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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터키) 약간의 각오와 약간의 여유 그리고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충분한 여행

by 피안재 2018. 11. 27.

 

 

 

 

 

 

 

 

 

 

 

 

 

 

 

 

 

  부드럽고 가느다란 이른 새벽아침의 미명이 사르라니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연일 계속된 고된 여정에 들어올려 본 한쪽 팔의 무게만도 천근만근이다.

  커튼을 걷어보니 어느새 제법 환해진 아침이 빼꼼 내 방안을 훔쳐보고 있다.

  '아뿔싸.  이러다 지각하는것 아니야?'

  훗후후.

  이내 아직은 내가 여행중이라는 사실과   이곳은 나의 현실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카파도키아라는 생각에 피식 웃어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날이 어느정도 환해질 때까지 누워 있었다니.........  좀체로 내 생활에서는 보기 드문 그런 아침이다.  흔한말로 이정도면 늦잠에 해당된다.

  본래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창문을 확 열어재낀다.  카파도키아의 아침이 사정없이 방안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서 빨간 불이 켜지도록 한다.  장독대에  정한수 한대접 떠놓는 심정과 같을 것이다.  방금 일어난 침대를 정리하고는  곧바로 샤워실로 직행한다.  언제나 처럼 말이다.  아침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커피포트의 물이 끓기 시작한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옷을 찾아 입는 것으로  나의 새벽 산책 준비는 끝이 난다.

  핸디폰에서는  하루의 힘찬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뮤직이 흘러 나오고 있다.

  오늘 준비된  내 여정의 타이틀 곡은  'America'의  (You can do magic) 이다.  두비두두 딥딥  두비두........

 

 

  아침 해가 떠올라 찬연한 빛을 발산하기까지,  그 직전의 시간은 청명함과 고요함과  심지어 어떤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낮도 아닌것이  그렇다고 밤도 아닌것이.......  그리고 그 미명의 시간은 짧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는 아주 독특한 향기를 품은 상큼한 바람결이 언제나 불어온다.

  그야말로 내가 아닌 신께서 보내시는 매직 같다고 해야할까?

  나는 이 시간과 공기가 그리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이런 새벽의 미명이 좋다.  새벽을 사랑한다.

  이렇게 새로운 새벽을 또다시 맞이하고 있음은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상큼한 새벽 공기를 페부 가득 들이키며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간다.  하루 일과를 한참 전에 모두 마쳤을  가로등이 아직 퇴근을 안하고 모두들 서있다.  밤새 힘에 겨웠음인지 뿜어내던 샛노란 광채도 거의 다  잃어가고 있다. '짜식. 한국 같았으면 정시 퇴근 시켜주었을 텐데.  뭘 그렇게 쳐다 봐?'

  전망대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까만 후라이 팬에 기름을 두르고나서  번데기 통조림 뚜겅을 조심스레 따고서 조심스레 살며시 팬 위에 쏟아 부으면  진한 갈색의 번데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내 수북하게 쌓인다.  지금 전망대의 풍경이 꼭 그렇게 닮았다.

  그 팬의 한쪽 빈공간으로 달걀 하나 톡 깨트려 넣으면.........  아침해가 떠오르는 카파도키아의 전망대 풍경이 꼭 그럴것만 같다.  골짜기 아래에서  애드벌룬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면.........  후라이 팬  달걀 노른자 위에 후추를 뿌릴 시간이 된것이다.  어쩌면? 

 

  피식.

  아무 의미없이 그냥 편안하게 터져나오는 이 미소는 무엇일까?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페단에서 생겨나는 웃음이 결코 아니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남음이 있겠다.  순박하고 편안한 미소는 그런곳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을테니까.  세상 만물은 물거품 같고  아가씨 마음은 아지랑이 같고   어린아이의 눈망울에는  태고의 신비가 담겨있다고 했다.

  아이의 눈망울에 담긴 하늘색 꿈 같은 그런 하루를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저들 모두에게도 그런 아침이 찾아들기를 나는 기원한다.  좋은 아침.

 

 

 

 

 

 

 

 

 

 

 

 

 

 

 

 

 

 

 

 

 

 

 

 

 

 

 

 

 

 

 

  카파도키아의 동쪽 바위산 구릉 위로  서서히 아침해가 떠오르고  야외박물관 인근의 너른 공터에서 붉은 불꽃을 선보이며 애드벌룬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하면   전망대에 가득 몰려든 사람들이 갑자기 분주해지면서  벅찬 감동에 탄성들이 터져나온다.

  항상 그렇다.  세세히 바라본다면  그 감흥들이 모두 다르고 탄성을 내지르는 사람들 또한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조금 뒤로 물너나서 큰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자면 언제나, 늘, 항상 거기서 거기인 같은 그림이다.

  우리네 일상에서 흔하디 흔한 음식의 맛은 물리거나 질리는 법이 없다.  흔히 집밥이나 청국장  김치찌개가 그렇다.  하지만 유난히 맛있거나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만큼 자극적인 맛은  처음의 단 한번은 환상적인 맛으로 다가오지만,  반복되면  그것들은 쉽게 물리게되고 식상하게 된다.

  뜬구름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카파도키아를 만나는 순간부터  이곳에서의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모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이곳에서의 모든것이 그랬다.

  하루가 지났고 이틀째를 맞이하는 순간일 뿐이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숨이 멎을 정도로......  가슴이 터질 정도로.......  지구가 아닌 어느 낯성 행성에 잠결에 날라들었든 것처럼........  지난 밤 잠자리에 들때까지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어마어마한 감동의 파노라마가 이어졌었다.

  그런데.........  이 아침엔 그런 감흥도 감동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제 하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일상적인 반복처럼  느껴졌다.

 

  털어내야지.

  아직 하루를 제대로 시작한것도 아닌데........

  오늘은 조금은 벅찰 수 있는 그런 스케줄을 갖기로 했다.

  두개 내지 세개의 계곡 트래킹을 단 하루에 감행해 볼 생각이다.  애초 생각에서부터 다소 무리가 될 것이라는 느낌은 있었다.  떨어져 있는 계곡간의 거리도 제법인데,  오로지 걸어서 그곳들을 모두 둘러본다는게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안을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 마음을 먹었으면 그리 해 볼 수 밖에.........

 

  서둘러 전망대에서 물러나와 바위벼랑 사이로 난 오솔길을 올라간다.

  아슬아슬 벼랑길을 따라 조금 윗족으로 올라가면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어제 걸었던 화이트 밸리의 반대쪽인 제미 밸리(Zemi Valley)로 내려가기 위함이다.  본래 제미 밸리는  괴뢰매 외곽의 야외박물관 서쪽의  너른 공터(애드벌룬 출발지)에서 오른쪽 '투어리스트 호텔' 안쪽으로 펼쳐져있는 계곡이다.  남성의 심볼을 닮은 바위들이 빼곡히 서있다해서 원조 '러브 밸리'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계곡이다.  하지만 입구쪽에서 시작하면 다시 입구쪽으로 돌아나와야만 한다.  하여 나는 선쎝포인트 뒷쪽의 능선을 타고 계곡의 상류로 올라가서  아침 산책 겸  제미 밸리 트래킹을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다.

  벼랑을 내려서 계곡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공간이 넓다.  반대편쪽  화이트 밸리의 협소한 계곡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이 계곡을........  그리고 이 아침을 천천히 느껴보기로 하자.

 

 

 

 

 

 

 

 

 

 

 

 

 

           --- 물웅덩이가 아니다.  착시현상이다.   아마도 백만년 전에는 물웅덩이였을 것이다.

 

 

 

 

 

 

 

 

 

 

 

 

 

 

 

 

 

 

 

 

 

 

 

 

 

 

 

 

 

 

 

 

 

 

 

 

 

  '브레이크 애드벌룬 다운'

  마치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애드벌룬 하나가 추락했다.

  높이 날아올랐다 떨어진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지상에서 겨우 조금 올라가더니  더이상 솟아오르지 못하고  옆으로만 바람에 밀려 서서히 떠밀려 다니다가  제미 밸리 공터에 추락했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이미 잘 알려딘대로  무시히 애드벌룬 투어를 마쳤을때 행한다고 알려진  샴페인을 터트렸다.  정말 웃기는 씨츄에이션이다.

  그나마 솟아 올랐다 큰 사고로 번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위로들 하는 것일까?

  환불을 해주려나?  아님 내일 다시 태워주려나?

  열 대여섯명의 승객에다  1인당 평균 120달러씩 잡으면 도대체 얼마여?  시방 그게 날라간거여?

  내가 잡아당긴것도 아닌데......

  나도 아직 못 타봤으니까 하나쯤 떨어져 봐라라고 기도한 것도 아닌데.........

  그동안 몇번의 기회는 있었지만  나도 아직은  애드벌룬을 타보지 못했다.

  일생에 한번밖에 안타볼것 같은 생각에........  미안해서 어떻게 혼자 날름 탈 수가 있겠는가?  담에 함께 타지 뭐.

 

 

 

 

 

 

 

 

 

 

 

 

 

 

 

 

 

 

 

 

 

 

 

 

 

 

 

 

 

 

 

 

 

 

 

 

  유니콘 케이브로 돌아와서 맛있는 조식을 먹는다.  밤새 기다렸던 바로 그맛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상념에 잠겨 본다.

  갑자기 미얀마의 바간 생각이 났다.  그랬다.  무엇이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카파도키아는 바간과 많이 닮았다.  풍경이 아닌 여행자의 느낌 말이다.

  그때 나는 일정을 앞당겨 바간을 뛰쳐나왔었다.

  도대체 이 느낌은 뭐지? 

  일단은 아미 마음 먹었던 대로 남아있는 오늘의 일정을 실행해야만 했다.

  매지저에게 부탁해서 기가막히게 맛있는 빵을 조금 얻어서 배낭에 갈무리 했다.  가는 길에 캔맥주 하나면 충분하리라.

  마음을 다잡아보기 위해서 샤워를 다시하고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방금 다녀온 제미 밸리의 입구인  카파도키아 자연사 박물관 앞 공터에서 부터 본격적인 오늘의 트래킹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레드 밸리(Red Valley)와  로즈 밸리(Rose Valley)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골짜기 깊은곳의 움막처럼 생긴 쉼터에서 현지인을 만나 알게된 사실이지만  레드 밸리와 로즈 밸리는 따로 구분이 필요 없다.  그냥 하나로 묶여있는 골짜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여행사가 수익성을 생각해서  그린 투어. 레드 투어. 로즈 투어. 벌룬 투어. ATV투어 등으로  상품을 세분화 했을 뿐이었다.  카파도키아에 있는 모든 골짜기 마다 하나 혹은 둘의 이름을 제각각 가지고 있다.  레드 밸리와 로즈 밸리는 그냥 통로 같은 골짜기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너른 지역인데  여행사와 가이드가 이들을  각기 다른 이름의 상품으로 구분을 해서 흔한말로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레드 밸리 투어는 조금 싸고  로즈 밸리 투어는 확연하게 좀 더 비싸다.

  레드 밸리나 로즈 밸리나 내면으로는 붉은색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행사나 가이드 말대로 굳이 구분을 해서 레드 밸리에 가면   그 어느곳에도 붉은 색깔이 없다. 온통 하얀 암벽 뿐이다.   골짜기를 지나 로즈 밸리라는 지역에 들어가야만   붉은색 계곡이 나타난다.

  쉼터 젊은이 왈.......  '레드 밸리와 로즈 밸리는 그냥 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돼요.  그게 옳은 설명이예요.  여기 주위가 모두 레드 밸리이기도 하고 로즈 밸리 이기도 해요.  부르는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요?'

 

  레드.로즈 밸리 투어의 초입에는  현재도 바위동굴에 주민이 거처하는 곳이 여러군데 있다.

  비록 생활을 하고 있는 현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못햇지만,  먼 수백년 전의 생활모습을 나름으로 유츄해 볼 수는 있었다.

  하긴,  현지인들의 실생활에  스쳐지나며 호기심으로 이어지는 여행자들의 눈길이 얼마나 거북하고 고초였을까마는...........

  장사꾼에게 여행자는 반가운 손님이다.  하지만 실제 생활자에게 여행자는  차마 내쫓지 못하는 불편한 불청객이다.

 

 

 

 

 

 

 

         --- 제미 밸리. 로즈 밸리. 레드 밸리 투어가 시작되는 분기점.  애드벌룬이 뜨는 출발지이기도 하다.

 

 

 

 

 

 

 

 

 

 

 

 

 

 

 

 

 

 

 

 

 

 

 

 

 

 

 

 

 

 

 

 

 

 

 

 

 

 

 

 

 

 

 

 

 

 

 

 

 

 

 

 

 

 

 

 

 

 

 

 

  바위벼랑 사이로 비밀통로 같은 길이 나타났다.

  가만히 살펴보자니  물길이었다.  수백만년 전에 이 작은 통로같은 길에는 세찬 급류가 콸콸 넘쳐 흘렀을 것이다.  보다 큰 본류는 양쪽의 계곡으로 쏟아져 내리며 이미 깊은 협곡을 만들었고,  덜 파여나간 언덕길에 새로난 작은 물줄기가 바로 여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방금 내가 지나온 길로 내려가 본류에 합류했을 것이다.  참으로 무상하다 싶을 억겁의 세월이 눈 앞을 스쳐 흘러내려 간다.

  오랜 세파에 부서져 내린 푸석한 응회암과 이미 잘게 부서질대로 부서진 모래가 위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에 휩쓸리며 얼굴을 때린다.

  이 좁은 통로의 바닥과 벽면 아래쪽으로 온통 타이어 자국이다. ATV 투어의 흔적들이다.  이들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길이든 길이 아니던 차량이 갈 수만 있으면 어디든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환경 파괴의 주범이다.  그것도 이 수백만년에 걸쳐서 겨우 만들어진  대자연의 유산 앞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하긴 자본주의의 속성상 돈이 되는 짓은 무엇이든 망설이지 않는게 경제적 동물의 근성이다.  환경은  가장 나중에.....  최후의 시간이 되어야 그때 생각한다.

  방금 내가 걸어온 길을 잠시 되돌아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은 실로 위대하며  이 모든것이 인간에게 선사해준 얼마나 큰 선물이가를 생각하면,  한없이 감사하고  소중하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저절로 생각하게 하는 곳이 아니었는가?  어찌 나만 그런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렇게 처연해지는 마음으로 대자연 앞에 겸손을 배워가는 즈음에 어디선가.......  요란한 엔진 굉음과 함께 십여대의 사륜구동차가 쌩 하고 내옆을 지나쳐 내려간다.  어쩌겠는가?  죽지 않으려고 서둘러 조금 아래쪽 빈 공터로 도망치듯 내려가 비켜 설 수 밖에........

  '에라이.....  썩을 놈들아. 요새 귀신은 뭐하나 몰러.  저런 싸가지들 안잡아가고........'  겸손과 겸양은 무슨? 부아가 치밀고 욕이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뒈지지 않을 정도로만 냅다 나뒹굴어라.  스레기는 그래야 정신을 차릴거야.'  악담을 넘어서 저주에 가까운 소리가 저절로 마구 흘러나온다.  나도 놀란다.

  자외선은 여전히 강렬하게 내리쬐고 라임 빛깔 응회암에 반사되어 오는 빛으로 인해 너무도 눈이 부시다.  바람에 실려온 모래 먼지는 여전히 내 눈을 지르고 있다.  덥다. 목이 마르다. 서서히 지쳐간다........

  'You can do it.'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건 후에야 다시금 가던 길을 올라간다.

  누군가가 낙서처럼 써서 매달아 논 이정표가 나왔다.  이정표는 배려이며 고마움이다.

  누군가가 목적지를 향해 첫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은 길일수도 있겠고,  또는 아직은 길이 아닐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뒤를 또 다른 누군가가 따라갔다면 그때부터는 분명히 길이다. 비로소 길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길에  또 누군가가 시간을 절약하고 헤메느라 고생하지 말라고 이정표를 세웠다.  목적지와 방향만 표시가 되었어도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는  많이 걸어 본 사람은 안다.  거기에다 오랜 경험으로 거리까지 표기해 두었다고 치자.  그것은 엄청난 배려이며 자비심이다.  내가 혼자만 다니는 길에는 이정표를 남기지 않는다.  그냥 알아서 다니거나 나만 아는 방식의 비밀스런 표시나 흔적이면 충분하다.

  손을 내밀어 이정표를 만져 본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 누군가의 고마운 마음을 혹 느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다.

  다소 허름해 보이지만  그 고마운 사람은 또 나름의 고심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표기해야 누구나가 쉽게 알아 볼 수 있을까?  어디에 매달아 놓아야 누구나가 쉽게 발견할 수 있을까?  거기에다 어떻게 만들어야 오래오래 매달려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세상은 나름으로 좀 더 살아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보석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은 사방에 많이 있으니까.

  '사람 사는곳 같은 세상' '사람 냄새 맡으며 사는 세상'은 너무 철학적인 문제 같아서 싫다해도.......  지금처럼  '나 아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나는 소리높여  목청껏 외치고 싶다.

 

 

  이정표는 분명 왼쪽의 언덕 아래쪽으로 가면 레드 밸리와 로즈 밸리로 향한다고 내게 말을 건네온다.

  그런데 내 시선은 까닭도 없이 자꾸 비밀 통로의 위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잠시 생각을 굴려 본다.

  능선에 올라서면 골짜기 마다의 깊은 속살을 절대 느껴볼 수 없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절대로 계곡 전체의 풍경을 짐작조차 해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능선도 올라보고 골짜기도 내려가 보는 방법뿐이다.  다만 시간과 엄청난 체력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내려가는 편한 길을 마다하고  끝을 알 수 없는 능선을 택했다.(이게 타고난 나의 천성이며 팔자인것을 이제와서 어떻게 하랴?)

  조금 더 올라가니 곧 길이 끊겼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주변이 심하게 훼손되고 쓰레기가 널려있는 것을 보자니  여기까지 ATV 투어가 진행되는 종점인 듯 싶다.  누가 아니랄까봐  발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의 빼어난 전망이 그대로 한 눈에 쏟아져 들어온다.  전망대이자  뷰포인트였다.  너도나도 여기서 열심히 인증샷들을 날렸으리라.

  하지만 내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싶다.  속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은  이 계곡의 감추어진 모습을 찾고싶다.

  능선을 따라 다시 가던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재난. 방심. 후회. 그리고 위험천만.........

  거기까지는 좋았다.  딱 거기까지 였다.

  능선을 타고 계곡의 정상부분까지 오르기를 백번 잘했다고 생각했다.

  직접 오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상상조차도 불가능했던 풍경들을 직접 목격할 수 있겠는가.  장엄하고도 무한으로 장엄한 풍경들........

  이것이 자유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희열이다.  또한 보람이다.

  그러나.......  인생사에선 공짜가 없다.  반듯이 그만한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어느 지점에 멈춰 서서 먼 앞을 내다본다.  아득하다 못해 까마득하다.  아니 아찔하다.

  발걸음을 계속해서 이 계곡의 시작지점까지 올라가서 또랑을 건너타고 다음 능선으로 가기까지는  아마도  쉽게 줄여잡아도 반나절 이상 돌아가야 할 것같다.

  그래서 힐끗 되돌아 보니 이제까지 올라 온 길도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이라 수월하겠지만,  설사 내려갔다쳐도 다시 골짜기를 여기까지 걸어 올라올 생각을 하니 그 역시 만만한 일은 아니지 싶다.  진퇴양난.  이럴땐 어떻게 하지?

  그때 문득 어떤 영화가 떠오르는건 왜 일까?  신의 계시일까?  악마의 유혹일까?  아니면  어떤분 말씀처럼 뛰어난 잔머리 때문일까?

  나는 '찰톤 헤스톤이 연기한 모세'와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모세'의 영화를 모두 보았었다.  그들 모두 인생의 어떤 막장에서 깨닭은바가 있어서 시내산에 오르게 된다.  그 험준하고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의 영역이었지만.........  양떼와 목동이 다니는 그 길을 통해 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었다.

  '까짓꺼.  여기 어딘가에도 양떼와 목동이 다니던 길은 있을거 아냐?'

  이게 허세인지 진실한 깨닭음인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앞으로 나가기도,  아니면 뒤로 다시 돌아가기도  싫더라는 것은 분명했다.  찾아보면 어딘가 능선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는 목동들의 길이 있을것만 같았다.  아니면 내가 목동인셈 치고 한번 길을 개척해 보면 되지 뭐.

  망설임 끝에 나는  느타리 버섯을 켜켜히 쌓아놓은것 같은 위의 사진과 같은 새햐얀 바위를 타고 계곡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바위 능선의 끝자락이 계곡아래 대지와 자연스레 맞닿아있지를 않았다.  바위의 끝에서 대지까지는 거의 아파트 5층 높이의 수직벽이었다.  평상시 내 직업이 고층을 오르내리는 것이라  그 높이감과 위험성은 익히 절감하고도 남았다.  올려다보니 이미 내려온 길도 까마득 하다.

  뾰족뾰족 바위돌기가 삐져나와 있는 이 암석의 표면이 걸어다니기에는 양탄자 위를 걷는것처럼 아주 편한데,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쉽게 으스러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기에 너무도 쉬운 환경이다.  내려는 왔으나  올라가기도 그리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이번엔 진퇴유곡이다.

  후회는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나마 경사가 완만해 보이고 높이가 짧아보이는 골짜기 안쪽의 풀밭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서기 시작했는데........  아뿔사....... 발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번엔 절대절명이다.

  어떤 판단이 뇌리를 스치기 이전이었다.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본능처럼 몸을 반쯤 비틀며 무조건 냅다 멀리 건너 뛰었다.  천운이었을까?

  내 키로 한길 좀 넘어보이는 아래쪽의 쬐끔 삐져나온 돌부리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  저절로  전신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는 구사일생 이었다.

  미끄러지다시피 나뒹굴어 굴러떨어지다시피 그곳에서 내려와 대지를 다시 딛고 나니 '이런게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거구나' 라는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했던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떨어지면서 겨우 매달린 돌부리에 주먹만하게 튀어나왔던 돌기가  내 오른발목의 뒷꿈치 부분에 그대로 박혀버린것이다.  접질린것 이상으로 통증이 왔다.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일어서서 걸어보니 그나마 다행스럽게 걷기는 하겠는데  오로지 충격부위로부터 통증이 머리끝까지 상당하게 전해져 온다.

  골짜기 안을 샅샅이 둘러보겠다던 애초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발걸음을 절룩거리며 계곡의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른 공터에 허름하게 설치한 여행자 쉼터 움막집이 나타났다.  여행자 두 팀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일단 캔맥주를 하나 부탁했은데  시내보다 거의 두배는 비싸다.  배낭을 벗고 휴식을 취하다가  공터 한켠의  커다란 미류나무를 닮은 고목 아래 아주 작은 웅덩이 처럼 물이 고여 있다.  우기에 물이 흐르던 도랑에  마지막 남은 물웅덩이 같았다.  신발을 벗고 웅덩이에 발을 담갔다.  통증은 여전하다.

  그때 여행자와 움막 젊은이 사이의 대화에서 '레드 밸리랑 로즈 밸리랑 구분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래서 내가 잠시 끼어들어 보았다.

  '그렇다면 이 넓은 지역에서 어디가 가장 멋있는 장소던가요?'하고 내가 물었다.

  '크로스 처치가 가장 멋있었어요.'

  '로즈 밸리하면 크로스 처치는 다녀가야 왔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여행자는 '크로스 처치가 최고'라고 했는데,  현지인인 쉼터의 젊은이 조차도 크로스 처치를 추천한다.

  물기를 닦아내면서 양말을 다시 신고 신발을 신으면서 매만져 보아도 오른쪽 발목의 상태가 영 안좋다.  하지만 어쩌랴?  여기까지 왔고  크로스 처치가  로즈 밸리에서 최고 으뜸이라는데..........

  '크로스 처치(Cross Church)는 어디로 가면 됩니까?'

  여행자가 가르켜 주는 방향대로 계곡 사이의 잡목 우거진 골짜기로 절뚝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이건 완전히 반쯤 미친놈 포스다.' '제정신이 아니다.'

 

  이런게 여행 아니겠어?  어제는 이미 놓쳐버렸지만  지금이란 놈은 아직 내 손바닥 안에 있는거야.  나는 여전히 현역이고 결코 포기하지 않아.

 

 

 

 

 

 

 

 

 

 

 

 

 

 

 

 

 

 

 

 

 

 

 

 

 

 

 

 

 

 

 

 

 

 

 

 

 

 

 

 

 

  사노라면 사랑하는 연인의 얼굴보다도 더 가슴뛰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도 있다.  아마 그런것을 느낄때 쯤이면 인생을 좀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슬픔으로만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니다.

  사무칠것 같은 아름다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시간을 만났다.  어쩌면 그것은 여행자의 시간 위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누구였을까?

  뒤에 올 사람을 위해서 앞서간 사람이 남겨준 세월의 꽃향기를 가득 머금은 시간의 풍경이 지금 이곳에 활짝 만개해 있다.

  대자연은 실로 위대하고 아름답다.  그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간 인간은 더욱 더 향기롭고 소중하다.

  그리고,  지금 이자리에 선 나는 한없이 마냥 행복하다.

  저절로 눈물이 날 만큼.

 

 

 

 

 

 

 

 

 

 

 

 

 

 

 

 

 

 

 

 

 

 

            --- 여기가 로즈 밸리의 꽃  'Cross Church'.

 

 

 

 

 

 

 

 

 

 

 

 

 

 

 

 

 

 

 

 

 

 

 

 

 

 

 

 

 

 

 

  다분히 무리였다.

  계곡을 나와서 다시 움막 쉼터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지만........  이제는 그따위 허술한 최면이 먹혀들 상황이 이미 지나고 있었다.

  움막의 젊은이가  '택시를 불러줄까요?' 라고 물어왔을 때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마치 의지의 한국인인양 당당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미치도록 싫어지는 카파도키아 상인들의 상술에 또 휘말리기 싫어서 였다.  도움을 청하거나 차라리 구걸이라면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눈 뻔히 마주보며 태연하게 들이대는 바가지 상술에는 죽어도 당하기 싫다.  정말 존심에 상처 입는다.

  차라리 죽기살기로 힘이들어도 걷겠다.

  로즈 밸리의 쉼터 움막은  차우신에서 괴뢰메로 가는 시내버스의 거리보다도 멀다.  해질녁의 들판은 볕이 유난히 따갑고 불어오는 바람에 모래가 흩날린다.

  그러나 그날......  끝내 나는 내힘으로 절룩거리며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완전 무대뽀 똥고집 한국인 화이팅.

  집에서 가져간 소염제랑 연고는 있고,  약국에서 스포츠 테이핑 밴드를 구입했다.

  숙소 매니저에게 얼음을 부탁해 찜질을 하고  저녁내내 마사지를 하고 종당에 압박밴드 테이핑을 하고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가졌던 '오늘'이라는 한정된 시간속을 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이미 족함을 넘어서 차고 넘치는것은 아닐까?

  미지의 세계도 밖으로 드러나고 나면 서서히 본래의 아름다움이 시들어 가듯이,  내 가슴의 공간도 한번 가득차고나면 더이상 어떤 설레임이나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은 더 이상 사라지고 마는것을.........  나에게 아직 선택의 기회는 남아 있겠으나,  인생사라는 것이 선택의 기회 뒤에는 반듯이 그 이상의 책임과 댓가가 따른다는 것을 이제 내 나이쯤이면 알아차릴 때도 되지 않았던가?

  내가 지나온 오늘 하루가.......  그리고 카파도키아의 자연이 내게 말을 건네온다.

 

  '발자국은 남겨도 좋다.  나머지는 본래대로 그냥 두어라.  사진과 추억만을 간직하고 떠나라.  그대,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자여.'

 

 

 

 

 

 

 

 

 

 

 

 

 

    ---- 순간의 선택에 대한 댓가치고는 참혹한 하루의 마감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트래킹은 황홀한 행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