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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이쯤 나이를 먹었으면 이제 조금씩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도 좋지 않을까?

by 피안재 2018. 10. 7.

 

 

 

 

 

 

 

 

 

 

 

 

 

 

 

 

 

  우리 세대에게나  부모님 세대에 있어서  '빨갱이'나  '간첩'이라는 소리만큼이나  절대 금기시 되던 단어가  바로 '낭비'가 아닐까 싶다.

  '낭비'라는 말을 혹여 잘못쓰기라도 하면 금새 '공공의 적'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낭비'는 곧 '몰락'을 의미하며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인생을 조금씩 낭비하면서 살아도 좋지 않을까' 라고 화두를 던지면서도  혹시 어디선가 돌멩이라도 날아오지 않을까 연실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다.  '미친 소리' '배부른 소리' 라고 당장 여기저기서 질타를 받을것만 같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내 가슴 한구석에 늘 아스라한 여운처럼 아로새겨져 있던 의문이었다.

  이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배기의 처지로서  '이쯤 나이를 먹었으면 이제 조금씩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또래들에게 슬며시 던져본다.

 

 

 

  내 나이 쉰 즈음에 지인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다보면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가  '잃어버린 시간''놓쳐버린 기회' 등등의 아쉬운 이야기들이었다.

  -  부모님 말씀대로 그냥 차분하게 공부나 열심히 했더라면........

  -  그때 개인사업이 어쩌니저쩌니 하지말고 그냥 직장에 꾹 눌러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  주식인지 뭔지 꾀임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  애 뒷바라지 한다고 전답까지 팔아치우고 이제 지금 남은게 뭐야........

  -  소소하게 잘되던 가계나 지킬것이지 사업확장은 무슨 얼어죽을..........

 

  그런데 가만히 지내놓고 생각해 보니  그것도 모두 '낭비'였다.

  우리는 모두 참으로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왔으면서,  또 알게 모르게 엄청나게 낭비를 일상으로 살아온것이 아닌가?

  시간도 낭비했고,  돈도 낭비했고,  때론 인간관계도 낭비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쉰 즈음의 우리는 또 더욱 치열하게 삶을 꾸려나가야만 했다.

  좀 빠르면 자녀가 군대를 갔거나 취직을 준비하거나 이고,  보통이면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는 자녀를 두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직은 오로지 돈을 위해 살아가야만 했던  현실에 짓눌려 허우적 거리던 나이였다.

  이제 환갑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지위에 오른 친구,  세속적 평가로 엄청나게 부를 이룬 친구,  좋은 직장에서 정년을 맞이하는 친구 들은 어느정도 노년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만,  개중엔 나 처럼  가진것도 모아놓은 것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오는 시간과  가는 세월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처지들도 많다.

  우리에게 공평한것은  오는 시간과 가는 세월이 똑 같다는 점 뿐이다.

  현실과 처지는 모두 다 다르다.

  그렇다고 당장 이쯤에서 모두 다 집어치고고 세상에 작별을 고할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을 이제와는 조금 다르게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가면서......  이제까지와는 좀 다르게 살아보는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두 어깨 위에 마치 어떤 커다란 책무를 짊어진 채 죽어라 일만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을까?  아직도 40대의 혈기왕성한 의욕으로 절실하게 목표를 세우고 여전히 뛰어다닐 기력이 남아있다면 혹여 다를까?

  얼마만큼이나 무엇을 더 이루거나 가져야만 그 바쁜 발걸음이 멈춰질 수 있을까?

  언제까지면 그 목표가 달성될까?

  높이 들려진 자는 높은 곳에서.........

  돈더미를 가득 쌓아놓은 자는 돈더미 위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나처럼 그냥 길바닥 위에서........  자기 위치에서  지신에게 허용된것의 한계내에서도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비울것은 비워가면서 지나온 길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  내가 말하는 '긍정적 낭비'이다.

  우리 나이쯤 되었으면  무엇으로든 더 가득채우려 하기 보담은........  이제는 서서히 정리해가면서 비워야 할 시기가 아닐까?

  아직은.......  너무 이르다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렇다면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옛 말씀 처럼........  죽는 날까지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인간다움일까?

  내가 말하는 '낭비'는  당장 일손 때려치우고 죽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놀자는 것일까?

  아니다.

  나 역시 죽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일손을 놓지 않을것이다.  내 밥벌이는 철저하게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

  내 마음이 필요로 하는 욕심을 좀 덜어내고  여유로움 속에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내게 남은 시간을  절박함이나 초조함이 아닌 나름의 즐거움속에 더불어서 누려보자는 생각이다.

  환갑을 바라다보는 나이쯤이면 생을 조금 낭비한다고 해서 사치는 아니지 않을까?

 

  아직 자녀의 취직문제와 결혼 문제가 남아있는 친구들도 많이 있다.

  물론 그 또한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책임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참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이쯤 되었으면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도 치열하게 살아 갈 기회를 내주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의 치열함이  저들의 안녕과 행복에 지대하게 공헌하는 길이라거나,  저들의 행복을 책임져주는 안전보장책이라는 환상은 이제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노력이  자녀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환상은   허구로 정의된 이차방정식이라는 것을 깨달을때도 된것 같은데........

  빵을 물려주는 것은 영원하지 못한것을 알면서도  창고 가득 빵을 채워 물려주려 하지?

  씨앗을 뿌리고  돌보다가 추수를 하고 밀가루를 빻아서 빵을 만들어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어느새 부드러운 빵을 맛있게 먹여주려고만 하는 세대가 또 우리세대이다.

 

  -  내가 죽어라 돈을 왜 벌었겠어?  다 아들놈 줄려고 벌었지.  때가 되면  다 지눔게 될텐데도 노력하는 모습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맨날 돈타령이야.  입만 열면 사업이 어쩌고 저쩌고.......  지가 사업을 알아?  땡전 한푼이라도 지가 벌어봤어?  이젠 아주 웬수같어....... 뼈빠지게 벌어 놓으면 뭘해.  나 죽고나면 열흘도 못가서 다 털어먹을 판인데........  저런걸 아들이라고.........  내가 미쳤지.  돈을 쌓아 놓으면 뭘해.  싸그리 말아먹을 궁리만 하는 아들놈을 위해  이 죽을 고생을 했어?

  -  나 죽고나면 딸래미 년 혹시나 설움당하지 말라고 뼈빠지게 일해서 죽어라 돈 벌어 놨더니.......  나 죽기도 전에 딸래미 앞세워 툭하면 돈타령이야.  내가 그래서 그놈은 내 사윗감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렸더니만........  아이고  분해....... 사위가 아니라 도둑놈이여. 날강도라고......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세상은 다 자기 맘 먹은대로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요즘 명퇴를 하거나 정년퇴임을 목전에 두고 앞으로의 인생을 설계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부쩍 그런 친구들로부터 연락과 만남과 대화가 늘어가고 있다.

  퇴직 후에 그들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최우선 순위가 바로 여행이다.  열이면 열 모두가 한동안 여행부터 실컷 하고 싶다는 답변이다.

  여행도 패키지가 아니고.........  딱 내가 하고 다니는 방식의 '자유 배낭여행' 이다.

  나와 함께  '딱 한번만  같이......'  배낭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요청이 여러건이나 쌓여 있다.

  그들의 심정을 나는 십분 이해한다.

  열심히 조언을 해주고  적극적으로  자유여행을 추천하고 있다.

 

  여행은 '인생을 조금씩 낭비'하는데 있어서 최고로 좋은 방법이다.

  내가 여행에 푹 빠져 사는 이유도........  내가 여행을 통해서 인생을 아주 조금씩 낭비해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즐겁고 행복한 낭비란 이런것이다.

 

 

 

 

 

 

 

 

 

 

 

 

 

 

 

 

 

 

 

 

 

  -  아덜.  아빠야.  지금 공항가는 버스 안이야.  다녀올께.

  -  출발일이 오늘이었어요?  아무걱정 마시고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즐겁고 유익한 여행 되셔야 해요?

  -  그래.  오늘 출발하면 일단 아르메니아로 갈거고  며칠 있다가 조지아 들려서 터키로 넘어갈거야.  그나저나 내가 태리(손녀) 생일날에나 귀국하는데  미안해서 어쩌니?  이러다가 할아버지 미운털 박히면 안되는데........

  -  아직 어려서 그런거 몰라요.  ㅎㅎㅎ.  다녀오셔서 보시면 되지요 뭐.  조심하세요.

  -  내가 어디 있는지를 너가 알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니?  다녀올께.  사랑한다 아덜.

  - 저두요.  열심히 일하셨으니 쉬시면서 멋진 여행하고 돌아오세요.  여기는 제가 잘 알아서 할께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새털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후원자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말이다.

  여행을 떠날때는 언제나 이런 기분이다.  이 세상에서 딱 한명........  우리 아들의 지지만 받으면 만고강산 난 아무런 걱정꺼리가 없다.

  아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웃음이 피어나고  녀석이 있는 한 나는 아무런 걱정도 없다.  그 어떤 일이라도 녀석은 나보다 훨씬 너끈하게 잘 해나갈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훗날  내가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할 순간이 닥쳐온다 해도,  나는 지금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그냥 쿨하게 운명을 웃으면서 받아들이며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번듯한 녀석을 세상에 남겨 놓았는데 무슨 걱정근심이 있으랴......... ㅎㅎㅎ

  나는 녀석의 팬이고  녀석은 나의 든든한 후원자.

 

 

  우리 집안에 특별한 가훈은 없지만  녀석이 어릴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아빠가 당부하는 세가지가 있다.

  '공부해라' '뭐는 하지마라'  '뭐는 해라'  등등의 이야기는 평생 해본적이 없다.  완전 자유 방임형 책임제.........  무조건 너의 생각대로.......

  '아덜.  아빠는 너에게 딱 세가지 바라는 것이 있어.  책 많이 읽고  친구 많이 사귀고  여행 많이 해라.  그러면 돼. 그렇게 하고나면 아주 먼 훗날 네가 어른이 되었을때   부족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고 틀림없이 즐겁게 세상을 살고 있을거야.  알았지?'

  나의 생각은 지금도 불변이고  녀석은 나의 바램을 잊지않고 잘 기억하고 있다.

  '아빠.  아빠 당부 세가지 중에서  두가지는 썩 잘 지키고 사는데  딱 한가지가 영 어렵네요?  책을 늘 가까이 하는게 쉽지가 않아요.  거기다가 아빠는 고전이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다고 하셨는데......  요즘 젊은이들 중에서 누가 고전을 읽어요?  컴퓨터 두드리면 요약집 다 나오는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언제고 기회가 되면  고전 찾아서 다 읽어볼께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들에게 잘못 가르쳐 준것 같다.  큰일 날 일을  잘못 벌여놓은 셈이 아닌가?

  책 많이 읽어라. 친구 많이 사귀어라.  여행 많이 해라.

  이거야 말로 인생을 낭비하는데 있어서  최상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당장 아들이 이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백수에 날거지에 쪽빡 찰 인생 아니겠는가?

  오호라.......  애비의 어리석움을 어찌하면 바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근데 30대 초반의 우리 아들.........  아주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청년 가장이 아닌가.

  휴.

  아덜아.  아빠 바램은 기억만 하고 있다가......  실질적 실천은  50대 중반부터 해도 늦지 않는단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모스코바를 경유해서  아르메니아 예레반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날아 올랐다.

  16박 18일의  늦은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열심히 일한 자여  더 열심히 돌아다니자.

 

 

 

 

  2018년 2월8일 이스탄불에서 돌아왔을 때,  귀국 후 시작하기로 했던 새 현장이 발주처의 요청으로 사흘전인 2월5일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귀국 다음날 부터 짐도 다 풀지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겨울을 기억한다.  산자락 응달지역에 고층의 작업장은 혹독하리만치 추웠다.  봄이 다 지나고 여름의 초입쯤에야 작업을 무사히 마쳤다.

  40도를 넘어서는 사상초유의 무더위는 목행 공단의 공장 신축현장에서 보냈다.  말로만 듣던 40도의 기온에서 연일 지붕 작업이 이어졌다.  안전화 밑창이 떨어져나가고 뜨겁게 달궈진 지붕에 앉아서 쉴곳도 없는.......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9월18일에 출발하는  늦은 여름휴가를 생각하고 출국일에 맞추어  상가 신축에 매달렸는데  9월15일 완공의 스케줄이 연일 내린 비 때문에 차질을 빚어서......  9월17일 밤까지 겨우 작업을 모두 마쳐 완공을 하고,  부랴부랴 다음날 아침 공항으로 겨우 떠나게된 험난한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다.

 

 

 

             9월 18일에서  10월 5일 까지  나는 자유인이다.

 

 

 

 

 

 

 

 

 

 

 

 

 

 

 

 

 

 

 

 

 

      타마니안의  캐스케이드

 

 

 

   예레반  오페라 하우스

 

 

 

 

 

 

 

           21세기에도 여전히  디아스포라의 눈물로 얼룩진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타마니안 이라는 위대한 건축가에 의해 탄생한 예레반은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신으로 부터 깨끗한 물과 푸른 숲을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도시.

 

 

 

 

 

 

 

 

 

 

 

 

 

 

 

 

 

 

 

 

   국경 너머의 갈 수 없는  아르메니아의 영산   아라라트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코트비랍

 

 

 

 

 

 

 

 

 

          서기 301년  인류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세계 1. 2차 대전의 틈바구니에서  소련과 오스만 투르크(터키) 사이 강대국간의 불공정한 협약에 의해서 지금의 영토보다 더 큰 땅을 터키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백오십만명에 달하는  대학살극과  백만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이란의 국경을 넘어야 했던 현대사의 비극을 잉태한 아르메니아.

  저들은 지금도  아라라트 산과  터키의 트라브존에서 남동부의 반에 이르는 광대한 아나톨리아의 비옥한 평야가  자신들의 땅임을 기억하고 있다.

  코트비랍 사도교회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민족의 영산인 아라라트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국경의 철망 넘어로  만년설을 머리에 쓰고있는  아라라트가 보인다.

 

 

 

 

 

 

 

 

 

 

 

 

 

 

 

 

 

 

   에치미아진의  성모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기념비

 

 

 

     비밀을 간직한  에치미아진 고대유적

 

 

 

 

 

 

   인류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의 고대 수도 에치미아진에 처음 지어진 성모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방문한 카톨릭의 교황 바오로 2세는 종교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억압받던 피지배자의 종교에서  로마에 받아들여지면서 지배자의 종교로 전락한 갈등으로  초대교회가  카톨릭과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사랑과 평화를 으뜸으로 치는 종교게에서  오히려 배려와 타협과 화합이 더 어려운것은  세속의 눈으로 보아도 참으로 안타까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트빌리시의  나리칼라 성채 야경.

 

 

 

   트빌리시 올드시티 전경

 

 

 

 

 

    '카프카스 산맥의 장엄함과 그곳 사람들의 낭만적인 기질이  방황하던 나를 작가로 바꾸어 놓았다'  고 막심 고리키는 회고했다.

  푸쉬킨과 톨스토이가 사랑한 도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트빌리시는 여전히 사랑과 낭만이 넘쳐흐른다.

  누구나 코카서스 지방을 여행하게 된다면  여기 트빌리시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될것이다.

 

 

 

 

 

 

 

 

 

 

 

 

 

 

 

  보르조미의 명물  케이블카

 

 

  천연 탄산 광천수의 고장 보르조미

 

 

 

 

 

 

 

  구 소비에트 연방에서 출세의 척도는 바로  '집에서 보르조미 광천수를 식수로 쓰고 있는가?'

 

 

  소련 연방의 유명한 특산물 하면  몰도바의 푸르카리 와인,  몰도바의 그빈트 코냑과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코냑.  하지만 이 모두를 합친것 보다 독보적으로 유명한 것이  조지아의  보르조미 탄산 광천수.  여전히 조지아의 3대 수출품목 중 하나이다.

 

 

 

 

 

 

 

 

 

 

 

 

 

 

 

  고대 동굴도시  우풀리스케

 

 

 

  지하 동굴도시의 비밀통로

 

 

 

 

 

 

    지진으로 지붕과 외벽이 무너져내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동굴도시  우풀리스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선사유적지에서 인류 기원의 수수꺼끼를 풀어나가보자.

 

 

 

 

 

 

 

 

 

 

 

 

 

   한반도에 분단의 38선을 그은 장본인 스탈린의 고향은  조지아의 고리

 

 

 

  무너진 성채아래 참혹한 모습의  십자군 원정대 조각상이 전시되고 있다.  너무도 처참한 모습이다.  왜?

 

 

 

 

 

  사회주의 정책노선에 따라 스탈린은  출생지인 조지아(고리)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조지아 사람들은, 그리고 고리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지도자 당서기장이 된 스탈린이 적어도 고향을  모스코바 정도로는 성장시켜줄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는 어긋났다.  스탈린은  조지아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조지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스탈린을 저주했다.

  구 소련이 몰락한 지금........  세상에서 유일하게  스탈린을 기리는 기념관이 고리에 있고,  싫든 좋든  역사속에서 소련을 만나보려는 사람들이  고리로 몰려 온다.  죽은 스탈린이 박물관 입장료를 조지아에 벌어주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룸스호텔 테라스에서 올려다 보는  카즈베기 산(해발 5.040 미터)

 

 

 

  카즈베기 마을  뒷편의 바위산도 3.000미터급 높이를 자랑한다.  그저께  바위산 위로 눈이 내려 쌓였다.

 

 

  덕을 쌓아야 볼수 있다는 완벽한 카즈베기산의 일출모습.

 

 

   트리니티 사메바 성당.

 

 

 

    코카서스를 찾는 여행자들의  가장 큰 로망은  당연히  여기 카즈베기산의 멋진 일출.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한 점 구름없이 맑은날  카즈베기의 만년설을 뒤집어 쓴 모습만으로도 영원히 기억에 남을진 대,  그 위로 찬연한 황금을 뒤집어 쓴 또 하나의 카즈베기를 만날 수 있다면..........

      카즈베기 마을(해발 1.700미터)에서  산자락 위의  성 삼위일체 교회(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 해발 2.200미터) 까지 다녀오는 환상의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

         현지인들은  그냥 '트리니티 사메바 성당'이라 부른다.  나도........

 

 

 

 

 

 

 

 

 

 

 

 

 

 

 

 

 

 

 

 

   데이비드 가레지 수도원.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젠의 국경을 연실 넘나드는 트래킹 코스.

 

 

 

 

 

 

 

 

 

 

 

 

 

 

 

     황량함 뿐인 고원지대의 한적하고 외진 구릉에 들어선 수도원  데이비드 가레지.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찬 바람소리와 황량함이 전부인 멀고도 외진 국경지역.........

        누군가가 앞서 지나간 흔적을 뒤쫓는 것이 길이다.  그게 전부다.

         그나마 눈이 내리면  길이 모두 사라진다.

           이제 곧 첫눈이 내리면........  내년 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고,  누구도 나갈 수가 없다.  길이 새로 생길때까지........

               데이비드 가레지가 가진 천상의 트래킹 코스는 황홀한 첫 입맞춤 같은 시간이었다.

                  어떤 인연이 있어서 내가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까?

 

 

 

 

 

 

 

 

 

 

 

 

 

 

 

 

 

 

 

 

 

   카파토키아의 일출

 

 

   아마도 지구상에선 가장 유명한  카파토키아 벌룬 투어.

 

 

 

 

 

 

 

 

 

 

 

 

 

 

 

 

     터키 방문 다섯번째 만에  겨우 찾아간 카파토키아.

    왜 나는 그동안 카파토키아를 외면해 왔을까?

 

         장난꾸러기 조물주의 애교스런 놀이터와 같은 카파토키아.

        죽어라 걷고 또 걷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은 그 깊은 골짜기의 끝까지........

        떠나오는 날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카파토키아에 더 머물렀었더라면  내 여행은 어쩌면 질식해서 죽어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카파토키아는 딱 고만큼이었으면 됐다.

          카파토키아를 떠나는 순간부터 내 여행은 다시 풍성해 지기 시작했다.  난 이런 자유롭고 자연스러움이 좋다.........

 

 

 

 

 

 

 

 

 

 

 

 

 

 

 

 

 

 

 

     이즈닉의 아야 소피아 성당.

 

 

 

 

 

 

 

 

 

 

 

         아주아주 멀고 작고 보잘것 없는  기독교의 성지  이즈닉. 

 

 

      12시간 야간버스를 타고 내려서 다시 작은 버스로 갈아타고 1시간을 달려서 찾아간  아주 작은 도시 이즈닉.

      이 지역 전체를 통 털어서 유일한 동양인  나.

      기독교 성지이긴 하나  흔한 성지순레자들도  다녀가는 사람은 극히 드문 아주 외진 마을.  학자나 목회자가 포함된 어쩌다 순례자가 간혹 다녀가는 성지.

         이즈닉은 아주 소박하고  한산하면서도 여유로운 도시였다.

          터키 무슬림들의 모습을 아주 천천히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

           기독교 역사에서 대 전환을 가져온   아주아주 중요한 사건의 현장이었음에도......  이런곳은 여행자들이 잘 찾지 않는다.

            지금은  '이즈닉'이라 부르지만........  비잔틴 시대까지의 지명은  '니케아'로 불리던 곳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첫 도읍지  부르사.

 

    이스탄불 만으로는 다 채워지지 못했던  비잔틴과 오스만 투르크의 나머지 부문을 찾게해준  전통의 도시  부르사.

     깨끗하고  활기차고 사랑스런 정말 멋진 도시.

       불루 모스크와  아야 소피아가 없을 뿐......  하나 더  바다가 없을 뿐이지.......  이스탄불에 뒤질게 하나도 없는 도시.

        터키 이슬람의 자부심은   그 어느곳도  부르사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들은 옛 율법을 따라 그대로 생활한다.

         여행자인 나로서도 감히 반바지 차림으로 나돌아다닐 엄두초차 내지 못한.........  거의 유일한 도시.

          술집도  술을 파는 상점도 술을 마시는 사람도 없는  NO 알콜의  이슬람 율법 도시  부르사.

           터키에서 꼭 다시 가보고픈 도시 넘버 1........  부르사.   그곳에서 나는 마냥 행복했다.

 

 

 

 

 

 

 

 

 

 

 

 

 

 

 

    이스탄불 하이다르파샤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선정된 바 있다.

 

 

   여전히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아야 소피아 성당.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지붕과 첨탑을 보수중인  불루 모스크.

 

 

 

 

   갈라타 타워의 위용과 아름다움은 늘 한결같다.

 

 

 

   터키의 세종대왕.  술레이만 대제 사원.

 

 

 

   미마르 시난의 묘.

 

 

 

 

 

 

 

 

     이번 이스탄불 방문은  오로지  미마르 시난을 제대로 한번 만나보기 위함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역사상 최고의 건축가이자  술레이만 대제의 최측근  미마르 시난.

      그는 과연 행복 했을까?

 

        (데브쉬르메) 라는 태생적 신분의 한계를 가지고 살아야 했던 미마르 시난.

            그의 지위는 재상 반열에  까지 올랐으나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일상적인 그의 모습과 행적들.......

              일생을 통해 그가 이룩한 그 어마어마한 업적들.........  눈부시게 아름다운 건축들........

                누구보다 술레이만 대제를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고  충성을 다하고.........  그만큼 술탄의 총애를 받았었건만.......

                  혹시 미마르 시난은 지금  지나온 자신의 행적들을 땅을치며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렇게  2018년 나의 가을 여행은 끝이 났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것은 곧  2018년 12월 말,  또는 2019년 1월이 될지 모르는 나의 다음 여행에 시작이기도 하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발목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여행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아울러 즐겁고 유익하고 행복했던 시간으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다시 현실 속의 일상으로 돌아가 더욱 열심히 생활해야 한다.

  이 순간까지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에 더욱 노력을 해야하겠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여행에 있었던 세세한 이야기들은  차차  여행기로 다시 정리를 할 생각이다.

  (알 럽 트래블)을  아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주위의 내 친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방법으로  조금씩 인생을 낭비하는 방법도 터득해 가고,  여행을 통해서 삶의 다른 면도 들여다 보면서  여유와 평안을 찾아보기를 바라면서............

 

 

 

 

 

                                                                                           -----  2018  가을 여행을 마치면서.........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