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세기말 무렵 로마에서의 일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한복판에 히립시메(Hripsime: 여기에서 H는 묵음임으로 립시메라고 발음해야 현지인들은 알아듣지만, 우리끼리 쉽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 글에서는 그냥 히립시메라 하겠다)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다.
히립시메.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차후의 행적으로 보아 그녀는 로마 귀족집안의 자녀로 추정된다. 그렇게 보는 시각이 절대적이다.
한마디로 다시 표현하자면 그녀의 아름다움이 대단히 엄청났던 것으로 보여진다. 클레오파트라도 울고 돌아 설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어느날 로마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4~316)가 히립시메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평민이나 노예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원로원에서도 명망있는 귀족의 딸이라면 아무리 황제라 해도 그리 호락호락할 사안이 결코 아니었다. 호감을 얻으려 여러가지로 노력을 해 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했다.
여러날을 고심하던 끝에 황제는 정중히 예를 갖추어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청혼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황제의 욕망은 이쯤에서 끝날일이 결코 아니었다.
황제는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몰랐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정혼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상대는 기독교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였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이미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평생을 동정녀로 예수를 따르며 살기로 맹세(오늘날의 수녀)를 한 뒤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기독교인은 이교도이자 로마의 적이었으며 발각되면 콜롯세움으로 끌려가 맹수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참수형 내지는 화형에 처해지던 시련의 암흑기였다.
여전히 로마의 종교는 태양신 미트라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이교도로서 이 세상의 모든 재앙의 씨앗이라 여겼던 시절이었다.
당시 로마에 그녀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수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맹세한 처녀 35명이 비밀리에 성경공부 같은 것을 하는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가야네(Gayane)라는 여성이 연장자로서 이 수녀들의 모임을 이끌었고 후세의 기록에도 '수녀원장'으로 기록되었다.
히립시메에게 닥친 불행을 알게된 가야네는 커다란 결심을 하게된다.
예수를 따르며 수행자로서의 일생을 함께 살아가기로 맹세한 처지로 그것은 오로지 히립시메 한사람에게만 닥친 불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네는 히립시메를 데리고 로마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자 나머지 33명의 수녀들도 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따라 나섰다.
그녀들은 로마를 떠났고 처음 찾아간 곳은 에수 사후 기독교인들의 절대적 은신처이자 신앙의 구심점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였다.
하지만 결코 쉽게 그녀을 포기 할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이미 신의 반열에 올라있는 사람인데, 신인 황제의 권세가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할 일이 무었이 있단 말인가? 황제의 권위와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황제의 절대적 존엄에 상처를 내는 일이었다. 황제는 사방으로 사람들을 풀었다.
수녀들은 은밀하게 남의 이목을 피해가며 도망치는 처지였으나, 수십명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서 먼길을 이동하는 상황이 어디 일상적으로 보편타당한 풍경이었겠는가? 수녀들은 무사히 알렉산드리아까지 도착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지나간 행적이 모두 황제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황제는 황실 근위병 중에서 최정예를 골라 소수의 추격대를 결성해 파견했다. 알렉산드리아 뿐만이 아니라 이집트 전체가 술렁거렸다.
가야네와 수녀들은 자신들의 처지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재앙이 닥치게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수녀들은 야음을 틈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황제의 칙서가 이번엔 예루살렘 총독에게 도착했다. 35명의 수녀를 찾아내서 로마로 압송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녀들은 다시 도망쳤다. 이번엔 터키의 멀고 먼 에데사로 도망쳤다. 에데사에 은거해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들을 돌봐주었다.
터키의 남동부에 위치한 (에데사)는 역사적으로 보나 아니면 당시로서도 아주 특별한 도시였다. 구약성경에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고향'인 (산느 우루파)가 바로 에데사였다. 하여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모두에게 이곳은 절대적 성지인 곳이다. 서기 179년에 에데사는 자치주(소도시)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공인해준 인류 최초의 지역단위 도시였다. 훗날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가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기에 앞서서 이미 그보다 120년 전에 기독교를 인정해 주었던 아주 유서깊은 지역이다. 이곳에서만은 기독교인도 신앙의 자유와 평등한 대우를 받았었던 것이다.
그러던 에데사가 서기 216년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또다시 모든 자유와 지위를 잃고 지하에 숨어서 그들의 신앙을 지켜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시기에서 약 60여년이 지난 시점에 35명의 수녀가 이곳으로 도망쳐 와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지구상에 로마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더이상 없어 보였다. 황제의 추격대가 또 들이닥친 것이다.
가야네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 고난이 행군이 끝나자면 로마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세력권 밖이면서도 기독교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감이 덜한곳을 찾아야만 했다.
수녀들은 함께 모여 밤새 기도했다. 그녀들에게 내려지는 이 고행이 언제 끝날 수 있는지........ 그 또한 신의 뜻인지를 알고싶어 했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어디인들 가지 못하리까........."
수녀들은 또다시 이번에도 야음을 틈타 에데사에서 탈출했다.
그녀들의 최종 목적지는 '바그하르사파트(Vagharshapat)' 였다.
최근에 가야네가 들은 소문이 있어서 그곳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던 것이다.
'바그하르사파트의 왕이 기독교 사도 신부를 13년만에 지하감옥에서 꺼내 자유를 주었다' 라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기독교인을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박해가 그곳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또한 그 나라는 로마제국에 맞설 처지는 못되지만 분명 자신의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였다. 그들 등뒤로는 소아시아의 거대한 이교도 제국 페르시아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가 무력을 행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생존을 위해 당연히 페르시아로 달려가 보호를 요청할 것이다. 당시 상황으론 당장 페르시아라는 대국과 전면전은 피하고 싶은 로마였다.
에데사까지 전해 온 소문은 어디까지나 모두 사실이었으며,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그레고리였다. 다른 이름인 게하르트였던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바그하르사파트로 간다.'
오늘날 최신형 여행사 리무진 버스로 에데사에서 바그하르사파트까지 가자면....... 고속도로로 쉼없이 달려서 족히 3일은 가야 할 것이다.
그 멀고 먼길을 35명의 처녀들이 낮에는 자고 밤에는 길목마다 지키고있는 초소와 추격대를 피해 우회하면서 산등성이를 타고 이동했다.
길고 험난한 여정중에 숨어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들을 후원해 주었다.
신께서 이끌어 주시고 돌보아 주셨음일까?
마침내 35명의 수녀들은 모두 무사히 바그하르사파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있는 기독교인들의 도움으로 은신할 거처를 마련했다,
할.렐.루.야.
아.멘.
성 히립시메의 성화.
35명 수녀들의 상당수가 로마인이었다.
부와 안락함과 행복을 보장받은 (로마인)이라는 보증수표를 내던진 사람들이 이런 고행에 스스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부의 로마인이 아닌 사람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람이 이들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고루 포함된 공통점은 하나 이거나 둘 뿐이었다.
'구세주로 이 세상에 내려와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받아들이고 따르기로 했다'는 사실과 모두가 젊은 처자들이라는 점 뿐이었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찾아다니면서 내가 가장 놀라고 궁금하게 생각되었던 것중의 하나가......... 가야네(Gayane) 라는 여인에 대한 의문이었다. 실로 상상이 부족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리더가 아니겠는가? 그 다급하고 사방이 온통 위험뿐인 상황에서 나약한 34명의 여인들을 이끌고 한 두번도 아닌 길을....... 그 멀고도 먼길을.......... 어찌 되었건 모두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솔할 수 있었다니....... 엄마의 입장에서 장성하였거나 아니면 어린 자녀 서넛을 데리고 걸어서 사나흘을 여행한다고 쳐보자.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상상이 가가겠는가?
가야네는 정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리더였다. 어떤 한 분야만 잘해서는 훌륭한 리더가 결코 될 수 없다. 35명이 겪은 세세한 행적들을 살펴 볼 때마다 나는 당시 가야네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을까?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그토록 과감하게 미리 대처했을까?
그리고 신에 대한 얼마만의 사랑과 존경이 있어야만 저런 난관들을 일체의 망설임 없이 극복해낼 수 있단 말인가? 동료에 대한 얼마만의 애정이 있어야 저렇게 무한정으로 헌신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 더하여 가야네의 이런 무한한 헌신이 없었다면........ 조지아는 현재 가지고 있는 역사처럼 아르메니아 로마에 이어서 곧바로 기독교 국가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기독교 국가 조지아'에 절대적 공헌을 하게되는 사람이 바로 이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립시메는 이 고난의 행군에 시발점이 된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순교했다. 34명이 모두 순교했다.
가야네를 포함한 35명의 수녀 중에서 순교 당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녀가 조지아를 기독교 국가로 이끌게 된다.
성 니노(st. Nino)가 이들 35명의 수녀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나는 항상 부르기 쉽게 그냥 '니노 할머니'라고 부른다)
니노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카파토키아의 콜로스트리에서 태어났다. 아주 부유한 명문가에서 귀한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니노는 베들레헴의 수녀 니오포라 사라에 의해 길러졌다. 이미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알게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삼촌의 도움으로 로마에 가게 된 니노는 그곳에서 히립시메와 가야네를 만나게 되고 이들과 함께 교류하고 공부하면서 점차 수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포도나무 십자가로 상징되는 '기독교 국가 조지아'를 탄생시킨 성 니노 할머니.
바그하르사파트까지 무사히 도망쳐서 은신처를 마련하기까지는 하였으나 35명의 수녀들에게 닥친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보망에 수녀들의 최종 행적지가 모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녀들이 숨어 든 은신처는 엄연한 독립국인 아르메니아의 수도 바그하르사파트 였다.
바그하르사파트(Vagharshpat)는 1945년 부터 에치미아진(Echmiadzin)이라 불리게 된 아르메니아 제2의 도시로서 예레반 이전의 옛수도이다.
그녀들의 은신처는 에치미아진 현충탑을 지나 예술문화회관 바로 옆에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선 마을이었으며, 수녀들이 순교한 후에 이 은신처 자리에 순교한 수녀 중 한사람인 마리안느의 이름을 따서 성 마리안 교회(St. Mariane Chuch)가 있던 자리였으나....... 모두 허물어 지고 너른 공터에 주춧돌과 허물어진 벽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이 페허에도 누군가 촛불을 밝혀 놓았고 헌화를 하였으나 내가 방문하였을 때 꽃들은 모두 시들어 있었다. 그녀들에게 내려진 아픈 비극의 역사가 모두 이곳에서 종말을 고했다.
숙연해 진다.
햇쌀은 따사롭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세상은 평온하기만 한데..........
왜 그런일이 벌어져야만 했을까?
도대체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 35명의 수녀들이 거처했던 은신처. 허물어져 페허가 된 마리안느 교회 터.
가야네와 수녀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시간에 느닷없이 한무리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로마황제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내들은 수녀들을 사정없이 끌어다가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 대기하던 마차에 강제로 끌어다 싣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주민이 곧바로 달려가서 관청에 신고를 했다. 이어서 아르메니아의 군대가 출동을 했다.
아르메니아의 군관은 고함을 쳐서 이 낯선 사내들의 납치행위를 일시 중지시켰다. 일촉즉발의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낯선 사내무리의 우두머리인듯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면서 당당하게 외쳤다.
'상관하지 말고 물러가시요. 우리는 로마 황제의 명을 받고 죄인들을 잡으러 온 로마의 황실 근위대요.' 라고하면서 금빛 휘장이 달린 신분을 나타내는 명패를 내보였다.
군관으로서도 꿈엔들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는 초유의 사태였다. 아르메니아 수도의 한복판에 느닷없이 로마황제의 최측근 호위대가 나타나리라고 누가 꿈엔들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모두 무기를 버리시요. 여기는 엄연히 우리 아르메니아의 영토요. 대제국 로마 황제의 호위대라니 무례는 범하지 않겠소만 아르메니아의 영토 안에서는 당연히 아르메니아의 법을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이요. 무기를 버리고 우리와 함께 갑시다. 여인들은 모두 따로 격리를 시켜 보호 할것이요. 정당한 일이라면 당신들에게 먼저 충분히 상황을 설명할 기회를 드릴 것이요. 어찌되었던 나는 이일을 당신들과 함께가서 상부에 보고를 할것이며........ 내 생각에 최종 결정은 아르메니아의 왕께서 하시게 될것이요.'
로마군의 수장도 내심 빠르게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장 이곳은 아르메니아의 영토 한복판이다. 또한 저들도 엄연한 아르메니아의 정규군이다. 로마의 권위를 보이려면 당장 칼을 휘둘러 군관의 목을 쳐야하겠지만........ 자신에게 하달된 임무는 오로지 저 여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이었다. 싸우다 모두 죽을 수는 있겠으나 황제의 명령은 이제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방법은 하나다. 아르메니아 왕을 만나서 제국의 권위를 앞세워 은근하게 그를 협박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당당하게 여인들을 끌고 로마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로마의 군인들이 무기를 땅에 내려 놓았다.
아르메니아의 군인들이 달려들어 무기를 모두 회수했다.
포박되어 끌려가던 수녀들의 손에서 밧줄이 풀려졌고 군인들은 그녀들을 어디론가 데려가기 시작했다.
신하들을 불러모아놓고 신전 보수공사를 논하던 아르메니아의 왕은 방금 전의 사태를 보고 받았다.
로마황제의 근위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단히 놀랐지만 그들의 목적이 겨우 한무리의 여자들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동시에 웬지모를 묘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 놈들이 무장을 한 채 도성까지 대낮에 버젓이 들어왔다면 이는 결코 예삿일이 아니지? 한 나라의 방어망이 모두 뚫렸다는 이야기아닌가?'
'그런데 기껏 그 목적이 몇 몇 여자들 때문이었다고?'
'황제가 로마에 여자가 없어서?'
'뭐야? 도대체? 뭐냐고'
아르메니아 왕은 로마에서 온 사내들의 수장을 불러들이라 지시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진상을 파악해 볼 심산이었다.
로마군인의 설명은 간단 명료했다.
'로마에서 반란을 준비하는 적당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적당들의 여식들을 따로 분리하여 감시하던 중에 가야네라는 여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저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도망쳐 왔노라고. 황제께서 반역의 피붙이를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듯이 살려서 끌고오라고 명을 내렸다'고 아주 당당하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마도 이쯤되었으면 약소국의 한낱 왕처지로서 로마제국의 위용에 스스로 굴복하고 순순히 여인들을 내주어 로마로 돌아가게 해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실은 왕의 생각도 같았다.
영민한 아르메니아 왕은 부국강병을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면서 국력을 키우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로마의 비위를 상하게 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최선의 배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저들의 목적을 완수시켜 무사히 돌아가게 하는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군관이라 자신을 소개한 저 자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제 부대의 한단계 위 직속 상관에게 보고하는 듯한 태도와, 로마황제를 칭할때면 바로잡는 자세와 한껏 격앙되는 말투가 은근히 왕인 자신을 깔아뭉개려 하는 태도로 느껴졌다. 비록 약소국의 처지이긴 하나 지금 주변에서 여러 자신의 신하들 눈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황제께서는 매우 든든하시겠구려. 그대처럼 출중한 기상을 가진 군관을 수하에 두었으니 말이요. 잘 알겠소. 황제께서 바라시는 일이 그런것이라면 내 기꺼이 응해드리는 것이 순리겠다 생각하오. 다만....... 어찌 되었던 내 영토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 상대가 황제가 되었건 저잣거리의 거렁뱅이가 되었건 아니면 누가 되었건....... 세세하게 자초지종은 알아봐야 하지 않겠소?'
'제국의 황제에 대한 그런 언사는 불충이요. 감히 제국의 황제를 거렁뱅이와 비교하다니........?'
'황제의 존엄은 로마에서나 찾는 것이지, 여긴 아르메니아이며, 아르메니아에서는 짐이 곧 존엄이다. 군관은 그런 기본적인 예절도 모르는가? 로마에선 상대국의 왕을 기껏 직속 상관인 하급 군관이나 하급 관료 정도로 예의를 갖추가 가르치던가? 상대국 왕까지도 능멸하라 가르치던가? 그것이 로마 황제가 가르쳐준 예법인가?'
로마군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여인들을 모두 불러오너라. 내가 로마황제의 뜻을 들었으니 이제 반대편에 선 여인들의 자초지종을 들어봐야만 하겠다.'
로마군관의 눈망울에 핏발이 섰고 분노를 참지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한참지나서 마침내 여인들이 들어서는 순간......... 이미 왕은 넋을 잃고 말았다.
맨 앞에서서 여인들을 이끌며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서는 여인을 보는 순간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었다.
보통의 가녀리고 보호본능을 자극시키는 아름다움이 아닌 치장하지 않고 거추장스러움을 모두 벗어버린 약간은 도도한듯 대장부의 기상을 떠올리게하는 의연한 기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아테네 여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왕은 받았다. 바로 가야네였다.
그 뒤를 따라 줄을 서서 들어오는 여인들을 바라보던 중에 왕은 하마터면 심장이 탁 멎어버릴것만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 가야네가 아테네 여신의 환생으로 느껴졌다면, 아프로디테 여신의 환생을 지금 보고있기 때문이었다. 저절로 무릎을 꿇고 숭배의 예라도 올려야겠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바로 히립시메였다.
왕의 머릿속의 하얗게 텅 비어갔다.
이성과 감성이 뒤섞이며 혼돈의 실타래에 점점 얽혀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넋을 잃었던 왕은 그제사 정신을 추스르고 나서 젊잖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로마의 병사는 돌아가서 황제께 전하여라. 로마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내가 알수 없으나 이 여인들은 스스로 이나라로 왔으며 이곳에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지금 우리의 보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니, 이사람들에 관한 문제는 차차 아르메니아의 정해진 법에 따라 짐이 직접 처리하기로 하겠다고 전하여라. 지금 짐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로마의 병사들은 이 나라를 떠나라. 돌아가는 길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며, 로마의 영토에 들어설 때까지 보호해줄 것이다. 모두 떠나라. 그리고........ 그 여인들을 모두 석방하고 저들의 거처에 아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동안 지켜주도록 하여라.'
사방에서 탄식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건 현명한 군주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나 현명한 판단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소국의 처지로 감히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보기좋게 기습적으로 먼저 주먹을 한방 날린꼴이 아니겠는가?
기록에 의하면 왕은 35명의 여인들을 대면하는 순간 '두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라고 적었다. 가야네와 히립시메였다.
여인들은 즉시 모두 석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왕은 아르메니아 역사를 통털어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가장 현명했던 왕이었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재건을 위해서 불철주야 힘쓰던 바로 티리다테스 3세(Tiridates, 250~330) 대왕이었다. 아르메니아 역사를 통털어 대왕의 존칭을 받는 몇 안되는 현명한 군주였다. 그렇게 현명하고 야망이 컸던 왕이 한순간에 자신의 처지와 극내정세와 국제정세를 모두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마귀에라도 씌인 것일까? 정말 그럴정도로 그녀들이 아름다웠단 말인가?
티리다테스 3세는 13년간이나 호르비랍 지하감옥에 갇혀있던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를 석방해 준 바로 그 왕이었다.
다음날 부터 티리다테스 왕은 하루가 멀다하고 35명의 수녀들이 거처하는 은신처를 찾았다. 그리고 지극 정성으로 그녀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나면서......... 오로지 한 여인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히립시메였다.
가야네도 아름답기는 했지만 히립시메에게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자나깨나 히립시메를 생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연모의 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든 정무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신하들은 저마다 불안한 눈초리와 탄식을 터트렸다. 그러나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그것이 태풍전야의 고요함 일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티리다테스 왕이 히립시메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히립시메는 자신이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약혼한 사이이기에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의 애정공세는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국경으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어 왔다.
아르메니아 국경선의 절반 가까이를 맞대고 있는 로마와의 모든 접경지역에서 새로운 로마의 군대가 다가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반 호수 인근에서 부터 흑해 연안의 국경까지 연일 끊이지 않고 로마의 군단이 이동집결하고 있었다. 로마군의 숫자도 연일 불어나고 있었다. 대대적인 로마제국의 침공이 눈 앞에 이른 것이다.
사면초가에 진퇴양난이었다. 하루 아침에 바람 앞의 등불 신세로 갑자기 전해버리고 만 것이다.
가뜩이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페르시아와 최근들어 잦은 분쟁으로 두 나라간의 사이가 아주 좋지않은 상황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들었을 무렵 서너필의 준마가 성문 앞에 당도했다.
로마의 사신이 찾아온 것이다. 군복이 아닌 자주빛 로마 원로원의 복장을 갖춘 사신이 로마 황제의 전갈을 내밀었다.
가죽 두루마리를 펼쳐 전갈을 읽어내려가던 티리다테스 왕의 표정이 시커멓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서신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이 서신의 답신자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보내는 서신인지 조차도 적혀 있지 않았다. 국제 관례에서 이렇게 무례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인들을 모두 데리고 네가 로마로 올래? 아니면 내가 직접 데리러 갈까?'
티리다테스의 팔이 심하게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몸을 가누기 조차 힘에 겨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사신이 입을 열어 덧붙였다.
'아침까지 입니다. 날이 새면 로마의 전 군단이 여기를 향해 국경을 넘을 것입니다. 성밖에서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부분의 삽화들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네이버를 통해서 이미지를 퍼왔음을 밝힙니다.)
티리다테스 아르메니아 왕은 자리에 앉아서 마냥 넋을 놓은 채, 잠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붙고 있는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서슬 시퍼런 눈초리가 자신의 심장을 날카롭게 노려보고있는 악몽을 한순간도 떨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꿈이 아닌 현실이었던 것이다.
전 국경에서 로마군이 동시에 출몰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는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실로 역사 이래 가장 막강하고 용맹한 로마 군단....... 적에 대해서는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군대......... 분노한 로마군단은 모두 악마의 자식으로 보여지고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제 날이 새면 아르메니아는 온통 처참한 시체더미와 왕궁이며 신전이 모두 파괴되어 페허더미만 남긴 채 이대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해진 것이었다.
'오 태양신이시여! 저에게 이 난국을 헤쳐나갈 지혜를 주시옵소서..........." 티리다테스는 절규하고 있었다.
티리다테스가 자정을 념겨 뜬 눈으로 절망적인 난국 앞에서 태양신 앞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있던 같은 시각에...........
새벽잠에 들었던 35명의 수녀들 중에 상당수가 똑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에 속하지 않았던 단 한사람........ 아자트 계곡의 동굴속에서 수도를 하고 있던 그레고리도 수녀들과 똑같은 꿈을 꾸게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것이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선 사람은 그레고리(게하르트. 게오르규)였다. 그가 받아서 깨달은 계시는 '네가 할 일이 있으니 지금 즉시 바그하르사파트(에치미아진)로 가라'는 계시였다. 그는 아픈 지나온 과거가 모두 바그하르사파트에 있었기에 떠나온 뒤로 결코 되돌아갈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몸으로 다시 속세의 지난 과거와 얶매이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릅을 꿇고 거듭거듭 신께서 내리신 계시가 맞는지 꼭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일인지를 거듭 되물어 보았다. 그러나 신은 더이상 아무런 답변도 새로운 계시도 내려주지 않았다. 하면 어쩌겠는가?
그레고리는 늘상 길을 떠나면서 걸치고 다니던 바랭이를 찾아 걸머 메었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호리병에 성스러운 물을 가득 담았다. 아자트 계곡 저 너머로 서서히 새벽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아자트 계곡의 동굴을 떠나 바그하르사파트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께서 이 몸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면 주저않고 달려 가겠습니다. 부디 이 어둠속에서 발걸음을 서둘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레고리가 꿈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같은 시간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를 털고 일어선 수녀는 다름아닌 카파토키아 출신의 니노(Nino) 수녀였다. 그녀가 깨달은 계시는 '네가 할 일이 있으니 고향인 카파토키아로 가라'는 계시였다. 아울러 꿈속에서 들려온 그 계시는 매우 다급한 음성이었다. 니노수녀는 너무도 놀라서 곧바로 가야네 수녀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는 이미 히립시메를 비롯해 같은 꿈을 꾸었던 수녀들이 모두 놀라서 모여 있었다. 가야네과 히립시메를 비롯한 모든 수녀가 느낀 계시는 무엇인가 커다란 위험이 다가오고 있으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결코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계시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수녀들은 모두 불안에 떨며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꿈이었지만 다른 계시로 받아들인 니노 수녀는 자신의 뜻을 가야네에게 고백했다. 니노의 계시에 대힌 생각을 가야네는 이해하고 공감했다. 하여 모든 수녀들을 모이게 하고 이야기 했다. 위험을 감지한 자신들이 느낀 계시와 니노 수녀에게 내려진 계시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신의 뜻이라면 니노 수녀를 보내야 하겠는데........ 여기서 카파토키아는 너무도 먼곳이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도망쳐왔던 에데사 보다 조금 가까운 거리였다. 거의 대부분의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만 하는 것이다.
가야네는 니노가 갈길이 너무나 멀고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여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니노를 따라나설 지원자가 없었다. 그나마 아르메니아 왕이 자신들의 거주를 허락하고 돌봐주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기독교인을 노리고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험난한 세상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가야네는 자신에게 내린 계시처럼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지만 니노 수녀는 그녀에게 허락하신 신의 뜻을 받들어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든 여정을 위해 준비를 좀 한 뒤에 혹시나 그리로 가는 다른 사람이라도 알아본 후에 천천히 떠날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니노 수녀의 뜻은 단오했다.
신의 음성이 그녀에게만은 너무도 다급한 목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니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이곳까지 올때처럼 여벌의 옷가지만이 달랑 담긴 보자기 하나만을 둘둘말아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34명의 수녀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너무도 뜻밖의 아쉬운 작별에 온통 눈물 바다가 되었다.
서로에게 신앙에 대한 굳건한 당부를 나눈 뒤 니노수녀는 은신처를 벗어나 카파토키아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에 첫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녀가 향하는 저 멀리 산등성이 위로 서서히 새벽의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고 긴 어둠이 지나고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새벽의 미명이 길게 희뿌연 연기처럼 동녁 하늘을 드리우더니 이내 눈이 부시도록 환한 섬광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쾅 쾅 쾅.
대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뇌성벽력처럼 새벽 공기를 가르자 새벽 기도를 드리다 놀란 수녀들은 일제히 대문을 향해 마당으로 몰려 나왔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던 터라 가야네가 앞서 다가가 대문의 빗장을 열었다.
다짜고짜 저마다 횃불을 손에 들고 중무장한 왕궁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한 년도 빼놓지 말고 모두 끌어내라.'
거칠고 성난 목소리로 외치며 대문을 드어서는 사람은 아르메니아의 왕 티리다테스 3세였다.
그제까지만 해도 온화한 미소와 청아한 음성으로 친절하게 수녀들을 대하고 돌보아주던 왕의 욕설까지 담긴 고함소리와 표정 때문이었다.
지금 왕의 표정은 자신들이 그동안 대해왔던 모습이 아니였다. 한마디로 지옥에서 뛰쳐나온 아수라의 모습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잔혹하게 일그러진 표정이며 거기에 잔혹한 미소까지 띄고 있었다. 그동안 수녀들이 꿈속에서 보았던 악마의 모습이 바로 저러했었다.
'오. 주여.'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공포에 질린 수녀들은 아예 눈을 질끈 감은 채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수녀도 있었다. 간밤에 보였던 계시가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고했던 것이라 생각하니 더러는 공포 이전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주여. 당신의 뜻은 정녕 어떤것이옵니까?'
안채의 이곳저곳을 수색한 병사들이 수녀들을 거칠게 끌어다가 마당 한가운데 정렬시켰다. 이미 어떤 명령이나 아예 작정을 하고 들이닥친 듯이 매우 거칠게 함부로 다루었다. 심지어는 머리채를 끌고오는 병사도 있었다.
여기저기서 수녀들의 절망이 담긴 울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모두 끌어냈으나 34명 뿐입니다. 한 명이 보이질 않습니다.'
'서른 다섯명이어야 하지 않느냐?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서 나머지 한 년도 찾아내 끌고와라.'
이런 상황을 강인한 의지와 예리한 통찰력으로 지켜보며 나름의 판단을 내린 가야네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왕이시여. 갑자기 무슨 사단이 일어났는지 소녀들은 감히 알지못하겠사오나 지금 저희 수녀들의 인원은 34명이 맞사옵니다. 무모하게 수고를 마시고 소녀들의 지금 상황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요.'
'그새 한 년이 뒈지기로 했단 말이냐?'
'실은 로마의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저희들을 포승줄에 묶었던 밤에 평소 심약했던 자매 한 명이 그만 그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실성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쳐 버렸단 말이냐? 그럼 그 미친년을 어디에 가두었느냐?'
'그 자매는 저희 무리에서 무조건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더하여........ 저희가 모시며 따르는 신을 부정하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날 밤 중에 밖으로 나갔는데........ 저희는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이미 저희와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밤중에 광야로 나간 후에....... 다시는 그녀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그녀를 찾고자 하신다면.......... 광야 어딘가에 이미.........'
'그년 이름이 무엇이냐?'
'니노라 불렀습니다.'
'니노라는 미친년 하나가 광야에서 짐승의 먹이가 되었든 안되었든 그것은 내 알바가 아니다. 어차피 이 집구석 어디에 숨었다 해도 모든것이 잿더미로 변한 뒤에는 숨어서 기어나올 수 없을테니까..........'
'왕이시여. 소녀들은 두렵사옵니다. 어찌하여 갑자기 이제와 다른 언행으로 소녀들을 모멸감과 두려움 속으로...........'
'모멸? 네 년 입에서 지금 감히 모멸이라는 말이 나오던란 말이냐?'
가야네에게 다가 선 티리다테스는 거친 발걸음으로 냅다 가야네의 복부를 힘껏 걷어 챴다. 저만치 날아간 가야네의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야네는 신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모든것이 여기까지 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안광 가득 살기가 그득하고 저주받은 형상처럼 심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티리다테스가 공포에 떠는 수녀들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그가 찾고자 했던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무리를 헤집고 들어가 한 여인의 금발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다짜고짜 당겨서 끌고 나왔다.
히립시메 였다.
'이 더러운 년. 네년이 그 반반한 얼굴과 목소리로 제국의 황제께 분노를 안겨드린것으로도 모자라 여기까지 와서 나 까지 농락했더란 말이냐?
도대체 네 년의 죄가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제국의 분노를 나약한 이나라와 여기 내가 대신 고통과 죽음으로 받아야만 한단 말이더냐? 이제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내가 죽기 전에 네년과 네년들 모두에게 그 죄를 먼저 묻고 죄값을 먼저 치루도록 하겠다. 히립시메. 이 더러운 년. 네가 지은 죄를 알렸다? 어떻게 값겠느냐?'
'왕이시여. 소녀는 그 어떤 죄도 지은 바가 없습니다. 이미 정혼을 한 몸으로서 황제의 청혼을 거절한..........'
티리다테스가 히립시메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내던졌다. 한웅큼의 머리가 뜯겨 나가면서 땅바닥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여봐라. 끝까지 거짓말을 늘어놓는 저년의 혀를 지금 당장 잘라 버려라. 당장.'
병사들이 달려들어 히립시메를 붙잡고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고 나뭇가지를 찔러넣어 혀를 끄집어 내고는 단도로 그녀의 혀를 잘랐다.
주루륵 주르륵 피가 흘러 내렸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 수녀들이 혼절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피범벅이 되었으면서도 젖은 눈망울로 히립시메가 티리다테스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원망이 가득 서린 눈동자였다.
'저년의 눈이 지금 내게 저주를 퍼붓고 있구나. 여봐라. 횃불로 저년의 두 눈을 지져라.'
병사가 달겨들어 들고 있던 횃불로 히립시메의 눈을 짖이겼다. 파고드는 고통에 세차게 몸부림을 쳤다. 마지막 절규였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두려워 말고 용감해져야 해. 히립시메. 기도 해.' 가야네가 외쳤다.
'더러운 년. 미친 년. 꼴깝을 떠는 년. 조금씩만 기다려라. 내가 하나 하나씩 뒤따라 가게 해 줄테니........ 아직 펄떡이는 것을 보니 뒈지지 않은 모양이구나? 저년의 배를 갈라라. 그리고 토막을 내서 문 밖에다 내다 버려라. 날이 새면 모두가 볼 수 있게 말이다. 다시는 기독교니 수녀니 하는 더러운 꼴을 보고 싶지 않다. 어서 저 년의 배를 갈라버려라.'
기독교 역사상 로마인의 신분으로 신앙을 지키다 죽은 첫 순교자가 히립시메 였다고 역사서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미 티리다테스는 이성을 가진 온전한 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열해 있는 근위병들도 눈앞에 펼쳐진 참혹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소나 돼지도 이렇게 처분하지는 결코 않았다. 이것은 아비규환 지옥에나 있을 수 있는 참상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왕의 명령은 지엄했고, 이미 피를 본 후의 병사들이었던 고로 그들도 이미 피에 취해 이성과 양심이 마비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히립시메의 시신을 훼손하기 시작하였을 때, 보다 못한 수녀 한 명이 그대로 온 몸을 던져 히립시메의 시신 위로 쓰러졌다. 동시에 쓰러진 그녀을 향해 왕이 직접 칼을 뽑아들고 휘둘렀다. 목이 잘려 떨어진 수녀의 이름이 마리안느 였다.
왕이 직접 쓰러진 가야네의 머리채를 나꿔챘다.
'이 년들을 모두 밖으로 끌어내라. 성문을 열고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라. 더러운 기독교년들의 최후를 모두 나와서 똑똑히 잘 보아두라고. 아르메니아를 농락한 댓가가 어떤 것인지를 내가 친히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그날........ 서기 290년 10월 9일.
티리다테스 3세 아르메니아 왕은 34명의 수녀들을 바그하르사파트(에치미아진)의 이곳저곳으로 끌고다니면서 한 명씩...... 한 명씩 참혹하게 모두 살해 했다.
'죄인들의 육신을 토막내어서 들판에 내다 버려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라. 남겨진 뼈도 영원히 들판에 그대로 두어라. 만약....... 누구라도 죄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려 들거나 옹호하려 드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물론 일가친척 모두를 반역죄를 들어서 저들과 똑같이 처벌하겠다. 모두 명심하라. 반듯이 짐의 약속처럼 시행될 것이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악마의 모습으로 왕은 왕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온 종일 이런 미친듯한 왕의 파행을 뒤쫓아다니며 벌어지는 사태를 샅샅이 살피던 차림새가 낯선 한무리가 있었다. 로마의 사신단이었다.
자주색 원로원 복장의 노인이 옆의 병사에게 귓속말을 속삭이자 이내 그 병사는 말을 달려 성밖으로 나갔다. 그는 곧바로 국경을 향해 달려나갔다. 원로 노인의 입가에 희미하게 환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티리타테스는 괴씸한 놈이기는 하지만 겁쟁이라고...... 이렇게 으름짱을 놓으면 어떻게든 제놈 스스로가 조치를 취할거야. 아마 놈은 내가 무서워 계집들을 내 줄수는 있어도 끌고 로마로 오지는 못할껄? 왔다가는 살아서 못돌아 갈테니까. 하하하하하하. 놈이 계집들을 넘겨 주면 즉시 놈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참수해 버리라고. 제국의 황제가 그깟 계집 하나때문에 치정에 얽혀서 이런 사단을 만들었다고 하면 세상의 놀림꺼리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자니........ 황제의 체면이 뭐가 되겠느냔 말이야? 그렇게 대충 마무리 짓고 돌아오라고. 대신 티리타테스 이 놈. 단단히 혼쭐은 놓고 오게. 당장 요절을 내고 싶지만........ 건너편 페르시아 놈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지 않은가? 좀 더 때를 두고 보아야 하는게 좋겠어. 대신 티리다테스 놈을 버릇을 고쳐서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가 앞으로 페르시아를 상대할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겁도 주고 어르고 달래도 주고........ ㅎㅎㅎㅎㅎ 자네가 알아서 하게.'
자신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자신에게 이르던 말이 모두 생각이 났다.
모든것이 황제의 짐작대로 되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자신이 힘들지 않게 티리다테스가 칼부림까지 대신 해주었으니 말이다.
사신은 이제 혼쭐에 넋이 달아난 티리다테스를 어르고 달래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도 왕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히립시메 교회와 공동묘지.
- 가야네 교회(전경사진이 흔들려서 네이버 퍼옮)
이쯤 대목에서......... 아르메니아 역사상 용맹스러움과 현명함에서 두번째 가라면 서운해했을 정도로 칭송이 자자하던 티라다테스 3세 왕이
하루아침에 악마로 전락해서 34명이나 되는 수녀들을 무참하게 살륙하게 되었을까를 되집어 생각해 볼 만도 하다.
그러나 어느 기록에서도 그가 왜, 무엇때문에 돌변하여 광기에 가까운 참상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차분하게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그날 밤 그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질러진 참상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로서는 그렇게 결정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르메니아에 고대때부터 전해내려오는 전설에 이날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을 보면 아르메니아 인들은 누구나가 이날의 참상을 여실히 기억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이날의 살인극에 동원된 군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 군인들은 모두 악마의 형상을 한 저승사자들이 성벽처럼 둘러싼 지옥에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서로를 향해 칼질을 해대고 서로의 육신을 찢어서 뜯어먹는 일이 영원히 반복되어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참상을 저지른 원흉인 티리타테스 왕은 야생 멧돼지로 변해서 평생을 악마형상을 한 사냥꾼들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가 성 그레고리(게하르트. 그레고리우스.게오르규 동명인)에 의해서 겨우 구원받았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이 말하길 이날의 '34명의 수녀가 순교한 사건'이 아르메니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결정적 계가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결코 아니다. 먼 훗날 이날의 참상이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공인에 있어서 어떤 단초가 되었다고는 볼 수 있겠으나, 결정적 역활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성자인 그레고리를 지하감옥에서 풀어 준 왕이 바로 티리다테스 3세 왕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태처럼 34명이나 되는 수녀들을 학살하고 기독교 박멸을 명령한 왕 또한 그였다. 그런 그가 다시 기독교를 공인하기에는 이번 사태의 파장이 너무나 컸고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이날의 사건은 서기 290년 이었고.......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공인은 서기 301년이었으니 아직도 10년 이상을 더 흘려보내야만 했다.
1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고.......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편........ 아자트 계곡을 떠나온 그레고리 수도사가 바그하르사파트(에치미아진) 도성을 목전에 두고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시각은 서서히 태양이 서산에 걸리던 때였다.
검고 탁한 연무가 도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연무 위로 마귀들이 넘실넘실 넘나들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진한 피냄새가 진동을 했으며 도성은 깊은 침묵속에 잠겨 있었다. 성벽 너머 이른 초저녁에 횃불이 빼곡하니 환하게 밝혀진 곳은 왕궁이었으며, 왕궁을 제외한 도심은 고요속에 더더욱 깊은 침묵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호리병을 열어 성수를 뿌리며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내 도성을 에워싸고 있던 검은 연무를 걷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미처 날뛰듯 하던 마귀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들판 가득 서성거리던 짐승들도 숲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는 도성을 향해 나아갔다. 궁성문을 기키는 군사는 양쪽에 서 있으나 그들의 넋이 모두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는 목각인형처럼 그냥 창을든 채 서있을 뿐 그레고리가 열려진 성문을 그대로 통과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먹구름을 걷어낸 바람이 점점 거세어져 갔다. 먼지가 사방에서 일고 있었다.
세찬 바람소리와 이따금씩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바탕 먼지가 휩쓸고 지나간 뒤로 핏자국과 조각난 시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참상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주여.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어찌하여 저를 이리 보내셨습니까? 이제부터 저를 어디에 쓰고자 하십입니까? 가르쳐 주소서.'
그레고리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참혹한 현실이 무슨 사단에서 생겨났는지 자초지종을 알 수 없었다. 또한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일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조차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희미하게 나마 어디선가 여인들의 울름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집을 찾아 대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계시요? 계시요? 아무도 없소?'
그러자 이내 숨소리처럼 겨우 울려나오던 울음소리마져 끊겨버리는 것이었다. 모진 바람소리만이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자트 계곡에서 온 수도사 그레고리라는 사람이요. 단지 이것이 무슨 일인지 연유만 알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나이어린 처자가 하나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레고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엎드려 수도사의 무릅에 매달려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처럼 그레고리도 그 처자를 알아 보았다. 지독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딸을 아비가 둘러 업고 아자트 계곡의 용하다는 수도사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레고리가 한동안 그녀를 돌본 덕분에 말짱하게 병이 나은 그녀는 한동안을 더 수도사들의 수발을 들며 머물다가 집으로 돌려보낸 적이 지난해 있었는데 바로 그 처자였다.
그레고리는 처자로 부터 이날 하루동안 벌어진 일의 전모를 전해들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이가 갈리고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달려가 티리타테스의 육신도 똑같이 토막을 내어 들판에 내던져 주고 싶었다. 굳이 수녀들에 대한 또는 기독교 탄압에 대한 그런 분노가 아니었다. 이것은 신을 떠나서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일이 결코 아니었다. 차마 가축이나 짐승일지라도 이렇게 대할수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이미 자행된 것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주여. 당신의 뜻은 정녕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참상이 당신의 뜻이라면 제발 거두어 주십시요. 부족한 저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저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십니까? 이런 참상 앞에서 저를 어디에 쓰시고자 하십니까? 도저히 저는 더이상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레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에게 하소연을 하기보담은 그 정도를 넘어 신을 하염없이 원망하고 있었다.
'사도시여. 왕께서는 수녀들의 시신을 들판에 내던지면서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거나 돌보려하는 자를 똑같이 처형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짐승의 먹이가 되고 뼈만 남았어도 누구도 손을 대면 똑같이 엄한 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모두가 집안에 숨어서 내다보기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내리면 짐승들이 내려와 달려들 것입니다. 저희는 연약한 여자이다보니 목숨 빼앗아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수습할 힘이 없사옵니다. 사도시여. 부디 사태를 헤아리셔서............'
순간 수도사는 무엇인가 커다란 쇠망치가 그레고리의 머리를 세차게 때린것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어린 처자의 한마디에 그레고리는 당면한 현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처자네 집 담장 옆으로 수레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것이요. 허니 내가 저기 수레를 좀 빼앗아가는 것으로 하고 이용을 좀 해야겠소. 쌓아놓은 풀더미도 좀 쓰겠소. 차후에 문제가 되면 아자트에서 온 그레고리가 강제로 빼앗아 갔다고 이야기 하시요. 그러면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요.'
그레고리는 수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처자의 말대로라면 처참하게 토막이 난 채 여기저기 흩뿌려진 신체 조각들이 히립시메의 시신조각들 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마당 구석으로 머리가 잘려 나간 채 엎어져 있는 시신이 마리안느 수녀의 시신일 것이다. 다가서려니 벌써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호리병에서 성수를 꺼내 시신들 위에 뿌렸다. 그리고 다시 기도문을 외우며 나뒹굴던 마리안느 수녀의 머리를 들어 몸체 옆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흩어져 있는 히립시메의 신체조각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젊은 처자와 함께 있던 여인 셋이 횃불을 켜들고 다가왔다.
'돕고 싶습니다. 밤이 찾아왔으니 더욱 시간을 지체할 수 없겠으며, 이 같은 일이 여기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기에 사도께서 모두 찾아다니시기엔 불가능할것입니다. 소녀들이 장소를 모두 알고 있으니 앞장 서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요.'
'왕이 엄하게 말했다 하지 않았느냐? 너무도 위험한 일이니 어서 돌아가도록 하려무나.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날이 새기전에 무사히 마치도록 허락하실것이야. 나에게 맡기고 돌아가도록 해라.'
'예수님과 정혼한 수녀의 처지는 아니겠으나 저희 또한 신앙을 위해서라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돕고 싶습니다,'
그때였다. 저만치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수레를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평범한 아르메니아의 백성이었다. 다가오는 그 사람도 기독교인인지 그레고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알지못할 힘이 샘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또 저 뒤에서 누군가 횃불을 켜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그 자리에 마리안느 수녀를 묻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좀 더 지나서 히립시메의 나뉘어진 신체들을 수습하고 나서 가까운 인근의 공동묘지로 수레를 끌고 갔다. 34명이나 되었기에 순절한 가까운 곳에 모셔 묻기는 하되 차후에 혹여 누군가가 찾거나 유족이 올 경우를 대비하여 혼동이 되지않게 구분하고 기억되게하려 함이었다. 하여 히립시메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400년 이상이 지난 서기 618년에 성녀로 추대된 히립시메 성녀의 무덤 위에 '히립시메 교회'가 세워졌다. 34명의 순절한 수녀들은 모두 성인으로 추대 되었으며, 마리안느 묘에 마리안느 교화, 가야네 무덤 위에 가야네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날 밤, 자신으로 하여 그런 죄악을 저지르게끔 내몰아세운 운명을 저주하면서 마구 들이킨 독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못하고 정신마저 혼미해진 상황에서 화급한 보고가 도착했다.
'페하. 한무리의 불손한 자들이 페하의 엄명을 무시하고........ 지금 횃불을 들고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하명하여 주십시요. 달려가서 모조치 죽여 조각을 내 버리겠습니다.'
'무엇이라고? 짐이 그렇게 호통을 쳤었건만.......... 흐흐흐흐.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시신을 수습하는 자들이 있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소인이 직접 달려가 모조리 요절을 내 버리겠습니다. 심려 놓으십시요.'
'하하하하하하. 이보게 근위대장. 지금 누구를 요절낸단 말씀인가?'
'네에? 페하.'
'치졸하고 멍청한 것은 바로 나일세. 왕이 부족하고 멍청해서 그렇게 명을 내릴 수 밖에 없었는데......... 자기 목숨 돌보지 않고, 모조리 죽이겠다는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시신을 수습하려 스스로 나선 곧고 올바르고 똑똑한 백성을 요절을 내겠단 말인가? 지금? 요절을 내려면 죽어마땅한 나를 먼저 내리쳐야 하지 않겠는가? 요절을 내도 나를 먼저 요절을 내야지? 아니 그런가?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이야............'
'페......... 페하............. 어찌하시려고...........'
'그들을 이끄는 사람이 누군자 알아오게?'
'그레고리라 합니다. 아자트 계곡에서 온 수도사라 합니다.'
'그레고리라......... 그레고리......... 그레고리...........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 그레고리............'
'페하. 국왕의 명령은 존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내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리겠다. 저들의 행함에 그 누구도 간섭하지 마라. 그대로 두어라. 새로운 명령이다. 모두 물러가라. 혼자 있고싶다. 내가 부를 때까지 그 누구도 내 앞에 얼씬 거리지 마라. 이번 명을 어기는 자도 내 반듯이 요절을 내 버릴 것이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이 소식은 순례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마침내 카파토키아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소식을 접하는 순간 니노 수녀는 그자리에서 혼절했다. 그리고 몇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바위동굴 다락방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차라리 그날 그자리에서 함께 죽었어야만 했다고 자책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서둘러 떠나온 길이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녀로 하여금 떠나오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다음 지시는 내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것이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그녀는 점 점 더욱 심하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무려 이후로 십년 동안을 니노 수녀는 떨쳐낼 수 없는 고통스런 나날속에 살아가게 된다.(니노 할머니 이야기는 조지아 편에서 이어서......)
-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방문 기념비. 왼편은 카톨릭의 수장 교황. 오른쪽은 정교회의 수장 대주교. 종교의 화합을 상징한다.
- 에치미아진 대성당. 역사상 최초의 공식 교회.
'수녀 학살'의 이해당사자였던 티리다테스 왕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그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전설속에 그가 '야생 멧돼지'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단적으로 그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낮이고 밤이고 환하게 횃불을 밝히게 했다. 눈을 감으면 항상 어디에서든 수많은 악마가 자신을 공격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변에 일체의 여자가 오지 못하게 하였다. 모든 여자의 얼굴에서 절규하며 죽어가던 수녀들의 모습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대인기피증을 심하게 앓았다. 누군가가 수녀들을 대신하여 복수에 칼날을 자신의 심장에 꼿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어 살게 되었다.
하여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들판으로 나아가 근위대의 철저한 보안속에 군영에서 장막 생활을 하게 되었다.
살아 움직이는 군대가 자신의 주변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야 그나마 겨우 안심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무심하게 7년여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세상은 그날의 악몽을 서서히 잊어가기 시작했고 티리다테스 왕 외에는 모두가 예전처럼 평온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어느날, 로마에서 사신이 도착했다. (서기 297년 가을)
로마가 페르시아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동부의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진격해 페르시아의 수도인 이스파한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통보였다. 사실 페르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로마와의 국경지대인 아나톨리아 평원은 지난날 아르메니아의 영토였다가 빼앗긴 곳이었다. 대단히 넓은 아르메니아의 영토로 언제고 반듯이 회복하고 말겠다는 야먕을 티리다테스는 가지고 있었다.
제국대 제국의 싸움인만큼 전투 자체는 물론 향후의 파장이 엄청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44~316)는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 3세(Tiridates, 250~330)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것과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적의 보급로를 끊어줄것을 요청했다. 예전에 자신들의 영토였기에 길잡이가 되는것은 문제가 없겠으나, 약소국의 입장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가 한정된 마당에 페르시아 제국의 깊숙히까지 침투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로마의 군대가 그곳으로 진격해 올때까지 전선을 사수해야 한다는 임무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모험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그렇다고 로마의 제의를 거절하거나 뿌리칠 처지도 못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새로운 제안 또한 치명적인 유혹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고 보급로를 차단해 준다면 이번 전쟁에서 빼앗는 옛 아르메니아 영토 전부를 고스란히 넘겨줄 것이며, 로마는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후 나머지 페르시아의 전역을 가지겠다는 제의였다. 실로 거절할 수 없는 기가막히게 솔깃한 제안이었다. 티리다테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야망이 바로 영토 수복이란 숙원사업 아니었겠는가?
아르메니아와 로마는 차근차근 페르시아를 침공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두 해가 바뀌고 봄이 무르익었을 즈음에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다.
아르메니아의 노련한 장수가 로마제국군대의 선봉에서서 아나톨리아 평원을 향해 질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티리다테스는 국운을 좌우할 커다란 전쟁에 몸소 전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국경을 넘어 안으로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적의 방어 진지 하나 하나를 격파해 들어갈 때마다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라는 광풍속에 휘말리고 난 후였다. 그가 페르시아 깊숙한 곳까지 마침내 진격하여 교두보 영활을 하던 성채를 점령하고 페르시아군의 보급로를 완전하게 차단하였을 때는 데리고 온 군대 4만 중에서 거의 일만오천이나 잃고 난 후였다. 너무나 큰 희생을 댓가로 치뤄야만 했던 것이다. 차단된 보급로를 다시 연결하려는 페르시아 군대의 무차별 공격에 이제는 전력을 다해 방어를 해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져 갔고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이 위급한 상황에 평원을 가로질러 진군했던 로마의 군대가 마침내 들이 닥쳤다.
로마와 아르메니아의 군대는 마침내 합류했고 그 기세를 몰아 페르시아 깊숙히 앞으로 앞으로 진격을 해 나갔다.
그러자 수세에 몰린 페르시아의 첩자들이 급하게 로마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로마황제의 칙서가 사자를 통해 전쟁중인 로마군 총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페르시아 왕이 화친을 요청해 왔으니 잠시 현 전선을 고수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는 전갈이었다.
티리다테스는 분노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여기까지 왔는데, 승기를 잡았을 때 전투를 빠르게 이어가서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옛 영토를 되찾아야지만, 그리고 차후 이번 전쟁을 무사히 끝내고나서 꾸준하게 군사력을 길러서 언젠가는 반드시 로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립국가로 성장해 지난날의 복수를 반듯이 하고야 말겠다는 깊은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라나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페르시아는 다급하게 첩자들을 통해 아나톨리아 평원을 빼앗기는 만큼 발칸반도 쪽으로 기습침공을 하겠다는 거짓 정보를 로마측에 흘렸다. 아울러 첩자들을 시켜 황제에게 불만이 많은 원로원 의원들을 매수해서 황제에게 반대하는 로마시민들의 여론을 조장함과 동시에 주변국의 이상한 조짐과 로마 군대내의 묘한 기류들을 거짓정보를 통하여 유포시키기 시작했다. 비록 소문이었지만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했거나, 높은 자리에 오른사람일수록 사소한것에 소심해 지기 마련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는 있으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의 안전과 권력의 보장이었다. 로마의 군사력이 전쟁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뒤따른다면........ 언제 어디서 쿠데타라도........ 오래전부터 이미 로마제국의 권력암투는 한계를 넘어서 있던 상황이었다. 황제는 벌컥 겁부터 났다. 서둘러 군대를 다시 불러들여야만 했다. 그러자면 페르시아와 화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니스의 사신이 티리다테스 왕에게 도착했다.
'즉시 전쟁을 중단하라. 로마와 페르시아는 화친에 서명했다. 티리다테스 왕은 군사를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가라. 빼앗은 아나톨리아 평원은 일단 로마의 군대가 머무는 전선으로서 당분간 병참전진기지로 활용할 것이다. 언젠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나면 영토를 모두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그때 지킬 것이다. 그러니 그 때를 기다리며 고국으로 돌아가 내정에 힘쓰도록 하라.'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던 티리다테스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속았다. 그 커다란 희생을 치루고 난 지금에...... 애초부터 로마는 그 땅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이용만 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분노를 사그라트리지 못하고 덤벼들었다가는 단번에 아르메니아를 멸망시키고 말 것이니......... 군사력의 절반 가가이를 이미 잃고 말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 배신자 놈. 잘게 찢어서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네 이놈.'
절규하듯 저주를 퍼붓는 고함소리와 함께 갑자기 티리다테스가 앉았던 자리에서 그대로 땅바닦에 쓰러져 버렸다.
아르메니아 군은 사경을 헤매는 티리다테스를 마차에 싣고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티라다테스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백약이 무효했다.
어쩌다 정신이 들면 여전히 디오클레티아누스 로마 황제를 향해 저주를 퍼붓다가는 또다시 이내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가을이 지나고 긴 겨울이 찾아들었건만 티리다테스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이제는 거의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기 조차 힘든 지경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숨소리조차 고르지 못할만큼 위급한 상태였다. 어린 태자는 아직 국정을 돌볼처지가 아니었으며 평소부터 왕비는 정치를 멀리해 온 사람이었다. 주변의 국제정세는 점 점 혼란스러워져 가는 시기였으며, 혹시나 로마가 이 때를 기회다 싶어 쳐들어 올까봐 전정긍긍할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아르메니아에게는 아직 티리다테스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그는 이미 뼈만 앙상하게 남아 숨쉬기 조차도 힘겨워하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이었다. 시력마저 급격히 떨어지더니 이제는 어쩌다 의식이 돌아와도 자신의 아들인 어린 태자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신하들과 백성들은 위중한 왕의 장례 절차와 준비에 들어갔다. 그게 순리였고 그것이 운명이었다.
첫눈이 온통 아자트 계곡을 뒤덮었다.
온통 대지를 뒤덮고도 남을만치 첫눈이 내렸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세찬 바람소리와 흩날리는 눈발 외엔 계곡에서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계곡 안쪽으로 울려 퍼졌다. 겨울이 찾아들면 봄이 올때까지 사람의 인적이 모두 끊기는 아주 험난하고 먼 외딴 골짜기가 바로 아자트 계곡이었다. 이곳저곳의 동굴속에서 바람을 막으려 매다아 놓은 거적떼기들이 들춰지면서 많은 수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기독교인을 몰아내려는 로마의 군대라 해도 이미 겨울이 한참 시작된 지금 이곳에 들이닥칠 수는 없었다. 모든 수도사들이 내려다 보는 저만치 아래 계곡의 입구에 한무리의 말을 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틀림없는 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앞쪽으로 한 사람만이 말에서 내려 여기 동굴 기도원을 향해 걸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에 힘이 들었는지 미끄러졌는지 자주 넘어지곤 했다. 수도사들은 힘에 겨워하면서 동굴로 다가오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혹한의 겨울 속에서 쌓인 눈과 휘날리는 눈보라를 뚫고서 한 여인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누구일까?
도대체 누가 무슨 연유로 이렇게 무모한 일을 감행한단 말인가?
궁금함을 참지못한 서너명의 수도사들이 동굴 아래로 내려갔다.
몹시 힘에 부쳤음인지 수도사들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눈밭에 쓰러졌다. 지쳐 쓰러진 사람은 이미 노년에 접어든 여인이었다.
'그레고리 수도사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수도사님은 벌써 나흘째 단식 기도에 들어가 계십니다. 사흘은 더 지나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단식 기도중에는 저희는 물론 그 누구도 접촉을 허락하지 않고 계십니다.'
'부탁입니다. 아주 다급하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왔습니다. 제가 수도사님께 제가 찾아왔음을 알릴 수 있게만 도와 주십시요. 단 한번만 고하고...... 물러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
여인의 너무도 절실한 표정을 보았으매 수도사중 누구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수도사들은 여인을 부축하여 동굴 안으로 안으로 계단을 오르고 작은 구멍을 통하여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드리운 작은 동굴안의 다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수도사들은 한걸음씩 물러나 옆방의 동굴로 자리를 옮겼다.
많이 지친 모습이었지만 여인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바로 고쳐 잡았다. 남루한 차림하고는 별도로 몸 전체에서 어떤 기품이 흘러나왔다.
그러수록 수도사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그레고리 수도사님. 제가 찾아왔습니다.제가 지금......... 수도사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애절한 그 하소연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어둠속에서 그레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주마마께서 어떻게..........'
'조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요........'
그녀는 바로 율리아나 공주였다. 티리다테스 3세의 고모가 되는 여인이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까지 호르비랍에 갖힌 그레고리를 위해 십삼년동안 겨울옷을 지어서 보내주었고, 조카인 티리다테스에게 진실을 당당하게 말해서 결국 그레고리를 지하동굴에서 석방시켜주었던 커다란 역활을 한 사람이었다. 34명의 수녀 학살이 벌어지고나서 그레고리가 나타나 시신을 수습하고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떠나지않고 병자를 치료하고 기적을 행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줄곳 아주 가까운 곳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면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다. 혹시라도 왕명을 어긴 죄로 누가 그를 해치려 한다면 나서서 막아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함께 궁궐에서 소꿉친구로 지낸 동무가 이미 몇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거의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겨우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레고리는 이 여인의 절실함이 무엇인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밤 기도중에 신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누군가가 오늘중에 어떤 이유로 찾아올 것임을 음성을 통해 이미 들었었다.
그레고리는 이미 떠날 채비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다만 그가 몰랐던것은 찾아올 사람이 율리아나 공주일 것이라는 사실만은 알지 못했다.
성수를 바가지에 담아 공주에게 건넸다. 한모금 받아마신 공주는 이내 모든 피로를 잊고 활기를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레고리는 자신의 호리병에 생수를 가득 받아 담았다.
참으로 오랫만에 타 보는 말이었지만 그레고리는 전혀 망설임 없이 공주를 호위해 온 기병들의 뒤를 따랐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쌓인 눈으로 인해 횃불을 켜지 않고서도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바그하르사파트(에치미아진) 도성이 아직 너무나 멀고 눈길은 험난하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울리아나 공주가 도성에 도착해 왕의 침전에 들었을 때, 모처럼 티리다테스는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미 시력을 잃은 왕은 목소리로서 태자와 신하들을 구분해 가며 거의 마지막 유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주는 자신이 아자트 계곡에 다녀 온 일이며, 문 밖에서 그레고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고모님. 이 추위를 무릎쓰시고 그 먼길을 다녀오셨단 말씀이십니까? 이 죽어가는 조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마움이겠으나........ 이젠 다 부질없는 일일뿐입니다. 이 조카는 더 이상 아무런 여한이 없사옵니다. 태자가 아직 너무 어려 국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에........ 아르메니아의 미래가 걱정될 뿐입니다. 고모님. 고모님께서 태자가 성장할 때까지 국정을 맡아 주세요. 조카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니라....... 어쩌면 선왕께서도 아니였고........... 고모님께서 이 나라의 왕이 되셨어야만 했다고 말입니다. 고모님. 이 나라를 맡아주세요.'
'아르메니아는 지금의 왕이신 폐하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직 폐하만이 이 나라를 올곧게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녀왔습니다. 그레고리 수도사를 한 번 만나 주세요. 그가 폐하에게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고모님. 지난 날 제가 저지른 죄를 아시지 않습니까? 태양신께서도 제가 저지른 죄에 책임을 해소시키지 못하셨습니다. 죄없는 기독교의 수녀들을 어쩔 수 없이 모조리 살륙한 죄가 너무나 큰데........ 같은 기독교인 처지인 그레고리 숙부께서 저를 용서하시겠습니까? 괜한 걸음을 하셨습니다.'
'수도사께서 저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분이 믿고 따르는 하느님께서 폐하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다고요. 폐하께서 아직은 하실 일이 많이 남아있음에........ 아직은 때가 이니라고 말입니다. 제발 이 고모를 생각하신다면....... 그레고리 수도사를 한번만 만나 주세요. 고모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율리아 공주도 티리다테스 왕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자 둘러서서 듣고 있던 신하들의 반대가 뜨겁게 들고 일어났다.
티리다테스 왕이 역적의 자식이자 기독교인인 그레고리를 만나면 안된다는 여론이었다. 그레고리가 반듯이 쇠락한 왕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모종의 음모를 가지고 찾아왔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모두 명심해 들으시요.'
비록 힘없이 가녀린 음성이었지만 엄숙하고 비장함이 배인 왕의 음성에 죄중은 이내 침묵을 유지했고 왕은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왕으로서의 마지막 명령이요. 누구도 남지 말고 모두 물러가시요. 그리고 그레고리 숙부를 들게 하시요. 내가 마지막으로 숙부를 단독으로 만나겠소. 이 시간 이후에 이방에서 나와 그레고리 숙부간의 일은 모두 내가 책임이요. 어떤 일이 벌어지던 숙부에게는 죄가 없소. 설혹 내가 죽더라도 그 책임은 모두 내가 질 것이요. 그대들은 숙부를 무사하게 돌려보내 줄 것이며, 차후로 그에게 어떤 위해나 책임도 물을 수 없소. 내가 죽고나면 국정을 포함한 모든 사안은 고모이신 율리아나 공주께 상의 하시도록 하시요. 또 무조건 그 분의 뜻을 받들도록 하시요. 그것이 짐의 마직막 유언이요. 이제 모든것은 고모께서 알아서 하실것이요. 그분께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시요. 이제 되었소. 모두 나가시요. 내가 혼자 그레고리 숙부를 만나 뵙겠소.'
모두 물러갔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챔내 그레고리가 혼자 왕의 침전에 들었다.
'숙부. 오랫만에 다시 뵙습니다. 조카가 이토록 허약해져서 감히 일어나 숙부를 맞이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요.'
'폐하의 병환을 전해들었으나 감히 스스로 나서서 일찍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용서하십시요. 폐하.'
'숙부......... 이제 조카에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하여........ 지난날에 제가 저지른 죄악에 대해 적어도 숙부에게만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부디 이 가여운 조카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였기에 오늘...... 저를 다시 여기까지 보내셨습니다.'
'조카의 때가 이르렀다고 이젠 숙부까지 거짓말로 저를 위로하려 하시는군요. 제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죄 없는 처자들의 목숨을....... 그것도 저 하나 살자고 개 돼지만도 못하게 서른 네명이나 참혹하게 살륙하였는데......... 어찌 숙부의 신께서 저를 용서하신단 말씀이십니까? 평생을 받들어 모신 태양신 미트라께서도 버린 조카입니다. 거짓 위로는 이 조카에게 위안이 되지 못함입니다.'
'폐하.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폐하의 고충과 깊은 속내를 모두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분명하게 폐하의 죄가 모두 사해졌음이라 하시었고, 아직도 살아서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위로가 되는 감사한 말씀이기는 하나.......... 숙부. 이 조카는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나님께서 저를 이리로 보내신 뜻이 있습니다. 잠시 제가 폐하께 다가가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숙부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대신들에겐 당부를 해 두었습니다. 숙부껜 어떤 위해나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숙부 뜻대로 하세요.'
'폐하. 하나님께선 폐하를 선택하셨고 아직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용기를 가지세요.'
'숙부. 조카의 때가 여기까지임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먼 길을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 폐하를 보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레고리는 자신이 가지고 온 표주박을 열어서 성수를 꺼냈다. 그리고는 성수를 손에 따라 조심스레 티리다테스의 얼굴을 씻어내렸다. 그리고는 남은 성수를 티리다테스의 눈 위에 뿌려 흘려 보냈다. 그리고는 왕의 손을 부여잡아 그의 가슴위에 올려놓고 그레고리는 엎드려 하느님께 간곡하게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이어질수록 티리다테우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아쉬움과 후회의 순간들이 그의 심장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티리다테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도중인 그레고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예전처럼 모든 사물들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날 그자리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레고리의 기도에 티리다테스의 병이 말끔하게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이날의 기적은 역사서에도 똑같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레고리가 나타나서 야생 멧돼지로 변했던 티리다테스를 다시 사람으로 환생시켰다'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
금방 쓰리질 듯 삐쩍 마른 몸상태였지만 티리다테스의 병이 말짱하게 회복 되었다.
그가 정신을 되찾고 숙부를 찾았을 때, 그레고리는 이미 아자트 계곡으로 돌아간 후였다.
해가 바뀌고 어느 따사로운 봄 날.
율리아나 공주가 단신으로 또다시 아자트 계곡을 찾아왔다.
'제가 스스로 찾아뵈온것이 아니고, 이번엔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레고리님을 초대하고자 왔습니다.'
'그냥 사람을 보내셨으면 찾아뵈었을 것을 공주께서 이 먼곳까지 직접 오시다니요........ 무슨 제가 도울 긴급한 일이라도...........?'
'제가 직접 뵙고 긴히 말씀 드릴 일이 있어서.......... 폐하께서 구은을 입으신 이후로 자주 광야에 혼자 나가셔서 자신을 구해주신 그레고리님의 하나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다 합니다. 지난 날.... 결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어찌하여 생명을 구해 주셨는지......... 깊이 생각을 하셨답니다. 수사께서 말씀하셨던 '앞으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을 헤아려보려 부단히 애썼더랍니다. 더불어 오랫동안 우리민족의 수호신이었던 태양신 미트라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폐하께서.........'
율리아나 공주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그레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 무슨 화가 미쳤습니까?'
'아닙니다. 폐하께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미트라 신전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거짓 우상이라 하셨답니다.'
'신전을 부셔버리셨다고요? 우상이라시면서요?'
'그래서 저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레고리님께서 방문해 주셨으면하고......... 말씀 전하여 달라하시기를.......... 그레고리님의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를 보내시면서 폐하께선........... 폐하께선 서른 네분 수녀님들의 무덤을 손보러 나가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아.멘.
율리아나 공주는 돌아갔고, 그날밤 하나님께 이 사실을 아뢰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황금 망치가 그레고리의 머리를 내려치면서 그 혼란속에 어떤 한 장소가 분명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곧바로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 수도사는 바그하르사파트로 가서 티리다테스 왕을 만났다.
왕의 의중은 확고했다.
왕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주고 아르메니아에 새생명을 불어넣어주신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양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다. 거짓 우상이었던 태양신 미트라의 신전을 헐어버리고, 이번엔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께 교회를 지어 바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간밤에 그레고리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며 각인시켰던 땅에 마침내 새 역사의 첫삽을 떴다. 동시에 아르메니아의 국교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로 공인 선언했다.
그 때가 서기 301년이었으며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에치미아진 사도교회 곧 대성당' 이다.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301년에 아르메니아 국책사업으로 시작해 304년에 지금의 대성당을 완공했다. 현재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중.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티리다테스 3세는 이후 30년을 더 아르메니아를 통치하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열어갔다.
여기부터 이후의 일에 대하여 서로 다른 두가지 버젼의 전설이 아르메니아엔 전해져 내려온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하나님께 바쳐지기는 하였으나 티리다테스 3세가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물로 지어 준 성당이다. 왕은 거대한 교회를 세워서 은인인 그레고리를 가까이서 자주 대하고 싶었다. 하여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건축하고 초대 주교로 그레고리를 맞이했다. 하여 그레고리가 죽을 때까지 초대 대주교로 봉헌했다는 이야기가 첫뻔째이다.
두번째는, 대성당은 완공이 되었으나 그레고리가 대주교에 취임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설이다. 그레고리는 안락한 대주교의 생활을 거절하고 젊고 능력있는 후배에게 대주교를 양보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일생동안 죽는 날까지 아자트 계곡의 동굴수도원에 기거하면서 인근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이야기다. 나는 아마도 후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러한 그레고리의 선행과 명망은 날로 높아져만 가서 훗날 아자트 계곡은 아주 영험한 기독교 성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아르메니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이 앞다투어 시주를 한 덕분에 그레고리가 수도하던 동굴수도원을 점차 확장했고, 동굴에 이어 붙여서 거대한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으니, 바로 오늘날의 '게하르트 수도원' 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레고리 수도원인 것이다.
--- 많이 길어졌네요. 어떻게 초대교회 탄생의 비밀이 좀 이해되셨나요? 유일한 생존자 니노 할머니의 이야기는 '조지아 편'에서........
다음 이야기는 츠바르트노츠의 고고유적지로 이어지겠습니다. 부족한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 에치미아진 대성당 경내의 공동묘지.
--- 대성당에서 가야네 교회로 향하던 중 만난 아르메니아 전통 구기종목 시 대표선수들 연습장면.
---- 올림픽 종목으로 치자면 레스링 그레꼬 로망형 프리 스타일이라 치면 되겠다는 아르메니아 전통 스포츠. 친절한 코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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