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니 신전과 게하르트 사원을 돌아보는것이 예정한 오늘 일정 이었다.
모스코브얀 대로를 따라 늘어선 우거진 숲길을 걷는다.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오페라하우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여전히 굵은 빗방울이 뚝뚝 안면 가득 떨어진다.
한시간 정도를 이렇게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다가 금방이라도 날이 개일것처럼 반짝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또 한시간 정도를 맑게 개인날씨 처럼 말짱하다가 또다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말겠거니 하면 갑자기 소낙비가 폭우처럼 마구마구 쏟아져 내린다. 지난밤엔 날이 새도록 온밤동안 폭우가 내리 퍼부었었다.
도저히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다.
지금 씨즌은 절대 이런 어정쩡한 우기의 언저리가 아니다. 이상기후인 것이다.
태풍이 한반도를 덮쳤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여기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동유럽도 이상기후에 휩쓸리고 있는 형국이다.
기후와 날씨 상으로 가장 좋은 시기를 선택한 것이 분명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날씨로 인해 심하게 망가지고 말것 같다.
오페라하우스 뒷편인 콘서트홀 건너편의 버스 승강장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곳이 에레반 도심을 오고가는 버스가 가장 많은것으로 보여서 찾아왔다. 방사형으로 구성된 도시이니 가장 버스가 빈번한 이곳에서 기다리다 보면 가르니 신전으로 가는 표지판을 내걸은 버스가 오지 않겠어? 물론 가르니 라는 표지판도 대충 뚜드려 맞춰서 읽어야 하겠지만.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에레반에서 가르니 신전 가는 미니버스가 에레반 기차역 건너편 골목에서 출발한다는 글을 안내서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무조건 벤츠회사 사무실을 찾아가면 그 건너편에 가르니로 출발하는 미니버스가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 버스들이 이 에레반의 한복판인 오페라하우스를 거쳐가지 않겠어 하는 생각에 여기를 택해 걸어왔던 것이다. 숙소에서도 가까우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실 미니버스가 지나가는데도..... 가르니 신전이 아니라 가르니 비슷한 간판도 안보인다.
행인들에게 물어 보았다. 말은 안통하지만 대충 감으로 짐작을 한다. 가르니 신전에 가는 버스가 여기선 없단다. 한결같이 택시를 타란다.
모두가 한결 같은 대답이다. 가르니 신전은 분명 알아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가는 방법은 택시를 타는 방법뿐이란다.
오.마.이.갓~~~~~~~~~~~~~
그래서 잽싸게 머리를 굴려본 결과로 작전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사막을 오가던 실크로드 상인들에게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사막에서 모래폭풍을 만나 길을 잃으면 함께 먼길을 온 말들의 고삐를 모두 풀어준단다. 살려는 본능에 모든 말들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져 달려간다. 그러면 상인은 잽싸게 달려가는 젊은 말들은 모두 포기한 채, 차마 버리지 못해 억지로 끌고왔던 이 길을 오랫동안 함께 오갔던 가장 늙은 말의 뒤를 쫄쫄 따라서 간단다. 늙은 말은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달리지도 않는다. 축적된 경험으로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어디론가 꾸준히 걸어간다. 몇 날이고 걸어가다 보면 앞서 달려나간 젊은 말들이 지쳐 쓰러져 죽어있다. 하지만 늙은 말은 끝내 오아시스 마을에 무사히 도착을 한다. 상인의 선택이 옳았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지나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길을 물어본다. 그래도 대답은 한결 같다. 실크로드의 진리가 여기서는 안통하나?
미니버스가 왔다. 중년의 기사다. 가르니 신전을 간다고 하니 마냥 손사래를 친다. 그때 였다.
운전기사 뒷자리에 타고있던 아주아주 나이드신 할아버지가 '가르니' '가르니 '하시더니 손짓으로 차에 올라 타라고 하신다. 그러자 기사가 할아버지의 손짓을 저지하고는 둘이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기사는 '할아버지 이 차는 가르니 신전에 가는 차가 아니에요' 하는 표정이고, 할아버지는 '괜찮어. 다 가는 방법이 있어' 하는 표정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표정만 믿고 넙죽 차에 올라 탔다. 차비는 달랑 50드람.(우리돈 130원 정도) 천국이다 지상천국.
한 10분쯤 도심을 달렸을까.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며 함께 내리자 하신다. 그래서 내렸다.
미니버스가 떠나가자 마자 할아버지가 길건너 허름한 골목을 가르키며 무엇이라 말씀을 하신다. '저기 서 있는 버스가 가르니 신전에 데려다 줄거야' 하는 의미로 내게 전달되어 왔다.
의아한 상황인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거 뭐가 잘못된거 아니야?' 하는 의구심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허름하다 못해 후미진 골목 한쪽의 공터는 방금 전같은 버스 정류장도 아니었고, 거기에다 서있는 낡은 미니버스가 과연 제대로 굴러가는 버스일까 싶을 정도로 낡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 할아버지는 내게 손을 흔들면서 저만치 골목안으로 사라져 갔다.
허니 어쩌겠어? 죽이되든 밥이되든 일단은 부딪쳐 볼 수 밖에.........
미니버스로 다가가니 불량스럽기가 그지없게 생긴 버스 기사가 고개를 삐쭉 내민다. 가르니 신전을 가려고 한다 하니까 손가락으로 버스 앞유리에 내걸린 표지판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 틀립없이 '가르니 템플'이라고 써 있다.
와!!! 실크로드 상인들의 진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친절했던 할아버지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뿔싸. 길 건너편에 벤츠회사의 커다란 자동차 부스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자유여행이 아니고선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경험을 절대로 가져볼 수가 없다. '할아버지 땡큐에요.'
10여분을 더 기다려서 정원을 빼곡하게 다 채우고서야 비로소 형편없는 구닥따리 미니버스가 출발했다.
다들 나를 쳐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짖는다. 환하게 웃으며 화답한다. 이제 이런 상황에는 이미 충분히 익숙해져있다.
조지아 국경을 넘어서 예레반에 올때가지와 비슷한 풍경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40여분이 좀 지났을 즈음에 사방으로 호두나무들이 우거져있는 신작로가 두 길로 나뉘는 삼거리의 아담한 시골마을에 다다르자 운전 기사가 '가르니 가르니' 하고 외쳐주었다. 마침내 나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요금은 너무도 착한 백오십드람(400원 정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안파도 사방에서 천연가스가 나오는 나라라서 교통비는 정말 정말 아주 착하다. 승용차고 화물차고 컨테이너 추레라고 모두 가스차다. 이 나라에 휘발유차나 경유차 렌트해서 타고오면 멀리 못가서 저절로 선다. 가스 충전소는 온 나라에 가득, 일반 주유소는 해운대에서 동전 찾기........ 명심 하시라.
하지만 그때까지도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하는 느낌이었다. '가르니 신전 맞아?"
암튼 가르니 신전이라고 낙서 처럼 써붙인 화살표를 따라 골목길을 들어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여기가 그 유명한 가르니 신전이 맞구나 하는 안도감이 저절로 생겨나왔다.
골목 안쪽을 가득 메운 여행사 대형버스들과 승용차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던 것이다.
'어찌 어찌 했던간에........ 왔다. 드디어 왔어. 가르니 신전에........'
--- 할아버지의 손짓만을 믿고 넙쭉 버스에 올라탔다. 이런게 자유여행 아닐까.........
----- 에레반 벤츠회사 사무실 앞과 가르니 신전을 오가는 최신형 초특급 리무진의 우아한 자태.
가르니 신전은 아주 작고 아담한 신전이다.
우리가 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터키나 시리아의 신전 유적이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비하면 형편없이 왜소하다.
기껏해야 가로 세로 18m X 13M 기단부 위에 24개의 열주(석주)를 세워 만든 현무암 신전이다.
하지만 가르니 신전은 놓여있는 위치와 상징적 의미들로 인해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커다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전 유럽을 석권하고 지배했던 로마시대의 영역중에서, (구)소련이 차지했던 지역에 유일하게 원형으로 남아 존재하는 신전 유적인 것이다.
사실 로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멀고 먼 변방의 외진곳에 신전을 지음으로써 로마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고 영역을 표시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이 신전은 몽골제국이 유럽을 침공했을 당시인 1384년 티무르족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었다.
그것을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1969년에서 1975에 걸쳐 현재의 상태로 복원을 한 것이다. 1979년 이 지역의 지진으로 인해 다시 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또다시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깍아지른듯 솟아오른 바위산인 아자트 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높은 고원지대의 평원을 가로질러 흘러내리면서 약한 지반을 서서히 깍아내렸다. 늘어난 물줄기가 아자트 강을 이루고, 나란히 평원을 흐르던 고그트 강과 합치면서 더욱 거세어진 물결로 휘감아 굽이치면서 침식작용과 풍화작용을 만들어낸 끝에 마침내 거대한 협곡이 탄생하였으니 사람들은 이 협곡을 가르니 협곡이라 부른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에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 떨어진 코타이트 지방이다.
가르니 신전은 바로 이 협곡 안쪽 수백길 낭떠러지 벼랑위에 우뚝 솟아있다.
누가 언제 어느 방향에서 보든 이 건축물의 모습이 흡사 그리이스의 신전을 닮았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이 건축물이 세워졌을 때는 신전이 아니었다. 가르니 신전은 애초에 신전이 아닌 요새로 만들어진 성채였다.
건물의 외부를 살피자면 24개의 돌기둥으로 둘러 싼 전형적인 그리이스 이오니아식 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리이스 신전들 처럼 대리석을 사용하지 않고 현지에서 생산되는 현무암을 사용하였다.
내부를 살펴보자면 주로 신화를 형상화하는 그리이스풍의 내부 조각상 부조 대신, 로미시대 사원의 형식을 빌어 포도나 석류등의 장식을 사용했다. 또한 로마시대 초기에 일부 사용했던 황소나 사자등의 토테미즘적 형상도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기 아르메니아의 장인들이 그리스 로마식 신전의 모양을 모방하여 만든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라 하겠다.
가르니 신전은 BC3세기 경에 세워졌으며 처음엔 이미 말한것처럼 요새로 건축된 건물이다.
그 후,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BC 1세기에 이르러 아르메니아 왕 미트리다테스 1세(mithridates I)가 로마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재건축했다. 한마디로 그 사용 용도가 바뀐것이다.
이제껏 드러난 학설에 기준하여 신전의 건립목적을 보자면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지역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기 위함으로, 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신전 내에 지금은 사라진 트라야누스(Trajan) 황제의 모습을 본뜬 상(像)을 세웠었다 한다. 그런가 하면 태양과 결부된 동부 지중해 연안의 신(神)인 미트라 에 연관지어서 이 신전을 ‘가르니 태양신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처음 요새였던 이곳을 신전으로 개축해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쳤던 아르메니아 왕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AD 32~51)와 그의 가족들 모두가 양자이자 조카였던 라다미스투스(Rhadamistus)에 의해 암살당한 곳 또한 이곳이기도 하다. 혹 신전으로 개축하지 않고 그냥 요새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안위에 유념했다면 그런 참담한 비극은 모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신에게 신전까지 지어바쳤음에도 그 신은 끝내 미트리다테스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 여행도서가 아닌 인문학서적을 들고 동유럽 여행을 하고있는 이 낯선 동양인 사내를 현지인들은 대단히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때는 외세에 점령당하여 이민족에 의한 또다른 종교의 신전으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이 지역을 다시 되찾은 아르메니아의 오론티트(Orontid) 왕조와 아르타시야드(Artaxiad) 왕조 시대에는 여름 별장으로 사용했다.
서기 897년 신전 근처에 2층으로 된 여름 궁전과 목욕탕, 교회가 추가로 건립되면서 가르니 협곡위의 신전지역과 주변의 너른 평지를 개간하여 거대한 복합지구를 형성했다. 지금은 온통 허물어진채 복원을 하고있는 신전 북쪽에 있는 목욕탕은 온돌로 되어 있으며, 목욕탕 바닥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의 여신인 테티스(Tethys)와 바다의 신인 오케아누스(Oceanus)를 비롯해 아킬레스(Achileus)의 어머니 테티스(Thetis) 등을 소재로 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이 모자이크에는 표준 그리스어인 코이니(Koine) 어(語)로 ‘우리는 무보수로 일했다(ΜΗΔΕΝ ΛΑΒΟΝΤΕΣ ΗΡΓΑΣΑΜΕΘΑ)’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건설 당시 모자이크를 담당했던 예술가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했음을 추측하고 있다. 위대한 왕은 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자신의 업적을 영원히 남기려고 여기에 대역사를 추진했지만 그 왕은 쌔빨간 거짓말쟁이라는 폭로이다. 최하층 근로자의 임금까지 떼어먹은 치졸한 인간이라는 영원한 고발장인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가르니 신전의 백미는 절벽 위 신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협곡의 풍광이 아닐까 한다.
여기 이 대협곡은 이천년 전 처음 신전이 세워지던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장대하고 장엄한 경치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화산 폭발시 분화구에서 쏟아져나온 용암이 해안가의 바다나 게곡 주변의 큰 강을 만나면서 급격하게 식어서 굳어지다보면, 부피가 급속도로 줄어들면서 사이사이에일정하게 틈이 생겨난다. 그 후 오랜세월에 걸치면서 그 틈들이 점점 커지게 되면 이것을 절리라 하고, 해안가나 바위산이나 강변에 4각형에서 6각형 형태의 돌고드름 같은것이 매달린것 같은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주상절리라 한다. 특히 화산암의 일종인 현무암 지역에서 이같은 현상이 즐겨 나타난다. 우리나라 제주도 정방폭포나 천지연 폭포 주변이 이 주상절리에 해당된다.
그 주상절리의 빼어난 풍광으로 각광받는 세계적인 명소가 바로 여기 가르니 협곡이다. 사람들은 이곳 가르니 협곡의 주상절리를 '돌들의 교향곡(symphony of the stons) 이라고 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정엄하고 거대한 자연의 신비로움이 마치 수수깨기 처럼 그곳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장엄한 협곡은 정말 아름답다.
신전의 좌우로 협곡을 따라 길게 벼랑위에 들어선 마을과 별장들의 풍광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나는 협곡을 향해 게곡을 내려가 보기로 했다.
가르니 신전의 정문 옆으로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아담한 오솔길이 나있다.
오랜 세월동안 이 오솔길을 따라 계곡의 아래쪽 물가에 개간한 과수원에서 포도며 사과며 토마토며 온갖 과일과 야채들이 올라왔을 것이다. 또 이길을 따라 소나 양과 말들을 끌고 물을 먹이러 내려갔을 것이다.
실제로 오솔길 양편으로는 현재에도 거대한 호두나무 과수원과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있었다.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농사를 짖고 있었던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며 하늘을 올려다 보니 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제법 시간이 걸릴텐데..... 비 내리기 전에 내려갔다 올 수 있으려나?'
--- 아니나 다를까. 잔뜩 찌프린 하늘에서 비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저만치 주상절리 아래 냇가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는것이 보인다. 나는 한걸음에 달려 내려갔다.
달려내려간 냇가에서 한무리의 단체여행단을 만났다.
그런데 무어라고 인사도 나누기 전에 후두득 하면서 빗방울이 거세어지기 시작했다.
단체여행객이 서둘러 방금 내가 뛰다시피 내려온 언덕길을 서둘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예쁜 가이드가 말하길 '여긴 바위골짜기라 기상이 아주 험악해요. 벼락이라도 치기 시작하면 피할곳이 없어요.......'
어쩌겠는가.
죽어라 다시 그들을 뒤쫓아 방금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갈 수 밖에......
오.마.이.갓~~~~~~~~~
굽이굽이 양떼나 올랐음직한 바위벼랑길을 죽어라 오른다. 한참을 급하게 오르다 보니 등허리까지 땀이 흥건하다.
급하게 앞서서 오르던 단체여행객들(참으로 위대하고 대단하신 분들.....)이 잠시 쉬시려는 폼이기에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엄청 놀랐다. 또 무척 아니....... 무지무지 부러웠다.
가르니 협곡을 관통하는 결코 쉽지않은 코스를 트래킹을 하고 돌아오는 이 단체여행객들은 모두 벨기에에서 오신 분들이었는데........
평군 연령..... 아니지....... 평군 연세가 자그만치 74세시란다. 오.마.이.갓~~~~~~~~
70 아랫줄은 단 한분도 없는 이분들...... 벨기에의 한마을에서 수십년을 동고동락해온 가까운 이웃들이란다. 아니 가족들이다.
세상에나........ 반바지를 입은 할아버지에 곱게 화장까지 하신 할머니......... 모두가 너무너무 정정 하시다. 그러니 이런 멀고도 깊은 골짜기가지 단체 트래킹을 다니시지......... 정말 정말 부럽다.
한없이 존경스럽다........ 나도 노년의 삶은 저렇게 살고 싶다. 더도 덜도 아닌 꼭 저만큼만 살고싶다. 저런 모습으로. 정.말.로.
그리고 이들을 안내하는 친절한 가이드 아가씨와 아줌마쯤의 사이일것 같은 이 예쁜 여성은 당연히 아르메니아인 이었다.
찰칵.
찰칵.
어른들 모습 하나로 새삼 (벨기에)라는 나라가 친숙하게 느껴지고 위대하게 느껴진다. 번번히 월드컵에서 한국의 발목을 잡는 '붉은 악마'의 원조격인 나라이지만...........
그분들도 내가 '한국인입니다' 하자 일제히 '코리아 넘버 원'을 합창해 주신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분들을 만나 새롭게 삶에 대한 의욕과 용기를 얻었다.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알.럽.벨.기.에.꼭.언.제.든.찾.아.갈.께.요.안.녕.
가르니 신전과 작별을 하고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마을 어귀로 나아갔다.
지나가는 트럭마다 태산만하게 건초더미를 싣고 지나간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나 동유럽은 지금 월동준비로 대단히 바쁘다. 대단히 길고 몹시 추운 겨우살이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삼거리에 다다르기도 전에 택시가 다가와 '가하르트 반크'를 외쳐댄다.
예레반에서 여기 가르니까지는 마슈르카(미니버스)가 있고, 여기에서 게하르트 수도원쪽으로 좀 더 가는 버스는 있지만, 목적지인 게하르트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는 '까짓 히치 하이킹이라도 해보면 안되겠어?' '어떻하든 가기만 하면 될거 아니야?' 했었다. 그런데 정말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 택시와 흥정을 해보기로 했다.
게하르트 수도원에 가려는데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손가락 세게를 펼쳐 내민다. 3천드람(약 7천팔백원 정도)이라 한다. 어디를 가든 택시비가 엄청 바가지라는 생각에 좀 깍아보자는 심뽀가 툭 삐져나왔다. 그랬더니 2천오백드람까지 내려갔다.(약 6천사백원 정도) 그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데 그 기사양반 혈압을 올리며 자기네 말로 마구 주절거리는데 대충 그 내용이.......'수도원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27km나 된다고. 버스도 없어요. 나 아니면 절대 찾아갈 방법이 없는 거라구. 2천오백드람 이면 아주 싼거야. 거져라구.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대로 어서 타기나 해.' 뭐 대충 그런 투였다.
그냥 그 낡은 택시에 올라타려 했었는데 그 기사양반의 부연설명이 그만 내 부아를 돋구고 말았다.
가르니 삼거리에서 게하르트 수도원 주차장까지 정확히 9km 인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수도원 가기 전의 산골 오지마을까지는 버스가 가는데, 그 마을 초입에서 수도원까지 4km라는 것까지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실수는 얼마든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지만, 두 눈 빤히 쳐다보면서 남의 뒤통수 치는 사기는 절대 당하지 않는다' 는게 나의 지론이다.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멀쩡하게 이런 거랑말코 택시기사에게 농락당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사서 고생하는 편을 기꺼이 택하는게 내가 살아가는 방편이다.
나는 단오한 어조로 승차를 거부하고 도로를 따라 식씩하게 걸어나갔다.
그런 내모습을 저만치 뒤에서 황당하단 표정으로 택시기사가 쳐다보고 있다.
이게 과연 잘한 선택일까? 아님 잘못한 선택이었을까? 낸들 알겠나?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을 어쩌겠어?
하여 얼마쯤 그렇게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서 낡디 낡은 소련제 구닥따리 승용차 하나가 다가오기에 마치 히치하이커라도 되는 양 엄지손가락을 채켜들고 내밀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낡은 승용차가 내 앞에 멈춰섰다.
앞유리도 깨져 길게 사선으로 금이가고 다 찌그러진 앞문짝 위로 수엄이 덥수룩한 젊은이가 내다본다.
내가 게하르트 수도원을 찾아가는 여행자인데 좀 태워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일정한 댓가를 지불해 주면 기꺼이 태워다 주겠다는 표정이 역력한 그네들 말투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더니 뭐라 뭐라 하는데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 계산법을 모르겠으니 차라리 달러로 환전해 생각하면 얼마냐고 했다. 그러자 이 사내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아에 자기 지갑에서 1천드람(2천육백원)짜리 지폐를 한장 꺼내 보여주면서 '이거면 된다'고 한다.
'오 케이' 라고 말하고 승용차에 올라타면서 돌아보니 아주 저만치 뒤에서 여전히 방금 전의 그 택시기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바보 같은 녀석. 괜한 억지에 이렇게 너는 손해를 보았고 나는 금방 1천오백드람이나 절약을 했잖아?
자유여행에선 이런 경우도 허다하다.
그나저나 이친구....... 이 수십년 된 X차를 가지고 달려도 너무너무 달린다. 딴에는 나도 운전을 좀 한다 하는데...... 이건 거의 롤로코스터 수준이다. 엉성하고 험악한 이 산악도로를 자동차 경기장 트랙을 돌듯이 달린다.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데........
오! 주여~~~~~~~~~~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경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강하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조건 어서 이 차에서 내리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 돌아갈 때 이사람을 또다시 만나면 그땐 심히 고민이 좀 될듯 싶다.
드디어 깍아지른 절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아자트 계곡이 앞을 가로 막았다.
게하르트 수도원에 도착한 것이다.
마침내 게하르트 수도원에 도착했다.
거짓말처럼 소련제 구닥따리 승용차를 타고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오는 사이에 비가 그쳤다. 아주 잠시 해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젠 정말 날이 개이려나 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제대로 폼 잡고 그럴싸한 사진 좀 찍을 수 있으려나 했었다.
정확하게 이때부터 채 5분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확히 5분 후 부터였다.
또다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 게하르트 여행기는 다음편으로 이어서.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아라라트 산과 호르비랍 교회 (0) | 2016.11.15 |
---|---|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게하르트 수도원.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다? (0) | 2016.11.10 |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캐스케이드와 예레반 아침산책 (0) | 2016.11.08 |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세반호수와 대재앙 (자연의 경고) (0) | 2016.11.07 |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무조건 떠나고 보자. 예레반으로..... (0) | 2016.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