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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이스탄불) 오늘은 걷다가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것 같은 날.

by 피안재 2018. 9. 1.

 

 

 

 

 

 

 

 

 

 

 

 

 

 

   지금은 이스탄불의 골목길 순례를 하고 있지만,  이 세상 어디든지 길을 걷다보면 문득 문득  떠올리게되는 나만의 어떤 생각이 있다.

  숲 길을 걷거나,  들판을 가로지르거나  혹은 산을 오르면서도  그런 느낌과 생각은 변하거나 떠나지를 않는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나 생각이 절정을 이루는 것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들 앞에서 탄성을 자아내고  있을때가 최고조에 달한다.

  그 대상이 거대하다못해 장엄하며  빼어나다 못해 눈이 부실만큼 아릅답다면  입이 벌어지면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탄성 뒤로, 반듯이 위에 말한 어떤 의문의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조물주의 전지전능하심을 전제로.........  이 세상의 모든것들이  미리 계산하고 설계하신 철저한 사전 계획에 의해  단 한번에 만들어진 것일까?'

  신실(?)하신 믿음의 사람들에겐 그것은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피식'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어떤 분명한 결론을 내린바는 없으나  나는 항상 '피식'하고 서툰 웃음을 터트리고 한다.  혼자서만.

  '부단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각 시대마다 부딪친 상황과 사태의 해결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들이 나름의 조화를 이루며 생존을 이어나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수정하고 손질해 나가면서 생겨났던 하나 하나의 사건들이 연결되어  거대한 시간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 결과로 인간이 창조해 낸 위대한 업적의 기록들이 바로 저 유적이며 유물이며 건축물들이라고........  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제물과 찬양을 받아왔다고.........'

  여행을 떠나 보라.

  모든 제약과 구속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세상의 어느곳이든 마냥 걸어 보라.

  나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될 것이다.

  '조물주께 경배를....... 어쩌자고 이렇게 위대한 아름다움을 축복으로 내려주셨나이까?'  라는 생각이 들 법한곳은  대부분 위대한 자연의 풍광을 대했을 때 일것이다.  로키의 눈 덮인 숲이나.  알프스의 거대한 풍경,  나이아가라 폭포 등등이  해당한다 하겠다.

  하지만  피라미드를 보고  만리장성에 올라보고  에펠탑에 올라서 파리를 내려다 보고,  박물관에서 수많은 유물과  조각상들과 그림을 마주한다고 치자.

  고대 이래로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았을 참혹한 전쟁들과  노예들의 피와 땀이 느껴지고,  사랑의 아픔을 회화로 승화시키는 예술혼은 있지만  조물주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조물주의 사전 계획에 의해서 단 한번에 창조된 세상이라면........  나는 이 순간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모든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 1천년의 암흑기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위대한 인간의 노력과 땀의 결실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어떤 필요에 의해 더욱 발전해갈 것이고,  그것은 앞으로도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창조행위를 계속해 나갈것이라는 생각이 나의 확신이다.   그런 전제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나의 여행은 계속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오랜 발자취를 찾아가는 나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 내가 걷고있는 이 길,  마주치는 사람들,  하늘에서 뚝 뚝 떨어지는 빗방울.........  이 모든것이 시간의 역사다.  인간의 역사다.

 

 

 

 

 

  이스탄불 시청사를 반대로 접어든 골목길은  제법 좁고 가파르지만  옛 오스만 시대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온다.

  이리저리 굽어진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낡은 주택들 위로  '발렌스 수도교'의 낡고 훼손된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한번 수도교 위를 거닐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벽위에 고층건물로 들어선 곳 중에는  수도교를 아예 건물 안쪽을 통과해 지나가게 만든 건축도 보인다.  생활의 지혜일 수도 있겠으나,  수질의 안전을 위해서 그걸것이 허가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애초에는  수질과 수량을 관리감독하던 건물로 지어졌다가  최근에 들어 일반 서민이 주거지로 사용했을것 같다.  수도교는 제국의 사활이 걸린 대단히 중요한 공공시설이 아니었겠는가?

  허름하다 못해 너무도 허름한 작은 카페들,  우리나라 한 40년 전쯤이 시골마을 구멍가계, 의복 수선소, 낡은 사진관 등이 지나간다.

  골목길이 언덕을 넘어 내려서기 시작했다고 느껴질 즈음 부터는 어딘지 모르게 제법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라지는 풍경을 느낄째 쯤  골목 어귀로  아주 웅장한 이슬람 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가 이스탄불의  유럽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술레이마니예 자미(Suleymaniye Camii)'

 

 

 

 

 

 

 

 

 

 

 

 

 

 

 

 

 

 

 

 

  

 

 

 

 

 

 

 

 

 

 

  오스만 투르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술레이만 대제'의 영문 표기 이름은 '솔로몬' 이다.

  지혜와 총명함을 두루 갖추었던 술탄은  자신 스스로를 '제 2의 솔로몬'이라 생각했다.  터키 역사의 자랑인 술레이만 대제는 우리나라의 가장 추앙받는 성군 세종대왕과 아주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술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성장과정이 썩 순탄치 않았다.  이 취약한  아들 술탄의 권위를 위하여  아버지 셀렘 1세는  최고 권력의 정점에 근접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처형시켜 버렸다.  더 이상 두려울 세력이 모두 없어진  기초 위에  대를 이어받은  술레이만은  자신의 정치를 펼치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발칸 반도를 포함한  불가리아와 폴란드 지역까지 영토확장을 시켜서 오스만 투르크 역사상 가장 많은 지역을 통치하는 제국을 완성시켰다.

  이는 왕위 승계의 정통성을 갖지못한 셋째아들을 위하여  사돈일가까지 참혹하게 제거한 후에야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태종의 행적과도 너무나 닮았다.  세종은 한글 창제에서  윤관을 시켜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고  4군6진을 설치하는 등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가능게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술레이만 대제는  증조(?)할아버지뻘인  메메트 2(술탄 마호멧 2세)와 비견되는  오스만의 최고 영웅으로서,  여기에 현대사의 아타튀르크를 포함하여  세사람이 터키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인기있는 위인들이다.

  메메트 2세는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비잔틴을 멸망시킨 역사적 사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장본인이다.

  오스만 역사상 장장 용맹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메메트는  그러나 딱  한번  두고두고 죽을때까지 한으로 남은 치욕적인 패배를 겪은 바가 있었다.  메메트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허물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을때,  겨우 450명 정도의 기사만이 남아서 십자가를 수호하고 난민들을 호휘하면서 바다로 후퇴한 무리가 있었다.  바로  '요한 기사단'이었다.  바다로 쫓겨난 요한 기사단은  약 4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그리스지역 크레타섬 인근의 아주 손바닥만한 작은섬 로도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비잔틴이 주도한 대 오스만의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요한 기사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스만은 곧 지중해 건너 유럽정벌을 위해 반듯이 이곳 에게해의 바다를 건너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450명의 기사와 4천명의 시민들이 똘똘 뭉쳐서 로도스섬을 하나의 거대한 성채로 만들었다.  화포의 등장으로  공성전에 의해 성벾이 무너지는 시대적 전쟁양상까지 철저하게 보완해 나갔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에  위기를 느낀 다국적 십자군들이 속속 로도스에 몰려 들었다.

  마침내 최강 오스만 수군을 앞세운  메메트 2세의 15만 군대가 로도스로 쳐들어 왔다.    두 달 이상 걸린 양측의 전쟁은 참혹했다.  심지어는 술탄과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며  그들의 존재가 곧 술탄의 권위로 평가받던 예니체니(황실 근위대) 총 인원이 2만오천명이었는데  그중 2만을 전투에 투입시키는 초강수까지 두었지만  1만오천에 가까운 친위대를 잃어가면서도 난공불락의  로도스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메메트는 패배를 인정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메메트는 죽어가면서  '다시는 누구도 로도스를 치려 하지 마라. 제국의 존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은 받아들여 졌다.

  오스만은 끊임없이 유럽으로 진격을 해서 발칸반도를 차지하였으면서도,  메메트의 유언대로 에게해를 통해 지중해로 나가는 해상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로도스의 요한 기사단 때문이었다.  바지예드2세와 셀렘1세의 통치기간인 약 40여년 동안 오스만은 지중해로 진출하지 못했다.

  술탄에 오른 술레이만은 즉위 다음해에 즉각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로도스를 공격했다.  메메트의 유언을 무시한 것이었으며,  약 두배의 군대 편성도 그만큼 나름 신중한 행보였다.  전투는 치열했다.  40년 만의  리턴매치였으니 어떠했으랴.  약 600명으로 증원되었던  기사가  겨우 250명으로 줄어들었다.  여기 저기 성벽이 무너지고 오스만군이 성벽 일부를 차지했다가 다시 탈환되는  정말 처절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술레이만 대제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만의 예니체니를 투입하고 그중 약 1만이 전사했다.  심각하게 내전이나  쿠데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전투의 끝은 보이지 않고   마냥 이대로 전투를 계속하기에는  자신의 자리(술탄)와  언제 사방에서  점령되었던 국가들이 들고 일어날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로도스섬의 요한 기사단 측에 아주 치명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화약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식량이 떨어지면  군마를 잡아먹으면서 라도 싸울 수가 있는데.......  화약이 떨어졌으니  칼과 화살만으로 전투를 계속할 수만은 없었다.

  양측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남아있는  250명의 기사와  2천오백명의 시민들과 무기와 재산을 모두 가지고 떠나 로도스 성채를 오스만에게 비워준다는  조약이 맺어졌다.  속 내용이야 어지되었든  요한 기사단의 패배였으며,  술레이만 대제의 승리였다.

  일년 전 술레이만으로 부터 선전포고를 받은것은 요한기사단의 단장이었던 필리프 드 릴라당이었지만  위기를 느낀 필리프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 위중한 사태를 대처하기 위하여 당시 69세의 노장 '아이슬란'이 대타로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올라  성전을 이끌었던 것이다.  아이슬란의 명령에 의해 로도스를 비우고 모두가 배 위에 올랐을 때,  26세의 청년 기사가 자신이 혼자 남아서 이 로도스를 지키겠다고  성루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다가  아이슬란의 명령에 의해 밧줄에 꽁꽁 묶여서 강제로 끌려간 기사가 바로 '라발렛'이었다.  이쯤되면  뒤로 이어질 스토리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

  로도스를 절령한 술레이만은 서둘러 군대를 수습하고  해군을 다시 증강 시켰다.

  요한기사단이 없어진 지중해는 이제 오스만 제국의 해상 영토였다.  본격적인 유럽 정벌에 나설 채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로도스에서 쫓겨난  '아이슬란'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아이슬란은 로도스에서 떠나와 한동안 바다를 유랑하다가  마침내 몰타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몰타를 로도스 이상의  전략 기지로 만들었다.

  오스만이 이스탄불을 떠나 로도스를 지나쳤다 해도  여기 몰타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지중해로 나아가 유럽땅을 밟을 수가 없는 길목이었다.  요한 기사단은 바다를 지키며  유럽의 기독교 상선들은 호위까지 해주고,  아시아에서 오는 오스만의 모든 배들은 나포하고 약탈하고 침수시켜 버렸다.

  술레이만의 입장에선 로도스 섬은 빼앗았지만  나머지 상황은 나아진 것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요한 기사단은 건재했다.

  최후의 리턴매치가 벌어졌다.

  술레이만은 발칸반도에 나가있는 육군까지를 불러 들였다.  그만큼 엄청난 전투가 벌어질 것을  술탄 자신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이슬란의 뒤를 이어받은 '라발렛'은  혈기왕성한  젊은 기사에서  '엎그레이드 된 아이슬란'으로 성장해 있었다.

  인류 역사책에 중요하게 기록될만큼  어마어마한 전쟁이 벌어졌다.

  결론은 라발렛의 요한 기사단이 몰타를 사수했고,  술레이만 대제는  일생일대의 첫패배를 겪게되었다.  이 위대한 술탄은 그 이듬해 친정을 펼쳐 폴란드의 시게르바트 성을 어렵게 함락시켰으나,  몰타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심각한 정신적 고뇌와  오랜 전쟁에 지쳐 병영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메메트의 유언처럼........  술레이만 사후 오스만 제국은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 통치기간 46년.  오스만 투르크 역사상  최고의 위대한 군주  술탄 술레이만 1세의 관.

 

 

 

 

 

 

 

 

 

 

 

 

 

 

 

 

 

 

 

  사람들로 북적이는 바로 위의 사진은 아주아주 유명한 식당으로   '다류지야페(Daruzziyafe)' 라고 한다.

  오스만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지은 '술레이마니에 자미'에 속하는 복합건물을 개조한 유명 레스토랑이다.  인류 역사를 통털어 손에 꼽을 정도의 최고 건축가가 만든 건물의 레스토랑이라서 그런지 ,  오스만 황실의 레시피를 기반으로 개발했다는 요리 대부분이 상당히 비싸다.  황실의 메인요라라 하면 비싼것은 당연한 것인가?  음료나 디저트들도 다른곳에 비해 어느정도 비싸다.  그래서 맘 먹고 들어갔다가 커피만 마시고 나왔다.

  하긴 약간 이해는 간다.  미마드 시난이 지은 건물에서 쉬었다 가는 호사를 누려보다니.......... 

  이 건물의 본래 용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이마렛(구제소)' 이었고,  그렇게 치부해 버릴까 하면 호스만 제국 황실의 연회장이었다고도 한다.  거꾸로 해석해 황실의 연회장을  빈민 구제소로 내어주었다면...........  그만큼 건물은 충분히 멋지고 으리으리하다.

  금각만과 보스포러스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은  지면 53의 높이 위에 지름 27.5m의 돔이 올려져 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건축 기법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천재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반원형 돔을 받치고 있는 버팀벽을 감추기 위해  버팀벽을 건물의 벽면에 흡수 통합 시켜 버리고, 또 이를 감추기 위하여 그 벽면을 긴 회랑으로 만들고  절제미가 뛰어난 장식과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그 벽면을 치장했다.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건축공법의 등장이었다.  가히 이슬람 건축물 중에서  최고의 자리를 놓고 '불루 모스크'에  비교될만한 멋진 건축물이다.

  별도의 돔 형식 건물을 정원에 만들어  자신과 사랑하는 여인의 무덤(튜르베)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자미의 바깥쪽으로는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다양한 건물들(큘리에)를 지었다.  병원과 의학대학, 신학교와 하맘등이 들어서 있다.

  이스탄불의 젊은 남녀들이 특히 많이 찾는 자미로 꽤나 정평이 나있다.

 

 

 

  다시 골목을 걸어내려오고 있는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뭐지?

  케밥.

  어떻하겠어?  나도 맨 뒤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지.  ㅎㅎㅎㅎ.  정말 쥑이는 맛이다.  터키의 맛.......  바로 그거..........

  이런거 그냥 무시하고 건너갔다간........  언제고 최소 삼일간 물만 먹고 버텨야 하는 고난을 맞이할 수 있다고 누가 그랬다.   자유여행이란 최대한 식도락을 즐길 수 있을때 실컷 즐겨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원칙에서 출발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괜히 생겨났겠어?    ㅎㅎㅎ

 

 

 

 

                    

 

 

 

 

 

 

  이렇게 술레이마니예 자미 골목에서 내려와 평지를 만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네에 들어섰다고 생각되면   이곳의 이름이 바로 베야줏(Beyazit) 지역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여행자나  패키지 여행자나 이스탄불에 갔다고 하면 꼭 들리거나 지나치게 되는 동네이다.   베야줏 트램역도 있어서 여기서 두 정거장을 더 가면 술탄 마호멧 역이다.  불루 모스크와 하기야 소피아가 있는 광장이니까 아주 가까운 인근지역으로 생각하면 된다.

  베야줏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싶은 것으로는 당연히  그랜드 바자르로 불리는 '카팔르 챠르쉬(Capali Carsi)가 이곳에 있다.  그러다보니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이곳을 꼭 한번 이상은 지나다니게 된다.

  이곳을 지나다 보면   두 개의 아주 커다랗고 인상적인 탑이 놓여 있는데.......  그냥 스케줄에 좇기다 보니 그냥 지나치기가 일쑤고,  시간이 지나 나중에 팜플렛이나 사진을 보게되면  '아! 저거.  그랜드 바자르 인근에서 봤든 것 같은데.......' 하는 정도만큼만 기억이 나게된다.

  그랜드 바자르를 여행하는 패키지 여행객들을  우루르 모아놓고 버스를 기다리거나  바자르 내지는 쇼핑에 대해 설명하는 너른 공터가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바로 코 앞에 커다란 자미의 뒷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이 이슬람 사원이 바예지드 자미(혹은 베야줏 자미)라고 부르는 사원이다.

  술탄 바예지스 2세가 처음 준공한 자미가 지진에 부서지자  건축가 미마드 시난이 재건하였다 한다.  곳곳에서 시난의 뛰어난 건축술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광장의 반대편으로  이스탄불을 통털어  에니 자미와 더불어 가장 많은 비둘기와 여러 종류의 새들로 부터 아낌없는 사랑이 차고 넘쳐서 새들의 배설물을 홀라당 뒤집어 쓴 채 우뚝 서있는 녹슨 철판으로 감싸있는 거대한 탑이 나타난다.

  쳄벨리타쉬(Cemberlitas)라 불리는 돌기둥으로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의미있고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적이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도를 하면서 새로운 로마제국의 수도로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면서  그 중앙에 기념으로 만들어 세운 탑이다.  이 탑을 중심으로 동로마의  원로원과 같은 핵심적 공공건물들이 이곳에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플의 심장이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본래는 57m 높이의 석탑 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각상이 서있었다고 전해지며, 지진으로 조각상이 깨어지면서  이번엔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 세웠으나  오스만의 정복 이후에 십자가도 철거되었다.  지진과 화재와 자연 부식등을 겪으며 현재는 약  34m 정도만 남은 상태로,  그나마  부식이 심해 철판과 고리로 감싸 안아 보존하게 되면서 마치 석탑이 아니라 철탑의 모양으로 지금 보여진다.  쳄벨리타쉬는 바로 이 모습에서 유래된 '감싸여 있는 돌' 이란 의미을 가지고 있다.

  비둘기의 배설물로 가득한......... 이곳을 지나치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일대가 콘스탄티노플의 중심이었던 만큼 당시의 귀한 유적들이 사방에 널려 남아 있는데  저만치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건축물이  광장 저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스탄불 대학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진짜로 비잔틴 제국 시대의 개선문이다.  그런가하면  대학 경내의 담장 옆으로  아주 멋진 첨탑이 우뚝 솟아 있다.  현재는 이스탄불의 방송국 전파탑에서 시작해서 각종 이동통신사의 주요 타워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탑 또한 1828년 이곳 그랜드 바자르를 비롯한 중요 공공건물의 화재 감시용으로 세웠던 높이 50m나 되는 '베야줏 탑' 이다.

  사방으로 발걸음에 돌부리 채이듯이 역사적 유적과 유물이 넘쳐나는 이곳.........  이스탄불 베야줏 지역이다.

  이쯤되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쓸려 들어가고 쓸려나오는 곳으로 시선이 끌리길 마련이다.

  아직까지도 아랍풍의 독특한 분위기가 살아 숨쉬는 곳..........

  시장이라기 보담은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은 이곳...........

  언제부터인가는  시장이라기 보다는  이스탄불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기억되는 이곳.........

  사람들은  '그랜드 바자르' 라고 부른다.

  본래의 이름인 '카파르 차르쉬'는  '지붕 덮인 시장'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로 들어가는 입구는 사방으로 널려있다.

  쇼핑이라면 쇼핑이고  여행이라면 여행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아이 쇼핑'을 나왔거나,  그것도 아니면  사람구경 나온 셈 치면 된다.

  그렇게 그랜드 바자르를 돌다보면  척하니 '여기가 고서적 시장이로구나' 하고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작은 골목이 나오고,  그 골목을 돌아  작은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벼룩 시장'이 나타난다.  각양 각색의 수많은 사람들과  쏟아져 나온 희귀한 물건들.........

  그런데 오늘은.........

  정신을 놓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불쑥 벼룩시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정말로 인산인해다.

  그래서 망설일것 없이 그 인파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벼룩 시장에서 시작한다.  쇼핑 겸 여행을..........

  마음이 참으로 푸근해 진다.

  난 이런곳이 참 좋다.

  사람사는 냄새가 느껴지니까.........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네?

 

  어떤것이 아랍풍리라 하는 것일까?

  어떤것이 이스탄불 다운 것일까?

  우이 씨............

  진열된 물건들 뿐만이 아니라  사고파는 사람들 모두가 아랍풍이고..........  시장 건물 자체가 이스탄불적이다.

  우짜쓰까............

  '그랜드 바자르' 통째로  내고향 충주로 가져갈 수는 없을까?

  철거해야 하는 교현동 (구) 운동장 일대에 가져다 놓으면 딱이겠는데.......... ㅎㅎㅎ

 

 

 

 

 

 

 

 

 

 

 

 

 

 

 

 

 

 

 

 

 

 

 

 

 

 

 

 

 

 

 

 

 

 

 

 

 

 

 

 

 

 

 

 

 

 

 

 

 

 

 

 

 

 

 

 

 

 

 

 

 

 

 

 

 

 

 

 

 

 

 

 

 

 

 

 

 

 

 

 

 

 

 

 

  그랜드 바자르에서 나와서  쳄벨리타쉬 첨탑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는 듯 싶으면  다시 완만한 내리막 경사로가 펼쳐진다.

  이스탄불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바라다보면서 잠시 걷다보면  트램이 지나다니는 도로(옛 마차길)가 나오고,  그 건너편 광장이  바로 '술탄 마호멧 광장'이 모습을 그러낸다.

  이곳이 흔히들 '올드 시티'라 부르는 '이스탄불 역시지구'로서 이스탄불을 찾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절대 성지'로 추앙받는 지역이다.

  '블루 모스크' '하기야 소피아 성당' '예레바탄 지하궁전' '톱카프 궁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등이 모두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트램이 지나는 길 옆에 놓인 커다란 분수대를 둘러싼 푸른 공원을 가운데 두고,  블루 모스크와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마주선 채,  한 시야(포커스)에 모두 바라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 압권이다.

  초기에는 그리이스의 식민도시가 건설되었다.  신전과 원형극장과 아고라 등이 이 지역에 가득 들어서 있었다.

  로마가 이 지녁을 정복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서로 분열되었던 로마를 다시 하나로 통일을 한 직후에,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로마의 수도를 바로 이지역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폴리스가 탄행한 것이다.

철판에 감싸인채 허물어지는 것을 겨우 면하고 있는 '쳄벨리타쉬' 첨탑을 중심으로 원로원(국회)을 비롯한 행정기관들이 들어섰다.  그 주위로 시민들이 주거하는 지역과  시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보스포러스 해가 보이는 지역에  그리스의 유적들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터를 닦아서  넓은 '대전차 경기장'과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다.  바로 '히포드모모스'로 불리는 '술탄마호멧 광장' 이다.  로마 시민들은 이곳에서  대전차 경기를 즐기면서 로마인의 자부심을 키워 나갔다.  새로운 번영기를 맞은 동로마인들은 이제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맞아 자신들의 이름을 '비잔틴 제국'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제국의 위용에 걸맞게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교회'를 갖기를 열망하여  만든것이 바로 '하기야 소피아 성당' 이다.  비잔틴 문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자,  인류의 건축학 발전사에 있어서 아주 획기적이자 불멸의 가치를 지닌 걸작이다.

  하지만 비잔틴이 몰락하고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이 위대한 유산은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게된다.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대부분의  교회를  점령과 동시에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심지어 모든 교회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이슬람 사원(자미)을 짖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기야 소피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최고의 보물창고'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아마도  '로마의 바티칸 박물과'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 '영국 왕실국립 박물과' '뉴욕 시립 미술관'  정도되는 세계 최고급의 박물관 서너개를 모두 합해놓은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세계는 곧 비잔틴'이었고, '비잔틴의 모든 재화는 하기야 소피아에' 라고 회자되던 시절이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이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 엉뚱하게 비잔틴을 쳐들어  왔을 때도,  항복한 비잔틴에게  실로 오늘날로도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십자군이 요구하였음에도  비잔틴은  하기야 소피아에 전시된 보물들을 꺼내다가 깔끔하게 모두 배상 해결했다는 사실로만 보아도   하기야 소피아가 얼마만큼의 보물을 보관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투르크는 하기야 소피아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리고는 껍데기만 남은 거대한  교회 건물을  파괴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메메트(술탄 마호멧 2세) 달려갔다.  그는 이 위대한 건물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해 온갖 수고와 희생을 감수한  제군들에게 보답으로  3일 동안의 무제한 약탈을 허용했다.  이제 3일이 지났으니  이제 더 이상의 약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모두 본연의 자세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라.  나는 너희에게는 보상의 기회를 주었으나  이제까지 정작 나 자신은 이곳에 돌맹이 하나 차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모두 먼저 차지한 이 시점에서 나는 남아있는것 중에 한가지만을  내 자신을 위해서 가지고자 한다.  여기 이 하기아 소피아 건물을  술탄인 내 개인의 기도 장소로 사용하고자 한다.  내가 이 건물 하나쯤은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메메트의 한마디 연설 덕분에  '하기야 소피아'는 살아 남았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지붕에 십자가 대신 초승달 형상이 내걸렸고,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지하는 율법에 따라  기독교식 벽화며 장식에  두꺼운 회칠이 덮였다.  대신 이슬람식 화려한 모자이크 문양과 창문에 스테인 글라스가 추가 되었다.   온통 붉은 황토빛을 띤 라임스톤 건물에 흰대리석으로 이슬람 사원 양식의 첨탑들이 추가 되었다.  건물의 입구에 역시 흰 대리석으로  기도실에 들어가기 전에 얼굴과 손 발을 씻는 간이세면장들이 추가되었다.

  붉은색은 본래의 하기야 소피아의 모습이고,  흰대리석 건물은 이슬람 양식으로 추가된 것이다.

  먼훗날  술탄 마호멧 1세는  모든 이슬람 지역의 내노라하는 건축가들을 불러다 놓고 '무슨 수를 쓰더라고  저기 보이는 하기야 소피아 보다 더 멋지고 더 위대한 건물을 지어라'라고 명해서  마주 보이는  로마의 대전차 경기장과 신전들을 싸그리 밀어버리고는  그 자리에 '블루 모스크'를 지었다는 야그..........

 

 

 

 

 

 

 

 

 

                                 - 바닥 포장도로면에  전차가 달리던 트랙의 모양을 그대로 되살려 놓았다.

 

 

 

 

 

 

 

 

 

 

 

 

 

 

 

 

 

 

 

 

 

 

 

 

 

 

 

 

 

 

 

 

 

 

 

 

 

 

 

 

 

 

 

 

 

 

  '예레바탄 지하 저수조 9Yerebatan  Sarnici)는 흔히들 '지하 궁전'이라 불리며 이스탄불 여행의 필수 여행 요소중 하나로 일컷는다.

  먼곳에서 수도교를 통해여 물을 끌어오고,  여기와 같은 여럿의 지하 저수조에 물을 보관했다가  이스탄불의 각지로 보내서 생활용수로 쓰고  분수도 만들고 했다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상의 가치는 실로 위대하지만,  그저 보통의 여행자 입장에서 다분히 실망스럽고 볼것도 별로 없는 장소라 하겠다.

  '메두사의 머리가 기중을 받치고 있는데,  왜 거꾸로 놓였을까?' 하는 호기심이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지하 궁전'이라 별칭이 붙은 이유는 비잔틴 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영향권 안에서 336개의 웅장한 돌 기둥들을 가지고 와서 12열로 정렬해  제국의 우상을 드러내고자 했던데서 유래한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지역에서 신전에 있떤 기둥들을 가지고 오다보니 크기도 길이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또 실제는 336개의 기둥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돌기둥들을 싹쓸이 해와서  여기서 쓰고 남은것들은  다른 건축 현장에 자재로 보내기도 했다.  이스탄불 박물관 마당에 쓰고 남은 돌기둥들이 너저분히 굴러다니고 있다.  길이가 너무 긴것은 잘라서 사용했고,  잘못 맞추어서 상부와 하부의 크기와 생김새가 다른것들도 즐비하다.  한마디로 부실공사 투성이다.  길이가 너무 짧으면 받침돌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메두사의 머리다.  왜 거꾸로 놓았는지는 불분명하고,  나는 인근의 이스탄불 박물관에서  이 지하궁전의 메두사랑 크기 생김새가 똑 깥은 메두사의 머리 조각을 찾아냈다.  그렇게 보면  여기 지하궁전 건설에서 짧은 기둥들이 여럿 있어서  받침돌로 메두사 머리를 여러개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만을 실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아니라면......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다른 저수조에도 메두사의 머리가  받침돌로 쓰여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와 유적 공부하는 입장으로  가보기는 하였으나........  또 가볼 이유는 전혀 없을거란 생각이다.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마당에 놓여진  메두사 머리 조각상.  양면 조각상으로  지하궁전의 메두사와 크기 모양이 똑같다.

 

 

 

 

 

 

 

 

 

 

  이스탄불을 거닌다는 것은 정말로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함께 걷는 사람이 없어도 좋다.

  때론.......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다니는 중이라 해도 좋다.

  영화나 책에서 보던 유적을 만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던,  알지 못하던 많은 것들을 우연처럼 또는 필연처럼 느닷없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유적과 문화속에서 실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즐겁다. 

  어느 시골의 무너져 내린 흙담처럼 여기저기 돌부리에 채이듯  고대 그리이스의 유적들이 나타난다.  관심을 가져보라. 로마 시대의 유적들도 곧 잘 마주친다.  비잔틴의 문화와 유적이 많이 산재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라 하겠다.  여기가 비잔틴의 한복판이었으니까.

  그 위에 오스만이 건설한  이슬람의 문화 유산들.........  터키의 이슬람 문화는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여타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무엇인가가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주로 오스만의 이스탄불을 찾아 걸었던것 같다.

  내일은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을 찾아 걸어봐야 겠다.

  나는 왜 이렇게 이스탄불이 좋은걸까?

 

 

 

 

 

 

   ----  다음 이야기에서는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길' 을 찾아 떠나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