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창에 '이탈리아 언어'를 검색하면 (이탈리아어) 또는 (라틴어)라는 대답이 나온다.
그런데 실제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각지역의 대표 20명을 뽑아 국가대사를 논의하려하면 적어도 30명 이상의 통역사가 필요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국 각지의 대표들을 불러 모았는데 서로간에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UN 총회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교황이 대표단을 불러서 축복을 내리는데 통역사들의 음성에 기도소리가 파뭍혔다고도 하고, 황제가 칙령을 내려 언어 통일을 수없이 시도했었으나 불가항력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적들과는 말 한마디(言語) 조차도 섞어서 쓸 수 없다'는 것이 이탈리아 각지에 퍼져있는 공국(소도시)들의 조상대에서 부터 전해내려온 전통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국들 대부분이 피로도 씻어낼 수 없는 절대적 앙숙의 관계들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와 씨에나'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이 그 대표격이다.
이들은 언어뿐만이 아니라 옷차림과 음식과 전통문화에서 조차도 도시들 간에 극단의 상반된 모습을 연출한다. '적과는 무조건 달라야 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라틴어이면서도 사투리가 아닌 '변형시킨 언어'를 만들어 말하고 쓰고 했다. 심지어 북쪽 지방에서는 아예 외국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이 이탈리아 소도시의 언어가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교황도 황제도 하지 못했던 언어의 통일을 토스카나 지방에 등장한 한 사내가 이룩해내는 사태가 벌어졌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 불릴만 하다.
이천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세상을 지배했던 교황과 황제들과 귀족들이 쓰던 고급 언어라 할 수 있는 '로마식 라틴어'가 '보편화된 통일 이탈리어'로 책정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기가 쉽지만 결코 아니다.
토스카나 지방의 토속적 사투리가 가득한 일개 지방의 언어였던 '피렌체식 라틴어'가 현재 이탈리아 사람들이 쓰는 '표준 이탈리아어'가 되었다.
단 한사람의 작가에 의해서.......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lighieri)가 본명인 이 사내는 흔히들 (단테)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영적인 나들이 이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행기라고 할만한 '신곡(La divina commedia)'을 발표하였는데 그 1부격인 '지옥편'을 발표하였을 때, 이탈리아를 포함한 전 유럽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수도사나 왕족이나 귀족들이 서로 앞다투어 '신곡'을 사서 읽고 외우고 타인과의 대화 중심에 그 내용들을 인용하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신곡'을 읽지 않고 '신곡'을 이해하지 않고 '신곡'을 빼놓고는 대화가 성립되지를 않게 되었다. 동시에 '피렌체식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교사가 최고의 대우를 받는 새로운 직업으로 급부상 하게 되었다. 전 이탈리아와 전 유럽은 바야흐로 '피렌체식 라틴어 학원' 광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단테가 이탈리아의 한 작은 지방에 불과했던 피렌체의 언어로 신곡의 1부인 '지옥편"을 세상에 책으로 발표했고, 2부격인 '연옥편'과 3부격인 '천국편'까지 모두 (피렌체어)로 집필해서 발표하겠다고 분명하게 입장표명을 했기 때문이었다. '신곡'을 모두 읽고 세상에서 당당하고 우아한 폼으로 으시대며 살아가려면 우선 '피렌체어'를 배우고. '신곡'을 모두 마스터 하고. '신곡'의 내용들을 원문으로 인용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 광풍은 서서히 중간 계급인 군인과 상인들을 넘어서 사회 하류층으로 까지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저절로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하나로 통일된 언어를 가지게 되고 사용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뜨거운 열기의 끝자락에 '새로운 시대적 사조'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게 되었다. 바로 (르네상스)였다.
단테는 분명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주인공 중의 한 명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르네상스)를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을까, 또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서 단도직입적으로 '이것은 이래서 이렇다'라고 정의 내리기는 어렵겠으나, 그래도 '14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화 사조였으며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부터였다'는 것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등장해 시험에도 곧 잘 나오는 (르네상스)의 다른 이름은 (문예부흥) 이었다.
정말 기가막힌 번역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문예부흥'이라는 표현에는 다분히 당시의 '국어사전 편찬 업자'나 '국정 교과서 세계사 편찬 담당자'의 종교관이 기독교(특히 카톨릭) 성향이었기에 신(神)의 존엄성을 어떻게든 덜 훼손시키려 불철주야 애쓴 결과로 은근슬쩍 뽀샵(?) 같은 작업을 거쳐 적당한 미사어구로 치장한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 담당자들은 과연 (르네상스)의 본질을 몰랐던 것일까?
아마도 직업과 신앙 사이에서 절묘한 타개책으로 '문예부흥'이라는 참으로 절묘한 표현을 찾아냈을 것이다.
이미 당시나 이전부터 (르네상스)라는 단어와 연관된 수없이 많은 논문과 관련 인물들과 바다 건너 들어온 책들에는 분명하게 '문예부흥'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게 정의가 내려져 있었다. (르네상스)란 어원은 '재생' '부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부흥'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왠지 그 농도가 얕아보인다.
'르네상스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던 종교(로마가톨릭이 주도)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인문주의 시절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자고 주장하였던 새로운 문화운동 이다.'
인간이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사과를 따 먹은 결과로 생겨난 피조물로써 그 탄생 자체부터가 이미 죄악이라는 시선이 로마카톨릭이 주장하고 세상을 지배하는데 내세운 최우선의 명분이었다. 그 원죄에서 벗어나 천국에 이르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자나 깨나 오로지 신성하시고 절대적으로 위대하신 신(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오로지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 하면서 일생을 살다가 죽는 방법이 죄인인 인간들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와중에 신께서 너른 아량을 베푸사 대리권자(로마 카톨릭)를 내세우셔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쉽고 편하게 지도편달 하게 배려하셨으니 자나깨나 그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것이 곧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권리양도 까지를 해주셨다는 이상한 논리를 앞세웠다. 돈 내라면 돈 내고, 땅 내놓으라면 땅 내놓고, 교회 짖는데 노동력 보태라면 가서 죽어라 굶어가며 일하고, 간혹 여자를 바치라면 딸도 내주고........ 면죄부니까 사라하면 빚내서라도 사고, 성수라고 하면 새벽에 길어간 도랑물인걸 알면서도 사고......... 1천년 가까이를 그렇게 로마카톨릭 마음대로 세상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다.
1천년이나 이런 똑 같은 시추에이션이 반복되다 보니 여기저기 일부 삐딱이(?)들이 다분히 의심이 담긴 이상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아니,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인간들의 원죄를 대속하려고 구세주께서 모진 고문 끝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을 하셨음에도 우리가 아직까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라면............... 생각해 보자......... 또 생각해 보자............. 이건 부활의 역사가 조작된 가짜이거나......... 교황(로마카톨릭)이 무식한 인간들을 가지고 사기행각을 1천년이나 해 쳐드시는............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거여. 틀림없어..........'
'교회는 맨날 우리보고 벌레만도 못한 미물에 태생이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나왔다는데....... 그건 교회가 제 얼굴에 누워서 침뱉고 있는게 아니야? 성경에 분명하게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데 교황이 나보고 지질이 못생겼다며 침을 뱉는것은........ 하나님이 나외 비슷하게 칠푼이 처럼 생기셨고, 그 외모때문에 대리권자인 교황에게 침 세례를 받아도 싸다는 말이되는데........... 헐.......'
이런 일들이 1천년이나 계속되다보니 사람들은 점차 자기자신을 새로운 각도 새로운 시선으로 거울을 들여다 보고 또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신의 피조물'이라는 겨울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따사로운 봄 햇쌀아래 알몸으로 초원을 뛰어다니며 옹달샘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니....... 거기엔 아름다운 한 생명이........ 더 없이 숭고한 생각과 함께........ 대자연과 우주의 원리와 이치속에 일개 피조물이 아닌 아름답고 자랑스런 하나의 존재로 자신의 포지션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나는 참 글씨를 못쓴다. 악필 중에 악필이다.
엄청나게 메모를 하는 편임에도...... 사나흘 지나서 내 글씨를 내가 못 읽어보는 경우가 종 종 있다. 기가막힐 노릇이다.
메모지에도 책에도 신문지에도 벽에도 사방 어디에나 필요하면 아무때고 아무대나 메모를 해 놓고는 정작..... 필요할 때 잘 찾지를 못한다. 더더욱 나이 먹어가면서는 기억을 더듬거나 무엇인가를 다시 찾아내는데 시간과 노력이 점 점 더 늘어만 가고 있다.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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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일어나서 엉망인 필체로 게스트하우스 매니저에게 편지를 쓴다.
핸디폰 로밍 서비를 하고 다닌다면 아주 쉬웠을 일을 또 사서 고생을 한다. (다음부터는 로밍서비스 활용을 고려해 봐야겠다)
지난밤에 늦게 귀소를 하는 바람에 매니저를 만나보지 못했다.
첫날 체크인을 하면서 오늘 체크아웃을 하겠다는 언질은 분명하게 해두었다. 하지만 혹시나 인근의 (티볼리)나 (피사)를 가보게 된다면 하루쯤 연장을 부탁할지도 모르겠다고 당부는 미리 해두었었다. 하여 오늘중으로 점심때 이전에 체크아웃을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마지막날인 이 새벽에 기차로 피렌체에 다녀올 계획이다. 그리고 밤 기차로 시칠리아로 이동하기로 이미 스케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나의 16kg이나 나가는 커다란 배낭이 문제였다.
피렌체 당일치기를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로마 페르미니역과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에는 락커룸이 있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호텔에 맡기는 것이 조금은 더 마음이 편할거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보관료는 락커는 내 스케줄에 비추어 8유로 정도이고 여기 게스트 하우스는 5유로면 된다.
3일간 숙박비 75유로와 함께 편지를 배낭 옆에 놓고 방을 나선다. 편지 내용이야 내 스케줄상 갑자기 피렌체를 다녀오기로 했고 저녁에 밤기차를 타니까 그때까지 배낭보관을 좀 부탁한다. 보관료는 저녁에 돌아와서 따로 지불하겠다. 여러면에서 고맙다 등등 간단하게......
열쇠를 카운터에 얹어 놓고 서둘러 페르미니역을 향해 밖으로 나선다. 열쇠를 보면 방정리를 하러 가볼것이고 편지와 돈을 보면 체크아웃 처리를 하고 따로 배낭 보관을 해 줄것이다. (실은 내가 준비해간 총 여행경비의 2/3가 배낭 안에 현금으로 그냥 들었는데....... ㅎㅎㅎ.)
물론 보관 노하우는 따로 있다. 이제껏 소매치기나 무엇을 잃어버려 본 적이 없다.
테르미니역에서 카푸치노로 새벽커피를 한잔 마시고 나를 태운 알이탈로 고속열차는 6시45분 정시에 피렌체를 향해서 1시간 30분으로 예정된 여행을 시작했다.
응급환자 발생으로 앰블런스를 중간에 기다리느라 20분을 지체한 것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시속 250km를 유지히면서 달리더니 마침내 나를 페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일전에도 설명한 바 있는 이탈리아의 역사는 여기 노벨라역이나 로마 테르미니역이나 대부분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의 표본들이다. 어디를 가던 건물의 외형을 떡 보면 '아하 저게 역이구나' 하는 짐작을 가능게 한다.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
우산을 사야하나 좀 기다려 보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냥 빗속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역사 정문을 내다보면 저만치 앞에 유독 독보이는 커다란 건물이(위의 맨 마지막 사진) 바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다. 보수중인 종탑이 뾰족하게 솟아있는 건물이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성당의 뒷꽁무니 모습이다. 성당의 본모습은 저기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 길게 늘어선 성벽처럼 보이는 성당의 옆면을 기나야만 하는데 그 길이가 자그만치 100m에 이른다. 그만큼 큰 성당이다. 이제껏 걸어가면서 보았던대로의 성당 앞모습을 상상하지는 마라.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작은 오벨리스크와 분수를 가진 너른 광장을 앞에 두고 있는 성당은 기하학적인 패턴이 반복되고 아치형 입구와 뾰족한 창문과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가 돋보이는 로마네스크양식과 고딕양식이 혼합된 이제까지 보아왔던 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뽀얀 대리석 마감의 성당 정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노벨라 성당이 유명한 이유즁에는 르네상스 회화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중요한 (마사초)의 '삼위일체'라는 작품과 '성 요한을 그린 프레스코화' 그리고 (지오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이날은 문이 굳게 잠겨 있는 날이었다.
광장 주변을 느릿느릿 걸어다니며 살펴본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면서 움직이기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한산하다.
피렌체가 이렇게 한산한 날이 일년 중에 몇날이나 될까? 날씨가 화창하다면 나에게 이런 여유와 한가로움을 남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우중충하고 구질구질한 이 날씨 마저도 즐겨보기로 했다. 자주 습기에 노출되어 뿌옇게 성애가 끼는 카메라 렌즈만 조심한다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염없이 좋았다.
한산한 피렌체가........ 겨울비에 촉촉히 젖어들어 차분해진 피렌체가 더없이 예뻤다.
그냥 우리 동네 산책하듯이 골목 골목을 누비고 돌아다녀본다.
어디로 향하든 어느 골목을 가든.......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며, 머지않아 거대한 멋진 광경이 이 골목 끝에서 불쑥 나타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또 기대하면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가........ 로마와는 다른 느낌이다. 아니 분명 로마와는 다르다.
'이것이 플로렌스의 자부심인가?'
골목 골목을 돌아보면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15 ~ 16 세기로 돌아간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천국의 문' 제작에 첫발을 내딛는 (기베르티)를 만났고, 마차를 타고 로마로 떠나는 (부르넬리스키)와 (도나텔로)를 보았다.
할아버지의 조각상에서 치아(이빨)를 뽑아내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만났고, 선술집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보티첼리)와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와인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내 옆을 휙 하고 지나치는 (단테)와 설계 도면을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지오토)도 보았다. 씨에나를 향해 돌진하듯 내달리는 기사와 비로서 자유를 찾은 검은 수탁의 울믐 소리가 골목 가득 울려 퍼졌다. 피렌체에서 추방 당하던 (코시모 메디치)는 나를 향해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막대기로 (깜비오)는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와! 이곳이 바로 피렌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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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지역은 대부분의 구릉지대로 주로 포도 생산에 종사하는 지역이다. 피렌체와 시에나, 피사와 루카 등의 도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아르노 강과 테레베 강의 인근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가축이 직접 오르내리기에 힘들 정도의 가파른 악산(岳山)은 아니어서 품질 좋은 포도 산지로서 그리고 와인의 본고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이탈리아를 대표하며 세계적인 와인 브랜드인 '검은 수탁의 상표'를 부착한 짚으로 싼 키안티(Chianti) 외인이 있다. 그리고 이 키안티 와인의 배경에는 '피렌체 사람들의 환희'와 '씨에나 사람들은 눈물'이 스며있다.
시에나와 피렌체는 이탈리아가 시작될 때부터 영원한 맞수이지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선의의 경쟁을 넘어서 특하면 도시의 운명을 걸고 한바탕 전쟁을 치루기가 일쑤였다. 그 전쟁은 오늘날의 이 순간까지도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이어지고 있다. 둘은 상극을 넘어서 절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운명을 간직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예 교황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적당한 선에서 휴전 협정을 맺자는 제의였다. 날로 급하게 변해가는 유럽의 정세 속에서 두 도시는 휴전이 서로에게 이롭다는 판단을 내려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두 도시간의 국경을 어디로 하느냐가 문제였다.
교황은 공평함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한 날 한 시에 피렌체의 광장 한가운데서와, 씨에나의 광장 한가운데서 각 도시의 가장 날랜 군사가 가장 빠른 말을 타고 같은 시간에 상대 도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해서 그 두사람이 마주치는 곳을 국경선으로 하기로 합의 했다. 지극히 타당한 의견이라 할 수 있었겠다.
그런데 문제가 요즘 같은 첨단 시계나 카카오 톡이 없던 시절이고 보니 멀리 떨어진 두 곳에서 동시에(?) 라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나고 말았던 것이다. 하여 교황은 양 진영에 공평하게 판정 감시단을 파견 하였고, 문제 핵심인 '동시에'를 새벽에 첫 닭이 우는 첫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하기로 하였다. 아뭏튼 자기편 닭이 쬐끔이라도 빨리 울면 그만큼 이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것이다. 어떻게 하면 닭을 빨리 울게 할 수 있을까에 경쟁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는데...... 두 도시의 대응이 제각각 달랐다.
씨에나는 흰닭을 선택하였고 사흘 전부터 최고의 극진한 대우로 보살폈다. 잘 먹이고 잘 재웠다. 닭의 심신이 편해야 당일날 일찍 잠자리에 들고 편안하게 푹 쉬고 나야 부지런히 새벽을 당겨가면서 힘차게 울어재킬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씨에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피렌체는 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이미 최선의 방법을 씨에나가 찾아냈으니 기껏 아무리 더 노력해 보았자 50 : 50 이라는 뻔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어서 였다. 그냥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삐닥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요상한 수도사가 찾아왔다. 무조건 자신에게 맡겨주면 무슨 수를 쓰던지 씨에나의 흰닭보다 피렌체의 검은닭이 먼저 울게 해주겠다는 제의였다. 이쯤되면 무조건 먼저 울게 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느냐 싶어 냅다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삐딱이 수도사가 하루종일 검은닭을 쫓아다니면서 어찌나 못살게 구는지 닭이 그만 비실비실 죽어버릴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저 놈이 혹시 씨에나가 보낸 첩자가 아니여?' 하는 의심속에 우르르 몰려가니 수도사는 여전히 태연하게 회초리로 바닦을 내리치고 있었고, 걸음아 닭살려라 하면서 검은닭은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닭을 쫄쫄히 굶기고 있었다. 회초리를 빼앗아 제지하려 했더니 수도사는 닭에 관한 일체를 자신에게 위임한다는 영주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피렌체는 앉아서 그냥 패배를 지켜 볼 수 밖에.......
결전의 날 새벽.
흰닭은 편안하게 깊은 잠에 빠져서 날이 밝아 오는 시점을 꿈속에서 카운트 하고 있었다.
검은닭은 사흘 동안을 물 몇모금 외에는 먹지도 못하고 그 빌어먹을 수도사에게 시달리느라 뜬 눈으로 계속 밤을 새우다보니 지쳐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고열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횃불을 환하게 켜든 수도사가 불쑥 나타났다. 다른때는 조그만한 촛불을 들고 다니더니 난데 없이 커다란 횃불을 들고 불쑥 찾아온 것이다. 순간 검은닭이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하도 정신이 오락가락 하다보니 날이 새서 환해진것인지 횃불에 놀라 아침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몰라도......... 냅다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려 버리고 말았다.
'꼬끼오'
기다렸다는 듯이 피렌체의 기사가 말을 달려 시에나로 향해 출발 했다.
씨에나의 닭도 울긴 울었고 기사가 출발 했다.
그런데 그 정상적인 타임의 작동과 비정상적인 타임 사이의 오차가 오늘날 시간으로 대략 15분 정도의 간격이 벌어졌다고 한다. 마침내 두 기사가 마주쳤는데.........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서 시에나 쪽으로 약 12km를 지난 지점이었다. 이 공짜로 얻다시피한 지역의 지명이 바로 '키안티' 였다. 그 거리만큼을 피렌체가 차지하게 되었다. 까만수탉의 비몽사몽 덕분에.....
이는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엄연한 투르우' 이다.
이 덤으로 얻은 지역에서 생산한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 '피렌체의 키안티(Chianti) 와인'이라 불리워졌으며 '검은 수탁을 상징'으로 한다. 오늘날에는 그냥 '토스카나의 키안티'라 하여 씨에나를 자극하지 않으려 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때 공로자인 검은수탉은 말년까지 피렌체유공자로 선정되어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는 전설이 내려오는데......
흰수탉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어떻게 되었을까? 볶음탕? 바베큐? 혹 뼈없는 닭발까정?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게되는 용어가 바로 (두오모)가 아닐까 싶다.
'두오모'란 본시 반구형의 천정을 의미하는 돔(Dome) 이다.
중세 이후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성당이란 성당이 모두 돔 양식으로 건축되면서 부터 용어의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현재 '두오모'의 뜻은 '대성당'을 나타낸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나 가장 큰 성당을 두오모라 부른다. 그러다보니 대도시마다 두오모란 명칭이 흔하게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하여 본래의 뜻인 '반구형 모양의 천정'을 의미하는 새로운 단어로 '쿠풀라 '를 사용한다. '쿠풀라'가 곧 '돔' 이다.
피렌체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는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쿠풀라에 오르거나, 바로 옆에 있는 지오토의 종탑에 올라 발치 아래로 피렌체 도심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두오모 쿠풀라가 30여m가 높으니 더 멀리 보인다 하겠으나, 쿠풀라에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쿠풀라의 멋진 풍광을 볼 수가 없기에 나는 기꺼이 지오토의 종탑을 선택했다. 물론 두 곳 모두를 오르는 여행자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글쎄.........
(부르넬리스키)와 (기베르티)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얽히고 서려있는 우뚝 솟은 장엄한 쿠풀라와 그 주변으로 여백처럼 펼쳐지는 붉은 지붕의 피렌체 도심은 한동안 여행자의 눈길과 발길을 붙잡아 놓기에 충분하다.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장소와 공간을 사람이 만들어 창조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가 않는다. 위대한 그 할아버지들.........
종탑이든 쿠풀라든 쉽게 오를 수 있는 만만한 곳은 아니다. 하여 두 곳을 모두 오른다는 것은 어떤 바램에서 일까? 하긴 역으로 쿠풀라에 올라야만 지오토의 종탑이 제대로 보일거라는 상상은 간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쿠풀라와 여기 페렌체 두오모의 쿠풀라는 두 눈에 들어오는 풍광도 느낌도 감흥도 전혀 다르다.
태어나 이제껏 인간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올라 가장 멋진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꿈이 아닌 현실속에서............
언제고 다시 이탈리아에 오게 된다면 로마는 다시 가보지 못한다 할 지라도........ 여기 피렌체 두오모의 쿠풀라에만은 꼭 다시 오고 싶다........
(부르넬리스키)의 천재성과 불굴의 의지에 한없는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본래는 (피렌체 두오모) 바로 앞에 있는 (산 지오반니 세례당)이 피렌체의 중심을 이루던 대성당(두오모)였다. 그리고 현재 두오모가 있던 자리에는 (산타 레빠라따)라고 하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그것이 본래 피렌체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변란이 발생했다.
정적인 라이벌 도시 '씨에나'에 어마무시한 대성당이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바로 (씨에나 두오모)가 모습을 드러내자 피렌체 전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씨에나가 성당 건축에서 앞서간다는 사실'을 피렌체 사람들은 죽어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피렌체 공회의가 연일 열렸다. 무조건 '씨에나의 두오모'를 능가하는 건축물이 여기 피렌체에 새롭게 들어서야만 한다'는 한가지 목표 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성당을 짖는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거나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건축가를 포함한 기술력과 훌륭한 기능공을 갖춘다 해도, 실로 얼마가 투입되어야 하는지 모를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포함한 건축비용이 문제였다.
하지만 피렌체로서는 건축비용은 나중의 문제였다. 일단은 무조건 씨에나를 모든 면에서 앞서 우위를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전적인 근성때문이었다.
하여 처음 시작한 것이 (산 지오반니 세례당)을 (씨에나 두오모) 이상의 규모로 증축하자는 방법이었다.
중세의 생활상 중에서 시장과 무역을 살펴보면 (길드)라는 특이한 조직이 등장한다. 오늘날로 표현 하자면 세분화된 '품목별 협동조합'이라 할수 있겠다. 이 조직의 단합력과 조직력에서 나오는 위력은 엄청났다. 회원들만의 독점이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때론 여러개의 길드가 합쳐서 거대 상단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 중에 철을 담당하던 조합(길드)이 새롭게 증축하는 (산 지오반니 성당의 청동문) 제작을 맡길 조각가를 선정하는 콩쿠르(컨테스트)를 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르네상스의 위대한 전설) 하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세례당의 동서남북 네 곳에는 네 개의 청동문이 걸려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두오모쪽으로 난 동쪽 문으로 '천국의 문'이라 불린다.
이 위대한 전설이 시작된 지 몇년이 지난 시점에서 피렌체 사람들은 새로운 결론을 돌출하기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원대한 계획으로 증축을 해 보았자, 증축으로는 결코 '씨에나 두오모'를 능가 할 수 없다는 결론 이었다. '증축으로는 결코 씨에나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페렌체 공회와 주민들은 하던 증축은 어느 선까지 그대로 하고...... 무조건 새로운 두오모를 꼭 만들어야 하겠다는.......
1294년. 마침내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아르놀포 디 깜비오 ;Arnolfo di Cambio)로 하여금 기존의 (산타 레빠라따) 성당의 자리에 새로운 두오모를 짖도록 하였다. 팔각형 돔을 중심으로 세 개의 신랑이 만나게 하고, 옛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권역은 가운데 신랑으로써 포함되도록 설계했다
깜비오가 현재의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설계를 했고 건축을 시작한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그가 완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착공 6년이 지나서 갑자기 깜비오가 사망했다. 그리고 공사는 중단되었다.
30년이나 중단되었던 공사는 양모조합(길드)이 새롭게 공사비를 부담하는 선에서 새로운 건축가로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던 화가이자 건축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에게 맡겨졌다. 두오모는 깜비오의 설계를 그대로 진행하는 선에서 계속되었고, 동시에 옆에 새롭게 종탑을 건축하기로 하고 설계외 시공을 동시에 추진(지오토의 종탑)하게 되었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한지 3년만에 (지오토)가 그만 다시 사망하고 만다. 이어서 그의 제자였던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1348)가 공사를 이어나갔지만 10년쯤 후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여파로 다시 공사가 중단 되었다.
흑사병의 여파로 피렌체의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력도 예전만 못하게 되어 두오모의 완공을 불가능으로 여겨질 즈음에 피렌체 공회와 상인조합과 시민들은 그 타개책으로 공사의 전권을 (메디치 가문)에 맡기기에 이른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금융가문 메디치였으나 당시 메디치가 역시 위기를 겪고 있었다. 메디치가를 금융가문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한 조반니 데 메디치가 사망하고, 대를 이은 코지모 데 메디치가 교황의 횡포에 가문의 존망이 걸린 위기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 위대한 금융가는 교황의 눈밖에 나면 곧 패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교황의 제의를 거절하고 '피렌체 두오모 공사'를 떠맡는다. 이 시기의 장대한 스토리는 현재 '메디치 마스터 오브 플로렌스'라는 제목으로 '미드'로 방송이 되고 있다. 아직 초반부로 코지모 데 메디치의 일생을 조명하고 있다.
'메디치가'가 르네상스에서 어떤 역활을 했었는가, 그리고 르네상스의 주역들의 모습을 살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참고하면 아주 유익할것임)
공사는 재개되었고 1349년 (프란체스코 탈렌티;Francesco Talenti)가 감독으로 공사에 들어가 마침내 (지오토)가 설계한 종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본당의 후미 부분을 (깜비오)가 처음 설계했던 것보다 상당부분 확대시켰다. 10년 뒤에는 다시 (조반니 디 라포 기;(Giovanni di Lapo Ghini)가 공사 감독이 되어 가운데 신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구역으로 나누었다. (깜비오)에 의해서 첫삽을 뜬지 80년 가까이 지난 1375년에 이르러서야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완전히 철거되었고, 5년 후인 1380년에는 신랑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완공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곳은 돔 뿐이었지만 처음 설계당시부터 당사자인 (깜비오) 조차도 설계는 가능하지만 현재의 건축술과 기술력으로는 워낙 거대한 크기와 높이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고 전제 했었다.
(코시모 메디치)는 이 위대한 건축물이 돔이 없어서 이대로 방치되는 것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가문의 명예를 걸고 팔을 걷어부치고 직접나섰다.
그러자....... (산 지오반니 세례당 청동문)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전설)이 1막을 마치고 긴 세월을 지나 서서히 다시 2막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힘들게 올라갔었지만 멋진 피렌체 풍광을 바라보고 나서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광장에 내려서서 올려다 보는 종탑은 가히....... 어떤 이가 이 종탑을 올려다보며 말하길 '지나간 시간 그 누구의 예술보다 완전하게 아름답다'고 했다더니 그 말의 여운이 길게 내 가슴에 살포시 가라앉는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 덕분에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금 광장으로 꾸역꾸역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리고 대분의 사람이 쿠풀라로 올라가는 긴 행렬과, 지오토의 종탑으로 올라가려는 긴 행렬과. 다른 하나는 '천국의 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한마디로 안달들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기념사진이 아니라 그냥 인증샷 으로 보인다. 그게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면....... 글쎄요.........
그런데 여러분......... !!!!!
그 '황금색 문' 가짜예요. 가짜. 그러니 제발 기를 쓰고 인파를 헤치며 철창 너머의 제대로 찍히지도 않는 사진 찍으려 애쓰지 마세요.
진짜가 가까운데 있어요. 거기 가서 여유롭게 소상하게 살펴가면서 제대로 찍으세요.
그런데..... 아마도 안들리나 보다. 아니지..... 어쩌면 안믿기는 것일지도.......... 어이구. 가짜 기베르티 조각을 만지는 사람까지.......
어디서 전설 이야기를 듣기는 하셨나 본데......... 진짜 전설의 깊은 속 내막까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텐데....... 가이드도 모르는데........ ㅎㅎ
잠시 사람들 모습을 바라보다가....... 광장을 한바퀴 돌아 아침에 미리 점찍어 둔 기*차게 맛있는 군것질을 하러 간다.
여행에서 군것질하는 재미 빼면........ 앙꼬 없는 찐빵.
요거 요거 정말로 정말로 맛있다.
그동안 뱅기타고 떠돌아다니며 먹어 본 음식중에서 적어도 세 손가락안에 꼽을 정도로 기가막히게 맛있다.
다른데서 먹어 본것 말고, 요기 피렌체 광장 근처에서 먹은 요게 진짜였다.
미술렝 레스토랑 스테이크 먹느니, 난 요기서 요걸 먹겠다. 시작은 군것질이었지만 한 끼 든든하게 해결해 주었다. 쨩~~~~
그리고 나서 다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골목 건너편 상점들 사이로 두개의 조각상이 나타난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피렌체 두오모)를 설계하고 착공한 '깜비오'의 모습이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두오모의 돔) 쿠풀라를 설계하고 완공한 '부르넬리스키'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래쪽 청동문이 바로 '기베르티'가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 콘테스트에 출품했던 세례당의 북쪽문으로 모조품이 아닌 진짜 작품이다.
맨 아래는 바로 부르넬리스키가 설계한 페렌체 두오모 돔의 모습이다.
여기 이 '기베르티'와 '부르넬리스키' 사이에서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에 버금가는 멋진 전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런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1401년 피렌체의 철제상인조합은 증축중인 (산 조반니 성당)의 청동문을 새로 만들어 기증하기로 하고 공모를 개최하였다. 제작 기간은 1년으로 하고 문의 가로 세로 크기와 두께를 정했다. 그리고 제작에 들어갈 청동을 똑 같은 양으로 배분하였다. 내용은 창세기에서 부터 시작된 기독교 이야기를 담으면 되는 것이었다. 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각가와 금속 세공사와 예술가들이 벌떼처럼 응모했다.
1년이 지나 심사에 들어갔는데 결승에 오른 두사람의 나이가 당시 23세.24세의 젊은이들 이었다. 조각가였던 (로렌초 기베르티)와 금세공사이자 시계공이었던 (필리포 부르넬리스키) 였다. 막상막하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들이었지만 콘테스트라는 것이 어찌되었건 1등을 뽑아야만 하는 것이었고, 결국 '기베르티'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승자인 기베르티는 온 피렌체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곧바로 새로운 북쪽문(천국의 문) 제작에 들어갔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패배의 쓴 맛을 본 '부르넬리스키'는 쉽게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자포자기에 빠져 술로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기베르티'가 좋은 의미의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세상에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조합과 주교에게 청원을 했다. 자신이 새로운 청동문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부르넬리스키와 공동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서로 상대를 존중해서 한 요청이었는지, 어차피 작업에는 주장이 있어야 하는데 라이벌을 보조로 써서 자신의 명망을 더 높이고자 했음인지는 당시로선 더이상 알려진것이 없었다. 다만 먼 훗날 부르넬리스키가 이 때와 똑 같은 방식으로 기베르티에게 앙갚음을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후자인 라이벌을 철저하게 짖뭉개기 위해서였다고 보인다.
조합으로 부터 통지를 받은 부르넬리스키는 절규했다. 이건 죽은 사람을 놓고 다시 칼로 찔러 난도질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차라리 손목을 자를 지언정 기베르티 밑에서 일할 수는 없다고 외쳤다. 그리고는 다시는 영원히 조각도를 잡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그 세계를 떠났다.
동료이자 제자격인 10살이나 어린 도나텔로의 설득으로 '로마'를 향해 무작정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 도나텔로는 2년 후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다.
하지만 브르넬리스키가 피렌체로 다시 돌아 온 것은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조각가이지 금속세공사였으며 시계공이었던 부르넬리스키는 20년 전에 죽었다. 지금 그는 건축가로 피렌체에 돌아 온 것이다.
20여년간 로마에서 '판테온'에서 받은 깊은 감명에 따라 남들과 다른 사고와 생각과 방법으로 원근법과 수학적 법칙을 건축분야에 접목시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온 부르넬리스키 였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서 돌아 온 피렌체는 여전히 그를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조각가'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건축을 의뢰해 오지 않았다.
무심한 세월만 야속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부르넬리스키는 또다시 깊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허구헌날 술집에서 세월을 탕진하고 있었을 그때, 한 낯선 사람이 부르넬리스키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탁자에 슬며시 다가와 마주 앉았다.
찾아온 방문객을 알아 본 사람들이 부르넬리스키를 깨우고자 하였을 때 방문객은 손을 내저어 그들을 만류했다.
그리고 마주 앉아서 부르넬리스키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밤이 제법 깊어지고 난 후에야 겨우 잠에서 깬 부르넬리스키는 테이블 위로 밝혀 놓은 촛불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눈치 챘다.
그리고 이내........ 만남은 처음이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방문객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당혹해 하는 부르넬리스키를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 다음에서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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