에 모든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세상은 모두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그냥 이야기 좋아하는 호머라는 노인네가 지어낸 전설 같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들 생각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슐리만의 집념과 투지는 실로 엄청났다.
여러번의 시행착오와 파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끝내 그는 터키의 서쪽 해안 치낙칼레 인근에서 '트로이 발굴'에 성공하여 세계를 경악시키고 말았다.
비록 어설픈 아마추어 고고학자에 의한 시도이기도 했고 뜻밖의 결과로 착오와 난항도 겪었지만 말이다. 이는 또다시 새로운 비극들을 잉태하게 된다.
슐리만은 결코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존하려는 제대로 된 의식있는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돈 많고, 허영심과 공명에 심취한 장사치에 불과했다.
오로지 '트로이. 트로이'에만 눈이 먼 슐리만은 트로이 유적과 유물을 찾아내기 위하여 다른 유적이나 유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마구 파헤치고 부숴트렸다. 거기다가 그가 발굴한 보물들을 몰래 고국인 독일로 밀반출해 갔다. 도둑질해 간 보물들을 여기저기 자랑꺼리로 선보이며 유명세를 타고 싶어 했다. 2차 세계대전의 말미에 베를린을 침공한 소련군이 이 슐리만이 훔쳐 온 보물들을 모스코바로 다시 훔쳐갔다. 종전 후, 이 보물을 두고 그리이스. 터키. 독일. 소련 간에 심각한 분쟁이 생기기도 했다. 최근에 메르켈 총리가 반환을 또다시 요구했고, 푸틴이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금도 여전히 페트상테스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미케네 발굴에서는 자신의 명망을 드높이려는 속셈으로 일부 유물을 조작하기까지 했다. 다큐멘터리여야만 할 고고학적 발굴에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연출을 가미해 희대의 위대한 가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슐리만은 숭고한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도굴꾼에 유물 약탈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슐리만 한 명의 문제였던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유럽의 문제였다.
영국의 귀족이자 저명한 고고학자 찰스 펠로스 경은 터키 남부의 고대도시 13곳을 발굴하면서 리키아의 조각품 78점을 몰래 배에 실어서 영국으로 가져갔다. 이어 크산토스에서 27점을 더 훔쳐갔다. 대영박물관 고대유물관장이었던 토마스 뉴턴도 고대도시 크니도스에서 데메테르 상과 사자 부조물을 뜯어 훔쳐갔다. 이때 훔쳐간 유물들로 인하여 대영박물관은 세계 최고급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유럽 강대국들의 문화재 약탈은 도를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의도되고 치밀하고 공작되고 수집되는 새로운 국가적 집약산업으로까지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 대상은 화려한 고대 역사와 유산을 가진 개발도상국과도 같은 못사는 나라들이었다. 원조와 개발을 앞세우면서 문명 약탈전이 자행되었다. 당연히 터키는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가장 먼저 노리는 가장 멋지고 우수한 먹잇감이었다.
세계 유수의 대형 박물관에는 어김없이 터키에서 출토된 문화유적들이 수북히 쌓여 전시되고 있다.
발굴과 개발을 내세운 유럽의 검은 손길이 온 터키를 마구마구 헤집고 다녔지만........ 19세기 중반까지 터키인들은 그 실상과 중대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터키 인들에 의해서 주도된 '터키 문화재 보존과 박물관의 역사'가 이제 겨우 130년 정도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유럽 공돌품 상들이나 탐욕스런 열강들의 노다지 밭 노릇을 했을 뿐이었다.
도굴되고 밀반출된 유물과 문화재가 절반만 회수된다고 해도......... 터키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유일무이한 최고의 박물관이 될 수 있을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대영 박물관이 가장 텅 빈 쪽박차는 박물관으로 껍데기만 남게되겠지만........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ay, 1842~1910)'는 화가이자 '터키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위 사진)이다.
이스탄불 이스틱랄 거리에 있는 페라 박물관에 가면 오스만 함디의 상설 전시관이 있으며 그의 대표작인 '거북이 조련사'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다.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파리에 유학하던 함디는 파리만의 독특한 환경에 심취한 나머지 법학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향하였다. 당시 유럽은 오리엔탈리즘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함디는 이 유행 위에다 터키 고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독특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뿐만 아니라 파리 유학생활에서 그는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유럽의 박물관이나 대형 갤러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고대 유물 전시'에 열을 올렸다. 유명한 귀족들이나 대부호들이 엄청난 자금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유럽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르게되는 동방의 유물과 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그리이스에서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에 이르는 인류 문명의 기원과 연관이 있는 고대 유물들이 대부분이었고, 대부분의 유물들은 도굴과 밀반출등을 통해 훔쳐 들여온 문화재들이었다. 뜨겁게 열광하는 유럽인들 틈새에 끼어 전시된 유물과 문화재를 관람하던 오스만 함디는 순간 엄청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전시되고 있는 문화재들이 바로 함디 자신이 살던 마을 어귀와 뒷동산에 뛰어놀던 장소에 있었던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고향에, 그리고 수학여행을 갔던 추억의 명소에 있었어야만 할 수많은 문화재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 이렇게 버젓이 유럽의 박물관과 갤러리에 전시되고, 또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가 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는 터키는 유럽의 부호와 호사가들에게는 최고의 암시장이었던 것이다.
오스만 함디는 서둘러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술탄과 정부 수반들을 찾아다니며 문화재 보호를 역설했다. 유럽이 열광하고 있는 고귀한 문화재의 상당수가 터키에서 몰래 밀반출되고 있다는 유럽의 현실을 피력했고, 마침내 이런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터키 정부가 이를 받아 들였다.
터키 문화재 보호 책임자가 된 오스만 함디는 가장 먼저 '모든 문화재의 해외 반출을 금지' 시켰다. 암시장의 밀거래에 대하여 철저하게 수사를 지휘감독했고, 문화재 도굴과 밀반출에 대한 죄를 대단히 엄하게 최고의 형벌로 다스렸다. 문화재 연구와 발굴을 국가가 직접 지휘 감독하게 하였으며, 연구와 발굴을 핑계로 도굴과 밀반출을 일삼는 유럽인들에게 과감하게 철퇴를 휘둘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시대순으로 구분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새롭게 보관 전시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만든것이 바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다. 그는 초대 박물관장이 되어서 수없이 많은 일을 벌였고 업적을 남겼다.
세게 각지에서 수많은 여행자들이 물밀듯이 터키를 찾아가는 가장 주된 이유가 '고귀한 문화재' 때문이라고 친다면, 이 문화재들이 지금가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오스만 함디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혹, 그가 반세기만 일찍 이런 사업을 벌였었다면 대영 박물관을 비롯한 유럽의 유수 박물관이나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우리는 터키 영토의 본래 유물이 있었던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만약에 그가 한 반세기쯤 뒤에 이런 사업을 벌이게 되었다면........ 셀축이나 예배소의 그 눈부신 유산들을........ 어쩌면 갈라타 타워나 하기야 소피아 성당 조차도 파리나 런던에 가져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벨리스크 하나가 미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것을 보면......... 요즘은 미국이 최고의 시장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겨우 2백년이 조금 넘는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은........ 돈으로 힘으로 역사를 주워 모으려고 혈안인 대표적인 속물강국이기에 하는 말이다.
뒤늦게 올바른 고고학 발굴과 문화재 보존이라는 분야에 뛰어든 터키였기에, 그들의 역사와 가졌던 문화유산을 볼때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 본 사람들 중에 유럽 유수의 대형 박물관들과 비교하여 다소 규모가 적고 기대치에 못미친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물론 발물과느이 크기나 전시물품의 수효에서는 혹 그럴지도 모르겠다. 거진 백오십년 정도 동안을 유럽의 도굴꾼과 밀매상들이 터키를 싹쓸이 하고 지나간 후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진것만드로도 호사가들은 '적어도 세계 5위권의 박물관'이라고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평가한다.
속속들이 전시되고 있는 알맹이들은 세계 그 어느 박물관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최고의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그럼 이제 터키 최고의 박물관 디렉터이자 화가이며 고고학자였던 오스만 함대 베이의 발자취를 따라 진정한 터키의 역사속으로 산책을 나서 보자.
가장 먼저 들리게 되는 곳은 '고대 동방 박물관(고대 아시아 전시관)'이다.
이슬람 문화를 가진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이전까지의 역사를 담고있는 유물들을 수집하여 전시한 공간이다.
희귀하고 소중한 고대 유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 중에서도, 고대 바빌론의 행진 거리와 이슈타르 문(Ishtar Gate)을 장식했던 색색의 거대한 벽돌 판 들이 그중에서도 압권이라 꼽힐만 하다. 벽돌판에는 사자. 용. 황소 등 실제 생존했던 동물들과 상상 속의 동물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 이 타일 부조들은 2.500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보존상태가 아주 뛰어나다. 사자나 신화속의 동물들이 당장이라도 살아서 여행자를 향해서 곧장 툭 툭 튀어나올것만 같이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중에서도 수메르의 우르 제3국의 '우르남무 왕'이 남긴 세계 최초의 성문법인 '우르남무 법전'이 있고, 300년 후의 일이지만 너무도 유명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고대 함무라비 왕의 법전' 일부가 적혀있는 점토판으로 인하여,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박물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분야는 어느정도 고고학이나 역사적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나 중요시 될 사항이라 할 수 있고, 보편적인 여행자들에게 쉽고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위에서 거론했던 바 처럼, 고대 바빌로니아 '느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전'에서 나온 화려한 색채의 타일 부조들일 것이다. 사자와 네발 달린 용과 유니콘과 같은 상상속의 동물들이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시나이 반도에서 출토된 이집트 미이라에 관련된 여러점의 유물들도, 이곳 메소포타미아에 전파되어 온 이집트 문명을 살펴볼 수 있다는 색다른 기회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이 박물관을 빛나게 만드는 가장 유명한 유물은 역시나 (카데쉬 평화 협정문서)가 아닐까 싶다.
기원전 1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 가던 이집트의 신왕국과 또 하나의 거대 세력으로 급성장하던 소아시아 지역의 신흥강국 힛타이트 제국은 현재의 시리아 남부 지역의 주요 거점도시인 '카데쉬'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계속적으로 벌이게 되었다. 서로 물러날 수 없는 피말리는 대치와 싸움이 연이어 이어졌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인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집권 5년 째인 1274년(기원 전) 전차와 5.000 명씩으로 구성된 군대를 네 군데로 나누어 장장 1.600km의 대장정에 나섰다. 그러자 힛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 왕'은 3.500대의 전차와 3만7천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군에 맞섰다. 당시 힛타이트의 전차를 앞세운 전투력은 가히 지상 최고의 수준을 가진 막강한 군대였다.
마침내 막강한 두 제국 군대의 전투는 오른테르 강 서안의 평원에서 시작되었다.
힛타이트가 밀정으로 파견한 두 명의 베두인이 가져 온 정보를 그대로 믿은 람세스 2세는 소수의 호위부대만을 거느리고 서둘러 오른테르 강을 건넜다. 기다렸다는듯이 매복하고 있던 무와탈리 2세의 힛타이트 군대가 람세스를 기습했다.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이 되었지만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와 그의 친위 부대의 저항은 영웅전에서나 나올법하게 사활을 걸고 거세게 저항했다. 마침 파라오의 도강 소식을 접하고 위기를 직감한 장군 한명의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달려오지 않았다면 이집트군은 몰살 당하고도 남을 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집트군은 심각한 위기로 내몰렸다.
궤멸 직전의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이집트군은 더 이상 전투를 치룰 여력이 없었고, 결코 포기할 줄을 모르는 이집트군의 처절한 저항에 혀를 내둘던 힛타이트 군도 점차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은 첫번째 전투에서 얻은 뜻밖의 승리에 만족한 힛타이트 군대쪽에서 이쯤에서 한발짝 물러나는것이 유리하겠다고 판단했다. 힛타이트 무와탈리 2세의 입장에서도 쳐들어 온 이집트군에게 방어권을 행사할 수 밖에는 없었지만,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절대 강국 이집트를 상대로 끝까지 사활을 걸고 전쟁을 계속할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돌려보내 주면서 무와탈리는 람세스에게 군대를 돌려 철수할 것을 권했다. 람세스는 기꺼이 이 제의를 수용하기로 했다.
이집트군대가 철수 하면서 모든 사태는 일단락 되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뜻밖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니까.......
바다를 오가면서 세력을 키워 급성장한 새로운 군대가 나타나 잇달아 이집트와 힛타이트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혀 새로운 위기를 느낀 이집트의 람세스와 힛타이트의 무와탈리는 기원 전 1259년 '카데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세계 최초로 체결된 '국제법상의 조약 체결' 이었다. 당시의 국제 언어인 아카드어로 협정문을 은판에 새기고 람세스와 무와탈리의 서명 후에 서로 한장씩 나누어 가졌다. 쌍방간에 전쟁을 중단하고 상호간에 군사 원조를 약속하며 상대 왕조의 존속에 서로 도와주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평화협정의 결과로 양국가는 이후 60년간 상호간에 조약 내용을 성실하게 지키면서 유대를 계속해 나가게 된다.
지금으로 부터 2.300 전에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협정문이 적힌 점토판이 여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애초의 협약당시 만들어진 은판은 사라지고 남아있지 않다. 당시 보존과 여러군데 나누어 전시를 하기 위하여 점토판에 복사하여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똑같은 세 개의 점토판만이 발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중 하나는 베를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두 개는 여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새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하나 더 있는데, 뉴욕의 UN 건물 입구에 크게 확대 복원된 카데쉬 평화 협정문이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조형물로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진흙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점토판 하나에 2.300년 전의 시대를 앞서 살다간 선인들의 지혜와 삶과 눈부신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고대 동방 박물관을 나와서 너른 마당으로 나서면 왼편 철제망 안으로 마치 고대 노천 석조물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열린 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그중에 여행자의 눈에 가장 선명하게 눈에 띄는것은 바로 '메두사 조각상'이다. 차마 완성까지는 되지 못한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메두사 조각상이 놓여져 있다. 그런데 이는 영락없이 '지하궁전(레비아탄 지하 저수조)'에서 명물로 인정받고 있는 고대 각지역의 신전 기둥들 아래 놓여있던, 하나는 거꾸로고 다른 하나는 반만 거꾸로 놓여있던 메두사 머리 조각상이랑 크기나 모양에서 너무나도 흡사하게 닮아있다.
그 이유는 쉽게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스탄불 모든 도심의 생활용수를 걱정하던 비잔틴 제국은 그 해결방식으로 아주 먼곳에 떨어져 있는 강으로 부터 수도교를 통하여 강물을 끌어들여서는 대형 지하수장고를 통하여 안정적인 생활용수 공급을 계획하였다. 하여 이스탄불 도심의 여러곳에 대형 지하 물저장탱크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지하궁전으로 불리는 레비아탄 저수조는 그 중의 하나였다. 이 지하 물탱크를 건설함에 있어서 비잔틴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역량을 만방에 과시하고저 비잔틴 점령지의 각곳에서 신전의 기둥들을 무작정 서너개 씩 이스탄불로 공수하도록 명령했다. 멀쩡한 신전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지중해 건너편 그리이스 신전의 기둥에서 시작해 이집트 신전의 기둥을 비롯해 멀린 소아시아 건너 고대 페르시아의 신전 기둥까지가 강제로 징발되어 육로로 해상으로 멀고 먼 이스탄불까지 수송되었다. 쏟아져 들어 온 기둥의 모양과 크기와 형태가 모두 제각각 이었다. 비잔틴의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지하 궁전의 규모에 맞게끔 너무나 큰 기둥은 잘랐고, 짧은 기둥은 쪼개고 나누어 이어 붙였다. 그리고 아주 애매한 크기의 기둥을 고여 지탱하고자 인조 받침돌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메두사의 머리 조각상이었다. 어떤 이유로 반만 뒤집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설치하였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박물관 마당의 채 미완성으로 남겨진 같은 모양과 형태의 조각상들은 그 해답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박물관 마당의 조각상은 뒷면이 입술부분만 남아있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어쩌면 야누스의 조각상 처럼 앞 뒤가 전혀 다른 표정의 조각상이 아니었을까?
마당을 가로지르면 흡사...... 우리나라 경복궁 입구에 놓였던 옛 국립중앙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신고전주의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그곳이 바로 오스만 함디 베이가 혼신을 쏟아부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본관) 건물이다. 살아있는 터키의 역사이자 수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터키인들의 자부심이다.
1881년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오스만 함디 베이는 시돈의 네크로폴리스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작업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그저 세월만 지나보내고 있었다. 여러해가 지나서 인근의 엉뚱한 곳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시돈 외곽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고대 석관이 묻혀있던 한 묘지를 발견했다. 지하 10미터 아래 고대 석관이 묻혀있던 그곳은 바로 함디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왕실 지하묘지였다.
오스만 함디는 서둘러 한걸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묘지는 두 개의 커다란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습기방지와 방수에 나름 철저하게 대비한 흔적들이 역력해 보였다. 일곱개의 방으로 구성된 첫번째 구조물은 사람 모양의 이집트 석관이 묻혀있는 방을 제외하고는 이미 모두 도굴꾼의 손길이 거쳐지나고 난 후였다. 하지만 다행이도 두번째 건물은 도굴꾼으로 부터 전혀 피해를 입지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오스만 함디는 이 유물들을 하나하나씩 철저하게 발굴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이스탄불로 옮겨갔다. 첫눈에 그는 알아 볼 수 있었다. 도굴꾼으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 유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인류의 유산인지를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스만터키 정부는 서둘러 시돈에서 발굴된 이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박물관을 지었고, 1891년 마침내 완공된 박물관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었으며, 시돈에서 박결된 석관 유물은 오늘날 (알렉산더 대왕의 관)이라고 불리워지는 석관이다.
고대 시대에 '시돈'으로 불리던 땅은 지금은 레바논의 영토인 '사이다'의 옛 지명이다.
-- 시돈에서 출토 되어 '알렉산더 대왕의 관'으로 알려딘 석관.
--- 창을 든 채 적군을 공격하고 있는 흰사자의 투구를 쓴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고고학 박물관의 계단을 올라가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그리이스 로마시대의 조각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고 있다. 대단히 강력한 인상이 풍겨나오는 곳이다.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의 조각상들이 즐비한가 하면, 표정과 움직임이 그대로 살아있는 빼어난 장인들의 조각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고, 또 그런 특징들이 잘 드러나도록 빼어난 전시 공간의 조명과 설치와 배치 또한 세계적인 수준임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레바논의 시데에서 발굴된 석관 부조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어서 오랫동안 학자나 관람자들은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라 여겼고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추가적인 고고학적 발굴과 활발해진 역사적 고증과 연구속에 내려진 결론은,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의 강력한 후원 덕분에 시돈의 왕이 된 '압달로니무스'가 존경하고 감사한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을 자신의 관에 새겨서 대왕의 은혜를 잊지않고 오래오래 간직하는 징표로 삼고자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고, 다른 학설로는 바빌론의 통치자인 '마제우스'가 대왕을 너무도 흠모하여 새겨 넣었다는 추론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암튼 현재까지는 알렉산더 대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비록 석관의 주인이 누군지는 아직 분명학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나갈것만 같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조각들은 그 부조만으로도 실로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하다.
이 석관은 현존하는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모든 조각물을 통털어서도 아름답기로 손에 꼽히는 최고의 명작이다. 1895년 독일의 빌헬름 2세가 히포드로모스에 아름다운 정자를 지어주면서, 슬쩍 이 석관을 독일에게 선물해 달라고 요청이자 협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오스만 함디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 결사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 빌헬름 2세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외에도 이곳에는 헬레니즘 시대에서 로마시대까지 지중해 연안과 소아시아지역에 퍼져있던 조각상들과 석관들이 주로 이 전시실에 모여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오르다보면 중간에 둥근 원형의 커다란 대리석 부조상에 멋진 인물이 조각되어 걸려 있다.
처음 이곳에 들렸을 때, 흡사 그리이스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메두사 부조인줄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독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며 다부지고 강렬한 인상을 내뿜고 있는 이 인물은 다름아닌 알렉산더 대왕의 부조상이다.
그런데........... 아뿔싸..........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앞두고 그만 발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2층은 완전 폐관을 한 채 내부 전시공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하긴 1층의 전신 공간도 부분적으론 제한되어 있는 상황이다.
어찌 안타깝지가 않겠는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2층에 오르면 우선 '알렉산더 대왕의 두상'이 가장 먼저 전시되어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성을 수호하던 해저 저지선이던 철구조물과 이의 사용을 나타낸 그림이 있었고, 히포드로모스 광장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 시대의 콘스탄티노플 지도와 풍경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이었는가?
고대 그리이스의 트로이와 프리기아 시대의 유물들과 시리아. 키프로스. 레바논 등에서 발굴된 방대한 량의 유물들이 고스란히 2층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모두 볼 수가 없는것이다. 1년 전의 여행에서는 모두 볼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술탄의 투구를 비롯한 이곳에 소장된 상당수의 유물들이 몇년 전에 멀리 대한민국까지 날아가 '터키 특별전'을 가지기도 하였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제대로 보려면 어쩔 수 없이 또 한번 이스탄불을 찾아와야만 하게 생겼다. (2/3 정도만 볼 수 있었다면 당연히 입장료를 그만큼 내렸어야 하는게 아닌가? 사전 홍보도 제대로 안되어 있으면서 말이다)
본관을 나와 마당을 건너 (타일 정자 박물관)으로 들어섰는데........ 방금 나온 본관 2층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숱제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물론 세번째 방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6개의 방과 중앙홀에 셀주크 터키 시대와 오스만 터키 시대의 도자기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고, 비교적 가까운 인근 도시라 할 수 있는 이즈닉이나 치낙칼레의 도자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도자기들 만큼이나 짙푸른 검은 청색의 타일이 수놓아진 아름다운 이 전시공간은 콘스탄티노프을 점령한 메메트 2세가 왕궁의 부속건물로 지은 건축물이다. 이스탄불에서 자미(이슬람 사원)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꼽힌다.
이스탄불 여행의 기록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아쉬움 속에 미처 다 돌아보지 못한 곳들도 그만큼 많이 남겨놓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스탄불이 이번이 마지막일 수는 없을터이니....... 언젠가 '리키안 웨이 트래킹'도 해야만 하겠고, 그리이스와 엮어서 페티예나 안틸랴 도 가보아야 하겠고, 넴룻산 트래킹과 산느우루파와 하산케이프도 돌아보려면 꼭 닷 돌아와야만 할 이스탄불이 아닌가?
챠밍여사에게 카파토키아는 일생에 단 한번일지라도 꼭 보여주어야만 한다.
하여 아직 남아있는 기록중에서 '지하궁전(예레바탄 저수조)'과 '불루 모스크'도 그냥 건너 뛰어야만 할것 같다.
훗날 여행에서 불루 모스크는 이번 여행기의 하기야 소피아 만큼 집중 탐구하는 장을 별도로 만들어서라도 말이다.
아직 이번여행의 시작점인 단계에서 너무 이스탄불 여행기의 분량이 길어진 탓도 있겠다.
이스탄불의 하늘은 끝까지 우리에게 배려를 거부했다.
마지막 날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시간은 제법 밤이 이슥한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무심하게도 폭우가 심하게 내리 퍼붓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온종일 잠시 그쳤다 싶으면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붓는 지독스런 끔찍한 날씨였다. 내 여행 이력에 언제 이런적이 있었던가?
비를 맞고 먼곳까지 가서 캔맥주(이슬람 국가라서 술이 귀함)를 사고 후라이드 치킨으로 저녁을 대신 해결한다.
많이 피곤했지만....... 이제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거의 없기때문이다.
우선 배낭을 다시 꾸리고......... 샤워를 한 후에 아주 짧은 휴식에 들어간다.
피곤함 보다는 어떤...... 시간적인 아쉬움에 차마 짧은 시간일 망정 쉽게 눈을 붙이지 못한다.(여행 다니면서 매번 비슷한 상황때마다 늘 격는 같은 심정이지만.....)
2019년 12월 31일 새벽 2시반. 여기는 이스탄불의 시르케지..........
요란한 뇌성벽력과 함께 하늘에선 여전히 세차게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다.
맑은 심성, 고운 소리를 가진 소시민으로 그동안 살아왔지만 이럴때는 정말........... '우라질...... 날씨야. 너 고따위로 밖에 못해? 썅 ** **!'
올 때도 이러더니........ 끝내 떠나는 순간까지 하늘은 우리를 저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상황에 절대로 굴복하는 커플이 아니다.
인생사던 여행사던......... 이미 이골이 날때로 난 우리가 아닌가?
비옷도 우산도 없이 씩씩하게 배낭을 메고 빗속을 걸어나간다. 시르케지에서 하기야 소피아 성당 앞까지 언덕길을 걸어 올라간다.
세상이 모두 고요속에 잠든 이 새벽에 말이다.
이런것이 우리의 여행 방법이다. 거진 늘 이런식이다. 아마도 남들에게는 이런 스케줄 진행이 좀 어렵겠지만 말이다. 나름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이스탄불 신공항을 오가는 (하비스트 버스)는 거의 30분마다 24시간 운행된다. 여기 올드 타운의 출발지이자 하비스트 버스의 종착지가 바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 정문 앞에 있다. 올드 타운에서 신공항까지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렇게 깊은 새벽 운행에 교통 체증이 없으면 40분이면 넉넉하게 도착한다.
오늘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가 5시 15분에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종일 걷느라 피곤했을만도 하건만.........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태리할망구(챠밍여사) 내 배낭과 비슷하게 족히 13KG 정도가 나가는 배낭을 메고 이 내리 퍼붓는 빗속 밤길 언덕을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어나간다.
도착과 동시에 하비스트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정시에 출발해서 다소 이른시간에 신공항에 도착했다.
보딩패스하고 출국심사하고 조금 걸어서 출국 게이트에 도착하니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이스탄불 신공항을 둘러보고 커피도 마시고 쇼핑도 하고.......... 마침내 우리는 예정된 비행기편에 올랐다.
이제 우리는 (몰타)로 간다.
우리의 새해(2020년)를 이번에는 몰타에서 맞이하고 시작할 오래된 계획이다.
'Happy New Year!!!!'
몰타(Malta)?
언제부터인가 한국인들에게 영어 어학연수지로 인식되기 시작하더니만 점차 여행지로서도 각광을 받아가고 있는 유럽의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몰타)라는 국가 이름조차 모르던가 심지어는 들어본적 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형편이다.
몰타에 대해서 무엇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더하여..........
르네상스와 몰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어찌되었거나 분명한것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몰타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만약 몰타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럽은 한참이나 이전의 중세로 거꾸로 돌아가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몰타을 찾아갑니다. 저로서는 세번째 방문이고, 태리할망구(챠밍여사)로서는 첫번째 방문이자 여행지 입니다.
이번 몰타여행에서는 세계사와 서양 미술사에 대해서 더 많은것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부터는........ 르네상스를 찾아가는 여정에서의 (몰타) 입니다.
-----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몰타 여행기에서 뵙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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