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나갈까?'
'열한시는 되어야 시간이 될것같애. 아들양복도 세탁소에 보내야 하고.......'
'괜찮아. 그러면 차 세차 좀 하고 개스 넣고 할테니 열한시에 내려와.'
'시간도 좀 그러니까....... 어디 산책이나 하는 정도 나들이면 좋겠어.'
'알써. 그렇게 하지뭐.'
시작은 그렇게 되었었다.
날씨가 아주 약하게 흐려있어서 덥지도 않고 또 우리가족에겐 가장 한가한 토요일이니까.
거기에 아덜은 여친 만나러 이천을 다녀오신다니....... 이런 상황을 '오붓하게'라고 기뻐해야 하는지, 아님 항상 자리를 비우는 아덜을 아쉬워해야 하는지.......
김밥을 세줄 사서 열한시에 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산책나가는 아짐씨의 포스를 잔잔하게 풍기며 왕짜증여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손에 등산화를 들고서.
'어느쪽으로 가는데?'
'살미쪽으로.'
'풋후후후후. 그럴줄 알았어. 시간을 생각해 보니까 괴산쪽이나 아님 단양?'
'단양.'
'생각은 했었지만 단양일 확률은 아주 작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주 남의 생각까지 넘볼려구 하시는구만. 그래서 더 어깃장을 놓아볼려구.'
'그래봤자지 뭐. 그래 단양 어디? 웬만한덴 다 가봤잖아?'
'단양팔경 중 우리가 안 가본데.'
'안 가본데?'
- 사인암의 전경. 물놀이 하는 사람들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붐볐다.
단양팔경.(丹陽八景)
단양지역은 소백산자락 아래 위치해 있으면서 동쪽으로는 죽령을 경계로 경상도 땅 풍기와 마주하고, 북으로는 강원도 땅 영월과 접해있어서 기후나 산세가 거의 강원도라 해도 무색할 정도이다. 특히 단양을 중심으로 사방에 빼어난 절경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여덟곳을 뽑아서 '단양팔경'이라 부른다.
상선암(上仙巖), 중선암(中仙巖), 하선암(下仙巖),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筍峯), 도담 삼봉(島潭三峯), 석문(石門), 사인암(舍人巖)을 이르는 말이 되겠는데, 이 중에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이 세군데 있었다. 하여 그곳을 가보기로 마음먹고 출발을 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들른곳이 바로 사인암.
사인암.
단양 대강면 남조천이 흐르다 소를 이루는 곳에 높이 50m의 기암절벽이 장엄하게 솟아 있는데 바로 사인암이다.
고려 때 유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인 정 4품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에 있을 당시 이곳에 머물렀다는 데에서 유래하여 사인암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또한 사인암의 바위벼랑 아래로 청련암이라는 작은 사찰이 있어서 둘러보는 것도 참으로 운치가 있다. 특히 바위벼랑 사이로 앙증맞게 난 돌계단을 올라가면 바위벼랑 사이로 작은 공간에 어떻게 지었는지 소담스럽게 아름다운 칠성각이 인상적이다.
그냥 사인암만 있는 풍광보다 이 청련암이 있어서 더욱 아름답고 인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들었다.
- 바위벼랑 아래 놓인 동자승들의 인형에 넋을 빼앗긴 왕짜증여사.
사인암을 이제서야 가보았다는 일이 사실 우리가족에게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월악산 송계계곡을 빼면 우리가족이 가장많이 여행이나 캠핑을 즐기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니 말이다. 근 삼십여년 전부터 이곳을 자주 찾앗으면서도 왜였는지 통 사인암에 들러 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한 십년 전쯤부터는 뜸해졌지만, 전까지는 해마다 한 두번씩 캠핑을 즐기던 곳이었다. 거기다 계곡 상류에 있는 도락산은 참으로 아름답고 등산의 묘미도 최고로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산이기에 계절을 불문하고 꽤나 여러번 올랐으면서도, 이상하게 지척에 있는 사인암을 외면했던 아이러니가 있었다.
사인암을 둘러보고 넘어오는 길에 상선암 쪽으로 방향을 틀어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여름이면 복잡한 송계계곡 보다는 여기 상선암쪽이 열배 백배는 더 좋다고 감추어 놓고 자주 찾던 곳이다. 그 중 최고의 야영지였던 상선암 위쪽의 솔밭이 지금은 야영금지 지역으로 페쇄되었다. 계곡의 전 지역이 캠핑과 취사가 금지되어있다. 자연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란다. 하여 하선암 부근에 야영장이 마련되었고, 조금 더 아래로 자연휴양림과 오토캠핑장이 좋은 시설로 꾸며져 이용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많은 캠퍼들이 사이트를 구축하고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부러웠다.
오랫만이지만 참으로 반가운 풍경들이었다.
이곳 선암계곡은 어디를 가나 놀라울 정도로 빼어난 풍광과 바닦까지 투명한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수가 흘러넘친다. 한마디로 모두가 절경이다.
중선암으로 가는 길목인 도락산장의 정겨운 모습도 여전하고 빨간 철난간 다리도 그대로였다.
'우리 수일 내로 여기에서 캠핑을 하자. 옛날처럼.'
'응. 다음 캠핑은 여기, 단양 선암계곡이다. 도락산 등산과 플라이 낚시를 즐기러........'
두 군데의 캠핑장을 꼼꼼하게 둘러보면서 왕짜증여사가 다음 여행을 제안한다. 대충 싸이트 구축할 자리까지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래. 오키. 오키.
그러고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 장회나루를 지나 마침내 도착했다.
구담봉과 옥순봉으로 오르는 시발점인 주차장에.
- 마침내 구담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구당봉과 옥순봉은 같이 가은산에 속해 있다. 등산로를 이용해 가은산을 오르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옥순봉에 이르고, 오른쪽을 택하면 구담봉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호수에 비친 모습이 거북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충주댐이 생겨나서 수위가 엄청나게 높아진 지금 멀리서 바라보면 거북이 한마리가 뭍으로 기어 올라가는 형상을 영락없이 빼닮았다.
주차장에 서면 간판대신 커다란 수묵화 한점이 크게 걸려있는데, 바로 단원 김홍도 선생이 연풍현감으로 재직할 때 이곳 단양팔경을 둘러보시다가 옥순봉을 화폭에 담아 그려놓은 것을 크게 확대해 걸어놓았다.
사인암을 가 보았으니, 이제 우리가 가보지 못한 팔경은 여기 옥순봉과 구담봉 둘만 남게 되었다.
구담봉의 높이가 330m 라니 충주시내에 있는 남산 높이 밖에 안되고, 거리를 검색해 보니 겨우 2km 라기에 그저 그런 산책정도려니 했다.
왕짜증여사의 사전부탁도 약간 땀을 흘리는 정도의 산책 쯤이면 좋겠다고 했으니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숲속으로 난 콘크리트 포장 언덕길을 오르고 비닐하우스 매점에서 음료랑 막걸리랑 더덕 도라지를 팔고 있는것을 구경하고 약간 경사의 나무계단을 어느정도 오르다보니 얼굴이며 등허리에 땀이 배기 시작한다. 심장박동도 서서히 요동을 치고 호흡소리가 점차 거칠어져갈 무렵 삼거리에 도착을 했다.
1.2km를 올라 온 것이었다.
안내 표지판을 읽어보니 남은 거리가 왼쪽으로 옥순봉이 0.9km, 오른쪽으로 구담봉이 0.6km 란다.
'에게게. 겨우 육백미터 남았어? 이쪽 저쪽 하루에 서너번씩은 왔다갔다 하겠다. 남산 깔딱고개 오르는 생각하면 새발의 피다. 그치?' 요렇게 애초의 예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내가 입방정을 떨었는데.
'그러게. 호암지 산책했다고 칠 정도네 뭐. 오늘로는 딱 맞는것 같아.' 왕짜증여사도 맞장구를 쳐준다.
육백미터라는데 후딱 둘러보고 나와서 옥순봉을 가든가 말든가 한다면서 왕짜증여사가 씩씩하게 앞장을 선다.
그런데 그것이...... 숲 모퉁이를 돌아 내리막이 막 시작 될 즈음에.........
'혹시........ 저기...... 저곳이 구담봉인 거여?' 하고 돌아보며 물어온다.
'모르지. 나도 첨인데......... 거기가 어떻게 육백미터냐? 한 2km는 되고도 남겠는걸.........'
'산행 표지판은 지도상의 평면 직선거리로 계산한다며? 저기 저 사람들이 보이는게 아무래도 저기 같은데? 그런거 같지 않아?'
어이쿠. 이젠 숱제 물어 보는게 아니라 따지러 드는 표정이다.
'글쎄. 분명 표지판에 육백미터라 했는데....... 총 길이가 2km라 했단 말야.'
'잘봐. 그럼 저 앞에 벼랑은 뭐란말이야? 저게 보통벼랑으로 보여? 당신 분명 산책코스라 했잖아. 산책.'
이때.
발아래로 구담봉을 다녀오는 듯한 남녀가 옆을 지나며 나누는 대화가 그만, 나를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떠밀고 말았다.
여 : '만만히 볼 코스가 아니었네요. 나이가 좀 있으시거나 아이들을 못 갈곳이예요.'
남 : '그렇게 보아야겠지요. 공룡능선 타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잖아요?'
으악!!!!!!!!!!!
설악산 공룡능선이랑 별반 차이를 모르겠다고???????????????????????????????????????
차마 왕짜증여사의 표정을 살필 여유가 싹 달아나는 순간이다.
'아! 그렇구나......... 또 그랬구나. 그러니 또 어쩌겠어? 그렇다고 여기서 이만 돌아갈껴?'
엄하게 훈계하시는 선생님 표정으로 툭 한마디 내뱉고는 쪼르르 또 앞장을 서서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당장 눈앞에 나타난 철제난간이 골짜기 저 아래까지 길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간건너 금수산의 정경이다.
- 공룡능선 정도라고 나를 절망의 벼랑으로 떠다밀고 지나가신 여행객 A.
-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옆모습을 닮았다. 머리와 눈매와 뺨이 그럴싸해 보인다. 멀리 소백산을 바라보고 계신 고즈넉한 시선이다.
- 슬슬 와이어 타고 오르기가 시작이 되고............
'잉간아. 이게 산책이니? 등산이지. 등산도 아주아주 암벽등반이지.'
누가 이럴줄 알았남.
크크크크큭.
푸념은 그렇게 늘어 놓으면서도 왕짜증여사가 씩씩하게 앞서 올라간다.
그러다가 중간에 잠시 쉬면서 또 툭하고 한마디 던진다.
'내 다리가 롱다리라서 이럴 때 절실하게 덕을 좀 보네. 이런 암벽길에 롱다리 아니면 어쨌을거여?'
이 여자.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자랑을 할 줄 아는 고단수의 여자다. 초일류 고수.
'칫. 지 다리만 롱다린 인가? 내다리도...... 아덜 다리도 롱다리구만' 하면서도 차마 입밖에 내지는 못했다.
'왜? 내 다리 롱다리라는 말이 아니꼽다는 표정이여? 이만하면 롱다리 아니여?'
'아니긴. 롱 롱다리지. 인정. 인정. 조심 조심해서 올라가라구.'
그리고 나서 다시 한참.
어쨌거나 저쨌거나 마침내 구담봉 정상에 올랐다.
- 충주호 장외나루터 전경.
- 주말휴일이라 그런지 유람선이 자주 지나가는것이 보인다.
- 구답봉에서 건네다 본 옥순봉.
- 장회나루와 제비봉 전경.
구담봉 정상에 한참을 앉았더니 어느새 흐르던 땀이 씻은듯 가셨다.
산 위로 부는 바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 보자니 깍아지른 벼랑에 와이어 줄만 달랑 걸려있는데, 계속 올라오고 있는 남자들도 매우 힘에 겨워 하는 표정과 푸념들이다.
'저 길을 다시 내려 갔다가 또 벼랑을 기어 올라야 한다는 말이지? 언제 빠져나간단 말이냐?' 혼자 되뇌이고 있는데, '당신 속을 내가 다 알어. 휀히 들여다 보여' 하는 표정으로 왕짜증여사가 다시 하산길을 재촉한다.
'잠깐. 그래도 내려 갈때는 남자인 내가 앞장을 서야 하는거여. 혹시나 미끄러져도 내 등판이 받을 수 있을께롱.'
'그런가? 그럼 당신이 앞장을 서.'
그런말에 감격해 주는데 돈 들어 가는것도 아닌데, 시큰둥 하게 옆으로 자리만 비켜준다.
- '어이쿠. 제게 산책길이냐? 요새는 산책을 와이어에 매달려 암벽을 타냐고?'
- 카톡스토리에 인증샷 올리시느라 열심.
'좋았어. 아주 아주 인상적이었어.'
'정말이야?'
'응. 산책은 무슨 얼어죽을 산책? 그치만, 적당히 운동도 됐구. 땀도 제법 흘렸구.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속에 좋은 구경도 많이 했으니깐 많이 좋았어. 굿 이야. 굿. 끝까지 안갔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거야. 아주 아주 상큼한 나들이였어. 당신 수고했어.'
'정말?'
크크크크. 나야 항상 잘하지 뭐. 항상.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 오는데.
'당신 수고했으니깐 모 해줄까?'
'배가 슬슬 뭔가 먹을것을 달라고........'
'당신 막국수 먹고 싶지?'
'어떻게 알았을까? 시원한 막국수.'
'중앙탑 꺼?'
'웅. 오늘은 곱배기로.......ㅎㅎㅎ'
'그리고 또?'
'팝콘도 먹고 싶고.........'(여기서 팝콘이란 영화관에서 영화 보면서 먹는 팝콘. 즉 영화를 보고 싶다는 뜻)
'팝콘이라....... 그리고 또..........'
'어디 호프집에 가서 술이라도 한 잔.........."
어이쿠. 풀어준다고 마구 덤벼들다간 혼나는데. 술 이야긴 괜히 꺼낸거 아닌지 모르겠다.
'음........ 술까진........ 시간하고 생각해 봐서........'
중앙탑가서 막국수 곱빼기로 배 터지게 먹고, 영화관 가서 '분노의 질주. 언 리미티이드' 보고 나니 밤 열시가 다 되어 간다.
그러고 나서 표정을 살피니 시간을 따지는 모습이다.
'아덜께서 귀가하실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뜻'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만.
'수요일날 퇴근하고나서 서둘러서 아까 그 선암계곡 야영장에서 캠핑하면 안될까? 목요일(6월6일)이 휴일이니깐? 징검다리니깐 아들도 이번엔 월차나 연차 안쓰고 하루 더 있다가 올것 같으니까. 도락산 올라도 좋겠고.'
'알았어. 그렇게 계획할께. 그런데...... 한가지 부탁해도 돼?'
'해봐. 뭔데?'
'이번엔 가까운데고 하루니깐........ 뭔가....... 좀 푸짐했으면 좋겠어.'
'알았어. 음식에 신경 좀 써볼께.'
'정말?'
'응. 그럼 내가 평상시엔 굶기면서 다녔니?'
'그렇다는게 아니라........... 굳이 남들처럼 먹기 위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부터 먹는 것에 대한 질적 향상을 좀 가지면 안될까 하고........'
'잉간아. 질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맨날 푸짐하게 푸짐하게 그러니? 체중 안줄일거여? 여기서 그칠거여?'
'요번에만 맛있고 푸짐하게 하고...... 다음부턴 채식 하면 안될까?'
'그게 지금 말이된다고 하는 소리여? 시방?'
----- 2013.06.01.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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