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할때나 국내에 있을때나 나는 걷는것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고나면 이상하리만치 걸어다니는 것에 지나칠 정도로 열중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때론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되묻곤 한다.
어디 그 뿐인가?
'그래. 교통비 절약해서 여행에 좀 보탬이 되셨습니까?'라고 자신에게 다소 비아냥쪼의 농담을 건네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절대 아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여행중에서 준비해간 예상 경비의 65% 이상을 쓰고 돌아와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자유여행의 장점을 살려 나름의 여행을 즐기다 보면 언제나 예상보다 경비는 훨씬 줄어 든다. 바로 직전의 동유럽 여행에서 예상 경비의 45% 정도에서 18일간의 여행을 마쳤다. 당장 떠나서도 한 3주 정도는 유럽에 더 체류할 정도의 비자금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죽기 살기로 걷는다.
나는 걷는것에서 운동의 즐거움을 느끼는 편은 절대 아니다.
그냥 걸으면서 작고 사소한 것에서 부터 깜짝 놀랄만한 일들을 자주 만나는 편이고, 많은 풍경들과 많은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아주 즐기는 편이다.
그런가 하면 아주 많은 생각의 시간을 걸으면서 갖는다. 그리고 퍼즐 조각처럼 편린으로 가지고 있던 많은 이야기와 역사와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서로 연결하고 순서대로 나열하는 그런 작업도 걸으면서 즐긴다.
그런 재미로 나는 항상 죽어라 걷고 또 걷는다.
'에치미아진 사도교회' '가야네 교회' '마리안느 교회' '히립시메 교회' '현충탑' '문화예술 극장'을 보고 이제는 '즈바르트노츠 고고유적군'을 보러 가야겠는데........ 여기서 거기까지 거리가 5km 되는데 어떻게 갈까?
버스는 아직 20분 기다려야만 하고, 점심은 건너서 배가 쫄쫄 거리고, 뙤약볕 아래서 여적 돌아다녔는지라 힘에 겨운 마당에 다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5km를 가야한다니......... 헐.
'지까짓께 멀어여 얼마나 멀겠어? 가다보면 나오겠지?'
길 위에서 걷다가 죽을 팔자여...........
할아버지들 놀이(장기) 하시는거 구경하다가, 옛날 구닥따리 방식으로 집 짓고 있는거 구경도 하다가, 여인네들 버스정류장에 모여서 방금 따가지고 와서 풀어놓은 피망을 사고 파는 모습이 신기해 구경을 한다.
그나저나 내가 걷고 있는 이 방향이 맞는지가 궁금해 물어보려는데 대부분이 어르신들이고 영어가 통할 사람이 없어보여 망설일 즈음에 버스에서 자매가 어머니랑 내려서 피망을 사려고 다가오는데....... 큰 딸이 무지무지 이쁘다. 전형적인 아르메니아형 미인이다. 아르메니아엔 참 미인이 많다. 여기저기 넘쳐나는게 이쁜 여자들이다. 우리나라 톱 클라스 미녀들이 여기 아르메니아에 오면 엄마 도와서 화장실 입구에서 돈 받고 앉았다. 새벽에 낙엽쓸고 있는 40줄의 청소부아줌마도 우리나라에 오면 화장품 광고 찍겠더구만.......
길을 물었는데 어찌나 수줍어 하는지........
세 모녀가 앞서 길을 가고 같은 방향이기에 뒤따라가는 모양이 되었는데 두 자매가 연실 돌아보고 웃고 수줍어하고를 반복한다. 그러더니 큰 딸이 다가와 커다란 사과 하나를 건네준다. 사진 찍는것은 한사코 거절........
한 1km쯤을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 어느 골목에서 손을 흔들어 주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에구. 에구 이넘의 세월이 웬수여. 한 35년만 젊었으면 어떻게 해보는건데............. 징말루 예뻐라.
예쁜 아가씨가 준 사과라서 그런지 너무너무 맛있다. 인생 사과라 할까?
다시 걷는다.
지금 내가 걷는 이 도로가 아르메니아의 고속도로다. 나는 지금 고속도로를 걷고 있다. 가축도 지나 다니고 가끔 무단횡단도 나오는 고속도로.
햇쌀은 너무너무 따갑고 아스팔트 도로는 푹푹 찌고 차들은 쌩쌩 지나간다.
'뭔놈의 아르메니아 5km는 이렇게 먼거여?'
목이마르면 잠시 고속도로에서 내려서서 포도밭으로 간다. 수확은 다 끝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빼놓고 수확한 실한 포도가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문제가 하나도 없다. 그냥 뚝 따서 들고다니며 입안에 털어 넣으면 된다. 여기서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천연 무공해다. 농약쳐서 재배한 포도는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농약 잔재물을 없앨 수 없고, 농약이 미세하게 나마 잔류한 포두주를 사서 마실 소비자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과일에 소독이란게 없다. 그냥 따서 입에 넣으면 된다. 죽어도 좋을 만큼...... 꼭 그만큼 달다. 과즙과 향이 엄청나다.
마침내 즈바르트노츠 고고유적군에 도착했다.
유적이고 뭐고 지치고 배가 고파서 매표소 옆의 편의점엘 먼저 들렸다. 달랑 한군데 뿐인 편의점엔 아가씨가 둘이다.
맥주를 한캔 사서 계산을 하려는데....... 이 아가씨들이 나랑 눈을 마주치질 못한다. 어찌나 수줍어 하는지.......
한국인 여행자들이 무척이나 많이 이곳에 다녀간다. 편의점이 딱 한군데이니 동양인을 수없이 접해보았을텐데......... 나에게 왜 이러지?
하도 귀여워서 사진 좀 찍겠다니까 허락은 해주는데........ 여전히 똑바로 나를 쳐다보지를 못한다.
'어디를 가나 이넘의 인기는 식을줄 모른다........ ㅎㅎㅎ 에고 무심한 세월아........ 낼 모레면 환갑이라니.........ㅋㅋㅋㅋㅋ'
'내가 젊었을때 날 만났으면 아가씨들 정신줄 놓았어야 했을꺼여.......... ㅋㅋㅋㅋㅋ'
'못 믿겠다고? 담에 우리아들 보내볼께. 내 젊은날의 복사판이여.......... ㅎㅎㅎㅎㅎ'
내가 지금 걸어 온 이길은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가장 가깝고 빠른 길이다.
아르메니아는 물론 소아시아지역의 척추에 해당한 다고 하겠다.
아래 남쪽으로는 터키와 연결되고 위로 북쪽으로는 유럽의 동쪽인 발칸반도와 연결되는 고대로부터 아주 중요시 되던 교통로이다. 이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곁가지를 치면 이란으로 향하는 길이 연결되고, 그 위로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가면 바로 러시아 땅이다.
지금 내가 걸어 온 바로 이 길을 통해 역사속의 유명한 몇사람이 지나갔다.
이 길을 통해 지나간 첫번째 역사적 인물은 바로 '알렉산더 대왕' 이었다.
그가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이 길을 지나 이란지역으로 들어갔다. 아르메니아의 숱한 전설은 알렉산더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기억은 '바람처럼 스쳐지나간 영원한 영웅'으로 비교적 간략하게 기억되고 있다. 알렉산더는 이곳에 전혀 머물지를 않았다. 다리우스 페르시아 왕을 뒤쫓느라 그냥 잠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전설속에서도 영원히 각인될 만큼 아주 강력한 영웅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남기고 지나갔다.
아르메니아는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이다. 이 땅에 살아있는 구세주가 내려왔다가 부활하였으며 언제고 다시 올 구세주의 재림을 믿는 신앙이다. 이는 로마나 조지아도 같았다.
기독교가 처음 공인된 301년의 전후 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다시 올 구세주가 지금 많이 보는 '예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는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고 창이나 칼을 치켜든 불세출의 영웅'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알렉산더의 모습이었다. 영락없는 알렉산더의 모습에 얼굴뒤로 구세주의 광배를 그려 넣었다. 저잣거리에서 그림이나 점술을 보는 서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알렉산더 같은 영웅의 모습으로 구세주가 이 세상에 다시 내려와 모든 죄악을 쳐부수고 인간을 영원히 구해줄 것이라 믿었고 , 그리하여 많은 그와같은 그림들을 남겼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에선 알렉산더 형상의 구세주 그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두번째로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바로 '십자군 원정대' 였다.
제1차 십자군의 경우 전체 6만여명의 원정대 중에서 약 4만의 군대가 육로를 따라 이곳을 지나갔다. 2만의 군대와 보급품은 이탈리아 남부의 메시나 항구를 통해 해상으로 이동했다.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로마에서 출발해 발칸반도의 산악지대를 넘어 온 십자군 원정대는 모두가 함께 모여서 이동하는 군대가 아니었으며, 출신지역별로 개별 출발을 해서 같은 이동로를 가지고 있었다. 은자 피에르(거짓 수도사)가 급조해서 먼저 떠났던 '민간십자군'이 이동을 하면서 이곳 저곳에서 파행을 거듭하자, 비잔틴의 군대가 출동해서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성지탈환을 위해 떠난 사람들이 시작과 동시에 저희들끼리 싸움을 벌인것이다. 민간십자군은 붕괴되었고, 비잔틴은 정식 십자군의 이동에 등한시 하게 되었다. 조지아를 거치고 아르메니아 평원을 지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여정에서 여러 지역민들과의 다툼, 보급의 부실. 이곳 고원지대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없는 고행의 길과, 무더위와 참혹한 겨울추위로 이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을 때는 겨우 2만오천명의 군대만이 살아남아 있게 되었다. 약1만 오천의 군대가 소규모 전투에서 죽거나 중상을 입었거나 탈영했다.
그만틈 이 길은 가깝고도 먼 길이었다.
그럼에도 차후의 모든 십자군 전쟁에서도 이 길은 비록 비중은 점차 줄어들게 되지만 여전히 중요 이동로이자 보급로로 쓰여진다. 이번 여행에서 조지아의 고리를 방문하였을 때, 십자군이 쌓은 무너진 성채 아래로 참혹한 모습으로 심하게 부상마져 입은 십자군들의 거대 조각상들이 둥굴게 원탁의 모양으로 앉아서 쉬고있는 거대 조각군상들을 만나게 되었다. 실패한 십자군 전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아주 의미심장한 장소였다. 제법 많은 시간을 나는 그곳에 앉아서 그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누었었다.
'실패한 치욕스런 십자군 전쟁.'
세번째는 유럽 전체의 엄청난 수난과 치욕의 기록이다.
1236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지역을 술탄 모하메드가 다스리던 호라즘 왕국에 동방(오리엔트)으로부터 대상단이 들어왔다. 수많은 비단과 온갖 향신료와 도자기와 보석들을 실크로드를 통해 가지고 온 대상들은 정식 교역을 하고자 온 것이다. 술탄은 그들이 가지고 온 모든 물건들이 무척이나 탐이났다. 하지만 그 물건들을 모두 사들이기에는 황금이 부족했다. 결국 술탄은 저질러서는 안되는 불의를 저지르고 말았다. 대상들을 모조리 처참하게 살륙하고 물픔을 모두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들 상단의 죽은 주인이 바로 몽골인 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점원이 곧장 몽골의 왕에게 달려가 고해바쳤다. 왕은 대단히 분노했다. 그 왕이 바로 칭기즈 칸 이었다. 칸은 곧바로 자신의 장남인 주치에게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술탄 모하메드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칸의 충복 수부타이와 제베까지를 딸려보냈다.
술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아시아대륙의 급변하는 정세와 그 핵심인물인 칭기즈 칸에 대해서 너무도 몰랐다. 몽골의 군대가 유라시아 지역으로 넘어왔는데........ 이들은 지구상에 이제까지 없었던 싸움귀신들 이었다. 악마의 사신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지않으려면 도망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몰랐다. 자신이 죽기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술탄은 죽어라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바로 이곳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쳐 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시기가 바로 제4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여전히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대치중인 휴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몽골이라는 어마어마한 군대 앞에 이스람도 기독교도 제 살길을 모색하던 시기에 도망쳐 오는 술탄 모하메드를 구원해줄 이슬람 세력이 없었다. 아울러 기독교측은 괜히 화근덩어리를 끌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할 눈치가 아니었다. 갈 곳은 한군데 밖에 없었다. 술탄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서 시베리아의 툰드라 숲속으로 도망쳤다. 드넓고 광대한 러시아의 삼림 숲속으로 도망쳤다. 혹독하고 긴 겨울의 추위가 추격에서 멀어지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몽골의 자연은 시베리아보다 혹독하면 혹독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삶을 이어온 몽골군에게 시베리아의 겨울은 별반 장애가 아니었다. 추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금나라를 치던 칭기즈 칸이 사망했다. 추격대는 몽골로 서둘러 돌아갔다. 예상치 않게 장남 주치가 아닌 삼남 오고타이가 새로운 칸에 즉위했다. 주치는 실의에 빠져 유라시아로 돌아온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오고타이 칸은 칭기즈 칸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다시 명령을 내렸다. '술타 모하메드의 목을 가져다 칭키즈 칸의 무덤에 바치는 명령은 아직도 유효하다' 라고. 그 명령을 죽은 주치의 둘째아들 바투에게 하달했다. 바투의 추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쪽 연해주(불라디보스톡)에서 북극지방으로, 다시 남쪽으로 죽어라 도망쳤다. 바투는끝까지 추격했다. 이 와중에 엉뚱하게도 러시아의 모든 도시와 민족들이 몽골에게 점령되었다. 그리고 끝내 바투는 헝가리 지역에서 술탄 모하메드의 목을 잘랐다. 이 엉뚱한 추격전의 결과로 바투는 러시아 전역과 폴란드. 헝가리를 복속하고 나라를 세우고 캅차크 칸에 즉위했다.
이어서 바투는 유럽 정벌에 나선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국경까지 진격했다.
온 유럽이 발칵 뒤집혔다. 성지탈환의 미명아래 이슬람을 무자비하게 침공했던 그들이....... 듣도보도 못했던 동아시아의 유목민족에게 무참하게 짖밟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몽골군은 지옥의 사자들이었다.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유럽은 바투의 맘 먹기에 따라서 페허속의 고대 선사시대로 돌아갈 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쯤에서 또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2대 칸이었던 오고타이가 죽었다. 몽고는 쿠릴타이(귀족회의)를 열고 새로운 대칸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 바투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인 주치가 장남임에도 오랜 전통인 '장자 승계권'에서 밀려났던 한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정복을 일단 미룬 바투가 몽골로 돌아가 정통성을 앞세워 '장자 승계권'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바투의 생각과 다르게 쿠빌라이에게 대칸이 돌아갔다. 이후로 몽골 내부의 왕위 쟁탈전이 계속 이어지면서 풍전등화의 유럽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몽골은 원나라를 세웠지만 왕족들은 둘로 셋으로 넷으로 쪼개져서 각자가 왕국을 세우고 대립을 계속해 갔다. 바투가 점령한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도 여러개의 소국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러시아와 헝가리와 폴란드는 없어졌지만......... 세상은 다시 기독교 제국과 이슬람제국의 형세로 나뉘어져서 5차 6차 십자군 전쟁이 이어지게 된다.
그때, 바로 여기 이 아르메니아 실크로드에 장사를 하는 형제가 어린 조카 하나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베네치아 상단의 장사꾼으로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의 아시아와 교역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번 목적은 아시아대륙을 지배하는 몽골제국의 대칸을 만나서 교역독점권을 베네치아 상단이 가지게끔 거래를 트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험난한 장도의 여정에 따라나선 어린 조카의 이름이 바로 '마르코 폴로' 였다.
이 길은 바로 '마르코 폴로(1254~1324)'가 몽골로 향해서 지나가던 길이다. 훗날 20여년을 훌쩍 넘겨서 그가 다시 이 길을 통해 유럽으로 돌아왔던 길이기도 하다. 동서양의 문명이 오갔던 대단히 중요한 길이었다.
7세기 중엽 아르메니아는 이란지역을 근거로하는 페르시아 샤산왕조에게 국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기고 있었다. 여전히 국경의 여기저기에선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등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로마제국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폄이었다. 양대 제국의 틈새에서 겨우 명맥이나마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는 바로 그런 형국이었다.
서기 643년 아르메니아의 왕 '카만토스 네르시스 3세(Camantos Nerses III)'는 수호성인 그레고리(Gregory the Illuminator)에게 아르메니아를 지켜주십사하고 기도를 올리기 위하여 아자트 계곡으로 향하려고 성을 나섰다. 호위군사들을 이끌고 한 2km쯤을 내달렸을까?
구름 사이로 한줄기 빛이 섬광처럼 내려비치기 시작하면서 그 빛줄기를 따라 성 그레고리가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네르시스는 즉시 말에서 내려 수호성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성자 그레고리는 네르시스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라고 손짓을 보내왔다. 네르시스가 일어서서 고개를 들었을때, 구름 사이로 내려비치던 빛줄기가 사라지고 그레고리의 모습도 온데간데 없이 보이질 않았다.
네르시스 3세는 그것을 '하늘이 자신과 아르메니아를 굽어살피는 계시'라고 받아 들였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완전해 폐허로 변한 황량하기만 한 공터였다.
'이곳에다가 그레고리 성인을 위한 교회를 지어야겠다.'
'즈바르트노츠 대성당(Zvartnots Cathedral)' 이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성당 건축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것은 이 시기에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와 오랜 기간동안 전쟁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652년이 되어서야 성당 건축은 완성되었고 성 그레고리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네스시스3세는 왕의 궁궐이 있던 아르메니아의 옛도시 Dvin을 페르시아에게 빼앗겨 점령당하게 된다. 겨우 왕궁을 빠져나온 왕비와 태자와 귀족들이 머물곳이 없어진 것이다. 네르시스는 바로 이곳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에 이어붙여서 궁궐을 짓도록 명령했다. 괸개시설을 착공해서 상류의 강에서 물을 끌어왔으며, 주변에 포도나무와 사과나무 같은 유실수를 심었다.
이오니아식의 볼륨감 있는 석주와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석주와 다양하고도 풍성한 덩굴장식의 과실들을 조각해서 치장한 성당의 디자인은 다분히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의 건축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여진다.
이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은 서기 930년 지진에 의해서 무너졌다고 전해져왔으나 20세기에 들어 복원 작업을 진행하면서 살펴보니 단지 지진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발굴복원 학자들에 의하면 서기 930년 전후에 건물이 무너질만큼의 강진이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km 남짓 가까운 에치미아진 사도교회의 경우만 보아도 930년 전후에 전혀 손상된 기록이 없다.
하여, 이 순간까지도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한 때는 페르시아 멸망 후 이곳을 잠시 차지앴던 아랍인들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의문을 가졌으나, 그 당시 아랍인이 이 건축을 파괴했다는 기록도 번혀 남아있지 않았다. 이교도간의 전쟁에서 영토를 뺏고 빼앗는 경우는 다반사겠으나, 종교적 건축물까지 훼손한다면 훗날 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들도 했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 들어서 극히 소수의 학자가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아랍의 군대(640명의 아랍인들 이라고 기록됨)가 643년에서 656년 사이에 남 코카서스 전역을 휩쓸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의 대부분 지역과 조지아의 일부, 그리고 아제르바이젠의 일부까지를 휩쓸며 돌아다녔다. 그 시기에 즈바르트노츠를 점령했었던 것이다.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스2세가 서둘러 아르메니아에 지원군을 보내왔다. 코카스스 남부가 아랍에게 점령당하고 나면 비잔틴의 국경이 그만큼 넓어지고 위협이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연합군은 마침내 아랍군대를 패퇴시켰다. 비잔틴군의 적극적 협조로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은 보수되었고, 궁성은 661년에 비로소 완공되었으며 그 해에 네르스3세가 사망했다.
아랍의 짧은 점령기간 중에 건축술에 조예가 깊은 아랍군인들이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을 건축학적으로 면밀히 파악한 후에....... 하중을 지탱하고 있는 치명적인 구조상의 핵심 돌조각 몇개를 은밀하게 빼내서 제거하였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부작용을 일으키다가 별거아닌 아주 미미한 지진에 와르르 붕괴하였을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한 상태다. 하지만 어떤 물증도 없다. 거기다 자칫 종교적 파장을 고려해서........ 아뭏튼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그 이론을 제기한 학자들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 상황에서 그렇다면 비잔틴 군대가 즈바르트노츠에 손을 댔을까? 아님 원래대로 아랍군대가 손을 댔을까?
또 하나의 가설은.......... 즈바르트노츠에 대한 기록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웅장한 대성당의 위용은 가히 사도교회(에치미아진 대성당)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성한 초대교회 에치미아진 사도교회가 훗날 생겨난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일 정도였다는 말이 된다. 이 웅장한 대성당이 왕궁과 붙어있고 군왕이 살고 있다. 신성한 대성당는 아르메니아 교회를 총괄하는 대주교가 살고 있는데 갑자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신실하신 신도께서 어느날 .......... (어디까지나 가설임. 소설가는 이런 상상을 할 자유가 있다.)
비잔틴제국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652년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스2세가 '즈바르트노츠 대성당' 준공 기념식에 직접 참석했다고 적혀있다. 대성당의 건축에 감동한 콘스탄스는 콘스탄티노플에도 이런 교회를 짓고 싶어서 즈바르트노츠를 지은 건축가를 대동하고 귀국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건축가가 지병으로 사망하여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하여, 아르메니아 역사상 가장유명한 건축사학자인 토로스 토라마니안 (Toros Toramanian)은 652년을 '즈바르트노츠 대성당과 궁전'이 완성된 해로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의해서 오랫동안 의문에 쌓여있던 이 건축 잔해더미가 '대성당과 궁전'의 터였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는 오랜 발굴기간과 연구를 통해 이곳의 대성당이 매우 독특한 형태의 3층 원형건물로 뾰족하게 치솟은 쿠풀라(돔)가 얹혀있는 교회건물임을 밝혀냈다. 토라마니안은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지금 현장에 남아있는 모양은 어느정도 토라마니안에 의해 복원이 이루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고대의 건축술에 기인하여 볼 때, 토라마니안의 학설은 지극히 비논리적이라는 이유였다. 고대의 건축 설계자의 입장과 토라마니안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공사는 중단되었고 토라마니안이 사망했다.
즈바르트노츠는 이처럼 많은 부분이 여전히 미스테리 투성이로 남아있다.
아르메니아 고대 교회건축의 원형은 정사각형 바탕 위에 원하는 높이만큼의 기둥을 올려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모양이 표준이었다.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의 경우는 아주특이하게 4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중간에 세운 기둥 위에 돔이 놓여 있는 아주 희귀한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네개의 정사각형으로 지름 55미터 길이의 기본층을 만든 후에 그 위에 다시 지름 38.7미터 높이의 인공원형을 만들어 올렸다. 전체 높이 45미터의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1층은 32면체의 다각형으로 외형을 만들었으며, 2층은 16면체이고 천장은 원뿔 모양의 쿠풀라(돔)으로 이루어졌다.
즈바르트노츠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건축물이며 동시에 수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건축가의 전통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아치와 기둥의 복잡하지만 미묘한 어울림 위에 예술적 이미지와 대담한 공간 배치에서 즈바르트노츠는 세계 건축사의 뛰어난 기념물로, 예술과 공학 사상의 높은 단계의 발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건축 아이디어는 나중에 세상에 널리 퍼져 새로운 건축분야의 창조와 새로운 예술 작품들로 발전되었다.
풀밭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조각장식을 보노라면 대부분의 장식이 꽃이며 과일들이다. 비록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파편들이지만 페턴이 선명하고 표현력이 풍부하며, 매우 다양한 종류들이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하게 수놓아져 있다.
대성당 건물의 외벽을 장식했다가 떨어져나간 조각에서 무엇인가 도구를 들고있는 사내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박물관 소장)
누구일까?
발굴 초기 학자들은 그것이 대성당을 건축하게 한 '카만토스 네르시스 3세(Camantos Nerses III)'의 초상이라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고학이나 역사학자가 아닌 미술가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각의 인물은 선명하지는 않지만 얼굴과 옷이 상당히 사실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자연스런 자세에서 느껴지는 조각상 인물의 개인적일 수 있는 특징들을 가만히 엿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손에 건축도구를 들고 무엇인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대성당을 설계하고 지은 건축가의 초상으로 본다. 이름은 비록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건축가 무명씨'가 슬쩍 장난삼아서(천재들의 애교) 대성당 건축에 자신의 싸인 쯤으로 남겨놓은것은 아닐까?
대성당의 테라스에 이어붙여 지어진 형상의 궁전은 흔히 '네르시스 궁전' 이라고 불렸으나 발굴 유물에 드러난 정식 명친인 '카톨리코스의 궁전' 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하겠다.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본 딴 나무지붕을 얹은 궁전은 네르시스3세의 집무실과 침전은 물론 신하들을 접견하고 회의를 하는 커다란 홀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건물은 7세기 당시로서는 아르메니아를 통털어 가장 크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아케이드를 통해 교회와 연결하였고, 개방된 거대한 홀과 로마시대 목욕탕은 물론 세개의 방에 커다란 항아리가 22개나 놓인 와인 저장고까지 갖추고 있었다. 로마목욕탕은 토관을 이용해 온탕과 냉탕은 물론 증기탕과 별도의 탈의실과 휴계실까지 갖춘 오늘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은 아르메니아 화페 100 ARD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절대적 국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이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도 많은 미스테리를 가지게 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무덤이 없다.
아직까지도 그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를 인류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 '에치미아진 사도교회'와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을 만들게끔 하였으며, 영원히 아르메니아인들의 가슴속에 살아남아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 그레고리(Gregory the Illuminator)' 이다.
그는 순교자가 아니다.
그는 죽는 날까지 기독교를 전파하던 수도사였기에 성인으로 추대된 이후에도 '계몽자 그레고리'로 불리고 있다.
일전에 이미 설명한 바 대로 일설에는 에치미아진 사도교회에서 대주교로 봉직하다가 사망했다는설과, 끝내 아자트 계곡의 게하르트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영위하다 사망했다는설 등 이야기가 분분하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천수를 누리다 수명이 다해 자연사 하였음에도 정작......... 그레고리의 무덤이 없다.
왜?
그건 아무도 모른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요하네스5세'가 남긴 일기에 따르자면........ '4개의 기둥이 있는 땅바닥에 둥그런 구멍 아래 그레고리가 묻혔다'고 썼다. 바로 즈바르트노츠를 가리키면서 남긴 말이다.
토러스 토라마니안과 학자들은 이 유적이 '즈바르트노츠 대성당'임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학자들 뿐만 아니라 온 아르메니안들의 지대한 관심속에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제야 비로소 수호성인의 유해를 대할 수 있게되나 보다' 하면서 열광했다. 실로 '국가의 재탄생'이라 까지 여겼다.
하지만 끝내 유해는 나오지 않았다.
어찌된 것일까?
요하네스5세가 다른 장소를 착각해서 잘못 기록한 것일까?
아니면, 이곳이 '즈바르트노츠'가 아닌것을 토라마니안이 잘못알고 발굴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중세시대에 거대도시들은 앞다투어 유명 사제나 성인에 추대된 사람들을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삼으려고 시신이며 유골들을 치열한 경쟁속에 서로 훔쳐가고 했는데, 누군가가 그레고리의 유해를 도굴해 간 것일까?
그렇다면 즈바르트노츠의 붕괴는 지진에 의한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의도적인 파괴였단 말인가?
여전히 '즈바르트노츠 고고유적군'은 많은 미스테리를 간직하고 있다.
그레고리의 무덤은 과연 어디일까?
어디 아참에 내가 한 번 찾아나서 볼까?
----- 다음 여정은 일상적인 아르메니아의 풍경을 끝으로 이제 '조지아'로 떠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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