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라는 용어를 알고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단히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연작씨리즈 미드인 과학수사대(CSI)와는 전혀다른 의미의 용어이다.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약칭 CIS).
우리말로는 (독립국가 연합) 이라고 부른다.
내가 이번 아르메니아 여행을 마치고 수도 에레반을 떠나오던날 시내 전역으로 전면 교통통제가 이루어졌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모든 통로는 열려저 있었으나, 외부에서 예레반의 도심으로 들어가는 모든 통로는 차단되었다. 남과 북으로 단 두개의 통로만이 열려져 있었다. 하여 대낮의 교통혼란은 거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사방으로 부터 무수한 군용트럭들이 수도 예레반의 한복판인 중앙광장으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하늘엔 군용 헬기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있었다. 흡사 영화에서 보던 혁명전야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하여 나는 서둘러 예레반을 떠나 조지아 트빌리시로 향했다.
내가 예레반을 떠나온 그 다음날인 2016년 9월 21일은 바로 (아르메니아 독립기념일)인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독립기념일 행사를 우리나라의 (국군의 날) 같은 분위기로 자축을 하는가보다.
아르메니아의 독립 2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다음날이었던 것이다. 군인들을 동원해 자축 페레이드라도 펼치려나 보다.
25년 전 9월 21일에 아르메니아는 독립을 했다.
지구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구)소련으로 대변되던 소비에트연방(USSR)으로 부터의 독립이었다.
그보다 먼저 9월 6일에 소비에트국가평의회는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투비아.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했었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 철의장막으로 불리며 서방으로 대변되던 미국에 대항하던 유일한 적대국이었던 군사대국 (소비예트연방)이 분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 시작된 분열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방의 붕괴를 직시한 (소비에트연방)의 핵심국가였던 러시아 마저도 여럿으로 나누어진 뒤의 국가의 안위를 자못 진지하게 생각할 때였다. 12월 8일에 같은 슬라브계 혈통을 가진 3국이 모여서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루로시 3국이 모여서 '독립국가 연합(CIS)'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소비에트연방의 실제적 주인이었던 러시아가 연방의 붕괴 앞에서 먼저 몸을 숙이고 일개 회원국으로 위상 격하를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연이어 각기다른 민족성을 가진 나라들이 스스로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해 12월 31일, 마침내 위대했던 (소비에트연방)은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져 소멸되었다.
소비에트연방으로 부터 독립한 나라의 수는 러시아를 포함하여 총 15개의 국가로 나뉘어 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몰도바·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공화국 등의 11개 국가에다, 약간의 사간이 걸려서 가장 늦게 가입한 조지아(그루지아)를 포함하여, 발트3국을 제외한 12개 나라가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다.
그후 투르크메니스탄은 2005년 탈퇴한 후로 준회원국으로 참가하고 있으며, 조지아는 2008년 러시아와의 전쟁을 치루면서 아무런 도음도 되어주지 못하는 연합체를 원망하며 탈퇴하였고, 우크라이나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정간섭이 노골화되면서 탈퇴허여, 현재는 가입국 9개국으로 연합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러시아지역에서 따뜻한 남쪽인 터키연안의 지중해로 가자면 거대한 산맥인 고카서스산맥(카프카스)이 웅장하게 가로막고 서있다.
그 험준한 코카서스산맥의 남쪽으로 터키와 인근해 있는 세나라가 바로 (코카서스3국)으로 불리는 조지아(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인 것이다.
코카서스산맥에는 4천미터를 훌쩍 넘기고 5천미터급에 육박하는 험준한 봉우리가 다섯이 있는데, 이중 넷이 조지아 북쪽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인 카즈베기 지역에 이웃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오랜 고대로 부터 이곳엔 길이 없었다. 아주아주 먼 길이 되겠지만 모두가 마다않고 당연시하며 그 먼길을 멀리 우회해서 오고갔다.
이곳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일부 유목민만이 말을 타고가다 끌고가다 하면서 뒤에 끌고온 조랑말에 내다 팔 물건과 사들인 물건을 싣고 게곡을 건너고 골짜기를 넘어서 겨우겨우 오가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이곳에 길을 낸 사람들이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의 군인들이었다.
해발 3천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여기 카즈베기의 구릉위로 길을 내면서 소비에트연방 소속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삽시간에 그들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을 점령했다. 매일매일 이 카즈베기의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서 연방의 군인들이 밀려내려왔다.
거의 수직벽으로 1천미터는 훌쩍 넘고 1천5백미터는 조금 못미칠것 같은 벼랑을 지그재그로 길을 뚫었다. 한번 미끄러지면 자동차든 사람이든 부스러기 하나도 찾기 힘들정도로 아찔한 절벽사이로 난 좁은 길로 무수한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제대로 된 가드레일도 전혀 없다. 스릴만점 상상초월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이 험준한 산악지방을 관통하는 도로를 내면서도 터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코카서스 인근에는 터널이 없다.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는 국경 직전에 딱 한번 터널을 만나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이 끝도없는 바위벼랑 옆으로 벽에 붙여서 길다란 터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차량 이동용 터널이 아니라 유사시 차량대피용 방공호였다. 이 험준한 지역에 전쟁물자를 가득싣고 힘들게 험겹게 올라가고 있는데 적의 공습이라도 받게되면 참으로 낭패가 아니겠는가. 하여서 도로 옆으로 길게 차량대피호를 만들어 놓았다.
더욱 더 놀라운것은 아르메니아의 유전지대에서 시작하여 조지아를 관통하여, 여기 이 험준한 산악지역의 도로옆으로 소비에트연방은 길고 길게 파이프라인을 설치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파이프라인으로 석유를 끌어갔다.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뽑아간 석유로 모스코바에 난방을 하고, 전 연방에 군용트럭들이 운행되었다. 또는 철저하게 계산하여 분배한 정책에 따라 공업지역으로 배분되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중요한 젖줄이었던 셈이다.
연방은 폴란드나 유고지역에 제철이나 자동차공장을 배분하여서 활성화 시켰으며, 생필품 같은 공장들은 철저하게 모스코바 인근에 배당하여 육성하였다. 그리고 이곳 코카서스3국에게는 철저하게 농업중심의 산업만을 영속시켰다. 가도가도 끝도없이 펼쳐진 평원에는 소나 양이나 말이나 돼지를 방목하게 하여서 고기와 우유와 치즈를 생산하게 했고, 거주지 인근의 들판은 개간하여 포도와 사과와 같은 과일을 주로 경작케 하였다. 약간의 산지에는 옥수수와 감자와 밀을 재배하게 했다. 하여 조지아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이 전 소비에트 연방의 와인 소비량의 80% 정도를 담당했으니 그 생산량이 실로 얼마나 컸다는 것을 알수있다. 그런가 하면 아르메니아에서 생산한 차(茶)가 전 소비에트연방 소비량의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카즈베기를 넘어오는 차량에 군대와 무기를 싣고 내려왔으며, 올라갈 때는 치즈와 와인과 차와 온갖 과일들을 싣고 올라가 전 연방의 인민들을 먹여 살렸다. 땅속으로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석유를 무한정 마구 끌어갔다.
프로레탈리아 혁명으로 이룩한 성스럽고 위대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이 겪은 20c 근현대사의 모든 아픔은 바로 이 통한의 군사도로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우리민요 속의 (아리랑 고개)가 생각이 났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주 잠시 무엇인가가 떠오르는지 할 말을 잊은 채 울컥해 하던 마슈르카(미니버스) 운전기사는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지금 달리고 있는 이 도로가 그렇게 모두 아픔인것만은 아니예요. 페레스트로이카도 바로 이 길을 통해 넘어왔거든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날리며 그는 맥없이 웃어보였다. 참으로 멋쩍으리만치 어색한 웃음이었다.
아! 페레스트로이카도 바로 이 길을 통해 이들에게 전해졌구나...........
페.레.스.트.로.이.카.
그것은 모스코바발 (평화의 봄) 소식이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나 모든것이 풍족하고 여유로운, 정녕 신에게 축복받은 땅. 코카서스.
하늘로부터 물의 축복과 포도나무의 축복과 인간으로서 최대의 축복인 장수와 평안의 축복까지 받은 선택되어진 대지가 바로 여기였다.
신들이 떠나면서도 마지막까지 이곳을 남겨놓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1931년 캅카스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고르비라고 불렀다.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2학년 때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비록 출신성분은 미약하였으나 남다른 성실함과 노력으로 어느정도 당내에서 지지기반도 다져놓은 소비에트연방이 주목하는 미래의 기대주였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우리의 농림수산부 장관급 정도)로 취임한 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실행에 옮기던 그는 뜻밖의 놀라운 경험을 하게되었다.
소련연방의 대단히 중요한 식량자원인 감자가 원인이었다. 늦봄까지 이어진 가뭄의 여파로 형편없이 떨어진 감자 생산량 때문이었다. 다가오는 긴겨울동안 연방의 모든 인민을 먹여살려야만 하는 중요 식량인 감자가 엄청나게 부족한 현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당장 서방으로부터의 감자 구입도 요원한 일이 아니었다. 전 소비에트연방이 긴 겨울동안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
젊고 유능했던 고르비는 즉시 사태파악에 들어갔다.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차를 직접 몰고 멀고 먼 연방의 끝자락에 위치한 감자생산지를 몇날이고 달리고 또 달려서 직접 찾아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감자생산을 담당하던 집단 농장의 농민은 '봄 가뭄이 좀 길게 심하기는 했지만 감자의 소출이 전년도에 비해서 그렇게 크게 감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출은 조금 줄었겠지만 오히려 생산된 감자의 품질은 어느해 보다도 썩 좋았단 말씀입니다. 저희 농장의 경우는 지난해와 별다른 차질이 없이 생산한 감자를 당으로 올려보냈습니다. 여기 보십시요. 여기 이렇게 증명서류가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르비는 그 농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 그가 직접 맛본 감자의 품질도 썩 우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 지역의 당기관이 있는 감자집산지로 차를 몰던 고르비는 함준한 산길에서 또 뜻밖의 놀라운 경험을 하게되었다.
비포장도로의 험준한 산악도로 위로 길게 늘어서서 감자수송차량들이 힘겹게 아주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화물트럭의 짐칸마다 판자를 덧대어 보강한 화물칸 위로 트럭마다 수북하게 감자가 쌓여 있었다. 아무런 덮개도 없이 그냥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그리고 상황은 거기서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노면에다가 급경사가 심한 산악도로의 모퉁이를 돌때마다 가득 싣고있던 감자가 그대로 노면위로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즉각 자동차를 멈춰서서 쏟아진 감자를 다시 주워 싣거나, 더 이상 쏟아지지 않게 보강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느 화물차나 마찬가지로 길게 늘어선 트럭마다 실었던 감자를 줄줄 흘렸고, 이를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뒤따라온 차량은 앞차량이 쏟아놓은 감자를 버젓이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실로 경악할 일이었다.
고르비는 즉시 트럭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고 그 이유를 따져물었다.
험악한 인상으로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듯한 태도의 운전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했다.
'이보슈. 나는 당으로 부터 이곳에서 저곳까지 하루 다섯번 감자를 운송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그 외에는 아무런 다른 지시가 없었소. 내가 하루에 다섯번의 운송을 마쳐야만 내게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며, 그래야만 나도 배급을 받고 집에돌아가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요. 내게 주어진 다섯번의 운송을 마치지 못하면 당이 내게 부여한 과업도 달성하지 못하게 도는 것이며, 식량 배급도 없고, 따라서 나와 내 가족이 굶게된다는 말씀이요. 아시겠소? 여기있는 운전기사들 모두가 나와 같은 입장이요. 화물차가 이렇게 노후되고 도로가 이모양 이꼴인데 하루 다섯번 오고가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인줄 아슈? 지금 이렇게 당신과 노닥거릴 시간도 없고, 감자가 떨어져서 다시 주워서 싣고, 가다가 떨어지면 또 주워서 싣고 하다보면 하루 두번이나 오갈 수 있으려나? 그러니 어쩌겠소? 우리는 당에서 내려준 과업대로 무조건 다섯번을 채울 수 밖에. 당신이 가서 직접 확인해 보슈? 이 감자를 납품받는 곳에서도 드나드는 차량의 횟수만 체크할 뿐이지 싣고 오는 감자의 량에는 관심들이 없소. 그게 우리가 부딱뜨린 현실이란 말이요. 아시겠소? 바쁘니 어서 길이나 비키시요.'
성난 표정으로 고래고래 악을 쓰듯이 일갈을 늘어놓고는 다시 감자가 뚝 뚝 떨어지는 화물트럭을 몰고 저만치 사라져갔다.
고르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프로레타리아가 주체가 되어 이룩한 위대한 사회주의혁명 과업은 결단코 이런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역당사가 있는 감자집산지에서도 또 놀라운 경험을 하게된 것이다.
일례로, 산지에서는 분명 감자 1천톤을 생산하여 화물트럭 100대에 실어 납품을 완료하였다. 서류가 이를 증명했다.
100대의 화물트럭이 정상적으로 납품을확인한 증명서류 또한 틀림없었다. 그렇데 감자 재고량은 600톤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누가 중간에서 빼돌린 것이 아니었다. 자연 누수된 뒤의 재고량이 600톤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농장에서 비를 맞으며 작업을 하였는지 상당부분의 감자가 심하게 부페 내지는 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상한 감자의 선별작업을 지시하지도 이행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다음 작업의 단계인 마대자루에 삽으로 퍼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앞의 트럭기사들과 별반 다를것이 없었다. 이렇게 부패된 감자들이 섞인 마대가 기차에 실려 모스코바나 다른 여러 연방으로 운송되어 간다. 인민에게 최종 배급이 되기까지는 열흘이던 스므날이던 여러날이 소요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긴 기간동안에 마대자루 안에서 감자는 점점 부패가 진행되어갈 것이다. 종국에는 반자루의 감자가 살아남으려나? 아님 모두 썩어 문드러지지 말란 법도 없어 보였다.
'이건 아니다.'
'이건 프로레타리아혁명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이상국가 건설이 결단코 아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함 속에서 공동생산하고, 엄격한 체계속에서 공동분배하여 지상최고의 복지를 꿈꾸는 이상향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제도의 종국에는 참혹한 결과가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이 프로레타리아 혁명의 결과였다면......... 이것은 무엇인가가 커도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이런 사회주의 체제로는 안된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대 변혁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고르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중국으로 부터 (수정자본주의)라는 비난까지 받아가며 이룩한 (위대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허상이 사정없이 페부속을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자신이 줄곧 믿고 따랐던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고르비는 이 놀라운 참상과 절망적 경험을 자신의 깊고깊은 가슴속에 꼭 꼭 숨겨 놓아야만 했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이 자신이 느낀것과 같은 생각을 피력하다가 형장으로 끌려가 참혹하게 총살되었던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때문이다.
교육자. 학자.과학자.인권운동가. 사회사상가 등의 많은 지식인들이 당으로 부터 숙청내지는 처형을 받아왔다.
고르비로서도 아직은 더 참아야만 했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하였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점점 확고하게 굳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사망하자 당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본명은 고르바초프였다.
당서기장에 오른 뒤, 고르바초프는 그동안 자신의 가슴속에만 꽁 꽁 숨겨두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과감하게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 일대 대 변혁과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바로 그 페레스트로이카가 여기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에도 평화의 봄과 함께 자유와 평등의 꽃씨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이번 여행은 주로 이런 관점에서 출발했다.
하여, 이번 여행기는 좀 지루하지 싶을만큼 길고 조금은 난해한듯 어려운 기록을 써 내려가야만 할것 같다.
그동안의 좋은 여행지를 선택하여 여행하면서 느낀점들과 놀라운 풍광들과 다음에 그곳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유익하다싶은 이야기를 나열하는 여행기였다면, 이번 여행기는 역사학적이나 지리학적인 그리고 정치사회학적인 나의 시각과 견해를 반영하는 애야기들이 첨부되는 그런 진행이 될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동안의 순수 배낭여행이 가지는 여행의 묘미가 우선이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다시 꺼낼 이야기지만....... 갈라타이 브릿지 옆에서 입출항하는 배들의 허가를 담당하던 어떤 터키공무원이 대단히 반갑게 환대를 해주셔서 차를 마시며 한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눈 뜻깊은 시간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주 인상적인 터키민족의 고해성사쯤 되는 이야기를 건네왔었다.
'동북아시아의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역사적으로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은 본인은 잘 알고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늘날의 이 순간까지도 쉽게 풀어내거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와도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우리 터키에도 있다. 당신이 이미 여행하고 온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거기에 아제르바이젠까지를 보태서 우리와 인접한 세나라와 터키의 관계역시 오랜 고대사로부터 시작해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점에 있어선 한국과 터키가 상당히 닮아있다고 본다..........'
그동안의 많은 여행에서 나는 이렇듯 심도있게 자신이 살고있는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지나온 역사로부터 시작해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30여분 남짓의 만남에서 정말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도 역시 그랬는지 접근제한구역으로 설정되어있고 무장한 경찰이 지키고 있는 건물의 안쪽 휴계실로 나를 데리고 가서 따뜻하고 진한 홍차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자기 직원들을 하나씩 죄다 불러내면서 나에게 인사까지 시켜주었다. 더군다나 그는 나에게....... 짧은 터키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정말로 훌륭한 투어를 하나 소개하면서 권해줬다. 나는 그의 추천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 마지막 투어는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긋바이 나의 한국인 친구. 아무때고 당신이 다시 터키를 찾게되고.... 신의 뜻이 있어서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겠네.' 하면서 그는 자신의 불끈 쥔 오른손을 가슴왼쪽의 심장에 갖다 대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중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습은 여행기 후반에 공개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의 짧은 만남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극동에 위치한 3국, 한국 중국 일본은 아주오랜 고대사에서 부터 시작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서로 창칼을 겨누던 숙적의 사간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어쩌면 오늘의 현실처럼 아주 잠간씩 우방인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 세나라가 잘 합심한다고 해서 모든것이 순조롭게 해결될 문제만도 아니다. 이 세나라간의 문제는 당사국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여기에 추가하여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강대국의 입김 또한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기 대문이다. 이 다섯나라가 조금씩은 제각각의 다른 시각과 다른 원하는 바를 가지고 밀당을 하고 있기에 북한 문제가 저렇게 마냥 뜬구름 잡기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코카서스산맥 자락에 놓인 3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의 경우도 대단히 닮았다. 역사적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로 숱하게 전쟁을 겪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들로 서로 얽혀있다. 이들 또한 3개국이 자생적으로 국가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느냐? 아니다.
아래로는 터키, 북으로는 러시아가 버티고 서서 자기들의 필요와 이익에 따라 세나라의 관계들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때문이다.
하여서 부득불 이번 여행기의 서문에 길게 소비에트연방(USSR)의 성립과 소멸을 다룬 이유였다. 그 이후 등장한 러시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등 새롭게 등장한 국가들의 복잡한 문제들이 바로 이 독립국가연합(CIS)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기에 부득이 하였다.
다음으로는 터키의 역사와 정녕 터키인들은 누구인지도 알아볼 것이다.
이어지는 여행기 터키편에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한국전쟁에 UN군 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여 피를 흘린 그들은 진정 평화의 사도인가?
영원한 형제의 나라 터키..........
지금 이 순간에....... 동북아 국제사회 대부분의 문제에서 취하는 오묘하고도 속을 알 수 없는 중국의 태도와 이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바로 그 시선으로 서방여러나라의 무수한 시선들이...... 국제사회속에서 터키문제를 대하는 한국인의 입장과 처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정작 한국인은 모른다. 몰라도 너무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중국의 태도는 모호하고 신뢰할 수없고 얄밉기까지 하다고 서슴없이 말하면서도,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역사란 참으로 재미있는 분야이다.
그리고 역사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인 것이다. 좋은 일에든 나쁜 일에든.
역사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고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세상일 것이다.
----- 2016년 가을. 코카서스 여행을 시작하면서.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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