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크(TURK)의 어원은 본래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서 발칸반도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 부족을 통털어 일컷는 말이었다.
이들은 인종적으로도 단일화된 한부족이 아니었기에 황인종과 백인종이 한데 섞여있었다. 투르크멘 부족과 우즈벡 부족 그리고 위구르족과 오스만리 부족은 백인종에 속하였고, 키르키르 부족 카자흐 부족 살라르 부족 투바 부족은 중앙아시아의 부족들과 닮은 북방 황인종의 형질을 가졌다. 이들이 활동하는 지역이 너무나 넓었고, 유목 생활의 특징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이었으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또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교류하고 혼합되는 과정을 겪었기에 딱히 투르크를 한마디로 정의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20세기에 들어서 그 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독립하였다. 고대 부족의 이름이 대부분 현재 하나의 국가 명칭이 되었다.)
그 수많은 유목부족을 통괄 지칭하는 투르크라는 고유명사가 어떻게 특정한 한 부족만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고 그 한 부족의 유전적 형질과 문화가 오늘날 터키(Turkey)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인지는 알지도 알수도 없지만 , 아무튼 오늘날에 투르크는 터키라는 한 국가로 대변되는 국가 지칭 교유명사로 통용되고 있다.
투르크 부족은 곧 터키人을 의미하며, 터키의 뿌리를 올라가다 보면 투르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쯤이면 한 국가의 기원이나 민족의 근원이 명확하게 정리가 끝나야 하는데....... 터키는 분명한 듯 하지만 속내는 여전히 불분명한것이 사실이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드넓은 초원을 주유하면서 말이나 양을 기르던 유목민족이었다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냥 딱 그쯤이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투르크인(터키인)들은 유목민족 중에서도 기마민족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거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터키 역사학자들은 그들 민족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고 또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시베리아에서 몽골지역 일부와 심지어 두만강 인근까지 흩어져 살던 흉노족을 투르크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세계 역사학계는 터키가 적당히까지만 올라갔어야 했는데 올라가도 너무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다 터키 역사학계는 '자신들이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전무후무할만큼 우수한 기마민족이라는 말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세계 역사학계는 상당부분 무리라고 보고 있다. 마치 일본이 '임나일 본부 설'을 앞세워 일본이라는 국가가 최초 성립하기도 전에 한반도를 지배하고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현실이다.
왜 터키는 보편타당한 상식의 선에서 자신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유목민족의 후예이며 푸른 초원을 찾아 남하하다가 12세기에 이슬람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19세기까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던 위대한 왕조의 후예라고 간단 명료하게 주장하면 안되는 걸까?
왜 흉노와 칭기즈칸이 그들의 역사 한구석에 억지로라도 끼어넣어져야만 한다는 말인가?
말타고 달리는게 그렇게 자랑이고 염원이라면 그 넓은 영토에 동서남북으로 경주마 전용도로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터키 역사속의 흉노에 대해선 흉노의 최대 피해자였던 중국이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터키 역사속의 칭기즈칸에 대해서는 몽골이 동의 할리가 없고. 차라리 터키가 호적을 파서 몽고 역사 속으로 투항하라고 한다.
왜 그럴까?
흉노와 칭기스칸이 있으면 생활이 좀 나아지는 것일까?
차라리 '광활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유랑하며 유목생활을 하는 수많은 부족들이 있었다. 그 부족사회의 중심에서 구심점 역활을 하면서 이들을 이끌던 부족이 트르크(TURK) 족이었으며 터키는 바로 그 투르크 족에서 기원한다.' 라고 했으면 아주 간단하고 명확했을 것을.
그 유목부족 명맥이 이어져 터키(Turkey)가 되었다는데, 이미 자신들 부족의 이름으로 자주독립국가로 출범한 키리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크메니스탄. 그리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주가 이제와서 우리도 투르크의 후예라고 따지고 덤벼들진 않을텐데 말이다.
거기다가 흉노는 뭐고 칭기스칸이 왜 튀어나와?
'셀주크 투르크는 우리 터키의 외갓집 조상이다. 그럼으로 그 또한 우리의 뿌리다.'라고 대못을 꽝 꽝 밖아놓는게 보다 현명한 일 일것을........
이러다 어디 셀주크의 후예들(부족 내지 민족)이 등장해서 '우리는 터키와 전혀 다른 민족이다. 배다른 형제로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한다면........ 그땐 터키가 진짜 사생아가 될터인데 말이다. 남의 흉노 칭기즈칸 찾다가 자신들 호적 떠내려 가는것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까발리면 터키에서 감사패를 받게될까? 아님 공항에서 쫓겨날까?
거두절미하고........ 내가 알고있고 납득할 수 있는 투르크(TURK)를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투르크는 중아아시아 지역에 아주 드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던 인종을 초월한 수많은 유목부족 연합체를 이르는 말이었다.
초원과 광야에는 아직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부족단위 유목생활이 이어져내려오던 950년 경, 셀주크( Seljuk) 라는 이름의 부족장이 이끄는 무리가 볼가강을 건너 흑해 연안의 스텝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부터 (셀주크 투르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이들은 기온이 따뜻하고 초지가 풍부한 남쪽의 새로운 환경을 찾아 부족 대이동을 시작한것이다.
처음 이들이 정착한 곳은 초기 이슬람 제국의 국경지대인 카스피해와 아랄해의 연안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목생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곧 쿠라산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이곳에서 수십년간 정착생활을 하면서 페르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받아들이게 되고 현지인들과 혼인을 통하여 혼혈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이들을 가르켜 '셀주크 부족장과 함께 투르크에서 온 사람들' 이란 의미로 셀주크 투르크人(Seljuk Turks)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착생활과 혼인을 통하여 점차 이슬람 세계속으로 발걸음을 넓혀가던 셀주크는 아바스 왕조의 분쟁을 틈타 전쟁에 뛰어들어 가즈나 왕조를 격파한다. 이어 조직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만왕조를 통합하고 마침내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슬람의 성역 이스파한을 점령하고는 위세를 몰아 부아이흐 왕조로 부터 이슬람의 지배권을 넘겨 받는다. 일개 유목 민족에서 이슬람의 지배자로 성장한 것이다. 이것이 셀주크 투르크 제국(Seljuk Turk)이다.
셀주크는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고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카이로에서 몰아냈다. 페르시아와 시리아를 묶어서 대제국을 건설했다.
1071년 아나톨리아 평원 남동부의 반 호수 근처 전투에서 거대한 제국 비잔틴과의 전투를 벌여 비잔틴 군대를 궤멸시키고 비잔틴의 황제 디오게네프를 포로로 잡는 대성과를 올리며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셀주크의 번영은 그리 지속되지 못했다.
능력을 갖춘 술탄 산자르(1097~1157)가 사망하면서 부터 생겨난 통치권 다툼으로 '한 제국의 몰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국은 무너졌고 수많은 소국가로 분리되었다. 이 소국들은 다시 소부족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이때부터 또 다른 생존을 위해 부족간 소국가간에 전쟁이 끊이질 않게 되었다. 이합집산과 음모와 배신이 끊이지 않았다. 제국은 사막의 모래알 처럼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족들은 또 다시 사막과 광야를 유랑하다가 오아시를 하나 발견하면 그곳에 터를 잡고 부족국가를 칭했고, 좀 번성한다 싶으면 어디서 눈군가가 쳐들어 와서 빼고 빼앗기기를 반복했다. 유목생활과 도적질과 강도질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을 오가던 순례자들이 살해당하는 강도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속 내용까지야 어떻든......... '십자군 전쟁'으로 이름지워진 한바탕 광풍이 몰아쳤다.
바티칸과 십자군 원정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성지 예루살렘의 수복' 이었다. 셀주크 투르크로 부터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비잔틴의 목적은 셀주크 투르크로부터의 안전확보와 영토 회복이었다.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셀주크 투르크는 이미 없었다. 사라지고 난 후였다.
셀주크 투르크가 사라지자마자 쫓겨났던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재빠르게 예루살렘을 다시 접수했단. 그만큼 무주공산 이었다.
그런 무주공산을 향해서 온 유럽을 통털어 6만의 군사를 끌어모아 원정대를 꾸려서 원대하게 출정을 한 것이다.
십자군 원정대의 여정은 장장 3.000km에 달했다. 왕복 6,000km에 달하는 멀고도 먼 길을 대부분 걸어서 하는 행군이었다.
맨 몸으로 혼자 걸어도 힘든데 무기며 장비를 가지고 움직여야 했다. 원정행로는 길었고 보급은 형편 없었다. 살기위한 방법은 현지조달 뿐이었다.
십자군은 주변의 민가와 도시들을 털었다. 모조리 털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까지 털었다. 성스런 군대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예루살렘까지 가는 도중에 드넓은 이슬람 지역은 어떻게 통과했겠는가? 약탈을 넘머 눈에 띄면 모조리 죽여 버렸다.
빼앗기고 살해당하다 못해 살아남은 투르크족들이 다시 한데 뭉쳤다. 그리고 죽기 살기로 십자군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것이 제 1차 십자군 전쟁이다.
유럽의 온 기독교 연합 군대가 일개 몰락한 셀주크 투르크 족을 상대로 벌인 거대하고 성스런(?) 전쟁이었다. 처참한 만행이요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당연히 1차 전쟁은 십자군의 승리였다. 일개 부족을 상대로한 전쟁에서 그들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잔치를 열고 환호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셀주크 일개 부족의 몰락은 흩어졌던 나머지 이슬람을 자극하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슬람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쿠르드 족의 부족장 '살라딘'이 있었다. 곧 하나된 이슬람의 술탄이 된다.
기독교 연합군 대 이슬람 연합군의 진정한 싸움이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슬람은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다시 차지한다. 그후 8차까지의 전쟁에서 십자군은 정당한 싸움으로는 1차 이후로 예루살렘을 단 한차례도 빼앗지 못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역사속에서 사라졌고 십자군 전쟁도 모두 끝났다.
--- 부르사 성벽과 통치자의 문 전경.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그쳤으나 잔뜩 찌프린 하늘에선 여전히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진곤 했다.
새벽 산책을 나섰다.
'내가 바로 오스만식 건축이야'라고 뽐을 내듯이 아름다운 건물은 이 새벽엔 고즈넉한 매혹까지 치장을 하고 나를 반긴다.
하루를 시작하긴 아직 조금 이른탓인지 오가는 행인은 별로 없지만 잠이 없는 노인 여행단은 벌써 깃발아래 모여 새벽 이슬람사원 순례를 시작했다.
립스틱을 선명하게 새로 바른 빨간 트램이 지나가고 도로 모퉁이엔 노란 택시들이 모여서 출근하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조용하고 싱그러운 부르사의 아침. 오늘은 과연 무슨일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생각에 벌써부터 절로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한다.
그냥 걷는다.
가보고자 하는 곳도 오라는 곳도 없지만 아침 바람결이 오른쪽으로 스쳐가는 것을 느끼고는 아무래도 바람이 나를 따라오라 부르는 것만 같아 나도 덩달아 오른쪽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무러면 어때? 어제는 볼펜이 나를 행복하게 이끌어 주었잖아? 혹 오늘은 바람인줄 알아?
그렇게 걷다보니 언덕길 안쪽으로 오래된 낡은 건물들과 좁은 골목길이 참 예쁘다.
난 왜 이렇게 낡고 좁고 휘어진 골목길을 좋아하는 것일까?
가다보면 낭떠러지 같은 가파른 돌계단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싶으면 또 다른 골목과 이어지고, 마치 숨박꼭질 하듯이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가다보면 잠시전에 왼쪽 골목으로 사라진 학생이 조만치 아래를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고,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툭하고 허물어져 떨어질것 같은 난간에 겨우 매달려 피어난 빨간 장미꽃이며 허물어진 담장위로 빨간 석류가 힘겹게 매달려 있다.하얀 페인트가 모두 벗겨진 미닫이 창문아래 색이 바랜 빨래와 양말이 아침바람에 흔날리면 도심 뒷편의 아침은 그렇게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골목 빠져나갈때 쯤 커피 자판기 하나 놓여있으면 좋겠다.
하나 둘 언덕길을 올라가는 학생들을 따라 올라간다.
라임스톤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성벽과 망루가 나타난다.
'아하 내가 지금 부르사 성벽을 향해 온것이로구나. 그럼 통치자의 문은 어디있지? 아하~~~~~~~'
부르사 시내를 한눈에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에 도착한 것이다.
정말로 싱그러운 아침을 맞는다.
'세상 사람 모두 안녕? 굿 모닝!'
중앙아시아에서 부터 셀주크를 따라 떠나온 투르크족 중에 (술레이만 샤)라는 부족장이 있었다.
그는 용맹하기도 하였으나 사려 깊고 인내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하여 그는 벼락처럼 급성장 하였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간 셍주크 투르크 제국의 융성과 몰락에서 한발자국 물러서서 이란 서부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이슬람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런 온화한 그의 성품은 셀주크 투르크의 멸망과 함께 등장한 부족과 소국가간의 피흘리는 전쟁판에서도 나름 자신의 부족을 이끌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술탄 모하메드가 비단에 눈이멀어 몽골 상단을 살해하면서 시작된 '몽골의 제 1차 침공(1218년)'은 온 유럽 사회뿐만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전 이슬람을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몽골이 후계문제로 인하여 세력확산이 주춤해 지자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후계구도가 안정되자 훌라구가 소아시아와 유럽을 향해 다시 침입(제 2차 침공, 1253년)을 감행해 왔다.
이슬람의 성지 바그다드가 훌라구에게 함락되었으며 이슬람의 최고 통치자였던 압바스 왕조가 멸망당했다.
급변하는 위급한 상황을 직시한 술레이만 샤는 부족을 이끌고 재빠르게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몽골 대군이 유럽으로 몰려가고 소아시아 지역이 안정을 찾게되자 술레이만 샤는 선발대를 이끌고 떠나온 고향의 상황을 살피러 강을 건너가다가 그만 유프라테스 강에 빠져 익사해 버리고 말았다. 술레이만 샤의 아들 에르투으룰은 부친의 사망 또한 신의 뜻으로 여겨 교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족과 함께 그곳에 그대로 정착하였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의 뒤를 이어 등장한 '룸 술탄국'의 장수가 되어 비잔틴과의 전쟁에서 여러번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족을 강인한 군대로 조련하기 시작했다. 에르투으룰이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이 장자권과 군대로 조직된 부족을 물려받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오스만이다. 바로 오스만 제국을 일으킨 '오스만 1세(Osman. 영어 표기는 Ottoman)'이며 그가 세운 나라가 '오스만 제국(The Ottoman Empire)이다.
그 뿌리가 중앙아시아의 유목부족 투르크 였기에 '오스만 투르크'라 불렀으며, 바로 지금의 터키(Turkey)가 된다.
오스만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탁월한 전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명성과 세력이 커져가자 수많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1299년 오스만은 새로운 나라 체제를 갖추고 술탄에 즉위함으로써 엄연한 독립국의 군주임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시작이다.
부르사 침공은 오스만 1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스만 1세는 아직 제국을 정착시키고 운영해나갈 수도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목표가 부르사였다.
하지만 그가 종국에 부르사에 입성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제국을 시작하기는 하였지만 제국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던 듯 하다. 제국의 완성은 그의 아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가 바로 오르한 가지 술탄이다.
위험 표시를 무시하고 성벾위로 힘겹게 올라간다.
부르사의 아침 풍경이 시야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아름답다. 이스탄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스탄불은 시작에서 끝까지 모두 보스포러스해의 코발트빛 바다빛깔과 비잔틴 향기와 멋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라면 부르사는 숲이 우거진 산자락과 빨간 지붕의 도심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내는 흡사 스위스나 이탈리아 북부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전혀 다르지만 모두 다 정말로 아름답다.
동편 산자락 운무 사이로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하늘은 당장이라도 소나기를 뿌려댈것처럼 흐려 있어서 일출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싱그럽고 아름다운 풍경 앞에 지금 내가 마주서 있다.
까마득한 성벽이 내 발치아래 내려다보이고 그 아래로 또 빨간 트램이 지나간다.
그러고보니 부르사의 트램도 이스탄불의 트램과는 전혀 다르다. 어찌보자면 그 다름은 두 도시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주는것만 같다. 정말이네?
부르사의 트램은 빨간색 한가지 뿐이다.
이스탄불 트램은 빨간샌.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거기에 화려하게 발광 페인트로 칠한 초형실적인 디자인과 그림으로 가득찬 트램도 있다.
부르사 트램은 매번 정해진 시간에 또박또박 운행한다. 시간표는 하나의 약속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이스탄불의 트램은 출발은 정시에 한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엿장수 맘대로다. 트램노선이 차선과 인도와 혼용이다보니 시도때도 없이 중간에 잘 멈춰선다. 그러다 보면 앞차가 미처 정류장을 떠나기도 전에 뒷차가 도착하고, 그냥 노선위에 서서 기다린다. 아주 간혹 두대 세대가 맞물려 한꺼번에 운행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목격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질서 하다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그냥 배려와 자유로움으로 느껴진다. 다분히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운행인데도 어디에도 위험방지 시설이나 특별한 조치가 없다. 스스로 편리하게 이용하고 혹시나 사고에 대한 위험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시민의식으로 보인다.
부르사는 그렇게 어딘지 모르게 정형화된 도시이다. 무슬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도시다.
이스탄불은 다분히 열린 도시다. 자유로움과 시장경제를 대단히 중시하는 여행자의 도시다.
트램이나 전차가 있는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곧 잘 그런 생각을 해왔다.
심신이 모두 여유로운 날에 종점에서 트램을 타고 다른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생각을 늘 접했었다. 그러면 이름난 특정 여행지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생활과 그들의 터전을 좀 더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것만 같아서였다. 트램은 아주 많이 이용해 보았지만 종점까지 가는 트램 나들이는 이제껏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이참에 부르사에서 트램 나들이를 한번 해볼까?
--- 20개의 돔을 가진 매우 특이한 울루 자미 전경.
오르한 가지(Orhan Gazi) 2대 술탄이 1326년 마침내 부르사를 점령했다. 비잔틴의 중요 거점도시였던 부르사는 그만큼 오스만제국에 있어서 탐나는 도시였다. 초대 술탄이자 오르한 가지의 부친인 오스만 1세가 니케아를 점령한 후 곧바로 부르사 침공에 나섰지만 부르사의 비잔틴 또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 와중에 오스만이 사망하고, 마침내 오르한 가지에 의해 부르사는 점령되었다.
아주 일부의 학자들은 초대 술탄인 오스만이 즉위하고 거처하였던 쇠위트(Sogut)를 초대 수도로 보는 의견도 소수있으나, 대다수는 오르한 가지에 의한 부르사를 오스만 제국의 초대 수도로 인정하고 있다.
오르한 가지는 점령과 동시에 부르사를 제국의 수도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이 지역이 비잔틴과 인접한 국경지역에 해당되었기에 성곽의 축조는 대단히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오르한은 이 독립된 높은 언덕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고 다섯개의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탈진 벼랑쪽에 두개의 웅장하고 높은 전망탑을 쌓았다. 그리고 성의 한쪽 구석이 되는 벼랑쪽으로 궁전을 지었으니 지금의 톱하네 공원 자리가 최초의 오스만 궁전이 들어섰던 자리이다.
궁전과 이웃해 있기에 오스만의 술탄들은 외출시 항상 이 문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통치자의 문(Saltana Kapi)' 이다.
1855년의 대지진으로 궁전과 성벽이 모두 완전히 무너졌다.
1900년대 초 현대식 도시 재건계획에 따라 도로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궁전과 성문의 석재들을 마구 가져다 쓰는 바람에 그만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오스만의 초대 궁전과 성벽은 지금 부르사의 도로아래 어딘가에 뭍혀있다.
지금 화사한 라임스톤의 밝은 색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복구된 부분은 1850년과 1887년의 옛 사진을 기본으로 하여 당시의 크기와 모양대로 본래의 모습으로 재건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초대 궁전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울루 자미(Ulu Camii)는 한마디로 부르사의 상징이다. 랜드마크 이다.
부르사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정착기에 접어든 무랏 1세때 착공하여 바예지드 1세를 지나 마호멧 1세 시대까지 40년에 걸쳐서 완공되었다.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새로운 자미들을 건설하기 전까지 오스만 전 영토내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서 역활을 다했다.
울루 자미는 밝고 선명한 라임스톤 응회암으로 지어져서 어딘지 모르게 다뜻한 느낌을 안겨주는 아주 특이한 사원이다. 부르사의 한복판이자 드넓은 언덕위에 마치 거대한 요새처럼 우뚝 솟아있다. 트램이 지나다니는 도로쪽에서 바라보자면 울루자미는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성벽을 연상시킨다. 난공불락의 거대한 요새 같은 위용을 물씬 풍긴다. 나머지 세개의 면에 출입구와 대리석으로 만든 문이 달려있다.
울루 자미가 유명한것은 아무래도 20개나 되는 작은 돔(뿔형태의 지붕)이 올려져서 아주 독특한 천장의 모습을 이루며 그 아래로 사각형의 기둥들이 마치 숲을 이루로 있는 듯한 독특하고 신비로운 풍경이 아닐까 싶다. 실내의 한복판에 19세기에 들어서 분수가 설치되면서 또 하나의 매우 독특한 풍경을 선사해 주곤 있지만........ 분수가 없는 빼곡한 돌기둥이 숲을 이루고 그 위의 20개나 되는 돔을 통해 빛이 스며 내려오는 성스럽고 신비스런 장면을 이제는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더욱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독특한 분위기의 이슬람 사원은 없다. 비슷한 사원도 없다.
이 같이 독특한 형태를 가진 사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지예드 1세가 마케도니아 전쟁에 나섰는데 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하지만 이번 전쟁의 성패는 앞으로의 제국에 운명을 갈라놓을지도 모르는 형국이었다. 다급한 술탄은 땅바닦에 엎드려 알라신께 간절하게 승리를 요청했다.
'알라께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죽기전까지 20개의 사원을 지어서 신께 영광을 받치겠나이다' 라고 빌고 또 빌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오스만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부르사로 돌아 온 바지예드 술탄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이미 신에게 20개의 사원을 지어 받치겠노라고 맹세를 했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했다.
당장 아버지 무랏 1세가 시작해 놓은 사원(울루 자미)을 계승해서 짓고 있는 시간만도 20년이 넘게 지속하고 있음에도 완공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또다시 사원을 지어야만 하는데 하나 둘도 아니고 자그만치 스므개라니........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자니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거기에다 그 많은 재원을 또 어떻게 조달한단 말인가?
이슬람 역사를 통털어 최초이자 전무후무한 '신에게 거짓말을 한 자' '신에게 공수표를 발행한 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술탄은 한가지 묘책을 찾아냈다.
이슬람 사원의 기본 형태는 1개의 돔에 4개의 첨탑이 기본형이다. 그렇게 보자면 어찌되었건 20개의 돔은 20개의 사원을 의미한다.
술탄은 곧 공사 총감독을 불러서 지금 공사중인 사원의 설계 변경을 명령했다.
이미 30년 가까이 끌어온 사원의 공사를 변경해서 면적을 더 넓히고 그 위에 무조건 20개의 돔을 설치해 얹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사원 공사는 개인의 업적이나 영달이 아닌 신에게 받치는 성스러운 작업이다. 하여 총감독은 당연히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술탄이 분명하게 못을 박고 시행을 명령했다.
'모든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는 무조건 20개의 돔이 있는 사원을 완성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길로 광야에 나아가 혼자 엎드려 알라께 이 사실을 고스란히 고할 것이다. 이 같은 나의 생각이 불경이라면 알라께서 나에게 참혹한 형벌을 내리실 것이며 나는 그 벌을 받겠다. 내 마음이 불경이라면 결코 사원은 완성을 볼 수 없으리라. 하지만 알라께서 허락하신다면 사원은 완성될 것이며 후세에 길이 소중함으로 전해질 것이다. 모든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는 내 말에 따르면 된다. 이제 모든것은 신께서 결정하실 것이다.'
바지예드는 알라신에게 모든것을 고했고 사원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대에서 아무 탈없이 마침내 무사히 완공되었다. 울루 자미다.
하여 여기 울루 자미는 수많은 이슬람 사원중에서 '알라신께서 직접 허락하여 완성되었고 신께서 직접 기뻐하며 받아주신 사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신성한 절대 성소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중동 지역의 무슬림 순례자들이 정말 무척이나 많다. 새벽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순례 행렬이 이어진다.
모하메드에 의해 시작된 이슬람은 모하메드와 추종자들에 의해 초기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를 비롯한 몇개 종파로 나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소수 왕조들로 분열되었다. 서구의 기독교 세계와 부딪치게 되면서 초기 이슬람을 주도하던 세력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렇게 본다면 셀주크 투르크나 오스만 투르크는 무슬림 정통성에 비하자면 이민족이자 이교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슬람에 동화되었고, 적어도 13세기에서 시작하여 18세기 까지는 이슬람의 기둥이자 지배자였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이슬람이 보호되고 이어져 내려왔다고 해도 무방할만큼 오스만은 이슬람이었고, 이슬람이 곧 오스만이었다. 터키 사람들 핏속에는 이처럼 이슬람을 수호해 온 오스만 정신을 무한한 자부심이자 자긍심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정신이 유독 강한곳이 바로 이곳 부르사 이다.
--- 귤하네 공원 전망대. 부르사 최고의 뷰 포인트.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울루 자미에 들려보았다.
첫날 잠시 들여다 보기는 했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있던 관계로 들어가보지는 못하였다.
아침 산책에는 주로 편한 반바지 복장이라 사원에 들릴 엄두를 못내기 일쑤였는데 부르사에는 항상 긴바지 차림이사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인데도 순례자들이 현지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은 분명 신의 영역이다.
북쪽으로 난 문밖으로 세속의 공간이 그대로 보인다.
두 공간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본래 그런 모습이었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도 가로막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나와 누군가, 나와 자연, 인종과 인종, 종교와 종교, 국가와 국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 스스로가 장벽을 막고 거리를 두고 구분을 짖게 만든것이다.
더할것도 덜어낼것도 없는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다.
신 앞에 겸손함으로 감사하고, 신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깨닫고, 그 본연의 자세를 재정립하는 곳이다.
어느 종파의 신이건 어느 신이 더 신령하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다.
신들의 가르침의 본질은 모두 같으니까 말이다.
진리를 깨달아라. 서로 사랑하라. 평화로울 지어다. 모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가르침이다.
나는 지금 신의 영역에 서있다. 어느 신인가는 이순간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낀다. 그분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도 느낀다.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도 느낀다.
나도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이곳을 떠나 세속으로 걸어나가게 된다면 더 열심히 생활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다.
신이 인간의 종교성을 따져서 차등을 두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도 신을 가리고 따져서 존경하고 사랑에 차등을 두어본 적이 없다.
신에겐 신의 영역이 있고 인간에겐 인간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형제자매이고 가족이라는 것을 나는 믿고있을 뿐이다.
울루 자미에서 나는 신과 함께 건물안을 거닐었다.
내 영혼이 위로받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앗 살람 왈레이쿰.'
--- 부르사에 대해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정리함으로서 부르사 여행을 마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트래블 / 터키) 수천 년을 이어온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 '이스탄불' (0) | 2018.12.14 |
---|---|
(알 럽 트래블 / 터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풍요로운 도시가 또 있을까? (0) | 2018.12.08 |
(알 럽 트래블 / 터키) 위대한 제국의 출발을 찾아가는 여행길....... 부르사 (0) | 2018.12.04 |
(알 럽 트래블 / 터키) 초대 교회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이즈닉을 찾아서..... (0) | 2018.12.02 |
(알 럽 트래블 / 터키) 이젠 떠나자. 악마의 숨구멍 같은 카파도키아에서.... (0) | 2018.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