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 유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나는 그곳에 대한 몇가지 불편한 진실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앙크르 유적 투어를 통해 그 어긋난 진실들이 생각보다 더 크게 또 다른 오류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앙코르 유적이 우리 인류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에는
더욱 공감을 하게 되었다. 정말로 불가사의한 위대한 건축물들 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런............
이제 본격적으로 (앙코르 유적) 탐험여행에 앞서서 서너가지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백과사전이나, 지식 검색창이나, 아니면 항간의 속설에서 살펴보자면 '세게 3대 불교유적' 이라는 명제 뒤에 이렇게 분명치 않은 속단을 내어놓고 있다.
'세계 3대 불교유적이라 함은, 인도네시아의 보르부두르 사원. 캄보디아의 앙코르왓트. 미얀마 바간의 파고다군을 일컷는다.'
여기에서 보르부두르 사원이나 바간의 파고다군을 위대한 불교유적으로 꼽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뭐 굳이 따지지않겠으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왓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앙코르왓트는 절대 불교유적이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힌두교의 위대한 유물이요 유적이다.'
불교의 시작은 인도였고, 점차 퍼져나가서 네팔. 미얀마.태국.인도네시아.중국.한국 등으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정작 불교의 발생지였던 인도는 힌두교 국가가 되었고, 인도네시아도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초기 불교의 위대한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도 인도나 네팔. 방글라데시 등 초기 불교 발생지의 인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위대한 불교유산도 많다.
새로운 '세계 3대 불교 유적'에는 '인도네시아 보르부두르 사원' '바간의 파고다군' 그리고는........ '인도의 산치 유적'이나 '방글라데시의 파하루프르 유적', 아니면 '파키스탄의 모헨조다로 유적'을 포함시키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본다.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하고, '초기 불교시대에는 불교와 힌두교의 구분이 분명치 않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엄연한 힌두교 사원을 위대한 불교유산으로 가져다 억지로 꿰마추기 같은 오류는 더 이상 범하지 않는것이 좋겠다.
터키를 보라.
기독교의 성지는 예루살렘이지만, 유대의 역사를 논 할때 터키를 빼먹으면 기독교의 역사는 아에 존립자체가 어려워 진다. 최종결과는 예루살렘이지만, 나머지 기독교의 전 과정은 대부분 터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터키는 지금 이슬람 국가이다.
터키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잔틴양식의 성당이 있다. 바로 (아야소피아 성당)이다. 동로마시대에 콘스탄티노풀의 기독교 대성당으로건축되었다. 그러나 터키의 오스만제국이 지배를 하면서 (아야소피아)는 이슬람사원으로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성당이 모스크로 전환된 것이다. 헌대에 들어 문화의 위대성이 중요해 지면서, 덧칠되고 변형된 (모스크)의 옷을 벗겨내는 공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인 터키국민들에 의해 (성당)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인 터키시람들도 그곳은 본래 (아야소피아)라는 위대한 기독교 건축물임을 누구도 따지지 않는다. 하긴 그들에게는 (아야소피아)에 버금가는 위대한 이슬람 건축물이 또 있기 때문일테지만 말이다.
(아야소피아 성당) 바로 앞에는 흔히 '불루 모스크'로 불리는 (술탄 아메드 모스크)가 있다. 오스만의 황제는 (아야소피아)가 기독교왕국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파괴하지 않고, 그 앞에 기독교 유산에 결코 뒤지지 않은 위대한 이슬람건축물을 짓도록 명령했다. 이슬람의 기술력과 과학과 에술이 총 집약적으로 모여서 (아야소피아)에 버금가는 위대한 (불루모스크)가 탄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앙코르왓트)를 불교유산으로 꼽기 보담은, 차라리 앙크르 왓트 옆에 이제부터라도 위대하고 새로운 불교 유산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지난 주말에 불국사에 다녀왔어' 라고 A가 말했다.
- '어제 낮에 경주 신라시대 유적들을 돌아보고 왔어' 라고 B가 말했다.
불국사에 다녀온 A는 석가탑과 다보탑은 보았겠지만, 첨성대나 안압지나 석굴암을 보았는지는 알 수없다. 달랑 불국사만 보고 왔을 수도 있다. 반면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유적을 돌아보고 온 B는 불국사를 포함한 나모지 모든 유적을 보았을 수도 있다. 다 둘러보았을 것이다.
만약, A도 경주일대를 모두 둘러보고 왔는데 '불국사'에 한정시켜 다녀왔다고 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잘못된 표현이었다.
(앙코르왓트)의 경우도 이와 똑 같다.
캄보디아를 여행함에 있어서 '씨엠립' 인근에 놓여있는 '크메르왕국 시대의 유적군'을 나타내는 영문 표현은 분명하게 (Angkor Ruins)다. (Angkor Wat)가 아니다. 앙코르왓은 앙코르 유적군 속에 포함되는 하나의 객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앙코르왓이 마치 앙코르 유적군 전체를 대신 나타내는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분명한 용어의 구분은 (앙코르왓)이 결단코 불교유적이 아니라는 데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군)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은 수많은 사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 수많은 사원의 99% 이상이 애초부터 모두 힌두교가 지배하던 시기에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다. 단, 가장 후대에 지어진 딱 하나 (앙코르 톰)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딱 하나인 (앙코르 톰)은 분명하게 불교를 배경으로 지어진 유적이다. 바로 위에 나열한 사진들이 (앙코르 톰)의 일부 모습들이다.
사면상이라 불리는 인물조각상은 모두 부처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상의 이색적인 표현이요 모습이라 하겠다.
(앙코르 유적군)은 (똔레샵)이라는 동남아 최대의 호수에서 시작해서 아주 멀리 (프놈 끌렌)에 이르기까지 장장 3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광활한 대지에 분포되어 있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은 유적군이다. 동서남북으로 장장 7백리에 가까운 면적위에 세워진 (크메르왕조)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라는 말이다. 이 드넓은 유적군 안에 세워진 수많은 사원들 중에서 (앙코르왓)도 (앙코르톰)도 그 중의 하나씩의 사원이거나 다른 유적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보자면 (앙코르왓)이 유적군 전체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도 아닐뿐더러, (앙코르 톰)이라는 단 하나의 불교유적 때문에, (앙코르왓)으로 대변된 (앙코르 유적군) 전체가 불교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것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격이 되는것이다. 불교유적이 아니다.
앙코르 유적군 전체는 확실하게 힌두교 사원들이다. 단 하나, 앙코르 톰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앙코르 왓)은 전체 유적군 속에서 가장 웅대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사원이다.
(앙코르 톰)은 단 하나의 사원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다. 가장 크게 번영을 하던 크메르왕조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수도(首都)이자 성곽이다. 이 성곽에는 다섯개의 문과 사원들과 왕궁과 백성들이 기거하던 영토까지를 포함한다.
나는 이 (앙코르 톰)을 아주 오래전부터 꼭 만나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앙코르 왓)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앙코르 톰)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고 하겠다. 그래서 앙코르 유적군을 찾게되는 첫날........ (앙코르 왓)의 정면 해자에서 내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북쪽으로 옮겨서 (앙코르 톰)으로 향했다.
나의 앙코르 여행은 당연히 (앙코르 톰)에서 시작되었다.
이 위대한 (앙코르 유적)을 남긴 (크메르 왕국)의 멸망은, 멀리 남아메리카 페루의 안데스 고원 정상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진 (마츄피츄의 잉카족) 만큼이나 신비로운 수수께기를 낳았다. 크메르 왕국도 하루아침에 모두가 어디론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부사람들은 아직도 여기서 사라진 사람들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정글 어디에선가 또 다른 위대한 문명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정글속에 파뭍혀 잊혀졌던 (앙코르 유적)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59년 경이었다.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가 정글의 수풀속에서 무너져내린 어마어마한 석조건물더미를 발견한 것이다. 유럽으로 돌아간 앙리무오는 (앙코르왓)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양의 정글속에서 피라밋에 버금가는 위대한 유적을 발견했다'고.
'피라밋에 버금간다'는 한마디에 온 유럽과 세계는 들끓었다. 유럽의 백인세상을 만든 (그리스문명)도 아니고 (이집트문명) 아닌, 미개한 식민지 천국 동남아시아 정글에 이집트문명을 대표하는 피라밋에 버금가는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개한 아시아의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수많은 유럽인들이 캄보디아 밀림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 '프랑스의 지성'이자 '20세기 최고의 인문학자'로 추앙받는 (인간의 조건)을 집필한 (앙드레 말로)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훗날 프랑스 문화부장관까지 오른 그는 대사관의 협조속에 (앙코르 유적군) 전체를 연구를 하듯이 샅샅이 돌아보고 다녔다. 그러던 그가 (반띠아이 쓰레이 사원)을 둘러보던중, 그만 중앙 벽면 기둥에 새겨진 부조상인 (데바타 여신상)에 필이 꽃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발굴조사가 막 이루어지던 시점이었다. 몇날을 고심하던 말로는 결국 몰래 벽면에서 여신상을 떼어내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여행가방에 숨겨서 귀국을 감행하던 도중에 그만, 프놈펜에서 경찰의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실제로 구속되었고 재판에서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정글속에 피라밋 같은 위대한 건축물이 있다'는 소문과 '프랑스의 떠오르는 젊은 지성인 앙드레 말로가 앙코르왓의 여신상에 눈이 멀어서 도굴을 하다가 붙잡혀서 유치장에 갇혔다는 두가지 소식은 온 유럽인들을 열광케 하기에 충분했다.
'가자. 캄보디아로. 앙코르왓을 보러........'
(앙코르유적)은 하나도 빼놓지않고 모두가 사암(沙巖)으로 만들어진 석조 건축물이다.
시멘트나 벽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실제도 돌과 바위를 자르고 다듬어서 쌓아올린 석조건축물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접착제도 없다.
사암은 대리석보다는 단단하고 화감암 보다는 강도가 덜해서 실제로 오늘날에도 많이 이용되는 건축재료다. 하지만 사용에 여려운 점도 있다. 화강암이나 대리석은 끌이나 정을 대고 망치로 쳐서 돌조각들을 쪼아내면서 하는 조각작업이 가능하지만, 사암을 정을 대고 망치로 치면 그 조각들이 의도와 다르게 크게 작게 여기 저기로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두드려 하는 작업이 불가능한 특징을 가진것이 사암이다.
사암은 오로지 비벼서 서서히 깎아내는 작업만 가능하다. 면을 다듬거나 조각을 할 때도 오로지 비벼서 하는 작업방법 뿐이다. 흔히 오늘날 말하는 사포작업 방식을 말한다. 돌끼리 부벼서 다듬거나, 모래를 깔고 가죽이나 나무로 누르면서 부벼대서 조각을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라.
위의 사진처럼 돌덩어리를 잘라오면, 저렇게 구멍을 뚫어 쐐기를 밖아 고정시킨 후에, 들었다 놨다를 하면서 부벼서 다듬거나, 일일이 손으로 모랠르 부어가면서 나무막대나 판자를 문질러서 면을 다듬고 조각을 새겨야 한다는 상상을 말이다.
그런 결과로 저렇게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건축물을 쌓아올렸다고 상상을 해보자.
사면으로 모래언덕을 쌓아놓고 그 위로 다듬어진 돌덩이를 통나무를 깔고 밀고 올라가 만든 피라밋과, 하나하나를 자르고 다듬고 조각을 새겨서, 나무기둥에 도르래를 달고 끈을 당겨서 하나하나 저 높은 꼭대기 까지 들어 올려 맞춰나가면서 뾰족뾰족 조형물들을 완성해 나갔다는 사실을 상상해보라. 지계차와 포크레인과 크레인을 설치하고 힘에겨워 하는 복원작업 현장을 보면서....... '저게 정말 인간이 만든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이었을까?' 라고 아무리 되물어 봐도...... 전혀 믿기지가 않는다. 불가사의다.
(앙코르 톰)의 남문에서 시작한 오늘의 여행이었다.
앙코르톰은 한 벽의 길이가 3km씩에 이르며 높이가 8m인 정사각형의 성벽으로 둘러쌓인 (크메르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다. 성벽을 따라 중간에 4개의 출입문이 있었으며, 도성의 중심부였던 (코끼리테라스)에서 행사를 치른 후, 정 동쪽 방향으로 나아가던 특별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네 방향의 성벽 모서리마다 성벽위로 크고 아름다운 사원을 지었다.
각 성문(고뿌라)밖으로 100m 넓이의 해자를 파서 물을 가두어 적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 출입하였으며, 여기 다리를 건너 앙코르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속세를 떠나 천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위 사진의 남문에서 보았듯이 성곽위로 아주 커다란 뾰족탑처럼 생긴 건축물에 부처의 얼굴을 형상화한 사면상(四面像)을 만들어 놓았다. 이 부처의 사면상은 또한 스스로를 부처로 인시기하며 여기 앙코르톰을 세운 크메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한쪽면의 길이가 3km씩 되는 크메르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이지역을 통털어 (앙코르 톰)이라 부르는 것이다.
12세기 말렵 경에 이곳에 인구 100만명의 도시가 실제했던 사실이 믿겨지겠는가? 여기 이 밀림에 말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무신정권의 혼란기 즈음이고, 유럽은 여성에게 정조대를 채워놓고 기사들이 떠돌아다니던 중세 봉건국가에서 이제 막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에, 변방인 동남아시아의 밀림속에 인구 100만이 상주하는 눈부신 문명을 간직한 왕국이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앙코르 톰)의 한복판에는 같은 정사각형의 (바욘사원.Bayon)이 있다. 앙코르왓에 비해서 규모즌 작지만 오히려 앙코르왓보다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곳이 바로 바욘이다. 내가 앙코르톰을 우선적으로 찾아온 이유도 바로 이 (바욘) 때문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 나는 세번이나 (바욘)을 찾았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는 (앙코르왓) 보다 (앙코르톰)이 좋았고, 그 중에서도 (바욘)이 인상적인 장소였다.
(앙코르톰)을 건설한 사람은 (자이야와르만7세)이다. 그는 전체 크메를 역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왕이다.
크메르왕국의 (수르야바르만왕)이 죽자 왕국은 심하게 내전과 외환에 휩싸이게 된다. 베트남의 중부를 지배하던 참파왕국이 쳐들어와서 한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몰락한 왕조의 왕자 신분이었던 (자이야와르만7세)가 흩어진 군대와 백성들을 모아 참파와 독립전쟁을 벌였으며, 유명한 똔레샵 전투를 통해 참파를 물리치고 다시 크메르왕국을 되찾았다. 참파에 의해 파괴된 왕국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서 새로운 수도이자 왕국인 (앙코르 톰)을 건설하였다. 그는 여세를 몰아 멀리 베트남의 남부에서 부터 말레이시아 반도를 거쳐 내륙의 미얀마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영토을 차지한 대제국의 위대한 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재건된 왕국의 혁신을 실천하면서 왕국개조의 이념으로 소승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로서 힌두교왕국이었던 크메르왕조가 이때부터 불교왕국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처라고 인식한 왕은 크메르영토 내에 있는 모든 사원에 불상을 안치하게 만들었다.(이 부분이 앙코르왓을 불교유적으로 꼽게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되었다) 자신 스스로를 부처라고 생각했으며, 앙코르톰의 모든 부처상에 자신의 이미지를 새기고 싶어했다.
앙코르톰 주변으로 인구 100만명이 운집해 살 정도로 변영을 구가하던 (크메르왕국)은 자이야와르만7세의 죽음과 함께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게된다. 그리고는 마침내 1431년 태국의 아유타이족에게 점령이 되고, 아주 짧은 시간안에 갑자기 모두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수수께끼를 낳고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크메르왕국의 지배를 맏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급격히 쇠락의 길을 가고있는 크메르를 그대로 마냥 놓아둘리가 없었다. 마침내 신흥왕국으로 급부상을 하던 태국의 (아유타이왕국)이 크메르를 침공했다. 전쟁이랄것도 없었다. 크메르는 참패했고, 아유타이는 수도 (앙코르톰)을 점령했다. 아유타이는 앙코르톰을 파괴했다. 바욘사원도 이때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아유타이는 크메르지역 사원에 있는 불상들의 머리를 모조리 잘라갔다. 그리고 사원마다 수호신으로 있던 사자상의 꼬리만을 잘라갔다. 이것은 그 지역의 토속신앙적 행위였으며, 불상 머리와 사자상의 꼬리를 잘라가면 그 나라의 국운이 다시 부활하지 못한다는 미신에 따른 행위였다.(우리나라 명산에 혈을 찾아 쇠말뚝을 박은 일본 만행처럼)
도성과 사원을 파괴하고, 막대한 금은보화를 챙긴 아유타이는 약간의 인질을 데리고 태국으로 철수했다.
그때부터 각처에서 빗발치듯 상소가 올라왔다. 크메르는 얼마전까지 아시아를 평정하고 호령하던 무한 잠재력을 가진 화근덩어리라는 상소였다. 여전히 모여있는 수많은 백성과, 무한한 지하자원, 그들을 이끌 영웅기질을 가진 인물만 나타난다면 크메르의 재건은 시간문제라는 우려들이었다. 그제사 제정신이 들은 왕은 허겁지겁 군대를 다시 소집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다시 크메르로 진군했다. 꼭 1년만에 되돌아 온 원정길이었다.
밀림을 헤치고 (앙코르 톰)에 입성했을 때, 거기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개 한마리 지나지 않는, 그야말로 적막만이 흐르는 텅빈 유령도시였다. 모든것이 사라져 버렸다. 왕은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보냈다. 돈레삽 호수 근처에 남아 살던 지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프놈펜 방향으로 도망쳤다. 일백만의 인구가 모여살던 (앙코르 톰). 오랜기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해도 적어도 수십만의 인구는 남아있지 낳았겠는가? 불과 1년전에 이를 분명하게 확인했기에 부랴부랴 되쫓아온 아유타이 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없다.
어디 집단으로 죽은 시신의 흔적조차 찾다찾다 못찾은 왕은 군대를 물려 태국으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오늘까지 (앙코르 톰)에 살았던 그 많던 사람들의 소식은 사라졌다. 영원히.......
오늘같은 현대에도 인구 십만의 도시를 1년 안에 산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우선 그들이 옮겨서 살아야 할 터전과 집들과, 그들의 일자리와 생필품을 조달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조리 사라졌다. 수수께끼........
그러다 450여년이 지나 프랑스 탐험가에 의해 정글속에서 발견이 된 것이다. 유령도시 상태로........
(앙코르 톰)을 통털어서나, 아니면 거기에 속하는 (바욘 사원)에서나 여행자로서 얻는 가장큰 즐거움은 당연히 부처를 형상화했거나, 아니면 자야바르만왕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 하게끔했다는 사면상들을 만나는 기쁨을 빼놓고는 달리 더 말할것이 없을 것이다.
그 무수히 많은 조각상 중에서 같은 모습을 가진 조각상은 어디에도 없다.
또 그 하나하나의 조각에서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느껴진다.
정말 놀라운 감동의 시간이다.
그러기에 내가 세번씩이나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제 참으로 다양한 그 표정들을 하나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 다음이야기에서는 바욘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앙코르 톰)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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