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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21세기형 디아스포라의 눈물로 얼룩진 예레반

by 피안재 2018. 10. 9.

 

 

 

 

 

 

 

 

 

 

 

 

 

 

 

 

 

 

 

  2년만에 다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찾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낯선 여행자의 폐부를 사정없이 관통해 지나가는  스산한 첫 겨울바람처럼  무엇이라 표현하기 힘든 어떤 착잡함이 파고들어 온다.

  이게 뭐지?

  2년 전의 아르메니아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긴 어둠이 지나고 화사한 아침 햇쌀과 함께 제모습을 드러낸 예레반은  결코 지금의 이런 모습이나 느낌이  아니었다.

  무엇인가가 변했다.  딱히 어떤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무엇인가가 달라져 있다.

  선뜻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무슨 일을 격은것도 이닌데  어떤 설움 같은것이 북받쳐 오르는 느낌이다.

  예레반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슬픈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다.

  도대체 뭐지?

 

  20세기에 들어서서 철저하게 현대식 도시계획에 의해서 건설된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은  아름답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방사선 형태의 너른 도로는 사방으로 쭉 쭉 뻗어나갔고  멋과 품위를 한꺼번에 간직한 라임스톤의 근현대식 고층 건물들은  동유럽에도 이런 멋진 도시가 있다는 자랑이 생겨날 정도로 계획도시의 품격을 한단계 높여주고 있었다.  거기에다 도심의  도로를 제외한 절반에 조금 못미치는 면적이 모두 숲이며 공원이다. 그 숲과 공원 사이에는 멋진 조각상들이 어디에나 들어서 있고, 하늘로 부터 물의 축복을 받은 이 도시는  어느곳에서나 모퉁이마다 설치된 분수나 식수대에서 무한정의  먄년설이 녹아 흘러내린 청정수를 공짜로 제공받을 수가 있다.

  여행자들은 에레반을 거닐면서  여기가 프랑스 파리인가  스페인 마드리드인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2년 전에 나도 분명하게 같은 느낌으로 예레반을 여행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는데 말이다.

  '트빌리시가 더 좋아?  아니면 예레반이 더 좋아?'

  여행을 마치고 나서 주위에서 그 같은 질문을 해오면 나는 참으로 답변하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두 도시가 모두 좋았던 때문이다.  트빌리시는 트빌리시 대로  그리고 예레반은 예레반 대로 분명하게 자신의 전혀 다른 개성과 칼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2년 전과 반대로  예레반을 먼저 찾아온 것이었는데........  여행 첫날 맞이한 예레반의 새벽 산책길에서 적지않게 혼자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순간이다.  더군다나 다시 찾아온 계절과 시기까지도  2년 전과 비슷한데  이 느낌은 도대체 뭐지?

  우선 새벽을 활기차게 시작하는 현지인들 모습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길거리 간이 매장에서 커피나 차와 함께  간단하게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면서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줄어들었다.

  간이 매장이나 빵집,  작은 꽃가계,  과일가계 등 새벽부터 일찍 문을 열던 작은 점포들이 줄어들었다.

  구 소련 연방의 전유물처럼 느껴진던  사방에 어지럽게 내걸린 전선에 우산대를  걸어 잡아당기는 모습의 트롤리 버스가 텅빈 채 코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이른 새벽에  사방으로 달려나가던  시내버스의 숫자도 줄어들어 보인다.  다만 대로의 이곳 저곳에 음식물 쓰레기통을 번쩍 들어 올려 수거해 가는 커다란 청소트럭과  떨어지기 시작하는 낙엽을 쓸고있는 청소부들 모습만이 예전보다 많이 숫자가 늘어 보였다.

 

  '아!  예레반은 2년 전에 비해 오히려 급격하게 뒤로 퇴보했구나.........'

  '독립과 자유는 얻었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쉽게 편승하지 못하고  지금........  점점 더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구나.'

  그랬다.

  그런 생각과 시각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서야  아르메니아의 현실과 적지 않은 아픔이 폐부 깊숙히 전해져 들어왔다.

  건물도  공원의 나무 관리와 설치물들도  도로도........  모든 것들이  제대로 현상 유지조차 되지 못하고   보수는 아예 생각치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르메니아는 지금 현실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갈 만큼의 재정적 안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돈이 없다.

  2년 전보다도 급격하게 쇠락해진  동유럽 최빈국이 바로 아르메니아였다.

  예레반도 예전보다 생기를 많이 잃은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오! 가여운  디아스포라의 나라여...........  '신이시여.  저들을 궁휼이 여겨  다시 일어설 힘과 기회를 내려 주소서.'

 

 

 

 

 

 

 

 

 

 

 

 

 

 

 

 

 

 

 

 

 

 

 

 

 

 

 

 

 

 

 

 

 

 

 

 

 

 

 

 

 

  역사는 가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철부지 장난꾸러기의  일탈처럼 아이러니한 사건들을 곧잘 만들어내곤한다.

  이 아름다운 도시 예레반의 탄생에는  두 명의 아주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이런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는 예레반이라는 도시의 탄생에 출발이자 주역이었으며,  또 예레반을 포함한 아르메니아 전체를 지금처럼 빈곤의 수렁으로 매몰차게 내몬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격고있는  국가적 절대빈곤은 모두 그의 실패한 사회주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45년 2월3일 크림반도에 있는  흑해 연안의 도시 (얄타)에 3개국의 정상이 함께 자리를 했다.  처칠과  루스벨트와 스탈린이었다.

  세사람이 그곳에서 회담을 열었으니 바로 '얄타회담'이다.

  이들이 그곳에서 회담을 연 이유는 단 두가지였다.  첫째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그리고 두번째는  전쟁이 끝난 후 세계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이가?

  이곳에서 처칠과 루스벨트는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다.  얄타는 '흑해의 진주'라 불릴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재정 러시아 황제의 여름 궁전이 있던 곳이었다.  이미 두차레나 모스코바를 방문한 그들이었지만  무언가 암울하고 위압적인 모스코바 분위기가 싫어서  다른 곳을 고르다 택한곳이 여기 얄타였다.  그런데 지금 얄타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그 잔혹함이 모두 나치독일의 소행이며 반듯이 되갚아 주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실은 얄타를  이토록 참혹하게  박살낸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이곳의 원주민인 타타르족(징기스칸의 유럽 원정에서 생겨난 몽골의 후예들)의 일부가  독일군에 협조하여 소련에 대항했다는 것을 알게 된  스탈린은  크림반도를 되찾자마자  보복을 감행했다. 20만의 타타르족을 열차에 태워 멀고먼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켰다.  물과 식량조차도 지급되지 않는 강제 이주기간동안  대부분의 타타르인들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몰살 당했다.  침묵의 살인마 스탈린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중의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눈하나 깜짝 안하고 모든 죄를 나치독일에게 덮어 씌웠던 것이다.

 

"이 회담은 비밀로 해둡시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자기네 운명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매우 불쾌해할 테니 말이오." - 처칠. (얄타 회담)에서

 

  그리고 이 비밀회담의 결과는  한반도의 우리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페허가 된 도시에서 성공리에 회담을 끝낸  스탈린은 고민했다.

  앞으로도 저 멍텅구리 같은  서방의 정상들을 데리고 회담을 핑계로 여러가지 공작을 벌여야 하겠는데,  저들이 한사코 모스코바를 꺼려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장소 때문에 서방 세계로 넘어간다는 것은 자존심과 안전때문에 가장 꺼려지는 부분이었다.

  '야. 우리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 안에 따뜻하고 경치가 좋으며 물자가 풍부하고  접근성과 안전성 보장이 확실한 도시가 어디냐?  없으면  아예 이참에 하나 새로 만들어야겠다.  런던이나 파리나 워싱턴에 비교해 나으면 낮지 절대로 못하지 않은 서구식 신도시를 하나 당장 급하게 만들어야 겠다.  처칠이나 루스벨트가 와보고는 놀라 자빠질 정도로 만들어야 해. 있는것 보수하거나  뜯어내서 다시 공사하기 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도시계획을 세워서 새로 하나 만드는게 좋지 않겠어?  어디가 좋겠어.  당장 서둘러 시작해야겠다.  어디야?  어디가 좋겠어?'

  그렇게 해서 '예레반'이 당첨되었다.

  전 소비에트 연방의 사활을 걸고 도시 공사가 시작되려 하는데........  이번엔 '누가 맡아서 도시를 건설할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 되었다.

  '마땅한 놈이 없어?  그렇다고 서방에서 데려다 쓸 수는 없잖아?  모스코바에도 건축가는 많이 있잖아?  누구야 거 최씨랑 박씨 불러와?'

  '두 분다 너무 고령들이시라  내년을 기약할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더욱이 예레반은 여기 모스코바에서 아주 먼 곳입니다.'

  '그럼 거 누구냐?  젊은애들 있잖아?  남궁인가 뭔가......  윤씬지 유씬지 그넘들은 모해?  안오면 붙잡아 끌고 오면 되지?'

  '젊은이들은 건물 하나 둘은 지을 수 있겠으나.......  도시 전체를 계획하는 것은 아직 무리입니다.  재고해 주십시요.'

  '이런 쓰으벌.......  그럼 내가 가서 직접 지으란 말이냐?  소비에트 연방에 도시 하나 세울 놈이 이렇게 없어?'

  그때 헐레벌떡 KGB 소속의 연락관이 뛰어들어 오면서 외쳤다.

  '서기장 동지.  찾았습니다.  있습니다.  도시를 세울 건축가를 찾아냈습니다.'

  '찾았어?  그럼 그렇지  대 연방에 건축가 하나 없을라고?  당장 내 앞에 데려 오라우.  내가 만나서 직접 명령을 하달할테니.'

  '찾아서 데리고 올 이유도 없게 생겼습니다.  그가 지금 예레반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뭐야?  일을 맡겨야 하는 놈이 지금 제발로 예레반에 가 있다는 말이니?  왜?  그넘이 어케 알고 거길  미리 가있는거니?'

  '내막은 모르겠으나 지금 분명히 예레반에 있다고 합니다.'

  '누군데?  예레반에 있는 그자가  도대체 누군데?'

  '타마니안 입니다.  알렉산드르 타마니안이라고........에카테리노다르(현 그라스노르)  출신으로  우리 연방에서 최씨 박씨랑 더불어 세손가락 안에 드는.............'

  '타마니안?  마흔 댓살 먹은  크렘린 궁전 보수할 때 불렀던..........  알지.  내 기억이 나.........'

  '연방에서 자신있게 내 놓을 수 있는 건축가 입니다.  그에게 맡기시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맞어.  타마니안이면 해 낼거여.  근데 갸가 왜 거기 가 있다는 거여?'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암튼 여기 모스코바 생활을 아주 청산하고 떠났다고 하는데........  예레반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됐어.  당장 예레반에 사람을 직접 보내라우. 전 유럽에서 최고로 멋진 도시를 만들라구 해.  전폭적으로 지원두 해주고.  서두르라고 해.'

 

  예레반은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발주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중앙 정부의 스탈린 서기장이었다.

  시공자는 알랙산드로 타마니안 이다.

  러시아에서 최고 건축가로 정점에 있었을 때,  어느날 타마니안은 모든것을 버리고 이곳 예레반으로 낙향해서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왜 갑자기 성공을 걷어차 버리고 스스로 유배아닌 유배를 떠나왔는지......

  그리고 그는 죽는 순간까지 여기 에레반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예레반 뿐만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 레니나칸(현 굼리)의 도시 건설도 직접 맡아서 했고,  예레반의 오페라하우스와  공화국 광장 주변 건물들을 모두 직접 설계해서 지었다.

  모스코브얀 대로에서 정북쪽 방향으로 건설된 캐스캐이드의 초입에 타마니안의 대리석 조각상이 거대하게 서있다.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은 바로 땅바닥에 그려져 있는  자신이 그린 예레반의 도시계획 도면을 바라보고 있다.

  예레반의 랜드마크로 사랑받는 명소인 캐스캐이드는  애초 타마니안이 구상하고 계획한 것은 맞지만,  1936년 타마니안이 숨을 거둘때까지 첫 삽도 뜨지못한 채 설계도면으로만 남아있는 미완의 유작이었다.  그것을 시간이 흘러 후배 건축가 짐 토로스얀이 타마니안의 유작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언덕 계단의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 전시실을 만들고,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수정안으로 마침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캐스캐이드는 미완성의 건축이다.

  계단 정상부의 탑 주위는 아직도 미완성으로  건축 자본의 고갈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이다.  여기 저기 방치되고 녹이 슨 철근들은 좀 을씬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저절로 생겨나게 하기에 충분하다.  언제고 곧 완성된 캐스캐이드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페타이어 소재 설치 작가  지용호씨의 '사자'가   전시되던 자리.  텅 비어있고  '사자'작품은  아래 평지로 옮겨졌다.

 

 

 

 

 

 

 

 

 

 

                                

 

              

 

 

                                

 

             

 

 

 

 

 

 

 

 

 

 

 

 

 

 

 

 

 

 

 

 

 

 

 

 

 

 

 

 

 

 

 

  캐스캐이드의 경우  설치된 조형물의  위치가 변동된 경우가 목격되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우리나라 설치미술가  지용호씨가  페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사자' 조형물이다.

  캐스캐이드 계단 언덕 중간을 넘어서는  지점에 처음부터 전시되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초입 광장의 중간부분 옆으로 비켜난 모습으로 전시가 되고 있었다.  옮겨진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처음 전시되었던 장소는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세계 각지 이름난 여행지마다 설치된 (LOVE) 조형물의 경우  계단의 초입에 정면을 바라보고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  '사자'의 반대편에 옆으로 전시되고 있다.  아마도 가장 많이 여행자들이 몰려가 기념 사진을 찍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은근 슬쩍 부러 밀어 낸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아울러  우리나라 작가의 조형물도 밀려난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근자에  한강 공원에 설치된 지용호씨의  다른 작품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을 지울길이 없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예술이다.

  예레반에서  지용호씨의 '사자'에 대해 흉물스럽다느니  혐오스럽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땅에서는  비슷한 다른 작품에 대해 '어린 아이들'을 핑계로 내세워 철거를 요구한단 말인가?

  그런 분들이 왜 아이들 손을 이끌고  피카소나 달리나 샤갈의 그림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렇게 고운 동심의 어린이들 눈에 비치는 샤갈이나 달리나 피카소의 그림들을.........  얼핏 어른들도 한참 쳐다보고 있자면 무슨 정신병자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고 하지 않는가?  나도 몰두해서 쳐다보노라면  어지럽고  머릿속이 실타래 엉키듯이 불편하다 못해 두통이 일어나는데 말이다.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으면 괜찮고.......  한국인 수준이면  가십거리처럼 이리저리 헤집어버려도 된다는 말인가?

  예술은 예술을 보는 시선으로 보자.

  한강변 공원 여기저기 많고 한없이 드넓든데  왜 꼭 거기에 가서  그 자리에 있는것을 탓해야 하는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러면 혹시 마릴린 먼로가  야시시 치마끈 붙잡고 속옷 가리려고 하는 동상은 세워도 되는지 묻고 싶다.

  아니면 한강공원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동상 세워야 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

 

 

 

 

 

  9월 20일 목요일 저녁 7시에 나는 예레반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 광장에 있었다.

  아르메니아 국립 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가 열리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2년 전에도 그렇게 애타게 갈망하던 공연이었는데.........  공연을 보지 못했다.  티켓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갈증은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도  끝내 풀지 못했다.  트빌리시에서는 내가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공연이 없었다.

  그동안 여러곳을 여행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굳이 공연을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르메니아 예레반과  조지아의 트빌리시,  그리고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만은  간절히 교향악단 연주나 오페라를 보고 싶어 해왔었다.

  내게 있어서 클래식 공연이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예레반이나 트빌리시나 팔레르모의 공연은 수준이 높기로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거기에 그 나라의 물가만큼이나 전혀 부담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싼 가격에 티켓을 구입할 수 있기로 또한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하다.

  아르메니아 국립 교향악단의 정기 굥연 티켓은 이미 모두 팔렸으며.......  혹시나 했지만.......  암표를 파는 사람도 사려는 사람도 없었다.

  협연자로 나온 검은 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나와 같은 피를 가졌을것 만 같은   젊은 남녀를 발견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  첼리스트  (팀 박)이었다.  반가웠다.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한국인 연주자를 볼 수 있다니......  그런데  프로필을 가만히 살펴보니 두사람 모두 국적이 독일이다.

  '독일아. 넌 참 운도 좋다.  대한민국의 젊은 인재들을 포용하는 기회를 갖게되었으니 말이다......... 은근히 내 속은 쓰려.........'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백번은 살펴보았어도.........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캐스캐이드 인근으로  예레반 도심의 북쪽 언덕  기슭에 자리 잡은  마테나다란(Matenadaran)은 아르메니아 문자를 연구하는 연구소와 박물관을 겸하는 국립 서고(書庫)이다.  본래의 이름은  아르메니아 문자인 아이브밴(aybuben)을 처음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서 메스로프 마슈토츠 고문서관 이라고 불렀다.

  여기 국립서고의 정면에 놓인 조각상의 주인공이 바로 마슈토츠(Mesrop Mashtots, 362~440) 이며 그 앞이 제자상이다.

 

 

 

 

 

 

 

 

 

 

 

 

 

 

 

  1만 7천여 권의  중세시대의 책과 필사본을 보유하고있으며,  3만여 건에 이르는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마테나다란은 세계 최고수준의 서고를 자랑한다.  또한  처음 36자의 문자로 만들어진  아이브밴에서  현재 세계가 공용어로 사용중인 영어 알파벳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르메니아인들의 문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겠다.

  마슈토츠의 오른손 조각상 부분에 적혀있는 글자는  그가 아이브밴을 창제한 후에 가장 먼저 창제한 글자로 적은  구약 성경에 있는  솔로몬의 '잠언'을 새겨 놓았다.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을 깨닫게 하라.'는 뜻이다.

  마슈토츠의 조각상 뒤로 마테나다란의 정면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존경받는  6명의 학자와 예술가 동상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왼편으로는 화가. 신학자이면서 철학자. 수학자가 위치해 있고,  오른편으로는 역사가.  법학자. 시인이 늘어서 있다.

  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같은듯 하면서도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다른 특징들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한 조각가에 의해 모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6개 모두가 다 각기 다른 조각가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로 가장 오른쪽에 서있는  시인 '프리크' 동상이다.  프리크는 몽골이 유럽을 침략했을 당시의 시인이었는데,  외세의 침략 아래 무능한 성직자와 지배계층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를 주로 썼다.  아울러 기독교인 이면서도  종교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를 품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직품 제목만 보아도 '예수에 대힌 불만' '운명과의 대적' 이었으니 그의 종교관과 강직한 성품을 엿볼수가 있다.

 

  마테나다란을 찾아간 시각이 새벽 산책길이었던 탓에  아쉽게도 박물관을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개관 시간에 맞추어 다시 찾아가볼 생각이었으나  부득이 아르메니아에서의 스케줄을 다소 변경하게 되어 다시 가보지 못했다.

  천연색 그림과 일러스트에 금박이나 은박을 입힌 채식필사본을 실컷 구경할 줄 알았었는데.........

 

 

 

 

 

 

 

 

 

 

 

 

 

 

 

 

 

 

 

 

 

 

 

 

 

 

 

 

 

 

  우연히  2018년 03월 28일자  조선일보를 읽게되었다.

  "3色으로 빛나는 유럽의 보석, 코카서스 3국" 이라는 제목하에  여행 안내를 하는 기사였다.  그런데.........

 

 

 

"과거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므츠헤타는 조지아 영혼의 심장과도 같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으며 조지아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장소다. 인류 최초로 기독교를 믿었다는 설명처럼 전 세계의 순례자들이 자신의 영적인 뿌리를 찾아 끊임없이 므츠헤타를 방문한다."

 

"4세기에 세워진 게하르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게하르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의 창’을 뜻하는 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써 현재는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지아의 옛 수도였던 므츠헤타를 인류 최초로 기독교를 믿은 사람들로 기사처럼 표현하는 것은 어떤 근거도 없고 너무 막연한 표현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의 순서를 논하라면 분명하게  아르메니아. 로마  조지아의 순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게하르트'라고 한다는 기사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게하르트는 그냥 사람 이름이다.  그곳 수도원에서서 수도한 수도사이고  아르메니아가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는데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예수의 엽구리를 찌른 창은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롱기누스가 소유하던 창이라 해서 '롱기누스의 창' 이라 하며   이곳 말고도 두군데나 더 자기것이  진짜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흔히들 성창(聖槍)이라고 한다.

  이런 기사가 지명도가 있는 조선일보의 기사라는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여행을 안내하는 사람이 쓴 기사라면  자신이 안내하고자 하는 지역에 대한 기초정보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신력을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저런 허무맹란한 기사를 쓴다면........  그릇된 기사가 진실인양 받아들이게 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공신력과 지명도를 가진  신문사의 여행 안내기사가 저정도 수준이라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현지에서 유창하게 떠들어대는  가이드들의 수준이나  안내 내용도 한번쯤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깃발만 쳐다보고 쫄쫄거리며 쫓아다니고  가이드 설명 시간엔 인증샷 찍어대느라 귀담아 들을 시간이 없고,  설사 약간 알아들었다 해도  귀국 비행기에서 내리면 금새 모두 잊어버리는 여행자들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행이 현대인의 필수 아이콘처럼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시기에  아주 인기리에 방송되는  여행 프로가 있다.  유력 방송에서 오래되었고 아주 인기있는 방송프로그램이다.  여러개의 케이블에서 낮이고 밤이고 옛 방송분량을 돌려대고 있다.

  그 프로중 아르메니아 여행기에서 이렇게 방송이 되고 있다.

  '호르비랍은 태양신 미트라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한  성 그레고리가 13년간이나 지하동굴에 갇혀있던 곳으로,  그로 인하여 아르메니아는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라고 말이다.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레고리에게 일어난 사건은 맞지만  13년간 옥에 갇힌 이유도 다르고,  13년의 감옥생활과  기독교 공인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가정사였다.  

 수많은 시청자가 여행교본으로 삼는 방송에서까지 이렇게 허술한 내용이 모두 사실인양 방영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에 어느 외국인 가이드가  자국의 여행자들을 데리고 명동성당을 투어하면서 '한국에 기독교를 들여 온 사람이 이순신이고,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라는 왕명을 거역한 죄로 참수당했다'  라고 한다면 옆에서 듣고있는 한국인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정말로 노력하는 가이드들도 많지만,  그저 앞서 그자리를 지켰던 선배 가이드의 자료를 마치 베끼기라도 하는것처럼  그대로 재생하는 가이드들이 상당수 있는것이 현실이다. 앞선 누군가의 잘못된 텍스트는  또 그대로 이어지고.......  수많은 여행자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파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수정보완해야 하며,  또 여행자 스스로 바른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보다 즐겁고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방송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보완에 거듭 거듭 검증이 필수로 뒤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호르비랍을 여행하다보면  성 그레고리가 등장한다.  13년간 지하동굴에 갇혔던 위 사진속의 바로 그사람이다.

  게하르트 수도원을 여행하다보면  수도사 게하르트(게르하르트)가 등장한다.

  예치미아진의 성모교회를 여행하다보면  성 게오르규가 등장한다.

  역사적인 관광명소마다  주인공이 등장하여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하게 하고 교회나 유적이 지닌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대부분의 가이드나 안내자들이 이들을 모두 다른 사람 다른 역사적 사건으로 재구성하여 설명을 하고,  또 여행자들은 모두 별개의 사람. 별개의 사건. 별개의 장소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런데 아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한사람이다.  모두가 다 한사람이 격었던 사건이었으며 한사람으로 인해 생겨난 역사적 가치를 지녔다.  그레고리가 게하르트고,  게하르트가 게오르규인 것이다.

  구약성서의 다윗은  이탈리아에서는 다비드가 되고  미국에서는  데이비드가 된다.   그런가 하면 같은 문화권에서도  미국은 마이클 이지만 영국 프랑스는 미셀이라 부른다.

  우리맘대로 이름을 하나로 통일 시켜버리기도 좀 그렇겠지만,  다만  불려지는 이름은 다르더라고  그 지역의 명소에 등장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며,  각기의 장소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에 맞게 연결시켜서 여행자에게 제대로 이해 전달시키려는 여행 안내자들의 노력이 절말로 아쉬운 느낌이다.  벽돌 한장 한장은  약하기도 하고 쓰임새도 별로 없다.  이것들이  제대로 맞추어 져야 담장도 되고 집도 되고 박물관도 되고  그러고 나서야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여행은 여행자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만큼만 유익하고 즐거워지는 것이며,  또 여행중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고 여행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러한 진실에의 접근은  이제부터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는 동안에 세세하게 다시 만나보기로 한다.

 

 

 

 

 

 

 

 

 

 

 

                           ----    2년만에   다시 찾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우울한 느낌으로 이번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