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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터키) 초대 교회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이즈닉을 찾아서.....

by 피안재 2018. 12. 2.

 

 

 

 

 

 

 

 

 

 

 

 

 

 

 

 

 

 

 

 

  12시간을 달려  월요일 새벽 6시,  마침내 버스는  브르사 테르미날(터미널 이라고 하면 잘 못알아 듣는다)에 도착했다.

  다행이 새벽에 들어서면서 쏟아지던 폭우는 멈추고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12시간의 장거리 여행이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별반 장애가 되지 못한다.  그동안의 여행에서 이미 여러번 장거리 여행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최고는 베트남에서 하루 건너 19시간씩 장거리 이동을 한 경험이 있다.

  이번 장거리 여행에서는 버스 안에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오늘을 포함해 4일 남은 여행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서 쓸것인가가 우선 중요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시작은 오른쪽 발목을 다쳐서  더 이상 무리한 트래킹이 힘들겠다 판단되어 나머지 여정의 스케줄을 이곳 부르사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부르사는 처음부터 꼭 한번 와봐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던 장소였다.  어떻게 따지자면 터키의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  그나마 이스탄불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고도 볼 수 있는 부르사였지만,  일단 이스탄불에 들어서고 나면 특별한 계획이 아닌이상  이스탄불을 벗어나기가 쉽지를 않았다.  그동안 네번의 이스탄불 방문이 모두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처럼  마침내 부르사에 오게 되었다.

  부르사에서 80km(약 1시간) 떨어진 곳에  이즈닉이 있다.  이즈닉에 대해서도 익히 잘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치는 부르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커다랗게 획을 그은 이즈닉이 였지만,  단 한군데를 제외하고는 딱히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는 아주 작은 도시였다.  부르사를 찾게되지 않았다면  결단코 나는 이즈닉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는 부르사에 도착해 있다.

  부르사 터미널에서  우측 도로로 30분을 가면  마침내 부르사 시내에 들어가게 된다.

  부르사 터미널에서 좌측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1시간을 달려가면  이즈닉에 도착하게 된다.

 

 

 

 

                                                                            -- 하기야 소피아 성당(복구 전)

 

 

 

 

  부르사에서 삼일 정도를 머물 생각이다.  그 중에 하루를 할애해서  이즈닉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부르사가 너무 좋아서 꼭 4일을 머물게 된다면,  귀국일 새벽에 버스편으로 서둘러 이스탄불로 떠나서  그 길로  공항으로  곧장가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이즈닉을 언제 방문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냐를 결정하지 못했었는데  방금 도착한 부르사 터미널에서 나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무거운 배낭이 문제였는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부르사 터미널에는  대형 락커 사무실이 별도로 있었다.  그렇다면 이즈닉 방문은 지금 당장이다.

  락커 부스를 찾아가니 (잠시 부재중)이라는 팻말이 내걸려 있다.

  터미널을 돌아보기로 했다.

  부르사 터미널을 대단히 컸다.  면세품 코너가 없을 뿐,  가히 지방의 비행장만한 면적에 최신식 시설로 들어서 있다.  보안 검색대도 공항과 똑 같다.  부르사가 그만큼 커다란 도시라는 반증이다.

  식당가 쪽에서는 사람들로 새벽부터 붐빈다.  즉석에서 빵을 막 구워내고 있는데 구수한 냄새가 사람을 홀린다.  시미즈를 한나 사서 뜯어 먹고 있는데,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  갑자기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할 수 없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음식을 주문했는데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메뉴판 덕분에 음식이 나왔을 때는  우선 후회가 막심했다.  야채가 약간 들어간 하얀 볶음밥에 튀긴 닭날개 4개가 얹혀서 나왔다.  계란 풀은 국물도 없다.  새벽 참극이다.

  락커부스에 다시가니  다행이 문이 열렸다.  아주 커다란 창고형 대형 부스였다.

  6시간에 25리라(4천오백원 정도)에 배낭을 맡기고  전표를 받아 챙겼다.

  대합실을 나와  이즈닉행 돌무쉬(미니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5분 뒤에 출발하는  돌무쉬가 마침 있었는데  종점인 이즈닉까지 요금이 15리라(2천팔백원)다.

  정시에 돌무시가 부르사 터미널을 빠져나와  이즈닉을 향했다.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그래. 이것이 바로 터키의 풍경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씽씽 달리던 돌무시가 지방도로로 내려섰다.  길은 좁고 노면 상태도 썩 좋지 않다.  군데군데 물웅덩이도 그대로 통과한다.

  갑자기 차가 멈춰서면  도로를 꽉 마아섰던 양떼들이 아주 천천히 옆으로 비켜나 길을 터준다.  아침에 들판으로 일과를 시작하러 나가는 양떼다.

  왼편으로 그 유명한  이즈닉 호수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인근은 모두 올리브 농장으로 변한다.  호수와 길을 빼고는 산자락 능선까지 온통 올리브 밭이다.  터키에서 올리브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 바로 이즈닉이다.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가는 탱글탱글한 올리브가 보인다.  마치 치앙마이 커피농장에 들어온 느낌이다.

   그렇게......  그렇게 호수를 끼고 한참을 달려가다 보면 저만치 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커다란 장막처럼 거대한 갈색의 성벽이 도시를 감싼 모습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즈닉(iznik)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이즈닉의 초입인 성벽 앞에 차를 멈춰세웠다.  이곳에서부터 이즈닉 여행을 시작할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여행은 간혹.......  애초부터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뜻밖의 상황과 예상치못한 추억을 만들어 선물처럼 안겨주곤 한다. 

 

 

 

 

 

 

 

 

 

 

 

 

 

 

 

 

 

 

 

 

 

 

 

 

 

 

 

 

 

 

 

 

  이즈닉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북서부에 위치한 아주 작은 도시로,  깊은 내륙에 위치해 있지만  '이즈닉 호' 라는 아주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실제 내가 걸어다녀본 결과로는 어제 떠나온 위르굽만도 못하게 여겨질 정도로 아주 작은 도시다.

  하지만 역사속의 이즈닉은 결코 그렇게 쉽게 넘길 작은 도시가 아니다.

  안티아고스 왕이 처음 이곳에 도시를 세운것은 기원전 316년이었다.  그때부터 이즈닉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유서깊은 도시가 되었다.  비록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있는 내륙이었지만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강수량과 비옥한 토지를 포함해  모든것이 풍요로운 축복받은 지역이었다.  이즈닉 호수는 이곳 사람들에게 바다 못지않은 대자연의 풍요를 선물했다.

  모든 물자가 풍족하고 살기좋은  도시가 형성되자마자 곧 이민족의 참략이 이어졌다.  도시가 형성 된지 불과 5년만에 알랙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리시마코스가  들이닥쳐 도시를 차지해 버리고 도시의 이름에 자신의 아내 이름을 따서 '니케아(Nicaea)' 라고 불렀다.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제국에 점령 당해서  로마의 속주로서 이 지역 일대를 다스리는 중심지로 거듭 발전해 나간다.  로마는 이 도시의 외곽으로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약 5km에 이르는 튼튼한 성벽을 쌓고  신전과 극장과 경기장을 지었다.  로마의 귀족이 지방관으로 이곳에 파견되어 아나톨리아 반도의 내륙을 다스렸다.

  동.서 로마로 분리되고 쇠퇴기를 걲으면서 등장한 비잔틴 시대에는 새롭게 기독교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십자가 부활사건' 이후로 열두 제자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지하로 숨어 들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의 감시와 탄압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아주 오랜 고난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곳곳에서 순교자가 발생하는 비극적인 참상이 발생했다.  그들은 신앙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로마의 감시와 탄압으로 부터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발생지로서의 성스런 역활을 더 이상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흩어져 기독교 명맥을 이어가야만 했던 지도자들은  고린도. 데살로니카. 에페소 등의 그리이스 지역과  알랙산드리아 중심의 이집트 지역과 카파도키아를 중심으로 하는 터키 남동부 지역을 넘어 멀리 시리아와 아프리카까지 도망쳐야만 했다.

  이 오랜 고난의 시간동안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케 한것은  카파도키아. 알랙산드리아. 에페소의 노력과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의 신앙 중심에  '초기 그리스 정교회 정신'이 있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수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압류된 재산의 반환과 국가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황제는 이 새로운 시대와 정책을 서둘러 시행함에 있어서 대화와 정책 진행의 파트너로  로마에 숨어있으면서 기독교를 전파하던  기독교 대표들을 선정했다.

  로마에 주재하던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로마제국과 협력하면서 새 시대를 여는 정책들을 수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실질적으로  기독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은 너무나 멀고 외진곳에 숨어 있었기에 이 시대의 변화를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로마의 파트너가 된 지도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한데 뜻을 모아 내세운 기독교의 참 지도자가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참 스승들은 모두 카파도키아. 알랙산드리아. 에페소에 있었는데  그들을 모두 일부러 철저하게 외면하고 배제한 채,  소수의 사명(?)에 눈 먼 일부의 로마주재 지도자들이 전권을 거머쥐고 온 세상의 기독교 대표를 자칭하고 나섰다.  그들 스스로  자기들 안에서 대표를 뽑고,  그에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하사(후계자)하셨다'는  입증되지 않은 명목을 내세워 스스로 절대적 권력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것이 곧 바티칸 이다.  교황의 탄생이다.

  흩어져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차지한 바티칸의 대표성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이미 바티칸은  로마제국의 제도권 안에 무사히 정착하고 난 다음이었다.  사방의 기독교인들이 저항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바티칸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는데 몰두하게 되었고  방어막을 철저하게 구축해 나갔다.  이제 바티칸은 새로운 종교 권력으로 부상했다.  카파도키아. 에페소. 알랙산드리아를 포함한 온 기독교 세상에 항복과 복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의모든 신앙을  바티칸의 발 아래 두고자 했다.  기독교는 새로운 암흑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뜻하지 않게 묘한 변수가 생겨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에는  드러나지 않은  미묘하고 복잡한 여러가지 이유가 사실은 실재했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취약한 자신의 입지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기독교 공인으로  황제의 권위는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으나,  이 새롭게 등장한 이질적인 종교와  기존 로마인들의 신앙관은 쉽사리 융합되거나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종교가 바뀌어도 여전히 로마의 기득권을 움켜쥔 귀족들의 막강한 권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얻은것만큼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제도권 안으로 새롭게 진입한  바티칸이라는 새로운 권력의 등장도 마음에 걸렸다.  황제는 그런 것들을 의식해  성탄절. 부활절. 등등의 기독교 기념일을  기존의 로마 축제일과 결부시킬 생각으로 바티칸을 설득했고,  이 외에도 여러가지 현실적으로 부각된 문제점들에 대해  바티칸이 이에 동의 했다.

  그러자 로마를 벗어난 세상 모든곳의 기독교인들이 저항했다.  그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바티칸의 입지를 위해서 진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고 저항했다.  그런 이유로  현재 기독교의 기념일이나 행사,  또는 교리 일부와 해석에 있어서  바티칸에서 기원한 기독교와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정교회의 성탄절은  12월 25일이 아니다.

  새롭게 드러나는 수많은 문제점에 고심하던 황제는 한가지 묘안을 찾아냈다.

  천도였다.

  수도를 로마에서  동방의 이스탄불로 옮기는 대역사를 생각해낸 것이다.

  황제의 기묘한 발상에 누가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을까?  당연히 바티칸이었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로 제국의 수도가 이전하게 된다면.........  그곳에도 이미 기독교 지도자가,  에페소나 카파도키아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에서  기어코 이전을 하게된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물거품으로 변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바티칸은  로마의 영토 안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을 앞세워 거세게 저항했다.(종교가 이미 권력과 부에 맛을 들인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끝내 천도를 감행했다.  이 역사적인 대사건은 곧 비잔틴 제국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로마의 바티칸은 끝내 황제를 따라가지 않았다.

  죽어도 한번 움켜쥔 기득권은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교황이라는 절대권력을 스스로 동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찾아가 무릎꿇고 헌납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지하묘지에서 기어나오던 시절의 자신들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로마에 눌러 앉아 이 사태를 타개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한 황제는  바티칸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오히려 기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많은 일들을 겪었던 때문이다.  '신성불가침'을 앞세운 바티칸에게 끊임없이 시달려 온 황제로서는 어쩌면 쾌재를 불렀을 수도 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라는 나의 추론은 이어진 황제의 행위로서 입증된다.

  황제는 새롭게 종교 지도부를 구성한다.  그 중심이 바로 그동안 흩어져 저항하던 '그리스 정교회'였다.

  그리스 정교회가 비잔틴의 기독교를 이끈다고 황제는 공표했다.  그러면서 바티칸 세력에게 호되게 당한 바 있던 황제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묘책을 내 놓게 된다.  비잔틴의 기독교는 그리스 정교회가 이끌되,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대표 지도자)을 황제가 임명한다는 조항이었다.  종교라는 새로운 권력에 욕심이 없던  그리스 정교회는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기독교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으며  황제라는 세속적 권력은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이전의 바티칸과는 전혀 달랐다.  황제의 권력은 세속적 한계가 분명했으며,  신에게서 부여받은 교황의 절대 권력은  황제로서도 어쩔 수없는  신이 부여해 준 신성불가침의 절대권력이라는 생각이었으니,  황제는 언제나 교황의 발 아래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교권'과 '황권' 이라는 새로운 전쟁이 끊임없이 전개된다.  그리고 그로인하여  그리스 정교회와  바티칸은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라는 아픈 비극의 역사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러 교황께서 이러한 과거에 대해 참회를 선언하고 인류의 역사 앞에서 사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것이 현실이다.  바티칸은 창조주 앞에 진실함으로 당당할 수 있을때까지 참회와 속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 무랏 1세 하맘

 

 

 

 

 

 

 

 

 

 

 

 

 

 

 

 

 

 

  비잔틴 제국이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고있던  1331년,  마침내 오스만 투르크(터키)의 2대 술탄 오르한 가지가 니케아를 점령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니케아'라는 지명 대신 현재의 지명인 '이즈닉(iznik)로 불려지게 된다.

  오스만은 로마와 비잔틴의 건축으로 들어 찬 호화로운  니케아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기독교의 흔적들도 철저하게 지워나갔다.  이때  '니케아 종교회의'를 가졌던  '하기야 소피아 성당'만은 이슬람 사원으로 꾸며지게 되었다.

  그해(1331),  오스만이  니케아를 점령하고 철저하게 파괴를하고 난  즈음에  모로코의 여행가 이분 바투타(Ibn Battuta)가 여기 이즈닉을 찾게 되었다.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이븐 바투타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당시의 이즈닉을 이렇게 기록했다.

  '화려했던 도시의 궁전과 신전과 교회는 파괴되어 황폐해 졌다.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도시 밖으로 쫓겨났다.  술탄을 섬기는 소수의 무슬림만이 성 안에 거주할 수 있다. 도시 성벽 안으로는 여전히 아름다운 정원과  과수원에 둘러쌓인 부유한 사람들이 살던 집과 경작지가 남아 있다.  이제는 모두 무슬림의 소유가 되었다.  이 도시 주변에서는  각종 과일과 올리브와 호두와 밤, 그리고 포도가 생산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니케아는 약 2만~3만 명의 주민이 기거하던 결코 작지 않은 도시였다.

  하지만 오스만이 차지하고 난 뒤의 이즈닉은  오히려 소수의 무슬림들만이 거주하던 아주 작은 마을로 전락했다.  지금 현재의 인구도 과거에 한참이나 못미치는  1만오천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오스만 시대에 들어서는  그저 한적한 곳에 조용히 살고싶은 사람들만이 이곳에 남아있고 싶어했던 까닭이다.

  오스만이 이즈닉을 차지하기 직전에  '오스만 투르크'라는 국가를 수립하고 첫 도읍지로 삼았던  '부르사'가 이곳에서 불과 8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울러 훗탈 차지하게 되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도한 이곳에서 불과 9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너무나 외지고 한적한 시골을 떠나 너도나도 큰 도회지로 나갔던 때문이다.

  지금도 이즈닉은 아주 외지고 한적한 시골마을일 뿐이다.

 

 

 

 

 

 

 

 

 

 

 

 

 

 

 

 

 

 

 

 

 

 

 

 

 

 

 

 

 

 

 

 

 

 

 

 

 

 

 

  로마제국이라는 제도권 속으로 편승한  로마의 바티칸은  이제 시대의 변방으로 밀려나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었다.

  비잔틴제국이라는 제도권 속으로 편승한 그리스 정교회는  바야흐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한 '교리 논쟁'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암초와 부딪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는 얻었으나,  유럽의 서쪽 끝에서 소아시아 지역까지와  일부 아프리카 지역까지 퍼져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관과 가치관,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간의 사이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와 생각들이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족에 따라 에배 의식에 대한 견해차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초기의 기독교는 아직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교리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가장 극명하게 대두된것이  예수의 신적 본질과 성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흔히 '삼위일체설' 이라는 문제를 놓고 기독교계가 양분되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결구도를 흔히 '아리우스 파와 아타나시우스 파간의 교리싸움'이라고  말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서는 이 사태를 그냥 무시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칫 이 종교적 파벌이 심화되어 정치문제로 비화되면서  겨우 안정을 찾은 제국을 다시 분열의 사태로  자칫 이어지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아울러 자신의 정치력을 앞세워 이 사태를 원만히 해결할 수만 있다면  황제의 존엄과 권위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하여 그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 지도자 회의를   제국의 행궁이자 물자가 풍요로운 휴양지  니케아에서 열기로 하고  제국내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에게 황제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것이 바로 '제 1차 니케아 공회의(325년)'인 것이다.  기독교 탄생 이후 최초로 가진 공적 회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니케아로 와서  공회의 개막연설을 했다.

  어떤면에서는  우리나라 사림들 간에 주자학의 이해를 놓고 벌인 '예송 논쟁'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겠다.

 

 

 

 

 

 

 

  알랙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 의 주장(Arianism)은 삼위일체설을 정면으로 모두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한 심부름꾼(도구)에 지나지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일시 하거나 동격으로 처우할 수 없는 이질적 본질(Heterousios)에 불과하다고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극도로 폄하했다.

  논쟁은 결론적으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승리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본체(Homoousia)라는 초기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온 가르침이었다는 정통성을 따르고자 했으며,  이번에 대두된 문제들을 체계화하여 '삼위일체론'으로 확실하게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니케아 신경) 으로  오늘날의 '사도신경'의 초기 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될것같다.

  아울러 공회의는 매우 여러가지의 사안들을 다루었는데,  신학 강의나  기독교 역사 강의가 아닌 관계로........  사제의 서품과 성직자의 승격,  그리고 교회내  위계질서에 대한 규범을 채택하였다는 내용으로 마무리짓고자 한다.

  '삼위일체'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니케아 신경'에 서명하기를 끝내 거부한 아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이단자로 몰려 파문당했으며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아리우스가 파문되고 제거되면서 그의 주장이 소멸되었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

  아리우스의 삼위일체 부정론은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여호와은 증인'이 주장하는 교리가 바로 아리우스 파에 가깝고,  유니테리언 교파(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이성을 중시하는 교파) 또한 아리우스파에 가깝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리. 의식. 규범에 대해서 새로운 문제점들이 계속 드러나게 된다.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적으로 다시 모여서 회의(공회의)를 통해 새로운 교리와 의식과 규범을 계속해서 새로 만들어 나가야만 하게 되었다.

  공회의는 계속되어 열렸다.

  서기 787년  7번째 공회의가 다시 이곳 니케아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역사는 이것을 (제 2차 니케아 공회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회의의  주요 안건이  기독교 역사로서는 너무도 중요했던  '우상 숭배 금지'와 '성상 파괴 운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에 의해서 시작된 성상 파괴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콘스탄티노플은 물론 소아시아와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유일신 하나님 외에는 모두가 우상이며  신성한 하나님은 결코 그림이나 돌조각으로 표현될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에서 발생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성화와 조각상들이 파괴되었다.  카파도키아 동굴벽화의 상당부분도  이 시기에 파괴되었다.

  평소 깊은 신앙심만큼이나 예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레온 4세의 황후 이레네는   더이상 위대한 미술품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없었다.  그녀는 이 사태에 대해 공회의가 공정한 판단을 내려줄것을 요청하였고,  마침내 787년  니케아에서 '성상 파괴운동'에 대한 기독교 대표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게 바쳐지는 것이지  성화를 숭배의 디상으로 삼는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화에 대한 공경은 우상 숭배가 결코 아니다'  라고 공회의는 새로운 결론을 내렸다.

  '제 2차 니케아 공회의'가 새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유럽을 위시한 지구상의 모든 교회는 그저 썰렁한 빈껍데기 건물과 십자가만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로마를 찾아 여행을 떠날 이유도 사라졌을 것이다.  자연을 그린 그림 정도 빼고는  유럽의 모든 예술작품들이 먼지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30년이 지나서 레오 5세에 의해  '제 2차 성상 파괴운동'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번 운동은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된다.  자그만치 20년이나 지속된다.  비잔틴 최고 전성기를 이끈 유수티니아누스 대제의 황후였던  테오도라에 의해서 근절된다.  테오도라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딱 한번 잘한 일이 '성상 파괴운동'을 저지 시킨 일이다.  희대의 마녀 테오도라는 수많은 이야기꺼리를 낳았다.(대부분 지저분한 이야기라서 생략)

 

 

  이쯤에서 새로우면서도 꼭 집고 넘어갈 것이 한가지 있다.

  바로 바티칸 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의 수도로 건설해 이사를 하면서   바티칸은 반쪽 남은  서로마를 부둥켜 안고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기로에 섰었다.  하지만 이미 가파르게 몰락을 향해 내달리는 서로마를 되살릴수는 없었다.  바티칸은  서로마의 멸망을 그냥 멀뚱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비잔틴의 유스티아누스 대제는 로마를 포함한  로마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번듯이  그리스 정교회가  버티고 서서 바티칸을 노려보고 있었다.

  1차 공회의에서  7차 공회의가 열리는 약 450년 이상의 시간동안  바티칸은 납작 엎드려 숨을 죽여가며 생존만을 걱정하며 지내왔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정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지 로마의 기독교에서는 벌어지지 않았겠는가?  교리. 예식. 규범에 대한 똑같은 문제들이 로마 인근의 기독교 사회에서도 연일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규율은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에서 회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규정이 만들어졌다.  바티칸으로서는 이들에게 대항할 명분도 지위도 갖춰지질 않았다.  공식적으로 수용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거부하거나  자신들만의 새로운 교리나 예절이나 규범을 주창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은 비잔틴 황제의 소유였고,  세상 기독교의 중심은 정교회였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위의 정교회 주도 7차에 걸친 공회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또 다시 세상은 변하기 시작하였고  바티칸에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유스티아누스 대제의 위대한 업적 덕분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비잔틴이 그의 사망과 함께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유럽 전체가 거센 변화의 물결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유럽을 지배하던 비잔틴의 세력권이 점차 축소되면서  수많은 봉건영주국가들이 앞다투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틈타 바티칸은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봉건 국가의 탄생과 영토 전쟁에 바티칸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이 주도하여 그들간에 혼맥을 이루도록 주선했고  국가간의 분열과 다툼을 주도해 나갔다.  중세 암흑기 1천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신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돈과 군력을 향한 음모와 다툼과 쾌락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지간히 기력을 회복했다  생각한 바티칸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를 향해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 4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마침내 로마 바티칸이 그리스 정교회를 향해서 포문을 열었다.(카톨릭은 이 회의 부터만 공회의로 인정하고 있다.)

  로마 바티칸의 총대주교 니콜라오 1세가  정교회의 대주교 포티오스를 파문시켜 버린 것이다.  기독교 호적에서 파내버렸다는 뜻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티오스가 공회의를 열어서  니콜라오 1세를 이단으로 몰아 기독교에서 파문 시켜 버렸다.(기독교의 양대 산맥 간에 유치원생 싸움 같은 치졸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바티칸이 이때부터 기선을 다시 잡게 되었다. 

  이 후로의 모든 공회의는 바티칸의 교황이 주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때부터 1천년의 중세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분명  비극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힌 것이다.  주인공은 바티칸이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기독교 역사가   바로 이곳 하기야 소피아 성당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하기야 소피아(Aya Sofya) 성당은 기독교의 성지다.

  제 1차 니케아 공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지어진 교회는 1065년의 대지진에 상당부분이 심하게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절 만든 바닦의 모자이크와 7세기에 제작된 프레스코화 일부만이 겨우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오스만이 이즈닉을 점령한 후에  이곳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다.

  입구에 굴뚝처럼 우뚝 서있는 첨탑(미나레)이 추가로 만들어 졌다. 16세기경에 또다시 화재로 무너져내린 사원을   오스만 제국이 자랑하는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을 통해 재건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건물은  오스만의  위대한 거축가 미마르 시난의 작품인 것이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만들어진 교회당 건물 안쪽에 미마르 시난은 이즈닉 타일을 이용해 미흐랍을 추가로 내부에 설치했다.  시난이 만든 미흐랍은 이즘 들여다 보아도 대단히 인상적이고 매우 아름답다.  미흐랍은 아치 형태로 만든 창문이 메카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작은 기도실을 말한다.

  비록 현재는 분명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기하학적 문양의 바닦 모자이크와 벽면의 한쪽에서 희미하게나마 에수와 마리아.  사도 요한들을 그린 프레스코화를 찾을 수 있다.  희미하게나마  종교의 공존을 느껴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교회는  이즈닉의 가장 중심부인 도심 한보간에 위치해 있으며,  교회의 주변으로는 광장이며 공원이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현지인들이 많이 모여있고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팔고 있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모두가 온화하고 소박한 인상들이다.  그네들의 미소에는 배려와 친절함이 담뿍 담겨 있다.

  이즈닉은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 하즈 외즈백 자미.  터키 전체를 통털어 가장 오래된 오스만 시대 자미.(1333년 준공)

 

 

 

 

 

 

 

 

 

        --- 이즈닉 박물관.

 

 

 

 

 

 

 

 

 

 

 

 

 

 

 

 

 

 

 

 

 

      ---  레프케 성문.

 

 

 

 

 

 

 

 

 

 

 

 

 

 

 

 

 

 

 

 

  약 5km에 이르는 팔각형 모양의  이즈닉 성벽과  동쪽의 레프케 문(Lefke Kapi).

  로마가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도시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도시를 둘러싼 읍성으로 건설하였다.  히드리아누스 황제때 증축 되었고  비잔티움 시대에 지금의 모양으로 재건축 했다.  당시 재건축을 하면 석재가 모자라자  로마극장을 헐어다가 성벽을 쌓는 석재로 사용했다.  성문이나 성벽을 잘 살펴보면 다른 건물의 기단이나 기둥을 가져다가 여기저기 사용한 흔적을 쉽게찾아 볼 수 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두껍고 튼튼한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남북 네개의 문과  12개의 비상용 통로를 갖추었다.  그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곳이 바로 여기 동쪽으로 난  레프케 문이다.

  또한 이 레프케 문 밖으로 길게 수도교가 놓여 있다.  멀리 압듈바합의 언덕으로 부터 맑은 물을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사용해왔던 흔적이다.

  또한 레프케 문 바로 앞  싸이프러스 나무 우거진 숲속에 공동 묘지가 있다.  가가운 곳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자주 찾아가고 했었던 것 같다.  마치 공원 같은 분위기다.

 

  이젠 이즈닉을 어느정도 모두 돌아본 느낌이다.

  발걸음을 다시 시내 중심가로 돌려  골목골목을 기웃거려 본다.

  이즈닉을 널리 알리는데 공을 세우고 있는 '이즈닉 타일 골목'과  아름다운 도자기들을 구경한다.

  소박한 이즈닉 사람들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힐링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고  '이즈닉이야 말로 진정한 슬로우 씨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 틈에 파뭍혀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가  터미널로 향한다.

  다시 부르사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즈닉으로 갈 때보다  부르사 터미널로 돌아오는 돌무쉬가 더 힘차게 쌩쌩 달렸다.

  얼마 걸리지 않아서 나는 다시 원점인 브르사 터미널에 내렸다.

  맡겼던 배낭을 다시 찾았다.

  휴계실에 앉아서 캔맥주 하나를 마신다.

  짧았던 이즈닉 여행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혹시나 부르사까지 왔으면서 들리지 못하면 어떻게하나 하고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다녀오고 나니 아주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소박하고 친절한 시골 이즈닉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분 좋은 느낌은  이즈닉도 그랬고,  여기 부르사 터미널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도 친절하다는 것이다.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다.  가히 카파도키아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고 말해도 잘못된 표현은 결코 아니리라.

  그만큼 부르사 여행이 기대된다.

  이제 부르사 시내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벌써 부터 어떤 설레임 같은 기대가 마구마구 생겨난다.

  시내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알아보고  승차권을 구입하고  버스에 올라 기사님께 버스표를 건네기까지  모두가 너무나 자상하고 친절하다.

  혹 부르사는 친절왕국이 아닐까?

  부르사로 가는 38번 버스는 샛노랑색의 아주 깔끔하고 멋진 버스다.  거기다가 처음 타 보는  버스 두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트램을 타고 가는 기분이었다.  와!  신기.......  거기다 부르사 시내에는  이스탄불처럼  빨간 트램이 다닌다.

  마침내 나는 고대하던 부르사에 정말로  입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르.사.야.마.침.내.내.가.여.기.에.왔.어.널.만.나.려.고.

 

 

 

 

 

 

 

 

 

 

 

 

 

 

 

 

 

 

 

 

 

 

 

 

 

 

 

 

 

 

 

 

       --- 부르사에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