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에서 깨어 창문을 바라보니 밖이 이미 환해져 있다.
예레반에서 보낸 이틀동안의 시간 모두가 오락가락에서 시작해 느닷없이 쏟아 퍼붓던 비로 인해 망가질대로 망가져있던 기억뿐이라 그 이상의 어떤 바램도 가질 수 없었던 터라, '밤늦게까지 내리던 비는 멈췄으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전부였다.
창문을 열자마자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결은 지난 이틀동안과는 전혀 다른 바람결이었다.
크게 한웅큼의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오.마.이.갓.
한국에서나 흔하게 듣던 '청명한 가을하늘'이 거기에 있었다.
한국땅의 '쪽빛 가을하늘' 보다 더 높고 더 짙어보이는 '코발트빛 에레반의 하늘'이 상큼한 새벽 공기와 함께 나의 아침을 맞아주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번 여행을 통털어 가장 선명하고 후레쉬한 아침을 맞게된 것이다.
아직 다른여행객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라는 것도 잊었다.
거실을 지나 부엌 옆으로 쪽문을 열고나가 게스트하우스의 4층 건물의 후면 베란다로 갔다. 빨랫줄이 걸려있고 주로 여행객들이 흡연실로 이용하는 발코니였다.
아라라트 산.
마치 지평선처럼 느껴지는 도심의 건물들 지붕위로 '아르메니아의 영산(靈山) 아라라트'가 장엄한 모습으로 눈 앞에 우뚝 서서 다가와 있다.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신성한 어떤 느낌이 서늘한 바람결과 함께 페부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할.렐.루.야.
믿을 수가 없었다. 이틀동안 안개와 구름에 가려 그렇게 찾아헤매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아라라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아침에...... 그것도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는 날, 에레반을 떠날 준비를 해야하는 이 아침에 거짓말 처럼 느닷없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저히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끓이고 어제와 비슷한 아침거리를 접시에 담아서 다시 베란다로 나왔다.
따끈한 커피가 알싸한 느낌으로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가고 어느정도 머리가 맑아졌다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갑자기 머리가 무한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라라트와 트빌리시로의 귀환 사이에서 시간 쪼개기와 스케줄 조정을 통해 새판짜기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조사해둔 여행정보를 기록한 수첩과 메모장과 책자도 동원했다.
아침 산책으로 공화국 광장을 비롯한 나머지 에레반을 돌아보고 점심때 즈음해 체크아웃을 하고 터미널로 가서 트빌리시행 마슈르카에 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날이 개이고,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포기하려 했던 '아라라트 산'이 말짱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아라라트까지 다녀오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가 관건이었다.
하루를 연장해서 예레반에 더 머물까?
늦은 체크아웃을 부탁하고 여유있게 다녀온 후, 야간 열차로 트빌리시에 되돌아 갈까?
그런데 열차는 문제가 있다. 미니버스로 6시간 걸리는 거리를 기차는 편하기는 한데 13시간에 걸려 간다는 사실을 알고도 있었고, 또 트빌리시 출발은 홀수일, 예레반 출발은 짝수일인 야간열차인데 오늘은 홀수일이다. 오늘은 기차가 없는 날이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와 짐꾸리기에 들어갔다.
'아라라트와 호르비랍을 보기전에는 에레반을 못 떠나. 절대로.......'
무조건 아라라트는 다녀와야만 하겠기에..........
배낭을 완전하게 꾸려서 방문 옆에 세워 두고, 그 위에 매니져에게 메모를 써서 남겼다.
'모처럼 날이 개여서 포기했던 아라라트 산을 꼭 보아야 하겠습니다. 서둘러 다녀오겠으나, 혹 조금 늦어지면 늦은 체크아웃을 부탁합니다. 2시 전에는 오도록 하겠습니다. 혹 새 손님이 오시면 제 배낭을 거실 구석에 놓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나는 서둘러 거리로 나섰다.
아라라트를 찾아 나서기는 했지만 또 반복되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교통편이다.
가르니 신전과 게하르트 수도원을 다녀오듯이 발품을 팔면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나에게 시간이 그리 넉넉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능하면 정오 이전에 돌아오고 싶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범은 하나뿐이다.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잘 안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흥정을 한다.
한시간 정도 걸리는 호르비랍 사도교회까지 8.000드람에서 6.000 드람까지 가격이 내려갔다. 표정을 보니 마지노선이지 싶다. 6.000드람이면 우리돈 1만오천원 정도이다. 이 정도면 포기하려 했던 호르비랍과 아라라트를 보는 보상으로는 어느정도 괜찮다 싶었다.
택시는 출발했다.
에레반 도심을 벗어난지 채 10분이 되지않아서 나는 아르메니아의 현실을 또다시 목격할 수 있었다.
트빌리시를 벗어난 조지아나, 에레반을 벗어난 아르메니아나, 어쩌면 소련에서 벗어난 동유럽국가 모두가 다 이런 모습들일 것이다.
심하게 훼손될대로 훼손된 도로는 곧이어 흉물스러운 공단을 이리저리 돌아 빠져나간다. 아르타샤트 공단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지난날 한때는 우리나라 광양니아 포항이나 울산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단이다. 그런데 지금은 통째로녹이 슬고 흉물스런 모습으로 뼈대만 남아 절망적이고 암울한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아르타샤트 공단은 식품공장과 건설자재 공장들이 들어서서 한때 불야성을 방불케 하던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되던 지역이었다 한다.
전형적인 낙농업 국가로 게승되었어야 할 코카서스 남쪽의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도 소련의 계획경제였던 고스플란(Gosplan) 정책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소련연방 전체를 여러개의 블럭으로 나눈 뒤, 중공업 중심의 공단들을 지역에 대한 특성과 상황 고려이전에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배분하여 균등한 배분만을 목적으로 실행한 정책은 처음에는 곧바로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냈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렇게 페허로만 남게 되었다.
공산당이 모든것을 독단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체제하에서는, 자원을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충분한 데이터속에서 합리적으로 생산하는 계획경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임무처럼 부여된 목표를 무조건 달성해야만 하는 괴물경제로 변질되고, 그 결과는 모든것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구실과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게된다.
결국 소련의 몰락은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의 시계바늘을 소련의 탄생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기초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기반적 인프라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도로망 조차도 구축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심하게 훼손될대로 훼손된 채 그냥 방치된 상태이다. 그나마 있던 공장들도 녹이슬어 더는 재가동 불능의 고철덩어리로 변했다. 전력도 부족하고, 자원은 있으나 생산할 인력과 가공에 쓸 자본력이 절대 부족하다.
한마디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 일부의 기득권을 가진 과거 소련에 빌붙어 살던 사람들에 의해 국가가 사단이 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의해 저질러지는 아르메니아의 난도질이 더욱 더 이들의 미래를 암울하고 절망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들이 한없이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그들의 신이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그들을 감싸주시기를 나는 온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아멘.
아르메니아의 사도 교회 호르비랍.
흉물스런 공단지역을 벗어나면 거의 대부분의 기역은 평탄하고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구릉으로 이어진다.
사방으로 포도밭이 늘어서 있고, 사과 농장과 옥수수밭, 그리고 채소밭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들판의 어디를 지나던 고개를 돌려보면 어디에서나 아라라트가 보인다. 만년설에 뒤덮여 있고 구름띠를 항시 목에 두르고 있는 모습이 더욱 신령스러워 보이는 아르메니아인들 영혼의 고향인 아라라트 말이다. 우측으로 대아라라트가 있고 좌측으로 소아라라트가 다정스레 형제처럼 나란히 서있다.
마치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곳에서 거의 100km쯤 저만치에 서 있는 산이다.
거기다 지금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가볼 수도 없는 민족의 영산이다. 아라라트가 서있는 그곳이 지금은 터키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 아라라트 산은 국경 초소인 철조망 너머 저쪽 터키땅에 있어서 가볼 수가 없고, 지금도 1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이란 국경 너머에 21세기의 디아스포라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AD.301년 인류 최초로 아르메니아는 왕의 칙령으로 기독교 왕국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기독교 왕국의 탄생에는 그레고리(Gregory the Illuminator)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 사도교회인 호르비랍과 게하르트 수도원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인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를 빼놓고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를 이야기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아르메니아는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고 있었다. 그레고리 또한 처음에는 태양신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후, 그레고리는 터키땅 카파도키아에서 비로소 기독교를 만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 특히 일부 기독교인 한국인 여행자들에 의해서 그레고리가 (순교자)로 둔갑을 하게된다.
그레고리는 절대 기독교의 순교자가 아니다.
그가 성인의 반열(st.)에 오른것은 사실이나..... 순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성인의 반열에 오른것 또한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 애초의 호르비랍은 바위산에 설치한 감옥이었다. 기원전부터 그 감옥 옆으로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었다. 지금도 공동묘지로 사용된다.
아라라트 산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겨지는데에는 모두가 익히 알고있는 (노아의 방주)와 연관이 있다.
구약성경속의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가 끝날즈음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아라라트 산의 증턱이었으며, 아르메니아 민족의 시작이 바로 그 노아에서 부터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의 노아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다. 노아의 손자였던 고멜이 아르메니야 지역에 정착한 후로 오늘에까지 그 역사가 이어져내려왔다고 믿고있다.
또한 이 지역과 순교를 연관지을 수 있는 사람은 그레고리가 아니라 따로 있다. 예수의 12사도 중에서 바돌로메와 다대오가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실제로 로마에 의해서 순교하였다. 하지만 그 사실로 인하여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된것은 아니다. 그들의 순교후 250년 이상이 훌쩍 지난 301년에 이르러서야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며,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가 공인되기보다도 12년이나 앞선 시기였다.
왜곡 내지 와전은 여기 흐르비랍 교회의 지하감옥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태양신 미트라를 믿던 아르메니아왕은 기념일에 축제를 열고 신에게 제물을 받치게 되었다. 왕은 이상한 종교를 믿는다고 들었던 그레고리로 하여금 태양신에게 제물을 받치라고 명했다. 하지만 이미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있던 그레고리는 이 우상숭배 행위를 거절하였다. 하여 분노한 왕은 그레고리를 감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 호르비랍의 중심에 있는 수직으로 바위를 깎아 만든 감옥이었다. 그레고리는 이 감옥에서 13년을 살았다. 여기서 이야기가 약간씩 변형되어 감옥에서 순교했다. 13년 후에 꺼내보니 아직 살아있어서 처참하게 처형했다. 또는 13년 이라는 절대 불가능한 시간을 생존해 있는것을 보고 탄복하여 방면하고, 즉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등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레고리와 태양신 제물사건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13년간 여기 지하 바위감옥에 갇힌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꺼내보니 정말로 아직 살아있어서 기절초풍한 왕이 그대로 방면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것은 절대 아니다. 그레고리는 천수를 누렸다. 순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기독교가 아르메니아의 국교가 된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레고리와 호르비랍 바위지하감옥이 연관지어진 사건의 발단은 (역모)에서 시작되었다.
그레고리의 가문은 권력의 정점에서는 어느정도 밀려나있었지만 엄연한 아르메니아의 왕족이었다.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왕족과 귀족들이 모여서 음모를 꾸몄다. 왕인 호스로프2세의 암살을 모의하였고 사전 약속된 날에 일제히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왕은 쿠데타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끌어내서 참혹하게 처형했다. 그레고리의 아버지도 참살되었다.
다행히도 사건 당시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그레고리는 화를 겨우 면했다. 막역한 후견인의 도움으로 야음을 틈타 아르메니아를 탈출한 그레고리는 카이세리지방의 카파도키아로 도망을 쳤다. 세월이 흐르고 그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곳에서 같은 아르메니아 왕족이면서 기독교인이었던 여인과 결혼했다. 아내의 인도로 그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으며 꾸준히 기독교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본국으로 부터 놀라운 기별이 날라왔다.
호스로프2세가 사망하고 아들인 티리다테스3세가 즉위한 것이다. 왕위 등극을 기념하기 위하여 왕은 아르메니아 전역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레고리는 즉시 사람을 보내 왕에게 질의했다. 자신의 부친이 벌였던 과거사에 대해서도 사면령이 적용되는지를 물었다. 왕은 화합의 시대를 강조하면서 지나간 시대의 모든 일에대해 사면령을 내렸으니 걱정말고 어서 돌아오라고 답신을 보냇다.
그레고리는 일가족 모두를 이끌로 아르메니아로 돌아왔지만........ 왕은 지난 기억을 절대 잊지않고 있었다.
온갖 구실을 다 붙여대면서 추궁 끝에 그리 오래지 않아 왕은 기어코 그레고리를 호르비랍의 바위감옥에 가두었다. 선대의 복수를 한것이다.
호르비랍의 바위감옥은 바위를 수직으로 동굴처럼 파내려가서 만든 노천 감옥이었다.
수직으로 파내려가 오직 그 구멍으로만 빛이 아주 조금 들어온다. 창문도 없다. 밧줄을 통해 음식물과 배설물이 오르고 내릴뿐이다. 이 바위감옥에서 장장 13년을 그레고리는 생존했다. 혹독한 추위와 어떻게 들어온 뱀과 전갈과 해충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죽지않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레고리란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냈다. 당연히 얼마못가서 죽었을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어느날 문득 그레고리에 생각이 미쳤다. 왕은 그의 소식을 알아오라 부하를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도 그가 버젖이 바위감옥에 생존해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왕은 대경실색했다. 바위감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너무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히 인간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은 말을 타고 달려갔다. 그레고리를 꺼내라 명령했고, 13년만에 밖으로 나온 그레고리를 관찰했다.
쇠약할 때로 쇠약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모습과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13년 전의 그런 분노에 찬 모습이 어디에도 없었다.
왕은 즉시 그를 사면해서 방면해 주었다. 정치범 그레고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그레고리는 왕의 배려에 깊이 감사를 표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레고리를 방면해준 티리다테스3세는 대단히 유능하고 용맹스런 왕이었다. 그는 로마와 손을 잡고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친 위대한 업적을 간직한 아르메니아의 전성시대를 이끌던 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배신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로마황제는 티리다테스 왕과의 맹약을 깨고 아르메니아의 서부영토를 차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로마의 배신에 치를 떨며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너무도 거대하게 성장해 버린 로마였다. 연일 로마의 배신과 분노에 치를 떨다보니 그만 티라다테스 왕이 병석에 눕고 말았다. 화병이었다. 백약이 무효했다. 문무백관이 모여들어 왕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왕궁으로 현자 한명이 찾아왔다. 남루한 차림의 그 현자는 바로 그레고리였다. 그레고리는 왕에게 알현을 청했다.
과거사의 일도 있고, 너무나 누추한 행색의 그레고리였던지라 모든 신하가 나서서 알현을 막고나섰다. 숨을 몰아쉬던 왕이 말했다.
'나는 그에게 볼 일이 없지만, 혹여 그가 나에게 아직 볼일이 남아있거든 내가 죽기전에 그의 말을 들어보아야겠노라'로 했다.
그레고리는 죽어가는 왕의 앞에 나아갔다.
지치고 병든 왕의 영혼을 위로하는 성경말씀을 전하고, 게하르트 수도원에서 가져온 약수물로 왕의 목을 축이게 하고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죽어가던 왕의 병이 순간 씻은듯이 사라졌던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왕은 그레고리가 믿고 의지해온 기독교를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국교로 선포했다. 그레고리를 그 종교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레고리가 13년간이나 갇혔던 바위감옥위에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으뜸가는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다.
또한,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는 배신의 나라 로마제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그 이후에도 조용히 게하르트 수도원에서 은거에 들어갔다.
그가 죽은지 100년이 지나서 그는 성인(St.)의 반열에 올랐다.
이것이 그레고리와 아르메니아가 첫 기독교 국가가 된 속내막의 전부인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아라라트 산을 배경으로 바위산 위에 들어선 호르비랍 교회의 풍경은 마치 달력속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달력에 등장하는 이 세상 그 어느곳의 풍경에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정말로 멋진 풍경이다.
하지만 아라라트 산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호르비랍은 어디서 어떻게 보든 대체적으로 음산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레고리의 고난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그 음산함의 깊이가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어보인다.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돌무더기 산 위로 감옥을 덮으려고 요새처럼 지어진 외로운 교회 하나.
스산함과 을씬년스러움이 안개처럼 호르비랍을 둘러싸고 있다.
2천년 가까이 되도록 말이다.
-- 그레고리가 13년간 지낸 바위감옥 입구.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사진촬영 불가.
호르비랍 사도교회 구경을 마치고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혼자 오셨나봐요?'
분명 또렸한 한국말이었다. 그것도 나를 향해 던져진 말이 분명했다.
깜짝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런데 어디에도 한국인은 없었다. 아니 비슷하게 생겨먹은 동양인도 없었다. 멀쑥하게 생긴 서양인 셋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알바니아인 이었다.
우리나라 일산에 거주하면서 알바니아와 한국간의 무역업에 종사하는 직장동료들이었다. 휴가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던중 잠시 아르메니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혼자 여행할 생각을 다 하셨어요?'에서 부터 한참동안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모두 한국말로........
배낭 메고 쪼리 신고 정말로 내 여행스타일에서 진일보해 마치 보헤미안처럼 주로 걸으면서 여행하는 젊은남녀들과도 인사했다.
사실 많이 부러웠다. 내가 한 20년만 젊었어도...........
그리고 주차장에서 만난 아르메니아 단체 수학여행단.
젊은 여성분이 한분 불쑥 내게 다가와서는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한다. 그래서 단체여행중이니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모여서 찍으려나 하나보다고 여겨 그분 카메라를 넘겨 받으려고 했더니........ 얼쑤? 찍어주는게 아니라 찍혀 달라는 말이었다.
내가 모델이 좀 되어 달란다. 선생님들은 나를 찍고. 나도 선생님들을 연실 찍고.......
학교에서 한국에 대해서도 가리키고 아이들이 요즘 K-POP을 무척 좋아하는데....... 정작 한국인은 태어나 처음 본단다.
헐.
캬.
컥.
한국엔 (아이돌)만 있는게 절대로 아니다.
여기 버젓하게 (늙은돌)도 있다.
헐.
이넘의 미친 인기는 멀리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인도양을 건너 여기까지와서도 식을 줄을 모른다............
황.홀.한.아.라.라.트.와.호.르.비.랍.안.녕.또.올.께.
호르비랍에서 돌아나오는 길은 손님을 태우고 들어온 택시와 또다시 흥정을 벌였다. 이번엔 5.000드람에 합의하고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예레반 외곽에서 도로가 막혔다.
내일이 바로 아르메니아 독립기념일이라는 것이다.
예레반의 공화국광장을 중심으로 기념페레이드 행사 에행연습으로 도심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레반에서 외곽지역으로 나가는 도로는 모두 열려있다. 그러나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모든 통로는 차단된 것이다. 아직 공산사회주의 공화국인 아르메니아는 독립기념일을 우리나라 70년대의 국군의 날 수준으로 성대하게 행사를 치른다 한다.
도심을 외곽으로 삥 둘러보아도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택시에서 내렸다.
걸어서 교차로마다 막아선 경찰들의 제지선을 통과한 후에 다시 도심 안에 남아있던 택시라도 타야 할 상황이었다.
바리케이트 저지선을 통과해 도심의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온 도심이 무척이나 부산하고....... 군사용 트럭이 떼를 지어 지나가는가 하면, 하늘에선 헬리콥너가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흡사 초기 민장위 훈련 공습경보 수준이다. 그 와중에 방향을 잃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도심의 중심인 센트럴 파크나 오페라 하우스로 가는지를 잃어버렸다.
여기는 도심에 들어섰다고는 하나 중심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으로 판단되는데....... 낭패가 이닐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길을 좀 물어봐야만 하겠는데,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도로 가장자리로 서서히 다가오는 고급 외제 자동차를 보았다. 무조건 손을 들었다. 길을 물어보려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창문이 열리고 젊잖아 보이는 인텔리층의 남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는데 반갑게도 영어로 말을 건네온다. 상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차에 타란다. 방향은 조금 다른데 기꺼이 데려다 준다고 한다.
이 남자 수년전에 한국에 잠시 다녀간적이 있단다. 이태원과 왕궁이(덕수궁)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면서 사내가 데려다 준곳은 공화국 광장이었다. 자신이 지금 가는 일에 시간때문에 거기까지만 데려다 주겠단다. 광장에서 숙소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숙소나 거리는 비슷하다. 그의 고마운 배려에 무엇으로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하자 '아르메니아 여행의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돌아갔으면 하고 기도하겠다'고 한다.
'신의 은총이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가 대답했다.
'인샬라.'
아르메니아 사람도 이슬람처럼 '인샬라' 라고 말한다.
찰칵. 사진을 한장 찍었다. 멋쩍게 웃어준다.
이 사람의 배려 덕분에 뜻하지 않았던 아르메니아 공화국 광장도 둘러보고 가게 되었다. 실은 어제 저녁에 이 광장의 야경을 구경하려 하였으나, 쏟아지는 폭우로 어쩔수없이 포기했던 사연이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이 뜻밖의 상황과 친절한 아르메니아 남자의 고마운 배려로 에레반 공화국 광장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가 있었다.
내일이 독립기념일이고 이곳에서 행사가 치루어 진다는데, 광장엔 아무런 시설이나 무대가 준비되지 않고 있었다. 그냥 평상시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가로운 도심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광장을 구경하고 사람들을 만나보고 도심의 골목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체크아웃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주인은 메모를 보았다고...... 샤워도 하고 천천히 쉬었다가 준비가 되는대로 출발하라고 권해준다. 그리고 내가 어색해 할까봐 자리도 비워준다. 정말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분들이다.
샤워하고 요기도 좀 하고, 커피도 마시고 난 후에 배낭을 메고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본 고마운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열쇠는 주인이 가르쳐준 장소에 넣어놓고.........
다음에 다시 예레반을 오게 된다면 나는 당연히 여기 (유어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여행의 거점으로 삼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6시간을 넘는 시간을 미니버스로 다시 트빌리시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조지아 여행을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만남들을 위하여..........
------ 다음편에서 다시 조지아로 향하는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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