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와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홍차의 향기는 아니다.
유목민의 후예인 터키인들은 거친 빵과 버터와 꿀 같은것을 오래전부터 먹어왔기에 그 약간의 느끼함을 잡아주기 위해 주로 홍차를 이용해 왔다.
식후의 홍차 한잔은 입과 속을 개운하게 해주고 정신을 맑게 해준다.
예전의 여행에서 만났던 흑해 연안 리제 출신 청년의 고향이었던 터키 최고의 홍차 생산지와 홍차에 맛과 효능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바 있다.
터키인들은 언제 어디서건 홍차를 즐겨 마신다. 하루에 대여섯잔은 기본인것 같다. 그들의 홍차 사랑은 그저 흔한 일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국땅에서 오래전의 시골생활을 경험해본 나로서는 항상 느끼게 되는 생각이, 비록 그 홍차가 고급이던 아니던 항상 커다란 가마솥에 볏집을 가득 썰어넣고 푹 삶아서 소 여물을 끓이다가 솥뚜껑을 열었을대 뿜어져 나오는 허연 수증기와 함께 풍겨나오던 바로 그 냄새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지금 풍겨오는 향기는 그런 홍차의 냄새가 아니다.
향긋하면서도 구수함 보다는 훨씬 더 진한........ 아주 약간은 그을리거나 타는듯한 짙은 내음이다.
나는 자미 옆쪽으로 난 작은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분수대가 있는 너른 광장이 나온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주로 붉은빛의 식탁보를 두른 수많은 테이블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다. 노천 카페다.
그리고 그 향기는 바로 터키식 커피의 향기였다.
커피의 종주국 터키.
축구의 종주국이 영국이라면 커피의 종주국은 터키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하겠다.
커피의 원산지는 에디오피아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종주국은 오스만 투르크 였다. 바로 터키다.
그동안 터키 여행때마다 자주 마셔오던 터키 커피였는데, 적어도 이 순간은 무엇인가가 다르다. 이런 진한 향기와 이런 정취는 처음이다.
터키 커피.
잔잔한 여운과 오래된 추억같은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진한 갈색이다.
뭐라고 좀 표현을 하고는 싶은데 딱히 꼬집어 설명할 방도가 없다.
꼭 그런 맛이다.
터키 커피는 에스페레소 보다도 더 깊고 자극적인 맛이다. 구수한 맛이라는 표현은 터키 커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스탄트 커피나 드립 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바베큐나 훈제 같은 불맛이 느껴진다고 할까? 터키 커피의 향기에서는 아주아주 조금 탄내가 난다.
홍차도 아닌것이 와인도 아닌것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고 매료시키고 유혹한다.
흔히들 와인을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자 축복이라고 한다.
커피는 신이 내려주시는 위로이자 용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커피 없는 인생을 나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와인을 아주 좋아하지만, 와인 없는 인생은 살아갈 수 있지만 커피 없는 인생은 살아갈 수 없을것만 같다.
부르사에서 나는 지금 '인생 커피'를 경험하고 있다.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터키식 커피.
동서양의 충돌이었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유럽인들은 처음 커피를 접하게 된다. 회군하는 그들을 따라서 커피가 유럽에 전해졌다.
처음 진한 갈색의 커피를 한모금 맛본 십자군의 리더들은 어떤 표정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맛을 어떻게 느꼈을까?
초등학교때 내 부친과 함께 사냥을 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미군들이 있었다. 그들 손에는 이제까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가지가 항상 들려 있었다.
하나는 아주 까만 넙쩍한 과자였는데 바로 쵸컬릿 이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대하는 그런 쵸컬릿이 아니다. 원액으로 만든 아주아주 진한 쵸컬릿이었다. 우리 식구나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것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비위가 상할 정도라 했다. 그런데 내 입맛에는 꼭 들어 맞았다. 매번 모두가 내 차지였다.
두번째는 하얀 분말 가루였다. 당시 보건소에서 하얀 분말의 우유가루를 배급을 주던 시대였는데, 그런 우유가루가 아니었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소고기 스프 분말 가루라 하면 이해가 쉽겠다. 미군들은 그 분말가루를 대접에다 붓고 물을 휘저어서 한겨울 마루에 내어 놓았다가 살어름이 생기면 가져다가 다시 휘휘 저어서 미수가루 마시듯이 마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다. 지금 같은 고체 상태가 아니라, 차거운 반숙 비슷한 상태의 아이스크림 이었다. 맛도 지금의 신선한 여러 과일향이 아니라 아주 약간 느끼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도 내차지였다.
세번째는 까만 갈색 분말 가루였다. 누런 봉투를 칼로 자르면 안쪽으로 하얀 빛을 띤 은박지가 내포장 되어 있었다. 그 안에 검은갈색 분말이 가득 들었다. 엄마가 물을 끓여다 주면 대접에다가 까만갈색 분말을 조금 쏟아 넣고 휘휘 저으면 꼭 한약을 닳인것과 닮았는데 향기가 약냄새가 아니었다. 그리고는 돌아가면서 한모금씩 마셨다. 그들은 진한 커피보다 옅은 커피를 양으로 마셨다. 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이것도 당연히 내 차지라고 생각하고 한모금 마셔 보았는데...... 미국 사람들도 향기가 다른 쓰디 쓴 한약을 그렇게 매일 자주 먹어야 하는지 그때 알았다. 나는 아픈데가 없어서 그 요상한 한약은 극구 사절했다. 그것이 커피와의 첫 만남이었다.
강한 열기에 볶은 원두를 곱게 부수어서 끓여내는 진한 터키식 커피는 이브리크 라고 부르는 기다란 손잡이가 달린 앙증맞을 정도로 귀여운 국자를 이용하여 커피를 추출하는 모습이 무척 신기하다. 그야말로 신통방통의 끝판왕이다.
이브리크(작은 국자) 속에 커피가루와 물을 넣고 가열한다.
숯을 이용하여 직접 가열하기도 하고 실내에서는 가스불 위에 열판을 얹고 그 위에 고운 모래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달구어진 모래 위에 이브리크를 얹어서 열을 가하기도 한다.
이브리크에 점차 열기가 전해지면 서서히 거품이 뽀글뽀글 생겨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끓어넘치려고 하면 즉시 불에서 거두어 내린다. 그대로 잠시 식히기도 하고, 물을 한 두방울 떨어트려 식히기도 한다. 거품이 모두 잦아들었다 싶으면 다시 열을 가해 끓인다. 거품이 일어 넘치려 하면 내리고, 식으면 다시 올리고를 서너 번 되풀이 한다. 물이 끓는 온도는 커피 추출에 적당하지 않다고 한다. 커피 추출에 알맞은 온도는 80도~90도 사이의 뜨끈한 물이다.
적당한 물의 온도와 알맞게 거품이 일어나는 타이밍이 커피의 맛을 좌우한다. 덜 볶아진 원두를 사용하면 거품이 적게 생긴다.
이브리크에서 추출된 커피를 잔에 옮겨 담는다.
터키식 커피는 조금 기다렸다가 마셔야 한다. 흔히 우리네 방식으로 섣불리 입으로 가져갔다가는 순간 모두 '에퉤퉤' 하게된다.
커피잔 안에 함께 담긴 분말 가루가 가라앉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이쯤에서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것은....... 에스페레소 보다도 더 맛과 향이 강하고 자극적이기 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현지인들은 미리 소금이나 버터를 아주 조금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기호에 따라 향신료를 첨가하기도 한다.
에스페레소 처럼 물을 한잔 가져다 놓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각설탕을 2개반 넣고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이것으로 끝이냐?
아니다.
하얀 천(손수건)을 탁자에 깔고 방금 마신 커피잔 아래 가라앉아있는 분말을 천 위에 냅다 엎어서 쏟았다. 그 쏟아진 형태와 문양을 보고 점쾌를 쳤다고 한다. 고대의 왕들과 점술가들은 이 커피의 점쾌를 대단히 신뢰했었다고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믿거나 혹은 말거나.
가끔 나는 내 자신에게 한번 들어보라고 혼자 곧잘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핸디폰을 꺼버리니까 확실히 달라지는 것이 있지? 그럼 이번엔 지도를 던져버려. 지도를 던져버리고나면 새로운 여행자의 길이 생겨나는거야' 라고.
복잡한 도시를 처음 만났을 때 한나절 정도 손에 지도가 들려 쥐어져있을 뿐이데도 또 자기최면을 걸고는 한다. 그럼 이번엔 내 머릿속의 또 다른녀석에게 이렇게 되묻곤 한다.
'지도는 치울 수 있지. 그럼 이미 머릿속에 새겨넣은 지도는 어떻게 해? 그 기억이라는 놈도 딜레이트 버튼 눌러서 지워버리고 그냥 도시의 유랑자가 되어보라는 거야? 부르사의 올드 미아?'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런게 바로 여행 아니겠어?'
길을 잃어버려야만 진정한 여행자의 길이 나타난다는 진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사기 같기도 하고........
'모든것은 인샬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내가 의도를 하던 하지않던 예상치 못한 일이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고, 또 예상치 못한 그 일이 꼭 나쁜 일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것을 회피하고 두려워할 사람이라면 애초 길을 떠나오지도 않았다.
닐 영의 노래 (Heart of gold)에 실려있지 않았던가? 마음의 진실을 찾아가는게 여행이라고, 그것은 아마도 영원한 여행이 될것이다.
나는 그의 노래중에서 (For strong winds)를 가장 좋아한다. 사방에서 외로운 바람이 불어오면 나는 떠날거야. 그리고 언젠가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땐 너를 가장 먼저 찾을 거야........
그래 오늘은 닐영이다.
(For strong winds)와 함께 걷는 날이다.
모진 바람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만나고,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도 만나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서 환하게 미소를 나눌수 있는 그런 오늘을 나는 기대한다.
참으로 오랫만에 왜 갑자기 닐영이 떠올랐는지는 알지못하겠지만, 아마도 오래오래 '부르사'는 (For strong winds)로 기억되는 그런 하루가 될것이다.
부르사의 중심인 헤이켈 지역에서 동쪽으로 첼레비 마호멧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 울루산(그리이스 시대 올림프스 산)에서 발원하여 부르사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계류인 굑 하천(Gok dere)이 난타난다. 계곡의 상류로 여러 노천카페가 들어서있어 브르사 주만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이 계류가 흐르는 한천 위로 노란색 건물이 지어진 예쁜 다리가 나타난다.
으르간디 다리(Irgandi Bridge)라 부른다.
짧은 다리위에 예쁜 상가 건물이 늘어서 있는 교상복합(橋商複合) 건축물이라 해야겠다.
여행자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를 최초의 교상복합 건축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점에 있어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리 위에 상가 건물이 들어선 다리를 쉽게 '교상복합 건물'이라고 칭하는데, 이 세상에는 어찌찾아보면 수많은 복합 건물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교상복합 건물로 대략 4개의 대표적 건축물을 꼽고 있다.
첫째가 유명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끼오 다리(Ponte Vecchio)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베기오 다리를 교상 복합건물의 효시로 여기고 있다.
둘째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인데 초기 목재다리로 건설되었다가 후에 석재 다리로 새로 건설되었다.
세번째가 바로 부르사의 으르간디 다리다.
네번째는 불가리아 오삼(Osam) 강 위에 건설된 오삼 다리(Covered Bridge)로 세간에 그렇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으르간드 다리는 1442년, 그러니까 15세기 중엽에 지어졌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반면 베끼오 다리는 14세기, 그러니까 1300년 대에 다리가 건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베기오 다리가 으르간디 보다 100년 정도 앞서 건설된 것은 맞다. 하지만 1300년대에 건설된 베끼오 다리는 처음 건설당시 교상복합 건물이 아닌 그저 순수한 교량에 지나지 않았다. 이 다리 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푸줏간과 야채를와 생선을 파는 노천 시장이 들어 서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서 1565년 피렌체 공화국을 차지한 코시모 데 메디치가 정적들의 암살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의 집무실인 베끼오 궁전과 주거지인 피디 궁전 사이를 모두 자신의 건물들로 연결해 출퇴근 전용통로를 개설하던 중에 사이에 아르노 강이 가로막자 베끼오 다리위에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한 2층건물 코리도이오 바사리아노를 건축했다. 2층은 자신의 전용 통행로가 되었고, 1층은 푸줏간과 생선가계를 모두 내쫓고 금은 세공점과 고급 피혁가계를 상주시키게 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져 있으나, 교상복합 건물로 역활을 시작한것은 분명 1565년 부터가 된다.
으르간드 다리는 1442년 무슬리히딘 이라는 부유한 상인이 부르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다리를 건설할것은 술탄 무라트 2세에게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교량 건설에 자신이 공사비를 부담할것을 전제로 교량 위에 상가를 지어 부르사 교역의 일부를 담당하게 해줄것을 술탄에게 건의 하였다. 이를 납득한 무라트 2세는 건축가 티무타스에게 명하여 다리를 건설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후세의 사가들은 연도에 근거해서 이 다리의 건설을 티무타스가 이닌 그의 아버지이자 건축가였던 알리가 실제 건설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다리는 애초 계획과 설계와 준공에 있어서 교상복합 건축물로 지어진 어쩌면 최초의 복합건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리 형태는 베기오가 근 1백년 앞서지만, 교상복합의 용도로는 오르간드가 오히려 베끼오오 1백년 이상을 앞선것이다.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통로 양쪽으로 각각 16개의 점포가 들어섰으며, 저녁에 마감시간이 되면 다리의 양쪽으로 철문이 닫혔었다고 한다.
정부 공인 시장이었던 것이다.
규모도 크지않고 아담하지만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고 하겠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복원된 다리 위 상가에는 카페와 수공예 기념품 판매점이 들어서있다.
으르간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앞에 옛 오스만 정취가 가득 묻어나는 고풍스런 건물이 서너채 밀집해 있는데 '부르사 전통 문화원'이라 해야할까?
낡은 건물을 수리하느라 위험과 접근금지를 나타내는 표지판과 저지선이 설치되어 있다.
오스만의 전퉁 무슬을 나타내는 커다란 청동상도 설치되어 있다.
잠시 둘러보다가 지나치려 하는데, 어디선가 불쑥 미니버스 두대가 다가오더니 전통 무술공연단 복장을 한 청년들이 쏟아져 나온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하러 오는 학생들이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에 오르한 가지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군악대인 메흐테르(Mehter) 연주회와 전통 춤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전통 공연의 제목은 클르츠 칼칸(칼과 방패)으로 칼과 방패를 휘두르며 전투 장면을 재현하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춤 공연이라고 한다.
전혀 꺼리낌이 없는 이 청소년들은 낯선 이방인인 내 앞에서 전혀 꺼리낌 없이 몇가지 시범까지 보여준다. 그들 또한 k-pop에 심취해 있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활기차고 호기심에 가득한 청소년들. 그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앗 살람 왈레이쿰.'
'왈레이쿰 앗 살람.'
언덕을 거슬러 내려가면서 경쟁에서 밀려난 소시민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세상 어디에나 자본주의의 기본 생리는 다 똑같아 보인다. 한발 밀려난 사람들의 삶은 다소 버거워 보이고 그네들의 어깨는 쳐져있다. 하지만 모두 웃는다.
굑 하천을 다시 건너오면 대단히 큰 광장과 공원이 나온다.
탁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이곳이 예전에 터미널이었던 곳으로 보인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그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부르사 테르미날이 이곳에서 30분 떨어진 외곽으로 이전하고 공원이 조성된것일 것이다.
다리 옆으로 커다란 교차로가 있고 커다란 버스 정류장이 두곳이며 주변으로 수많은 택시들이 늘어서 있다.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아주 예전엔 부르사 시장을 이용하는 아나톨리아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다 타고온 마차를 세웠을 것이다. 저렴한 주막과 숙소들이 빼곡히 들어섰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퉁이를 돌아가보니 마주 보이던 노란 건물이 트램 차고지다. 두칸짜리 아주 작은 초록색 트램이 한대는 안에서 정비중이고, 한대는 밖에서 대기중이다.
부르사에는 트램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형 빨간 트램으로 부르사의 번화가를 통과해서 시내와 시외를 순환한다.
하나는 아주 옛날 운행하던 올드 트램으로 바로 여기 이 초록색 낡고 작은 트램이다. 장남감 같다. 이 옛날 트램은 여기 종점이자 차고지에서 부르사 옛거리와 구 시장거리를 관통해 반대편까지 일직선으로 약 1.5km만 운행한다. 그러니까 여기가 버스 정류장이고 화물차가 놓여있는 주차장이라면 이곳에서 시장까지 짧은 거리를 사람과 짐을 옮겨주는 역활을 트램이 했던 것이다. 도심 시장의 혼잡과 안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참 뒤 초록색 트램의 운행을 목격했는데 손님이 거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짐을 잔뜩 들은 할머니들이랑 호기심 많은 여행객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부르사의 상징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듯 보인다. 귀엽다.
시장의 번화가가 아닌 뒷거리를 걷고 있는데도 늘어선 가계들의 규모가 크고 잘 정리 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르사 시장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대로 이 길을 쭈욱 걸어가면 트램 노선의 중간쯤이 번화가로 연결되는 골목이다. 중심상권인 셈이다.
그 번화가로 부터 왼쪽으로 재래시장이 늘어 섰고 그 안쪽으로 여러 자미에서 관할하는 전통시장이 빼곡히 붙어서 있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이다. 약 5.000개의 점포를 자랑한다. 그런ㄷ 내가 둘러보기에는 부르사의 전통 바자르 또한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 버금간다. 더 크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결코 더 작지도 않아 보인다. 단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는 단 하나의 시장으로 형성된 것이고, 부르사의 바자르는 여러개의 시장이 엉겨 붙어서 커다란 하나로 보이고 느껴지지만, 다지고 보면 여러개의 시장으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탄불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면........ 부르사는 다양하고 풍성함으로 넘쳐난다.
터키에서 풍요로움과 싱싱함이 넘치는 광경을 찾는다면 당연히 부르사 재래시장으로 가라. 세상의 모든것이 다 그곳에 있다. 기분 좋은 행복이 부르사에 있다. 장시간 여행에 지친 사람에게 부르사는 가히 지상낙원이다.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바가지 상혼이라는 것이 부르사에는 없다. 아예...... 그리고 전혀 없다.
손님과 현지인이 있을 뿐이지. 여행자와 장사꾼의 빡빡한 관계가 부르사에는 없다.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과 오스만 트르크 정신을 계승하는 무슬림으로서 매우 보수적이기는 하나, 그들에게 여행자는 신께서 보내신 선물인 것이다.
친절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부르사 사람들이다.
수양을 하던 요양을 하던 한동안 조용히 쉬면서 진정한 휴식을 원한다면........ 세상에 부르사만한 곳도 없을것 같다. 무념무상으로 지낼 수 있는 곳이다.
누군가 카파도키아를 다시 가자고 하면 나는 심각하게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본 후에야 결정을 내릴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사에 다시 가자고 한다면 일절 망설일 필요가 없다. 굳이 나에게 확인을 할 필요도 없다. 언제든 콜 이다.
비는 언제라도 한번 호되게 내려뿌릴 모양으로 잔뜩 찌프렸다가 개였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번화가를 향해서 꾸준히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저만큼에도 또 한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호기심에 이걸 그냥 지나칠수가 있겠는가?
일단 늘어선 줄의 끝자락에 가서 기웃거려 본다. 혹시나 이게 현지인에게 만 해당되는 일이라면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머뭇 거리며 주변을 맴돌자 히잠을 쓰신 할머니 한분이 내 옷깃을 잡아당기며 무어라 무어라 하신다. 자신 앞에 줄을 서라는 뜻인가보다. 열심히 말씀을 하시는데 그 설명을 내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당신 한국인이요?'
보라색 셔츠에 안경을 쓴 오십대 초반쯤의 사내가 다가와 영어로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야기를 꺼낸다.
'이슬람식 전통 행사라 보면 돼요.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이 세상 누구에게나 똑 같이 열려있는 나눔의 자리니까요. 한국인 여행자라...... 그럼 손님인데....... 손님을 길게 뒤쪽에 줄을 세울수는 없지요. 이리 나오세요. 날 따라와요."
'아뇨. 배려는 고맙지만 순서라는게 있는거지요. 여기서 기다릴께요.'
'아뇨. 괜찮아요. 손님이니까요.'
그 사내가 주변에 줄을 선 사람들에게 터키어로 뭐라뭐라고 하자 줄을 서고있는 모두가 나를 가리키며 앞으로 가라는 손짓을 보내온다. 거 보라는 듯 사내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아 끈다.
끌려가다시피 앞으로 갔다.
커다란 통에서 커다란 국자로 일회용 용기에 음식을 담아 준다. 맛과 의미는 동지섣달 그믐날에 지나가는 행인에게 팥죽을 선물하는것과 비슷했고, 비쥬얼은 팥빙수 토핑이 따끈한 국물에 말아있는것 같다고나 할까?
내가 음식을 받아들자 말자 사방으로....... 주변에 일백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 나에게 쏠리고 있다. 헐. 낯선 동양인인데다가 무슬림들의 전통 나눔행사에 불쑥 뛰어든 꼴이 되었으니..........
나를 안내한 사내는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다. 맛있게 먹어달라'고 하고는 배식하는데 뛰어들었고, 쏟아지는 눈초리에 나는 그냥 도로 한복판에 일회용 음식 용기를 들고 멍청히 서있다. 벤치에 앉아서 음식을 드시던 할머니가 내가 보기 딱하셨는지 다가와서 미렇게 먹는 거라고 시늉으로 가르쳐 주신다.
감사를 전하고 돌아서서 가로등 전봇대 옆에서 서서 먹어보는데......... 사람들 시선이 따가와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는다.
그것 참. 이넘의 인기는 세게 어디를 가나 수그러들지를 않으니..........
잠깐 밥먹을 틈도 안주고 쏟아지는 시선들이란........ 밖에 나가면 아이돌 하나도 안부럽다. 내가 바로 코리안 올드돌이다.ㅎㅎㅎ
꼬마야. 너까지 그러면 나 어떻게 해?
할아버지 부끄럽잖아........
요거 요거 은근슬쩍 맛있다.
배식하는 사람들에게 감사인사 전하고 지나가려는데, 반대쪽에서 배식하고 있던 멋쟁이가 또 부른다.
저쪽에서 방금 먹었다고 사양하는데 이 사람 기어코 나를 끌어다가 한그릇을 더 안겨준다. 주변에서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이게 퍼주는 사람에 따라서 맛이 조금씩 다 다르기때문에 자기것도 한번 꼭 먹어보고 가란다. 내가 먹는 보습이 보기가 좋다고 한다.
내가 인기를 끌게 생긴건지?
지갑 얇고 빈티가 줄줄 흐르는 여행자인걸 눈치를 챈건지?
뭔가 아주 쬐끔 아쉬웠는데 어떻게 눈치를 채고........... 아주 맛있게 뚝닥 해치웠다.
이 자선 행사는 이슬람 교리에 있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멋쟁이가 말한다. 그래서 무슬림의 다섯가지 의무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더 놀래켜 주려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앗 살람 왈레이쿰' 내가 두 손을 합장하고 말했다. 커다란 국자를 손에 든 그는 합장을 할 수가 없다.
'왈레이쿰 앗 살람.' 그가 허겁지겁 내 인사를 받았고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작별했다. 아름다운 미소가 가득한 터키인을 만났다. 부르사에서.
이 같은 자선행위 또한 코란에 적혀있는 바에 따른 것으로 무슬림들이 반듯이 지켜야 하는 다섯가지 의무중 하나이다. 이 다섯가지 의무는 알라 신과의 약속이다. 이 계율을 성실하게 수행함은 신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슬람 신자로서 반듯이 따르고 수행하여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덕목인 것이다.
첫 의무는 이슬람 신자로서의 신앙 고백이다. 알라가 유일신 임을 믿으며. 아울러 모하메드가 알라신의 사도로 믿고 따른다는 의무이다.
두번째 의무는 하루에 다섯번 메카를 향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의무를 말한다.
세번째 의무는 9월 한달간의 단식을 하는 '라마단'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이다. 해뜨는 시간에서 해지는 저녁까지 모든 음식물의 섭취는 물론 흡연, 그리고 성생활이 금지된다. 금욕 생활을 통해 심신을 맑게하고 깨달음의 시간으로 명상을 하도록 인도한다.
네번째 의무는 나눔의 행위(자선)를 뜻하는 '자가트'를 이행해야하는 의무이다. 모든 무슬림은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의 일부를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종교 단체나 복지 단체에 기부행위를 통해서 하기도 하고, 오늘 만난 사람들처럼 자신이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의 일부를 직접 거리에서 모든사람에게 음식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 또한 계율을 성실히 수행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다섯번재 의무가 흔히들 '하지'라고 일컫는 '일생에 한 번은 꼭 성지인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는 계율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히 한뿌리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다분히 맞는 말이다.
코란에 언급된 예언자는 모두 28명인데, 그 중에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리아. 사도 요한이 같은 예언자 반열에 올라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다른 선지자들과 같은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이해한다. 유대 종교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예언자 계보 중에서 모하메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직접 하달하던 마지막 선지자라고 이해한다.
알라 신이 모하메드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한 4개의 경전이 있는데, 첫번째가 모세 5경이며, 두번째가 다윗의 시편이요, 세번째가 에수의 행적을 적은 신약성경이며, 네번째가 모하메드가 기록한 코란이다. 그리고 이대목에서 무슬림들은 모하메드에 의해 기록된 코란은 진정으로 신성한 것이며 나머지 3개의 경전은 각 종파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왜곡되어 신성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인식한다. 그래서 코란만을 진정한 최고의 경전으로 여긴다.
코란이라는 이름이 다분히 영어식 명칭이며, 실제적인 발음으로는 '알 꾸르안'이라 발음하며, 그 의미는 '낭송하다'라는 뜻이다.
사람 냄새가 나고 그곳에 살고있는 현지인들의 생활과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시장만한 곳이 없다.
드넓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춥고 험악하고 황량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나톨리아 평원은 푸르고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고 넘쳐난다.
저들이 그렇게 신에게 감사하고 신에게 가까이 가려하는 이유를 그런 풍요로운 축복에서 엿볼수도 있겠다.
시간만 나면 나는 시장에 들리곤 했다.
이렇게 다양하고 이렇게 모든게 넘쳐나고 이런 풍요의 축복 속에서도 소박하면서 잔잔하게 온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적이 없다.
부르사에서 나는 재물을 탐하거나 이익에 눈이 먼 야박한 장사꾼을 본적이 없다. 그들에게 시장은 그저 나눔을 실천하는 일상적 생활의 일부분으로 보였다.
내가 다녀 본 유럽의 모든 도시중에서 물가가 가장 저렴했다. 물건값에 흥정을 해본 기억이 없다. 또한 최고의 품질들만 모여있다.
어쩌면 이런것 또한 종교적 자긍심에 기초한 보수적인 도시의 기질이나 심성에서 기반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부르사는 조용하고 사색적이며 착한 생활인들에게 지상 최고의 천국이다.
오늘도 동네 마트엘 다녀왔는데...... 포도가 한송이 조금 큰것이 7천원 정도 한다. 랩에 싸인 한송이반 정도가 1만이천원 정도이다. 감히 엄두가 나지않아 쳐다만 보다 돌아왔다.
카파도키아는 무조건 빼고........ 부르사에서는 포도가 1kg에 1천삼백원 정도다.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거기다 모두 유기농이다. 이곳에서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청포도 먹포도 품종을 구분하지 않는다. 싱싱한데 운송중에 알갱이만 떨어져나온 파생품이 2kg에 9백오십원 이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줄어들지 않는 포도가 부르사에 있다. 나에게는 정말 로 지상낙원이다.
하긴. 다음날 이스탄불 동네 골목 재래시장에서는 싱싱한 A급 포도를 1kg에 9백오십원에 샀다. 밤새 포도 먹어치우느라 고생 좀 했다.
포도 때문에라도 나 돌아가고 싶다. 터키에 다시........
부르사의 넘치는 풍요로움을 맛보기로 하자.
내가 부르사에 머물당시 환률 < 1리라 = 190원 >
---- 품종 불문. 최상급 포도가 무조건 1kg에 1천 사백원 이하.
--- 터키에는 1kg에 1천 오백원 이상하는 포도가 없다.(카파도키아만 빼고)
--- 밤에도 시장은 불야성을 이루는데, 전통 복장을 갖춘 여성들이 주로 밤에 장을 보러 나온다.(보수적인 도시임을 다시금 깊게 느끼게 된다)
---- 한 음식점의 쇼 윈도우. (우리는 양고기를 판매합니다) <흉측함>
시장을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은근히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그런데 골목길에 길게 늘어선 현지인들. 슬쩍 살펴보는데 너무도 허름하고 테이블이 5개밖에 없는 협소한 식당. 꼭 우리나라 시장통 보리밥집 분위기.
현지인들이 몰려 있거나 노인들이 즐겨가는 집은 '틀립없는 맛집' 이라는 오랜 여행에서 오는 노하우.
메뉴라는 것도 달리 없다.
양푼 세개가 주방 앞에 놓였는데 하나는 양고기. 하나는 소고기. 하나는 밥. 다른곳과 다르게 여기선 물을 준다. 빵도 써비스다.
현지인들은 밥 하나에 양고기 스튜 같이 생긴거나 소고기 스튜같은것으로 식사를 한다. 그래서 두가지 다 시켰다. 또 죄다 나만 쳐다본다.
맛있다. 기가막히게 맛있다.
싹싹 비웠다. 맛집이 틀림없다.
주방에서 요리하는 할머니에게 맛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드리고 음식점을 나서니, 매니저인 아들이 문밖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면 인사를 건네온다. '알써. 내 다시 부르사에 오게되면 꼭 다시 올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초기시대의 술탄들은 상당한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이념이나 사고가 근대에서나 볼 수 있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들을 그 당시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해 나갔다.
부르사의 어느 동네 어느 골목을 가던지 사원(자미)이 넘쳐난다. 흔히 우리나라 동네마다 설치된 마을회관 숫자 보다도 훨씬 많은 사원이 있다.
그리고 구 도시의 중심에 울루 자미가 위용도 당당하게 우뚝 서 있다.
이슬람의 술탄들을 즉위를 하면 너도나도 앞 다투어 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원을 짓기에 열심이었다. 그것이 신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이슬람을 전파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며, 건축주로서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길이 남기는 성스러운 역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 그러니까 부르사를 거점으로 하던 초기 제국의 술탄들은 울루 자미 하나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더 이상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을 세우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시장을 지었다. 사원 대신 크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실용적인 시장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인간에겐 신앙활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선 먹고 사는 문제였다.
신은 은혜와 자비로 인간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사랑과 자비를 인간에게 베풀어주고 시연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른 방법으로 대신하게 만들었다. 사원(교회)나 종교 지도자를 통해서 이다. 사원(교회)은 신도들을 불러 모으는 장소이자 교리를 학습하고 전파하는 장소이며 나아가서는 정신적 영역을 넘어서 물질적으로도 사람들에게 신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의 역활을 수행하는 장소이다.
신정합일 시대의 술탄들은 이 부분을 국가나 사원이 행정적 체계를 가지고 복지를 실현함 보다는 자율적인 시장경제에 내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즉위하는 술탄마다 사원 건축보다는 울루 자미 근처에 시장을 건설하는 일에 매진했다. 술탄은 시장을 넓히고 편리하게 해 주었다. 시장은 수요자와 공급자의 자율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수입의 일부는 사원에 기부되어 복지 사업에 쓰였다. 아주 먼 사막의 저편에서 까지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거래가 이루어 졌으며, 재화가 이곳에 쌓여갔고 부르사의 모든 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갔다. 국가나 통치권이 행정적으로 처리해 나갈 핵심적 문제를 시장이 자율적으로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이 자발적인 시장경제의 원칙을 위반하는 사람은 곧 신 앞에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되었다. 극한 형벌이나 추방이 뒤따른다. 그러다보니 공정함은 기본이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도 종교생활의 일부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이 곳 신의 자비였으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사랑이었다. 배고픔이 모두 사라지고 무엇이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세상이 생겨난 것이다.
무슬림 세계(오스만 투르크)는 급속도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열린 사고와 열린 세계관만이 무한하게 발전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느낄 수 있는 진리다.
바예지드 2세가 코자 한(Koza Han)을 세웠다. 동방으로부터 실크 로드를 통해 들어온 물자들이 이곳에 집결했다가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때부터 부르사를 '비단의 도시'라 불렀다. 중국이 독점하던 양잠 기술이 몰래 이곳 부르사로 전해졌다. 이때부터 부르사는 새로운 실크 생산지로 부상하게 된다. 부르사에게 실크가 어떤 것인지는 시장을 다녀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다음에 즉위한 술탄은 이곳 코자 한에 이어 붙여서 또 시장을 만들었다.
피린츠 한(Pirinc Han). 게이베 한(Gayve Han). 피단 한(Pidan Han). 에미르 한(Emir Han) 등의 시장이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금도 여전히 성업중이다. 그리고 이 시장 주위로 대상(카라반)들이 묵어가는 숙소와 하맘(목욕탕) 등의 시설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모든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비록 시장은 크고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부르사 현지인들의 잔잔한 삶이 숨쉬고 있다.
부르사 시장에 있다는 것은 부르사 국립공원 역사의 숲길을 걷는것과도 같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서둘러 숙소를 나와 산책길을 나섰다.
오늘은 부르사를 떠나는 날이다.
너무도 아쉬운 마음에 부르사의 한 장면이라도 더 가슴에 남기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울루산 자락 중턱까지 형성되어 있는 산비탈 동네를 둘러보고 싶었다.
어느 여행지에 가던 나는 유별나게 골목길을 좋아한다. 그곳에 사는 소시민들의 삶을 사랑한다. 시장도 그런 비슷한 느낌때문에 많이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달동네나 빈민가의 골목을 자주 드나들곤 한다. 부르사의 어느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는 달동네를 꼭 보고 싶었다.
그런가하면 공동묘지나 공원을 자주 들여다 보게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현지인 소시민들의 삶을 느껴보고 싶다.
달동네로 향하는 언덕은 생각보다 가파랐다.
우리나라 70년대의 정취가 그곳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힘들지만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이 그곳에 있었다.
가파른 골목길을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내려가는 고등학생의 모습에서 엄마가 가진 소망과 아들이 가진 꿈이 똑 같은 모습인것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의 삶의 장소는 힘겨운 달동네이지만 20년 후쯤에는 그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늘을, 그리고 이 달동네를 기억하게되기를 나는 기원해 본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만난 아름다운 청년 유세프.
올드 시티의 언덕길 모퉁이에서 철물점 겸 작은 공구상을 운영하는 고향이 카이세리인 이 청년. 골목마다 기웃기웃 하던 중에 아침에 막 점포를 열고 물건을 밖에 진열해 놓은 채 모닝 차를 마시려고 막 입에 가져가던 순간에 나랑 눈이 마주쳤다. 내가 급히 시선을 돌렸음에도 그 상황이 어색했는지.......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정중히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유세프는 영어를 썩 잘했다. 극구 사양하는 나를 그 자리에 붙잡아 놓고 유세프는 안으로 들어가 차를 새로 끓여내왔다. 엄청난 환대가 아닌가. 정중하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려는데 골목길 건너 맞은편 가계의 빗장이 열리자 유세프가 내게 양해를 구하더니 쫒아가서 노인이 가계문을 여는것을 돕는다. 그러자 다시 안으로 뛰어가 또 차를 한잔 끓여내와서 노인에게 건네준다. 그리고나서야 내 옆에 다가와 식어버린 찻잔을 들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와 17살에 고향 카이세리를 떠나와 이곳 부르사에 도착했다고 한다.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바로 앞집의 할아버지를 만나 점원으로 십년 가까이를 일을 배웠단다.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저축을 했더니 할아버지께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철물점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독립할 것을 제의해 주셨단다. 그래서 독립을 해서 철물점을 하다가 작게나마 공구상까지 확장을 했고, 지금도 할아버지를 부모님처럼 모시며 지척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정말 아름다운 청년 유세프를 만났다.
다시 부르사에 온다면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기회가 된다면 그가 베풀어준 친절에 작은 한국적 선물로라도 꼭 보답하고 싶다.
또 한 사람. 38번 버스기사 아저씨.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PTT 정류장으로 부르사 테르미날 가는 버스를 타러 지하도를 올라서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눈 앞에 38번 버스가 멈춰 서 있는것이 아닌가. 출발하려고 움직이는 버스를 뒤에서 손을 흔들며 쫓아갔다. 다행히 버스가 멈춰섰다.
앞 문이 열리고 버스에 올라 타려는 순간, 운전석 옆에 매달린 승차권 펀칭 기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아뿔싸'.
부르사 시내버스는 정류장 부스에서 승차권을 구입하고 나서야 이용을 할 수 있는것이다. 내가 서두느라 깨닫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나는 감작 놀란 표정으로 기사 아저씨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건넸다. 서두느라 미처 표를 구하지 못했다고 양해를 구하고 뒤로 물러섰다. 승차권을 구입해서 다음 버스를 이용해야만 하게 되는 상황이다. 포기하고 인도에 올라 섰는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기사분이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테르미날 가는 버스가 맞으니 그냥 타라고 한다. 티켓이 없다고 해도 그냥 타란다.
30분 후에 부르사 테르미날에 내렸다. 내리는 문은 뒷쪽이다. 내려서 열려진 앞문으로 가서 기사아저씨에게 거듭 감사하단 인사를 전한다.
'부르사가 당신에게 주는 아주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버스는 떠났다.
나는 잠시 그곳에 멈춰서서 그 버스가 다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런 소중한 만남들이 존재하는 한 나는 결코 내 방식의 여행을 멈출 수가 없다.
곧 이스탄불에서 나는 또 이런 소중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로 향했다.
부르사를 떠나는 것이 몹시 아쉽기는 했으나 내일은 이스탄불에서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날이다.
아침에 출발해서 이스탄불을 그냥 경유하고 귀국하기는 뭔가 개운하지 않은 아쉬움이 끝내 남겨질것만 같아 마지막 하룻밤만 이스탄불에서 머물기로 했다.
지난 여행기 터키편에서 맨 마지막 이야기인 '콘스탄티노플 편'을 마무리 짖지 못한고 떠나온 여행이 바로 이번 여행이었다.
이제 단 하루의 이스탄불 체류기와 지난번에 남겨진 콘스탄니노플 이야기를 묶어서 써 내려가기 위해서도 이스탄불을 꼭 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엔 '미마르 시난'을 제대로 만나보고 싶었다. 그와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었다.
버스에 올랐다.
아쉬운 부르사와 작별한다. 꼭 다시 찾아오고 싶은 도시로 부르사는 영원이 내 버킷 리스트에 기록될 것이다.
아나톨리아 평원을 가로지르는 시원한 대로를 버스는 씽씽 달려간다.
이스탄불을 향해서.........
--- 다음 이야기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이스탄불에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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