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많은 사람들이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만든이가 누구인가?
나라가 살만하고 세상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있는데도 헛된 망상으로 싸움터에 스스로 뛰어들 사람들이 있겠는가?
어느 하늘이 있어서 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겠는가?
온화한 표정으로 말만 그럴싸하게 번지르르 내뱉는 조정과 관리들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그런 세상에 대해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선 자들을 향해 역도라 내몬다면, 그 역도들을 막아선 사람들에 대해선 또 무엇이라 불러야만 좋겠는가? 과연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인가?
어차피 찰라같은 인생은 선택이요 모험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택했다.
역도의 길을 걷기로 작정을 하고 아주 멀고도 먼 길을 떠났다.
가난한 농민 출신 문인학자의 아들에서 출발하여 초등학교 교사로 잠시 재직하기도 했으나 눈 앞에 드러난 현실에 대하여 더 큰 포부를 가지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다. 프랑스 선박회사 주방보조로 배에 오른 그는 프랑스 영국 미국 아프리카를 두루 돌아다니며 드넓은 세상에 대한 식견을 넓혀갔다. 그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정원사 잡부 웨이터 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식민시대 강대국의 지배하에서 정치범의 석방, 집회 결사의 자유 등 베트남 인민의 자결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이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마침내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했다.
바로 베트남 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호치민(1890~1969) 이다.
유달리 소탈하고 청빈한 생활을 했던 탓에 인류역사의 뭇 다른 혁명가들과는 전혀 다른 친근한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 가슴속에 남아있다.
세계적으로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혁명가 지도자에서 베트남의 영웅, 베트남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그가 현재에는 '호 아저씨(Bac Ho)' 로 불리며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었다.
그가 사랑한 베트남.
좀 더 나은 삶을 함께 영위하고 싶었던 그가 사랑한 베트남의 민중들.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냥 베트남 산하 어디에든 흩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그를 부모처럼 추앙하는 민중들은 그를 호치민의 거대한 궁정에 안치시켜놓고 영원히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겠노라고 가슴속으로 거듭 거듭 맹세를 하고있다.
한반도의 3.5배나 되는 국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졌음에도 아직 아시아의 빈국 대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베트남.
대한민국과의 지난시절의 아픈 상처와 기억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깡마르고 왜소한 그네들에게 있어 유난히 크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아주 인상적이다.
영어라는 장벽 앞에서는 손사래를 치며 서너걸음씩 뒤로 물러서기도 하지만, 유난히 친절하고 미소가 해맑은 사람들.
한국의 출퇴근길 분위기와는 너무도 다른 평범하다 못해 지극히 일상적인 그들의 생활모습들.
알.럽.베.트.남.
호 아저씨(호치민)의 바램과 헌신이 베트남의 앞날에 커다란 기쁨과 영광으로 영원하기를.............
헨 갑 라이............
후에의 흐엉강변에 위치한 한 작은 초등학교 새벽 등교시간의 모습을 촬영해 보았다.
아래쪽은 다낭의 유치원 모습이다.
세상 어디를 가나 밝은 미소로 뛰어노는 아이들 보다 더 예쁜 모습은 지상 어디에도 없다.
어떤 신(神)의 모습과 표정 보다도 고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국가 간의 문제, 종교 간의 문제........ 신도 국가도 법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 수많은 난제들...........
해답은 저기 이세상의 어린이들이 태어나서 처음 대하고 배우는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 모든 답이 들어있다.
에덴 동산이나 파라다이스나 무릉도원은 아닐지라도, 사람가 사람이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같이 웃고 같이 울고 서로를 위로하고 감싸며 살아가는 신통한 해답이 거기에 이미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아집과 교만에 빠져 세상을 점점 미궁과 혼탁의 세꼐로 빠트리고 있는 우리 기성세대는 저 눈망울 초롱초롱한 아이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깊이 반성해야만 한다.
'어린이가 바로 세상의 스승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우리 한국사람들 만큼이나 축구를 사랑한다.
어떻게 보면 광란으로 보일정도로 우리보다 더 열정적이다.
공원과 공터에서 축구에 한참인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축구장 스타디움도 보기는 했지만 정식 경기를 관람하지는 못하였다.
그네들의 열광하는 모습과 표정들을 보고 싶었는데......
대신, 열정으로 똘똘뭉친 베트남사람들의 길거리 표정을 아주 많이 보았다.
활기, 침통, 좌절, 분노, 환희가 모두 담겨있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그런 길거리 풍경이었다.
그것은 바로 (장기)였다.
공원이던 길거리 좌판이던, 차를 마시며 장기를 전문으로 두는 우리네 기원 같은 곳이던, 장기판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로 붐볐고 고성과 함성이 들끓고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표정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후에나 다낭 나짱을 여행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장기판을 수시로 기웃거려보았다.
우리네 장기와 방법은 같았다. 써 있는 글씨와 나무토막을 잘라 매직으로 글씨를 쓴 조악해 보이는 장비들은 좀 달라보였지만 말이다.
장기를 두는 사람은 똑같이 둘인데, 훈수를 두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북적거린다.
훈수로 활로를 찾아 표정이 밝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훈수로 다 이긴 장기를 버렸다고 고성을 내지르는 사람도 있다. 순간 처럼 분위기가 살벌하기도 하지만, 이내 또 그런 그런 상황들은 또다시 이어져 나간다.
낯선 이방인인 내가 그 모습들이 신기하여 카메라를 들이대어도 그냥 무시하듯 환하게 웃어주는 사람들. 나보고 둘 줄 아느냐고 베트남 말로 물어오는 사람들. 어디서 왔냐기에 (꿔 한. 한국인) 이라고 답하자 다짜고짜 악수를 청해오는 사람.
여기서 구경을 하다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구경하다보니, 먼저번 장기가 끝이 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몰려오는데, 잠시전에 그곳에서 보았었다고 그새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 참으로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건, 할일 없어서 죽치고 앉아 장기나 두는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저들에겐 장기가 무엇이길래...........
마을 골목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가로막아선 강물에 빨래를 하는 부부가 보였다.
익숙하게 비누질하는 남자를 보자니 하루이틀 숙련된 솜씨가 아니다. 혹시 이들은 첫 만남도 여기 빨래터가 아니었을까?
강건너의 후에 황궁의 구도시에 예전에 살았던 고위관리의 가족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강건너에 둥지를 틀고 그 황궁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들을 가만히 보자면, 예나 지금이나 황궁이나 도심에서 빗겨나 먼발치로나마 번창해가는 신도시와 사람들을 보면서 또 자신들의 새로운 꿈을 가꾸어나가고 있지 않을까.
해가 저만치 떠오르고 한낮같은 뜨거운 열기가 찾아들었을 때쯤에서야 아침 산책을 마치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마도 황궁의 남동쪽 모서리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 제법 먼거리를 새벽나절에 둘러본것이다.
돌아오다 보니 길가에 늘어선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새로 집을 지으려 기초공사를 하는 곳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일을 서두르고 있는 우두머리인 듯 싶은 사람에게 다가가 평소 건축이리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여기 일하는 것을 구경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그 사내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ㅎㅎ...... 한 때 자신이 한국의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경험도 쌓고 돈도 벌어와서 지금 이런일을 한다면서, '이런 조잡하고 쬐끄만 현장에서 뭘 볼게 있느냐'고 반문해왔다. 그래서 그냥 여기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자, 길을 열어주면서 동료들 소개까지 해 주는것이 아닌가.
지금의 우리네 건축현장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아주아주......... 먼 엣날의 추억까지 떠올리게 하는 현장의 모습들........
저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나름으로 집을 지으면서 살아가는구나.........
아득할 것만 같으면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 속의 우리들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다.
환경은 구시대적이었어도 열심히 일하는 그들의 모습을 한동안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래쪽으로는 좀 현대식인 다낭에서의 체육관 건설 현장의 모습 사진들.
그들도 친절했고, 감리로 나온 사람은 한국말로 내게 인사를 건네오기까지 했다. 아마도 한국에 건설분야 산업연수라도 다녀온 사람이 아닐가 싶었다. 카메라를 향해 웃므며 손을 흔들어 주던 힘든 산업현장의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공사장 바로 옆으로 과일을 팔러 새벽부터 나온 아주머니랑........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제각각 나름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현지인들으리 모습들........
평온하고 소박한 사람들.......
에펠 브릿지 옆 찐꽁선 공원에서 만난 새벽 산책을 나온 여행자들...........
호텔로 돌아오는 여행자 거리의 각 여행사마다 어느새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나려는 여행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내게도 같은 현실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호텔로 돌아갔다.
늦은 호텔조식을 먹고 무작정 풀장으로 달려가 여독을 풀겸 잠시 물놀이를 하고는 룸에 올라가 잠시 드러누워 쉬었다.
짐 정리를 해서 배낭을 둘러메고 11시 30분에 호텔 체크아웃을 한다. 가가운곳에 위치한 여행사로 가서 다낭행 버스 에약을 확인하고는, 어제 스스로 다짐했던 바 대로 맛이 기가막히던 음식점을 다시 찾아가 색다른 음식을 맛보았는데 역시 좋았다.
오후 1시10분 다낭행 버스가 후에 여행자거리를 출발했다.
굿.바.이. 후.에.언.젠.간.꼭.다.시.올.께.
버스는 다낭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떠나는 날이어서였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화창한 맑게 개인 날씨였다.
후에를 가로질러 흐르던 흐엉강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랑꼬해변 근처에서 바다와 합류한다. 그러니까 후에 방향에서 하이번 고개가 시작되는 지점쯤이라 하겠다.
하이번 고개를 앞두고 버스가 휴계소에 들렸다. 휴계소라야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계소와는 천당과 지옥 차이만큼이나 다른, 아주 아주 허름한 시골 길옆에 놓인 가판대 노점쯤이라 할까? 암튼 화장실 다녀오라고 휴계소에서 20분을 정차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에어컨이 돌고있는 차 안에서 쉬고 있는데, 20분이라는 시간을 그냥 허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카메라를 꺼내들고 버스 밖으로 나섰는데.......... 헉. 한낮의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나선김에 고속도로 이면의 마을 뒷쪽을 구경하려는데......... 풍경이 장난이 아니다. 절로 눈이 크게 떠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있는 것이 아닌가? 드넓은 호수처럼 강을 폭이 넓어진 흐엉강의 하류 풍경을 향해 연실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목격하게되는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좀체로 보기드문 놀라운 현장.
고속도로변에서 고장난 차량을 수리하러 연장통 하나만을 들고 출장 온 기사, 그 트럭을 수리하기도 전에 더 급하게 화급을 다투는 또다른 고장난 소형트럭....... 그 트럭을 수리하려는 베트남 기사의 열정과 노력의 모습.......,..
마침내 다시 다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사 버스는 여행자거리에서 약 2km쯤 떨어진 해변가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배낭을 둘러메자 마자 내 몸속에 내재해 있는 내비게이션은 현재 나의 위치와 다낭의 지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지도를 꺼내 펼치지도, 누구에게 길을 묻지도 않고 다낭의 여행자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드래곤 브릿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첫날 쉬었다가 간 하일랜드 커피숖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여행 마지막날의 오붓한 시간을 다낭 여행자거리에서 보냈다.
이것저것 맛난것 찾아 막어도 보고, 그 유명한 한시장을 구경하면서 쇼핑도 좀 하고........
한강의 밤풍경과 베트남사람들의 밤문화도 들여다 보면서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밤 10시가 넘어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다낭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놀랬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작은 공항을 빼곡하니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더 놀라기는......... 그들중의 상당수가 한국인들이라는 사실에..........
나는 새벽 1시 20분 비행기였는데........ 1시 출발 대한항공편이 딜레이가 되었다는데.........
12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부산행 1편을 포함해 인천을 향하는 한국행 비행기가 무려 5대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
다들 어디서 무얼 하다 오시는 분들이지?
왜 내 여행지엔 한국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것일까?
내가 재미없는 곳만 다녀온것일까?
미티미티.
아무튼 그렇게 나는 7박9일의 베트남 중부와 중남부 여행을 마쳐가고 있었다.
인천 - 다낭간 왕복항공료 \248.000 에 티켓팅을 했고, 여행 경비로 충주 농협중앙회에서 우대금리로 700$을 환전하였으며,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337$가 아직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게 나의 이번 여행 총경비 지출내역이었다.
- (알 럽 베트남) 혀행기를 마치면서 그동안 관심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부터는 (알 럽 트래블 씨리즈. *** 편) 이라는 제목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뵙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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