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에도 이미 밝힌바가 있듯이 '바티칸'이라는 존재 자체를 그리 썩 달가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인류) 독생자이신 그 분께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으며, 다시 부활하시면서 베풀어 주신 은헤로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받았다'라고 한다면....... 그 부활의 사건 이후로 실제 존재한 역사에서 '로마 카톨릭'이 한 역활이 너무도 미천하고 미미하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로마 카톨릭'이 없었다면...... 인류의 신에 대한 사랑이,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베푸신 사랑이 더 피부에 와닿기가 쉽고 풍성하고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로마 카톨릭'이 그동안 자신들의 안위와 지위 확보 유지와 세속적 권력과 물질만능에 눈멀어 자행한 어두운 역사가, 부활의 사건 이후로 거의 2천년이 흐른 현재까지의 기록된 역사 중에서 거의 1천5백년 이상을 인류에게 커다랗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유구한 기독교 역사에서 신실한 기독교 신앙인들은 말하기를, 기독교의 존재 자체나, 교회를 폄하하고 교리를 훼손하며 기독교를 부정하는 듯이 비판 내지는 성토하는 사람이나 세력을 '적그리스도'라고 명명하여 불렀다. 하여 이 '적그리스도'는 지대한 관심과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연구와 어마어마한 결실을 낳았는데......... 그 결론 중에(참으로 힘들고 위험한 생각 일 수도 있겠으나)......... '교황'롸 '로마 카톨릭'이 오히려 실제 '적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린 학자와 종교가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교황'과 '로마 카톨릭'이 오히려 '구세주의 십자가를 지심과 부활의 의미가 담긴 참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세속의 지저분한 하급 종교로 변질 시켰다는 이야기다. 나는 감히 '적그리스도'라는 용어 조차 입에 올리기도 힘든 별볼일 없는 지극히 미미한 신앙의 겨우 한가닥 끄나풀 정도를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지만, 앞서 말한 이야기의 내용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나의 소견이나 감회를 멸시하거나 폄하하지는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이런 부족한 나의 심경까지를 헤아려 주시고 보듬어준 분이 계시기에 나는 감히 용기를 내서 이번에 '성베드로 교회'(바티칸)를 한번 들려 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을 생각하면 왠지 무거워지는 나의 마음에 환하게 빛을 선사해 주신 분이 한 분 계신다.
1920년 폴란드에서 태어나시고 2005년에 선종하신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시다.
나는 그 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분이야 말로 암흑의 시대를 줄곳 외길로 힘차게 달려온 '로마 카톨릭'에게 아직 꺼지지 않은 '참 신앙의 등불'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케 하여주시고 더욱 환하게 밝혀 놓으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톨릭뿐만이 아니라 종파를 넘어 모든 기독교인들에 베풀어주신 고인의 놀라운 사랑이었으며, 로마 카톨릭에게는 엄하고 커다란 교훈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항상 나에게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을 건네 주셨다.
'우리 함께 이제까지의 어둡고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고....... 다 같이 초대교회로 돌아갑시다.'
"교황은 바티칸 안에 죄인처럼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초원의 유목민들부터 수도원의 수도자들까지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또 모든 가정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라고 늘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즉위식에서 쓰셨던 3층 면류관을 '어두운 카톨릭의 과거사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시면서' 영원히 벗어 버렸다. 그 이후로 어느 교황도 과거 절대 권위의 상징이었던 3층 면류관을 쓰지 않고 있다.
교황께서는 <3천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하여, 교회가 과거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不寬容)과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기본권의 유린을 묵인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하는, 가톨릭으로서는 진일보의 고백을 함으로써 로마 카톨릭의 양심이 아직 살아있음을, 거듭나려는 노력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셨다.
즉위 이후 타 종교와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점이 매우 훌륭하다. 이슬람 학자들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지도자들과도 교류하여 직접 사원을 참배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대희년(2000년) 새해 첫 성사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조장하거나 방조해 온 각종 범죄 및 사건들에 대한 시인과 반성을 발표하여 세간에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건 시초를 따지자면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정신의 연장선상. 당시 아랍권에선 여러 의미로 대환호했다.
- 기독교인은 하나뿐인 유일신 야훼를 모시지만, 세상에는 다른 인종 다른민족이 믿고 있는 그들의 신앙관과 그들의 신이 따로 존재한다고 인정했다.
- 기독교는(로마 카톨릭)은 세속적 욕심에 눈 멀어 수많은 악행을 자행해 왔으며, 거기에는 오들레앙의 성녀 '잔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한 것 같은 부끄러운 역사도 포함된다고 했다.
- '성스러움'을 앞세워 세속적 욕심을 채우려 수없이 많은 생명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십자군 전쟁'이 결코 성스러운 기독교인의 양심에 올바른 정당한 행위가 아니었음을 사죄했다.
- 더하여, 당시 기독교인의 손으로 수많은 기독교인을 학살한 '로마 바티칸'의 만행을 속죄했다.
- 나찌의 만행 속에 수많은 유태인의 학살을 침묵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한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인정하고 사과한 후에, 다른 민족 다른 종교와 용서와 배려 속에 화합을 이뤄 '정녕 신이 창조하고 바라신 모두가 더불어 사는 미래'를 이루어 가자고 평생을 헌신 노력하였다.
2005년 선종하시면서 그 분은 두 마디 말씀을 남기셨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하지만, 그렇게 헌신하였음에도 이 분의 사상. 가치관. 교리의 해석. 업적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과 세력이 있다. 그들은 다른 종교나 세상밖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비판 세력은 오로지 '로마 카톨릭' 안에 만 존재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2018년 2월. 이 순간에........
'로마 카톨릭(바티칸)'은 그 동안의 2천년 역사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거대한 풍랑에 휩싸여 있다.
지금 '로마 카톨릭'은 지구상의 또 하나의 거대한 세력인 '중국'과 (빅 딜)을 진행하고 있다. 아니지. 세세히 들여다 보면 '중국'이 아닌 '시진핑의 공산주의'와 '카톨릭의 정체성'을 걸고 '딜(거래)'를 벌이고 있다.
'구세주의 십자가형과 부활' 뒤에 로마 카톨릭은 굵직굵직한 사건을 많이 겪어 왔다.
- 313년 기독교의 로마국교 공인.
- '카놋사의 굴욕'을 통해 세속적 (갑질)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 '아비뇽 유수'를 통해 (을질)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스럽과 존재의 가치를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절실하게 경험 하였고.
- 세속에 눈 멀어 '면죄부를 판매' 하고 '성수'를 만명통치약이라고 속여 팔아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 교황의 권위 유지와 부를 축척키 위해 영주들을 속여 '성지 탈환' 이라는 명목아래 '십자군'을 일으켜 전쟁터로 내몰았고.
- 카톨릭의 근본 생존권을 위해 끊임없이 장자권을 주장하는 '유태인을 완전 제거' 하려는 야욕으로 살륙을 감행하고.
- 마침내 '종교 개혁'으로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는 역사들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한치의 양보나 반성도 없이 기를 쓰고 죽어라 내세우고 외친 명분은 단 하나 '신께서 선택하셔서 세우셨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나는 정당하다. 세속의 시선이나 가치관으로 감히 나를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말아라.'
이 대목이 되면 나는 '컥' 하고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혀 온다.
중세 암흑기 1천년이 바로 저 명분때문에 자행된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스스로 권위와 권능을 만들고 내세운다.
사도 베드로는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장자권으로 천국의 열쇠를 약속 받았다고 한다. 하여 베드로가 구세주의 절대 권능을 이어 받은 후계자로서 초대 교황에 등극하였고 역대 교황들이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여전히 구세주에게서 신성한 권능을 위임받은 대리권자라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막달라 마리아의 장자권'이 나오고, 십자가 처형시 모든 사도들이 뿔뿔히 도망을 쳤음에도 막내였던 요한만이 성모 마리아와 함께 예수의 마지막을 목격하였으며 '요한아. 저 분이 이제 너의 어머니시다. 어머니. 이제부터 요한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며 요한에게 성모 마리아와 가족을 부탁하였으니 요한이 장자권을 받았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이 뒤따른다. 이런 주장이나 행위가 바로 '적그리스도'가벌이는 공작이라는 것이 카톨릭의 주장이다.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다.(오로지 카톨릭 안에서만)
콘클라베를 통해 교황을 선출하지만, 콘클라베는 주님께서 주재하시는 성스런 회의이기에 거기에서 선출된 교황은 신이 선택한 성스러움을 가진다.
교황은 '로마 카톨릭의 대주교'를 겸임하며, 세상에 펴져있는 카톨릭 교구를 관장하는 추기경과 주교들을 직접 선출하여 임명한다. 이는 구세주의 대리인으로 행하는 신성한 의무이자 가장 중요한 책무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구세주의 말씀과 뜻을 세상에 전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로마 바티칸이 정하고 지켜온 2천년간 절대 불변의 신성불가침의 계율이며 책무'였다.
2018년 정 초. 이탈리아 언론이 불쑥 이런 기사들을 일제히 실었다.
'로마 교황청이 (주교 임명권)을 중국 정부에 사실상 넘겨주는 것을 골자로 양국 간의 협의가 임박했다' 라고.
순전히 자본주의 하에서 무엇인가 마치 '특허'나 '상표권'을 사고 파는 기업간의 거래처럼 말이다.
그러자 중국 관용매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프란체스코 교황과 중국 정부가 이러한 주교 임명방식에 합의 했고, 3월 5일 이전에 중국의 전국인민대표회의의를 거쳐서 결과를 가지고 중국 외교부 인사가 바티칸을 방문해 합의서에 공식 서명을 할 계획' 이라는 기사였다.
카톨릭이라는 거대 종교가 일개 국가와 종교적 제도와 믿는자들의 신앙 활동에 대하여 협의하여 합의 한다는 내용이다. 글쎄다. 신앙이란 결코 장사처럼 딜에 의해 발전하거나 달성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조셉 젠 추기경은 '예수에 대한 배신이고 교회를 팔아 넘기는 행위'라며 교황청을 맹 비난했다. 아프리카나 남미를 비롯한 대부분의 카톨릭이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여타 다른 종교에서는 표현을 자제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카톨릭의 존립'을 걱정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철저한 감시 속에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지하 교회로 시작되었음을 '로마 바티칸'은 아마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중국의 카톨릭은 양분되어 있다.
교황이 임명한 40명의 주교가 관장하는 '지하 교회"가 있고, 중국 공산당 정부가 임명한 7명의 주교가 이끄는 '공식 교회'가 있다. (북한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교황이나 바티칸이나 추기경들을 일부 제외하고라도, 과연 보통의 신앙인이나 일반 사람의 견해로 누가 참 기독교인 인가?
수많은 '지하 교회'의 주교와 신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고 구속되고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들의 목숨을 건 신앙이 오늘의 중국 지하교회를 이끌어 이어져내려 왔다. 체포된 주교위 석방을 위해서 임명자인 교황청은 툭하면 인권과 종교탄압을 앞세워 성명을 발표하곤 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요지부동이었다. '공산주의의 노선에 맞지 않는 불온한 사상을 선동했다'는 명분을 항상 내세웠다.
'종교의 자유는 허락하지만, 어디까지나 공산주의 노선 안에서 주체사상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허락' 이라는 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다.
구세주께서 인간에게 허락한 믿음은 저런 제한이나 허락을 전제 받아양 하는 그런 믿음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교황청은...... 중국 공산정권의 주교 임명권자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달아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존엄하고 신성했던 '교황의 주교 임명권을 스스로 중국 공산당 정권에게 양도 하려고 협의 중' 이라는 말이된다.
결코 흑백 논리에 입각한 이념주의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조물주의 놀라운 은총과 가르침에 힘입어 인류 모두가 더불어 보다 낳은 삶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중국 공산당의 이념과 가치관에 우선을 둔 허울뿐인 주교들을 중국 공산당이 임명하게 되고, 그들 중에서 추기경이 탄생하게 되며, 나아가 교황 선출권은 물론 피선거권까지 가지게 된다면......... 지구상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에서 언제고 교황이 선출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에 충실하고 중국 공산당의 당원 자격증을 가진 교황이라...........
혹, 교황청은 이런 허왕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핍박만 받던 지하도시의 보잘것 없는 종교가 거대한 로마제국도 먹어 버렸는데....... 이참에 무한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중국도 그렇게 한 번 먹어봐?' 라고.
과연 글쎄다.......... 이게 무슨 투자회사의 배팅이란 말인가?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이번 합의가 성사되고 나면.......
한 2년 쯤 후에 중국 공산당은 교황청에 새로운 합의를 요청할 것이다. 바로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서 새로운 요구를 하게 될것이다.
사회주의 노선 안에서, 아무리 비과세의 종교라 할 지라도....... 무노동 무대가로 감히 '노동자와 인민의 피와 땀이 서린 돈을 마구 교회가 가져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겠다고' 말이다. 물론 종교는 비과세임을 인정하겠지만....... 주교도 당에서 임명했고, 교인 모두도 당원인데........ (십일조)며 (헌금)을 반땅 내지는 일정 비율로 역시 '자발적인 기부금'의 형태로 중국 공산당과 나누어 갖자고 말이다. 아니 꺼내리란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뻔히 이런 파행이 계속 자행되리라 내다보고 있다.
다음으로는 북한의 문제가 대두된다.
극제사회의 다양한 압박 속에서 북한도 중국처럼 '신앙의 자유'를 내세워 바티칸과 '빅 딜'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중국과 합의가 성사된 마당에...... 교황청은 거부할 명분을 찾지 못하게 될것이다. 결국 북한 문제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처음부터 이번 여행에 있어서 로마를 방문해서 여행을 하기는 하겠지만 그 과정중에 '바티칸 시국'에 대한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냥 (로마)만 돌아 볼 생각이었다.
주로 걸어서 돌아다니는 내 여행스타일에 비추어 (로마)는 생각보다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로마를 상징하는 명소들이 로마가도를 따라서 일직선상에 거의 모여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아쉽게 스쳐지나간 '캄피돌리아 광장'과 '보르게세 공원과 박물관' 등이 아쉽기는 하였지만 얼추 내가 이미 생각했던 장소들은 거의 둘러본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남았다.
마지막 날은 좀 무리가 따르는 스케줄이겠지만 (피렌체)를 당일치기로 다녀와서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시칠리아)로 떠날 계획을 이미 세워 놓았다.
시간은 좀 남았는데 '반나절 정도' 라는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 나에게 허용되었다.
인근의 (티볼리)가 가장 마음을 끌었지만 반나절에는 불가능한 나들이가 되겠고, '내일을 위해 좀 쉴까' 하던 중에 기념품 코너를 잠시 들렸는데...... 그분의 사진이 그곳에 걸려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이었다.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살아게실적에 뵌 적이 없었는데 영면에 드신 무덤이라도 알현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자면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야만 한다.
나는 로마에서 처음으로 바티칸으로 가는 64번 버스에 몸을 싣고 크로치피소 다리를 건너 버스에서 내렸다.
표지판을 따라 좀 걸어가니 마침내 '성 베드로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티칸)이 그 뒤에 웅장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바티칸 박물관' 앞으로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행렬을 보면서...... '여행 중에 박물관은 웬만하면 그냥 건너 뛴다'는 나의 여행 철학이 얼마나 다행스런 경험인지를 느끼면서 성당으로 향했다.
일단 성당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다가 그제서야 알게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드로 성당의 지하에 모셔졌고, 지금 지하 예배당은 개방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빵 돌아가서 15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검색대를 통과해서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가장 높은 종탑(쿠풀라)으로 향했다.
교황청 주변은 물론 멀리 로마의 풍경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였다.
브라만테가 상당부분을 건축했고, 라파엘로의 손을 거쳐서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성 베드로 성당의 쿠풀라(돔)가 마침내 내게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그냥 투어를 하듯이 즐겼다.
쿠풀라와 성당 지붕 사이에 있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도 한잔 마시고........
내려와서는 남은 시간이 아쉬워 다시 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페관까지 허용되는 남아있는 시간을 여유로움과 여러가지 생각과 상념을 하면서 성당 내부의 건물자체와 조각들과 성화들을 찬찬히 둘러 보기로 했다.
외면하려 외면하려 해도....... '로마 카톨릭의 역사'와 내게 선입견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고정 관념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에서 나오는 뭇 상념들이 살며시 가슴 사이로 피어 올라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생각들은 점 점 선명해져만 갔다.
그러나마나 수많은 인파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느릿느릿 나만의 시간을 즐겨본다. 세상에서 가장 여유롭고 한가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 본 지면에서는 특별히 나열하고픈 이야기들이 잘 떠오르지를 않아서.......
이번 여행의 주요 관점이 그리스. 로마 . 비잔티움.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를 돌아보고 이 시기의 서양 미술사적인 관점들을 좀 스스로 정리해 보고자 하는 취지였던 만큼, 여행기를 통해 하고픈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하여 (피렌체와 르네상스) 따로, (시칠리아와 로마. 시칠리아와 비잔티움. 시칠리아와 이슬람) 따로. 그리고 (이스탄불 속의 비잔티움과 오스만 투르크) 이야기를 따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 내용들이 상당히 방대한 연유로....... 여기 '바티칸 여행기'를 시작으로 부분 부분 이야기를 다시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여행은 (culture&history) (travel)로 분류하려고 했었는데,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니 의도와 다르게 내용이 다소 섞이는 부분이 있어서 차후로는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흔히 우리는 말하기를 '같은 하나의 신을 믿는 4개의 종교' 가 있다고 말을 한다.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신.구교로 불리는 카톨릭과 개신교 이다.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결코 아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포괄적 의미의) 등의 3개 종파라고 했다면 차라리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이것을 다시 풀어 쓴다면 유대교. 이슬람교. 카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렇게 5개의 종파로 나누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흔히들 '정교회'를 '카톨릭의 아류 ' 쯤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아니다. 정교회는 카톨릭에 속하지 않고, 카톨릭 또한 정교회에 속할 수 없다.
기원과 역사가 같으나 교리와 종교의 역사적 관점에서보면 분명이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종교이다. 하지만 둘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와 비슷하다.
지극히 단편적인 시각에서 '같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의 변천사'를 들여다 본다면........
'유대교'의 입장은 그 시작에서 부터 현재까지 오로지 외길'(죽어도 go) 이다. 애초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고 그 약속은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는 근본 원리를 고수 한다. 하여 세월의 흐름과 시대의 변천에 종교와 신앙활동의 방식이 바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베푸시는 은총은 여전히 히브리 민족에게만 국한 한다'고 믿고 있다.
'이슬람교" 종교적인 성격의 역사적 기원은 유대교에 이어 다음이지만, 이슬람이 체계를 갖춘 하나의 분명한 종교로 탄생한 것은 카톨릭이 등장하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다. 서기 610년에 천사 가브리엘이 마호멧에게 나타나면서 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기라면 카톨릭과 정교회가 서로 반목하면서 치열하게 대결하던 한참이나 훗날의 이야기가 되겠다.
아호멧으로 부터 시작된 '이슬람교'는 창시자인 마호멧의 엄격한 성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오로지 '신성불가침'의 외길뿐이었다. 마호멧은 가브리엘 천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코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앞장서서 그 누구보다도 그 코란의 가르침에 순종한, 매우 엄격하고 단호한 신앙과 법률의 수호자였다. 청빈하게 살며 코란에 기록된 바대로 엄격하게 실천하였다. 여러 종교 중에서 금기와 제약이 가장 많고, 또 게율을 지켜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그리고 다음이 유대교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이슬람인들은 처음 신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를 지켜야만 한다는 전통적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코란'은 알라(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계율이다. 사람이 거기에 토를 달 수도 없을 뿐더러, 주관을 담아 달리 해석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오로지 쓰여지고 전해내려온 바대로 그저 행하면 되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다.
'카톨릭'이 가장 많은 변화와 변모를 감행했다. 그 모든것이 '숭고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찬미를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였으나 ' 과연 글쎄올시다' 라고 해야겠다. 카톨릭에서 '초대 교회'의 원형을 찾는다는 것은 아마도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많은 것이 변모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숱한 변모는 나름의 종교적인 정당성과 명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내세우고 있다. 다만....... 다만....... 조물주께서 지금의 카톨릭의 모습을 과연 허락하셨고 이쁘게 보아주실지는 미지수다.
여담으로...... 한국의 중세 정치사를 보면 울화통이 치밀고 분노에 치를 떨게 된다. '유학'을 들어서 해괴망측한 말장난들이나 늘어 놓고, 그 싸움이 피비린내 나는 파벌싸움으로 번지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소신만 본다면 다들 너무너무 위대한 학자들이시고 어마어마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셨지만..... 쉽게 표현해서 '세상의 이치란 존엄한 생명을 받고 사람의 형태로 태어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옛것을 숭상하고 보다 나은 개선을 위해 애쓰며, 부모를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아랫사람을 보살피며 보다 나은 미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기본 도리다.' 뭐 대충 이런 정도의 구호를 가슴에 새겨 놓도록 하고 하루하루...... 어제보다 나은 모두의 삶을 위해서 노력하면 되는것이 아니었겠느냐는 말이다. 공자. 맹자. 노자. 한비자. 그냥 대충 읽고 좋은것만 추려서 오로지 잘 살고자 하는데에 주안점을 두고 실천하면 된느 것을......... 어쩌니 저쩌니 끊임없이 말꼬리 잡기 놀이에만 미쳐 날뛰고.........
이 같은 똑같은 일들이 카톨릭의 전체 역사에서 똑같이 되풀이 되었다.
어려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처음 나가서 전래 동화를 듣듯이 성경속의 아름답고 고귀한 이야기만을 듣고 자란 지극히 보편적인 소박한 신앙인에겐 그런 칙령이나 종교회의를 통과한 복잡한 교리 같은것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일정한 학문을 이루었다는 사람에게도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 등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심지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라. 따지지 않아도 될 신학적 교리들을 우리 일반인들이 모두 학습하고 이해하기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세례나 영세를 받으려면 그것을 모두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전제나 신앙적 맹세가 뒤따른다. 과연 이순간 대한민국의 기독교 신자중에서 기본 골자처럼 여겨지는 몇 몇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면 교회로 인도했던 분께서 쪽집게 과외를 통해 해답을 가르쳐 주신다.
' 그냥 믿습니다 하면 돼. 다 알고 믿으려 하면 아주 힘들어져. 일단 믿습니다로 세례(영세)를 받고 나서 착실하게 내가 이끌어 주는 대로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저절로 깨닫게 되. 그게 신앙 생활이야.' 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이렇게 믿음에도 쪽집게 속성 과외가 있다.
중세까지 글을 모르는 신부도 많았고 성경을 보기는 했으나 감히 소유하지 못했던 수도사가 대부분 이었다. 그러니 가장 낮은 신도들은 어떻겠는가. 그냥 훈장님의 옛날 위인전이나 동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소위 교회의 지도자 반열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이런 설전과 교리 논쟁들을 벌이고 피터지는 싸움판으로 확대했다.
한쪽은 세속의 '정치판에서 권력 싸움을' 다른 한쪽은 교회판에서 성스런 자리 다툼'을....... 이 싸움이 거의 1천년 이상을 이어갔고, 중간에 놓인 우리(?)들은 개나 돼지만도 못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것이 중세 암흑기 1천년이다.
서기 313년 지하에 숨어살던 풀뿌리 기독교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다.
이 당시까지 로마의 지하교회는 자립하지를 못했었다. 에루살렘에서 뻗어나가기 시작한 지하교회는 감시와 박해가 덜 한 지역에서 먼저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는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옥이 그러했고 데살로니카와 고린도가 나름 기반을 잡았던 시기였다. 기반이 허약했던 로마지역은 끊임없이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옥 등에게 종교적 지도자를 파견해 줄것과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기독교가 공인됨과 동시에 지리적 이점(?)을 차지하게 된 로마주재 종교 지도자들이 최고로 중요한 일들을 맡게 된 것이다. 로마 지점이 하루아침에 본점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지위는 격상 되었지만 내부에서 새로운 수많은 분쟁들이 생겨났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자 이미 로마라는 영토 안에 세상 최고의 거점을 확보한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를 국가의 종교로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풀로 옮겨 감에도 따라가지 않고 로마에 그냥 남는다.(바티칸)이다. 교회 지부의 서열이 바뀌었다. 1. 로마 2. 콘스탄티노플 3. 안디옥 4. 알렉산드리아 5.예루살렘.
서로마가 멸망하고 얼마 후에 동로마가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게 되었다. 교회 지부의 서열이 또 바뀌었다. 1. 콘스탄티노플 2. 로마 3. 안디옥 4. 알렉산드리아 5. 예루살렘
이렇게 상황이 변하게 되자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풀의 대주교 사이에 알력 싸움이 크게 생겨났고...... 이 싸움이 마침내는 교권(교황)과 황권(황제)의 싸움으로 번진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과 '아비뇽 유수' 사건은 이런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서기 726년 동로마의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발표하게 되자 , 이젠 더 이상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로마를 차지한 교황은 동로마의 황제를 아단으로 파문하였다.
동로마의 황제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더 넓은 지역의 숫자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추기경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로마의 교항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 콘스탄티노풀의 대주교를 (교황)의 반열에 올려서 새로운 종교단체인 (정교회)를 탄생 시켰다.
로마는 (정교회)를 동쪽의 이단교로 폄하하면서 (동방 정교회)라 불렀다.
정교회는 로마에 교황이 차지한 단체인 '바티칸'이라는 새로운 정식 명칭이 있음에도 비하시켜 (로마 바티칸)이라 영역적 한계를 분영하게 표시하고자 했다.
'정교회'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같은 기원과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정교회가 뿌리로 는 '그리스 정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로마 카톨릭은 313년 기독교로 공인된 후 스스로 만들어낸 어느정도 자생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결국은 파벌싸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역사의 정통성 아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 중심에 김구 성생님이 계셨다. 세게 각 지역에서 동참 하였기에 여러 지부를 두었다. 김구는 임시였으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수장(주석)이었고, 이승만은 미주 지부 하와이의 지부장이었다. 맡은 역활과 공적인 지위는 감히 비교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날 일제가 패망했고 대한민국은 해방 되었다. 그 해방된 대한민국에 관리자로 미국이 당당히 입성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정보가 필요했고 인재가 필요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재는 중국 땅에 있었고 미국에게 상해의 인재들은 너무 먼 당신이었다. 미국은 가까운 자기 영토 안에서 이승만을 찾아냈다. 이승만은 흘러가는 정세를 잽싸게 파악했다.
'챤스'
그는 곧 미국의 후광을 등에 없고 상해의 임시정부에 안면을 까고 대한민국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로마카톨릭과 정교회의 애증은 위의 예와 아주 흡사하다 하겠다.
'개신교'는 중세 함흑기 1쳔년을 보냈으면서도 카톨릭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숱한 만행을 일삼고 있었다. 세상은 점차 카톨릭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종교마저 외면해 버리는 단게에 이르렀다. 교황들의 욕심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면죄부'를 파는것에 분노하여, 마침내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에 달하는 반박문을 세상에 공표하면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의 가장 큰 변화의 핵심은 '직접 종교'라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나 사제의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 매개체적인 역활을 부정하고, 언제 어디에서든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신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다는 논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아주 심플하게 쉽게 만들어 주는 인상이 강하지만, 반대로 이를 근거로한 수많은 곁가지 신앙형태를 대량생산해 내게 되었으며, 그로하여 수많은 이단 싸움과 파벌을 야기시키게 된다.
----- 다음 이야기는 (플로렌스)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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