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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게하르트 수도원.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다?

by 피안재 2016. 11. 10.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장 31절>

 

 

     

 

 

 

  여기에 등장하는 '군병'이 바로 로마군의 하급군관 백부장이었던 롱기누스 이다.

  하여 그가 가졌던 무기로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을 일컬어 '롱기누스의 창' 이라고 부르며, 그 사건  이후로  그 창은 기독교의 영험있는 신성한 '성물'로 여겨왔다.

  예수라는 인물이 역사상에 나타나는  어떤 나라의 왕이었거나 어떤  제국의 황제들 처럼 지상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왕궁을 짖고 왕관을 쓰고 온갖 보석과 보물들로 치장하며 살았던 인물이 아니었기에,  성서에 드러난  바에 준하여 아무리 살펴 보아도 그와 연관 지을 수 있는 물건들이  별로 없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최우의 만찬)에 사용 되었을 거라 추정되는 '성배',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까지 걸쳤던 의복인 '성의',  그리고 지금 여기 케하르트 수도원에 등장하는 '성창(롱기누스의 창)'  정도가 에수와 관계하여 직접적인 연관을 그나마 지을 수 있는 유물들이라 하겠다.

 

  이제부터 살펴볼 게하르트 수도원은 지금은 '롱기누스의 창'을 보관하고 있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성창'을 보관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서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또는 그 성물을 보고자 찾아오는 전세계의 기독교인들과 여행객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아온 장소였다.

  하지만 좀 더 사실적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자면  게하르트 수도원은   St. Gregory(성인 그레고리)와 관련된 기독교 성지이다.  또한 그레고리는 아라라트가 한 눈에 내다보이는 성소 호르비랍(Khor Virap) 교회와도 연관이 있는 동일 인물이다.

  인류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은 아르메니아에 있어서,  그 기독교의 시작도 성 그레고리요 그 마지막도 성 그레고리인 것이다.

  이것은,  세번재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조지아에 있어서, 그 시작도 끝도 모두 St. Nino(성 니노) 할머니인것 과도 닮았다.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다?'

  이 말을 내가 고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어쩌면 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던져졌던 돌덩이들 보다 훨씬 더 많은 돌맹이 세례를 기독교인들로 부터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은근슬쩍 비켜가보려고 의문 부호를 뒤에다 붙여보았다.

  하지만 뭐........  굳이 의문 부호를 뒤에 달지 않는다 해도........  난  감히 '가짜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왜?

  적어도 나에게 돌맹이를 던지고자 나서는 사람이라면, 먼저 내 말이 어디서 왜 어떻게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야만 한다.  어떤 근거로 최근까지 게하르트 수도원에 보관되었던 '롱기누스의 창'이 진짜 에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이 맞는지를 내게 납득 시켜야만 한다.

  그러면, 나는 아무도 이런 입증 할 수 없는 사실을 속으로 뻔히 알고 있었기에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내 던졌느냐?

  아니다.

  나는 그 '롱기누스의 창'이 가짜 일수도 있다는 근거가 충분한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던진 의문의 말이다.  나는 내 이야기가 사실일 것이라는 확신에 대해서도.......  이번의 이 여행기를 마치기 전에 확실하게 피력해 볼 생각이다.

  혹시나 (다빈치 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과 함께 진짜 '롱기누스의 창'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꿈속에서라도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것이 간절한 나의 소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이지 싶다.'     ------  어디까지나 피안재 생각.

 

 

 

 

 

 

 

 

 

 

 

 

 

 

   -- 여기 게하르트 수도원을 후원한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의 문양이 정문은 물론 여러 건물의 벽과 출입문에도 새겨져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은 얼핏 보자면 깍아지른 바위벼랑이 병풍처럼 삥 둘러쳐져있고 발 아래로 맑은물이 흘러내리는 아자트 게곡위에 커다란 바윗덩이를 다듬고 깎아서 세운 천험의 요새처럼 보인다.

  이 같은 특징은 중세시대 이후 도시가 아닌 계곡이나 험준한 산언덕에 세워진 무수히 많은 교회나 수도원들이 들어서는 지형적 특징들중의 하나로도 분명해 보인다. 왜 그랬을까?

  유럽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했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에는 각 국가의 중심 도시들(로마. 피렌체. 비인. 마드리드. 독일의 고성들.셀축. 시리아. 등등)에서 부터 눈부시게 기독교 건축물들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두오모로 불리는 대성당들이 그 대표적이 사례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중세 봉건국가로 접어들면서 마치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갑자기 부상한 귀족들과 쇠락해 가는 왕조들과 새롭게 군대를 거느린 집단간의 무지비한 살륙과 침략과 약탈로 전철되는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수없이 등장한 많은 영주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영토를 마련하고 안주할 성을 우선으로 쌓았다.  그리고 그 성 안에 자신과 자신이 거느린 군사와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교회들을 서둘러 지었다. 십자가를 앞세워 하나임의 뜻이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과 표현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확실한 신변안전보장책이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에게나 오로지 교회(십자가)만이 무리를 하나로 묶고 지탱할 힘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기도와 믿음을 바탕으로  영토 확장을 위해 뛰쳐 나갔고 전쟁을 치루었다.  여기에는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오로지 승리만이 생존을 넘어 번영과 풍요를 약속해 주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어 민족성과 종교 갈등 문제까지 합세하게 되면서 전쟁은 점점 참혹하고 치열해져만 갔다.  그러다보니 이 시대의 교회들은 숫자는 넘쳐났지만 모두가 소박하고 규모도 아주 작다. 

  그러자 아비규환의 전쟁터를 피해 일부의 수도사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주들은 떠나는 수도사들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여 영주들은 산속으로 숨어든 수도사들 중에 영험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명망이 높은 수도사들에게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동굴에 숨어서 끼니를 걱정하던 수도자들에게 식량과 의복과 기도에 필요한 물자가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주들은 수도사들에게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천험의 요지를 찾아서 교회나 수도원을 지을것을 권했고,  여기에 따른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 덧붙여 타종교나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튼튼한 교회를 지을것을 권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하여서 깊은 골짜기 계곡 바위벼랑 위에 천험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영주는 들판이나 커다란 강변에 들어선 자신의 성채에서 풍요로움 속에서 왕국을 지배했다.  멀리 산속의 교회나 수도원에 계속적으로 물자를 보내  막역한 관계를 유지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수도사들을 그 영주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를 했다.  영주의 권위가 얼마나 튼튼하고 위용을 자랑하는 수도원을 몇 개나 후원하고 있느냐로 권위를 평가하려는 시대까지 도래했다고 하겠다.

  영주와 영주. 왕조와 왕조간에 전쟁이 벌어져서 부득이한 경우가 생기면 영주는 가족과 군대를 이끌고 자신이 이제껏 후원하던 교회나 수도원으로 도망쳤다.  이처럼 산속의 교회나 수도원은 후원자들에게 있어 제 2의 거점이자 자신들이 보유한 최후의 보루로 여겨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당시 대부분의 교회와 수도원들은 모두가 또 하나의 요새요 또 하나의 성채로 지어졌다.

  여기 게하르트 수도원도 그런 맥락에서 이 처럼 튼튼한 천험의 요새같은 수도원으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게하르트 수도원은 본 예배당(Kathoghikè)과 그 서쪽에 있는 가비트(gavit),  그리고 바위를 파내거나 깎아 만든 아바잔(Avazan) 교회,  거기에 묘지이자 동굴 교회인 자마툰(Jhamatun),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 그레고리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건물의 1/3 정도가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예배당이며, 그 동굴에  잇대어 기둥을 세우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씌워서 현재의 수도원이 된것이다.

  그냥 그런쯤으로 대충 이해하면 된다.  떨어진 건물도 있지만 협소한 바위지형 안에 서로 맞대고 이어붙인것 같은 건물들을 여행자가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여 나도 그냥 안내 책자를 인용하고, 여기저기 그냥 둘러보는 정도로만 움직였다.

  쉽게 말해......  게하르트 수도원은 아르메니아 건축의 대단히 뛰어난 위대함과 건축장식을 거의 에술의 경지에 까지 끌어올린 중세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기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기꺼이 등재 될만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채와도 같아 보이는 수도원이,  그래도 이 시기의 다른 교회에 비해보자면 외형적으로 다소나마 소박해 보이는 이유는 구조나 규모면에 있어서 그 당시의 소작농들이 모여사는 오두막을 모방해서 지었기 때문이라 한다.

 

 

 

  게하르트 수도원의 기원은 서기 380년 쯤이 지난   4C 말엽의 성 그레고리 에게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때는 그레고리가 쎄인트(성)의 반열에 오르기 전의 상황이었다.

  에수의 말씀에 크게 깨닭은 바가 있었던 그레고리는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 할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코타이트 지방 고트 마을 인근의 아자트 계곡에서 바위 동굴을 발견하고는,  이곳을 그의 평생의 은신처이자 기도처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서 기도생활을 하던 그레고리는 이곳의 한 바위동굴에서 사시사철 결코 마르지 않는 성스런 약수를 발견하고는 그 위에  움막 같은 형태의 작은 교회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게하르트 수도원의 시초였다.  그 약수는 오래지 않아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레고리는 사망하였으나,  그의 덕분에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더구나 그가 성인의 반열(St. Gregory)에 오르면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성스러운 장소를 게속 찾게 되었으며,  덕분에 케하르트 수도원은 몰라보게 성장을 하였다.

  한때 아랍의 침공으로 초토화 되다시피한 적도 있었으나, 프로샨 왕조의 후원으로 다시금 완벽하게 재건 되었다. 

  이 시기에서 부터 제대로 동굴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외부로 벽을 쌓아 지붕을 덮는 형태로 새롭게 지금의 형태와 같은 교회로 재건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에는‘동굴 사원(Monastery of the Cave)을 뜻하는‘아이비랑크(Ayvirank)라고 불렸었다

  그러던 13세기에 일설에는 사도 유다가 전해 주었다는 문제의 그 '롱기누스의 창'이 이곳에 전해져 보관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창'을 뜻하는 게하르트를 붙여  '창 수도원(Geghardavank)'인 '게하르트 반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였나?"

 

   게하르트 수도원 방문기를 이제 접어야 하는 시점이 되고 보니  애초 처음부터 거론했던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였나?' 부분을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기독교의 성스러운 유물중에 하나인 (롱기누스의 창).

  지금은 게하르트 수도원에 보관되고 있지 않기에  이번 방문에서도 '롱기누스의 창'을 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기에 부득이 이번만은 다른 지식 싸이트에서 그 이미지를 퍼 왔다.  다음의 계재된 사진이 바로 '롱기누스의 창'이다.

  '롱기누스의 창'은 보존과 보관상의 이유로 다른곳으로 옮겨져, 현재는 예레반 시내 에치미아진 성당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또 지금의 창의 모습은 아래 사진의 모습과도 판이하게 다르다.  정확한 시기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십자군 전쟁 당시 사라센에 의해 부러졌다는 학설은 있음)  사진 속의 창은 부러져 조각이 난 상태의 오래전 사진이다.  하여 현대에 이르러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고도화된 과학기술을 접목시켜서 부러졌던 창날을 복원하여 원형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전하여지는 전설같은 이야기로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밖혀 돌아가시던 날, 그분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에 창을 찌른 로마군대의 백부장 롱기누스는 순간 눈이 멀어 앞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자실하던 그에게 창자루를 타고 흘러내린 예수의 피가 그의 손을 흥건하게 적시고 말았다.  순간 무의식중에 롱기누스는 에수의 피가 묻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씻었고 거짓말처럼 시력을 되찾았다.

  이 놀라운 성령 체험에 감격한 롱기누스는 곧바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으며, 로마의 군관직을 버리고 아주 먼곳으로 떠나서 에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런 사실로 그 당시부터 이미 이 창은 무엇인가 신령한 기운이 서린 성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리 오래지않아 모두가 사라졌다.

  롱기누스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의 창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사에서 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장장 700여년 이상을 아무도 롱기누스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성창'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찾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모두 지워져 버렸다.

 

 

 

 

 

  그렇게 사라졌던 '롱기누스의 창'이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한것은 바로 (제1차 십자군 원정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던때인 1099년에 일이었다.  이때 비로소 수세기 동안 사라졌던 (롱기누스의 창)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골고다 언덕에서 사라졌던 창이 에루살렘 근처 안티오키아에서 다시 나타났으니 당연히 어느정도 설득력은 뒷바라지가 되는 재등장 이었다.

 

  성스럽고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에서 출발했어야 하는 (십자군 원정대)는 출발 당시와는 달리 (천국을 약속)하는 교황과 대주교들의 꼬임에 넘어가, 종국에는 세속적 야망과 개인적 이기심으로 표출되는 야만행위를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시작의 진정한 목표가 (성지 탈환)이었었기에, 그 목표를 달성하였음에도 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을 처참하게 살륙해 나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의 씨를 말리고자 대학살을 벌였고,  또 그곳에 거주하던 같은 신앙적 동족이기도 한 기독교인 마져도 살륙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이제 (성지 탈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새롭게 부여된 목표는 (예루살렘의 약탈) 이었으며,  세속적인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반으로 다지고자 했다.  예루살렘의 보물과 영토를 원정대 자신들이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관련된 모두 사람들을 아예  다 죽여 없애기로 했던 것이다.

  이 모든 야만적 행위들이 모두 그들이 믿고 따르는 (기독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자행 되었다. 

  (성스러운 전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성스러운 약탈)과 (성스러운 살인)만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이름으로........

  하지만 이같은 만행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 인근인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처럼 또다시 처참한 살륙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달아나고 뿔뿔히 흩어졌던 이슬람이 모술의 태수 케르보의 지휘하에 하나로 뭉쳐서 반격을 시도했던 것이다.  하나로 뭉쳐진 사라센의 군사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십자군 원정대는 삽시간에 사방으로부터 무너져갔다.  신의 분노였을까.

  이슬람의 군사들이 안티오키아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십자군은 이제 바람 앞의 한줄기 등불이었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슬람의 연일 게속되는 공격은 집요했다.  여기 저기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연일 이어지는 전투에서 수많은 십자군 병사가 이미 전사하였거나 부상당하였고,  이제는 성문을 부수러 달려드는 적들을 막아내기에도 힘에겨운 위기 상황이 도래했다.

  십자군 수뇌부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점 점 불어나는 적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십자군을 따라 이곳에 왔던 수도사인 은자 피에르가 '성 안드레아의 계시를 받았는데, 성스런 롱기누스의 창이 이곳에 있다'고 소리쳤다.  스스로 살아날 방법조차 상실한 십자군에겐 하나님의 게시가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그 어떤 믿음과 그 증표가 절실했다.  십자군의 수뇌부와 피에르는 안티오키아 성내의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성스런 창은 찾아내지 못했다.  피에르의 허왕된 꿈이었다고 모두가 결론 지었다.  군대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고,  이제는 사라센의 칼날 앞에 목을 내어놓고 그들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연이어 쳐들어 오는 이슬람의 공세에 마침내 성문이 무너졌다.  물밀듯 밀려오는 이슬람군에의해 십자군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십자군은 완전한 몰살을 거의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십자군 수뇌부의 한 장수가 에배당 아래의 지하로 뛰어내려 가더니 이내 기다란 자루에 녹슨 쇠붙이가 붙어있는 낡은 창 하나를 꺼내들고 뛰쳐나오며 큰목소리로 외쳤다.

  '찾았다.  롱기누스의 창을 찾았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군사들은 나를 따르라.  이교도를 물리치고 하나님으로 부터 축복을 받은 십자군의 용맹을 입증하라.'

  그는 그 낡은 창을 높이 치켜들고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고,  절망에 싸여 패식이 짙던 십자군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과 함께 뛰쳐 나갔다.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슬람군이 바람처럼 어디론가 철수를 했던 것이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뜻밖의 승리를 쟁취한 십자군은 이 사건 이후로 즉시 체재를 정비하고 단계적으로 각자의 고향을 향해 지중해를 건너갔다.  여러 우여곡절이 더 뒤따랐지만 말이다.  이것으로 (제1차 십자군 전쟁)이 모두 종결된 것이다.

 

  그 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종교 재판이 열렸다.

  피에르가 받았던 계시와 기적을 행한 롱기누스의 창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하는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피에르는 유죄를 선고 받고 처벌을 받았다.  그가 받았다는 계시가 거짓이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상황이 그런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고 울면서 신과 재판관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그 창을 처음 지하실에서 꺼내온 장군과 롱기누스의 창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재판도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재판에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장군의 진술도 밝혀지지 않았고,  창이 가짜인지 진짜인지에 대한 판정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방치했다고 해야겠다.  결단코 판정의 유보가 아니었다.  어쩌면 필요에 따라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알았다.  피에르의 증언과 장군의 진술이 있었으니 진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가짜라고 판명해 버리는 것보다,  판정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진짜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 앞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는데 유리하거나 필요할거라 판단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의문은 여기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안티오키아를 점령당한 후 곧이어 에루살렘까지를 다시 빼앗기면서 (롱기누스의 창)은 결국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에 이슬람군에 의해서 어떤 이유에선지 창의 자루와 촉이 분리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창은 이 시기에 분리되었다.

  시간이 지나, 이슬람은 이슬람 대로 바티칸은 바티칸 대로 체재의 안정에 주력하면서 상호대치 속에서 현상유지에 안주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또 그와중에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바티칸의 감시를 속여가며 이슬람과 교역을 시작하여 점차 언청나게 부를 이루기 시작하던 시기에...... 베네치아 상인들과 거래를 하던 이슬람의 거간꾼 손에 이유야 어찌되었던간에 (롱기누스의 창)이 들려나와 매물로 둔갑을 한것이다.  교황청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장사를 벌이려는 생각이 있던  한 거상이 그 (롱기누스의 창)을 구입해 교황청에 바쳤다.  하여 처음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에 안치하였다가, 훗날 다시  옮겨져서 현재는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십자군 원정대)에 의하여 다시 모습을 드러낸 (롱기누스의 창)은 지금 분명하게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에레반의 에치미아진 성당에 보관되고 있는 아르메니아 (롱기누스의 창)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느것이 진짜이고 어느것이 가짜인가?

  그러면 이 뿐이냐?  아니다. 또 있다.  이것 말고도 또 '롱기누스의 창'이 등장하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수많은 유물과 보물들을 (템플 기사단)에 의해 몰래 유럽으로 퍼 날려졌고,  그 귀한 물건들 중에 바로 (롱기누스의 창)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유럽으로 건너 온 (롱기누스의 창)은 여러번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폴란드 볼레스와프 국왕의 손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이 쳐들어오자 위기를 느낀 볼레스와프 국왕은 나중에 되돌려받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성창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실에 맡겼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 아무리 회수를 요구해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를 끝내 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성 모리츠의 창)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명명한 채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롱기누스의 창)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이러면 더 보태어 세 개의 (롱기누스의 창)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창에는 신령한 절대적 능력이 스미어 있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그리하여 실제로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이 창을 확보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탐냈던 기록들이 실제로 남아있다.

  이 창을 차지하면 실제로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샐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어떤게 진짜인지 알아야 수작을 꾸미지......  세개를 다?

 

 

 

  바티칸 베드로 성당에 보관된 창이나 오스트리아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보관된 창의 역사적 유래에 비하자면  아르메니아 게하르트 수도원에 보관되어왔던 창에 대한 유래는 지극히 심플하다.

  골고다 언덕에서 성령체험을 한 후,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롱기누스는 로마에서 아주 먼곳으로 떠나와서 에수님의 말씀을 더 공부하였으며,  후에는 그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행복하게 일생을 마감하였다 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로마군관의 옷을 벗고 로마를 떠나올 때, 바로 그 (롱기누스의 창)을 가지고 떠나왔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모든 개인휴대 무기는 군인 스스로가 자비로 마련하던 시대였으니, 자신이 마련해서 사용했던 무기를 그대로 가지고 떠나오는것에 아무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 거치장스러운 커다란 창의 자루를 반쯤 자른 후에 노상에서 강도나 산적들을 막아내기 위해 창을 휴대하고 떠나왔다는 가설에 아무런 의구심이 생기지 않는것도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가 로마에서 멀리 떠나와 정착한 곳이 여기 아르메니아였으며,  그가 선교를 하러 다닌 지역이 바로 게하르트 수도원이 위치한 코타이트 지방의 가르니와 고트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가 죽고나자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누군가가 (롱기누스의 창)을 게하르트 수도원에 기증하였으며, 그것이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분명,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은 하나일진데,  기독교의 중요한 성지 곳곳에 보관된 세개의 창이 모두 스스로가 진짜라 주장하고 있다.  세 개의 창이 모두 성스런 효험까지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가 입을 맞추고 기도를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중 하나가 진짜라면 나머지 둘은 분명 가짜다.

  아니,  어쩌면 내 생각처럼 세 개 모두가 다 가짜일 수도 있다.

   댄 브라운의 E-mail 주소만 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아마도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나 느낌이.......

 

  로마의 바티칸이, 아르메니아의 정교회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이상 나서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을 보면........  나서봐야 따져보아야 자신들에게 득이 될것이 하나도 없다는 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쯤되면 내가 '롱기누스의 창은 가짜다?' 라는 표현에서 의문 부호를 떼어낸다 해도 별반 문제될것은 없지 않겠는가?

 

  십게명에 '거짓말 절대 금지' 라는 항목이 없어서 인지 다 자기네 것이 진짜라 한다.

   인.샬.라.

 

 

 

 

 

 

 

 

 

 

 

 

 

 

 

 

 

 

 

 

 

  아자트 계곡의 초입까지 걸어서 나왔다.

  가히 절경이다.

  정말 아름답다.  두고두고 잊지못할 풍광들이 가득하다.

  하늘에선 여전히 굵은 빗방울만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사람을 태우고 수도원으로 가는 아주 낡은 승용차가 지나가기에 손짓으로 나갈것이라는 암시를 건넨다.

  아마도 생각에 아까 내가 타고 여기까지 들어온 같은 상황으로 여겨져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지나 방금 전의 그 택시가 달려와 거짓말처럼 내 앞에 멈춰 선다.

  4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오지마을 입구 정류장까지 1천드람(\2.600)에 합의라고 넙쭉 올라 탄다.

  버스 정류장이라고 할 수 없는 산골 마을 초입에서 20분을 기다려 마침내 에레반으로 돌아가는 구닥따리 마슈르카에 다시 올랐다.

  어.서.가.자.예.레.반.으.로.

 

 

 

 

 

 

 

      ------- 다음 편으로 이어서.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