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산(大林山)은 충주(忠州)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문헌으로 전해내려오는 말이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이나 다른 도읍지나 커다란 고을에는 옛날부터 진산을 두었다.
진산(鎭山) 이라는 말은 풍수지리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나, 실제 풍수지리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혈장(穴場)이 있는 명당(明堂) 뒤에 위치하며 명당을 보호하는 정기를 가진 산이라 하여 후산(後山)이라고도 하나, 그냥 쉽게 풀어서 해석을 한다면 마을이나 고을이나 도읍의 주위에 굳건하게 우뚝 솟아서 그 산의 정기로 마을이나 고을이나 도읍을 지켜주는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중 나은 해석이 아닐까 싶다. 부연하자면 마을이나 고을이나 도읍에 사는 백성들이 수호신으로 여겨 의지하며 살아가는 산 이라는 뜻이다.
충주고을의 중심이었던 읍성(관아공원)에서 남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타나는 산이 바로 대림산이다.
그렇게 치자면 충주의 남산은 당연히 대림산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엄연하게 남산은 따로 있다. 바로 금봉산이다. 지금은 아예 금봉산이라는 이름대신 그냥 남산으로 통용된다.
남산을 가지고 있는 도시는 많다. 서울도 그렇고 경주와 상주. 순천 등이 그런 예다.
한양의 심장인 도성(광화문)에서, 신라의 왕궁에서, 그리고 상주와 순천의 고을을 다스리던 관청에서 정남향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서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南山)이라고 부른 것이다.
충주의 금봉산은 읍성에서 바라보자면 동남향이다. 정남향에는 바로 대림산이 놓여있다. 그런데 어떤 양반이 고장난 나침판을 들고 돌아다니며 금봉산이 충주고을의 남쪽에 있으니 남산이다 라고 명했다 하니......... 고것 참.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충주고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소를 꼽으라면 주저없이들 금봉산성(남산성)의 성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충주고을의 전경을 으뜸으로 꼽는다.
그러나 단연코 아니다.
드넓은 충주벌이 두 눈 가득 들어오느것은 사실이지만 단연코 으뜸은 아니다.
금봉산성에서의 조망은 충주고을의 모든 전면이 다 보이는 것도 아니다. 마치 전체인양 어슴프레하게 보인다 하는것이 맞다.
충주고을의 완전한 전경을, 아울러 최고의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극히 일부의 아는 사람만 안다.
이제 그곳으로 가보려 한다.
내 친구중에 유독 몸이 약해 늘 걱정스러운 친구가 있다. 그를 나는 호디기(애칭)라 놀려 부른다.
호디기에게 등산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벼운 산행이나 캠핑을 가르치려고 부단히 애쓰던 중 근자에 시간을 내서 관문도 한바퀴 돌아 보았고, 오늘은 아예 작정을 하고 월악산을 목표로 불러냈다.
자꾸만 목적지가 어디냐고 따져묻기에 종당에 월악산이라 했더니 자지러지며 땅바닦에 벌러덩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하여, 월악산은 1.000m 고지인데 오늘 한 400m 고지로 산책이나 가자고 했더니 얼굴에 희색을 띠며 오 케이 한다.
호디기를 데리고 수안보 방향으로 차를 달리다 유주막 삼거리에서 구길로 접어든다.
노루목 직전에 왼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나온다. 흔히 창골이라 부르는 향산리 이다. 이곳을 입구에서 바라보자면, 단풍나무 잎을 꺼구로 들고 올려다 보는 모양새랑 완전 똑깥아 보이는 특이한 지형을 하고 있다.
대림산이다.
그리고 이 대림산 산자락을 따라 놓여진 성을 대림산성이라 부르는데, 바로 몽고와의 항쟁에서 70여일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충주산성이 바로 이곳이다. 대림산성이 곧 충주산성이다.
별로 달가운 표현은 아니지만 남산성이 충주산성은 아니다. 충주읍성은 관아공원이요, 충주산성은 바로 이 대림산성인 것이다.
800년전 몽고군을 위풍당당하게 막아섰던 충주산성의 입구였던 서문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위치만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호디기를 옆구리에 차듯이 바짝 챙겨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대림산은 대부분이 온통 잡목으로 우거진 관리나 정돈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산이다.
몽고와의 오랜 항쟁에서 승리한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그 중용성이 대두되어 몇차레의 유적유물탐사와 학술연구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역사적 가치에 비하자면 그에 따르는 복구나 관리제도나 시설이 거의 하나도 뒤따르지 못한 채 그냥 방치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의 설치 필요성에 따라 고압선 준설을 위해 임시도로를 내어 공사를 했고, 그 임도를 따라 등산로를 낸것처럼 보여지나, 실제 나머지 전 구간을 살펴보아도 아무런 이렇다 할 안내시설이나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진 것이 없다.
입구에서 등산 시작하는 약간의 지점까지 목재로 계단을 준설한 것과, 등산로 이곳 저곳에 쉬었다 가라고 벤치를 십여개 이상 설치해 논것이 실로 전부라 해도 좋겠다. 근자에 문지등에 안내해설판이 설치되기는 하였다.
하여 특별한 등산로가 있다고도 딱히 말하기가 좀 그렇다.
사진에도 나타나듯이 그럭저럭 아는사람만 가끔씩 찾아오는 곳이기에 그나마 사람이 다니기는 다닌 흔적이 등산로라는 명함을 내미는 정도라 할까?
조금만 올라가 보면 사람이 다니는 등산로로 산짐승들이 다니신 것인지, 멧돼지 가족이 떼로 산책을 다니는 길을 따라 사람이 무임승차를 하는 것인지가 헷갈리는 구간이 꽤나 많이 나온다.
몇번을 함께 갔던 짱구모친께서 종주바위 부근에서 여름날 뱀에 한 번 호되게 놀란 후 다시는 대림산만은 안따라간다고 한 일이 있었는데, 호디기와 오르는 오늘도 낙옆수북한 길 한가운데서 뱀 한 마리가 삐죽 엉덩이를 내밀고 있다.
이런 점들이 대림산을 즐겨찾지 못하게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재발굴과 복원도 필요하겠으나, 이곳의 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쉽게 자주 찾아올 수 있게 최소한의 등산로 정비 정도는 당장 시급한 것이 아닐까 싶다.
충주산성은 거꾸로 쳐든 단풍나무잎 형태의 산등성이를 따라 머리통만한 돌들을 주워다가 돌을 쌓고 흙으로 고이고 다시 돌을 쌓아 만든 전형적인 포곡식 토석혼축성의 대표적인 성이다.
성의 얼굴격인 서문 앞의 양쪽으로 100m 이상되는 깎아지른 벼랑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섰고, 그 앞으로 대단히 거센 달래강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천험의 요새였다. 그리고 나머지 삼면의 배후도 가파른 산언덕과 바위벼랑들을 끼고 있어서 누구도 함부로 넘보기가 아주 어려운, 적의 공격에 들어앉아 장기전으로 수성하는데 있어서 더없는 여러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춘 성이었다.
그리고 그 본보기로 마침내 중국과 유럽까지의 무수한 성들을 격파한 몽골군의 격성술 앞에서도 당당하게 70여일을 벼텨냈고, 종국엔 지친 몽고군이 포기하고 돌아선 동서고금의 몽고와 연관된 역사에서 결코 흔치않은 대단한 이력을 갖춘 성이 바로 충주산성인 것이다.
그라나 80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성문이나 망루등은 흔적조차 없고, 성곽 조차도 무너져 내려서 여기저기 그저 흔한 돌무더기처럼 그 흔적만 미미하게 남아 겨우 자취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풍동의 강수욕장과 단월의 역참터와 유쥬막, 그리고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렬사가 보인다.
모시래의 드넓은 벌판 위로 탄금대가 보이고, 비로소 남한강이 되는 합수머리의 강줄기 위로 놓인 탄금대교와 가야금교의 모습 또한 장관이다. 그 뒤로 중앙탑이 서 있는 탑평리의 모습도 시야에 들어온다.
수주팔봉의 폭포에서 흘러내린 강줄기가 싯계를 굽이쳐 내리는 모습도 있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니 마침내 이곳 창골(향산리)에 마을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안보 인근의 봉수대가 있는 주정산이 보이고, 아주 멀리고 월악산의 영봉도 시야에 들어온다.
비로소 새롭게 시야가득 들어오는 풍광에 놀라움을 드러낼 즈음에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몰려와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친다.
시원하기가 그지없다.
산등성이에 가까와진 것이다.
산을 즐기는 사람은 알고있다. 계곡에 부는 바람과 산등성이에 부는 바람은 맛에도 향기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달라진 드넓은 풍광과 달콤한 산등성이 바람을 만나 잠시 쉬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곳에 머물수는 없다.
진짜는 따로 있으니까.
다시 힘을 내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간다. 저만치 산등성이가 보인다.
집채만한 바윗덩이를 돌아가기도 하고 타고 넘기도 하며 거칠어진 호흡에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올라간다.
그리고 이내 눈에 아주 익숙한 바위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전망대다.
특별한 시설이나 안내판도 없다.
그저 커다란 바윗덩이가 그위에 장정 대여섯사람이 함께 서있어도 좋을만큼 널직하고 평평한 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바로 이곳이다.
충주고을의 전망을 파노라마처럼 한 시야에 모두 가득 담을 수 있는 제일의 전망대가 바로 여기다.
호디기도 우-와 하는 탄성을 저절로 토해낸다.
위의 사진 석장을 옆으로 나란히 붙여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이 나의 시야에 한 눈에 들어오는 충주고을의 전망이다.
온 충주가 한 눈 가득 시야에 쏟아져 들어온다.
맨 윗사진의 우측에 금봉산(남산)자락의 꼬리인 범바위 일대가 슬쩍 보이고. 그 뒤로 충주댐 앞의 용탄동까지 흘러내리는 계명산(계족산)의 산자락이 북으로 길게 늘어서있다. 그 아래로 좌측의 시내 전경이 본래의 충주고을(관아골)의 진면목인 것이다. 중간의 사진에서 호암지를 가운데로 남쪽으로 서쪽으로 뻗어나간 충주고을의 새로운 모습들이 그대로 답겨있고, 아래 사진으로 너른 모시래와 건국대학교와 새롭게 시내로 흡수되고 있는 단월과 풍동까지의 모습이 모두 담겨져 있다.
이 석장사진의 전체 모습이 이곳 전망대에서 한 눈에 모두 쏟아져 들어온다.
금봉산 성터에서 바라본다면, 아마도 이 석장 사진의 두장이거나 두장 반쯤의 충주고을 모습이 보여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가까운, 바로 인근의 금봉산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곳에서의 시계가 항상 조금은 나은듯 여겨진다.
물론 이 같은 조망권을 갖기 위해서는 금봉산에 오르는 것에 비하면 어느정도의 인내와 노력이 더 뒤따라야만 하겠지만 말이다.
더 감수해야 할 불편도 제법 크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렇다해도........ 충분히 감수할만 하다고 말하겠다.
한참을 머무르다 쉴만큼 쉬었다 싶어졌을때, 다시 언덕을 조금 더 오른다.
대림산의 정상에 봉수대가 있기 때문이다.
봉수대는 그 기단의 초석들만 남아있다.
문헌으로 본 봉수대에 대한 궁금중을 해소하기 위하여 나는, 수안보 사조마을 앞의 주정산 봉수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봉수대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
봉수대를 둘러보고 나면 나머지는 하산길이라 해도 좋겠다.
물론 이제까지 올라온 거리에 비하면 남은 거리가 훨씬 더 남았지만........ 나머지 길은 그저 산등성이를 타고 시원한 바람결에 쓸려 내려가는 시원하고 달콤하고 흐뭇한 산책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진은 (종주바위)의 풍광이다.
남쪽으로 난 바위벼랑위에 있으며 바로 성의 남문이 있던 자리 바로 옆이다.
여기에서의 종주는 우종주(于宗柱)를 일컬음이요, 몽골군과의 전쟁시 그는 충주고을의 부사였다. 아주 높은 관리였다.
호환 마마 보다 무섭다는 몽골군이 여주와 이천을 지나 쳐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충주부사 우종주는 혼비백산 우왕좌왕 갈팡질팡 하였다. 이때 우종주는 양반별초라는 특수부대를 서둘러 만들어 오랑캐에 대항해야 한다고 했고, 판관인 유홍익은 노비와 일반양인들을 징발해 임시로 노군잡류별초라는 것을 만들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로만 떠들면서 저들끼리 말싸움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몽골군대가 원주시 부론면에서 충주시 앙성면으로 남한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전쟁준비라는 말은 싸그리 접고 양반들만 죄다 끌어모아 읍성을 텅텅 비운채 도망을 쳐버렸던 것이다. 유홍익도 따라 나섰으며 읍성을 지키던 관원과 군사들도 수행원으로 짐꾼으로 죄다 끌고 도망을 쳤던 것이다. 남겨놓은 노비와 일반백성들(천민)에게 돌아올 때까지 읍성과 양반네들 집과 전답을 잘 지켜야 한다고 엄히 명령까지 내리면서 지들을 죄다 싸그리 도망을 쳤던 것이다.
여기 이 충주읍성에서 대림산의 충주산성까지 직선거리로 4km 이다. 우종주의 애초 도망 목적지가 월악산 골짜기의 덕주산성이었기에 양반무리를 이끌고 처음 도망쳐간 곳이 아마도 충주산성이었던것 같다. 그러기에 종주바위 전설이 남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와서도 도저히 안되겠다고 겁을 먹고 서둘러 남문을 통해 월악산 덕주산성으로 도망을 쳤거나, 이 바위에서 유홍익과 한바탕 붙었거나, 산성을 사수한다고 큰소리 뻥뻥 쳐놓고 이 바위뒤에 숨어있다 슬며시 도망 친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상황에 몽골군에 한발짝 앞서서 허겁지겁 충주에 당도한 사람이 바로 충주방호별감이 된 김윤후였다.
약간의 병사를 이끌고 몽골군에 대항하려고 충주읍성에 당도해 보니 아뿔싸.
이미 성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읍성을 수비하던 군대마져도 한 명도 남아있지를 않았다.
또한 훗날 중축하기 전의 당시 충주읍성은 돌과 진흙으로 섞어서 쌓은 제대로 된 방어진지로서의 성의 구실을 하기에도 아주 부실한 상태였다. 김윤후는 읍성으로는 적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주변의 정황을 파악해 보니 그나마 그중 충주산성이 천연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성안의 크기와 물의 공급과, 물자 보유와 임시로나마 사람이 기거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을 알아냈다.
김윤후는 충주고을에 남아있던 모든 백성(대다수 관의 노비와 일부 천민들)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가니 그 수가 대략 2천5백여명 쯤 되었다. 양반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씨가 말라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싸울 수 있는 군대도 거의 없었다. 수백명쯤.
마침내 읍성을 불지른 당시로서 세계최고의 몽골기마대가 대림산성 건너편의 풍동 산자락에 나타났다.
그리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자 비축한 물자도 달리고 제대로 훈련받은 군사들도 아니었기에 점차 사기도 떨어지고, 언제 산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김유후는 절묘한 타개책을 내놓게 된다.
이곳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민이거나 관의 노비였다.
김윤후는 충주관아에서 가져온 서류 중에 노비문서를 죄다 꺼내다 놓고 선언한다.
- 용감히 싸워서 몽골군을 물리친다면 이자리의 모든 노비들을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겠고, 천민의 경우에는 그에 해당하는 포상을 꼭 하겠노라고.........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에 집중된 속에서 마침내 그 노비문서를 산더미 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하나로 뭉친 그들은 더욱 더 용감하게 싸웠다. 칡을 캐고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싸움에 쓰던 말도 잡아 먹으면서 싸웠다. 인류 역사상 최강의 용사들로 꼽히는 몽골기마대에 대항하여 장장 70여일을 꿋끗하게 버텨나갔다.
이미 오래전부터 난공불락이라 여긴 몽골군의 수뇌부는 충주산성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쳐서 삼남지방으로 쳐내려가자고 여러번 회의를 했었다. 그때마다 김윤후는 공갈탄을 쏘아댔다. 그런데 그 공갈탄이 공포탄이 아니라 핵폭탄의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오랑캐들아. 나하고 싸우다 말고 그냥 남쪽으로 내빼기만 해봐라. 내가 뒤쫓아가서 똥침을 제대로 한대씩 자주 놔줄 것이며, 뒤따라 내려오는 제대로 된 호위부대도 없는 너희들의 보급부대를 철저하게 두둘겨 패고 물자는 싸그리 불질러 버리겠다. 그러니까 토낄래문 흙 파서 밥해먹구 오줌 받아서 목축이고........ 어디 한번 새재를 넘어가 봐라. 어여 가봐. 가보라고."
그 점이 가장 두려운 몽골기마대의 최고 약점이었다.
안내려 갈래면 모를까, 저 독하디 독한 고려의 쌈꾼들을 등 뒤에 두고는 감히 남쪽으로 더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70일이 지나자....... 몽골군은 모든것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돌아섰다. 흔히 말하는 몽골의 5차 침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당시로서는 세계사에 길이 남는 눈부신 승전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800년전인 1253년 11월에 있었던 싸움이었다.
풍경도 감상하고 역사 이야기도 해주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처음 출발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친구인 나에게 고마운 표현을 하기도 하고....... 제 스스로가 대견한 듯 연실 웃어대는 친구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뿌듯한 산행이었다. 꼭 다시 와 보겠단다.
적당한 난이도의 산행에 적당한 정도의 운동도 되었고 아주 아주 개운한 나들이였다.
- 그나저나 다음엔 호디기를 어디 데려가지?
------ 끝이 없을 것만 같던 무더위가 아주 잠시 주춤하던날에...... 피안재.
--- 현재 글을 올리는 작업중.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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