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로마를 사랑하게되기 전에 서둘러 떠나라...... 늦어지면

by 피안재 2018. 2. 27.

 

 

 

 

 

 

 

 

 

 

 

 

  거대한 지진이 서너차례 로마를 휩쓸고 지나갔다.

  로마시내 건물의 상당부분이 하루아침에 잿더미아래 페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다만, 로마 중심부 로톤다 광장에 있던 이 거대한 건물만은 일부 외벽이 허물어져 벽돌로 쌓아올린 외벽의 기초부분이  일부 드러났을 뿐,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둥근 돔은 여전히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장대한 위용을 여전히 뽐내고 있었다.  건물의 입구부분은 코린트 양식로 치장된 옛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키켰는데,  지진으로 페허가 된 잿더미 위에 홀로 우뚝 솟아있는 높은  기둥들 아래로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는  흡사 지옥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도심 한가운데의 신전들과 시장들과 광장과 전차경기장, 그리고 시민들의 주거지역 가까운 언덕위에 높고 길다란 대리석을 다듬어 놓았기에,  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서야 비로서 거대한 건물의 입구로 오를 수 있었는데,  지금 지진으로 지각변동과 함께 주변의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빼곡히 거대한 건물의 주위를 메꾸어 버리는 바람에  거대한 건물은 아예 처음부터  높다란 계단이  없이  평지 위에 낮게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다쳐 피를 흘리고 뼈가 부러지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이재민들은  주변 건축물의 잔해로 신전 주위가 모두 메꾸어져 애초부터 계단이 없었던 듯   변해버린 건물의 위용이나 가치와는 아예 상관 없었다는 듯,  우선은 건물안으로  다가가기가 쉬워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며 주린 배들을 움켜쥐고 부상자들을 부축하며 이 거대한 건물의 안쪽으로 피난했다.

  밤은 이들의 지친 육신과 영혼을 위로하는 듯 했다.

  천장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신의 위로와도 같은 환하고 포근한 둥근달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살아있음과 신의 자비로움에 감사들 드렸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검은 먹구름이 저승의 굶주린 이리떼처럼 몰려와 삽시간에 둥근달을 뜯어 삼켜버렸다.  동시에 뇌성벽력과 함께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댜.  천장의 뚫려진 커다란 구멍으로 차가운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치를 떨며 지쳐버렸고 '신의 저주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들은 밖으로 뛰쳐 나갔다.

  '이 건물은 신의 저주를 받은 죽음의 신전이야.  그리고 저 구멍은 악마의 입이라고........' 외치며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이 건물이 바로  판테온(Pantheon) 이며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 이라는 의미를 닮고 있다.

  대략 여기에서의 모든 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 중에서 일곱의 신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모셨으나 후대에 남겨진것은 없다.

 

   판테온(Pantheon).

 

 

 

 

 

 

 

 

 

 

 

 

 

 

 

 

 

 

 

  로마를 상징하고,  어떻게 보면 로마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 바로 이 (판테온)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로마를 포함한 중세와 비잔티의 건축은 '판테온 이전'과 '판테온 이후'로 나눌 수 있을만큼 이 건축믈은  말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건축물로 인하여 신 공법과 설계가 등장하였고,  수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당시까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신 또는 악마의 능력에 힘입어 지어진 건물이라고 까지 여겨졌다.  이후,  피렌체  대성당(두오모)과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성당이 등장하기 까지  가장 위대한 건축의 극치를 보여준 건물이었으면,  2천년에 가까운 세월에도 변함없이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류의 소중한 건축유산이라 하겠다.

  (판테온) 하면 로마를 다녀온 여행자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건축물이다.  바티칸 다음으로 가이드들이 침이 마르고 입이 닳도록  설명에 열을 올리는 명소가 이니었을까 싶다.  물론 다 이해하거나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도 말이다.

  하지만 일부는 처음부터 바르지 않은 정보도 있었고......  대부분은 설명은 옳았어도 잘못 이해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 서툰 이야기들에 자랑이 보태지면서 전혀 엉뚱한 낭설들이 퍼지고 있는게 사실이다.  여행은  필히 적지않은 사전 공부를 필요로 한다니까.......... ㅎㅎ

  로마를 다녀온 한 여행자가 술자리에서 이렇게 자신있게 확신에 차서 외쳤다.

  '판테온은 말이야.....  기둥도 없이 커다란 돔을 쌓아 올렸고  그 위에 커다랗게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그 시대에 어떻게 그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랐어.  기가 막혀.......  로마의 아그리파 황제가 지었는데..........'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짧은 글에서 어디까지가 맞고 어떤 점이 틀립니까?  적어도 판테온에 다녀오셨다면 말입니다.  아니면 가보시려 관심이라도 가지셨다면 말입니다.

  우선 '아그리파'가 분명 판테온과는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다만,  아그리파는 황제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냥 이 순간에도 학교의 미술실이나 시내의 미술학원이나 미술용품점 어딘가 한구석에 놓여져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판테온 천장의 구멍은 일부러 그렇게 뚫어 놓은 것이 절대 아니다.  당시까지의 건축술로는 도저히 마저 천장을 막아서 덮는다는 것이 불가능하여,  어쩔 수 없이 하다가 하다가 그 상태에서 그냥 마무리 해놓은 건축물이다.  더 덮으려 했다가는 100% 무너질것이 뻔한........미완성인 채로의 이색적인 완전한 작품이라 할까? 

  당시로서는 그정도 크기와 하중(무게)을 견디면서 지붕을 덮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여기 판테온의 돔을 연구를 하고 또 연구를 한 '부르넬리스키가' 마침내 그 불가능에 도전을 하여 거대한 돔의 천장을 완전히 덮는데 성공 한다.  '피렌체 두오모다.'  판테온은 건물 전체가 대리석 덩어리로 이루어져 천장을 덮는다는 것이 어마머마한 무게때문에  불가능하기에 구멍을 남겨 놓았고,  부르넬리스키는 새로운 건축방법은 찾아냈지만  돌 덩어리로 지붕까지 덮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크기와 용도가 다양한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마침내 돔의 지붕을 덮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서 인간이 노력의 결실로 찾아낸 건축기술은 마침내  벽돌도 아닌 온전한 대리석 돌덩어리만으로도 돔의 지붕을 덮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바로 '아야 소피아 성당' 이다.

 

  판테온의 돔 아래 실내 바닦에 보면 한가운데를 나타내는 조금 다른 문양의 지점이 있다.

  여기에 지름 43.3m의 풍선을 놓고 죽어라 펌프질을 해서 바람을 빵빵하게 넣으면  그 풍선은 터지지않고 정확하게 지름 43.3.m의 구(완전한 공모양)로 탄행한다.  상하좌우 어디건 걸리거나 벌어진 틈새가 전혀 없다.  완벽한 둥근 원이다.  로마 건축의 우수성과 가치와  상징을 여실히 모두 그대로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어찌되었건 당시의 상황으로는 차마 지름 8.9m의 지붕을 덮진 못했던 것 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지름 8.91m의 가마솥 솥뚜껑을 만들어다 슬며시 올려놓게 된다면.......  틀림없이 새로운 위대한 건축가이자 조형예술가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음직도 보이는데...... 과연 8.91m의 솥뚜껑을 얹었을때 무사할런지........  혹여 무너트리기라도 한다면.........  헐......

 

  판테온은 처음 지어진 본래의 모양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지금의 판테온은 재건축의 산물이다.  지금의 건물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파손과 대대적인 보수 공사는 여러번 있었다.  그랬음에도  재건축된 판테온의 원형이 오늘까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건물 자체의 우수성이 그만큼 뛰어났다는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적같다고 하겠다. 

 

  (판테온)은 기원전 27년 로마의 초대황제에 오른 아우쿠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명에 의해서 세워졌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문구가 판테온 정면에 아주 커다랗게 새겨있는 것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게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초기의 첫 판테온에 대한 설계도면이나 완성된 건물의 그림이나 다른 설명들이 전혀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  초기의 판테온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다만 이 초기의 판테온이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되었다'라는 기록은 남아있는 바에 의하여 나는 몇가지 추론을 해 본적이 있다.  기원전에 세워진 초기 판테온은 후기의 판테온과 마찬가지로 신들을  모시기 위해서 지어진 신전이었다. 그리고 그 신들은 모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리스 신들이었다.  제우스. 아테나. 아폴론. 포세이돈.  헤라.  아프로디테........ 거기에다  기원전 27년 이었다면 당연히 그 건물은 현재의 판테온 입구의 건물처럼 수많은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흡사 그리스의 신전 모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 시작되면서 부터 내부의 공간 활용을 위한 '바실리카' 양식을 로마 건축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여 입구는 현재의 입구와 같은 그리스 석조건축이었지만 본건물은 석조건물 위에 목조로 대들보와 석가래를 얹어서 거대한 내부공간을 만들고,  그 내부의 각 처에 신들의 조각상을 세운 바실리카 양식의 판테온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만약 완전한 그리스 양식의 신전이었다면  석조건물 신전이 불에탈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누가 일부러 파괴하거나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지진이 아니고서는 석조 신전이 무너질 이유가 없다.  지붕을 목재 천장으로 대체하면서 내부 공간을 확보하려했던 거대한 바실리카 양식의 판테온이었기에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고 일부 기둥들이 남았다고 생각해 보았다.  또 남은 이 기둥들에 대해서는 또 따로 유추해볼 부분이 있다.

 

  초기 판테온을 세운 '아그리파'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아그리파라는 사람은 평생 건축이나 조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혹여 취미로 그림을 그려 본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그리파는 로마의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줄리어스 시저의 심복이었다.  시저의 수많은 전쟁 승리에는  아그리파의 눈부신 활약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시저 보다는 조금 젊었던 아그리파는 군대에 관한한 로마가 내세울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장군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시저가 암살되었다.  바야흐로 '이제부터 누가 로마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  부르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제일 선두 주자였다면......  그 다음 후발 주자중에 한명이 바로 아그리파 였다.  절대적인 로마군대의 신뢰와 지원을 받고 있는 아그리파 였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그에게도 정치적 야심은 분명 있었다.  전쟁터에서는 용감하고 신속 과감하게 판단하고  돌진하는 무적의  완벽한 용사였음에도........  정치 분야에는 반 쑥맥이었다.  주변의 줄기찬 독려에도 불구하고  고심에 고심만을 거듭하던 그는 끝내 납짝 엎드려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 덕에 피비린내나는 정치판에서 살아나게 된다.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즉위하게 되고,  자리를 빼앗긴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까지 가담하여  또 하나의 거대한 전쟁을 벌여 '악티움 해전'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이제 완벽하게 로마의 지배자로 자리잡게 되기까지,  바로  정치판에서 물러나 납짝 엎드려있던 아그리파가  이번엔 옥타비아누스를 위하여 또 눈부신 용맹을 떨친 결과였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그리파는 아버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삼촌뻘은 되는 연장자였다.  하지만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든 당시의 정치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황제의 권위를 더욱 탄탄하게 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 자신의 어린딸을  삼촌뻘의 아그리파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는 또다른 새로운 비극을 잉태하게 되지만......

  그런 사람이 아그리파  였다.

  나는 아그리파에게서 이런 초기 판테온이 설계되고 만들어 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볼 수가 없다.   아마도 공사 총감독 쯤이었는데........ 완공비 맨 윗자락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을까...........?

  아뭏튼  이 초기의 판테온은 불에 타 사라졌다.  단지 남은것이 아그리파가 만들었다고 하는 기념비 같은 글자 밖에........

 

 

 

  불에타 소멸되어 기억에서 조차 사라졌던 판테온이 부활 했다.

  기원 후. 11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서였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서 시작된 재정로마의 시기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시대에 로마의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큰 영토와 문화와 제국을 거느린 황제는 이름에 걸맞게 수없이 많은  공사를 일으켜 수없이 많은 건축물과 찬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름아닌  새로운 판테온을 건설 하는 일이었다.

  이때 비로서 지금의 형태인 판테온,  돔(천장)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여러 건축에서 돔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건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판테온의 돔은 여타의 다른 돔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판테온 (돔)느 그 기원을 로마의 공중(대중) 목용탕을 그 원형으로 본다.  대부분의 로마 공중 목욕탕들은 가운데 너른 공간에 지붕으로 작은 돔을 만들고,  그 위의 구멍으로 환기와 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이러한 건축은 오히려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부터 시작된 이슬람 문화권에서 먼저 시도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맘으로 불리는 이슬람식 공중 목욕탕이 터키나 서아시아의 많은 곳에 분포 이용되고 있는데,  한번 직접 보면 '판테온의 시초'가 바로 이런 용도의 공중 목욕탕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을  쉽게 이해햐게 될 것이다.

 

 

 

 

 

 

 

 

 

 

 

 

 

 

 

 

 

 

 

 

 

 

 

 

 

 

 

  (판테온)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서 화재로  소멸된 자리위에 전혀 다른 새로운 건축물로 재탄생했다.

  새로운 탄생의 시작은 역시  신전이었으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의원들과의 국정논의장 또는 법정으로도 사용하고  사신들의 알현 홀로도 이용했다.  이 건물은 반구(오클루스)와 원통구조에다 그리스 신전의 정면 모양을 조합하여 당시로서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대담한 착상으로 만들어진 건축이다.  당시 콘크리트 공법의 최고 기술 수준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웅장한 제국주의적인 표현을 나타내면서도 그리스적인 명쾌함과  절도 있는 건축공간 구성을 짜임새 있게 만든 대단히 훌륭한 건축물이다.   비록 판테온을 건축할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실제 어느 정도 관여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기본적인 구상을 황제 자신이 결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만들도록 명한 (새로운 판테온)은 과연 누가 만들었는냐?

  건축사에서는  (아폴로도로스)가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당시의 고대 미술사에서는 두 명의 아폴로도로스가 등장하는데  나중에 등장하는 아폴로도로스가 '판테온'을 설계하고 만들었다는데 별로 이견이 없다.

  (아폴로도로스)는 기원 후 2세기 경에, 주로 트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활동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출신인 건축가이자,  군사 기술자였다.  그가 주로 활동한 트리아누스는 바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직전 황제이다.   유명한 다뉴브강의 트로페타에 대교를 만든사람이 바로 아폴로도로스다.  안코나에 있는 트리아누스 개선문과 유명한 포룸을 설계했고,  로마 시내의 목욕탕들과 경기장 음악당 등의 공공 건물을 많이 만들었다.  앞선 이야기에서 보았던 에마뉴엘 2세 기념관 옆  트라얀 원기둥(오벨리스크)을 만든 사람이 바로 아폴로도로스다.

  트리아누스 황제가 사망하고 나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아폴로도로스를 불러 (판테온)의 재건을 명한다.  아폴로도로스는  이미 자신이 수없이 많이 지어보았던 로마의 공공목욕탕의 천장 돔에서 영감을 얻어서 그리스 건축에  이제까지 없었던 초대형  돔이 그 건축물의 중심이 되고  상징이 되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위대한 건축물을 설계했고 건설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존경하던 초대황제 아우쿠스투스의 심복으로  초기 판테온을 건설했던  아그리파의 위업도 기념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해왔다.

  아폴로도로스는 한쪽에   부서지고 무너진채로 쌓여있던 초기 대리석 기둥들과 석재들을 재활용하기로 하던 중에.......  아그리파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려고 새겨 놓았던 대리석판들을 찾아냈고,  그것들을 자신의 새로운 판테온에 전시하듯이 맞추어 넣었다.

  그것이 판테온의 정면 사진을 보면 웅장한 대리석 돌기둥들 위로 마치 간판처럼 새겨져 나타나는 글자들이다.

 

    < M . AGRIPPA . L . F . COS . TERTIVM . FECIT . >   ---' 루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번째 집정관 임기에 지었다.'

 

  하지만 끝내 아폴로도로스는 자신이 설계한 (판테온)의 완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폴로도로스를 다시 불러 자신을 위한 베누스와 로마신전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 과정중에  설계를 통해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하두리아누수 황제의 요구가  아폴로도로스 자신이 일평생 존경해 마지 않았던  전임 황제인 트리아누스 황제의 업적과 겹쳐지거나 왜곡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절대권자인 현재의 황제와 부딪치게 된다.  그는 곧 추방되었다고  오래지 않아 처형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서 아폴로도로스를 철저하게 지우도록 지시한다.  (판테온)의 위대한 설계자  (아폴로도로스)는 그렇게 지워졌다.

 

  그렇다면 또 한명의 아폴로도로스는 도대체 무얼하는 사람이냐?

  그는 '판테온의 아폴로도로스'보다 좀 더 앞선시대를 살았던 그리스의 화가였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단히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이름이 좋아서였을까?

  '시야의 거리감과 시각의 방향성에 의하여 조형이 이루어지며 조형의 위상에서 무한 거리에 있는 점(點)의 투시는 소실점과 같고 시각의 위치에 따라 설정된 위상에 존재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바로 원근법의 원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원근법은 기원전 6세기경에 그리스 화가인 '폴리그노토스'가 시작이었다고 하는데,  100년 쯤 후에 '그림자 화가'로 불린 '아폴로도로스'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다시 표현하자면 '카메라의 기본원리'가 비로서 탄생한 것이다.  카메라 렌즈의 한 작은 소실점은 렌즈 밖의 무한 사물들을 크기와 방향에 상관없이 그 소실점을 통하여 안쪽의 작은 공간에  똑같은 비례에 의한 크기와 방향으로.......  단 역상(거꾸로)으로 투영 반영된다는 논리이다.

  2차원적 평면이 3차원적 입체로 바뀌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핵심적 위치에 아폴로도로스가 있었다.

  이 같은 원리는 오늘날에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아이러니한 역사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르네상스의 라이벌 열전을 살피다 보면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만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는 라이벌로 '기베르티'와 '부르넬리스키'를 꼽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평생동안 라이벌이자 정적으로 지내게 되는 배경에 바로 아폴로도로스가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라는 역사속에서 아폴로도로스의 원근기법에 대해서 가장 감명을 받고 가장 깊게 연구한 사람이 바로 부르넬리스키와 기베르티였던 것이다.

  이랬던 두 사람이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에서 최종 경쟁자로 맞붙게 되었던 것이다.  둘다 체계화된  원근 표현법을 처음으로 적용하여 맞붙었는데 결국엔 '기베르티'의 승리로 끝난다.  이 기베르티의 원근 표현법은 이어 레오나드로 다빈치에게 영향을 주고 (대기원근법)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으며,  뉴욕 타임즈는 다빈치의 (대기원근법)을 '인류문명사의 가장 큰 변혁의 주체였다'고 극찬했다.

  반면 패배하여 좌절을 맛본 (부르넬리스키)는 충격으로 조각도를 아예 평생 손에서 내려놓기에 이르렀다.  그는 로마로 가서 새로운 분야인 건축학에 매진하게 되었는데,  당시까지 없었던........   건축물들을 실제로 측량해 가면서 일정한 비례와 안정적이며 아름다운 구도를 찾아가던 중에......  2차원의 종이 위에 3차원을 표현할 수 있는  투시도법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미 당시에 투시 원근법에 대해서 알고 일부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그는 나중에 피렌체의 두오모 돔(쿠풀라) 경쟁에서 이번에 기베르티를 제치고  마침내 기념비적인 피렌체두오모(대성당)을 완성하는 위대한 건축가가 된다.

  두사람 모두가 아폴로도로스 사관학교 우등생들이었다.

 

 

 

 

 

 

 

 

 

 

 

 

 

 

 

 

 

 

 

 

 

 

 

 

  사실 판테온은 대단히 화려한 건물이었다.

  외벽들도 실은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겉면에 대리석으로 마감되었던 것인데 대부분 모두 떨어져 나가고 붉은 벽돌이 드러나 있다.  거기에 화려한 장신구들과 온갖 조각상들이 여기저기 설치되었던 것인데 모두 도난되었다.  내부 천장의 격자무늬 공간 또한 모두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이 되었었는데,  지금은 모두 벗겨져 나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천장지붕의 청동판을 교황이 발다키노 제작을 위해 벗겨냈다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발다키노 제작에 사용된 청동은 베테치아 상인을 통해 수입한 서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동로마를 전성기로 이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옛로마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건축을 위해서 판테온의 지붕 일부를 철거해서 가지고 간 사실은 증명되고 있다.

  여기 판테온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혀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위에 사진의 성 모자 조각상 아래 잠들어 있는 (라파엘로)이다.  죽어가면서 그는 여기 판테온에 묻히고 싶다고 요청했다.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  그리고 이탈리아 건국의 영웅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  움베르토 1세와 왕비 마르게리타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왜 신전이나 교회에 이토록 무덤이 많이 있을까?

  그것은 '로마의 법' 때문이다.

  '실제 로마'(한양의 4대문 안쪽과 같은) 영역에는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무덤을 만들 수 없다는 법률이 분명하게 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누구든지 무덤을 쓰려면 일단은 로마라는 도시의 구획을 일단 벗어나야만 했다.  실제 로마의 북쪽 경계였던 포폴로 성문을 나서면,  거기서 시작되는 로마가도(아피아 가도) 옆으로 마치 두줄 가로수 나무가 심겨져 있듯이  무덤들이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로마의 공동묘지였다.  그 공동묘지 가운데 '카타콤베'도 있게된 것이다.

  교황들은 선종을 하게되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던 귀족이던 학자던 종교인이던......  로마를 너무도 사랑하여 잠시도 벗어나거나 떠나기 싫은 사람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로마 안에 묻히고 싶어 했고.......  그런 결과로 신전과 교회가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신전이나 교회에 묻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움베르토 1세 이후로는 누구도 판테온에 들어가 영원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로마사람들은 시퍼렇게 살아서 걸어다니는 한사람이야 말로 죽으면 판테온에 묻혀야 한다고 한 때 야단법석을 떨었던 적이 있다.  이탈리아 쎄리에 A리그 AS로마의 이제는 은퇴한 축구선수 '토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축구사랑이,  그리고 토티 사랑이 얼마나 컸으면 그가 죽어서 판테온에 묻어주자고까지 말이 나왔을까마는.......

  2018년 이탈리아는 60년만에 '러시아 월드컵'을 향한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판테온 관람은 (무료)다.

 판테온을 나오면 눈부신 햇쌀아래 장대한 오벨리스크와 아름다눈 새하얀 대리석의 분수를 다시 만나게 된다.

  로톤타 광장의 분수는.......  나보나 광장의 대장장이 분수대와 무어인의 분수에서 설명한 바가 있는 '자코모 델라 포스타'의 작품이다.  그래서 부연 설명을 생략하기로 하고.......여기의 오벨리스크는 그 유명한 이집트 제 19 왕조인 람세스 2세(구약성서의 모세와 함께 자랐고  성년이 되어서 대립하게 되는 이집트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파라오)가 헬리오 폴리스에 만들어 세운것을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군대와 전쟁을 치뤄 이겼을때 기념으로 약탈해 온  기념물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판테온)을 '악마의 건축물' 이라  불렀지만,  미켈란젤로는 '천사의 작품'이라고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다.

  중세에 들어서  교황 보나파시오 4세가  지중해를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의 포카즈 황제에게  판테온을 사용하고 싶다고 청하였고 황제가 수락해 기증했다.  그리스식 신전이  로마카톨릭의 성당으로 변모하는 계기였다.  성당의 이름은 '순교자의 성모마리아 성당'으로 붙여졌다.  한때 입구 양쪽으로 종탑이 세워졌었으나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서 모두 철거하였고,  초기의 원형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한 채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프랑스의 루이15세는 로마와  판테온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을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파리에 '팡테온' 이라는 비슷한 모양의 성당을 지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테베강 주변에 건설된 로마의 도시 계획도를 가져가 세느강 주변에 또 하나의 로마를 닮은 도시 파리를 건설했던 것이다.

  도시건축학자들은 말한다. '로마'와 '파리'는 '쌍둥이 도시' 라고..........

 

  판테온에서 나와  꼬르소 거리를 향해 고대의 옛정취가 흥겨운 길을 걷다보면 반가운 이정표가 자주 눈에 띄게된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한참 전에 나보나 광장을 나와서 아름다운 로마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다 보니 판테온이 짠하고 나타났듯이,  여전히 그 연장선상에서 나보나와 반대편 방향으로 계속 골목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에선가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오게 된다는 말씀이다.

 

 

 

 

 

 

 

 

 

 

 

 

 

 

 

 

 

 

  로마와 전 이탈리아를 통털어 가장 아름답다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1년 365일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마 최대의 관광 포인트이다.

  어디 한적한 곳에 앉아서 고즈넉한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으나  절.대.불.가.

  사람이 밖에 나다니기 힘든 폭우라도 쏟아지기 전에는 온전하게 트레비 분수를 차지하고 즐긴다는 것이, 아마도 나 살아서는 꿈도  못 꾸어볼 바램이랄까?

  아니면 저 위에 어디쯤 이곳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를 싹뚝 짤라버리면 사람들이 덜 찾아오게 될까?  그럴까? 그때...... ㅎ

  여기 트레비 분수에서도 '아그리파'가 등장한다.

  옥타비아누스의 명에 의하여 아그리파가  로마의 수도교를 건설하였고 멀고먼 북쪽에서 여기까지...... 나보나광장의 분수들과  스페인광장의 난파선분수랑  그리고 여기 트레비 분수에 같은 물줄기의 물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그리파가 했겠어?  로마의 군인들이 건축이며 토목이며 최고 기술자였지.

  '트레비' 란 세개의 길이 만나는 교차로 라는 뜻으로  삼거리에 세운 분수라는 의미가 된다.  나보나 광장보다 지대가 약간 높았기에 아예 설계과정에서 부터 땅을 파서 지대를 낮게해서  그만큼 높아진 수압을 활용하게끔 설계되어졌고,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이 분수대의 모든 조각이 거대한 하나의 대리석 돌덩이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실로 이렇 거대한 한몸뚱이의 조각작업이 가능했단 말인가?  중간에 실수도 안하나?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발주로 콩쿨에서 입상한 '니콜라 살비'가 만들었다니......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신기하고 신비로울 뿐이다.

  여디 가만히 살펴서 속 내막을 좀 알아보고자 하려는데.......  여기도 저기도 사람  사람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부딪치고........  결국엔 인파에 밀려 쫓겨난 꼴이 되고 말았다.

  트레비 분수를 번쩍 들어서 제주도 어디쯤에 가져다 놓을 수만 있다면.......  이거 하나로만도 제주도는 충분히 먹고 살수 있을것 같다........ ㅎㅎ

  너무 너무 유명해서 대충 그냥 통과 하기로 하는데..........

  나는 트레비 분수 앞에 돌아서서 머리 위로 동전을 던지지 않았다.  111% 순전히 뻥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몇 몇 사람에게 직접 확인해 보았다.

  '예전에 여기 와서 동전을 던진 일이 있습니까?  그런 행운으로 다시 오셨습니까?' 라고.  그런데  현지인을 제외하곤 예전에 동전을 던져서 다시 온 사람을 단 한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난 차라리  '동전을 던지지 않고서도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는 그 행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우리들은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서 따가운 햇쌀을 피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편적이겠지만,  서구의 사람들은 계단이나  잔듸밭에 앉아서 노출 샹태로 자연 그대로의 따사로운 햇쌀을  즐긴다.  우리는 뜨거운 햇살에 피부가 익으면 까맣게 타면서 허물이 벗겨지고 한동안 고생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햇볕 아래서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르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새하얗게 도로 말짱해진다.

  그런데........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광장에는 따사로운 햇쌀을 즐기는 서구인들 보다 오히려 그늘을 즐기는 한국인들이 따가운 햇쌀아래 유독 많이 눈에 띈다.  그리고 대부분.......  분수대에서  그리고 계단에서 햇쌀을 즐기려는 모습들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해 보인다.

  중국인이나 일본인 보다도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광장에서는  유독 많은 한국인들이 눈에 띈다.  그야말로 지천이다.  마치 서울의 광화문 광장인것 같다.

  트레비 분수에서 북쪽을 바라다 보면 휘어서 굽어진 듯한 골목의 끝자락에 희미하게나마 광장이 느껴진다.  그 유명한 오드리 햅번의 계단을 바라보고 오른쪽 모서리 부문이다.  광장에 도착해 오른쪽으로  궁전을 탈출해 짧게 단발머리로 변신한 공주가 특종을 잡으려는 기자 그레고리 펙을 따라 올라가면서 젤라또(아이스크림)를 먹는 장면으로 유명한 거대한 대리석 계단이 나온다.  계단의 중간엔 역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서 강탈한 오벨리스크가 서있고,  양편으로 갈라져서 올라가는 바로코 양식의 137개 계단의 위로 성 삼위일체 교회(개신교)가 서있다.  오른쪽으로 서정시인 키츠가 잠시 머물렀던 숙소가 있는데,  지금은 키츠와 같은 서정 시인인 샐리의 박물관으로 운영된다.  계단 앞쪽과 여기저기에 정복 경찰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하는 업무가 주로 이곳 계단에서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을 제지하는게 주된 업무다.  오드리 햅번의 흉내를 내고자 하는 여행자를 적발하고 제지하고 벌금을 부과하는게 그들의 주된 업무다.  젤라또를 비롯한 일체의 음식 절대 반입 금지.  대리석 계단의 훼손 주범이 젤라또를 비롯한 탄산음료.  아닌게 아니라 여기서는 하수도  맨홀 뚜껑까지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있다.  정말로...... 정말로 미치고 팔딱 뛰겠다.   남의 나라 하수도 맨홀 뚜껑만  가지고 와도 세월을 가미하면 국보나 보물이 될것만 같다.  미티미티......

  오드리 햅번 계단의 앞쪽 광장의 한 복판에  그동안 여러번 거론한 '난파선 분수'가 있다.  이 난파선 분수는 나보나광장 분수에서 설명한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아버지인 '피에뜨르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원조 베르니니의 작품임에도 일부 가이드나 가이드북에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이라고 써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하게도  아버지 '피에뜨르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 계단에 앉아서 데이트를 즐기고 무엇엔가 생각에 잠겨 있다.  차분히 앉아 시간에 상관없이 여유롭게 망중한을 즐기면 현지인이다.  왔다갔다 사진찍기 바쁘면 여행객이다.  주로 한국인이다.

  계단에서  난파선 분수를 건너 내려다 보이는 골목이 로마에서 가장 핫한 골목(서울의 명동)인 콘도티 거리이다.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또는 이탈리아의 패션을 대표하는 세계 굴지의 유명 브랜드가 이곳에 모두 모여 있다.

  베르사체.  살바토레 페르가모.  구찌. 프라다. 아르마니. 지안프랑코 페레. 미소니. 트루샤르디  등의 본점이나 직영매장을 한 골목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오늘 아침부터 출시되는 신상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선보이는 곳이 바로 이 골목이다.

  이 광장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넓은 골목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노라면 또 다시 저만큼 어디쯤엔가 광장이 나타나고 그 한가운데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다.

  바로 로마의 북쪽 관문이던 포폴로 광장이며 여기의 오벨리스크 또한 옥타비아누수(아우쿠스투스)가 이집트에서 슬쩍 한 것이다.  이제까지 등장한 오벨리스크만 하더라도......  참 많이도 쌔벼왔다. '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엔 없다.  죄 다 로마에 있다.'

 

 

 

 

 

 

 

 

 

 

                                          -- 이 광장의 이름을 낳은 스페인 대사관과 깃발이 보인다.

 

 

 

 

 

 

 

 

 

 

 

 

 

 

 

 

 

 

 

 

 

 

 

 

 

 

 

 

 

  (포폴로 문)과  (포폴로 광장)

  로마의 건국과 연관된 7개의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핀치오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로마의 북쪽 관문이지만  테르미니역(중앙역)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이곳이 로마여행의 시작이요 끝나는 지점이었다.

  이 거대한 광장은 주세페 발라디에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한가운데의 오벨리스크는 역시 그사람(?)이 어디?  이집트에서 강탈해온 것이다.  참으로 많이도 쌔벼왔다.

  광장에서 남쪽으로 코로소. 바부이노. 리페타.  세개의 도로가 뻗어 나가는데, 가운데의 바부이노 거리가 로마의 심장  '포로 로마노' 까지 일직선상의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세갈래로 갈라지는 중간에 유명한 쌍둥이 성당인 '산타 마리아 데이 미라콜리 성당'과 ' 산타 마리아 인 몬테산토 성당'이 나란히 서있다.

  더불어 이 광장의 이름은 현대적 의미로 너무도 성스러운 '민중의 광장' 이다.

  성문의 밖으로는 로마의 영토 밖에 세워진 또 하나의 광장으로 '플라마니오 광장' 이라고 한다.  바깥쪽의 플라마니오 광장에 서서 포폴라 성문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 보면 실로 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곳이 바로 로마다.'

  나름대로 각자의 바램과 야망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했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처음 대하게 되는 로마를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나는 로마의 시민이 되어서 원로원에 들어가 이 위대한 나라를 다스릴거야.'

  '나는 장사꾼이 되어서 온 지중해를 지배하는 부자가 될거야.'

  '나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은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가 될거야.'

  성문을 안쪽에서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산타 마리아 델 뽀폴로 성당'이 있는데 '천사와 막마'에 나오던 성당으로 내부 수리중이었다.  옆의 아우쿠스투스 수도원은 '종교 개혁'의 마르틴 루터가 2년간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핀치오 언덕쪽으로는 전쟁의 신인 아테나여신의 조각상이 놓여진 분수가 조성되어 있고,  반대편으로는 포세이돈의 조각상이 웅장한 규모로 만들어져 있다.

  성문을 통하여 로마의 실제 영지에 첫발을 내디딘 여행자에게는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감동으로 '드디어 이곳이 로마구나' 하는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너무도 벅찬 감동으로 금방이라도 숨이 멋을듯이  말이다.

  반면 떠나는 여행자에게는 이 광장의 모습과 광경이 얼마나 아쉽게 남고 가슴깊이 새겨져 돌아보고 또되돌아보게 만들었을까?

  포폴로 광장.

  실로 광장 그 자체의 느낌과 의미를 넘어서서 어마어마한 감동으로 내 가슴에도 새겨져들어왔다.  이 순간에도 어제쯤 그곳을 떠나왔던 듯 하다.

 

  '포폴라 문'을 통과해 로마에 도착한 (괴테)는 광장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괴테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 날이다.' 라고........

  그날부터 장장 1년9개월을 로마에 머물면서 유명한 '이탈리아 기행'을 탈고 했다.

  그래서 나도 광장을 둘러 본 후에 이렇게 말했다.

  'Me Too' 라고.......... 

 

 

 

 

 

 

        ------------  감사 합니다.   다음 이야기에 이어서................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