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내가 하나 있었다.
자신만의 아주 독특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내였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단 한 명, 교황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교황 정도는 되어야 자신이 특별히 상대해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도 그냥 꼰대라고 놀리며 우습게 여겼다. 라파엘로를 약간의 재능을 가진 후배 정도로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자신과 교황, 두 인간의 존재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다 그냥 주변인이었다. 150년 정도를 앞서 살다간 단테 정도라면 존경해줄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배라고 생각했다.
교황은 모든 유럽인들의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구도 감히 교황 앞에 섣불리 나설수가 없었고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 젊은 사내만은 아니었다. 불쑥 찾아가 요구사항을 늘어 놓기도 했고, 툭하면 대들고 따졌다. 교황에게 머리통을 얻어 맞은적도 있었고, 감옥에 가두겠다 교회에서 파문시키겠다 여차하면 쓱싹 죽여버리겠다고 협박도 자주 받았다.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면전에서 '흥'하며 콧방귀를 꾸는가 하면 갖은 꾀로 교황을 농락하고는 좀 심했다 싶으면 줄행랑을 쳐서 어디론가 내빼기도 다반사 였다. 혼내주려 찾다가 찾다가 체포령까지 발령했지만 아무리 그래보았자 사내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다 좀 잠잠해진다 싶으면 또 교황 앞에 불쑥 나타나 시비를 걸곤 했다. 어디 그 뿐인가? 툭하면 교황에게 공수표를 남발했다. 교황도 번번히 잘 속아넘어가고....... 그 공수표는 교황이 죽은 다음까지도 교황의 유족들에게 한동안 끌려다니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교황까지도 차마 어쩌지 못하고 머리를 싸매며 질질 끌려다닐만큼........ 그는 세상에 둘도 없을 위대한 천재였다.
그 젊은 사내를 세마디로 표현해본다면.......... '얄밉고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놈' 이라고 해야겠다.
한마디를 더 보태 다시 표현한다면 .......... '못생긴게 얄미운짓은 골라서 하고 거기에 싸가지까지 없으니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을만치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하겠다.
그 사내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였다.
(미켈란젤로)에 대한 많은 오류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잘못된 이야기를 하나 먼저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평생 조각만 하던 그에게 교황이 심하게 협박을 하여 어쩔수 없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붓과 페인트를 가지고 그림이라고 그려본 것이 '천지창조'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 와전된 이야기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그 정도는 불가능하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 정식으로 그림에 대해 교육을 받은적이 있다. 그리고 꾸준히 혼자 그림을 그렸다. 다만 자신의 적성이 조각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림을 등한시한 것이었다. 조각을 위해서도 조각이나 회화의 기본인 데생을 꾸준히 했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밑그림(데생. 스케치)를 남기지 않기로 유명했다. 다빈치의 경우는 스케치(밑그림)을 아주 많이 남긴 대표적인데 반해 미켈란젤로는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이전까지의 스케치(밑그림)나 자료들을 철저하게 없애 버렸다. 그런 부분에서 나온 와전된 이야기이고, 본업은 분명 조각가 이지만 상당 수준의 그림을 그릴줄 아는 화가 이기도 했다. 또 이부분에서 당시 자신보다 더 유명한 화가 레오나드로 다빈치에 대해 적개심을 느낄 정도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0살이나 연상인 다빈치를 단 한번도 예의를 갖춰 상대한 적이 없었다. 회화(미술)을 대표하는 다빈치를 경멸하였기에 조각가인 자신에게 그림을 연관시키는 것을 지극히 꺼렸던 때문이다. 이 두사람은 여러번 전쟁을 치루게 된다.
여기 시뇨리아 광장 역시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한바탕 전투를 벌인 전쟁터였다.
바로 이 장소에서 말이다.
조물주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했는데......... 만약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형상대로 조각을 했다면 나는 결단코 피렌체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다비드 상'이나 '헤라클레스 상'이 형편없이 흉뮬스러워졌을 테니까 말이다.
말인즉은....... 미켈란젤로가 너무 너무 매력남과 거리가 멀었다는 말씀이다.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못생기고 왜소하고 볼 품없기로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범위에 미켈란젤로가 들어있다. 그의 특이한 성품과 기행과 유별난 기질은 다분히 이런 컴플렉스가 상당부분 작용했으리라.
미켈란젤로는 몰락한(아주 폭삭 망한) 귀족집안의 혈통을 받고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에 어머니를 여위고 혼자 시골의 유모에게 맡겨져 자랐다.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 대리석 광산의 석수장이였고 유모는 광산의 페석장에서 버려진 돌무더기를 파헤쳐 소품을 만들 수 있는 작은 대리석 돌덩이를 골라내는 일을 했다. 하여 유모를 따라다니며 메켈란젤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가 바로 대리석을 고르고 깨고 다듬고 하는 놀이였다. 이 놀이가 훗날 그를 조각가로 성장시켰으며, 노년에 그는 '조각에 관한 모든것을 유모로 부터 배웠다'라고 했다.
청년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예술 뿐이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출세해서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줄것을 바라던 아버지와는 충돌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여러차레 모질게 얻어 맞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예술가의 길을 걷기로 하고 집을 나와서 당시 제법 이름이 알려진 화가 (도메니코 리글란다요)의 문하에 들어갔다. 한눈에 무한한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제자를 알아 본 도메니코는 모든 정성을 다해 가르침을 주려고 했지만....... 이 순간의 선택으로 영원한 치욕의 아품을 맞이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1년 만에 도메니코의 화실에서 뛰쳐 나온다. 흔한 말로 '스승에게서 더 배울것이 없어서'라고 이유를 댔다. 도메니코는 하루아침에 물바가지를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 예술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지도 않은 제자에게서 '스승의 자질'을 저울질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제자가 점점 유명해 질 수록 '팽 당한 몹쓸 스승의 이력'은 평생 꼬리표 처럼 딸라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도메니코의 화실에서의 경험이 그만 회화(그림)에 흥미를 잃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제부터 조각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싸구려 하숙방에 머물면서 일거리를 찾아다니다가 한적한 골목 어귀에 버려진 품질이 많이 떨어지는 커다란 대리석 돌덩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별로 할일도 없던 처지로 그 대리석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조각해 보기로 했다. 몇날을 조각에 몰두했다. 그러자 제법 그럴싸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른 새벽에 한적한 시간을 이용해 부근을 산책하던 초로의 노인 한분이 이 청년의 모습을 유심하게 살피게 되었던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조각에 몰두한 청년의 모습과 눈빛에는 예사롭지 않은 집념을 엿볼수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멋진 조각이 이제 거의 다 완성되었구나. 그래 그 작품의 제목이 무엇이냐?'
작품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누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던 청년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처음보는 소박한 차림의 노신사가 자애스런 미소를 가득 품고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옆에 시종을 한명 거느리고 있었다.
'제목이요? 그런건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요. 그냥 제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라고? 그럼 연세가 꽤나 많으셨겠구나?'
'물론 이지요. 앞에 계신 할아버지 보다도 더 많으셨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할아버지 연세라면 좀 더 늙어보여야 했을텐데 말이다. 나도 벌써 치아가 몇개나 빠져버렸는데 말이다.'
아주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노신사가 자리를 떠났다.
청년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이제껏 공들여 만들어 온 할아버지의 조각상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노인은 다시 나선 새벽 산책길에 그 청년의 조각상이 궁금해져서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청년은 같은 자리에사 같은 모습으로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의 탁자에서 이미 꺼져버린 양초의 흔적들이 여러개 눈에 띄었다. 아마도 밤을 새워가며 조각에 몰두했던 듯 싶어보였다. 소리내지 않고 슬며시 다가가서 조각상을 바라보던 노신사는 그만 대경실색 놀라 자빠질뻔했다.
조각은 분명 어제 보았던 조각상이 분명 했지만 조각상의 할아버지 표정이 어제와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게 정말로 살아있는 표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얼굴 주름의 골이 깊어졌으며, 어제는 가즈런한 치아였는데 오늘은 빠진 치아도 있고 충치로 상한 치아도 정말 살아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노신사는 엄청난 충격속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년은 아직도 노인이 다가온 것을 모르고 목덜미의 주름을 손질하고 있었다.
해가 떠올라 햇쌀의 따사로움이 찾아들고 나서야 청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다가 노인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감짝 놀랐다. 그때까지 노인은 미동도 없이 청년과 조각상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놀랍구나. 하룻만에 정말로 살아계신것 같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완성하다니..........'
'어르신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기억과 느낌으로만 생각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물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게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나이는?'
'미켈란젤로 입니다. 미켈란젤로 보오나로티. 열 일곱살 입니다.'
'미켈란젤로구나. 내 이름은 로렌초 라고 한단다. 로렌초 메디치가 내 이름이다.'
'네? 어르신 이름이 로렌초 메디치 시라구요? 그....... 궁궐에 사시는 은행가....... 그 메디치요?'
'그렇단다. 내가 그 메디치가 분명하단다. 음..... 내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언제 시간을 좀 내 줄 수 있겠는가?'
'제게 부탁을요? 도대체 무슨.......... 시간이요? 아무때라도...........'
'그렇다면 내일 이시간쯤이 어떻겠나? 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네.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부탁을 이야기 해 주겠네. 어떤가?'
'어르신과 아침을요? 세상에.......... 제가 감히 어떻게.......... 그냥 찾아 뵙기는 하겠으니........ 그냥 편하게 말씀만 해주세요.......... 어떻게.........'
'허락 한것으로 알겠네. 내일 이 시간에 내 집으로 오면 여기 이사람이 기다리고 있을것이네. 아침은 먹지 말고 오시게. 준비를 해 둘 것이니.......'
노신사는 자리를 떠나갔다.
'세상에........ 오.마.이.갓........ 저 분이 로렌초 메디치라니.......... 내일.......... 아침 초대를 받다니......... 세상에....... 세상에...........'
후견인.
로렌초 메디치가 미켈란젤로에게 한 부탁은 '자신이 후견인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2년반동안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궁전에서 로렌초의 가족들과 한식구로 생활하게 된다. 로렌초의 자식들과 함께 훌륭한 그리스 철학자들을 모셔다가 플라톤학파의 철학과 인문학에 대하여 가정교습을 받게된다. 또한 자신의궁궐 정원의 일부를 작업실(대리석 정원)로 꾸며서 마음껏 조각 연습을 할 수 있게 하여주었으며, 그 비싼 대리석들을 무상으로 한없이 제공해 주었다.
이때 '신곡'을 접하게 되었으며 단테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때 얻은 철학과 인문학은 그의 전생에 걸친 작품활동에 고스란히 묻어나게 되는데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으로의 주제를 늘 선보이게 된다.
그러던 중에 로렌초 메디치가 사망하게 되었고, 아버지에 비해 아들이 피에로 메디치는 예술적인 재능도 부족했을 뿐더러 점차 지원을 소홀하게 되었다. 하여 결국 미켈란젤로는 떠날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메디치가를 나왔다.
메디치가에서 나온 미켈란젤로는 생활고를 위하여 이런저런 잡다한 조각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위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만든 허접한 작품들이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바쿠스'와 같은 작품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점차 입소문을 통해 조각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미켈란젤로에게 제대로 된 첫 조각품 의뢰가 들어왔다. 로마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이 자신의 무덤을 장식한 조각품을 의뢰해 왔던 것이다. 1499년의 일로 미켈란젤로 나이 24세 였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피에타'(성 베드로 성당 소재) 이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추기경이 사망하는 바람에 미켈란젤로는 약속된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말았다. 비록 보수는 제대로 받지 못하였지만 이 작품 하나로 미켈란젤로는 단번에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피에타에 관한 이야기 꺼리 하나가 또 등장하게 된다.
결국 주문자인 추기경이 비용을 다 지불하지 못하고 죽게되자 교황청은 이 '피에타'를 증축 중인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장식으로 가저가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이로운 시선으로 이 '피에타'에 감탄을 하는데 정작 작가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성당 중축의 총 책임자였던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질투하여 사람들에게 '롬바르디아 지방의 2류 조각가가 어쩌다 실수로 만든 작품'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이 소문이 끝내 미켈란젤로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분노에 사무친 미켈란젤로는 그날 밤에 끌과 정과 망치을 들고 베드로 성당에 몰래 들어갔고 밤새 피에타에 손을 댔다.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에 'MICHAEL·ANGELVS·BONAROTVS·FLORENT·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 넣었던 것이다. 수많은 작품중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곧바로 작품에 이름을 새긴 사실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했다고 한다.
2년 후에 피렌체 공회는 (캄비오)의 주도하에 건설중인 '피렌체 두오모'의 부벽(지붕을 가리는 정면의 높은 벽) 위를 장식할 '다비드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는 제의를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비드를 통해 밀라노와의 오랜 전쟁으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상징해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이미1464년부터 다른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려고 착수했었지만 도중에 번번이 작업이 중단된 채 창고 구석에 방치된 상태였다.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 놓아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형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다. 하여 어쩔수없이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돌팔매)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밤낮 없이 열정적으로 작업에 매진한 결과 약 2년반 만에 높이 5m가 넘는 다비드 상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반응은 엄청났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에술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심지어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 라고 극찬하기에 까지 이른다.
도무지 수구러들 기미조차 보이지않는 (다디드 상)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에 놀란 공회의는 서둘러 공청회를 열었다. 이 위대한 걸작을 성당의 높은 부벽위에 장식품으로 놓아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작품을 어디에 두고 사람들을 기쁘게 할까 그것이 주제였다.
이 공청회에는 레오나드로 다빈치. 산드로 봇티첼리. 줄리아노 다 상갈로 같은 피렌체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로오나드로 다빈치를 중심으로 하는 주로 회화파(화가)는 이미 여러개의 조각상들이 전시되고 있는 (로자 데이 란치 회랑)을 전시장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피렌체의 핵심 중앙지역 이라 할 수있는 시툐리아 광장의 우측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이회랑 안에는 이미 약 15점이나 되는 많은 조각상들이 들어 서 있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생각은 달랐다. '못되어먹은 환쟁이(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여러 작품들 사이에 갇히게 하여 작품의 가치를 덜어트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여 따로 독립된 공간에 설치함으로서 독자적인 자신의 작품에 대한 위대성이 인정 받기를 원했다. 그가 원한 장소는 (란치 회랑)과 모서리를 마주대고 있는 피렌체 시청인 베키오 궁전 앞의 독립된 공간을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에 미켈란젤로가 원했던 자리에는 이미 도나텔로가 제작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청동상이 들어서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베끼오 궁전의 정문 앞, 꼭 그자리어야만 한다고 우겼고,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이미 대선배인 도나텔로의 작품이 서있는 상황에 남의 자리까지 탐내는 배은망덕한 짓'이라고 몰아부쳤다. 비록 20년의 나이차는 있었으나 당대 최고의 천재 2명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한바탕 맞짱을 뜨게 된 것이다. 다분히 명분은 다빈치의 편이었다. 하지만 워낙 독특한 성격의 미켈란젤로가 이대로 물러날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베키오 궁전의 정문 자리가 아니면 차라리 원래의 계획대로 두오모의 부벽 위에 세우겠다'고 외치고 나온 것이다. 소란은 몇 날동안 이어졌다.
결국은 '얄밉고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놈' 미켈란젤로의 승리로 끝이 났다.
멀쩡하게 잘 있던 도나텔로의 작품은 베키오 궁전의 정문에서 쫓겨나 반대쪽 모서리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다비드 상)이 놓여 졌다. 그 옆으로는 훗날 미켈란젤로와 피렌체 공화정부를 폄하하기 위하여 라치오 반디넬리를 통해 (헤라클레스 조각상)을 설치하였다.
이 일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드로 다빈치 또한 서로 간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미미 건너고 만 것이었다.
다빈치가 그렇게 (다비드 상)을 '란치 회랑'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스스로 싸움을 먼저 거는듯한 상황을 만든것일까?
'란치 회랑'에 전시된 작품들의 면면도 결코 다비드에 뒤질것이 없는 훌율한 작품들이 상당수 있었다.
피렌체의 상징인 두마리의 사자상이 회랑 입구의 야쪽을 지키고 서있다. '메두사의 목을 들고 서있는 페세우스 상' 이며, '폴릭세나의 약탈', 고대 로마 여인들의 조각상이 있고,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부인을 납치하려던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켄타우로스족의 니수스를 죽이는 상황을 재현한 조가상이며, 아들 파트로클로스를 떠받치고 있는 메노이티오스 조각상 까지,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서도 너무나 유명한 '겁탈 당하는 사비나 여인상' 등이다.
그리고 이 '란치 회랑'과 '베키오 궁전' 사이의 모서리에 서 있는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세상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우피치 미술관)이다. 미술 도감을 통해 소장품들의 대부분 이미 보기는 하였으나, 살아서 기회가 된다면 여기 우피치 미술관만은 꼭 실제로 한번 다녀보고싶은 미술관이다.
중세 1천년의 역사동안 대부분의 교황들은 '부름받은 자 로서의 사명' 보다는 '선택받은 자 로서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였다. 사치와 향락을 누리며 살았다. 이 와중에 '높은곳에서 바라시는 일' 보다는 '지극히 세속적인 일'에 더 관심과 영향력을 과신하여 끝없이 '교권과 황권의 다툼과 분쟁'을 일으킨다. 교황들의 탐욕에는 '십자가의 의미'나 '부활의 역사'가 아예 사라지고 없다. 어쩌다 로또에 당첨되어서 흥청망청 술집과 도박장을 오가는 패륜아 보다도 더 심하게 온갖 추잡한 일을 벌였고 악행을 저질렀다 .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히 남기는 것만은 모두가 일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다. 글(기록)로써 써진 역사가 진실을 간진한 채 남겨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로지 살아서는 거대한 성당(교회)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서 후대에 남겨 자신의 업적으로 기억에 남겨지길 원했고, (성 베드로 성당) 안의 자신의 영역에 누구보다 화려라고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서 영원히 후대에까지 기억되고자 하는 혈안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무덤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며줄 유명한 조각가나 건축가나 화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 또한 역대의 어느 선배 교황들 못지않게 딱 그런 전형적인 교황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성베드로 성당)의 증축을 통하여 교황청의 권위를 보다 높이고, 그 안에 자신의 묘지를 그 어느 교황의 무덤보다 월등하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짓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 두가지의 일이 모두 무사하게 마치게 되면 자신의 업적과 자신의 이름은후대에 영원히 훌륭하고 위대한 교황'으로 남겨지리라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하여 당대 최고의 조각가 이자 건축가인 (브라만테)에게 모든것을 맡겨 놓았던 상태였다. 그랬던 율리우스 2세가 그만........ '피에타'를 보고는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피렌체의 '다비드 상'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계속 들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교황은 브라만테에게 미켈란젤로에 대해서 물었다.
이미 '피에타' 작업을 통해서 미켈란젤로를 만났었고 이 위대한 후배의 출현에 위기감과 적개심을 가지게 된 브라만테 로서는 '한마디로 얄밉고 싸가지 없고 볼수록 재수없는 놈' 이라고 교황에게 자주 고자질을 했다. 더하여 '인간성 자체가지도 아주 흉물스럽다'고 조미료까지 살짝 쳐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대신 (브라만테)는 또 한명의 위대한 천재를 대신 교황에게 추천한다. 미켈란젤로를 대신할 대타로 새롭게 회화계에 떠오르는 신성 (라파엘로)를 추천했다.
라파엘로를 만나 본 교황은 대단히 흡족했다. 멋지게 잘생긴데다가 매너도 휼륭하고 교양이 넘치고 공손하게 자신을 대하는 폼이며, 거기에 아주 훌륭한 미술 솜씨까지 갖춘 젊은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무덤엔 조각가가 꼭 필요했다.
인간성은 아무래도 좋았다. 싸가지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무덤 완성을 위해선 훌륭한 조각가의 솜씨가 꼭 필요했다. 결국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미켈란젤로를 데려오도록 브라만테에게 요청했다.
드디어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와서 교황 율리우스 2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두사람은 만나기 이전부터 예정된 상극 중에서도 상극 이었다. 한마디로 물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각자의 필요에 의해서 이 만남을 주선했다. 교황은 오로지 그의 조각 솜씨가 필요했고,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가진 금덩어리가 필요했다. 그게 다였다.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소년 가장이었다. 몰락한 귀족의 처지를 잊지 못하는 그의 아버지는 술로써 허송세월을 보내면서도 늘 과거의 화려했던 귀족문화만을 늘어 놓았다. 아래로 남동생이 셋이 있는데 둘째가 아비를 100% 꼭 빼다 밖은 천하의 한량이요 망나니였다. 셋째는 나름 독립된 생활을 유지하려 꽤나 노력을 했지만 지독하리만치 운이 따라 주지 않는 그런 패배자였다. 미켈란제로가 유일하게 아끼는 동생이 막내였는데, 이 막내는 몸이 태생때 부터 워낙 약해서 평생을 시름시름 앓으면서 요양원이나 들락거렸다. 미켈란젤로는 이 허약한 동생때문에 평생 마음 고생을 아주 심하게 했다. 막내를 위해선 항상 돈이 필요했다. 거기에 그가 유명세를 타고 돈을 좀 만지게 되면서 부터 아버지와 둘째는 본성을 드러내면서 자나깨나 돈타령을 시작하게 되고, 이때부터 평생동안 미켈란젤로는 엄청난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기구한 팔자요 운명이었다. 교황에게 작품을 선매도 하면서 돈을 먼저 가져다 쓰고 나중에 작품으로 갚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와의 첫만남부터 마음이 크게 상했다. 듣던바대로 막대먹은 싸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조각 솜씨가 필요했다. 당장 유럽 전체를 통털허 가장 핫하게 유명해진 미켈란젤로의 조각품들로 무덤을 만들어 가질만한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인물이 누구였던가? 바로 자신 뿐이 아니겠는가? 또 자신 앞에서는 모두 굽신거리는 패거리들뿐, 구르라면 구르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서슴치않은 인간들만 상대하다가 삐딱한 젊은놈을 만나고 나니까 어떤 신선한 희열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생각했다. '이놈을 제대로 길들여서 평생동안 옆에두고 부려먹어야겠다'라고.
셍 베드로 성당 한가운데 피라미드처럼 무덤을 만들고 그 위를 치장하기로 미켈란젤로와 40점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고, 급전이 필요한 미켈란젤로가 그만 계약서에 낼름 서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작품 하나에 2~3년이 걸린다 치면........ 이제 미켈란젤로는 살아서는 영원히 교황이 쳐둔 올가미에 제대로 걸려든 꼴이되고 말았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 제작에 들어갔다. 직접 대리석 광산에 가서 1년을 머물며 최고 품질의 대리석을 골라 다음해에 50개의 수레에 싣고 로마로 돌아왔다. 실질적인 작업에 들어갔는데...... 조각대에 6개의 대리석 덩어리를 올려 놓고 왔다갔다 하면서 동시에 6개의 조각상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보지도 못하던 방법과 속도였다. 40개의 조각상을 계약하면서 교황은 100년의 족쇄를 생각했는데, 미켈란젤로는 맘만먹으면 6년이면 끝낸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천재는 천재였다. 아주 특이하고 놀라운 천재였다.
이 와중에 이번엔 교황에게 사단이 생겼다. 흑사병이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후 세상의 모든 경기가 나빠질때로 나빠져서 돈 줄이 막혀버린 것이다. 재정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급기야는 일단 무덤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매켈란젤로가 따지고 덤벼 들었다. 계약금으로 받은 돈 모두를 대리석 사오는데 들였기에 매달 일정하게 나오는 공사비용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쫓아다니며 괴롭혔던지 아예 무덤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녀석을 내쫓아버릴까 고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세상에 교황을 우습게 여기며 농락하는 천재를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 지진으로 성 베드로 성당의 일부와 붙어있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금이가는 피해가 발생했다. 교항은 성당의 복구를 핑계로 주변으로 부터 긴급하게 자금을 긁어 모았다. 하여 (브라만테)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보수공사를 시켰는데, 문제는 복구 후의 천장 치장이 문제였다. 브라만케는 아끼며 돌봐주고 있는 (라파엘로)에게 슬적 의중을 물었는데, '벽화 하나라면 모를까 그 크고 넓은 천장 전체를 맡으라 하시면 불가능' 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자 브라만테가 꾀를 생각해 내었다.
'교황 성하. 이참에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겨보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 싸가지? 그게 돌맹이나쫄줄 알지 언제 그림을 제대로 그려봤겠어?'
'그래도 천재 아니겠습니까. 천재니까 그 이름값을 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다 그림이 나온다 해도 그만이요........ 잘못된다면........ 그 또한 성하께는 전화위복이 아니겠습니까?'
'전화위복이라니? 잘못되면 망신이지 망신........ 말년에 내 얼굴에 *칠 하라는 말인가?'
'성하께서 은혜를 베푸사 천재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작업을 부탁까지 하셨는데....... 그자가 허구한날 천재타령만 하더니만 결국 대사를 그르쳤다고 하면........ 천재가 분수를 모르고 까불다가 *통에 빠진것이라 여겨 모든 사람들이 욕하느라 바빠서......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푸신 성하님에 대해서는 한동안 아무말도 못할 것입니다. 그때 골치아픈 녀석을 아주 요절을 내시던지 아니면 파문해서 추방을 해 버리시던지....... 아예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시던지......... 결코 성하께 손해가 날 일은 아닌듯 싶습니다. 조금 있으면 또 나타나서 돈타령이나 할 망나니를 아예 이참에.........'
'그도 일리가 있기는 한데.......... 이보게 브라만테. 자네는 왜 미켈란젤로라면 그렇게 쌍수를 들어 매번 반대를 하는가? 혹여 질투라도 하는겐가?'
'질투라니요 성하. 솜씨는 좋으나 천성이 하도 개망나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배로서 늦기전에 정신을 차리라고 다끔하게...........'
'선배로서 애정을 가지고 교훈을 주려는 생각이라 이말이지? 그런데 왜 나에겐 그렇게 안보이지? 그리고...... 그 참하고 어린녀석 (라파엘로)는 요즘 뭐하나? 통 보이질 않네? 가끔 데려오고 하지.'
그때 였다. 밖이 소란스러워 졌다.
'어이쿠' 교황은 벌써 알고 있었다. 개망나니가 또 등장 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나타나자 마자 포화공격을 시작한다.
'어제까지는 보내 주신다고 약속 하셨잖아요? 교황님은 거짓말을 못하지는줄 알았지요? 아에 금고를 열어주세요. 제가 직접 밀린것만큼 꺼내갈테니.......'
'어험.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얼른 꿇어 엎드려 성하께 예를 갖추지 못할까?'
'아니 브라만테 아재는 서둘러 보수 공사나 할 일이지 내가 여기 올때마다 허구한날 교황님 뒤만 쫄래쫄래 강아지처럼 쫓아다니시면 공사는 언제하실려구요? 나야 잘 진행하던 공사를 여기 교황님께서 잠시 중단하라 하셔서 멈추었고 밀린 공사비를 안주셔서 어디 나만 배가 고파서 이런답니까? 잡부들 임금을 못주어서 그 가족들이 모두 쫄쫄이 굶고 있고, 하숙집 하숙비가 밀려서 쫓겨날 판이고....... 엊저녁부터 쫄쫄히 굶어서 돌아가실 판이라구요. 예를 안갖추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 절하려다가 팍 꼬꾸라지면 그대로 죽어버릴까봐 그러는 것이라고요. 내가 이대로 꼬꾸라져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디 교황님께서 기쁨의 눈물속에 축도라도 해 주신답니까? 아이고 배고파......... 어디 먹다 남기신 밥이라도 있으면 좀 가져다 주라고 해주세요. 교황니......임.'
완전히 배 째라고 각오하고 덤벼드는 꼴이었다.
이 성스런 교황청 내의 교황 개인 접견실에서 말이다.
두 눈을 찔끔 감고 거친 숨을 몰아 쉬던 율리우스 2세간 손을 불쑥 내밀었다.
'잠깐. 이 꼴통아 여기가 어딘줄 알아? 시장통이 아니여 교황청이라고. 주둥아리 당장 안닥치며 경비병 불러서 아에 꿰메어 버린다?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보내줄것을 또 찾아와서 이 난리여? 너 미켈란젤로. 한번만 더 이따위로 굴면 아예 다시는 싸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됐어유. 제 때 줄걸 안주니까 그렇지 뭐........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유? 교황님은 맨날 땅파서 먹으면서 교황노릇 할 수 있어유?"
'뭐 교황 노릇?'
'아 차차차차. 아이 미스테이크. 절대 신성모독할 생각 읍썼슈. 절대 읍썼슈. 쏘 쏘리........'
'어이쿠 속탄다. 이걸 그냥........ 암튼 왔으니까 갈 때 돈은 타가고.......... 너 대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일 좀 해야겠다.'
'일 이라면........ 교황님 나중에 드러누울 자리 공사 다시 하나요?'
'아니 아니........ 저기 시스티나 천장에 금간거 보수 대 해놨다. 거기에 그림을 좀 그려야겠는데...... 네가 맡아서 그려라.'
'헐....... 저는 조각가지 환쟁이가 아닌데요? 저기 브라만테 아재가 저 보고 그리게하라고 시키던가요? 안해요. 저는 그림은 안그려요.'
'그려.'
'안 그려요. 못 해요'
'죽을래?'
'안 죽어요. 안 죽고 안 그려요.'
'감사 들어간다.'
'안 감사요........ 뭐요? 뭔 감사?'
'너 내가 처음 보낸 계약금하고 매달 또박또박 보내준 공사비 어디다 썼어? 어디다 썼기에 맨날 찾아와 돈타령이냔 말이여. 너 그거 공사 다 끝날때까진 공금이여. 공금. 니놈 밥값 하숙비 빼곤 오로지 공사에만 쓰라고 준 돈이여. 알간?'
'시상에 그런게 어딨어유? 계약금은 계약금이고....... 공사비는 책임자인 내가 내맘대로 쓰는거지. 노름을 하던 술을 마시던 게집질을 하던 공사만 끝내주면 되는 거지 그 돈을 어따가 쓰던 파묻던 그게 교황님과 무슨 상관이래유?
'상관이 있나 없나 볼텨? 감사를 내가 선정하고 감사 기준을 내가 정해서 요거요거를 파악해서 올리라하고 주교들을 모아놓고 내 방식대로 판단하면....... 넌 바로 모가지 싹뚝이여. 아예 교회에서 파문시켜서 너네 집안을 그냥 통째로 파묻어버린다? 너가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는 것도 신성모독이여 임마. 어디 그렇게 되나 안되나 한번 해 볼텨?'
'참 내 어이가 없어서. 교황님 씩이나 되셔서 왜 이렇게 쪼잔하게 구신대유? 그래 좋아유. 그럼 어디다 뭘 그리면 돼유?'
'시스티나 천장 전체를 맡아서 그릴 수 있겠냐? 시간을 얼마나 주면 끝마칠 수가 있겠느냐?'
'다빈치 영감을 시키면 한 30년은 달라그럴텐데........ 암튼 내가 끝내야 끝나는거지유.'
'뭐야? 니 맘대로라고? 이눔의 시키가........?' 화가 난 교황이 들고있던 지팡이로 미켈란젤로의 등때기를 한대 후려쳤다.
잠시 교황을 째려보던 미켈란젤로는 뒤도 안돌아 보고 나가더니 휑하니 보따리를 싸서 피렌체로 도망쳐 버렸다.
분노한 교황이 체포령을 내렸고 사태를 눈치 챈 브라만테가 사람을 보내 겨우 겨우 미켈란젤로를 달래서 다시 불러들여 교황과 다시 대면하게 했다.
'왜 벅차니? 못하겠어? 그래서 내뺀거여?'
'못하긴 누가 못한댔나유? 까짓 뭐 맘만 먹으면........ 그까짓꺼 정도는 아무일도 아니지유. 하면 될거 아니유. 그나 저나 뭘 그리라는 거유?''
'예수님과 12사도.'
'에이......... 못 해유.'
'못해? 한대놓구 이제와서 못해? 너 죽을래?'
'쪼잔하게 12사도가 뭐유? 쪼잔하게 스리....... 그렇게는 못 그려유. 종교적 찬양성만 있으면 된다했으니까 그림 내용은 내 맘대로유. 아님 못 그려유.'
'안돼. 12사도를 꼭 그려.'
'차라리 죽을 래요. 죽으면 죽었지 내 맘대로 아니면 죽어두 못그려유.'
'진짜 죽인다?'
'죽을 준비 끝. 맘대루 하세유.'
꼭 2시간 27분 49초를 더 '그려' '못그려유' 를 되풀이 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그리고 최후엔.........
'좋다. 그런데 만약에....... 네 마음대로 그린 그림이 아주 수준이 떨어지거나 내 바램과 너무 동떨어져서 도저히 그냥 더 두고 볼 수가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죽지유 뭐. 안그려도 죽고 죽어라 그림 그리고 나서도 맘에 안들어 죽이는거라면........ 일단은 지금 당장 죽지는 말아야지유. 그냥 맡겨봐유. 한 3년 지나서 보시구 맘에 안들면 절 팍 죽이구 나서 딴 눔에게 다시 그리라 시키세유.'
'중간 평가 3년은 너무 길어.'
'다빈치는 벼름빡 하나도 3년인데......... 그럼 5년이유.'
'길어. 3년 기다려 줄께.'
'콜. 대신........'
'뭐? 대신 뭐?'
'3년 동안은 잡상인 절대 출입금지. 보초를 세워서라도 저기 저 양반....... 브라만테 아재 같은 사람 기웃거리는거 죽어두 싫거든유? 그리고....... 체불금 모두 오늘 지급해 주시구유...... 차후로 꼬박꼬박 제 때 줘유. 또 어기면...... 그림이고 나발이고....... 저 다시 보기 어려우실거유. 아셨쥬?'
'지켜야지. 암 보초 잔뜩 세워야지. 혹시 네 놈이 내 돈만 쪽쪽 빨아막고 도망치면 안되니까. 3년이다?'
'어디 한 2년쯤 놀러갈 데 없나? 실컷 놀다 와서 1년이면 어떻게 되겠지 뭐............요?'
'지금 당장 여기서 죽을래?'
'3년은 일단 내목숨이라고 약속해 놓으시구선.......... 무슨 교황님이 이랬다저랬다 그래요?'
다비드 상이 서있는 시뇨리아 광장의 (베키오 궁전)에서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면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가 나오고, 유유히 흫허가는 아르노 강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의 한참 지나면 메디치 가문의 개인 저택인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이 나온다. 장장 2km가 넘는 건물 성벽이라 하겠다. 당시엔 정적들 끼리 테러와 암살과 독살이 성행했다. 하여 유럽 최고의 금융집안인 메디치가는 신변안전에 만전을 기하였다.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베키오 다리)이다. 다리는 사람이 오가는 길 위로 긴 회랑(복도식 통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 긴 회랑을 '바사리의 코리도리오'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회랑은 한쪽은 (베키오 궁전)까지, 다른 쪽은 (리카르디 궁전)까지 길고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집에서 은행까지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길고 긴 복도를 통해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걸어서 출퇴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긴 회랑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모퉁이와 벽에 미술품을 전시했다. 얼마만큼의 부귀를 누렸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이 출퇴근 길의 모든 건물이 그들의 재산중 일부였던 것이다.
지금은 연인들로 차고 넘치는 베키오 다리가 당시에는 최하층의 서민들이 모여살며 주로 정육점과 수산물 시장이 서던 장소였다. 현재는 귀금속 가계들고 최고급 가죽제품 가계들로 가득하지만.........
그 상징으로 다리 중간쯤에 서 있는 흉상을 보면 알 수 있다. 흉상의 주인공은 (벤베누토 첼리니)이다. 피렌체 출신으로 금세공술 분야에 획기적인 공헌을 세운 사람이라 한다. 코지모 메디치가 이곳의 정육점과 수산물 시장을 밀어내고 지금처럼 보석과 가죽의 시장을 형성시키며 세운 조각이다.
이탈리아에 전통적으로 전해내려오는 오월절 기념행사에 포르티나리 집안으로 부터 초대를 받은 피렌체의 귀족 알리기에리는 아들을 데리고 행사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9살의 (단테 알리기에리)는 한 살 아래의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를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두 가문은 친분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고 두사람이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단테는 한시도 베아트리체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것은 정말 숙명처럼 느껴졌다.
자나 깨나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다시 9년이 흐른 어느날 단테는 꿈에도 잊어 본적이 없는 그녀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바로 (베키오 다리)에서 였다. 저 멀리 수많은 인파속에서도 단테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버릴것만 같았다. 점 점 다가오는 그녀를 느끼며 차라리 눈을 질끔 감아버릴까도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정말로 오랫만에 만나뵙게 되었네요. 단테씨. 안녕하시지요? 좋은 글을 많이 쓰신다고 들었어요. 언제고 꼭 훌륭한 문학가가 되시길 바래요.' 라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홀연히 그녀는 자리를 떠나갔다.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부터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모든것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이 두사람의 인연을 끝내 이어주지 않았다.
어느날 집안의 권유에 못이겨 베아크리체가 한 은행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단테도 다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런던 어느날, 유부년인 베아트리체와 유부남인 단테가 운명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아니지. 재회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베키오다리 바로 아래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바로 산타트리티니 다리이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저녁날 산타트리티니 다리를 건너던 단테는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보게되었다. 그의 가슴은 또다시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 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한 밤이 얼마였던가. 이번엔...... 이번만은 반듯이 그녀에게 해줄말이 있었다. 더 이상 늦춰서는 결코 안될 일이었다. '그래. 더 이상은 기회가 없어. 이번엔 꼭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말리라. 오랜 내 사랑을 고백하고야 말리라.' 라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기다렸다.
얼핏 보니 그녀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갔다. 이제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는 정도로 가까와졌다.
이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말을 하면 되는데........ 고백을 하여야만 하는데........
'아줌마. 이 우산 얼마예요?'
차마 고백을 하지 못한 채......... 단테는 애꿋은 우산장수아주머니를 붙잡고 엉뚱한 말을 꺼내놓고 말았다.
그런 단테의 모습을 원망서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다리를 건넌 베아트리체는 아르노 강둑을 따라 서서히 내리는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않아 베아트리체는 죽었다. 24살의 나이였다.
그대 슬픈 눈에 어리는 이슬처럼 맑은 영혼이
내 가슴에 스며 들어와 푸른샘으로 솟아나리니
그대 여린 입술사이로 바람처럼 스친 미소가
나의 넋을 휘감아도는 불꽃이 되어 타오르리니
슬픈 그대 베아트리체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메디치의 개인저택 리카르디 궁전에서 발걸음을 돌려 야래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몇걸음 옮기지 않아 제법 규모는 있으나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허름해 보이는 교회당(성당)이 눈에 들어 온다. 이곳 역시 메디치 가문의 개인 예배당인 (산 로렌초 성당) 이다.
성당의 앞쪽과 옆쪽의 너른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나름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연인들과 계단 등에 걸터 앉아 쉬고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뛴다. 아주아주 편하고 즐거운 모습들이다. 이허름해 보이기까지 하는 건물이 대단히 유명하고 값진 소장품을 많이 보유한 성당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속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 이렇게 공터가 너른것은 바로 이곳이 성당의 정면쪽인데 이 공터의 크기만큼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는 이유가 되겠다. 여기 성당 역시 (피렌체 두오모의 돔)을 설계한 (부르넬리스키)의 작품이다.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공사도 그 순간가지에서 모두 멈춰선채 오늘에까지이르렀다.
그리고 미완성인 성당 정면의 공터 앞으로는 광장이 있다. 마치 이 분위기는 아르노 강 건너의 산 스프리토 교회나 광장은 분위기와 정말로 많이 닮았다. 가운데 멋진 분수를 두고 너른 원형 형태의 광장이 있다. 그리고 이날 이광장에선 전통재래시장이 서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보고 그들의 표정과 미소를 만나본다. 시장은 언제나 즐겁다.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으면 벌써 환하게 웃음부터 보여준다. 처음 내가 사진 좀찍겠다고 부탁했는데 엉뚱하게 다른 여행객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주시는 아짐씨들......... ㅎㅎㅎ
현지인이 여행자 보다 훨씬 많은 시장.
이제껏 보아온 다른 시장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 그저 편안하고 넉넉해 보인다. 바쁜것, 서두는것, 왁자지껄한 것 대신 여유와 포근함이 넘친다.
이런 장소에선 여행자의 시간과 발걸음 까지도 현지인의 마음의 시간만큼 꼭 그만큼 저절로 넉넉해 진다.
이런곳에서 살면 오래오래 무병장수 할 것만 같다.
2년 정도가 지나자 점점 안절부절해 지는 쪽은 다름아닌 브라만테였다. 눈에 가시 같은 녀석이 시스티나 성당을 통째로 턱하니 차지하고 들어 앉아서 안에서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하루하루 더욱 조바심만 날 수 밖에...... 남은 1년은 그에게 너무나 길었다.
무슨 수를 쓰던지 개망나니를 여기 로마 교황청에서, 아니 이탈리아에서...... 차라리 이 세상에서 아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림이라곤 한번도 제대로 그려보지 않은 놈이 그리기는 뭘 그리겠어?'
'어디 코딱지만한 벽도 아니고 운동장만한 천장을 지가 5년안에 완성하기 뭘 완성해? 채워넣을 건덕지나 있겠어?'
'5년 지나면 죽을 각오로 안에 숨어서 그때까지만 살 생각으로 쳐먹고 자고 쳐먹고 자고 하고 있을것이야 아마도...... 하지만 남은 3년은 너무나 길어. 중간 결산만 해도 아직 1년이나 남았잖아........ 이대론 안되겠어. 그때까지 저 싸가지를 어떻게 참고 두고 봐. 교황께 사단을 내자고 해봐야지.'
브라만테는 교황을 찾아가 온갖 감언이설로 여러가지 상황의 변수를 들어 집요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엔 '이미 약속을 했는데' 하던 교황이 점차 '나름 일리가 있어. 한번 들여다 봐?' 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날을 잡아서 브라만테를 앞세운 교황이 시스티나 성당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은 온통 비계(천장까지 올라가게 만든 구조물)로 가득찼고, 그 비계위에 무명 천을 펼쳐 걸어 놓아서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도 천장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미켈란젤로야. 어디 네게 일을 제대로 하나 확인하려고 왔으니 얼른 천막을 걷어서 천장을 보여다오.'
'약속 위반이유. 절대 안되겠으니 어서 문닫고 나가세요. 시방 바쁘니께로........'
'너 정말 끝까지 이럴꺼여? 내가 귀한 시간 빼내면서까지 이렇게 친히 납시셨는데........ 얼른 안보여줘?'
'못 보여줘유. 교황님은 약속 어겨도 된다는 하나님 확인서라도 받아오면 모를까. 옆에 까칠한 고자질쟁이 아재 데리고 얼른 나가세유.'
'죽어두 못보여준다 이거지?'
'아이구. 너무 열심히 하다보니 낮과 밤도 까먹었네. 이제부터 한잠 자야겠으니 조용히 하세요. 쿨 쿨쿨.'
'야 나가서 경비병들 죄 다 불러와라. 내 저눔의 새끼랑 사생결단을 내고야 말겠다. 어서 불러와. 아예 저놈이 누워있는 비계를 싸그리 자빠트려버려. 어서.'
'아이씨 더럽게 시끄럽네........ 그렇게 보구 싶으시면 올라와서 보세요. 어차피 그 아래선 제대로 안 보일테니까. 대신 내가 내려가서 쉬면 될꺼 아녀뉴? 교황씩이나 되어가지고 약속을 어긴 주제에 되게 큰소리는..........'
'야. 야. 저 놈 시방 도망칠려고 그런다. 붙잡아. 붙잡아.'
그러나 어느새 미켈란젤로는 붓을 내던지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난 후였다.
그리고 교황은 호위병의 부축을 받으며 새로 급하게 설치한 사다리를 통해 힘들게 힘들게 비계에 올라 천장을 올려다 보게 되었는데..........
오.
마.
이.
갓.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다시는 없을.......... 그런 그림이 지금 그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교황은 차마 열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아에 비게 위에 드러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느라......... 밤을 새웠는지 아닌지는...........
(천지창조)의 그림이 이미 절반 이상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브라만테도 놀라 자빠져서 비계에서 떨어질 지경이었다. 꿈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
'이보게 브라만테. 이 그림이 정년 내가 발주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단 말인가? 허허허허. 보시게.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는가 말일세. 어서 가서 미켈란젤로 좀 찾아서 데려 오시게. 내가 잘못 판단했던 것이야. 허허허허. 이제부턴 아주아주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겠어. 어서 어서 찾아서 데려오게.'
조각솜씨도 특별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림 그리는 방법과 속도도 남들과 크게 달랐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경우 벽화를 그리려면 우선 스케치(소묘. 데생) 다양하게 무수히 여러번 그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다른 벽이나 캔버스에 다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물감으로 칠을 반복했다. 여러번 반복 끝에 완성도가 되었다 싶으면 그제서야 그 샘플을 가지고 가서 샘플대로 벽에댜 옮겨 그렸다. 화가들의 공통된 작업순서였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달랐다. 전체적인 구상속에 등장인물에 대한 스케치를 그려보고 마음에 들었다 싶으면 곧바로 물감을 들고 천장으로 올라가 샘플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실제 그림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림이 마음에 든다 싶으면 내려와 그 스케치를 찢어서 태워버렸다. 망설이거나 뒤돌아보는 경우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작이든 대형그림이든 벽화던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만큼 유별난 천재였다.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는 약속대로 4년만에 완성되었고 미켈란젤로도 최고의 거장 반열에 올랐지만 분란과 대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90세까지 장수한 미켈란젤로는 노년에 접어들어 시력이 약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시각이 아니라 촉각에 의지해서 죽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피에타 작품(앞 여행기에 사진 수록)에 매달려 있었으며, 그 기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유언은 '이제야 조각의 기본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죽어야 한다니..........' 였다. 유언까지도 천재다운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사후 로마에 묻혔다가 고향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르네상스가 배출한 3명의 거장들의 단면을 살펴보고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우선 레오나드로 다 빈치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성관계를 질색하는 도를 넘어서 여자를 경멸했지만 언변이 탁월했고, 잘생긴데다가 패션 및 박학다식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늘 그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들이 따라다녔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처럼 꼬장꼬장한 면이 없이 고용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데다가 잘생겼고 본인 역시 여자를 좋아했기에 수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 덕(?)에 젊은 나이에 일찍 요절했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기본적으로 못 생긴데다가,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길거리로 나올 때에도 작업 중 지저분해진 몰골 그대로 하고 다녔다. 거기에 라파엘로처럼 원만한 성격도 아니고 다 빈치처럼 꼬장꼬장하긴 한데다가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때든지 독설을 자제하지 않았고, 한번 수틀리면 그 상대가 교황이라해도 예외없이 대들거나 도망가는 등의 행동에 전혀 망설임이 없었던, 다른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혼자 지내서 사색을 즐기는 전형적인 고독하고 쓸쓸한 천재였다.
미켈란젤로 안녕.
단테 안녕.
굿바이 피렌체.
저녁무렵 피렌체엔 여전히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초겨울 찬바람처럼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사 안에서 따끈한 카푸치노를 마시려다 그냥......... 폐부 깊숙히 파고드는 알싸한 감정처럼 도로가 내다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서 생맥주 한잔을 주문했다.
짐시 뒤면 다시 (알 이딸로)를 타고 로마 페르미니 역으로 달려 갈 것이다.
숙소에서 배낭을 찾고, 로마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다시 페르니미 역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야간열차에 오를 것이다.
여전히 검은 하늘에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내일 시칠리아에서는 따사로운 햇쌀을 볼 수가 있겠지?
지중해 푸른빛을 머금은 1월의 따스한 햇살을..........
굿바이 피렌체....... 잘 있어. 꼭 다시 올께..........
----------------- 감사합니다. 다음은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만나겠습니다.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트래블) 십자군 전쟁과 최초의 근대인 프리드리히 2세 (0) | 2018.03.30 |
---|---|
(알 럽 트래블) 시칠리아를 찾아서...... (0) | 2018.03.21 |
(알 럽 트래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사랑한 도시 피렌체 (0) | 2018.03.13 |
( 알 럽 트래블) 플로렌스의 영원한 향기 (0) | 2018.03.10 |
(알 럽 트래블) '로마 카톨릭'이라 부르는 것을 용서하소서. (0) | 2018.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