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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를 찾아가는 길.

by 피안재 2018. 10. 10.

 

 

 

 

 

 

 

 

 

 

 

 

 

 

 

 

 

 

 

 

 

 

  서기 242년.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현 왕의 친척인 몇몇 왕족들이 주동을 했고  일부 귀족과 군대와  성밖의  외부세력이 가세한 대대적인 쿠데타였다.

  모처에 모여있다가 보름달이 솟아오른 후 야음을 틈타 일거에 몰아치려던 쿠데타 세력의 음모는  해가 질녁쯤에 한 밀고자에 의해서 들통이 나고 이같은 사실은 곧 왕에게 전달되었다.  거사 직점에 음모가 탄로나고 만 것이다.

  왕은 우선 근위대를 소집해 자신의 주변을 방어함과 동시에 비상령을 내려 황궁수비대로 하여금 성문을 모두 걸어 잠궈 철저하게 외부와의 차단을 지시했다.  황궁 밖에 있던 최정예 부대를 은밀히 불러들여서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을 역모자들을  수색해서 색출하여 일망타진 할것을 명령했다.

  이 같은 일망타진 작전은 곧 쿠데타 세력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유불리를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쿠데타 세력에겐 승리 외에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그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한바탕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쿠데타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성밖에서 대기중이던 외부 세력의 지원이 없이 성 안의 자체 거사 세력만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불가항력인 싸움이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 싸움은 끝이났다.  쿠데타 세력이 완전히 일망타진된 것이다.

  아르메니아 왕인 호스로프 2세(Khosrov, ?~ 252)는  분노에 찬 서슬이 시퍼런 시선으로  체포되어 끌려나온 왕족들을 노려다 보았다.

  '태자야 잘 보아두어라.  저들이 오늘 아침까지 너에게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이다.  너의 숙부요 형제이며 조카도 포함되어 있다.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같은 혈육에게까지 칼을 들이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저들에게 아낌없는 배려와 부와 명예를 나누어 주었건만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더 큰것을 원하는 구나.  나와 너의 목숨을 말이다.  목숨을 탐했던 자들은 모두  목숨으로 그 댓가를 치뤄야 할것이다.  저들 뿐만이 아니라 저들의 가족과 가까운 친족까지 모두..........  반역의 뿌리는 완전하게 끊어놓을 것이다.  지시한대로 저들의 혈육과 가까운 일가를 모두 잡아 들였느냐?  하나도 빠짐없이?  어미 뱃속의 핏덩이까지 하나도 남겨 놓아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태자 티리다테스(Tiridates)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속에 새기며 어제까지 함께 웃으면서 지내왔던 포승줄에 꽁꽁 묶여 끌려나온 왕족과 귀족들을 하나하나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젊은 그의 눈망울에 핏빛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타고난 성품이 아버지 못지않게 광폭한 그였기 때문이다.  이제 처형장으로 모두 끌고가 적어도 한 둘은 자신이 직접 목을 베어버리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  명하신 대로 반역을 저지른 무리의 피붙이와 가까운 일가를 전부 체포해 왔습니다.  하온데  단 한명.........  외무 대신의 아들  그레고리 한 명은 잡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사흘전에 국경 근처에 사는  글을 가르쳐 주던 스승의 병환 소식을 듣고 병문안차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사옵니다.'

  '수비대에 명해 기병대를 당장 보내라. 반역은 송두리째 근원까지 철저하게 뽑아서 없애야만 한다.  무조건 찾아내 붙잡아 끌고 오너라.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모든 역도 무리를 광장으로 끌고가 모든 군중이 보는 앞에서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목을 베어라.  다시는 반역의 꿈도 꾸지 못하게 피로써 본보기를 보여주어라.  왕명이니 즉시 거행하여라.'

  체포된 자들은 개처럼 질질 광장으로 끌려나갔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고  피보라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십여기의 말들이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들을 태우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성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스승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던 그레고리는 평소 부친과 막역한 사이로 지내던 어떤 가문의 하인을 길에서 만났다.  다짜고짜 하인은 그레고리의 손을 잡아 끌고는 인근의 수풀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주인의 지시로  밤길을 달려  그레고리를 찾아온 길이었다.

  부친의 소식을 전해들은 그레고리는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해도 부족할 상황이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고 통곡을 입안속으로 꾸역꾸역 삼켜야만 했다.  요란한 말발굼 소리와 함께  그를 찾는 추격대가 방금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를 수소문 한 추격대가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하인은 둘러메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상당량의 금화와  편지와  지도가 들어있었다.  카파토키아로 가는 길과 방법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엔 누군가를 찾아가 전하면 된다는 소개장까지 있었다.  미처 슬퍼하거나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 도 없이  하인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게 되어 다행이라며  부디 몸조심 하라는 당부와 함께  저만치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열 네살에 하루아침에 이 세상에  덩그라니 내던져진 고아가 되었다.

  그는 편지를 보내준 고마운 분의 가르침대로  낮에는 들판이나 숲속에 숨어서 잠을 자고 밤길을 이용해 멀고 먼 카파토키아로 향했다.

  그의 이름이 바로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Gregory the Illuminator)' 이다.

 

  무사히 카파토키아에 도착한 그레고리는 소개장에 써 있는대로 찾아갔다.

  정치적인 이유로 카파토키아에 망명해와서 살고있던  아르메니아의 왕족 집안이었다.  따지자면 그레고리에게 아주 먼 일가친척쯤 되는  부유한 집안 이었다.  그레고리는 이집에 의탁하여 지내게 되었다.

  당시 이 아르메니아에서 망명 온 왕족은 카파토키아에 와서 기독교를 알게되었고,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집안 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레고리 또한 기독교를 접하고 받아 들이게 되었다.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레고리는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맏아 들였으며  기독교에 심취한 나머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제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정식 신부가 된 것이다.

  카파토키아에서 그레고리는 아름다운 아내를 맏았으며 기독교 공부에 심취해 사제가 되었으며 여유롭게 부유하고 행복하게 지내게 되었다.

 

 

 

 

 

 

 

 

                          

 

                          

 

        

 

 

 

 

 

 

 

 

 

 

 

  <Travel>

  여행사 투어프로그램이나 택시를 대절하지 않고 직접 (호르비랍)을 찾아가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예레반의 시내영역에는 세곳의 지하철 역이 있는데  아무데서나 일단 지하철에 오른 후 시외곽지역의 사순치 데이비드 역으로 가면 된다.  지하철 요금은 1회 이용시 100드람(250원)으로 아주 저렴하다.  사순치 역에서 나오면  위의 사진처럼 뾰족한 종탑이 보인다.

  아무에게나 버스터미널을 물어보면 쉽사리 가르쳐준다.  지하철역사에서 나오면 바로 옆 공터가 나오는데  그곳이 버스터미널이다.  조금 후미지고 어수선한 분위기로  우리나라의 버스터미널을 연상하면 절대로 안된다.  굳이 찾아헤매지 않아도 이미 여행객을 알아보는  택시 기사들의 집요한 호객행위가  여행자를 다소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절대 당황해 하지 말자.  이들의 말을 무시하자.  버스가 떠났느니  오늘은 버스가 없느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가며 손님을 유혹한다.

  광장의 땅바닥을 살펴보면 페인트로 번호를 표시해 놓았는데  가장 반대편 도로옆으로  467번을 찾아가면 된다.  467번이 호르비랍으로 가는 버스 주차장인데,  간혹 460번 버스가 들어서기도 한다.  차창 앞에 걸린 표지판을 잘 살펴보면  코트비랍이라 적힌 간판이 보일것이다.  여기에서는 앞의 k가 묵음임으로   읽을때는  호르비랍이라고 하면 된다.

  버스 시간은 예레반 출발  09:00. 11:00. 14:00  이고, 호르비랍 출발이 13:20. 15:20. 17:00 에 있다.

  호르비랍 여행에서 주의할 점은  목적지의 버스 종점이  호르비랍 주차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버스는  호르비랍 주차장에서 약 2.5km  떨어져 있는 삼거리에 여행자를 내려놓고 인근의 다른 도시로 가는 버스이다.  이 점을 꼭 주의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다만,  하루에 2회만  호르비랍 주차장까지 버스가 들어가는데  오전 11시 버스를 타고 주차장까지 들어가고,  오후 1시30분에 주차장까지 들어오는 버스를 이용해 빠져나오면 아주 쉽게 호르비랍을 여행할 수가 있다.  그 사이의 시간이면 호르비랍을 둘러보기에 충분한 시간이 된다.

  요금은 1인당 500드람(1.250원)으로 역시 저렴하다.

  나 역시 이 시간대의 버스를 이용하여 호르비랍을  쉽게 다녀왔다.

  외국인 여행자는 나를 포함해 러시아인 3명 뿐이었다.

  삼십년은 족히 넘었을 나이백이 꼬물 미니버스는 천연가스차로 개조된 것이었는데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치......  그저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버스는 거꾸로 현지인 서넛에 모두가 여행자로 꽉 찼는데  어마무시하게  운전사 빼고 18명이나 태웠다.  콩나물 시루라는 표현이 아주 적합한 말이었을 것이다.  겨우 엉덩이를 귀퉁이에 기대얹고 가만히 아래를 살피니  거대한 가스탱크가 덩그란히 놓여있고  그 위에 널판지를 덧댄것이 내 의자였다.  그 엉성한 탱크 설치 기술에 놀라  폭탄을 끌어안고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차량이 노후화되어 냉각팬의 기능이 저하되자  앞쪽과 옆쪽의 판넬을 아예 떼어버렸다.  팬이 돌아가는 모습과 벨트 소리가 스테레오 싸운드로 울려 나온다.  무엇인가가 날아들어가거나 걸려 끌려들어갈 위험이 여실한데도  무시하고 그대로 운행한다.  놀랍게도 이런 차량이 한 둘이 아니다.  사방에 돌아다니고 있는 이런 형태의 심각하게 노후된 차량들을 보면서,  아르메니아 경제의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번에도 날씨는 화창했으나  희뿌연 연무와 안개때문에  아라라트 산을  제대로 볼 수는 없어서 아쉬웠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호스로프 2세 왕이 사망했다.

  아들이자 태자로 있던 티리다테스 2세가 왕으로 즉위했다.

  조급하고 광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그는 아버지 보다 뛰어난 왕이 되기를 원했다.  이를 뒷받침 해줄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싶어했다.

  즉위를 선포함과 동시에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졌다.  정치와 권력에 대해서 반대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감옥에 가둔 많은 사람들을 모조리 풀어 주었다.  새로운 인재와 새로운 정책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감옥이 텅 텅 비게 생겼다.

  아울러 주변 국가로도 포고문을 보냈다.

  주변국가로 정치적 망명을 해서 살고있는 망명자들에게도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졌다.  티리다테스 왕은  망명객들에게  고국으로 돌아와 줄것을 요청했다.  망명 이전의 지위와 빼앗은 재산을 모두 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여기저기서 귀국 러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소식은 마침내 그레고리의 귓전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자신은 아직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의 장례를 치루지 못했을 뿐더러  무덤이라도 제대로 만들어져 모셨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레고리는  장인과 상의한 끝에  정중하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티리다테스 왕에게 보냈다.

  자신과 처가 식구들에게도 정말로 사면이 허락된 것인지 당사자인 왕에게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왕에게서 친서가 왔다.

  그레고리를 포함한 모두의 죄를 사한다는 내용과 왕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레고리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과 처가 식구들 모두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돌아왔다.  마침내 고향인 에치미아진(당시 수도)에 당도한 것이다.

 

  티리다테스 2세는 분명 그레고리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쿠데타와 관련하여 아들인 그레고리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그런데.........  눈에 띄지 않는 카파토키아에 있을 때의  그레고리는 용서해 주었지만,  지금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그레고리만 보면 과거에 꾸었던 악몽이 자꾸만 되살아 났다.  왕의 속마음까지 그를 완전히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왕은 사사건건 그레고리를 물고 늘어졌다.  무슨 방법을 쓰던 기어코 그를 해치우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레고리는 도시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왕의 집요한 올가미가 이미 자신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레고리는 체포 되었다.

  불손한 자들과 어울리며 저들을 선동하여 무슨 일을 벌이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참수형을 제외한 법정 최고형이 그에게 내려졌다.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지하감옥에 갇히게 되는 형벌이었다.  황량한 들판에 홀로 우뚝 솓은 바위산에 설치된 감옥이었다.  모진 추위와 무더위로 유명한 그 바위산에서도  바위를 10여 미터 이상 수직으로 파내려가  한웅쿰의 바람이나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인들에게 있어서 절대 성지이자,  민족의 영산인 아라라트 산을 가장 까까이에서 볼 수 있는 이 명소는 그 이름이 여기에서 기인하여  '호르비랍'은 '깊은 구덩이' 라는 의미인다.

  그레고리는 정치범으로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13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광포한 성격의 티리다테스 2세가 사망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정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티리다테스 3세(Tiridates, 250~330)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 했다.

  그는 용맹함과 총명함을 가진 현명한 군주였다.

  로마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틈새에서 하루하루를 위태위태하게 보내야 하는 약소국의 설움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주변 약소국들과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양대 제국에 대항할 원대한 꿈을 가진 젊은 지도자였다.  내치에도 힘써 백성들로 부터 절대적 지지와 칭송을 받고 있었다.  약소국의 처지로  로마나 페르시아라는 양대 제국을 향해 무모하게 싸움을 먼저 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넘어지는 제국들의 간섭에서 빠져나오자면  능란한 외교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여 왕은 주야로  외교분야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 대에서  로마와 한바탕 벌어졌던 소란에 대해 외교로서 잘 대처한 사례로 실로 귀감이 될만한  문서를 발견하고는  심도있게 공부를 하던 중,  그 당사자가 당시의 외무대신이었던  그레고리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떠오르게 된 것이다.  혈연관계로 따지자면  집안의 먼 친척쯤 될지라도 엄연히 자신에게는 숙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왕은 신하를 불렀다.

  '내 부친께서 종신형을 내린........ 전 외무대신의 아들 그레고리의 근황을 알고 싶다.'

  신하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참만에 허겁지겁 달려온 신하가 입을 열었다.

  '아직 그대로 감옥에 있을 것이라 하옵니다.  그동안 이감이나 기타 다른 조치가 내려진 적이 없었으며, 일절 면회나 여하한 외부인과의 접촉도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니........  사망 보고가 올라온 것이 없습니다.'

  '사망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으니 아직 살아있기는 하다는 이야기냐?  지금 너의 이야기가?  그가 하옥된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의 면회조차 단 한번도 허락되지 않았었단 말이냐?  단 한 번도?'

  '다시 알아보아야 하겠으나......  십년은 넘게 지난것으로 사려되옵니다.  선왕께서 엄명을 내리신 터러 그 누구도 일절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이 무슨 뜻이냐?   네가 알고 있는 사실 전부를 내게 소상히 고하도록 하여라. 어서.'

  '선왕의 명이 너무도 지엄하셔서 감히 그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었으나,  다만......... 다만  율리아나 공주마마께서.........'

  '내 고모님께서 무얼?  고모님께서 어버님의 명을 어겨가면서라도 무슨일을 벌이셨단 말이냐?  그게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하라.'

  '그냥 근거없이 떠도는 이야기라서..........  근원도 없는 낭설이라서 감히..........'

  '비켜라.  내 당장 고모님을 만나서 직접 들어야 겠다.'

  왕은 그 길로 고모의 침전으로 달려갔다. 

  '고모님.  그레고리를 아십니까?'

  고모는 매우 침착했다.  조카이자 현재의 왕이 내뱉은 첫 질문으로  대충이나마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차후의 여파가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릴적에 궁궐에서 함께 뛰놀던 동무입니다.'

  '왕명을 어겨가면서 그를 찾아가신 일이 있습니까?'

  '페하에게 아버지이신 내 오빠께서 그를 가두었지만  나는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빛도 바람도 없는 지하 동굴에 가두어 놓고 하루에 겨우 빵 한조각과 물한모금씩만 주게하여  스스로 참지 못하고 죽게만들 심사였지요.  가족들이나 그 누구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고요.  극심한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죽지않고 빵과 물이 내려가고 있다고 들었지요.  겨울이 되었습니다.  그곳의 겨울이 얼마나 춥고 참혹한지는 조카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얼어죽게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찾아갔습니다.  추위를 견딜만큼의 털옷을 가지고 갔지요.  이것저것을 더러 가져갔으나 요지부동 허락이 되질 않았습니다.  오로지 옷만 밧줄에 매어져 동굴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만나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동굴 입구에 대고 나 혼자 외쳤더랬습니다. (그레고리. 죽으면 안돼. 꼭 살아서그곳에서 나와야 해. 죽지는 마.)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대꾸도 흘러나오지 않았지요.  너무 세월이 흘러 어쩌면 이제 말도 잃어버렸는지 모르지요.'

  '몇년이 되었는지 고모님께서는 아시고 계십니까?'

  '지난 주에 열 세번째 옷을 전하고 왔으니  십삼년이 되었군요.'

  '십삼년을 사람이 지하동굴에서 살고 있다고요?  정말 아직 살아 있단 말씀입니까?'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옷을 달고 내려간 밧줄이 풀려서 올라왔으니까요.'

  '제가 이길로 달려가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카께서 지금 호르비랍으로 가신다고요?  왜요?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왕은 이미 저만큼 달려가고 있었다.

  말에 올라 호위병들과 함께 궁전의 문을 향해 달려나가면서 왕이 외쳤다.

  '고모님.  모든것이 고모님의 바램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레고리는 석방 되었다.

  13년간 지하감옥에서 살다가 나온 그의 몰골은 가히 사람이라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허연 실타래 같은 머리가 허리아래까지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고 더부룩한 수염이 온 얼굴을 뒤덥고  앙상하게 뼈만 겨우 붙어있는 신체로는 앉아있기도 힘에겨워 보였다.  퇴보한 눈과 시력은  왕이 들고 서 있는 횃불에 놀란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선왕의 부덕함과 잘못에 대해 사과함과 동시에 용서를 구했다.

  그레고리는 성경에 적힌 바대로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 했다.

  상황을 어느정도 수습한 그레고리는 그대로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꽤나 긴 기도의 시간동안 왕은 그대로 옆에섯 그레고리를 지켜보았다.

  기도를 마치자 왕은  그레고리에게 소원과 필요한 것을 물었다.

  '제가 세상에 다시 나온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요.  제가 이 모습으로 누구를 만나겠습니까?   모든것은 차차 제가 제자신을 추스른 후에 하나하나씩 해결해나갈 것입니다.  제 가족에게도 마라지 말아주십시요.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것을 높은 곳에 계신 그분께서 알아서 주관해 주실테이니까요.  하오나 단 한가지  지금 시급한것은........  에치미아진을 한참 벗어난 곳에 에훕이라는 사람이 일군 작은 농장과 오두막이 아직 있는지 알아보아 주십시요.  지난날 제가 은혜를 입어  카파토키아에서 돌아와 선물한 땅을 일구어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그곳에 있다면 틀림없이 저를 받아줄 것입니다.  저를 그곳까지만 데려다 주십시요.  건강을 되찾으면  곡 만나봐야 할 사람들을 만나 본 후  길을 떠날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사도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고모님을 만나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걱정하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크게 고마와 하더라고 말씀만 전해 주십시요. 죽는 날까지 공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으며  그분을 위해서 늘 기도할것입니다.'

  '안타까워 하실것입니다.'

  '어쩌면 공주님도 페하도.......  이승에선 다시 만날 수 없을것 같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 수도자의 길을 떠날테니까요.  오늘을 결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궁으로 돌아갔고,  그레고리는  에훕의 작은 농장 오두막에 머물렀다.  에훕은  지난날 국경까지 자신을 찾아와 위기에서 구해준 바로 그 아버지 친구분 댁의 하인이었다.  카파토키아에서 돌아온 그레고리는 잊지않고 에훕을 찾아  하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약간의 땅을 사주었었다.  에훕의 가족들은 지극정성으로  그레고리를 치료해주었다.

 

  시간이 지나 건강을 회복한 그레고리는 가족과 신세진 분들을 찾아가 그간의 안부를 전함과 동시에 또 다시 작별을 고했다.

  그는 이미 사도로서 고행의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기독교인은 세상 모두가 꺼리는 존재였다.  로마의 치세 아래서는 도망이라도 쳐야 겨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모두 지하로 숨었다.  세상에 드러내놓고 다니다가는  체포되어서 화형에 처해지거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가 일쑤였다.

 

  서기 35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로  기독교인들은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예수를 따르고 함께 생활까지 했던 제자들 까지도 겁에 질려 어디론가 모두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다음에야  정신을 되찾은 그들은 그때부터 늘 죽음을 등에 지고 다니며 숨어서 전도 활동을 벌였다.  직접 제자가 이닌 바울을 노력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모범이 되었다. 가능하면 예루살렘으로 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유대인에게 기독교인은  이단이면서 배신자 집단 취급을 받았다.  기독교를 불온 세력으로 규정한  로마의 탄압은 더욱 가혹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로 부터 도망치거나 숨어야 했다.  그리스의 데살로니카. 코린트,  그리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터키의 안티옥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곳마저 로마가 단속을 시작하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에서 멀고도 먼 터키의  카파토키아로 숨어 들었다.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계곡과 야생처럼 산재해 자라는 포도와 호두 올리브가 풍부한 지역이며  드넓은 광야에선 양을 치기 좋은 축복받은 대지가 그곳에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 곳에서 여기저기 바위동굴을 파고 생활했다.  쉽게 파지는 화산암의 특성을 이용하여  비바람을 피하고,  때론 요새처럼,  때론 비밀 장소를 만들어 나갔다.  심지어는 오천명 정도씩 모여 살 수 있는 지하도시까지도 여기저기 만들었다.  로마의 대군이 몰려와도  이 동굴 집과 동굴 도시를 모두 찾아내거나 부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곳에서 기독교 신앙인이자  기독교를 전파할 사도로서 성장해 나갔다.  이곳에서 성장한 수많은 사도가  다시 너른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아르메니아를 첫번째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그레고리가 바로 카파토키아에서 사도의 서품을 받은 기독교인이다.

  조지아를 세번째 기독교 국가로 만드신 성 니노 할머니 역시 카파토키아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조지아에 갔다.

  그렇게 보면  고대의 카파토키아는  기독교 사관학교 내지는  사도 양성소라고 불러도 되지 싶다.

 

  그레고리가  사망한지 백년쯤 지나서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계몽자의 존칭이 붙여졌다.  그리고 그가 갇혀있었던 감옥을 허물고 지하동굴 위에 그를 기리는 교회가 세워졌으니  바로 지금의  사도교회 호르비랍(Khor Virap)이며.  '깊은 구덩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까지가  (성 그레고리)와 (호르비랍)이 연계된 이야기의 실제 내용이다.

  태양신에게 제물 바치라는 것을 거부했느니........  종교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로지 정치적인 상황 뿐이었다.

  이 일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는지.........  허무한 낭설이다.  아무 상관이 없다.  기독교 국가는 아직도 10년은 있어야 된다.

 

 

 

 

  건강을 회복한 그레고리는  선교의 길을 떠난다.

  그가 찾아간 최종 목적지는  아자트 계곡이었다.

  이미 카파토키아에서  동굴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었던 그레고리는  아자트 계곡의 깊숙한 상류에  바위 동굴을 파고 은둔하면서 고행을 하는 수도사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아마 그들중에 상당수도  어쩌면 카파토키아에서 떠나와 포교 활동을 하다가 쉬거나  기도를 하기 위하여 찾아다니다 카파토키아와 비슷한 환경의 지역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동굴을 파고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레고리도 이 많은 동굴중에서 하나를 주거지로 택하고 수도 생활에 들어갔다.  골짜기까지 걸어내려가서 물을 길어다 생활해야하는 번거로움 중에 하루는   그레고리가 꿈결에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는 바로 옆의 동굴 바닥을 조금 파고들어가니  아주 맑고 시원한 생명수 같은 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 물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게 된다.  지금도 아르메니아 인들은 이 물을 아주 귀한 성수(聖水)로 여기고 있다.

  이곳이 바로 게하르트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수행한 게하르트가  바로 호르비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그레고리와 같은 인물이다.  그레고리가 아자트 계곡 상류에 동굴 수도원을 파고 선교활동을 했던 장소이며,   후에 그를 기려 교회와 수도원으로 증축된 것이 바로 (게하르트 수도원)이다.

  그레고리는 나머지 생의 대부분을 여기 동굴 수도원에서 보냈다.

  인근의 가르니 지역을 포함해 사방으로 선교 활동을 다녔다.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마귀를 물리쳤으며  많은 기적 같은 일을 행했다.

 

 

 

                     

                                                                                        게하르트(그레고리) 수도원 전경.

 

 

 

  다음 그레고리의 등장은  에치미아진의  성모교회와  히메시네 교회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 때의 일과  아르메니아가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는 일과 비로소 연결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 문제는  에치미아진에서.........

 

 

 

 

 

 

 

 

 

 

 

 

 

 

 

 

 

 

 

 

 

 

 

 

 

 

 

 

 

                             

 

    

 

 

 

 

 

 

 

 

 

 

 

  갈 수 없는 땅.  아라라트.

  호르비랍 바로 아래 길게 철조망이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민간인 통제구역 철조망이다.  2km 쯤 안쪽으로 좀 더 높고 튼튼한 철조망과 초소가 역시 길게 늘어서 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국경선이다.

  영원히  아르메니아 인들의 가슴속에 성산(聖山)으로 남아있는,  구약 성경의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정박한 곳이 아라라트 산이며,  노아가 일가족을 이끌고 배에서 내려 산 아래로 와서 집을 짖고 농사를 지으며 목축을 했다는 축복의 땅이 바로 여기 아르메니아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지만........  지금 이들은 코 앞에 있는 아라라트 산에 갈 수가 없다.

 

 

 

 

  아라라트 산.

  아라라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항상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디아스포라의 나라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Armenian Genocide).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대 그리이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로, 이산() 또는 파종()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사전에서는  '흩어진 사람들'로 번역된다.

  디아스포라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민족(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래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침략 앞에 예루살렘은 쉽게 허물어졌고 결국엔 멸망했다.

  수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곳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어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곳저곳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란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뿔뿔히 흩어져 살았다.  그들에겐 철저하게 파괴되어 페허로 남아있는 예루살렘이었을 뿐,  돌아가서 더불어 함께 살아갈 고향이 사라졌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멀리 떨어져 살아가면서도 유대민족만의 고유한 전통과 생활방식을 모두가 똑같이 그대로 전승하며 살았다.  아직 성경은 쓰여지지 않아 구전으로 신앙을 전승하고 있었으나,  그들에겐 유대민족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책'이 이미 하나 있었던 때문이었다.  바로 '탈무드' 였다.  탈무드에 쓰여진 내용대로 생활하면서 그들은 유대민족의 정통성을 이어내려갔다.

  역사의 전면에 혜성처럼 알랙산더 대왕이 등장하고 세상을 송두리째 한바탕 광풍으로 몰고 지나갔다.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이 퍼져나갔다.

  헬레니즘 사상은 흩어져 사는 유대민족에게 어떤 커다란 자극을 남겨주었다.  부족간에 어떤 보다 확실한 유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그 방편으로 등장한 것이 장사였다.  흩어져 있는 유대민족 사이를 오가면서 자기들 만의 방식으로 교역과 정보가 오가게 된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부족이나 민족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유대의 풍습과 신앙속에  그들의 장사는 시장을 넘어서서  점차 국가간의 무역으로 급격하게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대부분에 돈은  유대인이 다 가지고 있다'는 히틀러의 분노가  이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를 가지게 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면서 속속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후,  로마에 의해서 다시 멸망당하고  유대인은 또 다시 디아스포라의 길을 걷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영.소의 영토 나눠먹기의 와중에서 미국의 주도하에 아주 절묘한 타이밍을 얻어서 예루살렘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이는 또 반(反) 유대니즘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의 유대인들에 무한정의 문을 개방했다.  디아스포라들의 귀국 러시가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찌에 의해 저질러진 '아우슈비츠의 보상' 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그들의 건국과 귀국에 기꺼이 한표를 던져줄만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의 유대민족(이스라엘)은 역사적 정당성을 논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철저하게 모두 져버렸다.

  그들이 차지한 땅은 본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이다.

  세입자가 어느날 갑자기 집주인(건물주)을 두둘겨 패고 내쫓은 것과 같은 경우이다.  UN과  국제사회가 어떠한 명분을 주었던 간에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만부득이한 경우였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노선을 채택하여야만 했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던 이미 땅은 차지했고  등기도 나왔다고........  장벽을 치고 총을 쏘고  미사일을 날리는 행위는 살인자의 행위이다.

  누가 지금의 유대인을 보고  '사랑을 나누고 공명정대하게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자식들' 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모두 잊었다.

  오히려 지금 이순간  사람들을  디아스포라로 내몰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20세기에 발생한 21세기형 디아스포라는  아르메니아였으며,  21세기의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2015년 4월 24일.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아르메니아인들이 공화국 광장에 모여 터키의 국기를 불태웠다.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 100주년' 을 기리는 추모집회였다.

  작년에도 금년에도 해마다 4월 24일이 되면 되풀이 되는 행사이다.

  그들은 터키를 '역사의 범죄자'라고 세계 만방에 고발했다.

  유럽 연합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국가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터키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이 사태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 한다.  터키에 우방인 대한민국은 요지부동 침묵으로 중립을 지킨다.

  터키라는 국가가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EU(유럽 연합) 가입'과  이를 통해 국제사회로 부터 '개발비용(차관)'을 들여오는 길이다.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국이었다면  미국대 터키가 아닌,  트럼프 대 에르도안 간의 싸움에서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에르도안은 유럽연합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태도는 분명하다.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로 대변되는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시인하고  사과하고 배상을 먼저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915년 4월 24일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모든 정황을 들여다보자면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할 수 있는 사안이기에  여기에서는 일단 제기만 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하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한번 짚어볼 기회를 만들어 보도록 해야겠다.

  혹 궁금하신 분들은 잠시 시간을 내셔서 직접 찾아서 공부를 해보는 방법도 좋을것 같고........

  대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나타내 줄 수 있는  사진을 몇장 올려놓음으로써 약간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도 그와 아주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기에 그 아픔들이 쉽게 공감이 될 수 있으리라.

  역사속에서 그런 비극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수많은 영혼들에게  신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  다음 이야기는  에치미아진에서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를  만나보겠습니다.   피안재.

 

 

 

 

 

 

 

 

 

 

 

 

 

 

 

 

 

 

 

 

 

 

 

 

 

 

 

 

 

 

 

 

 

 

  2011년 인구조사결과  아르메니아의 총 인구수  302만명.

 

  1915년 4월   터키에 의해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무참하게 학살 되었다.  100만명의  아르메니아 닌민들이  이란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기독교인이라 하여 여성들을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은........  시신들 앞에서  저마다 기념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