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표기는 (My Son) 이다.
각종 홍보물에는 (미썬)이라는 표현이 가장 많으며, (미선) (미손) 이라는 표기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번 투어에서 몇몇의 가이드를 만나보고 현지인들의 발음을 유심하게 관찰한 결과로는 분명 (마이 쏜)이 맞다.
(마이 쏜)이 참파왕국이 남긴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분명한 이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쉬운 이해를 위해 (미썬)이라 하겠다.
(참파왕조)는 2세기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18세기까지 국가의 명맥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왕조국가였다. 그 중에서도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참파왕조의 위세는 막강하여 동남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세력을 떨쳤다. 9백년의 기간동안 번영을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참파왕국은 1471년 베트남족인 레왕조에게 정복당해 역사의 전면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다가 1832년 완전 멸망하였고, 극소수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베트남 남부와 캄보디아 일대에 흩어져 살며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수니파에 속해있다.
여기의 (미썬) 유적은 참파왕조의 수도가 아니라 성지(聖地), 성역(聖域)으로 신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며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였다. 그들은 힌두교의 신 중에서 창조와 파괴의 신으로 불리는 (시바신)을 모셨다.
백과사전을 펼치면 세계 3대 불교유적지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르 사원). 미얀마의 (바간 불교유적군)을 꼽는다. 그런데 실은 이 3대 불교유적군들이 모두 본래는 힌두사원이었다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모두 다 여기 이 참파왕국의 영향권에 있을때 세워진 힌두교 건축물들 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이곳 (미썬) 유적군의 힌두사원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그러다가 참파왕국이 세력을 잃으면서 각 지역에 들어선 불교를 믿는 민족들이 힌두사원의 상당부분을 파괴하고 그 위에 불교양식을 더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이제는 어엿하게 불교사원으로 대접들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번 미썬 유적 투어에서 나는 상당히 열정적인 가이드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융) 이었다.
그는 (자랑스러운 베트남)을 매 순간순간 상당히 강조했다.
그는 (위대한 참파왕국의 역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그 옛날의 영화가 미래의 베트남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다른 이면엔 오로지 한 가지 (American Bomb).
베트남이 겪고있는 모든 아픔과 상처 뒤에는 그넘의 어메리칸 뽐브가 있었다고 핏발을 올리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열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나는 '비로소 참파왕조가 베트남 역사에, 베트남인들 가슴속에 받아들여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아픈역사인 것이다.
그와 비슷한 역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서로 닮았다.
평소 여행사들의 투어상품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타입이라 이번 (미썬 투어)를 선택함에도 적지않게 고심을 했더랬다.
그런데 미썬 유적군을 직접 챙겨서 다녀오기에는 몇 가지 사전 해결할 문제와 상당한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하여 호텔에서 여행사의 투어를 신청했고 요금은 $10 이었다. 되돌아 오는길에 보트투어에다 전통공예마을 방문과 점심을 추가하여 $3 를 추가 지불한것이 전부였다.
결과적으로 (미썬 투어)에 여행사 상품을 선택한 것은 썩 잘한 선택이었고, 함께 했던 여행객들도 좋았고, 뜨거운 심장을 가진 열정의 사나이 융을 가이드로 만난것은 더엾는 행운이자 영광 이었다.
참으로 멋진 투어 였다. 감동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8시 5분 전. 호텔 후런트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단박에 그가 나를 데려갈 가이드라는 것을 알아챘다. 융 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나..........
투어 버스에 오르니 운전기사랑 가이드 융과 달랑 나 하나뿐이 아닌가. 내가 픽업 1번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여행자 거리의 이골목저골목을 40여분 동안 돌아다니며 예약된 여행객들을 하나 둘씩 태우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거기다 더 기가찬 것은 맨 마지막으로 태운 여행자가 바로 내가 묵는 호텔 건너편의 호텔에서 마지막 승차를 하는것이 아닌가. 내가 여기서 8시 35분에 서 있었어도 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이런 거랑말코 같은 경우가 있나..........
(미썬 투어) 신청자는 총 38명. 영국남자애와 사귀는 일본 여자애 1명. 중국인 6명. 나머지는 온통 허연나라들.......... 그중에 70% 가까이가 모두 여자. 오~~~~~ 메~~~~~~~~ 나.
가이드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프로그램 설명에 앞서 몇사람을 지명하며 소개와 베트남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당연히 끝부분에 내게도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피안재 인데 소감이고 뭐고 먼저 가이드에게 따질게 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냐? 왜 내가 픽업 넘버 1 이었냐? 마지막 여행객이 바로 나와 같은 장소에서 탈 것 같았으면 나도 맨 마지막에 태웠어야 하는것 아니냐? 그럼........ 투어 끝나면 역순으로 다시 나만 1번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는 말이냐?'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융이 다가왔다.
'쏘리. 쏘리. 당신을 1번으로 태운것은 예약자 명단에서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째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성실하고 근면하다고 알고 있기에 당신의 시간관념이 가장 정확할 것 같아 먼저 선택했다. 그리고 귀소하는 길은 아침같은 실수 없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할 터이니 걱정 말아라. 약속한다. 나를 믿어라.'
이거야 원.
나 원 참.
한국인이 근면 성실해서 나를 1번으로 픽업했다는데....... 이게 칭찬이면 칭찬이지 욕은 아닐 터........ 더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런데 이런 상황은 모두가 가이드인 융이 따른 속셈으로 저지른 것이었다. 승객들의 상태를 간을 본 것이었다. 영어 테스트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미썬 투어)의 전 과정은 오로지 잉글리쉬 하나로 진행되었다. 시작에서 끝가지 오로지 잉글리쉬 하나였다.
세상에나........ 내 팔자에 100% 영어로만 진행하는 1일 투어를 다 하다니........
야가 나에게 억지로 영어를 시키더니만 그정도면 끌고다녀도 됐겠다 싶었나 보다.
헐.
또 헐.
그런데 그날...... 난 무사히 투어를 마쳤다. 퍼펙트 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너무너무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가이드의 이야기 거의 다 알아 들었고, 베트남의 역사와 참파왕국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다.
그럼 이 대목에서 내 친구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해.......... '내가 영어를 썩 잘하느냐?'
노우. 절대 아님.
중등학교 수준 콩글리시.
그런데 여행중에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비지니스를 할 정도는 못되지만, 어느정도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는 여행가 쯤으로 보아준다.
70년대에 영어를 배웠다. 어디 배웠나? 외웠지. 흔히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의 산물이 우리또래들 아닌가?
' 하이 오바바 하우 두 유 두 하아 유 아이엠 파인 쌩큐 앤드 유 해브 어 나이스 타임 씨 유 어게인......... 뭐 그런 정도.......
무조건 외웠던 어쨌든 열심히 공부 하기는 했다.
외국인을 만나면 뻔히 쳐다보면서 무조건 좀 천천히 다시 한번 이야기 해달라고 손짓 발짓을 했다. 뭐 그러다 보면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 듣기는 했다. 그런데 말이 안나왔다. 알아 들었는데 대답을 할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단어와 숙어를 먼저 떠올리고 다음으로 이게 문법에 맞추려면 어떻게 나열해야 하는지를........ 사람 면전에 놓고 머릿속으로 지금 수학 방정식이 아닌 영어 이차함수를 열심히 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내가 속칭 학교라는데서 배운 영어의 모든것이었다.
고 1때 비틀즈와 존 덴버에 반해서 그만 (pop song)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정말 황홀한 별천지였다. 빠져도 단단히 빠졌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고 3이 되었을 때, 꽤나 두꺼운 팝스타 사전과 팝스 백과사전을 싸그리 외웠다. 정말 퍼펙트 하게 외었다. 담임선생님과 우리 아버지 말씀이 그때 그 머리로 교과서를 외웠으며 서울대를 갔거나 고시를 패스했을 거라고들 했다. 거기에 더해 이번엔 영화광이 되어 있었다. 남들 예비고사 준비할 때, 나는 영화의 명대사와 멋지게 번역된 팝송의 가사들을 외웠다.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에요.'
앨튼 존이 말하는 '미안하다는 말은 정말로 너무나 힘들어요.'
로버트 레드포드가 콘돌에서 말하는 '당신의 눈이 보는 세상은 겨울이 아니에요. 가을도 아니고요. 겨울과 가을의 딱 중간. 당신은 딱 중간인 그곳을 보고 있지요. 내게도 그곳이 보이네요.'
영화는 멋진 표현들로 처음부터 만들어 졌고, 노래는 우리 노래도 그런것 처럼 은유적이고 비유적이고, 문법과는 상관 없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 초보 영어지만 중간중간에 그런 표현들이 내 입에서 나오니 남들은 내가 아주아주 고급영어를 구사하는 줄 안다.
그런 결과들로 대학에 꼴인해서는 군대갈 때까지 팝송으로 용돈벌이를 짭짤하게 했다. 철없던 날라리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30년.........
영어를 절대 쓸 일이 없는 세상을 살아왔는데 이적 영어가 내게 살아남아있을리 만무했다.
영어를 생각하면 새하얀 백지상태.
그런데 여행을 다닐려니 다시 필요해지는 걸 어떻게 해.
영어회화책을 사서 펼쳐드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고...... 어디서 보긴 본것 같은데 생각이 안나고...... 다시 외워보려니 이젠 기억세포들이 연식이 좀 되어선지 엣날의 그 머리가 아니고.......
포켓북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궁하면 통한다 했나?
허연 사람들 마주치고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생겨나니깐......... 까맣게 잃어버렸던 단어들이 톡 톡 되살아나왔다.
그리고는...... 문법이 어디있어? 숙어가 어디 있어?
하고픈 요점의 단어만 떠올리면...... 짧게 짧게 단락 단락으로 나누어서 단답형으로 내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니까 아뭏튼 그네들이 다 알아들었다. 그게 반복이 되고........ 어설프지만 필요한만큼은 해결해 나간다.
허구헌날 디스카운트만 외치냐?
아니다. 길이나 주소도 찾고 맛난집도 물어보고 조크도 좀 하고, 흥정이나 딜도 하고....... 따지고 싸우기도 한다.
이번 에피소드의 후반에는 최대의 위기로 베트남의 경찰과 대판 싸우기도 했다. 물론 영어로........ ㅎㅎ
딱 그정도다.
세계 각지의 유명한 문화재들을 살피다보면,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야 어느정도 남았지만 거의 원형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문화재들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유적의 터나 기둥 몇개만 남아있는 유적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또한 동남아를 비롯하여 이집트나 그리스의 경우를 보면 목이 잘려나간 조각상들이 너무도 흔하게 산재해 있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가장 잔혹한 파괴자는 칭기스칸 이었다.
그는 한곳에 터전을 잡고 흔히 말하는 문명의 꽃이 피는것을 저주했다. 세상은 그저 드넓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뺏앗고 빼앗기며 처절하게 생존해 나가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싸워서 쟁취한 곳의 모든 성벽과 문화재들과 유물들을 주춧돌 하나까지 제자리에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신전의 파괴 그리고 석상의 목자르기.
문명과 문명이 격돌하면 반듯이 처참한 파괴가 뒤따랐다. 거기에는 종교와 종교 민족과 민족의 충돌에도 비슷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하지만 개중에는 이슬람의 살라딘 술탄처럼 파괴가 아니라 타민족 타종교 타문화에 대해서도 경외심을 갖고 보존에 힘쓴 의외의 사레도 있다. 살라딘이 칭기스칸의 단 몇%만 닮았었도 오늘날의 이스라엘이나 이스탄불의 그 화려하고 고귀한 유적들은 단 하나도 남아서 우리에게 감동을 전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미썬) 유적지의 경우 베트남 전쟁당시 미국의 폭탄투하로 상당부분이 잿더미로 변한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 아주 오래전에 참파왕국을 물리치고 베트남 전역을 되찾은 베트남인들에 의해 불상의 목이 잘려나가고 힌두사원으로서의 의미가 퇴색할 수 있을만치 상당부분이 파괴된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참족과 베트남족. 참파왕국과 베트남의 여러왕조들. 힌두교 왕국과 불교 왕국. 이들은 서로에게 이민족이자 이교도였던 것이다.
그러던것이 이번에 느낀것 처럼 이제는 자연스레 참파왕국의 역사가 베트남의 역사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는 것을 느낀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에도 최고의 역사적 암초는 바로 (발해)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강력하게 주장하기 이전까지는 발해는 우리역사에 넣어도 되고 안넣어도 되는 그저그런 어정쩡한 상태였다. 지금엔 당연히 우리역사의 일부분인것이 너무도 자명하지만.
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있어서 발해는 애초부터 중국의 일부였고 이제는 고구려까지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이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보면 참파왕조의 역사는 참 골칫덩어리 였다. 걷어내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였다. 그런데 이제는 찬란했던 영광을 간직한 그네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의 역사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참파왕국을 건설한 참족은 베트남의 전통적인 토착민족이 아니다.
참족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온 이민족이었던 것이다. 한자를 사용하고 유교와 불교를 믿었던 토착민족인 다이비엣(베트남족)과는 너무도 다른 이민족이었다. 남쪽의 바닷가에 터전을 잡은 참족은 배를 만드는 기술과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해상교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짱(나트랑)을 수도로 삼아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참족은 다이비엣(토착민족)을 몰아내고 세력권을 중부의 후에(훼). 다낭에서 남부의 무이네에 이르는 베트남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면서 최초의 통일국가이자 마지막 봉건국가라 할수 있는 참파왕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곳 (미썬)을 힌두교의 시바신을 모시는 신성한 성역으로 가꾸었던 것이다.
참파왕국은 캄보디아의 프놈펜과 앙코르와트지역, 미얀마의 양곤과 바간지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자바섬 지역까지를 그들의 세력권 안에 두기에 이르르며 번영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접국가였던 크메르제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점차 세력을 잃어갔고, 마침내는 영토회복을 노리는 베트남 본래의 토착민족이었던 다이비엣((베트남인)인 레 왕조의 레탄똥 황제에 의해 정복당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실로 900년만에 이민족을 몰아내고 영토와 종교와 백성을 되찾았던 것이다. 변방으로 쫓겨났다가 이제야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런 새대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을 인식해 볼 때, 당연히 다음으로 살륙과 약탈과 파괴가 자연스럽게 뒤따르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식민시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하고 있는가? 그런 처지에서 베트남민족의 땅과 역사를 900년이나 차지하고 호령하던 참족을 몰아내고 마침내 베트남을 회복하였다고 친다면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랬는데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가 오랑캐를 대하였듯이, 별반 다를것이 없는 참족들이 이룩했던 참파왕국의 역사를 이제는 고스란히 자신들 베트남의 역사로 재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보이며 그것이 역사인 것이다.
신전의 제단과 건물의 기둥과 주춧돌은 멀리 보이는 산에서 직접 돌을 캐서 날라와 가공을 했단다. 그 바위벼랑이 실제 멀리 보인다.
그 외의 모든 건물은 모두 붉은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
노우 시멘트. 노우 몰타르. 노우 워터.
그 어떤것도 사용치 않고 오로지 잘 다듬은것 처럼 일정하게 만들어진 붉은 벽돌을 그냥 손으로 정교하게 쌓아올려 이 아름답고 웅장한 유적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위대한 수수께끼라고 했다. 어떤 과학으로도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단다.
복구를 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그 옛날의 방법으로는 아무리 애를써도 되어지지를 않는 참 오묘한 미스테리라고 했다.
그런 융의 열정은 아마도 이런 역사와 문화에서 파생되는 자긍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조국 베트남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느껴지던 이 정열적인 사내 융은 '자신은 참 행운아다' 그리고 '오늘은 자신에게 있어서 참으로 특별한 날이다' 라고 유적을 돌아보는 중간에 말을 꺼냈다.
그가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 하는 융의 할아버지는 월맹해방전선(베트콩)의 장교였다. 우리네의 중령에 해당하는 고위급 장교였다. 바로 이곳 미썬유적을 근거지로 삼아 호이안과 멀리 다낭지역까지를 암암리에 모색하던 부대의 책임자였단다.
그리고 그날.
2시간 이상에 걸쳐 수천발의 폭탄이 베트콩의 핵심 근거지였던 미썬유적군에 집중적으로 투하되던 순간에, 그 한가운데 지휘본부에 그의 할아버지가 있었단다. 삽시간에 세상은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했단다.
무너진 벽돌더미를 헤집고 나왔을때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유적군은 모두 파괴되어 초토화가 되었고, 극소수의 생존자만 남았을 뿐, 그 많던 군인들은 온전하게 시신을 수습할 수 조차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거의 모두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포위망을 좁혀오는 토벌군에 대항하기 위해 생존자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서 각자 도망치기로 했다한다. 이곳을 빠져나간 할아버지는 곧장 호이안에 있던 고향집으로 도망을 쳤고, 몇년만에 찾아 온 집에서 그날 융의 아버지를 만드셨단다. 시바신의 은총이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것이라며 융은 웃었다. 바로 그날이 융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제삿날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날이 바로 그 어메리카 뽐쁘로 상징되는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전쟁후 처음 대통령의 신분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는 아주아주 뜻있고 의미있는 날이었다.
융은 미국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베트남을 위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나름의 깊이있는 자신의 식견과 철학을 피력했고 나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참으로 많은 감동과 생각을 안겨준 (미썬 투어)였다.
물론 무지무지 더웠다.
섭씨 34도라고 했다.
다들 이런 여건을 사전에 충분히 알고들 온것일까? 힘들어 지치거나 낙오되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모두가 적극적이고 열심들이다.
여행에 대한 기본 마인드가 이미 몸에 깊숙하게 배인 사람들이다.
한 미모 하는 아가씨들이라서 따지고 가리고 하는것 애초부터 아예 없다. 아가씨들이 늘 선두에서고 끊임없이 가이드에게 질문을 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의문을 갖고 배우고 느끼고 온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그런 진실한 여행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유적 사진을 멋지게 찍어보려고 노력을 하던 중에 호주에서 온 아가씨가 그 유적의 내부 구경을 마치고 막 나오려는 참이었다. 내가 조리개를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잽싸게 벽뒤로 쪼그리고 앉아 숨는다. 잠시 뒤에 빼끔 고개만 내밀더니만 '쏘리'를 연발한다.
괜찮다면 이렇게 된거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유적과 잘 매치가 되어보이니 아예 모델이 되어 한장 찍어도 되겠느냐 고 요청을 했다. 그 아가씨 흔쾌히 모델이 되어준다. 그러자 금새 옆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 아가씨 해맑게 웃어주며 여행객들을 위해 이래저래 포즈를 취해 응대해 준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런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들에겐 자연스러움과 상대에 대한 배려심과 일상을 늘 밝게 긍정적으로 보고 실행에 옮기려하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정말 아름다운 젊음들이다.
-- 매표소에서 유적군까지 2km에 이르는 길은 요렇게 이쁘게 생긴 전기차로 태워준다.(공짜)
(미썬 투어)를 마치고 버스에 다시 오르니 다들 지친 표정들이 역력하다. 에어컨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들 말을 잃고 휴식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있어 70% 정도의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투본강의 보트투어를 이용해 호이안으로 돌아가고 , 나머지 사람들은 이 버스를 그대로 타고 호이안의 숙소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투본강의 보트를 찾아가면서 나는 많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미썬 유적)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그와 비슷한 한국의 고대사를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차창밖을 보면서 상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베트남 하면 떠오르는 사진 한장을 생각해 냈다.
너무도 유명한 사진 한 장.
그것은 또 피로 얼룩진 베트남의 현대사 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 한국인들이 여기 베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어떤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사이공의 즉결처형'
이 사진으로 기자 에디 애덤스는 1968년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남과 북이 맞붙은 베트남의 내전에 인도차이나의 안녕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미국이 몸소 위대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이때까지의 너무도 당연한 미국의 헤개머니에 찬물을 끼얹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세계와 이미 당사국이 되어버린 미국인들 대다수 조차도 (베트남 전쟁이 무엇인지) ( 그 실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진 한 장이 단숨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베트남 전쟁이 무엇인지) (왜 미국이 거기에 뛰어들었는지) (무슨 일들이 어떻게 왜 벌어지고 있는지) 무한한 궁금증을 촉발 시키는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세계는 경악했다.
베트남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국뚜각시를 앞세워 약소국가를 침탈하고 있는 거대한 미제국에 대항하는 베트남 민족의 해방전쟁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기 시작했다.(그 시각이 바로 이영희 교수님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주장하는 요지이다)
베트남 전쟁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고,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던 미국의 역할이 마침내 공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을 미롯한 서구열강들의 무차별적 탐욕과 그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약소국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세계가 나서서 열강들의 탐욕을 지적했다.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반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활화산처럼 분출되기 시작했다.
팍스 아메리카를 모색하던 미국은 하루아침에 방향을 잃었다.
몇 몇의 열강들이 세상을 나누어 가지고 통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약소국가들이 결코 노예나 하등의 짐승들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약소국가들이 존재하기에 몇몇의 열강들이 뻐대고 있는 것이다. 다다수의 약소국이 뭉치거나, 아예 흩어져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는 열강이고 뭐고 의미가 없거나, 그때는 또 고만고만한 열강이라는 자기들 끼리 피터지게 싸울 판이었다.
결과는 미제국주의의 참담한 패배.
250년 위대한 제국 팍스어메리카가 유일하게 단 한번의 전쟁에서 패배를 했는데, 그것이 지극히 변변한 것이 하나도 없던 극빈의 최약소국 베트남에게 당한 유일한 1패였던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대체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나라나 민족은 미국일것 같지만 실은 중국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드러내지는 않지만 중국에 대해서 영원한 적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것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중국의 침략과 약탈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한나라 진나라 당나라........ 우리나라 평양과 공주에 도호부를 두고 간접 통치를 했던 것처럼, 당나라는 베트남에도 안남도호부를 두고 통치를 했다.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중국인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태도는 핏속부터 배타적이다.
1.2차대전과 함께 열강들의 아시아침략이 본격화 되었을 때, 베트남에서는 서서히 봉건왕조의 막이 내려서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각있는 인사들이 들고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 사상을 신봉하던 호치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프랑스는 허물어진 왕조의 뒤를 봐주겠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차지하려 군대를 주둔 시켰다. 호치민으로 통합된 베트남 민주해방전선은 베트남 사람들에 의한 정부수립과 통일을 내세우며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전쟁은 프랑스의 우세였다. 호치민은 북부의 중국 국경지대까지 쫓겨갔다. 그런중에 2차대전이 터졌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본국의 지원없이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하여 미국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베트남해방전선에게 패배해 항복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시점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2차대전이 끝난 것이다. 북부의 호치민은 베트남의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런데 열강의 놀이터였던 베트남을 강대국들은 그냥 호락호락 놓아주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이 사회주의를 선포한 마당에 인도차이나의 늘어나는 공산화를 막아야겠다는 미국의 계략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상황을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엉뚱하게 제네바 협의에서 베트남의 분할 통치를 결정해 버린 것이다. 북부는 호치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남부는 쫓겨갔던 프랑스가 다시 들어와 남부의 꾹뚜각시 정부를 만들어 뒤에서 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치민은 프랑스를 상대로 또다시 통일전쟁을 선언했다. 서구의 열강들은 그것이 베트남 남과 북의 내전이라고 폄하 했다. 미국이 배후에서 조정을 하고 서방세계가 일체 모른체 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오랜 전쟁이 지속되다보니 2차대전으로 국력의 대부분을 소비한 프랑스로 서는 더 이상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과 밀약이 이루어 졌다.
'우리가 슬며시 빠질 터이니, 이젠 너희가 살짝 들어와 이 게임을 맡아.'
이런 약속이 있고나서 살짝 끼어들 명분과 구실을 찾기에 골몰하던 미국은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1964뇬 8월2일 미국의 최신예 구축함 매독스호가 베트남 북부의 통킹만 해변에 나타났다. 월맹군의 해변초소 코 앞까지 다가간 미국은 말 그대로 요지경속 난장판을 벌였다. 술판을 벌이고 초소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쉬아를 했다. 영화에 잘나오는 갑판에 일렬로 늘어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유어 마더 훠커)를 연발했다. 보다 못한 월맹군이 고함을 쳐서 항의를 하고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위대한 미국의 전사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빈 술병을 던지고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해변 초소에서 월맹군의 경고 사격이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를 챙겨나온 미군들이 해안 초소를 향해 무차별 맹공을 퍼부었다. 월맹군의 반격도 치열했다. 해가지자 매독스호는 안전상 바다 깊은 곳으로 후퇴했다. 교전은 일단 멈추었고 양측은 지루한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양측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더 이상의 교전은 없었다.
매덕스 호는 즉각 본국에 교전이 있었고 사상자가 발생했을을 타전했다. 그것은 곧바로 백악관에 보고 되었다.
이틀 뒤 백악관에 또 긴급 전보가 도착했다.
다수의 어뢰정이 나타나 매덕스 호를 향해서 두 발의 어뢰공격을 감행해 왔다는 전보였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즉각 NSA를 소집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대통령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특수집단들이 있다. 하나는 잘 알려진 FBI 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CIA 이다. 그리고 이들 위에 또 하나의 아주 특별한 집단이 하나 더 있다. 대통령의 직할로 상상을 초월하는 권력과 능력을 가진 집단이다. NSA(미국가안보국)이다. 이들의 권한은 대통령 하나만 빼고는 절대적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다. FBI. CIA의 수장들이 이 NSA의 일개 구성요원이다. 이 NSA가 통킹만의 사태에 대해 뛰어들었고, 8월7일 미국 하원은 만장일치로 베트남에 대해 전쟁선포를 하게된다.
1995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라마의 회고록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통킹만 사태는 모두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사전 의도되고 조작된 사건이었다.
가만히 있는 애를 쫓아가서 툭툭 건드려 처음 싸움이 있었으나, 다른 사람을 대려와 확대해 싸운 두번째 싸움은 없었다. 허위 보고였고 사전에 이미 충분히 준비된 시나리오 대로였다. 이를 명분으로 미국은 마침내 남의 나라의 전쟁에 공식적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며칠뒤 미국은 즉시 18만명의 군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빠른 진행 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채 한달도 걸리지 않은 9월초 대한민국의 청룡부대가 위풍당당하게 다낭에 상륙을 한 것이다. 우방국이자 피를 나눈 혈맹으로서의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 200만명이 희생되었다.
베트남민주해방전선(흔히 베트콩) 100만명이 전사했다.
남부베트남군 25만명이 사망했다.
한국군 5.000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미군 5만8천명이 죽었다.
치루지 않아도 되는 무모한 전쟁에서 허망하게 치룬 댓가들이다.
위 처형 사진을 찍은 에디 아담스는 퓰리쳐상 수상소감으로 이렇게 말했다.
' 사이공 서장은 총으로 민간인을 죽였지만 나는 사진으로 사이공 서장을 죽였다' 라고'
그랬을까?
경찰서장의 이름은 응우엔응복로안 이다. 그는 한달 후 저격을 당해 한쪽 팔을 잃는다. 하루아침에 모든 북부해방군들의 표적이 되었고, 전 세계인들의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미국으로 망명하여 피자가계를 하다가 암으로 죽었다. 살아서 사진을 찍었던 에디 아담스가 찾아와 진심으로 사과를 하였지만 '자신은 사진이 찍히던 그날 그자리에서 이미 죽었다' 라고 말한 뒤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시 만나주지도 않았다.
사진에서 처형을 당한 사람의이름은 응우엔반렘 으로 그의 신분은 북베트남해방군(베트콩)의 전사였다. 낮에는 민간인 밤에는 베트콩 전사로 활동하면서 사이공의 남부군 요주의 인물들을 암살하는 임무였다. 특히 응우앤반램은 요인암살시 그의 일가족까지 모두 참혹하게 처형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이 사진의 직전까지 그는 실제 50여명에 이르는 요인과 가족들을 암살 내지는 처형한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죽기 일주일 전, 바로 서장의 일가족들을 모두 납치하여 잔인하게 처형하였었다는 사실이다.
암으로 투병끝에 죽기 직전에 서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 베트콩 한 명을 사살했을 뿐이다.'
투본강 보트투어가 시작되었다.
이 넓고 푸른 투본강을 1시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다시 호이안이다.
불어오는 바람결은 너무도 싱그럽고 시원했다.
베트남 시골의 전원 풍경도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다시 찾은 호이안.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원음대로 (마이 쏜 투어)는 참으로 놀라운 감동으로 내 가슴에 안겨왔다.
지금 이순간의 여행에 감사하고 진정으로 행복했다.
주여! 이 순간 살아 있음에 정녕 감사합니다.
------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베트남의 전원풍경과 호이안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베트남) 파란만장한 무이네 1박2일 (0) | 2016.06.15 |
---|---|
(알 럽 베트남) 호이안에서 '멍' 때리기 (0) | 2016.06.12 |
(알 럽 베트남) 세월의 흔적이 선명한 아름다운 호이안 (0) | 2016.06.08 |
(알 럽 베트남) 베트남은 식도락의 천국 (0) | 2016.06.07 |
(알 럽 베트남) 씬짜오 다낭 (0) | 2016.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