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 성동님의 소설 (꿈) 중에서.....
유심초의 노래로도 잘 알려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다.
낙옆진 가을산에서 새벽녘에 능현이 눈을 떴을 때, 여인은 그곳에 없었다. 배낭도 없고 파카도 보이지 않았다.
금강경 놓인 명자경상 앞에 세워진 대학노트 껍데기 안쪽에 사람의 얼굴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바로 연필로 그려진 능현의 얼굴이었다.
여백에 깨알같은 여인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칡속둥구미 속에서 꽂을초 한주먹과 화선지 몇장을 꺼내고는 초의 심지를 빼버리고 물 적신 화선지로 둘둘 만 다음 싸릿단 속에 봉박았다. 초 위에 솔걸을 조금 얹고 성냥을 긁었다. 지지지직 소리가 이어지더니 불이 붙었다. 개먹은 끈목 대신 칡넌출로 바짓가랑이를 간종 그리고 나서 홰를 잡았다.
'길은 멀고 밤은 깊으나 횃불을 잡지말라. 우리 함께 어둠속을 걷자.'
능현은 서둘러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
.....
산비탈을 내달려간 능현의 다음 행적들을 더듬더듬 추억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직동으로 돌렸다.
가을 햇살이 유난히도 따사롭던 지난 시월 중순때의 일이다.
현장일정이 다른 팀들과 엉키게되어 우리팀에서 하루 시간을 양보하기로 하고 나니, 별다른 사전 계획이 없었던 터였다.
'아무때고 절밥 드시고 싶으시면 찾아오세요.'
석종사에는 사찰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고마운 지인이 하나 있다.
불현 듯 그분 말씀이 생각나기에 '그럼 오늘은 절밥 한 번 먹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석종사를 찾아나섰다.
그날이 석종사를 찾는 처음은 아니었으나, 마음속에 능현을 찾아 끄집어 내고 그의 시선과 그의 심정으로 찾아가고자 하니 마치 초행길 처럼 설레는 느낌이다.
'대저 형상이 곧으면 그림자가 단정하고, 소리가 크면 메아리가 웅장하다. 형상이 굽었는데 어찌 그림자가 곧으며, 소리가 작은데 어찌 또 메아리가 크겠는가.
마음이라는 마음. 그 마음을 찾아가는 이 마음은 또 무엇인가?'
발티재 입구에서 실개천을 건너면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과수원 모퉁이를 돌아 비로소 석종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주문에는 '금봉산 석종사' 라는 현판이 창연하게 빛를 발하고 있다.
아주 옛날엔 봉황이 살았을 정도로 풍광이 빼어났다는 금봉산은 지금은 그냥 남산 이라고 불리는 산의 옛 이름이다.
이 금봉산 자락의 남쪽으로 난 골짜기 두 군데에 각각 유래가 깊은 천년고찰 두 개가 들어앉아 있는데 석종사가 그 중 하나이다.
충주 관내에 위치한 천년고찰을 꼽아본다면 당장 세 군데를 떠올릴 수 있겠는데, 이 세군데가 모두 내가 쓰고있는 소설에 중요 무대로 등장하기 때문에 나는 가끔 생각을 정리하고 자료를 정리할 때마다 즐겨 찾고는 한다. 이 땅의 지나온 역사나 소설속에서 사찰이나 스님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였기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다.
첫번째 천년고찰은 탄금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용흥사 이다. 신라 진흥왕때 세워졌으나, 고려시대 거란족과의 싸움에서 화재로 완전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수십년 전부터 한 스님께서 움막을 짓고 수도하시면서 불사를 일으키시더니 이제는 제법 사찰다운 위용을 갖추게 되었으며 새로운 이름으로 대흥사라 부르고 있다. 천년 역사의 향취를 눈으로 느낄 수는 없겠으나 깊게 배인 역사의 숨결만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듯 하다.
두번째는 같은 금봉산 자락에 석종사와 지척을 두고 자리한 천년고찰 창룡사이다. 신라 문무왕 시기에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중창을 거듭해 대사찰로 발전하였으나 역사의 수레바퀴에 상처를 크게 입어, 지금은 그저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정도의 조금 큰 암자 정도에 머무르고 있어보인다. 이곳에 오르면 왠지 조금은 쓸쓸해 보이고 적막함도 느껴지지만, 대신 푸근하고 편안함이 가득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번째가 바로 석종사 이다. 신라말과 고려초에 창건되었다는 일부 기록들이 전하여 오는데, 부족한 소견으로는 통일신라 말기쯤으로 보인다. 날로 번창하던 석종사 또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험악하게 할퀴고 간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옛 문헌의 이름에 따르면 보현사 죽정사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창룡사는 고난과 시련속에서 현재 작고 왜소한 사찰규모로 위축되었으나, 같은 시련을 겪은 석종사는 수십년 전부터 큰스님 한 분의 크신 헌신과 노력으로 오늘에까지 중건 불사를 거듭해 지금은 대사찰로서의 위용을 모두 갖추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여기 두 사찰뿐만이 아니라 충주고을 인근과 이 나라 전국방방곡곡의 모든 사찰들이 커다란 화를 입었으며, 그 원인으로는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시작한 숭유배불 정책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불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더니 마침내, 1870년 충주목사 조병로가 석종사의 모든 건물들을 통째로 헐어다가 충주 관아의 제금당(현존)과 청녕헌(현존)을 지었다. 뿐만아니라 조병로는 창룡사의 모든 전각들도 뜯어내서 관아의 수비청 건물을 지었다. 그 후 창룡사는 움막 형태의 암자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석종사는 5층석탑만을 남긴 채 완전 폐사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수십년 전에 5층석탑주위로 새로운 불사가 이루어지고 석종사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1929년에 시대가 변하고 수비청이 없어지게 되자 큰스님 한 분이 수비청 건물을 뜯어다가 지금 지현동에 위치한 대원사 건물을 지었다 하니, 현존 대원사의 전각들이 사실은 창룡사의 전각이 고대로 이전되어 위치만 달라진 것이 아닐까 싶다.
석종사는 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금봉산 자락 산중턱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있다.
금봉산 정상에서 내려앉기 시작한 화사한 단풍이 곱디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으나, 그러나 단풍보다 먼저 나의 두 눈을 호사스럽게 만들고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오게끔 만든것은 경내의 모든 곳곳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가을꽃들 이었다.
눈이부시도록 화사한 아름다움과 이것이 바로 가을날의 축복이 아닐까 싶다.
아!
와!
화사한 가을꽃만큼이나 석종사에는 자작나무가 사방으로 많이 심겨져 있다. 대부분이 아직은 제 위용을 자랑하기에는 어린나무들.
아마도 큰스님이나 관계자분중에 자작나무를 몹시도 아끼는 분이 계시는것 같다.
자작나무는 숲그늘을 이룰정도로 좀 크게자라나고, 또 무리지어 군락을 이를 정도가 되어야 제대로 운치를 느낄 수 있겠다 하겠다.
잔잔한듯 연한 노란빛으로 물드는 단풍과 나뭇입들이 부딪는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 짙푸른 녹음속에서나 을씬년스러운 한겨울 속에서도 유독 하얗게 빛나는 몸을 드러내는 살가운 느낌의 나무가 바로 자작나무라 하겠다.
한 십오년 후 쯤 자작나무 숲에 잠긴 석종사를 미리 그려본다.
발걸음을 한참 전으로 돌려 (금봉산 석종사)란 현판을 단 일주문으로 되돌아 가본다.
일주문(一柱門)이란 커다란 전각지붕을 양쪽으로 하나씩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하여 일주문이라 불린다. 간혹 어떤 곳에서는 주기둥 옆으로 양쪽에 작은 보조기둥이 달려있는 곳도 있다.
아무튼 일주문이라 하면, '여기서 부터는 절의 경내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라는 안내표시판 쯤으로 이해하면 될것이다. 현판에 (금봉산 석종사)라 내결렸으니, 이제 여기서 부터는 석종사의 경내에 들어서시게 되는 것입니다 정도로.
아울러 일주문을 들어섰으면, 우선 마음가짐을 정갈하게 하고 정숙한 걸음걸이로 구도자의 마음가짐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면 되는 것이다.
여럿이 왔다면 일렬로 줄을 지어 걷듣이 하는 것이 바른것이고, 사찰의 관계자나 스님을 만나게 되면 합장으로 고개숙여 인사를 건네는 것이 서로간에 예를 갖추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천천히 발걸음을 석종사 경내로 옮겨보자.
대부분 절의 입구에는 일주문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다 보면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난다. 기억에 가장남는 것으로는 강원도 고성땅 건봉사의 불이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주문과 불이문이 나란히 서 있는 절이 있는가 하면, 일주문은 있으나 불이문이 없는 사찰이 무척이나 많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게 되면 통상 다음 나타나는 것으로 바로 사천왕문(四天王門)이 있다. 다녀본 기억으로는 영주 부석사나 고창 선운사 경우처럼 일주문을 지나 다음으로 사천왕문에 들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이문 이란 '둘이 아니다' 라는 아주 간단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일주문이 절의 경계를 나타낸다는 뜻으로, 일주문을 들어섰으면 속세에서 벗어나 부처님 세계로 들어섰다는 의미인데, 여기 불이문은 떠나온 속세와 부처님 셰계가 둘이 다른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없이 커다란 의미와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부족하게 첨언을 한다면, 속인이던 불자인던 스님이던 비록 경내에 들어서서 부처님 품안에 들었다 하더라고 저기 속세의 힘들고 다치고 병들고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것이며, 속세에서 잔 꾀로 커다란 부를 취하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하더라고 부처님 세계에 들어서서는 뽐내지도 자랑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부처님 세계의 안과 밖, 사찰 경내와 세속이 결코 둘이 아니라 본시 하나로 그 모두가 애초부터 부처님의 보살핌 안에 있는 것이니 부단히 노력해서 모두 함께 잘 살아가라는 뜻 일것이다.
석종사의 일주문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불이문은 보이지 않는다.
사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누각과 문루들이 나타날 때 까지도 보이지를 않는다.
석종사에 사천왕문은 애초부터 없었으니 보이지 않는것이 당연하겠으나, 어찌된 일인지 불이문도 보이지 않는다. 없는것일까?
아니다. 석종사엔 불이문이 분명 있다.
하지만 여타의 다른 사찰과는 다른곳에 다르게 놓여져 있다.
그 이유까지는 나로서는 알지 못하겠으나, 석종사에 불이문은 분명이 있고 나름의 깊은 뜻과 이유 또한 있을것이다.
석종사를 좀 더 둘러보다보면 어디선가 그 불이문을 찾을 수가 있겠지 하면서 발걸음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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